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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김연아라는 이름 앞에 무슨 수식어가 더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정수건, 이상화건, 이승훈이건, 이번 대회 들어 어느 금메달이 극적이지 않았을까마는 이 메달에 비할 것이 과연 있을까 합니다. 물론 다 똑같은 금메달이지만, 이 메달은 이번 동계올림픽을 하나의 커다란 생크림 케이크라고 할 때 그 꼭대기에서 붉게 빛나고 있는 체리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 오래 전이 아니더라도 그 케이크는 우리 몫이 아니고, 잔치도 우리 잔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한복판의 체리가 우리 차지입니다. 그게 우리의 몫이 될 거라고 대체 누가 설마 기대를 해볼 수 있었겠습니까.

프리 연기를 마치고 난 김연아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한국적인 정서에 익숙지 않은 외국인들은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그 울음이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내가 해냈어'라는 눈물이라는 걸 다 알지는 못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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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었다 웃었다 하던 김연아가 자리에 앉고, 점수가 나왔습니다. 그 전까지 최고 점수는 라우라 레피스토의 126.39점. 이미 쇼트프로그램에서 78.5를 받아 놨으니 뭐 130점대 정도면 충분히 금메달 확보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차입니다. 하지만 화면에표시되는 점수는 150.06. 소리가 나지 않는 화면에서도 김연아의 입모양은 '오 마이 갓!'이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점수입니다. 쇼트와 프리 모두 세계 신기록. 합계 228.56이라는 건 온 세계가 이미 대세는 김연아라는 걸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 점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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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바로 다음 순서인 아사다는 김연아의 150.06에 대한 박수가 채 끊기기도 전에 빙판 위로 나왔습니다. 이 관객의 환호가 내게 대한 환호가 아니라는 생각이 그동안의 긴장을 끊어 냅니다. 오히려 절반쯤 맥이 풀리고 체념한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금메달을 따는데 필요한 프리 점수는 155점. 이미 아사다의 머릿속에는 '불가능', '무리'라는 빨간 네온사인이 켜져 있습니다. 이미 최고조에 달해 있던 컨디션에서 '흥'이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갑니다.

연기를 마친 아사다의 얼굴에 울음기가 스치고 지나갑니다. 이 무대에 서기 위해 그토록 힘겹게 훈련한 기억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다시 4년 뒤에도 이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자칫하면 2.5점차이인 조애니 로셰트에게 은메달도 내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두번이나 멈칫 한 것에 비하면 점수는 후한 편입니다. 131.72. 합계 2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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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마친 다음 김연아와 아사다의 얼굴에는 모두 눈물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의미는 정 반대였습니다. '내 생각대로 제대로 해냈어!'라는 김연아의 표정과 '이렇게 끝인가?'라는 듯한 아사다의 표정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생각해보면 이틀 전, 쇼트 프로그램에서 승부가 갈린 셈입니다. 당시 아사다는 김연아 바로 앞 순서에서 73.38이라는 좋은 점수를 받습니다. 김연아로서도 충분히 위협을 느낄만한 점수였죠. 76점대를 맞아 봤지만 매번 그런 점수를 낸다는 건 기대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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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부담을 안고 들어간 김연아는 완벽한 연기로 오히려 78.50이라는 미증유의 점수를 따냅니다. 앞선 사람이 잘 할 때 '더 잘해서 완전히 기를 죽인' 것입니다. 쇼트가 끝난 뒤 아사다는 "김연아와는 늘 쇼트에서 10점 정도 차이가 났으므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기세를 올렸지만, 설마 73점대를 찍었는데도 상대가 78점대를 낼 거라곤 상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었을 때 김연아는 아예 따라올 엄두를 낼 수 없는 성적을 낸 뒤 여유있게 뒤를 돌아봤습니다. 그런 상대를 따라 뛰는 건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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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대에 김연아-아사다-로셰트가 나란히 서고 태극기가 울려퍼집니다. 사무실의 누군가가 "마오가 인제 애국가 다 외겠네"라고 농담을 던집니다. 한바탕 웃고 나니 살짝 미안해지기도 합니다. 최근 대회에서 네번 연속 2등 자리에 오른 아사다. 어린 나이에 세계적인 기량을 갖고도 동갑내기인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난 것도 그리 행복한 운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득 4년 뒤가 궁금해집니다. 지금까지 동계올림픽에서 여자 피겨 2연패를 한 사람은 두 사람뿐입니다. 1932/36년의 소냐 헤니, 그리고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1984/88의 카타리나 비트입니다.

과연 김연아가 2010/2014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까요. 물론 은퇴설도 이미 나와 있는 상황이지만 한번 기대해 봐도 나쁘지 않을 듯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일테고, 부담이 만만찮겠지만 이렇게 온 국민이 행복해질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한번 부탁해봐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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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리고 이날 자기의 우상을 바라보면서 함께 경기를 하고 미래의 '그 자리'를 꿈꿨을 곽민정. 그도 누구보다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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