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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디 에어(Up in the air)'를 만든 제이슨 라이트먼이라는 감독의 이름은 아직 생소하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고스트버스터즈'를 만든 이반 라이트먼의 아들이라고 해 봐야 그런데 어쨌다는 거냐고 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땡큐 포 스모킹'이나 '주노'를 보신 분이라면 '아' 할만한 감독입니다. 미국의 젊은 감독들 가운데서는 제가 가장 기대하는 감독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조지 클루니와 함께 또 한번 희한한 소재의 영화를 만든다는데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영화 '인 디 에어'는 지난번 골든 글로브에서 각색상을 수상했고, 이번 아카데미에는 감독상과 남우주연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결국 한 부문도 수상은 하지 못했습니다.

기대는 부풀었지만 영화는 쉽게 볼 수 없었고, 마침내 국내에서도 개봉됐습니다. 한걸음에 달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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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라이언(조지 클루니)은 해고 통보자라는 희한한 직업을 갖고 있습니다. 회사를 대신해 '당신이 해고됐다'는 사실을 전해 주는 역할을 전문적으로 해 내는 직업입니다. 안 그래도 발에 불이 나게 돌아다니던 그는 미국 국내의 온갖 기업들이 금융 위기로 인한 불황으로 정리 해고에 들어간 이후 1년에 300일 이상을 여행하며 보낼 정도로 바빠집니다.

심지어 그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기내에 끌고 들어갈 수 있는 가방 하나 이상의 짐은 필요 없다'는 내용으로 대중 강연을 할 정도의 독특한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유목민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친구나 연인 같은 기본적인 인간관계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1년에 한달도 머물지 않는 '집'은 그림을 떼넨 미술관 같은 분위기일 뿐입니다. 냉장고 안에도 있는 건 미니어처 술병 뿐입니다.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항공사 마일리지 모으기입니다.

그런 그에게 두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그냥 그런 일시적인 상대로 여겼던 커리어 우먼 알렉스(베라 파미가)와의 관계가 점점 깊어 가는 것, 그리고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던 회사에서 갓 사회에 진출한 명문대 출신의 여사원 나탈리(애나 켄드릭)의 아이디어대로 직접 대면하지 않은 상태에서 화상 채팅으로 해고를 전달하는 시스템의 도입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됐다는 것입니다.두 방향에서 자신이 안정해 있던 세계에 위협을 받게 된 라이언은 과연 어떻게 대처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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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클루니가 연기하는 주인공 라이언 빙엄은 말하자면 '인생의 비밀'을 일찌기 깨닫고 그걸 몸소 실천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인생을 쓸데없이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수많은 변수(혹은 짐)들을 포기하지 않고 갖고 가기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 변수(혹은 짐)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인간관계입니다.

인생을 혼란시키는 것은 바로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 그리고 친구와 지인들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이죠. 물론 그들로부터 위안을 얻는 경우도 있겠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빙엄은 과감하게 '관심 안 주고 안 받기'가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려 놓고 있습니다. 쓸데 없는 감정의 소모야말로 시간낭비라는 걸 이 사람들은 '알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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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선 그리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았지만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그어 놓은 경계선 내로 사람이 들어올 때 저절로 머리 속에선 비상 경보가 울립니다. 타고난 매력 덕분에 중년의 나이에도 잠자리 파트너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지만, 절대로 상대방에게 필요 이상의 기대나 희망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잘라 버리는 데' 선수인 사람이죠.

그런 그에게 운명처럼 두 명의 여인이 나타나 가치관을 혼란시키는 과정은 어쩐지 '크리스마스 캐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스크루지처럼 살아가고 있는(물론 모으는 것은 돈이 아니라 마일리지일 뿐이지만) 클루니에게 두 여자는 '당신의 삶에는 과연 어떤 가치가 있느냐'고 묻고, 결국 클루니는 장고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나 리얼하고 그럴싸해서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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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먼의 장편 영화는 이제 세편째입니다. 하지만 몇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두드러진 것은 영화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달변가들이라는 것입니다.

'땡큐 포 스모킹'의 주인공 닉 네일러는 각계로부터의 비난 여론에 맞서 담배 회사를 옹호하는 대변인 닉 네일러입니다. 말을 못 할 수가 없는 사람이죠. '주노'의 주인공 주노 역시 나이답지 않은 엉뚱한 논리로 어른들을 꼼짝못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인 디 에어'의 라이언 빙엄 역시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인 만큼 말재주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라이트먼의 영화는 한결같이 아주 입심 좋고 산전수전 다 겪은 친구와 하룻밤 술자리에서 듣는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연상시킵니다. 때로는 이야기꾼 특유의 과장도 살짝 느껴지지만, 아무튼 잠시라도 다른 데 주의를 돌릴 수 없게 하는 세심하면서도 감칠맛나는 이야기 솜씨가 그야말로 발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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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라이트먼의 재능은 캐스팅에서 정말 무릎을 치게 합니다. 반생을 '캐주얼하게' 살아온, 매력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중년 남자 역을 조지 클루니보다 잘 할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까 하는 건 물론 시작에 불과합니다(각본가를 겸한 라이트먼도 '클루니가 안된다면 대본을 대폭 고쳐야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남자가 내 인생관에 문제가 있는게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매력적인 중년 여성 역의 베라 파미가, 그리고 얼굴에 '내가 사회 경험은 없을 지 모르지만 인생을 어떻게 사는 건지는 책으로 다 배웠어'라고 쓰여 있는 겉똑똑이 사회 초년병 역할의 애나 켄드릭은 정말 탁월한 캐스팅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트와일라잇'에서 여주인공의 진짜 인간 친구 4인방 중 하나일 때 애나 켄드릭을 본 사람이라면 놀라운 변신 능력을 갖췄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두 여배우가 모두 아카데미 조연상 후보에 오른 것은 배우들 개인의 재능보다 라이트먼의 혜안이 빛난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감히 해 봅니다. (다만 베라 파미가가 73년생이라는 건 좀 놀랍습니다.^^ 한 69, 70 정도면 적당할듯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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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영화에 대한 얘기가 좀 빠졌습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가을을 맞은 사람들이라면 사전지식이고 이해고 아무 필요가 없는 영화입니다. 그냥 보는 즉시 '이건 내 얘기' 이거나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얘기'일 수도 있고, 또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내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얘기'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만큼 가슴에 콕콕 박히는 장면이 한둘이 아닙니다. 몇몇 장면에선 77년생인 라이트먼 감독이 어떻게 저런 정서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수시로 떠올랐습니다. 그 부분에선 아마도 노련한 조지 클루니의 도움이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일종의 교훈담이라고 친다면, 젊은이들도 꼭 봐야 할 영화입니다. 과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나의 10년 후나 20년 후를 생각해 본다면 과연 어떤 중년, 어떤 장년이 나의 모습일지를 한번쯤 생각해 볼 나이에 꽤나 유용한 영화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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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빠른 분들이라면 아마 영화 중간 쯤에서 주인공 라이언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감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는 예기치 못한 반전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의 여운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굳이 이 영화의 장르를 꼽는다면 블랙 코미디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론 지난 겨울 이후 본 영화 중에서 가장 많이 웃었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게 될 많은 다른 분들 가운데는 눈물 흘리는 분도 있을 듯 합니다. 특히 나이만 먹었지 철 없는 삶을 살고 있는 분들, 혹은 나이가 어리고 별 경험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인생 뭐 있냐'며 세상 다 산 척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꼭 권해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특히 클루니의 마지막 표정이 오래 오래 기억날 듯 합니다.

뭐 취향 탓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감히 걸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P.S 아메리칸 에어를 비롯해 어느 항공사에도 1천만 마일을 기념하는 카드는 없다고 합니다. 단, 알렉스가 감동한 콘시어지 키 카드라는 건 실제로 존재한다는군요. 기업체의 정리 해고를 도와주는 사람은 실제로 '전직 상담 서비스(Career Transition Counseling Service)'라는 이름으로 성업중이라고 하는군요.

P.S.2. 어쩐지 아버지 이반 라이트먼의 라이벌이랄 수 있는 해롤드 레미스의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를 연상시키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니콜라스 케이지의 '패밀리 맨'에 이어 '여자들보단 남자들이 좀 더 공감하는 영화의 전설' 반열에 들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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