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롤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첫 부분에는 '삽화도 없이 글자만 가득한 책'을 읽는 언니를 보면서 대체 저 책을 무슨 재미로 볼까 하고 어린 앨리스가 궁금해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시절에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서 누가 이따위 책을 세계명작 아동문고에 넣은 것일까 궁금해 했습니다.
지금이야 문화적인 장벽이라는 것은 쉽게 넘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이 그 책에서 느끼는 재미라는 것은 번역으로 그 책을 접한 사람이 감히 느낄 수 없는 것이라는 것도 잘 압니다. 그러다 보니 심지어 그 길지도 않은 책을 끝까지 보지도 못한(!) 제가 이 영화를 보러 가려 마음먹기까지엔 꽤 시간이 필요하더군요. (네. 물론 몸 상태도 한 몫을 했습니다.) 물론 팀 버튼과 조니 뎁, 헬레나 본햄 카터의 호흡을 한번 더 보겠다는 욕심이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거울 나라의 앨리스'와는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 앨리스는 스무살을 눈앞에 둔, 이제 결혼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의 다 큰 처녀입니다. '이상한 나라(Wonderland)'에 갔던 기억을 그저 꿈이라고 생각하게 된 앨리스가 그 언젠가처럼 토끼굴에 빠져 다시 이상한 나라에 가게 된 뒤의 모험을 그리고 있습니다.
세월이 흐른 이상한 나라는 붉은 여왕(헬레나 본햄 카터)의 공포 정치 아래에 놓여 있습니다. 앨리스는 순서대로 조끼 입은 토끼를 비롯한 주요 캐릭터들을 만나고 결국 미친 모자장수(조니 뎁)에게까지 찾아옵니다. 그리고 붉은 여왕을 몰아내고 흰 여왕(애나 해서웨이)을 복위시키기 위한 모험을 시작합니다.
솔직히 스포일러고 뭐고를 걱정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줄거리입니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영화가 시작하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관객들에게 공개되고, 그 공개된 결말은 전혀 빗나가지 않습니다. 아니, 빗나가게 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1차적으로, 어린 시절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 시리즈를 재미있게 봤던 성인 관객들과 그들의 손에 이끌려 극장을 찾은, 한창 앨리스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고 있을 어린 소녀들을 위한 작품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한 '극장판 앨리스: 완결편' 이라고 보는게 가장 좋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런 관객들에 의해 이 영화는 미국 시장에서 이미 수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니 '그런 관객'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영화가 재미있었네 아니네 하는 건 별로 의미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라고 쓰면 많은 분들이 아, 저놈이 이 영화를 별로 재미 없게 봤구나 하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았습니다. 팀 버튼의 요상망칙한 상상력이 한껏 발휘된 영상을 3D로 보는 재미만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상상의 정원 꾸미기라면 아무래도 제임스 카메론보다는 팀 버튼이 한 수 위겠죠. 아무튼 뻔하디 뻔한 이 영화는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팀 버튼의 원투 펀치인 조니 뎁과 헬레나 본햄 카터도 여전했습니다. 아, 물론 이 영화만 놓고 보면 카터의 완승입니다. 이 영화의 실제 주인공은 붉은 여왕이기 때문입니다. 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짱구 여왕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붉은 여왕 아라베스는 참 이해하기 쉬운 캐릭터입니다. 미모와 품성을 타고 난 동생 하얀 여왕이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있을 때 혼자 속을 부글부글 끓였을 겁니다. 키도 안되고, 몸매도 안되고, 심지어 '대가리까지 왕짱 큰' 붉은 여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강력한 카리스마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규합해 왕위를 찬탈해버립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외모도 매력도 별볼일 없는 여자 혼자서 그 대단한 음모를 실현시켰다는게.
사실 붉은 여왕이 갖고 싶었던 건 권력이나 왕국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었던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사랑받는게 나을까, 공포의 대상이 되는게 나을까?'라는 질문 따위는 할 필요도 없죠. 진정한 마키아벨리스트라면, 일찌기 마키아벨리 본인이 '군주론'에서 말했듯 '어설프게 사랑받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게 통치자에겐 훨씬 이익'이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을테니 말입니다. (네. 저 대사는 '군주론'에서 그대로 따온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위를 차지하고도 주변에는 자기와 비슷하게 뭔가가 기형적으로 큰 인물들만을 배치하고(나중에 그것 때문에 또 한번 실망하게 되지만), 기형적으로 허리가 긴^^ 캡틴 잭을 애인으로 삼습니다. 그렇지만 동생 하얀 여왕과 앨리스를 비롯, 누구도 붉은 여왕의 그런 심정은 이해해 주질 않습니다. 이것이 '예쁘지 않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한 붉은 여왕의 비극이죠.
여기에 비하면 조니 뎁의 매력은 이 영화에선 크게 부각되지 않습니다. 뭐 미친 모자 장수 자체가 이번엔 순수하게 미치기보다는 열정적인 혁명가의 분위기를 내는 데 바쁘기 때문이죠. 여기에 모자 장수와 앨리스의 로맨스까지 겹쳐 지나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듯 한데, 아무튼 조니 뎁이 빛나는 것은 붉은 여왕과 흰 여왕의 전쟁 신 정도 뿐입니다. 물론 안 나온 것보단 나았겠지만.
주인공에 대한 주목이 너무 부족했군요. 15년 전이라면 기네스 팰트로에게 돌아갔을법한 앨리스 역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친 21세의 미아 바시코브스카(Mia Wasikowska, 와시코우스카라는 인디언 비슷한 발음으로 알려졌지만 imdb는 이 이름을 vash-i-kov-ska라고 읽어야 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래야 동구권 내음이 물씬 나는 생김새와 딱 어울리는 이름이 되죠^)에게 돌아갔습니다. 호주 출신인 바시코브스카는 하이틴용 영화 몇가지에 출여한 것 외에는 별 경력이 없습니다.
아무튼 스무살이라기엔 약간 발육부진인 듯한 몸매, 그리고 뭔가 불안해하는 듯한 눈빛이 팀 버튼이 실현하고 싶었던 스무살의 앨리스(동화 속 앨리스가 현실 속에서 성장한 모습)에 부합했기 때문에 캐스팅됐을 겁니다.
아래의 이미지 사진을 보면 에이브릴 라빈이 했어도 괜찮았을 듯...?
어린 시절 별로 이해할 수 없었던 정서의 원작에 대한 반발처럼,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있으면서도 뭔가 트집을 잡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일어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모자 장수에게 꼭 돌아오겠다고 말하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남발하면서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앨리스에 대해 새삼 비판적인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아편전쟁을 일으킨 것이 바로 앨리스였어!'라면서 '앨리스=제국주의의 첨병'이라고 비난하고 싶은 분들(무슨 말인지는 영화를 끝까지 보셔야 알 수 있습니다)도 꽤 있을 법 합니다. 뭐 팀 버튼에게 너무 많은 걸 기대한 분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얀 여왕, 붉은 여왕, 앨리스]
그저 팀 버튼은 '매일 아침 먹기 전 여섯 가지씩 불가능한 일을 상상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진취적인 엘리트들을 키워낸 것이 바로 루이스 캐롤의 원작처럼 상상력을 자극하는 좋은 아동 문학 작품들이었다는 식의 마무리를 하고 싶었던 것 뿐일테니까요. 갑자기 그러고 나니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상상력 개발을 위해 우리 어른들은 뭘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달려라 하니'를 보고 자라서 한국 드라마엔 여전히 콩쥐팥쥐만 나오는 걸까요?)
아무튼 보시고 싶은 분들은 '자녀들을 위해서'라는 핑계 없이 그냥 마음 편히 보시기 바랍니다. 괜히 결말과 대영제국의 제국주의를 연결해야 의식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 그런 부담도 없이, 머리를 비우고 판타지의 세계에 몸을 던져 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 합니다.
P.S. '하얀 여왕' 앤 해서웨이의 뭔가 과장된 듯한 말투와 몸짓은 TV의 여성 요리 연구가에서 따 온 거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뭔가 그럴싸하다는 느낌...^^
P.S. 2. 앨리스의 언니 역이 왠지 눈길을 끌어 찾아 보니 제마 파웰(Jemma Powell)이란, 잘 알려지지 않은 영국 여배우입니다. 잘 크면 에마 톰슨의 뒤를 잇는 잉글리시 로즈 스타일의 배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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