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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작은 1981년작에 비해 엄청나게 발달한 컴퓨터 그래픽을 비롯,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기술적인 발전을 등에 업고도, 과학의 발전이 결코 인류 문명의 발전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심각한 교훈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는 계기를 만든 졸작입니다. 한 평자가 '타이탄'을 본 뒤 '아바타가 아이폰이라면 타이탄은 옴니아2'라고 했는데, 그 말에 절대 공감입니다.
한마디로 '같은 소재로 영화 재미 없게 만들기' 대회가 있다면 레터리어 감독은 단연 우승 감입니다. 그런데도 미국 시장에서는 개봉 첫주 흥행 1위를 기록했군요.^^ 다음주 성적이 매우 궁금합니다.
일단 순수하게 2010년 영화 '타이탄'의 줄거리를 따라 봅니다.
페르세우스(샘 워딩턴)는 제우스와 신들을 증오하던 아크리시우스 왕의 '왕비' 다나에를 제우스(리엄 니슨)가 몰래 겁탈해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리고 페르세우스가 성장해 갈 무렵, 아르고스의 왕 케페우스는 신 따위는 두렵지 않으며 왕족인 자신들은 신에 못지 않다며 인간들을 부추겨 신에게 도전합니다.
저승의 왕 하데스(레이프 파인스)는 이 기회에 제우스에 대항해 자신의 세력을 키울 음모를 꾸미고, 제우스의 분노를 앞세워 인간들의 응징에 나섭니다. 그리곤 10일 뒤에 케페우스의 딸 안드로메다를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괴물 크라켄을 투입해 아르고스를 파괴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제우스의 아들이란 이유(신들의 끄나풀?)로 잡혀 고초를 겪던 페르세우스에게 역시 반신(demi-god)이라는 이오(제마 아터튼)가 찾아오고, 돌연 케페우스는 페르세우스만이 희망이라며 그에게 세상 끝으로 가서 크라켄을 죽일 방법을 찾아 오라고 합니다....(하략)
이야기가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제 탓이 아닙니다. 대체 무슨 놈의 스토리를 이따위로 만들어 놨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어쨌든 '타이탄'의 해석에 따르면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유명한 반신 영웅 중 하나인 제우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는 신의 피를 거부하고 인간의 길을 선택한, 신에 맞서 인간의 권익을 지켜낸 위대한 휴머니스트입니다. (대체 뭔 수작인지...)
그럼 1981년작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살펴봅니다. 얼마나 바뀌었는지 비교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아크리시우스 왕은 제우스와 사통했다는 이유로 딸 다나에와 외손 페르세우스(아기)를 상자에 실어 바다에 떠내려 보냅니다. 제우스는 격분해서 아크리시우스와 그 도시를 파괴하죠.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성장하자 편애하기 시작합니다.
성장한 페르세우스는 제우스의 성의로 쓰면 투명해지는 투구, 돌도 베는 검, 말하는 방패, 그리고 천마 페가수스까지 손에 넣습니다. 그런 다음 케페우스 왕의 공주 안드로메다가 한때 그녀의 연인이었던 칼리보스의 저주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알고, 저주를 풀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나섭니다. 이를 안 칼리보스의 생모인 여신 테티스의 농간으로 아르고스는 크라켄에 의한 멸망을 막기 위해선 안드로메다를 산 제물로 바치라는 강요를 받습니다.
상당히 소박하고 직선적인 줄거리입니다. 이후는 2010년작이나 1981년작이나 비슷합니다. 단 결말은 완전히(그리고 얼토당토 않게) 다르다는 정도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자, 그럼 이 영화와 관련 있는 그리스 신화상의 기록을 대략 끼워 맞춰 봅시다. 1981년작과 2010년작을 거치면서 신화는 얼마나 변형됐을까요?
- 페르세우스의 모친 다나에는 아크리시우스의 아내가 아니라 딸. 아크리시우스는 제우스에 대한 분노보다는 자신이 외손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란 예언에서 벗어나기 위해 딸과 외손자를 바다에 버렸다.
- 페르세우스와 다나에는 폴리덱테스 왕에게로 흘러가고, 왕은 다나에의 미모에 혹해 왕비로 삼으려 하지만 페르세우스가 걸림돌이 되자 그를 자극해 메두사를 퇴치하러 가도록(말하자면 가서 죽으라고) 보낸다.
- 페르세우스의 무기는 검과 투명 투구, 그리고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샌들이었다. 페가수스는 페르세우스와 아무 상관이 없다(페가수스를 타고 괴물을 퇴치한 영웅은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벨레로폰이다). 오히려 페가수스는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일 때 그 피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말하자면 페르세우스는 페가수스에게 '어머니의 원수'인 셈이다.
- '타이탄'에서 페가수스를 돕는 이오(Io, 위 사진의 제마 아터튼)는 본래 제우스가 사랑하던 여자. 제우스는 이오를 헤라의 질투로부터 감추기 위해 암소로 둔갑시킨다. 그러니까 페르세우스와 이오가 정분이 나면 그건 아버지의 정부를 건드리는 셈이다.
[절벽에 매달린 안드로메다, 1981년작과 2010년작의 '기본적으로 동일한' 아이디어]
- 페르세우스는 메두사를 해치울 때까지도 안드로메다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나, 메두사의 목을 친 뒤 날아가던 도중 해안 바위에 나체로(...) 묶인 안드로메다의 미모를 보고 반해 사연을 묻는다. 안드로메다는 어머니 카시오페아가 너무 자신과 딸의 미모를 믿고 신들 앞에 교만한 죄로 바다 괴물에게 제물로 바쳐진 것이었다. 아버지의 권세를 등에 업은 페르세우스는 호기있게 안드로메다의 아버지 케페우스 왕에게 괴물을 무찌르면 사위로 삼아줄 것을 제의해 허락받은 뒤 미션을 해결한다.
- 괴물 퇴치에 메두사의 머리를 쓰는 것은 반칙. 하지만 페르세우스는 안드로메다의 구혼자들을 물리칠 때와 폴리덱테스 왕의 무리를 해결할 때 메두사의 머리를 사용한다. 이후 이 머리는 아테네가 만든 제우스의 방패 아에기스(이지스)를 장식하는 데 쓰인다.
- 페르세우스가 물리친 바다 괴물의 이름은 미상이지만, 크라켄은 노르웨이의 바이킹 신화에 나오는 바다 괴물일 뿐, 그리스 신화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1981년작이든, 2010년작이든 본래의 신화에서는 거리를 재기 힘들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겁니다. 그래도 1981년작이 신화와 지구에서 알파 센타우리 정도의 거리라면, 2010년작은 안드로메다 성운 정도의 거리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아, 물론 한글을 잘 못 읽는 분들을 위해서 분명히 강조해 두지만, 원래 신화와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타이탄'이 형편없는 영화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결코, 결코, 결단코 아닙니다. 원래의 내용이야 어떻든 영화만 재미있다면 모든 건 면피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영화가 너무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라는 데 있습니다. '타이탄'이 엉망이 된 가장 큰 책임은 '뭔가 독창적인 재해석을 하고야 말겠다'는 감독의 엉뚱한 욕심에 있습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신에 대항하는 위대한 인간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데 유명한 신화를 여기에 끼워 맞추다 보니 이야기는 산으로 갑니다. 단 한 가지도 그럴싸하게 풀려 나가는 것이 없습니다. 도대체 왜 인간들이 신에게 반발하는지에 대해 한 가지도 설득력있는 설명은 없으며, 신의 아들의 권능은 인정하면서 신은 인정하지 못하고 대드는 희한한 인간들만 보일 뿐입니다.
더구나 주어진 시간은 열흘뿐인데 날짜 계산도 못하는 페르세우스는 여유만만. 물론 페르세우스가 미션 끝나기 전에 죽을 일도 없으니 애당초 생길 이유가 없는 긴장감을 억지로 짜내려는 희한한 연출(네. 페르세우스는 모든 미션을 성공시킵니다. 스포일러죠!)이 지독한 불균형을 이뤄냅니다. 케페우스 왕의 부하 드라코는 쓸데없이 겉멋에 치우쳐 신을 규탄하며 목소리를 높이느라 시간만 잡아먹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어섰다"면 그동안 인간이 신에게 어떻게 당했는지를 알려줘야 설득력이 있을 것 아닙니까?
또 아무 이유 없이 하데스가 강해지면 제우스가 약해진다는 설정 하며, 왜 하데스는 직접 손을 쓰면 손가락 튀기기같을 페르세우스를 없애기 위해 귀찮게 칼리보스를 이용하는 바보같은 짓을 하며, 하데스의 부하 괴물들은 페르세우스에게서 빼앗은 메두사의 얼굴을 페르세우스에게 이용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고(또는 인간들을 응징하는데 쓰지도 않고) 그저 꼭 쥐고 달아날 생각만 하는 등등, 스토리의 허점은 다 거론하기가 입이 아플 지경입니다. 아, 느닷없이 까만 브래지어를 입고 등장하는 15금 메두사는 매우 코믹합니다.
그러니까 - 어떤 원작이든 리메이크를 하면서 '새로운 해석'에 목을 매는 사람들은 반드시 알아둬야 할 게 있습니다. '새로운 해석'이랍시고 했다가 쓸데없이 원작을 망치고, 욕은 욕대로 먹는 것 보다는 그냥 원작이 간 길을 따라가는게 낫다는 겁니다. 더구나 이번 '타이탄' 처럼 규모까지 큰 경우에는 투자자들로부터 맞아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정 작품에서 영 연기가 신통치 않은 배우들에게 왜 그러냐고 물으면 대략 이런 대답을 합니다. "몰라! 나도 내가(즉 내 캐릭터가) 미친년 같고 이해가 안 가는데 어떻게 연기를 해? 내가 뭘 하는지 모르겠는데 무슨 연기를 하냐고?" 이 영화에 출연한 샘 워딩턴의 심정도 대략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괴물 크라켄 나오는 마지막 5분 정도는 볼만 합니다. 그 장면을 위해서 나머지 2시간 정도를 잘 참으실 분이 있다면 보러 가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P.S. 레터리어 감독은 '타이탄'을 만들게 아니라 PS용 게임 '갓 오브 워' 실사판이나 만드는게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그런 생각으로 '타이탄'을 만든 것일지도.
P.S. 유일하게 눈길을 끈 건 영화 속에서 완벽한 안드로메다였던 알렉사 다바로스(Alexa Davaros). 이름에서 벌써 그리스 계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깁니다. 새로 주목받기엔 좀 많은 나이(1982년생)이지만 앞으로 많은 활동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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