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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비글로 감독의 '허트 로커(Hurt Locker)'에 대해 안 건 그리 오래 전이 아닙니다. 제임스 카메론이 이 영화에 대해 "이 영화는 이라크전의 '플래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이 영화에 대한 첫 정보였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현대전(2차대전 종전 이후의 전쟁)을 다룬 영화 가운데 '플래툰'에 이어 두번째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 가운데 폭발물 제거를 전담하는 병사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전장에서 세계 최강 미군을 상대로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상대는 거의 없고 보면 게릴라들에게는 폭발물을 이용한 부비트랩이 대단히 중요한 수단일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폭발물 제거반의 역할 또한 강조될수밖에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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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줄거리부터:

바그다드에 주둔하고 있는 미 육군 브라보중대의 폭발물 제거반에 하사관 윌리엄 제임스(제레미 레너)가 팀장으로 부임해 옵니다. 전체 팀원이라야 3명. 나머지 두 사람인 하사관 샌본(앤서니 맥키)과 엘드리지(브라이언 게러티)는 전임 팀장의 사고사로 예민해져 있는 상태입니다.

두 사람의 소망은 39일 남은 바그다드 주둔을 마치고 안전지대로 얼른 복귀하는 것. 하지만 제임스는 임무 수행에 목숨을 거는 타입입니다. 항상 위험을 무릅쓰는 제임스 때문에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맞자 나머지 두 팀원은 분노를 감추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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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맨 앞부분은 폭발물 제거가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일인지 보여주는데서 시작합니다. 최근 폭발물 제거에 로봇을 이용한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졌지만, 모든 임무에 로봇을 투입할 수는 없습니다. 현장에 투입되는 폭발물 제거반은 각종 보호장구로 무장하고 임무 수행에 나서지만, 폭발물의 위력 앞에 무거운 방호복은 무용지물일 때도 많습니다.

이런 임무를 계속 수행해온 제임스는 일종의 전쟁 중독자입니다. 아내와 아이도 있지만, 가족은 더 이상 그에게 도피처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는 전쟁과 위험한 임무 속에 있을 때에야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증세를 꼭 집어 뭐라고 하는 지 모르지만 대개 아드레날린 정키라고 불리는 '위험에 중독된 사람'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이런 증세를 보이는 병사에 대한 영화는 그리 낯설지는 않습니다. 월남전을 그린 고전 중 하나인 '디어 헌터' 이후 꽤 자주 영화화된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라크라는 황량한 배경 앞에서 이 주제는 사뭇 강렬한 힘을 발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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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세 병사는 마치 다른 아군은 아무도 없는 황무지나 정글 속, 수없이 많은 적들의 시선 속을 헤매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군의관에게 상담을 받고 있는 엘드리지 외에는 이들 셋과 다른 아군 병사들과의 교류가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죠. 이런 연출은 이들 셋이 겪어야 하는 거대한 전투 속에서의 고립감을 내내 강조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비글로 감독 특유의 다큐멘터리적인 건조한 시선은 오히려 세 병사에게 관객이 더욱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냅니다. 더구나 유명 배우들을 피해 간 캐스팅(가장 이름값이 높은 배우라고 할 수 있는 레이프 파인즈는 정말 단역입니다^^)은, 흔히 할리우드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주인공은 죽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저 멀리 날려 버리기 때문에 관객은 세 병사가 느끼는 긴장감의 단초를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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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라크전에 들어가 본 적이 당연히 없기 때문에 비글로 감독의 영상이 얼마나 실제 상황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뉴스 영상이나 다큐멘터리 영상을 좀 더 좋은 화질로 보는 듯한 느낌은 이 영화의 분위기를 살리는 데 큰 몫을 합니다. 그리고 2시간 남짓 한 이 영화를 찍기 위해 200시간분의 촬영이 이뤄졌다는 건 영화에 들어간 공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 영화가 왜 '아바타'를 제치고 작품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아바타'와 이 영화의 소재는 같습니다. 두 영화는 모두 '머나먼 이역의 전쟁터에 파견된 병사가 느끼는 당혹감'을 동원하고 있죠. 하지만 '아바타'에서 제이크 설리가 느끼는 감정의 깊이는 - 물론 영화의 성격에 따른 것이지만 - '허트 로커'에서 세 병사가 느끼는 절박감에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부분이 보수적인 아카데미 회원들에겐 훨씬 값진 것으로 보였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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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비글로 감독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스트레인지 데이즈'는 흥미로웠지만 아무래도 스타일에 대한 집착에 줄거리가 희생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폭풍 속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명품 오락 영화지만 '사실상 (당시의 남편이던)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라는 소문이 판단에 개입했던 듯 합니다. '블루 스틸'은 좀 지루했죠.

하지만 '허트 로커'는 비글로를 다시 보게 하는 계기를 만든 영화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과연 다음부터의 영화 세계는 어떤 것이 될지도 궁금하죠. 자신이 직접 프로듀싱한 이번 영화는 1100만달러라는, 할리우드 치고는 상당히 싼 제작비로 만들어졌지만 다음 작품은 1억달러 규모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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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트 로커'는 분명 상업 대작이 될 수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미국내 흥행 기록이 1300만달러(물론 위에서 거론한 싼 제작비 덕분에 꽤 남는 영화가 됐습니다)에 그쳤을 정도로 일반 대중의 시선은 냉담했습니다. 하지만 보는 동안 만큼은 절대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작품인 것도 분명합니다. (물론 여주인공 없는 영화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절대 보시면 안 되는 영화기도 하죠.^^)

하지만 고전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진지한 대결의 장면이 그리운 분들에겐 매우 좋은 오락 영화이기도 합니다. 저 위 사진에 있는 저격 신은 은근히 괴테의 '괴츠 폰 베를리힝겐'에서 월터 스코트의 '아이반호'를 이어 내려오는 한 장면의 연속선상에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뭐 이건 그냥 개인적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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