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워낙 주간지 연재 때부터 박흥용의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을 좋아했더랬습니다. 함축적인 대사와 모난 데 없이 둥글둥글한 붓끝으로 매서운 칼잡이들의 세계를 담아내는 박흥용 화백의 솜씨가 더없이 매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일개 왈짜 소년 견자가 맹인 검객 황정학을 만나 임진왜란이라는 대사건을 배경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읽는 이를 절로 끌어당겼다고나 할까요.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 벗어난 달처럼'은 여기에 임란 전후의 조선 조정과 정여립의 옥사, 그리고 원작에서 그리 큰 비중이 아니던 이몽학을 주연급으로 격상시킨 이야기를 끌어냈습니다. 구도는 나쁘지 않았고, 영화 전반부는 지금껏 본 이준익 감독의 영화에서 미처 발견할 수 없었던 탁월한 성과를 보였습니다. 화폭은 환상적이고, 인물은 연못의 금잉어처럼 빛을 발합니다. 하지만 마무리는 납득하기 힘들었다고나 할까요. 아쉬움이 남는 작품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단 영화의 줄거리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맹인 검객 황정학(황정민)과 칼잡이 이몽학(차승원)은 정여립의 대동계에 들어 장차 일어날 왜변에 대비하는 실력을 키웁니다. 하지만 조정은 정여립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결국 서인의 고변에 의해 역적으로 몰린 정여립은 자살하고, 그 무리는 일제히 참수형을 당합니다.

정여립을 고변한 서인 세도가 한신균(송영창)의 서자 견자(백성현)는 서얼에 대한 차별로 의욕을 잃고 살아가던 반항아. 아버지를 비롯한 일족이 정여립의 복수를 선언한 이몽학에 의해 몰살당하자 복수를 결심하지만 도리어 이몽학의 칼을 맞고 빈사지경이 됩니다. 황정학의 구원으로 목숨을 건진 견자는 그로부터 인생과 검술을 서서히 배워가고, 황정학의 손에 이끌려 이몽학의 여자인 기생 백지(한지혜)를 대면하게 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도에서 일단 원작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원작의 견자에게 이몽학이나 아버지의 복수 같은 명분은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에서 한신균의 죽음부터 결말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몇 달, 짧으면 열흘 남짓 사이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작에서는 최소 수년은 걸려 보입니다. 그 사이에 견자는 황정학으로부터 검을 쓰는 것이 한낱 싸움이 아니며, 검의 달인이 되기까지 깨달아야 하는 자연과 인간의 이치를 배웁니다.

그리고 나서야 구름에 달이 가듯, 달이 구름 사이로 얽매임이 없이 들고 나듯 거침이 없는 고수가 되죠. 그 과정에서 황정학과 견자가 주고 받는 문답의 치고 받는 매혹적인 흐름이 영화에서는 똑딱 사라져 버렸습니다. 영화 속에서 견자는 황정학과 몇번 칼을 부딪히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막강한 검객이 되어 버리죠. 이런 유장한 호흡이 사라지고 헉헉대는 숨소리만 남았다는 느낌, 그것이 바로 이 영화에서 느끼는 첫번째 아쉬움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는 또 원작 만큼이나 배경이 되는 실제 역사를 우지끈 뚝딱 손봤습니다. 풍자와 재치가 가미되긴 했지만 실제 역사의 흐름과 당시의 정세를 가감 없이, 탁월한 시선으로 옮겨다 놓았던 '황산벌' 때와는 달리, '구르믈...'에 나오는 역사는 시나리오 집필진의 시선에서 마음대로 재구성된 가상의 역사에 가깝습니다.

연도별로 일단 보자면 정여립이 역모를 꾸민 것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것이 1589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은 다 아시다시피 1592년, 그리고 이몽학이 난을 일으켰다 잡혀 죽은 것은 1596년의 일입니다.

임진왜란과 같은 큰 국난의 한가운데에서 난이 일어난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지만, 임진왜란 7년간이 늘 격전의 시기였던 것은 아닙니다. 실제 육상전이 벌어진 것은 일단 1592년과 93년, 그리고 명의 참전 이후 남쪽으로 밀려내려간 왜군과 조-명 연합군 사이에선 1594년부터 96년까지 눈치보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전쟁은 1597년, 이른바 '정유재란'으로 다시 불이 붙죠. 이몽학의 난은 그 중간의 소강상태였던 3년 사이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니까 이몽학이 난을 일으킨 가운데 왜군이 부산으로 쳐들어오는 것과 같은 상황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이몽학이 왜군과 전투를 벌일 일도 없었고, 엄밀히 말하면 이몽학과 정여립의 관계는 개연성이 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영화 속 이몽학의 난이 보여주는 사건들은 이몽학의 난 보다는 명/청 교체기 중국에서 일어난 이자성의 난을 연상시킵니다. 틈왕이라고도 불렸던 농민 반란군의 대장 이자성은 명이 청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경을 공격해 명의 숭정제를 자살시키고 정권을 빼앗지만 결국 청의 공격으로 몰락하고 중원을 청에게 내주고 맙니다.)

단지 선조는 정여립 사건 이후 자신을 능가할 실력을 가진 외성의 존재에 극도로 민감해집니다. 그 결과가 유성룡을 견제하고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 곽재우와 김덕령을 모반자로 의심해 고문하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으로 나타나죠. 이몽학의 난 역시 이런 조정에 대한 호남 인심의 배신감을 이용했다고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튼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 실제 역사의 진행을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물론 아무렇게 바꿔도 곤란하겠죠.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실제 역사와 같다, 다르다가 아니라 '왜 그런 식의 진행이 필요했는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채택한 대체 역사의 진행과 결말은 적절했을까요?

사실은 그렇게 받아들여지질 않는다는게 문제입니다. '구르믈...'의 결말은 얼마 전 있었던 영화 '불꽃처럼 나비처럼'의 참사를 되새기게 합니다. 어찌 보면 거의 똑같은 결말이고, 어찌 보면 상상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비참한 장면입니다. 대체 왜 이런 어설프면서도 아무 교훈도 없는 장면이 왜 이 영화에서도 되풀이되었는지는 정말 의문입니다.

굳이 정여립의 옥사를 도입한 것이나, 이몽학을 주인공의 자리에까지 끌어올린 점 등은 흥미로운 포석이었지만, 그를 통해 하려던 이야기가 단지 '왜적의 침입을 코앞에 두고도 당파 때문에 사소한 일로 반목하는 조정 대신들에 대한 조소'나 '나라 꼴을 이지경으로 만들고도 정파 논쟁이나 하고 있는 현재의 국회의원/고관대작에 대한 비판'일 뿐이라면 정말 태산명동서일필이라는 옛말이 다시 떠오르게 됩니다. 게다가 결말이 '사소한 은원과 욕망이 거대한 외적 요소 앞에서 사그러들고 말 뿐'이라는 식으로 무책임하게 내려진다는 건 정말 아쉽기 짝이 없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맹인이지만 세상사를 꿰뚫는 지혜와 검술을 가진 황정학, 열정은 가득하지만 풀어 놓을 곳이 없는 한을 품은 견자, 타고난 매력과 기량으로 세상을 탐하는 야심가 이몽학, 한 남자에 대한 정한과 사랑 외에는 세상 다른 것이 필요 없는 여자 백지라는 인물 구도는 탁월하고도 아름답습니다.

특히나 그림 속에서 그대로 뛰어나온 듯한 황정민의 열연을 비롯해 네 주인공들의 연기는 흠잡을데 없이 뛰어납니다. 차승원의 냉혹함은 뭐 굳이 더 칭찬할 필요가 없을 듯 하고, 백성현이나 한지혜 역시 지금까지 보여준 어떤 모습보다 인상적인 열연을 펼칩니다(물론 결말 전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왜란 발발과 함께 사정없이 꼬여 버립니다. 이야기와 캐릭터들이 잘 어우러졌던 전반부와는 달리 후반은 억지로 끼워 맞춘 듯 어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호랑이가 되려던 그림이 결국 호랑이가 되지 못한 채 마무리된 아쉬움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인상적인 대사로 "넌 이몽학을 이길수 없어" "왜?" "넌 꿈이 없잖아" 를 꼽곤 합니다. 혹자는 여기서 '88만원 세대'를 발견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견자는 대체 어떤 꿈을 품었어야 할까요.

저는 과연 이 영화를 만든 분들이 여기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답이 바로 왜 이 영화가 이렇게 결말지어졌는지에 대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 속에서는 어떤 답도 발견할 수 없었고, 그것이 이 영화에 실망한 이유입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아마도 직접 보시고 평가하시는 것이 가장 좋을 듯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P.S.2. 시각적인 즐거움의 측면에서 이 영화의 성취는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큰 듯 합니다.




흥미로우셨으면 왼쪽 아래 손가락을 눌러 주시기 바랍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