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부작으로 기획된 KBS 2TV '성균관 스캔들'이 마침내 마지막 4회를 남겨 놓고 금등지사 찾기 모드에 들어갔습니다. 드라마 초반부터 이미 홍벽서-재신(유아인)가 금등지사를 거론하며 조정 중신들을 공격했고, 윤희(박민영)의 아버지와 재신의 형이 모두 정조의 최측근들인데다 금등지사와 관련된 비밀 임무를 수행하다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 금등지사 이야기는 드라마의 핵심으로 등장할 것이 자명했습니다.
대체 금등지사가 뭐냐고 궁금해 하시는 분들을 위해 초간단으로 설명하자면,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수를 갚기 위해, 노론 벽파를 처단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는 비밀 문서'라고 하는게 가장 적절할 듯 합니다.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어쨌든 이인화 소설 '영원한 제국' 이후 수시로 등장했던 소설/드라마/영화의 단골 소재입니다.
하지만 과연 이게 이 드라마에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그리 분명치 않아 보입니다.
본래 금등지사란 일반명사입니다. 그냥 '후대에 전하기 위해 고이고이 간직된 글' 정도의 뜻입니다. 중국 주나라때부터 고사에서 비롯된 말인 만큼, 널리 쓰이던 단어입니다.
금등지사를 이해하기 위해선 정조를 이해해야 합니다. 영조는 손자 정조를 왕위에 올려놓는 조건으로(즉 노론 벽파가 정조의 등극을 반대하지 않게 하는 명분으로), "나(정조)는 사도세자의 아들이 아니다. 만약 누가 나를 사도세자의 아들이라 부르는 자가 있다면 역적으로 다스리겠다"고 공식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선언하게 합니다. 또 영조는 여러 차례 사도세자를 죽게 한 '주모자'가 있다면 첫째는 자신이요, 그 다음은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즉 정도의 외조부)이라고 주입시킵니다.
이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냐 싶지만 사실 큰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정조가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 한다면, 그것은 선대왕인 영조의 명을 거역하는 것이며, 그것은 정조의 국정 운영 정당성을 부정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조가 왕이라 해도 이런 무리수를 두다간 반정이 일어나 왕위를 빼앗길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영조가 뒷날 입장을 바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내 뜻이 아니었고, 너(정조)는 왕위에 오르게 되면 네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처단하라'는 밀지를 내린 적이 있다면 상황은 일변합니다. 정조는 영조의 명을 거역했다는 정치적 부담 없이 보복을 할 수 있고, 이는 곧 정조와 대신들의 힘겨루기에서 정조가 왕권 강화에 박차를 가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바로 이것이 금등지사입니다. 그럼 실제로 금등지사가 존재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금등지사는 소설 속의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여러가지 정황을 볼 때 금등지사는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정조 17년인 1793년 5월28일, 영의정 채제공은 상소를 올립니다. 잘 알려진대로 채제공은 남인이고 정조가 노론인 윤시동, 김종수와 함께 자신이 탕평책으로 국정을 논할 수 있는 세 사람의 중신으로 꼽은 사람입니다(아울러 이 드라마에서 4인방이 이뤄낸 성과로 그려지는 신해통공의 주역이죠^^). 그런데 상소의 내용은 다소 충격적입니다. 정조가 즉위한지도 이미 17년, 그런데 갑자기 그는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재조사하고 확실히 진실을 밝힌 뒤 역적들을 토멸하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전략) 신이 기유년 현륭원(顯隆園, 사도세자의 묘)을 옮길 즈음에 우리 성상(정조를 말함)께서 입으신 소매자락에 흐른 눈물이 피로 변하여 점점이 붉게 물든 것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일찍이 옛 글에서 혈루(血淚)라는 두 글자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었는데 부득이하게 군부의 소매자락에서 직접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신은 전하께서 제왕의 효성으로 몸소 증자(曾子)·민자(閔子)와 같은 효도를 행하시는 것은 본디 알지만, 진실로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치고 맺힌 한을 펴지 못한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눈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이 어떻게 참으로 피를 이루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가슴 속에 가라앉히고 또 가라앉히고 억제하고 또 억제하여 의리가 크게 천명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단지 혹시라도 선대왕(즉 영조)의 훌륭한 덕에 털끝 만큼이라도 관계됨이 있을까 염려하신 때문입니다. 신이 어리석어 죽을 죄를 짓사오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선대왕께서 이미 전하를 위해 큰 괴수로서 원수가 되는 자들에 대하여 이름을 들어 말씀하였으니 선대왕께서 확연히 느껴 깨달았음을 이로 미루어 대략 헤아릴 수 있습니다. 선대왕께서 느껴 깨달으심이 이미 이와 같이 정녕하였고 보면 전하께서 속히 천토(天討)를 거행하시어 사도 세자의 무함 입은 것을 깨끗이 씻어내는 일이야말로 비록 성인에게 질정해보더라도 어찌 의심의 여지가 있겠습니까. (중략)
(번암 채제공)
신이 수십 년 동안 마음을 썩히고 뼈에 사무치는 아픔으로 마치 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던 까닭은 바로 여러 역적 무리가 무함하였던 일들은 곧 천고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도 아직까지 미처 눈을 부릅뜨고 용기를 내서 그 거짓들을 소상하게 변파하여 천하 만세에 알리지 못한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신이 굳게 결심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선세자에 대한 무함이 깨끗이 씻겨져서 징계와 토죄가 크게 시행되기 이전에 신이 만일 다시 관복을 찾아 입고 반열의 한가운데에 선다면 이는 의리를 잊어버리고 부귀를 탐하는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하가 신을 영의정에 발탁시킨 뜻이 어찌 신을 부귀하게 해 주려고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신으로 하여금 의리로써 마음을 가지고 의리로써 임금을 섬겨 온 세상을 의리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가게 하도록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이 전하를 섬기는 일 가운데서 이 큰 의리를 버려두고 다시 어디에다 손을 쓰겠습니까. (중략)
신의 부적합한 실상과 병에 찌든 상태는 오히려 부차적인 일에 속한 것입니다. 오직 이 큰 의리만이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으니, 이것이 받아들여지면 나갈 것이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대로 간직한 채 황천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에게 새로 제수한 수상직을 체직하시어 하찮은 신의를 온전히 지키도록 해주시고, 이어 신의 말을 채택하여 의리가 크게 밝혀지도록 하신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해와 같을 것입니다.”
은유고 뭐고 없습니다. 정면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정조 혼자 끙끙 앓고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니라, 이제 그 죽음을 다시 현실 정치의 아젠다로 삼고, 그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처단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지방 유생 몇몇이 아니라 국정의 수반인 영의정이 말입니다.
정조는 이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논란을 잠재우려 하지만 이미 알 사람은 다 안 이상 정국은 발칵 뒤집히고, 좌의정이자 노론의 수반인 김종수는 목숨을 걸고 이 상소를 올린 채제공을 역적으로 규정합니다.
물론 김종수 본인이나 노론 전체가 그 책임을 지지는 않겠지만, 만약 이런 식으로 정치적인 복수가 감행된다면 정국의 균형은 일시에 무너질 것이 분명했으므로 김종수로서는 반발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조용한 해결을 택합니다. 채제공과 김종수를 모두 파직시킴으로써 이 상소에 대한 논의를 강제로 덮어 버린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여론이 전부 가라앉을리는 없습니다. 3개월 뒤까지 소란이 가라앉지 않자 8월8일, 2품 이상의 모든 대신들을 소집한 정조는 금등지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명백하게 합니다.
"(전략)전 영상(채제공을 말합니다)의 상소 가운데는 비(非) 자 한 구절로 말머리를 꺼내고 즉(卽) 자 한 구절로 말을 끝맺었는데, 즉 자 이하의 내용은 아무해의 일(사도세자의 죽음)과 관계되어 있는 지극히 중대한 일이었다.
가령 전 영상이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기로 작정하고 미덕을 천양하려는 애타는 마음과 피끓는 정성에서 한 말이라 하더라도 내가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전 영상이 감히 말하였으니 그 겉면만을 얼핏 본다면 그의 죄는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중략) 그러나 전 영상이 남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감히 말한 것은 대체로 곡절이 있어서였다.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있을 때 선조(先朝, 즉 영조)께서 휘령전(徽寧殿)에 나와 사관(史官)을 물리친 다음 도승지만을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어서(御書) 한 통을 주면서 신위(神位)의 아래에 있는 요[褥] 자리 속에 간수하도록 하였었다.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 즉 자 아래의 한 구절은 바로 금등 가운데의 말인 것이다.
내가 처음 왕위에 오른 병신년 5월 13일 문녀(文女, 영조의 후궁인 숙의 문씨. 정조가 즉위한 직후 처단됨) 의 죄악을 드러내어 공포할 적에 전 영상이 윤음(綸音)을 교정하는 일에 참여하여 아뢴 것이 있었고 승지와 한림(翰林)을 보내어 이를 받들어 상고한 일까지도 있었다. 지금 물러가기를 청하는 상소에서 죽음에 임박하여 이런 진실을 말한 것은 전 영상만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혼자서 그 일을 말한 것이니, 이는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의 발로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전 좌상은 이런 본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그 표면에 나타난 것만을 의거하여 지난 여름 이후로는 감히 말하지 못할 의리로써 성토한 것이니 이 또한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에서 발로된 것이다. (하략)"
그럼 정조는 그것이 전해진다는 사실만을 알고 그 내용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예 정조는 작정하고 그 내용을 공개합니다. 단 두줄만. 이것이 바로 영조가 직접 썼다는 금등지사 가운데 공개된 20자입니다.
【피묻은 적삼이여 피묻은 적삼이여, 동(桐)이여 동이여, 누가 영원토록 금등으로 간수하겠는가. 나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바라고 바란다.(血衫血衫, 桐兮桐兮, 誰是金藏千秋? 予懷歸來望思)】
"내가 이덕사(李德師)와 조재한(趙載翰)을 사형에 처하게 하던 날 문녀와 김상로(金尙魯)도 처단했을 것이지만 나는 그때 이미 금등의 글 가운데 들어 있는 선왕의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그 뜻을 약간 반영하였던 것이다. (중략) 내가 차마 이 말을 하는 것은 나도 생각이 있어서이다. 요컨대 온 세상 사람들에게 전 영상이 상소에서 말한 것이 위에서 말한 바와 같고 또 전 좌상이 준엄한 성토를 한 것도 내면의 사실을 모른 데에서 나온 것임을 알리고 싶을 뿐인 것이다.(중략)
오늘 분명히 밝혀두는 것은 대체로 ‘대고(大誥)’의 뜻을 모방하여 사람마다 그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이다. 지금으로부터는 다시 이를 빙자하여 이러쿵저러쿵 시끄럽게 구는 일이 있으면 사람마다 성토할 것이다. 오늘 이후로 사리를 천명할 책임은 오로지 경 등에게 있는 것이다."
이걸로도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정조는 다음날, 김종수를 따로 불러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설명합니다. 즉, 채제공이 한 상소를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왜 채제공을 처벌하지 않는가에 대한 자신의 입장입니다.
“(전략) 아무해의 사변(사도세자의 죽음)은 차마 제기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이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차마 제기하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양조(兩朝)의 미덕을 천명하기 위한 일이라 하더라도 여태껏 차마 제기하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했기에 차라리 덮어둔 채 드러내지 않은 지가 지금 거의 10년이나 되었는데도 끝내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중략)
전 영상(역시 채제공)이 설사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기로 작정한 마음이 있었더라도 차마 제기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일을 제기하여 나에게 들려준 것은 죄가 되는 것이고 가령 그 마음이 옛날의 미덕을 드러내기 위한 데에서 나왔더라도 도리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막중한 자리에 미치게 한 것도 죄이며, 옛날 일을 언급하면서 선조에게까지 언급이 된 것도 역시 죄인 것이다. (중략) 이를 보았거나 들은 뭇신하들로서 그를 엄중히 성토하려 했던 것은 경(김종수) 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군들 그와 같은 심정이 아니었겠는가.
다만 전 영상이 차마 제기할 수 없고 감히 말할 수 없는 내용을 혼자서 말한 데에는 대체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선대왕(先大王, 영조)께서 휘령전에 친림했을 적에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입시하였었는데 사관을 문밖으로 물러가게 한 다음 선대왕께서 한 통의 글을 주면서 신위(神位) 밑에 있는 요의 꿰맨 솔기를 뜯고 그 안에 넣어두게 하였던 바 그것이 바로 금등 문서였던 것이다. 내 그 내용을 반포하는 것이 막중한 관계가 있고 또 시급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아픔을 참고 억울함을 간직한 채 오늘까지 끌어온 것은 오로지 차마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녀의 처분에 관한 전교를 내리면서는 그 속에 약간의 언급이 있었던 것이다. 전 영상의 상소문 가운데 즉 자 이하는 바로 아무해 이전의 흉도(凶徒)들이 한 흉악한 말이었는데 아무해 이후에 선대왕께서 즉각 이를 깨닫고 이 금등의 글을 내렸던 것이고 전 영상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혼자서만 이를 말하게 된 것이다.
그 상소문이 나온 뒤로 조정이 시끄럽게 들끓었으나 그대로 방임했던 것은 내가 차마 제기할 수 없어 아직껏 감히 말하지 못했던 것인데, 오늘에서야 한 번 말하지 않을 수 없음을 깨닫고 나서 비로소 말하게 된 것이다.
(중략) 이제 와서 내가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여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다가 도리어 차마 말할 수 없는 사실이 세상에 멋대로 전파되도록 내버려둔다면 세상에서 이를 보는 사람들이 앞으로 어떻게 볼지 모를 일이니, 그렇다면 한때에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은 작은 문제이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그 사실이 후세에 흘러 전하게 되는 것은 관계됨이 매우 중대할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볼때 정조의 입장은 분명해집니다. 즉,
"나는 금등지사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알고 있고, 그 내용이 영조가 한때 사도세자를 미워해서 죽였지만 그것이 실책이었음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후손에게 분명히 알리고자 한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따라서 그 사실을 전한 채제공을 처벌할 이유는 없다. 아울러 나머지 중신들이 채제공을 비판한 것 역시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니 문제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빌미로 정치적인 보복을 할 생각 따위는 없다. 채제공의 상소를 묵살하고 그를 즉시 파직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논의가 가라앉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그 상소의 내용을 이유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거나, 불안해 하거나, 상대 당파를 공격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혼란을 빚어내고 있기 때문에 온 중신들에게 분명히 밝혀 둔다.
병신년 3월10일(정조가 즉위하던 날) 분명히 밝힌 대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하지만 그것을 밝힌다는 것이 그 사건과 관련된 일들을 다시 캐내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모든 의혹이나 불안을 씻고, 나와 함께 정국을 이끌기 바란다."
물론 정조의 이런 입장에도 불구하고 정조와 김종수는 다소 삐걱거립니다만, 아무튼 이상의 내용을 보면 금등지사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슨 뜻이라는 건 전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분석에 따르면 정조는 금등지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도 합니다. 즉 실제로 금등지사 카드를 사용하기 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들먹여 노론 세력을 억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는 것이죠. 그럴듯 합니다.
사실 정조는 집권 초기에 금등지사 없이도 꽤 신나게 복수를 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7년. 다시 또 사실을 캐고 한대봐야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이미 늙어 죽었거나, 정조 초기에 죽거나 귀양을 가거나 했죠. 30년이나 지난 뒤에 굳이 복수를 거론하는 건 결국 왕권 강화를 위한 명분쌓기였을 뿐인 듯 합니다.
아무튼 너무 길어져서 정작 금등지사와 현재 '성균관 스캔들'에 관련된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겨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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