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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영을 향해 가고 있는 MBC TV '동이', 마침내 숙종은 세자에게 선위를 거론하며, 숙빈을 출궁시키고 세자를 후사로 삼는 일에 아무도 더 이상 이론이 없게 합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정상적인 진행입니다. 신하들의 입장에서 볼 때 장희빈이 낳은 세자와 숙빈(동이)이 낳은 연잉군은 왕위를 놓고 경쟁하는 사이인 것이죠. 여기서 왕이 세자의 손을 들어 준 이상 연잉군과 그 어머니 숙빈에게는 다소 냉랭하게 대하는 것이 정상일 듯 합니다. 그러다 장무열이 정세를 오판하고 숙빈에게 무력 시위를 하는 모습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 비쳐 보면 좀 황당무계한 일입니다. 숙종이 지시한 세자의 대리청정은 고도의 정치적인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동이'에서 다뤄지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숙종이 대리청정을 얘기했던 날, 이 날은 바로 1717년 7월19일입니다. 그리고 그때 이미 숙빈은 궁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1717년, 7월19일, 56세를 맞은 숙종은 심한 안질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 정도면 역대 조선의 국왕 가운데선 상당히 장수한 편에 속합니다. 이날 숙종은 자신의 건강을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 청정을 시킬 것을 공표합니다.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지는 않되, 실질적으로 국정 운영은 세자가 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드라마에선 소년이지만 1688년생인 세자는 이미 29세의 장년. 동생인 연잉군 역시 23세의 팔팔한 청년이었습니다. 당장 왕이 되어도 이상할게 없는 나이였죠. 그런데 숙종은 청정 발표 전에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바로 노론의 영수 이이명과 독대를 한 겁니다.
세자의 혈통을 보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의 지지세력은 소론과 몰락한 남인, 그리고 연잉군의 지지세력은 노론입니다(물론 이 시기의 노론은 영/정조때와는 달리 막강한 독재집단이 아닙니다. 숙종의 통치술이 만만찮음을 엿볼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발표를 하기 전인 미시(오후 1시-3시)에 노론의 영수와 홀로 만난 것입니다.
본래 임금이 신하를 만날 때에는 승지와 사관이 옆에 있어야 하는 법이지만, 숙종은 이이명 혼자 들어오라는 명을 내립니다. 그래서 승지 남도규와 사관 권적 등이 "이런 법은 없다"며 따라 들어가려 하는데 또 임금이 굳이 혼자 들어오라고 했는데 마구 밀고 들어가기도 켕겼는지 "자, 들어갑니다" 하고 보고를 합니다.
그러나 임금은 들어오라고 허락하지 않고 결국 뒤늦게 들어가긴 하지만, 이미 임금과 이이명의 대화는 끝나 있었습니다.
(정황을 생각하면 마땅히 사관과 승지가 배석해야 하는 것이므로, 뒷날 '왜 배석하지 않았느냐'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들어가려는 액션은 취하되, 또 마구 밀고 들어가면 임금의 진노를 살 우려가 있으므로 어정쩡하게 밖에 서서 기다린 것이 분명합니다.^^ 눈치 있는 사람들이었던 모양입니다.)
어쨌든 임금은 이이명과의 독대를 마친 뒤에야 더 많은 대신들을 부릅니다. 이건 신시(오후 3시-5시)의 일로 되어 있습니다.
신시(申時)에 임금이 희정당(熙政堂)에 나가서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이유(李濡)·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좌의정(左議政) 이이명 등을 불러서 접견하였는데, 승지(承旨) 이기익(李箕翊)·가주서(假注書) 이의천(李倚天)·겸춘추(兼春秋) 김홍적(金弘迪)·대교(待敎) 권적(權?)이 따라 입시하였다.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서종태(徐宗泰)·조상우(趙相遇)·김우항(金宇杭)은 병을 핑계하고 패초(牌招)를 어기고서 끝내 오지 않았다.
결국 왕과 마주 앉은 사람들은 모두 노론의 거두들입니다. 이 자리에서 왕은 자신이 안질이 심해 국정에 대안이 필요하나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꼬리를 흐립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노론의 세 대신이 일제히 "세자는 영명하고 자애로우니 세자에게 국정을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입을 모아 외칩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정상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세자에게 왕권을 넘기고 후계구도를 분명하게 한다는데 노론 대신이 찬성을 하는 건 좀 이상한 일이죠. 더구나 '세자 카드'는 숙종이 이미 노론을 겁주는 데 써먹었던 카드입니다. 12년 전인 1705년, 숙종은 한번 "건강이 안 좋으니 세자에게 양위하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화들짝 놀란 신하들이 일제히 '앞으로 잘 할테니 그런 말씀 마세요'라고 외치자 슬며시 철회한 사건이었죠.
그리고 머잖아 그 답은 나옵니다. 왕과 이이명의 독대에서 왕은 "세자에게 대권을 잇게 하되,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아 그 뒤를 잇게 하겠다"는 언질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극비에 해당하는 중대사였으므로 사관과 승지가 들어선 안되는 일이었던 겁니다.
이이명은 왕과 독대한 뒤 김창집과 이유에게 이 거래를 공유했고, 이후 세 대신은 자진해서 세자에게 청정을 맡기는 데 동의한 것입니다. 당장 세자가 바뀐다면 더할나위없이 좋겠지만 어차피 세자(뒷날의 경종)는 후사를 둘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진 상황이고, 병약해 얼마를 더 살 지 모르는 상황이고 보면 연잉군에게 그 다음 임금 자리를 약속한다는 것은 노론에게도 큰 불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뜻대로, 경종은 즉위 1년만인 1721년에 인원왕후의 허락을 얻어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합니다.)
결국 숙종은 이런 방법을 통해 두 아들을 모두 살리는 선택을 한 듯 합니다. 두 아들에게 동시에 왕좌를 물려줄 수는 없지만 세자의 신체적 결함을 감안할 때 연잉군의 위치만 보장해 준다면 노론이 당장의 후계구도를 양보해도 크게 반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죠.
물론 소론이 이런 숙종과 노론의 거래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낸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소론 윤지완은 며칠 뒤인 7월28일 상소를 올려 이 조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합니다.
세자로 하여금 항상 측근에 모시게 하여 문안하고 시탕(侍湯)하는 여가에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한 다음 큰 일은 품정(稟定)하게 하고 작은 일은 재결(裁決)하게 하신다면 성궁(聖躬)께서 수응(酬應)하는 번거로움을 덜게 되고 국사가 지체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이니, 그 위안(慰安)하는 방도와 훈도(訓導)하는 의리가 둘 다 마땅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청정(聽政)하는 일에 이르러는 천천히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리청정이라는 것은 사실 명분이고, "중책을 맡겨 놓은 뒤 트집을 잡아 세자 교체를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대리청정을 시켰다가 세자를 교체한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거야말로 그냥 생트집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뒷날 경종때, 연잉군에게 대리 청정을 시키자는 의견이 나오자 그때에도 소론은 반대합니다. 대리청정이 나쁜 것이라면 이때 반대할 이유가 없죠) 정작 이 상소가 공격하고자 한 것은 다음에 나옵니다.
독대(獨對)한 일에 이르러서는 상하(上下)가 서로 잘못했다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어떻게 상국(相國, 재상인 이이명을 말함) 을 사인(私人)으로 삼을 수가 있으며 대신(大臣)도 또한 어떻게 여러 사람들이 바라보는 정승의 지위를 임금의 사신(私臣)으로 만들 수가 있겠습니까? 중외(中外)가 놀라 의혹하고 국언(國言)이 떠들썩한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네. 결론은 내용이 문제가 아니고 왕이 노론과 몰래 협상을 했다는게 불쾌한 겁니다. 어쨌든 소론으로서는 연잉군이 지금 세자의 뒤를 잇는다는게 매우 싫긴 하지만, 당장 세자가 왕이 된다는데 거기에 반대할 수는 없는 일이죠. 드라마 속 장무열처럼 군사를 일으켜 언제 올지도 모르는 몰락을 앞당기는 해괴망칙한 일을 벌일 정도로 정신나간 사람들은 아니었던 겁니다.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이고, 그 흐름은 실제 역사와 일치하기 때문에 여기에 뭐라 토를 달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 부분에선 굳이 '동이'가 연장방송에 들어가야 했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드라마와는 달리 숙빈 최씨는 숙종이 이런 결단을 내리기 1년 전인 1716년 이미 병을 이유로 사저에 나가 치료하고 있었고, 1718년 3월 숨을 거둡니다.
그러니 숙종이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지시한 것은 어느 한 당파에 힘을 몰아 주지 않고, 두 아들에게 모두 살 길을 열어 주면서 불필요한 싸움을 억제하자는 뜻에서 내려진 판단으로 보입니다. 그동안 장희빈과 인현왕후를 다룬 수많은 사극 때문에 숙종은 '여자 치마폭에서 놀아난 왕'이란 느낌이 강했지만, 보면 볼수록 정치적 수완이란 면에서 영조나 정조보다 한수 위였던 듯 합니다. ...그나자나 이렇게 '동이'도 끝나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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