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해가 기울 무렵, 천천히 호텔을 나서 구시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호텔이든 민박이든, 한번 아침에 길을 떠나면 저녁에 녹초가 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 여행은 이제 좀 무리다.
그래서 핵심 관광 스팟에 가까운 호텔이 더 좋은 것이기도.
아무데서나 카메라를 대도 예쁘게 찍히는 프라하의 마법.
프라하에서의 마지막 밤을 음악회와 함께 보내기 위해서다.
프라하의 수많은 공연장에서는 쉴새없이 공연을 한다. 단, 거의 모든 공연들은 그저 '공연을 감상한다'는 목표에 맞춰져 있다. 큰 기대를 하면 안 된다. 소위 말하는 관광객용 공연이다.
그런데 또 막상 들어 보면 돈 값 이상은 분명히 한다. 이유는 공연장들이 100년 200년 씩 된 교회 내부라는 데 있다.
프라하의 폭염을 피해 들어간 서늘한 교회 내부에서, 파이프 오르간과 오케스트라(소규모지만)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절로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만원짜리 공연이 10만원짜리 공연의 효용을 내는 순간이다.
지난 2000년 프라하에 들렀을 때, 우연히 길에서 나눠주는 찌라시를 보고 한 교회로 연주를 들으러 갔다. 그때 느꼈던 청량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비록 관광객용의 약식 연주회지만, 그래도 프라하를 가는 사람들이라면 꼭 시도해 보기를 권한다. 굳이 고르라면 성당 쪽을 추천한다(교회 공연도 많은데, 교회에는 파이프 오르간이 없다^^).
오늘의 목적지는 틴 성당.
줄여서 그냥 틴 성당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틴 앞의 성모 성당'이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다. 체코어로는 Kostel Panny Marie Pred Tynem, 영어로는 Church of Our Lady before Tyn 이라고 한다.
지난번에 왔을 때 틴 성당의 내부를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함께 달래 보기로 했다.
엄청난 금빛의 물결. 성 비투스 성당보다 훨씬 화려한 색감이다.
팁 하나를 더 하자면, 일단 비싼 표를 살 필요가 없다. 그리고 일찍 표를 살 필요도 없다. 틴 성당의 저녁 8시 공연은 최고가 1100 코루나(약 5만5000원)에서 500코루나 (2만5000원) 까지 매겨져 있다. 아마 500 코루나는 무슨 장애인 우대 티겟인가 그럴 거다.
하지만 늦게 갈수록 가격은 떨어진다. 왜일까. 어차피 공연은 하게 되어 있고, 한 사람이라도 더 들어오면 이익이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공연 시작 시간에 임박해서 도착하기 바란다. (매진돼서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은 금물. 자리가 다 차면 보조의자 놓고 들여보낼 사람들이다.) '공연이 곧 시작하니 표를 사라'는 말을 들으면 그 자리에서 말하기 바란다.
'Discount Please!'
그 먼데까지 가서 체면 구길 필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냥 들어가시면 된다. 그 자리에서 당연히 할인을 해 준다. 오래 버티면 버틸 수록 싸 질 것을 확신하지만, 아무튼 적당히 타협을 해서 적당한 가격을 할인받고 들어가시기 바란다.
(할인율을 여기서 딱부러지게 쓰지는 않겠다. 각자 알아서 적당히 깎으시길.)
파이프오르간은 뒤에 있는 구조.
폰 카메라의 파노라마 기법을 좀 잘못 썼더니 기둥이 휘었다. 아무튼 이런 천장 아래서 음악을 듣는다.
멋지지 않나?
천장 한가운데 합스부르크의 독수리 문장.
역시 '그것 또한 우리의 역사'라는 체코 식 사고방식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8명 정도의 단원이 등장하는 Royal Chech Ochestra의 연주 시작.
(대체 왜 Royal이 들어가는지 매우 의문이지만)
연주곡은 비발디의 4계, 파헬벨의 캐논, 그리고 프라하이다 보니 당연히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중 '블타바' 등.
그렇다. 클래식 좀 들으시는 분들이라면 입문 후 3개월 이내에 듣게 되는 곡들이다(엔딩 곡은 무려 베토벤 교향곡 5번 1악장). 곡들을 자유자재로 특정 악장만 잘라 내 공연하는 등 전형적인 팝스 오케스트라의 선곡이다. 중간에 독주자로 나온 분은 체코 필하모닉의 악장 출신이라고 하는데... 뭐 누가 확인해 볼 것도 아니고.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대단한 예술적 경험'을 기대하실 만한 공연은 아니고 - 물론 프라하에서는 그런 공연도 매우 자주 열린다 - 이런 장소에서 음악을 듣는다는 게 매우 이색적이고 영혼을 맑게 해 준다는 것을 한번 경험해 보시라는 뜻에서 추천한다. 각자의 스케줄과 컨디션에 맞춰서.
공연이 끝나고 구시가 광장 쪽으로 나오면 보게 되는 풍경. 후스 동상과 성 니콜라스 교회 (참, 프라하에는 성 니콜라스 교회가 두 개 있다. 이건 구시가 광장 옆의 니콜라스 교회다)를 배경으로, 거의 항상 거리 예술가들이 판을 벌인다.
아마도 프라하라는 도시가 있는 한 영원히 만남의 장소일 구시가 광장의 얀 후스 동상.
"이번주 토요일 6시에 후스 동상 앞에서 만나" "알았어" 이런 대화가 수없이 오갈.
그런데 지금 저녁 9시다. 아직도 날이 너무 훤하다. 서머타임의 위력을 감안해도 너무 밤이 짧다.
그래서 일단 강 쪽으로 걷고 또 걷다가 적당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Mistral Cafe. 구시가 광장에서 마네수프 다리 쪽으로 걸어서 10분 정도면 도착.
Mistral Cafe
Valentinská 11/56
110 00 Praha 1 - Staré Město
Hovězí maso 150g ve svíčkové omáčce s domácím bylinkovým knedlíkem 이라는 이름의 요리다(좌하단). 200 코루나 정도 하는데 정말 기막힌 맛이다. 대략 안심 그레이비 소스에 버무린 살코기(Beef with Sirloin Gravy 정도?) + 덤플링 이라는 뜻인데, Svíčková omáčka 에 핵심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식당에서라도 꼭 드셔 보시길.
나머지는 상식적인 음식들이다. 쇠고기 슈니첼, 팬에 구운 야채, 그린 샐러드. 다 기본 이상의 맛이다. 매우 훌륭
아무튼 저렇게 차려 놓고 먹으면 음료까지 한 4만원 정도.
사실 손님은 건너편의 꼬치집^^이 더 많았다. 체코에서는 아마도 스피지 Spizy 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러시아의 샤슬릭이나 그리스의 수블라키 같은 꼬치 구이 요리가 체코에서도 꽤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내부는 꼬치 굽는 연기도 자욱하고, 사람들이 미친듯이 맥주와 꼬치구이를 먹으며 떠드는 분위기. 가격도 꽤 저렴해 보였다. 일단 사람이 많길래 저 집을 가볼까 했지만 빈 자리가 없어서 조용해 보이는 앞집으로 왔는데, 음식을 먹어보고는 전혀 후회하지 않았다.
신나게 저녁을 먹고 강쪽으로 나섰다. 해가 이제서야 뉘엿뉘엿 서산으로.
막 운치있게 예쁘고 그렇다.
아무데나 대충 들이대도 그냥 그림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강가로 나오면 건너편에 뜨악 나타나는 프라하 성의 전경.
강가 관광식당에선 관광객들의 식사가 한창. 조명 때문에 나무 색이 계속 바뀐다.
관광객 티를 팍팍 내면서 이런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찾아보니 이 집 http://marinaristorante.cz 인듯. 청담동 보단 싸다.
찍어도 찍어도 성에 안 차고 자꾸 또 찍고 싶어지는 프라하성의 마력
이럴때 해보고 싶은게 카메라 성능 테스트다.
밤 촬영에 특히 강한 RX100 시리즈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잡아당겨질까?
이 정도가 한계인 듯. 아무튼 카를교 위에서 바라보는 프라하 성 야경은 언제 봐도, 누가 찍어도 최고다.
카를 교 동쪽 광장은 항상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다. 일단 저 다리 끝을 알리는 탑이 사진의 배경으로 그만이기도 하고.
저 자리에서 두 남자와 한 여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들 20대 초반으로 보인다. 허물없이 예쁘고 잘생겼다.
여자가 두 남자에게 말했다. "어머, 그럼 정말 여기서 헤어지는 거에요?" 두 남자는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뭐라고 대답을 하는데,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이 그 말 한마디에 세 사람의 관계가 그려진다.
세 남녀는 이번 여행길에 만났다. 어제 만났는지, 그제 만났는지, 오늘 아침에 만났는지 모르겠지만 의기투합해서 프라하 구경을 같이 하기로 한다. 그래서 쟁하니 해가 밝은 토요일, 프라하 시내를 누비고 다녔다.
하지만 그 기한은 오늘 밤까지. 프라하 구경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카를교 위에서 프라하 성 야경 보기'를 마친 뒤 두 남자는 원래 정해진 대로 여자에게 "이제 우리는 갈 길(아마도 시간으로 보아 프라하 역에서 떠나는 야간 열차가 아닐까 싶다)을 갈테니 아쉽지만 여기서 헤어지자"고 말을 한 상태인 것 같다.
여자의 마음 속이 과연 어느 쪽인지, 정말 갑작스러운 이별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마지막 예의인지는 알 수 없다. 두 남자 중 누가 여자에게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하루 다녀 보고 여자에게 질려 예정보다 빨리 이별을 선언해 버린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쩐지 프라하의 야경을 배경으로 이런 얘기를 듣고 보면,
저 세 사람이 나중에 어디선가 다시 만나 프라하에서 함께 보낸 그날을 얘기하는 미래를 상상해보게 된다.
뭐 아무리 메마른 사람도 이런 경관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삼각관계로 발전... 까지는 몰라도.^^
하늘도 파랗고... 밤인데도 파랗다.
이렇게 해서 프라하 여행은 일단락.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맥주집을 들렀는데 분위기도 딱 1980년대 서울의 '하이델베르크'인데다 손님의 절반이 동양인, 나머지 절반 중 절반도 관광객으로 보였다. 큰 감흥 없는 마무리.
17년 전에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뭔가 롯데월드 같은 느낌이 난다. 예쁘고 사랑스럽고, 아무데나 찍어도 멋진 사진이 나오지만 어딘가 짙은 감흥을 주지는 못하는. 하긴 두 번 합해서 딱 3일 머물고 무슨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
...그래도 저 파란 저녁 하늘과 금빛으로 빛나는 성의 모습을 보면 저만한 볼 거리가 또 있을까 싶은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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