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들어 가장 잘한 일: 개봉관 부족과 묘하게 엇갈리는 일정을 무시하고, 만사를 다 제치고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극장에서 본 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집에서든 어디서든 봤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듯.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자 자신의 모든 영화 음악을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맡겼던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위대한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인류의 추억'을 다큐멘터리로 정제한 작품이다. 누가 언제 이런 영상을 기획한다 해도 최고의 적임자일 수밖에 없는 토르나토레가 감독을 맡아 극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너무나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일찍 본 사람들 중 눈물 나더라는 사람이 많아서 아저씨들이 왜 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나도 펑펑 통곡.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생전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에서 그냥 목놓아 울어 버렸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2. 스포일러는 딱히 없지만 고만 읽고 빨리 영화를 보러가라. 열려 있는 관들은 꽉꽉 차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상영관 수가 적어서 언제 닫힐지 알 수 없음.
3. 1987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내 기준으로는 분노의 한마당이었다.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미션>이 작품상/감독상은 <플래툰>에게, 음악상은 <라운드 미드나잇>의 허비 행콕에게 밀려 촬영상 하나 받고 끝나는 걸 보고, 알만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이 분노했다.
뉴욕출신 진보 유태인이란 아카데미의 성골 올리버 스톤이 미국 고인물들이 죽고 못 사는 월남전이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플래툰>의 싹쓸이는 어쩌면 당연. 그래도 <미션>아닌 다른 작품에 음악상을 수상한 건 오스카의 흑역사로 남을만 하다. 이 찌질한 로컬 잔치에 이 무식한 미국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1987년의 젊은이들은 누구나 반미의 선봉에 섰다. 이해하기 바란다).
뒤늦게 아 우리가 미쳤었구나 깨달은 아카데미는 일단 공로상 드릴게요 한 뒤에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로 잘못했습니다 시전. 굳이 차별이라기보다는 그래미가 제프 벡 젊었을때 했던 짓처럼, 그냥 미국 꼰대들(아카데미상은 원래 그 시대의 꼰대들이 뽑아왔다) 20세기까지는 참 무지했다는 증거.
아무튼 모리코네의 6회 노미네이션은 <천국의 나날>, <미션>, <언터처블>, <벅시>, <말레나>, 그리고 <헤이트풀8>. 당연히 다 좋은 음악들이지만, 모리코네의 팬이라면 <미션>을 제외하고 후보로 오른 작품들이 과연 모리코네의 베스트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미션>의 수상 실패가 워낙 충격적이라 그렇지 6회 지명-1회 수상이 그렇게 불운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2회 지명-2회 수상의 한스 짐머나 무려 48회 지명(!!!)-5회 수상의 존 윌리엄스를 보면 수상/지명의 비율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법자 3부작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시네마 천국> 등이 후보로도 꼽히지 않은 것은 역시 '로컬'임을 자인하는 안목 부족 외의 다른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아카데미 음악상의 지명-수상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난맥상을 파보는 것도 코믹할 것 같다. 정말 들여다보니 기가 막히다.)
4. 1928년 로마에서 트럼펫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한 정통 클래식 신동 모리코네는 한동안 '클래식을 배신한 저질'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본인도 영화음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것.
문득 생각난 일화: 한국의 성공한 드라마 작가가 고향에 갈 때마다 예전 학창시절 같이 신춘문예 준비하던 문학서클 선후배들을 불러 3차까지 밥사고 술을 산다는데, 그렇게 얻어먹고 얼근히 취한 선배가 꼭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 **이도 조금만 더 참고 노력했으면 참 훌륭한 문인이 됐을텐데..."
그러니까 열심히 문학의 길을 걷다 TV 드라마 작가가 된 건 문학에 대한 배신이란 얘긴데, 놀랍게도 현역 드라마 작가들 중 은근히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더라는. 그러니 모리코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아무튼 <미션>도 아니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때에서야 모리코네의 스승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 음악의 거장들이 '아, 이 친구가 정말 좋은 음악을 하고 있구나' 하고 탄복해서 사과 편지를 보냈다니. 참 이 분들도 대단한 분들일세.
5. 실제로 모리코네는 누가 들어도 바로 귀에 쏙쏙 꽂히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거장이면서, 동시에 누가 들어도 어색한 현대음악 작곡가였다. 영화에도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다'고 했을 정도. 물론 만년에는 '그 둘이 하나로 마침내 합쳐졌다'고 말하는 순간도 온다.
아무튼 남의 곡을 섞어 쓰지 않겠다는 이유로 프랑코 제페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 맡기를 거부했다는 모리코네. 유난히 '내 영화는 내 곡으로 채운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은 모리코네. <엔니오>를 보고 나서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그렇게 남의 곡 쓰기를 싫어했던 모리코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6. 문득 든 생각. 1960-70년대의 이탈리아 영화는 얼마나 쿨하고 다양했는지. 데시카, 펠리니, 파졸리니,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감독과 배우들이 만든, 군데 군데서 다니엘라 비앙키, 비르나 리지, 줄리아노 젬마, 로드 스타이거 같은 배우들과 마주치며 깜짝 놀라게 된다.
아주 저렴하고 우수 넘치는 형사물과 스파게티 웨스턴들이 쏟아지던(두 장르 모두 모리코네의 단골이다) 시대. 영어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할리우드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의 미녀들(그 리스트의 맨 끝에 모니카 벨루치가 있다)이 넘쳐나는 영화들.
지금은 볼 길도 없는 그런 영화들이 엄청나게 그립다. 그런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사람들이 극장에서 그런 영화들을 보던 시절이, 겪어보지도 못한 그런 시절이 참 그립다.
아마도 이탈리아 영화계의 적자인 토르나토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왕년에 이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소개할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토르나토레가 요약한 이탈리아 영화사, 아름다웠다.
7.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모리코네의 멜로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의 테마. 가끔 모리코네의 음악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 영화를 좋다고 생각할 것인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꿰뚫는 주제가 있다면 - 물론 500여편의 영화 음악을 맡았던 모리코네인 만큼 분명히 그 500편을 꿰뚫는 단일한 주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영화와 아는 음악의 한도 안에서 볼 때 - 그 주제는 '회한'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어느새 사람을 과거로 데려가 그 시절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랬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에 이르게 만든다. 분명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어떤 감정. 그런 감정을 끌어올리게 하는데 - 심지어 겪어 본 적도 없는 과거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포함해 - 모리코네를 능가할 만한 장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8. 가장 많은 코멘트를 하는 사람은 한스 짐머고, 존 윌리엄스도 몇 장면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존 윌리엄스는 아마도 스필버그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이봐, <엔니오> 봤어? 나는 루카스보다는 당신이 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둘이 공동으로 감독해도 좋을 것 같고."
한스 짐머는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까. 리들리 스콧? 혹시 마이클 베이? ㅎ
아무튼 RIP, 마에스트로.
P.S.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할 때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3부작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한글 제목이 엉터리다. 이 3부작의 제목은 한국에 수입 개봉되었을 때 붙여진 제목대로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라야 한다. 어느 무허가 비디오 제작자가 3편에 2편의 제목을 마음대로 붙이면서 이상하게 굳어진 케이스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찌기 분개한 적이 있다.
놈놈놈과 석양의 무법자의 관계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뭐 어차피 그깟 옛날 영화 제목 하나...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외국 영화가 수입됐을 때 원제를 직역한 것이든, 거기서 응용해 새로운 제목을 붙인 것이든, 제목에는 생명이 있다. 그 제목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자들이 1차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영화 깨나 봤다는 사람들이 그런 잘못을 계속 답습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내일을 향해 쏴라>를 어느날 갑자기 "이제부터 이 영화는 <부치와 선댄스 키드>라고 부르기로 합시다"라고 하면, 그냥 그걸로 끝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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