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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꽃보다 남자'의 도입부를 보면 구준표는 참 찌질하기 그지없는 인물입니다.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집안 돈으로 학교에서 왕 노릇이나 하고, 말도 안되는 사소한 이유로 동급생을 자살 위기에 몰아넣기도 합니다. 이 드라마의 전체 구조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저런 '이상한 놈'이 주인공으로 인기를 얻는다는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찌질한 남자'라는 점에서 구준표 말고도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천추태후'의 경종입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KBS 2TV '천추태후'를 볼 맛이 없어졌습니다. 잘 나가던 드라마에서 휙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난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천추태후'의 도입부에는 상당히 매력있는 배우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어린 천추태후 역의 김소은('꽃보다 남자'의 가을이기도 하죠)과 그 남편인 경종 역의 최철호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드라마 속의 세월이 흐르면서 경종과 어린 천추태후가 사라져 버렸더군요. 그에 비해 성인 역의 인물들은 좀 지나치게 평면적입니다.

아무튼 구준표나 경종 같은, 종래의 의미로는 '전혀 멋지지 않은' 남자들이 인기를 얻은 이유는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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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남자'가 뜨는 이유

KBS 2TV 대하사극 '천추태후'가 인기다. 투입된 물량이며 공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싶기도 하지만 인기의 진원지가 예상과는 전혀 달라 관계자들도 놀라고 있다. 타이틀 롤인 천추태후 역의 채시라가 1, 2회에만 출연하고 빠진 가운데서도 20%대의 시청률을 기록중인 건 누가 뭐래도 경종 역을 맡은 최철호의 힘이다.

24일 방송된 7회에서 경종이 죽자 시청자 게시판에는 "이제 무슨 재미로 보겠느냐"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 이 드라마 속 경종은 전혀 멋지지 않다. 정사는 돌보지 않는 술꾼에다 함부로 말을 내뱉고, 사리 분별이 없는 폭군의 모습이다.

안 좋은 면 투성이지만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으로 자주 등장했던 '나쁜 남자'와도 전혀 다르다. '나쁜 남자'들이 용모와 능력은 뛰어나지만 차가운 성격 때문에 여자에게 쉽게 정을 주지 않는 인물형을 가리킨다면 최철호의 경종은 그저 '못난 남자'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법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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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런 못난 남자가 인기일까. 어찌 보면 최철호의 인기는 고개 숙인 남성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록 욕은 먹었지만 지난해 SBS TV '조강지처 클럽'의 인기를 이끈 안내상이나 현재 SBS TV '아내의 유혹' 인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변우민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공통점은 '악당 축에도 못 드는 찌질함'이다. 악인은 악인이되 자기가 지은 잘못을 감당하지도 못할 정도로 심약하다. 가끔은 극중 여성들에게 너무 당해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안내상은 오현경의 복수로 인생 밑바닥을 맛보고, 변우민 역시 전처 장서희와 현재 아내 김서형의 협공으로 궁지에 몰렸다. 이 정도는 아니지만 최철호 역시 당찬 어린 아내 김소은 앞에서 설설 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들이 당하는 모습 역시 시청자들에게 쾌감을 주고 있다.

어쨌든 다른 드라마라면 그냥 묻힐 수도 있었던 캐릭터들이 좋은 배우들을 만나 빛을 봤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최철호와 안내상, 변우민은 모두 한심한 인물들을 다소 과장된 몸짓과 목소리로 희화화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캐릭터로 승화시켰고, 가끔은 동정을 사기도 하는 내공을 발휘했다.

문득 이런 찌질남들의 인기는 결국 영웅이 사라진 시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힘든 현실에서 시대를 이끄는 멋진 남자들의 모습을 볼 길이 없으니 드라마 속에서도 영웅호걸이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현실에서든, 드라마에서든 속히 시대를 타개할 영웅이 다시 나타나길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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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구준표나 경종은 뒤에 가서 개과천선이라도 하지만 철저하게 응징당하는 '원수씨' 안내상이나 아마도 크게 응징을 당할 '교빈씨' 변우민은 또 뭐란 말입니까.

이런 캐릭터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반면 전형적인 영웅 캐릭터 -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 인 '에덴의 동쪽'의 송승헌은 도대체 대책이 안 나오는 무심한 대본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캐릭터나 배우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작가의 오만이 잘 나가던 드라마를 망쳤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에덴의 동쪽'은 실력 이상으로 운의 뒷받침을 받았죠. 마땅히 시청자들을 끌어들일만한 경쟁작이 없는 가운데 순항했던 것을 100% 모두 실력이라고 믿고, 방만하게 스토리를 풀어헤쳐 놓은 채 진도를 나가지 않는 사이 지칠대로 지친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렸습니다.

결국 현재 시청자들은 '더 이상 드라마에서도 영웅이 고생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다'는 쪽으로 기운 것 같습니다. 경제가 많이 어렵습니다. 시청자들은 현실의 고민을 드라마 속에서도 그대로 이어가고 싶어하지 않는 듯 합니다. 아마 올해 내내 좀 더 가벼운 이야기, 현실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들이 인기를 얻어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의미로 사극의 강세도 계속되겠죠. 드라마 속에서 진정한 영웅 캐릭터가 우뚝 서는 것과, 현실을 타개할 진짜 영웅이 나타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빠를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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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사실 한국의 구준표는 일본의 츠카사에 비해 너무 빨리 착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쉽게 달라질 놈이 그동안 그 못된 짓을 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죠.

그나자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꽃보다 남자'같은 비현실적인 드라마는 처음 본다"며 방송심의위원회에 강력 항의했다는 시청자에 대한 기사가 떴더군요. 이 분, '반지의 제왕'을 보고는 어디에 항의했을까요? 뉴질랜드 대사관?






혹시 이 글에 나오는 '꽃보다 남자'에 대한 언급에 불만 있는 분들(예: '준표님은 찌질하지 않아요. 님하 드라마나 좀 보셈' 등등)이 있을 것 같아서 그동안 썼던 '꽃남' 관련 글들을 덧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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