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시빌 워>를 꽤 기다렸다. 2023년 연말, '이런 영화가 나온다'는 예고편을 보고 와 정말 할리우드는 다이내믹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미국 개봉도 4월로 늦어지고(아마도 예측 불가능한 미국 대선과 정치적 상황이 편집 과정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한국에서는 12월31일에야 개봉이 이뤄졌다. 

미국은 대략 160년 전에 내전(civil war)을 겪은 나라다. 여러가지 이유로 연방을 박차고 나간 남부 연합을 상대로 대통령은 탈퇴 불가를 선언했고, 결국 전쟁이 터졌고, 연방의 승리로 미국은 다시 한 나라가 되었다. 나라를 지켜낸 대통령은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워싱턴엔 미국의 신전같은 기념관이 세워졌다. 

 

영화 <시빌 워> 속 미국은 좀 다르다. 적극적으로 분열을 부추기고 독재에 나선 대통령에 맞서 나라가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고,  그중 텍사스와 캘리포니아가 힘을 합친(사실 영화 속이니 가능한 조합이다) 서부군이 워싱턴을 위협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시작 부분. 뉴욕에 머물던 베테랑 저널리스트 리(커스틴 던스트)는 서부군의 우세 속에 워싱턴에 고립된 대통령을 인터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전쟁의 끝을 보기 전, 벙커에 숨은 독재자는 대체 무슨 말을 할지가 가장 세상이 궁금해 하는 뉴스일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가능만 하다면야 누군들 1945년 8월의 히틀러를 인터뷰하고 싶지 않았을까). 

 

역시 베테랑인 동료 조엘과 둘이만 갈 계획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은퇴를 앞둔 노장 새미, 그리고 종군기자를 꿈꾸는 스무살 안팎의 제시가 일행에 합류하게 된다. 

리와 제시

보고 난 느낌: 저널리스트를 앞세운 것은 탁월한 판단. 미국의 내전을 '미국인 종군기자'의 눈으로 지켜보게 한다는 시선이 좋았다. 내전을 누가 일으켰는가, 내전의 대의명분은 어느 쪽에 있는가, 누가 어떻게 전쟁 후의 세계를 건설하는가는 영화 밖에 있다. 전쟁이 일어난 뒤 벌어질 일들과 그것이 사람들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알랙스 갈랜드는 냉철하고 차분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2025년이 방금 시작했지만 올해 연말에 꼭 넣고 말 수작. 강추한다. 

(아울러 마지막 30분 정도에 걸쳐 벌어지는 시가전 장면은 지금껏 본 수많은 영화 속 교전 장면 중에서도 손에 꼽을만큼 훌륭하다. 실제 전쟁 속에 들어가 아드레날린에 중독되는 제시의 마음 속을 이해할 수 있는 명장면이 이어진다. 대강 엑스트라들에게 자동화기만 쥐어 주면 저절로 총격 액션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했던 몇몇 영화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1. 영화가 시작될 때, 전쟁중인 미국은 어떤 형국인가?

미국 개봉때 만들어진 자료 중 하나가 가장 정확하게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대략 4개 정도의 큰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고,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전쟁은 서부군(Western Forces)과 충성파(Loyalist States)사이의 전쟁이다. 충성파는 현 대통령과 그를 중심으로 한 미 합중국에 대한 충성을 말하는 것이고, 서부군은 대통령의 독주와 헌정파괴에 대한 항의로 독립을 선언한 세력을 말한다. 

 

2. 서부군의 주력이 캘리포니아와 텍사스로 되어 있는데 이건 무슨 얘긴가. 

영화 막판에 공개되는 서부군의 깃발. 미국 국기에서 50개의 별이 있어야 하는 위치에 두개의 별이 있다. 두 별은 캘리포니아 주와 텍사스 주를 의미하고, 이 깃발에 13개의 붉고 흰 줄이 있는 것은 이 깃발을 지지하는 자들이야말로 미국 독립 당시 13주의 정신, 즉 미국의 헌법과 수정헌법을 진정으로 지지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두 주의 깃발에 모두 별이 하나씩 들어 있기는 하다. 

사실 캘리포니아와 텍사스가 하나로 힘을 합친다는 것 자체가 농담이다. 캘리포니아는 가장 확실한 민주당 지지 주고 텍사스는 공화당, 특히 트럼프 지지의 중심 거점이기 때문이다(특히 이민 문제에 있어, 멕시코 접경인 텍사스가 가장 강경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 그런 두 주가 힘을 합쳐 괴물 같은 독재자 대통령에게 대항한다는 설정은, 이 영화가 특정 정파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은 감독의 입장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알렉스 갈랜드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은 여러 인터뷰에서 '이 영화 속 대통령이 트럼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물론 당연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3. 그럼 영화 시작 시점의 뉴욕은 어느 파벌의 소속인가?

지역적으로 동부 끝인 뉴욕은 당연히 충성파 지역이어야 하겠지만 영화 속 설정은 뉴욕의 특수성(UN 본부가 있는 국제 도시)을 감안한 중립 지역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수시로 정전되고 길에서 물 배급을 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영화 속에서 기자들이 머무는 호텔과 로비(기자 클럽?)는 교전지역을 다룬 할리우드 영화에서 베이루트나 사이공의 외신기자들이 머무는 호텔 같은 느낌을 준다. 아마도 그런 느낌을 주려는 것이 연출 의도였을 것이다. 여기서 서로 정보 교환도 하고 술도 마시고 하면서 속으로는 특종 경쟁을 하는 기자 집단의 아지트 같은. 

4. 뉴욕에서 워싱턴을 가는데 며칠이 걸린다고?

영화 속에서 '고속도로는 파괴되고, 교전지역을 피해 에둘러 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뉴욕에서 워싱턴에 이르는 거리는 233마일(약 375km) 정도라 대략 네 시간이면 차로 주파 가능한 거리지만, 영화 속 이동 거리는 857마일, 약 1379km 정도다. 워싱턴을 포위하고 있는 최전선을 우회해 펜실베이니아와 웨스트버지니아를 거쳐 둘러둘러 갔다는 얘기. 

서부군의 사령부가 설치되어 있다는 샬러츠빌 Charlottesville 이 워싱턴 DC 전의 최종 목적지로 되어 있는데(새미와 제시를 내려놓겠다고 리가 마음먹었던 곳), 이 샬러츠빌도 워싱턴 DC 보다 훨씬 남서쪽 아래에 있다. 

 

 

[스포일러 경고. 여기서부터는 영화를 일단 보시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물론 사람 따라 취향도 각각이라, 일단 난 다 알아도 상관없어 하는 분도 있는데, 아무튼 나라면 나머지는 영화 보고 와서 읽어볼 듯.]

 

5. 그래서 어느 쪽이 좋은 쪽인가 

영화 속에서 어느 편이 어떤 이념으로 누구를 죽이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두고 있지는 않다. 영화 속 리와 노엘의 집단도 어떤 지역에서는 군복 입은 쪽과, 어떤 지역에서는 군복 입은 쪽을 상대로 싸우는 민병대 같은 복장의 집단과 주로 소통한다. 그나마 이들에게 다행인 것은, 양쪽 집단 모두 저널리스트 혹은 프레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용적이라는 점이다. 어떤 세력이건 자신들의 대외적인 이미지 관리와 명분 쌓기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일 듯. 아울러 '후세에 물려줄 자신들의 모습'을 저널리스트들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 또한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결론은 누가 정의인지는 제작진이 구분할 의사가 없다는 쪽. 저널리스트들과 소통하는 민병대 세력이 유색인을 다소 포함하고 있고, 백악관 진입 세력을 흑인 여지휘관이 이끌고 있지만 대통령 경호실을 대표해 나온 경호원도 흑인이다. 

6. 인종차별이 영화 속 이슈인가?

노엘의 아시아인 동료들을 사살하는 백인 병사(아이러니컬하게도 커스틴 던스트의 진짜 남편인 제시 플레먼스)를 보면 인종주의는 이 전쟁의 이슈 중 하나지만, 드러난 이슈는 아닐 것 같다. 만약 이게 그렇게 부각되는 이슈였다면, 아무리 목숨 걸고 막 나가는 두 동양인 저널리스트들이라 해도, 교전지역으로 그렇게 대책없이 들어가지는 않지 않았을까. 

(혹은 그런 명시적인 경고도 무시할 정도로 미친 사람들이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그 병사가 말하는 '리얼 아메리카'는 최소한 아시아계 이민을 '미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인종주의가 전쟁의 원인이었다기 보다는, 영화 앞부분에서 린치가 자행되는 시골 주유소의 모습처럼, 헌법이 무시되고 질서와 공권력이 사라진 공간에서는 개개인의 편견과 본성, 총 든 자가 정의라는 원시적 폭력성이 무한대로 제약 없이 노출될 수 있다는 삽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7. 대통령의 죽음과 조엘의 질문이 뜻하는 것은.

연장선상에서, 하나의 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있어 관용 같은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대통령은 헌법을 무시하고 노골적으로 국민을 분열시킨 내란의 주범이며, 더 이상의 발언권을 보장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지만, 조엘은 저널리스트로서, 이 역사의 현장에서 전쟁의 한 주역인 대통령에게 마지막 코멘트를 요청한다. (사실 이들의 목적이 바로 전쟁의 막판에 몰린 대통령을 인터뷰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한 진영을 이끌던 수장 치고는 참으로 비겁한 한마디밖에 들을 수 없었다. "나 죽이지 말라고 해줘. Don't let them kill me." 그동안 온갖 수사로 강한 모습을 보였던 권력자가, 끝까지 측근들을 앞세워 목숨을 구걸하고 결국 이렇게 비루한 모습으로 최후를 맞다니.... 라는 갈랜드 감독의 조소가 담겨 있다. 

 

8. 리는 왜 그렇게 최후를 맞나.

몇 차례의 사건을 거치며 제시는 변한다. 감수성이 풍부한 나이인 만큼, 아드레날린 분비로 겁도 없어진다. 리가 보기에는 '그 일'에 완전히 중독되어 있다. 목숨도 아깝지 않다. 반면, 이런 과정을 모두 겪었을 리는 새미의 죽음을 겪은 뒤 모든 것에 염증을 느낀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가' 라는 생각에 지배되어, 워싱턴 진입 후에는 사진을 거의 찍지 못한다. 

결국 마지막 희생은 '제발 너도 나처럼 되지 마. 무감각하게 스릴에 중독되어 판단 없이 뛰어들지마' 라는 메시지를 담은 것으로 설명된다. 물론 리가 쓰러진 뒤에도 제시는 다시 카메라를 들고 총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들어간다. 리의 메시지는 전해진 것일까, 아닐까. 그건 한번에 해결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과연 저널리즘이란 뭘까. 저널리스트란 뭘까. 전쟁터에서 누구의 편도 아닌 채, 총든 사람들의 꽁무니를 따라 왔다갔다하는 것이 저널리즘의 본질인가. 네 편도 내 편도 아니라는 것이 이제 의미가 있는 시대인가. 쓰러진 리의 모습이 던지는 질문들. 

(사실 쓰러진 리는 방탄조끼같은 것을 입고 있었고, 어쩌면 살아남았을 수도 있겠다. 이 또한 분명치는 않다.)

9.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대체 뭘까.

누가 봐도 알 수 있듯,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우리는 이 꼴 날 수도 있다'는 경고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이민의 나라'에서 빗장을 걸어 잠그는 현실, 다양성에 대한 거부, 대놓고 지지세력에게 폭력을 선동하는 대통령, 과연 이런 불확실성이 문명의 파괴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이 영화가 설정에 대한 해설을 의도적으로 자제하고 있는 것도 의미가 깊다고 본다. 적의 수괴를 사살하고 만세를 부르는 서부군 병사들. 과연 이 사건 이후의 미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그 10년 뒤, 30년 뒤에 그 장면을 찍은 제시의 사진들은 어떤 의미로 해석될까. 폭군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회복한 승리의 상징으로 남을 지, 아니면 이유야 어쨌든 야만의 도래와 문명의 후퇴를 알리는 신호로 여겨질지. 

워싱턴에 진입한 서부군이 첫 시가전을 벌이는 장소가 하필 링컨 기념관이다. 링컨 기념관 기둥 뒤에 숨어 저항하는 수비대나, 거기에 화력을 퍼붓는 서부군이나. 링컨, "내가 이 꼴을 보려고 그렇게..."

 

 

 P.S. '내전'은 좀 민감했던 모양...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