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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간에 걸친 MBC TV '일요일 일요일 밤에' 1000회 특집이 막을 내렸습니다. 사실 지난 20년, 1000회에 걸쳐 국민들의 주말 시간대를 장악했던 거대한 프로그램의 역사를 짚어 보는 특집이라면 그 정도 시간은 할애할 만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아쉽다면 '일밤'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때 빠져서는 안 될 주병진, 노사연, 이문세, 이홍렬, 신동엽, 최수종 같은 이름들이 거의 거론되지 않았고, 자료 화면에서도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병진의 경우 스스로 연예인으로서 다시 TV에 등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이유로 출연을 거절했고, 신동엽의 경우 SBS에서 현재 동시간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는 이유로 '예의상' 출연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저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정작 두 차례의 특집에 출연한 사람들 중, 최근 몇년이 아니라 일밤의 20년 역사를 거론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이경규와 김용만, 이휘재, 김국진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으로 얘기하면 이 정도의 숫자는 '20년 총정리'를 말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해 보입니다. 이 부분에서 '일밤 1000회' 특집의 제작진은 어느 정도 반성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리가 허술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역시 이경규의 존재 덕분이었습니다.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 대중문화에서 이경규와 '일밤'이 지금까지 남긴 족적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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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일밤'에 가장 많이 출연한 인물이라서가 아닙니다. 이경규는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두 가지 장르의 막을 열었습니다. 하나는 그 자체가 장르의 이름이 된 '몰래카메라'고, 또 하나는 '이경규가 간다'로 대변되는 국민 계도성 오락 프로그램 입니다.

90년대 후반까지 누가 뭐래도 MBC 예능은 경쟁 방송사들을 압도했습니다. 그 시기를 지킨 수많은 예능 PD들은 두 가지 흐름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송창의(현 tvN 사장)-은경표(현 워크원더스, DY 사장)로 대변되는 '재미 지상주의' 세력과 주철환(현 OBS 사장)-김영희(현 PD연합회장)로 대표되는 '교양주의(혹은 당의정파)' 세력입니다. 일단 오락 프로그램은 재미가 있어야 하며 그 재미가 바로 사회에 봉사하는 길이라는 것이 전자의 입장, 그리고 재미가 있는 가운데서도 보고 나면 뭔가 생각할 거리나 느낄 거리를 줘야 한다는 것이 후자의 입장입니다.

이중 후자의 결정판이 바로 '이경규가 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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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부터 '뭐든지 할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만큼 '이경규가 간다'의 정체는 매우 불분명했습니다. 그러던 1996년 어느날, '이경규가 간다'는 이른바 '양심냉장고 프로젝트'를 시작했죠. 우리 사회의 숨은 양심을 찾겠다는 취지에서 전 국민을 몰래카메라의 대상으로 삼은 겁니다. 포상을 의식하지 않고 대의를 지키는 사람들을 찾아 국민의 영웅으로 삼겠다는 이 프로그램의 취지는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했습니다.

지금도 몇몇 주인공들 - 심야 정지선을 지킨 장애인 운전자, 한밤에도 자동차 전용도로 제한속도를 지킨 중소기업체 사장, 복잡한 지하철의 높은 계단 앞에서 무거운 보퉁이를 든 할머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장병 등은 여전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경규가 간다'는 그동안 재미만 있으면 자기 몫을 다 했다고 여겨지던 오락 프로그램들도 공익적인 목표를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나갔습니다.

이후 '이경규가 간다'와 같은 뿌리의 오락 프로그램들은 MBC만이 가진 독보적 무기로 톡톡한 공을 세웠습니다. 신동엽의 '러브하우스'나 아예 다른 프로그램으로 출범한 '느낌표'를 비롯해 수많은 코너와 프로그램들이 산타클로스 역할을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습니다. 감동과 재미라는, 종래에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두 마리 토끼를 한 울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죠. '이경규가 간다'는 또 세 차례의 월드컵에서 보였듯 스포츠가 주는 감동을 오락 프로그램에 이식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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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정상에서의 나날이 길다 보니 이경규 역시 잘 된 프로그램도, 실패한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너구리 사건으로 대국민 사과를 한 적도 있었죠. 주병진이나 이홍렬, 신동엽처럼 당대 최고의 순발력을 자랑하는 천재형 MC들과 나란히 섰을 때에는 재능이 부족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예능 MC의 가능성을 지금처럼 확대했고, 10년 이상 예능 프로그램의 패러다임을 이끌었다는 꾸준함과 공로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수많은 '진짜 왕'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무시당해 '일밤 1000회 특집'이 내세운 '왕들의 귀환'이라는 제목이 낯간지럽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래도 이경규가 있어 볼만했습니다. 공약대로 '일밤 2000회 특집'에서도 이경규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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