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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사인에 이어 마이클 잭슨의 딸 패리스의 생부가 자기라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그것도 왕년의 '멜로디' '올리버'의 아역 스타 출신 배우 마크 레스터라는군요('코만도'의 감독인 마크 레스터와는 동명이인). 사후 한달이 넘었지만 잭슨과 관련된 화제는 끊일 날이 없어 보입니다.

저도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이야기를 빨리 정리해야 할텐데 막상 쓰기 시작하면 또 얘깃거리가 새록새록 살아나서 어느새 분량이 길어지곤 합니다. 아무튼 기왕 시작한 거니 끝을 보겠습니다.

사실 기자 생활을 10여년 하면서 참 신기한 일을 많이 봐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느낀 것 중의 하나는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는 식의 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마지막으로 "그게 사실이면 내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고 말한 날은 마이클 잭슨 내한공연이 끝나고 1년이 지난 1997년 11월18일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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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8일 오전의 일입니다. 마감을 마치고 점심 약속차 회사를 벗어났는데 당시 친하게 지내던 김 아무개 작가님(지금은 원로급 작가가 되셨죠)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대뜸 "마이클 잭슨이 지금 한국에 와 있다더라"는 거였습니다.

에이 아무리... 하는 생각이 먼저 스쳤습니다. 마이클 잭슨 쯤 되는 사람이 그렇게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리도 만무하고, 우리 나라가 그렇게 마이클 잭슨 같은 인물이 조용히 들어올 수 있을 정도로 허술하거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그런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된 시절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마이클 잭슨이 들어왔으면 지금 온 나라가 난리가 났을텐데 이렇게 조용하다는게 말이 되냐"고 오히려 훈계조(?)의 말을 늘어놨습니다. 마무리는 "지금 잭슨이 서울에 있다면 내가 손바닥에 당장 장을 지지겠다"는 걸로 끝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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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뭔가 찜찜하긴 했는지 회사로 정보보고를 했습니다. 이런 소문이 돈다는 정도였죠. 하지만 회사 안의 반응도 냉담했습니다. "너 할일 되게 없구나"라는 식이었죠. 그런데 오후, 회사에서 긴급 호출이 왔습니다. "알고 보니 정말 왔다"는 거였습니다. 마이클 잭슨이 무주 리조트에 갑자기 떠서 난리가 났답니다.

그때부터 호떡집에 불난 듯 여기저기 확인에 들어갔지만 사실 한국에서 마이클 잭슨의 행적에 대해 취재를 한대봐야 찔러 볼 곳이 뻔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잭슨의 음반 발매사인 소니뮤직으로 문의가 빗발쳤지만 이쪽에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 없다. 연락받은 것 없다"는 멘트만 나올 뿐이었습니다. 확인된 것은 무주 리조트에서 만날 사람이 유종근 당시 전북지사라는 것 정도였죠. 이 경로를 통해 흘러나온 내용은 "리조트 산업에 관심이 많은 잭슨이 무주 리조트에 거액을 투자해 세계적인 관광단지를 개발하려 한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너무 허점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잭슨이 해외의 리조트 산업에 투자를 했다는 얘기는 아무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리조트를 개발한다면 그게 왜 한국이어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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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오후, 국내 최고의 팝 전문가였던 당시 데스크께서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해냈습니다. 잭슨의 이번 극비 방한은 마이클 잭슨의 숙원인 평양 공연을 이루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다는 겁니다. 충격적인 얘기였죠.

마이클 잭슨의 야망이 세계의 모든 폐쇄적인 나라에 발자국을 찍는 것이라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나온 얘기지만, 1994년 6월 북한의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특사로 삼아 평양에서 김일성과 협상을 벌이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카터가 가져간 카드 중 하나가 마이클 잭슨의 평양 공연이었다는군요.

이야기가 제대로 진전됐다면 잭슨은 서울 공연보다 평양 공연을 먼저 치렀을 지도 모릅니다(그랬다면 상당한 망신이었겠죠. 북한보다 더 폐쇄적이고 장애물이 많은 나라 취급을 받았을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김일성-카터 회담이 있은지 한달만인 7월, 김일성은 갑작스레 사망합니다. 설혹 이때 잭슨의 공연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다 하더라도 그런걸 이행할 정신은 누구도 없었을 겁니다. 만약 김일성이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뭐 역사에서 가정이란 별 의미가 없겠죠. 다행히 1996년 서울에서 마이클 잭슨의 공연이 열렸고, 이로써 북한에 추월될 가능성은 없어졌습니다.

아무튼 그런 사연 속에서 1997년 내한한 잭슨은 1안으로 평양 공연, 이것이 여의치 않으면 판문점이나 비무장 지대 공연을 염두에 두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내한했다는 것이 새로운 정보의 내용이었습니다. 잭슨 혼자 벌이는 공연이 아니라 그와 친한 세계적인 스타들이 함께 할 것이고, 그 수익금으로 북한 어린이 돕기 운동을 벌인다는 명분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공연장으로 불러낸다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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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내용을 대서특필했는데, 취재는 데스크가 거의 다 하셨지만 관례상 이름은 제 이름으로 나갔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극비 방한, 진짜 목적은 평양 공연 추진'이라는 화끈한 기사였죠.

그런데 특종이란게 사실 너무 앞서가도 못쓰는 법입니다. 제 이름으로 나간 기사 빼고는 온 사방의 모든 기사가 '마이클 잭슨, 무주 리조트 투자차 방한'이었으니 말입니다. 더구나 경쟁사들이 따라오고 싶어도 도대체 기사를 확인할 곳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잭슨은 21일 서울로 올라와 그해 연말 있을 대선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을 만납니다. 그리고 잭슨이 한국을 떠난 뒤 마침내 26일, 공식 발표가 있었습니다. 잭슨이 판문점에서 세계적인 스타들과 함께 북한 어린이 돕기 공연을 펼칠 것이라는 내용이었죠. 이로써 특종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게 확인됐지만 마음 속으론 '평양에선 결국 공연이 열리지 않는구나'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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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2월, 잭슨은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서울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도 자주 오다 보니 잭슨이 오는 것도 이제는 그냥 늘 있는 일처럼 여겨지더군요^^. 이때 방한한 잭슨은 무주 리조트에 대한 투자 양해각서(MOU)를 작성하고 1억달러인가 하는 거금을 투자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또 최원석 당시 동아그룹 회장의 자택을 방문해 150만평에 달하는 인천 매립지에 대한 개발 계획을 논의했다는 보도도 있었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돈 얘기는 그냥 이렇게 나왔다 사라졌습니다. 잭슨은 한국 땅에 단 한푼도 투자한 적이 없습니다. 대신 마이클 잭슨을 통해 한국과 인연을 맺은 알 왈리드 왕자 같은 갑부들이 몇몇 한국 기업에 투자를 했습니다.

하지만 98년으로 예정됐던 문제의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공연은 연기에 연기를 거듭했습니다. 아마도 잭슨의 개인 사정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듯 합니다. 그러는 사이 잭슨과 한국의 인연을 만든 최규선씨도 이 공연과 관련된 사기 혐의로 궁지에 몰리고, 잭슨의 공연은 다시 한국에서 열릴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1999년, 국내 최대의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이 참여하면서 꺼져가던 불씨는 확 되살아납니다. 이것이 많은 분들이 기억하시는, 한국 땅에서 열린 '팝의 제왕'의 마지막 무대였습니다. 바로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의 공연이죠. 여기까지 정리를 해야 이 글이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p.s. 최근 클린턴 전 대통령이 대북 특사로 파견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태라는 뉴스를 보면서 그야말로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그리고... 여러분도 어떤 경우에든 '손바닥에 장을 지진다'는 말은 함부로 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내용의 앞의 사연들이 궁금하신 분들은 다음 포스팅을 참고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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