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건을 계기로 오래된 이슈들 - 왜 성범죄자에 대한 양형이 이렇게 솜방망이냐(사실은 우리나라 형법의 양형은 전체적으로 솜방망이입니다. 엄격한 것은 속도위반과 주차위반 단속 등 교통관련 법규 뿐입니다), 성범죄에 대한 대책은 뭐냐, 왜 성범죄자의 신원 공개는 이렇게 실효성이 없게 해 놓은 거냐...등등 - 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다시 거론되고 있습니다.
거론되고 있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또 이렇게 한창 이 이슈가 뜨거운 동안만 분개하다가 다들 잊어버리고 만다는 겁니다. 많은 관련 법규가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데, 미국의 경우도 모든 관련 규정이 한꺼번에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특히 성범죄 피해자의 가족들이) 노력한 결과로 정비가 이뤄진 것입니다.
예전에 한번 미국은 어떻게 성범죄자의 신원을 공개하기에 이르렀는지를 조금 조사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입니다.
미국 법무성에 연결된 NSOPR(www.nsopr.gov) 홈페이지입니다. 성범죄 전력을 가진 사람의 얼굴 사진, 풀 네임, 마지막 주소, 신장과 신체 특징, 심지어 문신을 했으면 문신의 종류와 내용, 별명까지 명시해두고 있습니다. (주요 부분은 제가 지운 겁니다.)
한국보다는 평소 사람들의 인권을 훨씬 중시한다고 알려진 나라가 미국이지만, 성범죄자, 특히 미성년을 상대로 한 성범죄자의 신원 공개는 한국보다 훨씬 철저합니다. 그럼 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요. 거저 된 건 아니더군요.
웹 검색을 통해 알아보니 이 과정에서도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Violent sex attacks lead to tough laws' 라는 제목으로 Lauren FitzPatrick이 정리한 내용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캘리포니아주는 1944년부터 성범죄자들을 추적하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관심이 인 것은 1980년대 이후의 일입니다.
미국 워싱턴주는 1990년 '지역사회 보호법(Community Protection Act)'을 통과시킵니다. 사실 그 배경에는 1989년 일어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정신장애를 앓고 있는 한 남자가 7세 소년을 성폭행하고 숲속에 버려 두어 죽게 만든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2년간 옥살이를 한 뒤 출감하자마자 2명의 10대 소녀들을 납치해 폭행합니다.
그리고 나서 또 다른 사건들. 13년간의 수감생활끝에 출감한 남자가 두 여자를 습격했고, 또 다른 범인은 극장에서 6세 소년을 납치하려다 붙잡혔는데, 나중에 공원에서 자전거 타던 소년 두명과 4세 소년을 납치해 살해한 사실을 자백했습니다. 경찰은 그제서야 성범죄 전과자를 석방할 때에는 지역사회에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거죠.
그리고 1994년 제이콥 웨터링 법이 등장합니다.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 조셉에 살던 11세의 제이콥 웨터링 은 1989년 10월 집에서 복면을 하고 총을 든 남자에게 납치됐습니다. 이웃들은 물론 안면 없는 사람들도 연대해서 실종 아동 수색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죠. 웨터링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미네소타에서 '제이콥 웨터링 법'을 만들게 합니다.
1996년, 메건 캉카 의 유괴 사건 이후 미국 연방법에 등장한 '메건 법'은 지역사회에서 성범죄 전력자가 이주했을 경우 주민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내용을 담게 됩니다.
뉴저지주 해밀턴 타운십에 살던 일곱살의 메건 캉카는 강아지를 주겠다고 유혹한 동네 주민의 집으로 따라갑니다. 그리고 이 주민, 두 차례 성범죄로 유죄판결을 받은 남자 제시 티멘데쿠아 는 메건을 성폭행하고 살해합니다. 그의 집은 캉카 가족과 같은 블록에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1994년에만도 이미 5세 남아와 7세 남아를 습격한 전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범인은 사형 판결을 받았지만 집행되지 않았고, 2007년 뉴저지 주가 사형을 폐지함에 따라 종신 복역중입니다.
사건 이후 메건 캉카의 부모들은 "모든 부모는 위험한 성적 육식동물이 이웃에 이주할 경우 그 사실을 알 권리가 있다"는 운동을 펼쳤고, 이들은 40만명의 서명을 받습니다. 법안은 89일만에 통과됐죠. 뉴저지주는 주 법규로 이 메건법을 통과시켰고, 1996년에는 클린턴 대통령도 이 법안에 사인을 합니다.
어린이들만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건 아니죠. 휴스턴의 부동산업자였던 팸 리크너 는 집 구경을 하고 싶다는 남자의 연락을 받고 빈 집으로 갑니다. 하지만 두 차례 처벌을 받은 적 있던 이 남자는 그녀를 덮쳤고, 리크너는 근처에 있던 남편의 도움을 목숨을 건집니다. 리크너는 이후 성범죄 관련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하라는 운동에 나섭니다.
플로리다주의 제시카 런스포드 법은 12세 이하의 아동에게 외설적인 행위를 한 것으로 판정된 성인에게는 최하 25년의 형량과 종신 전자 모니터링(전자 팔찌등을 이용한)을 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아동에 대한 성적 폭행과 강간은 사형이나 감형 없는 종신형을 선고할 수 있도록 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후 12개 주가 이와 유사한 법안을 도입했습니다.
2005년 2월, 당시 9세였던 제시카 런스포드는 한 차례 유죄판결을 받은 적 있는 범죄자에 의해 집에서 유괴됐고, 이후 성폭행을 당한 뒤 암매장됐습니다. 부검 결과, 런스포드는 매장당할 당시 살아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2006년 아담 월쉬 법에 의해 미국 법무부는 50개 주정부에 네트웍을 설치해 전국적인 성범죄 전력자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게 됐습니다. 이 법에 따라 모든 성 범죄자들의 정보는 2009년까지 표준화되어 일반인들에게 노출되게 됐습니다.
아담 월쉬는 1981년 플로리다주의 한 백화점에서 비디오 게임을 하던 도중 실종됐고 몇주 뒤 살해된 채 머리만이 발견됐습니다. 이미 유죄 판결이 난 연쇄 살인범이 그 범행도 자신의 것이라고 자백했지만, 얼마 뒤 주장을 철회하는 일도 있었죠.
2003년 11월, 당시 22세의 여대생 드루 조딘 은 미국 노스 다코타 주의 쇼핑몰 주차장에서 일하던 도중 미네소타주 크룩스턴으로 납치됩니다. 강간당한 뒤 사지가 잘린 조딘의 시체는 눈이 녹은 이듬해 4월에야 발견되죠. 이미 각종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50세의 전력 있는 범인은 차에서 조딘의 혈흔이 발견돼 체포됩니다. 그는 2006년 9월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조딘이 죽은 뒤 사람들은 NSOPR(National Sex Offender Public Website:www.nsopr.gov)이라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전국 어디에서도 성범죄 전력자의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법률 전문가도 아니고 해서 중간에 이상한 부분이 있을 지도 모르지만, 대의는 충분히 전달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성범죄자의 신원 공개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이중 처벌이다, 법 정신에 위배된다, 범죄자 자신은 몰라도 그 가족까지 희생자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가 저렇게 엄격하게 범죄자의 신원 공개를 통해 재발을 막도록 하게 된 것은 희생자가 나왔을 때 그 가족과 관계자들이 두번째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한 결과입니다. 특히 희생자의 부모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해 그 이후의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됐죠.
물론 미성년자 성범죄의 많은 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일어난다는(미국의 경우 90%에 이른다고 합니다) 통계에 비쳐 볼 때 저런 신원공개가 큰 효력이 없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불과 몇명이더라도, 저런 공개가 어린이들을 구해낼 수 있다면 그건 효율성으로 따질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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