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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격' 팀이 지리산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더군요. 20여년 전에 딱 한번 가본게 전부지만, 지금도 지리산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장엄한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제가 학생이던 시절만 해도 '지리산 종주'는 남자들의 로망이었습니다. 특히나 화엄사에서 시작해 천왕봉에 오른 뒤 중산리로 내려오는 '정통 코스'를 뛰어 봐야 진정한 지리산을 경험했다고 할 수 있다는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언제고 나도 한번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방송에서처럼 겨울은 아니었지만, 종주를 해 봤습니다.

그런데 '남자의 자격'팀이 새해 첫 사업(?)으로 지리산 종주를 선언하기에 내심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사실 말이 좋아 지리산 종주지 40대의 체력으로는 꾸준히 준비를 해 온 분들이 아니라면 꽤 무리인 코스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최근 '남자의 자격' 팀에서 비주얼을 담당하고 있는 비덩 이정진을 만나 그 뒷얘기를 들어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물론 인터뷰를 하거나 한 건 아니고 편한 자리에서 나온 얘기지만, 아무튼 지리산에 관련된 몇가지 이야기만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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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남자의 자격'팀은 화엄사에서부터 걸어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에서는 기후가 큰 몫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당초 제작진이나 출연진이 생각했던 것과 상당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지리산에 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지리산 종주를 시도할 때에는 어느 쪽부터 올라가건 본래 첫날이 가장 난코스에 해당합니다. (물론 저도 지리산 전문가는 절대 아니고, 20여년 전 종주를 한번 해본 것이 전부입니다. 제가 모르는 편하게 오르는 코스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번 방송에서도 소개됐던 화엄사-노고단-세석-천왕봉-중산리 코스를 기준으로 말씀드립니다.) 일단 첫날을 고생하고 그 다음날부터는 비교적 평온한 코스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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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화엄사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길은 현지인들이 '코재'라고 부르는 난코스 중의 난코스입니다. 길 이름이 '코재'인 이유는 바로 걸어 올라가면 바로 앞 땅에 코가 닿을 지경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 정도로 경사가 가파른 길입니다. 체력이 좋은 사람도 세시간은 걸어야 노고단에 이르는 길인데, 그렇게 내내 경사로를 오르다 보면 녹초가 되기 십상입니다. (더구나 눈길이니 8시간도 무리는 아니겠죠.)

그런데 90년대 이후에는 '종주'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종주가 아닌 사람들의 경험담이 대다수였습니다. 왜냐하면 노고단이 관광지로 개척되면서 도로가 정비된 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화엄사가 아닌 노고단에서 차를 내려 '종주'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힘든 코스인 코재는 생략하게 되는 것이죠. 그 전에 지리산에 오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코재도 오르지 않고 무슨 종주냐'고 항변하지만, 어쨌든 세상이 좋아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이런 상황에 맞춰 당초 '남자의 자격' 팀도 노고단에서 행보를 시작하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폭설로 상황이 바뀌어버린 것이죠. 평지에서 노고단에 오르는 도로가 막혀 버렸고, 결국 '남자의 자격'팀은 예정에도 없던 코재를 걸어서 올라가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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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코재가 만만치 않았을텐데"하자 이정진은 대뜸 "아, 코재를 아시는군요"하고 반가움을 표시했습니다. (사실 90년대 이후에 지리산에 간 사람들 중에는 앞서 말한 이유로 아예 코재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상당수더군요. 그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방송에서 보듯 중산리로 간 윤형빈과 김국진을 제외한 나머지 구성원들은 화엄사에서 노고단으로 고행에 도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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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마니아답게 이정진은 장비부터 다른 멤버들과 달랐습니다. 아이젠을 비롯한 동절기 장비는 물론이고 하체용 방습방한복까지 모두 자기 것을 사용했다는군요. 겨울 산행에 필수인 보온병을 보유한 사람도 이정진 하나 뿐이었다고 합니다. (방송을 보면 거의 전원에게 물이 얼어서 마실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위 자막에서도 보듯 거의 모든 보급품을 다 갖고 있는 바람에 전 대원의 보급창 구실을 하죠.)

그러다 보니 당시 배낭 무게는 30kg. 기본 짐에다 일행이 먹을 쌀을 모두 짊어지는 바람에 무게가 대폭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후미에서 자칫 포기할 멤버들을 독려하는 책임을 졌습니다.

산에 가면 '초보자나 체력이 약한 사람일수록 앞에 세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숙련자들은 누가 재촉하지 않아도 점점 빨라지게 되어 있는데 초보자가 뒤에 있으면 점점 거리가 벌어지게 되고, 자칫 등정을 포기할 수 있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차라리 초보자를 앞에 세우고, 뒤에서 숙련자들이 뒤를 쫓듯 올라가면 초보자의 페이스를 기준으로 속도가 조절되기 때문에 낙오자가 생기는 일은 막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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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속설대로 '남자의 자격'팀은 이윤석의 바로 뒤에 이정진을 배치했고, 예상대로 힘들어하는 이윤석은 이정진의 독려로 무사히 노고단에 오르게 됩니다. 이정진의 소감은 이랬습니다.

"사실 노고단 대피소에 올라갔는데 다리는 괜찮았지만 오른 팔이 아팠다. 윤석이형을 뒤에서 밀고 올라가야 했기 때문이다. 오른팔을 거의 들고 있다시피 하고, 팔뚝으로 등을 밀면서 올라갔다(웃음). 나중엔 부축해서 올라가야 했다. 아무튼 전원이 다 올라가서 정말 다행이다." (아마도 직접 들어보진 못했지만, 김태원을 뒤에서 밀고 올라간 김성민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겁니다.)

악천후로 인한 조건의 악화로 결국 노고단 팀은 천왕봉에 가지 못했습니다. 대신 상대적으로 상태가 양호한 이정진 이경규가 비교적 가까운 반야봉에 오르는 걸로 등정을 마무리하려 했지만 그것도 조건 때문에 여의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정진은 "노고단 대피소까지 가 보니 체력이 남은 사람이 나와 (이)경규형밖에 없는 것 같았다. 더 가고 싶었고, 갈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경규형이 몰래 말리더라(웃음). 날씨만 좋았어도 더 갈 수 있었을텐데 안타깝다"고 하더군요. 결국 천왕봉 일출은 엄홍길 대장과 함께 간 윤형빈, 김국진 조의 몫이 됐습니다.

"재미있게 말을 하지 못해서" 화면에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지만^^ 아무튼 이정진도 비주얼만 담당하고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네. 리얼 버라이어티는 정말 날로 먹을 수 없는 것이더군요.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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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들에게는 요즘 방송되고 있는 '남자의 자격'이 '산에 눈 온 그림만 나오는 지루한 프로그램'일 수도 있었겠지만, 겨울 산에서 눈꽃을 보신 분들이라면 한번쯤 다시 옛날 생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셨을 겁니다.

비록 지금은 산에 한번 올라가려면 무릎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가 됐지만 언제고 다시 눈 녹은 물로 분유를 끓여 먹고 비료푸대로 봅슬레이를 하던 겨울 설악산의 기억을 되살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불쑥 고개를 드는 지리산 등정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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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아직도 어두워진 다음에 도착한 세석평전의 그 많던 텐트 불빛들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과연 그런 광경을 다시 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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