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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장희빈' 드라마의 클라이막스는 최무수리(숙빈 최씨, 즉 동이)의 임신을 안 장희빈이 최무수리를 잡아 고문하고, 뒤늦게 정신차린 숙종이 달려와 최무수리를 구하고, 왕의 간호로 정신을 차린 최무수리는 "마마, 중전마마를 다시 모셔와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이렇게 해서 장왕후는 강등당하는 신세...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주인공이 장희빈도 아니고, 인현왕후도 아니고, 최무수리인 드라마가 나오게 됐습니다. 바로 MBC TV '동이'죠. 사실 최무수리에 대해 알고 있던 거라곤 성이 최씨고, 천민이었고, 신분이 낮아서 그에게서 태어난 아들인 영조는 왕이 되어서도 심한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드라마 '동이'를 보면서 숙빈 최씨에 대해 알아 보니 몇가지 흥미로운 점이 눈에 띄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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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동이'에서 동이는 한양, 혹은 그 부근에 사는 오작(검시관으로 당시에는 천민)의 딸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오작이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이름이 최효원이라는 것은 남아 있습니다.

숙빈 최씨의 일생에 대한 기록 가운데 가장 확실한 것은 아무래도 묘지의 기록이겠죠. 숙빈 최씨의 묘소인 소령원에는 숙빈최씨신도비가 서 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숙빈 최씨는 수양 최씨로서 증조는 말정으로 통정대부였다. 할아버지인 태일은 벼슬하지 않은 유생이었고, 아버지는 효원으로 충무위부사과를 지냈다. 어머니는 홍씨로 통정대부 계남의 따님이고, 현종 경술년(현종 11, 1670년) 11월 을미일에 빈을 낳으셨다. 병진년(숙종 2, 1676년)에 선발되어 궁으로 들어가니 겨우 7세였다. 숙종대왕 19년 계유년(숙종 19, 1693년)에 처음 숙원이 되었고, 갑술년(숙종 20, 1694년) 숙의로 승진되었으며 을해년(숙종 21, 1695년)에 귀인으로 승계했다가, 4년 뒤에 숙빈으로 봉해졌으니, 나인으로서는 가장 높은 품계이다.

빈은 타고나신 자질이 침착하고 진득하며 과묵하여 기쁨이나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두 내전을 모시되,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장엄하고 공경하며 삼가고 조심함으로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로 하였다. 모든 비빈이나 궁인을 접할 때 공손하고 온화하여 모두 그 환심을 샀고, 임금께서도 마음속으로 애중히 여겼다. 인현왕후와 혜순, 자경 두 대비도 역시 특별한 대우를 했으나, 빈은 더욱 겸손하고 두려워하였다. 더욱 남의 장단점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아, 옆에서 모시는 자들이 어쩌다 이런 일이 있으면 곧 꾸짖었으니 한 궁 안이 한결같이 칭찬하였다. 빈의 형제 중에 군문에 예속되었던 이들이 빈이 숙빈으로 봉해진 뒤로 그 직위를 사퇴하였으니, 빈이 삼가 조심하는 마음에서 실로 그렇게 시켰던 것이다.

사실 이 기록만 봐서는 최씨가 천민이었다고 보기 힘듭니다. 오히려 무관을 지낸 양반의 자손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건 자신의 어머니의 신분을 세탁하려는 영조의 뜻을 충분히 감안한 일종의 조작이었을 가능성이 크죠. 심지어 영조 초기에 발발한 이인좌의 난 때애는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천민 출신인 숙빈 최씨가 김춘택과 밀통하여 낳은 아들"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반면 "빈의 형제 중에 군문에 예속되었던 이들이 빈이 숙빈으로 봉해진 뒤로 그 직위를 사퇴하였으니, 빈이 삼가 조심하는 마음에서 실로 그렇게 시켰던 것이다(嬪同氣之籍軍門者自 嬪封爵辭?其任 嬪謹愼之心實使之然也)"라는 대목을 봐서는 천애 고아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도 듭니다. 굳이 없는 형제까지 지어냈다고 하면 모르겠지만, 왠지 부모와 형제는 제대로 있었기 때문에 이런 서술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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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비문을 '정설'이라고 하자면, 이 비문의 내용과 상충되는 이설이 있습니다. 바로 정읍 지방에 내려오는 숙빈 최씨와 관계된 전설입니다. 정읍 부근 태인에는 오래 전 대각교라는 다리가 있었고, 이 다리에서 운명적인 만남아 있었다는 이야기가 1936년 편찬된 '정읍군지'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이 정읍 길을 지날 때 대각교 위에서 옷차림이 초라한 소녀 하나를 마주칩니다. 하지만 소녀의 용모가 비상한 것을 본 민유중이 처지를 묻고, 소녀가 조실부모하여 오갈데없는 신세라고 하자 민유중이 이를 거두어 길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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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이 소녀 동이는 민유중의 딸과 함께 자라난 하녀가 되고, 나중에 이 딸이 인현왕후가 되어 궁으로 들어갈 때 따라가서 궁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록에 따라 정읍시는 얼마 전 이 대각교 다리가 있던 자리에 '만남의 광장'이라는 유적(?)까지 조성해 놓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궁에서 나인 최씨(동이)가 인현왕후의 복권을 위해 천지신명에게 기도하다가 왕의 눈에 들어 성총을 받았다"는 이야기의 근거가 될만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동이가 1676년, 만 6세의 나이로 궁에 들어왔다는 기존의 기록과는 완전히 대치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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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드라마 내용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지만 정읍시 측은 '동이' 방송에 맞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선 듯 합니다. 찾아 보시면 여기저기에 '동이의 고향'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입니다.

동이는 서울 부근에서 태어났을까요, 아니면 정읍 태인 부근 출신일까요. 또 동이는 천민 출신의 무수리였을까요, 아니면 그냥 인현왕후를 따라 궁에 들어온 하녀 출신 궁녀였을까요. 세월이 세월인지라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렇게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는 것이 사극의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지나치게 전후 인과관계를 해치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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