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화제가 될 만큼 된 2010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제리'를 읽었습니다.
김혜나의 '제리'는 알려진대로 소위 '루저'라고 불리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그린 작품입니다. 굳이 88만원 세대라는, 이제는 진부할대로 진부해진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그들의 절망과 고민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합니다.
진학 대상인 고3보다 전국의 대학급 학교 정원이 더 많아진 세상, 그리고 고용 없는 성장이라는 분위기가 점점 더 일자리를 빼앗고 있는 세상은 반드시 뒤처지는 사람을 낳기 마련입니다. 물론 흔히 말하는 취업난의 현장에 좀 더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늘 신문에 보도되는 것과는 다른 측면도 있다고 말하긴 합니다.
한 지인의 말에 따르면 "현재 강조되고 있는 취업난이란 과장된 부분이 많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자리가 없느냐 하면 그건 결코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취업 희망자의 절대 다수가 대기업이나 은행 등 '초봉 3000만원 이상' 직종에 연연하거나 공무원, 공사처럼 안정된 자리를 원하기 때문에 경쟁에 비해 일자리가 없다는 면이 너무 지나치게 부각되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현재 취업 실패로 좌절과 혼란을 겪고 있는 연령층이 좀 넓은 시야에서 냉정하게 판단하면 일자리는 어디에든 있다는 주장입니다.
뭐 이런 주장에 공감하실 분도, 그렇지 않은 분도 있겠지만 어쨌든 현재의 상황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좌절감을 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분명히 세상에는 대학이나 대기업 취업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까지 '학번'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사용되는 것은 분명 그쪽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들을 멀리 밀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김혜나 작가는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대학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 정말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거든요. 저처럼 스무 살에 대학 진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쨌거나 이 사회 안에서 다양한 일들을 하게 마련이니까요. 클럽이나 바는 물론 백화점, 레스토랑, 호프집, 노래방, 단란주점, 그리고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연극이나 미술, 음악, 미용, 제빵, 정비 등을 배우려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모두 다 저와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죠.
'제리'의 주인공 '나'는 수도권의 2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긴 하지만 학교 수업이며 장래에 대해선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없는 여학생입니다. 그런 '나'가 어느날 친구들과 함께 간 노래바(노래방+호스트바의 성격인 듯 합니다. 시간당 3만원을 내면 호스트 개념의 놀이 상대 남자를 부를 수 있는 곳입니다)에서 제리라는 이름의 스무살 안팎 청년을 만납니다. 그 '나'와 제리의 아주 짧은 만남에 대한 기록이 이 소설입니다.
이 책을 추천한 한 지인은 "세상에서 1등만 했던 사람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책"이라고도 했습니다. 솔직히 읽다 보면 답답한 구석은 너무 많습니다. 특히 '어른'의 눈으로 볼 때 그렇습니다. 스스로는 단 한푼 벌 능력도 없으면서 용돈으로 날마다 술자리를 벌여 놓고 있는게 너무도 자연스러운 아이들, 남자와 자는 이유도 '그저 새벽 길에 혼자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라는 아이들, 심지어 20대 초반 나이에 술자리 상대를 돈으로 사는 아이들과 스스로를 누군가의 술자리 노리개로 내놓는 아이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너희들은 무슨 생각으로 살고 있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릅니다.
게다가 이 소설에는 '어른'이란 존재는 소거되어 있습니다. '나'의 엄마가 설정되어 있긴 하지만 '나'와 엄마에게는 대화나 소통이란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마주치면 불편한 사이일 뿐입니다. 유일하게 의미있게 등장하는 어른은 '나'와 남자친구 강이 자주 가는 모텔 주인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하는 일은 주인공들이 뭘 하건 관심을 갖지 않고 돈을 받아 챙겨 방 열쇠를 내주는 것 뿐입니다. (네. 이 부분에서 작가가 보는 어른들이란 '입만 열면 늘 혀를 차지만 돈벌이 대상이기만 하면 도덕이고 뭐고 아무 관심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에만 얽매여 있으면 이 책이 그려내고 있는 세상을 제대로 보기 힘듭니다. 영상에 비유하자면 이 책의 시선은 거의 지면에 붙어 있습니다. 누구나 겪어봤을 법한 청춘의 불안과 고민, 가족보다 친구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묘한 공허감, 그리고 그런 공허를 채울 만한 대상을 찾지 못할 수록 더욱 깊어가는 고민이라는 악순환이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한심한' 주인공 '나'와 마찬가지로 한심한 호스트 제리는 그 절망의 끝에서 만나지만 그걸로 끝나지는 않는다는데서 이 소설이 그런 '바닥의 젊음'에 대해 갖고 있는 애정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소설을 다 읽은 다음 첫번째 소감은 '아니, 시작하려니까 바로 끝이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만치 한 호흡에 다 읽을 수 있는 소설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이 소설은 주인공들의 먼 장래에 대한 답을 주지 않고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소설이 커버하는 시간은 끽해야 몇달 정도. 그리고 이 한편 소설 속에서 주인공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습니다. 혹자의 표현을 빌면 '간신히 한 계단 올라서는' 정도라고도 하죠.
아무튼 이 책을 읽기 위해 '88만원 세대를 이해한다'는 거창한 명분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누구든 책 내용 속에서 언젠가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있고, 그들의 운명에 가슴 졸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 솜씨가 훌륭합니다.
여러 서평은 이 책의 '노골적이고 드라이한 성묘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깜짝 놀랄 정도라거나 흥분되는 대목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그런 걸 원하시는 분들은 아오이 소라에게 가시는게 낫겠죠^^). 물론 그렇다고 어린이/청소년 용 추천도서는 아닙니다.
문득 '제리'를 읽고 나면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키즈 리턴'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이 마지막에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어"라는 이야기를 나누듯, 지지리도 못나고 답답하고 한심한 청춘에게도 빛이 깃드는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이 휴가용 서적 추천 1호가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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