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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실제로 이랬을 리는 절대 없을]

 

"은. 시간이 별로 없어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네. 통역 필요 없지? 지금부터 잘 듣게."

방에 들어서자마자 D는 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뭐라는 거야, 대꾸할 새도 없이 D는 통역을 한쪽 구석 화장실로 몰아넣고 문을 잠갔다. 방 한켠의 디지털 타이머에서 시간이 조금씩 깎여 나가고 있었다. 43:36, 43:35, 43:34...

방에 들어온지 2분도 지나지 않아 이 키 큰 백인 남자와 단 둘만 남게 되고 보니 위산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게 느껴졌다. 은은 콜라를 마시고 싶었다.

"은. 퀴즈를 하나 내겠네. 자네는 내가 왜 대통령이 됐다고 생각하나?"

뭐지? 이건 누구나 다 아는 거 아닌가?

"젊은 시절부터 꿈이 대통령 아니었습니까?"

"낫 배드 앤써.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야. 그렇게 얘기하면 대통령 되는게 내 인생의 얼티밋 골 처럼 들리잖아. 그런 사람이 꽤 많겠지만 나는 아니야."

이렇게 질문의 여지를 남기고 대화를 주도하는 스타일은 싫다. 은은 잠자코 D의 눈을 바라봤다. 1946년생. 일흔 두 살. 나이는 노인의 초입이지만 장난기 내지 광기는 젊은 사람 같았다. 며칠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궁금증이 떠올랐다. 단 둘이 있을 때 그걸 물어봐도 될까? D는 은의 마음 속을 읽기라도 한 듯 곧바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대통령을 내 커리어의 마지막으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나이? 그게 뭐 문제야. 내게 있어 유에스 프레지던시란 그 다음 비즈니스들을 더 원활하게 하기 위한 경험일 뿐이야. 유 노, 대통령이란게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역시 그런가. 이렇게 솔직하게 이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

"감동적입네다."

"대통령 임기, 재선 해봐야 8년이야. 특히 자네를 위해선 내가 재선되는게 아주 좋을 거야. 내가 시간 절약을 위해 영상을 하나 준비했어. 길지 않으니까 같이 한번 보자고."

 

4분 정도 길이였다. 그리 잘 만든 영상은 아니었다. 편집은 좀 촌스러운 80년대 감성이었고, 대사는 누군가 영어로 쓴 것을 한국을 떠난지 꽤 오래 된 사람이 한국어로 다시 번역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이 끝날 때 쯤 은은 눈물이 찔끔 나오려 했다. 간신히 참을 수 있었다

"은, 잘 듣게. 내가 이걸 다 해 줄 수 있어. 해 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지?"

물론이다. 다 해서 떠먹여 주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가능성은 열어줄 수 있을 거다.

"자네 나라의 예쁜 비치들마다 자네가 숙박중인 세인트 레지스 처럼 멋진 호텔들을 백사장 삥 둘러 지어줄 수 있어. 아시아의 어틀랜틱 시티로 만들어 줄 수도 있지. 마카오에 질린 중국 갑부들이 떼돈을 들고 바카라 테이블을 꽉꽉 채우겠지. 하지만 이건 공짜가 아니야. 그것도 알고 있지? 자, 나 같은 부동산 전문가가 내 돈을 어디엔가 투자하려면 그 사업의 지속 가능성에 조금도 불안감이 있어선 안 돼."

"물론입니다. 하지만..."

"말해보게."

"그 핵폐기 말인데요,"

"핵폐기가 뭐가 어쨌다는 건가. 그건 그동안 보고받은 걸로 다 알고 있다고."

이 늙은이, 나도 말 좀 하자.

"솔직히 CVID가 정말로 가능한 건가? 아니라는 거 알아. 심지어 자네는 황해북도 평산에 꽤 훌륭한 유레이니엄 마인까지 갖고 있잖아. 아이 노. 남한처럼 핵원료를 전량 수입하는 나라도 가끔 장부상 보유 물량이 실제 보유량과 안 맞아 난리가 날 때가 있는데, 우라늄을 채굴할 수 있는 나라의 핵원료 잔량을 어떻게 정확하게 체크하겠나. 재주 있으면 갖고 있어 보라고. 하지만 갖고 있다 걸리면 바로 죽음이야. 알지? 중요한 건 '없다'고 자네 입으로 공언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거야."

물론이다. 핵무기의 의미는 갖고 있다고 얼러댈 수 있는 데 까지다. 직접 쓰는 건 정말 최후에나, 아니, 최후의 최후의 최후에나 생각해 볼 일이다. 내 입으로 없다고 선언한 뒤에는 그건 갖고 있어도 갖고 있는게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적절한 대답일까?

"제일 좋은 방법은, 그걸 쓸 이유가 없게 만들어 주는 거겠죠."

D의 얼굴이 확 펴졌다.

"부라보. 그거지 그거.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겠어. 물론 1,2년에 뭐가 확 달라지진 않을거야. 10년이 걸리든, 20년이 걸리든, 자네가 '내가 그때 이걸 안 했으면 어쩔뻔 했을까'라고 생각하게 해 줄거야. 그걸 위해서 나는 앞으로 한 7년 더 대통령을 할 거고, 그 동안 우리의 사업을 위해 모든 조건을 마련해 놓을 거야. 그 뒤에는 자네랑 사업을 할걸세. 파트너."

"파트너?"

"자네도 아직 젊잖아. 한 10년 더 조국을 위해 봉사하고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아. 뭐 그건 자네 선택이니까 강요하진 않겠네. 하지만 말이야, 남자는 일단 돈을 벌어야 해. 돈을."

사실 지금까지 은의 인생에서 '돈'이라는 게 그렇게 절실한 적은 없었다. 2009년, 화폐개혁 대 실패 때 겁먹었던 아버지와 새파랗게 질린 장성들의 모습을 보고 돈이라는건 양 같은 인민들도 늑대로 만들 수 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D의 입에서 나오는 '머니'라는 말은 마치 여가수의 비음처럼 끈끈하게 사람을 잡아 끄는 데가 있었다.

"그렇지. 머니. 이 세상에서 아워 헤븐리 파더, 하나님이 자네를 사랑하시는 지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재산의 축적 뿐이야. 그래서 남자는 일단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노력해야 해. 잠들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언제나 돈을 생각해야지. 머니. 유 노, 자네가 좋아하는 그 요다 같이 생긴 포머 차이니즈 체어맨이 얘기한 적 있지. 검은 고양이나 황색 고양이나 쥐만 잘 잡으면..."

"흰 고양이 아닙니까?"

"와튼 스쿨에선 정설만 취급한다네, 파트너. 내가 확인한 바론 중국에는 퓨어 화이트 캣이 없어. 그리고 쓰촨성에서는 오래 전부터 헤이마오후앙마오(黑猫黃猫)라는 속담이 있다네. 아무튼 시간도 없는데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혹시 자네 슈퍼마켓이 뭔지 아나?"

"평양에도 마켓 있습니다."

"굿. 그 마켓에 살 물건이 넘쳐 나고, 내 주머니에 그 물건들 살 돈이 있는데 오디너리 피플이 무슨 불만이 있겠나. 분명히 말할게. 돈을 벌어. 자네도 벌고, 유어 피플도 벌어. 그걸로 행복하게 살아. 그럼 자네도 안전하고, 피플도 행복하고, 아메리칸 시티즌도 좋아할거야. 2차대전 이후에 아메리카 합중국은 이 나라 저 나라 수도없이 돈을 퍼 줬어. 근데 한국 빼면 미국 원조 받아서 안 망한 나라가 별로 없어. 나는 한국 사람 DNA를 믿어. 다 잘 될거야."

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조선? 남조선이라면 너무나 잘 안다. 그 흐물흐물하고 설렁설렁하는 것들도 지구상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부지런하단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런 걸로 따지면 우리 인민들은 상질중의 상질이다. 그것들도 저렇게 잘 벌고 잘 먹고 사는데, 우리가 못할 게 뭐가 있나. 할 수 있다.

"다 좋은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D의 얼굴에 잠깐 긴장이 흘렀다. 무슨 시간?

"지금 그동안 인민들한테 해 놓은 말이 있단 말입니다. 그 말을 주워담고 자 이제는 정의의 보검이 중요한게 아니라 인민의 풍요가 진짜로 중요한 거다, 이런 걸 납득을 시킬라문 지금까지 우리가 잘 해왔다. 그러면서..."

"오케이, 아이 풀리 언더스탠. 그러니까 당장 대외적인 합의에 뭔가 구체적인 얘기를 쓰는 건 부담스럽다, 뭐 그런 거지? 아이 노. 돈 워리. 발표문 같은 건 대강 하자고. 진짜 중요한 건 사업이야. 유 노, 우리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비즈니스가 뭔지 합의했으면 그걸로 됐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거만 알아 둬."

그 다음, 은은 태어나서 가장 무서운 인간의 얼굴을 봤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자네가 실수든 아니든, 뭔가 밑의 애들 컨트롤을 잘못해서 내 비즈니스에 1달라라도 손해를 끼치면, 그 다음엔 진심으로 각오해야 할거야. 명심해. 나 아직 미국 대통령이야. 캐리어와 F35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야."

은은 얼굴에서 싹 빠져나갔던 피가 다시 들어오는 걸 느꼈다. 잠시 쫄았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렇게 마무리할 수는 없다. 뭔가 인상적인 말을 해서 국면 전환을 해야지.  

"그럼 일 잘 되면 조단 한번 만날 수 있습니까?"

은 스스로 생각해도 좀 엉뚱한 얘기였다. 하지만 D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건 자네 하기 달렸지. 미스터 조단도 훌륭한 비즈니스맨이야. 명예욕도 큰 사람이고. 북한 땅 한 구석에 최초로 건설되는 72홀짜리 컨트리 클럽 이름이 마이클 조단 CC라면 그렇게 기분나빠할 것 같지는 않군."

"어디에 지으면 좋을까요?"

"음... 곧 지어질 NK 디즈니 월드 근처가 어떨까?"

하하하. 타이머는 아직 5분 정도를 남겨 놓고 있었다.

"아 참, 그리고 이 기회에 한미연합훈련 이런 거 중단합시다. 평화의 상징으로 좋지 않습니까. 어차피 주한미군 인제 주둔해 봐야 별로 할 일도 없을테고..."

호오. D는 생각했다. 이건 꽤 날카로운데? 이 아이는 지금 주한미군이 자기 때문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는 건가? 이렇게 순진한 데가 있는지 몰랐는걸? 하지만 다음 순간, D의 머리엔 노회한 X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주한미군을 본토로 철수시키면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할 사람은 X다. 아마 그 주한미군의 가족들보다 더 기뻐할 것이다. 이 아이가 지금 X의 사주를 받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가? 은이 X의 비행기를 타고 싱가포르에 왔다는 사실이 떠오르자 D는 갑자기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D는 금세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까짓 거, 지금은 하잔 대로 다 해 주자. 뭐 훈련이야 안 하면 기름 값 굳고 좋지. 이럴 때 면도 살려 주고, 이걸로 M에겐 군 주둔 비용과 관련해 또 다른 계산서를 내밀 수도 있다. 

물론 어떤 경우든, 작은 내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 있는 중국의 동향을 체크할 수 있는 뷰티풀 군산 에어 베이스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단지 지금은 모든 것에 살짝 ? 표를 그려 놓아야 할 시점일 뿐이다.

"자네 말대로 하지. 은. 좋은 생각이야. 당장 공동 훈련 취소하겠네. 자, 그럼 기다리고 있는 애들 다 들어오라고 할까?"

 

건물 밖 주차장, 작전차량 안의 P는 D의 말에 헤드폰을 벗었다. 굳이 두 사람이 먼저 만나겠다는 이유가 이런 것이었군. 그렇다고 정말 둘만의 대화가 될 줄 알았다면 오산이다. 우리 CIA를 뭘로 보는 건가.

이 시대의 만남은 결국 D의 치적이 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P 자신의 공로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D가 왜 그렇게 NK 해결에 매달리는지 P는 대략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생생하게 듣고 보니 그동안 이해가 가지 않았던 퍼줄이 한방에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까짓 거, 어쨌든 핵을 실은 ICBM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은 미 합중국의 국익에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거기까지는 협조다. NK를 위험하지 않은 나라로 돌려놓는 것 역시 OK. 하지만 그 이상의 뭔가를 하려면 분명히 내게 잘 보여야 해. D. 왜냐하면 나는 그때 유 에스 프레지던트가 되어 있을테니까. 

 

보좌 인력들의 입장을 기다리던 은은 둘만 있을 때 미처 묻지 못한 질문이 다시 생각났다. D의 머리는 가발일까 아닐까. 가발이라면 어디부터 가발일까. 아 왜 이런게 갑자기 궁금해지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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