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4일, 월요일
월요일의 가장 중요한 할 일은 나비고(Navigo) 카드 개통이었다. 파리 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나비고 카드로는 1주일 동안 파리의 버스와 전철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현금으로 전철/버스 표를 사서(버스는 타서 버스표를 끊을 수 있다) 다니는 것도 가능한데, 전날 하루만에 그건 만용이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 웬만한 전철 역은 표 끊는 줄이 꽤 길고, 대부분 전철 표를 사려는 사람들은 관광객들이기 때문에 속도가 매우 느리다. 그리고… 한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전철역의 티켓 판매기에 티켓이 떨어져 긴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도착하자마자 나비고 카드를 개통했어야 할 일이겠으나… 불행히도 나비고 카드는 월요일-일요일 구간만을 일주일로 인식한다. 즉 나비고 카드를 금요일에 개통하면, 금, 토, 일 3일만 쓸 수 있다.
역시 이것도 한국이라면 말이 되냐고 난리가 났을 일이나, 어쨌든 파리에 가면 파리 법을 따라야 하는 법. 택시나 우버/볼트로 모든 교통을 해결할 사람들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그래도 시내에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지 않고 다닐 수는 없다. 특히 베르사유를 다녀 올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비고는 필수.
(그리고 나비고 이용하실 분은 셀카 찍어 컬러 프린터로 프린트를 해 가든, 증명사진을 빼 가든, 사진 가져가시는 걸 잊지 마시길. 이력서에 붙이는 것보다 좀 작은 사이즈로 사진을 붙여야 사용할 수 있다. 그 외에는 한국의 교통카드와 거의 똑같이 사용 가능.)
드넓은 샤틀레 레알 Chatelet Les Halles 역 구내를 살짝 헤맨 끝에, 물어 물어 창구를 찾아 나비고 카드를 개통하고 이날의 첫 목적지인 오스만 가로 향했다. 오늘날의 파리를 만든 도시계획가의 조상, 조르주 외젠 오스만의 이름을 딴 오스만 가에는 파리를 대표하는 프렝탕과 라파예트 백화점이 있다. 동행인이 파리에서 가장 잘 아는 곳.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어쨌든 뮤지엄 패스가 화-금 일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쇼핑은 뮤지엄 패스와 겹치지 않는 날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백화점 구경. 도심 숙소의 장점을 살려 쇼핑한 짐을 호텔에 가져다 놓은 다음 근처 쌀국수 집(꽤 유명한 가게였던 Pho14의 분점이 호텔 근처라 방문했다)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메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루이 뷔통 재단 Louis Vuitton Foundation 으로 다시 향했다. 루이 뷔통 재단은 유명 미술관이긴 하나 뮤지엄패스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므로, 이날 방문해야 했다.
(보기엔 그럴싸 했지만… 국물이 너무 달았다. 실망.)
루이 뷔통 재단으로 가려면 에투왈 개선문 바로 옆에 가서 재단에서 운행하는 셔틀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재단 홈페이지에 나와 있었다. 과연 그랬다. 개선문(Blue bus for Louis Vuitton Foundation이라는 정차장이 구글 지도에도 나온다)에서 재단까지는 거리상 지척이었지만 비오는 파리의 정체는 매우 심각했다. 셔틀버스 안에 앉아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달까.
안내상으로는 10분 거리였지만 족히 30분 정도 걸렸다.
어쨌든 사진으로 많이 보던 루이 뷔통 재단 도착. 비가 계속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건물 전경을 찍을 수 있는 먼 거리까지 떨어지는 건 무리였다. 그냥 이런 게 드넓은 공원 한 복판에 있다.
이날의 목적은 마크 로스코 전시. 재단 앞에 내려 보니 줄이 꽤 길었지만 예약을 해 놨기 때문에 걱정없이 신속 통과. 다만 어디서나 짐 검사를 한다는게 귀찮았다. 물론 이때만 해도 누가 루이 뷔통 재단에 테러를 할까 생각을 했으나, 모나리자에 수프를 뿌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 판이라 검색의 생활화가 나쁠 것은 없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검문 검색을 한다고 수프 뿌리는 애들을 막을 수 있으려나.
로스코 전은 듣던 대로 대단했다. 전시실만 11개인데 그 전시실이 모두 주제별, 시대별로 꽉 차 있었다. 총 작품 수가 거의 150~200개는 될듯 한 느낌. 세계 각지의 미술관은 물론, 개인 소장 작품들도 이 전시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듯 했다. 듣기로 리움의 홍관장님도 로스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던데, 혹시 리움에서 온 작품도 있나 궁금했지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이날 전시의 최대 수확은 로스코의 자화상을 본 거였다.
이 사람이 네모가 아닌 그림도 그렸다니. (물론 자화상의 얼굴도 약간 네모꼴...이긴 했다.)
뭐 당연한 얘기겠지만, 로스코도 젊은 시절에는 초상화도 그리고, 자화상도 그리고, 다양한 인물 그림을 그렸다. 1930년대까지는 특별한 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작품들도 꽤 인상적이었지만 그걸로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듯.
결국 언젠가부터 누가 봐도 로스코인 사각형 그림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마침내 대가가 되었다. 대략 이런 전환은 1946년에서 1949년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정말 다양한 로스코의 시도들을 볼 수 있었다.
때론 어둡고, 때론 밝은 그림들.
"나는 색에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추종한 것은 빛이다."
뇌과학과 미학을 연결시킨 대표적인 연구자 에릭 캔델은 마크 로스코와 데 쿠닝, 잭슨 폴록 등을 환원주의 Reductionism 를 이용해 미술의 새로운 돌파구를 연 작가들이라고 평가한다.
소위 환원주의의 시대. 화가들은 '그림의 원형, 미술의 원형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점점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그림이라는 것의 출발점을 어떤 형상을 구성하는 아주 원초적인 요소들의 단계에서 다시 규정해 보자고 시도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은 면을, 어떤 사람은 선을, 어떤 사람은 색을 선택해 각각의 그 요소들을 파고 들었다.
그렇게 해서 몬드리안이 선택한 것이 구획으로 나뉜 면, 폴록이 선택한 것이 복잡한 곡선이었다면 로스코가 선택한 것은 색이라고들 하는데, 로스코 본인은 '나는 색 아님. 내 관심사는 빛'이라고 저렇게 공언했다. 본인의 말이니 인정하자.
죽기 1년 전, 로스코는 갈색과 검은색으로만 그리는 시리즈에 들어갔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건가, 아니면 설명에 쓰여 있는대로 1969년 아폴로의 달 착륙을 지켜본 영향일까.
이 마지막 블랙 시리즈의 그림들은 윤형근 화백의 그림과 매우 닮아 있다.
로스코가 1970년에 죽었고 윤 화백은 1928년 생이니 생전에 만날 기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으나.... 아무튼 무채색의 선 속에선 뭔가 세상의 강요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의지 같은 것이 읽힌다.
아무튼 이렇게 로스코 안녕.
훌륭한 전시였다. 루이 뷔통 재단 미술관은 뮤지엄 패스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었는데, 상설 전시와 마크 로스코 전시는 따로 따로 표를 끊어야 했다. 간 김에 둘 다 봐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마크 로스코 전만 표를 샀는데, 다행이었다. 마크 로스코 전만으로도 체력소모가 꽤 심했다.
프랭크 게리의 작품인 루이 뷔통 재단 건물 1층은 커피숍과 매점, 관광객들과 뭔가 나들이를 나온 듯한 파리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는데 위로 올라가니 인적 없는 공간이 많아 좋았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실용적인 건물은 아니라는 생각. 건물 곳곳에 앉아서 파리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특히 해질녘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공간은 많았지만, 그 공간들은 그냥 그런 공간들일 뿐, 효율적으로 뭔가를 위해 쓸 수 있는 공간들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커다란 낭비 자체가 예술이라면 당연히 인정.
비가 와서 막히는 파리를 가로질러 호텔로 귀환.
샤틀레 레알 역 부근의 반미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캐주얼한 가게였는데 엄지손가락만한 회색 쥐가 나왔다. 그런데 너무 작고 귀여웠던(?) 탓인지 주인도,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심지어 쥐나 벌레를 절대 좋아하지 않던 동행인조차도 ‘해치지 말아요’의 태도였다.
주인은 슬리퍼 짝으로 쥐를 쫓아 가게 밖으로 내보내며 “파리에선 어디나 이래요”라고 변명했다. 동행인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쥐가 나온 식당의 위생상태를 걱정하기는커녕 비도 오는데 쟤 어디 가서 비나 피할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다. 역시 뭘로 태어나든.... 귀여워야 한다.
음식은 먹을 만 했지만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고, 꽤 많은 도보로 피로했으므로 바로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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