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드니 빌뇌브 감독이 "영화가 TV에 의해 타락했다. 나는 대사가 싫다"고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순수한 이미지와 사운드야말로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도 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한번 크게 망해 봐야 이런 말을 안 하겠지'라고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듄2>를 보고 나니, 그는 자기 말을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이었더군요.
<듄2>는 <듄>에서 하코넨의 추적을 피해 사막 깊숙히 달아난 폴(티모시 살라메)이 원주민이며 뛰어난 전사들인 프레멘의 신임을 얻고, 그들의 영웅이 되어 반격에 나서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배경은 전편에 이어 '모래의 행성'인 아라키스의 사막이고, 이 행성의 이름이 고대어로 '듄'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스토리는 일단 올라 타면 종점까지 외길로 달립니다. 이렇게 단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원작 소설 <듄>이 세상에 나온 것이 1965년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듯. 이후로 나온 SF 소설이나 영화. 만화 중에 <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지경이라고 하는데, 그만치 영화에 등장하는 설정이나 진행들이 자연스럽게 기시감을 줍니다.
물론 원작으로 따지면 소설 <듄>도 1962년 개봉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영향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난번 <듄> 1편 때도 얘기했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신 분이라면 두 영화 사이의 공통점이 너무나 선명하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외부에서 온 잘생긴 전사가 용감무쌍한 유목민들을 지휘해 자원을 탐내는 악의 제국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니까요. 게다가 무대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그런데 이런 뻔한 이야기를, 빌뇌브는 어마어마한 사운드와 영상의 힘으로 극복해버립니다. 데이비드 린이 사막이 주는 고독, 절망, 공포, 광기의 느낌을 영상으로 승화시켜 영화라는 장르의 역사상 절대 잊혀지지 않을 비주얼을 만들어 냈다면 빌뇌브는 거기에 첨단 과학과 상상력을 투입해 결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뒤지지 않는 영상미를 창조해냅니다.
더구나 한스 짐머의 사운드. 등이 둥둥 울리는 CGV 골드클래스에서 본 탓도 있겠지만, 이 비주얼과 사운드에 젖어들지 못한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쉽게 감동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얼른 보세요. 물론 이 뒷부분에 언급하겠지만, 비주얼과 사운드에 비해 정작 스토리에는 꽤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영화는 꼭 보셔야 할 겁니다. 그만치 볼거리는 대단하다니까요.
이후 이야기에는 스포일러....가 꽤 있습니다. 뭐 이야기 자체가 엄청나게 단순한데다 이미 나온지 50년이 넘은,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써먹은 스토리에 얼마나 대단한 결말을 기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용 전개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여기까지만. 나머지는 극장 다녀 와서 읽어보시길.
원래 남의 리뷰는 영화 보고 나서 보는 겁니다.
1. 경이적인 비주얼
영화 초반, 폴을 찾아 헤매는 하코넨 추격대가 모래벌레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바위산 위로 날아오르는 장면,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바로 빌뇌브의 말을 납득해 버렸습니다. 그래, 이런 걸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이었지. 이런 걸 보여줄 자신이 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거구나.
그 외에도 거울처럼 대지의 표면을 비치며 날아오는 황제의 우주선, 폴이 남부의 원리주의자들을 규합하는 대성회(?) 장면, 모래벌레가 황제의 대군을 덮치는 장면, 폴이 모래벌레의 등에 오르는 장면 등을 보면서 내내 감탄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듄2>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영화입니다. 그리 크지 않은 화면으로 봤는데도 이 정도의 위력을 느꼈으니, 아이맥스로 보신 분들은 엄청났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납작해진 스토리
하지만 아쉬움은 아쉬움. 스토리 면에서 <듄2>는 꽤 감점 요인이 있는 영화입니다. 원작 팬들은 원작 팬들대로 불만이 많은 듯 한데(저는 원작은 펼쳐본 적도 없습니다만...), 영화는 시작한 뒤로 내내 마음이 바쁩니다. 다 보고 난 느낌으로는 폴이 모든 프레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까지 정도가 영화 한 편으로 적당하지 않나 싶고, 그 뒤로부터 황제가 직접 나서고 폴의 프레멘이 황군(!)과 싸우는 내용으로 다시 한편을 만들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빌뇌브는 그보다는 마음이 급했던 듯 합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완성본 영화를 보고 있는데도 뭔가 압축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대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의 경우에도 나올 때 마다 '리싼 알 가입'!만을 외치는 아주 깊이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립니다.
오랜만에 등장한 거니 할렉(조쉬 브롤린)도 앞 사람이 계속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는데도 '지금 아니면 이 얘기를 다 할 시간이 없어! 나도 몇 장면 안 나온단 말이야!' 라고 항변하듯 '진행을 위한' 대사들을 토해냅니다. 심지어 최강 빌런인 페이드 로타 하코넨(오스틴 버틀러)의 잔혹함과 강력함을 보여주려 힘을 준 흑백 콜롯세움 신도 별 임팩트 없이 '자, 이놈이 얼마나 싸움도 잘 하고 무지막지한 놈인지 보셨죠?' 하는 식으로 매우 무성의하게(진심입니다) 처리됩니다. 그냥 필요하니까 넣은 장면이라는 식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영화 내내, '원래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멋진 장면 여러개 보여드렸으니 다들 만족하시죠?' 라는 식의 진행이라고나 할까요. (유튜브로 2시간 짜리 영화를 15분에 압축해서 보는 걸 좋아하는 분들은 이런 진행에 별 불만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네요.)
사실 이런 식이다 보니, 엄청난 스타들이 즐비하게 나오지만, 그 스타들에게 뭔가 연기력을 펼칠만한 기회를 주지 않는 영화라서 뭔가 마구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두 주인공, 티모시 살라메와 젠다이야가 빛을 발한다는 것이 위안거리. 특히 젠다이야는... 각도를 달리 볼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3. 영웅은 왜 해로운가... 살짝 겉도는 메시지
주인공 이야기를 좀 하자면, 살라메가 연기하는 폴은 금방이라도 망가질 듯한 섬세함이 돋보입니다. <듄2>에서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폴-무앗딥-아트레이데이스는 자신이 영웅이 될수록 전 우주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을 걱정하는데, 솔직히 프레멘들에게 이런 고민은 무의미합니다. 이미 하코넨이 스파이스 채취를 위해 프레멘을 억압하고 나선 이상,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아무 미래가 없기 때문이죠.
역사와 전설을 장식하는 그 수많은 영웅들이 대체 다수 인류에게 득을 끼친게 뭐냐...는 <듄> 시리즈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의 탄식에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압제에 맞서 살아 보겠다고 싸우는 사람들의 권리까지 부정하는 것처럼 보여서야 과연 이 영화가 매력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듄> 시리즈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 그 웅대한 세계관과 심오함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빌뇌브의 <듄> 시리즈는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란 느낌을 줍니다.
결국 빌뇌브는 원작에 충실할수록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 갖고 애쓴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결과 이렇게 기형적으로 스토리는 찌그러뜨리고 비주얼과 사운드를 강조한 영화가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듄> 시리즈 원작이 나온지 6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카리스마를 무기로 한 막무가내형 독재자들이 여기저기서 광신도같은 추종자들을 앞세워 팬덤 정치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프랭크 허버트의 통찰이 낡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개인적으로 <듄> 1편과 이번 <듄2>를 비교한다면 저는 1편의 승.
물론 처음에 언급했다시피, <듄2>는 이런 아쉬움을 충분히 덮을 만큼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2시간45분 동안 그 그림만 보고 있어도 표값은 아깝지 않을 정도. 그리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가능한 한 큰 스크린에서 보시길. 그런데 3편이 나올 때까지 어찌 기다리나...
P.S. 아주 오래 전, 서울 충무로의 대한극장은 '국내 유일의 70mm 수용 상영관'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대략 5~10년에 한번씩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다시 개봉하며 큰 스크린의 위력을 자랑하곤 했는데, 오늘날에는 IMAX가 그런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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