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
결혼 20주년을 맞아 파리를 가자.
별로 이의를 달기 힘든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직장 일 때문에 파리를 10여 차례 갔다 왔지만 자기를 위해 시간을 보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본인이 실장이 되어서야 후배들을 데리고 “얘들아, 우리가 파리까지 왔는데 루브르는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니?”하고 두어 시간 동안 박물관 산책을 했다고 한다. 에펠탑이고 개선문이고 지나가는 버스에서 본게 전부였다. ‘파리에 가서 내 시간을 갖고, 쇼핑도 하고 싶어!’
그동안 좋은 곳을 안 가본 것도 아니지만 파리가 그렇게 로망이라는데. 결혼기념일은 11월30일. 그 시기를 맞춰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고, 넘쳐나는 마일리지로 비즈니스 티켓을 끊어 파리로!
2. 발권
…그런데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코로나 이후 마일리지로 항공사 티켓 끊는게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항공사가 바다같이 넓은 비즈니스석을 갖고 있던 A380은 어두컴컴한 격납고 어딘가에 기계마인들이 사라진 뒤의 마징가Z처럼 잠재워놓은 모양이었다.
국내 항공사들의 마일리지용 비즈니스석은 행선지가 어디건 단 2석 아니면 3석. 세계 거의 모든 항공사의 마일리지 항공권은 출발 361일 전 오전 9시에 오픈되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마다 소리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9시 땡 치고 눌러 보면 이미 환상의 좌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요즘은 비즈니스석 뿐만 아니라 이코노미석도 땡 치고 나면 사라지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물론 매크로 같은 것은 짤 줄 모른다), 좌석을 확보했다. 물론 가는 표와 오는 표는 따로 따로 구해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공했다. 그것도 비즈니스 왕복을 다! 만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항공사는 고객이 마일리지로 사는 표를 공짜로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 마일리지는 고객이 다른 포인트로 받을 수 있는 가치를 바꾼 것이므로, 고객의 입장에선 절대 공짜가 아니다.
게다가 각 항공사는 역시 각 카드회사에 마일리지를 유상으로 팔아 수익을 챙겼으므로, 이미 그들 입장에서도 마일리지는 공짜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그 마일리지를 사용할 때가 되자 항공사들은 고아가 된 조카 월사금 내 주듯 인색하기 짝이 없는 맨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시국에 참 힘들었겠지만, 그건 그거고,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3. 계획 수립
어쨌든 비행기표를 구한 것만으로 든든해졌지만 그건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은하수의 별처럼 많은 파리의 호텔 중에 적당한 숙소를 고르고, 가볼 곳들을 생각하고, 뮤지엄 패스, 나비고 카드, 볼트, 루아시 버스 같은 새로운 명사들과 친숙해지고(그렇다고 불어를 속성으로 배워 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친한 변호사 중에는 2주 정도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면 3개월 정도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친구가 있다.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참 경이로운 습관이 아닐 수 없다).
여름이 지나자 파리 오페라와 콘서트홀들이 겨울 스케줄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중 훅 당기는 몇가지를 골랐다. 사실 가장 큰 적은 체력이었다. 예전처럼 새벽에 나가 한밤중까지 돌아다니다는 어찌 어찌 귀국때까지는 버틴다 해도 돌아온 뒤에 드러눕기 십상이었다. 숙소를 중심부에 잡아 도중에 잠시 잠시 쉬어 가는 방편은 상당히 유효했다.
시간이 무한정 있다는 것은 결국 뭐든 다 뒤로 미룬다는 뜻이고, 그렇게 해서 출발 일자가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왔지만 딱히 준비된 것은 없었다. 결정된 건,
쇼핑: 한다(어디서 해야 뭘 해야 하는지 가장 확실한 부분)
호텔: 두군데 정도로 나눈다. 하나는 레지던스 호텔, 또 하나는 진짜 호텔. 레지던스 호텔은 시내 복판으로 잡아 각종 일정을 소화하고 중간 중간 들어와서 쉴 수 있게 한다.
미술관: 고르고 골라 루이비통 재단,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파리 시립미술관, 퐁피두 센터를 방문한다. 피카소 미술관 탈락. 로댕 미술관 탈락. 기타 군소 미술관…. 멀미난다. 파리에만 미술관이 1700개… 나머지는 탈락.
명승고적: 베르사유 궁전과 에펠탑은 한번도 안 가보셨다니 가야겠지? 노트르담, 생샤펠, 클뤼니, 개선문 등등 모두 탈락.
식당: 뭐 대강… (사실 그리 큰 기대가 없다)
공연: 클라우스 메켈레의 파리 필하모닉(파리 필하모닉 홀), 한국 지휘자 김은선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바스티유 오페라), 이지 킬리앙 안무의 창작 발레 ‘블랙 앤 화이트’(오페라 가르니에) 3개로 끝. 파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3개 공연장을 돈다는 의미.
개인적으로는 1988년, 1998년, 2019년에 파리를 왔었다. 물론 각각 3일, 4일, 5일 있었으니 몇번 와 봤다고 뭘 잘 아는 건 전혀 아니었다. 기껏 아는 것은 세느강이 대략 서울의 한강이라고 치면 루브르는 동부이촌동 쯤에, 오르세는 반포 쯤에, 생제르맹은 압구정동 쯤에, 개선문은 서대문 쯤에, 오페라가 광화문 쯤에 있다는 정도.
또 한국식 기준으로 보면 세느강은 파리를 남북으로 가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파리 사람들은 강북과 강남을 나누지 않고 강 좌안과 우안을 따진다는 것(괴이하다), 화장실이 적고 냄새가 나며 심지어 상당수는 돈을 내야 갈 수 있다는 것, 음식은 짜고 생각보다 별 맛이 없다는 것, 지하철은 냄새가 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파리에선 최고의 교통수단이라는 것 정도.
1988년에는 가이드가 딸린 한국인 관광단의 일원이었고(2주 유럽 투어의 마지막인 파리에 2박3일이 배정되어 있었다), 1998년에는 대략 양재동 정도 되는 위치의 한인 민박에 있었다. 특히 2019년에는 2인1실에 60유로짜리 호텔에서 잤고(욕실 문은 잠금쇠가 떨어져 나갔고, 밤에 마약중독자들이 복도를 쿵쿵거리며 문을 두드렸다), 촬영팀과 함께 버스로 이동한 덕분에 파리 시내가 얼마나 더럽게 막히는지를 몸으로 겪어 봤다. 제일 맛있었던 것은 13구에서 먹은 베트남 쌀국수였다.
그렇게 파리를 네번째 간다고 하면 ‘와, 파리는 잘 아시겠네요’라는 말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아는 게 없었다.
뭐 어떻게 되겠지. 어쨌든 그렇게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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