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마자 옷을 챙겨 입고 바로 2차선 길건너 빵집으로 달려가 갓 구운 바게트와 빵 한두가지를 사온 뒤, 호텔 1층에서 핫 초콜렛(커피머신이 있는데 쇼콜라테는 오전에만 제공한다)을 받아 올라오는게 루틴이 됐다. 갓 구운 따끈따끈한 바게트 봉투를 손에 쥐는 느낌도 좋고, 맛은 또 얼마나.
마늘을 북북 갈 수 있는 마른 바게트의 단면과는 전혀 다른, 순결한 속살의 느낌이 기막히다. 물론 서울이라고 아침에 갓 구운 바게트를 파는 집이 없을까마는, 여기는 파리 아니냐, 파리.
어쨌든 아침을 간단히 챙기고, 잠시 다시 누워 아침잠을 청하고(...이상하게 아침이 되니 난방이 나와 방안이 따뜻해졌다), 깨 보니 점심때. 전날 밤부터 내심 가볼 생각이었던 파이브가이즈를 털었다.
오오. 이 리마커블한 맛이란. 귀국해도 꼭 다시 먹으리라 결심.
햄버거로 기운을 북돋운 뒤 버스를 타고 봉마르셰 탐방. 동행인에게 파리는 곧 봉마르셰 와 그 주변, 라파이에트와 그 주변이다. 고향 가서 모교를 돌아보듯(그분의 입장에서) 일단 봉마르셰를 방문했다. 흐리고 쌀쌀한 날씨.
영상 1~5도 정도에 습기가 섞인 날씨는 음울 그 자체다. 흔히 ‘뼈가 시리다’고 말하는 그런 날씨를 뚫고, 퐁네프 앞에서 버스를 타고 몽마르셰로 향했다.
봉마르셰는 1852년 개관한 파리 최초(당연히 세계 최초겠지?)의 백화점. 따지고 보면 170년이나 된, 역사책에 나와야 할 건물인데 구스타프 에펠이 지은 건물이라 그런지 지금까지도 쌩쌩하기만 하다.
물론 실내는 역시 세월을 이기기 힘든 느낌이 있다. 몽마르셰 위층은 개성있고 예쁘게 꾸며진 것은 분명했으나, 170년 전에는 정말 별세계였을지언정 지금은 아닌 느낌. 일단 층고가 너무 낮다. 그나마 중정이 뻥 뚫려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게 다행이었는데, 이 설계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백화점의 본보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는 건 쇼핑에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이고, 별도 옆 건물인 식품관 1층으로 내려가자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곳은 진정 별세계. 세상의 온갖 치즈 온갖 버터 온갖 절임 온갖 소스 온갖 초콜렛 온갖 과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만약 파리 시민인데 좀비가 창궐하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면 제일 먼저 털어야 할 곳은 이곳이었다. 여기저기 건넬 자그만 선물 등속을 요것조것 샀는데, 그것만 해도 꽤 돈이 깨졌다. 쇼핑 안 좋아 한다더니… 라는 동행인의 비웃음을 등지고.
아무튼 그렇게 몇 걸음을 걷다 보니 해가 반짝. 8일 정도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파란 하늘을 본게 몇번 안 되는데, 그중의 하루가 이 날이었다. 중간에 몇 군데를 더 들러 돌아보고(덕분에 에르메스 세브르 점의 위용을 봄), 어찌 어찌 하다가 예정되어 있던 카페 레 뒤 마고 Les Deux Magots에 일찍 입장.
오후 4시 경인데 그 명성 때문인지 카페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얘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사실은 우리 다섯시 반에 예약했는데’로 우겨서 바로 입장에 성공했다.
그런데… 내부는 바깥보다 더 끔찍했다. 개인적으로 붐비는 곳을 매우 싫어한다. 식당도 옆 사람의 팔꿈치가 닿을 듯한 곳은 삼겹살집 외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여기는 서울의 노포 삼겹살집이 우스울 정도로, 내부가 도때기 시장이었다.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기는 했는데, 프랑스어를 못하기에 망정이지, 만약 했더라면 옆 자리 아저씨들의 집안 사정을 다 알뻔 했다. 어찌나 격렬하게 떠드는지.
마드리드였다면 츄러스를 찍어 먹어도 좋을 듯한 쇼콜라(맛은 있었다)를 마시고 나니 한 순간도 더 거기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본래는 거기 앉아서 저녁식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옆자리 아줌마가 튀기는 침이 내 밥에 다 들어갈 듯한 공간에서 밥을 먹지 않게 된 게 천행이라는 생각만.
유명 문호들이 드나들던 파리 카페의 낭만적인 분위기?
아 녜 녜. 그런거 눈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레 뒤 마고를 헤밍웨이가 파리 살 때 자주 가던 곳이라며 가봐야 한다고들 하는데, 헤밍웨이의 회고록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 A movable feast>를 읽어보면 그의 단골 카페는 다른 곳이다. 뤽상부르 공원 남쪽에 있는 라 클로세리 데 릴라 La Closerie des Lilas 가 바로 그 곳이다.
헤밍웨이는 책에서 이 카페를 ‘파리에서 가장 좋은 곳들 중 하나’라고 부르고, 심지어 뒤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이 카페에 다른 작가가 왔다는 이유로, 그 작가에게 왜 '내 카페'에 온 거냐, 너 때문에 신경 쓰여서 글을 쓸 수가 없다고 욕을 하며 내쫓으려 하기까지 한다.
저 책 내내 헤밍웨이는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를 정신병자 취급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를 보면 헤밍웨이 또한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그래서 거기는 갔냐고? 아니.
레 뒤 마고를 가본 뒤 파리의 카페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런 곳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아졌다. 가 봐야 헤밍웨이 사진이나 몇장 붙어 있겠지.
참고로 파리 여행을 앞두고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어 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의 1/3 정도는 스콧-젤다 피츠제럴드 부부에 대한 뒷다마인데, 헤밍웨이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면 스콧 피츠제럴드는 젤다 못지 않은 환자다. 이런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실만 하겠으나, 헤밍웨이가 가 본 파리의 명소들에 대한 감상 같은 것이 궁금하다면, 매우 실망할 것을 확신한다.
그래도 기억나는 장면 하나: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1920년대 초,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문인들이 1차대전이 끝난 파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싸구려 와인을 퍼 마시고 몰려다니던 시절을 회고한 글이다. 단 <파리는 날마다 축제>가 실제 쓰여진 것은 1950년대. 만년의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쓴 내용들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시절의 파리에는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T.S. 엘리엇, 루이 부뉴엘, 만 레이 등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이 들끓던 시절이라 온 동네마다 셀럽들이 넘쳐 흘렀던 것 같다 - 물론 오늘날의 시각이지만. )
그중 한 대목. 그런 시절을 한참 지나고 파리를 방문한 헤밍웨이는 왕년의 단골 술집을 들러,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바텐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당연히 헤밍웨이는 그 시절 같이 술집을 전전하던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데, 바텐더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묘한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실 이 내용과 거의 똑같은 장면이 피츠제럴드의 단편 <다시 찾아간 바빌론 Babylon Revisted>에도 나온다는 점이 처연한 느낌을 더한다(이 단편은 1954년, <내가 마지막 본 파리 The last time I saw Paris>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젊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모가 빛나는 추억의 영화). 여기서 남자 주인공은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파리를 오랜만에 찾아 단골 바를 방문하고, 나이 든 바텐더에게 옛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그 바텐더는 나는 기억하지만 함께 오던 그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묘하게 일치한다.
어쩌면 나를 포함해 그들 모두가 웨이터에게는 잊혀진 인물들일 것이다. 단지 나는 눈앞에 와 있으니 기억해주는 척 하지만, 어차피 그에겐 그의 무대인 바를 스쳐간 수없이 많은 손님들 중 하나일 뿐.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혹은 그 패거리들이 휩쓸고 지나간 파리의 흔적을 그 다음 세대의 젊은 손님들이 밤마다 메웠을 것이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파리의 밤을 지배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뿐,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 자신이 세상의 주인처럼 느껴지는 시절이 있지만, 그들의 빈자리는 너무나 빨리 메워진다. 그 다음의 물결에 의해.
이런 생각과 함께 늦은 밤 파리의 카페에서 한잔 하는 스케줄을 떠올리기도 했었으나, 막상 파리의 카페를 가보고 나선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파리 카페, 안녕. 문득 서울의 술집들이 그리워졌다.
어쨌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것 같던 레 뒤 마고를 떠나 숙소로 돌아왔다. 마땅히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지 않았으므로 그날 산 소고기를 바로 구워 먹자는데 둘 다 이견이 없었다. 프랑스의 꽃등심(faux filet)은 맛이 좋았다.
식사 후 에펠탑 야경을 위해 길을 나섰으나, 기온이 급강하하고 비바람이 치는 바람에 바로 후퇴. 이렇게 해서 사실상의 첫날 마무리.
그 버스 정류장 앞에 있던 상 자크 탑 Tour Saint-Jacques. 그냥 크다는 느낌 말고는 사실 별 것 없었다.
파리에 이런게 어디 한두개라야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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