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라디오라는 기계가 음악을 듣는데 쓰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One Summer Night>이라는 노래는 너무나 친숙했습니다. 매년 2월, 졸업식 시즌이면 <Graduation Tears>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TV에서 어린이들이 나오는 장면이 나올 때면 <Tommy Tom Tom>이라는 노래가 들려왔거든요.
이 유명한 노래들이 모두 한 영화, <사랑의 스잔나>라는 1976년작 한국-홍콩 합작 영화에 나온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 목소리는 진추하 (陳秋霞) 라는 여가수 겸 배우의 것이라는 것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저의 청소년 시절에도 이미 '흘러간 영화'였기 때문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세대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를 TV에서 방송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전설의 영화가 되어 버린 거죠.
(이 영화는 '합작' 영화였기 때문에 1976년 집계된 '올해 최대 관객 동원 한국영화'에 오릅니다. 약 17만 관객. 저는 그해에 한국영화 흥행 2위였던 <로보트 태권 V>를 대한극장에서 봤습니다. ㅎㅎ)
유튜브 시대 이후, 이 영화의 유명한 장면들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를 볼 기회는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명절을 맞아, 아주 우연히 OTT 웨이브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명절 때이므로', 드디어 이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2. 그런데 영화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대체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사랑의 스잔나>냐는 것입니다. 일단 '수재너'가 아니라 '스잔나'인 것은 일본식 발음의 흔적인 것이 분명한데, 이 영화에는 '스잔나'라는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홍콩 제목은 <추하(秋霞: 진추하의 이름과 같음)>이고, 영어 제목은 <Chelsia, My Love>입니다. 극중 진추하의 배역명은 한자로 추하, 영어로는 첼시죠. 어디에도 스잔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제목에는 느닷없이 스잔나?
아마도 추측컨대 - 물론 이 추측이 진짜 이유인지 확인해 줄 사람은 아마도 생존자 중에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 1967년작인 또 다른 홍콩 영화 <스잔나>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의 스잔나>와 구별을 위해 <리칭의 스잔나>라는 제목으로 불리곤 하는 이 영화는 1970년 한국에 수입되어 무려 43만 관객을 동원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습니다.
1970년 8월28일자 조선일보에는 '허리우드 극장 개관 1주년 기념 특선 푸로'로 그 유명한 영화 <스잔나>의 한국 공개 결정이 내려졌다는 광고가 등장합니다. 홍콩에서 만들어져 히트한지 3년만의 일입니다. 이후 이 영화는 3개월간 롱런하며 전설적인 히트작으로 기록됩니다.
아마도 <사랑의 스잔나>를 처음 기획했던 한국 관계자들은 메이드 인 홍콩인 로맨틱 영화라는 점에서, '제2의 스잔나'가 되어 <스잔나>의 빅 히트를 재현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고, 그 결과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사랑의 스잔나>라는 제목이 등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점에도 누군가는 '대체 이 제목은 뭡니까? 이 영화에는 스잔나가 안 나오잖아요!'라는 항변을 했을 것이겠으나... 당시로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었고 보면 자연스럽게 반론은 묻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건 다 추측일 뿐이나, 이것 이외의 다른 이유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랑의 스잔나>의 히트를 등에 업고, 진추하-아비가 다시 주연을 맡아 급조된 영화 <추하 내사랑>의 제목이 <속 사랑의 스잔나>가 아니었던게 더 신기할 정도라는...
3. 웬만한 분들은 다들 아시는 줄거리.
홍콩 갑부 이사장 댁에 딸이 둘 있는데, 큰딸 추하(진추하)는 어려서부터 심장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친구인 방박사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해줍니다. 이사장은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었고, 애틋함 때문에 맏딸 추하를 편애하는데 이때문에 동생 추운은 비뚤어진 성격으로 자라납니다.
세월은 흘러 추하는 음악에 재능있는 숙녀로 자라나고, 방박사의 아들 자량(아비)은 추하를 짝사랑하지만, 이것 또한 자량을 좋아하는 추운의 성격을 더욱 비뚤어지게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추하는 청각장애 아동들을 돌보는 국휘(한국 배우 이승룡)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나 부모의 이야기를 엿들어 자신이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된 추하는 국휘에게도 이별을 고하고... 좌절한 국휘는 한국으로 떠납니다(물론 국휘가 한국인이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곡절 끝에 추하의 비밀을 알게 된 추운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언니의 마지막 추억을 위해 온 가족의 한국 여행을 제안해 언니와 국휘를 만나게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역시 모든 것을 알게 된 국휘는 이사장 내외에게 추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추하에게 눈 쌓인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용평 스키장으로 향합니다.
(경복궁, 세종로도 잠시 나옵니다만, 홍콩에서 한국으로 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설경입니다. 지금도 동남아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용평 스키장이듯, 이들도 개장한지 얼마 안 된 용평 스키장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드래곤밸리 호텔의 옛 모습을 잠시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 관객이 홍콩/한국 사람들이다 보니 어쨌든 '다른 나라'에 갔다는 느낌이 중요한 것이었을테고, 그렇다 보면 홍콩의 요트 파티 같은 장면이나, 한국의 스키장 장면이 상대 국가 관객들에게 강한 느낌을 줬을 듯 합니다. 특히나 해외 여행이 극히 힘들고 꽉 막힌 내수용 문화에 답답함을 느꼈을 당시 한국 청년들로선 홍콩 젊은이들의 분방한 장면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듯.)
뭐 사실상 영화의 거의 모든 내용입니다만, 사실 이런 내용을 모두 안다 해도 감상에 전혀 저촉되지 않는 영화입니다. 뭔가 이야기가 부실해진다 싶으면 진추하가 나와 노래를 하고, 노래들이 또 워낙 다 명곡들인 탓에 없던 개연성과 없던 감성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물론 아니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듯한 한국 가곡 <봄처녀>는 여기 해당되지 않으나... 이 노래들 덕분에, 이런 뻔하디 뻔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영화 보기가 지루하지 않습니다.
4. 신기한 것 중 하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저보다 한 세대 윗분들 중 절대 다수가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을 아비, 즉 종진도로 기억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주제가이자 한국에서의 히트곡인 <One Summer Night>을 함께 부른 것도 아비이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긴 한데,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엄연히 한국 배우인 이승룡입니다.
사실상 <사랑의 스잔나> 주인공으로 픽업된 신인인 듯 한데, 그 이후로 이분은 배우 생활은 그리 오래 계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배우가 있었다는 것조차도 먼 기억 속으로 사라진 날이고 보면, 참 인기도 무상하다 싶죠.
5. 그리고 이 영화를 늦게 본 덕에 발견한 한가지. 1980-90년대 홍콩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사실 이 영화에서 진추하나 아비 보다 더 친근한 배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시대의 걸작 <영웅본색 2>의 최종 빌런, 보스 고사장 역으로 나오는 배우 관산(關山)이 진추하의 아버지 역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더욱 신기한 것은 배우 관산이 오리지날 스잔나, 즉 <리칭의 스잔나>에서도 여주인공 이청의 아버지 역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관산은 한국 관객들에게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흥행 대작의 조연으로 인상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TMI: 관산의 진짜 딸도 한국 관객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황비홍> 시리즈의 여주인공인 관지림(關之琳).
6. 이 영화를 뒤늦게 보고 나서 알게 된 건 아비, 즉 종진도라는 스타의 재발견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서극의 <상하이 블루스>를 매우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주인공 종진도가 바로 그 <사랑의 스잔나>의 주연 배우 아비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B라는 이름 외에도 케니 비(Kenny Bee)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본래 위너스(Wynners)라는 밴드로 활동했는데, 이 밴드가 배출한 또 하나의 슈퍼스타가 알란 탐, 담영휘입니다.
아비, 즉 종진도는 1953년생으로 성룡과 임청하보다 한살 위, 주윤발보다 두살 위, 고 장국영보다 세살 위, 진추하보다 네살 위로 1980년대 홍콩 영화계의 전성기를 이끈 세대의 대표적인 배우 겸 가수입니다. 홍콩/중국어권에서는 앞서 말한 슈퍼스타들에 비해 전혀 손색 없는 유명 스타지만 일단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하다는 점, 그리고 묘하게도 종진도의 히트작들은 한국에 수입되지 않거나 묻혀 버렸다는 점에서 별 인연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홍콩의 거의 모든 스타들은 배우와 가수를 겸업하지만, 아무래도 어느 한쪽의 재능이 다른 한쪽보다 앞서기 마련인데,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한 스타들은 중국어권을 제외한 지역에서 스타덤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홍콩의 대표 가수'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알란 탐(담영휘)에게는 성룡과 공연한 <용형호제>, 유덕화와 공연한 <지존무상>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영화들이 있고, 여가수의 대표주자라 할만한 왕비(왕정문)에게는 <중경삼림>이 있는 반면 종진도에게는 그렇게 이거나 싶은 영화가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진도가 사극/무술 계열의 영화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은 것도 문제. 한국에서 수입하는 홍콩/대만 영화들은 20세기 말까지 대부분 무협/사극 장르의 작품들이었고, 그때문에 현대물 위주로 활동한 배우들은 중국어권을 벗어나면 거의 무명 배우 취급을 받았습니다. 전에도 얘기했던 20대의 임청하(<동방불패> 이전의 임청하를 아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나 임청하의 애인이었던 진한, 진상림 같은 스타들은 한국에서는 '누구?' 하는 대접이었죠.
그와 관련된 글: 임청하는 20대때 대체 뭘 했을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7. 아무튼 <사랑의 스잔나> 개봉 당시 23세였던 종진도와 19세의 진추하는 자연스럽게 커플이 되었고, 서로에게 거의 첫사랑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만... 그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곱게 늙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 후문.
진추하는 젊은 날을 지나며 활동을 줄였지만 종진도는 나이 먹은 뒤에도 인기가 식지 않는다는 전언.
중후합니다.
아무튼 한국의 <말죽거리 잔혹사> 시대에겐 정말 잊을 수 없는 이 커플. (저도 이 세대까지는 아닙니다만...)
여러분의 세대에도 이렇게 상징적인 커플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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