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각시탈'의 남자주인공으로 주원이 캐스팅됐다고 했을 때 상당히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원이 주목받는 신인이라 해도 '제빵왕 김탁구'를 빼면 경험이 너무 일천한 편이죠. 물론 '제빵왕 김탁구'의 주인공이었던 윤시윤도 베테랑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각시탈'이라는 원작의 지명도로 볼 때 주원이 타이틀 롤을 맡는 것은 다소 어색해 보였습니다.
물론 그 뒤로 들려온 소문은 좀 더 기가 막힌 것이었습니다. '각시탈'이 항일 독립운동을 다룬 드라마이기 때문에 소위 'A급' 남자 배우들이 출연을 기피한다는 거였죠. 이미 한류스타가 된 주연급들은 고사하고(사실 이 드라마에 투입된 다른 물량을 셍각하면 한류스타급을 캐스팅하기는 애당초 힘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하면 전체 제작비가 너무 올라가죠), 미래의 한류스타를 꿈꾸는 연기자들도 고개를 저었다는 얘깁니다.
업계 사람들에게는 이미 널리 퍼진 얘기였지만 이 이야기는 얼마 전 신현준이 '각시탈' 제작발표회장에서 입을 열어 온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참 씁쓸한 얘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각시탈'이 처음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동안 '한류'의 힘은 알게 모르게 한국 드라마에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수익성만 놓고 보면 당연한 얘기일 수 있습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일본 드라마 '나와 스타의 99일'에 출연한 김태희를 놓고 일본 내에서 혐한류 파문이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바람에 김태희를 모델로 썼던 일본 화장품 회사는 "김태희를 쓰지 말라"는 협박까지 받는 등 가볍지 않은 타격을 입었습니다.
아마도 '각시탈'의 기획안을 본 연기자들은 극중에서 신나게 일본 순사며 헌병을 때려눕히는 자신의 모습이, 먼 뒷날 일본에 진출해 '아이시테루'를 외칠 때 올가미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일본에서의 한류 인기가 엄청난 수입의 원천이다 보니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은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배용준 주연의 한류 드라마 '태왕사신기'를 기억하신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실 일입니다.
요즘 드라마 '광개토태왕'을 봐도 당연한 얘기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광개토대왕의 가장 큰 적은 후연을 비롯한 북방민족 계열의 국가들입니다. 중국 역사에서는 5호16국 시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명멸했던 왕조들이죠.
하지만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대왕 담덕의 가장 큰 적은 최민수가 거느리는 '화천회'라는 정체 불명의 초국가적 범죄단체(?)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태왕사신기' 방송 당시만 해도 중국이 상당히 중요한 한류 시장이었습니다. 또 이른바 동북공정과 관련, 중국은 한국 드라마 속의 중국 묘사에 매우 민감한 입장이었죠. 그 때문에 주인공 광개토대왕이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내용이 '태왕사신기'에서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중국의 눈치 때문에 줄거리를 바꾸거나, 중국 내 촬영을 위해 대본을 두개 만들거나 하는 일들이 상당히 흔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태왕사신기'는 광개토대왕의 업적 중 하나인 왜군과의 전투를 삭제해 버렸습니다. 내물왕 때 신라에 침입한 왜군을 물리치고 신라를 사실상 보호국으로 만든 내용이 드라마에서는 전혀 다뤄지지 않습니다. 물론 이 역시 우연은 아니었죠.
심지어 '태왕사신기'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대결 또한 광개토대왕이 외적과 싸우는 내용이 아니라 같은 고구려인인 호개(당시 윤태영이 이 역할을 맡았죠)가 이끄는 반란군(?) 집단과의 내전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식의 서술이 바로 드라마 '태왕사신기'의 뒷심을 빼 놓은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례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연기자들이 '각시탈' 출연을 꺼렸다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당히 이 역을 차지하고 열연을 펼치고 있는 주원을 칭찬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반대로, 드라마 속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쪽으로 가는 것 역시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일본에 대한 과거사 문제, 혹은 독도 문제에 대한 한 한국인이라면 분명한 입장을 취해햐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현세 원작 '남벌' 같은 정신나간 국수주의 역시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일본에 살면서 귀화한 것도 죽을 죄고, 일본인에게 성폭행당한 여동생이 자결하지 않은 것도 죽을 죄고, 그 시체를 썩을 때까지 메고 다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식의 비정상적 마초 분위기는 '한류를 위해 항일 드라마에는 출연하지 않겠다'는 기회주의보다 더 위험합니다.
한국 연예인들을 '항일 연예인'으로 몰아가며 민족감정을 부추기는 세력이 일본 내에서 다수파가 아니듯, 한국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과민 반응을 보이는 세력 역시 기를 펴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일부 할일 없는 사람들 중에는 최홍만이 일본 드라마에 출연한 일까지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는 걸 보면, 결코 기우는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한민족 우수성의 상징'인 장훈 선수도 일본 드라마(1982년작 '료마가 간다')에서 일본 사무라이 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득 일본에서 김태희를 놓고 '반일 연예인'이라고 주장했던 근거가, 지난 2005년 김태희가 펼쳤던 독도 사랑운동 때문이라는 사실이 생각납니다.
당시 김태희는 동생 이완과 함께 스위스 홍보대사였는데, 그 기회에 스위스를 방문해 사람들에게 독도 사랑 티셔츠를 나눠주며 독도 홍보를 한 적이 있었죠.
어쩌면 이런 사실들이 앞으로 독도 사랑 운동에 방해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무서운 상상이 스치고 지나갑니다. "야, 안돼. 나 다음 달에 일본에서 방송될 CF가 몇갠데." 만약 그런 한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친구들이 정말로 있다면, 예전에 배용준이 '독도는 한국 땅'이라고 발언한 뒤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진정한 팬이라면, 자기가 사랑하는 스타의 소신을 이해하기 마련입니다.
한국 연예인이면 한국의 입장을 당당하게 옹호하는 것이 중요하듯, 내한하는 일본 연예인들을 붙잡고 "독도가 어디 땅이야, 응? 독도가 어디 땅이냐고?" 하고 시비를 걸어 봐야 누구에게도 도움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것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만큼이나, 국제 사회에서 한국 혼자 살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 또한 중요하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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