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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각종 블로그를 통해서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이하 T4로 표기합니다)'에 대한 감회를 털어놓는 분들 중에서 1984년 12월 국내에서 개봉한 '터미네이터'를 극장에서 보신 분들은 별로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985년 1월, 아무런 사전 정보도 없이 '아놀드 슈바제네거(당시 표기)'라는 생소한 근육질 남자의 포스터만 보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모두 기절해 자빠졌습니다. 영화가 너무나 충격적으로 재미있었기 때문이죠. 그때 처음 들어 본 제임스 카메론이라는 이름은 이듬해 겨울, '에일리언 2'를 통해 '영화의 미래를 이끌어 갈 사람'이라는 인식을 굳게 해 줍니다.

사설이 길었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경로나 순서로 보게 됐건 T1과 T2 를 보고 감동하고, T3에서 개실망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T4에 대한 최근 반응은 대부분 "T3가 수렁에 빠뜨린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구원이 될 만한 작품'이라는 것이더군요.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지금, 그런 평가에 찬성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주의: 이하의 글은 지금까지의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다 보지 않았거나, 이 시리즈에 별다른 애착이 없는 분들은 안 보시는게 나을 듯 합니다. 괜히 골치만 아플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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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초 미국 텍사스의 한 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사형수 마커스 라이트(샘 워딩턴)는 한 여의사(헬레나 본햄 카터)로부터 시신 기증 제의를 받고 수락합니다. 물론 사형이 집행되죠. 그리고서 2018년, 그는 자신이 어떻게 다시 살아났는지도 모른 채 인간들과 기계들의 전쟁이 한창인 아수라장 속에서 깨어납니다.

이미 저항군의 주요 인사가 되어 있던 존 코너(크리스찬 베일)는 어머니가 남긴 유훈에 따라 어딘가에 있을 '아버지' 카일 리스(안톤 옐친)를 구해야 한다는 상념에 젖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인류의 저항군 사령부는 기계들과의 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놀라운 신기술을 얻는 데 성공합니다.

T4는, 당연한 얘기지만 '스타워즈 에피소드 1'의 역할을 할 운명을 띠고 이 세상에 태어난 작품입니다. 물론 시간상으로는 현재까지 나온 시리즈 가운데 가장 뒤의 시점을 그리고 있지만, 워낙 시간 여행을 전제로 하고 있는 작품인 만큼 T1의 원인을 제공할 사건들이 펼쳐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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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에 익숙지 않은 분들을 위해 시간표를 잠시 인용합니다.


1984. 5. 12. 사라 코너를 구하기 위해 카일 리스, 미래에서 와 T-800과 혈전 (T1)
1985. 2. 28. 존 코너 출생 (T1과 T2 사이)
1995. 6. 8. 스카이넷, T-1000을 파견. 저항군은 T-800을 보냄 (T2)
1997. 8. 29. 예정됐던 인류 절멸의 날. 그러나 T2의 결과로 사라짐
2004. 7. 24. 스카이넷, T-X를 보내 존 코너와 미래의 아내 케이트를 죽이려 시도. (T3)
2004. 7. 25. 스카이넷의 자각으로 기계의 반란 발생. 저지먼트 데이.
2018.          존 코너, 마침내 소년 카일 리스를 만나다. (T4)
2028.          존 코너, 저항군 사령관으로 열심히 스카이넷과 전투중 (T2의 한 장면)
2029.          (아마도) 저항군 최후의 승리, 존 코너가 카일 리스를 과거로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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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1의 도입부. 많은 팬들의 머리 속에 잊혀지지 않는 영상이 등장합니다. 인간과 기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미래의 어느 시점, 누드 상태의 터미네이터가 인간의 해골을 밟아 부스러뜨리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은 많은 감독들에게 영감을 줬고, 미래 시점에서 인간과 기계가 싸우는 처절한 대전쟁 드라마는 누구라도 만들고 싶은 이야기가 되어 버리죠.

하지만 카메론이 T2에서 코너 모자가 T-800의 도움으로 사이버다인 사옥을 날려 버림에 따라 당초 예정됐던 저지먼트 데이, 즉 핵전쟁의 날은 오지 않게 됩니다. 영화사들인 아무리 인간과 기계의 미래전쟁을 그리고 싶어도 그 상태로는 이야기가 이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T3의 존재 이유는 그 자체가 아니라(비록 바보같은 속편이라고 온갖 욕을 다 먹더라도), 본격적인 미래 전쟁 이야기가 펼쳐질 T4를 위한 희생타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리즈가 갖고 있는 본질적인 한계를 생각하면, T3는 물론이고 T4 역시 아니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터미네이터'의 세계는 과거와 미래가 한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단선적 세계입니다. '백 투더 퓨처'와 마찬가지로 과거가 변하면 미래가 바로 변해 버리죠. 이 세계에는 다차원 우주관 같은 것이 끼어들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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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깊이 파헤칠수록 문제가 생깁니다. 이번 T4를 보면 스카이넷은 2018년 이미 존 코너와 카일 리스의 비밀을 알고 있고, 이들을 처단해서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다만 아직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시간여행 기술을 갖지 못한 상태죠.

그럼 왜 스카이넷은 - 대체 언제 시간여행 기술을 개발했는지는 모르지만 - 단 세 차례, 그것도 각각 한 시대에 한명씩의 터미네이터만을 보내 어설픈 암살 시도를 한 것일까요. 시간여행 기술을 개발하자마자 인류 저항군에게 박살이 났고, 시간이 없어서 세 번만 보낸 것일까요? 그 세번도 한 시대에 전부 몰아서 보냈다면 효과가 더 확실했을 것을, 굳이 세 시대에 분산시켜 보낸 이유는 또 뭘까요? 점점 얘기가 어설퍼지지 않습니까?

게다가 2018년을 무대로 한 T4에서 이미 아놀드의 얼굴을 한 T-800 모델이 등장합니다. 스카이넷이 과거로 자객을 보내는 2029년에 이 모델은 이미 개발 10년이 넘은 구닥다리 모델인 셈이죠. 그렇다면 살해 시도를 할 때,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았을 1984년(이후의 시도는 사라 코너가 '미래에서 언제 터미네이터가 올지 모른다'고 경계하기 때문에 점점 성공 가능성이 떨어집니다)에 가장 성능이 떨어지는 T-800을 보내고, 최강의 T-X는 엉뚱하게도 가장 뒤 시간대로 보내는 이유는 뭘까요. 또 1984년에 암살에 실패했다면 그 다음에는 1983년, 1982년으로 보다 앞선 시대로 보내는 게 당연한 생각 아닐까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런 사소한 문제들이 계속 발생합니다. T3가 관객들로부터 불평을 들은 것은 영화의 만듦새가 워낙 허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포맷을 개발하지 못하고 T1과 T2에서 이미 다 써먹은 세계관과 스타일을 별 고민 없이 덧씌워 쓰기만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T3 제작진은 엉뚱하게도 바보같은 설정을 덧 씌워 이후의 속편 제작진에게 짐을 실컷 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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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존 코너의 아내 케이트죠. 미래에서 온 터미네이터가 "둘이 부부다"라고 선언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별 로맨스도 없이 그냥 커플이 돼 버립니다. 심지어 존 코너의 죽음과 케이트가 할 일까지 예언(?)을 해 버리죠. 그 바람에 어떤 속편을 만들건, 존 코너는 이미 꽉 잡힌 유부남이 되어 있어 어떤 로맨스도 불가능합니다.

또 이런 바보 짓들 때문에 T4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미래 사회에서 존 코너는 승리하는 직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을 것이고, 카일 리스 역시 1984년으로 가는 동시에 죽을 것이고, 앞으로 나올 일은 없지만 사라 코너 역시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쓸쓸히 죽을 겁니다. 한마디로 주인공들이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둘 지 모르지만 모두 비극적인 운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운명이 다 정해져 버리고 나면 영화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어차피 다 비참하게 죽을 거 아는데 뭘 저렇게 열심히 싸우고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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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심각한 문제는 존 코너의 역할에도 있습니다. 저항군을 이끄는 존 코너는 2018년, T4의 시점에서 10년 이상 더 싸워야 합니다. 혹시라도 그 전에 기계군단을 파멸시킬 기회가 생겨도, 존 코너는 그 이전에 최후의 승리를 거두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스카이넷이 시간여행 기술을 개발하기 전에 전쟁이 끝나버리면 존 코너는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이해를 못 하신 분들: 그의 아버지 카일 리스가 사라 코너를 만날 방법이 사라지면 그는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죠.) 그러니까 이길 기회가 있어도, 최소한 10년 이상은 질질 끌면서 싸워야 합니다. 아, 물론 그 전에 져서 전사해도 안되니까 존 코너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결론은, 이렇게 파면 팔수록 허점이 나오는 이야기를 굳이 4편, 5편(아마도 나오고 말 것 같습니다)까지 끌고 가면서 이야기를 질질 끌어 T1과 T2가 보여준 전설적인 완성도에 자꾸만 흠집을 낼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보면 볼수록 과거의 영광이 흐려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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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베일의 연기야 뭐 당연히 흠잡을 데가 없고, T2에 나오는 존 코너의 얼굴 상처까지 세심하게 재현한 맥G 감독도 할만큼 했습니다. 게다가 맥G 감독과 미술팀이 만들어 낸 다양한 종류의 미래 기계군단의 병기들은 참 찬탄을 자아냅니다. 플롯에서 자꾸만 발생하는 문제들을 볼거리로 덮는 데에 꽤나 성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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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배우들도 칭찬할 만 합니다. 마커스 역의 샘 워딩턴은 짧은 등장이 아쉬울 정도의 호연이었고, 문 블러드굿도 훌륭했습니다(화보로 볼 때는 몰랐는데 영화를 보니 왜 자꾸 박정아의 얼굴이 오버랩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액션 연출은 찬사를 아니 보낼 수가 없더군요.

특히나 안톤 옐친은 '스타 트렉'과 전혀 다른 모습이라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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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T3에 이어 이 영화 역시 아니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일부에서는 T4가 '인간의 심장과 기계의 몸을 가진' 마커스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메시지를 던졌다고들 하는데, 아니, 깨놓고 얘기해서 이미 10여년 전에 나온 T2에서 인간의 흔적이라곤 껍데기밖에 없는 T-800이 벌써 인간성의 요체를 깨닫고 어린 존 코너의 아버지 흉내까지 냈는데 이제 와서 인간과 기계의 구분 운운 하는 건 무슨 진눈깨비 오는데 매미 우는 소리란 말입니까. 어처구니없는 얘기일 뿐입니다.

뭐 이렇게 얘기를 해도 보실 분들은 당연히 다 보셔야겠죠. 네. 영화가 그 자체로 재미 없는 편은 아닙니다. 다만 보면 볼수록 '이 시리즈는 결국 막장으로 치닫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됩니다. 좋은 시리즈를 한창 좋을 때 끝낼 수 없다는 점, 그 점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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