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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시는대로 '잘 알지도...'는 홍상수 감독이 일찌기 보여준 패턴이 그대로 재현됩니다. 특히 '생활의 발견'을 보신 분이라면 데자부 현상이 매우 심할 겁니다. 물론 이 작품만이 아니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나 '극장전'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이 그대로 재현됩니다. 남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건 어떻게 하면 극중의 여자들과 성적으로 교접할 수 있을까 하는 것 뿐이고, 어떻게 하면 이 놈보다 좀 더 우월하고 강해 보일까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소름끼치게 리얼한 장면들이 어떻게 웃음으로 소화되는지, 지난번 요리 포맷으로 다시 꾸며 봤습니다. 아, 이 '오늘의 요리' 스타일은 영화를 보신 분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영화를 보시고 읽어 보시는 것이...
재료: 김태우 통으로 한 개. 고현정 소스, 엄지원 소스, 공형진 800g, 하정우 200g. 유준상 두 큰술, 정유미 1공기. 뒤켠에서 뜯어온 풀. 잔디도 가능. 실수해서 난초 이파리를 뜯어오면 대략 곤란.
준비물: 소주 100병, 담배 100갑. 맥주 50병.
사회자: 네,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요리는 온 세계에 한국 요리를 널리 알리고 계신 요리연구가 홍상슈 선생님입니다. 특히 비싼 재료를 싸게 써서 싸구려 요리를 맛깔나게 만드는 걸로 유명하신 분이죠.
홍: (눈을 흘긴다.)
사회자: 아, 네. 죄송합니다. 제대로 소개드리겠습니다. 유수의 세계 요리 축전에서 수상해 한국 요리의 명성을 드높이신 분입니다. 한때 또 이 분의 요리는 짙은 육향으로 유명했었죠. 돼지고기는 우물에 담갔다 조리해야 제맛이라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감자를 주 재료로 했던 '강원도의 힘',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크리스탈 그릇을 써야 맛이 난다던 '오! 수정', 그리고 우연히 조리대 근처에서 발견한 재료만 써야 한다던 '생활의 발견'... 모두 살색이 제대로 돌던 요리들입니다. 이야, 지금 생각해도 침이 넘어가네요.
홍: 인사는 안해요?
사: 아, 안녕하시죠?
홍: 엎드려 절받기구만. 대체 왜 그래요? 나에 대해서 뭘 안다구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 까칠하게 왜 그러십니까. 에이, 삐지지 마시구요. 하하. 오늘 소개드릴 요리 제목을 그냥 한번 강조해 보신 거죠? 말씀대로 요리 제목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입니다. 지지난번에 보여주셨던 '해변의 여인'과 재료가 비슷하군요.
홍: 재료가 중요한게 아녜요.
사: 네. 하긴 그렇습니다. 사실 한우 중에서도 김태우는 워낙 육질이 좋아서 뭘 해도 맛이 나죠. 얼핏 보면 좀 뻣뻣한 듯 하고 싱거운 듯도 하지만 알고 보면 제맛이거든요. 생각해보면 다른 요리연구가 분들도 육향 짙은 음식에 이 김태우를 사용하더군요. 그 뭐더라, 짙은 김혜수를 보글보글 끓이다가 김태우를 넣고 푹 고은...
홍: 얼굴없는 미녀탕.
사: 아, 네. 그겁니다. 드셔 보셨나요?
홍: 전 남의 요리 맛 잘 안 봐요.
사: 그러시군요! 네. 하긴 천재시니까. 아무튼 김태우를 어떻게 하죠?
홍: 전에도 몇번 해 봤지만, 역시 김태우는 잘게 채쳐야 제맛입니다.
사: 그렇죠.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방식입니다.
홍: 그리고 주의할 건 요리가 정확하게 절반으로, 데칼코마니 형태를 이뤄야 한다는 거죠.
사: 네. 그렇군요. 김태우를 크게 썰어서 접시 가운데 놓고...
홍: 그 전에 숙성을 시켜야죠.
사: 뭘로 합니까?
홍: 소주랑 맥주에 담가요. 꽤 담가서 소맥에 절여졌다 싶으면 담배 연기로 훈제.
사: 왠지 요리하는 광경만 봐도 속이 좀 쓰려옵니다.
홍: 내 음식 처음 봐요? 소주랑 담배연기 빼면 음식이 안 되는데.
사: 알겠습니다. 아무튼 자, 숙성 끝났습니다.
홍: 숙성 끝났으면 튀겨요.
사: 튀기니까 꽤 커지는군요? 푸짐해 보이네요.
홍: 자, 이렇게 접시에 담고, 중요한건 아까도 말했지만 좌우 대칭.
사: 그렇군요. 왼쪽에는 엄지원 소스, 오른쪽에는 고현정 소스.... 어째 고현정 소스 쪽은 소나무 냄새도 나는 것이 맛이 더 진한데요.
홍: 농도는 같아요. 뭘 안다구 그래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 (참는다) 재료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남은 재료들은 어떻게...?
홍: 뭐, 나머지 재료들은 큰 의미는 없어요. 하정우는 낫으로 큼직하게 썰어서 후라이팬에 볶으면 되고, 공형진은 좀 진을 짜내면 되고, 정유미는 그걸로 찰밥을 하면 되고... 요리가 끝나면 유준상에 올려 놓고 먹으면 되겠군요.
사: 그런데 듣고 보니 전부 말장난 같군요?
홍: 제법입니다. 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치곤 제법이군요.
사: 자꾸 그러시면 불쾌합니다. 저도 감정이 있습니다.
홍: 감정! 그거 정말 중요해요. 감정이 없으면 요리도 없지.
사: 이 음식에 들어가는 감정은 어떤 겁니까?
홍: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늘 느끼는 감정. 수컷의 감정. 그래서... 직접 맛을 보세요.
사: 네. 맛은 아주 좋은데 먹어도 먹어도 허전하네요. 뻥튀기 맛입니다.
홍: 정확해요! 이제 보니 맹탕은 아니군요. 이 요리의 주제는 수컷들의 허장성세에 대한 비판이죠. 뭘 하려고 해도 서로 더 커보이려고 하고, 그런데 그 속은 이 튀김처럼 공허하죠.
사: 그런데 이 공허한 튀김 요리는 전에도 계속 만들어 오시던 것 아닙니까. 좌우대칭도 그렇고... 뭐 하나 새로운게 없는데요? 대체 이런 요리는 왜 만드는 겁니까?
홍: 그런 유치한 식견으로 요리 프로 진행을 해도 되는 건가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 에잇 정말. 유치해서 더 이상 못 보겠네. 다음부터 만나지 맙시다. 그리고 다음에 내가 한 얘기로 요리 설명하는데 써먹지 말아요!
홍: 당신이 이 요리의 맛을 모른다면 그건 인생을 모르는 거에요. 인생을 알면 알수록 이 요리의 진미가 느껴진다구.
사: 인생을 살아본 사람 중에도 댁의 요리 싫어하는 사람 많다구요.
홍: 물론이지. 왜 그런지 알아요? 그건 자기 살을 씹는 기분이기 때문에 그런 거야. 음식을 먹을 땐 음식의 재료와 자신을 떼놔야 하는 법이거든. 개고기 못 먹는 사람들은 개에 대한 애착을 못 버려서 그런 것처럼. 마찬가지로 자기 살 씹는 느낌인데 요리 맛이 나겠어.
사: ...듣고 보니 제법 그럴듯한데요?
홍: 그럴듯하긴 뭐가 그럴듯해? 이게 다 사기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끔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놓고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해석이란 대개 현실과 동떨어진 것들을 현실의 언어로 푸는 걸 말하는데, 더 이상 리얼할 수 없는 영상을 보면서 그걸 해석이라는 빌미로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가끔 어려운 심리학 용어까지 등장시켜가면서 말이죠.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열한 야심을 비웃고, 낄낄거리고 웃다 나오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본 값는 다 하는 셈입니다. 아, 물론 몇몇 작품들은 안 그런 부분이 있죠. 그래서 저는 '생활의 발견' '오 수정' '해변의 여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순으로 홍감독의 작품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도 그 계열에 서 있는 것 같군요.
아무튼 이 영화에서 최고의 선택은 제목입니다. 뭐라 말하건, 어떤 상황이건 써먹을 수 있는 말입니다. 저라고 이런 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죠. '뭘 안다고 이렇게 주절거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요리 시리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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