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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 딸 원더걸스의 빌보드 싱글차트 상륙이라는 승전보가...라는 식의 70년대식 표현을 쓰고 싶은 나날입니다. 원더걸스가 빌보드 싱글100 차트에 76위로 올라갔더군요. 대한민국 대중음악사의 경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정말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동안 어설프게 '빌보드 마케팅'에 나섰던 몇몇 팀들이 있긴 했지만 사실 전부 군소 차트들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대중음악전문지 빌보드가 내놓는 차트는 수십가지죠. 그래도 그 중에서 핵심은 핫100 싱글 차트와 핫 200 앨범차트입니다. 물론 아직도 빌보드 차트가 판매량 순위라고 알고 있는 분들도 있지만, 빌보드 차트는 음반의 판매량과 예상 판매량, 방송 회수 등의 여러 가지 지표(물론 구체적인 내용은 빌보드의 영업 비밀로 되어 있습니다)를 종합해 매겨지는 '예측 순위'입니다. 즉 빌보드 차트상의 순위는 '우리가 예측하건데 2주 뒤면 이런 판도가 형성될 것'이라는 의미의 예상 차트라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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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미국 대중음악계에서 부동의 권위를 갖고 있는 빌보드 차트에서 원더걸스가 인정받았다는 점은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이들은 미국 활동을 하는 동안, 별 희한한 말들을 다 들어야 했었죠. 언플(언론 플레이)이다, 과대포장이다, 그러다 한국에서도 잊혀지고 공중에 붕 뜬다... 참 요란했습니다.

어쨌든 이제 첫 성공을 거뒀으니 모두 옛날 일로 웃어 넘길 일입니다. 그런데 모든 기사마다 '원더걸스는 아시아에서 데뷔한 가수 가운데 네번째로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올랐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원더걸스에 앞서 빌보드에 상륙했던 아시아 가수들은 모두 일본 소속이었습니다. 그럼 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이들이 걸은 길을 보면 원더걸스의 방향도 잡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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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을 따지자면 무려 196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일본인은 물론 아시아 출신 가수로서는 처음으로 빌보드 싱글 차트에 오른, 그것도 영어 가사도 아닌 일본어 가사로 된 노래로 오른, 심지어 그냥 차트에 오르기만 한 게 아니라 무려 3주간이나 1위를 한 가수의 이름은 사카모토 큐(坂本九)입니다. 그리고 노래는 흔히 '스키야키(Sukiyaki)', 혹은 '스키야키 송'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제목이 참 특이합니다. 아시다시피 스키야키는 불고기와 비슷한 일본의 쇠고기 전골 요리 이름이죠. 물론 원제가 아닙니다. 원제는 '위를 보고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 였습니다. 그럼 대체 왜 미국에선 엉뚱한 제목을 갖게 된 거냐, 뻔한 얘깁니다. 일본어로 된 노래 제목을 외우지 못하는 미국 음악 관계자들이 그냥 친숙한 일본 요리 이름을 써서 '스키야키 송'이라고 불러 버린 겁니다. 또 처음 이 곡이 미국에 소개될 때에는 연주곡이었기 때문에 가사 내용은 아무 상관 없었습니다. 어쩌면 '스시 송'이나 '템푸라 송', '우동 송'이 될 수도 있었단 얘기죠.

(미국식이란 건 가끔 이런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원더걸스도 노래 제목이 '노바디'였으니 망정이지 '총맞은 것처럼'이었다면 그냥 '김치찌개송'이나 '비빔밥송'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졌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 노래는 애조를 띤 듯 하면서도 가볍고 산뜻한 멜로디 덕분에 전 세계적으로 히트했고, 1000만장 이상의 판매를 기록했습니다. 수십명의 가수들이 이 노래의 리메이크에 나섰고, 그중 가장 히트한 곡은 1981년 여성 듀오 테이스트 오브 허니(A Taste of Honey) 버전입니다. 싱글 차트 3위에 올랐습니다. 그래도 원곡만은 못했네요.
 "

그리고 나서 한참 세월이 지난 뒤, 1979년 핑크 레이디가 다시 세계 무대를 노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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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1979년 'Kiss in the Dark'로 빌보드 싱글 차트 37위에 오르며 Top 40 안에 드는 성공을 거뒀고, 역시 세계적으로 유명해집니다. 특히 서울 국제가요제에 참가해 그랑프리를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한국의 문물 수준으로는 빌보드 싱글차트 37위의 노래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지만, 서울 국제가요제의 영향으로 핑크 레이디는 꽤 유명해졌습니다. (저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는데 서울 국제가요제가 아닌 다른 행사였고, 그랑프리가 아니라 특별 초청 공연이었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지금은 확인이 힘들 듯 합니다만 이 분들의 지적이 맞는 듯 합니다. 추가 정보 환영.)

심지어 미국에서도 말입니다. 미국 TV에 처음 소개된 핑크 레이디의 모습입니다. 그들을 소개하는 사회자의 얼굴을 보시면 깜짝 놀랄 분들도 있을 겁니다. 바로 이 시절, 숭의음악당에서 내한 공연을 해 한국 언니들을 자지러지게 했던 레이프 개릿이기 때문입니다.

 

노래가 참 묘하다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무렵, 디스코의 물결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저 스타일이 첨단 유행이었습니다. 바로 같은 해에 아니타 워드가 명곡으로 꼽히는 'Ring My Bell'로 인기가도를 달립니다.

다이나믹 듀오에 의해 리메이크됐던 바로 그 노래입니다.

 

정말 비슷한 느낌 아닙니까?

하지만 핑크 레이디의 선풍적인 인기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한번도 진지하게 미국을 활동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어디까지 이들의 시장은 일본이었습니다), 미국 진출 2년만인 1981년, 핑크 레이디라는 체제로는 일본 음악 시장에서 성인으로서의 미래가 없다는 판단 하에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합니다. 그리고는 꽤 성공적인 솔로 활동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아마 세계적인 디스코 열풍의 퇴조도 한 몫을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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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 1년 뒤인 1980년, 일본이 자랑하는 '시대를 앞서간 트리오' YMO가 1978년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Computer Game'으로 뜻하지 않은 성공을 거둡니다.

이 곡의 히트와 함께 YMO는 앨범 2장을 빌보드 앨범 차트에 올려놓는 쾌거를 이룹니다. 하지만 요즘의 시각에서 보면 대체 어떻게 이런 노래가 히트할 수 있었는지 어처구니없어 하실 분들이 꽤 될 겁니다. 6분이란 긴 러닝타임에 도입부만 1분30초, 백남준 선생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난해한 화면 등이 그렇습니다.

YMO는 일본에서 1978년, 사카모토 류이치(키보드), 타카하시 유키히로(드럼), 호소노 하루오미(베이스)가 모여 결성한 일렉트로니카 그룹입니다. 그야말로 '최소한 10년 이상은 빨랐다'고 평가받는 혁신적인 뮤지션들이었죠. 문제의 노래 'Computer Game'입니다. 고전 게임에 익숙하신 분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펙트가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 이번 원더걸스의 쾌거를 보도한 국내 매체들의 기사를 보면서 좀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의 모든 매체가 YMO를 '옐로우 멍키 오케스트라' 라고 표기해놓고 있더군요. YMO는 YELLOW MAGIC ORCHESTRA의 약자입니다. MAGIC이 어쩌다 MONKEY가 돼 버린 걸까요.

거의 모든 매체가 공히 틀린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보도자료 배포 축의 실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쨌거나, 자료를 받으면 그 자료를 검증해 보려는 노력이라곤 전혀 하지 않는 매체가 이렇게 많다는 게 다시 한번 드러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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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YMO는 무명 뮤지션도 아닙니다. 최소한 그 멤버들 중 한 사람은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다시 성장했습니다. 바로 '마지막 황제'의 음악을 맡았던 사카모토 류이치가 그 사람입니다.

 

아무튼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초까지 일본 대중음악은 세계와 리얼 타임으로 맞붙을 수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장르도 다양했죠. 이 무렵에 등장한 메탈 밴드 라우드니스도 앨범을 빌보드 차트에 올려놓는 저력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90년대를 거치면서 그런 도전정신이나 경쟁력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90년대 일본 최고의 프로듀서였던 고무로 테츠야를 비롯, 아무로 나미에에서 우타다 히카루까지 수없이 많은 빅 스타들이 미국 시장 상륙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흔히들 말하듯 일본 음악시장이 거대해지면서 굳이 세계 무대를 노릴 의욕을 느끼지 못했다든가 하는 이유만으로 설명하기엔 '진출'을 시도한 톱스타들의 면면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대체 왜 일본 대중음악이 80년대 초의 에너지를 잃었는지는... 누군가 알고 있겠죠.^ 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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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레이디와 비교해 볼 때 원더걸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나이도 어리고, 영어 실력도 점점 나아질 겁니다. 뭣보다 미국 사정을 잘 알고 비즈니스 감각도 뛰어난 프로듀서가 아예 옆에 붙어 있다는 것도 꽤 바람직한 상황입니다.

이번 진입은 그저 시작일 뿐입니다. 이번 일도 대단히 기쁘고 의미 깊은 일이지만, 앞으로 원더걸스가 어디까지 성장할지는 바로 지금부터 지켜봐야 할 일이라는 게 더욱 보는 사람을 기대하게 합니다. 아무쪼록 더 나은 모습이 있길 바랍니다.

뮤직비디오는 국내에서 만든 걸 그대로 쓰는 모양이더군요. 아직 못 보신 분들이라면 원더걸스의 영어 발음을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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