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개는 '투쟁'이라는 말이 뒤에 붙어야 한 단어가 완성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가끔 눈에 띄는 '단식원'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한가하거나, 뭔가 숭고한 대의를 조롱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후자의 이유로 단식을 하는 사람들에겐 그 나름대로의 절박한 사연이 있을테지만요.
한국이라는 시공간에서 단식이라는 위협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좀 남용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억압하는 쪽이나, 억압받는 쪽이나, 느낌표와 과장법이 지배하던 시대의 유산에서 아직도 세상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겁니다. 분명히 '단식'이라는 것은, 시도하는 사람이 "나는 지금 내 목숨을 걸고 나의 주장의 관철시키려 하고 있으며, 이 의지를 세상 사람들이 알아 주었으면 한다"는, 절박하고도 비상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일 때 진실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죽고 사는' 정도의 절실한 문제가 아닐 때 과연 이런 투쟁의 방식이 필요한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얼마 전 김영오씨의 단식투쟁이 세상의 주목을 끈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듯 합니다. 너무 흔해진 줄 알았던 '단식투쟁'의 의미가 이렇게 절박하고 절실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환기시켰으니까요.
단식 [명사] 斷食. 스스로 음식 섭취를 중단함.
단순히 밥을 먹지 않는다고 단식이 되지는 않는다. 일단 주체적인 의지를 갖고 음식 섭취를 중단한다는 점에서 단식은 의학적 목적으로 음식 섭취를 막는 금식(禁食)과 구별된다. 아울러 우리 말의 ‘단식’에는 영어의 fasting과 hunger strike, 두 가지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영어의 fast가 ‘빠른’이란 의미 외에 ‘단식’이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은 아침식사를 가리키는단어 ‘breakfast’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즉 밤 사이 잠을 자느라 어쩔 수 없이 했던 단식(fast)을 깨는(break) 것이 바로 아침식사라는 얘기다.
엄밀히 말해 ‘단식 투쟁’으로 번역할 수 있는 hunger strike는 인류사 전체를 돌이켜 볼 때 그리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행동양식이 아니다. 20세기 이전 인류 문명의 대부분 지역에서, 절대 다수의 피지배 계층에게 있어 기아(飢餓)는 형벌이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식량의 절대 생산량이 부족하던 시대에 만약 별 지명도 없는 인물이 “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굶어 죽겠다”고 적을 위협했다면 그 적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 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물론 단식을 감행하는 사람이 평소 큰 명망과 존경을 얻고 있는 사람이라면 달랐을 수도 있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패트릭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정의에 반하는 일을 하는 이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로 단식을 행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전통 탓인지 영국의 통치에 맞선 아일랜드 독립투사들 중 많은 수가 옥중에서 단식 투쟁으로 숨졌다. 1920년 무려 94일간의 단식으로 기네스북 기록을 갖게 된 피터 크로울리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1981년 3월1일, 보비 샌즈를 비롯한 10명의 IRA(아일랜드 공화군) 전사들은 자신들을 전쟁 포로 아닌 일반 죄수로 취급하는 영국 정부의 태도에 항의하며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순차 단식에 들어갔다. 첫 희생자인 샌즈는 66일만인 5월5일 목숨을 잃었고, 다른 9명도 차례로 소금과 물만을 섭취하며 버티다 차례로 숨져 갔다 마지막 주자 마이클 디바인이 숨진 것은 8월20일이었다.
이런 일이 빚어지는 동안 영국 미디어의 헤드라인은 로열 웨딩의 화사한 뉴스로 도배되고 있었다는게 놀라울 뿐이다. 그해 2월24일 약혼한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커플은 7월29일 런던 세인트폴 예배당에서 전설적인 결혼식을 올렸다. 테러리스트라면 테러리스트지만, 열명의 젊은이가 차가운 감방에서 수개월에 걸쳐 스스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꽃가루를 뿌리는 초대형 결혼 이벤트가 펼쳐졌으니, IRA와 동조자들의 입장에선 피가 끓어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정부에도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쏟아졌으나 이들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의 행정부다웠다.
단식 투쟁으로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일도 끔찍하지만, 더 심각한 폭력은 단식을 강제로 중단시키기 위한 강제급식(force-feeding)이다. 얼핏 생각하면 단식으로 죽어 가는 사람에겐 강제로라도 음식을 먹여 생명을 구하는 것이 더 인도적일 것 같지만, 세계 의료협회(WMA)는 1975년 전 세계 수감자들에 대한 가혹행위를 막기 위한 ‘도쿄 선언(Declaration of Tokyo)’ 제 7항에서 모든 의사들은 일체의 강제급식 행위에 참여해선 안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단식 투쟁은 구금상태에 놓인 사람의 선택이며, 이를 강제로 막는 것이야말로 인권에 반하는 일이라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불행히도 단식이 아름다운 결과를 빚어낸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마도 가장 동화 같은 이야기는 1948년, 마하트마 간디가 펼친 마지막 단식이 아닐까 싶다.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을 쟁취한 인도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반목으로 심각한 내전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간디는 1948년 1월13일, 모든 계파가 유혈사태를 멈추고 평화에 동참할 때까지 식음을 전폐하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식민주의와 맞서 평생 비폭력의 길을 걸으며 수시로 단식 투쟁을 감행한 간디였지만 이미 79세. 단식을 한다면 며칠 버티지 못할 것임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5일만인 1월18일, 인도 전역에서 총성이 멎었고 100여명의 각 종교 계파 지도자들이 간디의 처소 앞에 집결해 제발 단식을 중단해 달라고 호소했다.
불행히도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12일 뒤인 1월30일 간디가 권총으로 저격당해 숨지며 비극으로 끝났다. 범인은 힌두교 광신자 나투람 고드세로 밝혀졌다. 그의 총알은 인간애에 대한 호소, 비폭력 수단에 의한 투쟁이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 역시 산산조각을 냈다. (끝)
인도는 2차대전 종전과 함께 독립국이 됩니다만, 종교로 인한 분리는 피하지 못합니다. 힌두교가 절대 다수인 인도를 남긴 채 1947년 이슬람교 우세 지역인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가 독립했고, 역시 불교 우세 지역인 스리랑카도 다른 나라가 됐지요. 아무튼 이런 분리 이후에도 온 나라가 심각한 종교 분쟁에 휘말려 죽고 죽이는 피바람이 일 때였습니다.
이 시점에서 간디는 원초적인 형태의 단식에 들어갑니다.
간디의 일생을 다룬 5시간 짜리 다큐멘터리. 4시간48분부터 이 최후의 단식에 대한 기록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79세의 나이에 단식에 들어간 겁니다.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의 1982년작 '간디'의 후반부.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단식 5일째인 간디에게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지도자들이 찾아와 더 이상의 유혈 사태가 없을 것을 약속하며 단식을 중단해 달라고 사정하는 장면.
무슬림들에게 자식을 잃은 복수로 자신도 무슬림의 아이를 죽였기 때문에, 자신은 지옥에 갈 거라는 힌두 전사에게 간디는 "지옥에 가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다"고 말합니다. "잃은 아들과 비슷한 또래의 부모 없는 아이를 데려다 키워라. 단 그 아이는 무슬림의 아이여야 하고, 무슬림으로 길러져야 한다."
간디의 만년 이야기가 영화적인 과장이 아닌, 실제 역사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1948년의 세상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인간적인 곳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시절엔 저런 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지막으로 윗글에서 언급한 도쿄 선언의 제 7조 전문.
Where a prisoner refuses nourishment and is considered by the physician as capable of forming an unimpaired and rational judgment concerning the consequences of such a voluntary refusal of nourishment, he or she shall not be fed artificially. The decision as to the capacity of the prisoner to form such a judgment should be confirmed by at least one other independent physician. The consequences of the refusal of nourishment shall be explained by the physician to the prisoner.
수감자가 자의로 단식에 들어갔을 때, 의사는 그 수감자의 판단을 무시하고 비자발적인 강제급식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물론 스스로 마지막 순간을 맞지 않도록 단식을 중단시키기 위해 환자의 몸 상태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는 내용도 덧붙여져 있죠).
누군가 단식투쟁을 하고 있을 때, '인도적인 결정에서' 죽지 않게 보살펴 주자는 이유가 아니라, 그 수감자가 죽어서 영웅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강제 급식(force-feeding)'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단식 투쟁과 거의 비슷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 강제 급식은 그 자체가 고문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도쿄 선언은 '양심적인 의료인이라면' 거기 동참하지 말라고 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강제급식은 유명한 미국의 관타나모 수용소를 비롯해 수많은 감옥에서 현재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보비 샌즈의 투쟁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스티브 맥퀸 감독의 영화 '헝거'를 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아울러 주변에서 '진짜 목숨을 걸지 않은' 단식을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한번쫌 보시라고 권해도 좋을 듯.
문득 근 30여년 전. "단식할 때 정말 아무 것도 안 먹니?" "물은 먹죠." "그것밖에 안 먹어?" "가끔 사탕 정도는 먹죠." "또. 그게 다야?" "저녁엔 초콜렛 정도는 먹어야 해요. 그래야 안 쓰러져요." 이런 바보같은 대화가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잘 나가고 있는, 상대방은 혹시 이 대화를 기억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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