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올해들어 가장 잘한 일: 개봉관 부족과 묘하게 엇갈리는 일정을 무시하고, 만사를 다 제치고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극장에서 본 거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집에서든 어디서든 봤더라면 분명히 후회했을 듯.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자 자신의 모든 영화 음악을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맡겼던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위대한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에 대한 인류의 추억'을 다큐멘터리로 정제한 작품이다. 누가 언제 이런 영상을 기획한다 해도 최고의 적임자일 수밖에 없는 토르나토레가 감독을 맡아 극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너무나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일찍 본 사람들 중 눈물 나더라는 사람이 많아서 아저씨들이 왜 주책...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안하다. 나도 펑펑 통곡.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생전 시간 순으로 진행되는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에서 그냥 목놓아 울어 버렸다.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2. 스포일러는 딱히 없지만 고만 읽고 빨리 영화를 보러가라. 열려 있는 관들은 꽉꽉 차는 것 같기는 한데, 워낙 상영관 수가 적어서 언제 닫힐지 알 수 없음.
3. 1987년 아카데미상 시상식은 내 기준으로는 분노의 한마당이었다. 7개 부문 후보에 올랐던 <미션>이 작품상/감독상은 <플래툰>에게, 음악상은 <라운드 미드나잇>의 허비 행콕에게 밀려 촬영상 하나 받고 끝나는 걸 보고, 알만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같이 분노했다.
뉴욕출신 진보 유태인이란 아카데미의 성골 올리버 스톤이 미국 고인물들이 죽고 못 사는 월남전이라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으니 <플래툰>의 싹쓸이는 어쩌면 당연. 그래도 <미션>아닌 다른 작품에 음악상을 수상한 건 오스카의 흑역사로 남을만 하다. 이 찌질한 로컬 잔치에 이 무식한 미국 놈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1987년의 젊은이들은 누구나 반미의 선봉에 섰다. 이해하기 바란다).
뒤늦게 아 우리가 미쳤었구나 깨달은 아카데미는 일단 공로상 드릴게요 한 뒤에 타란티노의 <헤이트풀8>로 잘못했습니다 시전. 굳이 차별이라기보다는 그래미가 제프 벡 젊었을때 했던 짓처럼, 그냥 미국 꼰대들(아카데미상은 원래 그 시대의 꼰대들이 뽑아왔다) 20세기까지는 참 무지했다는 증거.
아무튼 모리코네의 6회 노미네이션은 <천국의 나날>, <미션>, <언터처블>, <벅시>, <말레나>, 그리고 <헤이트풀8>. 당연히 다 좋은 음악들이지만, 모리코네의 팬이라면 <미션>을 제외하고 후보로 오른 작품들이 과연 모리코네의 베스트인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미션>의 수상 실패가 워낙 충격적이라 그렇지 6회 지명-1회 수상이 그렇게 불운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12회 지명-2회 수상의 한스 짐머나 무려 48회 지명(!!!)-5회 수상의 존 윌리엄스를 보면 수상/지명의 비율은 그리 나쁜 편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무법자 3부작이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시네마 천국> 등이 후보로도 꼽히지 않은 것은 역시 '로컬'임을 자인하는 안목 부족 외의 다른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나중에 기회가 오면 아카데미 음악상의 지명-수상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난맥상을 파보는 것도 코믹할 것 같다. 정말 들여다보니 기가 막히다.)
4. 1928년 로마에서 트럼펫 연주자의 아들로 태어나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에서 공부한 정통 클래식 신동 모리코네는 한동안 '클래식을 배신한 저질' 취급을 받았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본인도 영화음악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는 것.
문득 생각난 일화: 한국의 성공한 드라마 작가가 고향에 갈 때마다 예전 학창시절 같이 신춘문예 준비하던 문학서클 선후배들을 불러 3차까지 밥사고 술을 산다는데, 그렇게 얻어먹고 얼근히 취한 선배가 꼭 하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우리 **이도 조금만 더 참고 노력했으면 참 훌륭한 문인이 됐을텐데..."
그러니까 열심히 문학의 길을 걷다 TV 드라마 작가가 된 건 문학에 대한 배신이란 얘긴데, 놀랍게도 현역 드라마 작가들 중 은근히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더라는. 그러니 모리코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해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
아무튼 <미션>도 아니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때에서야 모리코네의 스승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현대 음악의 거장들이 '아, 이 친구가 정말 좋은 음악을 하고 있구나' 하고 탄복해서 사과 편지를 보냈다니. 참 이 분들도 대단한 분들일세.
5. 실제로 모리코네는 누가 들어도 바로 귀에 쏙쏙 꽂히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거장이면서, 동시에 누가 들어도 어색한 현대음악 작곡가였다. 영화에도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다'고 했을 정도. 물론 만년에는 '그 둘이 하나로 마침내 합쳐졌다'고 말하는 순간도 온다.
아무튼 남의 곡을 섞어 쓰지 않겠다는 이유로 프랑코 제페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음악 맡기를 거부했다는 모리코네. 유난히 '내 영화는 내 곡으로 채운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은 모리코네. <엔니오>를 보고 나서 의문이 하나 떠오른다. 그렇게 남의 곡 쓰기를 싫어했던 모리코네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비틀스의 예스터데이를 쓴 이유는 무엇일까?
6. 문득 든 생각. 1960-70년대의 이탈리아 영화는 얼마나 쿨하고 다양했는지. 데시카, 펠리니, 파졸리니,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 감독과 배우들이 만든, 군데 군데서 다니엘라 비앙키, 비르나 리지, 줄리아노 젬마, 로드 스타이거 같은 배우들과 마주치며 깜짝 놀라게 된다.
아주 저렴하고 우수 넘치는 형사물과 스파게티 웨스턴들이 쏟아지던(두 장르 모두 모리코네의 단골이다) 시대. 영어 발음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할리우드의 부름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의 미녀들(그 리스트의 맨 끝에 모니카 벨루치가 있다)이 넘쳐나는 영화들.
지금은 볼 길도 없는 그런 영화들이 엄청나게 그립다. 그런 영화가 극장에 걸리고, 사람들이 극장에서 그런 영화들을 보던 시절이, 겪어보지도 못한 그런 시절이 참 그립다.
아마도 이탈리아 영화계의 적자인 토르나토레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왕년에 이런 영화들이 있었다는 걸 소개할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토르나토레가 요약한 이탈리아 영화사, 아름다웠다.
7.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모리코네의 멜로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의 테마. 가끔 모리코네의 음악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이 영화를 좋다고 생각할 것인가 의심하게 될 때가 있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꿰뚫는 주제가 있다면 - 물론 500여편의 영화 음악을 맡았던 모리코네인 만큼 분명히 그 500편을 꿰뚫는 단일한 주제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아는 영화와 아는 음악의 한도 안에서 볼 때 - 그 주제는 '회한'이라는 단어로 요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어느새 사람을 과거로 데려가 그 시절 내가 이루지 못한 것, 내가 달리 생각하고 달리 행동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랬더라면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에 이르게 만든다. 분명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어떤 감정. 그런 감정을 끌어올리게 하는데 - 심지어 겪어 본 적도 없는 과거에 대한 감정을 만들어 내는 마법을 포함해 - 모리코네를 능가할 만한 장인은 없다고 생각한다.
8. 가장 많은 코멘트를 하는 사람은 한스 짐머고, 존 윌리엄스도 몇 장면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면 두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존 윌리엄스는 아마도 스필버그에게 전화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이봐, <엔니오> 봤어? 나는 루카스보다는 당신이 하나 만들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둘이 공동으로 감독해도 좋을 것 같고."
한스 짐머는 누구에게 전화해야 할까. 리들리 스콧? 혹시 마이클 베이? ㅎ
아무튼 RIP, 마에스트로.
P.S.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세계를 이야기할 때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3부작을 꼽지 않을 수 없는데,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하지만 한글 제목이 엉터리다. 이 3부작의 제목은 한국에 수입 개봉되었을 때 붙여진 제목대로 <황야의 무법자>, <석양의 무법자>, <석양에 돌아오다>라야 한다. 어느 무허가 비디오 제작자가 3편에 2편의 제목을 마음대로 붙이면서 이상하게 굳어진 케이스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찌기 분개한 적이 있다.
뭐 어차피 그깟 옛날 영화 제목 하나...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외국 영화가 수입됐을 때 원제를 직역한 것이든, 거기서 응용해 새로운 제목을 붙인 것이든, 제목에는 생명이 있다. 그 제목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자들이 1차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영화 깨나 봤다는 사람들이 그런 잘못을 계속 답습하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다. <내일을 향해 쏴라>를 어느날 갑자기 "이제부터 이 영화는 <부치와 선댄스 키드>라고 부르기로 합시다"라고 하면, 그냥 그걸로 끝인가 말이다.
1. 또 시간여행과 멀티버스. 플래시의 능력이 '빛보다 빠른 속도'로 설정되었을때부터 시간여행 이야기는 언젠가 나오는게 필연이었겠으나, 막상 보고 나니 좀 그렇다. <플래시>의 리부트라기보다 <백투더 퓨처>의 리부트 느낌.
2. 대체 왜 마블이고 DC고 멀티버스에 꽂혀서 이 난리인가. 다른 평행세계의 스파이더맨, 다른 세계의 닥터 스트레인지... 결국 이런게 다 이제 슈퍼히어로가 빌런과 싸워 지구를 지키고 인류를 지킬수 있다는게 너무 뻔하고 순진한 소리란 생각이 널리 퍼진 결과 아닐지. 지난번 <가오갤3> 때의 생각 반복.
3. 그런 의미에서 '플래시'는 추억 총소집으로 팬들을 감격시키는데 성공. 특히 가족애를 테마로 한 슈퍼마켓 신은 눈물이 찔끔 나오는 감동. 그동안의 수없이 반복된 리부트와 리빌딩이 결국은 멀티버스였다는 스토리텔링은 보너스. (근데 크리스찬 베일은 왜 왕따인가)
하지만 이 감동이 DC를 구원할수 있을지. 거기에 대해선 비관적이다. <슈퍼맨 레거시>? 글쎄.
4. "OH! FLASH! I LOVE YOU!" 이거 혹시 퀸의 명곡 'Flash' 에 대한 오마주인가? 이보다는 훨씬 노골적인 <쇼생크 탈출> 오마주 매우 웃겼다.
4-1. 감독이 시카고 팬인지. 왕년의 시카고 팬이라면 모를 수 없는 명곡이 두곡 나온다. 음악의 활용은 벌써부터 제임스 건의 영향인지 <가오갤> 느낌이 물씬.
5. 역시 내가 DC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배트맨의 캐릭터를 매우 싫어하기 때문이란걸 재확인. 다크나이트고 뭐고... 태생이 고구마다.
6. 에즈라 밀러는 연기력도, 역할 해석도 매우 훌륭하다. 18세 배리의 성격이 좀 짜증나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는 성격. (이 리뷰를 작성하고 나서 얼마 뒤 에즈라 밀러의 과거 행각을 들음. 아마도 미국에서 <플래시>의 흥행이 박살 난 데에는 밀러의 역할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생각됨. 그런데도 미국 영화가에서는 "제임스 건이 이끄는 새로운 DC 세계에서도 에즈라 밀러는 계속 출연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알 수 없는 일.)
하지만 <플래시>의 가장 큰 성공은 역대 최고의 슈퍼걸 사샤 카예라고 생각. 등장, 각성, 캐릭터, 외모 모두 최고다.
7. 플래시의 캐릭터 중 최강의 먹방 히어로라는 점은 왜 충분히 상품화되지 않았을까. 단적인 예로 왜 플래시 초콜렛바 같은게 없을까? 에너지 보충을 위해 뛰면서도 줄창 먹어야 하는 플래시와 딱인데.
8. 결론: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2> 이후 지금까지 본 DC 영화중엔 최고. 하지만... DC를 되살리기엔 너무 늦은건 아닌지.
존경하는 작가 테드 창이 파이낸셜 타임스( FT)의 AI 에디터인 마두미타 무르지아( Madhumita Murgia, 어느 쪽 이름인지 짐작이 안 가는...)와 나눈 인터뷰. 아마도 Lunch with FT 라는 고정란이 있는 듯 합니다. 저명 인사들과 데스크 급 기자들이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눈다는 형식인 듯. 음식 이야기가 꽤 상세히 나옵니다.
더듬더듬 내용을 읽어보다가 그냥 번역을 해 버리기로 했습니다. 물론 번역기의 도움을 받았고, 받았는데... 어느 정도는 괜찮았지만 중간 중간 어이없는 오역이 꽤 있어서 그걸 다듬어서 읽기 편하게 한 정도입니다.
혹시 필요하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원제는 아래 있는대로 Sci-fi writer Ted Chiang: "The machines we have now are not conscious" 입니다. 기자가 먹는데 너무 정신이 팔려 질문을 제대로 안 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아무튼 기계가 쓴 글에서 아무런 영혼을 느낄 수 없었던 저는 창의 주장에 매우 동의합니다. 물론 모든 글이 영혼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고, 어쨌든 인간은 일시적으로든 영구적으로든 아주 사소한 위안이라도 기계가 줄 수 있으면 그걸 원할 것이라는 말을 포함해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AI가 하는 대답들이 사실은 통계학적 정밀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AI라는 이름 대신에 응용통계(Applied Statistics)라고 불러야 한다는 창의 주장을 지지하지만, 기존의 응용통계를 가르치고 배우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 한번 슉 읽어보시길.
내가 테드 창에게 점심 식사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 그가 쓴 이야기들처럼 – 간결하고 정확했다. "나는 AI의 현재와, SF가 그것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어 기쁩니다."라고 그는 답장했다. "하지만 저는 제 사생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점심 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창의 개인적인 삶이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 있는 세계들이다. 이 중국계 미국인 작가는 그가 30여 년 동안 쓴 18편의 단편 소설로 여러 개의 주요 상을 수상한, 그의 세대에서 가장 칭송받는 SF 작가 중 하나다. 외계종 생물과 의사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언어학자에 관한 그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할리우드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로 만들어졌다.
창의 여러 작품들은 그의 독특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 단순함, 과학적 엄격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독창성.그의 단편 중 하나인 '우리가 해야 할 일'에서, 프레딕터라고 불리는 장치는 인류를 미치게 만든다.이 장치는 버튼과 녹색 LED 조명으로 구성된 자동차 리모컨과 같다. 인간이 버튼을 누르기 1초 전에 항상 불이 깜박인다. 사람들이 그것을 능가하려고 할 때, 그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 개념은 이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 의지의 결핍과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그것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모두 2페이지 반으로 되어 있다.
(해석자 주: 프레딕터는 인간이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하든 그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고, 인간은 어떻게 해서도 그 결과를 바꿀 수 없다는 의미를 던져주는 가상의 기계. 만약 '불이 켜진 뒤에 안 누르면 되잖아'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그 불은 영원히 켜지지 않는다. 이 기계의 등장 이후 인간 사회는 자유의지란 없었음을 깨닫고 좌절에 빠지는 사람들로 인해 대파란에 빠진다.)
우리는 창이 수년간 아내와 함께 살았던 시애틀에서 강 건너편에 위치한 워싱턴 주의 잎이 무성한 벨뷰에 위치한, 그리 격식을 따지지 않는 지중해식 레스토랑에서 만나기로 했다. 창은 55세의 날씬하고 여윈 몸집에 주름없는 얼굴과 긴 포니테일로 묶은 회색 머리를 하고 자신감 있게 걸어왔다. 그는 흰색 티셔츠와 크림색 바지를 입었다. 그는 공손하지만 대개의 질문에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제가 동부 해안지역에서 자랐다는 것을 알고 종종 놀랍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제가 항상 생각하는 만화가 존 캘러핸의 만화가 있습니다. 뉴욕과 LA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작은 기준 같은 것입니다. 뉴욕에서는, 그 사람이 '퍽 유!'라고 말하지만, 생각풍선(말풍선 대신 속마음을 보여주는)에 쓰여 있는 내용은 '안녕하세요!'입니다. 그리고 LA에서는 사람들이 '안녕하세요'라고 말하지만, 실제 속뜻은 '퍽 유!'입니다." 그는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확인했다. "하지만 저는 조용한 편인 것 같아요."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 회사들을 방문하고 바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요즘 모든 사람의 머릿속은 대화와 질문에 응답하며 인간과 같은 문장과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소프트웨어인 '생성형 AI'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새로운 도구를 발명한 실리콘 밸리의 발명가들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술과 함께 온, 전례 없는 철학적 도전에 맞서고 있다.
이것들은 창의 작품 독자들과는 매우 친숙할 주제들이다. 언어와 인지의 관계, 초인적 지능의 의미, 그리고 궁극적으로 세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의 변화하는 본질과 같은 것들 말이다.
우리가 주문하기도 전에, 웨이터를 겸하고 있는 주인이 매운 붉은 렌틸 수프 두 그릇을 들고 나타났다. 그 맛은 즉시 내 미각을 깨웠다. 짜고 자극적이었다. 우리가 깊이 파고들면서, 치앙은 그의 사색적인 방식으로, 그의 허구적인 세계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불편하게 가까워지고 있다는 저의 관측에 대해 짚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기계들은 의식을 가진게 아닙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 그것은 의식 사이의 상호작용입니다." 반면 AI 모델은 원하는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모델의 다른 변수 간 연결 강도, 또는 소위 "가중치"를 변환하는 과정을 통해 훈련된다. "아이를 가르칠 때 네트워크에서 가중치를 조정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실수일 것입니다."
작가로서, 창의 비판의 핵심은 이 모든 것을 묘사하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단어들에 대한 불만이다. AI 엔지니어나 언론이 챗봇(ChatGPT) 등에 투영하는 '학습', '이해', '알다' 등의 의인화된 단어들이나 '나' 같은 인칭 대명사가 (마치 그것이 의식을 가진 존재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환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성급한 받아쓰기 때문에 우리 모두, 심지어 이러한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AI 도구에게서 마치 그것이 감각을 갖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된다고 그는 말한다. 사실은 텅 비어 있는데 말이다.
"얼마 전 트위터에서 누군가와 '인공지능이 무엇인가요?'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은 이에 대해 '1954년에 형편 없는 단어를 선택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말이 옳습니다. 50년대에 우리가 (AI라는 이름 대신에) 다른 이름을 선택했다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을 많이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약 그가 적절한 이름을 다시 짓는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그는 즉시 대답했다. 응용통계( Applied Statistics).
"이런 종류의 것(AI와의 대화 같은 것)들이 대량의 텍스트를 통계적으로 분석한 결과에서 추출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그의 관점에서, 그것이 도구에 지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응용 통계가 훨씬 더 정확한 용어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용어를 사용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렇게 섹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의 2010년 소설인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주기'에서 전 사육사 아나는 '가상 애완동물'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감각적인 디지털 존재("디지언트"로 알려진)를 개발하는 AI 회사에 취직한다. 이 기계들은 오늘날의 인공지능과 달리 의식이 있지만 미숙하다. 이 소설은 발간된 뒤 수년간에 걸쳐 기술 창작자들과 그들의 발명품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새로운 유형의 지능의 창조로 인해 발생하는 철학적 질문들을 검토하면서 수많은 질문들을 이끌어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도덕을 가지고 있습니까? 누가 그들을 책임질까요?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습니까? 창은 또한 이 이야기를 통해 부모가 된다는 것과 자유롭게 놓아 보낸다는 것, 두 가지 상반된 면을 자세히 그려내고 있다.
나는 항상 두 가지 수준에서 동시에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이야기의 기원이 궁금했다: 그의 작품들은 양자역학, 인공지능 또는 이론 수학과 같은 광범위한 과학적 개념들을 다루는 동시에 일과 사랑, 가족이라는 평범한 인간 삶의 뉘앙스까지 담고 있다.
음식이 너무 빨리 서빙돼 대화에 방해를 받았다. 짙은 바바 가누쉬, 향신료를 넣은 콜리플라워, 민트 잎으로 장식된 크림 라브네, 올리브와 토마토와 오이의 크루디테, 따뜻한 피타빵이 함께 접시에 담겨 나눠먹을 수 있게 나왔다.
"저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즉시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몇 달 또는 몇 년에 걸쳐 같은 아이디어가 계속해서 떠오릅니다."라고 창은 바삭바삭한 콜리플라워를 먹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면 저는 이걸로 소설을 써야 하는 건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에서든 이 생각은 그 뒤로도 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지중해식 요리들이 상을 가득 채웠다. (음식 이름 생략)
창이 자주 반복해서 다루는 주제들이 있다. 즉, 언어가 어떻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구성하는가, 그리고 자유 의지의 존재 등이다.
그의 2019년 단편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 등장인물들은 일상적으로 공상 과학 소설의 흔한 단계인 평행 우주의 포털을 열고 그들의 대체 자아(alternate selves)와 대화한다. 그의 초기 아이디어는 그러한 장치가 어떻게 생겼는지, 양자 컴퓨터를 사용하여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또한 사람들의 자신의 행위( agency)에 대한 변화하는 감각을 탐구했다. 그의 등장인물들이 뭔가 결정을 내릴 때 느꼈던 중량감은, 그들의 다른 자아(alter-ego)가 다르게 행동할 때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저는 그것에 대해 점점 더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 후 그것은 일종의 자유 의지에 관한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해석자 주: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에서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어떤 결정을 했을 때, 다른 차원에 있는 또 다른 자신들은 그것과 다른 결정을 내렸는지를 궁금해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확신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다른 자아들은 자신과 다른 판단을 내린 경우,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후회로 괴로움을 겪는다. 그렇게 해서 이 이야기는 '어떤 상황에서든 나에게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었다'는 식의, 자유의지에 대한 생각을 흔들어놓는다.) . 비록 그의 이야기들이 복잡한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창은 SF 장르의 오랜 전통의 일부인 단편 소설 형식을 고수해왔다.그는 아서 C 클라크와 아이작 아시모프와 같은 사람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15살 때 한 잡지에 그의 첫 번째 단편 소설을 싣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가 마가렛 앳우드나 가즈오 이시구로와 같은 문학적이거나 사색적인 소설가가 아닌, 이 SF 장르의 전문 작가로 확실히 자리를 잡는 동안, 그의 작품은 장르의 한계를 넘어 완전히 새로운 관객들에게 도달한다. 모든 길은 할리우드로 통한다.
"저는 제 작품이 SF 마니아가 아닌 일반 독자들에게 도달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습니다.그럴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라고 창은 말한다. 몇몇 문학 에이전트들은 전부터 그에게 그의 작품이 일반 독자층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 바 있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를 그는 '써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작가 애니 딜라드의 말을 인용한다. "당신이 만약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당신이 어디서도 그런 내용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이 경이로운 이야기에 목소리를 붙여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창은 말한다. "아직 아무도 그것에 대해 쓰지 않았기 때문에 흥미롭고, 그래서 당신은 그것을 표현하고 싶어합니다. 이제 그것이 바로 당신이 하는 일이 됩니다."
창은 점심 뒤 가까운 벨뷰 다운타운 공원에서 걷자고 제안했다. 나는 그에게 조금만 더 머무르라고 설득하고, 바클라바를 디저트로 나눠먹자고 했다. .그는 식당 안으로 사라졌고, 하얀 접시에 그들을 직접 담아 왔다.
언어와 지능 사이의 관계에 대한 그의 천착 때문에, 나는 특히 채팅 GPT와 같은 AI를 이용한 글쓰기에 대한 그의 견해가 궁금했다. 나는 기계가 생생해낸 글들이 그와 내가 쓰는 것과 같은 글쓰기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우리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나는 그에게서 짜증의 섬광을 느꼈다. "그들이 뭔가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글을 쓰나요? 제 말은, 챗 GPT가 만든 에세이 중에 실제로 사람에게 뭔가를 말해주는 글이 있었습니까?" 그는 말했다.
(원문은 "Do they write things that speak to people? I mean, has there been any ChatGPT-generated essay that actually spoke to people?" 인간에게 어떤 식으로든 들을만한 가치가 있는 자신만의 메시지가 담긴 글을 쓰는 AI를 본 적이 있느냐는 의미인 듯.)
창의 견해는 ChatGPT 및 Google의 Bard와 같은 챗봇의 기반이 되는 대형 언어 모델(또는 LLM)이 인류학자 David Graeber가 "거지같은 직업"이라고 불렀던 작업인, 아무도 읽거나 쓰고 싶어하지 않는 필러 텍스트(filler text: 빈자리를 메꿔 주는 텍스트. 전형적인 회사 안내, 길 안내 등 그냥 기능적으로 존재하는 텍스트)를 생산하는 데 주로 유용하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만든 텍스트는 즐겁지 않지만, 특정 영역에서 유용할 수 있다고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LLM이 그 중 일부를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능력에 대한 확실한 칭찬은 아닙니다."라고 그는 말합니다. "반대로 그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얼마나 많은 헛소리를 만들고 다루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고 해야 할 것 같네요."
창은 2월에 출간된 The New Yorker지에 "ChatGPT는 웹의 흐릿한 JPEG"라는 에세이를 기고했다. 그는 '언어 모델'을 '그들이 훈련받은 텍스트의 흐릿한 모방, 문법 규칙을 따르는 단어 순서의 재배열'로 설명한다.그 기술은 기존의 것과는 약간 다른 재료를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뭔가를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가 이것을 언어를 배우는 아이들과 비교하기에, 나는 내 다섯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작은 한 줄짜리 농담을 발명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부분은 말장난(pun)인데, 그걸 들은 창은 매우 반색했다.
"당신의 딸은 농담을 듣고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ChatGPT는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지도 못했고 웃기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딸이 하는 일에는 큰 사회적 요소가 있습니다."
ChatGPT는 "다음 번에 함께 놀 때 당신을 또 웃게 할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리허설을 하지" 않는다. 창은 인간의 의도, 감정, 목적이 실리지 않은 언어는 무의미하다고 믿는다. "언어는 다른 존재들과의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방법입니다. 이는 현재 [AI 툴을 통해] 하고 있는 미래 예측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공원을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 특히 밝은 분홍색 수국 덤불과 넓은 물가에 녹음이 우거진 공간이었다. 우리는 왜 공상 과학 소설이 중요한지에 대해 논의하면서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비록 그는 선동하기 위해 글을 쓰지는 않지만, 그는 공상 과학이 어떻게 급진적인 힘이 될 수 있는지 느끼고 있다. "과학 소설은 변화에 관한 것이고, 사람들이 세상이 지금과는 다른 세계를 상상하도록 도와줍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영국의 문화 비평가이자 정치 이론가인 마크 피셔도 비슷한 말을 했다. 창은 다음 내용을 인용한다: '해방 정치의 역할은 우리가 필연적이라고 들은 것이 사실은 우리 자신이 어떻게 할지에 달려 있다는 것을 널리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들은 것들은 실제로 달성할 수 있는 것들이다.' "저는 SF 소설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은 정치와 그의 소설을 혼동하지 않지만, AI가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장치(force multiplier)라고 걱정한다. 2017년 버즈피드의 에세이에서 그는 기술주의자들을 "부정적인 결과의 가능성을 외면하고, 편집광적인 초점으로 오직 목표만을 추구하는" 그들의 초지능 인공지능 창조물에 비교했다.
그의 두려움은 연구자들이 예측하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세계를 지배하는 최후의 날 시나리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는 AI 같은 기술이 소수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고, 불평등 문제를 가속화하는 데 대해 훨씬 더 걱정하고 있다.
우리는 공원을 몇 바퀴 돌았고, 나는 슬슬 다른 산책객들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창에게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기계와 소통할 때 세상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를 물었다.
우리는 몇 분 동안 말없이 걸었고, 그는 갑자기 톰 행크스의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행크스의 섬에는 그가 사랑하는, 유일한 동반자인 윌슨이라는 배구공이 있었다. "저는 윌슨에 대한 비유가 이러한 시스템에 대해 생각하는 유용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했다. "배구공 윌슨이 톰 행크스의 캐릭터에게 진정한 위안을 제공했기 때문에, 윌슨에 대해 그가 느끼는 감정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배구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하지만 건너편 코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왜 사람들이 서로 말하는 것보다 인공지능 시스템에 말하는 것을 더 선호하기 시작하는지 인정한다.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힘들어요. 그것은 많은 것을 요구하며 종종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현대 생활이 사람들을 그들만의 무인도에 발이 묶이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우정을 갈망하게 했다고 느낀다. "그래서 지금은 이것 때문에 배구공의 기회(!)가 있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소셜 챗봇은 윌슨이 제공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진정한 위안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인간 사이의 상호작용, 즉 서로에게 반응하는 사람들로부터 얻는 공감과 의도다. 인공지능에 대해 창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들은 건너편 쪽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거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끝)
해가 갈수록 너무나 한심한 영화상이 되어 가고 있는 아카데미상에서 올해 그나마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다 싶은 부분은 피터 위어의 '공로상' 수상이다. 아카데미 공로상은 언젠가부터 '유명한 분인데 그동안 우리가 상을 못 드리고 외면해왔던 분들'에게 드리는 상이 되었다.
이 상이 원래 그 해의 분위기라는 것(좋게 말해 '시대정신')이라는 것에 워낙 민감하다 보니 '예년 같으면' 충분히 상을 받고도 남았을 영화들이 수상에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는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이 상이 워낙 근엄한 상이다 보니 코믹 연기로 부각이 되거나, 영화가 좀 희한하거나 한 경우에도 상을 잘 주지 않았다. 성룡, 스티브 마틴, 데이빗 린치 같은 사람들이 그런 경우다.
반면 전혀 그렇지 않고, 온전히 봐도 충분히 상을 받을만 했는데도 좀 불운한 사람들의 경우, 번번이 뭔가 '사회적 이슈를 만드는 영화'들에 밀려 수상에 실패한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면 총 14번 후보에 올랐던 마틴 스콜시스의 경우 <디파티드>가 없었다면 공로상의 0순위 후보였을 터.
피터 위어는 6회 후보에 올라 무관(골든글로브는 4회 무관)이니 스콜시스에 비교할 정도는 아니지만, 개인적인 취향에 따르면 너무나 저평가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BAFTA에서는 <트루먼 쇼>, <죽은 시인의 사회>, <마스터 앤 커맨더>로 3회나 감독상을 수상했으니 결코 상복이 없는 감독은 아니다. 다만 아카데미가 그를 철저하게 무시한 것 뿐이다. 개인적으로 위어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트루먼 쇼>는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물론 올랐어도 <셰익스피어 인 러브>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같은 영화가 있었던, 아카데미 기준으로 극강의 해였기 때문에 수상은 실패했을 수도 있겠으나, 나머지 후보작들의 면면을 보면 <트루먼 쇼>가 후보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로 푸대접을 받을 영화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짐 캐리가 아니었더라도 이런 평가를 받았을까.
짐 캐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짐 캐리는 스콜시스나 위어는 저리 가랄 정도로 오스카가 철저하게 무시한 배우다. 캐리는 단 한번도 오스카 후보에 오른 적이 없고, 심지어 짐 캐리가 출연한 영화 중 어느 영화도 오스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적이 없다. <마스크>나 <덤 앤 더머>는 말할 것도 없고, <이터널 선샤인>도, <트루먼 쇼>도, <맨 온 더 문>도 아니었다. 이런 일은 희극인에 대한 지독한 편견의 결과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코미디언들도 비슷하다. 유명한 코믹 배우들은 커리어의 어느 시점에서 '어디 오스카가 언제까지 나를 외면하나 보자'는 심정으로 정말 재미없는 영화를 '작정하고' 출연할 때가 있는데, 예를 들어 빌 머레이와 스티브 캐럴은 각각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와 <폭스캐처>로 1회씩 오스카 후보로 지명을 받은 적이 있다(두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께 죄송. 하지만 두 영화 모두 두 배우들이 '어디 나도 상 받는 영화에 한번 출연해 볼까?'라는 생각으로 출연했던 영화라는 느낌밖에 들지 않는다).
정말 진지하게 빌 머레이를 평가했다면 <고스트 버스터즈>나 <사랑의 블랙홀> 같은 영화였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짐 캐리도 위의 몇몇 영화를 통해 존 카우프만, 피터 위어, 밀로스 포먼 같은 '오스카가 외면하기 힘든' 영화인들과 공동 작업을 했지만 결국 실패한 걸 보면 오스카 심사위원들은 캐럴이나 머레이보다 캐리를 더 싫어했던 모양이다.
곡절 끝에 이번에 위어가 공로상을 받았으니, 언젠가 캐리도 공로상은 받을 수 있기를. 아니, 그 전에 아카데미 회원들이 정신을 차려서, 연기상을 받을 수 있기를. 위어 형님,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뒤늦게)
<와이어드> 매거진의 편집장이었던 케빈 켈리는 '1000명의 팬만 있으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2008년에 내놓은 이 아이디어는 매우 충격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켈리는 2017년에 그 이야기를 약간 수정해서 자기 블로그에 올려 놓았습니다.
크라우드펀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이런 아이디어를 내놓았다니 참 그럴듯하기도 하고, 1000명은 쉽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튼 케빈 켈리는 콘텐트 생산자를 전제로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다른 어떤 사업에도 사실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뉴스레터 생산자든, 어떤 형태의 '구독형' 아이템이든.
영어로 쓰인 문장이 가끔 희한하게 꼬여 있기도, 좀 어려운 말을 쓰기도 해서 읽기 만만치 않은 부분이 있었는데, 한글로 번역해서 올려둡니다. 물론 파파고의 도움을 받았고, 그래도 말이 안 되는 부분을 제가 한글로 손을 대서 다듬었습니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1000명의 진정한 팬:
이것은 제가 2008년에 쓴 에세이의 편집, 갱신된 버전(주: 2017년)입니다. 그 지금은 널리 퍼진 이 아이디어는 당시에는 초기 단계에 있었고 빈틈도 많았습니다. 저는 최근에 핵심 아이디어를 전달하기 위해 그것을 다시 썼습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세부 사항을 제외하고요. 이 재검토된 에세이는 팀 페리스의 신간 "타이탄의 도구"에 등장합니다. 저는 1,000명의 진정한 팬들의 개념이 일을 만들거나 일을 성사시키는 사람들에게 유용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필요없는 부분 생략). — KK
성공적인 창작자가 되기 위해서는 수백만 달러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수백만 달러 또는 수백만 고객, 수백만 고객 또는 수백만 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공예가, 사진가, 음악가, 디자이너, 작가, 애니메이터, 앱 제작자, 기업가 또는 발명가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천 명의 진정한 팬들만 있으면 됩니다.
진정한 팬은 여러분이 생산하는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팬으로 정의됩니다. 이 열렬한 팬들은 여러분이 노래하는 것을 보기 위해 기꺼이 200마일을 운전해 찾아올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책의 하드커버와 페이퍼백, 그리고 오디오북을 살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다음에 내놓을 여러분의 작은 피규어까지도 현물을 보지도 않고(sight unseen) 구입할 것입니다. 그들은 무료 유튜브 채널의 베스트 모음 DVD 버전에 대한 비용을 지불할 것입니다. 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여러분의 요리사의 테이블에도 부르면 올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팬(슈퍼 팬이라고도 함)이 약 1,000명이라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큰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말입니다.
수학의 원리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두 가지 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 여러분은 각각의 진정한 팬들로부터 평균적으로 100달러의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을 매년 만들어야 합니다. 이는 일부 예술 및 비즈니스에서 다른 분야보다 쉽게 수행할 수 있지만, 새로운 팬을 찾는 것보다 기존 고객에게 더 많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 항상 더 쉽고 낫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훌륭한 창의적 도전입니다.
둘째, 팬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즉, 그들은 당신에게 직접 지불해야 합니다. 음악 레이블, 출판사, 스튜디오, 소매업체 또는 기타 중간 업체로부터 받을 수 있는 수수료의 작은 비율과는 달리, 고객은 고객의 모든 지원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각각의 진정한 팬들의 100달러를 모두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은 연간 100,000달러를 벌기 위해 단 1000명의 팬만 필요합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먹고 살기 충분한 돈입니다.
1,000명의 고객은 100만 명의 팬을 목표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현 가능합니다. 수백만의 돈을 지불하는 팬들은 특히 당신이 시작할 때 촬영할 수 있는 현실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하지만 천 명의 팬들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심지어 천 개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루에 진정한 팬을 하나 더 추가한다면, 1,000명을 얻는 데 몇 년밖에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1,000이라는 숫자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 중요성은 대략적인 자릿수에 있습니다. 천 단위는 백만 단위의 1/10의 1/10의 1/10이라는게 중요하죠. 실제 정확한 숫자는 사람마다 조정해야 합니다. 진정한 팬 1인당 연간 50달러만 벌 수 있다면 2,000달러가 필요합니다. (반대로 팬 1인당 연간 200달러를 판매할 수 있다면 500명의 진정한 팬만 필요합니다.) 또는 연간 7만 5천 달러만 있으면 생활이 가능한 경우, 목표를 하향 조정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듀엣이거나 파트너가 있다면 2,000명의 팬을 얻기 위해서는 2를 곱해야 합니다. 팀을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곱해야 합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진정한 팬층의 증가는 팀의 규모에 비례하여 기하학적이고 선형적이라는 것입니다. 팀을 33% 늘린다면 팬층을 33%만 늘리면 됩니다.
진정한 팬의 지지도를 계산하는 또 다른 방법은 1년 회비로 그분들의 하루치 임금을 받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이 하루 임금을 기꺼이 낼 만큼 충분히 그들을 흥분시키거나 기쁘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높은 수준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1,000명의 사람들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모든 팬들이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천 명의 진정한 팬들의 지지가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할 수도 있지만, 모든 진정한 팬이 한 명 있을 때, 두세 명의 일반 팬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심에 진정한 팬이 있고 주변에 더 넓은 일반 팬이 있는 동심원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일반 팬들은 가끔 당신의 창작물을 구매하거나 한 번만 구매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적인 구매는 당신의 총 수입을 확대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슈퍼 팬들의 50% 정도만을 추가로 가져올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팬들의 열정이 일반 팬들의 후원을 증가시킬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슈퍼 팬들에게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진정한 팬들은 여러분의 수입의 직접적인 원천일 뿐만 아니라 일반 팬들을 위한 여러분의 주요 마케팅 세력입니다.
팬들, 고객들, 고객들은 항상 있었던 존재들이죠. 새로운 점은 무엇입니까? 몇 가지. 옛날에는 고객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기본 모드였지만, 현대 소매업의 이점은 지난 세기에 대부분의 창작자들이 소비자와 직접적인 접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종종 출판사, 스튜디오, 레이블 및 제조업체조차도 고객의 이름과 같은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수백 년 동안 사업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뉴욕의 어떤 출판사도 핵심 독자와 헌신적인 독자의 이름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전 창작자들에게 이러한 중간 매개체(그리고 종종 둘 이상)의 존재는 성공을 거두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청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제작자가 전체 가격을 유지할 수 있는 이 새로운 능력은 혁신적이지만, 두 번째 기술 혁신은 그 힘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피어 투 피어 네트워크(웹과 같은)의 기본적인 장점은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노드와 가장 많이 사용되는 노드 사이의 거리가 단지 단 한 번의 클릭 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과소 판매된 책, 노래 또는 아이디어는 베스트셀러 책, 노래 또는 아이디어에서 단 한 번의 클릭 차이일 수 있습니다. 웹이 부상한 초기에 eBay, Amazon, Netflix 등과 같은 대규모 콘텐츠 및 제품 수집자들은, 가장 적게 판매되는(하지만 수적으로는 대다수인) 무명 아이템의 총 매출을 합하면, 몇 안 되는 베스트셀러 아이템의 매출과 비슷하거나, 초과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Chris Anderson(Wired의 후임자)은 이 효과를 "The Long Tail"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이 효과는 판매 분포 곡선의 시각적 그래프 모양을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몇 안 되는 베스트셀러의 수직적 그래프 오른쪽으로 수많은 별볼일 없는 상품들이 긴 "꼬리"를 형성하는, 거의 끝없는 품목 라인의 그래프입니다. 하지만 꼬리의 전체 면적은 머리만큼 컸습니다. 이러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집계자들은 청중들이 잘 알려지지 않은 항목을 클릭하도록 장려하는 데 큰 동기를 부여했습니다. 그들은 긴 꼬리에 있는 희귀한 창조물에 주의를 돌리기 위해 추천 엔진과 다른 알고리즘을 발명했습니다. 심지어 구글, 빙, 바이두와 같은 웹 검색 회사들도 긴 꼬리를 이용해 광고를 판매할 수 있기 때문에, 무명의 검색자들에게 보상하는 것이 그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모호했던 것이 덜 모호해졌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지구상에 있는 2백만 개의 작은 마을들 중 어느 곳에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동네에서 데스 메탈 음악을 좋아하거나, 귓속말에 흥분하거나, 왼손 낚시 릴을 원하는 유일한 사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웹이 있기 전에는 그 욕구를 결코 충족시킬 수 없었겠죠. 그냥 혼자 자신만의 즐거움에 빠져 있었을 뿐일 겁니다. 그러나 이제 만족도는 클릭 한 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크리에이터로서 여러분의 관심사가 무엇이든 간에, 1,000명의 진정한 팬들은 클릭 한 번이면 됩니다. 제가 아는 한, 인터넷에 팬 기반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품도, 아이디어도, 욕망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만들어지거나 생각되는 것은 적어도 백만 명 중 한 명은 흥미를 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낮은 수준입니다. 하지만 백만 명 중에 한 명만 관심이 있다면, 전 지구상에는 그 숫자가 7,000명에 이를 것입니다. 그것은 백만 명 중의 한명 이하만이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특이한 취향도 1,000명 이상의 진정한 팬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령은 실질적으로 팬들을 찾는 것, 더 정확하게는 팬들이 여러분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대기업, 중간 기업, 상업 생산자들은 이런 1000명의 진정한 팬들과 연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조직의 본질에 따라 틈새 시장과 소비자를 찾고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롱테일이란 크리에이터인 당신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백만 명 중 한 명의 진정한 팬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소셜 미디어의 혁신을 포함하여 연결을 위한 도구는 계속해서 개선되고 있습니다. 1,000명의 진정한 팬들을 크리에이터 주변에 모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쉽고, 그들을 가까이 두는 것이 더 쉽습니다.
진정한 팬 제작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많은 새로운 혁신 중 하나는 크라우드펀딩입니다. 팬들이 다음 제품에 자금을 대도록 하는 것은 천재적인 일입니다. 모두 윈윈. 전 세계적으로 약 2,000개의 다양한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이 있으며, 그 중 많은 것들이 특정 분야에 특화되어 있습니다. 과학 실험, 밴드 또는 다큐멘터리를 위한 기금 마련입니다. 각각은 전문적인 관심사 외에도 고유한 요구사항과 다른 자금 지원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부 플랫폼은 "전부 아니면 전무"한 자금 조달 목표를 요구하고, 다른 플랫폼은 부분 자금 조달을 허용하며, 일부 플랫폼은 완료된 프로젝트를 위해 자금을 조달하며, Patreon과 같은 일부 플랫폼은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지원합니다.
Patreon 지지자들은 월간 잡지, 비디오 시리즈, 또는 예술가의 급여에 자금을 지원할 수 있습니다. 가장 유명하고 가장 큰 크라우드 펀딩은 킥스타터로, 100,00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위해 25억 달러를 모금했습니다. 성공적인 Kickstarter 프로젝트의 평균 후원자 수는 241명으로 천 명에 훨씬 못 미칩니다. 즉, 진정한 팬이 1,000명이라면 크라우드 펀딩 캠페인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의상 진정한 팬은 Kickstarter 기금 지원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캠페인의 성공은 팬들에게 무엇을 요청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은 천 명의 진정한 팬들을 양성하는 것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때로는 신경이 쓰이며, 모두를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건 또 다른 정규직이 될 수 있습니다. 기껏해야 지속적인 기술이 필요한 소모적이고 어려운 파트타임 작업일 것입니다. 팬들을 상대하고 싶지 않은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있고, 솔직히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그림을 그리거나, 바느질을 하거나, 음악을 만들고, 그들의 팬들을 다룰 다른 사람을 고용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이 팬들을 상대할 누군가를 추가한다면, 도우미가 당신의 공식을 왜곡하여 당신이 필요로 하는 팬들의 수를 증가시킬 것이지만, 그것이 최선의 조합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간다면 중간층, 즉 레이블, 스튜디오, 출판사 및 소매업체에 팬을 "하청"하는 것이 어떨까요? 만약 그들이 당신을 위해 일한다면, 그것도 가능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세요,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당신보다 이것을 훨씬 더 못 할 것입니다.
1,000명의 진정한 팬들의 수학은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당신이 이 길을 간다고 해서 다른 방법을 배제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업계의 대형 중개업자들 외에도 슈퍼 팬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이용할 것입니다. 제가 쓴 책은 몇몇 뉴욕의 유명 출판사들에 의해 출판되었지만, 자비 출판도 합니다. 그리고 저는 킥스타터를 사용하여 진정한 팬들에게 게시했습니다. 저는 내용과 목적에 따라 각각의 형식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진정한 팬들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제가 선택한 길을 풍요롭게 해줍니다.
요점(takeaway): '1,000명의 진정한 팬들'은 스타덤에 오르는 것 말고도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보여주는 대안적인 길입니다. 플래티넘 베스트셀러 히트곡, 블록버스터, 만인이 아닌 셀러브리티에 오르는, 좁고 가능성 없는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여러분은 수천 명의 진정한 팬들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목표로 할 수 있습니다. 이 길에서는, 여러분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팬들을 얻는지와는 별개로, 여러분은 유행에 대한 애정이 아닌, 마음 속에서 우러난 진심어린 감사에 둘러싸여 있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희망할 수 있는 목표 중에서는 보다 현명한 쪽일 듯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실제로 그곳에 도착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아래는 영어 원문입니다. 저 위의 링크로 건너가시면 2008년에 쓴 글의 원문도 나오는데, 그건 딱히 필요할 것 같지 않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읽어보시길.)
This is an edited, updated version of an essay I wrote in 2008 when this now popular idea was embryonic and ragged. I recently rewrote it to convey the core ideas, minus out-of-date details. This revisited essay appears in Tim Ferriss’ new book,Tools of Titans. I believe the 1,000 True Fans concept will be useful to anyone making things, or making things happen. If you still want to read the much longer original 2008 essay, you can get it after the end of this version. — KK
To be a successful creator you don’t need millions. You don’t need millions of dollars or millions of customers, millions of clients or millions of fans. To make a living as a craftsperson, photographer, musician, designer, author, animator, app maker, entrepreneur, or inventor you need only thousands of true fans.
A true fan is defined as a fan that will buy anything you produce. These diehard fans will drive 200 miles to see you sing; they will buy the hardback and paperback and audible versions of your book; they will purchase your next figurine sight unseen; they will pay for the “best-of” DVD version of your free youtube channel; they will come to your chef’s table once a month. If you have roughly a thousand of true fans like this (also known as super fans), you can make a living — if you are content to make a living but not a fortune.
Here’s how the math works. You need to meet two criteria. First, you have to create enough each year that you can earn, on average, $100 profit from each true fan. That is easier to do in some arts and businesses than others, but it is a good creative challenge in every area because it is always easier and better to give your existing customers more, than it is to find new fans.
Second, you must have a direct relationship with your fans. That is, they must pay you directly. You get to keep all of their support, unlike the small percent of their fees you might get from a music label, publisher, studio, retailer, or other intermediate. If you keep the full $100 of each true fan, then you need only 1,000 of them to earn $100,000 per year. That’s a living for most folks.
A thousand customers is a whole lot more feasible to aim for than a million fans. Millions of paying fans is not a realistic goal to shoot for, especially when you are starting out. But a thousand fans is doable. You might even be able to remember a thousand names. If you added one new true fan per day, it’d only take a few years to gain a thousand.
The number 1,000 is not absolute. Its significance is in its rough order of magnitude — three orders less than a million. The actual number has to be adjusted for each person. If you are able to only earn $50 per year per true fan, then you need 2,000. (Likewise if you can sell $200 per year, you need only 500 true fans.) Or you may need only $75K per year to live on, so you adjust downward. Or if you are a duet, or have a partner, then you need to multiply by 2 to get 2,000 fans. For a team, you need to multiply further. But the good news is that the increase in the size of your true-fan base is geometric and linear in proportion to the size of the team; if you increase the team by 33% you only need to increase your fan base by 33%.
Another way to calculate the support of a true fan, is to aim to get one day’s wages per year from them. Can you excite or please them sufficient to earn one day’s labor? That’s a high bar, but not impossible for 1,000 people world wide.
And of course, not every fan will be super. While the support of a thousand true fans may be sufficient for a living, for every single true fan, you might have two or three regular fans. Think of concentric circles with true fans at the center and a wider circle of regular fans around them. These regular fans may buy your creations occasionally, or may have bought only once. But their ordinary purchases expand your total income. Perhaps they bring in an additional 50%. Still, you want to focus on the super fans because the enthusiasm of true fans can increase the patronage of regular fans. True fans not only are the direct source of your income, but also your chief marketing force for the ordinary fans.
Fans, customers, patrons have been around forever. What’s new here? A couple of things. While direct relationship with customers was the default mode in old times, the benefits of modern retailing meant that most creators in the last century did not have direct contact with consumers. Often even the publishers, studios, labels and manufacturers did not have such crucial information as the name of their customers. For instance, despite being in business for hundreds of years no New York book publisher knew the names of their core and dedicated readers. For previous creators these intermediates (and there was often more than one) meant you need much larger audiences to have a success. With the advent of ubiquitous peer-to-peer communication and payment systems — also known as the web today — everyone has access to excellent tools that allow anyone to sell directly to anyone else in the world. So a creator in Bend, Oregon can sell — and deliver — a song to someone in Katmandu, Nepal as easily as a New York record label (maybe even more easily). This new technology permits creators to maintain relationships, so that the customer can become a fan, and so that the creator keeps the total amount of payment, which reduces the number of fans needed.
This new ability for the creator to retain the full price is revolutionary, but a second technological innovation amplifies that power further. A fundamental virtue of a peer-to-peer network (like the web) is that the most obscure node is only one click away from the most popular node. In other words the most obscure under-selling book, song, or idea, is only one click away from the best selling book, song or idea. Early in the rise of the web the large aggregators of content and products, such as eBay, Amazon, Netflix, etc, noticed that the total sales of *all* the lowest selling obscure items would equal or in some cases exceed the sales of the few best selling items. Chris Anderson (my successor at Wired) named this effect “The Long Tail,” for the visually graphed shape of the sales distribution curve: a low nearly interminable line of items selling only a few copies per year that form a long “tail” for the abrupt vertical beast of a few bestsellers. But the area of the tail was as big as the head. With that insight, the aggregators had great incentive to encourage audiences to click on the obscure items. They invented recommendation engines and other algorithms to channel attention to the rare creations in the long tail. Even web search companies like Google, Bing, Baidu found it in their interests to reward searchers with the obscure because they could sell ads in the long tail as well. The result was that the most obscure became less obscure.
If you lived in any of the 2 million small towns on Earth you might be the only one in your town to crave death metal music, or get turned on by whispering, or want a left-handed fishing reel. Before the web you’d never be able to satisfy that desire. You’d be alone in your fascination. But now satisfaction is only one click away. Whatever your interests as a creator are, your 1,000 true fans are one click from you. As far as I can tell there is nothing — no product, no idea, no desire — without a fan base on the internet. Every thing made, or thought of, can interest at least one person in a million — it’s a low bar. Yet if even only one out of million people were interested, that’s potentially 7,000 people on the planet. That means that any 1-in-a-million appeal can find 1,000 true fans. The trick is to practically find those fans, or more accurately, to have them find you.
Now here’s the thing; the big corporations, the intermediates, the commercial producers, are all under-equipped and ill suited to connect with these thousand true fans. They are institutionally unable to find and deliver niche audiences and consumers. That means the long tail is wide open to you, the creator. You’ll have your one-in-a-million true fans to yourself. And the tools for connecting keep getting better, including the recent innovations in social media. It has never been easier to gather 1,000 true fans around a creator, and never easier to keep them near.
One of the many new innovations serving the true fan creator is crowdfunding. Having your fans finance your next product for them is genius. Win-win all around. There are about 2,000 different crowdfunding platforms worldwide, many of them specializing in specific fields: raising money for science experiments, for bands, or documentaries. Each has its own requirements and a different funding model, in addition to specialized interests. Some platforms require “all or nothing” funding goals, others permit partial funding, some raise money for completed projects, some like Patreon, fund ongoing projects. Patreon supporters might fund a monthly magazine, or a video series, or an artist’s salary. The most famous and largest crowdfunder is Kickstarter, which has raised $2.5 billion for more than 100,000 projects. The average number of supporters for a successful Kickstarter project is 241 funders — far less than a thousand. That means If you have 1,000 true fans you can do a crowdfunding campaign, because by definition a true fan will become a Kickstarter funder. (Although success of your campaign is dependent on what you ask of your fans).
The truth is that cultivating a thousand true fans is time consuming, sometimes nerve racking, and not for everyone. Done well (and why not do it well?) it can become another full-time job. At best it will be a consuming and challenging part-time task that requires ongoing skills. There are many creators who don’t want to deal with fans, and honestly should not. They should just paint, or sew, or make music, and hire someone else to deal with their superfans. If that is you and you add someone to deal with fans, a helper will skew your formula, increasing the number of fans you need, but that might be the best mix. If you go that far, then why not “subcontract” out dealing with fans to the middle people — the labels and studios and publishers and retailers? If they work for you, fine, but remember, in most cases they would be even worse at this than you would.
The mathematics of 1,000 true fans is not a binary choice. You don’t have to go this route to the exclusion of another. Many creators, including myself, will use direct relations with super fans in addition to mainstream intermediaries. I have been published by several big-time New York publishers. I have self-published. And I have used Kickstarter to publish to my true fans. I chose each format depending on the content and my aim. But in every case, cultivating my true fans enriches the route I choose.
The takeaway: 1,000 true fans is an alternative path to success other than stardom. Instead of trying to reach the narrow and unlikely peaks of platinum bestseller hits, blockbusters, and celebrity status, you can aim for direct connection with a thousand true fans. On your way, no matter how many fans you actually succeed in gaining, you’ll be surrounded not by faddish infatuation, but by genuine and true appreciation. It’s a much saner destiny to hope for. And you are much more likely to actually arrive there.
<이니셰린의 밴시>를 보고 충격을 받고(정말로 이 영화를 좋은 영화라고 해야 '영화 좀 본 사람'이 되는 것인지), 올해 아카데미상 수상작 리스트를 보다가 대체 영화란, 극장이란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카데미상이 해야 할 역할은 분명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그러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러 갔다.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을 신카이 마코토의 재난 3부작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나면 이 장면이 이 영화의 장면인지, 저 영화의 장면인지 혼동할 정도로 세 영화는 매우 닮아 있다. 글자 그대로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남녀 주인공 중 한쪽과 그 자연재해가 초자연적인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나머지 한쪽은 그 운명의 연결을 거스르려 한다는 점 등,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공통점이 한 가득이다. 물론 같은 감독이니 작화와 스타일도 당연히 같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강추. 안 보신 분들은 빨리 보러 가라. 아래 글은.... 물론 별 스포일러는 없다.
그중 최신작인 <스즈메의 문단속>. 이번엔 큐슈 남동쪽의 미야자키가 무대다. 여고생 스즈메는 폐허를 찾는 '잘생긴 남자' 소타의 뒤를 쫓다가(심지어 등교를 포기하고!) 일본 땅 깊은 아래를 흐르는 큰 힘, 지진의 원인인 거대한 미미즈의 실체를 알게 된다. 심지어 스즈메의 실수로 미미즈를 잠재우고 있던 요석이 빠져버리고, 미미즈를 관리하는 가문의 후계자인 소타는 희한한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
그렇게 해서 미야자키-에히메-고베-도쿄-미야기까지, 일본 열도를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거의 종단하는 스즈메와 소타의 대모험이 시작된다.
비슷한 톤의 영화가 세 편째이다 보니 <스즈메의 문단속>은 전작 두 편에 비해 이야기의 양은 많고 진행은 훨씬 빨라졌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전작 두 편에서 이미 스타일을 읽었을테니 비슷한 패턴을 다시 보여줄 이유는 없다는 뜻이다. 당연한 얘기는 얼른 건너뛰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얘기라 반가웠다.
이런 진행 때문에 두 주인공 사이의 감정선이 너무 튄다는 지적도 있었던 것 같지만, 어느 곳 어느 시절에, 남녀간의 감정에 매뉴얼 같은 것이 있단 말인가. 개연성이 필요하다면 소타의 외모가 개연성이겠지.
세 편의 영화 중 대중성으로 따지면 단연 <너의 이름은>이 앞서고, 그 다음이 <스즈메의 문단속>, 그리고 <날씨의 아이> 순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신카이 감독의 후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쉬웠다. <날씨의 아이>가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과연 대를 위한 희생이라는 것을 본인 아닌 다른 사람이 요구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제기였다.
거의 매일 폭우가 내리는 도쿄. '날씨의 아이'가 저 세상으로 가지 않는 한 비가 계속 내려 도쿄는 물에 잠길 운명이다. 그녀 하나의 희생으로 도시 하나를 구할 수 있다 해도, 과연 그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그가 자신을 희생해야 할까? 혹은 다른 누군가가 희생을 요구할 수 있을까?
유독 집단주의가 강조되는 나라로 알려진 일본에서 이런 목소리를 내는 영화가 나왔다는 것이 감동의 포인트였다. 20세기의 풍요를 점점 잃어가고 있는 일본에서, '왜 당신들이 망쳐 놓은 나라를 우리가 수습해야 하느냐'는 젊은 세대의 질문을 대변한 듯한 느낌. 하지만 <너의 이름은>을 사랑했던 많은 신카이 팬들은 이런 메시지에는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스즈메의 문단속>은 전통적인 윤리관으로 돌아갔다. 주인공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누군가는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평온한 일상이 유지될 수 있다'는, 매우 상식적인 주제를 따른다. 스즈메는 어떻게 해서든 이 '당연한 희생'에 반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나, 이번에는 그 '재난'이 모든 사람이 기억하고 있는 12년전의 대 사건이라면, '막을 수 있었어도 나를 희생해서 그걸 막지는 않겠어'라고 말할 수는 없었겠지. 그런데, 그러면 다이진은 대체 무슨 죄로 그 지루하고 어두운 일을 계속 해야 하는 것인가.
헤라클라스는 헤스페리데스의 사과를 가지러 갔을 때, 직접 가는 것보다 아틀라스를 보내라는 조언 때문에 잠시 아틀라스 대신 어깨로 하늘을 떠받치는 일을 맡는다. 그런데 사과를 가지고 돌아온 아틀라스는 '왜 내가 계속 하늘을 떠받쳐야 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거대한 아틀라스도 잠시 풀려난 뒤의 해방감을 알아버린 뒤, 다시 교대해 주고 싶지 않았던 그런 일.
'그건 원래 네가 해야 하는 일이었잖아' 라는 이유로, 다이진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결국 다시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잠시 묵념, 네네. 이게 주제가 아니라는 거 잘 압니다. 그래서 <날씨의 아이>쪽이 더 맘에 든다니까요.)
어쨌든 작화의 연출이나 영상, 음악, 거의 모든 면에서 신카이 마코토는 이 시대를 지배하는 탑 크리에이터로서 손색없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한국처럼 문화적으로 근접한 나라가 아닌 글로벌 관객을 고려한 일본적 요소의 승화 부분에서도 - 물론 한국 관객들은 좀 더 이해의 폭이 크겠지만 - 특히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미미즈(일본어로 지렁이더라)의 형태는 아니지만 지진이 잦은 나라의 특성상 지하에 뭔가 초자연적인 거대한 존재(이를테면 용, 메기, 구렁이 등등)가 진동을 일으킨다는 전설, 그리고 역시 신적인 능력을 가진 누군가가 그 진동을 가능한 한 억제하고 있다가 무슨 변고가 생길 때마다 대재앙이 덮쳐온다는 것....
그런 자투리들을 모아서 이만한 볼거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은 진정 탁월하다. 심지어 따뜻하기까지.
타락한 도시 바빌론. 계시록에 나오는 죄악의 도시.현대 문명권에서 sin city는 거의 공식적으로 라스베가스를 가리키는 이름이지만, 데미안 셔젤에게는 할리우드가 바빌론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에게는 파리가 바빌론이었던 것처럼.
영화 <바빌론>은 '그 타락이란게 대체 어떤 건지 보여주마'를 작심한 듯한 파티 신으로 시작한다. 영화가 '산업'이 되면서 콘텐트 비즈니스의 엄청난 매출 창출 능력이 현실이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들어간 돈의 100배, 1000배의 이윤을 돌려줄 수 있는 새로운 사업. 그 파티 신 하나에 어마어마한 허영과 사치와 욕망이 녹아 흐른다. 압도적이고 효과적인 첫 장면.
다들 아시다시피 이 영화가 가리키는 시점은 1920년대의 할리우드, 무성영화가 유성영화(토키)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물론 데미안 셔젤은 토키의 충격보다는(이미 이 영화 곳곳에 인용되는 <싱잉 인 더 레인>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들이 그 '충격'을 중요한 소재로 다뤘다) 그 시절의 영화계 사람들이 느꼈을, "이렇게 돈을 쉽게 벌어도 되는 거야?"라는 충격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 영화는 '신성한 영화의 역사에 바치는 헌사'와는 조금 다르다. <바빌론> 속 영화계는 재능은 있지만 그보다 먼저 말초적인 유혹에 미친 장인들과, 일확천금에 눈이 먼 장사꾼들의 파티장이다. 등장인물들은 아무데나 똥을 싸고, 걸핏하면 토한다. 마약이 알콜에 취한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물론 이게 다는 아니다. 누구도 <바빌론>에 진정성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취한 브래드 피트가 석양을 안고 펼치는 환상적인 촬영 장면이나, 당대 할리우드를 들었다 놨다 했던 가십 칼럼니스트(아마도 실존인물인 헤다 호퍼나 루엘라 퍼슨스를 모델로 했을)가 피트를 향해 "당신 시대가 간 건 당신 탓이 아니야. 하지만 당신이 죽고 난 뒤에 태어날 어떤 젊은이가 당신 영화를 보고 마치 친구를 만난 것처럼 느낄 때, 당신은 다시 살아나는 거야" 하고 위로하는 장면을 보면, 이런 장면에서의 셔젤은 진심으로 할리우드의 팽창기, 전설이 된 시대를 살아 보고 싶었던 영화소년의 자세 그 자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돈벼락을 맞아 제정신을 잃고 술과 마약과 섹스와 향락과 사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정신을 잃은 할리우드를 빈정대는 듯한 셔젤, 그런데 그 정신나간 사람들이 만들어 낸 찬란한 성과와 다시 오지 않을 전설의 시대에 대해 미칠듯한 부러움을 토로하는 셔젤. 이 두개의 셔젤은 영화 내내 쌈박질을 벌인다. 그러다 보니 영화의 정체성도 좀 오락가락한다. 너무 노골적으로 팬심을 드러내기 부끄러웠던 것일까. 애정표현이라면 좀 비뚤어진 표현이긴 하지만, <바빌론>의 시대에 대한 셔젤의 진심은 너무나 충분히, 넘칠 정도로 느껴진다.
(이런 종류의 동경은 굳이 영화 <미드나잇 앤 파리>를 들먹이지 않아도 너무나 친근하다. 만약 당신이 야구선수라면 트랙맨도, 갖가지 통계도, 에이전트도, 혹사 논란도 없던 시절로 돌아가 베이브 루스나 월터 존슨과 플레이하는 꿈을 꿀 지도 모른다. 가수라면 MP3가 없던 시절로, 글쟁이라면 인터넷이, 심지어 워드 프로세서가 없던 시절로.... 뭐 아무튼.)
그런데 진짜 문제는 이 영화가 꽤나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한다는 데 있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는 충분히 알겠'으나, 내겐 너무 길었다. 코로나 이후 극장을 찾는 관객들이 최소한 3시간은 되어야 티켓값을 아까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누군가 여기저기 전염시키기라도 한 것일까? 어쨌든 굳이 이렇게 지루하게 만들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이상, 아무리 아름다운 뜻을 가지고 만들었다 해도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그래도 스스로 생각할 때 영화라는 장르에 평균 이상의 애정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한번 보고 기억해 둘만한 영화. 이 영화에는 15분짜리 유튜브 압축본을 보고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 있다. 분명히. 그것이 욕이든, 감동이든. 이 영화의 엔딩을 보면서 '나는 저거 무슨 영환지 다 알아' 하는 유치한 자부심 같은 걸 말하는 건 물론 아니다.
P.S.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모에 감탄하게 되는 영화 <내가 마지막 본 파리>는 스콧 피츠제럴드의 <다시 돌아온 바빌론>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TMI)
'드라마'라고 되어 있는 것은 아시다시피 한 편으로 끝나지 않는 시리즈 영상물을 말합니다. 요즘 TV는 그냥 단말기일 뿐, 네트워크의 기능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에 연속극이냐, 8부작이냐, 30부작이냐, 매주 연속공개냐, 한방에 다 공개냐 따위의 다양한 형태로 제공되는 시리즈를 그냥 '드라마'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이제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는 3시간 이내의 단편이냐, 아니면 1시간~1시간30분 이내를 한 편으로 하고 내용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대략 3편 이상의 시리즈이냐 정도로밖에 구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 네트워크의 대표적인 특징인 '16부작 미니시리즈', 일본 드라마의 특징인 '연 4분기에 따라 공개되는 10~11부작', 미국 드라마의 특징인 '인물과 배경을 유지하고 시즌1이 성공하면 무한시즌 연속제작' 등이 다 OTT라는 거대한 늪에서 뒤섞이는 분위기라고나 할까요.
늘 그렇듯 '볼게 없어....'하다가 연말이 되면 '아, 올해도 꽤 많이 봤구나' 하게 되는 드라마 결산.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숫자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냥 갯수를 세기 위한 도구일 뿐. 그리고 2022년이라는 것은 제가 해당 드라마를 본 게 2022년이라는 것이지 이 드라마들이 모두 2022년작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1.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우영우(그러나 서울대 로스쿨 수석 졸업에 빛나는)가 현실 법조계에 뛰어들어 다양한 사건을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 단언컨대 한국에서 지금까지 나온 장애에 대한 드라마 가운데 가장 유니크한 시선을 보여준 작품. 물론 '실제 장애인들에 비해 너무나 뛰어난' 우영우가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다른 편견을 일으킨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원래 드라마란 매우 특이한 인물들을 보여주는 장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P.S. 한 법조인은 "지금까지 본 한국 법정 드라마 중에서 가장 재판 장면이 리얼하다"고 평가하기도.
2. 재벌집 막내아들
최초는 아니지만 한국 드라마의 세계에 본격적인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의 장을 연 드라마로 기록될 역사적인 작품. 평생 재벌 그룹에서 일했다기보다 재벌 일가의 집사처럼 일했던 한 직장인이, 심각한 배신을 경험한 뒤 그 일가의 잊혀진 막내로 빙의, 거대한 성공과 복수의 인생 2회차를 살아가는 이야기. 도준이가 대체 언제 비트코인을 사나 궁금했는데...
1회와 16회 vs 나머지 2~15회를 별도의 작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등의 온갖 이야기가 쏟아졌지만, 이런 논란이 생산적인 논의로 이어지려면, 과연 21세기 한국의 시청자들이 '정말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와 작가가 시청자들에게 '들려 주고 싶었던' 이야기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 차이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야 했을텐데, 그렇지 못한 한국의 드라마 평단(?)이 좀 답답했습니다.
3. 나의 해방일지
<재벌집 막내아들>이 '지분'을 남겼다면 이 드라마는 '추앙'을 남겼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통학은 30분, 통근은 1시간 이상 걸리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탓에 이 드라마의 깊은 상징성에 대해 뭐라 말할 처지는 못되고, 그저 2022년의 가장 달달했던 드라마 중 하나로 기억합니다. ("나 안 되는데." "왜?" "살쪄서" "한시간 내로 살 빼고 나와")
그리고 한편으로 이 드라마의 진정한 가치는, 21세기 초의 한국이라는 나라의 한 단면 - 인구의 50%가 '수도권'이란 곳에 모여 살고, 그 안에서도 안쪽에 사는 절반과 바깥쪽에 사는 절반이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 어떤 사회학 서적보다 훌륭한 이해를 가능해게 해 줬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합니다.
4. 모닝쇼 (애플)
10년 이상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아침 프로그램 <모닝쇼>에서 어느날 남자 MC의 성희롱에 대한 고발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방송국 사장, 이사, 담당 CP, PD, 그리고 혼자 남은 여성 MC(제니퍼 애니스톤)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치열한 눈치보기에 돌입합니다. 목적은 단 하나 '남들이야 어찌 되건 나에게는 그 불똥이 튀지 않도록'. 이런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에 갑자기 등장한 시골 방송국의 무명 기자 리즈 위더스푼. 예측 불허의 다이내믹한 전개가 엄지를 절로 들게 하는 걸작.
....그러나 시즌2로 숫자가 바뀌는 순간, 거짓말처럼 드라마는 쓰레기로 바뀝니다. 주의.
5. 테드 라소 (애플)
별 성적을 내지 못하던 EPL 구단에서 어느날 미국 대학 농구 감독을 데려다 감독 자리에 앉힙니다. 미국인이 축구를 잘 알 리가...의 수준이 아니고, 오프 사이드 룰이 뭔지 설명하지 못하는 수준. 하지만 그는 타고난 친화력, 낙천성, 강한 의지로 팀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온갖 난관을 돌파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미국인이니까!
드라마 전체가 하나의 농담이지만 매우 강력합니다. 그리고 감동적입니다. 최고.
6. 아파트 주민들이 수상해 (디즈니)
디즈니플러스를 탈탈 털어도 <만달로리안>과 이 <아파트 주민들이 수상해> 만한 작품은 다시 없다는게 제 생각. 뉴욕의 유서깊은 고급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어찌 어찌 하다가 엮인 세 주민은 힘을 합쳐 실시간으로 범죄를 추적하는 팟캐스트를 운영합니다. 한물 간 배우와 한물 간 브로드웨이 프로듀서, 그리고 신인 화가의 케미가 의외로 찰떡.
시즌2도 재미있습니다.
7. 페리패럴 (아마존)
한국에선 마이너 OTT에 불과하지만 세계 2위 OTT인 아마존은 사실 매우 강합니다. 비록 <더 보이즈> 같은 작품이 시즌2에서 쓰레기로 불타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페리페럴> 같은 걸작을 내놓고 있습니다. 클로이 모레츠가 드디어 성인 역할에서 제대로 한 작품을 뽑아냈다는 생각.
근미래. 흔한 미국 시골 마을에 병으로 눈이 멀어가는 어머니, 술이나 축내는 제대 군인 오빠와 살고 있는 클로이 모레츠는 알고 보면 보기 드문 게임 천재. 뭔가 실생활에서도 직업을 찾으려 하지만 실제 수입은 부자들의 게임 레벨 올려주기 알바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너무나 실감 넘치는 게임에서 뭔가 미션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와. 정말로 실제같은 게임. 그런데....
8. 업로드 (아마존)
사실 신작은 아니고, 몇해 전 시작을 했지만 사정에 의해 못 보게 되었다가 올해 다시 정주행한 작품입니다. 배경은 인간의 뇌를 하드 디스크에 저장해 육신의 생사와 무관하게 인간의 의식을 살아 있는 상태로 뇌에 저장할 수 있게 된 근미래 시대. 그렇게 해서 인간들은 죽음을 거부하고, 자아를 인간이 만든 메타버스 세계에 저장해 생전보다 훨씬 더 꿈같은, 그야말로 인간이 만들어 낸 천국에서 영생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 천국에 가게 된 남자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 설정만 봐도 흥미진진!
9. 애나 만들기 (넷플릭스)
엄청난 물량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의 올해 대다수 시리즈는 실망의 연속. 그러나 <애나 만들기>는 강추할만 합니다. 사기꾼이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리고 왜 사람들은 그 사기꾼에게 놀아나는가. 정확한 분석과 정교한 묘사. 이것은 다큐인가, 드라마인가(사실 넷플릭스에는 이 사건에 대한 다큐도 있고, 이 드라마에서 언급되는 파이어 아일랜드 페스티발에 대한 다큐도 있습니다. 후자 강추). 흥미진진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애나 아버지가 독일에서 어린 애나를 만나 레스토랑에서 페트루스를 주문하는 장면.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드라마를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0. 웬즈데이 (넷플릭스)
아담스 패밀리를 봤건 안 봤건, 좋아했건 안 좋아했건, 이 독특한 청소년 드라마에 빠져들지 않기는 쉽지 않을 듯. 이 드라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담스 패밀리>보다 <해리 포터>를 예로 드는 것이 훨씬 좋을 듯 합니다. 한마디로 <어둠의 세계의 해리 포터>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작품. 캐서린 제타 존스의 모습이 좀 슬프긴 하지만, 드라마는 참 재미지죠.
아주 이상한 아담스 패밀리의 딸 웬즈데이가 집안 내력에 따라 기숙학교를 가는데, 그 기숙학교에는 뱀파이어, 인어, 늑대인간, 마법사 등이 드글드글. 한마디로 별 초능력 없는 웬즈데이가 평범해 보일 지경. 하지만 곧 모두들 알아차립니다. 과연 누가 제일 이상한 아이인지.
그리고 10대 드라마에는 꼽지 못했지만 올해의 기념할 만한 작품들로는:
* 수리남: 한 4.5회 분량으로만 줄였어도 10대 드라마에 당연히 꼽았을.
* 슈룹: 유니크해서 재미있었는데, 가짜 역사를 너무 진짜처럼 포장해서 살짝 마음에 안 든.
* 사내맞선 : 뭐라 욕해도 좋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이 재미있었던.
아, 그리고 어디다 끼워 넣어야 할까....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고, 했던 것 중 하나.
러브, 데스 + 로봇 시즌3의 마지막 편, <히바로 Jibaro>야말로 2022년을 대표하는 영상 작품 중 하나였죠. 알베르토 미엘고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앞날을 기대하게 만든 엄청난 작품.
1. 넷플릭스 <러브 데쓰+로봇> 시즌3의 마지막 편인 <Jibaro>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얼얼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작 17분짜리 애니메이션이지만 담고 있는 이미지와 스토리는 인류 문명 전체를 제대로 관통한다. 진정한 글로벌 프로젝트란 이런게 아닐까 싶다.
2. 가장 기본이 되는 배경 스토리는 신대륙을 짓밟은 스페인 침략자들의 이야기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이렌(혹은 키르케) 이야기의 결합인듯.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이미지의 폭격은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다.
3. 지역 문명을, 지구를, 혹을 자연을 제멋대로 약탈하고 유린하는 침략자들에게 원주민들이 숭배해 온 자연신(혹은 신적 존재)이 저항하는 이야기 자체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고전으로는 존 부어맨의 <에메럴드 포레스트>가 있었고, <원령공주>나 <아바타> 가 그랬다.
4. 그런데 여기에 존 워터하우스의 <사이렌>이나 <라미아> 같은 작품들의 메시지, 밀레이의 <오필리아> 같은 라파엘 전파 화가들의 물과 꽃잎 이미지, 금색 조각들로 뒤덮인 클림트의 <키스>같은 그림들의 아우라가 풍겨나온다. 극중 사이렌의 이미지나 동작은 인도+발리풍?
(물론 이건 다 제 기분에 그렇다는 겁니다. 전문가분들이 보시고 야 그거랑 그거랑 뭔 상관이야 하시면 바로 깨갱...)
5. 물론 이런 이미지나 스토리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란 추측은 가능하지만, 알베르토 미엘고는 이 모든 것을 종합해(사실 다 가져다 합쳤다는 것만도 놀라운데), 전에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 다음엔 또 어떤 것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확실히 코로나의 충격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극장을 찾는 것이 전보다 좀 더 번거로운 일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래 리스트 중에서도 극장에서 본 영화는 손에 꼽을 정도네요. 심지어 극장에서 본 영화가 집에 앉아서 본 영화에 비해 만족도가 높았던 것도 결코 아니고 말이죠.
아무튼 늘 그렇듯 제가 2022년에 봤다는 것이지 제작 연도가 2022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숫자는 순위가 아닙니다. 그냥 갯수를 세기 위해 붙인 넘버링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1. 프리가이
NPC, 스타크래프트에서 마린들이 열심히 기관총을 쏠 때 한가하게 옆을 지나가는 백곰들이나 당신이 금괴 판매자를 찾아 중동의 낯선 항구를 방황할 때 옆으로 지나가면서 "메카에서는 향신료가 싸다네"하는 존재들을 말합니다.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보잘것 없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존재를 가지고 만들어 낸 보석같은 영화. 시대정신에 딱 맞습니다.
2. 리카르도가족으로 산다는 것
언젠가 '왈가닥 루시'라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세대가 이제 사라져가고 있지만, 한때 미국의 연인이자 세계의 연인이었던 루실 볼이라는 여배우. 그 여배우와 주변 사람들에게도 오늘날에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인종주의와 매카시즘의 폭력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둥둥 떠다니던 시절이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영화.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는 절대 그냥 주어진 것도 아니고, 태곳적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했던 것이 아닙니다.
3. 프렌치 디스패치
영화든 소설이든 모든 것은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않게 해 주는 영화. 그 이야기를 이렇게 촘촘하게 책으로, 잡지로 만들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영화. 웨스 앤더슨의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문라이즈 킹덤>과 함께 최고로 꼽고 싶은 작품.
4. 탑건: 매버릭
당신은 왜 극장에 가고 영화라는 것은, 극장이라는 것은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가장 최근의, 가장 설득력있는 답변. <탑건> 세대가 아닌 관객들까지도 사로잡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아직 인류가 낭만, 성취, 우정 같은 동기들에 대해 애착을 잃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 느껴집니다. 실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는...
그리고 영화 보는 동안이라도 스무살로 돌아간 듯한 느낌.
5. 놉
조던 필 감독의 세번째 작품. 대체 우리가 모르는 하늘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뭔가 진지하게 얘기하는 척 하다가 곧바로 병맛으로 넘어가고, 그렇게 블랙코미디인 척 하다가도 어느새 호러로 변신해 있는 영화. 영화 <놉> 자체가 영화의 역사에 대한 알레고리라는 주장도 있지만, 거기까지 굳이 갈 필요가 없다. 그냥 한 편의 호러 영화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고 강렬한 작품.
P.S. 다니엘 칼루야는 조던 필 감독의 세 작품 모두에 출연하지는 않습니다.
6. 헌트
한국 스릴러의 역사는 <헌트> 전의 작품과 그 뒤의 작품으로 나뉠 듯. 특히 한국 현대사의 정치 부분을 건드리면서 시나리오 상태에서 이 정도의 짜임새를 갖춘 영화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고, 이 모든게 신인 감독 이정재의 책임하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진정 놀라울 뿐.
7. 헤어질 결심
이미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이 영화는 박찬욱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죄와 벌에 대한 영화. 박해일의 죄가 '아내를 배신한 죄'가 아니라 '사랑을 외면한 죄'라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주어지는 벌 역시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는' 것. 그래서 이 영화를 멜로 영화로 보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 처참한 징벌극.
8. 13 라이브스
극장개봉도 하지 않고 단지 아마존프라임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이 문제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올해 가장 강렬했던 영화 중 하나. 13명의 조난당한 소년 축구단 일행을 구하기 위해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정성을 다하는데.... 너무나 담담한 시각이 가슴을 저미는 영화. '저렇게 모두들, 자기 할 일을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렇게 해야 아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것이었던 거죠.
9. 아바타2
솔직히 292분은 좀 무리라는 생각도 했지만 2022년에 본 영화 중 10편을 뽑는데 <아바타2>를 꼽지 않는 것이 가능할까? 저는 불가능했습니다. <아바타3>이 나와도 꼭 볼 거구요. 물론 그 얘기 외에는 사실 별로 할 얘기가 없다는게 함정. 그래도 같은 돈 만원(물론 저는 2만원) 내고 세시간 넘게 이런 시각적 경험을 즐길 수 있다는 건 정말 염가라고 생각합니다.
10. 더 스위머
시리아 출신의 두 자매가 올림픽 출전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 (이하 생략) 내전과 학살의 땅. 먼 나라에 사는 우리는 그저 '거기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야'라고 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곳에도 젊음이 있고, 누려야 할 삶이 있고, 가족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무겁고 눈물부터 쏟아야 할 것 같은 톤이 절대 아니고, 거칠 것 없는 젊은이들 이야기답게 흥겹고 씩씩한 영화지만, 어느새 '난민'이라는 말의 무게가 가슴에 실리는 영화.
경합: 범죄도시2
어쨌든 코로나로 지친 사람들을 가장 위로해준 작품. 손석구 캐릭터가 왜 사람을 죽이는가에 대한 개연성 여부를 비롯해 스토리의 구멍을 지적하자면 끝이 없을 수도 있겠으나... 마동석의 펀치가 작렬할 때마다 울려퍼지는, 500년 된 오동나무가 쪼개지는 듯한 '쩍' 소리의 쾌감 앞에서는 비판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할 듯.
엘비스
바즈 루어만에 대한 믿음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호오가 엇갈리는 작품이지만, 잊혀져가는 엘비스와 그의 시대에 대한 정리를 더 이상 아름답게 해낼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톰 행크스의 악역이 신선했고, Suspicious Mind가 보고 나서도 한동안 귓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1. 1940년생인 펠레는 1958, 1962, 1970 월드컵에서 세 번 우승, 줄리메 컵을 영원히 조국 브라질에 귀속시킨 영웅이 되었다. 물론 펠레에게는 좋은 파트너들이 있었다. 초기에는 가린샤, 후기에는 자일징요(자이르지뉴) 같은 초특급 스트라이커들이 곁에 있었다. 이 시절까지만 해도 브라질 축구와 유럽 축구 사이에는 꽤 레벨 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펠레의 브라질은 조별예선을 통과하지 못했다. 대신 브라질을 쓰러뜨린(그리고 나중에 북한도 탈락시킨)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오가 이 대회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처럼 축구란 역시 알 수 없다. 오늘날의 펠레는 '예측 못 하기로 유명한 왕년에 축구 좀 했던 아저씨' 대접이지만 펠레가 아니라도 원래 맞추기 힘든게 축구의 승부다. 더구나 스코어까지 맞춘다는 건 신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펠레가 한국 팀과 붙어도 아슬아슬한 승부가 연출될 수 있는 게 축구다. 50년 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
2. 펠레는 한국에서 딱 한번 경기를 한 일이 있다. 1972년 6월2일. 당시 소속팀이던 산토스의 아시아 순회 경기에 참가해 서울운동장에서 국가대표 상비군과 친선 경기를 펼쳤다. 차범근 이회택 이세연 박이천 김호 등 당시의 톱스타들이 모두 출전했는데 차범근과 이회택이 득점하며 종료 4분전까지 동점으로 접전을 펼치다 3대2, 한골차로 패했다.
펠레는 후반 한 골을 넣었지만 '펠레 부진'이라는 기사 제목이 뽑힐 정도로 당시 한국 팬들이 펠레에게 건 기대는 컸던 모양이다. 3만5천 관중이 모이고, 나중에는 관중들이 펠레에 붙어 밀착 수비하는 이차만에게 욕설과 야유를 퍼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전에 본 이회택 회고록에는 "이차만이 경기 전부터 '펠레는 내가 꽁꽁 묶겠다'고 장담을 했다. 나중에 한방, 어! 하는 사이에 펠레에게 공이 가더니 바로 골이 됐다. '책임진다더니' 하는 뜻을 담아 이차만을 쳐다봤더니 이차만이 '형, 딱 한번 눈 질끈 감았소. 관중들도 표값은 해야지' 라고 하더라"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펠레가 뛴 산토스 팀을 상대로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는 건 한국 축구계의 대단한 쾌거로 평가됐다. 다른 기사를 보면 암표가 극성을 떨고, 경기장 앞에서 사람들이 '펠레 방석'이라며 펠레 사진이 박힌 신문을 팔고, 펠레 얼굴이 인쇄된 '펠레 손수건'이 날개돋친듯 팔렸다는 내용을 봐도 대단한 화제였다.
3. 사실 펠레=골이라는 게 기본 상식이지만, 펠레는 본질적으로 '득점을 만드는 선수'지 '골 넣는 기계' 타입이 아니었다. 야구만큼 공식적으로 매겨진 것은 아니지만 축구에서의 등번호 역시 포지션과 관련이 있다.
야구의 1번이 투수이듯 축구에서의 1번은 당연히 골키퍼. 2~6번은 수비수고 7~11은 공격수다. 대략 7번과 11번이 양쪽 윙어를 말하고, 전통적으로 스트라이커, 즉 센터포워드의 번호는 9번이었다. 펠레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꼽은 디 스테파노에서 호나우두, 해리 케인에 이르는 9번의 역사는 유구하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원래는'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펠레는 10번. 물론 어느 포지션에 갖다 놔도 아마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되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을 정도로(심지어 골키퍼를 포함해) 뛰어난 축구감각을 가진 선수지만, 역사상 가장 유명한 10번이며, 마라도나와 메시가 10번을 달게 한 그 사람이다. 펠레 이전에도 푸스카스와 같은 역사적인 포워드들이 10번을 달았지만 진정한 10번, 최전방에서 미드필드까지 공격을 조율하며 득점을 창출해내는(스스로 넣든, 넣게 해 주든) 역할을 정립한 것은 누가 뭐래도 펠레다.
당연한 얘기지만 펠레 이후 브라질의 에이스들은 무조건 '제2의 펠레'로 시작했다. '하얀 펠레'로 불렸던 지코(지쿠)를 비롯해 나타나는 족족 '펠레의 후계자'로 불렸지만, 엄밀히 말하면 브라질의 에이스는 펠레-지쿠-베베토-호나우지뉴로 이어지는 10번 계열과 가린샤-자일징요-소크라테스-호마리우-호나우두로 이어지는 9번 계열로 구분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런 의미에서 아마도 현재까지 나타났던 선수들 중 진정한 '제2의 펠레'라면 호나우지뉴를 꼽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4. 얼마 전 FIFA 홈페이지에서 이번 아르헨티나의 우승으로 축구의 GOAT는 메시로 판가름났다는 망발을 저질렀다가 곧 내린 적이 있는데(마라도나 팬들의 항의로 없어졌다고 함), 메시가 2026년 월드컵에 출전해 아르헨티나를 우승시키지 않는 한, 펠레-마라도나-메시를 놓고 벌이는 GOAT 논쟁은 앞으로도 수십년간 유효할 것이다.
펠레에게 축구는 '뷰티풀 게임'이었다. 이기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다는 의지로, 축구를 전쟁 대신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와 브라질의 축구가 아니었다. 재미있고, 아름답고, 미학에 충실한 것이어야 했다. 그 이후에도 - 심지어 요즘에도 - 브라질 대표팀의 축구를 보다 보면 경기가 잘 풀리지 않을 때 선수들이 '너희 이런 식으로 하면 나 안 해', '이렇게 재미없게 하면 나 안 해' 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같은 남미 축구라고 해도 정말 황소떼처럼 밀어붙이는 아르헨티나 축구와는 매우 다르게 느껴진다.
펠레의 시대에는 그렇게만 해도 월드컵 우승도 할 수 있고, 만사가 행복했다. 유럽 축구가 전 세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모으며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 모으던 시절도 아니었다(펠레의 유럽 이적을 막기 위해 브라질 정부가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프리메라리가가 지금의 프리메라리가라면 펠레는 당연히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을 것이다). 모든 게 지금보단 소박했다.
그리고 그런 시절은 이제 10만년 이내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게 참 슬프다.
RIP. 펠레.
P.S. 펠레의 아버지도 축구선수이긴 했지만 크게 성공한 선수는 아니었다. 펠레는 한때 '제2의 펠레'를 묻는 흔한 질문에 "제2의 펠레는 나타날 수 없어.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너무 늙으셨거든"이라고 대답한 적도 있다고 한다.
펠레는 7명의 자녀를 뒀는데 그중 축구선수가 된 것은 장남(넷째) 에디뉴 하나 뿐. 하지만 골키퍼였고, 국가대표급으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산토스에서 200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안타깝게도 온 세계가 기대한 '펠레 2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축구에서도 성공한 2세가 거의 없는 걸 보면 축구를 잘 하는 데 있어 유전자의 힘은 그리 대단하지 않은 모양이다.
매년 연말이 되면 정리를 해보곤 합니다만... 매년 반복되는 생각은 '아 내년에는 책 좀 더 읽자'.
물론 실용서 종류를 필요에 따라 보긴 하지만, 그래도 막상 지나고 나면 참 부족함을 느끼게 됩니다.
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시간순으로 2022년의 첫 책인지도? 이미 올해가 저물 때가 되어 가다 보니 아직 안 읽은 분이 거의 없을 듯도 하지만, 혹시 아직 안 읽은 분들이 있다면 늦지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책을 처음 읽으시는 분들은 살짝 혼란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한 여성 과학자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로 시작하다가 한 유명 어류학자의 성공담, 그리고.... 반전에 반전이 존재하는, 그러면서 강렬한 메시지를 주는 놀라운 책. 아직 안 읽어보셨다면 2023년에는 반드시 읽어 보시길.
2. 모든 빗방울의 이름을 알았다.
본래 장편보다는 단편을 좋아하는 편. 프랑스의 <파리 마치>가 자신들의 잡지에 연재된 세계 유명 작가의 단편들 중 베스트를 추린 단편집. 이선 캐닌의 <궁전 도둑>과 제임스 설터의 <방콕>, 두 편만으로도 제값을 하는 책입니다. 물론 오래 전에 읽었지만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도 걸작. 누군가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두고 '불면증에 대한 가장 뛰어난 은유'라고 말했던 기억이 새삼.
이런 단편집은 시간 날 때마다 사탕 까 먹듯 한편씩 읽는 재미가 쏠쏠하죠.
3. 일본인 이야기 1, 2
한일전은 무조건 이겨야 하지만 '진짜 일본'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정말 적은 나라 한국. 자칭 일본 전문가는 넘쳐나지만 센고쿠 시대와 임진왜란 시대, 혹은 메이지 유신기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역시 대부분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에도 시대 일본이 엄격한 기독교 금지와 쇄국 정책 속에서도 난학의 전통으로 대표되는 서구 문물을 꾸준히 가까이 하며 이미 한국을 앞지르기 시작했다는 것까지는 알지만, 거기서 좀 더 알고 싶으면 한국어로 된 좋은 문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같은 맥락에서 시라이 사토시의 <국체론>도 참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휴가 때 긴자나 오모테산도, 좀 더 나아가 지유가오카나 시모키타자와에서 쇼핑하는 것 이상으로 일본을 알고 싶은 분들이 읽으실 만한 책. 감동적입니다.
4. 고립의 시대
현대의 고독을 말한 사람은 많지만 그 고독을 이렇게 사회적/심리적/산업적으로 주도면밀하게 분석한 책은 드뭅니다. 뭣보다 중요한 건 코로나가 끝난다 해서 사람들이 외롭지 않은 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외로움의 치유를 위해 사람들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혹은 그 해결을 위해선 어떤 일을 해야 할까...)에 대해 빛나는 인사이트를 주는 책. 거기다 나치, 트럼프, 아베의 성공을 설명해주는 외로움과 문명의 관계는 매우 설득력있습니다.
초반의 '뉴욕의 시간제 친구' 이야기부터 흡인력이 장난 아닙니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너무 폭이 넓다(너무 많은 것을 고독과 고립감으로 해석한다?) 정도인데 그건 각자 알아서 새겨 들으시길.
5. 고양이에 대하여
어떤 주제에 대해 '정말 당신이 이 주제에 대해 뭘 알긴 알아?' 라는 식의 책을 매우 좋아하는 편입니다. 마찬가지로 애묘인들이 넘쳐 나는 시대. 과연 고양이 기르는 분들은 이런 것까지 알까.... 싶은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쨌든 고양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야생에 가까운 동물이라는 것(인류가 개를 길들인 기간이 고양이를 길들인 기간의 5~10배 정도 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엄밀히 말하면 아직 '애완' 보다는 '포획' 상태의 종이라는 것.... 등등. 필요에 의해서 읽은 책이지만 고양이를 키우시는 분이든, 아닌 분이든 매우 흥미로울겁니다.
6. 더 페이블
뭔가 우울하고 답답할 때를 위한 만화. 일본 전국구로 활약하던 살인청부업자에게 어느날 보스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오사카의 아는 야쿠자를 소개시켜 줄테니, 그 지역에서 당분간 숨 죽이고 살아라. 절대 티 내지 말고, 보통 사람들 속에 섞여 살아야 한다." 반문이 허용되지 않는 절대 보스의 명령. 당연히 잘 수행하려고 하는데, 당연히 잘 안 되겠죠.
문제는 한국에선 전자책으로밖에 발매되지 않았다는 것. 하지만 이 만화를 보기 위해서라면 전자책 정도는 살만 합니다.
7.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
이 작가의 전작 <모두 거짓말을 한다>를 읽고 대실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인사이트라고 할 수도 없는 잡담으로 가득한 책. 그런데 그런 기대를 뺀 상태에서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를 읽으니 재미와 상상이 솔솔. '데이터 사이언스 어디까지 왔나'를 이해하는 데에는 별 도움이 안 되겠지만 현대인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됩니다. 물론 오락성도 매우 뛰어납니다.
한마디로 '아주 구라가 좋은' 책. 구라 속에서 쓸만한 이야기를 걸러낼 수 있는 사람에겐 참 유용한 책.
8. 감각의 미래
'아니 이런 책을 이제서야 보고...?' 라고 하셔도 할 수 없는, 이미 고전이 된 책. 소위 말하는 인지과학이라는 분야에 대한, 너무나 뛰어난 가이드. 흔히 우리가 오감이라고 부르는 인간의 감각들을 뇌가 어떻게 처리하는가에서부터 그 각각의 감각을 현대 첨단 과학은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대체하고 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점검할 수 있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인간이 직접 경험하지 못하는 세상(즉 메타버스 세계)에서 인간의 감각기관과 뇌의 '착각'은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각종 실험과 새로운 기술을 통해 설명하는 대목.
물론 이 책이 나온 뒤에도 놀라운 발전이 현재진행형으로 펼쳐지고 있겠지만, 역시 그건 각자 알아서 보충해 가시길. 제 수준에서는 이 정도면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9. 폴리나
바스티엥 비베스. 우연히 그림 한 장을 보고 빨려들듯 읽게 된 책. 회색의 사회주의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폴리나가 츤데레의 끝에 있는 발레 선생님을 만나고, 재능을 인정받고.... 그렇게 자기 인생의 춤을 추게 되는 이야기. 쓸쓸하지만 군데 군데 훈훈하고, 그 어떤 젊었던 날을 되새겨보게 하는 만화.
만화가 두 편이나 올해의 책으로 뽑힌 것은 그만치 '진지한 책'을 안 읽었다는 반증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 지금 저 표지에 나온 정도의 제한된 선으로,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인간의 감정을 빠짐 없이 표현해 내는 걸 보고 있으면 저절로 중얼거리게 됩니다. '비베스는 천재다'. 물론 이 책을 보고 나면 <염소의 맛>도, <내 눈 안의 너>도 읽게 됩니다. 당연히.
10. 크래프톤 웨이
'아 얘가 그 쪽으로 가더니 이런 책을... ' 이런 생각 하시는 분들도 많을 듯. 사실 책을 선물받고 거의 1년 지나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읽을수록 흥미진진. '개발, 디자인, 마일스톤, KPI, MAU' 이런 이야기를 배제하고 보면 이 이야기는 하나의 현대 영웅서사더군요. 그런데 주인공은 2/3가 지난 다음에 등장하고, 책의 초반부에 대의를 위해 뭉친 군웅들의 운명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아 이건 스포일러라 차마 말할 수가). 소설적인 과장, 무협지적인 윤색 없는 담담한 서술이랄까.
많은 이들은 역사가 그냥 숫자와 도표의 연결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남들의 성공담은 그냥 우상향의 그래프라고 생각해버리곤 하지만, 실제로 역사를 들여다 본 사람들은 어떤 위대한 업적도 우상향 직선으로 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걸 알려주는 좋은 책, 좋은 서술. 많은 면에서 공감하고 감동.
11. 위어드
많은 뛰어난 분들이 극찬하시기에 속으로 의아했던 책. 아니 고등교육을 받은 진보적인 서구 남성들이 인류 문명을 이끌고 있다는 게 대체 뭐가 신기한 일일까 싶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책의 데이터 활용은 매우 놀랍습니다. 특히 한국에 대한 부분. 어떤 분야에서는 대단히 개인주의적이고 진보적인 면모를 보이지만 정직성("당신이 유일한 증인인, 친한 친구의 범법 사실을 감춰주기 위해 당신은 위증을 할 수 있는가")에서는 최하위인 나라. 과연 이런 나라에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이거다 싶은 답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아무튼 읽고 나면 뿌듯해집니다.
12.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13세기 남송의 화가 이숭이 그린 <고루환희도(骷髏幻戱圖)>를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 상징성의 깊이에 감탄하게 됩니다. 해골은 작은 해골로 아이를 유혹합니다. 그 아이를 말리는 다른 아이는 누구며, 해골의 뒤에서 젖먹이를 안고 있는 여인은 또 누구란 말인가.
그러다 보면 과연 우리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이유로 오래 전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잠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미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부박한 것인가 하는 것은 대략 2000년 전에 확인된 것인데,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걸까. 당신이 함부로 커피 한잔에, 소주 한잔에, 가벼운 실패 후에 '인생 뭐 있니'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 온당한 일은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는 책.
1. 개봉 첫주를 놓치면 루저가 될 것 같은 불안감에 예매 시도. '드디어 예매가 열렸다'는 제보를 받고 예매에 착수했는데 어찌나 세상에 손 빠른 사람들이 많은지 이미 대부분의 IMAX와 DOLBY CINEMA의 핵심 좌석은 사라진지 오래. 마침 누군가 현재 국내 최고의 관람 환경은 남양주에 위치한 현대아울렛 스페이스원(메가박스)라고 극찬했던 말이 생각나 예매 시도. 여기도 역시 대다수 좌석은 빛의 속도로 사라진 뒤였으나 그래도 센터 라인의 좌석 확보. 대신 토요일 오전 8시.
2. <아바타>와 제임스 카메론에 대해서는 존경심 뿐. 1984년 겨울, 홍보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대체 영화의 장르가 뭔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본 <터미네이터>의 충격은 아마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다른 식당들이 설렁탕에 깍두기 반찬 하나, 짜장면 우동에 단무지 반찬 하나 놓고 장사 하던 시절에 갈비구이 반상에 16첩 반찬을 깔아 놓고 갑자기 방어회, 서산 무젓, 눈볼대 구이에 백합탕까지 시간 순으로 깔아 준 뒤 다 먹고 나가려는데 차가운 배숙에 개성식 주악으로 마무리까지 기막한 한끼 식사를 같은 돈 내고(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에선 모든 영화의 관람 요금이 같다) 먹게 해 준 카메론 형님의 은혜란. 그 뒤로 <에일리언2>를 보고 비슷한 감동을 느꼈고, 이후 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을 배신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던 <어비스>도 아름답기만 했다. 아니 뭐가 어때서? 재미만 있는데.
3. <아바타>때는 그래도 관객들이 새로운 세계관에 안착하게 하기 위해 꽤 긴 도입부와 안내 설정이 필요했지만, 이미 <아바타>를 13년 전에 본 관객들에겐 <아바타2>를 위한 새로운 적응 따위는 필요 없었다. 줄거리 역시 너무나 직관적. 이미 <아바타>의 엔딩에서 설리는 자신의 나비족 아바타에 정신을 이식, 아바타를 새로운 몸으로 삼아 판도라 행성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인간 과학자들이 적응을 위해 만든 나비족 아바타가 어찌나 완성도가 높던지 각종 운동능력은 물론이고 생식기능까지 완벽, 설리는 아내 네이티리(이 이름 기억하시는 분은 아무도 없는 듯. 캐릭터 이름을 기억할 필요 없는 새로운 프랜차이즈의 등장)와 아들 딸 쑴풍쑴풍 낳고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의 보고 판도라 행성을 기껏 개척해놓고 포기할 인류가 아닌 터. 그 전보다 확실한 준비를 갖추고 다시 침략자들이 밀어닥친다. 더구나 숙적 쿼리치 대령까지 지난번의 패배는 체력 격차 때문이었다고 판단한 듯, 나비족 아바타 몸을 새로 갖추고 달려든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수순. 쿼리치와 인간들의 1차 제거 표적이 자신과 가족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설리는 정든 할렐루야 마운틴을 떠나 멀리 멀리 새로운 곳에 숨는다. 그곳에는 해양 생태에 맞게 진화한 살짝 다른 나비족들이 살고 있다.
4. 보시다시피 <아바타2>의 이야기 구조에는 큰 매력 포인트가 없다. 14년을 기다린 팬들에게 풀 떡밥은 <WAY OF THE WATER>라는 부제답게 끝없이 펼쳐지는 대양 생태계와 그 속에서 함께 헤엄치는 나비족들의 화려한 모습, 그리고 새로 도전해 온 인간들과의 치열한 전투 정도다. 그렇다. '볼거리'에 대한 만족이 <아바타2>에 대한 당신의 만족도를 결정한다. 그 밖의 것은 없다.
사실 많은 사람이 화질과 자연스러운 몸동작을 이야기하지만... 물론 아주 훌륭하다. 훌륭하긴 한데, 이미 많은 사람이 UHD와 4K 시대를 즐기고 있는 마당에, 이 정도의 영상이 과연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지 잘 모르겠다. '너무나 멋지다'는 것을 기본으로 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집에서 20인치 브라운관을 보시는 분들이 아니라면 기절할 정도의 놀라움은 아니었다 정도로 해 두자.
그래서 개인적인 감상을 말하자면, '볼거리는 매우 훌륭하나, 2시간 72분을 버티기에는 살짝 아쉽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마지막 타이타닉(?) 시퀀스는 좀 너무 길고 성의가 부족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아, 노파심에서 얘기하자면 이런 얘기들은 '그래서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라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님을 다시 한번 밝혀 둔다. 무조건 봐라. 극장에서 봐라. 가능한 한 큰 상영관에서 3D로 봐라. 이걸 다 전제로 하고 하는 얘기다. 이런 투정을 한다 해도 이건 그냥 가족간의 응석 같은 것일 뿐. 이번 생에 <아바타> 시리즈가 몇 편 더 나올지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어찌 안 보고 지나갈 수 있을까. 다 본다.
5. 카메론은 살짝 변했다. 거의 모든 인터뷰에서 '가족애'를 좀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 하며, 전 같으면 나비족 한 마을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초토화시켜도 모자랄 상황인데, 악당들이 지나치게 인간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하며... 너무 인자해진 메론이형이랄까.
이런 면모들을 볼 때 <아바타>의 속편이 몇편까지 만들어지든(일단 5편까지는 나온다 치고), 동화같은 해피엔딩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편에서 나비족은 모두 소수민족 배우들이 연기했던 반면, 이게 오히려 역차별의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는지 나비족 역할에도 상당히 많은 백인 배우들이 투입된 점도 세월의 변화를 느끼게 한다.
6. 애당초 <아바타2>는 2015년 정도에 개봉 예정이었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사실 누가 카메론 옹에게 일 좀 빨리빨리 하라고 재촉을 할 것이며, 카메론 형 입장에서 보면 몇달 사이에 더 좋은 기계와 더 좋은 소프트웨어가 나오는 판에 어느 단계에서 딱 끊고 완성작을 내놓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2편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했으니 3편은 좀 빨리 내주길.
아무튼 메론이형, 건강하시고 오래 오래 사시고 앞으로도 좋은 영화 계속 만들어주세요!
P.S. 1. 사실 카메론 형은 흥행 못잖게 제작비 상한 파괴자로서도 1인자의 면모를 과시해왔다. <T2>때 최초로 제작비 1억불을 넘겼고 <타이타닉>에선 역시 최초로 2억불을 넘겼다. 그때마다 할리우드 최강의 스튜디오들이 드디어 우리 회사가 망하는구나 곡소리를 냈지만 그 곡소리들은 이내 샴페인 터뜨리는 소리로 바뀌었고....
<아바타2> 개봉에 맞춰 카메론은 희한한 이야기를 했다. GQ 기자가 수지타산 이야기를 묻자 "영화 사상 최악의 비즈니스다. 이번 영화는 역대 3,4위권의 흥행을 기록해야 적자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역대 1위가 <아바타>의 29억불, 4위가 <타이타닉>의 20억불 선인데. 이 말이 기사화되면서 "<아바타2>의 손익분기점은 흥행 20억불 선"이라는 소문이 전 세계에 퍼진 것이다.
그런데 이 금액이 너무 어이없는 금액이다 보니 저게 말이 되느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금까지 알려진 <아바타2>의 제작비는 최대 4억불 정도. 통상 손익분기점은 제작비+배급 비용+홍보비 정도에서 결정되는 것이 상식인데, 누가 뭐래도 이 제작비 외의 추가 비용이 16억불이라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얘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추측한 바에 따르면,
1) 카메론이 <아바타2>를 통해 앞으로 남은 속편들의 제작비를 다 뽑기로 결심했다(카메론은 적으면 3편, 많으면 5편까지 시리즈를 이어가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러니까 다음 작품부터는 그냥 리스크 0인 상태에서 제작을 할 계획이다. <- 사실 말이 안 되지만 카메론이 한 말이니 이런 의미일수도 있겠다 정도?
2) <아바타2>를 만들기 위해 특수효과나 그래픽 관련 기업들을 아예 카메론이 사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회사들의 인수비용을 모두 뽑을 생각이다. <- 역시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그중 나름 합리적인 해석.
3) 사실 <아바타2>의 제작비가 4억불보다는 꽤 많고, 카메론은 미국 국내 흥행만으로 흑자를 내 버릴 생각이다. <아바타>의 전 세계 흥행 성적은 29억달러로 역대 1위지만 미국 국내 흥행만으로 따지면 약 7억불 정도, 역대 4위권이다. <-뭐 이것도 할리우드=세계라고 생각하는 분들을 생각하면 가능한 숫자...
4) 그냥 카메론의 과장법이다. <- ....충분히 가능
P.S.2. 그렇게 판도라 행성까지 가서 구하려고 다들 애썼던 암리타는 이미 지구에서 시판되어 팔리고 있다. 메론이형, 부디 이거 드시고 건강 지키시길. (AMRITA는 산스크리트어로 '불멸' '불사'라는 뜻이라고...)
흔히 스파이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를 '첩보물'이라고 뭉뚱그려 얘기하지만 그 안에서도 '누가 배신자인가' 혹은 '누가 진짜 스파이인가'를 찾는 이야기는 그 안에서도 별도의 장르로 분류될 정도로 인기 높은 소재입니다. 조직 내에 잠입해 우리편을 가장하고 있는 첩자를 영어로 두더지(mole)라고 부르기 때문에 이 장르를 두더지사냥(molehunt)라고 흔히 부르죠. 영화의 제목이 <헌트>인 것 역시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 듯 합니다. (이 대목에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영화가 케빈 코스트너의 <노 웨이 아웃>같은 거라면 당신은 옛날 사람... 네? <무간도>요? ;;)
<헌트>는 이 장르 전통의 충실한 계승자이면서 탁월한 독자성을 갖춘 작품이고, 감히 말하자면, 한국 영화계가 이 장르에서 지금껏 만들어 낸 영화들 중 최고작으로 꼽을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제를 다룬 한국 영화에서 평균적으로 등장해 온, 너무나 밋밋하고 평면적인 주인공들의 캐릭터가 불만이었던 관객이라면 <헌트>를 통해 그 갈증을 씻어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캐릭터가 이 영화의 가장 큰 강점으로 보입니다.
겉으로는 수트를 차려 입었지만 속은 일상처럼 서로 죽고 죽이던 칼잡이들 그대로인, 무사들의 시대를 <헌트>는 실감나고 설득력있게 그려냅니다.
영화는 전두환 정권의 집권 3년차인 1983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웅평 귀순, 소련 전투기에 의한 대한항공 여객기 격추 사건, 그리고 아웅산 묘소 테러 사건 등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져나온 파란만장한 그 해입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권력 수호의 핵심이던 중앙정보부를 전두환 정권이 국가안전기획부로 개칭했지만 여전히 대외 첩보와 민간 사찰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던 시절이죠. 정권은 바뀌었지만 "당신들 누구야?" "남산에서 나왔다 이 새끼야!"는 그대로이던 그 때.
하지만 <헌트>는 어디까지나 픽션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전두환, 노신영, 이웅평 같은 인물들의 실명은 다른 이름으로 바꾸거나 아예 거론하지 않고 있습니다. 테러의 무대도 미얀마에서 태국으로 바꿔 버리고 사건의 내용도 '국가 원수 시해 음모'라는 핵심을 제외하면 실제 사건과 사실상 일치하는 부분이 없을 정도로, 창작의 세계로 멀리 가 있죠.
아무튼 잠시 줄거리.
독재 정권 3년차의 안기부. 국내팀 담당 차장 정도(정우성)와 해외팀 담당 차장 평호(이정재)는 워싱턴에서 대통령 살해 음모 사건이 발생한 뒤 그 처리 과정에서 심하게 대립합니다. 서열상으로는 평호가 윗사람이지만, 과거를 생각하면 결코 편치 않은 사이.
특히 안기부 내부의 최고 기밀 정보들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면서, 조직 상부는 내부 첩자를 파악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이들 두 사람이 상대방을 견제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조사에 착수한 두 사람은 모두 상대방에게서 석연찮은 증거들을 발견해 냅니다.
그렇게 해서 두 라이벌의 대결 속에서 '과연 누가 첩자일까'를 풀어가는 고전적인 구조.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시저> 후반부에서 그 전형을 만들어 놓은, 두 라이벌 사이의 치열한 치고 받고를 중심으로 한 플롯의 핵심은 결국 두 사람 사이의 기울지 않는 균형인데, 이미 영화를 본 사람들의 증언대로 이정재 감독의 솜씨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 영화에서의 연출은 사실 배우로서의 연기와 따로 떼 놓고 생각하기가 힘들죠. 두 배우의 대결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화면 가득한 풀샷을 이겨내는, 잘 늙은(?) 두 남자의 투샷은 매우 아름답고 만족스럽습니다. 정우성 역시 농익은 연기가 그만입니다.
이정재 감독은 시나리오 수정에도 깊이 관여했다고 들었는데, 그 완성도가 놀랍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두 남자는 그저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선을 그을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들이란 면에서 감탄을 자아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도 한국의 1980년대를 선과 악의 대립으로 파악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그 흑과 백, 양 극단 사이에 두터운 회색 층이 있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북한이나 미국이라는 변수들까지 감안하면 계산은 매우 복잡해집니다.
그리고 그 뒤, 30여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한민국 사회의 관찰자들은 처음엔 흰색이나 희뿌연 회색으로 보였던 수많은 점들이 당시에는 선명한 검은 색이었던 점들보다 더 검게 보이게 되곤 하는, 기묘한 변화를 목격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 영화가 커버하고 있는 시대는 그런 시대였고, 오히려 주인공인 두 남자는 그런 시대에 나름의 신념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배신한 것인지, 혹은 그 '배신'과 '충성' 사이의 어느 쪽이 더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영화는 분명 흥미진진한 오락 영화지만, 던지는 질문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아무튼 누군가 <헌트>에 대해 '먹물들이 더 좋아할 영화'라는 평을 내리기도 했는데, 제가 어쩔 수 없는 먹물 취향이라면 그것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당시의 정치 상황이나 복잡한 생각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게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적이면서 또 동지이기도 한 두 남자의 경쟁과 협력(?) 이야기라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는 감히 커티스 핸슨의 <LA 컨피덴셜>에 비견할 만한 멋진 영화가 드디어 한국 영화사에도 등장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놓치지 말고 보시길.
P.S.1. 올 여름,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했는데, 정작 최고의 캐스팅을 감춰둔 건 이 작품이었습니다. 유재명 주지훈 황정민 정경순 조우진 박성웅 등 어지간한 영화의 주연급 배우들이 거의 제대로 된 대사 한마디 없는 역으로 스쳐가듯 등장합니다. 감독님의 캐스팅 실력 실로 대단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베스트는 진짜 귀순용사같았던 그 분.
P.S. 2. 저분의 귀순을 환영하기 위해 그해 4월 여의도에서 열린 환영대회에 130만명이 몰렸다고 하는데, 그 130만명 중 한명이었다는 옛 기억이 문득.... (비가 부슬부슬 오던 그날, 10KM는 걸은 듯. 절대 자진해서 가지 않았음.)
1. <헤어질 결심>. 당장 보지 않으면 큰 일 날듯한 호평의 쓰나미. 더 이상 늦어지면 안되겠다는 조바심으로 극장에 달려갔다. 결론은... 역시 걸작. 아마도 <색계>보다는 이 영화가 탕웨이의 대표작으로 남을 것 같다.
2. 눈감고 봐도 박찬욱의 영화. '멜로 스릴러'라는 평이 꽤 있었지만 이런 영화를 멜러라고 부를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블랙코미디이고, 훌륭한 스릴러이며, 언제나처럼 박찬욱이 천착해온 죄와 징벌에 대한 교훈담.
3. 아름다운 영상과 무시무시한 음악, 함축적인 대사. 히치콕의 <현기증>과 <이창>을 시작으로 이미지를 차용한 듯한 고전 영화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무대의 색감과 짐짓 어설픈(?) 배치에서 스즈키 세이준의 <도쿄 방랑자>가 떠올랐다. 고경표의 호연 덕분에 그런 느낌이 좀 더 들었을 수도 있다.
4. 석줄 요약: 형사 해준(박해일)은 산에서 추락사한 중년 남자의 사인을 조사하다 미모의 젊은 아내 서래(탕웨이)를 보는 순간 강렬한 느낌에 빠진다. 모든 정황은 자살을 가리키는데도 해준은 석연찮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것은 그녀를 일찍 떠나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인가, 아니면 이 사건에는 정말로 드러나지 않은 비밀이 아직 남은 것인가.
아무튼 꼭 보시라는 말과 함께 이하는 스포일러. 웬만하면 영화를 보기 전에는 안 보시는 게 좋을 듯. 물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아래 글은 매우 개인적인 해석이고, 동의하지 않는 분도 많을 듯.
5. 거의 모든 영화에서 박찬욱의 주인공들은 고전 그리스 비극처럼 벗어날수 없는 운명 속에서 선을 넘고, 그 댓가를 치러 관객들에게 교훈을 남긴다.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은 서래지만 두 죄인 중 더 큰 죄인은 해준. 그는 자신의 감정 앞에 솔직하지 못한 죄, 감정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죄를 범하고, 상대적으로 더 큰 벌을 받는다. 해준은 그녀가 자신을 절벽 끝에서 민다면 저항하지 않고, '눈을 질끈 감고' 밀려 떨어질 각오는 되어 있지만 적극적으로 그녀를 구원하려는 시도는커녕 그녀에게 자신의 욕망조차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이쯤 되면 궁금해진다. 대체 그를 묶고 있는 굴레의 정체가 무엇이길래? 그가 가장 중시하는 듯한 가치인 품위를 지키기 위해서? 직업인으로서 원칙의 고수를 위해서? 품위의 근간인 자부심을 위해서? 그렇게 해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미 형식만 남은 중산층 부부의 안온한 삶? 그리고 영화는, 그가 그것조차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잔혹하게 보여준다.
6. 그래서 <헤어질 결심>을 위선에 대한 우화로 읽는 시각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그렇게 도덕을 말하고, 당위를 말하고, 기회만 있으면 정의를 말하지만 그 결과가 대체 무엇인가. 당신은 누구를 구하고 대체 누구를 잃었나. 무엇을 지킬수 있었나. 한편 이 이야기는 왕조 시대가 끝난 지 100여년, 민주주의 국가 건설 70년이 지났는데도 개개인의 해방은 요원하기만 한 한국 사회에 대한 조소로 느껴지기도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박찬욱의 영화는 기본적으로 잘못을 경계하라는 교훈담이다.
7. 이 영화를 멜로드라마로 읽는 시각에 동의하지 못한다. 이것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서래는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안 탓에 인생의 무게를 새롭게 느끼고, 그걸 감당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희생하는 벌을 받는다. 해준은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지 못하고 억누른 댓가로,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얻었다(아마도 그의 불면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런 무서운 징벌의 이야기를 과연 멜로라고 부를수 있을까.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는 서로 미칠 듯이 사랑해서 파멸에 이르는 멜로드라마지만, 이 영화는 사랑을 이해하고 감당할 능력이 없어 천벌을 받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만약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나 그리스 신화의 파에드라 이야기가 멜로드라마라면... 이것도 멜로드라마겠지.
8. 언어는 과연 장벽인가. 해준이 쓰는 한국어와 아내 정안(이정현)이 쓰는 한국어는 사실 다른 언어다. 박해일의 언어가 관념의 세계에 머물 때가 많은 반면, 이정현의 언어는 사물과 1대1로 대응하는 경우가 많다. 정안은 수시로 이주임 이야기를 통해 박해일에게 '경고'를 던지고 있지만 그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어눌한 한국어와 번역기를 사용한 대화지만 서래와의 소통이 훨씬 잘 이뤄지는 것을 영화는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감탄할 만한 연출의 섬세함이 느껴진다. 서로의 언어에 능통하지 않은 남녀간의 감정 교류에 대한 영화로서 대단히 야심찬 시도인데, 불행히도 칸에서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듯 하다.
...대개의 문화권에서 심장과 마음은 같은 단어로 표현된다. 영어로도 heart는 심장이면서 마음이다. 문득 한국어는 '마음'과 '심장'을 선명하게 구분하는 특이한 언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9. 절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지만 고의적으로 쉽게 스며들기를 포기한 영화. 대중적인 히트는 불가능하겠지만, 고전으로 남을 영화. 그런데 과연 20대 관객들이 보아도 이해할 수 있는 영화인지는, 글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