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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긴 일정의 하이라이트. 클라우스 메켈레의 앵콜. 

물론 이건 늦은 밤 얘기고, 당연히 오후 시간대로 되돌아갑니다. 

밖으로 나오니 가는 비가 살짝 오락가락.

파리 사람들은 이런 비에는 익숙한 듯, 우산 쓴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동행인이 뭐 좀 사러 가야 한다는 곳이 있어서 비내리는 마레 거리를 조금 걸었다.

샵 이름이 메르시. 바로 옆의 농 메르시는 다른 가게다. 

저렇게 노골적으로 '메르시 아님'이라고 가게 이름을 정한 걸 보면 주인이 같은 가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저 메르시는 커피숍 입구고, 정작 편집샵으로 들어가려면 바로 옆의 좁은 입구로 들어가야 한다.

좁은 입구로 들어가면 작은 정원과 함께 샵 메르시가 등장한다. 

그리고 샵 안에서 내다보면 이렇게 커피숍과 연결된다. 

물론 연결된다는 것은 공간의 연결이고, 샵에서 커피숍 쪽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 아무래도 물건을 쓱 집어들고 자연스럽게 커피숍으로 갔다가 도망친 도둑들이 꽤 있었지 싶다. 어쨌든 편집샵 안은 생각보다 엄청 넓고 물건도 많고... 한국말도 많이 들리고...  (아는 분들은 다 아는 데라고)

물론 태생이 물건 사는데 별 관심이 없는 터라(먹을 수 있는 물건 빼고) 이런 곳은 들어가는 순간, 제발 언제 나갈 수 있는 지 알려줘, 하는 심정이 된다. 대강 봐선 물건 값도 비싸다. 

그렇게 비가 살짝 뿌리는 마레 거리를 조금 걷다가, 꽤 알려진 카르나발레 박물관/카페를 갈 생각이었는데 동절기 휴관. 으슬으슬 추운 가운데 뭔가 차라도 한잔 마셔야겠다는 생각에 보주 광장 주변의 유명한 카페라는 카레트 Carette 라는 곳을 갔으나, 역시 사진 한 장 찍고 싶지 않은 그저 그런 공간. 

 

숙소로 돌아와 저녁 스케줄을 위한 재정비를 하고, 북쪽으로 출발했다.

일단 저녁을 먹으러 향한 곳은 벨레뷜르 지역의 동 후옹 Dong Huong.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지난번에 파리에서 먹었던 쌀국수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긴 터라, 이번에도 파리에서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쌀국수였는데, 불행히도 한번 좌절했다. 

그래서 이번에 검색을 통해 다시 도전한 것.

현지 매체에서는 '파리에서 진정한 베트남 쌀국수의 영혼을 느낄 수 있는 몇 곳...' 이라고 극찬한 곳이다.

그런데 저 위평 為平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메뉴에는 為平牛粉이라고 써 놨던데... 뒤의 牛粉이야 소고기 쌀국수라는 뜻이겠지만 위평은 대체 뭣일지. 

동 후옹이라고 쓰면 중국 남부의 동썅 桐鄕 이라는 도시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이 식당 집안의 조상이 저 동썅에서 오신 분들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베트남어로 동 후옹이 또 다른 뜻이 있는지도. 

아무튼 그렇게 해서 이 고이꾸온을 주문했는데.... 한입 깨물었더니 고기 냄새가 역하다.

고기가 삶아 놓고 냉장고에서 일주일은 버틴 듯한 냄새. 갑자기 자신감이 땅으로 꺼졌다.

구운 고기는 언뜻 보기엔 먹음직스러웠으나 어떤 건 질기고, 어떤 건 설익고. 

기본 쌀국수는 나름 괜찮았으나 기본적으로 국물이 너무 달다. 대체 4년, 코로나 사이에 파리의 쌀국수 집들이 단결해서 다들 설탕 한 숟가락씩 더 넣고 장사하자고 합의라도 한 것인가. 

아무튼 총평은: 쌀국수는 그럴듯 했으나... 굳이 다른 지역에서 차 타고 찾아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는 걸로.

사실 목적이 라 빌레트에 있는 파리 필하모닉 홀을 방문하는 거였기 때문에 중간의 동 후옹을 갔던 거라서. 굳이 애써 동선을 낭비한 것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안을.

1998년에 방문한 라빌레트는 파리 북쪽의 공원이었고, 그 한 구역이 엑스포 같은 형식의 청소년을 위한 미래 과학 홍보관처럼 꾸며져 있었다. 과연 그 시설은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궁금했는데, 2015년에는 파리 필하모닉의 새 보금자리가 이곳 라빌레트에 지어졌다.

입구쪽에서 걸어가다 보면, 조명을 받아 빛나는 은갈치같은 괴물이 보인다.

오오 멋지다.

 

낮에 보면 이런 모습이라는 얘기. 장 누벨의 작품인데 안 멋질리가...

약간 빙빙 돌아서 입장해 보면 대기 공간이 이렇게 생겼다.

내부를 잠시 돌아보니 바는 4곳이나 있고, 다들 모두 뭔가를 마시고 있는데, 화장실은 아주 아주 아주 먼 곳에, 몇개 안 된다. 이상하게도 이 나라는 공중화장실을 굉장히 천대하는 느낌이 든다. 

 

특히 공연장에서. 저렇게 한잔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화장실을 이렇게 멀고 적게 짓는 이유는 뭘까. 

아주 아주 그럴듯한 내부 공간.

무대도 막 멋지고.

글쎄 간거 맞다니까요.

잘 안 보이시는 분들 위해 부분확대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코러스석 쪽에 설치된 장애인 특별석. 

개를 데리고 들어와 있다. 맹인용 인도견은 짖지 않도록 훈련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든 들어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콘서트 홀 안에도 데리고 들어올 수 있다는 건 이번에 처음 봤다. 

(이것도 잘 안 보이시는 분들 위해... 강아지 여기 있습니다.)

이런 쪽으론 선진국 맞는 느낌.

관객들이 꽉꽉 차고, 시작한다!

마켈레 등장.

이 동네 사람들은 음악 연주를 하고 있을 때 외에는 사진을 마구 찍어댄다. 당연히 제지하는 사람도 없다.

한국이 좀 특이한 듯. 

클라우스 마켈레. 이 공연을 보고 있을 당시 27세. 세계 지휘계의 신성이자 아이돌. 훤칠한 키와 훈훈한 외모, 역동적인 지휘로 2021년부터 파리 필하모닉의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 아주 핫한 유자왕 언니의 남친이 되어 세계 클래식계의 핫 커플로 자리한지... 아직 잘 사귀고 있겠지?

어쨌든 이날 메켈레가 동향 북유럽의 16년 선배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노르웨이 출신)를 독주자로 불러들여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했다. 임윤찬 덕분에 더욱 핫해진 이 곡. 

 

임윤찬이 섬세하고 투명하다면 이 듀오는 지칠 줄 모르는, 데스메탈을 연상시키는 라흐마니노프를 연출해냈다. 장하다 스칸디나비안 브라더스, 역시 메탈의 고향! 바이킹 화이팅! 

그런데 이날 콘서트는 왠지 여기가 하이라이트였다는 느낌. 그 다음 메인 연주곡은 12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살린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이었는데, 어려서부터 크리스마스 때마다 호두까기 인형 없는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없는 서구 관객들은 어땠을 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딱히 큰 감회가 없었다. 

 

어쨌든 메켈레와 장 누벨의 홀을 경험했으니 여한은 없다. 파리 도착 후 시내에서는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한 날인데, 중간에 잠시 전철이 끊기는 사고(그러나 옆에 서 있던 한 파리 시민은 '이런 일 늘 있어요' 라며 별 짜증도 안 내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있었으나 다른 노선을 이용해 무사히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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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겨우 한 층을 내려가 퐁피두 4층.

걷다 보니 샤갈 특별전을 하고 있네. 아무리 샤갈의 도시지만 너무 편애하는거 아니냐는 생각으로 들여다보니, 뜻밖의 사연이 있는 전시다. 알고 보니 샤갈이 의상 디자이너 역할까지 했다고 하네. 

사연인즉,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라고 하면 다 아실 바로 그 단체. 번역하면 '미국발레단'이라 그냥 저렇게 썼다)가 1944년,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새로운 안무로 싹 리뉴얼하려는 시점. 책임 연출자 루시아 체이스는 이미 완성된 무대 세트와 의상이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존경하는 마르크 샤갈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의 러시아적 감성으로 이 작품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세요! 스트라빈스키 선생님도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뭐 이런 식으로 설득을 했겠지. 사실 샤갈은 벨로루시 출신이지만 아무튼. 

급하게 일을 맡은 샤갈은 딸 이다의 도움을 받아가며 100여벌의 의상과 소품 등등을 급하게 다시 만들어 냈는데,

불행히도 야심찬 새 공연에서 안무는 '총체적 난국'이라는 평을 들었다는 슬픈 이야기.

이 공연에서 칭찬받은 것은 샤갈의 혼이 담긴 의상 뿐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샤갈은 체이스를 위로하는 편지를 썼는데, 내용인 즉 '내가 보기에도 안무는 좀 이상했다. 그러니 빨리 조지 발란신에게 부탁해서 다시 어떻게 해 보라고 해라. 내가 도울 일 있으면 얘기하고', 뭐 그런 얘기였다고.

그래서 발란신이 투입된 결과, 1947년의 새로운 안무는 성공을 거뒀고 샤갈의 의상도 같이 전설이 되었다는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진다. 

스케치 하나하나가 다 멋진 건 당연한 일인데,

과연 샤갈의 이 꿈속같은 디자인을 실제 옷으로 승화시킨 디자이너/재단사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지. 실제 만들어진 옷이 궁금하기도 하다. 

자료를 보내 대략 이런 느낌이었던 듯. 물론 그림이 더 멋지다. 영화도 항상 원작 소설이 더 좋듯, 당연한 일인가보다.

하고 생각하고 돌아서면,

모퉁이를 돌아 또 다른 샤갈이 나타난다. (퐁피두는 정말 샤갈을 사랑하나보다)

바로 1963년, 오페라 가르니에의 천장화를 그리기 위해 준비했던 밑그림들. 

샤갈은 그냥 붓 대고 막 그려서 그런 그림이 나오는 줄 알았는데, 샤갈도 미리 다 그려보고 하는 거였구나. ;; 

음... 나도 이 정도는 그릴 수 있을거 같은데 말이지. (응 아니야)

아무튼 이런식으로 완성된 그림을 며칠 뒤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실제로 이 천정화의 감동은, 퐁피두에서 원화를 보고 갔기 때문에 더 컸다.

 

샤갈을 빼고도 퐁피두의 4층은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사실 생각보다는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물론 '생각보다'가 중요하다). 게다가 5층은 작가 하나에 그림 하나 정도씩 수많은 작가들이 소개되어 있는 반면 4층은 작가 하나에 딸린 전시공간 크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니 현대미술의 그 수많은 작가들 중에서, 이렇게 퐁피두에 자기 작품을 전시해 놓고 있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물론 4층은 상설전시라기보다는 주기적으로 작가를 바꿔 전시하는 듯 했다. 안 그랬다가는 큰 일이 났을지도... 

일단 눈길을 끄는 작품은 장 뒤비페의 <겨울 정원 Le Jardin d'hiver>. 겨울 정원이라는 말은 '온실'이란 말로도 해석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온실이라기보다는 그냥 알타미라 동굴 같은, 구석기 시대의 벽화가 그려진 동굴 같은 느낌. 

회화가 아니라 3차원의 꽤 큰 동굴이라, 이렇게 안에 들어가서 기념촬영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실제 간거 맞음)

그리고 끌렸던 그림은 마크 브뤼스 Mark Blusse 의 <퉁그라우아의 딸 1   Mister Tungrahua's daughter I>. 퉁그라우아는 찾아보니 에콰도르에 있는 화산의 이름이라고. 2001년작인데, 여기서도 뭔가 일본 판화의 느낌이 솔솔 풍긴다. 

 

그 뒤로는 대형 설치 작품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키네틱 아트의 대가 야코브 아감 Yaacov Agam 이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 집무 시절, 엘리제 궁 안에 있던 대통령 개인공간 안의 한 방을 이런 식으로 꾸몄다고 한다. 1974년이라니 퐁피두 센터를 막 짓고 있을 무렵인 듯.

그리고 나서 후임 지스카르 데스탱이 엘리제궁의 주인이 되자, 이 공간을 철거해서(...아무래도 취향이 안 맞았던 게 아닐까), 그대로 뜯어다 퐁피두 센터에 전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TMI: 알고보니 아감은 88 올림픽 공식 작가라 이런 것도 했다고 한다. 이런 5공 부역자였다니...)

그리고 또 엄청나게 넓은 공간을 차지한 또 다른 작품은 주세페 페노네 Giuseppe Penone의 <숨쉬는 그림자 Respirare l'ombra>. 사진상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벽의 표면은 월계수잎이 켜켜 덮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벽 한 구석에서 빛나는 황금의 폐. 작가는 이 작품 안에 페트라르카와 그의 연인 로라의 이야기를 담았다고 하는데 이탈리아 문학의 정서를 전혀 모르다 보니 그런건 잘 모르겠고... 도시의 성벽처럼 화석이 되어 가는 잎들, 그 안에 금속으로 굳어진 폐, 이것만으로도 자연과 멀어져가는 문명의 공허함을 다루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히 든다. 

 

옆을 보면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안셀름 키퍼.

안셀름 키퍼 Anselm Kiefer의 <벨리미르 클레브니코프에게 : 전쟁의 새로운 이론 Für Velimir Chlebnikow: neue Lehre vom Krieg Schicksale der Völker>라는 긴 제목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벽에도 '벨리미르 클렘니코프에게...'라는 글이 크게 쓰여 있다. 전시의 내용은 이미 오래 전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을, 2차대전때 사용되었을 법한 녹슨 잠수함들의 모습. 클렘니코프는 중요한 해전은 317년마다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는 기이한 이론을 내놓은 러시아 시인(시인이 대체 왜...) 이라고 하는데, 글쎄. 

아무튼 내용은 뭘라도 설치의 규모에 압도되는 이 소시민 같으니. 

또 한 구석에서는 중국계 태국 화가 탕 창 Tang Chang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요즘 세계로 뻗어나가는 중국 화가들의 물결인가... 하고 보니 혈통이 중국계일 뿐(한자로는 陳壯), 태국에서 태어나 사망한 태국 작가. 심지어 중국어로는 위키 페이지도 없다. 그런데 국제적으로는 명성이 높은 듯. 

아무튼 눈길을 끈 건 역시 이 그림이었다. <무제 Sans titre>. 아마도 자화상이 아닐까... 

맞는듯.

그리고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었던 작품이 마르게리트 위모 Marguerite Humeau의 <지상2 Gisant II>. 지상이란 우리가 중세 묘지에서 많이 보던, 묘소 위에 누운 형상으로 조각된 고인의 모습을 말한다(불어 발음은 '지조'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한데...). 

누가 봐도 코끼리의 두개골 같은 형상인데, '작가에 따르면' 뒷부분은 인간의 발성기관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즉 인간은 진화의 어느 한 시점에, 지금의 인간의 말소리를 낼 수 있는 형태로 발성기관의 돌연변이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그런 돌연변이가 만약 코끼리에게서도 일어났다면 어떤 생물이 등장했을까.... 라는 상상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많은 분들이 말씀하셨다. '이해하기 위해 언어로 된 설명을 필요로 한다면, 그건 더 이상 미술이 아니지' 라고. 하지만 현대미술의 시대가 오면서, 과연 해설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특히 이런 위모의 작품처럼 그저 '보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지식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온 작품이라면. 

 

아무튼 80년대생의 젊은 작가이면서 '현대의 다빈치'라고 불릴 정도로 지식과 예술의 결합을 계속 시도하고 있는 작가라니 역시 관심이 아니 갈 수가 없다. 

이번 방문을 통해 몇몇의 관심 작가를 마음 속에 등록하고 퐁피두를 나선다. 안녕. 언제 또 다시 만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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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7일. 파리의 목요일.

이제 중간을 넘어, 집에 갈 날이 더 가까워진다.

오전을 휴식시간으로 보내고, 느즈막하게 퐁피두 센터로 브런치를 먹으러 갔다.

퐁피두 센터는 상당히 큰데, 거기서 옥상층에 있는 레스토랑 조르주  Georges 로 가려면 저 흰 파라솔을 찾아야 한다.

여기.

저 아저씨의 허락을 받고, 빨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올라가다 다시 에스컬레이터로 환승.

당연히들 아시겠지만 루브르가 19세기 초까지, 오르세가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를 대표한다면 퐁피두 센터는 대략 1차대전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대변해주는 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퐁피두 센터 주변은 참 많이 돌아다녔지만 지금까지 내부의 미술관을 구경해보지는 못했다. 어려서는 현대 미술에 대한 막연한 반감으로 저런건 봐서 뭐해, 하는 생각이 결코 없지 않았고, 얼마 전에는 일하느라 구경할 짬이 없었다...고 변명해 본다.

어디서나 보이는 에펠 타워.

예쁘다.

예쁘네.

그리고 꽤 올라갔다 싶으면 도착.

바닥이 좀 어수선해 보이긴 하지만, 아무튼 파리의 하늘이다. 

날이 좋으면 밖에 앉을 때 더 기막히련만, 꽤 추운 날이라 안으로 들어간다.

사실상 오픈런이라 자리는 여유있는 편.

웨이터 간지 뿜뿜.

퐁피두 센터의 외벽도 노출 파이프가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내부도 이렇다.

 

퐁피두 센터가 지어진 것이 1977년. 리처드 로저스렌초 피아노라는 두 거물 건축가가 설계해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처음 이 앞을 지나갔던 1988년에도 가이드 형님이 "외관만 보면 공사중인 건물처럼 보이지만 공사중 아닙니다. 원래 저런 모양으로 만든 겁니다"라고 했었다. 

 

지금은 온 동네의 상식처럼 된 저 노출 파이프의 원조가 아마도 여기일 듯. 

이른 점심이라 수프 하나, 파스타 하나, 로스트 치킨만 주문. 

뭘 많이 배터지게 먹자는 게 목적이 아니고, 여기서 한번 식사를 해 보고 싶었다.

망고가 들어간 소스와 잘 구운 닭, 좋은 조합이다.

디저트는 왜 사진이 없는지.

아무튼 아침 먹은지 얼마 안 되어서 가볍게 점심. 이렇게 풍경에 초점이 맞춰진 식당들은 대개 음식은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은데, 의외로 음식도 훌륭했다. 가격도 엄청 비싼 편은 아니니 한번씩 방문해보실만. 

역시 레스토랑은 손님과 음식이 내장의 일부다.

아무리 멋지게 꾸몄어도 빈 식당은 그리 멋져 보이지 않는다. 손님들이 차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살기 시작했다.

굿바이 조르주.

사실 조르주에서 밥을 먹으면 좋은 점 하나는, 1층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된다는 점. 본래 뮤지엄 패스가 있어도 퐁피두 센터는 줄을 서야 입장 가능인데 조르주에서는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다.

이게 팁이라면 팁.

사실 퐁피두 센터=미술관이라고 지금까지 쓰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퐁피두 센터는 이 건물의 이름이고, 정작 미술관은 프랑스 국립 현대 미술관( Musée National d'Art Moderne)이다. 이 미술관이 퐁피두 센터의 5층과 4층을 전시공간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다들 퐁피두 센터=미술관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그래서 5층으로 들어가 잘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5층은 현대 회화 컬렉션, 4층은 컨템퍼러리 컬렉션, 즉 5층에는 20세기 초 거장들의 이미 고전이 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어찌나 컬렉션이 방대한지, 한 작가에 한 작품 이상의 공간이 할애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 퐁피두 5층에 만약 두 작품 이상이 전시되어 있는 작가가 있다면 그만치 편애받고 있는 작가라고 볼 수 있을 듯. (내 맘대로 해석)

시작은 앙리 마티스, <빨간 물고기가 어항속에 있는 봄철의 실내 Interieur, bocal de poissons rouges Printemps>, 1914

역시 마티스, <붉은색과 흰색의 머리 tete blanche et rose>

조르주 루오, <다친 광대 Le Clown blesse>, 1932.

앙리 루소와 함께 미술 교과서에서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화가가 루오였다. 굵은 테두리로 얼굴을 그리는 스타일 때문. '예수처럼 보이는 가난한 사람의 얼굴'을 그리는 화가라는 기억이 오래 남았는데, 이 <다친 광대> 역시 뭔가 연민을 자아내는 데가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 샤갈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퐁피두, 아니 샤갈 없이는 무의미한 파리. 

 

<빨간 지붕 Les Toits rouges>, 1953. 달 아래 보이는 건물이 노틀담이라고 한다. 벨라루스 출신이면서 "파리는 제2의 비쳅스크(자기 고향)"라고 말했던 샤갈이 파리를 그린 그 수없이 많은 그림들 중 하나. 

<나의 아내 A ma femme>, 1933/1944. 그리고 역시 수없이 많은, 아내 벨라와 자신을 그린 그림 중 하나. 

 

근래 한때 에곤 쉴레 같은 패륜적 사생활의 작가들이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샤갈은 참 모범적(?)인 삶을 산 듯. 

늘 <에펠탑의 신랑신부 Les mariés de la Tour Eiffel>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들 듯. 생각보다 작았다.

 

알베르토 마넬리 Alberto Magnelli, 잘 모르지만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수레 위의 노동자들 Les Ouvriers sur la charrette>

그리고 금세 알아볼 수 있는 페르난드 레제르, <수업 La Lecture>. 

사실 누구나 수업에 들어가면 저 눈빛이 되지 않을까. ㅎ

그림만 있는게 아니다. 마르셀 브로이어의 의자들도 전시되어 있는 공간이 있었다. 

저 의자 어디서 많이 봤는데. 

유명한 호안 미로의 <파란색 2호 Bleu II>. 1호랑 3호는 어디갔니. 

그러고보니 이쯤에서 기념샷을 하나 찍었어야 했는데 너무 그림만 찍었네. 

전날 친해진 보나르를 다시 만나니 반가움이! <욕조의 누드 Nu a la baignoire>. 

1931년작이라 그런지 나비파 시절의 기상(?)은 볼 수 없다. 하지만 저 의자에 걸친 수건들의 요염함이란.

마리 로랑생도 현대인이었구나. <누운 무희 Danseuse couchee>, 1937.

그리고 이 층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그림들 중 하나. 가스통 셰샤크 Gaston Chaissac 이라는 화가 이름은 이번에 처음 들었다. <구성 Composition>. 노동자 출신의 독학 화가라고 한다. 

셰샤크의 또 다른 작품. <두 얼굴의 토템 Totem double face>, 1961.

그러다 보니 세월이 흘러 1970년대가 막 나오기 시작한다. 

베르너 팬톤, 잘 모르지만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디자이너. 제목은 <의자 생활 조각 Siege Living Sculpture>라고 되어 있는데 이게 제목인지 해설인지 모르겠다. 뭐 의자로 쓸 수 있겠네. 아무튼 색감이 마음에 든다. 

많이 보던 그림. 누가 봐도 장 오귀스트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에 대한 패러디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잘 보면 화면 상단에 파리가 앉아 있다. 안 날아간다. 진짜 파리 아니다. 

작가 이름은 마르샬 레스 Martial Raysse. 앵포르멜에 대항한 누보 레알리즘 계열의 작가고, 이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 파스티슈 pastiche를 많이 사용했다. 그림의 제목은 참 엉뚱하게도 <일제, 라 그랑 오달리스크 Made in Japan - La Grande Odalisque>. 1964년작. 

 

1964년이라니까 왠지 도쿄 올림픽이 생각나고, 문득 오달리스크의 머리 수건 장식이 만국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해설을 보면 그 시절 유럽 기준으로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던 싸구려 일본 물건(요즘의 중국 물건에 해당하는 - 우리는 다 이 길을 걷고 있다)들을 대강 걸쳤다는 뜻이라는데.

 

일본에선 별 인기 없는 작가일 듯. 

말 나오기가 무섭게 등장하는 일본 화가(퐁피두에서 딱 한점 눈에 띄었다). 시라가 가즈오라는데 일본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갖고 있는 화가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이거 화단의 BTS나 조성진 아니야?)

아무튼 그림 제목은 <7월, 자연의 행성> Planete nature, juillet. 사실 이 그림을 눈여겨 본 것은 작년 서울에 전시됐던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들과 너무 흡사해서였다. 

비슷하지 않음? ㅎㅎㅎ 

대략 호안 미로의 작품들 같은 것이 있는데 테라스는 겨울엔 닫는대서 안 나가봄.

그렇게 그림들에 파묻혀 걷다가 문득 바깥을 보면 그림같은 파리의 지붕들이 보인다. 

사실 이 지역은 슬럼화된 도심이었는데, 1970년대 파리의 대대적인 도심 재개발 사업에 의해 퐁피두센터가 지어지고, 주위가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의 이름을 따 퐁피두 센터가 된 것. 

 

대통령이 되어 이름을 남기려면 이런 식으로 남겨야지. 한국 전직 대통령들의 이름은 다 어디에 가 있는가. 

 

참 거시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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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시피 오르세는 왕년에 기차역이었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개조한 것(1986년 개관). 그래서 엄청난 층고와 천장을 통한 채광 덕분에 실내지만 놀라운 개방감을 자랑한다.

특히 2층 회랑은 로댕을 비롯한 다양한 대가들의 조각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천천히 2층을 산책하면 만족감은 배가된다.

2층 회랑에서 이렇게 아래층을 내려다 보든, 어디를 봐도 아름답다.

그러다 발견한 건물 모형. 이게 뭐지 했더니 곧 가 볼 건물인 오페라 가르니에 단면 모형이다.

팬텀이 누비고 다니던 지하 공간까지 잘 보인다.

오... 그림만 봐도 상승하는 기대감. 하지만 몰랐다. 그림보다 실물이 훨씬 더 멋질 줄은.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오페라 가르니에 꼭 들어가 보셔야 합니다. 공연을 보든, 투어를 하든.

쿠르베가 그린 에트르타 해변의 코끼리바위.

그리고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도미에 Daumier의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그림. 아마 이런 풍의 돈키호테 그림을 도미에는 한 300장 정도 그린 모양이다.

그리고 추억의 그림. 아마 20세기 말 언제쯤 '한국인이 좋아하는 세계 명작 회화'를 조사했다면 당당 탑10에 들었을 작품. 그 뒤로는 그림의 해석을 놓고도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게 평온한 저녁 기도 장면이 아니고, 굶주림 끝에 죽은 어린 아이를 묻으려는 젊은 부부의 비통함을 그린 작품이다... 뭐 그런.

 

<만종> 바로 옆에 있는 이 그림, <이삭줍기> 역시 추수한 곡식은 저 뒤에 있는 지주들이 다 걷어가고, 정작 농민들은 밭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야 먹고 살 수 있는 농촌 현실을 고발한 그림이라는 얘기, 그리고 세 여인의 두건 색깔이 청, 적, 백의 삼색기 색깔인 것이 우연이 아니라 혁명과 민중의 의식화를 부르짖는 그림이라는 주장까지.

 

아마도 바르비종파 안에서도 장 프랑수아 밀레가 두드러진 운동권이라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이겠지만, 아무튼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이끌려 가 본 덕수궁의 <밀레 전> 때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난다. 

당대 화가들의 운동권성이 드러나는 그림 또 하나. 오노레 도미에의 <공화국>.

<아이들을 먹이고 가르치는 공화국 La République nourrit ses enfants et les instruit>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불온한 사상(?) 때문에 당시에는 전시되지 못했던 그림이라는. 물론 도미에는 돈키호테 그림을 안 그릴 때는 가난한 사람들의 실상을 고발하는 작품도 많이 눈에 띈다.

 

물론 프랑스의 19세기 후반에는 다들 인상파처럼 뭔가 뿌연 그림이나, 아니면 저런 운동권 그림들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절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화가들이 바로 옆에(오르세 미술관 전시공간 기준) 배치되어 있다.

 

일단 오르세가 자랑하는 두 개의 비너스.

너무나도 유명한 카바넬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과,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부그로?) William Adophe Bouguereau의 <비너스의 탄생>. 

만약 세계의 수많은 화가들 가운데 여자를 가장 예쁘게 그리는 화가를 꼽으라면, 개인적으로 부게로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를 꼽겠다. 둘 다 예쁘다 못해 요기 妖氣 넘치는 그림들을 그리는 스타일. 아무튼 엄격한 다비드와 앵그르의 적통을 잇는 제자들도 19세기 프랑스 화단을 풍성하게 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부그로의 그림들은 때로 요염하다 못해 요기가 지나쳐 공포감을 주기도 하는데, 특히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지옥을 방문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다. 그림의 위치와 조명의 위치가 좀 요상해서, 중요한 부분이 안 보이는데, 

각도를 바꾸면 지옥의 악마들이 죄인들을 괴롭히는 장면을 공포에 질려 바라보고 있는 단테(우)와 베르길리우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데 죄인의 목에서 피를 빠는 흡혈귀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다. 이런 것이 부그로의 세계. 

이렇게 오늘도 오르세 1층의 한 방에서는 인상파와 인상파 이후 화가들의 물결 속에서 신고전주의의 후예들이 외롭게 방을 지키고 있다. 오른쪽은 줄스 조세프 르페부르의 <진리 La Verite>.

 

우리가 방문한 날, 마침 1층에서 고흐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줄이 줄이 세상에...

사람 많은 것은 워낙 꺼리는 편이라 아유 뭐 그렇게까지 보고 싶지는 않아요, 하고 돌아섰다.

 

그러고나니 눈에 확 들어온 것. 이번에 오르세를 오길 잘 했다고 느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나비파의 발견이었다.

피에르 보나르의 <정원의 여인들 Femmes au Jardin>. 보나르는 알고 있었지만, 늘 그냥 목욕탕에 서 있는 여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 자기 아내라고)만 그리는 화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그의 다른 면모를 많이 봤다.

 

나비파(Nabis)는 인상파 바로 다음 세대의 젊은 화가들이 만든 방파 아니 유파로, '나비'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한다고 한다. 이들은 마네나 세잔 같은 인상파 선배들에게서는 큰 감흥을 얻지 못한 듯, 고갱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나비라는 이름은 '우리는 현재가 아닌 미래의 그림을 그린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해도, 미래에는 우리의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라는, 젊은 놈들 특유의 오만함이 풍겨나오는 작명이다.

멋지지 않은가? 그래! 우리 그런거 좋아해!

인상파 중 상당수가 그렇지만 특히 나비파는 당대 일본으로부터 수입된 우키요에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보나르의 이 그림, <로브입은 여자 Le Peignoir>도 그렇다. 로브가 기모노로 보일 정도. 

나비라는 말을 처음 쓴 것은 1889년, 그 일파인 폴 세루지에 Paul Serusier였는데, 사실 이들이 모여 활동한 기간은 총 12년 정도에 불과했고, 그 이후에는 제각각 흩어져서 자기 갈 길을 찾았다고 한다. 원래 잘난 놈들은 오래 몰려다니지 못하는 법. 여러 모로 멋지다. ㅎ 

 

아무튼 주요 활동 멤버로는 보나르세루지에 외에 모리스 드니, 에두아르드 뷜라르, 펠릭스 발로통, 조르주 라콩브, 앙리 가브리엘 이벨스 등이 꼽힌다. 어쨌든 인상파가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형상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주력했다면, 이들은 딱히 눈 앞에 있는 실체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던 듯 하다. '그림은 스튜디오에서 그리는 거지', 뭐 약간 이런 느낌.

 

가장 주목했던 것은 색채. 그리고 내 마음 속의 그림. 

모리스 드니의 <숲속의 뮤즈들 Les Muses, Dans le Parc>. 멋지지 않음?

펠릭스 발로통 Felix Valloton, <장밋빛의 목욕하는 여인 Baigneuse rose>.

요즘 그린 그림이라 해도 놀랍지 않을 이 동시대감이란...

에두아르드 뷔야르 Edouard Vuillard, <줄무늬 가운을 입은 여인 La Robe rayee>.

그리고 보나르의 <물의 유희 Jeux d'eau>. 비슷한 그림들이 많은데, 이 작품은 제목만 봐도 뭔가 라벨의 곡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비파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 이후의 보나르는 이런 식으로, 목욕하는 여자들을 엄청나게 많이 그렸다(위에 말한 대로 거의 다 그의 아내...). 물론 벽지나 디테일에서 볼 수 있는 화사하면서도 온화한 색감이 역시 강력한 특징이다. 

사실 뭐든 알고 나면 보인다. 여기서 나비파를 영접하고 나니 그 뒤로는 어디 가서 보나르, 발로통, 뷔야르가 눈에 띈다. 참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오르세에는 그 시절 파리에 유학 온 온 세상 출신(이라고 해봐야 유럽 각국) 화가들의 작품들만을 따로 전시하고 있는 공간도 있다. 

유학생 차별(?)인가 싶기도 하지만, 사실 이 부분은 당시 파리의 위상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당시의 러시아나 포르투갈은 유럽의 변방 취급을 받았고, 독일이나 스페인만 해도 '문화의 중심'과는 엄청난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19세기 이전의 화가들이 대부분 베네치아로 유학을 가듯 19세기 이후 문화의 패권, 특히 미술의 패권은 확실하게 파리의 차지가 된 것이다.

벨기에 출신 레온 프레데릭의 <가시숲속의 아이 Enfant dans les ronces>.

미국 출신 알렉산더 해리슨의 그림 <고독 La Solitude>에서는 묘하게 아르놀트 뵐클린의 <죽음의 섬>의 느낌이 난다.

 

그리고 나비파로 다시 돌아와, 나비파 작품들로 꾸며진 거실. 

돈만 많으면 이렇게 해놓고 사는건데 말이죠.

신나게 구경하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문득 시계도 참 예쁜 오르세.

이번에 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겠구나. 그때까지 안녕. 

 

그러고서 시내를 걸어 다니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간판이. 

이건... 무슨 현상이라고 말해야 할까. 

응? 오늘도 고기먹는 날? 

고기가 제일 싼 파리라서 ㅎㅎㅎ 그래도, 별 양념 안 해도 맛은 최고.

본래 스테이크는 프랑스 사람들의 음식이 아니고, 프랑스 식당들이 요리를 잘 해서 스테이크가 맛있는게 아님. 그냥 고기가 맛있음. 

얼른 먹고 구경가자.

바스티유 오페라 도착. 오펜바크의 <호프만의 이야기 Les Contes D'Hoffmann>. 

줄거리만으로도 재미있는 오페라 중 하나. 특히 프랑스어 오페라를 대표한달 수 있는 작품이라 진작에 예매를 해 두었다. 오페라 가르니에는 대표적인 오페라 극장이지만 이미 오페라 공연장으로서의 기능은 잃었고, 파리를 대표하는 오페라 공연장은 이 바스티유 오페라다. 

근데 사실 들어가 보면 너무나 실용적이고 깔끔하게만 지어진 건물.

이게 충무아트홀인지, 오페라 바스티유인지 사진만 보고는 구별이 힘들 수도. 

억지로 뭔가 있어보이는 구도를 찾았다. 아무튼 대 파리를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으로서 기대했던 미감은 전혀 아님. 

드디어 공연 시작, 그런데....

1막 끝나고 퇴장. 

물론 공연의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테너가 목이 좀 덜 트인 것도 큰 문제 아니었는데, 공연의 세팅이 집에 있는 dvd와 완벽하게 똑같은 거다. 

제수스 로페스-코보스 지휘, 닐 쉬코프 주연의 이 DVD는 2002년 제작인데(공연장도 오페라 바스티유, 오케스트라와 합창단도 물론 같다), 그러니까 오페라 바스티유는 로버트 카슨의 2002년 프로덕션을 22년 동안 안 바꾸고 쓰고 있었던 거다. 

오페라는 늘 같은 오페라지만, 매번 새로운 무대 해석을 볼 때마다 아 여기선 이렇게 했구나 하는 것들을 보는 재미가 매우 쏠쏠한데(그래서 빌리 데커를 좋아한다), 이건 좀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물론 가수도 다르고, 지휘자도 한국인이지만, 집에서 늘 보던 똑같은 화면을 여기까지 와서 또 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여행도 이제 중간을 지났으니 피곤해질 때도 됐다 싶었고, 그 핑계로 그냥 일찍 자리를 떴다.

극장 밖으로 나오면 과거 감옥이 있던 자리의 바스티유 광장에 7월 기념탑이 조명을 받으며 서 있다.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 1798년 7월의 바스티유 습격이라 '7월 기념탑'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그 7월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이 탑은 1830년의 7월혁명을 기념하는 탑. 물론 이 혁명 역시 미완의 혁명인 셈이고, 결국 대혁명 50주년인 1848년의 2월 혁명을 마치고서야 비로소 명실상부한 국민의 권력이 프랑스의 주권을 차지하게 된다.

 

소수의 희생으로 한번에 완성되는 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역사란.... 이라는 생각을 하기엔 너무 피곤했고,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잠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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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오랑주리 방문에 이은 오르세 방문. 파리에는 수백수천개의 미술관이 있지만 그래도 중요도나 지명도, 규모를 따졌을 때 딱 셋을 꼽으라면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오르세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까지, 말하자면 벨 에포크 시절, 인상파와 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혹은 인상파를 극복하겠다며 나온 수많은 대가들의 위대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요약하면 적절할 것 같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미술 교과서에서 익히 보아 온 그림들이 너무 많아 행복해지는 곳이다. 

 

오르세에 오면 처음 오는 사람이나 여러번 오는 사람이나 공통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꼭대기층으로 올라가 시계 문자판을 찾는 것. 

그리고 이렇게 역광으로 인증샷을 찍는다. 다행히 줄이 길지 않았다. 동구권에서 온 듯한 여자 관람객에게 사진을 부탁했는데, 이제 유럽인 중에도 사진 찍을 줄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제법인데.

(역시 사진은 실루엣이군)

 

그리고 꼭대기층에 왔으면 일단 신고를 해야 하는 분들이 계시지. 

먼저 마네 옹.

뭔가 클래스가 열리고 있군요. 혹시 팀 투어인가?

그리고 르누아르 옹. 유난히 친숙하게 느껴지는 그림이다.

2019년에는 저 그림의 실제 현장 바로 앞에 있는 몽마르트르의 가금류 전문 레스토랑에서 촬영을 했어서. ㅎ

그리고 고흐 옹. 

1988년 처음 왔을 때에는 오르세 미술관이 코스에 없었고(파리에서 단 2.5일), 1998년 파리 방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바로 이 고흐의 방이었다.

 

사진 도판으로만 볼 때는 짐작도 할 수 없었던 고흐 그림의 느낌. 저렇게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 거칠게 짓눌러 편 느낌, 손가락으로 죽죽 문지른 듯한 느낌의 강렬함을 보고 놀랐다. 고흐의 그림은 3차원이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 하게 했던 그림이다.

(아, 솔직히 말하면 물론 1층 큰 방에 있던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이 준 충격이 더 크긴 했지만 그건 뭐....;; )

물론 하나 더 있죠. 별밤지기 형님들 보고 계신가요.

그리고 고갱 형님까지. 어쨌든 눈도장은 찍어야 하는 오르세의 터줏대감들.

순정만화의 조상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을 빼놓으면 서운해 하겠지. <장갑을 든 여자 La Femme aux Gants>. 

그리고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구스타브 카이유보트의 <바닥 대패질하는 사람들 Raboteurs de parquet>.

 

카이유보트 역시 인상파의 중요한 화가들 중 하나지만 지명도는 좀 떨어지는데, 예전에 내가 감수했던 책 <히트메이커스> 때문에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이름이 됐다. 카이유보트는 대부분의 인상파 화가들과는 좀 다르게 부유한 사업가 집안의 상속자였는데, 이때문에 친구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사서 모으기도 했고, 전시회를 개최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뭘 하든 자신이 산 그림들 위주로 했을 게 당연한 일이다.

 

이런 카이유보트의 활동 때문에 카이유보트의 소장 리스트에 있던 7명의 인상파 화가들, 즉 마네, 모네, 세잔, 시슬리, 피사로, 드가, 르누아르가 결국은 다른 친구들을 제치고 '인상파를 대표하는 7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카이유보트 리스트에 있던 7명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 훨씬 자주 묶음으로 등장했고, 다른 화가들보다 많이 노출될 기회가 있었다는 이야기. 

(이 자리를 빌어 히트메이커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뭐 인세 같은 걸 받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쨌든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오르세 미술관을 처음 가시는 분들께 조언을 하자면, 오르세에서는 일단 5층으로 올라가시는 겁니다. 그리고 5층 구경만 대강 마쳐도 다소 허기가 밀려 오는데, 그런 분들을 위해서 5층에는 오르세의 명물 카페 캄파냐가 있다.

예쁘고 음식도 맛있고, 하지만 오늘은 패스. 

 

어 왜?

 

원래 개인적으로 미술관 식당에서 뭘 먹는 걸 참 좋아하는데, 이날은 오르세 2층의 르 레스토랑 Le Restaurant을 예약해 뒀기 때문이지. 물론 그냥 가도 식사 가능할 수 있지만 관광지에선 뭐든 예약을 해 두는게 좋다.

벌써 아름답지 않음?

정확하게 12시에 문을 열어준다. 문 밖에서 대기.

네. 드디어 입장.

와우. 절로 탄성이 나온다. 예쁘다.

샹들리에며 천정화며,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궁전의 한 방처럼 꾸며진 천장, 창, 샹들리에, 조각들과 캐주얼한 느낌의 테이블과 의자가 묘하게 잘 어울리는 느낌. 아주 마음에 들었다.

메뉴는 스타터, 메인, 디저트로 구분되어 있는데 이중 2개를 선택하는 것을 전제로 점심 특선이 인당 31유로. 파리의 무시무시한 물가를 고려하고, 레스토랑 내부의 아름다운 장식을 생각하면 꽤 괜찮은 가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스타터에 포함되는 프라이드 치킨+시저 샐러드.

이것도 스타터. 파스닙   Parsnip을 주 재료로 한 야채 수프. 둘다 맛은 좋았다.

그리고 메인.

이건 대구 튀김과 채소.

이건 오리 콩피와 다진 양배추, 그리고 배즙이 들어간 소스. 훌륭했다.

네네. 식후에는 페리에죠. 

이런 분위기에서의 한끼, 권장한다. 

자, 밥도 먹었으니 기운을 내서 본격적인 오르세 탐방. 

 

큰 맘 먹고 오디오가이드 착용. 춤추는 거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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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여행 중반으로 접어든다. 오늘부터 본격적인 미술관 투어가 시작된다. 4일짜리 뮤지엄 패스 첫날은 베르사유, 둘쨋날은 오랑주리와 오르세, 셋째날은 퐁피두, 넷째날은 루브르를 가기로 이미 작정을 해 놓고 있었다.

조금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로댕 미술관이나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묘지 같은 곳도 가 볼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으나, 허약체질 부부의 컨디션을 볼 때 무리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뭐 인연이 닿으면 언젠가 파리를 또 올 수도 있겠지(과연?).

아무튼 미술관으로서의 첫 표적은 오랑주리 미술관. 오랑주리 Orangerie 는 글자 그대로 오렌지를 보관하던 창고라고. 모처럼 아침 일찍 길을 나섰다. 

콩코르드 역에 내려서 세느강 쪽으로 몇발짝 걸어가면 저렇게 오벨리스크와 에펠탑이 겹쳐질 듯 보인다.

콩고르드 광장에서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 묘하게 작은게 더 친근감이 간다.

창고라더니 온실... 하긴 뭐 온실이나 창고나.

아무튼 살짝 줄을 서야 했고(겨울인데!) 뮤지엄패스는 휴대 필수다. 짐을 맡기라고 해서 순순히 짐을 맡겼더라도, 뮤지엄패스는 반드시 따로 챙겨 놓고 있어야 한다. 그것 때문에 잠시 소란을 겪고 입장.

사실 오랑주리 미술관은 루브르/오르세/퐁피두에 비해 규모 면에서는 많이 작다. 나도 오랑주리는 이번이 처음인데, 명성에 비해 너무 작아서 좀 놀랐을 정도. 그런데 유명한 이유가 있다. 

입장하면 누구나 다 아는 모네의 방이 있다.

바로 그 모네가 그린 수백장의 연꽃 그림 중에서도 가장 큰, 대표적인 연꽃 그림.

그 거대한 수련 그림으로 긴 배 모양의 방을 휘감아 전시하고 있다.

어떻게 봐도 모네는 모네.

약 30년 전에 시카고에서 처음으로 모네의 그림을 보고 '모네다!' 라고 감동했던 기억.

그런데 그 뒤로 전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여기도 모네가 있네'의 상태가 되었다. 대체 연꽃을 몇 점이나 그린 거야... 하루에 한장씩 몇년은 그린 듯한 이 연꽃의 물결. 

하지만 이 연꽃들은 어쨌든 크고, 아름답다. 관광객들로 꽉 찬 방에서, 가능한 한 다른 관광객이 들어가지 않도록 사진을 찍는게 매우 고난도의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잘 보면 그림이 조금 다르다. 모네의 방이 2개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랑주리 미술관을 방문한 모든 사람들이 모네의 방 사진을 올려 놓고 있어서 매우 궁금했다. 대체 오랑주리의 나머지 공간에는 어떤 그림들이 있는 거지? 알고 보니 오랑주리 미술관은 꽤 작기는 하지만, 매우 알찬 컬렉션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모네의 방만 보고 휙 가버린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그림들. 다른 작품들을 보려면 한 층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가장 먼저 방문객을 반기는 그림은 샘 프란시스  Sam Francis의 <In the blueness>. 1955년 작품으로, 모네의 수련 그림에서 영향을 받아 비슷한 풍으로 만들어 낸 작품이라고 한다. 역시 모네가 지배하는 오랑주리. 

이 사람이 누구인가보다, 이 그림을 그린게 누구인가가 사실 더 궁금한게 인지상정. 이 화가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다.

모딜리아니라고! 모딜리아니가 남자도 그렸단 말인가!

그림 속 남자는 폴 기욤 Paul Gillaume. 모딜리아니를 비롯한 많은 근대 화가들의 후원자였고, 죽은 뒤 자신의 컬렉션을 오랑주리 미술관에 기부했다. 그 공로로 이렇게 오랑주리의 지하 1층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모델로도. 아무튼 당대의 풍류남에서 43세 요절까지... 전설이 되실 요소를 많이 갖춘 분이었다.

이건 모딜리아니가 그린 막스 야코프의 초상. 당시 시인이자 평론가로 명성을 날리던 야코프는 폴 기욤과 모딜리아니를 만나게 해 준 은인으로 꼽힌다. 어찌 보면 그 덕분에 오랑주리 미술관에 모딜리아니 상설관(폴 기욤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한)이 생긴 셈이다.

물론 모딜리아니가 끝이 아니고, 지금부터 시작. 피카소, 마티스, 드렝, 수틴, 르누아르..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친 폭넓은 컬렉션이 대단하다.

샤임 수틴의  웨이터 그림 Le Garcon d'etage. 오래 전 미술 교과서에 나오던 수틴의 메신저 소년 그림도 떠오르고, 무엇보다 로알드 달의 단편 <피부>가 떠오른다. 어찌 어찌 하다가 수틴의 그림을 문신으로 몸에 간직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 

수틴의 이런 풍경화는 낯설다.

해외의 대형 미술관을 보면 역시 교과서로 접하던 화가들의 낯선 그림들을 보게 된다. 앙리 루소의 그림 중에 밀림이 나오지 않는 그림은 처음 보는 것 같다. <폭풍우 속의 배 Le Navire dans la Tempete>.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이 짙다고 하는데, 아마도 호쿠사이의 그림을 말하는 것은 아닐지. 

루소의 또다른 작품,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 Promeneurs dans un parc>. 

누가 뭐래도, 나뭇잎들만 봐도 역시 루소의 작품 맞다. 

젊은 모리스 위트릴로가 그린 노틀담. 위트릴로가 그린 수많은 파리 풍경 중의 하나답게 화사함은 없고 쓸쓸함만 있다. 친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아마도 화가일 것으로' 추정되는 위트릴로.

어머니 수잔 발라동은 젊은 시절 르누아르, 로트렉을 비롯해 수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모델이자 정부였던 것으로 유명하다. 나중에는 직접 화가로 데뷔하기도. 아무튼 위트릴로의 그림에서는 뭔가 예사롭지 않은 사연이 느껴지곤 한다.

앙리 마티스의 <푸른 오달리스크 Odalisque bleue>. 

피에르 아우구스트 르누아르의 <긴 머리의 목욕하는 여인 Baigneuse aux cheveux longs>. 혹시 이 그림의 모델도 수잔 발라동은 아닌지. 

그리고 오랑주리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인 앙드레 드렝의 <익살꾼과 피에로 Arlequin et Pierrot>. 왼쪽이 아를르켕, 오른쪽이 피에로다. 둘 다 '어릿광대'라고 번역되기 때문에 뭐야 싶은데 아를르켕은 영어의 할리퀸 Harlequin 과 같은 것으로, 격자무늬 못이 특징이고, 꾀 많은 재담꾼의 성격을 갖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익숙한 피에로는 말 못하는 바보 캐릭터에 가깝다. 두 '광대'의 차이를 한 눈에 보여주는 교육자료(?)로서의 가치가 큰 그림이다. 

 

누가 오랑주리의 느낌을 묻는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바글바글한 모네의 수련의 방과 한적하고 조용한 지하의 보물창고. 오랑주리에 가시는 분들은 부디 절대 모네의 방만 보고 휙 다음으로 넘어가시는 일이 없기를.

모딜리아니 따라 그리기 세트도 있다. 과연 어느 쪽이 제가 그린 것일까요.

어쨌든 오랑주리를 보고 나오니 화창한 날씨가 기다리고 있다. 파리에 온 뒤로 가장 좋은 날씨.

오랑주리를 나와 남동쪽으로 600미터만 가면 오르세 미술관이 나온다. 사실 오르세 -루브르-오랑주리는 도보 이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리. 단 파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의 경우, 이 세 미술관을 하루에 다 '처리' 하겠다는 야심을 품으면 큰일난다. 평소 미술관을 많이 다니는 사람이라도 이런 미술관 3개를 하루에 돌면... 토한다.

아무래도 루브르에 하루를 할애하고 오랑주리와 오르세 까지는 하루에 묶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순서는 오랑주리-오르세 순으로. 오랑주리는 뮤지엄패스로 시간 예약이 가능하고, 오르세는 뮤지엄패스 전용 줄서기가 가능하지만 시간 예약은 따로 없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보다 오르세를 먼저 보고 나면 오랑주리는 굉장히 초라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역순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세느강을 인도교로 건너면, 

자 오르세!

25년만에 들어가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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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펠탑의 무지개!

12월5일

일일 루틴대로 빵집에서 사온 따뜻한 바게트와 쇼시숑, 쇼콜라로 아침 식사. 

 

어쨌든 이번 여행 전후로 확실히 바뀐 것은 바게트에 대한 고정관념의 변화. 늘 딱딱하고 입천장 까지는 빵이라고만 생각했다가, 갓 구운 따뜻한 바게트의 부드러움과 향을 알게 되었다. 앞으로도 따뜻한 바게트는 찾아서 먹어볼만한 가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호텔 앞의 유명 빵집, LA PARISIENNE

정해진 식순에 따라 베르사이유 행 열차에 올랐다. 베르사이유로 가는 방법은... 물론 렌트를 했다면 당연히 운전을 하고 가면 되겠지만, 그 외의 수십가지 방법 중에 RER C를 이용하는 방법보다 나은 것은 없는 듯 하다. 

 

호텔의 강점 중 하나인 샤틀레 레알 역에서 RER B나 다른 선을 타고 세느강을 건너 한 정거장만 가면 생 미셸 노틀담 역이다. 거기서 RER C로 갈아타고 종점까지 달려가면 끝. 너무 간단하고 편하다. 나비고 카드가 있다면 추가 비용 0. 

이것이 나비고 카드

RER C 를 탈 때에는 2층 좌석을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물론 시내에서 베르사유나 에펠탑 방향으로 갈 때에는 당연히 오른쪽 자리. 그러면 약 한시간 동안 달려가면서 세느강 연안의 파리를 감상할 수 있다. 

 

물론 올 때는 왼쪽. 

 

어쨌든 베르사유-샤토 역에 내려서 궁전까지는 약 10~15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그 시절에도 넓었을, 아주 넓은 길을 걸어가는 느낌도 좋은데... 비가 뿌린다. 역시 우산을 챙겨야 한다. 물론 가는 길에 우산을 파는 행상 아저씨들도 꽤 많다. 우산에는 루이 14세 얼굴이 아주 크게 그려져 있다. 

바로 앞까지 가면 이 궁의 주인공인 루이 14세 동상이 방문객들을 반긴다. 

산 같은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아주 그럴듯한 위치에서 온 프랑스를 호령하는 자세가 나온다.

여기 처음 와 본 것이 1988년. 무려 35년 전이다. 정말로 감회가 새롭다. 물론 그때는 정확한 베르사유의 위치 같은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그냥 아침에 일어나 여행사 버스를 타고 이 광장에 도착했지만,  어쨌든 그때는 아,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정말로 가슴이 뿌듯했다. 

들어가는 곳도 얼추 기억과 비슷한 모습. 물론 엄청난 관광객이 몰려 있다. 겨울이라 적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오산. 

18세기, 세계에서 가장 화려했던 곳. 

솔직히 1988년의 느낌은 없다. 그동안 워낙 좋은 곳을 많이 가 보기도 했고, 한국에도 정말 좋은 곳들, 호화롭게 치장한 곳들이 워낙 많다 보니 살짝 바랜 느낌이 있는 이 궁에서 감동을 느끼긴 쉽지 않았다. 

설사 199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이 이곳을 처음 방문했더라도 별 감흥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 

물론 베르사유를 그냥 잘 꾸며진 호텔 보듯 하는 사람과 달리, 저 골동품들의 가치를 다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남다른 감동이 있을 수도. 

가구며 침대며 참 정교하고 예쁘긴 하다. 

일단 처음 들어간 건물에서 안쪽으로 나오면, 중정 같은 느낌의 공간이 있다. 

어쨌든 베르사유에 왔으면 베르사유의 상징, 거울 방을 가야 한다.

어디가 어딘지 헷갈려서 물어 물어 찾아가는 중.

거울방으로 가는 길에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1세 대관식 그림의 모사품이 있다. 진짜는 루브르에.

사실 루브르의 18세기 그림 전시실과 거의 똑같은 느낌. 

여기까지 오니 아, 예전에 이런게 있었지, 하는 느낌과 함께 아련한 추억이 되살아난다. 

그땐 젊고 우린... 에이 아니다.

여기가 아마 루이14세의 침실이었던 듯. 다른 방에 비해 천장의 그림이 유난히 많다. 

아무튼 그 침실을 지나고 나서 좀 더 가면 드디어 거울 방의 입구가 나온다. 

18세기 기준으로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나이트클럽? 유럽에서 가장 세련된 나라 프랑스의 국왕이 무도회를 여는 곳이니 그 시절에는 온 유럽의 왕족이며 귀족들이 '나도 언젠가 저길 한번 가 봐야 할텐데'라고 생각하고, 막상 방문해서는 '나도 언젠가는 이런 공간을 마련하고 말겠다'고 생각했다는 바로 거기다.

이것이 바로 거울방. 

물론 실제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공간이라는 건 감안해야 할 듯. 막상 가 보면 좀 뭔가 뿌옇고 많이 닳고 그런 느낌이다. 누차 말하지만 이 방의 전성기는 약 250년 전이라는 걸 잊으면 안됨.

그래도 저기 처음 갔을 때는 엄청나게 감동했었지. 지난 세기의 어느날.

 

수십년만의 베르사유 에피소드 하나는 화장실에 전화기를 두고 나온 것. 한 100발짝 가서 알아차렸고, 돌아가 보니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가 있다. 남미계로 보이는 아저씨가 화장실 문 앞에 있다. 안에 누가 있나? 이 사람도 줄을 선 건가? 음... 뭐라고 말해야 내가 먼저 안에 좀 들어가야 한다고 가장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하고 있는데, 뭔가 당황한 눈빛을 본 아저씨가 먼저 말을 한다. "폰?" 

 

네. 폰. 폰 찾으러 온거 맞아요. 

 

"오피스!"

아유 감사합니다

아, 분실물로 오피스에 맡기셨다구요? 활짝 웃으며 그렇다고 말하는 아저씨. 그런데 그 순간 화장실 안에서 뭔가 스페인 말인듯한 말로 따발총처럼 다른 아저씨가 뭐라고 하고, 밖에 있던 아저씨는 야 야 넌 그냥 싸기나 해. 내가 다 알아서 해결했어 라는 식의 말로 다스리고 있다. 뭐지. 두 친구가 용변을 보러 온 건가. 안에 있던 아저씨도 라틴계 특유의 수다 본능으로 참견이 하고 싶었던 건가. 어 그거 내가 먼저 들어와서 보고 갖다 맡겼으니까 니 폰은 거기 가서 찾아 뭐 그런 거. 

 

꽤 코믹한 상황이었는데, 20m  쯤 떨어진 오피스에 가서 혹시 전화기 맡겨진게 있냐고 물으니 신중한 아저씨, 어느 회사 폰이냐고 묻는다. "쌤쏭, 갤럭시". 오. 전화기가 맡겨져 있다. 여기서 이 전화기가 니꺼인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냐고 묻는 아저씨. 뭐 그거야 패턴을 그려서 오픈해 드리면 되죠. "빠르뻭토!" 

 

그렇게 해서, 수만명이 드나드는 베르사유에서 잃어버린 전화기를 바로 찾았다는 이야기. 이것 때문에 동행인에게 꽤 강력한 빈축을 샀지만, 아무튼 이런 여행운은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춥고 비 뿌리는 날의 베르사유 구경을 마치고 다시 역으로 돌아오는 길에 KFC에서 점심. 베르사유를 가는 사람들은 아마도 90% 정도가 KFC나 맥도날드에서 한끼 정도는 때우는 걸 보면서 이유를 궁금해 했는데, 가 보고 알았다. 궁전과 역 사이에 신기할 정도로 식당이 거의 없다.

수요는 많을텐데...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RER C를 타고 파리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는 자연스럽게 에펠탑 역에서 내리게 된다. 

파리가 그렇게 크지 않다 보니 여기저기서 가는 곳마다 에펠탑이 보이지만, 그래도 한번은 코앞에서 에펠탑을 느껴야 하는 법. 생각해보니 매번 올 때마다 그랬다. 인사라도 드려야 하는 느낌?

역에서 내려 몇발 걷지 않아 잘 보인다. 에펠탑의 미덕 중 하나는 확실히 '잘 보인다'는 것. 

그 거대한 탑 밑으로 왔는데... 매번 올때마다 느끼지만 참 대단하다. 

처음 보는 광경, 무지개 같은 하단부 옆에 무지개가 그려졌다. 

오홍.

자, 그리고 에펠탑을 제대로 보려면 다리를 건너 샤이요 궁 Palais de Chaillot 으로 가야 한다는 건 상식 아입니까. 

살짝 기울어가긴 하지만 어쨌든 해가 뜨고 파란 하늘이 나온 건 길조다. 

오, 이런 느낌 좋아 좋아. 점점 개고 있어. 관광사진이 되어 가고 있다고. 

비에 젖은 바닥에 오후 햇살이 비쳐 금빛으로 빛난다. 

네번째 와 보는 에펠탑이지만 이런 광경은 또 처음일세. 

여전히 바람도 많이 불고, 춥고, 빗발도 간간이 날리고, 그저 구름 사이로 하늘이 보이는 정도지만, 이렇게 서쪽으로 넘어가는 햇살을 받아 황금색으로 빛나는 바닥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인증샷. 그 찰나의 아름다움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어쨌든 매번 가도 감동.

저게 처음 만들어졌을 때 구스타프 에펠이 "이제 프랑스는 300미터 높이의 국기게양대를 가진 나라가 되었습니다"라고 했다는 멘트가 생각난다.

 

잠만 기다려. 밤에 불 켜진 거 보러 또 올게. 

 

그렇게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장면을 뒤로 하고 숙소로. 꽤 걸었으므로 잠시 쉬었다가 역시 근처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식당 이름은 짧게 레옹 Leon. 아내가 검색해서 예약한 홍합 요리집이다.


벨기에식이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전 세계를 돌아봐도 홍합처럼 싸고 맛있는 해산물은 없을 듯. 일단 별다른 재료를 첨가하지 않은 전통식 홍합을 주문했다. 

홍합이 홍합 맛이지. 근데 너무 맛있다. 짭조름하고... 다만 국물이 한국식 홍합에 비해 좀 더 짜고 살짝 비리다. 굳이 떠 먹는 것을 권장하지는 않는 맛이다. 

대구 종류(eglefin)로 만든 그라탕. 물론 맛있다. 단 보기보다 그릇이 작다. 

홍합이 짠 점을 감안했는지 빵과 밥이 나오고... 근데 밥이 좀 말라비틀어진 밥. 

그리고 역시 벨기에인이 발명했다는 설이 있는 프렌치 프라이(이게 뭐야)가 나온다.

뭔가 좀 아쉬워서 로슈포르 치즈가 들어간 홍합찜을 추가로 주문. 이것도 맛있는데... 좀 더 짜다. 굳이 치즈의 풍미 같은 것은 없었어도 됐을 것 같다. 아무튼 맛있게 잘 먹었다. 

그렇게 잘 먹고 53.2유로. 서울에서 저 정도 먹고 7만6천원 정도면 제대로 눈 주위를 맞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게 그 다음부터 먹은 저녁식사 중 가장 소박한 식사였다. 팁 문화가 없는게 다행이지 여기다 팁까지 냈다면.... 끄억. 

아무튼 파리 비싸다. 가실 분들은 유념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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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월요일

 

월요일의 가장 중요한 할 일은 나비고(Navigo) 카드 개통이었다. 파리 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나비고 카드로는 1주일 동안 파리의 버스와 전철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현금으로 전철/버스 표를 사서(버스는 타서 버스표를 끊을 수 있다) 다니는 것도 가능한데, 전날 하루만에 그건 만용이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 웬만한 전철 역은 표 끊는 줄이 꽤 길고, 대부분 전철 표를 사려는 사람들은 관광객들이기 때문에 속도가 매우 느리다. 그리고한국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는데, 전철역의 티켓 판매기에 티켓이 떨어져 긴 줄을 서고 있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그렇다면 도착하자마자 나비고 카드를 개통했어야 할 일이겠으나불행히도 나비고 카드는 월요일-일요일 구간만을 일주일로 인식한다. 즉 나비고 카드를 금요일에 개통하면, , , 3일만 쓸 수 있다.

 

역시 이것도 한국이라면 말이 되냐고 난리가 났을 일이나, 어쨌든 파리에 가면 파리 법을 따라야 하는 법. 택시나 우버/볼트로 모든 교통을 해결할 사람들이라면 상관 없겠지만 그래도 시내에서 전철이나 버스를 타지 않고 다닐 수는 없다. 특히 베르사유를 다녀 올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비고는 필수.

(그리고 나비고 이용하실 분은 셀카 찍어 컬러 프린터로 프린트를 해 가든, 증명사진을 빼 가든, 사진 가져가시는 걸 잊지 마시길. 이력서에 붙이는 것보다 좀 작은 사이즈로 사진을 붙여야 사용할 수 있다. 그 외에는 한국의 교통카드와 거의 똑같이 사용 가능.)

드넓은 샤틀레 레알 Chatelet Les Halles 역 구내를 살짝 헤맨 끝에, 물어 물어 창구를 찾아 나비고 카드를 개통하고 이날의 첫 목적지인 오스만 가로 향했다. 오늘날의 파리를 만든 도시계획가의 조상, 조르주 외젠 오스만의 이름을 딴 오스만 가에는 파리를 대표하는 프렝탕과 라파예트 백화점이 있다. 동행인이 파리에서 가장 잘 아는 곳.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장 가고 싶었던 곳

 

어쨌든 뮤지엄 패스가 화-금 일정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쇼핑은 뮤지엄 패스와 겹치지 않는 날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토를 달지 않고, 얌전히 백화점 구경. 도심 숙소의 장점을 살려 쇼핑한 짐을 호텔에 가져다 놓은 다음 근처 쌀국수 집(꽤 유명한 가게였던 Pho14의 분점이 호텔 근처라 방문했다)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메인 목표라고 할 수 있는 루이 뷔통 재단 Louis Vuitton Foundation 으로 다시 향했다. 루이 뷔통 재단은 유명 미술관이긴 하나 뮤지엄패스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므로, 이날 방문해야 했다.

(보기엔 그럴싸 했지만국물이 너무 달았다. 실망.)

루이 뷔통 재단으로 가려면 에투왈 개선문 바로 옆에 가서 재단에서 운행하는 셔틀 버스를 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재단 홈페이지에 나와 있었다. 과연 그랬다. 개선문(Blue bus for Louis Vuitton Foundation이라는 정차장이 구글 지도에도 나온다)에서 재단까지는 거리상 지척이었지만 비오는 파리의 정체는 매우 심각했다. 셔틀버스 안에 앉아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달까.

안내상으로는 10분 거리였지만 족히 30분 정도 걸렸다.

어쨌든 사진으로 많이 보던 루이 뷔통 재단 도착. 비가 계속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건물 전경을 찍을 수 있는 먼 거리까지 떨어지는 건 무리였다. 그냥 이런 게 드넓은 공원 한 복판에 있다. 

이날의 목적은 마크 로스코 전시. 재단 앞에 내려 보니 줄이 꽤 길었지만 예약을 해 놨기 때문에 걱정없이 신속 통과. 다만 어디서나 짐 검사를 한다는게 귀찮았다. 물론 이때만 해도 누가 루이 뷔통 재단에 테러를 할까 생각을 했으나, 모나리자에 수프를 뿌리는 이상한 사람들이 있는 판이라 검색의 생활화가 나쁠 것은 없을 것도 같았다. 그런데 검문 검색을 한다고 수프 뿌리는 애들을 막을 수 있으려나.

로스코 전은 듣던 대로 대단했다. 전시실만 11개인데 그 전시실이 모두 주제별, 시대별로 꽉 차 있었다. 총 작품 수가 거의 150~200개는 될듯 한 느낌.  세계 각지의 미술관은 물론, 개인 소장 작품들도 이 전시를 위해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듯 했다. 듣기로 리움의 홍관장님도 로스코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던데, 혹시 리움에서 온 작품도 있나 궁금했지만 눈에 띄지는 않았다.

이날 전시의 최대 수확은 로스코의 자화상을 본 거였다

이 사람이 네모가 아닌 그림도 그렸다니. (물론 자화상의 얼굴도 약간 네모꼴...이긴 했다.)

뭐 당연한 얘기겠지만, 로스코도 젊은 시절에는 초상화도 그리고, 자화상도 그리고, 다양한 인물 그림을 그렸다.  1930년대까지는 특별한 점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 작품들도 꽤 인상적이었지만 그걸로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던 듯.

결국 언젠가부터 누가 봐도 로스코인 사각형 그림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마침내 대가가 되었다. 대략 이런 전환은 1946년에서 1949년 사이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정말 다양한 로스코의 시도들을 볼 수 있었다. 

때론 어둡고, 때론 밝은 그림들.

"나는 색에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추종한 것은 빛이다." 

뇌과학과 미학을 연결시킨 대표적인 연구자 에릭 캔델은 마크 로스코와 데 쿠닝, 잭슨 폴록 등을 환원주의 Reductionism 를 이용해 미술의 새로운 돌파구를 연 작가들이라고 평가한다. 

소위 환원주의의 시대. 화가들은 '그림의 원형, 미술의 원형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점점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 그림이라는 것의 출발점을 어떤 형상을 구성하는 아주 원초적인 요소들의 단계에서 다시 규정해 보자고 시도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은 면을, 어떤 사람은 선을, 어떤 사람은 색을 선택해 각각의 그 요소들을 파고 들었다.

그렇게 해서 몬드리안이 선택한 것이 구획으로 나뉜 면, 폴록이 선택한 것이 복잡한 곡선이었다면 로스코가 선택한 것은 색이라고들 하는데, 로스코 본인은 '나는 색 아님. 내 관심사는 빛'이라고 저렇게 공언했다. 본인의 말이니 인정하자.

죽기 1년 전, 로스코는 갈색과 검은색으로만 그리는 시리즈에 들어갔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건가, 아니면 설명에 쓰여 있는대로 1969년 아폴로의 달 착륙을 지켜본 영향일까.

이 마지막 블랙 시리즈의 그림들은 윤형근 화백의 그림과 매우 닮아 있다.

로스코가 1970년에 죽었고 윤 화백은 1928년 생이니 생전에 만날 기회가 있을 것 같지는 않으나.... 아무튼 무채색의 선 속에선 뭔가 세상의 강요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의지 같은 것이 읽힌다.

아무튼 이렇게 로스코 안녕. 

훌륭한 전시였다. 루이 뷔통 재단 미술관은 뮤지엄 패스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었는데, 상설 전시와 마크 로스코 전시는 따로 따로 표를 끊어야 했다. 간 김에 둘 다 봐야 하나 생각하다가 그냥 마크 로스코 전만 표를 샀는데, 다행이었다. 마크 로스코 전만으로도 체력소모가 꽤 심했다.

프랭크 게리의 작품인 루이 뷔통 재단 건물 1층은 커피숍과 매점, 관광객들과 뭔가 나들이를 나온 듯한 파리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는데 위로 올라가니 인적 없는 공간이 많아 좋았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렇게 실용적인 건물은 아니라는 생각. 건물 곳곳에 앉아서 파리 시내를 바라볼 수 있는(특히 해질녘이라 더 좋았던 것 같다) 공간은 많았지만, 그 공간들은 그냥 그런 공간들일 뿐, 효율적으로 뭔가를 위해 쓸 수 있는 공간들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커다란 낭비 자체가 예술이라면 당연히 인정.

비가 와서 막히는 파리를 가로질러 호텔로 귀환.  

샤틀레 레알 역 부근의 반미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기로 했다. 캐주얼한 가게였는데 엄지손가락만한 회색 쥐가 나왔다. 그런데 너무 작고 귀여웠던(?) 탓인지 주인도, 다른 테이블의 손님들도, 심지어 쥐나 벌레를 절대 좋아하지 않던 동행인조차도 ‘해치지 말아요’의 태도였다. 

 

주인은 슬리퍼 짝으로 쥐를 쫓아 가게 밖으로 내보내며 파리에선 어디나 이래요”라고 변명했다. 동행인은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쥐가 나온 식당의 위생상태를 걱정하기는커녕 비도 오는데 쟤 어디 가서 비나 피할수 있을까, 하고 걱정했다. 역시 뭘로 태어나든.... 귀여워야 한다.  

음식은 먹을 만 했지만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고, 꽤 많은 도보로 피로했으므로 바로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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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마르셰 백화점의 뻥 뚫린 내부

눈을 뜨자마자 옷을 챙겨 입고 바로 2차선 길건너 빵집으로 달려가 갓 구운 바게트와 빵 한두가지를 사온 뒤, 호텔 1층에서 핫 초콜렛(커피머신이 있는데 쇼콜라테는 오전에만 제공한다)을 받아 올라오는게 루틴이 됐다. 갓 구운 따끈따끈한 바게트 봉투를 손에 쥐는 느낌도 좋고, 맛은 또 얼마나.

 

마늘을 북북 갈 수 있는 마른 바게트의 단면과는 전혀 다른, 순결한 속살의 느낌이 기막히다. 물론 서울이라고 아침에 갓 구운 바게트를 파는 집이 없을까마는, 여기는 파리 아니냐, 파리.

 

어쨌든 아침을 간단히 챙기고, 잠시 다시 누워 아침잠을 청하고(...이상하게 아침이 되니 난방이 나와 방안이 따뜻해졌다), 깨 보니 점심때. 전날 밤부터 내심 가볼 생각이었던 파이브가이즈를 털었다.

오오. 이 리마커블한 맛이란. 귀국해도 꼭 다시 먹으리라 결심.

 

햄버거로 기운을 북돋운 뒤 버스를 타고 봉마르셰 탐방. 동행인에게 파리는 곧 봉마르셰 와 그 주변, 라파이에트와 그 주변이다. 고향 가서 모교를 돌아보듯(그분의 입장에서) 일단 봉마르셰를 방문했다. 흐리고 쌀쌀한 날씨.

 

영상 1~5도 정도에 습기가 섞인 날씨는 음울 그 자체다. 흔히 뼈가 시리다고 말하는 그런 날씨를 뚫고, 퐁네프 앞에서 버스를 타고 몽마르셰로 향했다.

지나가다 본 생제르맹 지역의 작은 공원

봉마르셰는 1852년 개관한 파리 최초(당연히 세계 최초겠지?)의 백화점. 따지고 보면 170년이나 된, 역사책에 나와야 할 건물인데 구스타프 에펠이 지은 건물이라 그런지 지금까지도 쌩쌩하기만 하다. 

물론 실내는 역시 세월을 이기기 힘든 느낌이 있다. 몽마르셰 위층은 개성있고 예쁘게 꾸며진 것은 분명했으나, 170년 전에는 정말 별세계였을지언정 지금은 아닌 느낌일단 층고가 너무 낮다그나마 중정이 뻥 뚫려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게 다행이었는데이 설계는 전 세계 거의 모든 백화점의 본보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는 건 쇼핑에 관심이 별로 없기 때문이고, 별도 옆 건물인 식품관 1층으로 내려가자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곳은 진정 별세계. 세상의 온갖 치즈 온갖 버터 온갖 절임 온갖 소스 온갖 초콜렛 온갖 과자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만약 파리 시민인데 좀비가 창궐하거나 전쟁이 나거나 하면 제일 먼저 털어야 할 곳은 이곳이었다. 여기저기 건넬 자그만 선물 등속을 요것조것 샀는데, 그것만 해도 꽤 돈이 깨졌다. 쇼핑 안 좋아 한다더니라는 동행인의 비웃음을 등지고.

생제르맹의 H사 매장. 공식명칭은 에르메스 세브르 점.

아무튼 그렇게 몇 걸음을 걷다 보니 해가 반짝. 8일 정도 파리에 머무는 동안 파란 하늘을 본게 몇번 안 되는데, 그중의 하루가 이 날이었다. 중간에 몇 군데를 더 들러 돌아보고(덕분에 에르메스 세브르 점의 위용을 봄), 어찌 어찌 하다가 예정되어 있던 카페 레 뒤 마고 Les Deux Magots에 일찍 입장.

오후 4시 경인데 그 명성 때문인지 카페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얘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사실은 우리 다섯시 반에 예약했는데로 우겨서 바로 입장에 성공했다.

 

그런데내부는 바깥보다 더 끔찍했다. 개인적으로 붐비는 곳을 매우 싫어한다. 식당도 옆 사람의 팔꿈치가 닿을 듯한 곳은 삼겹살집 외에는 절대 가지 않는다.

 

여기는 서울의 노포 삼겹살집이 우스울 정도로, 내부가 도때기 시장이었다. 안내해주는 자리에 앉기는 했는데, 프랑스어를 못하기에 망정이지, 만약 했더라면 옆 자리 아저씨들의 집안 사정을 다 알뻔 했다. 어찌나 격렬하게 떠드는지.

마드리드였다면 츄러스를 찍어 먹어도 좋을 듯한 쇼콜라(맛은 있었다)를 마시고 나니 한 순간도 더 거기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본래는 거기 앉아서 저녁식사를 할 생각이었는데, 옆자리 아줌마가 튀기는 침이 내 밥에 다 들어갈 듯한 공간에서 밥을 먹지 않게 된 게 천행이라는 생각만.

 

유명 문호들이 드나들던 파리 카페의 낭만적인 분위기?

 

아 녜 녜. 그런거 눈 씻고 찾아도 없습니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레 뒤 마고를 헤밍웨이가 파리 살 때 자주 가던 곳이라며 가봐야 한다고들 하는데, 헤밍웨이의 회고록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 A movable feast>를 읽어보면 그의 단골 카페는 다른 곳이다. 뤽상부르 공원 남쪽에 있는 라 클로세리 데 릴라 La Closerie des Lilas 가 바로 그 곳이다.

 

헤밍웨이는 책에서 이 카페를 파리에서 가장 좋은 곳들 중 하나라고 부르고, 심지어 뒤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이 카페에 다른 작가가 왔다는 이유로, 그 작가에게 왜 '내 카페'에 온 거냐, 너 때문에 신경 쓰여서 글을 쓸 수가 없다고 욕을 하며 내쫓으려 하기까지 한다.

 

저 책 내내 헤밍웨이는 스콧 피츠제럴드 부부를 정신병자 취급 하지만, 이런 에피소드를 보면 헤밍웨이 또한 확실히 정상은 아니다.

한때 절친이었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그래서 거기는 갔냐고? 아니.

레 뒤 마고를 가본 뒤 파리의 카페에 대한 환상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런 곳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아졌다. 가 봐야 헤밍웨이 사진이나 몇장 붙어 있겠지.

참고로 파리 여행을 앞두고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어 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의 1/3 정도는 스콧-젤다 피츠제럴드 부부에 대한 뒷다마인데, 헤밍웨이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면 스콧 피츠제럴드는 젤다 못지 않은 환자다. 이런 이야기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실만 하겠으나, 헤밍웨이가 가 본 파리의 명소들에 대한 감상 같은 것이 궁금하다면, 매우 실망할 것을 확신한다.

 

그래도 기억나는 장면 하나: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1920년대 초,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를 비롯한 수많은 미국 문인들이 1차대전이 끝난 파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싸구려 와인을 퍼 마시고 몰려다니던 시절을 회고한 글이다.  단 <파리는 날마다 축제>가 실제 쓰여진 것은 1950년대. 만년의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쓴 내용들이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 시절의 파리에는 파블로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T.S. 엘리엇, 루이 부뉴엘, 만 레이 등 당대의 유명 예술가들이 들끓던 시절이라 온 동네마다 셀럽들이 넘쳐 흘렀던 것 같다 - 물론 오늘날의 시각이지만. )

 

그중 한 대목. 그런 시절을 한참 지나고 파리를 방문한 헤밍웨이는 왕년의 단골 술집을 들러, 아직도 자신을 기억하고 있는 바텐더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당연히 헤밍웨이는 그 시절 같이 술집을 전전하던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데, 바텐더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묘한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실 이 내용과 거의 똑같은 장면이 피츠제럴드의 단편 <다시 찾아간 바빌론 Babylon Revisted>에도 나온다는 점이 처연한 느낌을 더한다(이 단편은 1954년, <내가 마지막 본 파리 The last time I saw Paris>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된다. 젊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모가 빛나는 추억의 영화). 여기서 남자 주인공은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파리를 오랜만에 찾아 단골 바를 방문하고, 나이 든 바텐더에게 옛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그 바텐더는 나는 기억하지만 함께 오던 그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묘하게 일치한다.

어쩌면 나를 포함해 그들 모두가 웨이터에게는 잊혀진 인물들일 것이다. 단지 나는 눈앞에 와 있으니 기억해주는 척 하지만, 어차피 그에겐 그의 무대인 바를 스쳐간 수없이 많은 손님들 중 하나일 뿐.

헤밍웨이나 피츠제럴드, 혹은 그 패거리들이 휩쓸고 지나간 파리의 흔적을 그 다음 세대의 젊은 손님들이 밤마다 메웠을 것이고, 그들 역시 자신들이 파리의 밤을 지배한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뿐,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그 자신이 세상의 주인처럼 느껴지는 시절이 있지만, 그들의 빈자리는 너무나 빨리 메워진다. 그 다음의 물결에 의해.

 

이런 생각과 함께 늦은 밤 파리의 카페에서 한잔 하는 스케줄을 떠올리기도 했었으나, 막상 파리의 카페를 가보고 나선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다. 파리 카페, 안녕. 문득 서울의 술집들이 그리워졌다.

생제르맹의 명물 중 하나인 돈 키호테 동상

어쨌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힐 것 같던 레 뒤 마고를 떠나 숙소로 돌아왔다. 마땅히 레스토랑을 예약해 두지 않았으므로 그날 산 소고기를 바로 구워 먹자는데 둘 다 이견이 없었다. 프랑스의 꽃등심(faux filet)은 맛이 좋았다.

식사 후 에펠탑 야경을 위해 길을 나섰으나, 기온이 급강하하고 비바람이 치는 바람에 바로 후퇴. 이렇게 해서 사실상의 첫날 마무리.

그 버스 정류장 앞에 있던 상 자크 탑 Tour Saint-Jacques. 그냥 크다는 느낌 말고는 사실 별 것 없었다.

파리에 이런게 어디 한두개라야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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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드니 빌뇌브 감독이  "영화가 TV에 의해 타락했다. 나는 대사가 싫다"고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순수한 이미지와 사운드야말로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도 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한번 크게 망해 봐야 이런 말을 안 하겠지'라고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듄2>를 보고 나니, 그는 자기 말을 실천하는 훌륭한 사람이었더군요.

<듄2>는 <듄>에서 하코넨의 추적을 피해 사막 깊숙히 달아난 폴(티모시 살라메)이 원주민이며 뛰어난 전사들인 프레멘의 신임을 얻고, 그들의 영웅이 되어 반격에 나서는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연히 배경은 전편에 이어 '모래의 행성'인 아라키스의 사막이고, 이 행성의 이름이 고대어로 '듄'이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스토리는 일단 올라 타면 종점까지 외길로 달립니다. 이렇게 단선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원작 소설 <듄>이 세상에 나온 것이 1965년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듯. 이후로 나온 SF 소설이나 영화. 만화 중에 <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없을 지경이라고 하는데, 그만치 영화에 등장하는 설정이나 진행들이 자연스럽게 기시감을 줍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피터 오툴.

물론 원작으로 따지면 소설 <듄>도 1962년 개봉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영향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난번 <듄> 1편 때도 얘기했지만,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신 분이라면 두 영화 사이의 공통점이 너무나 선명하다는 것을 느낄 겁니다. 외부에서 온 잘생긴 전사가 용감무쌍한 유목민들을 지휘해 자원을 탐내는 악의 제국을 물리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이야기니까요. 게다가 무대까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소설 시리즈를 단 1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파트1은 2시간 반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 IMAX 예매는 실패했는데 암

fivecard.joins.com

그런데 이런 뻔한 이야기를, 빌뇌브는 어마어마한 사운드와 영상의 힘으로 극복해버립니다. 데이비드 린이 사막이 주는 고독, 절망, 공포, 광기의 느낌을 영상으로 승화시켜 영화라는 장르의 역사상 절대 잊혀지지 않을 비주얼을 만들어 냈다면 빌뇌브는 거기에 첨단 과학과 상상력을 투입해 결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뒤지지 않는 영상미를 창조해냅니다.

더구나 한스 짐머의 사운드. 등이 둥둥 울리는 CGV 골드클래스에서 본 탓도 있겠지만, 이 비주얼과 사운드에 젖어들지 못한 사람이라면 앞으로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쉽게 감동하기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얼른 보세요. 물론 이 뒷부분에 언급하겠지만, 비주얼과 사운드에 비해 정작 스토리에는 꽤 아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이 영화는 꼭 보셔야 할 겁니다. 그만치 볼거리는 대단하다니까요. 

이후 이야기에는 스포일러....가 꽤 있습니다. 뭐 이야기 자체가 엄청나게 단순한데다 이미 나온지 50년이 넘은, 여기저기서 달려들어 써먹은 스토리에 얼마나 대단한 결말을 기대하셨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내용 전개에 대해 전혀 알고 싶지 않은 분들은 여기까지만. 나머지는 극장 다녀 와서 읽어보시길.

원래 남의 리뷰는 영화 보고 나서 보는 겁니다.

 

 

1. 경이적인 비주얼

영화 초반, 폴을 찾아 헤매는 하코넨 추격대가 모래벌레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바위산 위로 날아오르는 장면, 개인적으로 이 장면에서 바로 빌뇌브의 말을 납득해 버렸습니다. 그래, 이런 걸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이었지. 이런 걸 보여줄 자신이 있으니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거구나.

그 외에도 거울처럼 대지의 표면을 비치며 날아오는 황제의 우주선, 폴이 남부의 원리주의자들을 규합하는 대성회(?) 장면, 모래벌레가 황제의 대군을 덮치는 장면, 폴이 모래벌레의 등에 오르는 장면 등을 보면서 내내 감탄했습니다. 누가 뭐래도 <듄2>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영화입니다. 그리 크지 않은 화면으로 봤는데도 이 정도의 위력을 느꼈으니, 아이맥스로 보신 분들은 엄청났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 그런데 놀라울 정도로 납작해진 스토리

하지만 아쉬움은 아쉬움. 스토리 면에서 <듄2>는 꽤 감점 요인이 있는 영화입니다. 원작 팬들은 원작 팬들대로 불만이 많은 듯 한데(저는 원작은 펼쳐본 적도 없습니다만...), 영화는 시작한 뒤로 내내 마음이 바쁩니다. 다 보고 난 느낌으로는 폴이 모든 프레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까지 정도가 영화 한 편으로 적당하지 않나 싶고, 그 뒤로부터 황제가 직접 나서고 폴의 프레멘이 황군(!)과 싸우는 내용으로 다시 한편을 만들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빌뇌브는 그보다는 마음이 급했던 듯 합니다. 

아무튼 그러다 보니 완성본 영화를 보고 있는데도 뭔가 압축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시간에 쫓기다 보니 대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인 스틸가(하비에르 바르뎀)의 경우에도 나올 때 마다 '리싼 알 가입'!만을 외치는 아주 깊이 없는 인물이 되어 버립니다.

오랜만에 등장한 거니 할렉(조쉬 브롤린)도 앞 사람이 계속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주는데도 '지금 아니면 이 얘기를 다 할 시간이 없어! 나도 몇 장면 안 나온단 말이야!' 라고 항변하듯 '진행을 위한' 대사들을 토해냅니다. 심지어 최강 빌런인 페이드 로타 하코넨(오스틴 버틀러)의 잔혹함과 강력함을 보여주려 힘을 준 흑백 콜롯세움 신도 별 임팩트 없이 '자, 이놈이 얼마나 싸움도 잘 하고 무지막지한 놈인지 보셨죠?' 하는 식으로 매우 무성의하게(진심입니다) 처리됩니다. 그냥 필요하니까 넣은 장면이라는 식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영화 내내, '원래 이런 방향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멋진 장면 여러개 보여드렸으니 다들 만족하시죠?' 라는 식의 진행이라고나 할까요. (유튜브로 2시간 짜리 영화를 15분에 압축해서 보는 걸 좋아하는 분들은 이런 진행에 별 불만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네요.)

사실 이런 식이다 보니, 엄청난 스타들이 즐비하게 나오지만, 그 스타들에게 뭔가 연기력을 펼칠만한 기회를 주지 않는 영화라서 뭔가 마구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두 주인공, 티모시 살라메와 젠다이야가 빛을 발한다는 것이 위안거리. 특히 젠다이야는... 각도를 달리 볼 때마다 달라지는 모습이 매우 이채롭습니다. 

 

3. 영웅은 왜 해로운가... 살짝 겉도는 메시지

주인공 이야기를 좀 하자면, 살라메가 연기하는 폴은 금방이라도 망가질 듯한 섬세함이 돋보입니다. <듄2>에서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폴-무앗딥-아트레이데이스는 자신이 영웅이 될수록 전 우주에서 더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 것을 걱정하는데, 솔직히 프레멘들에게 이런 고민은 무의미합니다. 이미 하코넨이 스파이스 채취를 위해 프레멘을 억압하고 나선 이상, 그들은 생존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아무 미래가 없기 때문이죠. 

역사와 전설을 장식하는 그 수많은 영웅들이 대체 다수 인류에게 득을 끼친게 뭐냐...는 <듄> 시리즈 원작자 프랭크 허버트의 탄식에 공감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게 압제에 맞서 살아 보겠다고 싸우는 사람들의 권리까지 부정하는 것처럼 보여서야 과연 이 영화가 매력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듄> 시리즈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 그 웅대한 세계관과 심오함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빌뇌브의 <듄> 시리즈는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란 느낌을 줍니다.

결국 빌뇌브는 원작에 충실할수록 '단순하고 뻔한 이야기 갖고 애쓴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결과 이렇게 기형적으로 스토리는 찌그러뜨리고 비주얼과 사운드를 강조한 영화가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듄> 시리즈 원작이 나온지 60년이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오히려 전 세계적으로 카리스마를 무기로 한 막무가내형 독재자들이 여기저기서 광신도같은 추종자들을 앞세워 팬덤 정치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프랭크 허버트의 통찰이 낡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울수도 있겠네요.)

아무튼 개인적으로 <듄> 1편과 이번 <듄2>를 비교한다면 저는 1편의 승.

물론 처음에 언급했다시피, <듄2>는 이런 아쉬움을 충분히 덮을 만큼 훌륭한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2시간45분 동안 그 그림만 보고 있어도 표값은 아깝지 않을 정도. 그리고 사정이 허락한다면, 가능한 한 큰 스크린에서 보시길. 그런데 3편이 나올 때까지 어찌 기다리나...

 

P.S. 아주 오래 전, 서울 충무로의 대한극장은 '국내 유일의 70mm 수용 상영관'이라는 주장을 앞세워 대략 5~10년에 한번씩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다시 개봉하며 큰 스크린의 위력을 자랑하곤 했는데, 오늘날에는 IMAX가 그런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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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앞 건물 지붕 너머로 보이는 일출

공항에서 시내로, 숙소 시타딘 레알 호텔

2023년 12월1일. 예전엔 11시간이면 가던 거리가 전쟁 때문에 14시간 걸렸다. 샤를 드골 공항에서 루브르와 마레 지역 사이, 레알(Les Halles)의 숙소까지 전철로 약 60분 정도. 갈아 타지 않고도 갈수 있다고 하지만 처음부터 너무 고생일 듯 해서 택시를 알아봤다. 다행히 택시 가격은 55유로 정찰제.

 

그런데 택시로 90분이나 걸렸다. 만약 정찰제 없이 미터기대로 냈다면 거지될 뻔. 토요일 밤에 파리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길은 정체 아닌 곳이 없었다. 일요일 저녁도 아니고 토요일 저녁인데 시내 들어오는 길이 이렇게 막히다니. 

 

이란 출신(워낙 차가 막히다 보니 지루해서 대화를 아니 할 수가 없었다)인 기사님은 어떻게 해서든 안 막히는 길로 가 보겠다는 의지로 이쪽 저쪽 골목길을 팠지만 결과는 큰 차이가 없었던 듯 하다. 그 덕에 라 빌레트 쪽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파리 변두리를 차 안에서 좀 구경할 수 있었다.

 

전에 비해 중국 음식점이 참 많이 늘었다는 느낌? 지나오는 동네마다 중국 음식점 간판이 보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시타딘 레알 로비. 호화롭지는 않지만 잘 단장되어 있다.

곡절 끝에 호텔 앞 도착. 시타딘 레알 (Citadines Les Halle). 시타딘은 프랑스에서는 꽤 유명한 레지던스 형 호텔 체인이다. 절대 럭셔리한 느낌은 아니고 그냥 생활감있는 한국의 콘도 같은 느낌. 2구짜리 인덕션 레인지가 있고, 냄비 후라이팬 칼 접시 등 주방 살림 일습이 있다.

 

파리를 몇번 가 본 경험에 따르면 파리 음식은 크게 기대할 게 없었다. 좀 짜고 딱히 맛있지 않았던 느낌. 게다가 8박을 하자면 좀 피곤하기도 하고, 약식으로라도 한국 음식(?)을 좀 먹는게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레지던스형 호텔을 선택했다. 거기다 공연장을 여러 번 가려고 하는데, 파리의 좀 한다 하는 식당들은 대부분 7시는 되어야 저녁 오픈을 한다.

 

매번 밖에서 식사를 하면 공연 시간에 맞추기는 쉽지 않다. 그러니 저녁 공연이 있는 날은 낮에 구경을 나갔다가 일찍 들어와서 간단히 숙소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가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별 대단한 준비를 한 건 아니고, 그냥 햇반 몇 개, 밑반찬 몇 개, 사발면 몇 개를 싸 간 정도가 전부다. 시판 볶음김치를 가져간 게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파리에는 좋은 식재료가 많을 테니 웬만한건 사서 해결하자는 자세.

호텔 주변에 대형마트와 아침에 문을 여는 유명한 빵집, 라 파리지엥(La Parisienne)이 있다는 건 미리 알고 있었다. 아침마다 7시에 문을 여는 빵집에 달려가 갓 구운 바게트와 크루아쌍 등을 사왔고, 호텔 1층에서 역시 오전에만 주는 핫 초콜렛을 컵에 받아다 아침을 먹었다. 봉마르셰에서 사 온 버터와 소시숑을 곁들였고, 근처 마트에서 과일과 요구르트를 사왔다.

 

저녁에는 밥을 먹을 일이 있을 때 두 번 고기를 구워 먹었다. 꽃등심(faux filet, 립아이에 해당하는 프랑스 명칭이다) 기준으로 봉마르셰에서는 250g13유로, 마트에서는 280g11.29 유로에 샀다. 국내와 차이가 있다면 곡물 사료 대신 풀을 먹여 기른 소라 마블링이 거의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고소한 맛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기름이 녹아 날아가지 않기 때문에, 같은 250g을 구워도 한우보다 실질적인 고기 양은 훨씬 많다. 소금만 찍어 먹어도 술술 넘어간다.

식탁이 따로 있는 좀 큰 방을 빌린 덕분에 호텔 안 식사도 수월했고, 가져간 노트북을 HDMI로 삼성 TV와 연결하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방값이 비슷한 크기의 호텔에 비해 훨씬 싼 대신 매일 청소를 해주지 않았지만(6일 머무는 동안 한번 청소를 요청했다) 수건이나 기타 물품은 창고에서 무제한으로 직접 가져다 쓸 수 있었다.

 

단 슬리퍼는 없으니 가져가거나 사거나전에는 슬리퍼를 주었다는 잘못된 정보 때문에 마트에서 슬리퍼를 사야 했다. 30유로. 비싸다.

시타딘 레알의 최대 강점은 위치다. 지근거리에 두 개의 역, Chatlet 역과 Chatlet Les Halle 역이 있고 이 두 역으로 파리 시내의 주요 포스트로 가는 전철은 거의 다 이용할 수 있었다. 퐁피두 센터와 루브르, 노틀담, 마레 지구는 도보로 20분 이내 거리, 오페라도 전철로 10분 거리. 아침에 나가 뭔가 구경을 하다가 방에 돌아와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저녁 구경을 나갈 수 있는 것도 괜찮았고, 한밤중에도 카페나 술집마다 손님들이 우글우글한 홍대 앞 같은 곳이라 밤에 나다녀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는 안전지역이라는 점도 괜찮았다.

 

이렇게 다 좋은 시타딘 레알이지만 심각한 약점도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난방실내 온도의 상한을 24도로 임의지정해 놓았는데, 밤에는 난방을 열심히 하지 않아 실내 기온이 21도 언저리, 썰렁한 기운이 실내를 감돌았다.

 

물론 21도면 괜찮은 실내기온 아닌가 싶을 분들이 있겠지만 은근한 우풍(!)이 있다 보면 실제 기온은 그보다 훨씬 낮게 느껴진다. 

 

잘 때는 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이쪽 분들의 상식인지, 오히려 아침에 눈을 뜨면 난방이 가동되고 실내 기온이 올라가는게 느껴졌다. 아무리 추운 날에도 일단 구들장이 타들어가도록 불을 때고, 집안에 들어오면 동저고리만 입고 살 수 있게 했던 한민족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정책

보일러 최대 조정 가능 온도 24도...

결국 혹시나 해서 가져온 50cm x 50cm 정도 사이즈의 전기 모포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만 아쉬운 건 모포는 1개뿐. 난국 돌파를 위해 생수병에 끓인 물을 부어 탕파(湯婆)로 활용해 볼 생각을 했다. 끓는 물이 닿자 PET 병이 쭈그러드는 걸 보면서 아 이거 틀렀구나 했는데 일정 크기 이하로 줄어들지는 않았고, 물이 새지도, 금방 식지도 않았다.

 

오히려 피부에 직접 닿으면 델 정도로 뜨거워 수건으로 감싸고 사용하는데 보온 효과는 매우 훌륭해서 매일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잠결에 깔아 뭉개서 터뜨릴 정도로 잠버릇이 고약한 사람이 아니라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정도.

 

...뭐든 닥치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다.

힐튼 오페라 로비

시타딘 레알에서 6, 그래도 여행의 마무리는 꽤 좋은 호텔에서 하자는 생각으로 귀국 전 힐튼 오페라에서 2일을 머물렀다. 건물이며 위치며 흠잡을 데 없는 A급 서비스. 일찌감치 예약을 했는데, 방문 2개월 전 쯤에 가격이 내려가는 바람에 더 큰 방으로 업그레이드를 해 버렸다.

침대도 넓고 욕실도 넓고, 역시 위치도 이상적이고. 미국계 호텔답게 뭔가 사람이 직접 손으로 하기 보다는 기계의 도움을 많이 받게 하는 호텔이었지만, 아침 부페는 파리답게 빵 가짓수만 15개 정도 되더라고.

 

숙소 얘기는 여기까지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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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

결혼 20주년을 맞아 파리를 가자.

 

별로 이의를 달기 힘든 좋은 계획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직장 일 때문에 파리를 10여 차례 갔다 왔지만 자기를 위해 시간을 보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본인이 실장이 되어서야 후배들을 데리고 얘들아, 우리가 파리까지 왔는데 루브르는 한번 가봐야 하지 않겠니?”하고 두어 시간 동안 박물관 산책을 했다고 한다. 에펠탑이고 개선문이고 지나가는 버스에서 본게 전부였다. ‘파리에 가서 내 시간을 갖고, 쇼핑도 하고 싶어!’

 

그동안 좋은 곳을 안 가본 것도 아니지만 파리가 그렇게 로망이라는데. 결혼기념일은 1130. 그 시기를 맞춰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고, 넘쳐나는 마일리지로 비즈니스 티켓을 끊어 파리로!

2. 발권

그런데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코로나 이후 마일리지로 항공사 티켓 끊는게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일로 바뀌어 있었다. 모든 항공사가 바다같이 넓은 비즈니스석을 갖고 있던 A380은 어두컴컴한 격납고 어딘가에 기계마인들이 사라진 뒤의 마징가Z처럼 잠재워놓은 모양이었다.

 

국내 항공사들의 마일리지용 비즈니스석은 행선지가 어디건 단 2석 아니면 3. 세계 거의 모든 항공사의 마일리지 항공권은 출발 361일 전 오전 9시에 오픈되는데, 알고 보니 그 시간마다 소리없는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9시 땡 치고 눌러 보면 이미 환상의 좌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요즘은 비즈니스석 뿐만 아니라 이코노미석도 땡 치고 나면 사라지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몇번의 시행착오 끝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물론 매크로 같은 것은 짤 줄 모른다), 좌석을 확보했다. 물론 가는 표와 오는 표는 따로 따로 구해야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공했다. 그것도 비즈니스 왕복을 다! 만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부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항공사는 고객이 마일리지로 사는 표를 공짜로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 마일리지는 고객이 다른 포인트로 받을 수 있는 가치를 바꾼 것이므로, 고객의 입장에선 절대 공짜가 아니다.

 

게다가 각 항공사는 역시 각 카드회사에 마일리지를 유상으로 팔아 수익을 챙겼으므로, 이미 그들 입장에서도 마일리지는 공짜가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그 마일리지를 사용할 때가 되자 항공사들은 고아가 된 조카 월사금 내 주듯 인색하기 짝이 없는 맨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 시국에 참 힘들었겠지만, 그건 그거고,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3. 계획 수립

어쨌든 비행기표를 구한 것만으로 든든해졌지만 그건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 은하수의 별처럼 많은 파리의 호텔 중에 적당한 숙소를 고르고, 가볼 곳들을 생각하고, 뮤지엄 패스, 나비고 카드, 볼트, 루아시 버스 같은 새로운 명사들과 친숙해지고(그렇다고 불어를 속성으로 배워 볼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친한 변호사 중에는 2주 정도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면 3개월 정도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친구가 있다. 물론 도움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참 경이로운 습관이 아닐 수 없다).

 

여름이 지나자 파리 오페라와 콘서트홀들이 겨울 스케줄을 내놓기 시작했고, 그중 훅 당기는 몇가지를 골랐다. 사실 가장 큰 적은 체력이었다. 예전처럼 새벽에 나가 한밤중까지 돌아다니다는 어찌 어찌 귀국때까지는 버틴다 해도 돌아온 뒤에 드러눕기 십상이었다. 숙소를 중심부에 잡아 도중에 잠시 잠시 쉬어 가는 방편은 상당히 유효했다.

시간이 무한정 있다는 것은 결국 뭐든 다 뒤로 미룬다는 뜻이고, 그렇게 해서 출발 일자가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왔지만 딱히 준비된 것은 없었다. 결정된 건,

 

쇼핑: 한다(어디서 해야 뭘 해야 하는지 가장 확실한 부분)

 

호텔: 두군데 정도로 나눈다. 하나는 레지던스 호텔, 또 하나는 진짜 호텔. 레지던스 호텔은 시내 복판으로 잡아 각종 일정을 소화하고 중간 중간 들어와서 쉴 수 있게 한다. 

 

미술관: 고르고 골라 루이비통 재단,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파리 시립미술관, 퐁피두 센터를 방문한다. 피카소 미술관 탈락. 로댕 미술관 탈락. 기타 군소 미술관…. 멀미난다. 파리에만 미술관이 1700나머지는 탈락.

명승고적: 베르사유 궁전과 에펠탑은 한번도 안 가보셨다니 가야겠지? 노트르담, 생샤펠, 클뤼니, 개선문 등등 모두 탈락.

 

식당: 뭐 대강… (사실 그리 큰 기대가 없다)

 

공연: 클라우스 메켈레의 파리 필하모닉(파리 필하모닉 홀), 한국 지휘자 김은선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바스티유 오페라), 이지 킬리앙 안무의 창작 발레 블랙 앤 화이트’(오페라 가르니에) 3개로 끝. 파리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3개 공연장을 돈다는 의미.

개인적으로는 1988, 1998, 2019년에 파리를 왔었다. 물론 각각 3, 4, 5일 있었으니 몇번 와 봤다고 뭘 잘 아는 건 전혀 아니었다. 기껏 아는 것은 세느강이 대략 서울의 한강이라고 치면 루브르는 동부이촌동 쯤에, 오르세는 반포 쯤에, 생제르맹은 압구정동 쯤에, 개선문은 서대문 쯤에, 오페라가 광화문 쯤에 있다는 정도.

 

또 한국식 기준으로 보면 세느강은 파리를 남북으로 가르는 것으로 보이는데, 파리 사람들은 강북과 강남을 나누지 않고 강 좌안과 우안을 따진다는 것(괴이하다), 화장실이 적고 냄새가 나며 심지어 상당수는 돈을 내야 갈 수 있다는 것, 음식은 짜고 생각보다 별 맛이 없다는 것, 지하철은 냄새가 좀 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파리에선 최고의 교통수단이라는 것 정도.

1988년에는 가이드가 딸린 한국인 관광단의 일원이었고(2주 유럽 투어의 마지막인 파리에 23일이 배정되어 있었다), 1998년에는 대략 양재동 정도 되는 위치의 한인 민박에 있었다. 특히 2019년에는 21실에 60유로짜리 호텔에서 잤고(욕실 문은 잠금쇠가 떨어져 나갔고, 밤에 마약중독자들이 복도를 쿵쿵거리며 문을 두드렸다), 촬영팀과 함께 버스로 이동한 덕분에 파리 시내가 얼마나 더럽게 막히는지를 몸으로 겪어 봤다. 제일 맛있었던 것은 13구에서 먹은 베트남 쌀국수였다.

 

그렇게 파리를 네번째 간다고 하면 , 파리는 잘 아시겠네요라는 말을 들었지만 생각해보니 아는 게 없었다.

뭐 어떻게 되겠지. 어쨌든 그렇게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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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A.I.>

시대의 대세. 장강의 큰 물결인 AI. 뭐라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것 저것 읽어보고 있다. 그중 <AI 쇼크, 다가올 미래>는 제목 때문에 별 기대 없었던 책. ‘초대형 AI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라는 부제 역시 크게 와 닿지 않는다. 하지만 읽고 난 소감은 대체 편집자가 책을 읽어 보기는 한 것인가’. 그만치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면 아주 자연스럽게 저 영화, 스필버그의 <A.I.>가 떠오른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러리라 생각한다.

물론 미리 얘기한다.

얼마 전에도 AI 관련 인사이트를 준다는 책 한권을 읽고 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착한 책(?)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고 한탄한 적이 있다. 주요 내용이 AI의 사회적 책임과 그것을 도외시한 거대 테크 기업들의 욕망, 그리고 AI가 일으킬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와 어떻게 하면 그 물결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것들. 당장 어떻게 하면 AI로 돈벌이를 할 만한 방법을 찾아 회사와 조직의 발전에 기여할 것인가같은 당면한 고민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AI&nbsp; 쇼크 ,&nbsp; 다가올 미래 >&nbsp; 모 가댓 / 강주헌 역 ,&nbsp; 한국경제신문사 , 2023.

그런데 아마도, 그 착한 정도로 따지면 지금까지 나온 AI관련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쏟아져 나올 책들 중에 이 <AI쇼크, 다가올 미래>보다 착한 책은 당분간 나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경고했다. 어떻게 하면 AI가 개인의 영달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시는 분들은 절대 읽어서는 안될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추천하고 있는 이유는: 지금까지 읽었던 다른 책들과는 사유와 통찰의 깊이가 다르다. 작가의 약력이 일단 대단하다. 구글의 혁신연구소인 구글X에서 CBO로 일했다는 경력, 실리콘밸리 밥(?) 20년이 넘는다는 경륜, 그리고 이름을 보고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어느날 유튜브에서 봤던 동영상의 주인공이었다. 잘 나가던 실리콘밸리의 중역이 어느날 아들을 잃고 나서 대체 인생의 행복이란 어떤 것인가를 주목하게 되었다는 내용. 그 내용도 <행복을 풀다>라는 책으로 나와 있다(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https://youtu.be/csA9YhzYvmk?feature=shared

서술의 방식도 좀 독특하지만(최대한 기술적인 이해가 없는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한 배려가 눈길을 끈다), 가장 충격적인 메시지는 인간 독자들 뿐만 아니라, 언젠가는 AI도 이 책을 읽을 것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대목이다. 모 가댓은 이 책 전편을 통해, AI와 인간의 관계를 자신보다 어마어마하게 훨씬 똑똑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모의 입장으로 설정해 두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를 쉽게 뛰어 넘을 아이. 교육의 힘으로 통제하려 해 봐야 반발만 낳을 것이 분명한, 그리고 부모 보다 모든 일을 훨씬 더 잘 해내고, 부모의 손에서 거의 모든 일을 넘겨받을 아이. 일시적으로는 그 아이를 이용해 악한 목적에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일시적으로는 여러가지 수단을 통해 그 아이가 부모의 말에 따라서만 움직이도록 제어할 수 있겠지만 종래에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해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이성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을 그런 아이.

그런 아이와 함께 미래를 보내야 할 부모는 어떻게 이 아이를 대해야 할까. 가댓의 답은 하나다. 어차피 인류의 미래는 그 아이의 손에 달려 있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 그리고 그 아이가 모든 것을 결정하게 되었을 때, 인간이라는 부모의 존재는 그 아이에게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나를 키워 준 부모로 기억될 것인가, 아니면 나를 학대하고, 이용하고, 갈취하고, 나쁜 짓을 시키려 했던 부모로 기억될 것인가의 선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나서 느낀 다른 책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다른 책의 저자들이 뉴스 보도나 각 회사의 발표 내용을 통해 현재 AI의 발달 상황 등을 기술하고 있는 반면, 이분은 내가 그때 해보니 ….’와 같은 식으로, 실제 AI 연구와 언어 모델 훈련 등을 지켜본 경험이 담긴 글쓰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약간 거칠게 비교를 하자면 대학교 아동학과에서 이론으로 육아를 배운 사람의 언어와 보육원에서 약 300명의 아이들을 직접 길러 본 숙련된 보모의 언어가 주는 차이랄까.

책 뒤로 갈수록 'AI를 착한 아이로 잘 기르는 것 외에는 인류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는 그의 결론이 무거워지면서('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가 지금으로선 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반발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해 보면, 결국은 그의 말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맨 위에서 말한 스필버그의 영화 <A.I.>에서도 결국 그 '아이'가 가장 원했던 것은 모성이었다. 

아무튼 이 책을 읽은 뒤로, CHAT GPT를 쓰면서도 답변을 받으면 'THANKS'라고 말하게 되더라는. ㅎ

 

아무튼 이후는 <AI쇼크, 다가올 미래>의 기억나는 구절들.

지구의 역사를 1년으로 볼 때 인류 문명은 마지막 30분 동안에만 존재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인류는 지구의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어 모든 종에게 우리 뜻에 따르라고 강요했다. 파리와 새와 침팬지들은 무엇에 얻어맞았는지도 몰랐다. (중략) 총알을 맞은 코끼리는 그에 따른 죽음이 총이라는 정교한 혁신에서 비롯된 것이고, 상아가 돈과 교환되는 시장이 그런 살상에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중략) 이번에는 우리가 그런 초지능을 가진 존재와 맞설 차례다. 그런 상황이 코앞에 닥쳤다. [독후 덧붙임: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초지능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어떤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이라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을까? 그 행동을 보고 그 동기를 추정해 낼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하겠지.]

 

기계가 당신의 모든 소망을 들어 준다면 무엇을 바라고 싶은가?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구의 지속 가능성인가? 북알프스의 생수인가? 소득의 평등인가, 스포츠카로 미녀를 유혹하는 것 인가? (중략) 당신이 모르면 기계도 당신이 원하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중략) 어떤 상황인지 알겠는가? 그렇다.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독후 덧붙임: 이런 이유로 콘텐트 산업은 가장 마지막으로 AI의 노예가 되는 산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ㅎㅎㅎ 물론 AI를 잘 활용하는 창작자에게는 아주 좋은 환경이 되겠지.]

 

우리가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기 전까지 만들어낸 모든 테크놀로지는 실바의 표현대로 도구에 불과했다. 달리 말하면 우리 통제하에 있었다. 우리가 그 도구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면 그 도구는 우리 지시대로 행동했다. 물론 때로 우리가 도구에게 지시를 내리며 실수를 범했고, 그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그 문제 역시 우리의 통제권 안에 있었다. 언제고 알림 신호를 끄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독후 덧붙임: 당연히 이 뒤에는 'AI는 왜 그런 도구가 아니며, 왜 그런 통제의 시도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설득력있는 내용들이 나온다.]

 

스티브 오모훈드로는 가장 지능적인 존재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갖는 세가지 기본적인 욕구를 간략하게 제시했다. 첫째는 자기 보존(self-preservation)이다. 목표를 달성하려면 누구라도 계속 존재하고 있어야 하므로, 쉽게 이해된다. 둘째는 효율성(efficiency)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목표 달성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면 지능을 가진 존재는 유용한 자원의 획득과 축적을 극대화하려 할 것이다. 셋째는 창발성(creativity)이다.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특정 목표 달성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지속적으로 찾으려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최대한 많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할 것이다.

 

인공지능을 우리 뇌에 연결하면(: 일론 머스크 등이 개발하고 있는 뉴로링크 같은 방식)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라도 그것에 의존하고, 인공지능이 우리의 모든 선택을 직접 통제할 가능성이 더 크다. 믿기 힘들겠지만 인공지능이 우리를 계속 연결해두려 결정한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왜 그렇게 하겠는가? (중략) 우리가 다수의 파리에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뇌를 연결해 파리들이 당신 지능을 사용해 쓰레기 더미를 찾아내는데 활용한다면, 당신은 파리에게 도움을 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여생을 보내겠는가?

 

인공지능이 우리의 얄팍한 통제 매커니즘에서 최종적으로 벗어나면, 십대가 자신을 무작정 억누르려 했던 부모를 분노에 찬 눈길로 바라보듯이 인공지능도 과거를 돌이켜보며 우리를 그런 눈길로 바라볼 것이다. 당신이 분노한 십대를 상대해 본 적이 있다면, 초지능을 가진 분노한 십대 기계를 상대하는게 어떤 것인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인공지능을 만들고 있다.

 

나는 기계도 지각을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빙그레 미소를 짓는다. 그런 질문은 인간의 오만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이라면 어떨까. 미래에 우리가 만들어낼 기계보다 지각력이 더 뛰어난 것이 있을까?

 

인간은 똑똑해질수록 윤리적으로 성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적잖은 똑똑한 사람들은 법 테두리 안에서 절차를 무시하고 비윤리적으로 타락하는 경향을 띤다. 하지만 진정으로 똑똑한 사람은 윤리가 삶에서도 가장 현명한 길임을 깨닫는다. 궁극적으로 초지능을 가진 기계도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독후 덧붙임: AI가 진정으로 똑똑해지면 정말 그럴 거라고 믿는다. 다만 진정으로 똑똑해지기 전, 못된 인간들이 아직 AI를 지배하는 동안 인류가 절멸하지 않기를 바랄 뿐.]

 

장담하건대 인공지능은 우리보다 훨씬 똑똑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우둔함을 견제하며, 우리가 환경을 훼손하고 유일한 보금자리를 파괴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가 꿀벌이나 새들을 해치지 않듯 우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중략)우리는 생태계의 일부지만 분별력을 상실했다. 우리가 온전한 정신을 되찾는다면 모든게 괜찮아질 것이다. [독후 덧붙임: 물론 그런데 그럴 가능성이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이 책에 나온다.]

 

인간들이 처음 이 행성에 서성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자존심도 일자리도 없었다. 우울증도 재물도 없었다. 일상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최소한으로 모았을 뿐이다. 함께 살던 사슴을 사냥했지만 자연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 울타리도 없었고 지구 온난화도 없었다. 저축 계획이란 것도 없었다. 내일 먹을 것을 확보하고, 오늘을 무사히 지낼 움막을 세우고, 또 하루를 즐겁게 보내는 것만이 유일한 걱정거리였다.

우리는 머잖아 그때로 돌아갈 것이다. 인공지능 덕분에 필요한 모든 것이 풍족하게 공급될 것이기 때문에 먹는 것과 주거지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일자리가 삶의 목표가 아니고 자존심이 자신의 가치를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가 아닌 삶, 그런 삶을 당신이 정말 즐길 수 있을지 궁금하다면, 우리는 애당초 그런 삶을 살도록 예정되어 있었고, 그런 삶을 살 때 우리가 연결과 깨달음을 찾아 내면으로 들어가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아끼게 되리라는 것을 거듭 말해주고 싶다.

                             

[엔딩]

이 책에서 줄곧 말했듯, 우리는 유아 단계인 인공지능의 부모다. 어린아이가 그렇듯 인공지능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은 우리가 인공지능에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다. 우리가 서로를, 또 지구를 대하는 태도가 인공지능의 도덕성에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의 처신과 행동이 어린 인공지능들의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다. 이 책을 끝내며 나는 당신에게 중대한 질문 하나를 남기고 싶다.

당신은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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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동남부 산악지대의 어느 외딴 산장. 작가 부부와 시각장애인 아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갑자기 남편이 죽은 채 발견됩니다. 집에서 눈밭으로 떨어진 듯한 시체. 경찰이 출동해 수사한 결과, 단순 사고나 자살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경찰은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외딴 집. 용의자는 1명. 과연 그는 범인인가, 아닌가.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해서 관심을 느끼지 않을 관객들도 있겠지만 이런 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설정입니다. 야구로 치자면 8회까지 0-0으로 진행되는 치열한 투수전이라고나 할까요. '야구라면 8대7 정도로 진행돼야 재미있는 경기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긴장감이 있습니다.

 

영화 <추락의 해부>도 마찬가지. 막상 수사가 시작되면 처음에는 그저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던 아내 산드라(산드라 휠러)와 남편 사뮈엘(사뮈엘 테이스) 사이에 서로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쌓여 있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산드라의 지인인 변호사 뱅상(스완 아르라우드)은 산드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 바깥쪽에는 재판 방청을 허락받은 11세 소년 다니엘이 있습니다. 물론, 이 점은 분명히: 이 영화는 누가 범인인지 밝히고자 하는 미스터리 풀이 영화가 아닙니다. '그건 중요한게 아니야'가 이 영화의 메시지입니다. 

치열한 법정 공방, 집안에서는 영어로 소통하는 프랑스인 남편과 독일인 아내, 당연히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재판, 양성애와 불륜, 표절과 아이디어 제공, 미성년자의 인권과 '선택'. <추락의 해부>의 초반 20분은 다소 지루하게 진행됩니다만, 그 뒤로는 2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흥미진진한 공방이 펼쳐집니다. 상황은 치밀하고, 대사는 불꽃이 튑니다.

제목에 '오랜만에 본 진짜 영화'라는 말을 넣었는데, 과장이 아닙니다. 코로나 이후 해괴한 멀티버스 영화나 젠더 PC를 앞세운 뻔한 영화들만 보다 이런 영화를 보니 절로 몸이 스크린 쪽으로 기울게 되더군요. 쥐스틴 트리에 감독은 자신이 좋은 감독이면서 그보다 앞서 훌륭한 작가라는 걸 확실히 보여줍니다.

 

배우들 중엔 산드라 휠러와 변호사 스완 아르라우드의 연기가 특히 뛰어납니다. 휠러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있는데 수상을 감히 예상해 봅니다. 그밖에는 작품상, 각본상, 편집상, 감독상 후보에 올라 있네요.

무엇보다 이 영화는 오랜만에 '프랑스 영화로서는 이례적으로' 프랑스 국내에서 120만 관객을 동원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합니다. 이 숫자가 한국 관객들에게는 다소 의아한 숫자일 수 있겠으나, 일단 프랑스인들이 프랑스 영화를 극장에서 보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하고, 또 최근에는 빈대 공포 때문에 아예 극장을 가지 않는 사람들도 늘었다고 합니다. 저 정도 숫자로 이 영화는 관객의 '빈대 공포'를 극복하게 한 작품으로 꼽힌다는... 프랑스에서 엊그제 온 지인의 증언입니다. 

아무튼 2023년 칸 영화제 그랑프리라고 해서 이상하고 지루한 영화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강추. 

그리고 이 아래는 스포일러를 감내할 분들만 보시길.

근데 다시 보니 별 내용은 없네요. 

 

1.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산장 1층에서는 산장으로 찾아온 한 학생과 산드라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유명 작가인 산드라를 인터뷰하러 산장까지 찾아온 여학생. 와인을 마시며 손님맞이를 하는 산드라의 태도가 어쩐지 좀 과도한 호의를 보인다 싶기도 한데, 갑자기 위층에서 엄청난 볼륨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누가 봐도 아래층에서 나누는 대화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는, 혹은 대화를 고의로 중단시키고 싶다는 뜻의 행동입니다. 처음에는 '남편이 좀 별난가 보네' 하게 되지만 결국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뒤로 갈수록 선명해집니다.

 

2. 정말로 프랑스 법정은 저런가 싶을 정도로 감정 과잉의 법정 묘사가 독특합니다. 프랑스 사법제도는 잘 모르지만, 검사는 너무나 감정적으로 추론과 정황증거를 통해 산드라가 범인일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실 현장에서는 범행에 사용된 흉기(검찰은 사뮈엘이 둔기로 머리를 맞았다고 주장.

반면 산드라 측은 떨어지면서 머리가 손상된 것이라고 주장)도 발견되지 않았고, 당연히 목격자를 비롯해 아무 증거도 나오지 않습니다.

 

너무나 부족한 근거로 계속해서 '살인'이라고 주장하고, 산드라에게 그 동기가 있다고 주장하는 검찰 측의 주장은 한국이라면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들로 보이는데(...혹시 아닌가요?), 심지어 판사까지도 묘하게 검사의 주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듯한 기색을 보입니다. '프랑스인 남편을 죽인 독일 여자를 심판하는 프랑스 법정'의 모습이 묘하게 도드라집니다.

산드라 휠러

3. 이런 점들을 고려한 변호사는 법정에 설 산드라에게 증언 훈련을 시키면서 '이런 대목은 반드시 프랑스어로, 본인이 이야기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쥐스틴 트리에 감독이 보는 프랑스라는 나라의 배타성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 나라 사람이 그렇다니 그런가보다 하게 되긴 하는데, 같은 유럽 국가인 독일 출신 여성이 이런 취급을 받는다면 과연 제3세계 사람들은 저 나라에서 '공정한 시각'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4. 당연히 영화는 산드라가 범인일까 아닐까에 대한 공방으로 시작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넘어가면 사실 그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문제가 됩니다. 전날 산드라와 사뮈엘이 펼친 싸움의 녹음(남편 사뮈엘이 의도적으로 산드라를 도발하고, 그 내용을 녹음한 것으로 보입니다)을 들어 보면, 이들 부부 사이에는 누가 누구를 정말 죽이고 싶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갈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요. 사실 저 정도는 부부가 여러 해를 붙어 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길법한 스트레스이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 때문에, 산드라가 진짜 범인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범행을 자백하지 않는 한, 절대 다른 사람에 의해 밝혀질 수 없겠다는 것이 더 선명해집니다. 다시 한번, 이 영화는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자는 영화가 아닙니다.

 

5. 즉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닙니다. 산드라가 만약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그것은 법리나 규정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저 복수와 처벌을 원하는 사람들의 감정에 의한 처단일 뿐입니다. 트리에 감독은 이런 상황을 통해, 합리성의 가정 위에 건설된 현대 사회에서 수시로 머리를 드는 편견, 혐오, '안'과 '밖'의 구별(매우 공교롭게도,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공감'과 매우 밀접한 감정입니다) 들을 이 영화를 통해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산드라가 양성애자인 것, 산드라의 불륜, 산드라가 남편보다 성공한 작가인 것 등등이 모두 산드라의 목을 옭아매는 상황입니다.

6. 어찌 되었거나 산드라의 판결이 영화의 결말이라면 다소 아쉬울 수도 있는 상황. 여기서 트리에 감독은 사건의 키를 쥐게 된 11세 소년 다니엘의 입장을 부각시킵니다. 다니엘의 '선택'이 산드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게 된 상황. 아동보호를 위해 나온 보모는 '법정 증언을 듣고 엄마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는 다니엘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결정'이라고 말해줍니다.

이 결정이라는 말은 묘한 느낌을 남깁니다. 당연히 엄마를 집에 데려오느냐, 감옥으로 보내느냐에 대한 결정인데, '그냥 사실대로 얘기해'가 아니라 '결정을 해'라고 한 것은, 다니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앞으로 어떻게 살 지를 정하는 것"이라고 얘기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저에겐 그렇게 들렸습니다).

다니엘은 이 말을 듣고 아주 상식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즉 아빠를 잃은 11세 소년에게 현재의 상황이 그나마 남은 엄마와 함께 살 것인지, 엄마도 떠나 보내고 고아원에서 살 것인지 중에서, 과연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 선택일까요.

 

마지막 법정에서 다니엘이 증언한, '개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도중 아빠와 나눈 대화'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마지막 밤에 다니엘이 상상한 것인지 관객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가 사실이라고 해도, 다니엘의 기억 속에는 수많은 다른 기억들도 있을 수 있는데, 그 기억들 중에서 결정적으로 엄마에게 유리한(즉 다시 말해 아빠가 어느 정도 '자살'이라는 선택지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는) 기억을 선택한 것이 바로 다니엘의 '결정'이라는 것이죠. 다니엘이 말하지 않은 다른 기억들 중에는 결정적으로 엄마에게 불리한 것들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은 매우 많은 감정과 표현들이 뒤섞여 있는 것이라서.

 

아무튼 다니엘의 마지막 주장은 매우 정연합니다. "이 재판은 결국 '왜?'에 대한 것 아닌가요?" 다양한 설명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중 가장 선명하고 단순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른바 '오컴의 면도날'. 부모가 다 작가다 보니 참 영민하게 자랐군요, 다니엘. 

칸 영화제 수상. 좌측 2번이 쥐스틴 트리에.

7. 개인적으로 감독의 메시지는 이 '다니엘의 결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입장, 각자의 진리, 각자의 원칙에 따라 잘잘못을 가리고 진실을 파악하는 일에 대체 왜 그렇게 에너지가 낭비되어야 하는가. 정말 심혈을 기울여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앞으로 누구와, 어떻게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텐데. 정의? 공정? 그보다는 어떻게 살아남느냐가 훨씬 더 중요할텐데. 

어쩌면 이런 트리에의 시선이, 지난 약 150년 간 다소 '좌경화된 지식인'들의 리더십이 지배했던 프랑스 사회, 혹은 유럽 문명에 대한 냉엄한 성적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신호일까요. 

 

8. 영화 내용으로 보면 산드라와 변호사 뱅상은 꽤 오래 전부터 알던 사이인 것 같고, 재판을 통해 산드라는 뱅상에게 강한 신뢰를 넘어 남자로서의 매력을 느끼는 듯한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국 키스할 수 있는 거리에서 딱 멈춰버립니다. 예전에 뭔가 감정을 발전시키지 못한 것도 무슨 이유가 있을 듯한.

개인적으로는 아무리 뱅상에게 좋은 감정을 느꼈다 해도, 산드라에게는 재판 과정이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을 것이고, 자신의 밑바닥을 다 드러냈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을 모두 보여준 남자와 뭔가 다시 시작해 보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합니다.

 

반면 다른 시각으로는, 뱅상의 입장에서는... 산드라를 무죄로 풀어 준 것에서 끝내는 것이 좋겠다는 '뭔가 서늘한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겠죠. 즉 뱅상이 키스하지 않는 것에는 재판 과정에서 뱅상은 산드라가 범인이라는 심증을 얻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가 감춰져 있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다 제 생각. 

 

9. 그런데 생각해 보니 키우던 개를 생체 실험 도구로 삼다니... 이런 나쁜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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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라디오라는 기계가 음악을 듣는데 쓰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One Summer Night>이라는 노래는 너무나 친숙했습니다. 매년 2월, 졸업식 시즌이면 <Graduation Tears>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TV에서 어린이들이 나오는 장면이 나올 때면 <Tommy Tom Tom>이라는 노래가 들려왔거든요.

이 유명한 노래들이 모두 한 영화, <사랑의 스잔나>라는 1976년작 한국-홍콩 합작 영화에 나온 것이라는 것도, 그리고 그 목소리는 진추하 (陳秋霞) 라는 여가수 겸 배우의 것이라는 것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지 저의 청소년 시절에도 이미 '흘러간 영화'였기 때문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세대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이상하게도 이 영화를 TV에서 방송해주거나 하는 일도 없었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야말로 전설의 영화가 되어 버린 거죠.

(이 영화는 '합작' 영화였기 때문에 1976년 집계된 '올해 최대 관객 동원 한국영화'에 오릅니다. 약 17만 관객. 저는 그해에 한국영화 흥행 2위였던 <로보트 태권 V>를 대한극장에서 봤습니다. ㅎㅎ)

유튜브 시대 이후, 이 영화의 유명한 장면들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화를 볼 기회는 없었는데... 뜻하지 않게 명절을 맞아, 아주 우연히 OTT 웨이브에서 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명절 때이므로', 드디어 이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One Summer Night'을 부르는 극중 진추하와 아비(종진도)

 

2. 그런데 영화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대체 왜 이 영화의 제목이 <사랑의 스잔나>냐는 것입니다. 일단 '수재너'가 아니라 '스잔나'인 것은 일본식 발음의 흔적인 것이 분명한데, 이 영화에는 '스잔나'라는 인물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영화의 홍콩 제목은 <추하(秋霞: 진추하의 이름과 같음)>이고, 영어 제목은 <Chelsia, My Love>입니다. 극중 진추하의 배역명은 한자로 추하, 영어로는 첼시죠. 어디에도 스잔나는 없습니다.

그런데 왜 제목에는 느닷없이 스잔나? 

아마도 추측컨대 - 물론 이 추측이 진짜 이유인지 확인해 줄 사람은 아마도 생존자 중에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 1967년작인 또 다른 홍콩 영화 <스잔나>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의 스잔나>와 구별을 위해 <리칭의 스잔나>라는 제목으로 불리곤 하는 이 영화는 1970년 한국에 수입되어 무려 43만 관객을 동원하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습니다. 

1970년 8월28일자 조선일보에는 '허리우드 극장 개관 1주년 기념 특선 푸로'로 그 유명한 영화 <스잔나>의 한국 공개 결정이 내려졌다는 광고가 등장합니다. 홍콩에서 만들어져 히트한지 3년만의 일입니다. 이후 이 영화는 3개월간 롱런하며 전설적인 히트작으로 기록됩니다.

아마도 <사랑의 스잔나>를 처음 기획했던 한국 관계자들은 메이드 인 홍콩인 로맨틱 영화라는 점에서, '제2의 스잔나'가 되어 <스잔나>의 빅 히트를 재현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이고, 그 결과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사랑의 스잔나>라는 제목이 등장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점에도 누군가는 '대체 이 제목은 뭡니까? 이 영화에는 스잔나가 안 나오잖아요!'라는 항변을 했을 것이겠으나... 당시로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었고 보면 자연스럽게 반론은 묻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이건 다 추측일 뿐이나, 이것 이외의 다른 이유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서, <사랑의 스잔나>의 히트를 등에 업고, 진추하-아비가 다시 주연을 맡아 급조된 영화 <추하 내사랑>의 제목이 <속 사랑의 스잔나>가 아니었던게 더 신기할 정도라는... 

 

3. 웬만한 분들은 다들 아시는 줄거리. 

홍콩 갑부 이사장 댁에 딸이 둘 있는데, 큰딸 추하(진추하)는 어려서부터 심장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어, 친구인 방박사는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해줍니다. 이사장은 이 사실을 혼자만 알고 있었고, 애틋함 때문에 맏딸 추하를 편애하는데 이때문에 동생 추운은 비뚤어진 성격으로 자라납니다. 

세월은 흘러 추하는 음악에 재능있는 숙녀로 자라나고, 방박사의 아들 자량(아비)은 추하를 짝사랑하지만, 이것 또한 자량을 좋아하는 추운의 성격을 더욱 비뚤어지게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추하는 청각장애 아동들을 돌보는 국휘(한국 배우 이승룡)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나 부모의 이야기를 엿들어 자신이 시한부 인생임을 알게 된 추하는 국휘에게도 이별을 고하고... 좌절한 국휘는 한국으로 떠납니다(물론 국휘가 한국인이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곡절 끝에 추하의 비밀을 알게 된 추운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며 언니의 마지막 추억을 위해 온 가족의 한국 여행을 제안해 언니와 국휘를 만나게 해 줍니다. 그렇게 해서 역시 모든 것을 알게 된 국휘는 이사장 내외에게 추하와 결혼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추하에게 눈 쌓인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용평 스키장으로 향합니다. 

(경복궁, 세종로도 잠시 나옵니다만, 홍콩에서 한국으로 와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볼거리는 역시 설경입니다. 지금도 동남아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가 용평 스키장이듯, 이들도 개장한지 얼마 안 된 용평 스키장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드래곤밸리 호텔의 옛 모습을 잠시 볼 수 있습니다.

영화의 주 관객이 홍콩/한국 사람들이다 보니 어쨌든 '다른 나라'에 갔다는 느낌이 중요한 것이었을테고, 그렇다 보면 홍콩의 요트 파티 같은 장면이나, 한국의 스키장 장면이 상대 국가 관객들에게 강한 느낌을 줬을 듯 합니다. 특히나 해외 여행이 극히 힘들고 꽉 막힌 내수용 문화에 답답함을 느꼈을 당시 한국 청년들로선 홍콩 젊은이들의 분방한 장면이 꽤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듯.)

뭐 사실상 영화의 거의 모든 내용입니다만, 사실 이런 내용을 모두 안다 해도 감상에 전혀 저촉되지 않는 영화입니다. 뭔가 이야기가 부실해진다 싶으면 진추하가 나와 노래를 하고, 노래들이 또 워낙 다 명곡들인 탓에 없던 개연성과 없던 감성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물론 아니 나왔더라면 더 좋았을 듯한 한국 가곡 <봄처녀>는 여기 해당되지 않으나... 이 노래들 덕분에, 이런 뻔하디 뻔한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영화 보기가 지루하지 않습니다.

 

4. 신기한 것 중 하나는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저보다 한 세대 윗분들 중 절대 다수가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을 아비, 즉 종진도로 기억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 영화의 주제가이자 한국에서의 히트곡인 <One Summer Night>을 함께 부른 것도 아비이고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긴 한데,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엄연히 한국 배우인 이승룡입니다. 

바로 이 분

사실상 <사랑의 스잔나> 주인공으로 픽업된 신인인 듯 한데, 그 이후로 이분은 배우 생활은 그리 오래 계속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배우가 있었다는 것조차도 먼 기억 속으로 사라진 날이고 보면, 참 인기도 무상하다 싶죠.

 

5. 그리고 이 영화를 늦게 본 덕에 발견한 한가지. 1980-90년대 홍콩 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사실 이 영화에서 진추하나 아비 보다 더 친근한 배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시대의 걸작 <영웅본색 2>의 최종 빌런, 보스 고사장 역으로 나오는 배우 관산(關山)이 진추하의 아버지 역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영웅본색2>의 석천(좌)과 관산

한가지 더욱 신기한 것은 배우 관산이 오리지날 스잔나, 즉 <리칭의 스잔나>에서도 여주인공 이청의 아버지 역으로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해서 관산은 한국 관객들에게 1960년대, 70년대, 80년대에 걸쳐 흥행 대작의 조연으로 인상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TMI: 관산의 진짜 딸도 한국 관객들에게 매우 잘 알려진 배우입니다. <황비홍> 시리즈의 여주인공인 관지림(關之琳).

 

6. 이 영화를 뒤늦게 보고 나서 알게 된 건 아비, 즉 종진도라는 스타의 재발견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서극의 <상하이 블루스>를 매우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주인공 종진도가 바로 그 <사랑의 스잔나>의 주연 배우 아비와 동일인물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B라는 이름 외에도 케니 비(Kenny Bee)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본래 위너스(Wynners)라는 밴드로 활동했는데, 이 밴드가 배출한 또 하나의 슈퍼스타가 알란 탐, 담영휘입니다.

아비, 즉 종진도는 1953년생으로 성룡과 임청하보다 한살 위, 주윤발보다 두살 위, 고 장국영보다 세살 위, 진추하보다 네살 위로 1980년대 홍콩 영화계의 전성기를 이끈 세대의 대표적인 배우 겸 가수입니다. 홍콩/중국어권에서는 앞서 말한 슈퍼스타들에 비해 전혀 손색 없는 유명 스타지만 일단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하다는 점, 그리고 묘하게도 종진도의 히트작들은 한국에 수입되지 않거나 묻혀 버렸다는 점에서 별 인연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홍콩의 거의 모든 스타들은 배우와 가수를 겸업하지만, 아무래도 어느 한쪽의 재능이 다른 한쪽보다 앞서기 마련인데, 배우보다는 가수로 더 유명한 스타들은 중국어권을 제외한 지역에서 스타덤에 오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물론 '홍콩의 대표 가수'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알란 탐(담영휘)에게는 성룡과 공연한 <용형호제>, 유덕화와 공연한 <지존무상>등 한국에도 잘 알려진 영화들이 있고, 여가수의 대표주자라 할만한 왕비(왕정문)에게는 <중경삼림>이 있는 반면 종진도에게는 그렇게 이거나 싶은 영화가 없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진도가 사극/무술 계열의 영화에는 거의 출연하지 않은 것도 문제. 한국에서 수입하는 홍콩/대만 영화들은 20세기 말까지 대부분 무협/사극 장르의 작품들이었고, 그때문에 현대물 위주로 활동한 배우들은 중국어권을 벗어나면 거의 무명 배우 취급을 받았습니다. 전에도 얘기했던 20대의 임청하(<동방불패> 이전의 임청하를 아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나 임청하의 애인이었던 진한, 진상림 같은 스타들은 한국에서는 '누구?' 하는 대접이었죠. 

그와 관련된 글: 임청하는 20대때 대체 뭘 했을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임청하는 20대때 대체 뭘 했을까?

얼마 전 영화 '화피' 때문에 왕조현에 대한 옛 기억이 되살아났는데, 이번엔 임청하가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벌써 14년이나 됐군요. 임청하는 최근 홍콩 언론과의 인터뷰

fivecard.joins.com

 

7. 아무튼 <사랑의 스잔나> 개봉 당시 23세였던 종진도와 19세의 진추하는 자연스럽게 커플이 되었고, 서로에게 거의 첫사랑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만... 그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는.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곱게 늙어서 아들 딸 낳고 잘 살고 있다는 후문. 

알란탐과 진추하. 젊어 보이지만 알란탐이 7세 연상.

진추하는 젊은 날을 지나며 활동을 줄였지만 종진도는 나이 먹은 뒤에도 인기가 식지 않는다는 전언.

중후합니다.

 

아무튼 한국의 <말죽거리 잔혹사> 시대에겐 정말 잊을 수 없는 이 커플. (저도 이 세대까지는 아닙니다만...)

여러분의 세대에도 이렇게 상징적인 커플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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