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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고민했다. 열편의 영화를 꼽을 수 있을까. 올해 그렇게 괜찮은 영화를 많이 봤나? 영화 자체를 많이 보지 못했다. 대신 드라마 시리즈는 평소보다 더 본 것 같기도 한데, 극장에 간 횟수가 매우 줄어들었고, 솔직히 추천하고 싶은 작품을 많이 보지 못했다. 특히 한국 영화는, 만드시는 분들께 죄송하지만... 좀 그랬다.
퍼펙트 데이즈 (빔 벤더스) Perfect Days
대체 왜 저 남자는 아무 불만 없다는 표정으로 도시의 변기를 닦고 있을까. 평온하고 소박한, 아무 욕심도 없어 보이는 한 남자의 일상 속에 얼마나 큰 폭풍우가 감춰져 있는지 보여준 걸작. 야쿠쇼 코지라는 훌륭한 배우의 힘으로 이야기는 절로 설득력을 얻었다. 속죄, 욕망, 번뇌 같은 단어들이 햇살처럼 마음에 박힌다.
퍼펙트 데이즈, 속죄와 구원의 우화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퍼펙트 데이즈, 속죄와 구원의 우화
를 뒤늦게 봤다. 주위의 찬사와 추천 속에서도 사실 비슷한 영화라는 말에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연말을 맞아 보길 잘 했다.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이 코모레비 (木漏れ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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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의 해부(쥐스틴 트리에) Anatomie d'une chute
눈 덮인 산 속, 추락한 남자의 시체. 과연 범인은 아내인가, 아닌가. 미스터리가 형성될 수 없을 것 같은 시공간에서 이뤄지는 미스터리. 여자가 무죄라면, 과연 왜 무죄인가. 죄의 유무는 범행 여부에 따라서만 결정되어야 하는가. 도저히 공이 돌아다닐 수 없을 것 같은 좁은 페널리 에리어 안에서 절묘하게 슈팅을 뽑아내는 쥐스틴 트리에의 솜씨가 놀랍다.
추락의 해부, 오랜만에 본 '진짜 영화'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추락의 해부, 오랜만에 본 '진짜 영화'
프랑스 동남부 산악지대의 어느 외딴 산장. 작가 부부와 시각장애인 아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갑자기 남편이 죽은 채 발견됩니다. 집에서 눈밭으로 떨어진 듯한 시체. 경찰이 출동해 수사한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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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리오사 (조지 밀러) Furiosa: A Mad Max Saga
전작 <매드맥스4>로 사령관 퓨리오사라는 불멸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 조지 밀러 옹의 노익장이 빛나는 또 한편의 걸작. <매드맥스4>가 워낙 기대치를 높여 놓은 탓에 좀 더 박한 평을 얻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퓨리오사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 <빨간 내복 사가>도 혹시 볼 수 있으면 어떨까.
퓨리오사, 남신들의 성전을 박살내는 여신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퓨리오사, 남신들의 성전을 박살내는 여신 이야기
의 프리퀄 는 문명의 종말을 맞은 호주 대륙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경작이 가능한 땅, 녹색의 낙원에서 시작한다. 열살 남짓한 소녀 퓨리오사는 엄마(찰리 프레이저)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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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2 (드니 빌뇌브) Dune: Part Two
이 시대의 완벽주의자 드니 빌뇌브의 야망이 빚어낸 결정체. 물론 1편 만큼의 임팩트는 없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OTT 시대의 관객에게 영화란 무엇인지 알려주기엔 충분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원작의 한계를 넘어서기는 쉽지 않겠지만, 부디 이 듄 시리즈도 조금만 더 21세기의 관객들도 만족할 수 있도록 서사에 좀 더 신경을 써 주길. 1편도 그랬지만 2편의 주인공은 확실히 '벌레'.
듄2, 장대한 빛과 소리의 걸작, 그러나 아쉬운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듄2, 장대한 빛과 소리의 걸작, 그러나 아쉬운 이야기.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드니 빌뇌브 감독이 "영화가 TV에 의해 타락했다. 나는 대사가 싫다"고 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순수한 이미지와 사운드야말로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도 한 것으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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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조나선 글레이저) The Zone of Interest
아우슈비츠의 담벼락 밖. 삶과 죽음의 경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인간이기를 선택한 자들은 떠나고, 일신의 안위를 선택한 자들은 남아서 즐긴 곳. 누군가는 이런 고발에 왜 은유가 필요하냐고 비판했지만, 인간의 내면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은 다큐멘터리가 할 수 없는 울림을 준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마는 거울을 볼 줄 몰랐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존 오브 인터레스트, 악마는 거울을 볼 줄 몰랐다.
1.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뭘 하는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수용소에서 일하는 독일군들은 당연히 수용된 유태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특히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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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스 (루카 구아다니노) Challengers
가장 중요한 것은 승부였나, 사랑이었나, 혹은 그 둘은 따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었나. 두 명의 하이틴 테니스 유망주가 어느날 여신같은 주니어 테니스 스타를 만났고, 둘 다 사랑에 빠졌다. 여신은 두 남자에게 이기는 자를 사랑하겠다고 선언했고, 그 뒤로 대략 15년에 걸쳐 두 남자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치열한 대결을 펼친다. 나의 가장 치명적인 적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매우 고전적인 승부 속의 은유. 이걸 청춘과 패션으로 녹여낸 구아다니노의 솜씨가 놀랍다.
이소룡들 (데이빗 그레고리) Enter the Clones of Bruce
한글 제목은 직관적이지만 영어 제목은 여러가지 주변 정보를 알아야 웃을 수 있다. 그만큼 이 영화가 이 리스트에 있다는 것은 확실히 제목의 '개취'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영어 제목의 브루스 리란 우리 모두가 아는 Bruce Lee. 그리고 출연자 리스트에는 Bruce Le, Bruce Li, Bruce Lau가 총출동한다. 홍콩 영화의 주류를 쇼 브라더스에서 골든 하베스트로 바꿔놓은 영웅. 우리가 아는 이소룡의 영화는 <당산대형>에서 <사망유희>까지 억지로 늘려도 5편 뿐이지만, 당시 서구에서는 수십편의 영화가 브루스 리의 영화로 공개됐다. 왜? "동양인 얼굴은 구별하기 힘들어서." 이런 얘기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재미있을 영화.
아 개취라니까요.
위키드 (존 추) Wicked
무대극 원작에 대해서도 한동안 사람들은 "어떤 영화화도 원작을 능가할 수 없다"고들 했다. 하지만 피터 셰퍼의 위대한 대본을 밀로스 포먼이 영화화한 <아마데우스> 이후, 그런 시비는 사라졌다. 특히 뮤지컬 분야에서는 물리적인 제약이 큰 무대를 벗어날 때 더 놀라운 결과물이 나오곤 했다.
<위키드>는 3시간 내외의 무대 뮤지컬을 두 편의 영화로 나누다 보니 앞부분의 진행이 더뎌 지루함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이 뮤지컬의 주제곡이라고 할 수 있는 <Defying Gravity> 시퀀스에서 모든 것을 잊게 하는 압도적인 연출을 보여줬다. 누군가가 왜 아직도 극장에 가야 하냐고 묻는다면, 손가락을 들어 <위키드> 포스터를 가리키라고 말하고 싶다.
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밤 (넷플릭스 오리지널, 바오 응우옌) The Greatest Night in Pop
2024년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날로서 3시간 이하의 단편 영상물 중에서 볼만한 게 있느냐는 질문에, 거의 유일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었던 작품. 물론 '그 세대'가 아니라면 이런 감동을 느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작품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울러 당대의 제왕과 제왕의 형님, 모든 것을 기획한 사람, 그 핵심이 되고 싶었지만 겉돌았던 사람, 이 자리에 선 것이 정말 일생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나를 위한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아쉬움과 분노를 느낀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날의 이벤트를 조명한 바오 응우옌의 솜씨도 탁월했다.
파묘(장재현)
이 영화가 없었다면 과연 2024년의 한국 메이저 영화 중에 뭘 이 리스트에 넣을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 물론 일본 귀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한국 영화의 신기원이라고 할 정도로 몰입감이 엄청난 걸작이었고, 그 뒤로는 앞부분의 성취를 조금씩 깎아먹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다음번에도 장재현 감독의 영화를 꼭 보겠다는 믿음은 분명하다. 차 번호판이니 포스터니 하는 것들이 화제의 중심이 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 없이도 충분히 훌륭했던 작품.
페르시아어 수업 (바딤 페럴먼) The Persian Lessons
2차대전 독일 수용소. 한 독일 장교가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 수감자가 살기 위해 "나는 페르시아어를 할 줄 압니다"라고 주장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결국 한 남자는 자기가 만들어 낸 가공의 세계로 다른 남자를 끌어들인다는 설정인데... 좀 늦게 봤지만 '이런 소재로도 이런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구나'에서 충격을 받았던 작품. 사기꾼의 사기가 들통나느냐 마느냐 하는 긴장감도 긴장감이지만, 정말 저런 식으로 세계 하나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2022년작이라 맨 뒤로 밀렸지만 아직 안 보신 분들은 꼭 보시길.
...뭐 이렇습니다. 예전에 기운 뻗치고 뭘 모를 때에는 추천 영화와 망작을 같이 꼽기도 했는데, 나이 먹고 보니 그게 무슨 짓인가 싶기도 하고, 뭔가 콘텐트들을 만드는 데 관여해 보니 그런거 저런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만드는 사람들은 피똥 싸면서 만드는데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어쨌든 새해에도 이 글 읽는 분들 다들 건승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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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를 뒤늦게 봤다. 주위의 찬사와 추천 속에서도 사실 <패터슨> 비슷한 영화라는 말에 별로 내키지 않았는데, 연말을 맞아 보길 잘 했다.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이 코모레비 (木漏れ日: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라는 새로운 명사를 이야기했다.
자전거를 타고 숲길을 달리건, 자동차로 달리건, 걸어가며 바라보건, 아니면 제 자리에 누워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을 즐기건 코모레비는 아름답다.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도 한다. 내가 아무리 애를 쓴들, 이 세상의 모든 코모레비를 가질 수 없고, 내가 없다 한들, 심지어 아무도 즐기는 사람이 없다 한들 코모레비는 변함 없이 어딘가에 쏟아지고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한때 '코모레비'가 될 뻔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지만 보고 나니, 그 코모레비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코모레비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같은 순간은 하나도 없는, 변화 없는 것 같은 나날들 속의 코모레비같은 햇살의 가치'에 큰 무게를 두는 것 같다.
물론 그게 중요한 영화긴 하지만, 내게 이 영화는 속죄와 욕망에 대한 영화로 읽혀서 매우 와 닿았다.
일상의 소중함? 잔잔한 감동? 천만에.
2. 히라야마는 왜 화장실 청소부가 되었을까. 누가 봐도 '이런거 하실 분' 혹은 '이렇게 사실 분'이 아닌 사람이 매일 아침일찍 일어나 토사물 쌓인 아침의 공공화장실을 꼼꼼하게 닦고 정리한다. 대체 왜.
누가 봐도 '닦음'의 의미는 선명하다. 그는 지우고 싶고, 펴고 싶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고 싶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어느 정도 그 노력은 결실을 이룬듯 했다.
3. 다만 빔 벤더스가 그리 친절할리 없고, 사실 친절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 사연을 깔끔하게 털어줬더라면 영화의 아우라는 확 사라져 버렸을게다. 그저 이 정도로 짐작하고 상상하게 하는게 좋다.
히라야마의 동기 가운데 단지 느낄수 있는 것은, 배운 사람인 그에게 어느 한 순간 자신과 주변에 대해 견딜수 없는 환멸이 찾아왔고, 기존의 삶을 도저히 유지할수 없는 계기가 있었을 거란 정도였다. 맨 정신으로는 살아가기 힘든.
4. 조카, 동생, 술집 여주인, 안경 쓴 남자와 일련의 만남은 그에게 그가 왜 현재의 삶을 택했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그 일들이 한방(대략 2주 사이)에 찾아오는 바람에, 그는 지난 수년간의 삶이(최소 6년, 대략 10년? 15년?), 혹은 치열한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게 된다.
긴 시간 변기를 닦으며 속죄(수행)를 했건만, 그렇게 쌓아올린 마음이 이렇게 한방에 무너져버리고 마는구나. 여전히 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다가가려 하고, 질투하고 좌절하는구나. 그냥 그런 인간의 삶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구나. 그렇게 울고 웃을수밖에 없었구나.
5. 그렇게 폭풍우가 이는 듯한 영화를 봤다. 영화는 결코 잔잔하지 않았다. 야쿠쇼 코지는 치열했다.
대략 여기까지가 페북에 썼던 글. 사실 여기서 할 얘기를 다 하긴 했지만, 한발 더 들어가보려 한다. 역시 결말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분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혹은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도, 이 영화에 대한 좋은 감정만을 갖고 싶은 분도 멈추시기를 권장한다.
물론 이런 해석 역시 개인적인 시각일 뿐이고, 민주적으로 1/n의 가치를 갖는다. 반대로, 빔 벤더스가 어떤 인터뷰에서 어떻게 말했거나 야쿠쇼 코지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든, 그것이 절대적인 해석의 기준일 수도 없다. 이미 해석은 관객의 것이니까.
6. 히라야마는 계속 꿈을 꾼다. 꿈은 흑백으로 묘사되어 확실히 현실과 구분된다.
7. 조카 니코가 찾아온 날, 히라야마는 니코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만치 그가 기존의 가족들을 떠나온 것이 오래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던 그는 이 낯선 소녀가 누군가와 닮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제서야 "니코니?"라고 묻는다.
8. 그날 밤, 그의 꿈에는 니코가 나타난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니코가 아니다. 꿈이라는 것의 속성상, 바로 오늘 처음 본, 지금 위층에서 자고 있는 조카가 나온다는 것은 넌센스다. 이 꿈에 나타난 소녀는 아주 오래 전, 그의 기억 속에 간직되어 있던 소녀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소녀가 왜 니코와 똑같이 생겼을까.
9. 며칠 뒤, 기사가 모는 렉서스를 타고 여동생이 딸을 데리러 나타난다. 여동생은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방문해 보라. 예전처럼 그러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치매 상태일 수도 있고, 그냥 노쇠했을 뿐일 수도 있다. 어쨌든 히라야마의 가출은 아버지와의 심각한 갈등을 전제로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아버지로부터 내쫓김을 당했을 수도, 내쫓기기 전에 그 스스로 떠났을 수도 있겠다. 여기서 히라야마의 '죄'는 가족 내부의 죄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조카의 비밀을 상상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10. 히라야마는 바 여사장과 전남편이 포옹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여사장과 눈이 마주친 히라야마는 맥주 세 캔을 사들고 도망친다. 강가에서 술을 마시는 그를 발견한 전남편(어떻게 히라야마를 찾았고, 어떻게 알아봤는지를 따지지는 말자 ㅎ)은 그와 여사장 사이의 서사를 말해주고, 그녀를 잘 부탁한다고 말한다.
히라야마가 도망쳤다는 것은 그 역시 여사장과의 관계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그림자 놀이는 좀 난감하지만, 결국 인간의 감정과 관계라는 것은 논리와 주장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짙다면 그냥 짙은 것이고, 안 짙다고 하면 안 짙은 것이다. 하지만 그림자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11. 사실 이 영화가 사람들이 말하듯, '소소한 일상의 작은 행복의 소중함'을 말하자는 거였다면, 마지막에 울었다 웃었다 하는 히라야마를 설명할 수 없다. 히라야마는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고, <미션>의 로버트 드 니로가 갑옷 뭉치를 끌고 이구아수 폭포의 절벽을 오르듯, 남의 오물을 씻는 행동으로 속죄를 꾀했다. 가끔씩 '난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다 알아'라는 듯한 몸짓의 노숙자가 악몽처럼 나타나기도 했지만, 어쨌든 조카와의 해후 전까지 그는 자신의 속죄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조카와 여사장의 사건으로 그는 자신의 속죄가 눈속임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울고 웃음을 반복하게 된다. 좌절일까. 좌절만은 아니다. 삶이란 어떻게든 이어질 것이고, 그는 자신의 삶을 이제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미련을 버릴 지도 모른다. 즉 '사는' 것에서 '살아지는' 삶을 이어갈 수도 있고, 속죄 같은 것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깨달음으로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코모레비는 번뇌의 다른 표현일 뿐. 번뇌가 싫어 인간의 삶을 떠났다면(떠날 수 있었다면), 사실은 코모레비도 사라졌어야 한다. 찰나가 영원이고, 영원이 곧 찰나라면 코모레비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리고 나는 이 열린 결말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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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올해는 읽은게 없는데 10권 뽑기가 쉽지 않겠네, 하다가 막상 꼽기 시작하면 12권 정도를 꼽고 나서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올해도 골라 놓고 보니 12권인데 굳이 2권을 잘라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룩백>같은 책만 접하게 된다면야 20권도 고를 수 있겠지만, 어쨌든 먹고 살고, 녹슬지 않으려면 벽돌 책도 읽어야 하고, 어떤 책은 읽다가 던져 버리기도 해야 한다.
연간 50권 60권 80권씩 읽고 별점을 매기는 다독가들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리스트지만 그래도 아직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로 기록을 남긴다. 이 책들 덕분에 올 한해도 꽤 즐거웠고, 침대에 누운 뒤 숙면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들을 참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AI 쇼크, 다가올 미래 (모 가댓)
따로 길게 쓴 글이 있으니 그쪽을 참고하시길 권장. 어쨌든 제프리 힌튼의 경고나 모 가댓의 경고는 거의 비슷한 톤을 갖고 있지만, 가댓의 서술이 훨씬 더 구체적이다. "현재의 인류는 자신을 지적으로 훨씬 상회하는 10대 자녀를 키우고 있는 부모의 상황과 같다. 나중에 그 아이가 커서 그래도 나를 사랑했던 부모로 나를 기억하는 것이 좋을까, 학대하고 의심하고 이용하려고만 들었던 부모로 기억하는 것이 좋을까." AI 에 대해 자고 일어나면 쏟아지는 수많은 사설들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와 닿았던 책.
AI와 인간, 부모-자식의 관계가 될 수 있을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AI와 인간, 부모-자식의 관계가 될 수 있을까
시대의 대세. 장강의 큰 물결인 AI. 뭐라도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것 저것 읽어보고 있다. 그중 는 제목 때문에 별 기대 없었던 책. ‘초대형 AI와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가’라는 부제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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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서스 (유발 하라리)
또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어쨌든 연장선상에서 볼 때' 라는 관점을 고집하는 하라리의 시선은 여전히 설득력이 넘친다. 점토판에 글자를 새겨 넣을 때의 인간은 이미 블록체인을 구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정보의 본질은 네트워킹'이기 때문에 과도한 정보는 해가 될 수 있다는 관점, '인간'과 '이야기'의 연결과 구분에 대한 이야기들은 여전히 우리가 맞아야 할 세계에 대해 유익한 인사이트를 제공한다. (그리고 읽고 나서 잊어버린 <사피엔스>의 여러 관점들에 대한 복습의 의미로라도, 하라리는 계속 책을 써 주면 고마울 것 같다.)
불변의 법칙, 절대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23가지 이야기 (모건 하우절)
개인적인 취향을 묻는다면, '현재 변하고 있는 것'과 '그래도 변하지 않을 것' 중에서 나는 후자의 편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물론 이 책은 '그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네가 앞으로 부자가 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매우 실용주의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는 하지만 꼭 돈벌이만을 위한 책은 아니다. '미래에 어떤 리스크가 있을 것이라고 지금 예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심각한 리스크가 아니다', '평화로운 시기야말로 불안정의 씨앗이 싹트는 시기다' 등, 예사롭지 않은 통찰이 넘친다. 감동적.
불안 세대(조나선 하이트)
왜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모바일 기기를 빼앗지 않을까. 내 생각처럼 모든 학부모들이 이 생각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청소년기에 현재 수준의 모바일 스마트 기기에 노출되는 것이 단지 '새로운 시대의 문명'이라고 이해하기에는 정신적으로 심각한 폐해를 끼치고 소위 '학업'이라고 부르는 분야에 큰 해악을 주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선명한데 말이다. 누구나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이런 이야기들을 하나 하나, 조목 조목 짚어주고 있는 좋은 책. 부디 하이트의 조언에 더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길 바라며.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베릿)
오래 전부터 그런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감정을 갖고 있을까. 그렇든 아니든, 어떤 감정을 말로 접했을 때, 이 단어로 표현된 감정이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사실 이건 감정이 아닌 감각에도 적용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내가 느끼는 '저리다'는 감정이 내 옆 사람이 느끼는 '저림'과 같은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그런 궁금증에 대해 꽤 정리된 답을 주는 책. 지난해의 책이었던 아닐 세스의 <내가 된다는 것>과 함께 매우 추천한다.
우리는 가상세계로 간다 (허만 나틀라)
가상세계라고 부르건, 메타버스라고 부르건, 그것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우리 곁에 있었다. 성경이, 그리스 로마 신화가, 모든 종교의 경전과 민주주의라는 이상이 모두 메타버스의 역할을 해 왔다. 단지 기술의 발달은 그것을 조금 더 받아들이기 쉽게 하거나, 반대로 문턱을 넘기 어렵게 했을 뿐. 어쨌든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결국 그 세계와 함께 살아가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역시 다가올 세계에 대한 하나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책.
히치콕 (패트릭 맥길리건)
영화라는 장르에서 최고라고 인정할만한 장인 두 사람을 꼽으라면 여전히 알프레드 히치콕과 구로사와 아키라를 꼽게 된다(누군들 아닐까 ㅎ). 맥길리건은 그 존경을 흥신소 탐정의 자세로 표현하기로 결정한 듯 하다. 그런데,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을까? 예전에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을 읽었을 때에는 크로키로 슥슥 그린 듯한 묘사에 감동했는데, 맥길리건이 그려년 히치콕에 대해서는 그 정 반대의 치열한 디테일에 감탄하게 된다. 아주 많은 부정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치콕에 대한 애정이 식지는 않았다.
세설 (다니자키 준이치로)
20세기 일본 작가들의 단편은 면도칼 같은 재미를 준다. 한국에선 자주 언급되지 않는 일본 작가들 중에서 나카지마 아쓰시의 <산월기>,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문신>을 읽고 감탄하다가 마침내 우연히 <세설>을 접했다. 1930년대 오사카/고베 지방에서 부유한 상인 가문의 네 자매가 세상의 변화를 맞이하며 삶을 가꿔가는(이 표현을 선택하면서, 여기서 분재나 꽃꽂이를 연상하게 된다) 이야기다.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늘 멀고도 가까운 이웃나라에 관심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함.
세설, 벚꽃이 지는 간사이의 봄날같은.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세설, 벚꽃이 지는 간사이의 봄날같은.
물론 벚꽃철에 교토에 간 적은 없었다. 단지 상상했을 뿐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 세상을 화려하게 뒤덮다 강 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을 노래하고, 그렇게 처절하게 사라지는 벚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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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아마도 성인이 된 뒤에 읽은 책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소설을 꼽으라면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가 분명 세 손가락 안에는 확실히 포함될 것이다(이 애정에 비례해서, 영화화된 작품에 대해서는 저주에 가까운 악감정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 작품과 뭔가 끈을 잇고 싶었던 출판사는 거의 그 제목과 댓구를 이루는 제목을 내놨다. 물론 Sense of an Ending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옮긴 것은 탁월한 감각이라고 생각하지만, 거기에 비해 Elizabeth Finch를 '우연은 비켜가지 않는다'로 옮긴 것은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어쨌거나 이 책을 읽고 나서 여전한 반스 옹의 꼬장꼬장함에 감사 기도를 드렸다. 부디 오래 오래 사시면서 또 좋은 작품을, 한번만 읽고 말 수 없는 작품을 계속 써 주시길.
룩백 (후지모토 타쓰키)
만화가를 꿈꾸는 두 소녀의 이야기. 정확하게 말하면 두 소녀가 모두 만화가를 꿈꾸지는 않았다. 한 소녀는 분명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를 찾고 있었고, 다른 소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소녀가 날개를 펴는데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꿈을 이뤘던 소녀는, 평생의 꿈을 이루는 것보다 자신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비록 너무 늦기는 했지만. (애니메이션도 그리 좋다는데, 현재의 느낌으론 이 만화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다.)
패배의 신호 (프랑수아즈 사강)
사강을 흔히 '통속 작가'라고 부르곤 한다. 이런 종류의 책을 근래 거의 읽지 않은 것은 이런 책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이런 종류의 서사는 읽는 것보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워낙 많이 접하고, 또 그렇게 접하는 데 익숙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10분의 독서가 10분의 시청보다 훨씬 더 함축적이고 상상을 자극한다는 걸 다시 깨닫는 계기가 됐다. 앞으로도 이런 문화가 오래 오래 지속되길.
패배의 신호, 서늘한 섬세함을 즐기려면.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패배의 신호, 서늘한 섬세함을 즐기려면.
1960년대의 파리. 30세 가량의 루실은 50대의 재력가 샤를과 함께 살고 있다. 한때 사교계의 여왕이던 40세의 디안은 10년 어린 미남 앙트완을 사귀는 중. 어느날 이들은 모두 상류층 사교 모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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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와의 랑데부 (아서 C 클라크)
이 책 때문에 꽤 비슷한 주제인 <유년기의 끝>과 사실 별 공통점 없는 주제인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 오지 않은 일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멈추면 안 된다는 자극과 함께, 여전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이야기를 읽고 상상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역시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유익하다고 생각했지만 올해의 책까지는 아니었던 <더 커밍 웨이브 (무스타파 술레이만)>, 즐겁게 읽은 책으로 <사랑인줄 알았는데 부정맥(실버 센류 모음집)>, <한국 요약 금지(콜린 마샬)>, <키르케(매들린 밀러)>,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김기태)> 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채식주의자(한강)>를 다시 읽은 것도 2024년의 기억할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 전에 이 책을 접할 때의 내가 얼마나 부실한 독자였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다.
세설, 벚꽃이 지는 간사이의 봄날같은. (1) | 2024.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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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를 읽고 (2) | 2023.08.27 |
물론 벚꽃철에 교토에 간 적은 없었다. 단지 상상했을 뿐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 세상을 화려하게 뒤덮다 강 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을 노래하고, 그렇게 처절하게 사라지는 벚꽃의 부질없는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부질있다'는 말이 왜 없겠나. 부질없는 것은 그걸로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강을 분홍색으로 메우고 떠내려가는 벚꽃 꽃잎을 볼 때 문득 '우키요에'라고 읽는, '浮世絵'의 한자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저러나, 이 포스팅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을 읽은 이야기다. 예전에 페이스북에 썼던 글을 대략 고침.
1. 일본에선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몇년 더 살았으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고 한다. 다니자키는 1965년에 죽었고, 3년 뒤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왔다.
2. <설국> 대신 노벨상 수상작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세설>을 읽었다. 묘하게 둘 다 눈이다.
3. 1930년대, 고베의 몰락한 무사 가문의 네 딸들(실제로 등장인물의 역할을 하는것은 그중 세 딸)이 세상의 변화 속에서 각자의 삶을 가꾸어 가는 이야기다.
4. '가꾸어 간다'는 부분에서 뭐라 쓸까 잠시 망설였다. 그 자리에 개척한다든가 영위한다든가, 버틴다든가 이겨낸다든가, 다른 어떤 말을 넣어도 이 작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 여인들은 그야말로 정교한 자수를 뜨듯, 화병에 꽃을 꽂듯 자기 삶을 꾸며간다, 는 느낌이 든다.
5. 다니자키가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때(1943년)의 나이가 57세. 이 작품을 쓰려고 수십년간 여자들의 세계를 곁에서 관찰한 듯한 치열함에 감탄하게 된다. 대체 어떤 작가가 저 나이에 이 정도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여자들 이야기를 쓸수있단 말인가.
6. 바로 그 디테일의 재미가 기막히다. 간사이-간토의 묘한 자존심 싸움이랄까 하는 감정과 당시 풍물이 너무나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 그 시절의 일본에서 그럴듯한 집안들은 혼사를 앞두고 흥신소를 동원해 상대방의 레퍼런스체크를 거의 수사하듯 진행했다. 유전병, 전처의 사인, 전처 소생 아이의 성격까지 철저한 체크.
- 혼인 당사자가 얼굴을 보는 맞선 정도는 흔한 풍습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퇴짜를 놓는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진 반면 어떤 이유를 대도 여자가 퇴짜를 놓는건 원한을 남겼다.
- 당시 일본에서는 이모와 언니를 가르는 촌수에 예민하지 않아 젊은 이모는 언니라고 부르기도 했다.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회사의 일본 직원에게 물어보니 요즘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한다.]
- 외래 문화에 민감한 고베 지역 상류층의 특징인지 모르지만 이미 이 시절에도 생선회와 화이트 와인을 곁들이는 건 매우 자연스러웠다. [고베는 지금도 이진칸이라는 20세기 초 외국인 거주 지역이 관광 명소로 남아 있을 정도로, 외국 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일찍부터 수행했다. 지금도 양과나 양식 요리의 수준이 높다고 일컬어진다.]
- 간사이에선 역시 도미. 참치는 상스러운 생선이라 해서 고급 스시야에선 취급하지 않았다. [기름진 참치, 특히 오도로를 맛있다고 먹기 시작한 것은 육고기의 지방을 받아들인 뒤의 일이라고 한다.]
...등등
7.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 지금까지 최소 3회 이상 영화화됐다. 가장 유명한 것이 1983년판인데, 그 유명한 요시나가 사유리가 세째 유키코 역을 맡았다. 당시 38세. 아직 사진만 봤지만 '30대 초반인데 다들 20대로 보는 일본풍 미인' 유키코 역에 너무나 잘 어울린다. 이 1983년작은 구미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Makioka Sisters 라는 제목으로 꽤 매니악한 인기를 모으고 있다고 전해진다. [네. 지금은 영화를 구해서 봤습니다.]
오른쪽부터 장녀 쓰루코 역의 기시 게이코, 차녀 사치코 역이 사쿠마 요시코, 3녀 유키코 역의 요시나가 사유, 4녀 타에코 역의 고테가와 유코. 셋째 역의 요시나가 사유리야 말할 것 없는 일본 영화의 전설이지만, 둘째 사치코 역을 맡은 사쿠마 요시코 (佐久間良子) 도 전 세대의 톱스타였다고 전해진다. 원작에도 셋째는 일본적인, 다소 수동적인 태도의 미인이지만 둘째는 활짝 피어난 미인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셋째의 맞선 자리에 "웬만하면 언니는 나가지 않는게 어떨까"라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
영화를 본 소감: 1983년작 <세설>은 물론 2권의 책을 한 편의 영화로 만든다는 부담 때문에 상당 부분을 덜어낸, 다소 다이제스트 판 같은 느낌의 작품이지만 그래도 화려한 기모노 패션과 당대 간사이 상류층의 분위기를 잘 살린 수작이라는 느낌. 캐스팅도 좋고 바로 그 '벚꽃 지는 시절 교토'의 풍광과 함께 사라진 시대의 미감이 훌륭하다.
그런데 각색에도 참여한 이치가와 곤 감독은 작품의 해석에서 상당히 큰 월권을 저지른다. 40년 전의 작품을 놓고 스포일러 타령을 하는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결말을 알고 싶지 않은 분은 여기까지만.
영화판에서는 사치코의 남편, 그러니까 유키코의 형부와 유키코가 내연의 관계인 것으로 묘사된다. 영화 중간에 두 사람이 묘한 애정 표현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를 우연히 사치코가 목격하지만 남편과 의 좋은 여동생의 관계를 자신이 오해(?) 해서 문제를 만드는 것이 오히려 큰 죄라고 느끼는 듯 덮어 버린다. 그리고 마침내 노처녀 유키코가 배필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되자 형부는 혼자 요리집에서 술을 시켜 마시며 처제에 대한 그리움의 눈물을 흘린다.
원작에서 그런 뉘앙스를 굳이 찾으려면 찾을 수도 있겠으나, 영화처럼 노골적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묘사한 부분은 없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혹시 발견하신 분 있으면 알려주시길). 이건 좀 너무한게 아닌가 싶은데, 뭐 이 정도는 각색자의 권리라고 한다면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개취로 뽑아본 2024년 10권의 책 (3) | 2024.12.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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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상 18개 부문 수상. 디즈니 플러스 <쇼군>이 엄청난 기록으로 미국 TV 역사에 발자국을 남겼다. 쇼군 이야기는 지난번에 한번 쓴 적이 있지만, 사실 나오자마자 보지는 않았다. 이 드라마를 늦게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여주인공에게서 고전적인 일본 미인의 느낌을 받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쇼군, 미국이 만든 '할복하는 일본인'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누가 뭐래도 2024년 <쇼군>의 주인공인 애나 사와이는 전통적인 일본 미인상이라기 보다는 하와이-폴리네시안 얼굴로 보였다. 이런 얼굴이 마리코 역을 맡는다는 것은, 왕년의 마리코 역을 연기한 시마다 요코에 대한 모욕이라는 느낌이 살짝 들 정도라...
혹시 영상이 궁금하신 분은 이쪽
아무튼 앞의 글, <쇼군(2024)>에 대한 글에서 제임스 클라벨의 베스트셀러 소설 <쇼군>은 1975년에 출간됐고, 미국에서 1980년 NBC 5부작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져 히트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1980년 버전의 미니시리즈, 그러니까 내가 1981년 종로 피카디리 극장에서 극장판으로 본 그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도대체 나는 그때 그걸 왜 보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1980년 12월25일자 매일경제 지면에는 베스트셀러 집계 단신이 실렸다. 국내 소설로는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이 1위, 국외소설로는 제임스 클라벨의 <장군>이 1위였다. 클라벨의 <장군>, 즉 <쇼군>은 일단 미국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고, 일본으로 역수입되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물론 미국에서는 진작부터 이걸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명목상의 주인공인 파란 눈의 사무라이 안진 역에는 리처드 체임벌린이 캐스팅됐다. 체임벌린으로 말하자면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잘 나가던 TV 스타 중 하나라고 불러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쇼군>으로 골든 글로브 TV 부문 남우주연상을 꿰찼고, 3년 뒤, 한국에서도 많은 시청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가시나무새>를 통해 다시 한번 같은 상을 차지했다. 오죽하면 공식 별명이 '킹 오브 미니시리즈'다.
당시 미국 TV에서 가장 핫한 장르는 '미니시리즈'였다. <달라스>나 <다이내스티>로 잘 알려진 이 장르는 짧으면 4부작, 길면 10부작 정도의 길이로 영화 못잖은 제작비를 투입해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볼거리를 제공했다. <쇼군>이나 <가시나무새>은 물론이고, 그 시절 한국 시청자들의 기억에 생생할 대표적인 미니시리즈들로는 남북전쟁을 그린 <남과 북>, 파충류 외계인의 지구 공격과 레지스탕스의 활약을 그린 <V>, 닉 놀테-피터 슈트라우스 형제를 스타로 만든 <야망의 계절>, 시드니 셀든 원작의 <내일이 오면> 등이 있었다.
극장용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조금 모자라지만, 일반적인 TV 드라마 배우들보다는 지명도에서 앞서는 배우들이 딱 이 장르의 주인공 감이었다. 한국 TV의 드라마 장인들도 이 장르의 영향을 받아 1990년대부터 '미니시리즈'라는 이름의 드라마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한국에선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다 보니 16부작이 기본 틀이 되었다. 그래도 핫한 배우들이 나오고, 보다 젊은 시청층을 겨냥하고, 일반적인 드라마보다 훨씬 큰 제작비를 투입한다는 면에선 같은 맥락 위에 있었다.
아무튼 체임벌린은 이 영역에서 가장 빛났던 배우다. 그는 대형 스튜디오들이 억대 예산을 투입할 만한 배우는 아니었다. 할리우드 빅 스타들이 총출동한 대작 <타워링>에도 출연했지만, 그의 역할은 꼴사납게 구명대에서 떨어져 죽는 악당 사위 역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TV에서는 에미상 남우주연상 후보로 4차례나 노미네이트되는 거물 대접을 받았다. 그 시절엔 TV 배우(한국식 영어로는 '탤런트'?)와 영화 배우사이에 매우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영화 <타워링> 출연진을 한 자리에 모은 사진. 위 사진의 배우들 이름을 7명 이상 댈 수 있다면 1950~70년대 대중문화에 대해 뭔가 한마디 해도 좋은 사람으로 인정한다. 왼쪽부터 스티브 맥퀸, 로버트 와그너, 페이 더너웨이, 윌리엄 홀든, 제니퍼 존스, 프레드 아스테어, 폴 뉴먼, 리처드 체임벌린, 로버트 본, 그리고... O.J. 심슨. 모두 다 설명하려면 각각 한 문단씩은 충분히 채울만한, 당대/전세대의 슈퍼스타들이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영화 <솔로몬 왕의 보물>과 그 속편(무명 시절의 샤론 스톤이 나온다)을 매우 재미있게 봤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가 아라미스 역을 맡았던 <삼총사>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영화 커리어의 실패는 좀 안타깝다. (여담이지만 그 많은 그의 TV 미니시리즈 주연작들 중에는 뒷날 영화로 리메이크돼 대박을 친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도 있었다. 이 오리지널 시리즈도 매우 재미있었던 기억.) 만년엔 커밍아웃을 하고 이런 톱스타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성 정체성(!)을 꼭꼭 감춰야 했던 아픈 추억을 털어놔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사실 세계 영화계를 기준으로 하면 체임벌린보다 도라나가 역의 미후네 도시로가 훨씬 더 슈퍼스타였을 것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몬>,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등 칸 영화제를 휩쓴 걸작들 덕분인데, 이런 명성에서 한국은 분명 예외였다. 철저한 일본 영화/음악에 대한 금수 조치 때문에, 아마 <쇼군> 당시 국내에서 이런 영화들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유학생들 외엔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비디오 테이프도 구할 수 없던 시절이다).
한국 관객들이 그나마 미후네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진주만 기습을 다룬 <토라 토라 토라>나, 알란 들롱과 공연한 <레드 썬> 등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왕년의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영화광들이 아니라면, 굳이 '자막 붙은 영화'를 볼 이유가 없었던 미국의 일반 관객들에게는 그냥 마토(Mato)나 별 차이 없는, '영어 못하는 동양인 배우'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쇼군>은 미후네가 한국 팬들에게 처음으로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53년생인 시마다 요코는 이때까지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톱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본도 '할리우드의 주목'에는 열광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이었고, 시마다 요코는 체임벌린과 함께 골든 글로브 미니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 덕분에 일약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일본 TV는 <쇼군>을 수입 방송하면서, 매회 시마다 요코를 기용, 시청의 편의를 돕는 '해설'을 제작해 덧붙이기도 했다.
그 뒤로도 미모와 지성(?)으로 주목받은 요코였지만 사생활에서 유부남과의 관계, 알콜 중독으로 인한 파산,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한 누드 사진집 발간, 만년엔 58세의 나이로 성인용 비디오 출연 등 파란만장한 사건사고를 기록하며 69세로 삶을 마감했다. 비운의 스타라 할만 하다.
아무튼 이야기는 다시 한국으로. 당초 일본에서도 1980년 11월 극장판이 먼저 공개되었고, 한국에서도 상영될 수 있을까에 대해 관심이 쏟아졌던 느낌이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가당치 않은 얘기였다. 1962년, 한국 정부는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영화 <콰이강의 다리> 상영을 불허한 적이 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들을 상대로 가혹행위를 벌이는 이야기가 한국인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는 이유에서였는데, 당연히 지식인들이 "그게 말이 되느냐"는 집단 항의에 나섰고, 결국 이듬해 상영이 허락되기도 했다.
그만치 한국 사회에서 '왜색'이라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범죄였다. 한국 영화에 한국 배우들이 일본 의상을 입고 일본인으로 출연하는 것은 허용이 되었지만(물론 그래봐야 왜구 역이나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왜군 역 들, 혹은 개화기 조선에 들어와 여기저기서 폐를 끼치는 낭인들 정도), 미국 혹은 다른 나라 영화라도 일본적인 느낌이 나는 영화들은 아예 수입사들이 처음부터 시도를 안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그 수많은 닌자 영화, 사무라이 검술 영화들이 한국에서 전혀 공개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런데 <쇼군>의 경우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980년부터 미국에서 드라마로 방송된 <쇼군>이 엄청난 화제작이라는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더니 1981년에는 수입추진중이란 이야기가 돌았고, 개봉이 결정된 뒤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시마다 요코가 내한해 영화를 홍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요즘 같으면 상식적인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 길이 없다.
그리고 1981년 12월26일,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물론 저때에는 저걸 <쇼군>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당연히 <장군>이지.
솔직히 수입업자들의 촉으로는 당연히 수입해서 상영관에만 걸리면 대박이 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다음으로 이 영화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한국 관객들이었을테니 말이다. 소설 <쇼군>은 물론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지식인의 필독서'였던 시절. 게다가 전 중장년층의 80~90%가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일본어 회화 가능자들(즉 은근히 일본 문화에 대한 향수가 어딘가에 남아 있는 분들).
물론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그리 듣던 만큼 대단한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는 좀 심심하기도 했고(대규모 전투신 같은 것도 전혀 없었고, 내가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수준도 아니었다는 얘기다), 일본의 쇼군 이야기라더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디 가고, 들어본 적도 없는 도라나가가 주인공이냐는 의아함도 있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일본 역사나 문화를 깊이 있게 접해 볼 기회가 없었던 젊은 관객(나다)들에겐 대체 영화 속의 정치 상황이 어떤 것인지, 마리코가 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지 등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리코의 실제 모델은 아케치 다마 혹은 호소카와 카라샤 라고 불리던 인물.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이다. 호소카와가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대역죄인의 딸이라 마땅히 죽었어야 할 몸이지만 이미 출가외인이고, 호소카와 가문은 아케치에게 동조하지 않고 맞선 공이 있어 '멀리 유폐' 되는 선에서 끝났다.
아무튼 그래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기독교에 투신하고, 뒷날 호소카와 가문이 도쿠가와의 편에 서자 이시다 미츠나리가 가라샤를 인질로 잡기 위해 군대를 보냈는데, 이때 포로 되기를 거부하고 폭탄에 불을 붙여 장렬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쇼군>의 마리코와 상당 부분 행적이 일치한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실제 모델이 있었는지, 아케치 미쓰히데가 대체 누구인지, 남편과는 왜 사이가 나빠졌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봤으니 당최 이해를 하지 못했다.)
물론 재미있게 본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당시 청춘/틴에이저 영화로 유명했던 문여송 감독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감상문을 보면, 마침내 금기를 뚫고 극장에서 일본 문화를 접하게 된 감회가 넘쳐 흐른다.
'마리코는 분명 블랙슨의 침실에 침입했다. 그러나 뒷날 간밤에 침실에 침입했던 여자는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보낸 하녀였다고 시침떼는 장면은 모든 관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쇼군에서 느낀 것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내가 늘 갈구하던 영화 에로티시즘의 한 단면, 어떤 기교를 다시 한번 생각케 했다. (1982. 2. 4. 동아일보)'
그랬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장면은 2024년에도 그대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재현되었다. 아무튼 그때 그 <쇼군>이 부활해 에미상을 휩쓰는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참... 감회가 새롭다. 어쨌든 왕년의 <쇼군>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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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식 문화가 한국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건 사실 상식이다. 19세기 개항 시절부터 해외 문물의 도입에 워낙 적극적이었던 일본. 온갖 나라의 온갖 식재료와 기술이 세계적인 대도시 도쿄로 몰려든 결과일테고, 1980년대 버블 시대를 거치며 그 모든 취향이 여러 단계 업그레이드됐을 터.
(이런 '취향'의 허세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라고 생각한다. 읽어 보신 분은 잘 아실 터. 세기말적인 허세와 극도로 발달한 욕구가 '정말 이렇게까지 했다고?'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버블 시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어쨌든 서울에도 정통 나폴리식 피자를 굽는 집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얼마 전 '이탈리아인' 알베르토 몬디 군이 '아시아 최고의 피자'라고 극찬한 집이 도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또 도쿄를 가는 김에, 그럼 그런 집은 가 봐야지. 점심에는 예약을 받지 않아 상당한 웨이팅을 각오하고 고고.
웨이팅을 각오하는 이유 중 하나는, 피자집 '리스토(Risto)' 자체도 핫하지만 피자집이 있는 곳이 바로 도쿄의 최신 핫플레이스 아자부다이 힐스이기 때문. 현재 세계에서 가장 핫한 건축가인 토마스 헤더윅의 헤더윅 스튜디오가 설계한 곳. 안 그래도 한번 가봐야겠다 싶었는데, 바로 이렇게 기회가 생겼다.
일류 건축가들이라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헤더윅의 스타일은 뭔가 자연과의 공존에 무게를 두는 느낌이 짙다.
아자부 언덕을 올라가며 구축된 건물들이다 보니 뭔가 능선을 연상시키는 그런 설계.
명품 샵들이 그득한, 3층 정도의 건물들이 언덕 아래에서부터 죽 줄지어 올라가고(가 보면 실제로 건물들이 언덕을 기어올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덕을 꽤 올라간 곳에 메인 빌딩인 타워 플라자를 비롯, 몇개의 건물들로 둘러 싸인 중앙 정원이 나타난다.
어느새 그 정원의 명물이 된 크레페 가게.
3층으로 올라가면 리스토가 나온다.
오픈 직전에 도착. 줄은 서 있지만 대기 없이 앉을 수 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화덕. 뻬뻬가 화덕이란 뜻은 아니겠지?
피자 가격은 대략 저 정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비싼 거 인정. 시그니처인 별 모양 피자와, 하루 5개 씩만 만든다는 한정판 피자를 시켜봤다. 그게 뭐지.
"나폴리에선 와인을 피자 안주로 먹나?"
"아뇨. 이탈리아 사람도 와인이랑 피자는 같이 잘 안 먹어요."
"그럼 뭘 먹어?"
"대개 맥주랑 먹죠."
오호. 이딸리아에서도 피맥이 정석. 알베군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암.
주방장 특선 모듬 전채. 프로슈토, 모짜렐라, 말린 토마토 등등. 맛난 것들.
그리고 시그니처 별 피자. 물론 내용물은 아주 충실한 나폴리식 마르게리타 피자다.
당연히 맛있는데, 아주 충실하게 맛있다. 그리고 저 별의 뿔 모양 손잡이 속까지 매콤한 양념이 잘 되어 있다.
이것이 한정판이라는 Il futuro della salsiccia e friarielli. 생 소시지를 까서 채소와 함께 마구 볶은 뒤 반죽에 녹아들게 해서 같이 구운 피자. 맛있다. 뭐라 더 표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대책없이 맛있다.
아쉬워서 시켜 본 봉골레. 양이 너무 치명적이긴 한데, 저 국수가 믿을 수 없게 맛있다. 국수가 바지락과 홍합의 맛을 쪽쪽 빨아들인 그런 맛. 국수라기보다는 길게 늘인 수제비를 먹는 맛? 놀랍다.
그리고 나폴리탄 라구 파스타를 더 먹었는데, 이건 너무 맛있어서 그랬는지 사진찍는 걸 잊었나보다. 없어짐.
점심을 두둑하게 먹고 아자부다이 힐스의 상징 같은 뚜껑 아래서 크레페로 마무리.
총평: 아자부다이 힐스는 괜찮은 피자집이었다. 좀 비싼 것만 빼면 아주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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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탄다(五反田)은 훈독과 음독이 섞여 있어서 일본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지명이라고 들었을 뿐, 거기 뭐가 있는지 알 일이 없었다. 한번 이쪽에 호텔을 잡으려 했더니 밤에 좀 시끄러울 수 있다고 해서 피한 정도.
그런데 육식 대가들께서 이 동네가 의외로 맛집이 많다고 하심. 직장인들이 많아서 점심 먹으러 오기 좋은 곳인가? 아무튼 육타 오너 이남곤 셰프의 '인생 함박스텍'이라는 추천을 듣고, 불원천리 달려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이렇게 생긴 입구. 바로 왼쪽에 대기석이 넉넉하게 확보되어 있는 것이 '우리는 줄 서는 가게'라는 자부심을 돋보이게 한다.
(야외 좌석 아님)
메인은 누가 뭐래도 함박스텍. 와규 100%를 자랑하는 집이다 보니 함박스텍과 비프 스테이크의 병합 상품도 여러가지 눈에 띈다. 평소같으면 병합 상품에도 관심을 가질만 하지만, 이른 저녁 예약이 기다리고 있는 터라 눈물을 머금고 함박스텍만 시키는 것으로.
그런데 일행은 3명인데 이 식당의 함박스텍 종류는 4가지다.
"그래도 네개 다 시켜봐야겠죠.?"
"그럼요."
대강 이런 분위기. 아주 작지도, 아주 크지도 않은, 딱 맛집 사이즈.
먼저 샐러드를 준다.
뭐.... 샐러드다.
가장 먼저 나온 1호.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다. 체다 치즈를 얹은 함바그와 데미그라스 소스라는 정통의 조합. 가지, 당근, 구운 감자, 매쉬드 포테이토, 머리 뗀 숙주가 같이 익어가고 있다.
사실 모든 함박은 거죽만 익힌 레어 상태로 서빙되기 때문에, 더 익히고 싶은 사람은 저 상태에서 반으로 갈라 아직도 쩔쩔 끓는 철판에 익혀야 한다.
2번. 계란 후라이를 얹은 함바그에 야자와 소스. 먹어 보니 우스터 소스와 간장의 조합 같은 느낌이다. 간장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좋은 선택일수도.
아, 여기에 공기밥과 미소시루가 나온다.
3번 조합. 모짜렐라 치즈를 얹은 함바그와 토마토 소스.
4번은 소바 장국에 많이 넣는 간 무(오로시)와 폰즈 소스. 느끼한걸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선호할 수도.
개인적으로 3번-1번-2번-4번의 순. 다음에 다시 갈 의사는 매우 크고, 만약 다시 간다면 토마토 소스와 데미그라스 소스 중에서 고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 사진의 모델과 똑같이 생긴 종업원이 서빙을 하고 있다. '혹시 이 가게 모델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차를 불렀는데 차가 엉뚱한 위치에 있다고 그 위치까지 달려가서 차를 다시 잡아 준 기타야마상, 감사합니다.
그 밖에도 서빙이 세련되고 친절한 가게.
그리고 식사 후에는 누구나 다 가는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을 이제야 처음 가 봤다.
(내가 얘기했잖아. 도쿄 잘 모른다고.)
눈길을 끈 것은 아사노 타다노부의 화집.
제목 자체가 Gaps in the film, 촬영 중간중간 짬 날때마다 그렸다는 얘기 아닌가.
워낙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더 호감이 가네, 이 아저씨.
서점에 왜 이런게? ;
아무튼 이런 서점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고 나서 한 10년 전, 이 츠타야 서점이 생기기 전에 이 동네를 와 봤다는 걸 기억해냈다.
아무튼 도쿄는 계속 발전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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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일본 민예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안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18년에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정병모 선생이 민화에 대해 강연을 했고, 그때 마침 현대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던 민화 전시회에 갔는데, 전시 작품 중 몇몇이 도쿄에 있는 '민예관'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예관이 뭐야, 찾아보니 그 유명한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사설 박물관의 이름이었다.
뭔가 마음 속에서 비밀의 문 하나가 열리는 느낌...이었다면 과장일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 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어렴풋이 '한국적 미감에 깊은 애정을 보인 일본인'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게 다였다. 그가 설립한 민예관이라는 곳이 도쿄에 있고, 거기에 수많은 한국 미술품들이 있다는 것까지는 듣보도 못한 일이었다.
물론 야나기에 대해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전통 미술에 대해 특유의 선입관을 갖게 했다', 혹은 '결코 진심으로 조선의 독립을 지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또한 식민 통치의 한 측면이었다'는 식의 비판도 있다. 이를테면 야나기는 조선사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어둡고 비참한, 사대를 강요당한 역사로 보았고, 조선의 미술이 한의 미술, 혹은 비애를 짊어진 미술로 드러난 것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야나기의 '진심과 애정'이 바로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려 했던 소위 문화통치의 도구로 쓰였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당시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있던 조선의 암울한 상황과, 그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야나기에게 보인 호의를 생각하면, 오히려 후대 사람들이 무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시대의 한계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야나기 이전에는 과거 한국인이 이룩한 미적 작업 중에서도 백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미학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스스로를 자각할 능력이 없었다고나 할까. "깨진 사기 조각, 항아리 조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여겨졌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백자나 사발 같은 서민적인 작품에서 미감을 느끼고, 그것을 '백성의 예술', 즉 '민예(民藝)'라는 이름으로 불러 준 사람이고, 무엇보다 1924년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 미술관의 존재, 특히 그 이름에 '민족'이라는 것을 넣는 데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문화통치 시기였기 때문에 박물관 자체를 막지는 않았고, 1945년까지 존속됐다. 해방 이후 서울에 있던 대부분의 소장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넘겨받았다.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일 것 같고, 왜 일본민예관이라는 곳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것 같다. 구글 지도에서 일본민예관의 위치를 찾아봤다.
사실 일본을 꽤 오갔지만 일본어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정작 도쿄에는 어디에 뭣이 있는지 잘 모른다. 도쿄는 놀러 가기보다는 거의 출장으로 간 탓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쓰기 힘들었고, 근래 휴가로 일본을 갈 때에는 홋카이도와 큐슈를 번갈아 다녔기 때문에 자유롭게 도쿄 곳곳을 오갈 수 있었던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시부야 역에서 전철과 도보로 10여분 정도. 생각보다 변두리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번 여행 날짜를 잡고 나서 일본 민예관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 특별전.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가 걸려 있는 거다.
아무 근거 없지만 이건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 (물론 뇌과학자 모 선생님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하셨지만 ㅎㅎ)
왠지 이때를 놓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스케줄을 뽑았다. 일본 민예관이 있는 동네는 시부야구에서도 대략 고급 주택가로 알려진 고마바(駒場) 지역이다. 앞서 지도에서 보듯 도심에서 그리 크게 떨어진 것도 아닌데, 일반적인 도쿄 여행자들의 동선과는 별 교차점이 없다.
시부야 역을 경유하지 않고 가는 방법. 도심에서 전철 치요다센을 타고 요요기우에하라 역에서 내리면 시부야구에서 운영하는 하치코버스(일종의 마을버스)가 다닌다. 요금 100엔.
요요기우에하라 역에서 시부야 역 방향으로 세 정류장을 가 우에하라 2초메 미나미에서 내린 다음, 고마바 지역에서 10분 정도 주택가 골목을 걸으면 일본 민예관이 나온다.
한적하고 곱게 단장된 길. 양쪽의 집들이며 주차된 차들을 보면 꽤 사는 분들이 사는 동네 맞는 듯.
좁은 길을 사이로 일본 민예관과 야나기 무네요시가 살았던 집이 마주 보고 있다.
매표소에서 1100엔짜리 표를 끊으면 두 장의 표를 준다. 한장은 서관(야나기 본가) 관람권, 하나는 민예관 본관 관람권. 서관은 4시까지만 개방하니 그쪽을 먼저 보고 오라는 안내까지 해 준다(본가는 개방하지 않는 날도 많다).
사실 서관은 딱히 큰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늑하고 곱게 단장된 2층집. 고아(古雅)하다는 말이 절로 느껴진다.
특히 서재가 좋아 보였다. 볕 잘 들고 통풍도 좋을 듯한 넓은 창, 단단하고 기대기 좋을 듯한 넓은 책상, 벽 둘러 쌓인 책장. 지금이라도 그 서재에 들어가 앉으면 일어서기 싫을 듯한 방이다.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 두었으면 좋으련만, 집 전체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라 아쉽지만 그냥 집을 나서야 했다.]
본관 전시. 역시 2층 집인데 보기보다 앞뒤로 넓은 집이었다. 전시 소개 포스터/도록의 표지가 모두 같은 그림이다. 사진 위의 맨 왼쪽, 가는 풀 문양이 그려진 청화백자 각항아리가 바로 야나기가 처음 조선 백자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바로 그 작품이라고 한다. 아래쪽 전시 광경은 조선민족미술관의 전시실 사진.
1층에선 이번 특별 전시와 별 상관 없는 유럽 공예품 등의 상설 전시중. 2층으로 올라가자 가장 눈길을 끌 만한 공간에 깨진 도자기 파편들이 정성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조선에서 넘어 온 것들. 대체 이걸 왜 전시해 놓았을까.
굳이 말하자면 '내가 눈여겨 보지 않았어도 당신들이 이 다음에 보게 될 명품들을 명품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라는 공치사일까. 내가 손대기 전에 이 귀물들이 얼마나 천대받고 있었는지 직접 보라는 뜻일까. 이 생각 자체가 유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설사 그런 공치사라 해도, 충분히 인정할 만한 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듣던 대로 민예관 전체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고, 이번 전시에서는 대략 대여섯 점 정도만 촬영 허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나마도 평소보다는 후한 것이라고 한다. 도자기에 대단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기 전 도서관에서 '일본 민예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도자기 일람'을 한번 살펴봤다. 가장 관심이 간 작품은 이런 것들이었다.
코믹한 표정의 민화풍 호랑이가 떡 자리잡은 백자 항아리.
그리고 세상에 이런 백자가 있나 싶었던 3중 찬합.
다행히 이번 전시품 중에 둘 다 있었다.
민화 속 호랑이가 그려진 백자동화호문호는 그리 섭섭지 않은 크기였고, 백자청화채찬합은 과연 찬합으로 쓸 수 있었을까 싶게 작았다. 찬합이란 용도대로라면 어른 한끼분 정도의 반찬을 담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어쨌든 한국 백자 중에서 저렇게 전체를 푸른 색으로 칠한 그릇은 처음 봤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두개만으로도 이 전시를 보러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만 했다.
그밖에 사진 촬영이 허가됐던 품목들은 이렇다.
이 자기들을 설명하는 표찰(사진 오른쪽 아래를 보듯, 작품 이름을 설명해 놓은 것 외에는 아무 해설이 없다) 중 상당수에 염부(染付)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는데, 이 염부가 청화백자의 청화를 뜻하는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일본어로는 소메츠케라고 읽는다.
이건 금사리 자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8세기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뜻. 즉 한국식으로 저 표찰을 읽으면 '난초 문양과 글자가 들어간, 금사리에서 구워진 청화백자 항아리' 라는 뜻이다.
포도줄기와 잎이 그려진 청화백자 항아리.
여기엔 또 염부에 진사까지 붙은 염부진사 染付辰砂 라는 설명이 있다. 뒤의 화조문면취호(花鳥紋面取壺)라는 것은 꽃과 새가 그려진 각진(面取) 병이라는 뜻인데, 왜 굳이 병(甁)이 아닌 항아리(壺)라고 썼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대체 염부진사가 뭘까. 물론 찾아보면 다 나온다.
염부진사(染付辰砂)란 일본어로 소메츠케 신슈, 요즘 우리가 쓰는 용어로 하면 청화(靑華)+동화(銅畵)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즉 백자에 청색 안료를 넣은 청화, 산화철을 넣은 철화처럼 산화동을 넣어 그림을 그린 백자를 동화라고 부른다. 즉 대부분의 봉황 몸체는 청화로 그려 푸른색이고, 벼슬과 날개 일부에 산화동을 이용해 붉은 색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소메츠케 신슈라고 설명한 것.
이 봉황문 항아리도 도록에서 먼저 보고 실물이 궁금했던 것이라 감회가 깊었다.
반면 위쪽의 꽃 그림 병은 산화동으로만 그렸기 때문에 신슈(辰砂)라고만 쓰여 있다. 진사초화문병.
그러니까 이 특별전 중에서 가장 아껴둔 물건들을 이 특별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그중에서도 몇개를 골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두고 있었다. 언뜻 봐도 참 좋은 물건들인데, 이 물건들을 눈으로만 보고 오려니 참 아쉽기 짝이 없었다. 물론 도록도 샀지만, 도록은 대부분 흑백이라...
못내 아쉬워서 휴식공간 앞에 있던 장식장을 한장 찍어 봤다.
가운데 줄 왼쪽이 바로 가기 전부터 보고 싶었던(위에서 언급한) 3중 찬합이다.
휴식공간 바깥쪽의 항아리들. 뭔가 어린 시절 집집마다 있던 장독대가 생각나 정겨웠다.
일본 미술관에 가면 언젠가부터 이런 테누구이(手拭)들을 눈여겨 보게 된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 몇개 사도 큰 부담이 없는. 그런데 예쁘다. 도록과 함께 기념품으로.
어느새 문 닫을 시간이 된 미술관. 간혹 한국에서도 전시하고, 수집 과정부터 '일제가 강탈해 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물건들이지만, 그래도 남의 손에 있는 것이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곧 또 만나게 되길.
P.S. 조선민족미술관 100주년 기념 전시는 8월25일까지 진행된다니 그 사이 도쿄에 가실 분들은 짬이 나면 들러 보시길. 결코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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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뭘 하는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수용소에서 일하는 독일군들은 당연히 수용된 유태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특히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는 아내 헤드윅(잔드라 휠러)과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수용소 담장 바로 밖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뜰에는 넓은 잔디밭과 꽃들이 우거졌고, 마당에는 아이들을 위한 수영장이 있었다. 가족들은 여름이면 부근의 강에서 수영을 했고, 저녁때면 마당에 간단한 파티 테이블을 차려 놓고 의자에 기대 지는 해를 바라보곤 했다. 그 석양을 배경으로, 아우슈비츠에서는 거대한 굴뚝이 밤새 연기를 뿜어냈다...
2. 영화는 회스 부부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마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소름끼치게 보여준다. 회스에게 유태인 학살은 음식쓰레기 배출이나 수돗물 공급과 마찬가지로, 처리해야 할 업무일 뿐이었다. 아내 헤드윅은 유태인 포로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유태인들로부터 빼앗은 옷가지와 각종 물품을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 쓴다. 반면 자신들의 자녀와 가족에 대해서는 너무나 자애롭고 헌신적인, 훌륭한 부모다.
이들의 관심사는 이 평온하고 풍요로운 삶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뿐. 헤드윅은 회스가 아우슈비츠 소장직을 그만두게 될 때 "나는 여기서 떠날 수 없어!" 라며 흥분하고, 회스는 어떻게 하면 상부의 신임을 얻어 소장직을 되찾고, 헤드윅을 실망시키지 않을까에만 관심이 있다. 수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데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 충격적이다.
여기까지 보셨으면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은 충분하다. 나머지는 영화 속 디테일에 대한 소소한 얘기들. 딱히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어렵지만(이 영화의 결말을 모를 사람은 없을테니), 아무튼 강추작. 박수가 아깝지 않다.
자, 그냥 표 사러 가세요. 나머지는 영화 보고 다시 오시길.
3. 이 끔찍한 이야기는 다소 과장된 우화처럼 보이지만, 거의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이 또한 놀랍다). 루돌프 회스는 실존인물이고, SS 장교 출신으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다. 1943년 11월 잠시 다른 인물과 교체됐지만 44년 5월 복귀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즉 나치가 아우슈비츠 주변 약 40제곱킬로미터의 지역에 설치한 특별 구역의 이름인데, 이 동네에 멋진 마당이 있는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마틴 아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전쟁이 끝나고 회스 가족은 자취를 감췄다. 추적자들은 먼저 북부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로 변신해 있던 아내 헤드윅과 가족들을 찾아냈고, 헤드윅은 처음엔 남편이 죽은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알고 있는 사실을 자백했고, 회스 또한 덴마크 국경 지역에서 농부로 가장하고 있다가 체포됐다.
회스는 자신이 1941년부터 43년까지 SS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약 200만명의 유태인을 가스로 살해하고 시신을 태우는 작업을 지휘했음을 자백했고, 사형을 선고받아 아우슈비츠 수용소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4. 과연 회스의 가족들, 아내 헤드윅과 자녀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회스는 종전 후 재판에서 "최소한 아내와 장남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녁때마다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연기, 그리고 시체 타는 냄새를 맡으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방문자들은 이 냄새와 연기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금세 익숙해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영화에서 모든 것을 선명하게 알려주지 않는 쪽을 택했다. 예를 들어 회스의 장모는 왜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지, 어느날 회스 앞에서 신발을 벗는 여자는 누구인지, 낚시를 하던 회스는 왜 갑자기 아이들을 물에서 꺼내 집으로 끌고 오는지, 왜 갑자기 회스는 구토 증세를 보이는지 등에 대해 깔끔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상황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긴 하다.
장모는 정말로 태연하게 악마의 삶을 살고 있는 딸과 사위 가족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달아난 것이고, 회스와 아내는 아우슈비츠에서 상당수의 유태인들을 몸종처럼 부리고 때로 성노예 취급도 했을 것이고, 강물에서 시체 태운 재를 발견한 회스는 '아이들'이 그 재에 오염될까봐 깜짝 놀란 것이고... 구토는 아마도 잠시나마 '미래의 사람들이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와 같은 자각이 일시적으로 무의식을 뚫고 나와 신체에 반응을 일으켰음을 상징하는 것일텐데, 이런 해석들이 맞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이런 것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하고, 결론을 내리기를 글레이저 감독이 바란 것일 뿐.
벽에 사과를 박아 넣는, 뒤집힌 그림 속 소녀도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몇몇 폴란드 사람들은 작업 중에 유태인 수감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밤에 몰래 진흙 속에 음식을 감춰놓기도 했다고 하는데, 영화 내용중에는 '사과 하나를 놓고 두 수감자가 싸움을 벌였다'는 말을 들은 회스가 '둘 다 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하는 장면도 있다.
5.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그저 명령에나 복종하고, 조직 안에서 과업의 완수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간들에 의해 집행되었다는 보고는 2차대전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것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이르면, 이건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악의 무심함'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저 홀로코스트의 고발에서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담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과 희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을까. 글레이저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가자지구의 학살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호소했다. 단지 홀로코스트의 고발만이 중요했다면, 당시의 피해자였던 유태인들이 이제 가해자가 되고 있다는 기괴한 현상을 외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외에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담 너머의 참상에 고개를 돌린다. 아니, 엄밀히 말해 모든 선진 문명국들의 풍요는 일정 부분 이상 '담 너머'의 희생에 일정 부분 이상 빚을 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생각하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소름끼치는 은유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6.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4 아카데미 작품, 각색, 감독상을 포함해 5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그중 국제영화상(구 외국어영화상)과 음향상을 수상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은 로컬 영화제잖아요" 이후 영어가 아닌 언어를 바탕으로 제작된 많은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바람에, 소위 국제영화상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이 2024년 시상식에서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작품상과 국제영화상 후보에 모두 오른 반면, <추락의 해부>는 작품상 후보에는 올랐지만 국제영화상 후보에서는 빠졌다. 작품상이 아카데미상의 최고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 국제영화상 후보에는 들지 못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다(물론 해당 국가에서 <추락의 해부>를 후보로 밀지 않으면 국제영화상 후보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현행 제도다).
7. 다만 개인적으로 음향상에는 다소 의문이. 과연 이 영화의 검은 화면이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그렇게 대사 없는 장면이 꼭 필요한 것이었나?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굉음과 비명을 꼭 들려주면 더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겐 이 영화의 잔잔한 분위기 속에 감춰진 악의 선명함으로 충분했고, 굉음에 가까운 음향은 오히려 과잉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 외에는 모든 부분에서 칭찬하고 싶은 걸작.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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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종>이라는 새로운 드라마가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이수연 작가의 작품이고 한효주 주지훈이 주인공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작품이 한방에 다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나눠 업로드 된다는 걸 알고 나선 '다 올라오면 봐야겠다'로 태세를 전환했다. 마침 <쇼군>을 추천하시는 분들이 있어 이번 디즈니 멤버십 부활의 타겟을 <쇼군>과 <지배종>으로 잡았다.
(이 OTT 난립의 시대, 그 많은 OTT에 모두 월사금을 바치는 것은 너무 부를 과시하는 일이라는 입장이라, 대부분의 OTT들은 똑 똑 떨어지는 빗물이 고이면 멤버십을 살려 후루룩 마시고, 바닥이 마르면 구독을 끊는 형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업계 종사자분들, 이해하시죠?)
요즘 핫한 바이오 산업을 무대로 하는 드라마라길래 주인공들이 너무나 야근을 많이 해서 <집에 좀> 가라는 드라마인가 잠시 생각했으나(...죄송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정 한국에서 보기 드문 웰메이드 테크노 스릴러였다. 디즈니 플러스를 볼 수 있는 분들이면 지금이라도 꼭 보시길.
(올해 상반기에 드라마 좀 보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다들 '아니 왜 이렇게 볼만한 드라마가 없어요?' 하시던데, 보실게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주제 의식, 전개, 배우들의 연기, 핵심을 찌르는 대사, 다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기에 손색이 없네요.)
시작: 현재에 아주 가까운 미래. 동물의 특정 부위 세포를 대량 증식해 소를 잡지 않고도 꽃등심이며 안심을 실험실에서 배양해 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축산업의 양상이 뿌리부터 흔들린 시대. 그 중심에 한국 기업 BF가 있다. 수백조 가치를 평가받는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 BF 총수 윤자유(한효주)는 과감하게 농업과 축산업을 공장에서 대체하는 것만이 환경 파괴를 막고 인류 문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해군 대위 출신의 경호원 채운(주지훈)은 전직 대통령(전국환)을 불구로 만들고 자신을 퇴역하게 한 의문의 폭발 사건에 대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채운에게, 당시 폭발 현장에 윤자유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BF에 접근해 그 배후에 BF가 있는 것은 아닌지 조사해 볼 것을 지시한다.
한편 BF는 생계 위협을 받는 농어민들의 시위로 여론이 악화되고, 국제적인 사이버 테러리스트 집단에게 해킹을 당해 거액을 요구받는 위기를 맞는다. 총리 선우재(이희준)는 이 상황을 정국 운영에 유리하게 활용하려 하고, 선우재의 아버지이며 재벌 그룹 회장인 선우근(엄효섭)은 윤자유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BF의 지분을 요구한다.
스포일러가 싫은 분들은 대략 여기까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윤자유와 채운은 어찌 어찌 같은 편이 되어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역시 이수연 작가의 팬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누가 정말 같은 편이고 누가 정말 적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의심하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해 진심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재미있다. 얼른들 보셔.
참,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들도 있던데 지배종이란 dominant species, 즉 여러 생명체가 같이 존재하는 하나의 생태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종, 즉 다른 종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종을 말한다. 당연히 지구 생태계의 지배종은 인간인데, 내용상 이 드라마에서 지배종이란 현생 인류보다 한 단계 더 진화했다고 볼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여기까지만.
(스포 경고. 넘어오지 마세요)
<비밀의 숲>에서 거대한 적들에 비해 돈도 없고, 뭔가 힘도 없는 주인공들의 노력이 안타까우셨던 분들이라면 이번엔 좀 편안하게 보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상대인 재벌그룹이나 국무총리만은 못하지만 BF그룹은 기술도 있고, 맨파워도 있다. 최소한 돈이 없어서 뭘 못하는 일은 절대 없다. 경호원도 수십명씩 고용할 수 있다.
비록 이 드라마가 근미래, 아직 이뤄지지 않는 신기술이 적용된 사회상을 그리고 있지만, 혹시나 <그리드> 같은 드라마일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그리드>에 비하면 기술은 그렇게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고, 복잡한 타임슬립 트릭도 없다. 연출 의도인지 가끔씩 시간상의 인과가 헷갈릴 때도 있지만, 시청에 방해 되는 요소는 아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역시 <24>나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느낌의 슈퍼 에이전트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드라마라는 점. 국내 드라마 주인공 중에선 이 작품의 주지훈에 비견될만한 캐릭터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배신+배신으로 점철되는 악당들의 뿌리를 추격해 가는 과정이 탄탄한 플롯 덕분에 엄청난 몰입감을 준다. 심지어 <존 윅>에나 나올법한 파워 수트, 인공장기 수술의 부작용(?)인 초인적인 힘까지 장착하다니.
윤자유라는 '이상주의자이면서 유능한 이과 출신 경영자'의 역할을 한효주 외에 다른 어떤 여배우가 연기할 수 있었을지도 솔직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 역할은 수시로 매우 인간적인 대학교 서클 회장 언니에서 사람 수십명의 목숨 따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적들과 한치 양보없이 싸워야하는 우리편 대장의 면모를 오가야 하는데, 결코 구현이 쉽지 않을 인물이 한효주 덕분에 매우 설득력있게 그려졌다.
그리고 드라마에 생동감을 주는 것은 역시 막강한 악의 무리들. 엄효섭, 이희준의 화려한 악당 연기는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고, 잘 모르는 배우였던 박지연의 열연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악당들'의 목적이 BF가 갖고 있는 '진짜 무서운 비밀'의 확보에 있었다면, 대체 김신구 교수(김상호)를 굳이 죽여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살려서 핵심 원천 기술을 빼오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활용이 아닌가 하는 대목 처럼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또 후배 경호원은 하필이면 '칼과 불을 막아내는' 파워 수트를 입고 있다가 죽고, 경찰 세 사람을 공중부양시키는 채운의 괴력은 막상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특공대원들과의 1:1 대결 때에는 어디론가 실종되어 버린다는 진행 등도 아쉽다. 가장 중요한 전투 신에서 채운이 좀 더 슈퍼파워를 과시했어야 하는 건 아닐지.
그래도 현 시점에서 가장 시즌2가 기대되는 한국 드라마라면 아무래도 <지배종>을 첫 손가락에 꼽게 된다. 내부 상황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디즈니 플러스의 빠른 결단을 촉구한다.
P.S.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 마케팅 점검 좀 하시죠. 어떻게 구글 검색을 해도 포스터 말고는 검색되는 사진이 이렇게 없을수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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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파리. 30세 가량의 루실은 50대의 재력가 샤를과 함께 살고 있다. 한때 사교계의 여왕이던 40세의 디안은 10년 어린 미남 앙트완을 사귀는 중. 어느날 이들은 모두 상류층 사교 모임에서 만나고, 루실과 앙트완은 동년배인 자신들 둘만이 그 모임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갖는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된다.
재미있는 소설을 읽은 지가 꽤 오래됐다는 생각이 든다(생각해 보니 소설 자체를 읽은지가 좀 됐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주황색 표지의 책. 얼마전 재미있는 드라마의 기준 이야기를 하면서 ‘2배속으로 볼 수 없는 드라마’를 조건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패배의 신호>는 얇지만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사실 프랑수아즈 사강이 이렇게 놀라운 작가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오래 전, 어딘가 중역의 냄새가 짙은 <슬픔이여 안녕>이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었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혹은 <슬픔이여 안녕>을 썼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노련함이 깃들어 있다. 사강이 딱 30세였던 1965년에 쓰여진 책인데 30세로 설정된 루실보다는 40세 정도로 설정된 디안에게 뭔가 더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은 파티다. 소설 내내 '파티'라고 이름붙여진 상류층의 관찰 게임이 등장한다. 모든 참석자는 연기자이면서 관객이다. 모두가 모든 사람을 보고 있다. 노련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잘 알고 있고,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려 노력한다. 참석자들 사이에는 이미 경제/사회적인 우열과 의존의 관계가 있고, 모든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돈과 인기, 즉 매력을 다 갖춘 플레이어들은 최강자이므로 이 게임을 주도할 수 있다. 물론 전제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암묵적인 룰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샤를과 디안은 오랫동안 이 게임의 강자들로 군림해왔지만, 불행하게도 룰을 인정하지 않는 두 젊은 플레이어들을 이 무대로 끌어들인 탓에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 무대에선 ‘무슨 짓을 해도 좋았던’ 자신들의 오랜 입지가 흔들리는 수모를 겪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젊음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지 않은 댓가다.
‘디안은 전날의 사건이 완화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클레르는 안하무인인 디안이 무슨 변덕인지 정오에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는 말을 퍼뜨릴 수 있었다. 디안은 파리에선 기본이 되는 이 원칙을 잊었다. 바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대 사과해선 안 된다는 것과, 꺼림칙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
<패배의 신호>를 읽는 것은 잘 부스러지는 여러 겹의 페스트리 빵을 먹는 것과 같다. 손 대기 무섭게 부서져내리는 내리는 부스러기 하나 하나에 모두 감춰진 의미가 있다. 모든 이들이 모든 이를 바라보는 그 시선 하나 하나를 해부하는 사강의 시선은 ‘섬세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구석이 있다.
스스로 패배로 인정하지 않는 결말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 샤를, 자기가 아는 단 한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는 앙트완을 그리는 붓끝도 선명하지만 두 여주인공, 루실과 디안을 그려내는 필치는 실로 감탄을 자아낸다. 낮에 앙트완과 밀회를 즐기고, 헤어지기 아쉬워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그 사이 저녁 파티에서 예기치 않게 앙트완와 마추쳤을 때에는 약간 번거롭게(?) 느끼는 루실. 앙트완과 루실의 관계를 짐작하고 슬퍼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루실을 인정하는 디안.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샤를에게서 키다리 아저씨의 잔상을 볼 것이고, 어떤 이들은 디안의 우울에서 동질감을 겪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루실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볼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디안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볼 지도 모른다. 물론 루실과 디안이 모두 자신의 과거였던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힐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생을 아는 사람에겐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일각에서는 샤를을 '포용하는 사랑'의 주체로 해석하는 듯 하지만, 나이 먹어 이 책을 읽고 보면 결국 샤를의 태도는 포용이라기보다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과연 샤를의 입장에서 앙트완과 무슨 경쟁을 하든, 정면 대결을 한다면 패배는 불보듯 뻔한 상황. 이럴때 뒷날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앙트완이 '백신'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노회한 지혜가 아닐지.)
분명한 것은 아무도 사강에게 동정을 기대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사강은 내내 모든 등장인물을 조소한다. 젊은 애인을 어떻게 해서든 잃고 싶지 않은 샤를의 어리석음("샤를은 2년 전부터 바보가 되어 있었다")을, 그와 마찬가지인 디안의 집착을, 루실의 지킬 수 없는 약속을("혹시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절대 우스워지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앙트완의 아집을 비웃고 있다.
그 서늘함을 즐길 사람이라면, 강추.
P.S.1. 이 포스팅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모두 1968년 알랭 카발리에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패배의 신호>의 장면들이다. 카트리느 드뇌브가 루실 역을, 미셸 피콜리가 샤를 역을 맡았는데 드뇌브야 누가 뭐랄 사람이 없겠지만 샤를이 전혀 미중년으로 보이지 않는 대머리 아저씨라서 실망. 1960년대 파리의 눈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던 것 같다(누군가 세계에서 가장 대머리에 관대한 나라가 프랑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는데, 그 말이 맞는 지도).
게다가 디안 역을 맡은 이레느 툰치가 지나치게 미인이라 루실-디안의 대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첫 장면에서 카트리느 드뇌브가 입고 나오는 옷이 바로 오렌지색 니트 스웨터. 우연의 일치라기엔 매우 신기하게, 한국어 번역서의 장정 컬러와 같다.
P.S.2. 이 책을 흥미롭게 보신 분이라면 두 편의 다른 작품을 추천. 하나는 <롤리타>로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어둠속의 웃음소리>, 그리고 또 하나는 영국 작가 에블린 워의 <한줌의 먼지>. 세 작품 모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냉철하고도 섬세한 분석이 일품이다.
세 권의 책을 읽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을 젊은 남자에게 빼앗긴 독일 중년 남자, 영국 중년 남자, 프랑스 중년 남자의 각기 다른 반응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P.S.3. <La Chamade>는 '퇴각 나팔'이라는 뜻이지만 '예기치 못한 감정의 격동'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La Chamade>의 영어 번역 제목으로는 주로 <Heartbeat>이 사용되는 듯 하다. 그 전혀 다른 두 의미가 같은 단어에 담겨 있다니, 프랑스어는 참 묘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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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맥스: 퓨리 로드>의 프리퀄 <퓨리오사>는 문명의 종말을 맞은 호주 대륙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경작이 가능한 땅, 녹색의 낙원에서 시작한다. 열살 남짓한 소녀 퓨리오사는 엄마(찰리 프레이저)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어느날 우연히 그곳을 발견한 디멘투스의 졸개들에게 납치된다.
녹색의 땅을 지키는 전사들, 부발리니 중 하나인 엄마는 퓨리오사를 구출하기 위해 추격에 나선다. 물론 딸도 딸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녹색의 낙원의 위치를 알게 된 졸개들을 해치워야 했다. 폭주족의 리더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는 과일이 열리는 땅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다. 이렇게 시작된 퓨리오사의 기구한 팔자가 어찌 어찌 진행되어 엄마와 떨어진 소녀가 시타델의 사령관 퓨리오사가 되었는지를 그려내는 영화.
주인공은 당연히 퓨리오사지만 그 밖에 눈에 띄는 여성 캐릭터는 거의 없다. 퓨리오사의 엄마와 엄마 친구를 빼면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은 정도.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매드 맥스: 퓨리 로드>에 이은 여성 중심의 서사라는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남성 캐릭터들은 최상위 서열의 지도자들에서 말단 전사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뇌라고는 없는, 지배욕와 파괴, 탐욕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들이다. 공생을 위한 의지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곧 현실이 될 것 같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지구에서 그나마 어떻게든 생명을 이어가려 노력하는건 여성들 뿐이다. 지식인의 흔적은 '히스토리언'이라는 존재로 남아 있긴 한데, 거세된 환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조지 밀러는 이 영화를 통해, 인류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순수한 폭력과 광기, 공포가 지배하는 세계를 미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아드레날린과 욕구불만으로 꽉 차 있는 올림푸스나 발할라 풍의 남신/영웅들을 조소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런 맥락에서 그 대표자인 디맨투스 역을 '토르' 크리스 헴스워스가 맡은 것은 너무나 적절한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헴스워스의 열연이 펼쳐진다.
(가스타운에 벽화로 그려진 워터하우스의 '물의 님프들' 또한 이 남신들이 주도해 온 신화 비꼬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퓨리오사>에 매우 만족하지만, 아쉽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잘난 전작 <퓨리 로드> 때문이다. 아냐 테일러 조이도 인상적인 열연을 펼치지만 그 역시 샤를리즈 테론의 그림자 안에 있다.
하지만 <퓨리 로드>만으로 알 수 없었던 주인공들의 동기들, 특히 녹색의 땅에 대한 퓨리오사의 열망과 좌절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는 매우 성공적인 프리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퓨리오사>가 없이 <퓨리 로드>만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퓨리오사>를 만들어 준 조지 밀러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시타델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의 두 축, 가스타운과 총알농장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고 무엇보다 두시간 반 내내 쏟아지는 광기어린(!) 폭력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퓨리 로드>에서 최강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빨간내복'이 나오지 않는 점은 아쉬우나, 시타델의 전투 트럭이 공중에서 공격하는 옥토보스의 부하들에 맞서 싸우는 전투 장면의 박진감은 결코 전편에 뒤지지 않는다.
이제 79세인 조지 밀러는 과연 얼마나 더 이런 괴물같은 영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imdb에 따르면 이미 여섯번째 매드 맥스 시리즈 제작에 들어간 것 같은데(톰 하디의 차기작 중에도 이 작품이 거론되고 있다), 문득 조지 밀러 버전의 트로이 전쟁 이야기나 <코난 더 바바리안> 같은 것이 보고 싶어졌다.
P.S. 과연 <퓨리오사>를 보고 나서 <퓨리 로드>를 다시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두편 다 안 봤다고? 서둘러라.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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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플러스의 10부작 <쇼군>. 드라마 한편을 보고 나서 이렇게 할 얘기가 많은 작품도 정말 오랜만이다. 일단 줄거리를 살펴보자.
배경은 서기 1600년의 일본. 타이코(태합) 나카야마는 1598년 사망하면서 '5대로'라고 불리는 다섯 명의 강대한 영주들에게 어린 아들의 앞날을 부탁했다. 하지만 2년 뒤, 5대로의 결속은 깨지고, 나카야마의 심복인 이시도는 후계자를 위한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어린 후계자의 생모인 오치바와 동맹을 맺고 강력한 라이벌인 에도의 다이묘 토라나가를 거세하기 위해 갖은 압박을 가한다.
내전을 예감한 각지의 영주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엄청난 눈치보기를 시전하던 상황, 네덜란드 배를 탄 영국 항해사 존 블랙손이 토라나가의 세력권인 이즈 반도 끝으로 표류해온다. 당연히 일본과 단독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포르투갈인들과 그들의 편인 천주교 영주들은 이 개신교도의 출현을 껄끄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고, 토라나가는 이 복덩이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심복의 아내 마리코를 블랙손에게 통역으로 붙인다. 블랙손은 피치못하게 토라나가의 수하가 되어 전국시대의 종말을 앞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일본의 1600년이라면 임진왜란 종결로부터 2년 뒤.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시대인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왜 생소할까. <쇼군>의 원작을 쓴 제임스 클라벨이 창작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인지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바꿨기 때문이다. 저 위의 줄거리에서 나카야마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시도 대신 이시다 미츠나리, 토라나가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입하면 실제 역사가 된다. 사실 블랙손이라는 인물 역시 '안진'이란 이름으로 도쿠가와를 섬겼던 영국인 윌리엄 아담스를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에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줄거리는 대략 일치한다.
어쨌든 클라벨의 이 소설은 1975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번역 출간된 한국과 일본에서도 크게 성공했고, 1980년에는 5부작 미니시리즈(약 540분 분량)로 제작되어 역시 큰 성공을 거둔다. 이 미니시리즈는 한국에서 방송되지는 못했지만 2시간짜리 극장판으로 편집돼 1981년 피카디리 극장에 걸린다. 이 영화를 본 사람으로 생각나는 얘기가 참 많은데...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따로 한번 써야 할 것 같다.
1980년판의 리처드 체임벌린(뒷날 <가시나무새>로 잘생긴 남자가 신부복을 입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 바로 그 분이다), 미후네 토시로, 시마다 요코의 명성에 비길 정도는 아니지만 2024판에서도 사나다 히로유키를 필두로 아사노 마사노부, 히라 타케히로 등 할리우드에도 어느 정도 기반을 갖고 있는 일본 톱스타들이 출동해 탄탄한 연기를 보여준다.
사실 드라마의 작중 화자 겸 명목상의 주인공은 블랙손 역을 맡은 코스모 자비스지만, 누가 봐도 진정한 드라마의 축은 토라나가 역의 사나다 히로유키와 마리코 역의 안나 사와이다. 굳이 주제를 찾자면 '아시아의 정치 고수들 손바닥에 놓인 단순한 영국인' 이라고나 해야 할까. 블랙손은 끝까지 일본인들을 깊고 깊은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장깃말처럼 끌려다니는 존재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서 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야부시게 역을 맡은 아사노 타다노부의 열연이다. 왕년의 섹시 스타가 어쩌다 이런 코믹한 아재가 됐는지 모르겠으나, 야부시게는 여기서 큰 영주들 사이에 낀 소영주, 즉 대영주의 가신들이 겪는 애환을 상징하는 존재다. 명분상의 의리로는 토라나가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나, 가문과 영토를 보존하려면 이시도를 무시할 수 없기에 거의 내놓고 양다리를 타는 그런 남자... 전설 속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의 실체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2024년의 <쇼군>이 주는 충격은, 1970년대(소설 <쇼군>은 1975년에 나왔다) 미국인들이 바라보던 저 먼 동양의 신비로운 나라 일본의 이미지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는 거다. 사실 이런 시각은 1969년작인 <007 두번 산다>나, 일본이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떵떵거리고 있던 1993년작인 <떠오르는 태양>에서나 큰 차이가 없다. 이 작품들 속의 일본인들은 항상 신비로운 미소 속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갖고 있고, 특히 여성들은 뭔가 은밀한 임무를 위해 언제든 몸과 마음을 다 외국인들에게 바친다. 상급자의 명령은 하급자에게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며, 잘못에 대한 사죄는 결국 항상 셋푸쿠(切腹, 우리에겐 '할복'이 더 익숙하지만 정작 일본어로 많이 쓰이는 이 단어는 한자로 '절복'이다)를 통해서만 해결된다.
현대 일본인들이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 드라마를 만드는 데 동원된 명분은 아무래도 '아니, 누가 지금이 그렇댔나, 이건 400년 전 얘기잖아' 같은 것일텐데, 이 드라마 속의 몇몇 상징들을 봐선 지금도 미국이 일본과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번 <쇼군>에서 블랙손이 일본에 상륙하는 이즈 반도 끝자락엔 시모다(下田)란 항구가 있다. 1853년, 미 해군의 매튜 페리 제독이 구로후네, 즉 흑선(黑船) 함대를 몰고 무력시위를 벌여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킨 바로 그 곳이다. 참고로 블랙손의 모델인 윌리엄 아담스가 실제로 상륙한 곳은 저 머나먼 큐슈였다.
...뭐 이런건 그냥 일종의 피해망상이라고 치자. 아무튼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너무나 흥미로울, 넘쳐나는 오리엔탈리즘 덕분에 이 드라마는 공전의 히트작이 됐다. 디즈니 플러스 발표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미국 국내에서는 훌루(Hulu), 글로벌하게는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배급됐는데 '역대 디즈니 플러스가 만든 드라마 시리즈 중 최고의 성공작'이라고 한다.
미주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봐선 이것은 한류를 한방에 날리는 일류(日流)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일본 배경의 미국 드라마고 쇼러너인 레이첼 콘도는 일본계지만 하와이 출신 미국인이다. 말하자면 <오징어게임>보단 <파친코>에 가깝다. 그건 그런데, 사실 겁나는 건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봤지? 이런게 통하잖아. 우리도 이런거 만들면 당장 미국 시장 다 먹을 수 있어! 잘 할 수 있잖아?" 할 몇몇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이란게 과연 어떤 걸까. 혹시 남편이 죽으면 수절 과부 만들기 위해 며느리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자손 얻기 위해 씨받이를 들이고, 그래도 안되면 남자를 씨내리로 들이고, 복자승에게 보내 임신을 시켜 오려 하고, 가문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딸들을 대국에 공물로 바치고, 그중 권력자의 처첩으로 성공하는 케이스가 나오면 그 댓가로 아버지와 오빠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고.... 뭐 이런 이야기들 아닐까. (왠지 너무 잘 먹힐 것 같아 불안하다.)
어쨌든 이런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 것은 내가 그런 사정을 지켜보며 살아 온 한국인이기 때문인데, 사실 이런 생각을 걷어 내고 보면 <쇼군>이 매우 재미있는 드라마라는 점은 감히 부인할 수가 없다. 검술 액션이나 전투신은 거의 없지만 의상, 건축, 미술은 탄복할 만 하고, 음모, 폭력, 잔혹, 그리고 은밀한 남녀관계까지 볼거리가 넘친다. 배우들의 연기, 연출력 모두 탄탄하다. 거기에 몇 차례의 셋푸쿠 신을 둘러싼 제작진과 시청자의 줄다리기는.... 정말 대단한 경지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센고쿠(전국)시대란 무엇인가, 쇼군과 다이묘는 어떤 관계인가, 하타모토는 또 뭔가. 에도와 오사카는 어떤 관계인가 등등을 알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쇼군>은 그런거 하나도 몰라도 드라마를 즐기는 데 전혀 지장이 없도록 잘 만들어진 오락물이다.
오히려 일본 역사에 관심있는 시청자들이라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장면 때문에 몰입이 깨질 수도 있을 부분들이 있는데, 이 역시 재미있게 보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남의 일이니까 재미있게 보는데 이런게 내 이야기가 되면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이런 느낌은 어떻게 하면 사라질 수 있을까.
...하긴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보고 즐기기나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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