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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상 18개 부문 수상. 디즈니 플러스 <쇼군>이 엄청난 기록으로 미국 TV 역사에 발자국을 남겼다. 쇼군 이야기는 지난번에 한번 쓴 적이 있지만, 사실 나오자마자 보지는 않았다. 이 드라마를 늦게 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여주인공에게서 고전적인 일본 미인의 느낌을 받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쇼군, 미국이 만든 '할복하는 일본인'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joins.com)

누가 뭐래도 2024년 <쇼군>의 주인공인 애나 사와이는 전통적인 일본 미인상이라기 보다는 하와이-폴리네시안 얼굴로 보였다. 이런 얼굴이 마리코 역을 맡는다는 것은, 왕년의 마리코 역을 연기한 시마다 요코에 대한 모욕이라는 느낌이 살짝 들 정도라...

 

혹시 영상이 궁금하신 분은 이쪽

아무튼 앞의 글, <쇼군(2024)>에 대한 글에서 제임스 클라벨의 베스트셀러 소설 <쇼군>은 1975년에 출간됐고, 미국에서 1980년 NBC 5부작 미니시리즈로 만들어져 히트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지금부터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1980년 버전의 미니시리즈, 그러니까 내가 1981년 종로 피카디리 극장에서 극장판으로 본 그 시리즈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도대체 나는 그때 그걸 왜 보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1980년 12월25일자 매일경제 지면에는 베스트셀러 집계 단신이 실렸다. 국내 소설로는 황석영의 <어둠의 자식들>이 1위, 국외소설로는 제임스 클라벨의 <장군>이 1위였다. 클라벨의 <장군>, 즉 <쇼군>은 일단 미국에서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됐고, 일본으로 역수입되어 다시 베스트셀러가 됐다. 물론 미국에서는 진작부터 이걸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 

 

명목상의 주인공인 파란 눈의 사무라이 안진 역에는 리처드 체임벌린이 캐스팅됐다. 체임벌린으로 말하자면 1980년대를 통틀어 가장 잘 나가던 TV 스타 중 하나라고 불러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 <쇼군>으로 골든 글로브 TV 부문 남우주연상을 꿰찼고, 3년 뒤, 한국에서도 많은 시청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가시나무새>를 통해 다시 한번 같은 상을 차지했다. 오죽하면 공식 별명이 '킹 오브 미니시리즈'다.

<가시나무새>의 레이첼 워드와 리처드 체임벌린. 49세의 나이로 멜로드라마 주인공을 소화해 세계적인 히트작으로 만들었다. 대단한 양반.

당시 미국 TV에서 가장 핫한 장르는 '미니시리즈'였다. <달라스>나 <다이내스티>로 잘 알려진 이 장르는 짧으면 4부작, 길면 10부작 정도의 길이로 영화 못잖은 제작비를 투입해 블록버스터 스타일의 볼거리를 제공했다. <쇼군>이나 <가시나무새>은 물론이고, 그 시절 한국 시청자들의 기억에 생생할 대표적인 미니시리즈들로는 남북전쟁을 그린 <남과 북>, 파충류 외계인의 지구 공격과 레지스탕스의 활약을 그린 <V>, 닉 놀테-피터 슈트라우스 형제를 스타로 만든 <야망의 계절>, 시드니 셀든 원작의 <내일이 오면> 등이 있었다. 

 

극장용 영화의 주인공으로는 조금 모자라지만, 일반적인 TV 드라마 배우들보다는 지명도에서 앞서는 배우들이 딱 이 장르의 주인공 감이었다. 한국 TV의 드라마 장인들도 이 장르의 영향을 받아 1990년대부터  '미니시리즈'라는 이름의 드라마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한국에선 여러가지 상황을 고려하다 보니 16부작이 기본 틀이 되었다. 그래도 핫한 배우들이 나오고, 보다 젊은 시청층을 겨냥하고, 일반적인 드라마보다 훨씬 큰 제작비를 투입한다는 면에선 같은 맥락 위에 있었다. 

영화 <타워링>의 주역들. 스티브 맥퀸, 로버트 와그너, 페이 더너웨이, 윌리엄 홀든, 제니퍼 존스, 프레드 어스테어, 폴 뉴먼, 리처드 체임벌린, 로버트 본, 그리고 O.J. 심슨. 1950년대~70년대의 빅 스타들이 포진한, 뒷날의 <오션스 11> 못지 않은 화려한 출연진이다. 여기서 지명도로 따지면 체임벌린이 최하위 급?

아무튼 체임벌린은 이 영역에서 가장 빛났던 배우다. 그는 대형 스튜디오들이 억대 예산을 투입할 만한 배우는 아니었다. 할리우드 빅 스타들이 총출동한 대작 <타워링>에도 출연했지만, 그의 역할은 꼴사납게 구명대에서 떨어져 죽는 악당 사위 역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TV에서는 에미상 남우주연상 후보로 4차례나 노미네이트되는 거물 대접을 받았다. 그 시절엔 TV 배우(한국식 영어로는 '탤런트'?)와 영화 배우사이에 매우 분명한 경계가 있었다. 

 

(영화 <타워링> 출연진을 한 자리에 모은 사진. 위 사진의 배우들 이름을 7명 이상 댈 수 있다면 1950~70년대 대중문화에 대해 뭔가 한마디 해도 좋은 사람으로 인정한다. 왼쪽부터 스티브 맥퀸, 로버트 와그너, 페이 더너웨이, 윌리엄 홀든, 제니퍼 존스, 프레드 아스테어, 폴 뉴먼, 리처드 체임벌린, 로버트 본, 그리고... O.J. 심슨. 모두 다 설명하려면 각각 한 문단씩은 충분히 채울만한, 당대/전세대의 슈퍼스타들이다.)

 

 아무튼 개인적으로 극장에서 영화 <솔로몬 왕의 보물>과 그 속편(무명 시절의 샤론 스톤이 나온다)을 매우 재미있게 봤던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가 아라미스 역을 맡았던 <삼총사>를 좋아했던 사람으로서 영화 커리어의 실패는 좀 안타깝다. (여담이지만 그 많은 그의 TV 미니시리즈 주연작들 중에는 뒷날 영화로 리메이크돼 대박을 친 <본 아이덴티티> 시리즈도 있었다. 이 오리지널 시리즈도 매우 재미있었던 기억.)  만년엔 커밍아웃을 하고 이런 톱스타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성 정체성(!)을 꼭꼭 감춰야 했던 아픈 추억을 털어놔 화제가 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사실 세계 영화계를 기준으로 하면 체임벌린보다 도라나가 역의  미후네 도시로가 훨씬 더 슈퍼스타였을 것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몬>, <7인의 사무라이>, <요짐보> 등 칸 영화제를 휩쓴 걸작들 덕분인데, 이런 명성에서 한국은 분명 예외였다. 철저한 일본 영화/음악에 대한 금수 조치 때문에, 아마 <쇼군> 당시 국내에서 이런 영화들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은 유학생들 외엔 거의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비디오 테이프도 구할 수 없던 시절이다).

한국 관객들이 그나마 미후네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진주만 기습을 다룬 <토라 토라 토라>나, 알란 들롱과 공연한 <레드 썬> 등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서였을 것이다. 미국에서도 왕년의 쿠엔틴 타란티노 같은 영화광들이 아니라면, 굳이 '자막 붙은 영화'를 볼 이유가 없었던 미국의 일반 관객들에게는 그냥 마토(Mato)나 별 차이 없는, '영어 못하는 동양인 배우'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쇼군>은 미후네가 한국 팬들에게 처음으로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53년생인 시마다 요코는 이때까지 미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톱스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본도 '할리우드의 주목'에는 열광하지 않을 수 없던 시절이었고, 시마다 요코는 체임벌린과 함께 골든 글로브 미니시리즈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 덕분에 일약 톱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일본 TV는 <쇼군>을 수입 방송하면서, 매회 시마다 요코를 기용, 시청의 편의를 돕는 '해설'을 제작해 덧붙이기도 했다.

 

그 뒤로도 미모와 지성(?)으로 주목받은 요코였지만 사생활에서 유부남과의 관계, 알콜 중독으로 인한 파산, 재정 위기 극복을 위한 누드 사진집 발간, 만년엔 58세의 나이로 성인용 비디오 출연 등 파란만장한 사건사고를 기록하며 69세로 삶을 마감했다. 비운의 스타라 할만 하다.  

 

 

아무튼 이야기는 다시 한국으로. 당초 일본에서도 1980년 11월 극장판이 먼저 공개되었고, 한국에서도 상영될 수 있을까에 대해 관심이 쏟아졌던 느낌이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가당치 않은 얘기였다. 1962년, 한국 정부는 아카데미상 수상작인 영화 <콰이강의 다리> 상영을 불허한 적이 있다.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영국군 포로들을 상대로 가혹행위를 벌이는 이야기가 한국인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는 이유에서였는데, 당연히 지식인들이 "그게 말이 되느냐"는 집단 항의에 나섰고, 결국 이듬해 상영이 허락되기도 했다.

 

그만치 한국 사회에서 '왜색'이라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범죄였다. 한국 영화에 한국 배우들이 일본 의상을 입고 일본인으로 출연하는 것은 허용이 되었지만(물론 그래봐야 왜구 역이나 임진왜란 때 쳐들어 온 왜군 역 들, 혹은 개화기 조선에 들어와 여기저기서 폐를 끼치는 낭인들 정도), 미국 혹은 다른 나라 영화라도 일본적인 느낌이 나는 영화들은 아예 수입사들이 처음부터 시도를 안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만들어진 그 수많은 닌자 영화, 사무라이 검술 영화들이 한국에서 전혀 공개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그런데 <쇼군>의 경우는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980년부터 미국에서 드라마로 방송된 <쇼군>이 엄청난 화제작이라는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하더니 1981년에는 수입추진중이란 이야기가 돌았고, 개봉이 결정된 뒤 일본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시마다 요코가 내한해 영화를 홍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요즘 같으면 상식적인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는 당연히 알 길이 없다. 

그리고 1981년 12월26일,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물론 저때에는 저걸 <쇼군>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당연히 <장군>이지. 

 

솔직히 수입업자들의 촉으로는 당연히 수입해서 상영관에만 걸리면 대박이 날 거라고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본 다음으로 이 영화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한국 관객들이었을테니 말이다. 소설 <쇼군>은 물론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이 '지식인의 필독서'였던 시절. 게다가 전 중장년층의 80~90%가 일제시대에 교육받은 일본어 회화 가능자들(즉 은근히 일본 문화에 대한 향수가 어딘가에 남아 있는 분들). 

물론 정작 뚜껑을 열고 보니 그리 듣던 만큼 대단한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는 좀 심심하기도 했고(대규모 전투신 같은 것도 전혀 없었고, 내가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수준도 아니었다는 얘기다), 일본의 쇼군 이야기라더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디 가고, 들어본 적도 없는 도라나가가 주인공이냐는 의아함도 있었다. 게다가 그때까지 일본 역사나 문화를 깊이 있게 접해 볼 기회가 없었던 젊은 관객(나다)들에겐 대체 영화 속의 정치 상황이 어떤 것인지, 마리코가 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지 등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리코의 실제 모델은 아케치 다마 혹은 호소카와 카라샤 라고 불리던 인물. 혼노지의 변을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를 죽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딸이다. 호소카와가의 며느리가 되었는데, 대역죄인의 딸이라 마땅히 죽었어야 할 몸이지만 이미 출가외인이고, 호소카와 가문은 아케치에게 동조하지 않고 맞선 공이 있어 '멀리 유폐' 되는 선에서 끝났다.

아무튼 그래서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기독교에 투신하고, 뒷날 호소카와 가문이 도쿠가와의 편에 서자 이시다 미츠나리가 가라샤를 인질로 잡기 위해 군대를 보냈는데, 이때 포로 되기를 거부하고 폭탄에 불을 붙여 장렬한 최후를 맞은 인물이다. 이야기를 보면 알겠지만 <쇼군>의 마리코와 상당 부분 행적이 일치한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실제 모델이 있었는지, 아케치 미쓰히데가 대체 누구인지, 남편과는 왜 사이가 나빠졌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봤으니 당최 이해를 하지 못했다.)

 



물론 재미있게 본 사람들도 많았던 것 같다. 당시 청춘/틴에이저 영화로 유명했던 문여송 감독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감상문을 보면, 마침내 금기를 뚫고 극장에서 일본 문화를 접하게 된 감회가 넘쳐 흐른다. 

'마리코는 분명 블랙슨의 침실에 침입했다. 그러나 뒷날 간밤에 침실에 침입했던 여자는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보낸 하녀였다고 시침떼는 장면은 모든 관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른다. 쇼군에서 느낀 것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내가 늘 갈구하던 영화 에로티시즘의 한 단면, 어떤 기교를 다시 한번 생각케 했다.  (1982. 2. 4. 동아일보)'

그랬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 장면은 2024년에도 그대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재현되었다. 아무튼 그때 그 <쇼군>이 부활해 에미상을 휩쓰는 공전의 히트작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니 참... 감회가 새롭다. 어쨌든 왕년의 <쇼군>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는 의미로 이 글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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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키도리. 구운 새. 좋은 닭 구우면 당연히 맛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일본은 닭이 다르다고. 닭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 싶다가, 모처럼 한번 경험해보는걸로.
 
 
 
결론부터 말하면, 달랐다.
 
 
닭도 닭이지만 들인 정성과 공력에서 차이가 났다. 에비스 가든 부근의 야키도리 오하나. 딱 10석, 카운터석뿐인 매장인데 매달 예약을 오픈하자마자 예약완료가 뜬다. 2시간에 걸쳐 총 17개의 접시가 나왔다.
 

김 위에 익힌 얇은 닭가슴살을 깔고, 그 위에 시소잎과 오이를 펼친 뒤 다시 닭가슴살 회를 얹어 만다.

그렇게 해서 첫 접시는 '시소와 오이가 들어간 닭가슴살회 마끼'. 신선한 충격이었다. 기대가 두배로 급상승했다. 감탄. 이어서 줄줄이 감탄의 연속이다.

2. 다진 닭고기 춘권
 
예상할 수 있는 맛이지만 당연히 맛있었다. 매우 뜨거움.
3. 튀긴 쌀전병 위의 닭무침
 
뜨거운 것 다음에는 식은 것인가. 바삭바삭한 전병까지 같이 먹어 식감이 즐겁다.
 
4. 진한 닭육수의 죽순과 완탕
 
가장 인상적인 메뉴 중 하나. 닭육수의 강렬함에 국물을 완샷하지 읺을수 없었다. 
5. 다릿살 간장양념구이
 
역시 예측 가능한 맛이었지만 아삭이는 실채소와의 조화가 좋았다.
6. 튀긴 미니옥수수와 채소
 
이쯤 되니 셰프와 장난을 치고 싶어진다. "닭을 먹으러 왔는데 닭은 어디 있나! 닭을 달라!"고 항의(?)를 하니 "닭 기름에 튀긴 미니 옥수수"라고 대답한다. 실제로 옥수수에서 꽤 진한 맛이 났다.
7. 오리 가슴살 미디엄레어 구이
 
왜 갑자기 오리인가. 닭가슴살은 지방이 너무 적어 퍽퍽한 반면, 오리는 가슴살에도 지방이 꽤 있어 촉촉하기 때문이라나(이건 셰프가 아닌 옆자리에 혼자 왔던 중국 손님의 주장). 오리 특유의 쇠 맛이 좀 나긴 했지만, 아무튼 맛이 좋았다.
8. 츠쿠네(완자)
 
이건 뭐...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 없는 기본적인 맛. "왜 피망을 주지 않는가"라고 항의(?)했더니 셰프들끼리 서로 "쟤가 뭘 봤는지 피망을 달래"라며 낄낄대고 웃더라. 빨간 무 절임과 같이 제공.
9. 고기볶음 미소를 얹은 두부튀김
 
미소 안에 닭이 좀 들었던 듯? 
10. 목껍질(쿠비가와) 볶음
 
요즘 야키토리 집들도 세세리(목살)을 많이 내놓곤 하는데, 이건 세세리가 아니라 그 부위의 껍질. 짭조롬.
11. 닭 갈비끝 연골(난코츠) 주변살 구이
닭 한마리에 하나씩 든, 오도독 오도독 씹히는 그 하얀 연골. 신선했다.
12. 생강을 박은 허벅지살 말이와 고추
 
별 생각 없이 깨물었다가 속에 박힌 생강 맛에 깜놀. 생강과 감싼 살 맛이 잘 어우러졌다. 
아무리 닭이라도 계속 먹으면 느끼할 거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걸 억누르기 위한 고안들이 다양하다.
13. 날개 튀김
 
한국식 치킨에서도 이렇게 펼쳐 튀긴 날개맛을 볼수는 없을까. 절정의 튀김. 바삭함과 고소함의 끝.
14. 군고구마
 
신선하고, 활기차다.
 
15. 껍질째 구운 등살
 
라임을 뿌려 단숨에 해치웠다. "고기로는 이게 마지막"이라는 안도와 함께. 
 
사실 양이 좀 많게 느껴지긴 했다. 점심을 굶고 왔어야...
 
16. 기름발라 구운 오니기리와 닭육수 오차즈케
 
마지막까지 온 이상 다들 배가 차서 살짝 진력이 날 시점. 그런데 오독오독 오니기리 누룽지를 씹고 있으니 믿을수없게 식욕이 살아난다. 여기에 닭 육수까지.
 
 
밥을 말고, 곁들여 나온 향채들을 넣고 저으니 군침이 돈다. 미니 닭곰탕 후루룩 원샷.

 

 
17. 유자빙수
 
앙증맞은 빙수기까지 센스 만점. 가득찬 배와 기름 맛을 걷어준다. 최고.
 
(여기다 대고도 '아즈키를 내놔! 아즈키가 없으면 카기고오리가 아니야!'라고 진상을 부림.)
 
 
대략 한 접시에 7000~8000원 정도니 절대 싸지는 않은 가격. 하지만 감동적인 맛, 감동적인 장인 정신. 앞으로 6개월은 다른 닭 생각이 안 날테니 내년쯤 다시 시도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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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양식 문화가 한국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는 건 사실 상식이다. 19세기 개항 시절부터 해외 문물의 도입에 워낙 적극적이었던 일본. 온갖 나라의 온갖 식재료와 기술이 세계적인 대도시 도쿄로 몰려든 결과일테고, 1980년대 버블 시대를 거치며 그 모든 취향이 여러 단계 업그레이드됐을 터. 

(이런 '취향'의 허세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무라카미 류의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라고 생각한다. 읽어 보신 분은 잘 아실 터. 세기말적인 허세와 극도로 발달한 욕구가 '정말 이렇게까지 했다고?'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버블 시대 일본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

 

어쨌든 서울에도 정통 나폴리식 피자를 굽는 집들이 한둘이 아니지만, 얼마 전 '이탈리아인' 알베르토 몬디 군이 '아시아 최고의 피자'라고 극찬한 집이 도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또 도쿄를 가는 김에, 그럼 그런 집은 가 봐야지. 점심에는 예약을 받지 않아 상당한 웨이팅을 각오하고 고고.

웨이팅을 각오하는 이유 중 하나는, 피자집 '리스토(Risto)' 자체도 핫하지만 피자집이 있는 곳이 바로 도쿄의 최신 핫플레이스 아자부다이 힐스이기 때문. 현재 세계에서 가장 핫한 건축가인 토마스 헤더윅의 헤더윅 스튜디오가 설계한 곳. 안 그래도 한번 가봐야겠다 싶었는데, 바로 이렇게 기회가 생겼다. 

일류 건축가들이라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헤더윅의 스타일은 뭔가 자연과의 공존에 무게를 두는 느낌이 짙다. 

아자부 언덕을 올라가며 구축된 건물들이다 보니 뭔가 능선을 연상시키는 그런 설계. 

명품 샵들이 그득한, 3층 정도의 건물들이 언덕 아래에서부터 죽 줄지어 올라가고(가 보면 실제로 건물들이 언덕을 기어올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언덕을 꽤 올라간 곳에 메인 빌딩인 타워 플라자를 비롯, 몇개의 건물들로 둘러 싸인 중앙 정원이 나타난다.

어느새 그 정원의 명물이 된 크레페 가게. 

3층으로 올라가면 리스토가 나온다. 

오픈 직전에 도착. 줄은 서 있지만 대기 없이 앉을 수 있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화덕. 뻬뻬가 화덕이란 뜻은 아니겠지?

피자 가격은 대략 저 정도. 장소가 장소다 보니 비싼 거 인정. 시그니처인 별 모양 피자와, 하루 5개 씩만 만든다는 한정판 피자를 시켜봤다. 그게 뭐지. 

"나폴리에선 와인을 피자 안주로 먹나?"

"아뇨. 이탈리아 사람도 와인이랑 피자는 같이 잘 안 먹어요."

"그럼 뭘 먹어?"

"대개 맥주랑 먹죠."

오호. 이딸리아에서도 피맥이 정석. 알베군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암. 

주방장 특선 모듬 전채. 프로슈토, 모짜렐라, 말린 토마토 등등. 맛난 것들. 

그리고 시그니처 별 피자. 물론 내용물은 아주 충실한 나폴리식 마르게리타 피자다. 

당연히 맛있는데, 아주 충실하게 맛있다. 그리고 저 별의 뿔 모양 손잡이 속까지 매콤한 양념이 잘 되어 있다. 

이것이 한정판이라는 Il futuro della salsiccia e friarielli. 생 소시지를 까서 채소와 함께 마구 볶은 뒤 반죽에 녹아들게 해서 같이 구운 피자. 맛있다. 뭐라 더 표현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대책없이 맛있다. 

아쉬워서 시켜 본 봉골레. 양이 너무 치명적이긴 한데, 저 국수가 믿을 수 없게 맛있다. 국수가 바지락과 홍합의 맛을 쪽쪽 빨아들인 그런 맛. 국수라기보다는 길게 늘인 수제비를 먹는 맛? 놀랍다. 

그리고 나폴리탄 라구 파스타를 더 먹었는데, 이건 너무 맛있어서 그랬는지 사진찍는 걸 잊었나보다. 없어짐. 

점심을 두둑하게 먹고 아자부다이 힐스의 상징 같은 뚜껑 아래서 크레페로 마무리. 

총평: 아자부다이 힐스는 괜찮은 피자집이었다. 좀 비싼 것만 빼면 아주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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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탄다(五反田)은 훈독과 음독이 섞여 있어서 일본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지명이라고 들었을 뿐, 거기 뭐가 있는지 알 일이 없었다. 한번 이쪽에 호텔을 잡으려 했더니 밤에 좀 시끄러울 수 있다고 해서 피한 정도. 

그런데 육식 대가들께서 이 동네가 의외로 맛집이 많다고 하심. 직장인들이 많아서 점심 먹으러 오기 좋은 곳인가? 아무튼 육타 오너 이남곤 셰프의 '인생 함박스텍'이라는 추천을 듣고, 불원천리 달려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바로. 

이렇게 생긴 입구. 바로 왼쪽에 대기석이 넉넉하게 확보되어 있는 것이 '우리는 줄 서는 가게'라는 자부심을 돋보이게 한다. 

(야외 좌석 아님)

메인은 누가 뭐래도 함박스텍. 와규 100%를 자랑하는 집이다 보니 함박스텍과 비프 스테이크의 병합 상품도 여러가지 눈에 띈다. 평소같으면 병합 상품에도 관심을 가질만 하지만, 이른 저녁 예약이 기다리고 있는 터라 눈물을 머금고 함박스텍만 시키는 것으로. 

그런데 일행은 3명인데 이 식당의 함박스텍 종류는 4가지다. 

"그래도 네개 다 시켜봐야겠죠.?"

"그럼요."

대강 이런 분위기. 아주 작지도, 아주 크지도 않은, 딱 맛집 사이즈. 

먼저 샐러드를 준다.

뭐.... 샐러드다. 

가장 먼저 나온 1호. 철판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고 있다. 체다 치즈를 얹은 함바그와 데미그라스 소스라는 정통의 조합. 가지, 당근, 구운 감자, 매쉬드 포테이토, 머리 뗀 숙주가 같이 익어가고 있다. 

사실 모든 함박은 거죽만 익힌 레어 상태로 서빙되기 때문에, 더 익히고 싶은 사람은 저 상태에서 반으로 갈라 아직도 쩔쩔 끓는 철판에 익혀야 한다. 

2번. 계란 후라이를 얹은 함바그에 야자와 소스. 먹어 보니 우스터 소스와 간장의 조합 같은 느낌이다. 간장 맛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좋은 선택일수도. 

아, 여기에 공기밥과 미소시루가 나온다. 

3번 조합. 모짜렐라 치즈를 얹은 함바그와 토마토 소스. 

4번은 소바 장국에 많이 넣는 간 무(오로시)와 폰즈 소스. 느끼한걸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선호할 수도. 

개인적으로 3번-1번-2번-4번의 순. 다음에 다시 갈 의사는 매우 크고, 만약 다시 간다면 토마토 소스와 데미그라스 소스 중에서 고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 사진의 모델과 똑같이 생긴 종업원이 서빙을 하고 있다. '혹시 이 가게 모델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차를 불렀는데 차가 엉뚱한 위치에 있다고 그 위치까지 달려가서 차를 다시 잡아 준 기타야마상, 감사합니다.

그 밖에도 서빙이 세련되고 친절한 가게. 

그리고 식사 후에는 누구나 다 가는 다이칸야마 츠타야 서점을 이제야 처음 가 봤다. 

(내가 얘기했잖아. 도쿄 잘 모른다고.)

눈길을 끈 것은 아사노 타다노부의 화집. 

제목 자체가  Gaps in the film, 촬영 중간중간 짬 날때마다 그렸다는 얘기 아닌가. 

워낙 좋아하는 배우였는데 더 호감이 가네, 이 아저씨.

서점에 왜 이런게? ;

아무튼 이런 서점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고 나서 한 10년 전, 이 츠타야 서점이 생기기 전에 이 동네를 와 봤다는 걸 기억해냈다. 

아무튼 도쿄는 계속 발전하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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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 일본 민예관이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안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2018년에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정병모 선생이 민화에 대해 강연을 했고, 그때 마침 현대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던 민화 전시회에 갔는데, 전시 작품 중 몇몇이 도쿄에 있는 '민예관'이라는 곳에서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민예관이 뭐야, 찾아보니 그 유명한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사설 박물관의 이름이었다. 

 

뭔가 마음 속에서 비밀의 문 하나가 열리는 느낌...이었다면 과장일까.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 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예전부터 어렴풋이 '한국적 미감에 깊은 애정을 보인 일본인' 정도로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게 다였다. 그가 설립한 민예관이라는 곳이 도쿄에 있고, 거기에 수많은 한국 미술품들이 있다는 것까지는 듣보도 못한 일이었다. 

물론 야나기에 대해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의 전통 미술에 대해 특유의 선입관을 갖게 했다', 혹은 '결코 진심으로 조선의 독립을 지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또한 식민 통치의 한 측면이었다'는 식의 비판도 있다. 이를테면 야나기는 조선사를 중국과 일본 사이에 낀, 어둡고 비참한, 사대를 강요당한 역사로 보았고, 조선의 미술이 한의 미술, 혹은 비애를 짊어진 미술로 드러난 것이 그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야나기의 '진심과 애정'이 바로 일제가 한국을 병합하려 했던 소위 문화통치의 도구로 쓰였다는 시각이다. 

1924년 야나기가 경복궁 집경당에서 개관한 조선민족미술관

하지만 당시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있던 조선의 암울한 상황과, 그 당시 한국 지식인들이 야나기에게 보인 호의를 생각하면, 오히려 후대 사람들이 무리한 평가를 내리는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항상 시대의 한계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야나기 이전에는 과거 한국인이 이룩한 미적 작업 중에서도 백자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미학에 대한 평가가 매우 낮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스스로를 자각할 능력이 없었다고나 할까.  "깨진 사기 조각, 항아리 조각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로 여겨졌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백자나 사발 같은 서민적인 작품에서 미감을 느끼고, 그것을 '백성의 예술', 즉 '민예(民藝)'라는 이름으로 불러 준 사람이고, 무엇보다 1924년 서울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당시 조선총독부는 이 미술관의 존재, 특히 그 이름에 '민족'이라는 것을 넣는 데 노골적인 불쾌감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문화통치 시기였기 때문에 박물관 자체를 막지는 않았고, 1945년까지 존속됐다. 해방 이후 서울에 있던 대부분의 소장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넘겨받았다.

 

전문가도 아닌 내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것은 별 의미 없는 일일 것 같고, 왜 일본민예관이라는 곳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는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것 같다. 구글 지도에서 일본민예관의 위치를 찾아봤다.

 사실 일본을 꽤 오갔지만 일본어 한마디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정작 도쿄에는 어디에 뭣이 있는지 잘 모른다.  도쿄는 놀러 가기보다는 거의 출장으로 간 탓에 다른 일에 신경을 쓰기 힘들었고, 근래 휴가로 일본을 갈 때에는 홋카이도와 큐슈를 번갈아 다녔기 때문에 자유롭게 도쿄 곳곳을 오갈 수 있었던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시부야 역에서 전철과 도보로 10여분 정도. 생각보다 변두리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번 여행 날짜를 잡고 나서 일본 민예관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니,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선민족미술관' 특별전. 조선민족미술관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가 걸려 있는 거다. 

 

아무 근거 없지만 이건 운명이구나 하는 생각. (물론 뇌과학자 모 선생님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하셨지만 ㅎㅎ)

 

왠지 이때를 놓치면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스케줄을 뽑았다. 일본 민예관이 있는 동네는 시부야구에서도 대략 고급 주택가로 알려진 고마바(駒場) 지역이다. 앞서 지도에서 보듯 도심에서 그리 크게 떨어진 것도 아닌데, 일반적인 도쿄 여행자들의 동선과는 별 교차점이 없다. 

시부야 역을 경유하지 않고 가는 방법. 도심에서 전철 치요다센을 타고 요요기우에하라 역에서 내리면 시부야구에서 운영하는 하치코버스(일종의 마을버스)가 다닌다. 요금 100엔.

요요기우에하라 역에서 시부야 역 방향으로 세 정류장을 가 우에하라 2초메 미나미에서 내린 다음, 고마바 지역에서 10분 정도 주택가 골목을 걸으면 일본 민예관이 나온다. 

한적하고 곱게 단장된 길. 양쪽의 집들이며 주차된 차들을 보면 꽤 사는 분들이 사는 동네 맞는 듯.

좁은 길을 사이로 일본 민예관과 야나기 무네요시가 살았던 집이 마주 보고 있다.

매표소에서 1100엔짜리 표를 끊으면 두 장의 표를 준다. 한장은 서관(야나기 본가) 관람권, 하나는 민예관 본관 관람권. 서관은 4시까지만 개방하니 그쪽을 먼저 보고 오라는 안내까지 해 준다(본가는 개방하지 않는 날도 많다). 

사실 서관은 딱히 큰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늑하고 곱게 단장된 2층집. 고아(古雅)하다는 말이 절로 느껴진다.

 

특히 서재가 좋아 보였다. 볕 잘 들고 통풍도 좋을 듯한 넓은 창, 단단하고 기대기 좋을 듯한 넓은 책상, 벽 둘러 쌓인 책장. 지금이라도 그 서재에 들어가 앉으면 일어서기 싫을 듯한 방이다.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 두었으면 좋으련만, 집 전체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라 아쉽지만 그냥 집을 나서야 했다.]

본관 전시. 역시 2층 집인데 보기보다 앞뒤로 넓은 집이었다. 전시 소개 포스터/도록의 표지가 모두 같은 그림이다. 사진 위의 맨 왼쪽, 가는 풀 문양이 그려진 청화백자 각항아리가 바로 야나기가 처음 조선 백자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바로 그 작품이라고 한다. 아래쪽 전시 광경은 조선민족미술관의 전시실 사진. 

 

1층에선 이번 특별 전시와 별 상관 없는 유럽 공예품 등의 상설 전시중. 2층으로 올라가자 가장 눈길을 끌 만한 공간에 깨진 도자기 파편들이 정성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 조선에서 넘어 온 것들. 대체 이걸 왜 전시해 놓았을까.

굳이 말하자면 '내가 눈여겨 보지 않았어도 당신들이 이 다음에 보게 될 명품들을 명품이라고 느끼고 있을까' 라는 공치사일까. 내가 손대기 전에 이 귀물들이 얼마나 천대받고 있었는지 직접 보라는 뜻일까.  이 생각 자체가 유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설사 그런 공치사라 해도, 충분히 인정할 만한 업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듣던 대로 민예관 전체가 사진 촬영 금지 구역이고, 이번 전시에서는 대략 대여섯 점 정도만 촬영 허가 팻말이 붙어 있었다. 그나마도 평소보다는 후한 것이라고 한다. 도자기에 대단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가기 전 도서관에서 '일본 민예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 도자기 일람'을 한번 살펴봤다. 가장 관심이 간 작품은 이런 것들이었다. 

코믹한 표정의 민화풍 호랑이가 떡 자리잡은 백자 항아리.

그리고 세상에 이런 백자가 있나 싶었던 3중 찬합.

다행히 이번 전시품 중에 둘 다 있었다.

민화 속 호랑이가 그려진 백자동화호문호는 그리 섭섭지 않은 크기였고, 백자청화채찬합은 과연 찬합으로 쓸 수 있었을까 싶게 작았다. 찬합이란 용도대로라면 어른 한끼분 정도의 반찬을 담으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 어쨌든 한국 백자 중에서 저렇게 전체를 푸른 색으로 칠한 그릇은 처음 봤기에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두개만으로도 이 전시를 보러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만 했다.

그밖에 사진 촬영이 허가됐던 품목들은 이렇다. 

이 자기들을 설명하는 표찰(사진 오른쪽 아래를 보듯, 작품 이름을 설명해 놓은 것 외에는 아무 해설이 없다) 중 상당수에 염부(染付)라는 말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는데, 이 염부가 청화백자의 청화를 뜻하는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일본어로는 소메츠케라고 읽는다. 

이건 금사리 자기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18세기 경기도 광주 금사리 가마에서 나온 물건이라는 뜻. 즉 한국식으로 저 표찰을 읽으면 '난초 문양과 글자가 들어간, 금사리에서 구워진 청화백자 항아리' 라는 뜻이다. 

포도줄기와 잎이 그려진 청화백자 항아리.

여기엔 또 염부에 진사까지 붙은 염부진사 染付辰砂 라는 설명이 있다. 뒤의 화조문면취호(花鳥紋面取壺)라는 것은 꽃과 새가 그려진 각진(面取) 병이라는 뜻인데, 왜 굳이 병(甁)이 아닌 항아리(壺)라고 썼는지 궁금하다. 아무튼, 대체 염부진사가 뭘까. 물론 찾아보면 다 나온다. 

염부진사(染付辰砂)란 일본어로 소메츠케 신슈, 요즘 우리가 쓰는 용어로 하면 청화(靑華)+동화(銅畵)에 해당하는 모양이다. 즉 백자에 청색 안료를 넣은 청화, 산화철을 넣은 철화처럼 산화동을 넣어 그림을 그린 백자를 동화라고 부른다. 즉 대부분의 봉황 몸체는 청화로 그려 푸른색이고, 벼슬과 날개 일부에 산화동을 이용해 붉은 색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소메츠케 신슈라고 설명한 것. 

이 봉황문 항아리도 도록에서 먼저 보고 실물이 궁금했던 것이라 감회가 깊었다. 

반면 위쪽의 꽃 그림 병은 산화동으로만 그렸기 때문에 신슈(辰砂)라고만 쓰여 있다. 진사초화문병. 

 

그러니까 이 특별전 중에서 가장 아껴둔 물건들을 이 특별 전시실에서 전시하고, 그중에서도 몇개를 골라 사진을 찍을 수 있게 해 두고 있었다. 언뜻 봐도 참 좋은 물건들인데, 이 물건들을 눈으로만 보고 오려니 참 아쉽기 짝이 없었다. 물론 도록도 샀지만, 도록은 대부분 흑백이라... 

못내 아쉬워서 휴식공간 앞에 있던 장식장을 한장 찍어 봤다.

가운데 줄 왼쪽이 바로 가기 전부터 보고 싶었던(위에서 언급한) 3중 찬합이다. 

휴식공간 바깥쪽의 항아리들. 뭔가 어린 시절 집집마다 있던 장독대가 생각나 정겨웠다. 

일본 미술관에 가면 언젠가부터 이런 테누구이(手拭)들을 눈여겨 보게 된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 몇개 사도 큰 부담이 없는.  그런데 예쁘다. 도록과 함께 기념품으로.

어느새 문 닫을 시간이 된 미술관. 간혹 한국에서도 전시하고, 수집 과정부터 '일제가 강탈해 간' 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물건들이지만, 그래도 남의 손에 있는 것이 아쉬운 마음을 지울 수는 없었다. 

곧 또 만나게 되길. 

 P.S. 조선민족미술관 100주년 기념 전시는 8월25일까지 진행된다니 그 사이 도쿄에 가실 분들은 짬이 나면 들러 보시길. 결코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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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뭘 하는 곳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수용소에서 일하는 독일군들은 당연히 수용된 유태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특히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는 아내 헤드윅(잔드라 휠러)과 다섯 아이들을 데리고 수용소 담장 바로 밖에 아름다운 집을 짓고 살았다.

 

뜰에는 넓은 잔디밭과 꽃들이 우거졌고, 마당에는 아이들을 위한 수영장이 있었다. 가족들은 여름이면 부근의 강에서 수영을 했고, 저녁때면 마당에 간단한 파티 테이블을 차려 놓고 의자에 기대 지는 해를 바라보곤 했다. 그 석양을 배경으로, 아우슈비츠에서는 거대한 굴뚝이 밤새 연기를 뿜어냈다...

2. 영화는 회스 부부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악마적인 삶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소름끼치게 보여준다. 회스에게 유태인 학살은 음식쓰레기 배출이나 수돗물 공급과 마찬가지로, 처리해야 할 업무일 뿐이었다. 아내 헤드윅은 유태인 포로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유태인들로부터 빼앗은 옷가지와 각종 물품을 아무 거리낌없이 받아 쓴다. 반면 자신들의 자녀와 가족에 대해서는 너무나 자애롭고 헌신적인, 훌륭한 부모다.

 

이들의 관심사는 이 평온하고 풍요로운 삶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뿐. 헤드윅은 회스가 아우슈비츠 소장직을 그만두게 될 때 "나는 여기서 떠날 수 없어!" 라며 흥분하고, 회스는 어떻게 하면 상부의 신임을 얻어 소장직을 되찾고, 헤드윅을 실망시키지 않을까에만 관심이 있다. 수십만의 유태인을 학살하고 있다는 데 대한 죄책감 같은 것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진정 충격적이다.

여기까지 보셨으면 이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은 충분하다. 나머지는 영화 속 디테일에 대한 소소한 얘기들. 딱히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어렵지만(이 영화의 결말을 모를 사람은 없을테니), 아무튼 강추작. 박수가 아깝지 않다.

자, 그냥 표 사러 가세요. 나머지는 영화 보고 다시 오시길.

 

가운데가 루돌프 회스

3. 이 끔찍한 이야기는 다소 과장된 우화처럼 보이지만, 거의 모두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이 또한 놀랍다). 루돌프 회스는 실존인물이고, SS 장교 출신으로 2차 대전이 끝나기 직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이었다. 1943년 11월 잠시 다른 인물과 교체됐지만 44년 5월 복귀했다. 그는 가족과 함께 '존 오브 인터레스트', 즉 나치가 아우슈비츠 주변 약 40제곱킬로미터의 지역에 설치한 특별 구역의 이름인데, 이 동네에 멋진 마당이 있는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회스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 마틴 아미스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전쟁이 끝나고 회스 가족은 자취를 감췄다. 추적자들은 먼저 북부 독일의 어느 공장에서 노동자로 변신해 있던 아내 헤드윅과 가족들을 찾아냈고, 헤드윅은 처음엔 남편이 죽은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알고 있는 사실을 자백했고, 회스 또한 덴마크 국경 지역에서 농부로 가장하고 있다가 체포됐다.

 

회스는 자신이 1941년부터 43년까지 SS 지도자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약 200만명의 유태인을 가스로 살해하고 시신을 태우는 작업을 지휘했음을 자백했고, 사형을 선고받아 아우슈비츠 수용소 자리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회스 역을 맡은 크리스티안 프리델. 매우 흡사하다.

4. 과연 회스의 가족들, 아내 헤드윅과 자녀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을까. 회스는 종전 후 재판에서 "최소한 아내와 장남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녁때마다 하늘을 뒤덮는 거대한 연기, 그리고 시체 타는 냄새를 맡으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기는 쉽지 않았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방문자들은 이 냄새와 연기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 지역에 살고 있던 독일인들은 금세 익숙해져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학살당한 유태인의 것임이 분명한 모피 코트를 뽐내는 헤드윅.

4. 조나단 글레이저는 이 영화에서 모든 것을 선명하게 알려주지 않는 쪽을 택했다. 예를 들어 회스의 장모는 왜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지, 어느날 회스 앞에서 신발을 벗는 여자는 누구인지, 낚시를 하던 회스는 왜 갑자기 아이들을 물에서 꺼내 집으로 끌고 오는지, 왜 갑자기 회스는 구토 증세를 보이는지 등에 대해 깔끔한 설명은 주어지지 않는다. 물론 상황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긴 하다. 

 

장모는 정말로 태연하게 악마의 삶을 살고 있는 딸과 사위 가족을 보고 충격을 받아 달아난 것이고, 회스와 아내는 아우슈비츠에서 상당수의 유태인들을 몸종처럼 부리고 때로 성노예 취급도 했을 것이고, 강물에서 시체 태운 재를 발견한 회스는 '아이들'이 그 재에 오염될까봐 깜짝 놀란 것이고... 구토는 아마도 잠시나마 '미래의 사람들이 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 와 같은 자각이 일시적으로 무의식을 뚫고 나와 신체에 반응을 일으켰음을 상징하는 것일텐데, 이런 해석들이 맞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이런 것들을 스스로 생각하고, 추론하고, 결론을 내리기를 글레이저 감독이 바란 것일 뿐. 

 

벽에 사과를 박아 넣는, 뒤집힌 그림 속 소녀도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몇몇 폴란드 사람들은 작업 중에 유태인 수감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밤에 몰래 진흙 속에 음식을 감춰놓기도 했다고 하는데, 영화 내용중에는 '사과 하나를 놓고 두 수감자가 싸움을 벌였다'는 말을 들은 회스가 '둘 다 강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하는 장면도 있다. 

5. 홀로코스트라는 것이  '그저 명령에나 복종하고, 조직 안에서 과업의 완수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인간들에 의해 집행되었다는 보고는 2차대전 이후 많은 연구자들에게 충격을 줬다. 그것이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이르면, 이건 '악의 평범성'을 넘어 '악의 무심함'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물론 이 영화는 그저 홀로코스트의 고발에서 그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담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살과 희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을까. 글레이저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가자지구의 학살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호소했다. 단지 홀로코스트의 고발만이 중요했다면, 당시의 피해자였던 유태인들이 이제 가해자가 되고 있다는 기괴한 현상을 외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쟁 외에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늘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들은 담 너머의 참상에 고개를 돌린다. 아니, 엄밀히 말해 모든 선진 문명국들의 풍요는 일정 부분 이상 '담 너머'의 희생에 일정 부분 이상 빚을 지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생각하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소름끼치는 은유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6.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2024 아카데미 작품, 각색, 감독상을 포함해 5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그중 국제영화상(구 외국어영화상)과 음향상을 수상했다. 봉준호 감독의 "아카데미상은 로컬 영화제잖아요" 이후 영어가 아닌 언어를 바탕으로 제작된 많은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에 오르는 바람에, 소위 국제영화상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이 2024년 시상식에서도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작품상과 국제영화상 후보에 모두 오른 반면, <추락의 해부>는 작품상 후보에는 올랐지만 국제영화상 후보에서는 빠졌다. 작품상이 아카데미상의 최고상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이 국제영화상 후보에는 들지 못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하다(물론 해당 국가에서 <추락의 해부>를 후보로 밀지 않으면 국제영화상 후보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이 현행 제도다). 

 

7. 다만 개인적으로 음향상에는 다소 의문이. 과연 이 영화의 검은 화면이 필수불가결한 것인가? 그렇게 대사 없는 장면이 꼭 필요한 것이었나? 여기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굉음과 비명을 꼭 들려주면 더 좋은 영화가 되는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겐 이 영화의 잔잔한 분위기 속에 감춰진 악의 선명함으로 충분했고, 굉음에 가까운 음향은 오히려 과잉으로 느껴졌다. 

 

물론 그 외에는 모든 부분에서 칭찬하고 싶은 걸작. 꼭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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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종>이라는 새로운 드라마가 나온다는 것, 그리고 이수연 작가의 작품이고 한효주 주지훈이 주인공이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작품이 한방에 다 올라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차례에 나눠 업로드 된다는 걸 알고 나선 '다 올라오면 봐야겠다'로 태세를 전환했다. 마침 <쇼군>을 추천하시는 분들이 있어 이번 디즈니 멤버십 부활의 타겟을 <쇼군>과 <지배종>으로 잡았다.

 

(이 OTT 난립의 시대, 그 많은 OTT에 모두 월사금을 바치는 것은 너무 부를 과시하는 일이라는 입장이라, 대부분의 OTT들은 똑 똑 떨어지는 빗물이 고이면 멤버십을 살려 후루룩 마시고, 바닥이 마르면 구독을 끊는 형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업계 종사자분들, 이해하시죠?)

요즘 핫한 바이오 산업을 무대로 하는 드라마라길래 주인공들이 너무나 야근을 많이 해서 <집에 좀> 가라는 드라마인가 잠시 생각했으나(...죄송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정 한국에서 보기 드문 웰메이드 테크노 스릴러였다. 디즈니 플러스를 볼 수 있는 분들이면 지금이라도 꼭 보시길.

 

(올해 상반기에 드라마 좀 보시는 분들을 만날 때마다 다들 '아니 왜 이렇게 볼만한 드라마가 없어요?' 하시던데, 보실게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였어요. 주제 의식, 전개, 배우들의 연기, 핵심을 찌르는 대사, 다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꼽기에 손색이 없네요.)

 

시작: 현재에 아주 가까운 미래. 동물의 특정 부위 세포를 대량 증식해 소를 잡지 않고도 꽃등심이며 안심을 실험실에서 배양해 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축산업의 양상이 뿌리부터 흔들린 시대. 그 중심에 한국 기업 BF가 있다. 수백조 가치를 평가받는 세계적인 바이오 기업 BF 총수 윤자유(한효주)는 과감하게 농업과 축산업을 공장에서 대체하는 것만이 환경 파괴를 막고 인류 문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길임을 역설한다. 

 

해군 대위 출신의 경호원 채운(주지훈)은 전직 대통령(전국환)을 불구로 만들고 자신을 퇴역하게 한 의문의 폭발 사건에 대해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은 채운에게, 당시 폭발 현장에 윤자유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BF에 접근해 그 배후에 BF가 있는 것은 아닌지 조사해 볼 것을 지시한다. 

한편 BF는 생계 위협을 받는 농어민들의 시위로 여론이 악화되고, 국제적인 사이버 테러리스트 집단에게 해킹을 당해 거액을 요구받는 위기를 맞는다. 총리 선우재(이희준)는 이 상황을 정국 운영에 유리하게 활용하려 하고, 선우재의 아버지이며 재벌 그룹 회장인 선우근(엄효섭)은 윤자유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BF의 지분을 요구한다. 

 

스포일러가 싫은 분들은 대략 여기까지. 당연히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윤자유와 채운은 어찌 어찌 같은 편이 되어 공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진땀을 흘리고, 역시 이수연 작가의 팬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 모든 주요 등장인물들은 누가 정말 같은 편이고 누가 정말 적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의심하고, 누군가는 누군가를 위해 진심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재미있다. 얼른들 보셔.

참, 제목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분들도 있던데 지배종이란 dominant species, 즉 여러 생명체가 같이 존재하는 하나의 생태계에서 가장 지배적인 종, 즉 다른 종들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종을 말한다. 당연히 지구 생태계의 지배종은 인간인데, 내용상 이 드라마에서 지배종이란 현생 인류보다 한 단계 더 진화했다고 볼 수 있는 '새로운 인류'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여기까지만. 

 

(스포 경고. 넘어오지 마세요)

 

<비밀의 숲>에서 거대한 적들에 비해 돈도 없고, 뭔가 힘도 없는 주인공들의 노력이 안타까우셨던 분들이라면 이번엔 좀 편안하게 보실 수도 있을 것 같다. 비록 상대인 재벌그룹이나 국무총리만은 못하지만 BF그룹은 기술도 있고, 맨파워도 있다. 최소한 돈이 없어서 뭘 못하는 일은 절대 없다. 경호원도 수십명씩 고용할 수 있다.

 

비록 이 드라마가 근미래, 아직 이뤄지지 않는 신기술이 적용된 사회상을 그리고 있지만, 혹시나 <그리드> 같은 드라마일까봐 걱정하실 필요는 없다. <그리드>에 비하면 기술은 그렇게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고, 복잡한 타임슬립 트릭도 없다. 연출 의도인지 가끔씩 시간상의 인과가 헷갈릴 때도 있지만, 시청에 방해 되는 요소는 아니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역시 <24>나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느낌의 슈퍼 에이전트가 종횡무진 활약하는 드라마라는 점. 국내 드라마 주인공 중에선 이 작품의 주지훈에 비견될만한 캐릭터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배신+배신으로 점철되는 악당들의 뿌리를 추격해 가는 과정이 탄탄한 플롯 덕분에 엄청난 몰입감을 준다. 심지어 <존 윅>에나 나올법한 파워 수트, 인공장기 수술의 부작용(?)인 초인적인 힘까지 장착하다니. 

윤자유라는 '이상주의자이면서 유능한 이과 출신 경영자'의 역할을 한효주 외에 다른 어떤 여배우가 연기할 수 있었을지도 솔직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 역할은 수시로 매우 인간적인 대학교 서클 회장 언니에서 사람 수십명의 목숨 따위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적들과 한치 양보없이 싸워야하는 우리편 대장의 면모를 오가야 하는데, 결코 구현이 쉽지 않을 인물이 한효주 덕분에 매우 설득력있게 그려졌다. 

그리고 드라마에 생동감을 주는 것은 역시 막강한 악의 무리들. 엄효섭, 이희준의 화려한 악당 연기는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고, 잘 모르는 배우였던 박지연의 열연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아쉬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악당들'의 목적이 BF가 갖고 있는 '진짜 무서운 비밀'의 확보에 있었다면, 대체 김신구 교수(김상호)를 굳이 죽여서 얻는 것이 무엇인가. 살려서 핵심 원천 기술을 빼오는 것이 훨씬 더 좋은 활용이 아닌가 하는 대목 처럼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몇 군데 있다.

 

또 후배 경호원은 하필이면  '칼과 불을 막아내는' 파워 수트를 입고 있다가 죽고, 경찰 세 사람을 공중부양시키는 채운의 괴력은 막상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특공대원들과의 1:1 대결 때에는 어디론가 실종되어 버린다는 진행 등도 아쉽다. 가장 중요한 전투 신에서 채운이 좀 더 슈퍼파워를 과시했어야 하는 건 아닐지. 

그래도 현 시점에서 가장 시즌2가 기대되는 한국 드라마라면 아무래도 <지배종>을 첫 손가락에 꼽게 된다. 내부 상황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디즈니 플러스의 빠른 결단을 촉구한다. 

P.S. 그리고 디즈니 플러스 마케팅 점검 좀 하시죠. 어떻게 구글 검색을 해도 포스터 말고는 검색되는 사진이 이렇게 없을수가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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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파리. 30세 가량의 루실은 50대의 재력가 샤를과 함께 살고 있다. 한때 사교계의 여왕이던 40세의 디안은 10년 어린 미남 앙트완을 사귀는 중. 어느날 이들은 모두 상류층 사교 모임에서 만나고, 루실과 앙트완은 동년배인 자신들 둘만이 그 모임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갖는다.

모든 것은 여기서 시작된다.

영화 <패배의 신호(1968)>에서 왼쪽부터 루실, 디안, 앙트완, 샤를. 사진은 모두 이 영화의 컷들이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맨 밑에.


재미있는 소설을 읽은 지가 꽤 오래됐다는 생각이 든다(생각해 보니 소설 자체를 읽은지가 좀 됐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주황색 표지의 책. 얼마전 재미있는 드라마의 기준 이야기를 하면서 ‘2배속으로 볼 수 없는 드라마’를 조건으로 꼽은 적이 있는데, <패배의 신호>는 얇지만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사실 프랑수아즈 사강이 이렇게 놀라운 작가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오래 전, 어딘가 중역의 냄새가 짙은 <슬픔이여 안녕>이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었을 때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혹은 <슬픔이여 안녕>을 썼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노련함이 깃들어 있다. 사강이 딱 30세였던 1965년에 쓰여진 책인데 30세로 설정된 루실보다는 40세 정도로 설정된 디안에게 뭔가 더 감정이입이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루실과 샤를.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배경은 파티다. 소설 내내 '파티'라고 이름붙여진 상류층의 관찰 게임이 등장한다. 모든 참석자는 연기자이면서 관객이다. 모두가 모든 사람을 보고 있다. 노련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를 잘 알고 있고,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자신의 역할을 연기하려 노력한다. 참석자들 사이에는 이미 경제/사회적인 우열과 의존의 관계가 있고, 모든 이들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돈과 인기, 즉 매력을 다 갖춘 플레이어들은 최강자이므로 이 게임을 주도할 수 있다. 물론 전제는 모든 플레이어들이 암묵적인 룰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샤를과 디안은 오랫동안 이 게임의 강자들로 군림해왔지만, 불행하게도 룰을 인정하지 않는 두 젊은 플레이어들을 이 무대로 끌어들인 탓에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 그 무대에선 ‘무슨 짓을 해도 좋았던’ 자신들의 오랜 입지가 흔들리는 수모를 겪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젊음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지 않은 댓가다.



‘디안은 전날의 사건이 완화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클레르는 안하무인인 디안이 무슨 변덕인지 정오에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는 말을 퍼뜨릴 수 있었다. 디안은 파리에선 기본이 되는 이 원칙을 잊었다. 바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절대 사과해선 안 된다는 것과, 꺼림칙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누구나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는 것.’



<패배의 신호>를 읽는 것은 잘 부스러지는 여러 겹의 페스트리 빵을 먹는 것과 같다. 손 대기 무섭게 부서져내리는 내리는 부스러기 하나 하나에 모두 감춰진 의미가 있다. 모든 이들이 모든 이를 바라보는 그 시선 하나 하나를 해부하는 사강의 시선은 ‘섬세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구석이 있다. 

루실과 앙트완.

스스로 패배로 인정하지 않는 결말을 얻기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는 샤를, 자기가 아는 단 한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는 앙트완을 그리는 붓끝도 선명하지만 두 여주인공, 루실과 디안을 그려내는 필치는 실로 감탄을 자아낸다. 낮에 앙트완과 밀회를 즐기고, 헤어지기 아쉬워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지만, 그 사이 저녁 파티에서 예기치 않게 앙트완와 마추쳤을 때에는 약간 번거롭게(?) 느끼는 루실. 앙트완과 루실의 관계를 짐작하고 슬퍼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루실을 인정하는 디안. 

디안과 앙트완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샤를에게서 키다리 아저씨의 잔상을 볼 것이고, 어떤 이들은 디안의 우울에서 동질감을 겪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루실에게서 자신의 과거를 볼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디안에게서 자신의 미래를 볼 지도 모른다. 물론 루실과 디안이 모두 자신의 과거였던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재미있게 읽힐 것이라고 확신한다. 인생을 아는 사람에겐 더 많은 것이 보인다. 

(일각에서는 샤를을 '포용하는 사랑'의 주체로 해석하는 듯 하지만, 나이 먹어 이 책을 읽고 보면 결국 샤를의 태도는 포용이라기보다는 전략적 판단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과연 샤를의 입장에서 앙트완과 무슨 경쟁을 하든, 정면 대결을 한다면 패배는 불보듯 뻔한 상황. 이럴때 뒷날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은 역시 시간이 흐른 뒤에는 앙트완이 '백신'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노회한 지혜가 아닐지.)

 

분명한 것은 아무도 사강에게 동정을 기대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사강은 내내 모든 등장인물을 조소한다. 젊은 애인을 어떻게 해서든 잃고 싶지 않은 샤를의 어리석음("샤를은 2년 전부터 바보가 되어 있었다")을, 그와 마찬가지인 디안의 집착을, 루실의 지킬 수 없는 약속을("혹시 내가 당신을 불행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절대 우스워지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앙트완의 아집을 비웃고 있다.

 

그 서늘함을 즐길 사람이라면, 강추. 

 

P.S.1. 이 포스팅에 등장하는 사진들은 모두 1968년 알랭 카발리에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패배의 신호>의 장면들이다. 카트리느 드뇌브가 루실 역을, 미셸 피콜리가 샤를 역을 맡았는데 드뇌브야 누가 뭐랄 사람이 없겠지만 샤를이 전혀 미중년으로 보이지 않는 대머리 아저씨라서 실망. 1960년대 파리의 눈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던 것 같다(누군가 세계에서 가장 대머리에 관대한 나라가 프랑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는데, 그 말이 맞는 지도).

게다가 디안 역을 맡은 이레느 툰치가 지나치게 미인이라 루실-디안의 대조가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첫 장면에서 카트리느 드뇌브가 입고 나오는 옷이 바로 오렌지색 니트 스웨터. 우연의 일치라기엔 매우 신기하게, 한국어 번역서의 장정 컬러와 같다.

 

1988년 <한줌의 먼지>.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주연으로 영화화됐다.

P.S.2. 이 책을 흥미롭게 보신 분이라면 두 편의 다른 작품을 추천. 하나는 <롤리타>로 잘 알려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어둠속의 웃음소리>, 그리고 또 하나는 영국 작가 에블린 워의 <한줌의 먼지>. 세 작품 모두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냉철하고도 섬세한 분석이 일품이다.

세 권의 책을 읽고 나면 사랑하는 사람을 젊은 남자에게 빼앗긴 독일 중년 남자, 영국 중년 남자, 프랑스 중년 남자의 각기 다른 반응을 비교해 볼 수도 있다. 

 

P.S.3. <La Chamade>는 '퇴각 나팔'이라는 뜻이지만 '예기치 못한 감정의 격동'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La Chamade>의 영어 번역 제목으로는 주로 <Heartbeat>이 사용되는 듯 하다. 그 전혀 다른 두 의미가 같은 단어에 담겨 있다니, 프랑스어는 참 묘한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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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드 맥스: 퓨리 로드>의 프리퀄 <퓨리오사>는 문명의 종말을 맞은 호주 대륙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경작이 가능한 땅, 녹색의 낙원에서 시작한다. 열살 남짓한 소녀 퓨리오사는 엄마(찰리 프레이저)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어느날 우연히 그곳을 발견한 디멘투스의 졸개들에게 납치된다. 

 

녹색의 땅을 지키는 전사들, 부발리니 중 하나인 엄마는 퓨리오사를 구출하기 위해 추격에 나선다. 물론 딸도 딸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녹색의 낙원의 위치를 알게 된 졸개들을 해치워야 했다. 폭주족의 리더 디멘투스(크리스 헴스워스)는 과일이 열리는 땅이 남아 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다. 이렇게 시작된 퓨리오사의 기구한 팔자가 어찌 어찌 진행되어 엄마와 떨어진 소녀가 시타델의 사령관 퓨리오사가 되었는지를 그려내는 영화.

주인공은 당연히 퓨리오사지만 그 밖에 눈에 띄는 여성 캐릭터는 거의 없다. 퓨리오사의 엄마와 엄마 친구를 빼면 아예 없다고 봐도 좋은 정도. 



그럼에도 이 영화가 <매드 맥스: 퓨리 로드>에 이은 여성 중심의 서사라는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남성 캐릭터들은 최상위 서열의 지도자들에서 말단 전사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뇌라고는 없는, 지배욕와 파괴, 탐욕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존재들이다. 공생을 위한 의지 같은 것은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

 

아무래도 곧 현실이 될 것 같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지구에서 그나마 어떻게든 생명을 이어가려 노력하는건 여성들 뿐이다. 지식인의 흔적은 '히스토리언'이라는 존재로 남아 있긴 한데, 거세된 환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조지 밀러는 이 영화를 통해, 인류 문명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이야기'들이 대부분 순수한 폭력과 광기, 공포가 지배하는 세계를 미화한 데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아드레날린과 욕구불만으로 꽉 차 있는 올림푸스나 발할라 풍의 남신/영웅들을 조소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런 맥락에서 그 대표자인 디맨투스 역을 '토르' 크리스 헴스워스가 맡은 것은 너무나 적절한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헴스워스의 열연이 펼쳐진다.

 

(가스타운에 벽화로 그려진 워터하우스의 '물의 님프들' 또한 이 남신들이 주도해 온 신화 비꼬기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존 워터하우스, 힐라스와 물의 님프들. 1815

개인적으로 <퓨리오사>에 매우 만족하지만, 아쉽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잘난 전작 <퓨리 로드> 때문이다. 아냐 테일러 조이도 인상적인 열연을 펼치지만 그 역시 샤를리즈 테론의 그림자 안에 있다.

 

하지만 <퓨리 로드>만으로 알 수 없었던 주인공들의 동기들, 특히 녹색의 땅에 대한 퓨리오사의 열망과 좌절을 이해하게 하는 데에는 매우 성공적인 프리퀄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퓨리오사>가 없이 <퓨리 로드>만 있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퓨리오사>를 만들어 준 조지 밀러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시타델을 중심으로 한 생태계의 두 축, 가스타운과 총알농장의 실체를 볼 수 있었다는 점도 좋았고 무엇보다 두시간 반 내내 쏟아지는 광기어린(!) 폭력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퓨리 로드>에서 최강의 존재감을 과시했던 '빨간내복'이 나오지 않는 점은 아쉬우나, 시타델의 전투 트럭이 공중에서 공격하는 옥토보스의 부하들에 맞서 싸우는 전투 장면의 박진감은 결코 전편에 뒤지지 않는다. 


이제 79세인 조지 밀러는 과연 얼마나 더 이런 괴물같은 영화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imdb에 따르면 이미 여섯번째 매드 맥스 시리즈 제작에 들어간 것 같은데(톰 하디의 차기작 중에도 이 작품이 거론되고 있다), 문득 조지 밀러 버전의 트로이 전쟁 이야기나 <코난 더 바바리안> 같은 것이 보고 싶어졌다. 

 


P.S. 과연 <퓨리오사>를 보고 나서 <퓨리 로드>를 다시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두편 다 안 봤다고? 서둘러라. 인생은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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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 플러스의 10부작 <쇼군>. 드라마 한편을 보고 나서 이렇게 할 얘기가 많은 작품도 정말 오랜만이다. 일단 줄거리를 살펴보자.

배경은 서기 1600년의 일본. 타이코(태합) 나카야마는 1598년 사망하면서  '5대로'라고 불리는 다섯 명의 강대한 영주들에게 어린 아들의 앞날을 부탁했다. 하지만 2년 뒤, 5대로의 결속은 깨지고, 나카야마의 심복인 이시도는 후계자를 위한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어린 후계자의 생모인 오치바와 동맹을 맺고 강력한 라이벌인 에도의 다이묘 토라나가를 거세하기 위해 갖은 압박을 가한다. 


내전을 예감한 각지의 영주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엄청난 눈치보기를 시전하던 상황, 네덜란드 배를 탄 영국 항해사 존 블랙손이 토라나가의 세력권인 이즈 반도 끝으로 표류해온다. 당연히 일본과 단독 무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포르투갈인들과 그들의 편인 천주교 영주들은 이 개신교도의 출현을 껄끄럽게 바라볼 수밖에 없고, 토라나가는 이 복덩이를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심복의 아내 마리코를 블랙손에게 통역으로 붙인다. 블랙손은 피치못하게 토라나가의 수하가 되어 전국시대의 종말을 앞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일본의 1600년이라면 임진왜란 종결로부터 2년 뒤. 한국인에게도 친숙한 시대인데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왜 생소할까. <쇼군>의 원작을 쓴 제임스 클라벨이 창작의 자유(?)를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인지 유명한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을 모두 바꿨기 때문이다. 저 위의 줄거리에서 나카야마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시도 대신 이시다 미츠나리, 토라나가 대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대입하면 실제 역사가 된다. 사실 블랙손이라는 인물 역시  '안진'이란 이름으로 도쿠가와를 섬겼던 영국인 윌리엄 아담스를 모티브로 하고 있기 때문에 디테일은 다르지만 큰 줄거리는 대략 일치한다. 

 

어쨌든 클라벨의 이 소설은 1975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고, 번역 출간된 한국과 일본에서도 크게 성공했고, 1980년에는 5부작 미니시리즈(약 540분 분량)로 제작되어 역시 큰 성공을 거둔다. 이 미니시리즈는 한국에서 방송되지는 못했지만 2시간짜리 극장판으로 편집돼 1981년 피카디리 극장에 걸린다. 이 영화를 본 사람으로 생각나는 얘기가 참 많은데... 아무래도 이 이야기는 따로 한번 써야 할 것 같다.

쇼군, 1980


1980년판의 리처드 체임벌린(뒷날 <가시나무새>로 잘생긴 남자가 신부복을 입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 바로 그 분이다), 미후네 토시로, 시마다 요코의 명성에 비길 정도는 아니지만 2024판에서도 사나다 히로유키를 필두로 아사노 마사노부, 히라 타케히로 등 할리우드에도 어느 정도 기반을 갖고 있는 일본 톱스타들이 출동해 탄탄한 연기를 보여준다.

사실 드라마의 작중 화자 겸 명목상의 주인공은 블랙손 역을 맡은 코스모 자비스지만, 누가 봐도 진정한 드라마의 축은 토라나가 역의 사나다 히로유키와 마리코 역의 안나 사와이다. 굳이 주제를 찾자면 '아시아의 정치 고수들 손바닥에 놓인 단순한 영국인' 이라고나 해야 할까.  블랙손은 끝까지 일본인들을 깊고 깊은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장깃말처럼 끌려다니는 존재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서 이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야부시게 역을 맡은 아사노 타다노부의 열연이다. 왕년의 섹시 스타가 어쩌다 이런 코믹한 아재가 됐는지 모르겠으나, 야부시게는 여기서 큰 영주들 사이에 낀 소영주, 즉 대영주의 가신들이 겪는 애환을 상징하는 존재다. 명분상의 의리로는 토라나가에게 충성을 다해야 하나, 가문과 영토를 보존하려면 이시도를 무시할 수 없기에 거의 내놓고 양다리를 타는 그런 남자... 전설 속 일본 전국시대 사무라이의 실체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2024년의 <쇼군>이 주는 충격은, 1970년대(소설 <쇼군>은 1975년에 나왔다) 미국인들이 바라보던 저 먼 동양의 신비로운 나라 일본의 이미지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는 거다. 사실 이런 시각은 1969년작인 <007 두번 산다>나, 일본이 세계 최고의 경제 대국으로 떵떵거리고 있던 1993년작인 <떠오르는 태양>에서나 큰 차이가 없다. 이 작품들 속의 일본인들은 항상 신비로운 미소 속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갖고 있고, 특히 여성들은 뭔가 은밀한 임무를 위해 언제든 몸과 마음을 다 외국인들에게 바친다. 상급자의 명령은 하급자에게 절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며, 잘못에 대한 사죄는 결국 항상 셋푸쿠(切腹, 우리에겐 '할복'이 더 익숙하지만 정작 일본어로 많이 쓰이는 이 단어는 한자로 '절복'이다)를 통해서만 해결된다. 

 

현대 일본인들이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 드라마를 만드는 데 동원된 명분은 아무래도 '아니, 누가 지금이 그렇댔나, 이건 400년 전 얘기잖아' 같은 것일텐데, 이 드라마 속의 몇몇 상징들을 봐선 지금도 미국이 일본과 일본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번 <쇼군>에서 블랙손이 일본에 상륙하는 이즈 반도 끝자락엔 시모다(下田)란 항구가 있다. 1853년, 미 해군의 매튜 페리 제독이 구로후네, 즉 흑선(黑船) 함대를 몰고 무력시위를 벌여 일본을 강제로 개항시킨 바로 그 곳이다. 참고로 블랙손의 모델인 윌리엄 아담스가 실제로 상륙한 곳은 저 머나먼 큐슈였다. 

...뭐 이런건 그냥 일종의 피해망상이라고 치자. 아무튼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너무나 흥미로울, 넘쳐나는 오리엔탈리즘 덕분에 이 드라마는 공전의 히트작이 됐다. 디즈니 플러스 발표에 따르면 이 드라마는 미국 국내에서는 훌루(Hulu), 글로벌하게는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배급됐는데 '역대 디즈니 플러스가 만든 드라마 시리즈 중 최고의 성공작'이라고 한다. 

 

미주 시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봐선 이것은 한류를 한방에 날리는 일류(日流)인가 싶기도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일본 배경의 미국 드라마고 쇼러너인 레이첼 콘도는 일본계지만 하와이 출신 미국인이다. 말하자면 <오징어게임>보단 <파친코>에 가깝다. 그건 그런데, 사실 겁나는 건 이런 드라마를 보면서 "봤지? 이런게 통하잖아. 우리도 이런거 만들면 당장 미국 시장 다 먹을 수 있어! 잘 할 수 있잖아?" 할 몇몇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것'이란게 과연 어떤 걸까. 혹시 남편이 죽으면 수절 과부 만들기 위해 며느리에게 자결을 강요하고, 자손 얻기 위해 씨받이를 들이고, 그래도 안되면 남자를 씨내리로 들이고, 복자승에게 보내 임신을 시켜 오려 하고, 가문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딸들을 대국에 공물로 바치고, 그중 권력자의 처첩으로 성공하는 케이스가 나오면 그 댓가로 아버지와 오빠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고.... 뭐 이런 이야기들 아닐까. (왠지 너무 잘 먹힐 것 같아 불안하다.)

어쨌든 이런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 것은 내가 그런 사정을 지켜보며 살아 온 한국인이기 때문인데, 사실 이런 생각을 걷어 내고 보면 <쇼군>이 매우 재미있는 드라마라는 점은 감히 부인할 수가 없다. 검술 액션이나 전투신은 거의 없지만 의상, 건축, 미술은 탄복할 만 하고, 음모, 폭력, 잔혹, 그리고 은밀한 남녀관계까지 볼거리가 넘친다. 배우들의 연기, 연출력 모두 탄탄하다. 거기에 몇 차례의 셋푸쿠 신을 둘러싼 제작진과 시청자의 줄다리기는.... 정말 대단한 경지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센고쿠(전국)시대란 무엇인가, 쇼군과 다이묘는 어떤 관계인가, 하타모토는 또 뭔가. 에도와 오사카는 어떤 관계인가 등등을 알면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쇼군>은 그런거 하나도 몰라도 드라마를 즐기는 데 전혀 지장이 없도록 잘 만들어진 오락물이다.

오히려 일본 역사에 관심있는 시청자들이라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장면 때문에 몰입이 깨질 수도 있을 부분들이 있는데, 이 역시 재미있게 보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뭐 그렇게 자잘한 생각이 많은가?"

남의 일이니까 재미있게 보는데 이런게 내 이야기가 되면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은 느낌. 이런 느낌은 어떻게 하면 사라질 수 있을까.

...하긴 어쩌긴 뭘 어째. 그냥 보고 즐기기나 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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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10일 일요일.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언젠가부터 찍고 이동하는 여행보다는 한 도시에서 가능한 한 오래 머무는 여행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성에 차려면 한 도시에 한달씩은 살아야겠지만, 어쨌든 대중교통을 이용해 그 도시 사람들처럼 이동하고, 최대한 그 도시 사람들이 먹는 것들을 먹어보려 하고, 일상에 접근해 보려 하는. 

 

뭐 아예 은퇴한 뒤라면 모를까, 일을 하면서 그렇게 다니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어느 도시든 대중교통이 대략 익숙해지고, 도시의 방향과 길이 눈에 들어올 때쯤 되면 떠날 때가 된다. 정말 아무데서나 보이는 에펠타워.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멀리서 보이기만 해도 반가웠는데 이제 슬슬 귀찮아지려 한다. 

 

아무튼 쌀쌀한 일요일 아침, 일찌감치 짐을 싸서 체크아웃을 해 버리고 호텔을 나섰다. 

세느강 북쪽의 텅빈 길을 걸어 도착한 곳은,

파리 시립 현대 미술관 Musée d'Art Moderne de la Ville de Paris. 그런데 정말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사람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은근히 바깥의 돌들이며 진입로도 어딘가 정성들여 돌보지 않은 태가 난다.

문 닫은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하지만 굳이 여기에 온 건 라울 뒤피의 '전기의 요정 La fee electricite'을 보기 위해서지. 

이런 거대한 그림. 

 

라울 뒤피는 1937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를 위해 대작 벽화를 의뢰받고, 현대 문명의 상징인 전기를 형상화하는 아이디어에 따라 제작에 착수한다. 그 결과 이런 대작이 나왔다.

 

이 작품에는 석판화 연작과 이 벽화가 있는데, 작년 서울 전시때는 이 작품을 약간 변형한 석판화 버전이 전시된 것으로 알고 있다.

약간 둥근 홀 모양으로 되어 있는 2층 높이의 전시실을 가득 채운 대작. 

잘 보면 수십명의 인물들이 있다. 무식해서 다 알지는 못하지만 20세기 과학문명을 이룩하는 데 기여한 과학/공학자들이라는 것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맥스웰, 모르스, 뢴트겐... (나머지 잘 모름)

에디슨, 퀴리 부부, 멘델레예프... 뭐 등등.

 

물론 이걸 보러 온 거지만,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 '파리 시립'이라는 이름을 아무 미술관에나 달아줄 리 없다. 소장품들을 보면 그렇게 만만한 미술관이 아니다.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들이 꽤 많다. 

이건 마티스가 스트라빈스키의 교향시 <나이팅게일의 노래 le chant du rossinol>의 1920년 초연을 위해 그린 무대와 의상. <나이팅게일의 노래>에 대해 들은 적은 없지만,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이 모티브가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고보니 어렴풋이 생각이 난다.

 

황제를 감동시킨 나이팅게일의 노래. 어느날 선물로 바쳐진 기계 나이팅게일. 궁정인들이 기계 나이팅게일에게 열광하자 숲으로 돌아가버린 나이팅게일. 그러나 기계는 어느날 작동을 멈추고, 죽음의 사자가 황제 앞에 나타나는 이야기.

어쨌든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발레는 여러 모로 전설이다. 마신, 니진스키 같은 이름들과 함께 달리, 피카소, 마티스 같은 사람들이 무대미술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마티스는 역시 마티스. 왠지 마티스의 스케치에서 '춤' 연작이 떠오른다.

 

그리고 또다른 인상적인 작품은 캐서린 브래드포드의 <운동선수들 Athletes>.

.... 왠지 이래야 할 것 같은 그림.

 

뭔가 동화와 악몽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듯한 그림. 돈 밴 빌리트의 작품 <야크와 달들 Yaks, moons>.

돈 밴 빌리트는 캡틴 비프하트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뮤지션이자 가수라는데, 처음 들어본다. 이럴 때마다 뭘 안다고 거들먹대는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라울 뒤피, <헨리 로얄 레가타의 조정 선수들 Regates a Henley, les rameur>. 

그리고 그 연작. 헨리 로얄 레가타는 런던 테임스강에서 19세기부터 계속 열리고 있는 조정 경기라고. 

빅토르 브라우너, <La Rencontre du 2 bis rue Perrel>. 제목의 의미를 잘 알 수 없지만 조르주 루오를 연상시키는 숲과 정령인 듯 한 생명체의 묘사가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리 로랑생이 1923년에 그린 Jeannot Salmon의 초상. 지인 중에 닮은 사람이 있어 눈길이 가는 그림이기도 했다. 

마르크 샤갈의 <꿈 Le reve>. 문득 샤갈이 그린 그림 중 꿈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림은 몇개나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중국 화가 Zao Wou-Ki의 그림이 여럿 걸려 있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01.10.73>. 1973년 1월10일이란 뜻일까? 폭설이 내린 산중의 설경?

대략 미술관의 설명으로 봐선 중국 출신이지만 파리에서 프랑스 여성과 결혼해 살면서 널리 활동한 화가인 듯 하다. 

아무튼 이밖에도 수많은 피카소, 샤갈, 루오, 보나르 등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던 멋진 미술관.

오히려 무료라는 이유로, 그리고 일반적인 관광객들의 노선과는 좀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많은 발길이 몰리고 있는 곳은 아니지만, 파리에서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꼭 한번 방문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뭔가 초겨울에는 을씨년스럽던 마당의 카페. 노천 좌석 뿐이라 동절기에는 아예 문을 닫고 있었지만, 여름 밤이면 에펠탑을 바라보며 와인 한 잔 나누기에 최적의 장소일 듯. 

사실 파리 시립현대미술관이 있는 이 건물은 팔레 드 도쿄라고 불리는 유서깊은 곳. 그러니까 1차대전 당시 유럽 연합국의 반 독일 노선에 참여했던 일본은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간주되어 이 건물에 수도의 이름을 남겼다. 

물론, 서울에 있다면 꽤 중요한 명소 취급을 받았음직 한데 불행히도 여기는 파리. 이 정도의 연식과 이 정도의 사연을 가진 건축물은 그야말로 동네마다 하나씩 있다. 그래도 현장에 가 보면 확실히 멋지다. 

그렇게 해서 잔뜩 흐린 파리의 하늘을 살짝 바라보며, 택스 프리 신청을 위해 들른 백화점 식당에서 사실상 마지막 끼니를 때웠다. 

문어와 파스타. 꽤 비쌌지만 생각보다 고퀄의 식사. 

그리고는 호텔에 들러 맡긴 짐을 찾고, 마지막 라운지 이용을 탈탈 털고, 우버를 불러 공항으로 향했다.

파리 드골 공항의 스타 얼라이언스 라운지(아시아나 항공도 함께 쓰는)는 엄청난 규모와 꽤 괜찮은 시설이 눈길을 끌었는데, 불행히도 좌석이 그리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런 걸 언제 쓸까 싶은 공간이 많고,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은 별로 없는 바람에 뭘 좀 먹어 보려 음식을 집으면 수백걸음을 걸어야 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구조. 

게다가... 아니 대한민국 국적기가 라면을 이따위로밖에 못 만들다니. 

어쨌든 14시간의 긴 비행 시간 동안 편히 숙면을 취할 수 있는데 감사했다. 대한항공 비즈니스와 아시아나 스마티움은 일장일단이 있는데, 공간 이용 면에서는 대한항공이 좀 앞서지만 좌석을 내가 원하는 각도로 딱 맞춰 활용하는 것은 스마티움 쪽이 훨씬 나았다. 

그리고 귀국. 바로 달려간 곳은 부대찌개집.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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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서에 맞춰 다시 올립니다.]

2023년 12월 파리를 방문하기로 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숙소 알아보고, 그리고 그 다음은 연말로 예정된 공연들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손꼽히는 대도시 파리에서 꼭 가 보고 싶은 공연장은 뭐니뭐니해도 '오페라'라는 지명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오페라 가르니에(영화든 뮤지컬이든, <오페라의 유령>을 보신 분이라면 '아 거기?'하실 바로 거기다), 그리고 라 빌레트에 새로 지어진 파리 필하모닉 홀이었다. 

 

대부분의 공연 일정이 정해지는 것은 대략 6개월 전. 그런데 그로부터 한달 안에 중요한 공연들은 매진이 되어 버린다. 베를린 필하모닉 때도 그랬지만, 현장에 간 상태에서 '아, 베를린에 온 김에 베를린 필하모닉 공연이라도 한번 보러 갈까?'라고 생각하면 이미 늦다. 아주 운이 좋지 않으면 표를 구할 수 없다. 다만 일찍 표가 열린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기도 좀 불안한 것이, 한번 사고 나면 환불은 불가능(정말이다). 산 사람이 알아서 다른 사람에게 티켓을 파는게 최선이다. 그래서 신중하게 사야 한다.

 

2023년 12월, 가장 눈에 띄는 공연은 마리아 칼라스 탄생 100주년 기념 공연이었는데, 이건 본 순간 이미 매진이었다. 실제로 티켓을 팔기는 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오페라 가르니에 후원회원을 위한 특별 공연 같은 형식으로 관객들을 모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다음으로 꼽은 공연이 바로 이지 킬리앙 Jiri Kylian의 안무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공연하는 <Jiri Kylian Evening> 공연. 흔히 지리 킬리앙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체코어로 Jiri라는 남자 이름은 '이지'라고 읽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한다.

 

아무튼 네덜란드 발레 시어터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공연단체로 끌어올린 킬리안은 '현대 발레의 나침반'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은 안무가(집에 그의 DVD를 두개 갖고 있다). 특히 강한 인상을 받은 <Petit Mort> 도 이번 공연 리스트에 들어 있는 걸 보고 이건 꼭 봐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공연장이 바로 오페라 가르니에. 사실 이름이 오페라지만 이미 오페라를 위한 공간으로선 수명을 다했다. 지금은 공연 프로그램의 90%가 발레. 오페라는 새로 지은 오페라 바스티유에서 거의 모두 소화된다. 혹자는 예쁘기만 한 공연장이라고 폄하하기도 하지만 발레 프로그램을 놓고 보면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다.

 

....였는데, 며칠 딴 생각을 하는 사이에 공연이 매진이 되어 버렸다. 이럴수가. 다행히 대기 모드를 띄워 놓고 기다린 결과, 약 한달 뒤에 빈 자리가 나왔다(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늦게 푸는 좌석이 있는 것인지). 바로 낚았는데, 사실 그리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19세기형 극장의 박스석이 어떤 분위기인지 맛볼 수 있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어쨌든 공연 당일. 토요일 밤의 파리 오페라 주변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 날씨인데도 사람이 막 흘러다니는 분위기였다. 보수중이라 건물 앞부분은 차폐막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그 차폐막까지도 명품 광고... 그리고 극장 안으로 들어간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사진과 동영상을 보시면 느낌이 오실 듯.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 극장을 처음 본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에 맡긴다. 2층과 3층의 회랑에서 바라보는 계단과 기둥의 장식들이 너무나 멋지다.

 

아마도 같은 유럽이라도 러시아나 발칸 제국 같은 변방 사람들의 눈에는 이것이 바로 파리와 다른 도시들을 구별하는 기준처럼 보였을 것 같다. 내게도 '알겠나? 이게 바로 문명이야'라는 선언처럼 들렸다. 아마 21세기의 사람들이라면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같은 건축물에서 느꼈을 그런. 

그동안 멋진 걸 많이 봐 왔지만, 정말 눈이 휘둥그레진다. 더구나 이 멋진게 그냥 오래된 멋짐으로 남아 있는게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극장이잖아. 그래서 더욱 대단한 것. 

각각 다른 안내원에게 몇 차례 티켓을 보여주고 간신히 찾아간 곳은 무대 바로 앞의 2층 박스석. 묘한 구조라 1층과 2층의 구별이 모호하지만 어쨌든 박스석 중에는 가장 낮은 위치, 그러니까 무대와 거의 수평 위치에 있다.

박스석마다 입구가 있다.

저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렇게 박스 안에 한 6석 정도 좌석이 있다. 

바로 건너편에 유명한 '유령의 박스'가 있다. 실제와는 무관하지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 이후 저 자리를 찾는 관광객도 많다고 들었다. 물론 지금은 팬텀 아닌 일반 관객들이 그 자리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머리를 들면 <오페라의 유령> 도입부에 나오는 그 유명한 샹들리에가 있고, 그 뒤에는 그 유명한... 샤갈이 그린 천정화가 있다. 사실 전날 퐁피두 센터에서 샤갈이 이 천정화를 그리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했던 스케치들을 보고 온 다음이라 감동이 더했다. 

여기서 시선을 위로 올리면,

쿠궁.

 

그리고 공연.

맛보기로 하자면 이런 거다.

https://youtu.be/MKOqRvcLknE?feature=shared

뭐 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 <Gods and Dogs>, <Stepping Stones>, <Petit Mort>, <Sechs Tanze>의 네 부분으로 되어 있었고, 고개를 너무 내밀고 보느라 목이 좀 아팠지만(무대에서 너무 가까운 박스석은 비추. 절대 비추. 더 가까운 박스석의 관객들은 대체 어떻게 공연을 봤는지 궁금하다), 무용수들의 안무 소화는 완벽했다. 드문드문 동양인 무용수가 보여 혹시 박세은...? 일까 했는데 그 뒤를 이어 파리 오페라 발레에 합류했다는 강호현이었다. 매우 훌륭했다.

물론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공연을 마친 뒤 76세의 이지 킬리앙이 직접 무대에 오른 것. 20세기의 문화 영웅들이 하나씩 하나씩 흘러간 별들이 되고 있는 지금, 현대 발레의 이정표를 세운 거인을 직접 볼 수 있다니. 공연을 마치고 숙소로 걸어가는 동안, 절로 발길이 둥둥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실 구경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객석 바깥쪽에는 쉬는 시간마다 음료를 마시고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파티 공간이 있다.

근데 진심 호화롭기 그지없다.

지금의 눈으로 봐도 이런데, 19세기 사람들의 눈으로 봤다면 정말 이 공간이 어떻게 보였을지. 

물론 전기의 도입 이후라야 제 역할을 했겠지만.

공연장, 좌석, 무대, 그 밖에 극장에서 펼쳐질 수 있는 파티를 위한 공간, 지금도 바로 쓰이고 있는 회랑 공간 등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파리 시민이냐, 관광객이냐의 차이는 이런 곳을 일상 공간처럼 향유하고, 저 자리에 여유있게 서서 칵테일이나 와인을 나누며 대화의 꽃을 피우느냐 아니냐의 차이로 느껴질 정도.

물론 뭐니뭐니해도 극장의 완성은 무대.

낮시간에 오페라 가르니에 건물의 내부 투어를 하는 가격이 15유로. 블로그들을 보다 보면 내부 광경에 감탄해 '언젠가는 이 안에서 직접 공연을 보리라'는 평을 남긴 분들이 많은데 그런 언젠가는 절대 오지 않는다. 다음에 파리에 가기로 되어 있는 분들, 방문 기간 중의 오페라 가르니에 공연 정보를 꼭 살펴 보시길. 그리고 반드시 공연을 보시길. 거기서 공연을 보고 그 안을 둘러본 느낌은 그동안 파리에서 했던 어떤 경험보다 값지고, 인상적이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턱시도를 입고,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가신다면 더 기막힌 경험이 되겠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라도 그 안에 머무는 동안은 정말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 글을 읽고 그대로 하실 당신, 누구든 후회 없을 거라고 믿는다. 

 

 

P.S. 파리 여행의 기록을 여기다 남기긴 남길 것인데, 한번에 다 숙제하듯 쓸 것도 아니고, 일단 가장 인상적이었던 경험을 포스팅으로 남깁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직 마음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파리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전에도 그랬듯, 여행기는 시간 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곶감 뽑아 먹듯 올릴 예정입니다. 시간 날 때마다 한번씩 들러 보시길.^^ [라고 썼고, 그래서 이 회차는 전체 여행기의 16회로 끼워넣습니다. 제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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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쎈 동영상 하나 보고 가실게요.

파리 라파예트 백화점은 크리스마스때마다 천장 돔을 저렇게 장식해놓고 트리를 설치한다고 한다. 근데 그게 대단한 볼거리가 될까...라고 생각했는데, 되더라는. 아무튼 그런 저런 파리의 크리스마스 장식과 조명 보시는 회차.

 

잠시 시간은 전날 밤으로 돌아간다. 조엘 로부숑에서 비싼 밥을 때려먹고, 잠시 기운을 회복해서 에펠탑 조명을 보러 갔다. 

사실 밤마다 에펠탑도 볼 겸, 밤마실도 나가려고 생각을 했지만, 대부분의 날 비가 왔고, 특히 밤이 되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람에 어딜 나갈 엄두를 잘 내지 못했다. 

1988년. 맨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조명이 들어 온 에펠탑을 보고 황홀경에 빠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해지는 시각에 세느강 유람선 바토 무슈를 타고 동쪽으로 흘러갔다. 한강만 보고 자란 청년에게 세느강의 강폭은 의외로 좁았고, 배에 설치된 조명이 다리 하나를 지날 때마다 교각의 장식을 비췄다. 절로 탄성이 나왔다. 

 

배가 반환점에 도착할 무렵 사방이 컴컴해졌고,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는 길에 금빛으로 빛나는 에펠탑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것이 있다니. 감탄했다.

세월이 흘렀고, 나는 다시 이 자리에 와 섰다. 그야말로 감회가 새로웠다. 무려 35년. 나이를 먹었고, 그 시절의 낙관은 사라졌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안녕. 부디 잘 남아 있기를. 정각의 반짝반짝까지 볼까 했는데 날도 차고... 피곤해서 호텔로. 오자마자 숙면.

새벽의 라자레 역 광장. 눈이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눈이 온 건 아니다. 차가운 새벽, 

더 이상 빵을 사러 가지 않아도 된다. 여기는 진짜 파리 호텔 부페. 

빵 종류만 10가지가 넘는다고 쓰려고 했는데 하필 빈 틀을 찍었네. 

아무튼 아침 디저트(?)인 파운드케이크만 네 종류. 괜찮은데.

물론 빵 말고 다른 쪽은 별 대단한 건 없다. 콘티넨탈 브랙퍼스트의 전통인지 뜨거운 음식은 그냥 구색만 갖춘 정도. 계란은 얘기하면 원하는 스타일로 조리해서 가져다 주는 방식이다. 

커피는 받아서 알아서 가져가시라는 분위기. 종이컵과 뚜껑 제공.

 

그렇게 아침을 먹고, 자체 휴식. 쇼핑을 원하시는 분은 백화점으로 가시고, 뭘 할까 하다가 그냥 침대에서 뒹굴기로.

그리고 버스를 타고 (구)몽주약국으로 쇼핑차 이동.

정말 어디가나 보인다. 근데 점심을 뭘 먹긴 먹은 것 같은데 왜 기억이 없지? 사진도 없고... 음... ;;

기억의 구멍. 

 

아무튼 느즈막한 오후, 생또노레에 왔는데 겨울이라 일찍 해가 떨어지고, 거리에 조명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래, 이런게 파리지.

파란 하늘, 금빛 조명, 하얀 건물. 안 예쁠 재간이 없다.

생토노레라는 지역 강조.

네... 다 아시는 상표

말하자면 그 명품거리.

방돔 광장 쪽으로 가 본다.

어느 건물 앞에 갔는데,

웬 애들이 엄청나게 떠들고 있는데, 시끄럽기가 장난 아닌.

주위에 물어봐도 누군지 아는 사람이 없는데, 좀 어려 보이는 아가씨가 가르쳐줍니다. "틱토커".

그렇군요. 주말이라 북적북적.

탄성이 나와 계속 사진을 찍게 된다.

반대편에는 회전목마가.

어쨌든 이것이 바로 파리의 크리스마스다! 라고 할만한 광경. 

그냥 계속 서서 사진을 찍게 된다.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고, 주변 사람들이 다 그럴듯하게 예뻐 보인다.

해가 이미 지긴 졌는데 아직도 파란 하늘.

마음에 담고 갑니다.

쇼핑한 짐을 내려 놓기 위해 일단 호텔 쪽으로.

좀 이따 다시 오게 될 오페라 가르니에

 

아무튼 호텔에 짐을 내려 놓고, 마침 호텔의 해피타임이라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기로. 

그리고 다시 나간다. 이번엔 백화점 쪽으로. 

크리스마스 일루미네이션의 끝판왕은 백화점.

그것도 파리의 백화점.

온 가족이 다 나온 집이 많고, 당연히 어린이들을 노린 노점들 천지.

길 양편으로 난리.

끄레뻬가 빠질 수 없다.

저쪽으로 가야 오페라 가르니에지만 일단 백화점 내부의 돔을 보러 간다.

이렇게 생긴 돔. 

파리의 오만 사람들은 다 여기 와 있는 느낌.

모든 사람이 이런걸 찍고 있다.

심지어 음악에 따라 천장 돔 색깔이 계속 바뀜. 너무 예쁨.

진종일 보고 있어도 안 질릴 것 같지만 아무튼 계속해서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라도 자리를 떠야 한다. 여기저기서 안전관리 요원들이 지나가라고 독려하기도.

어쨌든 그래서 밖으로 다시 나옴.

백화점 건물 1층의 외벽 장식이 기가막히다.

인파가 걷기 힘들 정도.

갤러리아 라파이에트 안녕.

거기서 조금 길을 따라 내려가면,

오페라 가르니에 뒤편이 나타난다.

갤럭시 간판 밑으로도 입구가 있는데, 아니 아니, 여기는 관객 출입구 아님. 

여기가 정면 출입구. 사람은 많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근데 파리 가시는 분들, 여기는 꼭 들어가 보셔야 해요.

이렇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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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다비드를 알게 된 것은 어린시절 들고 다녔던 동아출판사 완전정복 시리즈의 표지였던, 백마를 타고 알프스를 넘는 그 나폴레옹 그림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때도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이 그림이었다.

미술 교과서에 나오는 수없이 많은 초상화 가운데 가장 미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림, 

줄리에트 레카미에, 이 그림이 그려진 1800년 당시 23세. 남편은 39세의 은행 재벌 자크 로즈 레카미에. 그런데 결혼을 1793년에 했다니... 16세에 딱 두배인 32세 남자와 결혼하신 거다.

(사실 근데 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이제는 16년 차이가 뭐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66세와 50세, 뭐 괜찮은 나이 아닌가? ㅎ)

 

어쨌든 당시에도 미모와 지성이 파리를 뒤흔들어 수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셨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전설적인 분이다 보니 실시간으로 그려진 수많은 초상화가 오늘날까지도 전해 오는데, 어떤 그림도 다비드의 그림처럼 빛나는 미모는 아니다. 왜 다비드가 출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아무튼 그런 초상화들의 힘(?)으로 그 셀럽으로서의 명성은 프랑스를 넘어 전 유럽에 퍼졌고, 수많은 숭배자(라고 쓰고 정부라고 읽을 수 있는)들이 각국에서 찾아왔고, 남편의 은행이 망해 살림이 어려워진 뒤 프로이센의 왕자가 구혼해 오자, 남편도 차라리 자기와 헤어지고 왕자와 결혼하는것이 좋겠다고 후원(?)에 나섰으나, 결국 남편과 헤어지지는 않고 근근이 사셨다는 그런 분이다. 

암튼 거대한 나폴레옹을 다시 한번 보고, 수없이 많은 유명한 그림들이 잘 있나 확인해 본다.

사실 이 그림에는 다비드 본인이 들어 있다는 걸로도 유명한데,

저 그림 위쪽, 일반 관람객 사이에 섞여 열심히 실제 광경을 스케치하고 있는 사람이 다비드라고. 물론 그림을 이렇게 그린 걸 보면 실제 다비드의 위치는 반대편이겠지만.

 

생각해보면 카메라도 없던 시절, 이런 종류의 기록화를 남기는 것도 아마 혼자 힘으로는 힘들지 않았을까.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물론이고 저 많은 왕족, 귀족, 거물들이 '내가 이렇게 생겼냐' '난 저날 저거보다 훨씬 잘 입고 갔다' '내가 숱이 그렇게 없냐'고 화가를 들볶았을테니, 아마도 현장에 제자들 수십명을 풀어 보이는 건 모두 그려오라고 하지 않았을지. 

 

아무튼 저렇게 사진처럼 현장을 잘 표현했으니 왕정 - 혁명 - 나폴레옹 제정 시대를 이어서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다비드라는 작가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감히 ㅎㅎ)

또 루브르에 있는 외젠 들라크르와의 그림이라면 당연히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꼽아야겠지만, 개인적으로 그 못지 않게 인상적인 그림은 이 그림,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Mort de Sardanapale>이다.

 

전설적인 앗시리아의 왕 사르다나팔루스는 전쟁에 패하고 항복 권유를 받자 노예들에게 자신의 애첩들을 모두 죽이고 처소에 자신의 말, 자신의 보물들을 모두 쌓아놓은 채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 자신의 삶에 기쁨을 주었던 그 어떤 것도 적에게는 넘겨주지 않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 속에서 침상에 기대 앉아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이 벌인 참극을 바라보고 있는 사르다나팔루스의 표정이 무엇보다 강렬하다. 그의 머릿속에는 무슨 생각이 오가고 있을까. 지금까지 자신이 누렸던 이승에서의 삶, 극한의 사치와 즐거움, 그 모든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를 반추하고 있을까. 아무튼 왠지 이 그림이 좋다. 

 

물론 여기는 루브르. 저렇게 그림 하나 하나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담으려면 책 열권으로도 어림없다. 그리고.... 사실 비싼 레스토랑에 저녁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 영영 머물 수는 없다. 

위 그림도 좋아하는 그림. 프란시스 에두아르드 피코의 <큐피드와 프쉬케 L'Amour et Psyche>.

 

구경하다 보니, 마침 루브르에서 나폴리의 카포디몬테 미술관 Museo di Capodimonte 과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교환 전시중인 작품들이 눈에 띈다. 카포디몬테 미술관에 가본 일은 없으나, 피렌체의 우피치에 이어 이탈리아 전역에서 두번째로 소장 회화가 많은 미술관이라는 명성. 

명성에 걸맞게 18세기 이전, 유럽 미술계를 지배한 이탈리아 화가들의 걸작들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카라밧지오의 <그리스도의 태형 The Flagellazione>. 수십차례의 범죄 행각으로 수배 대상이었던 카라밧지오를 대체 불가능한 화가로 만든 라 루체, 광선의 위력이 살아있다. 

 

그리고 이 나폴리에서 온 그림들을 보다 보니, 이건 '카라바조와 그 후예들' 전시회 아닌가. 은근히 반가웠다. 

이를테면 마티아 프레티의 <성 세바스찬>. 화살에 맞아 순교하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그린 수억장의 그림 중에서도 손꼽힐만한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귀도 레니의 <아탈란테와 히포메네스 Atalante e Ippomene>. 남자보다 강한 여전사 아탈란테를 유혹하기 위해 세 개의 황금 사과를 받은 히포메네스는 '경주에서 나를 이기는 자와 결혼하겠다'는 아탈란테와 경주에 나서 중요한 대목마다 사과를 흘려 결국 아탈란테를 신부로 맞는데 성공한다... 는 이야기. 

 

물론 이야기를 듣다 보면 결국 아탈란테가 신랑 후보들을 유심히 본 다음, 맘에 안 드는 놈들에게는 전력질주해서 이기고(패자는 모두 죽였다), 맘에 드는 놈을 골라 져 줬다는 그런 이야기다.

그리고 최근 세계적인 젠더 이슈의 부각과 함께 너무나 유명해진 그림. 17세기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린 <홀로페르네스를 죽이는 유디스 Giuditta decapita Oloferne>가 역시 나폴리에서 와 있었다. 실제로 강간 피해자였던 젠틸레스키가 그림 속 유디트에게 자신을 투영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상을 그려냈다는 극찬을 받고 있다.

 

성경 속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를 그린 그림들은 수만 종이지만 그 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확실히. 

주세페 데 리베라의 <성 제롬과 심판의 천사  Saint Jerome et I'ange du Jugement>.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일반적으로 성 히에로니무스라는 이름보다 제롬이라는 이름을 쓰는 듯. 아무튼 성 세바스찬이 화살 꽃힌 나체의 청년으로 그려지듯, 황무지에서 두루마리에 뭔가 쓰고 있는 깡마른 노인은 백이면 백, 라틴어 성서 번역자 성 히에로니무스라고 알아볼 수 있다. (해골이나 사자가 있으면 특히 더)

 

아무튼 이렇게 카라밧지오의 영향이 크게 느껴지는 그림들을 많이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역시 나폴리에서 온, 주세페 데 리베라의 또 다른 작품. 제목은 <취한 실레누스 Silene ivre>. 그림을 보는 순간 느껴지는 이 아재스러움이 너무나 친근감을 갖게 한다. 

 

사티로스 중의 한 사람인 실레누스(실레노스)는 어린 디오니소스를 키워 준 반신. <정글 북>에서 모글리를 키워준 곰 발루가 아마 실레누스의 아바타가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 거의 모든 그림에서 술만 마시면 즐거운, 뚱뚱한 중년 남자로 그려진다. 아재의 신...

주세페 데 리베라, 혹은 호세 데 리베라의 <아폴론과 마르시아스 Apollon et Marsyas>. 피리의 명인인 마르시아스는 감히 자신이 음악으로 아폴론 신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하며 신에게 공개 도전한다. 거기 응한 아폴론은 리라 연주로 마르시아스를 무너뜨린 뒤, 산채로 가죽을 벗기는 형벌로 인간의 오만을 응징한다. 

 

데 리베라라는 이름만 봐도 스페인 출신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이런 소재를 그린 것도 그렇고, 뭔가 광기가 느껴지는 필체도 그렇고, 어딘가 엘 그레코를 연상시킨다. 

위 그림과 뭔가 비슷한 느낌이 오지 않습니까? 엘 그레코의 <성 루이, 프랑스의 왕>.  

엘 그레코의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아래 두 인물은 이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 독지가들인데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주문 생산된 그림이라는 뜻. 그렇다 보니 엘 그레코 하면 떠오르는 광기가 많이 잠잠해져 있어 아쉽다.

아무튼 이 한도 끝도 없는 그림, 그림, 그림들...

마지막으로 라파엘로의 <큰 미카엘>로 알려진 <악마를 물리치는 미카엘 대천사>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동굴의 성모>에는 인사를 하고 루브르 구경 마무리. 

 

다빈치 선생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그림은 지금까지 20개 뿐인데, 그중에서도 <모나리자>나 <최후의 만찬> 처럼 의심의 여지 없이 다빈치의 작품이 확실한 것은 그나마도 몇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동굴의 성모>도 '다빈치가 참여해서 그린 것은 맞는 것 같지만 타인의 기여가 꽤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정도의 단서가 붙은 작품. 

(그런데 대체 어쩌다 이 다빈치 선생은 이렇게 대단한 화가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 이 짧은 식견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아직이 이 분이 그린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좀 무섭다.)

 

아무튼 이번에는, 세번째 루브르를 방문해 그 전에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 행동을 했다.

어라 이런 것들도 있네 싶은 수많은 전시실을 돌아 도착한 곳은 

네. 화장실.

혹시 가 보셨습니까? 루브르 화장실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 많은 관광객들에 비하면 화장실 수는 정말 적고... 안에 들어가면 비정상적으로 넓은, 희한한 구조.

그리고 이 많은 그리스 도자기와.... (사실 이것도 화장실에 가까워서 한번 찍어 본 것)

인간이 아무리 오래 살아도 할 수 없는 것이 있는 법. 이를테면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는 책을 전부 다 읽는다든가, 루브르 안에 있는 모든 소장품을 다 본다든가. 

 

어쩌다 파리에 살 일이 생기면 감히 한번 도전이라도 해 보련만, 여행자란 항상 바쁘고, 아무리 여유있어도 항상 시간은 부족하고, 봐야 할 것은 항상 많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아예 루브르는 일정에서 빼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래도 와 보고 나니, 역시 루브르를 방문하지 않고서 파리를 다녀왔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뭔가를 보고 느끼고 감상하는 차원이 아니라, 인류 문명을 대표하는 유산들에게 그동안 잘 계셨나 인사드리고 오는 수준이라고 해도 말이지. 

이상 부실한 2024년의 루브르 방문기를 이걸로 정리하며.... 

과연 금생에 파리 올 일이 또 있을지 모르겠소. 그때까지 안녕히들 계시길. 

도보로 세느강을 건너러 간다.

다리 위에서 봐도 예쁜 밤의 파리.

강 건너편의 루브르.

그렇게 강을 건너 남쪽으로 죽 내려간다. 

10분 쯤 걷다 보니 보인다.

조엘 로부숑의 아틀리에. L'Atelier de Joel Robuchon.

현재 '가장 많은 미슐랭 스타를 따낸 셰프'로 공인된 스타 셰프 조엘 로부숑의 소위 '본점'이라 불리는 레스토랑이다. 현재 파리에 2개, 도쿄, 런던 등을 합해 총 12개의 레스토랑을 통해 32개의 미슐랭 스타를 따냈다.

 

그런데... 정작 이 '본점'은 현재 별이 없다(가 보고 난 뒤 궁금해서 찾아보니 그랬다). 같은 파리에 있는 에트왈 점은 원스타. 가장 많은 별을 가진 곳은 홍콩 지점으로 3스타.

 

뭐 아무튼 별 수가 뭐가 중요해! 여기가 본점이라고 본점! 

(꼭 여기를 가라고 강추하셨던 문교수님, 어떻게 된 겁니까... 왜 여기만 별이 없나요. ㅎㅎ)

단체석이나 마주보는 테이블도 없는 건 아닌데, 대부분의 좌석이 바 형태도 되어 있다. 

아무튼 파리에서도 부촌이라는 생제르맹 지역. 주변 분위기는 아주 좋다.

일단 코스를 주문하고, 샴페인도 한잔. 기분인데!

인테리어가 독특하다. (옆엣분은 '내 취향은 아니야' 라고 자르심.)

어느새 거의 전 좌석 만석.

자, 메뉴를 봅시다. 

1. 아뮤즈부쉬

2. 라임을 곁들인 도미 카르파치오

3. 세가지 질감의 양파 수프

4. 푸아그라

5. 푸아그라와 트뤼플 소스를 곁들인 왕새우 라비올리

6. 무와 미소에 재운 대구 구이

7. 우유에 담근 양 갈비와 타임, 그리고 매쉬드 포테이토

8. 치즈

9. 바질과 열대과일 주스를 곁들인 밀크 아이스크림

10. 아라구아니(Araguani) 초콜렛 가나슈, 코코아 

이상 10개 코스에 인당 159유로. 네네. 비쌉니다. 그러니 파리까지 와서나 한번. 

식전빵. 말해 뭘 하나. 당연히 맛있다.

아뮤즈 부쉬. 호로록 짭짭. 뭔지 기억 잘 안 남. 아무튼 맛있었다. 

도미 카르파치오. 라임 주스가 많이 들어가 있어 사실상 세비체. 당연히 맛이 없을리 없음. 국물까지 쪽쪽. 

이 대목에서 레드와인 도 한잔!

세가지 풍미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양파 수프. 흔히 생각하는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아니고, 아주 진득한 맛. 

푸아그라. 솔직히 말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 이게 뭐라고 그렇게 난린가. 느끼하다.

개인적으로 대구 이리나 홍어 애가 훨씬 맛있다.

랑고스틴으로 만든 라비올리. 소스가 끼얹어져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그냥 한입. 맛있어.

미소에 절인 대구...라고 되어 있는데, 옆에 무까지 있는 걸로 보아 일식 기분을 내려고 많이 노력한 흔적이 느껴진다.

무를 쓸거면 국물에 푹 삶아서 양념이 가득 밴.... 얘들이 아직 고등어나 갈치조림에 들어간 무 맛을 모르는 것 같다.

양갈비 구이와 타임. 그리고 그 유명한 매쉬드 포테이토. 

양갈비가 생각보다 너무 연약했는데 아무튼 맛은 당연히 좋았다. 매쉬드 포테이토도. 감자 더 드릴까요를 물어보는데, 한입거리씩 먹은 게 뱃속에 쌓이다 보니 배가 꽤 불러왔다. 

 

이게 아마 주는대로 팍팍 먹어 치우는 느낌이었다면 배가 안 불렀을 수도 있는데, 문제는 여기까지 먹는데 두시간 반 정도 걸렸다는 것. 음식이 나오면 먹는 데에는 거의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 음식을 기다리는 시간이 어마 어마 어마하게 긴 거다. 음식과 음식의 간격이 약 20분 정도?

 

아 물론 이해한다고. 그렇게 천천히, 맛난 음식을 음미하면서, 와인도 한잔 하면서, 같이 온 사람과 대화도 나누면서, 그렇게 만찬을 즐기는게 이 프렌치 코스 디너의 진정한 의미라고 하겠지. 안다고.

 

그런데 느려도 너무 느려! 졸리다고! ㅠㅠ

어 왜 치즈 사진이 없지 ;; 아무튼 치즈가 나왔고, 먹었고, 첫번째 디저트. 아이스크림. 

그리고 입맛을 다시게 하는 새큼한 열대 과일 주스. 

여기까지 먹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계산서를 달라고 했다. 에? 아직 코스 안 끝났는데요 손님, 네네. 알아요 알아. 여기까지만 먹고 갈게요. 맛이 없어서도 아니고, 분위기가 나빠서도 아니고, 지겨워서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디저트는 포기할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계산 처리하는 것도 꽤 느려서, 계산서와 함께 마지막 디저트가 나왔다. 초콜렛과 생크림, 그리고 오레오쿠키 부순 가루로 만든 가나슈. 주위의 새큼달큼한 잼과 함께 먹는다. 그렇게 해서 코스 완주.

 

모든 코스가 당연히 맛있고(푸아그라 빼고), 재료의 수준이나 들인 공, 서빙하는 인건비를 생각하면 저 정도 가격이 그리 비싼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제발 음식은 조금만 빨리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해서, 파리 방문 중 가장 화려하고 긴 식사를 마쳤다. (생각해보니 오늘 하루에 먹는데만 대체 얼마를 쓴거냐)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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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8일. 숙소 옮기는 날. 

그 말인즉 파리에서 머물 날이 2박3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뜻 ㅠㅠ. 

모든 숙소는 집이라서 떠날 때는 아련해진다.

그 기분을 떨치기 위해 짐을 싸서 프론트에 맡겨 놓고, 근처 멋진 데 가서 비싼 점심을 먹기로.

집(?)에서 세느강 쪽으로 가면 사마리텐 백화점이 나오고, 그 옆 건물의 꼭대기 층, 저 돔 같은 지붕에 콩 Kong 이라는 유명 레스토랑이 있다. 왕년의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와 유명해진 곳.

(처음엔 잘못된 정보로 저 장면 촬영지가 퐁피두 옥상의 조르주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여기였다.)

 

뭐 어찌됐건 이번엔 최근 더 핫한 곳으로.

사마리텐 백화점을 지나 강을 따라 서쪽으로 몇발짝 가면,

슈발 블랑 호텔이 나타난다. 

신상 호텔. 밤에 보면 조명발이 더 예쁜데, 아무튼 이날 따라 날이 화창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퐁 뇌프를 아니 걸을 수가 없지. 

<퐁뇌프의 연인들 Les amants du Pont Neuf>... 이거 아시는 분들 최소 연식이. 

 

저땐 줄리엣 비노쉬도 젊었고, 나도 젊었고...

(한때 누군가 소개팅 하라고 할 때마다 '줄리엣 비노쉬같이 생겼대'라는 말이 유행하곤 했었다. 당연히 곧이 들으면 안되는 말들... 요즘 기준으로는 김고은 닮았다는 말에는 절대 넘어가면 안된다던데.)

암튼 그 퐁 뇌프. 영화에 나오는 칙칙한 분위기 아님. 관광객 넘실넘실.

다리 위에서 다시 슈발 블랑을 보고, 예약 시간에 맞춰 입장. 

저 건물 7층의 테라스가 튀어 나온 곳, 거기에 목적지인 르 뚜 파리 Le Tout Paris 가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아 통창을 통해 레스토랑 안을 보는 순간, 아, 예쁘다, 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알록달록 화사. 

처음엔 욕심껏 창가쪽 자리를 잡았다가, 강렬한 직사광선 때문에 안쪽 자리로 다시 요청했다. 

이렇게 앉아서 세느강을 바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어차피 전망은 테라스로 나가서 보는 게 더 낫다.

사실 날씨가 따뜻했다면 테라스를 예약했겠지.

(좋은 날씨에도 테라스에서는 식사는 안 되고, 술이나 음료만 된다고 함. 참고들 하시길.)

설계가 잘 되어 있어 안쪽 테이블에서도 전망이 잘 보인다. 

테라스에서 안쪽을 보면 이런 느낌.

굳이 창가 자리를 고집할 필요가 없을 듯. 

메뉴, 듣던대로 가격은 상당히 사악함. ㅎ

그래도 파리를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니고... (아 모르겠다 막 시켜)

전채 요리. 

음료 잔 안의 얼음에 박힌 백마 로고가 앙증맞다.

백마는 바로 호텔의 이름인 슈발 블랑 Cheval Blanc 을 상징하는 것. 로비에 이런 것도 있다.

문득 한비자에 나오는 아열의 백마비마( 白馬非馬: 백마는 말이 아니다) 고사가 생각나려다... 말았다.

식전에 왜 과자를 주나 싶긴 한데, 아무튼 주니 고맙다. 맛도 좋고, 모양도 예쁘고.

비싸다는 느낌을 완화하려고 뭘 자꾸 주는거냐.

심지어 식전빵도 예쁘다. 맛은 당연히... 여기 빠리라고요. 빵의 도시.

식전빵이 나오고 나니 여유가 좀 생겨서 

화장실

화장실 앞 대기공간 

그리고 바 테이블을 슬쩍 둘러봤다. 참 공들인 가꿈. 

아무튼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 하나 나오는데,

농어. 서더리 부분을 잘라내고 고갱이만 구움. 당연히 맛있는데... 양이 적고 비싸다. 

자... 크기 보고 놀라지 마세요. 

그리고 블루 랍스터. 뭐 크기는 상상하시는 그 크기. 물론 맛은 있다.

그리고 아티초크 지짐.

모듬 구운 채소. 뭐 이것도 조금. 

빵과 디저트는 제공, 여기서 탄산수와 버진 칵테일 한잔 해서 180유로 정도 나왔다. 

 

사실 정상적으로 말도 안 되는 엄청 비싼 가격이긴 한데, 파리라는 이공간, 그 중에서도 핵심 공간 체험료라고 생각하니 또 낼만 하다는 생각도 들고. (아 몰라. 어차피 파산)

본전을 뽑기 위해 테라스 구경. 볕이 드니 참 좋네.

시테 섬 왼쪽으로 공사중인 노틀담이 보인다. 

당연히 반대쪽으로는 에펠탑이. 물론 이 전망을 밤에 보면 반짝반짝해서 더 좋다는 얘기가 있더라.

이건 이 호텔 옥상에 있는 셀레스테라는 바의 야경인데, 각도로 보아 르 뚜 파리의 테라스에서 보이는 야경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음. 아무튼 좋네. 

딱 정면은 이런 풍경.

막 이런 것도 해보고.

특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좋은 위치에 있다. 날씨 좋은 날 밤, 이 테라스에 앉아 와인 한잔.... 그런 그림이네.

그러고보니 12월. 

1층에는 예쁜 트리가 있다.

참 예쁘고 비싼... 기억을 담고.

이제는 슬슬 익숙해진 동네 길을 지나 호텔로 짐 가지러.

워낙 날이 흐리다보니 파란 하늘이 매우 정겹다. 

샤틀레 안녕~

그렇게 해서 시타딘레알에서 볼트를 불러 타고,

힐튼 오페라로 이동.

뭐... 파리 호텔 같다.

1층 카페 겸 레스토랑 겸 바. 

'파리의 호텔'이라고 하면 생각날 듯한 그런 풍경이다.

방도 크고, 화장실도 크고, 옛날 호텔이라 좀 이상한 것도 있는데 아무튼 널찍널찍 좋다.

역시 비싼게 최고...

코너 방이라 큰 창도 두개나. (아 네. 하나는 반사)

욕실 바닥도 따뜻.

네네. 결혼 20주년, 돈 쓴 보람이 있군요.

서울에선 없어진 브리오슈 도레가 여기에.

아무튼 점심식사로 시간을 너무 소요한 관계로, 서둘러 다시 길을 나섰다.

아무튼 이번엔 호텔이든 뭐든 위치 중심으로. 

전철로 두 정거장 내려가 코너를 돌면,

응 피라미드, 오랜만이야. 

루브르는 1988, 1998에 이어 세번째 방문. 물론 세번째라고 해도 사실 늘 똑같다.

아무튼 이번엔 야간개장 하는 날 오후 4시 정도가 가장 덜 붐빈다는 어떤 분의 말을 믿고, 그 시간으로 예약했다. 

줄이 진짜 별로 없네

씐나셨군요.

정말 좀 한산한가 했는데

응 그렇지 않아

아무튼 식순에 따라 니케 여신에게 루브르 왔다고 신고를. 

어휴 25년... 만에 보니 많이 낡았네.

그리고 눈썹 없는 그분께도 역시 인사를 드려야.

항상 느끼지만, 루브르에 온 사람의 한 1/5 정도는 니케 여신상과 모나리자 사이에 있는 것 같다.

어디 안 가고 잘 계신거 확인했으니 됐네.

길 잃지 말고 잘 보세요. 

 

사실 루브르에 맨 처음 와서 놀란 것은 "와,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들이 그냥 이방 저방에 다 걸려 있어!" 라는 것인데, 나이 먹어 생각해보니 우리가 어려서 본 미술 교과서들인 너무나 19~20세기 프랑스 주요 미술관 위주로 작성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뭐 그렇다고 해서 루브르라는 이 공간의 위력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여기 걸린 작품들의 가치가 별로라든가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아무튼 루브르에 와 보면 이 공간의 주인공은 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중 하나가 이 오이디푸스 그림과 아래쪽 잔다르크를 그린 장 오거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줄여서 그냥 앵그르).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은,

이 초상을 그린 자끄 루이 다비드와 그림 속의 주인공인 나폴레옹.

잘 아시겠지만 다비드는 말하자면 나폴레옹의 어용화가(또는 어진화사) 역할을 충실하게 해 내 지금까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아울러 나폴레옹은 다비드의 응원에 힘입어 온 유럽과 이집트를 누비며 각국의 수많은 문화유산을 파리로 실어 날라 이 루브르의 드넓은 공간을 가득 가득 채운 주모자.

당연히 이 유명한 그림도 다비드의 작품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나폴레옹 1세의 생김새는 거의 모두 다비드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다비드의 최고 걸작은 역시 이 그림이라고 생각한다. ㅎ

이른바 옛날 미술 교과서 최고의 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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