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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플러스에서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를 봤다. 앤드루 헤이그, <45년>의 그 감독이다. 앤드루 스콧, 좋아하는 배우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퀴어? 보고 나서 알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도 그 관계 자체가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런던 어딘가의 낡은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폐허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는 아담(앤드루 스콧)은 어느날 이웃 해리(폴 메스칼)을 알게 된다. 세상 살이에 미련이라곤 없어진 아담은 어느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냐"는 해리의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한다. 뒤늦게 자기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 아담. 그리고 그들은 매우 친숙한 사이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아담은 갑자기 어려서 살던 옛 집을 찾아가는데, 거기에는 여전히 부모님이 살고 있다. 자기를 남겨 두고 죽었을 때의 젊은 모습 그대로. 그들은 너무나 반갑게 아담을 맞이한다.
 
(네. 이런 얘기에요. ㅋ)
 
 
왠지 그렇게 끝나면 안 될 것 같은 방향으로 영화가 흘러가고, 결국 엔딩 크레딧이 뜬 뒤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이런 기분 오랜만인데, 굳이 기억을 뒤져 보자니 관금붕의 <연지구>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외로움, 인연, 그리움, 이런 키워드들에 이어 ‘회한’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다 늦은 밤 시골길을 걷다 보면, 문명이란 어떻게든 어둠을 이겨 보려는 인간들의 발버둥이 이뤄낸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밤을 낮처럼 밝혀냈지만, 마음 속의 어둠은 쫓아낼 수 없었고, 도시에도 여전히 그늘은 있다.
 
 
그 그늘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두려워한다면, 아직 당신은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지도.
 
1월이지만 올 연말에 꼽을 올해의 영화 중 한 자리는 확정. 영화는 잔잔하지만 여운은 어마어마하다. 디즈니플러스에서 볼 수 있음.
 
 
P.S. 일본 작가 야마다 타이치의 <이방인과 보낸 여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미 1988년에 영화화됐다. 물론 번역 출간도 되지 않았고, 영화도 볼 방법은 없어 보인다. 혹시 보신 분 계심?
 
 
P.S.2. 해리 역의 폴 메스칼이 <글래디에이터>에서 그 소년 루시우스였다고. 아. 세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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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굉장히 비슷비슷한 영화평이 여기저기서 잇달아 올라오고 있다. '왜 좋은지 어떻게 설명을 하고 싶은데 설명을 하려들면 바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설명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세계의 주인>. 여고생 주인은 어린이집 원장인 엄마, 마술사를 꿈꾸는 초딩 남동생과 살고 있다. 태권도를 좋아하고, 봉사 모임에도 나가고, 남자친구와 키스도 좋아하는, 활기차고 씩씩한 주인. 어느날 같은 반 남학생 수호가 서명운동에 참여할 것을 부탁하는데, 주인은 정색을 하고 거절한다. 아니 충분히 찬성할만한 일인데 왜?
 
 
영화의 전반은 수수께끼를 내고, 후반은 그 수수께끼의 답을 준다. 의아했던 것들이 풀려 나가면서, 관객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게 하는 묘한 영화. 미스테리는 해결되고, 웃음이 화면 가득 차오르지만 당신은 영화를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악은 분명 존재한다. 악이란 너무나 알아보기 쉬워서, 마주하는 자가 유혹에만 넘어가지 않으면 피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는 물론이고, 실제 세상에도 악한 인간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만, 일단 악행이 저질러지고 나면, 어떤 식으로 단죄를 하든 '그 뒤의 삶'이라는 것은 고스란히 피해자에게 넘어온다.
 
 
그 악행의 흔적, 악행이 남긴 것은 지우개로 지우거나 욕실세제로 박박 닦아내릴수 있는게 아니다. 그럼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태양 아래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악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약한 자들을 보호할수 있을까. 한번 무너진 것은 어떻게 다시 일으킬수 있을까. 그리고 그 무너진 것을 다시 쌓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윤가은 감독은 답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재능 못지 않게 배우들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솜씨가 놀랍다. 영화 시작 후 30분이면 '음. 저 배우와 저 배우는 상당히 오버액션을 하네'라는 생각이 드는데, 1시간30분쯤 되면 그 오버액션도 연출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한국 영화에서 보기드물게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휘몰아치는 힘이 느껴지는 영화. 상영관이 적은게 안타까운데 어떻게든 찾아서 보시길 권한다. 내 마음이 얼마나 굳어 있나 볼수 있는 자가검진 세트로도 사용 가능.

 

P.S.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윤가은 감독의 영화 몇 편을 찾아 봤는데, '남동생'이라는 존재의 특이한 역할이 공통점으로 드러나는 걸 보았다. 윤 감독은 남동생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관계일지가 궁금했다. (지인을 통해 '남동생이 있다'는 것까지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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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TA , 그러니까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들 중 <리노의 도박사>, <부기 나이트>, <팬텀 스레드>, <펀치드렁크 러브>는 좋아하는 영화들이지만 <마스터>, <매그놀리아>는 고만고만하고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전혀 취향이 아니다. 일각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불세출의 천재 감독'이란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비호를 넘어 극혐에 가깝다(물론 라디오헤드의 우울증 유발형 음악도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이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도 유일한 약점이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펼쳐지는 장면들과 지금 이 음악이 어울리나? 아무튼 내 취향엔 맞지 않았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배틀...>은 진심 재미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위선에 맞선(?) 가상의 테러 조직과 세월의 흐름, 백인우월주의 비밀 서클 같은 주제들이 종횡무진 대륙을 질주하며 벌어지는 요란한 액션 코미디. PTA가 어쩌다 이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 기특하기 짝이 없다.
 
3. 요즘 미국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말도 안되는 짓거리와 영화 속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 하는 짓들을 보면 이 영화는 트럼프의 나라가 되어 버린 미국에 대한 강렬한 비판인데, PTA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그 반대편도 날카롭게 후벼 판다.
 
 
4. 겉멋들린 운동권 엄마는 결국 모든 걸 배신해버리고, 그 바람에 애당초 혁명의식이란게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밥(디카프리오다)은 하루 아침에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는데, 그 16년이란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어린 딸을 부양하면서 잡히지도 않고 버틸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무능하기 짝이 없다.
 
니들도 잘한게 없다는, 미국 진보진영에 대한 실망이 그대로 담긴 듯한 느낌이다. 너희가 쓸데없는 PC와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에만 매달려 민생을 돌보지 않는 바람에 정권이 트럼프한테 넘어간 게 아니냐는 분노가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젊었을 때는 목숨을 걸고'를 외우고 다니는 586 꼰대들에 대해 실망한 한국 관객들의 호응도 눈부시다.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5. 디카프리오를 비롯해 천하의 악당 역을 맡은 션 펜, 카라테 센세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의 활약이 눈부신데, 이 세 아저씨(셋 중 하나는 확실히 내년에 오스카 트로피를 쥐지 않을까. 특히 주연일지 조연일지 모르겠으나 션 펜)의 활약을 보고 있으면 이 영화를 타란티노 아닌 PTA가 만들었다는 것이 의아해진다.
 
 
6. 물론 PTA에게 이런 장르가 익숙지 않아 그런지, 아니면 '어차피 이 영화는 코미디'라는 생각에서인지 뒷부분으로 가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이어진다. 특히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이 감탄해마지 않는 마지막 시퀀스의 자동차 추격전 장면에서 대체 마지막에 세 대의 자동차가 어떻게 그 차가 그 차인줄 알고 쫓고 쫓길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냥 달리다 보면 그 차가 그 차고, '본능적으로' 그 차가 자기를 죽이러 쫓아오는 차인 걸 눈치챈다는 식이다.) 하지만 보고 즐기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은 금물. 특히 망원렌즈 활용을 극대화한 촬영은 박수받을만 하다.
 
 

 

SLA 홍보 요원이었던 허스트와 체포된 뒤의 모습.

 

7. 영화 속 프렌치75는 1970년대 언론재 벌 허스트가의 손녀 패트리샤 허스트를 납치한 사건으로 주목받았던 SLA 같은 무정부주의 조직에서 모티브를 가져온게 아닐까 싶다. 60년대의 대책없는 낭만이 남아있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2010년쯤의 미국에서 이런 조직은 존재했을리가 없어 보이긴 한다.
 
SLA는 Symbionese Liberation Army의 약자로, 이들은 반 자본, 반 인종차별, 반 제국주의를 주장하는 극좌 조직이었다. 사상적으로 치밀하지는 않았고 막시즘과 모택동의 사상에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이나 호치민의 게릴라 전에 대한 생각들을 조합한 것이 이들의 기반이었다. 
 
1974년 당시 SLA 는 패트리샤 허스트를 납치했다. 처음에는 유괴 사건이었고 이들은 허스트의 몸값으로 빈민들에게 식량을 지급하라는 등의 요구조건을 내새웠지만, 사라졌던 허스트가 SLA의 테러 활동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찍히며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테러 조직에게 납치당했던 재벌가 상속녀가 그 테러 집단의 한패가 되어 있다니.
 
그들과 함께 생활하던 허스트는 그들의 반복되는 주장에 어느새 '세뇌되었고', 그들의 일원이 된 것이다. 허스트는 피해자에서 어느새 지명수배 명단에 함께 오르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조직은 체포되어 와해되었고, 허스트도 당연히 같이 처벌을 받았지만 1982년 허스트는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의 책(그러니까 자발적 참여가 아니고 억압적 세뇌에 의해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인 것이다... 운운)을 써서 사면에 성공했다. 정말로 그녀가 자발적으로 동참했는지, 아니면 새로운 심리적 이론의 근거를 마련한 것인지는 그녀 본인만 알 듯. 
 
8. 어쨌든 PTA 답지 않은 결말까지도 한국 관객 취향에도 딱 맞을듯한 작품. 개인적 기준으론 상반기의 <씨너스>와 올해의 영화를 다툰다. 얼른들 보시도록.
 
 
P.S. 성수동 메가박스가 문닫기 직전에 관람. 이런 식으로 극장이라는 존재가 삶의 주변에서 아예 사라져버릴까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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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 안 읽고 오신 분들을 위해 리스트만 앞에다 붙인다.

기준은 작품성 예술성 모르겠고, 그냥 내가 가장 좋아한, 2001-2025 사이의 영화 25편. 배치는 제작 연도순. 순위 아님.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 2001)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피터 잭슨, 2001)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2)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무간도2 (유위강/맥조휘, 2003)

킬빌 (퀜틴 타란티노, 2003)
올드보이 (박찬욱, 2003)
쿵푸허슬 (주성치, 2004)
타인의 삶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타짜 (최동훈, 2008)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빗 핀처, 2008)
아이언맨 (존 파브로, 2008)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2010)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베스트 오퍼 (주세페 토르나토레, 2013)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2013)
킹스맨 (매튜 본, 2014)

매드맥스: 퓨리로드 (조지 밀러, 2015)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2025)

 

이것만으론 아쉬우니 한줄씩 붙인다. 

1~11까지는 바로 앞의 포스팅 참고.

12.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빗 핀처, 2008)

어느 순간엔가, 모든 좀비 영화는 가장 무서운 병, 치매라는 병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가장 슬픈 좀비 영화는 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다. 사랑하던 사람이 살아 있으나 더 이상 사랑하던 사람이 아닐 때, 그 사람을 바라보던 케이트 블랜칫의 슬픈 눈빛이 지금도 떠오른다. 관심 있는 분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 단편을 읽어 보시길. 각색이란 얼마나 위대한 예술인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https://fivecard.joins.com/302

 

벤자민 버튼, 21세기의 포레스트 검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런 영화가 또 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데이빗 핀처는 잘 알려진대로 '에일리언 3'에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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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이언맨 (존 파브로, 2008)

슈퍼맨은 단순하지만 명쾌한 데가 있어서 그나마 좋아했는데 뭘 해도 고민하는 배트맨은 너무 중2병스러워서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언맨의 자기애와 과시욕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슈퍼히어로의 등장. 그리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시대의 매혹적인 화법. 이 영화가 없었다면 지금의 마블은 없었다.

https://fivecard.joins.com/271


 

아이언 맨, 제2의 트랜스포머가 될 듯

마블 코믹스의 세계가 참 깊고도 넓다는 것은 일찌기 알았지만, 아이언맨이라는 캐릭터는 이 영화의 제작 소식이 들릴 때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고편만큼은 대단한 수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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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솔직히 놀란의 영화는 거의 다 봤지만 <인썸니아>, <프레스티지>, <인터스텔라>, <덩케르크>는 매우 마음에 들었던 반면 그 나머지 영화, 배트맨 3부작과 <메멘토>, <테넷> 등은 뭔가 좀 거슬렸다. 그런 사람으로서 <인셉션> 은 발상에서 그 발상을 영화로 표현한 방법까지, 진정 최고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였다. 그런데 과연 팽이는 멈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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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9가지 궁금증에 대한 심층해설

안 보면 왕따된다는 영화 '인셉션'. 본 사람도 또 보고 아이맥스로 봐야 진짜배기라고들 소문이 자자한 인셉션. 요즘 단연 장안의 화제입니다. 그런데 결말이 두가지네 어쩌네, 레오나르도 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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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누가 난해하다 했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에 대해 수없이 많은 평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말들 속에는 흔히 공통된 단어나 어구가 등장합니다. '난해' '관객의 혼동' '지적인 블록버스터' '매트릭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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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을린 사랑 (대니 빌뇌브, 2010)

뭐하는 감독의 무슨 영화인지 전혀 모르고 이런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보는 동안 설마...했던 것이 설마...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 충격의 순간도. 이런 영화들을 통해 우리는 어느 세계, 어느 문명을 누리고 있어도 결국은 모두 비슷한 인간이라는 사실로 순식간에 회귀하곤 한다. <듄>이나 <컨택트>도, <시카리오>도 훌륭했지만 여전히 내게 빌뇌브의 최고작은 <그을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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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 당신의 심장을 직격하는 영화

'그을린 사랑'을 보러 가서 가장 놀랐던 점은 극장이 거의 꽉 차 있더라는 것입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지명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각계의 호평이 쏟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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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왜 여전히 살아있을까

고전극의 세계에 집착하는 영화 감독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셰익스피어 극의 리메이크를 시도했던 감독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죠. 특히 '햄릿'은 수십차례나 세계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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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그 많은 앨런의 영화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직도 물론 <애니 홀>을 꼽지 않을 수 없고, 10개를 꼽는대도 7,8개는 20세기의 영화들일 것 같은데, 그래도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매혹적인 상상은 늘 다시 들쳐보고 싶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해서 살고 싶은가. 무엇이 나에게 진짜 산다는 느낌을 줄 것인가. 스스로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앨런의 위대한 헌사.

 

17. 베스트 오퍼 (주세페 토르나토레, 2013)

<시네마 천국>의 토르나토레를 사랑했고, 그 뒤로도 그는 생을 긍정하는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 놀라운 작품들을 잇달아 만들어냈다. <스타메이커>, <언노운 우먼>을 지나 <베스트 오퍼>와 <피아니스트의 전설>중 어느 것을 꼽을까 고심하다가 선정한 것이 <피아니스트의 전설>이었는데, 어느 분의 지적으로 확인해 보니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1998년작. (아뿔싸)

가슴을 쓸어내리며 <베스트 오퍼>로 정정한다. 영화 <베스트 오퍼>는 '자만심'에 대한 경이로운 우화. 세상을 우습게 보는 남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고, 그 외로움 때문에 의외의 곳에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적으로 토르나토레와 파라디를 21세기 초반,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부르고 싶다. (사실 토르나토레의 작품 중에 엔니오 모리코네에 헌정하는 다큐멘터리 <엔니오(2021)>를 뽑을까도 잠시 고민. 이렇게 눈물이 펑펑 흘렀던 영화도 드물었던 것 같다.)

 


18.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뭔가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어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고레에다(꼭 좋은 뜻만은 아님). 아무래도 그냥 마구잡이로 혼자 분류할 때, '가족과 아이들'에 천착했던 고레에다 1기의 정점에 있는 영화는 이 영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키웠는데 내 아이가 아니라니...에서 오는 직관적인 느낌과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잊을 수 없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

 


19.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스가르 파라디, 2013)

고구마 서사를 싫어하기 때문에 <어떤 영웅>은 좀 실망이었지만, 그래도 파라디에 대한 기대가 여전한 것은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과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가 워낙 좋았기 때문. 두 작품 중 어느 것을 고르는가는 그야말로 미세한 취향 차이일 수 있는데(두 편 다 고르자니 25편은 너무 적었다), 전자는 누가 봐도 '확실한 이야기'가 있었던 반면, 후자는 '무슨 이야기인지 분명치 않은' 이야기인데도 그걸로 한 편의 영화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그래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가 위대한 스토리텔러 파라디의 재능을 더 잘 발휘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리스트에 넣었다.


20. 킹스맨 (매튜 본, 2014)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 역을 맡은 007 시리즈가 흥행 기록을 돌파할 때 한켠에서 분노로 몸을 떨던 사람들이 있었다. '저게 어떻게 제임스 본드냐!' 매튜 본의 <킹스맨>이 사랑받은 이유 중에는, 그렇게 '진정한 본드'를 빼앗긴 사람들이 이쪽으로 집결한 것도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지. 비록 그 기세가 2편 3편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킹스맨>의 발랄한 엔딩만큼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들을 때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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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왕년의 007 팬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

어느 정부를 위해서도 일하지 않는 비밀 정보 기관 [킹스맨]의 멤버 갤러해드(본명은 해리, 콜린 퍼스)는 임무 수행중 죽은 동료의 아들에게 메달을 줍니다. 세월이 흘러 17년 뒤, 그 소년 엑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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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매드맥스: 퓨리로드 (조지 밀러, 2015)

이 영화, 네번째 매드맥스 시리즈 영화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감독의 나이를 보고 전율했다. 70세 노장의 감각이 이렇게 힙할 수가 있다니. 34세때인 1979년 <매드맥스>를 내놨던 조지 밀러는 결국 그 세계관을 갈고 닦아 30여년 뒤에도 통할 수 있게 부활시키는 놀라운 저력을 과시했다. 그 시절 칙칙한 불법 복제 비디오로 <매드맥스>와 <매드맥스2>를 보던 사람들 중 누가 2015년에도 젊은이들이 빨간 내복에 열광할 줄 알았을까. 밀러는 아직도 6번째 매드맥스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부디 가시기 전에 10편을 채워주시길. 


22.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마틴 맥도나의 영화라고는 <킬러들의 도시> 하나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의 영화세계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작은 도시에 세워진 세 개의 간판. 그리고 법 집행을 믿을 수 없는 엄마의 폭주. 정의와 질서라는, 인류가 문명을 건설한 이후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어 있는 두 가지 요소가 제대로 충돌하도록 폭탄을 던지는 영화. 결국 영화란 우리의 인생에 뚝 떨어진 예기치 못한 사건과 거기에 대한 캐릭터들의 반응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관점에서, 그 정의에 가장 충실한 영화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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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가 작가 지망생들에게 미칠 영향은?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영화가 끝나 갈 무렵, 이 영화, '쓰리 빌보드' 의 악영향에 대해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꽤 적지 않은 수의 시나리오 작가 혹은 시나리오 작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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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정말로 우연히, 부산영화제 참관차 갔다가 사전정보 0인 상태로 보게 된 영화. 그런데 여운이 일주일은 갔다. 어린이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 중 이보다 강렬한 작품이 있었을까. 대체 무엇을 해 줘야 할지 모르는, 그러나 아이를 사랑하는 것만은 분명한 철없는 엄마와 그나마 철이 좀 든 어린이의 기막힌 드라마. 물론 베이커에게 아카데미 작품/감독/극본상을 안겨준 작품은 <아노라>였지만, 가장 오래 기억될 영화는 역시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아닐지. 

 

 


24.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신카이 마코토의 소위 '재난 3부작' 중 많은 사람들이 <너의 이름은>을 최고로 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베스트를 꼽자면 <날씨의 아이>. 끝없이 비가 내리는 도쿄의 어느 여름. 비가 그치고 해가 떠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가 있다. 그런데 이 홍수는 우연이 아니고, 세계의 지형을 바꿀 노아의 대홍수였고, 그런 결과를 막는 것도 결국 그 소녀에게 달린 일이었다. 여기서 신카이는 묻는다. 자, 이 소녀 하나를 희생시켜서 그 비를 막을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전체주의 국가' 일본에서 이런 질문이 나오다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적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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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 일본인도 달라졌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나날. 비슷한 또래의 한 믿을만한 분이 극찬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포스터 속 파란 하늘이 끌려서 를 선택했다. 어쩌면 며칠 전 한강을 건너다 본, 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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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2025)

대체 이게 뭐지. 호러 뮤지컬? <리틀 샵 오브 호러>나 <이발사 토드>의 연장선인가? 아니면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리메이크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였지만 일단 보기 시작하고는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드는 뚝심이 어마어마했다. 마이클  B 조던의 1인 2역 열연도, 영화 전편에 넘쳐 흐르는 순혈 블루스의 힘도 강력한 작품. 이 모든 것을 조율해 낸 라이언 쿠글러의 다음 작품이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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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너스, 하룻밤의 혈투로 압축한 블루스의 역사

0. 스포일러는 없지만 일단 영화를 보시고 읽어보시길 권장. 근 몇년 사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얼른 보라고, 극장에서 내려오기 전에 보라고 권한 영화가 없었다. 후회 안 하실 거라고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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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고 추리다 영 아쉬워서 두편은 깍두기로 추가한다.


와일드 테일즈 (다미안 시프론, 2014)

인간의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6편의 단편 모음 영화. 아르헨티나, 그 중에서도 부에노스 아일레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이야기 하나 하나의 밀도가 24시간 우려낸 설렁탕 이상이다. 천재의 다음 작품들을 기대하게 하는 힘이 압권.


스틸 라이프/삼협호인 (가장가, 2006)

사람들은 왜 모이고, 무엇 때문에 흩어지는가. 왜 제목은 스틸 라이프일까. 지아 장커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인물 하나 하나는 왠지 거대한 산수화 속에 박혀 있는 동그라미 머리 하나 하나처럼 느껴지곤 한다. 장강은 유유자적 흘러가고, 청산도 그대로 그 모습인데, 거기 잠시 머물다 가는 인간들의 사연이 제아무리 기구하다 하나, 어차피 곧 흘러갈 일들 아니겠는가. 이런 느낌 때문에 쉽게 '사회성 강한 영화'로 단정할 수 없게 하는 대작. 

 

이렇게 2001-2025까지 25편을 꼽아 봤다. (다 뽑은 지금도 역시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를 뽑았어야 하나 생각중이다.)

여러분의 25편은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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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가 21세기의 첫 쿼터를 맞이해 영화 100편을 꼽았다. 

물론 내 취향은 아니다. 나같으면 절대 꼽지 않았을 영화들이 대량으로 끼어 있다. 그냥 '21세기의 첫 100대 예술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리스트였다. 예술영화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그냥 직접 꼽아 봤다. 2025년이다 보니 그냥 숫자를 맞춰 25편을 뽑았다. 꼽아 놓고 보니 개중엔 좀 뭔가 있어 보이는 영화도 있고, 심각한 사람들이 보면 피식 웃을 영화들도 있는 것 같다. 그냥 취향의 기억을 위해 정리해 본다. 모든 작품의 기준은 논리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욕하실 분은 취향을 욕하시길.

생각해보니 인생 참 짧다. 과연 20세기의 두번째 쿼터에서 내가 이런 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까. 약간 회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20세기의 마지막 쿼터에 대한 25편의 영화도 한번 골라볼까 싶다. 그래도 리스트 두개는 남겨 봐야지.

21세기가 2000년에 시작하는지, 2001년에 시작하는지는 좀 애매한 것 같은데, 그래도 꽂아넣고 싶은 영화가 2000년 작품이라 여기에 넣었다. 그럼 시작한다. 순서는 연도순. 

화양연화 (왕가위, 2000)을 꼽으려고 했는데 2000년은 21세기가 아니란다. ㅠㅠ

그래서 다시.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 2001)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피터 잭슨, 2001)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2)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무간도2 (유위강/맥조휘, 2003)

 

킬빌 1,2 (퀜틴 타란티노, 2003)
올드보이 (박찬욱, 2003)
쿵푸허슬 (주성치, 2004)
타인의 삶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타짜 (최동훈, 2008)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빗 핀처, 2008)
아이언맨 (존 파브로, 2008)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2010)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베스트 오퍼 (주세페 토르나토레, 2013)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2013)
킹스맨 (매튜 본, 2014)

매드맥스: 퓨리로드 (조지 밀러, 2015)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2025)

 

줄이고 줄이다 영 아쉬워서 두편은 깍두기로 추가한다.


와일드 테일즈 (다미안 시프론, 2014)
스틸 라이프/삼협호인 (가장가, 2006)

이상 긴 리스트 끝. 

제목만 열거하고 끝내려니 뭐라도 한마디씩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순서는 연도순. 순위 아님.

화양연화 (왕가위, 2000)

정말 인생 최고의 순간은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 내가 지금 최고의 순간에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는 알 수 있을까. 먼 훗날, 지나고 난 뒤 석상의 귀에 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 뿐이라면, 인생은 너무나 슬픈 것이 아닐까. '유려하다'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슬로모션,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만옥의 치파오,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몇몇 사람들과 반대로 과도하다 싶은 1인 샷들. 내용을 떠나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오래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그런데 사실 21세기는 2001년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어쩔수 없이 <화양연화>는 제외.

1.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 2001)

바즈 루어만이 그동안의 영화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쏟아부은, 그의 영화 세계 종합편. 인도 영화인들은 '인도 사람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발리우드 영화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것은 마치 '한국인이 제작하지 않은 K-POP'을 연상시킨다)'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고 한다. 모든 장면들이 현란하고 아름답지만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은 탱고와 어우러진 '록산' 신. 데이비드 셔젤이 <바빌론>으로 해보려 했던 것들을 이 영화는 모두 뛰어넘고 있다.


2.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피터 잭슨, 2001)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피터 잭슨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시기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할 듯. 물론 그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잘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스스로 이야기 속에 폭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그려낸 성과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명배우들이 열연했지만, 이 영화 시리즈에서 딱 한 장면만 뽑으라면 2편에 나오는 '로한의 봉화' 장면. 지금도 빅 스크린에서 이 장면을 보고 온 몸에 소름이 끼쳤던 순간이 생생하다.


3.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2)

지옥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신이 있다면 이런 도시를 세상에 남겨두어도 좋은 것일까. <시티 오브 갓>을 보면서,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 가치, 보람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 뒷날, 그가 <두 교황> 같은 영화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 강렬하고 또 강렬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오고 20여년, 세상은 점점 더 '신의 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도.


4.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우리는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슬픔과 상실과 분노를 자아내는 힘을 악이라고 부른다. 악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떠난 적이 없었고, 우리는 그것을 기를 쓰고 단죄하려 하지만,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일부이며, 우리는 잠시 그것을 잊으려 노력할 뿐이다. 그런 인간들의 이야기 중 <살인의 추억>은 단연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5. 무간도2 (유위강/맥조휘, 2003)

<대부>가 만들어 진 이후, 범죄집단과 그 가족을 그린 영화로 <대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품은 없다. <무간도2>는 1편에서 만들어진 인물의 구도(경찰에 잠입한 마피아와 마피아 속에 잠입한 경찰) 위에 <대부>의 가족 플롯을 덮어 씌운 탁월한 작품. 1편도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2편은 그 구도에 그리스 비극의 장중한 운명을 얹은 걸작이다. 물론 그 뒤에는 3편이라는 어이없는 작품이 있어 이 영화를 트릴로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역대 어떤 홍콩의 갱스터 무비보다 뛰어난 작품.


6. 킬빌 1,2 (퀜틴 타란티노, 2003)

자신이 보고 자란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타란티노의 핏빛 광시곡. 장난기조차도 엄숙하게 연출하는 이 작품을 과연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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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빌, 쿵푸의 스타 데이비드 캐러딘을 조상하다

영원한 '쿵푸'의 스타 데이비드 캐러딘이 73세로 운명했습니다. 1936년생. 4일 방콕의 한 호텔에서 목을 매 사망한 채 발견됐다는군요. 70대에 자살이라니...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로 왕년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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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올드보이 (박찬욱, 2003)

박찬욱은 항상 죄와 벌을 말한다. 그런데 그 벌은 누가 내리는 것인가. 신이? 신을 대신해서 인간이? 아니면 그냥 인간이 인간의 판단으로? 어떻게 결정하든, 그 벌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궁금한 것. 과연 오대수의 뒤편에서 흔들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8. 쿵푸허슬 (주성치, 2004)

주성치를 모르는 사람도 없었지만, 영화 좀 본다는 사람 중에 '주성치 영화를 보는 사람'을 비웃지 않는 이도 드물었다. 그러나 <소림축구>와 <쿵푸허슬> 이후에는 이 콧대높은 소위 영화 마니아들은 여래신장 맞은 두꺼비 꼴이 되었다. 순도 높은 주성치 스타일의 루저 주인공에서 깨알같은 전통 무협 장르 패러디까지 완벽한 선물같은 영화. 


9. 타인의 삶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모든 영화는 인간이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것은, 별다른 원칙 없이 '그저 열심히' 하던 사람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오는 순간. 동독 비밀경찰의 숨가뿐 기밀 업무 속에서, 하나의 '인간'이 눈을 뜨고,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폰 도너스마르크는 왜 좀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주지 않는 것일까. 이 영화를 보시고 꼭 <작가미상>을 보실 것.

 

10.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뱀파이어는 주인이 초대하지 않으면 그 집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규칙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기에 한국에서도 호랑이는 창귀의 부름에 대답하는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었으니, 이 비슷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 사람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괴물도 청순하고 여릴 수 있다는 뜻밖의 경험. 순백의 눈 위에 그려진 순수의 그림. 아름다운 영화.

11. 타짜 (최동훈, 2008)

허영만의 원작은 걸작이 분명했는데, 최동훈이 아니었다면 그 숨결을 이렇게 살려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소재는 도박이지만 분명 이것은 의리와 불의, 성장과 복수의 무협 극화. 검결을 외던 검객들이 그저 화툿장을 손에 쥐었을 뿐. 불행히도 속편들은 <타짜>의 맥을 제대로 잇지는 못했다. 이제 곧 20주년이 되면 시리즈 리부팅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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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 왜 자꾸 '친구'가 어른거릴까

화면을 보면서 한참 생각했습니다. 대체 왜 드라마 '타짜'의 배경이 부산일까, 왜 이 드라마에는 '우정'이라는 말이 이렇게 자주 나올까. 그리고 왜 고니의 패거리는 네 명이고, 원작에 없는 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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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야쿠자의 아들 기쿠오(요시자와 료)는 부모를 잃고 유명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의 제자가 되어,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요코야마 류세이)와 함께 자라고, 함께 수련한다. 이들은 한지로를 계승해, 가부키의 온나가타(여성 역할을 전문적으로 연기하는 배우)로 성장한다.

두 사람을 가까이서 지켜본 한지로는 기쿠오의 재능이 아들 슌스케를 훨씬 능가한다는 것을 깨닫고, 기쿠오는 그 재능을 한껏 펼치고 싶은 야심을 품고, 슌스케는 아버지의 선택과 친구의 재능 앞에 좌절한다. ...그렇게 50년이 흐른다.

이상일 감독의 <국보>. 화려하고 재미있다. 전혀 난해하지 않고, 선명하다. 3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얼른들 극장에서 보시길. 극중 가부키 장면의 화려함이 압도적이고, 묘하게 닮은 두 주인공의 열연에 절로 빠져든다. 정리 끝. 



1. 영화에도 등장하듯 일본에는 '인간 국보'라는 개념이 있다. 공식 용어로는 '중요 무형문화재 보지자', 대략 어떤 것인지 느낌이 온다. 아마 한국의 인간문화재 제도는 이 제도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가부키든, 교겐이든, 전통춤이든 어떤 한 분야의 인간 국보가 되면 그 분야에서는 절대적인 해석 권력이 되며,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하는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한다. 제목이 <국보>인 것은, 바로 이 제도를 전제로 한 것이다.



2. <국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당연히 '혈통'과 '재능'이다. 가부키는 가문이 지배하는 사회고, 그 가문의 이름이 곧 배우의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은 대를 건너가면서도 4대 5대 6대로 이어져 다른 인물이지만 선대 같은 인물을 그대로 계승한다. 계승의 근거는 혈통이고, 스타 가문의 후계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스타고, 극히 예외적인 경우(대가 끊어지거나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적통이 아닌 사람은 가문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다. 명문가 출신의 후계자는 주인공을 맡고, 조연 가문의 후계자는 조연을 맡는다. 가부키 명문가의 자손들은 사회적으로도 귀족 대우가 기본이고, 가부키 외의 연예계 활동, 이를테면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할때도 남다른 대접을 받는다. 

사실 재능이냐 혈통이냐를 따지기에는,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엘리트 교육을 받기때문에 실력으로 꼬투리를 잡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일본 여배우인 마츠 다카코가 유명 가부키 패밀리의 딸이고, 신인일 때부터 "(가문의 힘 덕분에)마츠 다카코는 수영복을 입지 않아도 뜰 수 있다"는 말이 돌았다는 이야기를 익히 들었다.


3. 이상일 감독의 영화 <국보>를 보러 가기 전, 내가 가부키에 대해 아는 게 고작 이런 지엽적인 것들 뿐이라는 깨닫고 뭔가 예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넷플릭스를 뒤져 보니 <이쿠타 토마의 도전>이라는 게 있다. 유명 배우 이쿠타 토마가 글자 그대로 친구의 꾐(?)에 빠져 가부키 연기에 도전하는 내용의 소프트 다큐다. 

일드 많이 보신 분이면 눈에 익었을 배우 오노에 마츠야(2대)가 바로 그 친구인데, 이 배우가 가부키 가문의 후계자라는 것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이들이 하는 가부키는 정통 가부키라기보단 대중화를 지향하는 신 가부키라 로보트도 나오고, 개그도 나온다. (신 가부키라는 것은 말하자면 창작 가부키를 가리키는데, 고전 가부키 중에는 한국의 판소리 다섯마당처럼 18편이 오래 전부터 전통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여기서 '노래방 18번'이 나왔다.)

 

아무튼 <이쿠마 토마의 도전>을 보면 가부키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이해를 얻을수 있고, 그렇게 해서 이들이 공연하는 가부키 <아카도 스즈노스케>가 전편이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다. <국보> 관람에 상당히 도움이 됐다.

<아카도 스즈노스케>에서 온나가타 역을 맡은 나카무라 간교쿠는 오종종한 체구의 미인형(?)으로, <국보>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비련의 여주인공들과는 전혀 다른, 한국식 로코 주인공 같은 발랄한 온나가타의 전형을 보여준다. 온나가타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4. 많은 사람들이 이미 이야기했듯 예술 세계에서의 재능과 노력의 대립이라면 <아마데우스>가 있고, 극중 세계와 바깥 세계, 여기에 여성 역할의 남자 연기자를 등장시켜 성 정체성의 문제를 덧붙인 걸작으로는 <패왕별희>가 있다. 그렇다면 <국보>는 여기에 어떤 이야기를 보태야 할까. 

이상일 감독은 온나가타, 남자들만의 세계인 가부키에서 여성 역할을 하는 주인공을 중심으로 두 남자의 50년에 걸친 우정과 경쟁을 철저하게 '남자의 눈'으로 그렸다. 실제로 온나가타라는 역할의 역사를 남색(!)을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울테지만, 감독은 그렇게 뻔한 길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 두 주인공은 극중에서 여자 역을 하고 여성성을 표현하는 데 몰두할 뿐, 자신의 성 정체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강조되고 있는 것은 넘치는 확고한 남성성이다.

물론, 그들 각각의 내면에 있는 여성성은 당연히 발현되는데, 끝까지 이 두 주인공은 서로를 '동성의 친구'로서 인식한다. 한쪽이 어느 한쪽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이 다음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스포일러가 됩니다. 영화를 보고 오실 분은 여기서 정지.]

 

5. 여성 역할을 하는 주인공이 현실과 무대를 구별하지 못하는 불량배들의 폭력에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은 여장남성과 관련 소재를 다룬 작품들의 클리셰라 하겠는데(<헤드윅>이나 <프리실라>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보>에도 이런 장면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여기서 잠깐 '만약 감독이 이 장면을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내용으로 구성했다면 <국보>는 어떤 작품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 부분이 영화의 성격을 결정한다. 사실 <국보>는 그 방향으로 흘러가기에는 너무나 남성 중심적인 영화다. 

<국보>의 여성 캐릭터들 가운데 가장 비중이 큰 역할은 하루에라는 역인데,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캐릭터였다. 하루에는 처음에는 기쿠오에게 인생을 바친 헌신과 후원을 약속하고, 나중에는 슌스케의 아내가 되어 후계자를 낳아 주는 역할이다. 그러나 하루에게 왜 이렇게 변신을 하고, 그 변신에 대해 어떻게 해명하는지는 영화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국보>에서 이상일 감독의 연출 방식은 '...이 밖에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은 얘기는 다 할 시간이 없어요' 를 표방하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하루에의 존재는 스토리의 구멍일까.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상일 감독은 하루에를 '가부키 세계' 혹은 '예술 세계의 시스템'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자리하기를 바랐던 것 같다.

모든 예술은 탁월한 재능을 사랑하지만, 결국은 예술계도 하나의 시스템이고, 그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를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하루에는 처음에는 기쿠오를 추앙하지만 결국은 슌스케에게 봉사한다. 이런 논리를 하루에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려는 것이 감독의 의도 아니었을까.

사실 약간 억지인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인물이다. 감독이 하루에라는 캐릭터에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었다면, 최소한 슌스케의 아내가 된 뒤에 기쿠오에게 뭐라도 이해를 구하는 행동이 있어야 하겠지만, <국보>의 하루에에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기능적인 캐릭터로 그냥 활용되고 말았다는 느낌이다.

 

6. 이 영화에는 묘하게 등장인물들이 분장실 거울을 통해 다른 인물을 바라보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거울 속에 있는 나(남성)는 나인가, 아니면 극중 인물인 여성인가, 아니면 극중 여성을 연기하기 위해 준비하고 존재하는 내 안의 여성인가. <국보> 속의 '여성'이란 이런 존재다. 이 가상의 여성이 강조되기 위해, 실제 여성 캐릭터들은 소품이나 별 치이 없게 다뤄지는 셈이다.

이런 내용을 통해 영화 <국보>는 철저하게 남자들의 이야기와 남자들의 세계라는 가부키 월드의 특징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생각. 물론 더 나아가면 일본이라는 사회의.... (뭐 이건 그냥 넘어가자)



7. 놀라운 것은 배우들의 호연. 키쿠오와 슌스케의 소년 시절 역할을 한 두 배우, 성인 연기를 한 두 배우 모두 감동적인 열연을 펼친다. 1년 넘게 가부키를 수련해야 했다는데, 화면을 보면 그 성과가 놀랍다(혹시 가부키 전문가들이 보기에는 영 미흡했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 관객으로서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하고 이색적인 가부키 무대의 연출 또한 대단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키쿠오와 슌스케의 관게를 LGBT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도 당연히 없지 않겠으나, 누차 말했듯 이 영화는 남성성의 강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더욱 서로에게 끌릴 수도 있겠으나, 그 끌림은 근대 이후 설정된 우정(그리스 시대의 우정이 아니다)의 선을 넘어서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선이 비슷한 두 배우를 캐스팅 한 것은 결국 또 하나의 거울, 즉 내가 너를 보듯 너는 나를 보면서, 나의 이런 인생을 너만은 이해할 수 있다는 느낌을 더욱 강조한다. 

 

8. 엔딩. 이상일 감독은 죽 이어진 스타일대로, 구체적인 해석이나 설명 없이 영화를 맺는다. 과연 기쿠오는 무엇을 얻었나. 인간 국보가 된 것이 그가 평생 추구한 것의 성취인가. 평범한 인간들이 추구하는 다른 모든 요소들을 포기하고 도달한 것이,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는가. 답은 어디에도 없다.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문득 철저한 자기 부정으로 끝을 맺은 이문열의 <금시조>가 떠오른다. 

9. 아무래도 가부키라는 장르를 지금껏 한번도 접근하려 시도하지 않았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받아 온 항일교육, 즉 왜색을 멀리하고 일본 문화의 요소를 긍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강력한 정신 교육의 의 지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 <국보>가 호평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제 그런 구세대의 잔재에서 어느 정도 대한민국이 자유로워졌다는 뜻. 혹은 케이팝과 케이컬처라는 이름의 문화적 자부심이 '가부키 정도는 뭐라도 괜찮아'라는 안심을 준 것일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런 요소들 외에도 가부키라는 장르에 다가가기 쉽지 않았던 것은 그 '형식 과잉'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영화 <국보>는 그런 형식 과잉의 예술에 대한 거부감을 어느 정도 씻어주고 있다. 뭣보다 이 정도의 치열함이 있다면, 그게 뭐든 그 결과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음번 일본 방문 때에는 한 막이라도 가부키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봐야 할 것 같다. 그 전에 만화 <가부쿠몬>부터 구해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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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에 몸살기가 있어 일찍 잠들었더니 이런 충격적인 일이.

1. 로버트 레드포드의 부고라니. 뭔가 포스팅을 남겨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지만 첫줄을 쓰기가 어려웠다. 레드포드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60년대 끄트막에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70년대 내내 세계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고, 80년대에도 위력을 발휘한 배이자 감독, 제작자. 

<내일을 향해 쏴라> 때 이미 33세, 결혼 12년차, 1986년에 이미 50세였지만 여전히 여심을 흔들 수 있었던 매력적인 사람. <스팅>,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추억(더 웨이 위 워)>, <위대한 개츠비>, <내추럴>, <아웃 오브 아프리카>, 소수 취향으로는 <콘돌>이나 <하바나>, <업 클로스 앤 퍼스널>, 직접 출연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미니미를 발굴해 넣은 <흐르는 강물처럼>, 미니미와 함께 출연한 <스파이 게임>... 배우로도, 감독으로도, 제작자로도, 환경운동가로도, 영화운동(?)가로도 성공한 인생. 심지어 결혼도 두번밖에(?) 안 했고, 불필요한 스캔들도 없는, 할리우드의 수피(sufi)같은 인물. 

대체 어떤 짧은 글로 이 사람을 조상한단 말인가. 무리다.



2. 한국에서도 ‘CHiPs’라는 미국 드라마가 인기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의 활약을 그린 드라마라 <기동순찰대>란 제목으로 방송됐고, 에릭 에스타라다라는 멕시코 계 배우가 스타가 됐다. LA를 무대로 하다 보니  한번은 순찰대원들이 셀럽들을 초청해 채리티 행사를 갖는다는 설정이었는데, 당연히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등장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행사장에 말을 타고 나타나 천천히 지나가자 그 순간, 주변이 모두 정지했다. 진행을 맡았던 순찰대원도 얼어붙었다.


“무슨 일이야, 왜 다 넋이 나갔어?”
“못 봤어? 로버트 레드포드가 왔잖아!”

사실 얼굴도 나오지 않았다. 다만 제작진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그렇게 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왔지만 로버트 레드포드는 그들과는 격이 다른 스타라는 것, 즉 ‘스타의 스타’라는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이름만 출연’한 이 장면이 왠지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2. 희대의 미남 스타이면서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타가 되기를 거부한 배우.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는 전반적으로 멜로드라마 혹은 코믹 멜로의 터치가 매우 빈약하다.


물론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탈리 우드의 일생을 그린 다큐 <나탈리 우드의 유산>에서 레드포드는 “나에게 할리우드의 주인공 길을 열어 준 것이 우드”라고 말한다. 어느날 우드가 레드포드가 나오는 브로드웨이 연극을 보고, 제작진에게 강력하게 추천해서 레드포드를 주인공으로 데려왔다는 거다. 

제인 폰다와 공연한 <공원의 맨발>도 같은 경우(이 시절의 제인 폰다는 베트남전에 반대한 의식있는 배우가 아니라, 마냥 발랄한 청춘스타였다). 이 시기의 레드포드는 그야말로 반짝반짝하는 로코 남주에 최적화된 배우였다.


하지만 <내일을 향해 쏴라> 이후 그는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들 중 가장 로맨틱한 작품들인 <추억>과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상대역이 바브라 스트라이잰드와 메릴 스트립이라는 것은 꽤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쩌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의식이 강한 배우였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에서 예쁜 건 나 하나로 족해’ 같은. 어쨌든 그는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꽃같은 남주'로 남고 싶지는 않은 배우였던 것 같다. 



3. 영화 속에서든, 밖에서든 사회참여를 빼고 레드포드를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부분을 상징하는 작품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그는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취재일지를 책으로 쓰기도 전에 우드워드에게 연락해서 “내가 판권을 살테니 빨리 책을 쓰라”고 종용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원작을 사고, 자신이 우드워드 역을 맡고(당시 할리우드에서 레드포드가 하겠다는데 투자하지 않을 영화사는 없었다), 더스틴 호프만을 직접 섭외해서 번스타인 역을 맡겼다. 이 정도면 다 한건데 어쨌든 프로듀서 리스트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당시의 관행이라나. 



4. 그 이후로 레드포드는 환경과 인권에 대해 심심찮게 입을 열었고, 한때 민주당에서는 진지하게 레드포드를 대선에 내보내는게 어떠냐는 검토도 했다고 하지만 본인은 유타주의 산골 오두막에 숨어 사는게 더 좋다며 고사했다고 전해진다. 대신 선댄스 재단(선댄스 키드의 바로 그 선댄스다)을 만들었고, 선댄스 영화제를 만들어 할리우드의 신인 공급 루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5. 배우로서의 그는 엄청나게 대본 보는 눈이 뛰어났다. 그가 주연한 영화들은 최소 3,4개씩 아카데미 트로피를 쓸어갔지만 그의 몫은 없었다(감독상 제외). 언젠가부터 그는 고뇌하는 지식인, 인간에 대한 애정이 담긴 따스한 인물을 주로 연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좋았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좋은 것은 선댄스 키드로서의 레드포드다. 말수 적고, 그만치 말보다 행동이 빠르고(절친 부치 캐시디에게도 “네 여자를 빼앗는 중이야”라는 말에 바로 총을 뽑으려 허리를 더듬는다), 다만 수영을 못하는 선댄스 키드. 



나중에 아무리 넉넉한 웃음으로 뭇 여성들의 혼을 빼놓아도, 여전히 남아 있는 선댄스 키드의 서늘함이 마음 한 구석에 떠올랐다. 세상의 선악에서 떠나 있는 듯한, 어찌 보면 순수악의 표상 같은 느낌. 

야구도 해봤다가 실패하고, 그림도 그려 봤다가 별 재미를 못 보고, 무대미술로 전향했다가 마침내 ‘외모’를 활용하기 시작한게 20대 후반. 그러다 30대에 터져서 무려 50년간 그냥 ‘로버트 레드포드’라는 일반명사로 군림한 사람.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못 받은게 티끌같은 흠이지만 이승에서도 더 이상 누릴게 없이 잘 사신 분. 저 세상에서도 내내 평안하시길.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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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보고 쓴 글은 맞지만 딱히 리뷰라고 하기는 애매한 글입니다. 극장판 <무한성편>은 일단 비주얼 면에서는 황홀합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무한성의 렌더링이 감동을 자아내고, 격투신의 박진감 또한 매우 뛰어납니다. 

물론, 그러나, 본인이 애니보다 만화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귀멸의 칼날>은 만화책 대신 애니로 거의 다 봤으면서...), 특히나 무한성편에서 모든 캐릭터들은 너무나 말이 많습니다. 장광설도 이런 장광설이 없습니다. 싸우는 시간보다 떠드는 시간이 훨씬 더 길고, 그게 제게는 심하게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저같은 이런 의견보다는, 비주얼 당연히 멋지고, 내용도 가슴저리게 감동적이었다는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아무튼 쓴 글은, 무한성편을 보다가 든 궁금증입니다. 대체 왜 어른들은 어디 가고, 아이들만 혈귀와 싸우고 있는거지?

시작.

무한성에 앞서 <귀멸의 칼날>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열심히 보고 있다(미친돗이 열광하는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뜻. 대단한 팬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 보다 보니 묘한 생각이 떠오른다. 

왜 귀멸대의 검사들은 이렇게 다 어릴까. 인류의 미래가 걸린 혈귀와의 전쟁을, 어른들은 왜 방관하고 있을까. 무한성 시점을 기준으로 가장 나이 많은 주 교메이가 27세. 탄지로는 16세. 나머지 주요 등장인물들은 10대 중반-20대 초반. 최연소 주인 토키토는 13세... 너무 어리다.



가장 먼저 나올 답은 '<귀멸의 칼날>의 타겟이 10대라서'인데 이건 너무 당연한 애기고, 그럼 이것을 설정이 어떻게 합리화하는가가 궁금했다. 

첫번째 이유는 귀살대와 주가 얼마나 극한직업인가에서 기인한다. 즉 귀살대에서 혈귀들과 싸우며 20 중반을 넘긴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 그 전에 대부분 싸우다 죽기 때문이다. 27세면 놀라운 나이. 귀살대가 되어 싸우면서 그 나이를 넘겨 심지어 늙어 죽을 수 있다면 그건 대단한 행운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 혈귀와의 전쟁이 중요한 일이라면, 혈귀가 이렇게 날뛰는데 왜 조정은 적극적으로 토벌하지 않고, 혈귀와의 투쟁은 일개 가문의 일로 한정되어 있을까. 혈귀의 수장 무잔이 여러 경로를 이용해 조정까지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무잔이 조정을 움직여 귀살대를 토벌해버리는게 더 손쉬울텐데 그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세계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약간 비약이 있겠지만, 가능한 답은.... 이 <귀멸의 칼날>의 세계에서 어른들은, '혈귀를 배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능하다. 혈귀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희생시키는 존재이므로, 당연히 희생자는 계속 나오지만, 혈귀의 덕을 보는 사람도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이 '혈귀'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냥 자연재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죽는 사람은 나오기 마련. 

그런 것이 바로 어른의 세계다. (다만 혈귀의 혜택이 뭔지는 잘 보이지 않는데, 그냥 넘어가자.)



귀살대는 그런 세계 안에서 인간의 마음을 지키려 싸우지만, 성인이 된 귀살대가 거의 없는 것은, 성인이 되기 전에 모두 전투에서 사망한다기보다는 살아남더라도 혈귀가 되거나, 혈귀의 존재를 인정해버리는(혹은 혈귀와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인간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혈귀의 상현 중에는 귀살대 출신이 몇명 있고, 그중 아카자는 끝까지 물의 주 키유에게 '혈귀가 되라'고 권유하고 무잔도 탄지로를 혈귀로 만들려 한다. 사실 상현까지 성공한 것이 두명일 뿐, 귀살대에서 넘어간 인원은 실제론 훨씬 더 많은게 아닐까. 



이런 시각에서 보면 <귀멸의 칼날>은 인간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너무나 통렬하게 비웃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이라고 모두 불의에 맞서 목숨을 바치는 것은 아닌데, 세대가 바뀔 때마다 그들은 어느새 이들을 가로막는 존재(즉 혈귀)가 되어 있거나, 혈귀와 함께 살아가기를 택한다. 예를 들어 빵 공장에서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는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지만, 죽을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이건 자연재해나 마찬가지다, 라고 외면하며 살아간다. 이런 것이 혈귀 식의 논리다.

혈귀가 수십만 수백만이 아니니, 혈귀로 인한 희생자는 80억 인구에 비하면 극소수일 뿐. 그 정도를 희생시키고,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 선에서 내 삶을 유지하는게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어른들은 혈귀와 싸우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잔을 해치우는 과정에서 주인공 탄지로를 비롯한 귀살대 대부분이 죽거나 치명상을 입는 것도 충분히 설명 가능하다. 그들은 이미 정상적인 '어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혈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정말로 이런 이야기일까. 그렇다면 <귀멸의 칼날>은 정말 끔찍한 작품이 아닐수 없다. 비록 무잔을 해치우는걸로 끝났지만, 끝나지 않는 이야기... 무잔은 사라져도 다른 무잔이 어느새 만들어져 그 자리를 차지할테고. 아무튼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해석은 관객의 권리)

제일 불쌍한 토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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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스포일러는 없지만 일단 영화를 보시고 읽어보시길 권장. 근 몇년 사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얼른 보라고, 극장에서 내려오기 전에 보라고 권한 영화가 없었다. 후회 안 하실 거라고 믿는다. 이상.

 

1. 블루스라는 단어가 나에게 의미를 준 시점을 기억한다. 1993년 여름, 취업이 결정되지 않은 애매한 시기에 갑자기 기회가 생겨 난생처음으로 미국 유람을 가게 되었다. 첫 도착지는 시카고. 당시 노스웨스턴대 유학중이던 친구 집에 기숙하기로 했는데, 그 친구가 시카고에 왔으면 가봐야 한다고 끌고 간 곳이 블루스 바였다. 

허름한 창고같은 건물, 중학교때 이후로 본적이 없는 나무 책걸상 같은 테이블과 의자. 파고다극장만도 못한 무대. 그런데 온 손님 중에는 뭔가 상류사회 냄새가 나는 사람들도 있어 좀 의외였다.  

라이브 시간이 되자 지독하게 깡마른 흑인 노인 한 사람이 담배를 물고 무대로 걸어나와 아주 천천히 기타를 어깨에 걸치고, 케이블을 연결했다. 어찌나 오래 걸렸는지 저러다 쓰러지는거 아닌가 싶었다. 이마 가득한 주름 사이에는 담배도 끼울수 있을것 같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불붙은 담배를 마이크 옆에 끼운 노인은 별 연습도 없이 바로 기타줄을 뚱겼다. 



그런데 그 첫 음, 지이이잉 하는 기타 소리를 듣는 순간, 아 이건 대체 뭐지! 하는 느낌이 머리를 띵 때렸다. 그때까지 태어나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였다. 곧이어 노인은 30년 동안 하루 5갑 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절대 낼수 없을듯한 가래 끓는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했다. 당연히 가사는 한마디도 알아들을수 없었지만, 지금 그가 무엇을 노래하는지 한방에 알수 있었다. '삶에 대한 배신감', 바로 그거였다. 

젊어선 나도 한때 우쭐했고, 세상이 우습게 보였고, 연애도 많이 했어. 그런데 지금 내 꼴을 보면 알겠지? 인생이 그래. 기대? 기대하지 마. 도전? 그러다 내 꼴 나. 사랑? 야, 이게 정말 웃긴 건데 말이지, 내가 왕년에, 그런데 다 끝났어. 돌이킬수 없어. 뭐가 이래. 에이 씨발. 생각할수록 이건... 

표정, 목소리, 기타 소리, 완벽하게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흡수할수 있었다. 가사 따위 아무 필요 없었다. 어쩌면, 실제로 그날 그가 불렀던 노래 가사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고 생각한다). 오해라면 완벽한 오해였을 것이다. 뒤이어 드러머도 나오고, 사람들은 일어서서 춤을 췄다. 금세 쓰러질것 같던 노인은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맥주 한병으로 버텨서 세번의 라이브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친구가 아주 잘난척하는 웃음과 함께 말했다.

 "이게 블루스라는거야." 

그 뒤로 집에 돌아와서 블루스에 심취해 자칭 국내 최고의 블루스 마니아가 되었냐....는 건 절대 아니었다. 블루스를 좋아하게 되었고, BB King이며 Buddy Guy며 들어 봤지만, 음반으로 듣는 블루스에선 그날의 처절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연히 그날의 쨍한 충격은 추억의 더깨가 얹혀지며 더 대단했던 것으로 포장됐을테니, 그 체험의 재현은 불가능했다.

운이 좋아서 나중에 멤피스의 빌 스트리트를 가 볼 기회도 있었으나, 지독하게 상업화된 라이브 바들을 봤을 뿐이다.

그런데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씨너스>를 보고, 그날 밤의 그 감흥이 되살아나는 걸 느꼈다.

2. 영화 <씨너스>는 미시시피주 클락스데일이라는 실제 존재하는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다. 거대한 미시시피강의 하구 삼각주를 가리키는 '델타' 지역이야말로 블루스의 고향이다. 

사실 이 클락스데일과 멤피스를 연결하는 선이 바로 블루스가 태어난 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도로의 이름이 바로 61번 고속도로고, 밥 딜런의 앨범 제목인 <Highway 61 revisited>에 나오는 그 61번 도로다. 일명 <블루스 하이웨이>. 이 도로로 나가기 전, 클락스데일 시내에는 일명 <블루스 크로스로드>라는 사거리가 있다. 

앞서 말했듯 멤피스의 빌 스트리트에 가 보면 'Home of the Blues'라는 대문짝만한 아치가 걸려 있다. 하지만 이 홈은 블루스를 세상에 알린 홈이고, 진짜 고향은 클락스데일이라고 누구나 인정한다. 그러니까 블루스는 클락스데일에서 태어났고, 멤피스에서 성인이 되었고, 시카고에서 정점에 도달했다. 바로 영화 <씨너스>의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글 제목을 저렇게 단 거다.)

델타 블루스의 완성자, 현대 블루스의 조상으로 불리는 기타리스트 로버트 존슨은 이 사거리에서 악마를 만났고, 악마에게 기타를 배워 불세출의 기량을 과시했다는 전설적인 존재다. 그 뒤로 이 사거리에 서 있으면 악마를 만날 수 있고, 최고의 기타리스트가 될 수 있다는 전설이 생겼고, 랄프 마치오 주연 영화 <크로스로드(1986)>는 이 전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영화 <크로스로드(1986)>. 당대의 하이틴 스타였던 랄프 마치오가 스티브 바이와 기타 배틀을 펼치는 클라이막스가 압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당시의 록 마니아들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마지막 기타 배틀 신에서 악 소리를 냈다. 당대의 천재 속주 기타리스트, 스티브 바이가 '악마에게 혼을 판 기타리스트'로 나오기 때문에. 그 장면은 지금 봐도 재미있다.

바로 이 장면이다. 안 보신 분들은 한번씩 보시기를 권한다. 

왼쪽이 랄프 마치오(30여년 전 한때 <베스트 키드>, 혹은 <가라테 키드>라는 영화로 세계적인 하이틴 스타 반열에 오른 적이 있다), 오른쪽이 스티브 바이.

로버트 존슨

어쨌든 '전설'에 따르면 1911년생인 로버트 존슨이 어디선가 기타를 배워 클락스데일 무대에 신화처럼 등장한 것이 1932년, 그의 나이 21세때다. 그렇게 당대 최고로 인정받고 급사한 것이 1938년. 27세에 사망했으니 블루스의 신으로 군림한 기간은 대략 7,8년에 불과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영화 <씨너스>의 배경도 1932년 클락스데일이라는 것. 이쯤 되면 영화 <크로스로드>와 <씨너스>는 엄청나게 밀접한 관계임을 알 수 있다. 

 

3. 영화에 대해 간단히 소개. 

1932년 미시시피주 클락스데일. 시카고의 알 카포네 조직 휘하에서 목돈을 모은 1차대전 참전 용사 스모크와 스택(마이클 B 조던이 쌍둥이 형제 양쪽을 1인2역으로 연기한다)이 돌아와 블루스 클럽을 연다. 백인 농장주 소유인 제재소 건물을 사서 블루스 클럽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갖고 이들 형제는 어리지만 발군의 블루스 기타리스트인 사촌 새미(마일스 케이톤), 관록있는 피아노-하모니카 연주자 델타 슬림(델로이 린도), 내장과 운영을 맡을 야오(보 초우) 부부 등 죽마고우와 일가친척을 모두 불러 모은다.

그렇게 해서 오픈한 클럽은 대성황을 맞고, 클럽 무대에 데뷔한 새미는 뛰어난 실력으로 갈채를 받고, 공식적으로는 금주법 시대지만 다들 흥청망청 부어라 마셔라 취해서 춤을 추는 흑인들만의 신명나는 잔치가 진행된다. 하지만 저 멀리 어둠속에서, 흡혈귀 무리들이 서서히 클럽을 노리고 다가온다. 그리고, 해가 뜰 때까지 살아남기 위한 인간들의 사투가 시작된다. (이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타란티노의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오버랩된다.)

많은 출처에서 이 영화를 '이색적인 호러'라고 소개했다. 뱀파이어와 인간의 혈투가 나오니 그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으나, 이건 참 생뚱맞은 홍보 방향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뱀파이어가 나온다고 우리가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호러라고 부르지는 않지 않는가.

뱀파이어 군단

영화 속 뱀파이어들은 기본적으로 백인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물론 이들에게 물리면 흑인도 황인도 뱀파이어가 되기는 하지만, 뱀파이어 무리는 절대 다수가 백인이다. 영화 속 흑인들이 블루스 기반의 음악으로 흥을 올리는 반면, 뱀파이어들은 아일랜드 민요를 부르며 덩실덩실 포크댄스 같은 춤을 춘다. 이게 대체 뭘까. 조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구도다. 

많은 흑인들은 백인들이 흑인들의 것을 강제로 빼앗았다고 말한다. 일단 자유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했고, 나중에는 그들의 영혼(이걸 soul이라고 하면 중의법이 된다)까지도 빼앗았다. 수많은 백인 뮤지션들이 흑인 음악의 정수를 가져가 자신들의 음악에 녹였다.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영향을 받거나 새로운 장르로 탈바꿈시키는 정도라면 충분히 이해할 만 하겠지만, 아예 훔쳐 쓰는 경우도 흔했다. 

흑인 음악이 주류 음악으로 자리잡기 전까지, 아니, 자리잡기 시작할 무렵까지, 그러니까 흑인이 듣는 음악과 백인이 듣는 음악이 따로 있던 시절에 흑인들의 멜로디를 그냥 가쳐 가서 쓰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예를 들면 척 베리 같은 유명 뮤지션도 히트곡 <Sweet Little 16> 같은 히트곡을 그냥 도용당하기도 했다(이 곡이 바로 비치 보이스의 대표 히트곡 <Surfin USA>다). 이 곡은 발매 당시 그냥 브라이언 윌슨 작곡으로 표기됐다. 많은 흑인 뮤지션들이 이런 일들에 대해 아예 항변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척 베리는 이의를 제기했고, 결국 <Surfin USA>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받았다. 

https://youtu.be/ZLV4NGpoy_E?feature=shared

아무튼 이 영화의 분위기로 볼 때 백인 뱀파이어들은 '자유, 노동력에 이어 흑인들의 영혼까지' 빨아 먹는 존재들이라는 은유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렇다면 대체 왜 아일랜드 민요를? 이건.... 굳이 끼워맞추려면 아일랜드 출신들이 유럽에서 넘어온 백인 이민들 가운데서도 주로 하층 노동계급으로 천대받는 계층이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인종주의든 뭐든, 계급간의 갈등은 실제 접점이 가장 넓은 지점에서 가장 강하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흑인들과 가장 접점이 많은 것도 백인들 중 최하위의 계급을 형성하고 있던 아일랜드계(혹은 폴란드 등 동구권)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들이 흑인들에게 직접적인 박해자로 나섰을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대략 그런 의미를 담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설정은 그렇다 치고, 도입부에서 영화는 어딘가 인디영화스러움을 의도적으로 강조한다. 특히 전반부에서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카메라는 자주 초점을 빗나가고, 조명은 지나치게 어둡다. 특히 실내 장면에서 인물들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이 21세기의 첨단 문명 시대에 기술이나 제작비가 부족해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아마도 이런 설정들은 관객들을 자연스럽게 '1932년'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 전기도 제한적이고, 특히 실내 조명은 엉망이었을 당시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고 한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마이클 B 조던과 라이언 쿠글러.

4. 호러 영화라고 누가 주장하든 말든, 사실 이 영화의 정체성은 음악+역사극이다. 음악 신동 출신인 마일스 케이톤을 비롯해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직접 연주와 노래를 실연했다고 한다. 영화는 블루스라는 장르가 목화 따고 돼지 비계에 닭 튀겨 먹던, 비록 노예 신분은 벗어났지만 생활 수준은 그리 나아진 것도 없었던 델타 지역 흑인 노동자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라는 것을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고된 노동과 낮은 보상, 딱히 꿈도 희망도 없는 삶 속에서 이들은 직설적인 가사와 음률을 통해 마음을 다스렸을 터. 이런 정서가 역사책 100권보다 묵직하게 가슴에 와 박힌다. 

플롯 면에서는 누가 봐도 타란티노의 <황혼에서 새벽까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지만, 타란티노의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한과 그 한풀이가 담긴 영화. 그런데 자세히 보면 <황혼에서 새벽까지>도 아무 생각 없이 멕시코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장악해가고 있는 미국 마약상들이 구 아즈텍의 성소를 함부로 모욕했다가 아즈텍 지박령들에게 혼나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정서적으로는 꽤 근접해 있다. 다만 <씨너스>에선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느끼기 힘든, 짙은 페이소스가 풍겨 나온다는 정도. 

씨너스는 결국 결말에서, '불멸이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뱀파이어 영화의 클리셰 같은 이 질문에 대한 쿠글러의 답은 "이미 (블루스 뮤지션으로서) 나는 불멸의 존재다" 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블루스고, 블루스가 나인데, 이 육신의 불멸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탄탄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아무튼 <씨너스>근 3,4년 간 본 영화들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 선명한 영화였다. 오랜만에 마음이 뒤흔들리는 걸 느꼈다. 사실 록키 시리즈를 다시 우려 먹고 있는 <크리드>도, 마블의 <블랙 팬서>도 개인적으로는 별 감흥 없는 영화들이었는데, 이 영화 한 편으로 라이언 쿠글러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게 됐다. 

아무래도 극장에서 내려갈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으니 아직 못 보신 분들은 서두르시길. 어차피 좀 있으면 OTT에 올라오겠지...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아직도 극장에서 보는게 압도적으로 더 좋은 영화들이 있다. 정말이다. 믿어라. 

P.S. 과연 내년 오스카에서 <씨너스>는 어떤 대접을 받을까. 벌써부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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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프레드릭 포사이스(1938-2025)의 부음을 들었다.

그를 문화적 멘토로 생각하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최소한 한국에선 지극히 드물 것 같다. 한국의 분위기에서 포사이스는 절대로 '순문학 작가'는 아니고, 엔터테인먼트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페이퍼백 스릴러 작가 정도로 분류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인생 최고의 작가 중 한명이다. 

가장 먼저 읽은 그의 작품은 1979년작 <악마의 선택 Devil's Alternative>이었다. 아직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구 소련으로부터 우크라이나 독립을 바라는 지하조직 요원들이 KGB 의장을 암살하면서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던 동-서방의 균형이 무너질 위기에 놓인다. 소련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이 이익이 되는 쪽과 당시의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 쪽의, 인류 역사를 건 대결이 전 세계를 무대로 펼쳐진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수준에서나 간신히 해외 문물을 접하고 있던 1980년대 한국 고교생에게 이 작품이 얼마나 거대한 충격을 던졌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미국과 영국을 축으로 한 세계 정보망, 소련의 권력 구조, 흑해와 지중해, SR-71의 비행, 루비앙카 지역의 KGB 본부 묘사를 보며 도대체 이 사람은 소설가인가, 아니면 신인가 감탄해가며 읽었다. 작품 속에 나오는 배 이름 '프레야(Freya)' 호를 '플레이어'라고 번역한 것을 보면 영어 원본은 보지도 못한 사람이 일본어 중역을 한 것이 분명했지만, 당시로선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우크라이나라는 나라를 처음 알게 된 것도 이 소설 때문이었다. 지도를 찾아 보니 실제 있는 나라(물론 소련 연방 내의 한 공화국으로)였고, 무소르그스키 때문에 들어본 키에프라는 도시가 바로 우크라이나의 수도였다. 이 소설 때문에 지금도 우크라이나 국가의 첫 대목, '시츄 니에 우메를라 우크라이나' 라는 구절을 기억한다. '우크라이나는 죽지 않는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을 때, 바로 이 구절이 떠올랐다. '우크라이나는 죽지 않는다'.  

뒷날 로버트 카플란이나 피터 자이한의 책에서 러시아라는 나라의 지정학적 입장을 서술한 부분을 읽으며,  포사이스가 '서쪽으로 독일과 폴란드 방향을 바라보면 가는 길이나 오는 길이나 탱크로 질주할 수 있는 평야뿐이라서' 러시아인들이 느끼는 심정에 대해 묘사한 부분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건 정말 이 책을 읽어본 사람만 알겠지만, 2007년 서해안 석유 유출 사고 때에도 <악마의 선택>이 생각났다. '오염을 최소화하는 가장 빠른 방법'도. 


그 뒤로 포사이스의 작품들은 눈에 보이는 족족 읽었다. 이제는 상식이 된 '냉혹한 불사신 암살자'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할 수 있는 <재칼의 날>은 또 다른 의미의 걸작이었고, <전쟁의 개들>, <오데사 파일>, <제4의 핵>도 멋진 작품들이었다. 역시 모든 작품들이 그때까지 알고 있던 세계의 지평을 넓혀주는 책들이었고, 우리가 늘 느끼는 세계의 이면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물론 내게는 어느 작품도 <악마의 선택>을 넘는 충격은 주지 못했다. 

기자로서, 파일럿으로서, 또 한때 MI6의 정보제공자로서 겪은 생생한 디테일들이 책장을 뚫고 나오는 듯한 느낌으로 읽었다. 주인공들의 치열한 대결은 물론이고, 마지막의 대반전은 또 얼마나 멋진가. 

그러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영국 작가들은 대부분 스파이 관련 경력을 가진 것 같다. 존 르 카레, 그레이엄 그린, 서머셋 모옴, 로알드 달, 이블린 워... 스파이 업무가 스토리텔링 능력을 높여주는 효과가 있는 걸까. 혹시 제프리 아처나 줄리언 반스도 첩보 경력이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런데 대체 왜 지금까지 <악마의 선택>이 영상화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재칼의 날>은 훌륭한 제작진과 에드워드 폭스라는 훌륭한 배우를 만나 영화로 성공했고, 얼마 전 에디 레드메인의 드라마 <재칼>로도 성과를 거뒀다. 나머지 작품들은 영상화에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제법 괜찮은 작품들이 나왔고, 그 덕분인지 쓰는 족족 많이도 만들어졌다. 그런데 왜 이 최고의 작품이 빠진 것인지.)



포사이스의 작품을 읽다 보면 감탄하게 되는 부분, 그가 단지 엄청난 디테일과 스릴을 살리는 방향에 특화된 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심 감탄하게 되는 것은 그의 문장력이다. 어떤 사람들은 톰 클랜시가 그의 계승자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미안하지만 클랜시와 포사이스는, 비록 원문으로 본 문장은 많지 않지만, 이 문장력 부분에서 너무나 격이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읽는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포사이스의 솜씨를 보려면 간단히 그의 단편집 <면책특권>을 어떻게 구해서 읽어보기 바란다(영어 제목은 'No comebacks'인데 왜 저 한국어 번역본은 저런 제목을 선택했는지...).

10편 모두 정말 주옥같은 단편들이지만 <돌아오지 않는다>와 <제왕>은 특히 압권이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런던의 성공한 사업가가 가난한 퇴역군인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면서 생기는 일, <제왕>은 은퇴를 앞둔 배불뚝이 아저씨가 아내와 함께 열대의 섬으로 휴가를 떠났다가 우연히 바다낚시를 경험하면서 놀라운 일을 경험하는 이야기다. 아마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대한 역대 최고의 패러디가 아닐까 한다. 이밖에 <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도 아일랜드에서 우연히 막노동을 하게 된 인도 유학생의 이야기인데, 아마 다른 앤솔로지를 통해 잘 알려진 작품일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포사이스의 글쓰기에서도 참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만큼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다만 아쉬운 것은, 2000년대 이후의 작품들은 이전의 작품들에 비해 확실히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 아무래도 현장감을 강력한 무기로 갖고 있던 작가다보니 나이들어 현장을 떠난 뒤로는 뭔가 생생함을 표현하는데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슬프지만 사실이다. 심지어 <맨하탄의 유령>같은 작품은 대체 왜 썼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는 대체 어쩌다 이 작품을 갖고 <오페라의 유령> 속편을 만들었나 하는 생각도....)

물론 한창때의 작품 중에서도 실망스러운 작품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본을 무대로 한 <은신처>는... 제아무리 천하의 포사이스도 이렇게 '모르는 나라의 모르는 정서'를 표한하는 것은 무리였구나 하는 생각을 주는 작품이었다. 

어쨌든 꽤 장수하다 가셨네요. 포사이스 옹, 마음의 양식을 풍성하게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평안하시길. 

그런데 혹시나 해서 검색해보니 읽을만한 작품들은 죄다 절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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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이를 넘어 고혹적인 맏딸, 미야자와 리에. 둘쨋딸, 미인이지만 확 끌리지는 않는 둘째딸, 오노 마치코. 별 인기도 없고 남자와 인연도 별로 없는 셋째딸, 아오이 유우(이건 좀 캐스팅에 문제가...?), 그리고 젊음과 발랄함이 주제인 막내 히로세 스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아수라처럼>을 본 사람은 누구나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떠올린다. 같은 감독이 만든 자매들 이야기. 그때 밖에서 들여온 막내였던 히로세 스즈가 이번에도 막내지만 업둥이 아닌 정규 멤버가 되었다는 점에도 뭔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어쨌든 믿고 보는 고레에다. 명불허전. 드라마는 아름답고 섬세하다. 안 보신분들 얼른들 보시고,

2. 그 네 딸들이 남자를 만나고, 결혼을 하고, 바람을 피우고, 바람을 의심하고, 자매간에도 툭탁거리고, 그러면서도 가족의 테두리를 꿋꿋하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라 매우 흥미롭다. 템포도 적당히 빠르고, 중간 중간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면같은 것 없이 툭툭 넘어가는 시간 흐름도 좋다. 그런데 제목이 <아수라처럼>이라니. 한국식 막장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에겐 아수라장이라면 이보다 10배는 더 극악스러워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느낌인데.

 

그럼 한국에서라면 어떤 제목이 적절했을까. 아사리판? 문득 아사리판의 어원이 아수라장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3. 게이샤 지망생인 마이코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었다가 약간 쓴 맛을 봤지만, 고레에다는 글로벌 시청자를 상대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로컬리티를 강조해야 한다는 신념을 아직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일본 프로듀서들의 공통된 입장인 듯. 고레에다가 에이스인 팀 재팬은 지금까지 게이샤, 스모, 닌자처럼 오래 전부터 서구인들이 사랑해온 소재들로 넷플릭스를 노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만든 것은 아니지만 미국 시장에서 <쇼군>의 성공을 봤으니 이런 신념은 다 굳어졌을 것 같다.

 

똑같이 목표는 세계인에게 먹히는 콘텐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를 지향하지만 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 있는 이야기를 만들자는 쪽으로 성과를 내고 있는 한국 팀과는 상반된 접근이다. 물론 어느 쪽이든, 잘 만들면 다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다들 파이팅.

4. 그런데 자매 이야기를 해서 성공하려면 딸이 넷이어야 하는 법칙 같은 거라도 있는 걸까? <작은 아씨들>도 그렇고, 지난해 인상적으로 읽었던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세설>도 그렇다. 특히 같은 일본 작품이다 보니 <세설><아수라처럼>은 은근히 구조적인 공통점이 눈길을 끈다.

 

네 자매지만 맏딸보다 둘째딸이 동생들을 리드하는 역할을 한다든지, 그러다 보니 둘째딸의 남편이 처형이나 처제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족의 일원처럼 행동한다든지, 셋째는 남녀관계에 소극적이고 넷째는 오히려 지나치게 개방적이라 대조를 이루면서 가족들의 걱정을 산다든지...사실 이런 것들보다 더 표면적으로 다가오는 부분은 일본 전통 복장의 네 자매가 전면에 나선 포스터 같은 것들이다.

(세설이 뭔가 궁금하신 분들은 이쪽으로.)

세설, 벚꽃이 지는 간사이의 봄날같은.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세설, 벚꽃이 지는 간사이의 봄날같은.

물론 벚꽃철에 교토에 간 적은 없었다. 단지 상상했을 뿐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짧은 시간 세상을 화려하게 뒤덮다 강 위로 둥둥 떠내려가는 꽃잎을 노래하고, 그렇게 처절하게 사라지는 벚꽃

fivecard.joins.com

 

워낙 유명한 작품이다보니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을 수는 없을 것 같고, 오히려 똑같잖아!’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비튼 부분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세설>을 아는 사람에게는 이런 비교 자체가 흥미롭게 느껴진다.

 

5. 사실은 <세설>과의 공통점을 너무 강조할 수도 없는 것이, <아수라처럼> 자체가 일본에서는 워낙 유명한 브랜드였더라고. 1979년에 이미 원작 드라마가 나와 히트했고, 2003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고레에다의 2025년 드라마 출연진도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 올스타 캐스팅으로 보이지만, 2003년작 영화에는 오타케 시노부, 구로키 히토미, 후카츠 에리, 후카다 교코가 네 자매 역으로 출연. 굳이 점수를 매겨 보자면 이쪽이 더 대단한 캐스팅으로 보인다. 

영화는 어땠는지도 궁금하네.

 

 

6. 사실 아무도 관심 없을 디테일 하나. 1980년대 초가 배경이고, 넷째딸의 남편이 권투선수이다 보니 구시켄 요코가 잠시 언급된다. 사실 나도 구시켄 요코를 직접 보거나 아는 세대는 아니지만, 장정구와 유명우를 언급할 때마다 따라다니던 이름이라 저 두 영웅을 아는 사람에게는 매우 친숙한 이름이다. 한국의 장정구와 유명우가 세계 라이트플라이급을 호령하기 얼마 전, 일본의 구시켄 요코는 세계 타이틀을 무려 13차례 방어하며 일본의 복싱 영웅으로 군림했다. 물론 이 기록은 장정구가 15차 방어에 성공하며 깨진다.

 

이런 걸 보면 문득 한국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대략 10년의 시차를 두고 일본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다시 걸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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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관이 압도적인 호쿠사이 미술관.

그런데 사실 이게 다라고 해도 큰 무리는 아니었다. 

호쿠사이의 고향 스미다라는 점을 강조한 것까진 좋은데, 정작 호쿠사이의 그림을 그리 많이 소장하고 있지는 못했다. 

전시실은 3층의 두개가 전부. 2층은 특별 전시 때만 사용한다고 한다. 

전시실 하나만 보면 400엔, 두개 다 보면 700엔. 그런데 표를 사려고 서 있으면 옆에서 친절하게 얘기를 해준다. 400엔으로 볼 수 있는 건 전부 레플리카라고. 

뭐요 레플리카? 호쿠사이 미술관이라고 이름을 걸어놓고 레플리카?

뭐 기본적으로 우키요에는 전부 판화다. 그 판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느 것인지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건 좋았다. 

그 유명한.... 그런데 물론 레플리카.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본 '요시와라의 새해' 그림. 

요시와라는 에도 시대의 유명한 유곽 지역. 새해를 맞아 요시와라의 여인들이 몸 단장을 하고 손님맞이 준비를 하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요란하게 그려져 있다. 

물론 '풀 스케일 하이 데피니션 레플리카'라고 쓰여 있다. 

가나가와의 혼모쿠 해안 그림. 그 유명한 가나가와의 파도 그림의 자매편 쯤 되는데, 역시 레플리카. 

조개줍기 그림. 언뜻 봐도 몇군데 벗겨진 것이 오래된 느낌이 든다. 혹시 이건...?

진품이네. 그 유일하게 하나 있는 진품에는 '사진찍지 말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아. 미안해. 벌써 찍었네. 이거 하나는 봐줘. 

이런 식의 삽화들, 

그러니까 이 두 그림은 모두 후가쿠 36경이라는 시리즈의 일부다. 후가쿠( 富嶽)는 후지산의 별칭. 

당연히 후가쿠 36경에 담긴 그림에서는 모두 후지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판화집에는 모두 46장의 그림이 실렸다는데(36경이라더니?) 당시에도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했다고. 과연 몇부나 찍었을지?

(물론 이 그림들도 모두 레플리카...)

사실 호쿠사이의 작품들 중에서 특별히 맘에 드는 건 이런 식의 귀신 요괴 그림들.

결국 현장에서 이런 우키요에로 그린 귀신 그림 모음집을 샀다.

그리고 우키요에 미술관을 따로 찾은 보람은,

호쿠사이의 아틀리에(?)를 재현해 놓은 공간.

제자 츠유키 릿츠가 그의 작업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그 그림대로 방을 재현해 놓았다. 

방이 좀 추웠던 듯? 옆에 앉은 여인은 당연히 아내겠거니 했는데 위의 설명을 다시 읽어 보니 딸이라고.

아니 딸이 왜 나이가 더 들어 보여... 살림살이가 넉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기야 당시의 우키요에는 포스터, 포장지, 책 표지로 마구 뿌려졌다고 하니 뭐 그럴수밖에. 대신 후손들에게는 꽤 좋은 일을 한 편이다. 호쿠사이의 이름만 내건 이 허접한 미술관도 꽤 많은 방문객을 모으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호쿠사이의 공로 중 하나는 만화를 발명(?) 했다는 것인데, 

그의 작품집 중에는 호쿠사이만화(北斎漫画)라는 이름인 '그림 그리는 법 교본' 풍의 책이 여러 가지 있다. 

대략 이런 식으로 된 책인데, 인물 표정의 단순화, 동작, 표정을 통한 의미 전달 등이 현대 만화의 기본을 모두 갖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호쿠사이 만화가 줄거리와 대사가 있는 현대 만화와 바로 이어지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cartoon의 한자 번역어가 '만화'가 된 것은 바로 이런 호쿠사이의 공헌 때문이라는 것.

그래서 현재 모든 일본의 만화가/애니메이터의 조상은 호쿠사이라는 말이 자주 통용된다. 

물론 이 미술관에 전시된 호쿠사이 만화는 진품인지.... 역시 촬영 금지. 

그리 크지도 않은 전시실 2개 뿐인 호쿠사이 레플리카 뮤지엄은 30분 정도면 다 볼 수 있다. 더 있고 싶어도 더 볼게 없다. 

기념품점에서 도록이나 카드를 사는 정도로 끝. 

건물만 멋진 호쿠사이 미술관 안녕. 

기운이 빠져 호텔로 후퇴하기로 했다. 

오는 길에 다이몬 역 앞에 있는 도쿄 유수의 붕어빵집을 들렀다.

한국에서는 '붕어빵' 이지만, 아무래도 그 원조일 일본에서는 '타이야키'라고 부른다. 타이는 돔. 

돔과 붕어의 몸값 차이가 있으니, 한국의 붕어빵과 일본의 타이야키는 몸값 차이가 어마어마하다. 팥, 고구마, 크림이 든 타이야키는 300엔. 계절 한정 상품인 사과가 든 것은 330엔. 

한국에서 붕어빵이 이제 천원이라고 개탄을 했는데 여기선 이미....

그 이름도 거룩한 나루토 타이야키 본점. 나루토는 물결이 거세기로 유명한 세토나이카이의 해협 이름이다(닌자와 무관). 거기서 잡은 도미가 맛있다고 해서 타이야키 이름에 나루토를 붙이는 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센스.... 

(하긴 영덕 게빵이 있는 한국 사람이 이런 말 하면 안 될지도.)

잘 보니 토카치(홋카이도의 지명이다)의 명산 팥, 나루토의 고구마를 썼다는 것 같다.

근데 한국 붕어빵도 이렇게 번듯한 가게에서 위생복 입은 직원이 만들면 한개 3000원쯤 하려나?

3000원짜리 단팥빵이 있는 걸 보면 그리 놀라운 가격이 아닐수도. 

돈 날아가지 말라고 누르는 역할의 도미도 있다. 천엔 내고 3개. 

사과에는 애플파이 같은 사과 프리저브가 들었고, 

팥에는 팥이 가득 들었다.

껍질이 한국 붕어빵보다 훨씬 얇은데다 팥도 연양갱 수준으로 달다.

양갱에 껍질을 살짝 붙인 느낌. 어우 달어. 난 인제 됐네. 

이렇게 해서 레플리카 미술관을 다녀온 느낌으로 똑같이 퐁퐁 찍어내는 붕어빵으로 마무리.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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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인가 도쿄를 처음 갔을 때, 혼자였다. 날은 꽤 쌀쌀했고, 아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일본어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마디도 못한다. 여행안내서에서 우에노라는 지명을 처음 봤다. 숙소가 신주쿠 주변이라, 녹색 야마노테센을 타고 한참을 갔다.

우에노공원이라는 이름 안에 동물원, 미술관, 박물관이 한데 모여 있었다. 평일 오전이라 한적한 공원. 차가운 비가 스물스물 내리는 길을 혼자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데, 진입로에 뜬금없이 군고구마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침을 챙겨 먹었지만 군고구마 냄새는 위협적이었는데 가격이 400엔. 당시 한국 기준으로 고구마 하나에 4천원은 너무 비쌌는데 심지어 웬만한 무 만큼 고구마가 컸다. 

"하프?"

손님이 없어서 그랬는지, 외국인이 딱해서 그랬는지 아저씨가 절반을 뚝 잘라 주고 200엔을 받았다. 그때부터 우에노는 내 기억 속에 군고구마로 남았다. 

어 하고 들어가보니 여기는 아시아관. 우에노 일본 국립박물관에는 3개의 건물이 있다. 하나는 한국, 중국, 태국 등의 유물을 전시한 아시아관, 일본을 대표하는 박물관인 본관, 그리고 표경관이라는 건물이다. 건물은 표경관이 제일 예쁜데... 뭔가 헬로 키티 전시회를 하고 있다. 

다 돌아보기엔 기운도 딸리고, 아무래도 관심있는 건 일본 유물. 본관으로. (사진은 재팬가이드. 건물 정면 사진을 못 찍음)

1938년에 지어진 건물. 고색창연한 1층 로비와 계단. 

눈길을 확 사로잡는게 화려한 기모노. 

뭐 제대로 기모노를 보자면 복식박물관 같은 것이 따로 있겠으나,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물건인 만큼 하나 하나 수로 놓인 장식이 어마어마한 공력이 들었음을 바로 알수 있게 한다. 

사실 기모노에서부터 느껴지는데, 워낙 오래 전이라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전시의 규모가 좀 줄어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서울의 국립박물관처럼 시대순으로 배치되어 있지도 않고, 주제별로 일본을 대표하는 유물들을 보여주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졌다는 느낌? 

이를테면 죠몬시대, 아스카 문명, 무로마치 시대 등으로 구분되어 있는게 아니라 유키요에, 기모노, 그림, 칼, 요로이와 구조쿠(갑옷), 도자기, 불상 등 주제에 따라 유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 주제에 대해 전시된 유물이 그리 많지도 않다. '보셨죠? 이렇게 대단한 유물이 많아요' 라는 태도가 아니라, '뭐 이런 겁니다' 정도랄까. 대신 동선이 훨씬 여유롭고, 이해를 돕는 보조 자료(이를테면 영상)의 활용이 많았다.

그리고 모든 유물의 설명이 일본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로. 

여름에 도쿄 민예관을 다녀온 뒤로 도자기에 요즘은 눈길이 간다. 이런 19세기식의 화려한 스타일.  

이건 17~18세기 에도 스타일. 에도 시대에도 '교야키(京燒)'라고 부른 것은 교토 도자기였다니. 바닥에도 '미조로가이케'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는 것은 이때 이미 도공들의 브랜드가 진행되었다는 얘기겠지. 철화, 청화, 백토가 모두 동원된 표현 기법도 세련되어 보인다. 

이것이 임진왜란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모여 살았던 큐슈 이마리(伊万里) 도자기. 아직까지는 독자적인 스타일 보다는 중국 경덕진 도자기 스타일의 작품들을 만들 시절이라고 되어 있다. 

물론 그 이전 것들인, 한반도에서 만들어져 일본으로 건너간 물건들도 꽤 많았다.

'겐토'라는 이름까지 붙여져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명품으로 꼽히던 작품.

우리 눈으로 보기엔 그냥 흔한 밥공기 같은 이런 물건들이 일본에서는 고려다완이라 불리며 엄청난 귀물 대접을 받았다는 것이 여전히 신기하다. 

그리고 눈길이 가는 건 이런 정교한 완구류,

한국 유물 중에는 흔히 보기 어려운 이런 정교하고 아기자기한 소품들. 소풍 세트라니.

주문 생산일지, 공산품일지는 모르겠지만 저런 물건이 만들어지고 팔렸다는 것은 취향이라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수준의 도시 문명이 통하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얘기.

그리고 우타가와 히로시게(이때까지는 우타가와도 한 사람인줄 알았다. 알고보니 우타가와는 우키요에 화가 패밀리의 이름. 스승이 우타가와면 제자도 데뷔 후 우타카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의 우키요에를 보다가, '내친김에' 스미다에 있는 호쿠사이 미술관을 가기로 맘 먹었다. 

전철역에 내리면 보이는 엄청 큰 간판. 전철역에 '스미다'가 살짝 가렸다.

어쨌든 호쿠사이가 살았다는 동네라 '스미다'를 강조한다. '스미다 호쿠사이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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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후쿠오카 맛집이라는 키와미야. 도쿄역 1층 식당가에 도쿄점이 있다.

소싯적부터 함박스텍이 진정한 소울푸드라고 생각하며 자라온 터라 맛있다는 함박스텍이라면 닥치는대로 먹어왔다. 키와미야는 極味라는 이름 그대로 궁극의 맛을 지향한다는 집. 거의 순 살코기 덩어리인 함바그를 손님이 직접 숯불에 구워 먹는 컨셉이라니. 어찌 당기지 않을손가. 

그러나 첫날은 보기좋게 실패하고, 둘쨋날은 오픈런으로 맞섰다. 11시 오픈이라니, 10시 반에 가면 충분하겠지.

물론 줄은 좀 서 있는데, 전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 이 정도면 충분히 들어가겠다 싶었다.

줄서기가 어찌나 요란한지, 대표로 줄서기 금지가 난리. 하지만 곧 이것 때문에 분노하게 된다. 

오른쪽으로 꺾어져서도 몇명 더 서 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오픈런 성공이다 싶었는데... 바로 앞의 키작은 여자가 문제. 

이윽고 셔터가 올라가고, 입장 준비 시작. 4인석 같은 것은 없고, 이런 식으로 빙둘러 카운터에 앉는 방식이다. 

그런데 문열기 5분 전쯤 앞에 줄을 선 여자 옆에 어디선가 4명의 일행이 날아와 붙는다. 다들 여행가방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메 열차에서 내렸거나, 열차를 타러 차비를 하고 나온 느낌. 줄세우기 담당 직원이 뭐라 뭐라 이야기를 하길래 '미리 대표로 줄서기 없기'를 금지하고 있는 매장인 만큼 제지를 하겠거니 했는데.... 그냥 넘어갔다. 

그런데 거기서 처음 오픈런 줄이 딱 끊길 줄이야. 

왜 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줄에 서 있던 여자가 일행이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했다. 우리는 손님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라나(번역기를 돌려서 알려줌). 이런 젠장. 

다행히 회전은 꽤 빠른 편이어서 약 20분 뒤에 자리가 났다.

아무튼 이렇게 꽉 찬 카운터와 음식 냄새를 맡으면서 20분 대기. 

여러가지 조합이 있는데, 대략 괜찮아 보이는 스테이크+함바그 세트를 주문했다. 

요만한 스테이크 한 덩어리와,

역시 요만한 함바그 한 덩이를 준다. 

그리고 다양한 소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앞에서 직원이 직접 함바그를 동그랗게 빚고,

밥, 국(콩소메 수프), 양배추 샐러드를 준다. 이 세가지는 무한 리필. 

그리고는 철판 위에 이렇게 살짝 레어 상태로 준다. 앞은 구운 마늘편. 

이게 아마 스테이크 100g + 함바그 120g의 2480엔 짜리였던 듯. 

여기에 400엔을 추가하면 밥, 수프, 양배추는 무제한 리필이다. 내 기준으로 딱 기분좋은 점심 사이즈. 

그리고는 자기 앞의 철판에 알아서 더 익혀 먹는 구조. 

레어 상태로 그냥 먹든, 더 익혀 먹든 그건 손님 마음이다. 

각종 소스를 부어 놓는 틀. 

일단 레어로 한점 맛을 본다. 

워낙 마블링 천지의 고기라 역시 더 익히는 게 좋아 보인다. 

치지지직 

아 좋다. 육질도 양념도 A급. 흰 쌀밥과 아주 궁합이 좋다. 

그리고 역시 우유맛이 진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 

줄서기 파동만 없었으면 참 괜찮은 맛집으로 기억에 남았을텐데, 유감이다. 그래도 그냥 가지 않은게 다행이라는 생각. 먹어보길 잘 했군. 그런데 솔직히 줄이 너무 긴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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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서울역과 형제간인 듯한 느낌이 있는 도쿄역. 도쿄역에서 출발해 시모노세키로 가서 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내린 뒤, 부산역엑서 경성역과 평양역, 신의주역을 거쳐 만주 심양 신경 합이빈 흑하까지 달리는 것이 소위 대일본제국의 꿈이었으려나. 오늘날 생각하면 참 물거품같은 꿈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쿄역은 앞쪽은 고색창연한 모습이지만 뒤쪽과 지하로 확장 확장을 거듭해 어마어마한 규모. 1층 한켠에는 거대한 식당가가 있어 주변 빌딩군에서 손님이 쏟아져 들어온다. 

당초의 목적은 여기서 소문난 함바그 맛집 키와니야에서 점심을 먹자는 것이었으나.... 줄이 대략 100미터. 오후 1시쯤 되면 좀 한산할 거라는 안이한 예상을 비웃는 손님의 규모였다. 마음의 준비도 안 되어 있고 기력이 딸려 일단 점심은 다른데서 때우는 걸로.

해서 그 옆집을 들어갔는데(여기도 5~6명 정도 줄을 서 있었다), 

이런 일식 정식과 

이런 닭 전골 주문. 

닭고기와 당근, 호박 등 채소가 같이 들어 있는데 기대했던 맛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비추. 

역시 기다려서라도 먹겠다고 작정한 걸 먹었어야 하는데. 

식후 천천히 긴자로 이동. 그러고보니 대체 긴자를 와본게 얼마만인지. 제대로 긴자 구경을 해본 적이 없네. 

동행인이 볼일이 있다는 긴자 식스로 직행.

그런데 백화점 상공에 떠있는 기이한 형상. 아니 저게 대체 뭐야. 

큰 고양이 작은 고양이 요란하다. 

잘 보면 수백마리 고양이들의 표정이며 포즈가 다 제각각이다. 

고양이 손오공인거냐 

알고 보니 야노베 겐지라는 작가의 설치 미술 작품. 고양이가 이 양반의 주요 테마인 모양이다.

그렇게 저렇게 긴자를 헤매다 저녁을 먹으러 예약해 둔 신바시의 야키토리 전문점으로 향했다. 

신바시의 으리으리한 고층 건물들 사이에 쏙 들어가야 있는 야키토리야 히라노.

아마도 주인 성이 히라노? 평야라는 뜻일텐데 왜 들 야짜만 한자로 쓰여 있는거냐. 

요만한 실내고 4인 정도 들어갈만한 작은 방이 있다. 그래도 예약 시간 정각에 자리가 꽉 찬다. 

그런데 그동안 가본 야키토리야중에 젊은 손님들의 비율이 가장 높았던 것 같다. 

웰컴 드링크를 일본식 납작한 잔에 준다. 깔끔한 니혼슈. 

딱 한잔은 아니 할 수 없는 분위기라 역시 깔끔한 쇼추 하이볼 주문. 녹진한 수프로 시작한다. 

이어 잔 멸치와 닭가슴살을 들깨 드레싱에 무친 전채. 실패 없는 조합. 근데 솜씨가 좋다. 

부지런히 구워 내는 화덕.

세세리(목살)부터 준다. 특이하네.  

그렇지. 야키토리 집이면 다이콩 오로시가 나와야. (왜 나는 일본어는 명사밖에 모르는 것인가)

살짝 기름진데 토마토 맛. 어느 부위인지 까먹었다. 기름기로 보아 허벅지? 등? 

스나기모(모래집). 딴딴하다. 레바(간)도 나왔는데 아 이건 별로. 

꼭꼭 붙은 허벅지살인듯. 

진득한 땅콩소스와 두부, 살짝 생강. 

언어 소통이 잘 안 되니 부위 모형(?)을 앞에 가져다 놓는다. 

대략 읽을 줄만 안다는 걸 눈치챈 듯. 

날개! 

다른 가게에선 츠바사? 하고 물으면 하하하 웃던데 이 집은 심각하게 예스! 하고 대답한다. 

맨가슴살? ㅎㅎ

퍽퍽하지 말라고 유자고쇼를 살짝. 

은행이 나오고, 오 테바사키. 

그러고보니 사진을 몇개 빼먹은 듯도 한데, 아무튼 배가 불러 온다. 

사실 좀 미안한건 이 친구들이 짜놓은 순서가 있을텐데 너무 천천히 주는 바람에 하야이, 하야이 했더니 다른 테이블에 갈 것까지 먼저 막 가져다 주더라. 그래서 순서는 엉망일듯. 

어쨌든 마무리 1번, 미니 오야코동과 

미니 시오라멘 중에서 선택. 

진한 닭 육수의 시오라멘 맛도 그럴듯했다.

녹진한 푸딩, 차, 딸기 반쪽. 계란껍질을 식기로 쓰는건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무튼 이 집 전통인듯. 

어쨌든 꼬치 10개에 등등 해서 인당 9800엔. 이만하면 야키토리 전문점 치고는 가성비가 괜찮다는 생각. 쵸친이나 뭐 등등도 있는데 배가 불러서 굳이 추가 요금을 내고 먹을 이유가 없다 싶었다. 

Yakitori restaurant in Ginza │ YAKITORI HIRANO

 

Yakitori restaurant in Ginza │ YAKITORI HIRANO

For our Customers’ enjoyment of “the taste of birds”, we value the mutual understanding between the griller and the recipient, whereas we try our best to provide our warm hospitality to them. We hope customer could enjoy the stylish fusion of traditi

www.yakitori-hirano.tokyo

이렇게 해서 실질적인 첫날 끝. 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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