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모임에서 AI의 창작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AI가 교장선생님의 졸업식 축사 같은 글을 꽤 잘 쓴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 하지만 재미는 없다. 물론 AI의 능력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80% 정도도 재미있는 글을 써내지 못하면서 AI에게 너무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 비율이 70%인지 80%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사실 '재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 부터가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튼 대부분의 인간들은 AI가 잘 써내는 종류의 글조차도 잘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창의적으로 재미있는 글, 예를 들어 <보건교사 안은영>이나 <나혼자만 레벨업>같은 글을 써 낼 가능성은 인간 쪽에만 있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간 중에는 극소수라도 그런 글을 써낼 가능성을 가진 인간들이 있지만, AI의 경우에는 0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반면 이런 시각도 있을 수 있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웹소설 시장에서는 이미 상당히 분석적으로 독자가 원하는 패턴을 분석한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회에는 두 주인공의 관계가 어느 선까지 나가야 하고, 3회 이내에 키스신이 나와야 하고, 6회에 이내에...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도 유형 분석이 끝나 있다고도 한다. 이런 식의 패턴화가 가능하다면, 그 틀에 맞춰 조금씩 변화를 섞은 작품들을 엄청나게 양산해 내면 그중에는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작품들도 나오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공식에 따라 AI가 그럴싸한 작품을 써낼 수 있다는 주장이 있고, 이미 중국에서는 AI작가들이 양산해낸 작품들이 시장에 등장해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거대한 중국 웹소설 시장에서는 대략 1700만명의 작가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중 100만명 정도는 진짜 인간이 아니라 AI라고 해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써 낼 수 있다는 것'과 '정말 재미있고 기발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중에 히트작이 나온다는 것' 은 제각각 전혀 다른 이야기. 개인적으로 첫번째는 당연히 가능하지만 두번째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 대화를 나누던 친구들 중에는 그것도 시간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는 얘기하지 못했지만,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로알드 달의 단편 <위대한 자동문장 제조기 The Great Automatic Grammatizator>가 떠올랐다.
1953년에 발표된 이 단편은 한 천재가 자동으로 소설을 쓸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면서 시작된다. 이용자가 주제를 선정하고, 각종 요소의 비율(에로틱, 스릴러, 코믹 등등)을 배합하면 타자기와 비슷한 기계가 이미 저장되어 있는 수많은 단어와 문장, 사례를 배합해 30초에 한 페이지씩 글을 써내려간다. ‘문법에 맞는 글을 써내는 기계’라는 뜻인 Grammatizator라는 단어는 실제론 존재하지 않는다.
투자자는 ‘신기하긴 한데 대체 이걸 어디에 써먹느냐’고 묻고, 엔지니어는 ‘이걸로 우리는 이 나라의 문학시장을 차지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몇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엔지니어의 주장은 현실이 된다. 이들은 100여명의 새 작가 이름으로 엄청난 수의 작품을 내놓고, 이들의 물량 공세에 소설을 싣던 온갖 신문이며 잡지들은 모두 이들의 고객이 되어 버린다. 심지어 이들은 기존 작가들에게도 앞으로 작품을 기계에 맡기는 대신 고액의 계약금을 받고 은퇴하라는 제의를 한다. 소수의 정상급 작가를 제외한 많은 작가들이 골치아픈 창작 대신, 작가 이름을 넘겨주고 편히 사는 길을 택한다.
인공지능은 커녕 집채만한 ENIAC, EDVAC 같은 것들이 컴퓨터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시절에 이런 상상을 한 걸 보면 역시 달은 보통 사람이 아닌게 분명하다. 물론 당시 문학 시장에 대한 달의 냉소적인 시선이 담긴 우화에 가깝지만, 실제로 글을 쓸 수 있는 기계가 등장한 21세기에 소설 속 대화와 비슷한 이야기가 오가는 건 참으로 놀랍다.
개인적으로 소위 인공지능의 본질은 응용통계, 즉 문장을 생성해 가면서 이미 나온 수많은 문장들 가운데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즉 다수결에 의해 가장 틀릴 가능성이 적은) 단어를 배치하는 것이므로 이 방법을 통해 소위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올 가능성은 0이라는 생각 – 테드 창을 비롯해 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이런 의견을 냈다 – 에 동의하는 편이다.
물론 콘텐트 소비자들이 항상 참신하고 독특한 것을 선택한다는 법은 없고, 때로 너무나도 진부하고 뻔한 것의 손을 들어 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AI가 대중의 사랑을 받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말라는 법도 없다고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말 좋은 작품을 써낼 수 있다'와 '히트하는 작품을 써낼 수 있다'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햇동안 본 영화들 중 좋았던 영화를 꼭 10편만 추리기 어려웠던 해가 더 많았습니다. 한국영화 10편과 해외영화 10편을 따로 꼽아야 하나 생각해 본 적도 있을 정도로. 그런 만큼, 올해같은 해는 정말 없었습니다. 10편을 채우기가 너무 힘든 해가 올 줄은.
물론 영화제들은 여전히 좋은 작품들에게 상을 안겼고 평론가들은 역시 걸작들을 꼽았지만 늙고 낡은 탓인지 이제 더 이상 공감할 수가 없더군요. 온갖 영화제들이 앞다퉈 '의미있는' 작품들에게 '의미있는' 시상을 하려 애썼지만, 재미는 없고 의미만 있는 영화가 상을 받은 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치적 공정성/젠더/소수인종/소외자 이야기는 이제 그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내면 탐구도 이제 그만. 멀티버스/슈퍼히어로도 이제 그만. 의미 의미 의미 지겨워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 주세요. 재미만 있으면 관객들은 다시 극장을 찾을 여지가 충분합니다.
퍼스트 슬램덩크
굳이 줄거리를 설명해야 할까.... 백호의 빠른 성장으로 전국 대회 진출에 성공한 북산고. 1라운드를 신나게 통과하지만 역대 최강 산왕공고가 그 앞을 가로막는다. 1년 전 우승 멤버가 셋이나 주전으로 남아 있는 산왕. 아무도 산왕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겁없는 북산 5인조는 '우리가 악역이 되자'며 달려든다.
만화 <슬램덩크>의 가장 극적인 순간(이라기엔 두권 분량)인 산왕전을 한편의 영화로 만들었다. 대하 드라마의 허리를 뚝 잘라냈으니 그 앞의 서사나 각 인물의 캐릭터를 모르는 관객들에겐 다소 뜨악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잘 만들어진 이 영화 덕분에 오히려 슬램덩크를 몰랐던 세대가 만화 독자로 다시 유입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바람이 있다면.... 세컨드와 서드도 만들어 줬으면 하는 것.
화이트 타이거 (넷플릭스)
21세기에도 여전한 인도의 계급 사회. 최하 계층의 남자들은 그나마 좋은 직업인 '부잣집 운전기사'가 되는 것이 꿈이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부잣집 도련님은 "신분 같은 거 따지지 말고 친구처럼 대해 달라"고 하지만, 과연 그게 진심일지. 결국 사고가 터지고, 모든 사람들의 본색이 드러난다.
라민 바르하니라는 감독의 이름은 영화를 다 보고 알았다. 인도 감독인가 했더니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란계 감독. 이 영화 이후에 찾아 본 <라스트 홈 (99 Homes)>도 만족스러웠다. 이것이 아라비안 나이트 때부터 다져진 페르시아의 스토리텔링 실력인가. 문득 아스가르 파르하디가 떠올랐다.
스즈메의 문단속
신카이 마코토의 속칭 '재난 3부작' 중 세번째. 큐슈 작은 도시에 사는 여고생 스즈메가 어느날 다른 차원을 여는 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일본을 보호하는 다이진이 사라지면서 그를 회복하기 위한 모험이 시작된다. 서쪽 끝에서 거의 동쪽 끝까지 일본을 종단하며.
<너의 이름은>보다 <날씨의 아이>에서 놀라운 성취를 느꼈기 때문에 <스즈메의 문단속>에서는 더 한층 발전을 기대했지만 그보다는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보여 살짝 실망. 하지만 그 자체로도 좋았다. 그들만의 스토리를 현대적인 이야기로 바꿔 놓는 일본의 기법은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 있다. 그런데 주인공들보다 다이진에게 더 공감하게 되는 건 왜일까.
2차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순간.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들은 핵분열을 통한 가공할 에너지 분출을 무기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전쟁을 끝내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 나아가 지구상에서 전쟁을 없앨 수 있는 무기라는 명분으로 많은 사람들이 개발에 몰두한다. 그러나 이 개발 작업의 총 지휘자인 천재 오펜하이머는 그 폭탄이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데 쓰이는 것을 보고 난 뒤...
그의 자서전 제목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너무나 적절한 명명이라는 생각. 그러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니 크리스토퍼 놀란의 관심은 핵무기의 역사적 의미가 아니라 오펜하이머라는 독특한 인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관점에서 본 <오펜하이머>는 '어느 순진한 관종의 몰락기'.
의외로 별로라는 평이 너무 많아 놀란 영화. '이순신이 왜 끝까지 전쟁에 집착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이순신을 전쟁광처럼 그렸다' '이순신이 박정희냐("...난...괜찮다..." 때문인 듯)' 등등의 평. 당시 이순신의 입장이라면 이게 과연 전쟁의 진짜 끝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는 점이 관객에게 제대로 어필되지 못한 것 같다. 그것만 이해해도 이런 몰이해는 없었을 것 같은데. 더 친절했어야 하는 것인가.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이젠 그도 '내가 어쩌다 영화를 직업으로 택하게 되었냐 하면'이라는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을 것이다. '수퍼8'이 그의 유년기 이야기라면 이건 청소년기 이후의 성장기인 셈. 이제 노장이 된 스필버그도 '엄마 이야기'를 할 때면 조금 자신에게 너그러워 질 필요도 있었을 것 같다. 아무튼 스필버그가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잘 들었고, 자신의 영웅을 되살려낸 마무리도 아름다웠다.
약간의 느슨함이 느껴지지만, 이 또한 추억의 이름으로 충분히 이겨낼 만 했다. 물론 평년의 기준으로 이 영화가 정말 한 해를 대표하는 영화에 들만 하냐고 따지지 말았으면 좋겠다. 평생의 즐거움에 대한 예우로라도.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우리 시대 최고의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그의 작품을 보러 가며 문득 구로자와 아키라의 <꿈>이 생각났다. 80대에 접어든 노장의 신작을 볼 수 있는 기회(당시만 해도 일본 영화의 극장 정식 개봉은 허락되지 않았다)라는 말에 꽤 먼 어느 대학 교정까지 찾아갔더랬다. 그러나 보고 난 소감은... '세계 영화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거장의 은퇴작이 고작 이런 것이라야 한단 말인가'라는 비참함.
구로자와가 유작을 예감하고 만든(물론 그 뒤에도 몇편 더 만들었다) 작품인 <꿈>에서 유년기의 꿈으로 퇴행하듯, 미야자키 역시 은퇴를 공언했던 <그대들...>에서 유년기의 꿈 속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다행히 그 꿈은 솔직했고, 어지럽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전의 작품들과 같은 흐름이라 좋았다. 각각의 장면들이 무슨 의미를 띠고 있고, 그 전의 어떤 작품들과 어떻게 이어진다는 어지러운 주석들도 필요 없어 보인다.
어쩌면 '나를 따라하는 자는 죽는다', 이 말 한마디가 하고 싶었는지도.
그리고 제작 연도 때문에 조금 애매해서 따로 언급하는 영화.
울프 콜 (The Wolf's Call, French: Le Chant du loup, 2019)
사실 2023년에 본 영화중 당당히 베스트에 올릴 만한 작품이었지만 2023년에 2019년작을 꼽는 것은 좀 심하다 싶어 번외로 뺀다. 냉전시대의 유물이자 가장 확실한 핵 전쟁 억지력, 즉 '최후의 보복'인 SLBM 장착 핵 잠수함의 이야기인데 길게 설명하는 것 보다 안토닌 보드리 감독의 프랑스 판 <크림슨 타이드>라고 요약하는게 이해가 빠를 것 같다.
물론 <크림슨 타이드>가 수작이었던 만큼, 비슷한 소재를 다룬 <울프 콜>이 긴장감 면에서 그보다 못했다면 아예 개봉과 함께 묻혀 버렸을 것이 당연한 상황. 하지만 반대로 <울프 콜>을 본 사람이라면 이제 더 이상 <크림슨 타이드>를 이야기하지 않을 정도의 작품이라고 감히 평가한다. 오마 샤이, 마티유 카소비츠 등의 얼굴도 반갑다.
나는 부정한다(Denial, 2017)
이런 영화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넷플릭스를 통해 본 영화. 과연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은 실재했던 사건인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도 상식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음모설을 뿌리며 먹고 사는 기생충들이 존재한다. 한 음모론자가 홀로코스트를 가르치는 여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고, 영국 법에 따라 여교수는 홀로코스트가 실재했던 사건임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음모설, 가짜 뉴스, 가짜 역사...에 진짜 지식인들이 맞서 싸우는 방법을 보여주는 실무 교과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영화. 다혈질 여교수 역의 레이첼 와이즈보다 그 주위를 둘러싼 냉정한 변호사 군단의 연기와 역시 담담하기 짝이 없는 믹 잭슨의 연출이 돋보인다.
기타:
신작들에 실망하고 옛날 영화들을 하나 하나 찾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그냥 봐 줄 수 없는 영화들도 많았지만 아나톨 리트박 감독의 <바르샤바의 밤(a.k.a 장군들의 밤, The night of the Generals, 1966)>과 조셉 L 멘키위츠의 <맨발의 백작부인(The Barefoot Countess, 1956)>이 대단한 작품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개인적으로 멘키위츠는 <지난 여름 갑자기>만으로도 최고의 감독이었지만, 이 작품 역시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 왕년의 일본 액션 스타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나카노 스파이 학교(陸軍中野學校, 1966)>도 대단히 매력적인 영화였다(이 영화를 베낀 몇편의 한-일 영화들이 떠올랐다). 속편들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오시마 나기사의 <청춘 잔혹 이야기(靑春殘酷物語, 1960)>도 좋았지만 내게는 스가와 에이조 감독의 <야수는 죽어야 한다(野獣死すべし, 1959)>가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역시 내게 이 시절 최고의 배우는 나카다이 타츠야다.
제가 스콧 갤로웨이 Scott Galloway 라는 미국의 저명한 미래학자이자 뉴욕대 교수의 블로그를 가끔 보는데, 연초라 이 분이 한 2024년 예측이 마침 나와 있었습니다. 읽어 보다가 아예 번역기의 도움으로 번역을 했는데, 시사점이 꽤 있는 것 같아서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씩 훑어보시길 권합니다. 미국 경제, 특히 메타, 알파벳, 틱톡 등 IT 부문의 향방, 국제 질서, 미국 대선 결과 예측까지 다양합니다.
물론 갤로웨이 본인의 예측이며, 학계의 주류 의견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금년 연말에 몇개나 적중할지 보는 재미도 있을듯.
워낙에 농담처럼 은유적인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이해를 위해 제가 각주를 여러 개 붙였습니다. (앞에 주: 라고 표시된 것이 제가 단 각주입니다.)
1년 전, 블룸버그의 경제 모델은 경기 침체 확률을 100%로 계산했습니다만나는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된 만큼 빠르게 하락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우리의 논지는 간단했습니다: 전 세계가 재앙을 예측해도 우리가 재앙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재앙은 현실화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Y2K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주: 1999년 12월31일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순간 거의 모든 컴퓨터에 이상이 발생한다는, Y2K때 그랬던 것처럼,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생각했던 불상사는 모두들 정신을 바짝 차리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주장)
저는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트머스 대학의 경제학자 대니 블랜치플라워는 정상적인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플레이션은 스스로 치유되기 때문에, 잘 운영되는 현대 경제는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높은 물가는 수요를 억제하여 물가를 낮춥니다). 또한 공급망에 문제가 생기고 있고, 워런 상원의원 등 다른 사람들의 금리 인하 압력을 무시하는 것을 즐기는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위원회 의장이 있습니다.
(주: 엘리자베스 워런은 지난해 내내 “연준이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금리 인상을 멈추지 않으면 우리 모두 파멸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으나 파월 의장은 2023년 내내 그 주장을 무시했고, 2024년 새해가 밝은 뒤에야 금리 인하 가능성을 시사. 그러나 현재 실제 금리 인하를 발표할 전망은 여전히 보이지 않음.)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기술과 마찬가지로 AI는 기업이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디플레이션을 유발한다고 생각합니다.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인플레이션은 9%에서 3%로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하락 모멘텀이 계속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타임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은 테일러 스위프트였지만,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파월 의장이었습니다.
2.주택 판매 활성화
지각판(tectonic plates)이 이동해 지진이 나면 중심부 충격에 이어 외곽 지역에서 여진이 발생합니다. 지난 2년간의 지각변동은 미국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상승한 금리였습니다. 이제 싸움이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판은 다시 조정되고 있습니다: 연준은 2024년에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일련의 여진에 직면해 있으며, 가장 심각한 여진은 주택에서 발생할 것입니다. 지난 40년 동안 주택 가격은 두 배로 올랐지만 가계 소득은 20% 증가에 그쳤습니다. 2024년에는 주택 판매량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주택 가격의 급등은 거래량을 압살해버리는 완벽한 폭풍이었습니다: 기존 주택담보대출의 저금리로 인해 사람들이 주택을 구입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지고, 님비현상으로 인해 신규 건설이 제한되고, 가계 소득이 주택 가격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주택 소유는 점점 더 노년층에게만 국한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미국의 주택은 젊은 층에서 노년층으로 부의 이전을 촉진하는 경제 정책의 대리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금리 인하와 그동안 강제로 억눌려 있었던(pent-up) 수요(새로운 일자리, 자녀, 인생 이벤트)가 결합되어 2024년에는 막혀 있던 주택 거래가 훅 뚫릴 것입니다.
(주: 미국도 코로나 시대를 겪으며 집값이 급격히 오르며 이미 집을 갖고 있는 노년층이 청년층에 비해 가처분소득이 커지는 상황을 겪었지만, 2024년 금리 인하 예고와 함께 경기 활성화로 그동안 주택 보유에 소극적이었던 젊은 층이 집을 사기 위해 나설 것이라는 예측.)
각 주 의회와 지역구 위원회는 더 많은 주택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실업률은 낮고, 젊은 근로자들은 역사적으로 강력한 희망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좋은 소식(sweetener)은? 부동산 중개인 카르텔이 마침내 깨져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 발생하는 중개 수수료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3. 워너-파라마운트 통합, 그 다음은 디즈니?
지난 12월 12일에 예측 라이브 스트림에서 이 소식을 전했는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이미 현실이 되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에 워너 브라더스-디스커버리 CEO 데이비드 자슬라브가 파라마운트 CEO 밥 베이키쉬를 만나 합병에 대해 논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러한 추세는 계속될 것입니다. 내년에 WBD(주: 워너 브라더스와 디스커버리의 합병 법인), 넷플릭스, 디즈니가 그들 소유가 아닌 스트리밍 서비스들을 잇달아 인수하는 것을 지켜보세요.
(주: 통상 디즈니, 워너 브라더스, 파라마운트, 콜럼비아, 유니버설, 폭스를 미국 혹은 세계 6대 메이저 영화/드라마 콘텐트 제작사 혹은 그냥 '메이저 스튜디오' 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지금 서로 통합하겠다는 움직임이 나온 것이죠. 갤러웨이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24-25 사이에 더 큰 통합 노력이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지속적인 생존 가능성은 규모의 함수가 될 것입니다: 작가 파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넷플릭스는 가격을 인상했습니다. 이 파업은 기존 스튜디오에서 NFLX(주: 넷플릭스의 상장 법인명)로 부의 이전을 의미하며, 플레이어 수와 지출에 있어 각각 통합과 합리화라는 시장 역학 관계를 촉진했습니다.
(주: 2023년 미국의 방송작가들이 영상제작사들을 상대로 OTT들의 재방송료, AI 사용 등에 대해 항의하며 파업을 일으켰고 결국 타결. 그러나 그 와중에도 넷플릭스는 구독료를 인상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콘텐트 제작의 패권이 넷플릭스로 넘어가 있는 상태였기 때문. 즉 이미 넷플릭스는 다른 OTT들이나 기존 방송사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강력한 포지션에 올라 있다는 뜻.)
4.두 가지 주식 추천: 스트리밍 후발주자
저는 매년 주식 추천을 합니다. 작년에 저는 각각 60%, 180%, -15% 상승한 Airbnb, Meta, 중국 인터넷 주식을 선택했습니다. 이 회사들이 특별한 일을 할 것이라는 예상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시장이 (이들 회사들이 이미 하고 있는)기존 비즈니스가 현금이 쌓이는 비즈니스라는 사실을 잊고, 이들 기업(특히 메타)의 주가를 깎아내렸다는 것이죠.
(주: 그래서 2023년 시장의 오판으로 가격이 떨어진 메타, 에어비앤비 등을 사들여 고수익을 냈다는 이야기)
올해 제가 추천하는 주식은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와 디즈니인데, 제가 보기에 기술 섹터는 충분히 고평가(라틴어로 과대평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주의 주가수익비율 배수는 1999년과 2007년과 무섭게 비슷해 보입니다. 올해 저는 부실 자산을 좋아하는데, DIS와 WBD는 10년래 최저가에 거래되고 있기 때문에 합리적으로 투자할 수 있습니다.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이며, 상대 후보는 분노와 관심을 유도하여 TV 광고를 판매할 수 있도록 실험실에서 설계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 트럼프만큼 다양한 뉴스를 생산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트럼프가 유세에 나서면 기존 TV의 시청량이 늘어나고, 그만치 기존 네트워크 방송사의 수지가 좋아질 것이라는 예상.)
또한 WBD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부채를 갚아나가고 있습니다. 재무제표가 깨끗해지면 거리는 돌아설 것이고, 넷플릭스는 가격 인상을 위한 구름막을 제공했습니다. 디즈니는 공원 사업과 가족 친화적인 성향, 고유한 IP로 차별화되는 스트리밍 네트워크라는 특징을 통해 NFLX 및 WBD와 경쟁할 수 있는 이점을 누리고 있습니다.
5.넷플릭스와 스포티파이에 대항하는 틱톡시대의 도래
한쪽 문을 막으면 다른 쪽 문에 늑대가 나타납니다. 우리는 넷플릭스 대 디즈니, 스포티파이 대 애플 뮤직과 같은 유사한 제품끼리의 경쟁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엔터테인먼트는 하나의 시장, 즉 관심의 시장이며, 한 플랫폼이 다른 모든 플랫폼보다 앞서서 이 상품을 수확하고 있습니다: 바로 틱톡입니다.
이 중국 회사는 OpenAI가 등장하기 전까지 역사상 가장 높은 상승세를 보인 플랫폼이었으며, 여전히 서구 젊은이들이 세상을 인식하는 프레임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의 본능을 믿으세요. 2024년은 틱톡이 스트리밍 서비스의 점유율을 갉아먹는 해가 될 것입니다.
6.정점에 오른 AI (과잉투자 단계)
작년에는 AI가 올해의 기술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올해는 AI 거품이 터지지는 않겠지만 수축할 것입니다. 이는 과잉 투자로 인해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작년에 미국 벤처 자금의 4분의 1 이상이 AI 스타트업에 투자되었고, 현재 미국 유니콘 기업 5개 중 4개가 AI 관련 기업입니다. 가장 큰 AI 스타트업인 OpenAI와 Anthropic의 기업 가치는 각각 매출의 180배와 200배에 달합니다. 예를 들어 Uber의 3배와 비교해 보세요.
AI가 2024년에 막대한 가치를 창출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가치는 이미 2023년 주식 상승의 대부분을 주도한 7개 기업(Microsoft, Alphabet, Apple, Tesla, Amazon, Meta, 그리고 새로 합류한 Nvidia)의 주식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시장은 영감을 얻기 위해 다른 곳에서 눈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미 S&P 500 기업 실적 발표에서 AI가 언급되는 비율이 35%에서 29%로 감소하는 등 기업 PR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수치는 더 낮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7.빅테크 주식 추천: 알파벳
작년에는 메타가 다른 빅테크 주식 중 가장 좋은 성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했지만, 올해는 알파벳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이 경우 대규모 언어 모델은 정유 공장에 해당하고 독점 콘텐츠는 화석 연료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Google 검색, Gmail, YouTube는 오리노코 강 유역에 해당합니다. 알파벳은 이메일, 검색 습관, 유튜브 시청 위에 두꺼운 AI 레이어를 구축하여 삶을 더 효율적이고 즐겁게 만들 것입니다. OpenAI는 <스타워즈>, 알파벳은 <제국의 역습>입니다.
(주: <스타워즈>는 시리즈 첫 작품인 스타워즈4를 가리키며, <제국의 역습>은 두번째 작품인 스타워즈5의 부제. <제국의 역습>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전편을 능가하는 속편’이라는 호평과 함께 스타워즈 시리즈의 앞날을 밝게 점치게 한 작품.)
8.올해의 기술: GLP-1
2023년이 GPT-4의 해였다면 2024년은 GLP-1의 해가 될 것입니다. 즉, 오젬픽, 모운자로, 그리고 모든 GLP-1 관련 체중 감량 기술입니다. 이 시장은 거대하고 혁신이 무르익었습니다. 미국 국민의 70% 이상이 비만 또는 과체중입니다. 지난 50년 동안 비만 유병률은 3배로 증가했으며, 간접 비용과 생산성 손실을 포함한 미국의 비만 비용은 1조 7,0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에 관해서는 이전에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미국은 자유의 땅이자 플러스 사이즈의 본고장입니다. 우리 경제의 거대한 부분이 ‘비만이야말로 당신의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거짓말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산업 식품 단지가 여러분을 똥 같은 건강에 해로운 음식에 중독시키고 당뇨병 산업 단지로 넘겨줄 수 있게 해줍니다. 빌 마허는 GLP가 AI보다 실물 경제에 더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제게 농담을 던졌습니다. 저는 그 말을 지지합니다.
(주: 살찐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외모지상주의를 배격하고, 뚱뚱한 사람에 대한 비난이 사회적 차별이라고 주장하는 운동이야말로 당분 섭취와 운동부족을 합리화하는 거짓말이라고 비웃고 있음.)
현재 뉴욕시에서 GLP-1 처방이 가장 많이 이뤄지는 지역이 가장 날씬한 지역(어퍼 이스트 사이드)인데, 이는 이 약이 주로 마지막 남은 15파운드를 감량하기 위해 점심을 먹는 부유한 여성들에게 처방되기 때문입니다. GLP-1에 대한 투자가 증가함에 따라 비용은 낮아지고 접근성은 확대될 것입니다. 이는 제약업계를 넘어 맥도날드, 펩시 등 패스트푸드 업체에도 파급 효과를 가져올 것이며, 소비자들이 소비를 줄임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될 것입니다.
소비자 경제에 대한 가장 큰 질문입니다: 미국이 더 날씬하고 당뇨병 환자가 적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9.인도가 새로운 중국
2023년에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국가가 되었습니다. 2024년에는 이러한 인구 증가가 경제적 측면에서 기록될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양면성을 띠고 있습니다: 인도는 인프라에 투자하고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반면, 중국은 항공모함에 투자하고 청년 실업과 산업 붕괴에 대처하기 위해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습니다. 바통이 넘어갔다는 증거: 애플은 아이폰 생산을 히말라야 반대편으로 공격적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10.지정학: 미중 관계의 해빙기
중국이 외국 자본의 유출을 막기 위해 벼랑 끝 전술에서 벗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국 경제는 여러 세대에 걸쳐 가장 아픈 상태이며, 효과가 입증된 유일한 치료법은 현지 제조업을 통해 유입되는 외국인 투자뿐입니다. 결국 중국은 막대한 빚을 지지 않고도 자국 시장을 위한 주택과 고급 자동차를 건설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서방은 인플레이션 문제가 있고 중국은 성장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가장 큰 경제 대국이 화해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럴 것입니다.
11.지정학: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
10월 7일 이전까지만 해도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가 예상되었지만, 하마스의 공격과 이스라엘의 대응이 정상화를 방해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더 광범위한 지역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협력의 논리는 여전히 피할 수 없습니다. 석유 의존도가 낮은 세계에서 사우디의 전략은 스윙보트, 즉 모든 국가와 잘 지내면서 모든 테이블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과반수 의석을 차지해 막강한 힘을 얻는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저의 직감은 지난 여름 미코노스 섬을 여행하는 동안 관찰한 바에 근거합니다. 요컨대, 나이트클럽의 거의 모든 테이블은 걸프 지역에서 온 젊은이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사우디는 이슬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하고 있습니다.사우디는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으며 이스라엘-가자 전쟁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12.머스크, 트위터 통제권 상실(또는 매각)
머스크가 가출 청소년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그만둬야 합니다(주: 이미 일론 머스크도 젊지 않습니다). 2년 후면 그는 대부분의 노인 커뮤니티에서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것이고, 사람들은 거의 노인이 된 그의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지쳐 있습니다. 머스크의 재산은 대부분 테슬라와 스페이스X에 묶여 있으며, 그는 팔고 싶지 않은 주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 회사 모두에 대해 많은 돈을 빌렸으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라도 현금 흐름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엘론이 트위터의 80%를 해고한 후에도 트위터는 여전히 값비싼 취미이며, 그는 협박하는 사람들(즉, 광고주)을 계속 쫓아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회사, 더 나아가 엘론은 트위터 인수 자금 조달에 사용된 부채를 수년간 갚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엘론은 소셜 미디어보다 더 큰 야망을 품고 있으며, 2024년에는 테슬라와 스페이스X를 우선시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스포일러 주의: 이 모든 것은 언론의 자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13.메타의 2024년 성장 동력: WhatsApp
Facebook과 Instagram은 여전히 거대하고 수익성이 높은 비즈니스이지만, 빅테크 기업 가치를 좌우하는 것은 성장성이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하지 않습니다. Meta는 수년 동안 외양간에서 세 번째 말을 키우고 있지만, 30억 명의 사용자를 보유한 플랫폼에 잠자고 있던 잠재력이 곧 꿈틀거릴 것입니다. 저커버그는 수년 동안 수익화 전략을 암시하며 WhatsApp과 관련된 서비스를 야금야금 흘리고 있습니다. 2024년은 제노모프 인터네시부스 랩터스가 메타의 뱃속에서 터져 나오는 해입니다.
(주: 제노모프 인터네시부스 랩터스는 영화 <에일리언>에 나오는 무적의 외계 괴물. 이 괴물은 인간의 뱃속에 기생충처럼 잠복하고 있다가 다 자라면 배를 가르고 튀어나온다.)
14.정치 예측: 바이든은 재선, 트럼프는 유죄 판결을 받다
대선 정치의 진실은 스윙보터, 무소속 등 실제로 선거를 결정하는 유권자들은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스윙보터인 이유는 3년 반 동안 밀폐된 반향실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투표장으로 향할 때는 ‘낮은 인플레이션, 높은 고용률, 탄탄한 경제, 미군이 개입하지 않은 세계 곳곳의 분쟁, 미국에 대한 범죄로 동료 배심원단으로부터 유죄 판결을 받은 공화당 후보’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지막 예측에 대한 증거는 (트럼프가 피고로 출석해야 하는) 세 번의 개별 재판에서 제출되며, 세 번의 재판을 모두 이길 확률은 끔찍합니다: 연방 중범죄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이 단 한 번의 재판에서 징역형을 피할 확률은 30%에 불과하며, 세 번의 재판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을 확률은 2.7%(30% * 30% * 30%)에 불과합니다. 2024년에 우리는 노인을 등치려는 범죄자가 등장하는 리얼리티 쇼와 대통령에 당선될 때까지 법정 소송을 지연시켜 자신을 사면하는 것이 플레이어의 임무인 게임 쇼 사이를 채널 서핑하며 시청하게 될 것입니다. 맙소사, 우리 지금 정말 엿같아요.
(주: 전통적으로 민주장 지지자인 갤로웨이는 ‘그래도 미국 국민들이 트럼프보다는 바이든을 선택할 것’이라고 판단. 현재까지 바이든 정부의 경제 정책은 큰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지만 선거 전까지 인플레이션이 잡히고 실업률이 떨어지는 동시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실제 미군 병력이 파병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 스윙 보터 – 선거때마다 그때 그때 좋아 보이는 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 – 로 하여금 바이든을 다시 선택하게 할 것이라는 희망적 관측.
반면 트럼프는 현재 대선 결과 불복, 기밀 유출, 성추문 등 3차례의 재판을 받아야 하며, 대통령 출마 또한 세 번의 재판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 그 자신을 사면하는 것 뿐이라는 점을 꼬집고 있음.)
<옐로우스톤>. 케빈 코스트너가 주연한 파라마운트 드라마. 현재 미국에선 시즌5가 방송중이다. (계속해서 테일러 셰리단의 작품을 보고 있음) 배경은 '현재'.
코스트너는 미국 몬태나주에서 ‘로드아일랜드주만한 크기의 목장’을 소유하고 있는 지역 토호 존 더튼 역. 더튼과 충실한 2인자인 장남 리, 변호사인 차남 제이미, 반항적인 카우보이인 막내 케이시,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천재 딸 베스의 4남매가 변해 가는 주변 환경 속에서 ‘트래디셔널 아메리칸 웨이 오브 라이프’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서 다루는 전통적인 미국인의 가치를 가장 간단히 요약하면 ‘내 집과 내 가족은 내가 내 힘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인 것 같다. ‘정의’의 기준은 ‘네가 넘어오면 결과는 네 책임이다’고, 좀 더 나아가 ‘자기 방어’의 기준은 ‘나와 내 가족을 위협하는 요소는 무엇이든 제거해도 된다’가 된다.
이 ‘무엇’ 안에는 해충과 방울뱀, 인간이 모두 동등하게 포함된다. 존 웨인 영화 속 세계가 21세기에도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자못 충격적이다.
보다 보면 그렇겠구나 싶기도 하다. 몬태나 주와 한국의 인구 10만명당 경찰력을 비교해 보면 각각 201명대 250명,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몬태나 주엔 남한 4배 정도의 넓이에 100만명 정도가 살고 있다. 경찰 한 명이 약 115제곱킬로미터를 커버해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기면 경찰에 신고...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니 <옐로우스톤>에선 ‘시체 버리는 장소’가 자주 등장한다. 한 인물이 “왜 늘 시체는 여기다 버리느냐”고 질문하는데, 대답이 이렇다. “여기서 사방 100마일 내에는 인가도, 경찰도, 보안관도 없기 때문이지.”
케빈 코스트너는 말보로 광고에 나오는 듯한 19세기적 카우보이 보스였다가, 적들을 거리낌없이 제거하고 증거를 인멸하는 냉혹한 범죄단체 수장이었다가, 결국은 전통적인 미국의 개척정신을 수호하는 신념의 화신으로 미화된다. 총 몇방 맞은 정도로 의사 신세를 지는 것은 수치고(정말 존 웨인을 보는 것 같다), 그의 적들조차도 결국은 그를 존경하게 된다(물론 대부분 그 전에 시체가 되어 황무지에 버려진다). 한국의 꼰대 아저씨들 따위는 그 앞에 가면 순진한 유치원생처럼 보일 듯한 느낌이다.
이런 가치관에 동의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고, 미국의 단면을 본다고 생각하면 매우 흥미로운 드라마다. ‘아무리 악인이지만 내가 인간의 목숨을 이렇게 빼앗아도 되는가’ 따위의 고민은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에 고구마가 없다. 진행도 빨라서 정신을 차려보면 5시즌 순삭.
물론 보고 있으면 버본이 마시고 싶어진다는 부작용도 있다. 티빙에 시즌5까지 있음.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서서히 테일러 셰리던 월드에 젖어들고, 다른 작품들까지 모두 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2023년 상반기에는 재미있게 몰두해서 본 드라마가 많았던 반면, 하반기에는 재미있을 뻔 하다가 만 드라마들이 많았던 듯 합니다. 굳이 외면한 작품으로는 병자호란-소현세자로 이어지는 시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연인>을 처음부터 안 본 정도?
아무튼 나중에 생각해 보면 2023년은 개인적으로 '테일러 셰리던의 해'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그냥 개인적으로 '미드계의 박봉성'이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이 양반 정말 대단합니다. 2023년 현재 <옐로우스톤> 시즌 6, <라이오니스> 시즌2, <메이요 오브 킹스타운> 시즌3, <1923> 시즌2, <털사킹> 시즌2를 동시에 자신의 크레딧으로(작가/제작) 진행하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아무리 밑에 유능한 작가들이 많고, 대본 공장을 심하게 돌려도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대부분 다 재미있고 성공하고 있다는...)
세계를 호령하는 한국 드라마 중에는 역시 상반기의 <글로리>와 <카지노>가 워낙 강렬한 탓인지 그 뒤로 <소년시대>가 오기 전까지 그닥 인상적인 작품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반짝이는 워터멜론> 정도...?
옐로우스톤, 1863, 1923
테일러 셰리단 월드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아마도 2023년의 가장 결정적인 선택이었던 듯. 미국 몬태나 주를 무대로 '그 자체가 서부 개척사'라 할 수 있는 더튼 가문의 150년을 한꺼번에 훑어보는 이 장대한 사가에 한번 발을 들여 놓은 뒤로 도저히 뺄 수가 없었다. <옐로우스톤>은 현재 몬태나의 실세인 대 목장주 존 더튼의 삶, <1863>은 처음 더튼 가문이 어떻게 서쪽으로 역마차를 끌고 이동해 몬태나까지 오게 되었는지(사실 오레건으로 가다가 중간에 멈춘), 그리고 해리슨 포드가 주연인 <1923>은 자동차가 말을 밀어내는 시대에 미국 서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
저런 스틸컷을 보면 이 드라마가 <초원의 집> 같은 미국의 전원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착각할 수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인구밀도가 희박한 몬태나 주는 19세기 후반과 큰 차이 없는 야망과 살육의 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하드보일드 대하 드라마. 본편이라고 할 수 있는 <옐로우스톤>의 다섯 시즌, 그리고 그 조상들의 이야기인 <1863>과 <1923> 을 보고 있으면 어쩌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고 또 되려고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진정한 미국. [티빙]
테일러 셰리단 월드는 몬태나에서 끝나지 않는다. 잘 나가던 뉴욕의 마피아 중간 보스에서 하루 아침에 오클라호마주 털사를 나와바리(?)로 받은 실베스터 스탤론. 30년의 옥살이 끝에 지성과 펀치를 겸비하게 된(노인 우습게 보는 동네 깡패들을 한방에 제압하고 돌아서서 검찰 여수사관에게 치근댈 때에는 세네카를 인용할 수 있는 남자!) 스탤론의 인생 2모작 이야기인 셈인데, 일단 보시면 빠져나오기 어려울 듯. [티빙]
라이오니스
셰리던은 <옐로우 스톤> 시리즈와 <털사 킹> 외에도 <메이요 오브 킹스타운>과 <라이오니스>를 동시에 만들어내는 신통력을 과시하고 있다. 그중 더 재미있었던 쪽은 <라이오니스>. 근육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미 특수부대 장르에 여자들이 주도하고 여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새로운 유닛(실제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에 대한 이야기다. <메이요 오브 킹스타운>은 시즌2로 가며 엿가락 신공이 작용하고 있는 듯 해서 애정이 식었지만 이 쪽도 팬이 많다는 정도는 언급해도 좋을 듯. (이상 테일러 셰리단 시리즈는 미국에서는 파라마운트, 한국에서는 웨이브였는데 최근 한국 서비스 OTT가 티빙으로 바뀐 듯.)
조이 살다나, 니콜 키드먼의 조합이 생각보다 좋다. [티빙]
아무튼 여기까지가 테일러 셰리던 시리즈.
글로리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지만 그래도 2023년의 드라마로 과연 이 작품을 빼놓고 뭘 얘기할 수 있을지. 오히려 <글로리>의 임팩트가 너무 컸던 탓에 2023년을 빛낸 다른 한국 드라마들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여러 학폭 사태로 인해 하늘이 도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무적의 송혜교 외에도 주변의 악역 하나 하나, 그 악당들의 주변 인물 하나 하나까지 모두 살려낸 대본은 실로 '드라마의 신'이 실존한다는 것을 느끼게 했다. [넷플릭스]
소년시대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이성한 감독의 2009년작 영화 <바람>. 그리고 충청도를 무대로 했던 영화 <불타는 청춘>이나 뭔가 촌스러운 큐슈 기지촌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담았던 이상일 감독의 <69>는 아마도 반면 교사 역할을 했을 듯. 어떤 면에서는 일본 만화 <엔젤전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소년시대>제작진의 위대함은 이미 존재했던 이 많은 작품들을 보고 본인들이 아쉬웠던 점을 후련하게 털어낸 뒤 완벽에 가까운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점. 대본, 연출, 그리고 이 드라마에 출연하기 위해 데뷔한 듯한 수많은 젊은 배우들. 그리고 그 중에서도 2022년에 박은빈이 있었다면 2023년에는 임시완이 있었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열연. 물론 그래도 개인적으로는 이상진이 연기한 호석이가 가장 사랑스러웠다. [쿠팡]
디플로맷
프로페셔널 외교관 부부. 의뭉스러운 대통령의 의지로 영국 전문가인 남편이 아닌 아내가 주영 미국 대사가 된다. 같은 뿌리를 갖고 있고 항상 같은 편이지만 그래도 뭔가 긴장이 흐르는('영국 총리는 미국 대통령의 애완견이냐'는 시각은 항상 존재한다 - 물론 이런 것도 <러브 액추얼리>같은 영화에서 본 거지만) 미국과 영국의 관계. 그 안에서 온갖 음모와 싸우는 용감한 여대사 케리 러셀의 1인 무적 드라마인데, 사고를 치는 건지 아내를 도와주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남편(전남편) 루퍼트 시웰이 은근히 더 빛나는 느낌도 있다. 시즌 2를 기다리는 중. [넷플릭스]
브러쉬업 라이프
회귀물을 참 많이 봤는데, 인생 2회차 드라마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고, 성공한 작품은 더더욱 없다. 아무래도 그만치 쓰기 어려운 듯. 그런데 인생 5회차 6회차 7회차를 그리는 드라마가 나왔다. 일본 드라마 <브러쉬업 라이프>. 야망도 뭣도 없는 평범한 공무원이 어찌어찌하다 살아온 삶을 뒤엎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판타지다. 안도 사쿠라의 연기가 찰떡같다.
물론 살아 보면, 역시 인생이란 두번 정도 살아서 무슨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게다가 과거를 바꾸면 그 과거는 계속 또 다른 과거(그러니까 좀 더 가까운 과거)를 만들고... 아무튼 '젊은 여자들 이야기인데 남자 주연은 하나도 없는' 신기한 드라마. 여자들의 우정이 주제다. 멜로가 없으면 드라마가 아닌 분들께는 비추. [웨이브]
플레이리스트
스포티파이라는 셰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음원 앱을 주제로, 그 앱을 만든 창업자, 개발자, 경영자, 그리고 이 사업을 존재 가능하게 한 변호사, 이 사업과 손을 잡아야만 했던 음악산업의 거물, 마지막으로 가장 핵심인 콘텐트를 제공하는 아티스트라는 6개의 시각으로 그 성장 과정을 살펴본 드라마. 꽃미남/미녀/멜로 전혀 없고, 만듦새부터 내용까지 모두 '아 이런 드라마가 가능하구나'하는 생각을 주는 혁신적인 드라마. 그런데 재미있다. 특히 IT 비즈니스라는 것이 어떻게 일어나서 어떻게 자리를 잡아가는가에 관심있는 분들에게 강추. 물론 다큐 아님. [넷플릭스]
카지노
시기적으로 살짝 애매하지만 어쨌든 내가 본게 2023년이니 여기에. 결코 흠이 없는 드라마는 아니다. 초반 주인공의 어린 시절 성장 서사가 사실 너무 뻔하고, 너무 지루하다. 하지만 일단 필리핀으로 넘어가면 중간에 끊고 안 볼 수 없게 하는 흡인력이 대단하다. 특히 호구 형님과의 시퀀스가 '아... 저기서 멈췄으면' 하는 생각과 '저런 의지 없는 인간은 밑바닥까지 당해 봐야지'하는 묘한 양가감정을 일으킨다. 드라마를 통해 보는 남의 불행은 이런 식으로 즐길 거리를 주는 걸까. 아무튼 일단 흐름에만 오르면 결말까지(그 결말이 꼭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이건 그냥 개취) 한방에 달리게 하는 탄탄한 드라마. [디즈니]
리키시
일본 드라마는 어떤 식으로 넷플릭스를 노릴까. 일단 고레에다가 게이샤/마이코 이야기로 물꼬를 텄는데 아무래도 페도파일 냄새가 불편했다. 어디 가서 함부로 '재미있었다'고 말할 수 없는 드라마(그리고 개인적으로 재미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두번째의 기념비적인 드라마는 바로 이 <리키시>라고 생각한다.
<리키시>는 한자로 역사(力士), 즉 '힘 쓰는 남자=스모 선수'라는 뜻. 모래판을 무대로 강백호보다 10배 쯤 더 말 안 듣고 제 잘난 맛에 사는 천재형 스모 선수가 어찌어찌 아슬아슬한 과정을 거쳐 제도권(?)으로 들어오는 이야기. 전혀 잘생기지 않고, 본받을 데도 없는 주인공이 신선하고 이야기 전개도 좋았는데, 주연급 여성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발암이다. 이런 요소는... 앞으로 일본 드라마가 세계 시장으로 나가는 데 분명 걸림돌이 될 것 같다는 생각.
너무 뭔가 아저씨 드라마 판 인것 같아 하나 추가하면,
반짝이는 워터멜론
그렇게 많은 2023년의 말랑말랑 청춘 드라마들 중에서 시간을 기다려가며 볼만한 드라마는 이거 하나였다는 생각. 아빠 엄마의 어린 시절을 만나는 한국의 그 많은 과거 회귀 작품들 가운데서도 드물게 신선함이 빛났다고나 할까. 특히 최현욱의 신비로운 매력은 정말. [지금 보려면 티빙?]
기타:
물론 매번 시즌이 바뀔 때마다 다시 얘기를 할 수는 없기 때문에 <만달로리안3>는 따로 꼽을 수 없었다. 좀 경우는 다른데 최근 넷플릭스로 소개된 <나이트 에이전트>도 강추하고 싶은 작품이지만 이미 본지는 꽤 오래 된 작품. 드라마 외의 TV show 로 꼽는다면 <피지컬 100>, <사이렌: 불의 섬>, <데블스 플랜>이 정말 재미있었다.
창의성, 창작, 스토리텔링, 미감, 인간의 자의식, 한국 근대사... 근래 개인적으로 관심있는 내용들이 너무 많이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아무튼 인간이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많은 인사이트를 제공하는 책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출판 연도와 무관. 그냥 제가 2023년에 읽은 책들 중에 인상적이었던 책들을 추린 리스트입니다. 신간 위주로 읽는 분들께는 조금 죄송합니다.
아무튼 나름 다 좋은 책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서는 무순.
내가 된다는 것(아닐 세스)
분명히 경고한다.잘 쓰여진 책이지만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은 아니다.우리가 의식이라고 말하는 것,내가‘자의식’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뇌가 나 대신 생각하는 것인가,내 뇌가 바로 나인가.신중한 답변이 필요할 때 인용할 수 있는 책.
예를 들어 이런 설명들: 내 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밀실 안에서,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몇가지 정보에 의존해 바깥 세상을 해석하려고 한다. 빛, 소리, 색깔, 냄새, 형상, 이런 것들은 뇌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내 감각기관들이 보내오는 전기 신호들 뿐. 뇌는 이 신호들을 어떻게 해서든 해석해서 '세계'라는 것을 조립하려고 애쓴다. 즉... 내가 보고 느끼는 '현실'이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쩐지 미술에서 뇌과학이 보인다 (에릭 캔델)
‘환원주의’라는 키워드. 인간의 시각은 어떤 대상을 볼 때 시각이 이해할 수 있는 기본 단위로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과정을 거친다. 미술 또한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은 과거의 미학. 일찍이 세잔이 자연을 원기둥, 구, 원뿔 등 기하학적 형태로 해체하고 터너가 갑자기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로스코, 칸딘스키가 새롭게 보이는 책.
기억전달자 (로이스 라우리)
소설을 몇가지 읽지 않았는데, 그 소설들 가운데 가장 좋았던 책. 근미래를 배경으로 인류 문명의 전달에 대한 은유. 그리고 문명을 계승한다는 것의 대가. 과연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 위한 소수의 희생이란 어떤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합리화되는가. 어슐라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연상시키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감동.
그리고 무엇보다 짧다. 쉽게 읽을 수 있다.
창의성을 지휘하라 (에드 캣멀)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사장을 지낸 캣멀이 풀어낸, 한 조직을 크리에이티비티가 넘쳐 나는 조직으로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어떤 조직도 샘솟듯 아이디어가 뿜어나오는 사람들만을 데리고 있지는 않다. 어쨌든 잠언과 같은 명언이 넘쳐나는 책. ‘스토리가 왕이다’ ‘프로세스를 신뢰하라(신뢰할 수 있는 프로세스를 구축하라)’, 그리고 ‘<토이 스토리>는 장난감들이 우리가 안 볼 때 자기네끼리 이야기를 한다면?’이라는 아이디어 하나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같은 말들.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한 조지 루카스의 한마디. Do or do not. There is no try.
스토리텔링 애니멀+이야기를 횡단하는 호모 픽투스의 모험(조나단 갓셜)
사실 이어지는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같은 사람이 쓴 책이라는 걸 읽고 나서 알았다). 하지만 둘 다 스토리텔링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는 동시에 아주 흥미로운 책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예를 들면 짧은 결론 중에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보이는 것들 사이에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못해 안달을 한다'는 것이 있다.
무표정한 표정의 여자, 수프 한 접시, 관에 든 시체의 사진을 제시하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든 연결해 내는 것이 인간. '한번 각인된 이야기는 수없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이 검증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은 요즘 세상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인사이트를 제공하기도 한다.
조선잡기 (혼마 규스케)
1884년 갑신정변 현장에서 (F.H.뫼르셀)
일본 정부의 밀정인 혼마 규스케가 갑신정변 9년 뒤, 갑오경장 1년 전인 1893년 조선에 들어와 견문하고 정탐한 내용. 전 세계를 볼 때 가장 비슷한 문화를 갖고 있는,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으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해가던 일본인들의 눈으로 본 당시의 한국은 처참한 후진국이었다. 과연 어떤 부분들을 보고 일본인들은 ‘식민지 개화’의 자신감을 얻었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참담하다.
<1884 갑신정변 현장에서>의 원제는‘Events Leading to the Emeute of 1884’.민영익의 호의로 한국 지방 탐사 여행을 떠났던 독일 상인 뫼르셀은 남도를 여행하던 도중 서울에서 변란이 일어나 민영익이 생사를 알 수 없는 위기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는다.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반란에 휩싸인 뫼르셀의 불안감이 생생하게 살았는 여행기.모세을(牟世乙)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독일 상인인 뫼르셀F.H.Morsel은 독립신문에1호 광고를 낸 사람이기도 하다.
그라제니 (아다치 켄/모리타카 유우지)
야구만화를 매우 좋아하는 편인데,과연 이렇게 시속150km를 던지는 광속구의 대투수도, 40홈런을 때려내는 강타자도,열혈 고교 에이스도 나오지 않는 야구만화가 있었던가.죽을 힘을 다해 던져야140km가 나올까 말까 한 중간계투 요원인 주인공은‘그라운드에는 돈(제니)이 묻혀 있다’는 말에 따라 성실하게 연봉을 챙겨가는‘생계형 프로 야구 선수’다.매년 신인들이 들어오고 고참들이 쓸려 나가는 치열한 경쟁 현장에서 펼쳐지는 그의 생존기가 매력 만점.
미 가장예쁜 유전자만 살아남는다(낸시에트코프)
대체 왜 인간은 예쁜 것을 좋아할까. ‘Beauty is in the eyes of the beholder’라는,누가 했는지 알 수 없는 말은 미감이란 인류 각 개체의 독립적인 감각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최신 뇌과학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그 문제의‘개인차’보다는 공통점이 더 크다.심지어 갓난 아이도 성인들이‘예쁘다고 생각하는 얼굴’을 좋아한다.그렇다면 예쁜 것에 대한 반응은 본능인가? 하버드 대 교수 낸시 에트코프의 기발한 분석. [그런데 안타깝게도 절판. 중고는 많이 팔립니다.]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오구라 기조)
서울대에서 한국 정치사상을 연구한 일본인 저자의 눈으로 본 성리학이 한국인에게 미친 영향, 혹은 한국인이 성리학을 내면화하면서 생긴 일에 대한 정리서. ‘남이 본 우리 이야기’인 만큼 시사점은 넘쳐 흐른다. 과연 이 책은 한국을 미화하는 책인가, 폄하하는 책인가. 직접 판단하시면 좋을 듯.
1. 7번을 단 포인트가드 중 유명한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피닉스의 전설 케빈 존슨이 송태섭의 모델로 꼽혔던 것은 그리 크지 않은 키와 함께 7번이라는 번호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2. 1m68이라는 설정신장때문에 먹시 보거스나 스퍼드 웹이 모델이라고 주장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송태섭의 작화상 신체 비율은 이 미니 가드들의 느낌은 아니다. 그리고 왕년의 찰스 바클리마저도 길들일수 있었던 불같은 리더십을 보면 역시 케빈 존슨...
2. 발군의 스피드, 넓은 시야, 패싱 감각, 호승심, 리더십, 그리고 상대적으로 빈약한 슈팅력이 특징인 송태섭. 하지만 팀의 주축인 센터와 3점 슈터가 졸업하는 이상 새 팀에서는 주장으로서 득점원으로도 잠재력을 드러낼 것으로 보이는 선수. 그 송태섭의 시각으로 슬램덩크의 하이라이트를 재구성한다는데, 가슴이 뛰지 않을수 없었다.
(평소 가문 섭자 항렬의 3대 인물이 송태섭과 막걸리 장인 송명섭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3. 북산 5인방이 하나씩 스케치에서 인물로 바뀌며 걸어나오는 인트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 벌써 이러면 안되는데. 애니메이션 상의 경기 묘사에서 선수들의 동작이 아주 매끄럽지는 않다. (괜찮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
4. 팬들 사이에서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피어스>라는 단편이 송태섭의 과거 이야기냐 아니냐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영화 <퍼스트 슬램덩크>는 처음엔 마치 <피어스>를 따라갈 듯 하다가... 결국은 전혀 다른 길로 간다.
5. 하지만 문제는 송태섭이 주인공(?) 인데도 불구하고, 배경으로 계속 삽입되는 개인사(송태섭의 성장기)가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뒤로 갈수록 그 성장기가 경기의 긴박감을 심하게 떨어뜨린다. 이 부분 매우 아쉽다.
6. 어쨌든 북산이 이긴다(...스포일러인가?). 당신이 듣고 싶어 했던 그 주옥같은 명대사들도 상당수 나온다. 그리고 강백호의 클라이막스는 정말... 와... 멋지다. 역시 주인공은 강백호. 눈물이 괸다.
7. 이러니 저러니 했지만, <퍼스트 슬램덩크> 소식을 듣자마자 '어 이건 봐야지' 생각한 사람은 무조건 달려가 볼 것. 이건 '잘 모르는데 요즘 핫하다니까' 볼 작품은 아니다. 이 극장판은 어디까지나 <슬램덩크>의 짤 한장만 봐도 그 장면의 대사가 생각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 그 밖의 사람들은... 모르겠다. 보든지 말든지.
8. 자막으로 봤는데 더빙은 어떨지 궁금. 자막의 이름 표기는 모두 한국식이라 위화감은 없다. 단지 강백호 역의 일본 성우가 좀 심하게 아저씨 목소리... (참. 극장이 아저씨 판일줄 알았는데, 80% 이상이 10~20대라서 놀랐다)
9. 아쉬움: 변덕규 안 나옴(무 깎는 신 매니아로서 매우 안타까웠음).
10. 기왕 <퍼스트 슬램덩크>로 시작했으니 텐스, 트웬티스까지 극장판 오리지날로 계속 이어주십쇼.
0.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일찍 영화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잘 모르겠다'는 평을 몇 차례 들었고, 솔직히 말해 <명량>과 <한산>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리 높은 평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량>은 지나치게 특정한 감정을 유발하기 위한 전개가 좀 부담스러웠고, <한산>은 '전투'라는 사건을 지나치게 전면에 내세우다 보니 정작 주인공인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흐릿해져버린 점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노량>은 달랐다.
<노량>은 1598년 12월16일 밤부터 그 다음날까지 벌어진 해상 전투, 7년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혈투를 글자 그대로 입체적으로 조명한 영화다. 이전의 두 작품에서 다소 평면적인 시야가 아쉬웠다면, <노량>에 등장하는 다양한 시각은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이순신이라는 인물과 그리 어울리지 않는다는(특히 외모 면에서) 생각이 들었던 김윤석의 존재감 또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압도적인 절제미'라고 부르고 싶다.
그 밖에도 해전의 스케일, 전투의 박진감 모두 전작들에 비해 진일보했다. '전투 한복판의 정적' 신, 전장의 북소리 신 역시 그 섬세함을 모두 칭찬하고 싶다. 특히 '정적' 신은 전투에 참가한 3국 병사들의 시선과 이순신의 시선, 이순신의 마음 속을 한 흐름에 담아낸 명장면이었다. 이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
혹시라도 세 편 다 보는게 뭔가 좀 부담스러워서, 혹은 <서울의 봄>을 보고 난 지 얼마 안 되어 또 극장에 가는게 부담스러워서 관람을 꺼린 분들이라면 어서 극장으로 가시길 권한다.
1. 노량해전은 어떤 전투일까. 한산해전이 희망 없는 전쟁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영웅의 대업을, 명량해전이 궤멸지경이었던 조선 수군을 기적처럼 되살린 영웅의 재기를 상징하는 사건이라면, 노량해전은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하는 결전이자 영웅의 최후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데 상식으로는 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영화 <노량>의 가장 큰 미덕이라면, 다른 두 전투와는 사뭇 다른 이 전투의 의미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량해전의 의미를 아는 사람에게는 사실 영화 속 진린의 대사,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겠습니까?"가 그리 무리한 말로 들리지 않는다. 1598년 12월. 이미 조선과 명, 그리고 토요토미 사후의 일본 조정은 일본군의 철병을 전제로 한 종전에 합의한 상태였다. 패배를 인정하고 도망치는 적에겐 항자불살 降者不殺의 아량을 베푸는 것이 고전적인 동양 무인의 대의. 게다가 승리가 담보되지 않은 출전 명령을 거부하다가 졸병으로 강등된 적도 있는 장군 이순신이, 그동안 치열한 전투에 시달렸던 휘하 장병들을 불필요한 전투에 몰아넣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설사 전투를 벌인다 해도, 적을 적당히 도망치게 내버려 둔 뒤 추격하며 전과를 올리는 것이 병가의 상식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순신은 왜군과의 화의를 인정하지 않고,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투지를 불사른다. 그 결과 정면 대결이 펼쳐지고, 엄청난 전과를 거두기는 하나 자신을 포함해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고, 모든 전투를 통틀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물론 일본군 역시 여기 맞서 결사적으로 싸웠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꼭 그래야만 했을까. 만약 이 질문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노량해전이라는 이상한 사건에 대해 제대로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내가 영화 <노량>을 높이 평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대체 왜'에 충실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2. 영화에선 몇가지 소재로 설명을 시도한다. 첫째는 아산에서 가족들을 돌보던 세째 아들 면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인데, 이건 영화 속에서도 진린의 추정일 뿐, 이런 개인적인 동기로 수많은 장병들을 죽음의 전투로 끌고 들어간다는 것은 충무공의 캐릭터상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이보다는 두번째, 7년 동안 죽어간 동지들과 희생당한 백성들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가 훨씬 와 닿는다. 물론 이것도 충분하지는 않다.
세번째, 이순신은 전투가 한창일 때 '이만하면 되지 않았느냐'고 묻는 송희립에게 다시 한번 잘라 말한다. "이렇게 어중간하게 끝낼 수는 없다. 열도 끝까지라도 추적해서, 확실한 항복을 받아내지 않으면 제대로 끝냈다고 할 수 없다"고. (어쩐지 이 말은, 영화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하기도 하고,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는 루쉰의 말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영화 <노량>에서 이 말의 의미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3. 이순신의 입장에서 이 상황을 생각해보면, 결국 이 전쟁을 그대로 끝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은 임진왜란(1592)와 정유재란(1597)이라는 이중의 전쟁이다. 전쟁 초기. 일본 수뇌부, 특히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이 조선에 출병한 이상 이 전쟁을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주도로 종전 협상이 진행되며 왜군들은 1596년까지 서서히 철군을 진행했지만, 이 화의 조건의 구체적 내용이 상당부분 사기로 밝혀지며 히데요시는 격분하고, 1597년 다시 대규모의 왜군이 조선을 재침공한다. 이것이 정유재란.
이미 정유재란을 겪어 본 이순신과 조선의 일선 지휘관들이 과연 1598년 12월의 후퇴를 영구적인 후퇴라고 믿었을까.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때, 과연 그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누가 확신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 부분이 핵심인데, 영화 <노량>은 이런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고 보여지기는 하나, 아쉽게도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관객에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4. 물론 우리는 실제 역사를 통해 히데요시가 죽은 뒤 일본 전국 다이묘들이 둘로 갈라져 내전을 벌이느라 조선 재침공은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유성룡이나 윤두수 같은 정치인들이라면 다양한 정보를 조합해 재침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수도 있었겠지만, 과연 당시의 이순신이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그의 입장이라면,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산산조각을 내고 감히 재침을 상상할 수 없을 만한 피해를 주는 것만이 확실히 이 전쟁을 끝내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만이 군사들과 백성들, 그 가족들이 다시 전쟁에 시달리지 않게 할 수 있는 유일하고 확실한 방법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마지막 전투'에 목숨을 걸어야 했다. 비록 그 마지막 전투에서 휘하 장병들이 죽고 상하고, 그 자신이 목숨을 잃을지라도, 끝까지 싸우지 않을 수 없는.
5. <노량>은 여기에 보태, 그렇다면 일본 측 장수들은 어째서 그렇게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는가에 대해서도 충분한 명분을 제공한다. 물론 순천 왜성에 갇힌 고니시야 탈출하지 못하면 바로 끝장이니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는 고니시 구조에 어째서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섰는지 좀 궁금하다.
<노량>이 내놓은 답은 자존심. 사츠마의 시마즈 가문은 일본 전국시대에도 용명을 떨친 강병을 갖고 있었고, 특히 시마즈 요시히로는 칠천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전멸시킨 바로 그 사람이자(영화 속에도 소개된다),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최대 승리라 할 수 있는 사천왜성 공방전에서 명군에 거의 1만 가까운 사상자를 낸 명장이었다.
시마즈가 노량해전에 목숨을 건 실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영화 <노량>에서는 고니시가 시마즈에게 편지를 보내 '이순신을 제거하는 공까지 세운다면 일본으로 돌아가도 감히 누가 당신을 핍박하지 못할 것'이라고 부추기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 시마즈의 자존심과 자신감이라면, 충분히 물만한 떡밥이다.
사실 이순신이 왜군의 재침을 우려했다면, 반대로 고니시는 이순신을 앞세운 조명 연합군의 열도 보복 침공을 걱정했을 수도 있다(이것 역시 실제 역사상으로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우리는 알지만, 당시 왜군 다이묘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니 일본군 최강의 카드인 시마즈 군을 동원해 이순신을 공격하고 자신이 살 길도 만들 수 있다면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노량>은 이순신, 고니시, 시마즈에게 목숨을 걸고 노량 바다에 뛰어들 동기를 마련해준다. 지금까지의 <한산> <명량>은 물론, 거의 모든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입체적인 설계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런 잘 설계된 대립이 대다수 관객들에게 얼마나 잘 전달되었는지는 약간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몇몇 부분의 대사에 좀 아쉬움이 있다.
6. 또 하나의 아쉬움은 여러 인물들간의 관계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생략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이순신 관련 드라마나 영화에서 진린과 이순신은 거의 버디 무비의 두 주인공처럼 묘사되곤 했다. 이것은 실제 역사가 기록하고 있는 진린과 이순신의 관계가 매우 좋았기 때문인데(진린은 일찌기 이순신을 가리켜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보천욕일補天浴日의 충절을 겸비한 인물'이라는, 최상급의 찬사를 보냈던 인물이다), <노량> 제작진은 이런 관계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판단에서였을까. 진린/등자룡과 이순신의 매력적인 티키타카를 기대했던 관객으로서 좀 아쉽다.
물론 이 글 시작 때 말했듯, 이런 사소한 아쉬움에 비해 <노량>은 매우 세련된, 멋진 영화다. 진심으로 응원한다. 뭘 하고 있나. 빨리 예매를.
이후는 다소 뜬금없는,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들.
P.S. 1. 고니시의 사신으로 바쁘게 뛰어다니는 아리마(이규형)의 갑주가 임진왜란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지 않았던 스페인풍의 남만동구족 갑옷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당시 포르투갈과의 교류가 많았던 고니시의 군대이니 고위 장교인 아리마는 포르투갈 수입 갑주를 입었을 가능성도 충분하긴 하다.
P.S.2. 이순신의 조총 피격 장면은 어쩐지 어린시절 본 김진규 주연 <난중일기(1978)>의 같은 장면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한민 감독도 이 영화를 기억할까.
P.S.3. 이면은 사망 당시 20세 추정. 그런데 굳이 여진구에게 덕지덕지 수염을 붙일 이유가...?
P.S.4. 여담이지만 노량해전에 대한 일본 측 해석 중에는 '일본군이 꽤 큰 피해를 입었다 해도 어쨌든 고니시의 일본 귀환이라는 작전 목표를 달성했고, 조선 최고 사령관 이순신을 전사하게 하는 전과까지 세웠으니 이것은 승리한 전투'라는 시각이 있다.
P.S.5. 패전하고 후퇴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분하다... 하지만 언젠가 돌아올 것이다..." 같은 대사를 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약 300년 뒤 시마즈의 후예인 사츠마의 유신지사들은 정한론과 한일합방의 주역이 된다. 이순신의 우려는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재벌집 막내아들(2022)>의 원작 웹소설 이후로 요즘 '인생 2회차' 서사가 넘쳐나지만 사실 이 장르에서 아 그거 걸작이었지 싶은 작품은 그리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페기 수 결혼하다(1986)>, 해롤드 래미스의 <사랑의 블랙홀(1993)> 이후로는 <어바웃 타임(2013)> 정도? 일본 만화 <리라이프>?
그러니까 내가 과거로 가거나, 내가 누군가에게 빙의되어 다시 태어나는 경우는 흔한데 '내 인생'을 동시대에 다시 살 기회가 생기는 서사는 생각보다 흔치 않았다. 아마도 2023년 일본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는 이 전통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될듯 하다.
일본 어느 지방도시 공무원으로 아주아주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던 아사미. 어느날 교통사고로 급사해 저승의 흰 공간에 떨어지고, 생전의 자기와 너무나 하는 짓이 비슷한 저승 공무원("규정때문에 안됩니다")에게서 지금 환생하면 쌓은 덕의 포인트가 부족해 다음 삶은 과테말라의 개미햝기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는다. 단, 그게 싫으면 인생을 다시 살아서 만회할수 있는 기회는 있다. 그래? 그렇다면 당연히 다시 살아야지. 인생 2회차 도전!
이라는 이야기인데, 과연 인생을 두번 살면 얼마나 삶이 달라질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삶은 어느새 훅 지나가 버린다. 더구나 덕을 쌓지 않으면 미물이 되어 다시 태어난다니. 대체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한 덕'이란건 정체가 뭐냐.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포텐셜인가, 노력인가. 과연 좋은 선택과 나쁜 선택이란 존재하나. (단, 장르는 코미디)
...라는 식의 이야기는 인생이 2회차면 다 될것 같으냐는 진지한 접근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위에 계란 후라이처럼 가장 돋보이게 덮인 것은 놀랍게도 철저하게 일본적으로 변형된 <섹스 앤 더 시티>.
아니,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일까? 네 친구의 너무나도 끈끈하고 치열한 우정이 사뭇 감동적인데 심지어 거기엔 남자의 그림자가 없다.
남성 캐릭터 중 가장 비중이 큰 후쿠짱은 그야말로 커다란 곰 인형 수준. 사랑이며 연애며 하는 것은 그녀들의 인생에서 정말정말 사소한, 지나가는 얘깃거리일 뿐이다. 정정하면 <노 섹스 앤 더 시티>. "Trends come and go, but friendships never go out of style." 그런데 정작 작가는 75년생 남자(바카리즈무).
소꼽친구 여자들 이야기에서 연애라는 강력한 재료를 아예 들어내고도 10부작 드라마가 이토록 흥미로울수 있다니. 사뭇 놀라울 뿐이다. 일본 드라마 특유의 사회교육방송적인 색채도 최대한 억누른(물론 아주 없지는 않다) 연출도 새롭고, 말 실수 하나도 나중에 보면 다 이유가 있었던 초세심 대본도 빛을 발한다. 안도 사쿠라의 명연기는 말할것도 없고.
물론 <펜트하우스>나 <아씨두리안>이 인생드라마였던 분들에겐 비추. 왓차/웨이브/티빙에서 시청가능.
<무빙> 때문에 디즈니 아이디 살렸는데 어 어벤저스밖에 없네 인제 뭐보지 하는 분들을 위한 추천. <만달로리안> <아파트 이웃들이 수상해>를 보시고, 물론 <카지노>도 볼만한데 <드롭아웃>도 한번 보시라고.
우리에게 황우석이 있지만 바이오 벤처의 역사에는 그 정도는 우스울 수많은 사기꾼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테라노스의 엘리자베스 홈즈. 피 한방울만으로 200가지 질병을 진단할수 있다는 신기술로 엄청난 투자를 모아 초거대 성공신화를 쓴 늘씬한 금발 미녀가, 실제론 모든게 구라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한때 수조원이었던 기업가치를 0원으로 만들고 실형을 살고 있다는 실화.
<드롭아웃>은 바로 이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사기의 원칙이 살아 있다. 사기를 치려면 가능한 한 상상의 범주를 넘어 크게 쳐야 한다. 그래야 '설마 저게 사기겠어?'라는, 대중의 사각에 위치하게 된다.
극중 사기의 패턴은 너무 간단해서 놀라울 정도. 우리를 검증하겠다고? 미안. 정보 유출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검증은 불가하다. 특허는 현재 검토중이며, 곧 모든게 선명해진다. 얼마나 많은 유명인사들이 우리를 지지하는지 알고 있나? 그 사람들은 뭐 다 바보라서 그러고 있을 것 같은가.
우리 실험실을 보여주지 않으면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아,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꼭 투자하라는 얘기는 않겠다. 다른 투자자가 기다리고 있어서 이만...
엘리자베스 홈즈는 실제로 금발, 외모, 언변이라는 자신의 자산을 최대로 이용한 인물인 듯(드라마 한 회차의 제목이 '백인 중년 남성'이다). 테라노스 사건 이후로 한 여성 벤처기업인은 "홈즈를 연상시킬수 있으니 금발을 다른 색으로 염색하라"는 조언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암튼 보고 있으면 선악의 자리바꿈이 현란하다. 홈즈의 피해자(투자자)들은 그야말로 탐욕의 화신들. 홈즈의 변호인은 너무나 '정의'를 자주 들먹인다. 한편 유일하게 진실을 파헤친 사람은 모두가 싫어하는 극 비호감 인물이란 점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 작품의 해석에 따르면 홈즈는 소시오패스다.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역을 맡은 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연기를 보는 것이 큰 재미. '감정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감정을 보고 학습해서 그걸 연기로 써먹는' 연기가 진정 압권이다. 아무튼 참 실화라기엔 실감이 안 나는 놀라운 이야기. 재미있다. #드롭아웃
2021년, <오징어게임>이 처음 나와 세계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때 썼던 글입니다. 시간이 지난 뒤에 읽어봤는데 별로 틀린 말이 없었던 것 같네요. 그때 온갖 호들갑이 쏟아져 나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 나올 때 썼던 글이라 생각하면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아무튼 그 뒤로 K-콘텐트의 물결이 세계를 휩쓰는 걸 보게 된 지금, 다시 읽어볼만 한 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 1970년대 초 쯤이라고 치자. 서양인 서넛이 아시아의 어느 도시를 여행하다 길을 잃어 인적이 드문 변두리로 빠졌다. 어두컴컴해서 겁도 슬슬 나고 배도 고픈데 저 앞에 영자로 된 레스토랑 간판이 보인다.
그런데 기대 이상이다. 잘 닦아진 커틀러리 하며, 리모주 자기 그릇들이 예사롭지 않더니, 거북이 알 수프에서 브랜디에 담근 메추라기, 농어 구이까지 제대로 된 프렌치 정찬 코스가 나오는 거다. 다들 놀라는 가운데 어디서 좀 먹어봤다는 친구가 말한다.
“수프와 메인은 좋았어. 하지만 제빵기술은 아직 부족해. 치즈도 두가지밖에 나오지 않고, 이렇게 쿰쿰하지 않은 까망베르는 어린이용이지. 뭣보다 와인리스트는 손을 봐야 할 거 같아.”
그러자 다른 친구 하나가 말한다.
“무슨 소리야. 뉴욕이나 파리에서 이 가격에 이런 식사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있으면 우리는 내일부터는 이 식당에 다시는 예약을 못 하게 될거야. 그리고 넌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이 음식이 어떻게 나온 건지나 알아? 이 도시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아? 여기가 홍콩이나 도쿄라도 되는 줄 알아?”
2. <오징어게임>에 대해 입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마디씩 하는 요즘. 굉장히 어이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모두 <오징어게임>에 열광하는데 왜 한국 사람들만 여기저기서 재미없다, 잘 못 만들었다 말이 많은 건가요?”
한때는 <기생충>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을 매국노로 몰아 죽창으로 찔러 죽일 기세더니(물론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살려주세요), 이젠 <오징어게임>이다. 세계인이 열광하는 콘텐트에 토를 다는 행위는 마치 여동생이 선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얘 눈이랑 코랑 다 성형한 거에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듯한 분들이 적지 않다.
올림픽 금메달에서 ‘전 세계 넷플릭스 1위’까지, 국위선양, 환호, 좋다. 다만 해외에서 <오징어 게임>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일단 이 콘텐트가 너무 짧은 시간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고, 이방인 평자들은 이 콘텐트를 ‘어떻게 보아야 할 지’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한국 붐은 여기저기서 징후가 보인지 오래지만 이렇게 큰 화제가 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아직은 신기하고 낯설다는 뜻이다. 좀 익숙해졌다 싶은 순간, 드디어 외국에서도 ‘비평’이 시작되고 있다. 알리 캐릭터가 엉클톰으로 보인다는 이야기부터 황당무계한 이야기도 많지만, 이런 이야기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3. 가장 답답한 것은 ‘<오징어게임>의 분석을 통해 K-콘텐트의 성공 원인을 분석’ 하려는 시도다. 이건 전봉준이나 나폴레옹의 캐릭터 분석을 통해 동학혁명의 실패 원인이나 19세기 초 프랑스의 군사적 성공 원인을 파악하려는 시도와 비슷해 보인다.
개인적인 의견: K-드라마는 이미 충분히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상품을 내놓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대대적인 노출의 기회, 즉 쇼윈도의 존재였다. 이 경쟁력의 배경에는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게 비해 매우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어 온 창작의 자유가 있었다. 일부 제한된 분야, 즉 섹스와 폭력에 대해서는 상당 수준의 금기가 작용했지만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그런 제약을 일시에 뛰어넘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이 있으면 늘 하던 대로 천, 지 인으로 나눠 서술하고 싶지만 먹고 살아야 하니 이 정도만.)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이라는 나라를 레스토랑에 비유하자면 현재의 K-콘텐트는 훌륭한 디저트다. 디저트만으로도 명성을 떨칠 수 있지만 메인디시까지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때가 진정한 성공의 시작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P.S. 그럼 앞으로는? 당연히 잘 되겠죠. 이웃 나라 중에 K-콘텐트를 온 국력을 다해 응원하고 있는 나라도 있는데, 당연히 잘 되지 않을까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한 건 <펜트하우스>가 넷플릭스에 올라가면 어떤 반응을 얻을지…)
하카는 많이 들어 봤는데 하카식 음식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고, 사실 그냥 이름에 끌려 방문. 근데 그런거 있잖아 왜. 오래된 식당 아닌데 간판만 봐도 뭔가 내공이 느껴지는 거.
(어쨌든 이 식당은 맛있지만 하카식은 아니었습니다.^^ 중국에는 진짜 하카식 식당들도 꽤 있다고.)
오이무침은 흔한 메뉴지만 살짝 고수맛이 섞인 데서부터 양념의 섞임이 상큼하기 이를데없고(물론 오이를 썰지 않고 부숴 주었다면 더할나위없이 좋았겠으나 그건 아니었다), 공심채는 흔히 먹듯 숨을 죽인 맛이 아니라 줄기의 힘을 탱탱하게 살려 아삭아삭한 맛이 별미다. 처음 두가지 채소에서 기대 폭등.
미리 주문한 오리는 광동식이라기에 기대했는데 북경식과 사실상 다를 게 없어 살짝 실망. 하지만 맛은 대박. 오이채와 파채를 넣고 전병에 싸먹는 바로 그 맛이다. 살코기를 먹고 나면 남은 살점이 붙은 뼈를 튀겨낸 뒤 큐민 등등 양고기 양념에 굴린 느낌으로 주는데, 살짝 느끼한 오리 맛을 없애 준다. 맛있다.
사천볶음밥(중국식 햄이 들었다. 이름과 달리 맵지 않음). 버터 탕수육, 창펀 모두 탄탄한 내공을 자랑하는 맛. 샤오롱바오는 내 기준으로는 살짝 국물이 좀 과하게 기름진 맛이긴 했는데 다들 맛있다고 난리.
경리단길 여수댁(혹자는 여수집이라고도 한다). 덕자찜 한번 먹자는 따거의 말씀에 우루루 모였다. 병어찜이나 덕자찜이나 대개 갈치조림이나 별 다를 것 없는 국물에 푹 졸여 국물도 떠 먹고 살점도 들어 먹고 하는 게 일반적인데, 경리단길 시장의 여수댁은 하얀 덕자찜을 낸다.
왕년에 민어집으로 유명했던 팔판동 병우네(코로나 지나고 보니 어디론가 사라짐)에서 먹어 본 뒤로 하얀 덕자찜은 처음이다. 덕자 사진 옆의 전화기는 크기 비교를 위해 누군가 내민 것.
50cm는 되어 보이는 덕자병어를 홍고추 대파 썰어 넣고 담백하게 잘 쪄냈다. 두터운 흰 살을 떠내 양념 간장 뿌려 파와 함께 입 가득 넣고 씹으면 고소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일품.
물론 비싸서 아무 때나 먹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여럿이 한입씩 먹는 재미가 있다. 메뉴판을 보면 덕자 외에도 가오리 민어 등 고춧가루 넣지 않은 생선찜이 전문. 서울에서 여수식 맛을 볼 수 있다는 기쁨이 있다.
추가로 생선구이. 서대, 좀 작은 민어, 조기가 나온다. 괜히 이름만 드높아서 여수 가는 사람들이 먹어 보고 실망하는 군평선이는 필요 없다. 앞으로도 여수 가시는 분들, 맛이 없는 것은 아니나 뼈만 많고 살은 한 숟가락인 군평선이를 그 가격에 먹느니 다른 맛난 생선들을 잔뜩 드시길.
모두 살짝 반건조해서 구운거라 고소한 풍미가 그만. 여기에 닭똥집 제육 같은 기본 안주들이 매우 충실하고, 일단 자리에 앉으면 나오는 기본 찬에 파김치, 돌김, 돌게장이 훅 달려든다.
돌게장(사실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올 때 살짝 눈짓을 하면 양푼에 밥 비벼 먹으라고 계란후라이까지 같이 주시는 센스가 일품. 후식으로 나오는 구운 가래떡에 설탕 궁합도 매력적이다.
단 일견 허름해 보이는 가게의 분위기에 비해 비싼 집(정확하게 말하면 비싼 재료 취급 전문점. 내장이 화려했다면 더 비쌌겠지)이라는 건 각오해야 할 듯. #송원섭맛집#경리단길#여수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