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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기다리던 <탑건: 매버릭>.

 

감상은 너무 좋았다.”

 

한마디 더 보태면 이렇게 좋아도 되는거냐.”

 

전편을 좋아했던 그 시절의 젊은이들에게 이 영화는 보물이자 보약이다. 그날의 기억이, 그날의 느낌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 극장 가득 울려퍼지는 Top Gun AnthemDanger Zone을 들으면서 벌써 눈물이 나려 한다. 오토바이는 타 본 적도 없는데도 활주로를 따라 매버릭이 가와사키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장면에선 그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영화는 뭔가 숨은 의미를 찾거나 할 여지가 없는 직구의 연속. AI라고 만능 아니다. 아직 인간이 할 일 많다. 젊은이들에게 주눅 든 노인네들, 아직 멀었어! 기운 내! 할 수 있어! 뭐 이런 메시지는 너무나 자명해서 거론하는게 창피할 정도. 거기다 제작진은 다른 생각은 모두 접고, 어떻게 하면 1편을 본 관객들에게 좋은 기억을 줄 수 있을까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친구들일텐데^^, 정말 정성이 가상하다.

 

다음은 그저 영화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 기억나는 것들의 모음이다.

 1. 오래 전, 고교생 록밴드를 인터뷰 할 일이 생겼다(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이미 아이돌의 시대. 밴드라지만 니들이 무슨 밴드 음악을 하겠니, 라는 생각으로 질문했다. “그래서 어떤 밴드 곡을 커버해요?” 그런데 대답이 예상을 벗어났다. “토토요.”

 

태어나 88올림픽을 본 적이 없는 너희가 토토를 안단 말이냐. 밀려오는 감동. 갑자기 멤버들이 잘생겨 보이기 시작했다. 꼰대질을 했다. “너희가 한번 들어봤으면 하는 연주곡이 있어.”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던 Top Gun Anthem을 틀었다. “들어본 적 있니?” “아뇨. 근데 너무 좋은데요.” 그럼. 좋지. 안 좋을 리가 있니.

 

2. 36년만의 속편. <탑건: 매버릭>은 정말 흔한 속편 영화들이 닿을 수 없는 깊이의 영화다. <록키>로 치자면 1976년의 첫 편에서 바로 2006년작 <록키 발보아>로 넘어 온 느낌. 하지만 그 사이에는 4편의 <록키> 시리즈가 있다.

 

<탑건><탑건: 매버릭>에서 톰 크루즈가 소화하는 젊은 매버릭과 늙은 매버릭은 어딘가 <허슬러>(1961)<컬러 오브 머니>(1986)의 폴 뉴먼을 연상시킨다. 원작에서 25년 뒤. 나이는 먹었지만 불 같은 호승심은 그대로인 초로의 남자. 젊은이들과 진심으로 부딪혀 승부하는 남자(공교롭게도 그 남자가 바로 톰 크루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건: 매버릭>은 다른 어떤 영화도 도달할 수 없는 요소를 갖고 있다. 1962년생인 톰 크루즈라는 사기 캐릭터다. 본래 2020년 개봉 예정이었으니 대략 57~8세 무렵의 모습이겠지만, 그 나이에 성적으로 어필하는 매력발산 표정(매우 중요한 요소다)’을 유지하고, 젊은이들과 함께 상의탈의를 할 수 있는 배우가 과연 있었을까. 앞으로는 나올 수 있을까

4. 어쨌든, 1편을 보지 않은 사람들이 보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도록 세심하게 구성된 영화지만, <탑건: 매버릭>을 가장 재미있게 보기 위해선 역시 <탑건>을 봐야 한다. 본지 10년이 넘은 사람이면 한번쯤 다시 볼만하다. 지금 봐도 1986년작은 정말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탑건: 매버릭>은 <탑건>에서 약 30년 뒤의 현재. 가는 데마다 사고를 쳐서 장성 진급도 못하고 말년 대령으로 늙어가고 있는 매버릭은 어찌어찌 하다가 갑작스런 필요에 의해 다시 탑건으로 불려간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12명의 탑건 출신 엘리트 파일럿들. 그들 중 6명을 선발해야 하는 긴박한 임무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 (두둥)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경고. 그래봐야 대단한 비밀도 아니지만, 어쨌든 경고. 영화 보고 오세요.)

 

5. 1986<탑건>이 나왔을 때 과연 영화 속 가상적국은 어디일까 하는 이야기가 나오곤 했다. 사실 그 시절엔 의심할 여지 없이 이라크가 1번 후보였다. 매버릭의 항공모함은 인도양 해상에 떠 있었고, 그 지역의 가장 유력한 미그기 운영 국가는 이라크였기 때문이다. 사실 꼬리날개의 별 모양은 북조선 공군의 상징이지만, 그걸 갖고 북한을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인도양에 북한이 웬 말이냔 말이다.

 

그럼 <탑건: 매버릭>의 가상 적국은? 이번 영화의 작전 지역이 태평양 함대 구역이라는 점, 5세대전투기를 운영하는 나라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유력한 후보는 러시아와 중국이다. 하지만 항공모함에서 내륙으로 접근하는 경로나 눈이 쌓인 지형이 있는 나라라면 러시아 외의 답을 생각하기 어렵다. 전투기의 생김새도 중국산 J-20보다는 러시아제 Su-57과 훨씬 더 비슷하다(혹자는 F-14가 그 기지에 있었다는 이유 때문에 이란을 후보국으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이란 수준에 5세대 전투기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얘기다.)

 

6. 그런데 왜 그 나라에 F-14가 있는 걸까. 사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굳이 가능하게 하자면 이란을 통해 흘러나갔을 가능성이 있다정도다. 1970~80년대, F-14는 성능도 성능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전투기였기 때문에 해군은 F-14, 공군은 F-15를 주력기로 채택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천조국이라는 미국에서도 해군이 공군보다 부자다). 그런 비싼 F-14를 수입해다 쓴 외국은 원리주의 혁명 이전의 이란 뿐이었다. 친미주의자였던 팔레비 왕은 오일 머니를 아낌없이 투입해 F-14로 플렉스를 했는데, 팔레비는 호메이니가 이끄는 혁명세력에 의해 쫓겨나지만 이때 산 F-14들은 결국 돈값을 한다. 이란-이라크 전 당시 이 F-14들을 앞세운 이란 공군은 이라크 공군을 압도했던 것이다. 호메이니가 팔레비 덕을 본 셈. 

 

물론 아무리 F-14가 미국 바깥의 어떤 나라에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은 있다고 쳐도, ‘그 나라F-14, 하필이면 그 기지에, 급유도 되어 있고 완전무장까지 된, 당장 비행 가능 상태로 정비되어 있었다는 건 정말이지 좀 심한 농담이 아닐 수 없다. 관객들에게 톰 크루즈가 다시 F-14 조종석에 앉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제작진의 지나친 욕심이 빚은 결과. 좋은 뜻이었으니 그냥 넘어가자.

 

 7. 이밖에도 진짜 전문가들이 보면 온통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이겠지만, 마지막의 적기가 갑자기 3대가 되는 이유는 진심 궁금하다. 작전중이던 적기는 분명 2기였고, 마지막 3기째는 대체 어디서 불쑥? 굳이 설명하자면 매버릭이 기체를 이륙시키는 걸 보고(사실 이걸 막기 위해 크루즈 미사일로 먼저 공격한 것인데 그 활주로에서 기체를 이륙시킨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어떤 용감한 조종사가 3번 기체를 무리하게 이륙시켰다? ㅜㅜ

 8. 찰리(켈리 맥길리스) 대신 페니(제니퍼 코넬리)가 나오는 이유는: 아시는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1편에서 구스의 아내 캐롤(당시 무명배우였던 멕 라이언이 이 역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눈에 띄었다)이 술자리에서 제독의 딸 페니 벤자민이라는 매버릭의 전 여친 이름을 거론하는 장면이 나온다.

1편에서 매버릭이 탑건 교관으로 돌아오면서 찰리와 재회하지만, 교관 노릇도 두달만에 때려쳤다는 걸 보니 연애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을 듯.

톰 크루즈의 현 여친 앞에서 '페니 벤자민'이라는 구여친 실명을 언급하는 멕 라이언. 이런 만행이...

 

9. 아무튼 무슨 구조나 숨은 의미를 따질 영화는 절대 아니고, 다시 한번 권한다. 지금이라도 <탑건>을 보고 보러 가시길. 관람 경험이 훨씬 더 풍성해진다.

 

10. 마지막 자막은 1편의 감독인 고 토니 스코트에 대한 헌사. 가슴이 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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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쯤인가 NPC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모든 게임에는 NPC(Non Personal Character)라는 존재들이 있다. 게임 속에 등장하는 병풍 같은 존재들을 말한다. 스타크래프트의 백곰 같은 경우도 있고, 가끔 플레이어들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게임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를 말해주는 역할일 수도 있지만 어떤 독자적인 사고나 행동은 할 수 없다. 플레이어의 게임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엑스트라들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1년 전쯤, ‘이 세상이라는 게임에서 자신이 NPC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NPC’에 대한 포스팅을 했다가 조회수가 나오지 않아 좌절하고 다시는 NPC 어쩌고 하는 글 따위는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 있다. 그런데 너무나도 그 설정과 어울리는 영화가 나왔다.

<프리 가이>의 주인공 가이(라이언 레이놀즈)는 프리 시티에서 은행원으로 살고 있다. 은행 업무를 수행하긴 하지만 주 업무는 선글라스 낀 남자(혹은 여자)’들이 총을 들고 은행에 나타났을 때 아무 저항도 하지 않고 바닥에 엎드리는 정도다. 프리 시티에서 선글라스는 초인류의 상징이다. 그들은 은행을 털어도, 사람을 죽여도, 차나 건물을 파괴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돈을 내고 게임을 해야 이 게임이라는 세계가 의미가 있는 거니까.

일반 시민들은 고스란히 그들의 폭력에 노출되지만, 그냥 그게 일상이고 팔자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늘 똑 같은 인사를 나누고 똑 같은 커피를 마시면서. 그들에겐 그게 세상의 전부고, 세상의 이치다.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 프리 시티는 게임의 공간이고, 가이는 게임 프리 시티NPC. 그런 가이 앞에 어느날 심쿵하는 매력의 여성 캐릭터 밀리(조디 코머)가 나타나고, 그 순간 가이는 NPC의 굴레를 넘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너무나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세상의 질서를 다르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매트릭스>가 이미 20년 전 영화고 <레디 플레이어 원>이 벌써 4년 전 영화인 세상에서 이 설정이 대단히 신기할 것도 없고, 플레이어 아닌 NPC를 주인공으로 놨다고 해서 놀라 자빠질 일도 아니다. 하지만 <프리 가이>는 그렇게 한번 시각을 바꿨다가 다시 돌아오게 하는 움직임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리얼 스틸>의 숀 레비가 감독인 만큼 따뜻한 유머와 밝은 분위기는 기본. NPC에겐 NPC의 길이 있다. 메인 캐릭터에겐 메인의 길이 있듯이.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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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센스(2011)

데이비드 맥켄지 감독. 이완 맥그리거, 에바 그린 주연

만약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이 한가지씩 감각을 잃어 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처음엔 후각이, 이어 미각이 사라진다. 인간들은 혼란에 빠지고, 냉소적인 셰프였던 마이클(이완 맥그리거)는 실업자가 될 위기에 놓인다. 수전(에바 그린) 연구팀은 급속도로 번져가는 전염병의 원인을 찾으려 하지만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한다.

주어진 오감으로 부족하다는 듯 가상 세계에까지 감각을 확장해가고 있는 현대인에게서 가장 기본적인 감각들을 빼앗아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흥미로운 설정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 오감은 인간이 욕망을 갖게 하는 전제다. 감각이 없으면 욕망도 없다. 미각이 사라진 뒤에 미식이, 청각이 사라진 뒤에 음악이 사라지듯 시각과 촉각이 사라진 뒤에 성욕이라는 것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충족할 수 없는 즐거움이 없다면 인간은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남아야 할까.

<퍼펙트 센스>는 감각이 하나 하나 사라질 때마다 나타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두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세상의 종말이 찾아왔다는 절망과 파괴, 그리고 또 하나는 어떻게든 최대한 남아 있는 감각을 이용해 삶을 유지하려 하는 방향(물론 오감은 욕망의 전제이기 전에 모든 생명체의 안전을 위한 도구이지만, 영화는 거기까지 커버하지는 않는다).

영화에선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도 사람들은 레스토랑을 찾고, 와인을 마시며 얼굴을 마주한다. 청각을 잃은 뒤에는 빠른 속도로 수화를 익힌 사람들이 대화를 나누고, 라이브 바에서는 밴드가 음악을 연주한다. 청중들은 공기의 진동을 통해 음악을 느끼려 애쓴다.

마스크 착용이 강제되는 사회. 격리. 강제 수용. 텅빈 거리. 11년 전 영화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팬데믹 시대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는 영화. 초기 개발 단계의 제목은 ‘The last word’였다고 한다. 그리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는 그 단어다. 흥미로운 설정을 100% 활용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영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대사,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And life goes on)’으로 대변되는 낙관이 강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만약 이런 세상도 올 수 있다면 코로나 따위가 대체 무슨 문제일까.

그런 의미에서는 매우 용기를 주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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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 비해 책읽기에 소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연말. 책 한권을 봐도 필요한 부분만 보게 되고, 책보다 자료를 더 많이 보게 된 나날. 그래도 기를 쓰고 읽었다(?). 그중 참 좋았다고 생각되는 책을 꼽아 보니 12. 10권을 안 지키면 누가 따질 것도 아니니 그냥 소개

(드라마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2021년에 출간된 책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습니다. 몇년도에 나왔든 2021년에 내가 읽은 책 중에 선정.)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조법종)

1884년 미 해군 소속 조지 포크 중위의 한반도 남부 여행기 번역과 그 해설. 한국을 좋아하고, 특히 개화파와 친분이 두터웠던 포크 중위는 한국에 대한 더 깊은 이해(물론 미 해군의 이해가 더 중요한 목적이었겠지만) 전라도와 경상도 여행을 떠났는데, 바로 그 개화파 인사들은 포크의 여행 도중에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이역만리에서 정변에 휩싸인 우리의 포크는 어찌 될 것인가…. 정도의 스릴 넘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여러모로 신기한 이야기. 이사벨라 비숍 여사와는 확실히 관점이 다르다.

넷플릭스 시대의 글쓰기 (패멀라 더글러스)

한마디로 요약하면 미국에서 드라마가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메인 작가 혹은 쇼러너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아주 자세한 해설서. 초판은 21세기 초에 나왔고 원제도 넷플릭스와는 1도 관련 없지만, 최신판에서는 넷플릭스 이후의 사례를 많이 소개했으니 저 제목도 아주 틀린 건 아님. 관심있으면 유용.

버터 (유즈키 아사코)

소설. 살인자로 몰린 여자와 그 여자와 인터뷰를 하고 싶은 여자. 음식에 관심이 넘치는 여자와 음식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여자. 두 여자의 세계는 과연 만날까. 같은 여자라는 면에서 대동단결, 의기투합할 수 있을까. 그렇게 쉽지는 않은 두 세계를 녹은 버터가 연결한다.

공기의 연구 (야마모토 시치헤이)

일본에서공기라는 말은 한국에서 많이 쓰는분위기라는 말과 매우 유사하지만 그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대체 그럼 그 공기란 뭔가? 부제인일본을 움직이는 힘이라는 말에서도 읽을 수 있듯 그공기의 무게는 한국인이 느끼는분위기의 무게와 비할 바가 아니다. 심지어 야마토 호를 마지막으로 출전시킨 결정은 아무도 명령하지 않았다는 무시무시한 비유까지. 상당히 흥미롭다.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센델)

너무나 유명한 책인데 유명한 분들이 TV에서 이 책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앞부분 100페이지 이상 안 읽었구나’, 혹은 이 책을 소개한 신문 기사 이상은 안 읽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는 책. 특히 한국 보수 언론이나 보수 계열 정치인들이 이 책을 인용해 가며 이야기를 하는 건 누가 봐도 자충수인데, 그게 자충수인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은 걸 보면 한국이 신기한 나라인지도. 어쩌면 유명 정치인 가운데 그나마 이 책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건 이준석 하나 뿐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여러분이 읽기 전에 생각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다. 훨씬 더 급진적인 책. 개인적으로 매우 공감.

혁명의 맛 (가쓰미 요이치)

맛으로 읽는 중국 현대사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청조가 망하고, 황제를 위해 봉사하던 고도의 음식문화가 민간으로 퍼져나오며 형성되었던 20세기 초반의 화려한 북경 요리 씬은 중일전쟁과 혁명기를 거치며 파괴되어가지만 오히려 고위 공산당원들이 미식을 원하면서 다시 살아난다. 일본인의 눈으로 본 20세기 중국의 음식 문화와 그 변화에 대한 이색적인 책. 다른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묘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1 (손정목)

1953. 전쟁이 끝난 수도 서울. 어떻게 도시를 새롭게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긴 책. 어디까지를 서울로 할 것인가, 워커힐이라는 호텔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한강과남서울의 관계 등등지금의 일상을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참 낯선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담겨 있다. 해를 넘겨 이 책 시리즈는 모두 읽어보고 싶다.

 

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일본 문학 사상 3대 천재니 5대 천재니 하는 리스트에 자주 등장하는 낯선 작가. 천재라는 이름에 관대한 일본 문학계라는 점에서 그리 큰 기대는 없었지만 읽어 보고 매우 놀랐다. 창작의 뿌리를 고전에 두고 있어 제2의 아쿠다카와라는 말을 듣는지도. 번역된 작품 수가 매우 적어 아쉬움. 소년시절을 식민지 조선에서 보내 <범 사냥>같은 작품을 쓸 수 있었다.

 

디즈니만이 하는 것 (로버트 아이거)

이미 세계 최고의 미디어기업 중 하나였던 디즈니가 ABC, 픽사, 마블을 품에 넣고 진정 최강의 자리를 굳히는 과정을 지켜본 밥 아이거가 책을 썼길래 정말 디즈니만이 갖고 있는 뭔가 비밀스러운 프로세스가 담겨 있지 않나 했나. 알고보니 어떤 유능한 직장인의 고군분투기. 그래도 충분히 재미있고, 인사이트도 넘친다. ‘창의력은 과학이 아니다같은 인사이트 넘치는 말씀도 많이 하심.

 

제비뽑기 (셜리 잭슨)

영미권 사람들에게 줄거리를 얘기해주면 108,9어 나 그 얘기 아는데라고 한다는 유명 단편 제비뽑기가 실린 셜리 잭슨의 단편집. ‘제비뽑기의 섬뜩함과 함께 지극히 예민하고, 지극히 치밀한 글쓰기가 사람을 잡아 끈다. 벗어나기 힘든 악마적 매력.

 

40일간의 남미일주 (최민석)

작년 연초. 뭔가 약간 우울하던 무렵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책. 남미의 절경과 재미를 만끽하는 와중에 끝없이 이어지는 작가의 실수담과 후회. 탄식. 자학이 눈물없이 볼 수 없는 큰 웃음을 던진다. 특히 아르헨티나-브라질로 이어지는 신발 에피소드는…. 작가님. 장염일 때는 제발 맥주를 그만 드세요.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김영민)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이야기’, 애니메이션 월E의 뚱보 인간들, 제바스티안 브란트의 바보배’,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이 생각난다. 인간의 욕망이란, ‘욕심이 있어야 인생이 있고, 인생이 있어야 욕심이 있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책.

 

이밖에 2021년에 본 책 중 추천하고 싶은 책들은:

 

한국의 국보 (이광표)

1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전하영 외)

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신명직)

진짜 프랑스(스페인)는 시골에 있다 (문정훈)

오늘부터 클래식 (김호정)

아무튼 떡볶이 (요조)

배빵빵 일본 식탐여행 (다카기 나오코)

 

자, 마지막으로 이 책을 빠뜨리면 안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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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필버그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1)를 보고 나서 너무나 당연한 수순으로 1961년 판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극장에서는 몇몇 장면을 빼면 거의 똑같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고 나니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차이가 났다.

2. 아무래도 가장 큰 차이는 극의 핵심인 ‘1961, 뉴욕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백인과 푸에르토리코 출신 청소년들의 갈등에 대한 해석이다. ‘당시의 이 문제는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이슈였지만 지금 보기엔 60년 전의 과거다. 1961판에서 제트파는 샤크파에 비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우월하다. 심지어 경찰도 노골적으로 제트파의 편을 든다. 그때는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2021년에 만들어진 이야기는 제트파나 샤크파나 모두 곧 개발되어 없어질 지역(이미 영화 도입부에서 링컨 센터 건설을 위한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의 추방이 예정된 난민들이다. 2021판의 제트파에게 경찰은 노골적으로 "똑똑한 사람들은 다 빠져나갔는데 너희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그렇지 못한 탓에 너희는 여기 살게 된 것"이라고 비웃는다.

이건 누가 봐도 21세기의 주제인 양극화와 젠트리피케이션의 시각이다. 개발은 부자들의 편의에 의해 이뤄지고, 그들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너희의 형편이 나쁜 것은 다 쟤들 때문이라는 식으로 하층민들의 갈등을 부추긴다. 쟤들에는 때로 전라도 홍어가 들어가기도 하고 다문화, ‘멕시코 이민’, ‘예멘 난민이 들어가기도 한다. 극의 주제가 되는 갈등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가 더욱 강조된다.

3. 사실 흑인들이 집중적으로 부각되기는 했지만 미국이라는 이민자의 나라에서 인종, 혹은 민족간 차별은 미국을 건설한영국 식민지의 후손들, 즉 필그림 파더스의 직계 후손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인종집단들이 겪어야 했던 일이다. 영화로만 봐도 <갱스 오브 뉴욕>에서는 남북전쟁 시절까지도 같은 백인들끼리 먼저 온 쪽이 나중 온 쪽을 차별하는 광경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백인 중에서도 유럽 출신들 중 아일랜드나 이탈리아계 이민들에 대한 묘한 차별은 뿌리가 깊다. 1947년작인 그레고리 펙 주연 <신사협정 Gentleman's Agreement>을 보면 그 시절까지만 해도 유태인들이 미국 주류 사회에서 얼마나 배척받는 집단이었는지 참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세월이 흐르며 어느 정도 희석되어 과거의 유산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하지만 트럼프 시대,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자는 시도 덕분에 미국의 보통 사람들사이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못 사는 이웃들에 대한 편견이 여전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리메이크는 스필버그의 오랜 꿈이었다고 하지만, 아마도 마음을 굳힌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까 싶다. 어느 시대나 외부로부터 유입된 인종 집단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것은 그 사회의 하층민들일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줄어드는 일자리의 경쟁자들이 되기 때문이다. “왜 안 그래도 없이 사는 힘든 사람들끼리 서로 미워하게 만드나.” 이게 2021판의 핵심 메시지로 읽힌다.

아, 물론 이 영화가 근본적으로 러브 스토리라는 건 바닥에 깔고 하는 얘기다.

 

3. 스필버그는 대단한 용기를 낸 셈이다. 레너드 번스타인(작곡), 스티브 손드하임(작사), 제롬 로빈스(안무), 로버트 와이즈(감독)라는 불멸의 라인업이 만들어 낸 역사적인 작품을 리메이크한다는 것은 제아무리 스필버그라고 해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일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일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어느 것이 더 리메이크하기 힘든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대답하기 쉽지 않은 일이었을 듯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스필버그는 원작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았다. 2021년판의 모든 캐릭터는 1961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소다 가게 주인인 중늙은이 닥이 여자로 바뀐 것 외에 주요 인물들은 모두 그대로. 아이스의 비중이 거의 사라지고 치노가 중요한 캐릭터가 되었지만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아울러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신들이 대폭 축소됐는데, 이건 이 관계가 궁금하면 1961년판을 참고하세요라고 해석하면 될 것 같다. 2021판은 누가 뭐래도 1961판의 연장선상에서 존재하고, 1961판에 대한 대단히 긴 프로모션 영상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 원형이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하지? 궁금하면 1961판을 봐라는 식의.

물론 이런 시각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특히 1961판을 전설로만 생각해온 세대에게 2021판은 새로운 해석이 아닌 독자적 텍스트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분들, 2021판을 오리지널로 접하게 된 분들의 생각이 매우 궁금하다. 그냥 지루한 옛날식 뮤지컬일 수도 있을테니.

4. 이런 젊은 세대를 포함해서 2021판에 대한 만족도는 누가 봐도 추억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같다. 관객의 입장에서 본다면 2021판은 ‘Maria’, ‘Tonght’, ‘Somewhere’ 같은 클래식 넘버들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개인적으로 ‘Mambo’ 씬에서 울컥 하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극장이라는 게 있어 줘서 정말 고맙다는 생각도). 

아마도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매우 중요한 국가 문화 유산인 미국 관객들에겐 그런 생생한 추억이 큰 힘을 발휘하겠지만, 그 밖의 나라 사람들에겐 매우 개인차가 클 수밖에 없겠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다른 영화들처럼 추천/비추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 같다.

볼 사람들은 이미 알아서 보러 가고 있을 것이고, 별로 당기지 않는 이들은 괜히 호평에 눈이 멀어 보러 갔다가 아 지루해하고 나올 수밖에 없을 듯. 그러니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당신은 이 영화가 당신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 이미 알고 있다. 혹시 완성도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만듦새는 감히 누가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원작의 틀 안에서.

개인적으로 레이첼 지글러 캐스팅은 10,00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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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 (1936.12.19 - 2019.12.09) 

김우중 회장 별세를 맞아 기억나는 단편들.

아마도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류에서 본 이야기인듯. 고인은 먹을 것을 놓고 깨작거리는 사람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고인은 한창 일할 때 만나야 할 사람이 워낙 많아 점심 약속도 2부제로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점심을 두번 먹어도 두번 모두 맛있게 음식을 싹 먹어치웠다는 얘기다. 만약 수행하는 사람 중에 그걸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내가 점심 두번을 감당 못 하면 무슨 큰 일을 하겠느냐”고 못마땅했다는.

또 하나는 장거리 비행에서 피로를 이기기 위해 바닥에서 잤다는 이야기. 통상 2-4-2나 3-4-3으로 배열되어 있는 항공기의 뒤쪽 4열 좌석 바닥에 모포를 깔고, 길게 누워 자면서 날아가는 걸 대우 직원들은 '회장님 방식'이라고 불렀다는 전언이다. 요즘처럼 국제선도 꽉꽉 차는 세상엔 쉽지 않은 방법이겠지만, 어쨌든 이 이야기는 김우중쯤 되는 인물도 이코노미 타고 출장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물론 회장 된 다음에도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기업인으로서 그분의 성취나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감히 뭐라 말할만큼 알지 못한다. 다만 21세기에도 우즈베키스탄에서 대우 브랜드가 여전히 큰 인기더라는 것, 이란에서는 지금도 대우라는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 등을 들었을 때 상당히 아쉽기는 했다. 한때 ‘받아도 잘 안 찌그러지는 차’의 대명사로 불렸던 대우 로열 시리즈도 생각나고. 어쩌면 대북사업에서도 현대보다 대우가 먼저 큰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이야기일 터.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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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의 영화 열 편을 고르기는 여느 때보다 훨씬 힘들었습니다. 일단 2020년에 이어 극장에 몇번 가지 않았던 게 가장 큰 이유였고, 개봉 편수 역시 적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대작’의 숫자도 적었고, 매년 즐거움을 주던 마블도 <인피니티 워> 이후의 작품들은 개인적으로 매우 실망입니다. 

아무튼 극장 개봉, OTT 개봉을 구분하지 않고 꼽아 봤습니다. 똑같이 OTT로 공개했을 때 50분 3부작 드라마와 150분짜리 영화는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같은 질문은 학계로 넘기고, 쪼개지 않고 한 편으로 된 작품은 영화로 분류합니다. 그렇게 10편.

아, 매년 똑같지만 이 리스트의 기준은 언제 제작되어 언제 개봉됐냐가 아니라, 제가 본 시기에 따라 가른 것입니다. 2018년, 2019년 제작 영화라도 제가 2021년에 봤으면 이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2011년, 1958년작도 좋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이 정도는 적당히 뺐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노매드랜드
홈리스와 하우스리스는 과연 어떤 차이가 있을까. 흠잡을 데 없이 잘 만든 영화지만 어쩐지 너무나 비현실적인 건 아닌가 싶은 구석이 있다. 이것은 클로이 자오 감독의 의도일까, 아니면 젊음에서 오는 치기인가. 

노매드 랜드, 유목 생활은 과연 낭만적일까 (tistory.com)

 

노매드 랜드, 유목 생활은 과연 낭만적일까

“엄마가 그러는데 선생님이 홈리스(homeless)래요.” “아니. 나는 하우스리스(houseless)야. 그건 다른 거야.” 홈리스와 하우스리스는 어떻게 다를까. 전자가 세상에 의해 강요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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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디슈
분명히 더 많은 이야기를 찍어 두었을 것 같은데, 만들어진 영화는 그 나머지를 그냥 상상에 맡긴다. 힘을 주다 만 느낌이 아쉽긴 하지만 담담한 진행이 나쁘지 않다. 어쨌든, 북한이고 남한이고, 극한 상황에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배려. 

자산어보
서로를 인정하는 좋은 스승과 제자도 모든 의견이 일치할 수는 없다. 서로 애정을 가진 두 사람이 갈린 의견 때문에 헤어졌다가 이견을 극복하는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잘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 어려움을 극복한 놀라운 영화. 
자산어보, 두 형제의 세계가 만났던 시대 (tistory.com)

 

자산어보, 두 형제의 세계가 만났던 시대

<자산어보>의 감동을 느끼며 나오는 길. 객석에 관객은 10명이 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극장보다 안전한 곳도 많지 않을텐데(관객이 입을 벌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팝콘도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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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미싱 영 우먼
한 젊은 남자에게 한 젊은 여자가 ‘당했을 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이를 이런 일로….’라고 말하는 것은 한국에만 있는 일인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다소 과장된 톤이지만, 그 과장 덕분에 영화는 평이함을 넘어서는 힘을 갖는다. <크라운>의 카밀라이자 <킬링 이브>의 작가 중 한명인 에메랄드 페넬 감독의 차기작이 궁금해지는 영화. 


스타 파워와 스타 감독. 아낌없는 물량. 우주공간에서 펼쳐지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라 부르고 싶은 아름다운 대작. 2021년 단 하나의 영화만 골라 보라는 질문에도, 2022년 23년에 가장 속편이 기대되는 영화를 고르라고 해도 <듄> 이외의 다른 답을 할 수는 없을 듯.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tistory.com)

 

듄, 21세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

소설 <듄> 시리즈를 단 1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듄> 파트1은 2시간 반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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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룩 업
머저리들만 나오는 아담 맥케이의 <석세션>에는 매우 실망했지만 어떻게 머저리들에 의해 몇 안되는 현자들의 목소리가 묻혀 가는가를 보여준 <돈 룩 업>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와 그 무리를 희화화하는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그 문제를 전 지구적인 공감대를 갖도록 풀어 낸 것은 맥케이와 초특급 배우들의 힘. (사실은 저 아래의 <헌트>와 함께 봐야 균형이 맞는 영화다)

돈룩업, 인류의 대동단결이란 가능한가 (tistory.com)

 

돈룩업, 인류의 대동단결이란 가능한가

몇해에 한번씩 그해의 히트작을 겨냥해 '내 아이디어', 혹은 '(아무도 모르는)내 작품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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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코로나 수혜작인가? 이런 작은 목소리에도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한 점에서라면 반드시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자전적인 이야기가 갖고 있는 담담하면서도 솔직함이 이 영화의 힘. 이런 식의 이야기는 반드시 그 뒷얘기가 궁금하지 않아도 좋다.


소울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 그런데 픽사라는 세계 최강의 크리에이터집단은 어떻게 매번 세계인의 기대를 넘어서는 작품들을 내놓을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이야기지만 그걸 음악과 재능과 인생에 대한 한 폭의 그럴 듯한 우화로 엮어낸 솜씨에는 찬사를 아낄 수 없다.

 

찬실이는 복도많지
늦게 본 게 미안했던 영화. 개인적으로 주변의 지인들이 자꾸 겹쳐지는 것이 이 영화에 대해 지나친 호평을 하게 된 게기가 아닐까 자기검증도 해 보게 되지만, 어느 순간엔가 주인공 찬실이를 응원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불가사의한 매력이 쭉쭉 뿜어나온다. 강말금, 김영민, 두 배우의 열연과 김초희 감독의 힘.

찬실이는 복도 많지 (tistory.com)

 

찬실이는 복도 많지

1. <찬실이는 복도많지>의 강말금이 신인여우상 6관왕을 차지한 2021년 2월에야 이 영화를 보고 뒷북으로 한마디 하려니 좀 찔린다. 하지만 아직도 본 사람보다는 안 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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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헌트
<돈 룩 업>이 트럼프와 그 무리를 조소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더 헌트>는 힐러리 클린턴과 민주당 지지세력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입으로만 정의를 부르짖고,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척 하지만 돈벌이 욕심은 결코 뒤지지 않는 자들을 겨냥한 칼날이 제법 매섭다. 신나는 칼춤 한 판.

헌트, 트럼프는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 (tistory.com)

 

헌트, 트럼프는 어떻게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었나

1. 뒷북. <헌트>는 인간 사냥에 대한 영화다. 소수의 부자들이 자신들만의 사냥터에 영문을 모르는 몇몇을 납치해다 풀어 놓고 잔혹한 사냥놀이를 진행한다. 이미 많이 써 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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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
씨스피러시
이쯤해서 한번 거론을 하지 않으면 안될듯한 다큐멘터리 한 편. 우리가 바다에 버리는 PET 병이 자구를 망친다고? 그렇게 해서 생긴 쓰레기 섬이 해양 생태계를 교란시킨다고? 만약 그게 아니라면? 바다와 인간, 해양 생물과 인류의 생존에 대한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 만약 ‘어업’ 자체가 문제라면 당신은 어쩔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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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찬실이는 복도많지>의 강말금이 신인여우상 6관왕을 차지한 2021년 2월에야 이 영화를 보고 뒷북으로 한마디 하려니 좀 찔린다. 하지만 아직도 본 사람보다는 안 본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을테니 한마디. 미리 말하면, 이 영화를 보면서 세 번 이상 크게 웃지 않는 사람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 

2. 줄거리. 영화 프로듀서 이찬실(강말금)은 같이 일하던 감독이 급사하는 바람에(죽음의 원인이 나오는데, 미리 얘기하지만 굉장히 어이없다) 일자리를 잃고 산동네 단칸방으로 이사하게 된다. 막상 한번 꺾이고 나니 마땅히 일을 주는 사람도, 그렇다고 영화를 떠나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 인생 왜 이 모양인가 싶고 마침 눈이 가는 남자도 나타나는데 과연 어찌 될지. 

3. 적잖은 나이. 모아둔 돈도 마땅히 장래가 보장된 일자리도 없는 찬실이 이야기인데 영화 분위기는 어둡지 않다. 영화계란 특정 직종이 문제가 아니라, 서른 넘고 마흔 넘어서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어’라고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영화. 영화 속에서도 찬실이의 팔자는 전혀 풀리지 않는데도, 영화가 끝날 때 쯤에는 <찬실이가 운이 좋다>는 제목이 그리 엉뚱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4. 여자 감독들이 여자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들은 그 감독과 주인공이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은데, 강말금이라는 배우의 발견이 어찌 보면 이 감독의 행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윤승아, 김영민 같은 배우들도 이 영화에서 유난히 생기가 넘치는 걸 보면 ‘감독의 역량이 빛난다’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5. 내친 김에 <산나물처녀>까지 보고 나니 때로 어이없게까지 느껴지는 감독의 유머감각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윤곽이 잡힌다(내 취향이다).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6. 우디 앨런 주연의 <카사블랑카여 다시 한번 Play it again, Sam>에는 험프리 보가트가 나오고, 토니 스코트의 <트루 로맨스>에 엘비스가 나온다면 이 영화에는 장국영이 나온다. 끝. (혹시 이런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가 더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이 두편밖에 생각이 안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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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뒷북. <헌트>는 인간 사냥에 대한 영화다. 소수의 부자들이 자신들만의 사냥터에 영문을 모르는 몇몇을 납치해다 풀어 놓고 잔혹한 사냥놀이를 진행한다. 이미 많이 써 먹은, 그렇지만 흥미로운 소재다. 그런데 반골기질이 넘치는 크레이그 조벨 감독은 이런 소재로 <사우스 파크> 실사판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너무 늦게 본 걸 후회한다. 

2. 인류애, 공감, 연민, 박애, 평등과 같은 덕목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중받아온 가치이긴 하지만, 오늘날처럼 사회 전반으로부터 인정받게 된 것은 사실 길게 잡아 봐야 100년도 되지 않았다. 어쨌든 많은 사람들은 젠더, 동성애자, 외국인 근로자, 기타 사회적 약자들도 이런 가치들을 제대로 누릴 수 있도록 정서적 배려와 자원의 분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대개 '진보적인 가치'라고 여겨 왔다. 

3. 각 국가와 환경에 따라 진보/보수의 경계가 다르고, 쟁점도 당연히 다르지만, 전통적으로 '약자에 대한 배려'가 진보적인 가치로 여겨진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보니 일반적으로 '보수=부를 독점하고 있는 부자들' '진보=착취당하는 민중의 깡마른 대변자'라는 식의 등식이 성립해왔는데, 21세기 들어 상황은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해석할 수 없게 점점 더 복잡해져가고 있다. 한국도 포함해서. 

4. 이를테면 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는 '돈 많고 잘난척하는 진보적 엘리트 놈들'에게 '못 배우고 보수적인 촌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한 사건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 쪽이 선이고 다른 쪽은 악이라는 식의 구분은 이미 무의미. 즉 <헌트>에서 보듯 배운 것들이 이렇게 타락하고 오만했으니 트럼프 같은 대통령이 나온 것도 놀랍지 않다는 설명인 셈이다.


5. 영화 <헌트>에서 인간 사냥을 하는 쪽은 힐러리 클린턴 지지자 쪽, 당하는 쪽은 트럼프 지지자 쪽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양쪽을 바라보는 시선도 공평하다. 한 쪽에선 '너희같이 무식하고 생각없는 것들은 이렇게 당해 봐야 해' 라고 하고, 반대 쪽에선 바로 '매일 인권과 공정성, 심지어 동물권까지 외치는 것들이 왜 이렇게 위선적이냐' 고 야단을 친다. 모두까기의 끝판왕이랄까. 

6. <사우스파크>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피가 좀 나와서 그렇지 영화 <헌트>는 심하게 웃긴다. 보는 내내 폭소가 터진다. 가장 기억나는 장면(대사)들: 

"그리고 기후변화는 진짜야!" 

"아프로 아메리칸, 이제 다시 블랙이라고 불러도 된대." "누가 그래?" "NPR(미국 공영 라디오)에서." "그거 백인 남성들이 만드는 거잖아." 

"기모노? 그거 문화도용(appropriation)인거 알아?" 

"(설마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을 네가 읽었단 말이야?" 

"캐비어 좋아해요?" "아뇨. 먹어본적 없어요. 규정상 전 못먹게 되어 있어요." "앉아요. 이제 먹어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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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의 감동을 느끼며 나오는 길. 객석에 관객은 10명이 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극장보다 안전한 곳도 많지 않을텐데(관객이 입을 벌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팝콘도 안 파는데). 뭣보다 이런 영화는 극장에서들 좀 봐줘야 하는데. 

1. 아시다시피 <자산어보>는 정약용 4형제중 둘째이며 흑산도로귀양가서 해양어류 연구서 '자산어보'를 집필한 정약전의 이야기다.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도에서 지식욕과 출세욕이 가득한 젊은이 창대를 만나고, 지루하기만 했을법한 유배생활은 창대 때문에 다채로워진다. 

2. 정약전(설경구)과 창대(변요한)는 실존인물. 물론 창대가 서자인지 상놈인지, 아비가 나주의 부유한 홍어상인인지는 알 수 없다(이런 캐릭터는 제작진의 창작). 

3. 영화의 시작은 정조 승하 1년 뒤인 1801년. 교과서에 '삼정의 문란'이라고 표현됐던 지방 행정의 부패와 타락은 극에 달했고, 뜻 있는 엘리트라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리 없는 시대였다. 

4.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영화는 여기서 <목민심서>의 길과 <자산어보>의 길을 나눈다. 기존 성리학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시스템을 운영하는 인간 개개인의 윤리적 각성이 시스템 붕괴를 막으려 하는 쪽과, 시스템 자체의 교체 없는 부분적 수리는 이미 한계 극복의 수단이 아니니 좀 더 극단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쪽이다. 이 영화의 고민을 읽어냈다면, 그 다음엔 과연 조선이 외세의 개입으로 망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올라야 정상이다. 

5. 이준익 감독의 영화답게 함축적인 대사가 폐부를 찌른다. 영화 시작과 함께 나오는 "벼슬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버티는 것"에서 "질문이 바로 공부지! 외우는 공부만 하다가 나라가 이꼴이 됐는데!" 까지. (그런데 이것은 바로 <차이나는 클라스>의 모토가 아닌가!!) 

6. 영상미는 수묵화를 보는 듯 경이롭고, 배우들의 연기는 착착 붙는다. 특히 '가거댁' 이정은의 캐스팅은 신의 한수. 결론은 꼭 보시라. 극장에서. 스크린의 마법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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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그러는데 선생님이 홈리스(homeless)래요.”
“아니. 나는 하우스리스(houseless)야. 그건 다른 거야.” 

홈리스와 하우스리스는 어떻게 다를까. 전자가 세상에 의해 강요된 ‘집 없는 사람’이라면 후자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길 위의 삶을 선택한 것이란 뜻일까.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프란시스 맥도먼드)은 산업 구조의 변화로 도시 하나가 없어지다시피 하는 날벼락을 맞아 낡은 밴 한 대가 전 재산인 처지가 됐다. 그 밴에 몸을 싣고 돈벌이를 따라, 날씨를 따라, 때로는 친구를 따라 미국의 대평원을 이리 저리 달리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현대의 유목민이다. 

유목이라는 말은 낭만적으로 들린다.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몸이 가볍다. 돈이며 명예며 권력이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쫓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어디든 마음에 드는 곳에 몸을 누이고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한 일망무제 하늘 아래서 잠을 청한다…. 

하지만 실제론 그렇기만 할 리가 없다. 쉴새없이 날씨와 굶주림, 폭력과 야만, 질병과 부상을 겁내야 하는 것이 유목 생활의 본질이다.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이나 예술은 유목민에겐 사치다. 비록 그 무대가 12세기의 유라시아 평원이 아니라 21세기 미국이라 해도 그렇다. 디지털 노매드라는 새로운 인류에 대한 보고도 있었지만, 펀은 그런 계열도 아니다. 전화기는 그저 통신수단일 뿐인 올드 스쿨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클로이 자오의 <노매드랜드>는 비록 아름답지만 필요 이상 판타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안에서 펀은 꽤 행복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어쨌든 좋은 친구들도 만나고, 별다른 위협에 부딪히지도 않는다. 문명의 혜택으로 유목민 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위생상태도 좋고, 무엇보다 노동으로 먹고 살 수 있게 건강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펀의 모습은 참 많은 ‘만약에’를 떠올리게 한다. 만약 치과에 갈 일이 생기면. 만약 교통사고가 나면. 만약 누군가로부터 습격을 당하면. 영화에도 나오지만 펀에게 차 수리비를 빌릴 누군가가 없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현재도 미국에는 이렇게 스스로 유목생활을 선택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현실 가운데서 ‘집 앞에 요트를 사 놓고 한번도 타 보지 못한 채 죽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자오의 메시지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지.

그럼 자오는 <노매드랜드> 관객이 무엇을 느끼길 바랐을까. 이미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으니 새로운 삶의 방법에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 어떤 삶에든 아름다움은 있다? 아름다운 음악과 영상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인생 후반에 대한 어떤 인사이트를 얻을 수는 없었다. 노인들이 많이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젊은이의 영화'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런 의미에서 클로이 자오는 참 용감하고, 훌륭하다). 

갑자기 서글퍼졌다. 이런 아름다운 영화를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기엔 너무 늙어버린 것인가. 영화를 보면서도 노파심이 앞서가니. 젠장. 

P.S. 맥도먼드의 연기력을 칭찬하는 건 이미 수달의 수영 솜씨에 감탄하는 거나 마찬가지. 그런데 이 영화에서의 모습은 <쓰리 빌보드>나 드라마 <올리브 키터리지>와 사뭇 비슷하면서도 인물의 감수성 면에서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한다.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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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듄> 시리즈를 단 1페이지도 읽어보지 않은 관객 입장에서 말하자면, 드니 빌뇌브의 <듄> 파트1은 2시간 반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걱정은 기우. IMAX 예매는 실패했는데 암튼 꼭 극장에서 보시길.

1만몇년이라는 연도(서기인가?). 우주제국의 귀족들이 행성 하나씩을 자신의 영지로 갖추고 군림하는 시대. 명망있는 아트레이데스 공작 가문이 우주에서 가장 비싼 물질인 환각제 '스파이스'의 산지 아라키스 행성을 관리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개인적으로 드니 빌뇌브의 가장 큰 강점은,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으나, '차분한 진지함'이라고 생각한다. 잔혹한 이야기든 황당무계한 이야기든, 스토리텔러가 이 정도로 진지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빌뇌브의 영화들은 일단 보기 시작하면 그 성실한 완벽주의에 끌려 주의를 기울이게 되고, 그러다 어느 순간 한눈을 팔 수 없게 되어버린다. 

우주를 무대로 한 판타지의 영역에서도 그런 성실성은 빛을 발한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연상시키는 비주얼은 한스 짐머의 음악과 함께 가히 압도적이다(사실 스토리도 앞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유사해질 기미가 보인다. 모두가 탐내는 자원이 풍부한 사막의 나라. 그들을 장악하려는 악의 제국. 외부의 간섭을 싫어하는 용감무쌍한 토착민. 이들을 도와 나라를 일으키겠다는 파란 눈의 백인 전사...).

우주전함은 광선포를 쏘고 있는데 전사들은 검(광선검 아님)으로 승부를 겨루고 있는 기이한 상황도, 빌뇌브의 손을 거치면 그럴싸한 긴장을 유발한다. 어느 순간 설득당하고 마는 진지한 친구 같달까. 



티모데 살라메의 여린 몸매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남주를 연상시키는 듯 나름 성공적. 하지만 배우 중 파트1에서 가장 인상적인 배우는 레베카 퍼거슨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연성이 다소 부족한 캐릭터의 약점이 퍼거슨 덕분에 보완되는 느낌이다. 퍼거슨의 캐스팅으로 인해 제시카-폴 간엔 모자간답지 않은 묘한 긴장감이 생긴 건 감독의 의도적인 캐스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 개봉이 다소 늦었지만 그 시점에 이미 해외 개봉(미국 기준임)만으로도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어 버렸다. 이제 관건은 빌뇌브가 몇 편까지 감독을 맡는냐 하는 문제.

이 영화가 '파트 1'이 된 것은 6권으로 된 시리즈 중 1권의 파트1이라는 뜻이다. 현재 빌뇌브는 1권을 2편으로 나눠 만들고, 2권을 3편으로 하는 트릴로지를 구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트릴로지가 성공하면 소설 3권 이후도 죽 시리즈로 나올 수 있겠단 생각이 드는데, 과연 빌뇌브가 계속 붙어 있을지 모르겠다.

마블 외에도 기다려 가며 볼만한 시리즈가 나왔다는 점에서 매우 기쁘다. 그런데... 한 2023년에는 볼 수 있는건가. 

P.S. 워낙 방대한 원작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일각에선 세계관을 공부하고 가야 하네 말들이 많던데,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를 재미있게 봤던 사람이라면 관람에 아무 무리 없을 듯. 

P.S.2. 1984년작인 데이비드 린치의 <듄>(국내 비디오 출시명은 <사구>)은 왕년에 보기는 했으나 혀를 끌끌 차며 잠들어버렸다. 기억나는 건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과 거대한 샌드웜 뿐. 문득 이 <사구>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서극의 <촉산>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기억도 난다. 둘 다 좋아하는 사람은 멀리 하고 싶었던 기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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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에 한번씩 그해의 히트작을 겨냥해 '내 아이디어', 혹은 '(아무도 모르는)내 작품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곤 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시기에 우연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는 걸 믿으란 말이냐'고 주장하는데, 드라마 신인작가 공모전 채점을 한번이라도 해 본 사람이라면 안다. 세상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혜성이 지구를 삼킬 거라는 영화가 거의 동시에 두편 나온 적이 있었다. 찾아보니 그게 벌써 1998년.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이었다. 

<돈 룩 업>이 지금까지의 범 지구적 재난 영화들과 철저하게 다른 점은 인류의 단결에 대한 냉소다. 지금껏, 최소한 영화 속에서 세계 각국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외계인의 침공, 혜성, 괴수, 질병, 기후위기에 일치 단결해 맞서 왔다. 이런 영화들 중 절대 다수가 할리우드 산이었던 만큼, 미국 대통령이 그 선두에 서서 엄청난 명 연설로 인류의 단합을 촉구하는 장면이 빠지지 않았다. 또 지난 50여년간 만약 그런 재난이 닥친다면, 웬만하면 미국 대통령이 그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을만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2021년. 아담 맥케이(<돈 룩 업>의 감독이다. 혹시 모르실까봐)는 과연 지금도 그런가 묻는다. 1998년이든 2021년이든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건만 어째 '미국 대통령이 지구 대통령'이라고 인정하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최악의 대통령이 코로나라는 최악의 시기에 집권하는 바람에? 

물론 이 이유도 크지만, 설사 트럼프가 당선되지 않았었다고 해도, 이미 '미래를 위한 인류의 단합' 자체가 그리 공감가지 않는 이슈가 되어 버린지 좀 된다. 코로나 이전에도 기후 이변, 지구 온난화에 대한 각국 정부의 태도는 인류의 공동 대응이란 것이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줘 왔다. 전문가들은 인류의 멸종을 가져올 수도 있는 대대적인 생태계 파괴와 생물다양성의 소멸이 금세기 안에 일어날 거라고 경고의 소리를 낮추지 않고 있지만, 어떤 국가도, 어떤 기업도 자신들의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지구 내부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런데 과연 혜성이라면 다를까? 그것이 바로 <돈 룩 업>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세계다. 

물론 이런 아이디어 자체에 대해선 칭찬을 아끼고 싶지 읺지만, 과연 이 아이디어의 구현을 위해 메릴 스트립,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제니퍼 로렌스, 케이트 블랜칫, 티모시 살라메, 조나 힐 같은 엄청난 출연진이 필요했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데(솔직히 좀 낭비다 ㅎ), 반대로 저 배우들이 모두 '정상적인 출연료'를 모두 챙겨 받았다면 이 작품이 7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완성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디카프리오가 이 영화로 얼마를 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운동에 기부한 누적 금액은 1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 작품 출연의 동기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본다.) 

초반은 지나친 코미디 설정으로, 중반은 그리 진행에 도움되지 않는 요소의 남용으로 잠시 지루해지기도 하지만 마지막 20분은 걸작의 일부로 손색이 없다. 떠나려던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엔딩이다. (그리고 쿠키도!) 

P.S. 그리고... 이 영화를 보다가 내가 뭘 놓쳤나 싶은 분들은 다시보기를 통해 지난주 <차이나는 클라스-인생수업> 최재천 교수님 편을 찾아 보시길 권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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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태곳적부터 있었던 거라고 쉽게 생각해버리곤 한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냉장고나 스마트폰을 사용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만 그보다는 좀 덜 선명한 요소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도 솥뚜껑에 삼겹살을 구워 먹었을 거라든가, 조선시대에도 "역시 한우가 맛있네" 같은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분들은 <양식의 양식>을 보시길 권장한다.

 2. 또 그 얘기냐고 하실 분들을 위해 신속하게 주제 전환. 오늘 얘기는 프로 스포츠의 기원에 대한 거다. 축구의 발상지 영국에서 FA컵이라는게 있는 시절이라면 당연히 밥먹고 축구만 하는 선수, 그러니까 프로 선수가 있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19세기 말까지 오히려 '돈을 받고 축구하는 선수'가 있는 팀은 출전정지를 먹는 게 룰이었다.

 3. 이유는 당연히 '스포츠맨십을 해치는 부도덕한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 스포츠란 건강과 여가를 위한 것이니 돈에 팔린 선수는 그 순수함을 해치는 존재라는 논리다. 직장인 야구적인 사고방식.

 4. 이런 논리는 축구라는 스포츠가 어떻게 정립된 것인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아무렇게나 모이면 공을 차던 시절, 그러니까 축구나 팩차기나 별 차이 없던 시절에 이튼과 해로우 등 영국의 유명 보딩 스쿨 축구인들이 모여 공식 룰을 만들었다. 대주분 귀족 출신인 동호인들이 축구를 '소유' 했기때문에 엄격한 아마추어리즘이 축구의 본질이 된 것이다.

 5. 그런 시대, <더 잉글리시 게임>에서 최초의 프로 축구선수가 된 퍼거스 수터(블랙번 로버스)는 말한다. "만약 그 규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같은 노동 계급 선수는 당신들처럼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을 영원히 축구로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우리 노동자들은 따로 연습할 시간도 체력도 없습니다."

 (정말 똑똑한 자본가들은 이 대목에서 ', 축구라도 져 주는게 장기적으로 더 좋은 전략이 될 수 있겠구나! 입장료 수입이 얼마지?'라고 느꼈을 터.)

6. 그런 면에서 이 드라마는 당시의 사회상에서 축구라는 것이 어떻게 귀족들의 여가에서 노동계급의 엔터테인먼트로 변해가는지를 이해하게 해 주는 너무나 훌륭한 교과서 역할을 한다. 이것은 축구판 <양식의 양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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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플레이크드 Flaked>를 조금씩 쪼개 시즌 2까지 봤다. 미친듯이 정주행한 건 아니고 시간날때마다 곶감 빼먹듯 계속 보고 있었다. 낄낄대며.

주인공 이름은 칩. 그럭저럭 관리가 된 40대 싱글 남자. 전 장인(전처의 아버지) 소유 건물에서 전혀 장사가 되지 않는 가구점 운영. 세 안냄. 친구 데니스 어머니 소유 주택 본채(?)에 얹혀 생활. 역시 세 안냄. 인생에 대한 대단한 철학이 있는 척 하기 위해 핸드폰도 운전면허도 없이 산다. 한마디로 보기에 멀쩡한 빈대. 왜 제대로 된 뭔가를 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에는 답이 엄청나게 길어진다. 

특기는 순간적인 멋진 척, 생각있어 보이는 척, 상처 많이 받은 척, 그리고 얄팍한 거짓말을 이용한 임기응변. 실상을 알고 보면 도대체 긍정적인 면이라곤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워낙 뛰어난 사회적 위장막 덕에 사람들에게 은근히 인기있는 편이다. 특히 그를 무슨 롤모델인 양 떠받드는 남자 후배들(?)이 적지 않다.

한마디로 자아는 비대하지만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객관적 인식은 유아 수준인 중년 남성이 주인공이다. 이 두가지가 종특이라는 중년 한남으로서, 보고 있으면 누군가 옆에서 바늘로 심장을 콕콕 찌르는 듯한, 매저키스틱한 쾌감이 일품이다. 그런 면에서 아저씨의 세계를 필요 이상으로 미화했던 <나의 아저씨>와는 우주 정 반대에 위치한 작품이랄까. 어쩌면 홍상수 영화를 영어로 보는 듯한 느낌도 있다.

대체 왜 제목이 flaked일까. '너무 얄팍해서 속이 뻔히 보일 듯한 캐릭터' 때문일까도 했는데 한국어로는 뭐라 번역하면 좋을까. 들통난? 뽀록난? 드라마 좀 보다 보다 뻔하지 않은 드라마 찾는 분들께 추천. 이런 엉망진창 개차반인 캐릭터가 주인공인 드라마에 다른 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으실지도 궁금.  

#자신있는사람만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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