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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후에도 한참을 못 보고 있다가 드디어 봄.

페이스북에나 몇줄 쓰려다 너무 길어져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이리로 가져왔습니다. 중간에 반말 존댓말 왔다갔다 하는데 귀찮아서 그냥 올립니다. 나중에 시간 나면 다듬을 수도.


사실 이 영화는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퀸 노래를 많이 들려주면서, 그 사이 사이에 스토리를 배치하느냐를 고민한 영상물, 즉 초장편 뮤직비디오에 해당하는 영화이므로 영화 자체의 만듦새에 대해서는 많은 분들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할 얘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내용이 사실이라고 곧이곧대로 믿을 분들이 아무래도 80% 이상이라는 점에서, 왜 줄거리가 이렇게 짜여졌는지가 좀 의아해집니다.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가 영화 제작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앨범 출시가 퀸의 분열 내지는 심각한 갈등으로 비화했다는, 별로 믿어지지 않는 스토리가 왜 영화의 축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더라는 것이죠.

아마도 제작진의 설득에 메이와 테일러가 '수긍'을 한 쪽으로 진행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이하 내용은 스포일러일수도 있으니 그만 보실 분은 여기서 그만 두시길.>

 

0. 잠시 영화 진행 리마인드. 매니저 중 하나가 "CBS에서 400만 달러에 솔로 앨범을 내라는 제안이 들어왔다"며 프레디 머큐리의 귀에 속닥질을 하고, 여기 솔깃한 머큐리가 솔로 앨범을 내겠다고 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른 멤버들은 "너는 퀸을 죽였어!" "어떻게 상의도 없이!" 하고 흥분하고 등을 돌리고, 상심한 머큐리는 더욱 매니저의 말만 들으면서 앨범 작업만 하고, 심지어 매니저는 라이브 에이드에 나가라는 말 조차도 차단해서 알려주지 않고, 결국 전 애인인 메리가 나타나서 모든 걸 알려주기 전까지 머큐리와 다른 멤버들의 갈등은 깊어지기만 하고.... 그래서 반성한 머큐리가 친구들에게 사과하고 다시 라이브 에이드 무대에 서고... 이런 스토리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1. 퀸 멤버 중 솔로 앨범을 낸 건 머큐리 혼자만이 아니고, 심지어 머큐리가 첫 솔로 앨범 'Mr. Bad Guy' 를 내기 전 로저 테일러는 이미 두 장의 솔로 앨범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밴드 전체의 음악성과 별개의 '자기 음악 세계 실현'은 퀸 뿐만 아니라 많은 밴드에서 이뤄진 관행. 그러니 머큐리가 솔로 앨범을 낸다고 해서 다른 멤버들이 "어떻게 니가 그럴수가!"라고 분개하는 건 좀 이상한 일. 신해철이나 김종서처럼 밴드를 버리고 아예 솔로 가수로 새 길을 걸은 것도 아니고.

2. 라이브 에이드가 85.7.15의 일이니 영화상으로 표현된 심각한 갈등과 머큐리의 고립은 85년 상반기의 일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85년 상반기 퀸은 84년 앨범 Works의 홍보를 위한 전 세계 순회공연 Works Tour를 진행중이었더군요. 84년 8월 시작된 이 공연은 85.5.15 일본 오사카에서 끝났습니다.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시간이래야 고작 2개월.  즉 실제로는 매일 같이 먹고 자고 비행기타고 다음 공연장으로 이동해서 다시 공연하고 먹고 자고 파티하고 하고 있을 시절인데 영화 속에서는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어딘가 따로 떨어져서 남남처럼 지내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영화와 현실의 시간표는 완전히 어긋나기 시작>

3. MR. BAD GUY 앨범은 83년부터 녹음을 시작해 85.4.29 발매.

그러니까 머큐리가 이 시점에 솔로 음반 발매를 털어놓고, 갈등을 빚고, 멤버들과 소원해지고, 라이브 에이드라는 것이 열리는 지도 모르고, 화해하고, 다시 라이브 에이드에서 멋진 공연을 펼친다는 건 몽창 지어낸 이야기. 갈등이 있었다면 The Works 앨범을 녹음하기 이전의 일일테니 83년 쯤인데, 이미 그 갈등을 극복하고 Works 앨범을 내고, 같이 전 세계 투어도 다니고 한 다음에 올 85년의 라이브 에이드에다 이 갈등을 갖다 붙였으니 이건 실제 역사와는 영 딴판.

4. 라이브 에이드를 앞둔 화해(?)의 조건이 '앞으로 모든 노래를 니 노래 내 노래 하지 말고 모두 퀸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수익분배도 1/4로 하자'는 것이었다고 나오는데, 그래서 그 화해(?)의 산물로 나온 86년 앨범 'A KInd of Magic'에서 첫곡 One Vision은 작곡자가 'Queen'이지만, 타이틀 트랙인 A Kind of Magic은 '로저 테일러 작곡'이라고 되어 있음.

한마디로 이 역시 실제와는 영 딴판인 얘기.

5. 퀸이나 핑크 플로이드가 위대한 점 중 하나는 10만명씩을 수용할 수 있는 웸블리 구장 같은 초대형 공연장에서, 어디서 들어도 훌륭한 음향 배치를 독자적인 기술로 실현할 수 있었다는 점(어딘가 인터뷰를 보면 브라이언 메이가 이걸 매우 자랑스럽게 얘기하는게 나온다). 그런 퀸이 '라이브 에이드에 나와' 라는 요청을 받으면 '거기는 음향 시스템을 어떻게 해놨대? 드럼 세트도 하나 갖고 다 돌려가며 써야 한다는데?' 라는 점에서라도 참여를 주저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무튼 그래서 라이브 에이드는 끝까지 참가를 망설인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

6. 아무튼 현실과 영화의 괴리는 이런데, 영화 시나리오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사전에 몰랐을 리 없는 퀸 멤버들이 왜 이런 요상한 갈등설(?)을 영화에 넣는데 반대하지 않았을까가 매우 의문입니다. "...미안해, 그때는 말 못했지만 사실 네가 솔로 앨범 내는게 우리는 너무 싫었어. 우리도 내지 않았냐고? 너는 너고 우리는 우리잖아." 뭐 이런 게 진실이었을지?

아울러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 테일러의 입장: "그래, 영화 속에서 우리는 파티도 싫어하고 난잡하게 여자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싫어하고,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게 최고였어. 응. 그냥 그렇게 믿어 줘. 우리는 살아 있고, 마누라들이 이 영화를 보고 있잖아. 이제 늙어서 갈 데도 없어. 받아 줄 데도 없고. 그러니까 나쁜 건 다 네가 가지고 가. 프레디. 사랑해." 뭐 이런 것이었는지도.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든 몇가지 생각. 

<아셔도 그만, 모르셔도 그만.>

 
1. 머큐리가 내놓은 문제의 솔로 앨범 Mr. Bad Guy 수록곡 중 영화에 나오는 곡은 단 한 곡, 바로 타이틀 트랙인 Mr. Bad Guy 입니다.

머큐리가 폐인(?)이 되어 가며 '다들 좋다는 얘기만 하는' 녹음실에서 솔로 앨범 작업을 하는 동안 뿜빰뿜빰뿜빰하는 전주가 잠시 흘러 나옵니다. (아주 오래 전, 서울음반의 상징인 녹색 껍질이 씌워진 카세트 테이프로 열심히 듣고 다녔죠. 곡들의 면면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당시 음악 좀 듣는다는 친구들은 모두 이 음반을 싫어했습니다. 하긴, 이 친구들은 퀸의 Works 앨범도 인정하지 않았죠.^^)

2. 사실 이 앨범에서 현재 가장 유명한 곡은 거의 모든 사람이 그냥 '퀸의 노래'라고 알고 있는 I was born to love you. 이 곡은 나중에 퀸의 다른 멤버들이 반주를 다시 녹음해 머큐리 사후 발매 앨범인 Made in Heaven에 슬쩍(그것도 처음엔 일본 발매분에만! ) 끼워 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찾아 들어 보시면 반주가 두가지. 머큐리 솔로 앨범 버전은 전자악기 중심의 약간 저렴한 듯한 반주고 퀸 리메이크 버전은 처음에 천둥소리가 나면서 메이의 기타 사운드가 울려퍼집니다. 아무튼 뭔가 께름칙한 부분이 있었는지, 웬만한 히트곡은 다 들어 있는 퀸의 그레이티스트 히츠 1, 2, 3 앨범에도 이 곡은 들어 있지 않지요.

(그러니 앞으로 '프레디 머큐리의 솔로 곡'이라고 족보를 제대로 찾아 주기 바람.)

3. Mr. Bad Guy 전주가 잠시 나오는 것 외에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밴드의 곡은 아마도 Dire Straits의 Sultans of Swing 이 유일한 듯. 라이브 에이드 무대에 서기 전, 퀸이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이 곡의 일부가 잠시 들립니다. Dire Straits는 퀸의 바로 앞은 아니고 앞의 앞 순서죠.


(그런데 이런 것까지 정확하게 재현한 이 영화에서 왜 스토리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상.

 

그런데 다시 생각해 봐도, 이 영화에서 스토리가 솔직히 뭐가 중요하겠어. 노래가 주인공이고, 노래가 열일 다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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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한국 영화 최고 흥행작이었던 '신과 함께 - 죄와 벌'의 속편 '신과함께 2: 인과 연'이 개봉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신과 함께'의 흥행 열풍이 갖는 의미를 물어보곤 합니다. 물론 흔히 거론되는 의미만 해도 이미 여러가지입니다. 우선 한국영화 최초로 대작 2편을 동시에 제작했다는 점이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식한 용감한^^ 기획입니다. '신과 함께'가 흥행 초대박을 기록하면서 1편만으로 두 편 모두의 순익분기점을 넘기는 쾌거가 이뤄졌지만, 만약 1편이 흥행에서 쓴 맛을 봤다면 2편은 아예... 상상하기도 싫은 대재앙이죠. 또 '판타지=마법사, 요정, 드라곤이 등장하는 서구풍 이야기' 라는 등식을 깨고, 한국 고유의 설정을 기반으로 최초의 본격 판타지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점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뭣보다 웹툰 원작의 폭발력을 입증한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밖에, 얼마전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두 가지 면에서 가장 큰 의미를 갖는다고 얘기했습니다.

첫째. '수출용 상품으로 적절한 한국 영화는 어떤 것일까'라는 질문에 가장 충실한 답을 제시했다는 점입니다. 근래 한국의 대형 흥행작들을 살펴 볼 때, 철저하게 한국 로컬 관객들을 노린 '한국형 블럭버스터'들이 주류를 이뤘다는 점이 특징으로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한국 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대표적입니다. '1987'이나 '택시운전사'가 대표적이고, 흥행 참사를 기록하긴 했지만 '군함도'도 개봉 직전까지 '실패할 수 없는 영화'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누구나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듯, 일단 소재면에서 철저하게 한국 관객들의 취향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해외 진출에서는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낳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 '신과 함께'는 누가 봐도 훨씬 문화적 장벽을 넘기 쉬운 작품입니다. 예를 들어 '신과 함께' 1편의 모자간 정서 같은 것은 지극히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전 인류에게 어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죠. 그 밖에도 '신과 함께'를 보는데 한국 현대사나 정치 구도에 대한 선이해, 혹은 큰 관심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런 보편성이야말로 '신과 함께' 프랜차이즈의 큰 특징이라 하겠습니다.

둘째는 한국 영화 시장에서 의외로 천대(?) 받아온 가족영화의 성공입니다. 한국 영화 제작자들에게 왜 가족영화, 즉 패밀리 무비를 만들지 않느냐고 물으면 어떤 제작자들은 약간 모욕을 받은 표정을 짓곤 합니다. "내가 그 따위 영화나 만들 사람으로 보이냐"는 속내인 것이죠. 이런 제작자들에게 있어 '가족영화'란 '유치한 저예산 영화'와 거의 동의어로 느껴지는 듯 합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많은 제작자들은 아직도 '한 시대를 관통하는 뜨거운 메시지를 담아 성인 관객들을 격동시키는' 작품들을 선호합니다. 사회성 강한 영화와 폭력물, 메시지가 강한 사극 등이 주로 한국 영화에서 흥행이 잘 되는 장르로 여겨지는 것도 한 몫을 하겠죠.

그런데 굳이 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역대 할리우드 영화 흥행 순위를 보면 상위권에는 PG, 혹은 PG-13 등급의 가족 관람을 겨냥한 영화, 즉 패밀리 무비들이 압도적입니다. 왕좌의 게임, 쥬라기공원, 해리 포터, 스타워즈 시리즈를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결과죠. 특히 여름/겨울 방학 시즌을 노리는 영화라면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패밀리 무비의 수요는 압도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영화 역대 흥행 순위 1위인 '명량'이 동원한 1700만명의 관객 중에도 부모님과 함께 온 초등학생들의 수가 만만찮게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무공의 위업을 다룬 영화'의 교육적인 효과 때문에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등급을 무시하고 자녀들을 데리고 극장을 찾은 부모님들이 적지 않았으니까요.

물론 '신과 함께' 이전에도 12세 관람가 판정을 받은 흥행 대작으로 '국제시장'을 들 수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 이 영화 역시 지금 이 글에서 의미하는 패밀리 무비를 겨냥한 작품은 아닙니다. ('그때 그 시절, 굳세게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 라는 이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를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 가능합니다^^.) 반면 '신과 함께'는 개봉 직후부터 '자녀들과 함께 관람하기 좋은 한국영화 대작'임을 대대적으로 알린 작품이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속편들을 통해 한국 영화 사상 처음으로 '가족 영화 프랜차이즈 블럭버스터'를 만들었다고 평가할 만 합니다.

요약하면

1. 최근 한국 흥행작 가운데 드물게 해외 시장에서 수출용 상품으로 가치를 가진 영화다. 

2. 어른들도 흔쾌히 함께 볼 수 있는 온 가족용 프랜차이즈라는 새 시장을 개척했다. 

..도입부가 너무 길었군요. 2부는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48번째 귀인인 자홍(차태현. 2부엔 안 나옵니다)의 재판을 성공적으로 마친 세 차사 강림(하정우) 해원맥(주지훈) 덕춘(김향기) 앞에 또 하나의 귀인 수홍(김동욱)이 등장합니다. 자홍의 동생 수홍이 49번째 귀인이므로, 수홍까지 환생시키면 세 차사 역시 천년의 의무에서 풀려나 환생할 수 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순간입니다.

하지만 수홍의 정당한 재판을 요구하는 세 차사에게 염라대왕(이정재)은 두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당연히) 49일 안에 수홍의 재판을 모두 마칠 것. 그리고 지상에서 많은 차사들을 괴롭혀 온 성주신(마동석)을 제압하고 허춘삼(남일우) 노인을 저승으로 데려오라는 것.

하지만 성주신은 전투력이라면 절대 남부럽지 않았던 해원맥을 한방에 무릎꿀립니다. 게다가 성주신은 "너희 죽을 때 내가 저승사자였는데... 나 기억 안 나냐?"는 충격적인 말까지 던집니다. 과거를 잊은 해원맥과 덕춘은 큰 충격을 받죠. 아울러 수홍은 자신을 지옥 재판정으로 인도하는 강림에게 끈질기게 캐묻습니다. "대체 왜 내 재판에 이렇게 집착하는 거지? 내 재판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거 아냐?"

그렇게 해서 '신과 함께2'는 해원맥과 덕춘이 어떻게 저승사자가 됐는지, 그리고 성주신과 허춘삼 노인은 어떻게 되는지, 전편에 이어 등장하는 염라대왕과 강림은 대체 무슨 사연인지 세 갈래의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사실 수홍은 1편에서만큼 중요한 활약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엔딩에서 그가 뭔가 더 큰 빅 픽처의 일부였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알려지면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참 많아 조심스럽네요. 게다가 뒤집은 32의 등장은 정말이지... ^^]

1편이 자홍의 죽음, 망자가 저승에서 겪어야 할 재판의 과정, 한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 등을 보여주며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큰 주제에 도달하는 다소 단순한 흐름이라면, 2편에서는 지상과 저승의 이야기가 비틀리고 꼬이며 비슷한 비중으로 흘러갑니다. 특히 2편에서는 성주신-해원맥-덕춘 라인과 강림-수홍-염라 라인이 팽팽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논리적인 얼개도 1편보다는 2편이 더 탄탄합니다.

게다가 1편에 없었던 철학적인 질문이 2편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현세에서 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이 죽음, 즉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는 죄를 지을 수 없도록 강제로 차단하는 것'이라면 이미 죽음을 맞은 이후인 저승에서 죄인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큰 형벌은 무엇일까요?

말을 바꿔 보면, 만약 이승에서의 삶이 끝난 뒤 저승에서도 한 인격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면, 그래서 그 인격이 소멸되지 않고 존재를 이어간다면, 영원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 존재를 가장 괴롭게 할 형벌은 무엇일까요? 불구덩이? 얼음 벌판? 매일 날아와 심장을 파 먹는 독수리? '신과 함께 2'는 한 인간을 천년 동안 괴롭힐 수 있는 신선한 방안을 제시합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인간으로부터 레테 여신의 선물을 빼앗는다는 것인데요, 그게 어떤 것인지는 직접 영화를 보시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  

1편에 비해 2편의 가장 큰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주지훈의 매력 발산입니다. 1편에서도 나름 멋졌던 해원맥은 2편에서 고려 최강의 무사, 여진족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흰 삵' 으로 변신해 여심을 강타합니다. '뇌는 없고 행동력만 최강인' 현재의 해원맥에 비해, '흰 삵' 버전의 주지훈은 쓸쓸한 눈빛의 츤데레 검객,  즉 고전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여기에 예고편 2초 등장 만으로도 2편에 대한 흥미를 100포인트 이상 상승시켰던 마동석의 근육미(?)도 열일을 합니다. 마동석 표 코미디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면 조금 아쉬울 수도 있지만, 아무튼 마동석은 만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듯한 모습으로 열연을 펼칩니다. 마동석이 아니라면 누가 했어도 '이렇게 적절할 수' 없는 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구성을 통해 '신과 함께 2'는 전편에 비해 손색 없는 거대한 엔터테인먼트의 도가니에 관객을 집어던집니다. 개인적으로는 1편의 강렬한 결정타 - 많은 지식인들이 '신파'라고 짜증스러워했던 -가 2편에는 없고, 전반부 수홍의 발걸음이 좀 무겁다는 점에서 2편보다는 1편이 더 가슴에 와 닿지만(개취입니다)이미 1편을 보신 분들은 2편에 올라타지 않을 재간이 없겠죠. 뭣보다 2편을 보시면 다시 3편을 기다리게 될 겁니다. 벌써 2편은 개봉일 역대 최다 관객 기록을 세웠군요.

1편도 그랬지만 '신과 함께' 시리즈의 관람이란 행위는 전통적인 영화 관람이라기보다는 롤러코스터 탑승에 비교하고 싶습니다. 그 흐름에 저항하면 턱이 아프고, 어깨가 아프고, 두통이 올 수도 있습니다. 저 새까만 곳에서 떨어지는 청룡열차에, 독수리요새에 몸을 맡기고 그 아찔함을 즐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원해집니다.

P.S. 그런데 이미 나오기로 했다는 3편은 언제쯤 개봉? 아무래도 내년 여름은 힘들겠죠? (염라는 알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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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어느 한 순간, 정재승 교수님의 신작 '열두 발자국'을 읽다가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따끈따끈한 신간이죠.

제목대로 총 12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일곱번째 발자국, 즉 '창의적인 사람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에는 여러분들이 어디선가 익히 보셨을 유명한 그림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이 그림입니다.

네. 많이 보시던 그림이죠.

살바도르 달리 의 1951년작,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 입니다.

(책과 제목을 다르게 쓴 이유가 있습니다. 조금 더 보시면 알게 됩니다.^^)

컬러로 보시면 이런 그림입니다.

 '열두 발자국'에서는 이 그림을 창의적 발상을 설명하는 예로 들고 있습니다.

지금도 '십자가를 그려 보라'고 하면 세상 사람들 중 열에 아홉은 우리가 많이 보던, 정면에서 보는 십자가와 거기 매달린 예수님을 그릴 겁니다. 화가들의 그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십자가와 예수를 그린 수만장의 그림 가운데 99% 이상은 아마 정면에서 본 예수님의 모습일겁니다.

그런 면에서 이 그림은 혁신적인 구도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니. 그렇다면 이 구도는 하나님의 시선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 높은 곳에서,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을 형상화 한 듯한 구도인 것이죠.

상당수 해석자들은 이 구도가 바로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답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게 아니고, 이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아니지만, 어제 처음으로 이 그림의 제목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Christ of Saint John of the Cross. 묘한 제목입니다. 한글로는 뭐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 망설이게 됩니다. 그래서 대체 저게 무슨 뜻인가 검색해 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다짜고짜 영어로 세인트 존(St. John), 즉 성 요한 이라고 하면 1차적으로 복음서의 저자인 사도 요한 을,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세례 요한 을 떠올리게 됩니다. 물론 요한이라는 이름은 성경시대나 지금이나 넘쳐 나기 때문에 '성 요한'은 한두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저 그림 제목에 나오는 성 요한은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듣도 보도 못했다는 것은 제 기준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저 그림 제목에 나오는 성 요한은 바로 이 스케치를 남긴 사람의 이름이고, 카톨릭에서는 매우 유명한 성자였습니다. 이 분의 이름은 바로 '십자가의 성 요한 Saint John of the Cross' 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님이 저 스케치를 남긴 것은 대략 1574~1577년 정도로 추정되며, 그 당시에도 '아니, 예수님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다니!'라는 시선은 대단히 충격적으로 여겨졌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십자가의 성 요한' 님의 유물이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소중한 보물로 간직되어 왔고, 어느날 저 스케치를 본 살바도르 달리가 저 구도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의 유명한 십자가 그림을 남긴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그 유명한 '십자가의 성 요한' 님입니다. 여러 정보를 종합해 보면 이 분은 1542년에 태어나 1591년에 돌아가신 스페인의 성직자입니다. 종교개혁의 물결 속에서 오랜 전통의 카톨릭 교단은 개혁의 필요성에 맞닥뜨리게 되었죠. 마침 그 이그나티우스(이냐시오) 로욜라의 예수회 학교에서 교육받은 요한님은 카톨릭 개혁의 선봉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테레사와 함께 맨발의 가르멜(Carmelite) 수도회를 일으키게 되고... 뭐 다양한 업적을 남기시고 카톨릭 교회의 성인에 오른 분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분은 왜 '십자가의 요한 John of the Cross'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일까요? 혹시 저 유명한 '위에서 내려다 본 예수' 스케치 때문에? 이 궁금증은 쉽게 풀리지 않았지만, 최소한 그것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 일단 밝혀졌습니다. 이 분이 스스로 자신을 '십자가의 요한'이라고 불러 달라고 한 것이 1568년. 저 그림을 그리기 전의 일입니다. 그럼 혹시 십자가에 매달려서 순교라도? ...아닙니다. 이분은 단독(丹毒)에 걸려서 사망하셨습니다.

교황 베네딕트 16세가 십자가의 요한의 일생을 소개한 글 에 답이 있었습니다. (알아보면 볼수록 십자가의 요한, 대단한 분입니다.)

원문은 http://w2.vatican.va/content/benedict-xvi/en/audiences/2011/documents/hf_ben-xvi_aud_20110216.html 

For several months they worked together, sharing ideals and proposals aiming to inaugurate the first house of Discalced Carmelites as soon as possible. It was opened on 28 December 1568 at Duruelo in a remote part of the Province of Avila.

This first reformed male community consisted of John and three companions. In renewing their religious profession in accordance with the primitive Rule, each of the four took a new name: it was from this time that John called himself “of the Cross”, as he came to be known subsequently throughout the world.

그러니까 무슨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 그냥 '순수했던 원시 기독교의 믿음으로 돌아가자'는 마음에서 스스로를 '십자가의 요한'이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 분이 모셨던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 역시 스스로 '예수의 테레사 Teresa of Jesus' 라고 불렸다니, '십자가의 요한'과 손발이 척 맞는 작명이네요.

결론적으로 저 그림의 제목은 한글로 하자면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리스도'라야 할 것 같습니다. 한글에 밝은 사람들에겐 뭔가 어색한 제목이지만, 저 제목이 붙은 이유를 생각하면 그렇게 부를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여기까지 쓰고 나서 다시 한번 후회되는 것은...

남들은 12회나 기념비적인 명강의를 해서 이런 책까지 쓰고 있는데 너는 지금 이 시간에 블로그에 이런 글이나 쓰고 혼자 씩 웃고 있다니 이게 참 할 말이냐... 라는 자괴감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포스팅도 이 글을 누가 읽고 공감해 주리라는 기대보다는, 대체 저 그림 제목은 무슨 뜻일까,,, 를 알아내는 데 쓴 시간이 아까워서, 그냥 기록이라도 남겨 두자는 차원인 것이죠. 예. 맞습니다.)

그런데(읭?) '열두 발자국'은 참 읽으면 읽을 수록 대단한 책입니다.

대체 뭐 하자는 짓이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구글 어스를 개발한 존 행크 가 이걸 어디다 써먹을까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 결국 만들어 낸 것이 바로 포켓몬 고 였다는 대목에서는 절로 무릎을 탁 쳤습니다. 아톰과 비트의 결합이라는 말이 정말 실감나는 대목입니다. 얼마전 "만약 아인슈타인에게 자동차 운전자가 길을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하라는 프로젝트를 줬다면 결코 상대성 이론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글을 읽고 그게 그렇구나 싶었는데, 이 이야기와 묶어 보니 이런 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무용(無用)의 대용(大用) 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또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려면 빅 데이터가 필수적인데 한국은 빅 데이터는 커녕 데이터 자체가 없다... 이 역시 평소 생각했던 문제지만 이 책에서 읽고 보니 더욱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모두 거짓말을 한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공허함의 뿌리와, 그동안 빅데이터라는 이름을 걸고 혹세무민을 시도했던 몇몇 분들의 얼굴이 새삼 스쳐가는. (왜 그런지는 책에서 확인하시는 걸로.)

아무튼 '결정장애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개인적으로 매우 친숙한^^) '우리는 왜 미신에 빠져드는가'에서 '혁명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까지 읽고 보면, 과연 한 사람이 이 방대한 내용을 다 건드릴 수 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경이적인 사고와 지식의 스펙트럼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저기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술은 안 드시지만) 이 분을 보고 있으면 혹시 이미 집안에 대필 인공지능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곤 합니다. 대략 1.4KG 내외, 누구나 비슷비슷한 크기의 뇌인데 어디서 이런 차이가.

(지금 막 뭐라고 항변하시려는 분들을 위해 이 책에는 '얼굴이 크다고 뇌가 큰 것은 아니다'라는 방어벽이 쳐져 있습니다. 네. 철벽이죠.)

조금 이상한 내용으로 시작하긴 했지만, 결론적으로 이 책, 생각의 자극이 필요하신 분들-아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중 거의 대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만-에게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P.S. 그리고 이런 책은 가능하면 남들보다 빨리 읽으시는게 절대적으로 유리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써먹고 싶어지는 이야기가 그득하거든요. 어젯밤 술자리에서 상무님을 감탄하게 했던 김대리 의 구라가 이 책에 나오는 얘기라는 걸 오늘 알고 나면 얼마나 분통이 터지시겠어요. 그러니까...

 

 

P.S.2. 그리고 마지막으로 퀴즈 하나.

이 글을 읽는 동안 저는 줄곧 이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번째로 정답을 맞추시는 분에게는 제가 맛난 밥 한끼 정도 사겠습니다. 응모는 여기 쓰시든, 페북에 댓글로 다시든, 트위터에 다시든 알아서. (넌센스 아님. 의외로 쉬울지도...) 노파심에서 단서 하나 달자면, '음반 관계자' 관련은 답이 아닙니다.

키워드 몇개를 조합하시는 것이 포인트.

그리고 상품으로 방금 나온 '차이나는 클라스' 1권 단행본도 추가하겠습니다. (어차피 이 책도 따로 리뷰가 있을 겁니다.)

자, 분발하세요.^^

 

 

** 요즘 나오는 '열두 발자국'에는 본문의 내용이 수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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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영화가 끝나 갈 무렵, 이 영화, '쓰리 빌보드' 의 악영향에 대해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꽤 적지 않은 수의 시나리오 작가 혹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키보드를 던져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플롯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건 진정 신의 축복이기란 생각이 들기 마련입니다. 그 정도로 '쓰리 빌보드'는 대략 근 5년간 본 영화들 가운데 최소한 대본에서만큼은 최고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영화 시작. 

 

살인사건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미국 남부의 어느 조용한 읍내. 한 여자가 그 시골에서도 외진 길 쪽에 있는 다 쓰러져가는 광고판 세 개를 사서 광고를 냅니다. 광고의 내용은,

 

RAPED WHILE DYING

내 딸이 강간당해 죽었어.

 

AND STILL NO ARRESTS?

그런데 아직 아무도 체포하지 못했다고?

 

HOW COME, CHIEF WILLOUGHBY?

윌로비 서장,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가출한 10대 딸이 강간당해 죽고, 불에 타다 만 시신이 발견되고, 그 뒤로 7개월이 지났는데 아무도 체포하지 못하고 있는 경찰의 무능에 대한 어머니의 분노가 이렇게 표현됩니다.

 

이 부분까지 보고 나면 관객의 90%는 영화의 방향을 짐작합니다. 이것은 딸을 잃고 분노에 가득 찬 백인 하층민 엄마의 외로운 싸움을 그린 사회성 영화로구나. 이 엄마는 결국 무능하고 나태한 시골 경찰을 질타하고, 어디선가 론 레인저 한 사람이 나타나고, 이 영웅(혹은 반영웅)은 대다수 사람들의 외면 속에 엄마를 도와 딸의 원혼을 달래 줄 수 있....

 

라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지극히 정상입니다. 정상일 뿐만 아니라 매우 우수한 관객입니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를 계속해서 본다면 당신의 그 모든 예측이 이렇게 벗어날 수 있다는 데 진정 놀라게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분이 있다면, 지금 바로 키보드 앞에 앉아서 샘솟는 아이디어로 바로 대본을 쓰시기 바랍니다. 정말입니다. 한국의 영화계/드라마 업계는 바로 당신 같은 분을 찾고 있습니다.)

 

사실 글 첫머리에서는 이 작품으로 인해 좌절할 작가 지망생들에 대해서만 썼지만, 반대로 한 두 작품 해 보고 아 난 안 되는구나 하신 분들에게도 이 영화는 좋은 자극이 될 수 있습니다. 각본/감독을 겸한 마틴 맥도나의 이전 작품들을 보면 이런 수준의 작품을 써 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작 중 제가 본 작품은 '킬러들의 도시(In Bruge)' 하나 뿐인데, 일부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본상으로 별로 뛰어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맥도나 감독의 세번째 장편영화 시나리오입니다. 최소한 세 번은 써 봐야 하실 이유가 또 생긴 셈입니다.  

 

자꾸 다른 얘기로 빠지지만, 이 영화의 리뷰를 쓰면서 줄거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건 별 의미가 없을 듯 합니다. 이 대목에서 할 말은 딱 한마디. 지금 바로 극장으로 달려가세요. 언제 상영관이 없어질지 모릅니다. 다음주까지... 물론 국산이든 외산이든 흥행용 대작 영화가 없는 3월이긴 하지만, 한국의 극장 상황에선 낙관할 수 없습니다.

 

아무튼 지금부터는 스포일러 작렬입니다. 영화를 보실 분은 여기서 나가 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중심 인물은 세 사람. 간판에도 언급된 시골 읍내 경찰서장인 윌로비(우디 해럴슨), 문제의 엄마인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먼드), 그리고 윌로비의 부하인 꼴통 경찰관 딕슨(샘 록웰)입니다.

 

 

 

세 사람 중 아마도 전통적인 주인공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윌로비 서장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꽤 자주 등장하는 미국 소규모 지역사회의 영웅이죠. 굳이 고전 영화로 비교하자면 '앵무새 죽이기'의 아티커스 핀치 변호사(그레고리 펙이 연기하는)같은 인물입니다. 정의감이 투철한데다 두뇌가 명석하고, 딕슨 같은 개망나니도 따르게 하는 이상적인 인간에 가깝습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도 그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로서도 밀드레드 딸의 강간 살인 사건은 난제입니다. 수사를 하려 해도 증거도 증인도 없습니다. 시체에서 남자의 DNA가 검출되긴 했지만 비교할 용의자가 없는 실정입니다. 

 

반면 밀드레드에겐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증거가 없다는 윌로비의 말에 왜 이 동네의 모든 남자, 나아가 전 미국의 모든 남자로부터 DNA를 추출하지 않느냐고 우겨댑니다. 자신이 중시하는 정의의 실현을 위해선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이를테면 국가 권력이 닥치는대로 민간인의 DNA를 추출할 때 벌어질 수 있는 인권 침해 같은)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매우 극단적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사람들은 생각보다 흔합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이익이 주어질 때 내놓아야 할,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편익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법입니다.

 

밀드레드의 일방통행적인 생각은, 딸을 잃은 엄마라는 당위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공감을 사지 못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밀드레드가 공격하는 윌로비 서장이 평판 좋은 인물인데다 암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밀드레드는 자신이 암에 걸려 있다는 윌로비의 말에도 "그럼 시간이 없을테니 더 서둘러 수사하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진정 비호감 캐릭터죠. 이런 밀드레드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선두에 딕슨이 있습니다.

 

 

 

물론 딕슨에겐 밀드레드에 대한 구체적인 미움 같은 것이 없습니다. 애당초 딕슨은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일찍 죽은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그의 성장 과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고, 인종주의를 비롯한 갖가지 편견도 다 어머니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그 결과 딕슨은 엄청난 효자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어머니 외에 그가 믿고 따르는 것은 윌로비 서장 뿐이고, 그 윌로비 서장에게 맞서다 결국 윌로비 서장을 죽게 하는(이건 좀 다시 얘기할 필요가 있죠) 밀드레드는 진정 용서할 수 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윌로비 스스로 밝히고 있듯, 그의 죽음은 더 지속해 봐야 고통만 더할 뿐인 암 치료의 연장을 피하기 위한 선택입니다. 광고 때문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 때문에 밀드레드를 더욱 비난할 것임을 짐작하고 있고, 그 때문에 밀드레드에게 광고판 임대료를 자신이 지불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당연히 그의 예견대로 밀드레드는 더욱 고립되지만 밀드레드는 서장의 마지막 편지를 공개하지 못합니다. 죽을 사람을, 그리고 이렇게 솔직하고 선량한 사람을 괴롭혔다는 죄책감 때문이죠.

 

이 영화는 '인간의 용서와 화해', '다른 인간의 입장에 대한 역지사지', '더불어 살기의 미묘함' 처럼 너무나 기본적인, 심지어 너무 자주 다뤄져서 하품이 날 지경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제껏 관객들이 접해 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으로 관객들을 몰아넣고 절묘한 공감의 체험을 하게 한다는 것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아울러 그 가운데서도 코미디, 특히 블랙코미디로서의 위치를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강점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 내면을 성찰하는 이야기'와 '유머 감각'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쉽게 단정해 버리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과 송강호의 개그가 절대 따로 놀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쓰리 빌보드'에서는 딕슨이 주로 이 역할을 맡습니다. "아니에요! 열두시까지 들어간다고 했다구요!" "왜? 소금은 원래 상처에 좋은 것 아닌가?" 같은 대사는 너무나 유쾌합니다. (개인적 취향이고, 그렇지 않은 분도 있겠죠.^^)

 

 

 

이 세 사람을 둘러 싼 여러 마을 사람들은 각각 이 세 사람 중 한쪽 편에 서서 갈등과 웃음을 조율합니다. 특히 '왕좌의 게임'으로 월드스타가 된 난장이 배우 피터 딘클리지가 연기하는 제임스는 몇 신 나오지 않지만 이 영화의 색깔을 대변하는 중요한 기능을 갖습니다. 그가 맡은 역할을 '낙관'이죠. 희망이라곤 없는 밀드레드에게 잠시 인생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인물입니다. 역시 같은 역할을 하는 페넬로페(사마라 위빙) 역시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위빙 Weaving 이란 이름에서 '혹시?' 하셨다면: 네. 스미스 요원님의 조카딸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정말 대단한 이야기를 봤어!'라는 생각이 들지만 누군가로부터 '대체 그 영화는 뭐에 대한 영환데?'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한 두 마디로 이 영화가 어떤 영화라는 점일 이해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어떻게 변해 가는가를 다룬 다른 위대한 영화들, 예를 들어 '타인의 삶' 같은 영화를 설명한다면 '도청이라는 수단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생을 엿보다, 그 사람의 인생에 감화되어 자신의 인생이 바뀌는 이야기' 처럼 얘기할 수 있겠지만 '쓰리 빌보드'를 이런 식으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한 어머니가 딸이 죽은 사건을 추적하다가 인생에 눈뜨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고, '서로 미워하고 갈등하던 사람들이 인간은 어떤 경우에서든 화해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이야기'라고 하면 과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너무나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이렇게 특별한 사건이랄 게 딱히 등장하지 않는데도, 놀랍도록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이 이 영화의 신비로운 요소라 할 수 있겠습니다.

 

라스트 시퀀스.

 

차 안에서 딕슨과 밀드레드는 발견된 악을 스스로 징벌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를 고민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건 오히려 덜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중요한 건 두 사람 사이에 정의에 대한 합의가 이뤄졌고, 그 둘은 이제 이 힘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서로를 지지해 주는 힘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거죠.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끝까지 인간성에 대한 낙관을 잃지 않습니다. 이 낙관이 너무 나이브하게 느껴진다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을 좋아했던 분들이라면 이런 마무리를 충분히 싫어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아, 물론 저 이 영화 굉장히 좋아합니다.)

 

맥도먼드와 록웰에게 오스카 트로피를 안긴 영화에서 배우들의 연기를 논하는 것은 시간낭비. 그 밖의 배우들도 눈부십니다. 이 화려한 연기가 맥도나 감독의 대본과 디렉션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하면 작품상, 최소한 각본상은 주어졌어야 한다는 생각이지만, 물론 상은 운이죠. 어쩌면 골든글로브 작품상을 받은게 불운의 시작...

 

 

 

 

 

P.S. 물론 가장 마음에 드는 대사는 라스트 신 직전에 나오는 밀드레드와 딕슨의 대화 = "이봐, 사실 그때 경찰서에 불 지른 건 나였어." "...그럼 당신 아니면 대체 누구겠어?" - 입니다. 아마도 오래 전, "우리 이제 끝난 걸까?"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어"('키즈 리턴') 이후 가장 훈훈한 대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P.S. 2 이 영화의 여운을 느끼며 들을 만한 노래는 아마도 이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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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과 함께'를 봤습니다.

 

2017 연말은 '강철비'-'신과 함께' - '1987'이 잇달아 개봉하는 대목입니다. 겨울방학의 시작이고 전통적으로 한국인들이 가장 영화를 많이 보는 시즌인데다 크리스마스와 1월1일이 모두 연휴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대작들이 1주일 간격으로 개봉하는 것은 좀 이례적인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방학도 긴데 이렇게 꼭꼭 붙어 개봉을 해야 하는지 약간 의문입니다.

 

그 세 작품 중 가장 먼저 '신과 함께'를 보았습니다.

 

일단 만족도는 최상. 오랜만에 훌륭한 순수 오락영화를 봤습니다.

 

흔히 오락성=상업성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떤 작품이 상업적이냐 아니냐의 기준에는 오락성 외에도 여러 조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굳이 '순수 오락 영화'라고 한 것은 정치적인 상황, 개봉 당시의 사회적 이슈 같은 외적 요인을 최대한 배제하고 영화 안에 내재하는 고유의 오락성이라는 요소에 주목할 때 매우 탄탄하고 충실한,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 만들어진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좀 지나칠 정도로 내수 전용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신과 함께'는 꽤 특이한 영화입니다. '광해', '변호인', '국제시장' '명량' 등 역대 천만 영화들, 그리고 기획 순간 바로 천만을 바라봤던 '군함도', 'VIP'같은 2017년의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의 질곡이나 독특한 정치 상황에 주목한 작품들이 상당히 많았던 점을 생각하면 제가 얘기하는 '내수 전용'이라는 말의 의미는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신과 함께'는 이런 영화들에 비해 매우 보편성을 띤 영화라 할 수 있겠습니다. 게다가 12금이라는 점도 '한국형 블록버스터'들과는 좀 다르죠.

 

아무튼 들어가는 말이 길었습니다. 그럼 줄거리.

 

(이 정도면 '출발 비디오 여행' 수준에 비쳐 볼 때 거의 스포일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스포일러가 있다고 느끼신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튼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소방관 자홍(차태현)은 위험한 화재현장에서 소녀를 구해 함께 추락합니다. 일순 소녀를 구해냈다는 안도감을 느끼지만, 자신을 데리러 온 차사 해원맥(주지훈)과 덕춘(김향기)을 보고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습니다. 어머니를 만나기 전엔 죽을 수 없다는 항변에도 불구하고 자홍(의 혼)은 저승으로 날아가고, 자홍은 거기서 차사들의 우두머리 강림(하정우)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망자들은 49일 동안 일곱 차례의 재판을 통해 이승에서 저지른 죄를 평가받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 환생할 것인지 지옥에서 세월을 보낼 것인지 결정된다는 설명을 듣습니다. 

 

(네. 천당행...은 여기선 선택지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 의인으로서의 죽음 덕분에 자홍은 귀인(貴人)으로 대접받지만 그래도 모든 인간은 살면서 생각지도 못한 죄를 짓고 사는 법이죠. 통과하는 재판마다 자홍은 조금씩 위기에 빠집니다. 그리고 차사들은 차사들대로, 천년 동안 49인의 망자를 각각 49일 안에 환생시키면 그들도 환생을 맞을 수 있다는 저승의 법에 따라 안간힘을 씁니다. 강림-해원맥-덕춘 조는 자홍에 앞서 47인의 의인을 환생시킨 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홍이 통과하면 딱 한명 남게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자홍과 세 차사의 앞에는 지옥귀들이 나타나 재판길을 방해하고, 이것이 이승에서 망자의 직계 가족이 원귀로 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강림은 이승으로 내려옵니다. 그리고 자홍의 동생 수홍(김동욱)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죽음을 당해 원귀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죠. 제대를 앞둔 육군 병장이었던 수홍의 원귀는 자신의 죽음과 관련된 관심병사 동연(도경수)의 주변을 맴돌고... 그 과정에서 자홍이 이미 15년 전 집을 나가 단 한번도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지 않았다는 놀라운 사실이 밝혀집니다.

 

대체 효성과 우애가 유난히 깊은 의인 김자홍이 어머니와 동생을 15년간 외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영화의 뒤쪽 절반을 차지하는 미스테리이고, 강력한 반전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꼭 휴지나 손수건을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특히 여자분들은 눈화장이 녹아 민망해질 수 있습니다.

 

 

 

 

앞부분, 자홍이 죽은 이유와 일곱 대왕이 지배하는 일곱 지옥의 설정, 자홍과 세 차사들의 캐릭터가 설명되는 부분은 흠 없이 매끄럽게 흘러갑니다. 사실 '신과함께'의 초기 홍보 과정에서 가장 많이 부각된 부분은 '상상을 초월하는 CG 효과로 저승의 거대한 비주얼이 표현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CG는 명불허전, 대단합니다. 자홍과 세 차사가 가는 저승길의 비주얼은 한국 영화에서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규모의 볼거리를 제공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다가 아니죠. '신과 함께' 제작진은 자칫 이런 작품의 제작진이 빠질 수 있는, '자, 이게 우리가 제공한 스펙터클이야. 어때, 멋지지?'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김용화 감독은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화려한 저승의 그래픽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메인 요리로 인물들의 디테일과 사랑받을만한 사연이 허술하지 않게 들어 찼다는 점이 '신과 함께'의 첫번째 강점입니다. 당연히 사건을 풀어 가는 메인 주인공은 하정우의 강림 역(원작의 강림도령과 변호사 진기한을 합친 캐릭터)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순무식과격한 무적의 전사 해원맥이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

 

해원맥은 차사들의 우두머리 강림도 위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강력한 전사입니다. 단 머리 쓰지 않는 일일 때만. ^^ 

 

 

 

 

그래서 해원맥은 사뭇 진지한 강림과 영화 내내 걱정이 태산인 자홍 때문에 자칫 무거워질수도 있는 영화에 웃음과 힘을 제공합니다. 아, 한국인이 좋아하는 배우 차태현의 위력 또한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정우-차태현-주지훈-김향기 라인은 이들 외에 어떤 배우를 끼워넣어도 이 이상의 효과를 내기 힘들 정도로 탄탄합니다. 여기에 딱 세 장면 등장하지만 주인공으로 착각할 정도로 존재감이 뚜렷한 이정재가 있고, 영화 시작 30분 이내에 장광 김해숙 오달수 임원희 유준상(응? 어디?) 가 쏟아져 나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물반 고기받으로 쏟아진다는 점에서 진정한 블록버스터의 향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흠을 잡자면 초반엔 자홍의 재판이 너무 안이하게 쉽게 풀려나간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지옥귀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화 '신과 함께'는 장르가 바뀝니다. 수홍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와 그 과정에서 밝혀지는 뜻밖의 이야기들이 관객을 서서히 클라이막스로 이끌어 갑니다.

 

마지막, 올해 한국 영화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한방'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기 힘듭니다.

 

이 '한방'에 대해 꽤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너무 신파다'라는 일부 평자들의 주장입니다만, 부모 자식간의 정에 대한 이야기로 관객의 심금을 건드리는 것은 어떤 영화든 선택할 수 있는 전략이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관객의 몫입니다. 이 영화에는 가족사에 관련된 강력한 최루성 코드가 있고, 저는 그 부분이 '신과 함께'라는 영화의 훌륭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네. 이 영화의 후반 30분은 관객 모두가 '우리도 알고 보면 모두 죄인임' 을 인정하게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신과 함께'가 완전무결한 영화는 아닙니다. 주인공 중 하나인 자홍의 초반 감정은 관객들이 따라가기에 다소 아슬아슬한 부분도 있고(이 역할을 연기한 것이 '한국인이 사랑하는 배우' 차태현이 아니었다면 좀 심각한 위협일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정 전자 제품에 대한 집착은 좀 지나쳐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후반부가 자아내는 거대한 공감의 크기는 그런 사소한 흠결들은 충분히 덮고 갈 수 있는 힘들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영화 본편이 끝났다 싶으면, 역대 한국 영화 사상 최강의 쿠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진심 빵 터집니다.)

 

 

 

무시무시한 싱크로...^^

 

 

 

P.S. 도경수가 연기한 캐릭터 이름 '원동연'은 이 영화의 제작사인 리얼라이즈 픽처스 원동연 대표의 이름에서 따 온 것입니다. 따라서 촬영장 분위기 충분히 상상이 갑니다. "동연아 임마! 야 이 자식아!"....

 

 

 

아무튼 도경수의 연기력은 아이돌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 한 사람의 배우로서 훌륭합니다.

 

 

 

P.S.2. 그래도 개인적으로 이 영화 때문에 가장 크게 득 볼 배우는 주지훈김동욱이라고 생각.

 

P.S.3. 이 영화가 갖는 감동의 핵심은 관객의 죄책감을 공략한다는 데 있습니다. 특정한 장면이 평소 관객들이 갖고 있던 죄책감의 단초를 확 폭발시키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이 부분에서 김용화 감독은 매우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주위에 잘 하셨던 분들은 그런 느낌이 덜 할 수도 있지만, 대다수 관객들은 이 대목에서 왈칵 밀려드는 감정을 느낄 거라는 생각. ^^ 여러분은 어떤지 한번 시험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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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철 감독의 영화 '대립군'을 봤습니다. 130분 동안 화면 속의 인간들은 치열하게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계속합니다. 토우(이정재)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그들대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세자 광해(여진구) 또한 왕이 되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걸음을 옮깁니다. 이름 없는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고, 가토 기요마사의 명을 받아 세자 일행을 뒤쫓는 왜군 장수 역시 빈 손으로 돌아가면 가토의 질책으로 할복을 피할 길이 없으니 피차 물러설 곳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몸부림의 아수라장 속에서 영화는 선명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어쩌면 너무 선명해서 다소 시대에 뒤진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이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란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것이죠. 같은 말이지만 만약 아무개가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면, 대체 어떤 덕목이, 어떤 기준과 시선이 그 아무개를 제대로 된 지도자로 설 수 있게 할 것이냐는 이야기입니다.

 

약 10개월 간의 진통 끝에 새 대통령이 나와 구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워가고 있는 지금, 2017년의 한국에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지금.

 

 

 

순서대로 하자면 일단 영화의 배경을 소개해야 합니다. 조선 선조 때, 1592년.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 없는 숫자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이 부산을 통해 조선 내륙으로 치고 올라오고, 선조와 대신들은 평양을 거쳐 북으로 북으로 피난을 거듭합니다. 중간 피난지 영변에서 선조는 "나는 천자의 나라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며 요동으로 건너가 직접 구원병을 청할 뜻을 밝힙니다(1592년 6월13일).

 

그리고는 대신들이 일제히 요동행에 반대하자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선언해버립니다. 이 또한 대신들이 일제히 반대했지만 선조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다음날인 6월14일 자신은 요동으로 떠날테니 세자는 평안도 땅에 남아 의병을 모으고 결사 항전하라고 지시합니다. 이른바 분조(分朝), 즉 조정을 둘로 나눠 국난에 대처하겠다는 것입니다.

 

조선 건국 200년, 말하자면 안일했던 나라에 국권이 흔들리는 대전쟁이 일어나고, 선조로서도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겠지만... 기록에 남아 있는 내용만으로도 지나치게 허둥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국난을 극복할 만한 슬기로운 군주가 당시 조선에는 없었던 것이죠.

 

 

 

 

이때 광해군의 나이 만 17세. 사실 당시 기준으로는 다 큰 장정의 나이지만 그래봐야 스무살도 안 되는 앳된 청년일 뿐입니다. 왜군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일 때 국정 최고 지도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기엔 어림도 없는 나이입니다. 게다가 아버지 선조는 장남인 임해군 보다는 뭘 봐도 낫다는 점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웠지만, 이들 사이에 부자간의 살가운 정을 엿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후의 역사를 살펴보면, 광해는 임진왜란 중의 활약으로 백성들과 대신들의 신망을 샀고, 그 이후 선조는 오히려 광해를 자신의 라이벌로 여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영화 '대립군'은 이런 역사의 기록을 충실히 따라가면서, '과연 무엇이 궁중의 금지옥엽이었던 17세의 광해군을 국난 극복의 선두에 선 강인한 왕자로 바꿔 놓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합니다. 대체 이 왕자는 전쟁중에 어떤 일을 겪었기에 미리 경험해보지도 못한 위기를 기회로 바꿔놓았을까요.

 

 

 

 

영화의 시작. 임진왜란 발발 직전 토우(이정재)를 비롯한 대립군들은 여진족과 맞서고 있는 북쪽 변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누구보다 뛰어난 전공을 세우지만, 후방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대신해 병역을 살고 있는 대립군들이라 누구도 그 공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저 보수를 받고 약조한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또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 병역을 살게 된다는 현실만이 무거울 뿐입니다.

 

그런 토우와 곡수(김무열)을 비롯한 대립군들은 남쪽에서 왜란이 발발했으니 국왕을 호종하러 평양까지 남하하라는 명을 받고 이동하다가 피란차 북상하는 왕의 행렬을 만납니다. 그리고 조정이 둘로 나뉘었으니 세자 광해(여진구)를 호위하고 강계까지 이동하라는 명을 받습니다. 한달만 있으면 역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대립군들이지만 세자 호위의 임무를 무사히 마치면 전쟁중의 특별 무과 시험을 통해 팔자를 고칠 수 있다는 바람으로 여럿은 선뜻 세자를 인도합니다.

 

하지만 철도 없고 숫기도 없는 소년 세자,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왜군의 추격, 왜군보다 더 무섭게 압박해오는 정체 모를 자객들, 턱없이 부족한 식량이며 무장, 추격을 피햐려 들어선 가파른 산길 등 이들 앞의 난관은 첩첩 산중. 그러는 가운데 토우는 자신이 호위하고 있는 왕세자의 민낯을 찬찬히 훑어볼 기회가 생깁니다.

 

과연 그를 살려 내면 무엇이 달라질까. 그가 왕이 되면 이 나라와 백성들의 운명이 바뀔 수 있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자신도 대립군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로서 토우의 고민은 시작됩니다.

 

그를 살려내기 위해 나와 우리 무리의 목숨을 거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영화 '대립군'은 다들 아다시피 지도자의 자질에 대한 영화입니다. 본래 역사에 쓰여 있는대로 선조는 암군이요, 광해는 현명한 군주라고 딸딸 외우는 것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데 별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한 소년이 민초들과의 만남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통해 민초의 눈높이에서 삶과 죽음을 느끼게 되고, 그를 통해 희생과 헌신이라는 영웅적 행위의 가치를 깨달아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한테 이 영화의 카피를 뽑아 보라고 한다면 저는 '그날, 소년은 남자가 되었다' 정도로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선 두 배우, 여진구와 이정재는 아낌없는 호연으로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 넣습니다. 여진구의 연기도 대단히 칭찬받을만 했지만, 특히 이정재는 2017년 이후 배우로서 그의 이름은 아마도 이 영화, '대립군'을 통해 가장 먼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정재라는 배우는 긴 활동기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변함 없는 모습을 보여줘 왔습니다.

 

 

 

 

 

네. 20년 가량의 시간 차이를 둔 모습이지만 거의 차이를 느끼기 힘듭니다. 그만치 이정재는 어찌 보면 불멸의 젊음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지금껏 자리매김해 왔죠.

 

 

 

 

아무튼 그의 젊은 모습은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동년배인 정우성과 함께 찬란한 빛을 뿜었습니다.

 

 

물론 배우로서 본격적으로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그 젊음에 연륜이 깃든 뒤부터의 일인 듯.

 

 

전같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이런 열연이 새삼 그의 에너지를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대립군'이라는 작품,

 

 

문득 이 배우, 미후네 도시로와 불멸의 걸작 '7인의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사무라이라는 특권 신분의 남자들이 자신들이 특별한 대접을 받으며 무훈을 칭찬받는 것은 불의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안전하게 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본래의 소명을 깨닫고, 한 촌락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이야기입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기쿠치요(미후네 도시로가 연기하는 캐릭터입니다)는 본래 백성의 아들이면서 전쟁통에 사무라이를 가장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사무라이들과 동네 사람들 사이의 믿음이 깨질 위기가 등장했을 때, 그는 백성의 눈으로 본 전쟁의 의미를 사무라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백성의 한 사람이기에 백성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인물.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사람을 제대로 세우기 위해 자신의 운명을 걸 수 있었던 남자.

 

이 영화, '대립군'에서 그 남자의 얼굴은 비로소 이정재를 통해 생명력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얼굴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만한 연기를 보여줄 배우란 본래 흔치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이정재가 보여줄 또 다른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점에서 영화 '대립군'은 매우 반가운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P.S. 영화의 후반부에는 [배 한척]과 [배 한척에 목숨을 건 민초들], 그리고 [그 배에 함께 오른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물론 의도적인 설정은 아니겠지만, 그 [배 한척]이 주는 느낌은 매우 산산하더군요. 백성이 탄 배의 중요성이 이미 몇몇 지도자들의 운명을 바꿔 놓은 나라라서 말입니다.

 

P.S.2. 제작진으로부터 'NO CG, NO SET'라는 말을 듣고 보긴 했습니다만, 실제로 영화를 보니 제작진과 배우들이 겪었을 고생의 강도가 피부로 느껴지는 듯 합니다. 진정 '수고하셨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일반 관객들도 아마 이런 점을 감안하고 보시면 감동 두배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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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님이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뭔가 한마디 정리하는 글을 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뵙고 인사를 드린 적도 몇번 있지만 특별히 긴 대화를 나눴다거나 내세울 만한 친분이 있는 사이는 전혀 아닙니다. 그저 오랜 시간 그분의 모습을 본 시청자로서, 관객으로서의 입장일 뿐입니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1970년대 한국에서 TV 드라마는 지금보다 훨씬 영향이 큰, 온 국민의 대표적 엔터테인먼트였습니다. 흑백이었지만 TV 보급이 본격화되면서 TBC, MBC, KBS라는 세 채널에서 방송해 주는 드라마야말로 경쟁 대상이 없는 대중의 관심사였죠.

 

 

 

 

그 시절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트로이카'가 있었습니다. 바로 정윤희 장미희 유지인이라는 세 이름이었죠. 사실 이 세 스타가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가장 빛난 스타였던 것은 맞지만 이 셋은 바로 'TBC의 트로이카'였습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탤런트(TV 배우와 영화배우가 이런 이름으로 구별되고 있었습니다)나 코미디언들에게도 전속 방송사가 있었습니다. TBC에는 TBC 배우들만 나오고, MBC에서는 MBC 배우들만 나오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 TBC의 위상은 워낙 강력해서 저 트로이카 외에도 홍세미 김창숙 김형자 같은 당대 최고 여배우들과 원미경 같은 최고의 기대주들이 모두 TBC에만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남자 배우로도 한진희 노주현 김세윤 같은 배우들이 모두 TBC 전속이었죠.

 

MBC가 드라마 왕국으로 거듭나는 것은 5공의 방송 통폐합 이후이지만, 물론 이 시절에도 MBC 드라마는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남자로는 이정길 박근형 현석, 그리고 여자로는 김영애 이효춘 같은 배우들이 MBC의 얼굴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KBS의 얼굴이라면 한혜숙 김자옥 정도의 배우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어렴풋이 남아 있는 제 기억으로는 방송 통폐합 이전 KBS 드라마를 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시절의 그 드라마 가운데서 너무나 선명하게 기억나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바로 김수현의 1978년작 '청춘의 덫'입니다. 이미 리메이크 작인 1999년판 '청춘의 덫'이 '전설의 드라마' 대접을 받는 분위기에서 78년작을 얘기하자니 뭔가 엄청난 옛날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긴 합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매회 빠뜨리지 않고 '청춘의 덫'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다른 걸 다 떠나서 최소한 배우들의 연기 만큼은 1999년작이 1978년작을 따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GQ 아티클 '서울, 1978년 겨울'에서 퍼 왔습니다. 위 5장의 사진들이 모두 '청춘의 덫' 마지막회 장면들입니다.

(http://www.gqkorea.co.kr/2010/12/14/%EC%84%9C%EC%9A%B8-1978%EB%85%84-%EA%B2%A8%EC%9A%B8/)

 

78년작과 99년작은 인물의 이름부터 이야기의 구조가 일단 똑같습니다. *(  )안에 78년작의 배우를 앞에, 99년작의 배우를 뒤에 써서 구별하도록 하겠습니다.

 

가난하지만 유능한 회사원 동우(이정길/이종원)는 윤희(이효춘/심은하)와 딸 하나를 두고 동거중인 사이. 형편상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지만 장래를 약속한지 오래인 관계입니다. 하지만 동우는 어느날 오너 가문 상속녀 영주(김영애/유호정)의 관심을 받게 되고,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다는 유혹에 직면합니다. 돈 뿐만 아니라, 착하지만 순종적이기만 한 윤희에 비해 활달하고 자존심 강한 영주의 매력이 강렬하게 어필하기도 합니다.

 

결국 동우는 윤희를 버리고 영주와 결혼하려 하고, 그러는 사이 동우와 윤희 사이의 딸이 사고로 죽음을 당합니다. 아이가 죽어가는 동안 동우가 영주와 있었다는 사실을 안 윤희는 180도 돌변합니다. 팜므 파탈로 변신한 윤희는 영주의 오빠이며 소문난 한량인 영국(박근형/전광렬)에게 접근,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오너 집안에 들어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본래 기업 경영이나 가업 승계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던 영국은 윤희 때문에 감춰져 있던 능력을 드러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물론 이 드라마가 방송되던 당시의 제 나이를 생각하면 이런 스토리에 사로잡혔다는 게 좀 이상하실 수도 있겠지만 뭐 굳이 그걸 따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집에나 약간 이상한 애들은 있기 마련이니까요. ^^;; )

 

 

 

아무튼 이 드라마는, 당시 굉장히 중요한 드라마 저널의 역할을 했던 조선일보 '방송주평'에 따르면, 초반에는 "때가 어느 땐데 1950년대 얘기같은 혼전관계 순정녀 이야기냐"는 말을 듣다가 윤희의 각성 이후에는 장안의 화제작이 됐고, 하지만 "미혼모가 변심한 애아빠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라니, 이렇게 부도덕한 내용을 온 국민이 보는 드라마로 방송하다니 제정신이냐"는 높은 분의 말 한마디에 갑자기 조기종영이 결정되는 비운의 작품이 돼 버렸습니다. 김수현 작가가 굳이 이 작품을 리메이크하기로 한 데에는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크게 작용했다는 후문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배경 설명은 이 정도. 아무튼 당시 김영애라는 배우의 미모는 독보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위에서 나열한 수많은 당대의 톱 여배우들이 있었습니다만, 한국에서 보기 힘든 날카로운 콧날과 함께 '원조 얼음공주'라고 불러도 좋을 법한 도시적인 미모를 갖춘 배우는 달리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른 배우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목소리에서도 지적이고 냉정한 면모와 함께 뭔가 감춰진 열정을 느끼게 하는 배우였죠(물론 이런걸 다 당시에 느꼈다는 건 아닙니다. ^^;; ).

 

 

아무튼 요즘도 한국 드라마에는 '도도하고 섹시하면서 평민(?)들을 벌레 보듯 하는' 재벌가 따님 캐릭터가 드물지 않게 등장합니다만, 근 40년 전에 그 원형을 연기한 배우로 이 배우만한 사람이 있었을까, 여기에는 반박하실 분이 별로 없을 듯 합니다. 특히 저 오리지널 '청춘의 덫'에서는 윤희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내는 사람이 영주인데, 그걸 안 뒤에도 오빠가 윤희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차마 비밀을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 내면의 갈등을 연기하는 김영애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두번째 작품은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작품, '모래시계'입니다. 이 드라마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건 공간의 낭비이기도 하고, 다들 기억도 선명하실테니 넘어갑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의 1회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했던 캐릭터는 바로 태수(최민수, 아역은 김정현) 어머니 역으로 등장했던 김영애입니다.

 

김영애는 젊은 날 좌익 운동을 하다 빨치산이 된 남편을 떠나 보내고, 혼자 아들을 키워 온 어머니 역을 맡았습니다. 수재였던 아버지의 유일한 흔적인 아들은 어머니에겐 인생의 유일한 의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혼자 몸으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요릿집을 운영하다 보니 여자로서 적잖은 수모를 겪어야 했고, (명시적이진 않지만) 알콜 중독이 됐어도 아들에 대한 사랑은 어쩌면 집착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잘생긴 아들이 공부하는 것만 봐도 흐뭇해서, 아들의 공부방 웃목에 소반을 들여 놓고 혼자 술잔을 기울이면서 앉아 있는 어머니입니다.

 

 

 

하지만 그런 아들이 빨치산 아버지 때문에 출세길이 막혔다는 현실을 마주한 어머니는 세상을 살아갈 희망을 완전히 잃었습니다. 술취한 몸으로, 바람에 날아간 목도리를 줍다가 기차에 치여 생을 마감하는 1회의 마지막 시퀀스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한때 대통령을 꿈꿨던 패기만만하고 똑똑한 젊은이가 어떻게 해서 좌절과 분노로 가득한, 태수라는 이름의 야수로 성장하게 되는지를 너무도 선명하게 설명해 주는 이야기였죠. 이 어머니 역할을 맡은 배우가 김영애가 아니었다면, '모래시계'의 신화도 조금은 다른 모습이었을 거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개인적으론 최근 영화 '변호인'에서 고문당한 아들을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나이 많은 어머니 역할의 모습을 볼 때에도 이 '모래시계'의 잔상을 지우기 힘들었습니다. 아마 그랬던 분들이 꽤 있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고인의 업적과 공헌을 얘기하자면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듯 하고, 감히 그럴 능력이 있다고 말하기도 힘듭니다. 다만 그분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두 개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조의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늘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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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인기를 얻으면 아무래도 가장 먼저 주목을 받는 것은 배우들입니다. 아무래도 최고의 수혜자들은 주인공들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드라마의 진짜 주역은 작가연출가입니다. 아무래도 그 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제가 양심에 가책을 받을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진짜 주인공을 꼽자면, 백미경 작가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분을 처음 뵌 것은 2014년 여름, 유병술 몽작소 대표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무명 제작자였던 유병술 대표가 건네준 대본 표지에는 사랑하는 은동아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합니다. (유병술 대표도 지금은 '사랑하는 은동아'와 '오 마이 비너스'를 거쳐 잘나가는 드라마 제작자로 변신해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목만으로는 전혀 끌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대본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어라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슬금슬금 온몸이 빠져들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은 아시다시피 아주 새롭지는 않은 내용입니다. 어린 시절 고교생 현수와 초등학생 은동이는 운명처럼 만나 짧고 강렬한 애정을 느끼지만, 그걸로 인연은 끝이 나고 맙니다. 성인이 된 현수는 은호로 이름을 바꿔 톱스타가 되고(사실 유명해지고자 한 것도 은동이를 쉽게 찾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은동이를 찾기 위해 자신의 자전적 일기를 출판합니다. 현수가 구술하는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어 줄 작가로 정은이 발탁되죠.

 

이쯤 되면 드라마 좀 보신 분들은 정은이 바로 어린 시절의 은동이고, 뭔가 사연이 있어서 현수가 은호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할 거다라는 건 충분히 짐작하실 만 할 겁니다. . 누구든 지금껏 살면서 한번쯤은 들어 보거나 지켜봤을 법한 그런 내용입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은동아는 달랐습니다. 어디서 본 듯한 줄거리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냥 박제된 인물들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원초적이고, 때로는 적나라하면서 어느새 은동이가 현수와 헤어지는 장면에서 가슴이 벅차 오르고, 엉뚱하고 고집불통이면서도 순수한 어른 은호의 모습에 웃음보가 터져나오게 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당시 드라마 편성을 위한 회의 때 제가 한 이야기가 지금도 기억납니다. “제가 미친 것 같습니다. 전혀 제 취향이 아닌 것 같았는데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저만 미친게 아니었습니다. 빨리 어떻게 해 보자는 결론이 났고, 그때부터 대체 이 작가는 누구냐고 알아 보는 과정이 시작됐습니다. 신인이라는데, 도저히 신인의 솜씨는 아니라는게 공통된 의견이었기 때문입니다.

대구 출신. 영어 학원 경영 경력. SBS 극본공모에서 단막극 강구이야기가 당선돼 제작된 바 있고, 현재 한 방송사 극본공모의 최종 결선에 작품이 올라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작품의 제목을 물어보고 다시 한번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작품은 JTBC 극본공모에서도 수상 내정작으로 뽑혔는데...?” (아직 비공개작이라 여기서 제목을 거론하지는 않겠습니다.^^)

방송사들끼리 비슷한 시기에 극본 공모를 하면 응모하는 작가들은 누구나 양쪽 공모전에 모두 출품을 합니다. 수천개의 응모작 중에 수상작은 몇 개밖에 안 되기 때문에, 어느 쪽이든 입상만 할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도 양쪽 모두로부터 입상하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워낙 심사하는 작품 수도 많고, 심사위원들의 취향도 제각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드물게도 양쪽 모두 수상권에 들어 있다는 얘기였습니다. 저희보다 그쪽 방송사의 최종 발표가 빨랐으므로, 백미경 작가님의 대본은 그쪽 방송사의 수상작이 됐습니다. (방송국끼리의 관례상, 다른 방송사에서 먼저 수상작으로 뽑은 작품은 나중 수상에서는 제외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중복 시상은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약간의 딜레마가 생겼습니다. 그쪽 방송사에서 당선 즉시 그 작품을 미니시리즈로 제작하자고 제안해 온 겁니다. 저희 쪽은 저희 쪽대로 이태곤 감독이 연출을 맡기로 하고 사랑하는 은동아의 제작을 진행하고 있던 터라 난처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처음으로 백미경 작가님의 의리를 경험해보게 됩니다. “미안하지만 JTBC와 이미 이야기되고 있는 작품이 있다. 그걸 먼저 제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당선이 취소되더라도 감수하겠다.” 이게 신인작가에게 얼마나 어려운 결단인지, 업계에 계신 분들은 다 아실 겁니다. 결국 약속 엄수와 극본공모 당선을 맞바꾼 셈이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하는 은동아는 세상에 나왔습니다. 시청률이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화제성은 상당했습니다. 일반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에게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이 보통이고, 작가나 연출에 관심을 갖는 경우는 대단히 이례적이지만 업계에서는 대체 이 작가가 누구냐는 소문이 폭풍처럼 지나갔습니다. 당시만 해도 신인 작가로서는 특급 대우의 재계약이 이뤄졌습니다. “성적이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쨌든 JTBC에서 데뷔했다는 걸 잊지 않을게요. 은혜는 갚을 날이 올 거에요.” 작가님의 멘트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습니다. 첫번째 글에서 언급했듯, 2016년 초 백작가님은 다시 한 편의 대본을 건네주셨습니다(통상 이럴 때에는 시놉시스와 대본 1,2부가 같이 있습니다). 한국형 원더우먼이 등장하는 바로 이 대본입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주 종목이 있습니다. 로맨틱 코미디가, 스릴러, 성인용 멜로, 휴먼, 판타지…. 대개 한 장르에 능한 분들은 다른 장르에서는 약점을 보이곤 합니다. 하지만 힘쎈여자 도봉순을 보면서 가장 놀란 건 바로 장르를 넘나드는 힘이었습니다. 한 드라마 안에 로코와 스릴러, 판타지가 위화감 없이 공존하고 있었던 겁니다. 셋 중 두 가지는 몰라도 세 장르가 이렇게 사이 좋게 들어 차 있기는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사실 공개된 것이 이 정도일 뿐 실제로는 더 있습니다. ‘힘쎈여자 도봉순의 스릴러 부분은 시그널풍의 본격 수사물이라면 아직 공개되지 않은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는 미드 위기의 주부들을 연상시키는 시니컬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게다가 제가 위에서 언급한 다른 작품은 가족을 중심으로 한 홈 코미디와 판타지의 조화가 돋보였습니다. 당대의 수많은 대작가들 가운데서도 제가 과문한 탓인지 이렇게 여러 장르에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분이라는 이야기를 빼놓으면 안 되겠으나, 아무리 이 블로그가 사적인 공간이라 해도 다 털어놓기에는 좀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튼 지난 1, ‘힘쎈여자 도봉순의 제작 기간이 길어지는 동안 머리를 식혀 가며 품위있는 그녀’ 20회를 탈고한(때로 천재들은 두어 가지 일을 번갈아 하는 것이 뇌 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집필력은 범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단 두 작품으로 이렇게 화제의 중심에 서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솔직히 이 두 작품이 이 분의 대표작이 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누가 농담으로라도 이런 말을 하면 나 아이템(소재) 무한대인 거 알죠?” 하고 씩 웃을 분이기 때문입니다.

힘쎈여자 도봉순대본은 거의 끝나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이 대본이 끝날 때에는 무척 서운하면서도 설렐 것 같습니다. 그 다음엔 대체 어떤 상상을 초월하는 대본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니까요.

 

P.S.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작가님의 스타일상 사진은 싣지 못했습니다. 아마 머잖은 미래에 어느 시상식장에서 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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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쎈여자 도봉순'이 시작하기 전에, 만약 누군가 "야, 이 드라마 잘 될 것 같아. 한 4회 쯤에 8% 정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라고 했다면, 아마 칭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 때 감히 기대하기엔 너무 높은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4회만에 '힘쎈여자 도봉순'은 전국 8.3%, 수도권 8.7%라는, 저희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성적을 냈습니다. 막연히 '잘 될 거'라는 기대는 했지만 이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 밀려올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감사드릴 곳이 너무 많습니다.

아울러 우리의 무적 삼각편대, 박보영-박형식-지수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는 것도 참 반가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

솔직히 말하면 박형식을 남자 주인공으로 하려고 했던 JTBC 드라마는 '힘쎈여자 도봉순'이 처음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상류사회'의 박형식을 본 뒤로 푹 빠져들었습니다.

'상류사회'의 유창수는 참 독특했습니다. 신분(?) 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인 알바 지이(임지연)를 사랑하게 됐지만 그녀와 결혼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고, 오히려 자신과 결혼을 해야 하는 상대는 비슷한 재벌 집 딸인 윤하(유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창수는 알아차립니다. 자신은 그 '마음'을 무시하고 머리가 가리키는 대로 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물론 하명희 작가님의 캐릭터부터 독특했죠. 한국 TV 드라마에 등장했던 그 수없이 많은 남자 재벌 2세들 가운데 가장 싱싱한 재벌 2세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게 없던 젊은 남자. 그런데 처음으로 마음과 생각이 따로 노는 상황을 맞닥뜨린 남자.

만약 박형식이 아닌 다른 배우가 이 역할을 연기했더라면 절대 '왜 내 마음이 내 머리를 배신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라는 느낌이 제대로 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리한 배우가 아니라면 절대 그렇게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뒤로 수차에 걸쳐 - 남자 주인공이 필요할 때마다 - 제1후보로 박형식의 현재 상황을 체크했지만 그럴 때마다 스케줄이 맞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힘쎈여자 도봉순' 때에도 일단 박형식을 떠올렸지만 - 매우 길고 두터운 장벽이 가로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사전제작드라마 '화랑' 의 촬영이 진행중이었던 겁니다. 제작기간도 길고, 방송기간도 매우 긴.... (물론 박형식을 캐스팅하고 싶은 저희 심정에서 그랬다는 겁니다. 뭐 지금도 '도봉순 촬영 왜 이렇게 안 끝나냐'고 애태우고 있을 다른 제작진들도 있겠죠.^^)

어쨌든 정말 아슬아슬하게, 박형식의 출연이 결정됐습니다. 정말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죠. 그리고 결과를 보면 박형식에게나 '힘쎈여자 도봉순'에게나 모두 행운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안민혁은 엉뚱함과 따스함이 교차하는 쉽지 않은 남자입니다. 게다가 뭐든 다 해줄 수 있는 재력까지 갖추고 있는, 그야말로 꿈의 남자친구죠. 태연하면서도 의뭉스럽게 "뭘 그러고 서 있어? 짝사랑하는 남자 여자친구라도 본 사람처럼?", 이런 대사를 하는 박형식을 볼 때 우리는 그 안민혁의 현신을 보고 있습니다. 멍뭉커플 화이팅.

삼총사 중에서 마지막 빈 자리, 국두 역도 간단치는 않았습니다. 이 캐릭터에 대한 백미경 작가님의 애정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국두는 원리원칙에 죽고 사는 엘리트 경찰이라는 기본 캐릭터 외에, 결국 봉순이와의 멜러에서 한 축을 담당해야 하는 추억 속 첫사랑의 느낌을 살려야 하는 역할입니다.

이 대목에서 후보로 급부상한 배우가 바로 지수. 군인이나 경찰관의 느낌으로 잘 어울릴 배우이기도 했지만 사실 지수군은 JTBC에 약간의 빚(?)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지난해 가을 방송된 '판타스틱'이라는 드라마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죠.

당시 지수는 극중 박시연의 탈출구가 되는 연하남 검사 역으로 발탁됐습니다. 연기 경력으로 볼 때 다소 무리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막상 연기를 해 보니 순진하면서도 저돌적인 연하남의 이미지가 잘 어울렸고 박시연과의 케미스트리도 아주 좋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 본격적인 멜로드라마가 펼쳐질 대목에서 지수군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것입니다. 급성 골수염 진단으로, 수술이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작년 추석 연휴를 앞두고 이런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판타스틱'은 다급한 대본 수정이 이뤄졌고, 김현주-주상욱 커플 못지 않게 주목받던 지수-박시연 커플은 갑자기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겉도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한창 시청률이 오르고 있던 '판타스틱'에 제동이 걸린 것과 지수의 부상이 결코 무관하지 않았던 상황이었죠. 당시 '판타스틱' CP를 맡고 있던 터라, 너무나 안타까운 상황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다리로 서지도 못하는 환자를 어찌 할 수도 없고... 병원에 찾아갔을 때,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아쉬워하고 있는데 거기다 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랬던 상황이라 '의리'를 앞세워 국두 역할을 밀고 들어갔습니다. "'판타스틱'의 아쉬움을 씻어 보자. 다시 한번 JTBC와 함께 해 보는게 어떠냐?" 물론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런 정도의 설득이 먹혀들지 않았겠지만, 어쨌든 의리의 사나이 지수는 다시 한번 한 배를 타는데 흔쾌히 동의했습니다. 그 자신에게도 '판타스틱' 때 못다 이룬 아쉬움이 못내 컸던 거죠.

 

초반 국두를 대표하는 대사들은 "아저씨,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에서 "남자는 다 개야!"에 이르는 순도 100%의 순정 마초 대사들이지만 뒤로 갈수록 국두도 마음 속 로맨스가 살아나는 역할을 연기하게 됩니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국두의 변신, 기대하실만 합니다.

이렇게 해서, '힘쎈여자 도봉순'이 자랑하는 무적의 삼각편대가 완성됐습니다.

 

박형식이 91년생, 지수가 93년생으로 두 살 차이면 사회에 나가서는 사실 친구도 될 수 있는 나이지만 지수군은 어찌나 형을 좋아하는지(평소에도 뭐하냐고 물으면 '형들과 뭐 한다'는 대답) 바로 '형식이형'이 '우리 형'이 돼 버렸습니다. 보기에도 훈훈한 두 남자가 서로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촬영장 분위기가 나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죠.

아무튼 현재 두 배우 모두 자신들의 기대치를 100% 이상 달성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뭐든지 다 해주는 남자' 박형식에게 좀 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고 있지만, 지수 또한 언젠가 국두의 과거 - '국두는 왜 하늘하늘한 여자가 좋다고 했을까' - 가 소개되면 풋풋한 첫사랑의 추억과 함께 캐릭터가 한 단계 올라서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뭔가 달달한 브로맨스도... 아쉽지 않게 준비돼 있으니 기대하시길.^^

 

P.S. 노파심에서 한마디 -

제가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어설프나마 제가 이 드라마의 초기 세팅 과정을 잘 알고 있고, 나름 이 드라마 제작진을 대표하는 입장에서입니다. 글 내용에 나오는 것들을 모두 저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다거나, 내가 없었으면 이 드라마가 없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드라마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서는 100명 넘는 스태프와 연기자, 그리고 작가와 연출가가 피와 땀을 쏟습니다. 그 분들의 공로를 대변해서, 제작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 중 흥미로울 부분들을 정리하고 있는 것 뿐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연기자들이 등장하는 화려한 드라마 이면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숨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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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쎈여자 도봉순] 1회가 성원에 힘입어 JTBC 드라마 사상 첫회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수도권 4.04, 전국 3.8이라는 저희로서는 꿈의 숫자가 나왔습니다. 진정 작가님, 감독님, 스태프, 제작사, 그리고 모든 출연진에게 감사드립니다.

지난번 예고대로 드림 트리오의 결성 계기로 돌아갑니다. 박보영-박형식-지수를 저희는 무적 트리오라고 부릅니다. 그냥 단지 남자 둘, 여자 하나의 축이라서가 아니라, 본래 드라마의 구성이 '도봉순의 힘, 안민혁의 돈과 기발함, 인국두의 수사력과 활동력'이 삼각편대를 이뤄 악의 무리들을 물리쳐 간다는 흐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셋이 모여야 '정의의 편'이 완성되는 구조였던 것이죠.

물론 삼총사라고는 하지만 뭣보다 우선, 당연히 타이틀 롤인 도봉순 역에 누구를 기용하느냐가 최대 관건이었습니다.

일단 이 드라마의 어머니인 백미경 작가님과 처음 대본을 놓고 마주했을 때부터, '일단 육체적으로 강건해 보이는 늘씬한 건강미녀 스타일은 배제하자'는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JTBC 안에서도 마찬가지였죠. '외형적으로 연약해 보이고, 전혀 힘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스타일'이 필요하다는 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했습니다. 

앞서 얘기한대로 도봉순은 단지 슈퍼히어로일 뿐만 아니라 한국 88만원 세대, 구직자 젊은이, 그 중에서도 여성 구직자를 대변하는 캐릭터여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에 귀여움이 필수. 당연히 체격도 크면 안 됨.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 나가다 보니 거의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적인 도봉순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바로 박보영이었죠.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봉순 역으로 박보영을 데려올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가 당시의 염원이었습니다. 검증된 연기력. 천부적인 귀여움. 아담한 체격. 남녀노소 모두 좋아하는 폭넓은 인기. 어디 하나 부정적인 요소가 없었습니다. 다만 작품 보는 눈이 까다롭고, 워낙 찾는 곳이 많아 모시고 오기가 어렵다는 것 뿐.

그런데 다행히도, 이미 박보영이 이 작품의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공동제작사 JS픽처스의 이경식 이사님이 일단 박보영 측과 교감이 있었고, 작품에 대한 호감도 형성시켜놓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게 곧 '최종 결심'은 아닌 상황이었죠. 아무튼 그 뒤로도 꽤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캐스팅을 하다 보면 늘 그렇지만 답답할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정말 이 배우가 우리 대본을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좋아한다면 대체 얼마만큼이나 좋아하는 걸까. 본인의 의사를 확인할 방법은 없을까.

그러던 어느날, 박보영과 친분이 두터운 어떤 인물과 우연히 통화를 했습니다.

그: 보영이가 요새 꽂혀 있는 대본이 있다던데요?

나: (헉) 그, 그게 뭔데요?

그: 제목은 모르겠고... 뭐 슈퍼우먼 이야기라던가? 여주인공이 힘이 엄청 세대요. 아무튼 재미있대요.

합창교향곡 4악장이 머리 속에서 울려퍼지는 느낌. 이거 되겠구나. 될 수 있겠구나.

그리고 기쁜 예감은 머잖아 현실이 되었습니다. 작가/감독님과 함께 CD만한 얼굴의 박보영을 처음 만난 날. 차오르는 환희를 느꼈습니다. 우리는 그냥 된거다. 이 다음부터 뭐가 어떻게 되든, 이 박보영/도봉순만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수 있을거야. 뭐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죠. (백미경 작가님: 어쩌면 그렇게 예뻐요. 쳐다 보고만 있어도 질리질 않네.)

그날의 만남 이후에도 우리의 보영님을 노리는 수많은 마수(?)들이 뻗어왔지만(정말 알게 모르게 수많은 제의가 쏟아졌습니다. 농담 아닙니다) 당대의 의리녀 보영님은 사악한 유혹을 모두 뿌리치고 일편단심 도봉순을 기다려 주었고, 결국 우리는 박보영이 연기하는 최상의 도봉순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피데스스파티윰 김상유 대표님. 사랑합니다.)

촬영이 시작된 이후 우리의 보영님은 한번도 저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박보영이 모니터를 가득 채울 때, 이형민 감독님을 비롯해 촬영장의 모든 스태프는 추위도 잊고, 배고픔도 잊고(이건 아니고), 그저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거든요.

네. 글자로만 쓰여져 있던 도봉순의 이상을 200% 실사로 실현시킨 것은 바로 박보영이었습니다.

이미 드라마 본편 방송 전, '한끼줍쇼'를 통해서도 확인된 이 뽀블리의 위력.

박보영의 캐스팅 확정 이후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느낌에 헤벌레 하고 있었지만 사실 두 사람의 남자 주인공이 필요했습니다. 도봉순을 둘러 싼 두 남자, 안민혁과 인국두. 잠시 프로필을 살펴봅니다.

안민혁: 재벌가 5형제의 막내지만 부모 덕 안 보고, 게임 회사를 창업해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에 성공한 능력자. 거기에 완벽한 꽃미남이지만 또 그런 만큼 오만불손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관심이 없음. 그리고 '어떻게 저런 생각을'이란 말이 절로 나오는 괴상한 사고방식의 소유자. 대 저택 지하에 AV룸+게임룸+지하 방공호 개념의 던전을 짓고 남자의 꿈을 실현하며 살고 있다. 자신의 상식을 넘어서는 초자연적 존재 봉순에게 관심을 갖고, 그 관심은 어느새...?

인국두: 완벽한 외모와 신체조건에 경찰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능력자. 성장 과정 내내 주위의 선망을 한몸에 받았던 엘리트. 피아노도 잘 치고 각종 무술에도 능함. 하지만 정의감이 지나쳐 윗선의 지시를 무시하고 고위층을 수사하는 똘끼를 발휘하는 바람에 좌천돼 집 근처 경찰서 수사팀으로 배치. 봉순의 초중고 동창이며 오랜 시간 봉순이 꿈꿔온 이상형. 다만 여자친구가 있다고는 하지만 봉순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쌀쌀맞게 딱딱 끊는 철벽남. 알고 보면 츤데레...?

이 두 남자를 데려와야 환상의 트리오가 만들어지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특히 시장엔 정말 남자 배우 기근이 심각하고... 어떤 배우들은 1,2년 전부터 스케줄이 잡혀 있고... 더구나 영화 쪽에서는 '뭉쳐야 뜬다'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웬만한 주연급 배우들이 한 영화에 3,4명씩 잡혀 있기도 하고....

(정말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특히 '신과 함께' 같은 영화는 정말 생태계 파괴의 주범입니다. 영화 한편에 이정재 하정우 차태현 주지훈 디오를 묶어놓고 있으면 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쩌란 말입니까... 근데 재미있긴 하겠다.)

아무튼 너무 길어져서 남자들 이야기는 다음편에 하겠습니다.

 

P.S. 힘쎈여자 도봉순은 아직 안 깐 패가 너무 많습니다. 일단 웃음의 핵심병기 임원희 김민교는 아직 등장도 안 했고, 동네를 공포에 몰아넣는 연쇄 납치범 이야기도 이제 시작. 아울러 민혁을 위협하는 협박범의 정체도 아직 기미도 안 보이죠. 게다가 뒤로 가면 오돌뼈라는 신비의 인물(?)도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이제 시작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P.S.2. 아울러 특별출연해주신 JTBC 1등신부감 아나운서 강지영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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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하게 썼다가 오타가 많아 몇군데 수정했습니다. 낯이 뜨겁습니다.]

 

[힘쎈여자 도봉순]이 곧 방송됩니다. 사실 [힘쎈여자 도봉순]은 태어난지 좀 되는 아기입니다. 벌써 1년 전인 2016년 어느 봄날, '사랑하는 은동아'의 백미경 작가님이 대본을 한번 읽어 보라며 주셨습니다. 한 눈에 쏙 들어왔습니다. 작가님의 2015년 작품인 '사랑하는 은동아'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일찌기 한국 드라마에 없었던 여성 슈퍼히어로 드라마가 탄생해 있었더군요.

'여성 슈퍼히어로 드라마'라고 구별해서 썼지만 사실 한국 드라마 가운데 변변한 남성 슈퍼히어로 드라마가 있었느냐 하면 뭐 그런 것도 아닙니다. 몇몇 시도가 있었지만 '이것이 한국에서 방송된 히어로 드라마다'라고 할만한 작품은 없었다고 보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굳이 꼽자면 '홍길동'이나 '전우치' 같은 전통적인 영웅들의 활약을 다룬 작품 정도? '인간시장'의 주인공 장총찬을 슈퍼히어로라고 놓기는 좀 불편합니다. 영화까지 영역을 넓혀 봐도 류승범 주연의 '아라한 장풍대작전' 정도가 떠오르는 정도입니다. 강동원 주연의 '초능력자'가 있지만 주제 면에서 일반적인 히어로 무비와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대체 왜 한국에는 그런 드라마가 없었을까...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물론 반성이 앞섰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드라마 소재란 이런 것'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것이죠. 확실히 우리 드라마의 소재는 좀 더 다양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습니다.

(물론 날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시청자를 놀라게 하는 막장 드라마 계열도 새로운 시도에 인색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무슨 생각을 하다가, '형제가 한 여자를 사랑하는 내용의 드라마'가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전혀 예기치 못한 작품이 하나 툭 튀어나오긴 했습니다만, 생각보다 한국 드라마는 정말 '다양하지 않았습니다'.)

 

'힘쎈여자 도봉순' 은 심지어 한국 상황에 매우 적합한 슈퍼히어로 드라마였습니다. 일단 '힘쎈 남자'가 아니고 '힘쎈 여자'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침 이때 저는 감히 '욱씨남정기'라는 드라마의 cp를 맡고 있었는데, 이 드라마에 매료된 것도 사실 '강한 여자' 라는 테마가 지금의 한국 드라마에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 생각대로 '욱씨남정기'는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고, 에서 '욱씨'역을 맡았던 이요원도 뜨거운 찬사를 받았습니다. 강은경-주현 작가님이 숨을 불어 넣은 캐릭터가 이형민 감독님의 손끝을 거치면서 21세기 한국 여성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낸 것이죠.

무엇에 대한 공감일지는 너무도 자명했습니다. '욱씨남정기'의 승부는 '사이다'에 있었던 것이죠. 직장에서도 약자, 그러다 집에 오면 엄마이자 주부 역할까지 해야 하는 것이 여자. 상사-남편-부모, 심지어 자식까지 포함해도 누구 하나 만만한 사람이 없는 시청자들에게 이요원이 연기한 욱다정(옥다정)은 그야말로 냉장고에서 갓 꺼낸 사이다 자체였을 겁니다(네. 제가 여자가 아니라서 여기서 추정으로 바뀝니다).

'할 말 다 하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그러면서도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 사실 '여자가 정의롭고 합리적이고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싸가지 없다고 욕을 먹는 현실까지 잘 반영돼 있었습니다 - 욱다정은 진정 독보적인 캐릭터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가운데 또 다른 흥미로운 캐릭터를 발견하게 됐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욱다정 이요원이나 '직장의 신'의 김혜수가 '못하는 게 없이 완벽한' 직장형 슈퍼우먼이라면 도봉순은 사실 힘이 세다는 것 외에는 전혀 슈퍼우먼스럽지 않은 캐릭터입니다.

도봉순은 단란한 가정에서 쌍둥이 남매 중 누나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집안의 기대는 서울대 의대를 간 쌍둥이 남동생에게 '너무나 당연히' 쏠렸고, 공부머리가 부족한 봉순이는 그저 그런 학력으로 그저 그렇게 사회에 나왔지만 결국은 길고 긴 구직자의 대열에 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봉순이가 학교에서 뭘 전공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봉순이의 꿈은 게임 제작자. 자신을 닮은 캐릭터를 활용해 대박 게임을 만들기 위해 학원도 다니고 열심히 스펙을 쌓...으려 pc방에서 게임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전문용어로 구직자. 구체적으로 말하면 백수입니다.

누가 봐도 도봉순의 가장 큰 강점은 넘치는 힘 - 달리는 버스를 세울 수 있을 정도의 힘입니다 - 입니다. 외할머니의 외할머니의 외할머니 때부터, 엄마에게서 딸에게 수백년에 걸쳐 대물림되어 온 신비로운 힘이죠. 하지만 봉순이는 이 힘을 장점으로 활용할 의지도, 환경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힘이 센게 왜 나빠? 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지만, 사실 봉순이의 힘은 일종의 은유입니다. 드라마에서는 '여자가 무식하게 힘만 세서 뭐하게!'라는 봉순이 엄마의 등짝 때리기 신공도 나오고,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을 힘을 써서 괴롭히다가 천벌을 받은 조상들의 이야기도 나옵니다만 이런 건 어디까지나 드라마를 위한 장치들이죠. 이 드라마에서 진정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남자들보다 훨씬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참고 살아야 했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봉순이의 '넘치지만 감춰져야 했던 힘'은 바로 그 '참고 살아야 했던 여자들의 능력' 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힘쎈여자 도봉순'은 원더우먼이나 엘렉트라 같은 우먼 히어로 이야기와 결별합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냥 비슷한 힘쎈 여자 이야기지만, 그냥 그 힘쎈 여자가 나쁜 놈들 혼내주고 다니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힘쎈여자 도봉순' 은 스물이 한참 넘도록, 넘치는 슈퍼 파워를 갖고 있었으면서도, 그 힘을 어디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늘 자신감 없이, 인생에 대한 뚜렷한 목표도 없이 살아온 봉순이가 어느날, 몇 차례의 만남과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쓰여야 할지를 깨닫는 이야기입니다. 바꿔 말하면 남들보다 빼어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 능력을 어떻게 써야 할 지 모르던(심지어 상당수는 자신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온) 한 젊은이가 진정한 자기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도봉순이 여자다 보니 이 '힘'은 글자 그대로 물리적인 힘으로 드라마 안에서 활용됩니다. 예를 들면 '약한 여자' 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들이 요즘 특히 많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밤길 함부로 다니기 무섭고, 술 마시고 집에 가는 택시 혼자 타기도 무섭고(얼마전 목포에서 무서운 일이 있었죠),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 않는다고 막말하는 나이 헛먹은 할아버지들이 무섭고, 클럽에서 만난 남자가 막무가내로 팔목 잡고 집에 못 하게 할 때 무섭고, 여자 혼자 산다고 방범창 뜯고 들어오는 동네 미친놈이 무섭고... 그런 세상에서 봉순이의 힘은 시원한 대리만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요소일 겁니다. (네. 우리 드라마에서 봉순이는 이런 '놈'들을 아주 시원하게 응징해 드립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볼수록 '힘쎈여자 도봉순'은 반드시 드라마로 만들어야 할 대본이라는 확신이 섰습니다. 아, 물론 이런 대의를 갖고 있는 드라마라는 점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죠. '힘쎈여자 도붕순'의 대본은 일단 너무나 재미있었습니다. 봉순이를 가운데 놓고 벌이는 게임회사 사장 민혁과 엘리트 형사 국두의 일진일퇴 공방전도, 봉순이 가족들의 알콩달콩한 분위기도, 그리고 봉순이의 초반 주적(?)인 건달 백탁 일파의 황당무계한 행각도 흥미로웠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백미경 작가님은 데뷔작인 '사랑하는 은동아' 같은 심각한 멜로 드라마 때도 넘치는 유머감각을 주체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잊지 못할 코믹 명장면들을 만들어 냈던 분입니다. 그런 양반이 이번엔 맘 먹고 코믹 드라마를 쓰겠다고 내놓은 대본이니 뭐 그런 쪽으로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가 딱 맞는 표현입니다.

 

 

이 드라마를 제대로 만들어 주실 분은 누구일까....는 사실 그리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로 현재, 리얼 타임으로 '욱씨남정기'로 매주 시청자들을 포복절도하게 하던 이형민 감독님이 바로 곁에 계셨기 때문입니다. 네. 왕년에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만드신 거장 맞습니다. 바로 그분이 코믹 장르에도 눈을 뜨시고 만든 작품이 바로 '욱씨남정기' 입니다. 이형민 감독님도 OK를 하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도봉순은 누가 해야 할 것인가...인데, 이것 역시 사실 긴 고민이 필요한 얘기는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그 배우를 데려올 수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죠.

(너무 길어져서 접습니다. '무적의 트리오는 어떻게 만들어졌나'에 대한 글은 다음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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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개국 이후 드라마 몇 편의 책임프로듀서를 맡아 봤지만 단 한번도 캐스팅이 쉬운 적은 없었습니다. 좋은 대본을 찾는 일은 물론 어려운 일이고, 좋은 기획을 대본으로 발전시키는 일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드라마 한 편을 같이 만드는 백여명의 스태프 중 어느 한 자리 '정말 좋은 사람'을 구하는 일 중 간단한 일은 하나도 없지만, 드라마 제작에 관여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가장 힘든 일'이 뭐냐고 물으면 아마 십중팔구는 '캐스팅'이라고 할 겁니다.

 

어떤 프로듀서도 얼마 전에 그런 얘기를 하더군요. "방송국에서 원하는 캐스팅이 안 되고 날짜는 가고 있으면 밥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 않고, 잠을 자고 일어나도 잔 것 같지가 않다"고. 그런데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대본과 훌륭한 연출이 있어도, 좋은 배우가 붙은 상태와 붙지 않은 상태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훌륭한 대본은 아주 유명한 배우가 없어도 그 빛을 발휘합니다. 내로라하는 톱스타가 출연해도 망하는 드라마들이 많고, 반대로 무명의 신인들이 혜성처럼 나타나 드라마도 살리고 자신도 몸값을 높이는 경우들이 비일비재하죠. 하지만 만약 그 대본에 정말 지명도 있는 배우들이 붙었다면, 그건 정말 대박이 났을 겁니다.

 

유명한 배우의 힘은 일단 마케팅에 미치는 영향이 엄청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됩니다. 요즘 TV 드라마의 경쟁자는 다른 채널 드라마가 아닙니다. 일단 채널 자체도 엄청나게 많아졌지만 TV 외에도 스마트폰이나 IPTV, 그리고 수많은 다른 엔터테인먼트들이 경쟁자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초반에 '어? 재미있어 뵈는데 한번 볼까'하는 생각에 들게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행히도 저희는 '판타스틱'을 준비하면서 주상욱김현주라는, 믿을만 한데다 대중이 좋아하는 스타들을 주인공으로 기용할 수 있었습니다. 네.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캐스팅에는 설득이라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그리고 두 배우 모두 지난한 설득 끝에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됐습니다만, 주상욱이 망설인 이유 중에는 "어떻게 연기해야 좋을지 잘 알 수 없는 장면들이 몇개 있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발연기'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본으로 이 드라마를 접한 사람들은(아, 물론 무식한 저만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다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니 발연기가 뭐가 어려워?' 잘 하는게 어렵지 못하는게 뭐가 어려울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촬영을 시작하고 1주일 안에 드디어 그 '발연기'를 눈앞에서 볼 기회가 생겼습니다. 바로 2부의 '대본 연습' 신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극중 드라마 작가 소혜(김현주)가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던지며 대본을 자기에게 맞게 수정해 달라는 해성(주상욱)에게 짜증이 나서 '킬러의 고뇌를 눈빛으로 연기하는' 고난도 감정 신을 쓰고, 대본 연습을 요청해서 해성을 망신시키려 하는 내용입니다.

 

신이 나서 대본을 읽어보던 해성은 마침내 감독과 상대역 여배우 앞에서 얼어붙고, 상대역 여배우는 그 자리에서 역할에 몰입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것을 보다가 긴장한 나머지 평소보다 더 심한 발연기를 폭발시킵니다.

 

이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보다가 아, 왜 저 장면이 어렵다고 한 건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주상욱은 해성의 캐릭터를 분석해 보고, '한류 톱스타가 할 수 있는 선의 발연기'를 구현하려 고민했기 때문에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죠.

 

보통 사람들이 '발연기'를 생각하면 흔히 장수원의 '로봇 연기'를 떠올립니다. 이 '로봇 연기'는 그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에 아예 다른 하나의 장르로 간주해야 할 부분이지만, 아무튼 극중 해성이 로봇 연기를 보여줄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류해성은 아시아권의 톱스타로 군림하고 있는데, '로봇 연기'로 그런 자리에 갈 수는 없는 거죠.

 

그런데 막상 주상욱의 연기를 보고 있으니 그 '한류스타의 발연기'라는 것이 오히려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적게는 2%, 많게는 5% 정도 부족한, 아주 끔찍한 연기도 아니면서 절대 잘 한다고는 할 수 없는, 그래서 뭔가 명연기를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기 딱 좋은, 절묘한 선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실로 감탄을 자아내는 연기였습니다.

 

이 장면은 아마 방송으로 익히 보셨을테니 메이킹 영상을 가져 옵니다.

 

 

 

 

 

 

이 발연기 장면은 3부에서도 선배 배우 박원상의 지도를 받는 장면에서 다시 한번 등장합니다.

 

 

 

아무튼 그 뒤로 인터넷에 기사가 뜰 때마다 '발연기 장인'이라는 별호가 주상욱에게 붙는 걸 보고 역시 큰 노력은 누가 봐도 확연히 보인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됐습니다. 사실 이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연기 호흡은 누가 뭐래도 마에스트로급입니다. 정말 요소 요소에 연기 잘 하는 배우들이 포진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회 '발연기'와 '깨방정'으로 분위기를 살려 주는 주상욱이 큰 주목을 받으며 노력을 제대로 평가받고 있다는 건 이 드라마 관계자로서 참 흐뭇한 일입니다. 

 

 

 

 

 

 

P.S. 그런데 이 주상욱의 기막힌 발연기 연기가 중국 팬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와 안타깝습니다. '한국에서 발연기로 소문난 배우가 중국에서는 우상으로 대접받는다는 것은 중국 시청자들이 발연기와 명연기를 구별할 줄 모른다고 비웃은 것 아니냐'는 느낌을 받으신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건 저희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이야기입니다.

 

문득 개인적인 경험이 떠오릅니다.

 

몇해 전에 홍콩에서 방송학을 강의하시는 여교수님 한분과 우연히 저녁 자리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한국 드라마에 조예가 깊었던 이 분은 저를 보더니 이런 저런 덕담을 하다가 "한국 여배우들은 어쩌면 그렇게 다들 예쁜 것 뿐만 아니라 연기까지 잘 하느냐. 연기 못하는 배우가 없는 것 같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누가 그렇게 연기를 잘 하더냐"고 물었더니 이 분이 그 자리에서 줄줄이 십여명의 이름을 대는 겁니다. 이영애, 송혜교, 김태희, 김희선, 수애, 최지우, 전지현, 하지원.... 그랬더니 자리에 있던 다른 분이 웃으면서 "그러냐. 그런데 지금 말한 여배우들이 모두 얘기하시는 것만큼 명배우는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내가 보기엔 중국 여배우들이 훨씬 더 연기를 잘 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좌중의 많은 사람들이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랬더니 이 교수님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누가 그렇게 연기를 잘 하더냐"고 반문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장만옥, 유가령, 관지림, 서기, 이가흔, 장백지, 판빙빙..."이라고 어렵지 않게 중화권 여배우들의 이름을 댔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막 웃으면서 "그런가요? 내가 보기엔 장만옥 외에는 다 별론데..." 라고 하시더군요.

 

 

 

 

이런 시각차에 대해 여러 사람이 이야기를 하다가 그날의 결론은 1) 남의 떡이 커 보인다 2)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 연기력을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사실 2)는 우리가 평소에도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할리우드의 남자 주인공들 가운데서도 조니 뎁이나 조지 클루니가 명배우로 꼽히는 반면, 키애누 리브스나 매튜 매커너히, 올란도 블룸은 수시로 관객들이나 평론가들로부터 '발연기'라고 혹평을 받습니다. 하지만 후자의 배우들은 전 세계적으로 전자의 배우들 못잖은 인기를 누리고 있죠. 특히나 비 영어권 국가의 사람들은 저 배우들의 연기력이 혹평의 대상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아 그래?' 하는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역시 언어의 장벽이란 이럴 때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중국 시청자 여러분들이 혹시 이 글을 접하시게 된다면(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겠지만), 저희는 중국을 비하하려는 생각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었다는 점을 좀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에서 인기는 높지만 발연기로 놀림 받는 배우가 중국(혹은 일본, 혹은 대만, 혹은 브라질)에서 인기를 얻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한국 배우가 중국에서 높은 인기를 누린다는 설정 자체가 불쾌하시다면 그건 어쩔수가 없겠지만, 요즘처럼 문화 교류가 빈번한 시대에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극중 해성이 중국에서 환대 받는 장면은 최근 중국 스타 허위주(许魏洲, 쉬웨이저우)가 내한했을 때 인천 공항에서 펼쳐졌던 대대적인 환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텐데 말입니다. 요즘 같은 분위기에 만약 호가(胡歌, 후거) 같은 배우가 내한한다면 환영 인파로 정말 큰 혼란이 일어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드라마는 드라마일뿐', 오해는 말아 주시길. 늘 얘기하지만 이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대신 그냥 재미있게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P.S. 2. 주상욱의 연기와 함께 꼭 같이 거론됐으면 하는 분은 바로 이분. 둘의 케미는 진정 환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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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가 무슨 시사회야... 하시던 분들. 제대로 했습니다. 서울에서도 극장가의 코어,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드라마 시사회가 열렸습니다. 바로 JTBC 금토드라마 '판타스틱' 얘깁니다.

 

사실 배우들도 반신반의했습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드라마는 제때 만들어서 방송 내기 바쁩니다. 바빠서 죽을 새도 없고, 밤을 밥먹듯 새 가며 납기일 맞추는 게 제격입니다. 게다가 극장에서 시사회를 하려면 대관해야지, 조명 마이크 시설 갖춰야지, 영상이 제대로 재생되는지 영상 플레이도 체크해야지, 음향도 알아봐야지, 정말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치고 제대로 작정해야 가능합니다. 물론 앞에서 말씀드렸듯, 본방 거의 1주일 전에 1회를 완성에 가까운 형태로 내놔야 한다는 짐이 제작진에게 떨어집니다.

 

그런데 그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 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이 행사를 기획한 JTBC 홍보마케팅팀과 영상을 만들어 주신 조남국 감독님을 비롯한 스태프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행사는 결국 아주 단순한 니즈, 즉 "어떻게 하면 드라마를 방송 전에 널리 알려 볼 수 있을까"하는데서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극장에서 시사회를 해 보자는 거였죠. 물론 전에도 비슷한 시도를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엔 제대로(사실은 티켓을 팔아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대형관에서 팬들과 몇몇 관계자들, 파워블로거들을 초청해서 해 보자는 생각을 한 겁니다.

 

 

 

뭐 기왕 판을 벌인 김에 이런 등신대 패널을 설치해 팬들이 사진 찍을 수 있는 플레이스를 만들었고

,

 

입장할 때 팬들이 써 넣은 사연에 따라 소원 들어 주기 이벤트도 진행했습니다.

 

 

 

 

이날 이벤트에서 특히 잊을 수 없는 한 분이 있습니다.

 

 

 

 

주상욱씨 팬 중에 "제 눈을 보고 제가 어디가 예쁜지 말해주세요"라는 사연을 쓰신 분.

 

 

 

 

다 쓰러졌습니다. ㅋ (얼마나 예쁜 분이었는지는 상상에...)

 

 

굳이 길게 말로 하는 것보다, 대체 어떤 행사였는지 직접 보시는게 좋겠습니다.

 

 

 

 

다행히 관객 반응도 좋더군요. (행사에 대한 반응 말고 드라마에 대한 반응^^)

 

 

 

 

 

박수갈채 속에 상영이 끝나고, 행운권 추첨 이벤트까지 이날의 행사가 끝났습니다.

 

 

아, 이미 앞에 감사 인사는 JTBC 홍보마케팅팀과 조남국 감독님에게 드렸지만 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JTBC의 장남 장성규 아니운서. 이날 제작발표회에 이어 시사회까지 환상의 진행 실력을 뽐냈습니다.

 

요즘 인터넷방송 '짱티비씨'로도 인기 폭발입니다.

 

짱티비씨 보실 수 있는 곳은 페이스북의 https://www.facebook.com/JjangTBC  여기나 http://afreecatv.com/jjangtbc 

 

 

 

영상을 퍼올까도 생각해봤지만 지금 짱티비씨는 짱티비씨고,

 

주제는 판타스틱.

 

혹시 그동안 판타스틱 예고 한번 못 보신 분이 있다면 엑기스를 드립니다.

 

옛다.

 

 

 

 

 

에... 아무튼 재미있다는 이야기고요.

 

첫 방송은 9월2일 금요일 밤 8시30분.

 

앞으로 두어달 동안 여러분을 흥분시킬 그 드라마입니다.

 

 

 

 

 

본방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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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이라는 대본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가장 마음에 든 부분은 이 드라마가 '여자(들)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그 다음은 불치병이라는 소재를 전혀 무겁지 않게 다뤘다는 점이었습니다. 작가와 톱스타라는 남녀 주인공의 구도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암 환자의 이야기를 다룬 국내 드라마 중에 기본적으로 로맨틱 코미디의 자세를 유지했던 드라마는 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판타스틱'의 주인공 이소혜는 인기 드라마 작가. 어렵다는 장르 드라마에서 연속 히트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에게는 '갓소혜'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 소혜는 드라마 속 시한부 인생 대목의 자문을 위해 암 전문의 홍준기를 자주 만나게 되고, 그러던 와중에 자신이 바로 유방암 말기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소혜.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집니다. 돈도 꽤 벌고 직업인으로서 기반은 굳혔지만, 버는 족족 돈은 가족들에게 들어갔습니다.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는 언니네가 들어가 살고 있고, 자신은 작업실에서 먹고 자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죠. 결혼은 커녕 연애도 언제가 마지막인지 가물가물.

 

이렇게 인생을 끝낼수 없다고 결심한 소혜는 마지막 나날을 화려하게  불살라 보기로 결심합니다. 10년 넘게 연락이 끊긴 친구들을 찾아내고, 평소 전혀 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에 도전합니다. 그러는 사이, 오래 전 뭔가 관계가 맺어질 뻔 했던 류해성이 드러내놓고 자신에게 대시해 오고, 주치의인 홍준기도 "우리 사귀는게 어떠냐"고 제안해 옵니다. 심지어 홍준기는 현재의 삶을 보너스라고 생각하는 암 환자입니다.

 

진작들 나타났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무튼 인생이 마지막 나날이 외롭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 아무튼 이렇게 해서 두 남자와 썸 타랴, 자신의 유작이 될 것 같은 드라마 집필하랴, 소혜의 분주한 나날이 이어집니다.

 

어쩌면 작가 본인의 판타지로 보이는 이 내용(연출자 조남국 감독은 이성은 작가에게 "본인이 하고 싶었던 연애 내용이 다 들어가 있는 거냐"고 대놓고 얘기하십니다 ㅋ) 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라는 점에서 볼 때 김현주와 주상욱은 최상의 조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따질 땐 따박따박 따지고 바늘끝처럼 신경이 예민한 여자이면서도 사랑스러움을 잃지 않는 소혜 역이라면 누가 봐도 김현주가 적격입니다. 나이는 먹었지만 마음 속은 어린이인 철없는 한류 스타 역할을 주상욱만큼 해낼 수 있는 사람도 드물죠.

 

특히나 팬들 앞에서는 허세 가득한 스타로서의 카리스마를 과시하지만 유일한 혈육인 할머니에게는 애교 덩어리. 겉으로 표현을 못 해서 그렇지 마음 속은 히트맨 아닌 '히타맨'인 남자의 면모를 보여줘야 한다면 더욱 그럴 겁니다.

 

 

 

캐스팅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았지만(누군가 말했습니다. "캐스팅만 안 해도 되면 드라마 프로듀서는 신의 직업"이라고), 어쨌든 두 주인공이 결정된 뒤에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습니다. 왕년의 거칠 것 없는 여고 퀸에서 지금은 거대 로펌 오너의 아내로 숨 죽여 살고 있는 백설 역을 박시연이 맡게됐고, 백설로 하여금 답답한 현실을 박차고 역시 자기의 삶을 찾게 하는 연하의 남자 상욱 역에 지수가 캐스팅됐습니다.

 

사실 순서상으로 가장 먼저 캐스팅된 사람은 의사 홍준기 역의 김태훈입니다. 무시무시한 연기력 덕분(?)인지 그동안 이상성격의 인물들 역할을 자주 맡는 바람에, 저는 이 배우의 진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그동안 보여지지 않았던 엉뚱한 김태훈의 면모가 드러날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 캐릭터들이 궁금하신 분들을 위한 영상. 저 다섯 주인공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보여줍니다. 특히 깨알같은 "이거 너무 잘생긴거 아니야?" ㅋㅋㅋ

 

 

 

 

 

 

생각해 보면 올해만큼 사회 각계에서 '여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해도 별로 없었던 듯 합니다. 각종 혐오 범죄와 여혐 논란, '미러링'이라는 생소한 단어와 함께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고, 그런 가운데 미국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이어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가 등장한 현실에 대해 다시 한번 사회 전반에서 '유리 천장'에 대한 언급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이런 현상을 예견해서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저희는 올해 '여성'이 뭔가 중심에 오는 이야기들에 계속 관심을 가져 왔습니다. 그냥 '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에 대해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여성, 세상을 자기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여성, 사랑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쟁취하는 여성, 옳고 그른 것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여성의 이야기가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것이 '욱씨남정기'의 욱다정 이요원이었고, 배경이 조선시대이기는 합니다만 '마녀보감'의 연희도 저주와 운명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당당한 여성상을 보여줬습니다. '청춘시대'의 다섯 주인공 역시 아직 미생의 존재인 여대생들이 부딪히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통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문제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아, 눈치 채셨겠지만 '죽음을 앞두고서야 생활로부터 해방된 여자'의 이야기는 '여자'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실 한국 사회의 모든 성인들은 사회에 나서는 순간 주위를 둘러 볼 여유 없이 '앞으로 앞으로' 자전거 페달 밟기를 강요당합니다. 다리를 멈추는 순간 자전거가 쓰러지고 너는 낙오된다는 교훈 속에서 수십년간 훈육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차라리 시한부 진단이라도 받았으면 좋겠다'는 푸념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물론 자녀 있는 분들에게는 큰일 날 얘기죠.^^) 

 

 

아무튼 '판타스틱'은 넓게 보아 남자든 여자든 '생활로부터 벗아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작은 판타지입니다. 어떤 계기에서든 조금 여유를 가지고, 그 지긋지긋한 생활의 쳇바퀴에서 살짝 내려온 사람들의 이야기이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잠시 즐겨 보는 것이 힘든 일상에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P.S. 이 드라마 1,2회를 보시고 나면 옛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질 겁니다. 문득 한참 떠올리지 않았던 이름들을 찾아 보고, 전화번호가 011이나 016으로 되어 있어도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다들 살기 힘들어서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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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 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본다.

 

 

'청춘시대' 티저에 쓰였던 윤동주 시인의 시 '병원' 입니다. 이미 대본을다 읽은 뒤였기 때문에, 티저에 들어간 저 싯구절이 더욱 적확하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사실 '청춘시대'를 본 사람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예상대로, '너무 자극이 약하지 않느냐' '전개가 느리다' '대체 누가 남자 주인공이냐'는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일정 정도의 기간이 지나고, 서서히 이 드라마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두 가지 정도의 이야기가 폭발력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첫째는 처음부터 '이 드라마에 굳이 주인공이 있다면 주인공일' 윤진명, 즉 한예리의 지독한 불행입니다. 그 불행이 단적으로 나타난 장면은 지긋지긋한 알바와 그 생활을 더욱 힘들게 만든 매니저의 갑질이 아니라, 어느날 급한 연락을 받고 병원으로 달려간 윤진명의 시선으로 바라본 어머니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병원 복도. 바닥에 주저앉은 어머니는 "수명아, 그동안 엄마 불쌍해서 못 간 거지? 내가 안다. 우리 아들. 6년 동안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를 되뇌며 주위 사람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있습니다. 누가 봐도,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다음 장면, 어디선가 다가온 의사는 말합니다.

 

"걱정마십시오. 안정됐습니다."

"...?"

"바이탈이 안정됐습니다."

"예?"

"원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침묵하는 어머니. 어떤 어머니들에게든 '아들의 죽음'보다 절망적인 상황이 무엇이 있을까요. 하지만 '청춘시대' 4회의 이 장면은 아들의 죽음보다 더 큰 절망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아들의 죽음에 오열하던 어머니가 '아들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 말에 고개를 떨궈야 하는 무서운 상황입니다.

 

이 장면을 바라보던 윤진명은 어머니의 시선을 외면하고 돌아서 가 버립니다. 그리고는 박재완(윤박)에게 '날 좋아하지 말라'는 말을 던지고 집(벨 에포크)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눈물을 보입니다. 우는 이유는 "삶이 고달파서"가 아니라 "손톱이 빠진게 너무 아파서".

 

스물 여덟의 대학 졸업반. 세 군데 알바를 뛰어야 간신히 이어갈 수 있는 삶. 항상 바라보고 있는 두 사채업자의 그림자. 병원에 누워 있는 식물인간 남동생. 그 손을 놓지 못하고 빚만 쌓아 가고 있는 어머니. '절망적'이란 말 하나로 설명하기 힘든 한 여자의 상황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는 사람의 어깨를 눌러 옵니다.

 

어쩌면 이런 무게를 현실에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바로 그 이유로 이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자신의 현실은 그래도 윤진명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람들이라야 이런 드라마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느낄 수도 있겠죠. 아무튼 그 '절실함'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때립니다.

 

 

 

 

 

 

 

또 하나의 동력은 막내 유은재(박혜수)의 첫사랑입니다. 은재가 은근히 좋아하는 복고풍 미남(대본의 표현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그런 유은재가 귀여워 미치겠지만 그 눈치없음에 환장할 것 같은 선배 윤종열(신현수). 이 구도가 너무나 깜찍했습니다.

 

과연 요즘의 스무살 안팎 청년들이 아직도 저렇게 깜찍하게 연애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저 유은재와 윤종열의 모습은 '요즘 대학생'이라기 보다는 한 10여년 전 대학생들의 모습과 더 닮아 있는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아직 철이 덜 든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처음 다가가 보여주는 동작이 상대에겐 '시비 걸기' 내지는 '사소한 일로 꼬투리 잡아 괴롭히기'로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특히나 상대가 경험이라곤 저혀 없는 초짜 중의 초짜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둘의 연애는 시작하기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것을 시청자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술에 취해 콧물 흘리는 모습조차도 귀여운 박혜수, 그 박혜수를 자기도 어찌할 줄 몰라 바라보지만 어쨌든 너무 귀여워서 죽을 것 같은 신현수. 두 배우의 매력이 이 드라마를 살린 원동력 중 하나라는 건 아마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겁니다.

 

 

 

 

사실 이 드라마가 얼마나 '리얼한지'에 대해서는 큰 자신은 없습니다. 아마도 이 드라마는 2016년의 진짜 대학생들 이야기이기 보다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세월이 흘러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진짜 순수했던 그 시절'의 그림에 더 가까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의 젊은 배우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아마도 매우 중요한 한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드라마를 떠올릴 때마다 그 배우들은 시청자들과 함께 시공을 넘어 누구에게나 있을 '젊은 날'의 기억을 공유하게 됐을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태곤 감독의 세심한 연출은 그 공감의 핵심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서 몇 회 남지 않은 '청춘시대'. 일단 이 드라마는 12회로 끝나지만 이 끝이 그냥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어디 가서 이만한 완성도의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정확히 언제가 될 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언젠가 어디서든 윤진명, 강이나, 정예은, 송지원, 유은재의 이야기를 다시 보게 될 날을 은근히 기대해 봅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부터는 한껏 웃으면서 현실 세계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판타스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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