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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식 상팔자]라는 드라마가 조용히 시청자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미 보고 계십니다. 하루가 다르게 반응의 크기가 달라지고 있죠. 이 드라마가 붐을 일으키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김수현이라는 작가의 힘을 가장 먼저 꼽지 않을 수 없죠. 이건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김수현이라는 작가는 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무소불위의 위력과 권위를 갖게 된 것일까요. 일단 대본만 읽어 봐도 그 깨알같은 설정과 마약같은 감칠맛에 감탄하게 되지만, 촬영장에 가 보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을영 감독을 비롯한 현장 스태프들이 그 대본을 영상화하는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시청자들 가운데 아래 나오는 세 장의 졸업사진을 보신 분은 안 계실 겁니다.

 

 

 

 

김수현 작가가 '무자식 상팔자' 전에 마지막으로 집필한 미니시리즈는 수애 김래원 주연의 '천일의 약속'입니다. 나날이 치매로 시들어가는 수애의 가련한 모습이 많은 시청자들을 안타깝게 했던 작품이죠.

 

이 드라마 방송 도중 주제와는 아무 상관 없이 디테일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었습니다. 수애가 요리하는 장면이었죠.

 

 

 

수애가 손에 들고 있는 마늘통을 냉장고 냉동실에서 꺼내고, 끓고 있는 찌개에 넣는 대목입니다. 이게 왜 문제일까요. 마늘을 빻아 놓고 냉동실에 넣고 쓰는 분들은 한둘이 아닌데.

 

한 시청자가 "냉동실에서 꺼낸 마늘이 너무 부드럽다. 그냥 찌개에 떠 넣을 정도일 리가 없다"고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렇습니다. 얼어 있어야죠. 이런 경우를 대비해 빻은 마늘을 아예 각설탕처럼 깍둑썰기를 해서 쓰시는 분들도 있죠.

 

아무튼 이 지적에 대한 김수현 작가의 반응(당시에는 트위터를 하고 계셨습니다)은 이랬습니다. "나도 열 받아 머리가 뜨끈했었어요. 아이고 음식 소품 담당이 제대로 챙겼어야 했는데. 그런 실수 나올 때마다 끔찍해요"

 

 

 

사실 모든 드라마가 찍다 보면 이런 사소한 실수를 하지만, 모든 작가가 이렇게 '머리가 뜨끈해 질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하지는 않습니다. 드라마 현장이 얼마나 군사 작전처럼 움직이는 지 다들 잘 알기 때문에 웬만한 건 그냥 넘어가게 돼 있죠. 그런데 '김수현 드라마의 디테일'은 그냥 디테일이 아닙니다. 그 디테일이 바로 드라마가 갖는 힘의 일부죠.

 

일단 '무자식 상팔자' 스튜디오로 한번 가 보시겠습니다.

 

 

 

JTBC 사옥 지하로 내려가면 이런 긴 복도가 있고,

 

 

그 끝에 J2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스튜디오 바로 앞 부조에선 연출부의 지휘가 한창입니다. 가운데 팔을 높이 드신 분이 바로 연출자인 정을영 감독. 살짝 보이는 자양강장제 상자가 제작진의 노고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건 스튜디오 안의 세트 모습. 마침 슛이 진행중이라 들어갈 수 없습니다. 멋모르고 문을 열었다간 정면에 앉아있는 저 연출부 스태프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겁니다.

 

안으로 들어가면 집안 방 방이 모두 세트로 설치되어 있습니다. 그중에서 할아버지(이순재) 할머니(서우림)의 방.

 

 

 

 

 

바로 이런 장면이 연출되는 공간입니다. TV 화면으로도 어렵풋이 보신 분이 있겠지만, 사진으로 보면 문 위쪽에 졸업사진이 죽 붙어있는게 눈에 띕니다.

 

 

네. 이 세 손자 손녀의 졸업사진입니다.

 

 

그 옆의 큰 가족사진. '산수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산수(傘壽)는 80세를 가리키는 이름이죠. 드라마에서 두 분의 나이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일은 없지만, 어쨌든 이 사진으로 보아 팔순의 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자식 상팔자'가 처음 기획되고 배우들이 모두 소집됐을 때, 제일 먼저 한 작업이 바로 이 가족사진 촬영이었습니다. 몇가지 버전의 가족사진이 촬영돼 목적에 따라 조금씩 수정을 거쳐 이렇게 쓰이고 있습니다.

 

화면에 저 깨알같은 사진 하나 하나가 비쳐질 일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예전에는 저 자리에 그냥 느낌이 비슷한 가족사진을 붙여 놓는 일도 적지 않았죠. 그렇다고 이 사진이 드라마 설정상 사용할 일도 아마 없을 것이고. 하지만 이런 디테일 하나 하나가 '김수현의 드라마'를 만들어 온 힘인 것입니다.

 

 

 

방 앞쪽에 보이는 할머니의 화장대. 할머니들이 쓰실법한 노인용 화장품 세트(아마도 자녀들 중 누군가가 사다 드린 것이겠죠) 앞에 정말 할머니 풍의 반달 빗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빗 하나까지도 어찌나 서우림 할머니 느낌인지.

 

아무튼 이런 것이 바로 디테일이고, 디테일이 곧 힘입니다.

 

 

다음엔 이 출연진들이 어떻게 드라마 속에 녹아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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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식 상팔자]라는 드라마를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유동근] 이라는 배우를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근 10년 이상 각종 여론조사에서 '왕 역할이 가장 어울리는 연기자' 순위의 1위를 석권해온,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자 중 하나죠.

 

그런 유동근이 최근 JTBC 주말드라마 '무자식 상팔자'에서 또 한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면서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지금까지 주로 맡아 온 역할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말이죠. 생각해 보면 이 배우야말로 변신의 대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무자식 상팔자'는 부모도 감쪽같이 모르게 미혼모가 된 소영(엄지원)을 중심으로 한창 이야기가 진행중입니다. 소영도 소영이지만 그 소영을 바라보는 아버지(유동근)와 어머니(김해숙)의 마음고생이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사고 있습니다.

 

 

 

위의 모습이 감동적인 것은 저 역할을 하고 있는 배우가 웬만하면 왕 아니면 대기업 회장 역만 하던 배우라는 것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듯 합니다.

 

한국 드라마에서 '유동근=왕'이라는 공식은 매우 선명하지만 사실 유동근이 왕 연기를 그리 많이 한 것은 아닙니다. 곰곰 생각을 해 봐도 '용의 눈물'에서 태종 역할, '장녹수'에서의 연산군 역할 외에는 똑부러지게 왕이라고 할만한 역할이 거의 없었다고나 할까요.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왕년의 '파천무'라는 드라마에서 세조 역을 한 적이 있지만 이걸 기억하시는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물론 '명성황후'에서 대원군 역, 그리고 '연개소문'에서 연개소문 역 등이 있지만 이건 엄밀히 말해 왕 역은 아니죠. 어쨌든 '굉장히 많이 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리 왕 역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유동근=왕'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횟수와는 무관하게 카리스마와 남성적인 힘 부문에서 비교할 만한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연기를 보여줬기 때문일 겁니다.

 

또 유동근은 '무자식 상팔자' 이전에도 몇 차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시청자들을 놀라게 한 전력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황신혜와 공연했던 드라마 '애인'.

 

 

 

 

불륜에 대한 새로운 조명으로 장안의 화제가 됐던 드라마입니다. 더구나 '유동근의 멜로드라마'라는 점이 관계자들 사이에선 특히나 화제가 됐죠. 잉크색 셔츠나 멜빵 바지처럼 그 전까지 '아저씨'들에게선 전혀 볼 수 없었던 차림새가 이 드라마를 계기로 유행할 정도로 반향이 컸습니다.

 

아마도 이 '애인'을 유동근의 첫번째 변신이라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반면 유동근의 코믹 연기는 주 무대였던 드라마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영화 쪽에서는 두어 차례 선보인 적이 있었죠. 차태현 손예진과 공연한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에서 유동근은 말이 선생님이지 사실상 건달 두목같은 연기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 영화가 사실상의 데뷔작이라 청룡영화상 신인상까지 손에 쥐었습니다. 

 

그 다음엔 '가문의 영광'의 건달 가문 장남 역이 생각납니다. 제왕의 품격은 어디로 갔는지 영화 속 건달 연기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그 뒤로 이 '가문' 시리즈는 지금 5탄이 제작중일 정도로 한국 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연작 성공사례가 됐습니다. 그 기틀을 닦은 것이 유동근의 건달 연기였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이것이 두번째 변신이라고 봐도 좋을 듯.

 

 

그런데 '무자식 상팔자'에서 유동근은 또 한번 변신했습니다. 그가 연기하는 희재는 호식(이순재)의 삼형제 중 장남. 평생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일하다 정년퇴직했고, 당뇨와 혈압이 지병이라 '절대 흥분하지 말자'를 좌우명으로 삼은 인물입니다. 더구나 천성이 우유부단(좋게 보면 그냥 온유)이라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옳고 저 말을 들으면 또 솔깃한 양반.

 

어디를 보나 평소 유동근이 자랑하던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지만, 놀랍게도 유동근이 이 역할을 맡고 나자 너무나 입던 옷처럼 잘 어울리는 마술이 펼쳐집니다. 어려서부터 유난히 총명했고 커서 기대대로 판사가 된 딸(엄지원)이 어느날 갑자기 만삭이 되어 나타났을 때, 딸에 대한 배신감도 배신감이지만 무엇보다 딸의 남은 인생이 걱정되어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많은 시청자들이 감동을 경험했습니다.

 

 

 

게다가 그 딸이 낳은 아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놓고, 이 말도 들었다 저 말도 들었다 흔들리며 결정하지 못하는 희재의 모습은 과연 유동근이 이 역할을 맡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할 정도입니다.

 

사실 체격은 크지만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남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입니다. 그리고 그런 캐릭터를 구상하고 드라마에 세운 것은 누가 뭐래도 김수현 작가의 힘이죠. 여기에 그 캐릭터가 유동근의 손에 들어가니 너무나 생기넘치는 모습으로 형상화됐고, 그것이 '무자식 상팔자'라는 드라마의 상승세에 큰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드라마의 중심은 아무래도 아이를 낳은 소영 본인이고, 그 뒤로는 아내와의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는 희명(송승환) 쪽으로 서서히 주도권이 넘어갈 전망입니다. 여기에 아직은 고양이와 개처럼 싸우고만 있는 성기(하석진)과 선배(오윤아) 사이, 그리고 졸지에 애아버지가 된 준기(이도영)와 도저히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신인류 수미(손나은)도 충분히 흥미를 자아낼 듯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기초가 있어야 가능한 법. 초반 이 드라마가 이만한 화제를 모으게 된 데에는 누가 뭐래도 유동근의 역할이 가장 컸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연기가 다른 사람 아닌 유동근의 놀라운 변신에서 나왔다는 것 또한 다시 한번 감탄을 자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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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결수] 두 편의 따끈따끈한 드라마가 방송 대기중입니다. 그중에도 '무자식 상팔자'는 전 방송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신상품입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작가이면서 연기자의 지명도를 능가하는 유일한 작가, 김수현 작가의 신작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배우들까지 이순재, 유동근, 김해숙, 송승환, 임예진, 윤다훈 등등등 이름만 대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연기 9단들로 포진해 있습니다. 한마디로 국가대표 드라마라고 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사실 그런 가운데서 찜찜했던 것은 다른 한 편의 드라마, 바로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이하 우결수)'였습니다. 전사적으로 '무자식 상팔자'를 지원하는 분위기라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방송되면서도 안팎의 관심이 덜 몰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 (개인적으로는 '엄마 왜 나는 학원 안 보내줘?'라고 묻는 둘째의 눈망울을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런 미안한 마음을 물리쳐주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23일의 온라인 공개.

 

 

 

사실 두 편의 드라마 모두 1회를 인터넷을 통해 선공개하면서도, 아무래도 더 큰 관심이 몰렸던 쪽은 '무자식 상팔자'입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작가와 배우들의 지명도에서 비교가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공개의 장이 된 포털사이트 다음에서도 '무자식 상팔자' 쪽에 훨씬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래도 온라인에서 힘을 발휘할 쪽은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는 성준/김영광 투탑. 10대와 20대 여성층을 사로잡을 수 있는 모델 출신의 두 신인이 어지간히 위력을 발휘해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대로, '우결수'는 방송 첫날 이미 3만 뷰를 넘기며 돌진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 갈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래 보시는 바와 같이 첫 방송 당일인 29일에는 12만 뷰를 바라볼 정도로 열기가 뜨겁습니다. 너무 많이 보시는게 아닌가 우려될 지경입니다.^^)

 

 

 

물론 다른 무엇보다 연출 김윤철 PD와 하명희 작가가 전력의 핵심입니다. 김윤철 감독은 누가 뭐래도 당시의 국민 드라마였던 '내이름은 김삼순'의 연출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명희 작가는 지명도에서는 다소 뒤질지 몰라도 매주 금요일 밤 주부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던 '사랑과 전쟁'을 오랫동안 지휘한 베테랑입니다.

 

스토리라인도 20대에서 50대까지 여성 시청층의 관심을 끌 만 합니다. 여기 한 엄마가 있습니다. 이름은 들자(이미숙). 남자 하나 잘못 만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탓에 두 딸의 결혼에 자신의 인생을 겁니다. 애들 시집 잘 보내는 것이 인생의 목표죠.

 

 

 

그런 소신 덕분에 큰 딸 혜진(정애연)을 의사 남편(김성민)에게 시집보내는 데 성공합니다. 물론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죠. 아무튼 그러고 나니 눈에 걸리는 것이 둘째 혜윤(정소민)입니다. 탐문해 본 결과 혜윤이 사귀고 있고, 결혼하겠다고 나선 상대는 겉보기에 그냥 그저 그런 정훈(성준)입니다. 아버지가 소아과 의사라는 것 외에는 탐탁치 않습니다.

 

당연히 들자의 평소 성격대로 갈라놓기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정훈네 집이 그렇게 희망 없는 집은 아니라는 정보가.... 이때부터 '그렇다면 너는 내 사위' 작전이 시작되겠죠?

 

 

 

이런 들자와 두 딸 커플 사이로 들자의 동생 들레(최화정)과 40대 후반 노총각 민호(김진수), 그리고 정훈의 선배이며 둘도 없는 '원조 나쁜 남자'인 레스토랑 사장 기종(김영광)과 겉보기에만 여권론자인 동비(한그루) 커플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바람기 있는 의사 남편과 재혼한 커플, 그저 사랑밖에 믿는게 없는 젊은 커플, 뒤늦게 사랑에 눈뜬 중년 처녀총각 커플, 그리고 나쁜 남자인 걸 뻔히 알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는 겉으로만 쿨한 커플까지 네 커플이 포진해 있습니다. 이 네 커플이 서로 죽이네 살리네, 오만가지 사랑의 양상을 그려내는 드라마가 바로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줄여서 '우결수' 입니다.

 

 

 

 

물론 이 드라마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은, 비록 자신은 연애 상대가 없지만 온 커플을 다 휘젓는 엄마 들자입니다. 두 딸, 여동생, 그리고 둘째딸의 친구까지 네 커플의 여자 쪽은 모두 들자의 영향권에 있는 인물들이죠.

 

그런 들자 역을 맡은 이미숙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 훨씬 크고 우렁찼습니다. "난 겁날게 없는 사람이야! 남자 없는 집이라고 우습게 볼 생각이거들랑 애저녁에 집어 치워! 내 딸 해치는 놈은 난 죽을 때까지 쫓아가서 끝장을 봐!" (뭐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이런 대사를 이미숙보다 더 잘 소화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습니다.

 

('신데렐라 언니'에서보다 전투적이고, '천일의 약속'에서보다 딸 사랑이 지극합니다. 그리고 1부 엔딩의 바나나 우유 신... 압권입니다.^^)

 

 

 

 

23일 시사회장에서 유리알같이 매끄러운 '우결수' 1회를 봤습니다. 영상미 하나만큼은 정말 대한민국 어떤 드라마에 비겨도 부족함이 없는 장인 정신이 돋보입니다.

 

 

솔직히 말해, 같은 편이지만 흠을 잡자면, 약간 아쉬웠습니다. 대본으로 보았을 때의 재미가 95라면 드라마로 느낀 재미는 88 정도? 그만큼 대본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의 완성도가 높았던 반면, 역시 20대 초반 연기자들의 대본 구현 능력은 좀 떨어졌다고 볼 수 밖에 없을 듯 합니다. 이쪽에서 퉁 때리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아주 적절한 간격을 두고 저쪽에서도 퉁 때리며 대사의 랠리가 이어지는 리듬감, 그 화려한 리듬감까지 기대하기엔 성준-김영광-정소민-한그루 라인은 아직 더 많은 숙련이 필요할 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네 젊은 배우들은 비주얼의 위력을 뽐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굳이 꼽자면 어린 시절의 송승헌을 연상시키는 성준이 역시 발군.

 

 

 

 

또 하루 종일 정애연과 함께 검색어 순위를 오르내리던 한그루도 차세대 베이글녀 자리를 내놓지 않을 분위기였습니다.

 

아무튼 여기 저기서 하명희 작가의 '대삿발'은 불을 뿜었습니다. "내가, 니가 며칠 안에 다시 나 찾아온다는데 10원 건다." "돈 잘버는 아들은 며느리 거, 똑똑하고 학벌좋은 아들은 장모 거, 그리고 신용불량자 아들만 내 거라더라" 같은 대사는 쉽게 잊혀지지도 않습니다.

 

여자가 살아가는 데 있어 신경써야 할 돈이라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뭣보다 첫째는 혼수, 그리고 둘째는 위자료일 겁니다. 결국 '우결수'는 그 두 가지 돈에 대한 드라마가 될 전망입니다.

 

 

 

20대라면 '바로 내 연애' 이야기, 30대라면 '내가 왜 연애에서 성공하지 못했나'하는 이야기, 40대라면 '내가 노처녀라면 겪었을 법한 이야기', 50대라면 '내 딸들이 내 속 썩였던 이야기'를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예전에 '아내의 자격'이 방송되던 시절, 많은 20대, 30대 미혼녀들이 "내가 결혼하면 겪게 될, 너무 리얼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호러 같더라"는 애기를 했습니다. '우결수'도 그 못잖은 리얼한 이야기지만 호러보다는 웃음이 넘칩니다. 일단 1회를 보시고 직접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매주 월,화요일 11시를 기다리시면 됩니다. 물론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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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식상팔자] 새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 첫회가 27일 방송됐습니다. 물론 이미 지난 22일, 제작발표회와 함께 온라인으로 1회가 선공개된 터라 미리 보신 분들도 적지 않겠지만, 역시 드라마는 본 방송으로 봐야 제맛인 듯. 방송 시간에 맞춰 여러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는 모습이 역시 믿음직 합니다.

 

'무자식 상팔자'는 방송 전부터 한국 드라마를 대표하는 김수현 작가의 집필로 가장 큰 관심을 모아 왔습니다.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한류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로 한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통한다는 것을 증명한 분이기도 하죠.

 

그리고 오랜만에 자신의 본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주말형 홈 드라마로 돌아왔습니다. 일찌기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그리고 최근에는 '인생은 아름다워'로 건재를 과시했던 장르죠. 이번에는 '무자식 상팔자'.

 

대본을 보는 순간 '이것이 최고 작가의 관록'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대사의 위력.

 

 

 

 

사실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가 어떤 스타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겠고, 어지간한 배우들은 아예 그 대본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대본을 먼저 보고 드라마를 보면 제아무리 최고의 연기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대본을 100%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눈으로 대본을 읽으면 10초 정도에 뇌에서 처리하게 될 정보를 드라마로 보게 되면 4~5초에 지나가게 됩니다. 대부분 작가들의 드라마는 그 속도에 맞춰 쓰여지는게 보통이죠. 하지만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꼬박 10초를 써야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이 꽉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로 만들어진 상태에선 대사의 맛이 100% 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런 건 드라마를 먼저 보고 대본으로 나중에 보는 분들도 공통적으로 느끼곤 합니다. '아, 그때 그 대사에 이런 의미가 또 들어 있었구나'하는 걸 발견하게 된다는거죠. 재방송을 봐도 재미있게 느껴지는 이유랄까요.^^)

 

 

 

 

'무자식 상팔자' 첫회는 그 '대사의 신'이 또 한번 화력시범을 시작했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서울 근교의 지방 소도시. 아직도 정정한 80대 부모와 세 아들 부부, 그리고 손자들이 한 동네 이웃 사이에 모여 살고 있습니다. 첫회에선 일단 이렇게 '어른들'의 캐릭터가 소개되고, 장남의 맏딸이며 판사인 소영(엄지원)이 느닷없는 임신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내용이 등장했습니다. 정말이지 속도감이며 말맛이 지금까지의 대표작들에 비쳐 손색이 없습니다.

 

 

 

 

김수현 선생의 작품이 늘 그렇듯 이번 드라마도 마땅히 딱 꼬집어 누가 주인공이라고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건으로 보면 핵심 인물은 혼전 임신으로 초점이 된 엄지원이라고 봐야겠지만, 세 형제와 며느리 사이에 이야기가 충분히 분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무자식 상팔자'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아버지와 세 형제의 캐릭터입니다. 특히 아버지 역의 이순재. 언제 어떤 작품에서든 진가를 드러내는 한국 드라마의 간판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이번 캐릭터는 '잔소리 폭격기'.

 

수돗물 한방울에서 더덕구이에 붙은 고추장 양념까지 어느 것 하나 눈에 거스르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다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하기도 쉽지 않지만, 원래 잔소리는 맞는 말이 더 지긋지긋하 법이죠. 게다가 한번에 끝나는 법도 없고, 한번 꼬투리를 잡히면 죽을 때까지 되풀이하는 집요함까지 갖춘 캐릭터.^^

 

평생을 같이 살아 온 할머니(서우림)는 이제 습관이 됐을 법도 하지만, 60년을 함께 있어도 잔소리는 역시 잔소리. 서서히 할머니도 이 끝없는 잔소리에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합니다.

 

 

 

 

장남 희재 역의 유동근은 속없는 무골 호인.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듯, 저 말을 들으면 저 말이 맞는 듯. 일생을 조용조용 지내온 소심한 장남이지만 한 순간에 일생의 수양이 물거품이 됩니다. 시집 안 간 딸이 만삭이 되어 온 광경을 보면 아니 그럴 수가 없겠죠.

 

 

 

둘째 희명 역의 송승환. 중견 기업 임원으로 일하다 정년퇴직한 인물. 회사 생활에선 유연하고 원만한 사람이지만 그런 사람들이 막상 출근할 일이 없으면 급속도로 위축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히나 경제권을 아내(임예진)에게 빼앗긴 뒤라 더욱 심합니다.

 

 

 

세째 희규 역의 윤다훈. 두 형에 비해 공부도 짧고 생각도 짧은 막내. 대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고 나이에 비해 생각도 젊은 인물입니다. 사실 어찌 보면 '김수현 드라마'에서 윤다훈이 계속 유지해 가고 있는 그런 캐릭터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추가된 건 '닭살 부부'. 슬하에 아이 없는 커플로, 아내 역의 견미리와 나이를 잊고 펼치는 닭살 행각이 웃음을 자아냅니다.

 

 

첫회의 엔딩은 다시 한번 갈등이 폭발한 희명 부부가 신음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는 데서 끝났습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엔딩 때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가며 넘어졌던 걸 생각하면 이번엔 혹시 매회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마지막이 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아무튼 대본을 다 읽어 본 저로서도 2회가 어떻게 만들어져 나올지 궁금합니다.

 

 

이번 작품을 앞두고 이번달 여성중앙과 함께 하신 인터뷰입니다. 흥미롭습니다.

http://woman.joinsmsn.com/article/article.asp?aid=1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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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지상파 TV가 방송의 전부이던 시절의 방송인들은 흔히 그런 말을 했습니다. "방송이 제일 강력한 미디어인데 대체 방송을 어떻게 다른 매체로 홍보하냐?" 그래서 TV 드라마를 널리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채널을 통해 예고를 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지상파 방송에서는 아마도 이 상식이 아직 깨지지 않았을 겁니다. 하루 평균 시청률 5%가 넘는 채널을 갖고 있다면 자기 채널을 이용한 홍보가 최고일 수밖에 없죠. 물론 현재 지상파 방송보다 유력한 매체가 없는 건 아니죠. 주요 포털의 메인 홈페이지에 노출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만, 거기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생각하면 사실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지상파가 아닌 방송사가 콘텐트를 널리 알리고 살아남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고심 끝에 한가지 수를 냈습니다. [만약 방송 드라마를 방송이 아닌,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것이죠.

 

 

 

 

JTBC는 이번에 한국 TV 사상 처음으로 두 편의 드라마를 본 방송보다 앞서 온라인으로 론칭시켰습니다. 바로 27일부터 방송되는 '무자식 상팔자'와 29일부터 방송되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입니다. '무자식'은 22일, '우결수'는 23일부터 온라인으로 공개됩니다. 포털사이트 다음, 그리고 JTBC(www.jtbc.co.kr)와 중앙일보(joongang.co.kr) 홈페이지를 통해서입니다.

 

 

 

 

('무자식 상팔자'나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동영상을 카페, 블로그, SNS로 공유하시기만 해도 캔커피가 공짜! 이벤트 진행중입니다. 선착순입니다.

 이벤트 페이지 바로가기는 이쪽: http://home.jtbc.co.kr/Event/Event.aspx?prog_id=PR10010127&menu_id=PM10015634 )

 

드라마를 '첫 방송 10월27일 오후 8시50분'이라고 예고하면서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러니까 예고편도 아니고, 특집판도 아니고, '미리보기'도 아니고 정규 1회를 먼저 온라인으로 내놓는다는 겁니다. 한국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 반대도 만만찮았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상식적인 반응은 당연히 이런 겁니다. "아니, 그걸 인터넷으로 먼저 다 보여주면, 누가 본방을 봅니까?"

 

물론 다 보여주는게 아니라 1회만 보여준다고 해도 불안해 하시는 분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뿐이지, 미국에서는 어느 정도 상식이 되어 가고 있는 사전 홍보 방법입니다.

 

 

 

 

올해 7월, 미국 NBC는 9월에 시작하는 새 시리즈 6편의 첫회(파일럿)를 온라인으로 먼저 풀었습니다. 'The New Normal' 'Go On' 'Guys With Kids' 'REVOLUTION' 'Animal Practice' 'Chicago Fire' 까지 6편을 길게는 한달 전, 짧게는 2주 전에 인터넷을 통해 공개한 것입니다. 방송사 자체 홈페이지는 물론, 유튜브나 훌루 등 온갖 사이트가 동원됐습니다. 물론 광고도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온라인으로 먼저 보여주면 본방 시청률이 떨어질 게 아니냐는 얘기였죠. NBC 드라마의 온라인 론칭을 다룬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들입니다.

 

맨 위의 댓글이 그런 우려를 담고 있지만 그 아래 댓글들이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 줍니다.

 

 

 

 

미국 드라마업계에서 수년간의 실험 끝에 확인한 것은, "온라인 선공개가 본방 시청률을 떨어뜨리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온라인으로 그 첫회를 먼저 본 사람들이 본방송 1회를 다시 볼 가능성은 별로 없겠죠. 하지만 먼저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그 드라마에 대한 평을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온라인 선공개를 경험한 사람에 비해 몇 배나 되는 새로운 시청자들이 본 방송에 관심을 갖게 된다는 얘깁니다.

 

NBC가 온라인 선공개에 적극적인 것은 당연히 올 연초, 뮤지컬 드라마 'SMASH'를 온라인으로 론칭한 것이 드라마의 성공에 좋은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NBC만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FOX의 'New Girl', ABC의 'The River'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입니다. 그리고 온라인선공개는 점점 더 확산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물론 온라인으로 드라마를 론칭하는 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닙니다. 홍보나 마케팅은 어디까지나 보조 수단일 뿐, 드라마 성공의 키는 작품의 질이 쥐고 있죠.

 

 

 

 

사실 드라마의 질이 문제가 있는 경우, 온라인으로 먼저 공개하는 것은 글자 그대로 '쥐약'이 될 수 있습니다. 악평이 더 널리 퍼질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라면, 온라인으로 선공개를 하건 말건 망가지는 데에는 전혀 차이가 없을 겁니다. 본 방송으로 시작해도 망할 드라마는 망하고 말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JTBC가 공개하는 두 편의 드라마는 모두 퀄리티 면에서 확신을 갖게 합니다. '무자식 상팔자'는 김수현-정을영 콤비에 이순재 유동근 김해숙 송승환 등 연기 9단들이 즐비합니다.

 

 

 

29일부터 방송되는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도 '내 이름은 김삼순'의 김윤철 PD가 연출을 맡고 이미숙 최화정 김성민 김진수 등 베테랑들이 탄탄한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론칭을 하면서 기대하는 것은, 시청자의 선택입니다. 좀 더 긴 유효기간에 걸쳐 좀 더 많은 시청자들이 JTBC의 콘텐트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것이죠. 늘 보시던 채널만 고집하다 보니, 굳이 채널 바꿀 필요성을 못 느껴서, 어쩐지 별로 볼 것도 없을 것 같아서 시도하지 않았던 분들이라면 이 기회에 한번 자신의 취향을 시험해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지금 '무자식 상팔자' 관련 이벤트는 너무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버스 사냥 이벤트를 비롯해 티저 사냥 이벤트, 동영상 퍼가기 이벤트 등등, 상품 갯수만도 2000개 이상입니다.

 

http://drama.jtbc.co.kr/mujasik/?cloc=jtbc|header|drama

 

이런 기회를 놓치시면 억울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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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방송계에서 '김수현 드라마'만큼 확고부동한 브랜드는 없습니다. 그 뒤를 잇는 스타 작가들도 즐비하지만, 그 누구도 '김수현'이라는 이름만큼 강력한 신뢰를 구축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런 김수현 작가의 새 드라마가 오는 27일부터 JTBC에서 방송됩니다. 제목은 '무자식 상팔자'. 들어 보신 분도 있고 아닌 분도 있겠지만, 이순재 서우림 유동근 김해숙 송승환 임예진 윤다훈 견미리 엄지원 등 출연진도 화려합니다.

 

눈을 크게 뜨시면 시내에 '무자식 상팔자'라는 광고를 옆구리에 붙인 버스들이 달리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 버스를 사냥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아이패드2, 에스프레소 머신 등 상품이 쏟아집니다.

 

 

 

 

 

 

이렇게 사진으로 찍으시면 됩니다.

 

(안내 페이지는 이쪽)

http://home.jtbc.co.kr/Board/Bbs.aspx?prog_id=PR10010127&menu_id=PM10015317&bbs_code=BB10010230

 

 

그렇게 썩 잘 찍지 않아도 됩니다.

 

대강만 보이면 합격!

 

 

 

사실 이렇게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이려면 아무래도 작품에 자신감이 있어야 할 건 당연지사. 그리고 그 방송 한달 전인 지난 25일, 서울 신세계 백화점에서 그런 신뢰를 확인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바로 한국 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열린 '방송전 드라마 시사회' 입니다. 드라마 방송 직전 열리는 기자 간담회에서 전편을 상영한 드라마는 몇번 있었지만, 일반 시청자들을 상대로 한 드라마 시사회는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사실 드라마가 방송되기 전, 방송 관계자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일반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입니다. 대본을 보고 짐작하는 방법이 있지만, 대본을 보고 나서 이 드라마가 어떤 모양으로 그려질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일반 시청자가 아닙니다. 대개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볼 수가 없는 사람인 경우가 많죠.

 

그래서 한번쯤 우리가 방송할 드라마를 일반 시청자들이 먼저 본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가 배우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장소가 문제였죠. 극장을 빌려 상영하면 간단하지만 사실 비용이 만만찮습니다.  만원 기준으로 표값을 다 계산해야 합니다. 즉 시청자 한 분을 모시는데 극장표 1장 값이 드는 겁니다.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다 문득 백화점마다 있는 문화공간에 생각이 닿았습니다. 신세계 백화점 측도 OK. 당초 목적대로 2~3회 정도 시사회를 하는 것은 불발이었지만 어쨌든 첫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9월25일로 시사 날짜가 잡혔습니다.

 

(그러니까 저 위에 있는 분들이 저희 사장님보다 먼저 이 드라마를 보신 겁니다.)

 

 

 

물론 뭐든 처음 하려면 문제가 생기는 법. 회사에선 멀쩡하게 돌아가던 DVD가 현장에서 말썽을 부립니다. 회사에서 황급히 테이프와 데크를 공수했습니다. 아찔한 순간은 지나가고, 시청자들이 입장하셨습니다. 약 200분 정도.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느낌으로는 당연히 시사 성공. 하지만 뭔가 확인을 해야 합니다. 설문지 수거 및 분석.

 

 

 

 

그렇게 해서 약 200명의 시청자 중 144분이 응답해 주신 설문지 분석 결과 10점 만점에 9.07의 평점으로 '무자식 상팔자'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습니다.

 

필요하다면 드라마를 여기서 보여드리고 싶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사실 모든 분들이 선명하게 사진을 찍지는 못합니다.^^

 

아무튼 결론은, 이렇게라도 버스 사냥에 참여해 보시라는 얘깁니다.

 

의외로 찍기가 쉽지 않아서(폰카 켜는 사이에 지나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경쟁률 그리 높지 않습니다. 당첨 기회를 보면 이만한 이벤트도 드물 겁니다.

 

항상 긴장을 놓치지 마시고, 버스 정류장에서는 전화기를 꺼내 들고 계세요. 그럼 행운이 찾아올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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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없는 꽃집'이라는 일본 드라마는 사실 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제목은 스치듯 들어본 기억이 있었지만, 사실 일본 풍의 순정 멜로 드라마는 제게 대부분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호평일색인 '1리터의 눈물' 같은 드라마도 힘겨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는 '미녀 혹은 야수' 풍의 코믹터치입니다.)

 

게다가 여주인공이 다케우치 유코라는 것도 그닥 관심이 가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미인이라는 데에 이견을 달 수는 없지만 취향이라는 것도 있어서...^^ 그런데 어쨌든 회사 일 때문에 이 '장미없는 꽃집'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네. 2일부터 JTBC에서 방송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장미없는 꽃집'은 정말이지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드라마였습니다. 그야말로 드라마의 내숭이라고나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드라마는 '전혀' 순정 멜로 드라마가 아닌 겁니다.

 

 

 

줄거리. 에이지(카토리 신고)는 작은 역 앞 꽃집을 경영하며 살아가고 있는 30대 가장. 아이 엄마는 딸 시즈쿠(야기 유키)를 낳다가 죽었고, 그 추억 때문에 이 꽃집은 장미를 팔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미모의 맹인 여성 미오(타케우치 유코)가 꽃집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외로운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게 됩니다. 여기에 우연히 에이지에게 얹혀 살게 된 호스트(마츠다 쇼타)까지 얽히며 미오와 에이지의 밀당이 시작됩니다.

 

...뭐 이렇게 쓰면 역시 전형적인 순정 멜로드라마의 시작입니다. 남자 주인공 에이지는 심지어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가도 일부러 노인 뒤에 줄을 설 정도로 착하디 착한 남자. 이유는 "성질 급한 사람이 노인 뒤에 줄을 섰다가 빨리 계산하지 못한다고 구박이라도 받을까봐"입니다. 당연히 일본 드라마의 남주답게 절대 애정 문제에서도 박력이나 패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오에게 끌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절대 미오에게 자신의 흑심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저쪽은 처녀고 나는 애아빠...'라는 식의 한국적인 생각 아닙니다. 그냥 일본 풍으로 주저하는 겁니다. 아주 그냥.

 

그런데, 문제는 이게 이 드라마의 주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선 2회쯤 되면 미오가 사실은 맹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새로운 사실. 즉 처음에 설정되어 있던 인물들의 구조가 회를 거듭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구성된다는 게 이 드라마의 매력입니다. 즉 순정 멜로인 줄 알았던 장르가 미스터리 휴먼 성장 드라마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죠.

 

 (아니...뭐... 그렇다고 링은 아니고...)

 

출연진입니다.

 

薔薇のない花屋

 

2008年3月24日放送終了

 

香取慎吾  汐見英治
竹内結子  白戸美桜
釈由美子  小野優貴
松田翔太  工藤直哉
八木優希  汐見 雫 

 

 


 

가토리 신고는 일본 문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들어봤음직한 슈퍼 아이돌 그룹 SMAP의 막내입니다. 아무리 막내라 해도 77년생. 이제 3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어쨌든 팀내 캐릭터는 장난꾸러기 막내라서 이전까지 '손오공' 류의 캐릭터나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황당무계한 변신이 그의 주업이었지만, '장미없는 꽃집'에서는 진지한 정극 연기자로 새롭게 탄생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 친구가 나이가 들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팬들이 보면 큰일나겠군요.)

 

 

 

타케우치 유코. 일본을 대표하는 순정파 여배우.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선이 특기입니다. 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을 휩쓴 이른바 민폐형 여배우 캐릭터의 화신이라 할 수 있죠.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기무라 타쿠야와 공연한 '프라이드'.

 

2005년 나카무라 시도와의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지했지만 2008년 이혼과 함께 복귀합니다. 그 복귀작이 바로 이 '장미없는 꽃집'입니다. 그 뒤로 다시 승승장구. 최근에는 미국 ABC 드라마 '플래시포워드'에도 출연합니다.

 

 

 

아마도 '로스트'의 김윤진이 성공을 거둔 이후 미국 드라마 시장에서 아시아 여배우에 대한 새로운 가치 판단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플래시포워드는 시즌1으로 제작 중단.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배우는 타케우치가 아니라 시즈쿠 역의 아역 야기 유키입니다. 눈물 연기는 기본. 물론 '백한번째 프로포즈'를 쓴 천재 작가 노지마 신지의 위력이기도 하겠지만, 드라마 중반에 나오는 명장면 '시즈쿠 찾기' 등을 통해 야기는 일본 최고의 아역으로 자리잡습니다.

 

 

 

그밖에 눈길을 끄는 배우는 '꽃보다 남자'에 나왔던 마츠다 쇼타,

 

 

 

그리고 일본의 야쿠자 전문 배우 데라지마 스스무가 아직도 '청춘의 로맨스'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에이지 앞집의 카페 주인으로 등장, 웃음을 자아냅니다.

 

 

한번 보시면 다음 진행이 궁금해지는 드라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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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1504)의 만행으로 수많은 신하들의 피를 흘린 연산군. 이해 4월 인수대비도 숨을 거두고, 이제 연산군의 만행을 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제부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 그로부터 2년 뒤 연산군은 장녹수와 노닐다 말고 권좌에서 내려와 유폐되는 신세가 됩니다. 왕좌는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중종)에게 물려주게 되죠.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연산군은 왜 진성대군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2년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됐을까요.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도 다뤄지지만 연산군이 폐위될 때 거론된 수많은 죄 중에는 '패륜'이 으뜸입니다. 패륜 중 하나는 앞글에서 얘기했다시피 병중인 할머니 인수대비를 '이마로 박치기 해' 충격으로 사망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큰어머니고 아버지 성종의 형수인 월산대군부인(승평부부인) 박씨와의 사통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 (1506, 정덕1)  7월 20일(정유)
 
월산 대군의 처 박씨의 졸기
 

월산 대군 이정(月山大君李婷)의 처 승평부 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 박씨와의 관계는 - 일단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 연산군의 폐위에 매우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중종반정의 핵심인 박원종이 바로 승평부부인의 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날이 7월20일, 연산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것이 9월2일입니다. 그러니 정말 직접적인 동기가 아닐 수 없죠. 아무튼 연산군과 박씨를 둘러싼 추문 묘사는 실록에서도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항상 대궐안에서의 연회에 사대부(士大夫)의 아내로서 들어가 참여하는 자는 모두 그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하고, 미모가 빼어난 이는 녹수를 시켜 머리 단장이 잘 안되었다고 핑계대고 그윽한 방으로 끌어들이게 해서는 곧 간통했는데, 혹 하루를 지난 뒤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시 내명(內命)으로 인견(引見)하여 금중(禁中)에 유숙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부인은 세자의 양모라는 핑계로 항상 금내(禁內)에 머물게 하였고, 성종의 후궁 남씨(南氏)도 대비의 이어소(移御所)에 있으면서 자못 총행(寵幸)을 입어 추한 소문이 바깥까지 퍼졌다.

常於內宴, 士大夫妻人參者, 皆令書其夫姓名, 付諸衣領, 有姿色者, 令綠水, 諉以梳粧不整, 引入幽房, 卽通焉。 或經日後出, 或復以內命引見, 留宿禁中者, 亦數有之。 月山大君夫人, 稱爲世子養母, 常留禁內。 成宗後宮南氏, 亦在大妃移御所, 頗見寵幸, 醜聲聞外。

 

'녹수를 시켜'의 녹수는 당연히 장녹수. 또 다른 기록.

 

중종 5년 경오(1510,정덕 5) 4월17일 (임인) 
 평성부원군 박원종의 졸기
 
원종은 순천(順川) 사람이며, 무과로 출신(出身)했는데 풍자(風姿)가 아름다웠고, 폐주(廢主) 말년에 직품이 정2품에 이르렀다. 원종의 맏누이는 월산 대군 이정(月山大君李婷)의 아내로 폐주가 간통하여 늘 궁중에 있었는데, 폐주가 특별히 원종에게 숭정(崇政)의 가자를 주니 원종이 분히 여겨 그 누이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 하였다.


元宗, 順天人, 由武擧進, 美風姿。 廢主末年, 位至正二品, 元宗之姉, 乃月山大君婷妻也, 廢主通焉, 長在宮中。 廢主特授元宗崇政加, 元宗憤之, 語其姉曰: “何爲忍生, 飮藥而死。

 

이 주장에 따르면 박원종이 누이의 죽음을 강요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실 연산군과 박씨의 관계가 사실이겠느냐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의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박씨의 나이. 박원종이 1467년생이고, 맏누이인 승평부부인은 1455년생으로 전해집니다. 그럼 박씨는 죽을 때 만 51세...연산군이 1476년생이니 21세 연상입니다.

 

뭐 나이가 사랑의 장벽이 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51세도 아니고 15세기의 51세에 과연 임신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시절의 51세면 사실상 할머니에 가까운데 도대체 무슨 마술로 연산군을 미혹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좀 의심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남녀관계였는지, 양어머니와 아들 관계였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연산군이 매년 수백필의 비단과 수십석의 곡식을 박씨에게 내린 것이 사실이고, 불교를 숭상하던 박씨의 집에 사대부집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풍기문란으로 미운털이 박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연산군과 함께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 것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당초의 궁금증으로 돌아가서. 연산군은 왜 최대의 라이벌인 진성대군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일설에는 정현왕후(자순대비)가 키워준 공 덕분에 진성을 친동생처럼 아꼈다고 하지만 지난번 글에서 '그날 밤(성종의 후궁들을 죽이던 1504년 3월20일)'의 기록에 연산군이 자순대비 침전 앞에 칼을 빼들고 난입해 당장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되어 있는 걸 보면 이런 설명은 그닥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5card.tistory.com/1012 참조.)

 

자신의 권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심복 신수근의 딸과 혼인한  진성대군이 '딴 마음'이 없다고 확신한 걸까요. 이런 설명도 신통치 않은 것이, 진성이 아무리 다른 마음이 없어도 그가 살아 있는 한, 모든 반란 세력은 일단 그를 옹립하고 일어난다고 봐야 합니다. 반대로 연산군이 죽이려고 결심만 했다면, 반란 사건하나를 조작하고 진성대군을 그 수괴로 조작하는 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죠.

 

무엇이 이유였을까요. 마침 며칠 전 '인수대비' 종방연 자리에서 정하연 작가를 뵌 김에 여쭤봤습니다.

 

- 대체 연산군은 왜 진성대군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정: 허허. 죽일 새가 없었던 것 아닐까요?

 

- 왕위에 12년이나 있었는데요.

정: 인수대비가 살아 있는 동안은 꿈도 꿀수 없는 일이었죠. 조선왕조의 이념은 충보다 효가 항상 우위에 있었어요. 대비가 살아있는 한 어떤 왕도 그 대비를 넘어설 수 없었으니까요. 광해군이 쫓겨난 가장 큰 이유도 패륜, 바로 모후는 아니지만 선왕의 정궁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이었죠. 그러니 기회가 있었다면 인수대비 사후 뿐이에요.

 

- 인목대비 사후에는...

정: 의미나 시간이 없었죠. 이 정권은 갑자사화와 인수대비 사망 이후에 급격히 무너집니다. 사람을 죽이면 권력이 강화될 수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 할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할머니를 핍박해 죽게 했다는 것은 연산군에게 치명적이었던 겁니다. 박원종 아니라 누구라도 뒤집어 엎었겠죠. 연산군 스스로도 이미 민심과 신심이 모두 자신을 떠나 자신이 왕위를 오래 보전할 수 없을 것임을 눈치챘습니다.

 

(연산군이 자신의 앞날을 예감했다는 내용은 실록에도 전해집니다. 1506년 8월23일, 왕위에서 밀려나기 대략 열흘 전의 기록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 8월23일 (경오)
 
후원에서 나인들과 놀며 불의의 변고를 예감하다. 전비와 장녹수 두 계집이 슬피울다
 

내거둥이 있었는데, 왕이 후정(後庭) 나인을 거느리고 후원(後苑)에서 잔치하며 스스로 초금(草笒) 두어 곡조를 불고, 탄식하기를,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는 것
하며, 읊기를 마치자 두어 줄 눈물을 흘렸는데, 여러 계집들은 몰래 서로 비웃었고 유독 전비(田非)와 장녹수(張綠水) 두 계집은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으니, 왕이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하며, 각각 물건을 하사하였다.

 

有內擧動, 王率後庭內人, 宴後苑, 自吹草笒數闋, 嘆曰: “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吟訖淚數行下, 諸姬共竊笑, 唯田、張二姬, 悲噓飮泣, 王手撫其背曰: “今太平日久, 安有不虞之變, 然脫或有變, 汝必不免。” 各賜物。

 

정하연 선생의 말대로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정치력은 극도로 악화됩니다. 언문으로 연산군을 욕하는 벽보가 붙은 사건은 연산군이 민심을 잃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고, 그 측근 중에는 무력으로 정국을 끌고 갈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연산군의 측근 중 하나고 두 차례의 사화에서 모두 승자였던 노련한 총신 유자광이 어느새 중종반정의 주역으로 변신했다는 것은 연산군의 총신들 중에도 정권 보위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연산군 집권 말기 그 측근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구화사적(構禍事蹟)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병인년(1506)에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과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반정을 하려 할 때에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을 시켜 비밀리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생각을 떠보게 하였다. 이에 수근이 말하기를,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것이니 나는 말할 수가 없소.” 하였다. 곧 연산(燕山)의 비(妃)는 수근의 누이요, 중종(中宗)의 전 왕비는 수근의 딸이기 때문이다.

(守勤曰。廢妹夫立女婿。吾所未能言。蓋燕山妃乃守勤之妹。而中廟前妃守勤之女故也)

 

귀손이 마침 등극사(登極使)로 명 나라 서울에 가는데 일이 발각될까 스스로 의심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이 되어 길에서 죽었다. 원종 등은 귀양가 있는 이과(李顆)가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수령과 더불어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기일을 당겨서 먼저 거사하려 하였다. 그런데 9월 초이튿날에 마치 연산군이 장단(長湍)의 적벽(赤壁)에서 놀이를 하게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초하룻날 저녁에 원종 등이 장사들을 훈련원(訓練院)으로 모으기로 약속을 하니 그날 모인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으나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이에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 유자광(柳子光)을 부르고 그의 계책에 따라 두터운 유지(油紙)를 오려 표신(標信)을 만들어서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죄수와 역부(役夫)를 몰아 돈화문(敦化門) 앞 수백 보쯤 되는 곳에 나가서 말을 세워 진을 치고, 운천군(雲川君)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의 저사(邸舍)를 호위하게 하고, 변수(邊修)ㆍ최한홍(崔漢洪)ㆍ심형(沈亨)ㆍ장정(張珽)을 시켜 궁 내성(內城)을 지키면서 내사복시(內司僕寺)에 쌓아둔 꼴더미에 불을 질러 뜻밖의 변에 대비하게 하고, 또 신윤무(辛允武)를 보내어 용맹한 장사 이조(李藻)를 거느리고 신수영(愼守英)ㆍ신수근(愼守勤)ㆍ임사홍(任士洪)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끌어내어 쳐 죽이게 했다. 그리하여 초이튿날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전지를 받들어 관원을 보내어 종묘에 고하고, 왕을 폐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喬桐)으로 옮기게 했다.

 

좌의정 신수근은 연산군의 매부이며 심복 중 심복입니다. 그런 인물에게 '난이 일어나 진성대군을 세우면 누구 편을 들겠느냐'고 물어봤는데도 음모가 누설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인물의 대답이 '매부와 사위 중 누구를 고르란 말이냐. 난 못 고른다'라는 것은 당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권의 핵심 인물조차도 '까짓, 난이 실패하면 내 매부가 왕, 난이 성공해도 내 사위가 왕이 되는데 나를 어쩌겠어'라는 식으로 양다리나 걸칠 생각이었으니, 누가 연산군을 지키기 위해 나섰을까요. 반정이 성공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신수근은 그의 판단과는 달리 사위가 왕이 된 덕을 전혀 보지 못했고, 중종은 공신들의 등쌀에 왕비 신씨를 사가로 돌려보내고 새 왕비를 맞아야 했습니다. 박원종 등 중종반정의 주도세력들은 신수근과 새로운 권력을 나눌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이죠.

 

신수근은 커녕 유자광조차도 '박쥐' 취급을 받아 반정 핵심세력에 의해 곧 처단당합니다. 유자광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도 반정에 이용만 당한 것이죠. 그야말로 비정한 권력의 속성입니다.

 

 


 

아무튼 드라마 '인수대비'에 따르면 인수대비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죽음이 연산군의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예상했고, 그 예상대로 '할머니를 해친 패륜아'의 낙인이 찍힌 연산군은 2년만에 왕위를 내주고 유폐당하는 몸이 됩니다.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4대에 걸쳐 정권을 농단했던 인수대비. 여걸인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좋은 팔자는 아니었던 듯 합니다. 어쨌든 마지막 가는 길마저도 한 임금의 권좌를 좌우할 정도였으니 그 그림자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연산군이 물러나던 날의 자세한 풍경을 남겨 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 (1506, 정덕1) 9월 2일(기묘)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평성군(平城君)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이 한 마을에 살았는데, 서로 만나 시사를 논할 적마다 ‘이제 정령(政令)이 혼암 가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종묘 사직이 장차 전복될 것인데, 나라를 담당한 대신들이 한갓 교령(敎令)을 승순(承順)하기에 겨를이 없을 뿐, 한 사람도 안정시킬 계책을 도모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은 함께 성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천명과 인심을 보건대 이미 촉망된 바 있거늘, 어찌 추대하여 사직을 바로 잡지 않을 수 있으랴.’ 하고, 드디어 큰 계책을 정했는데 모사에 참여할 자가 있지 않았다.

부정(副正) 신윤무(辛允武)는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이로서 평소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를 ‘일조에 변이 있게 되면 화가 장차 몸에 미치리라.’ 생각하고, 원종 등에게 가서 말하기를 ‘지금 중외(中外)가 원망하여 배반하고 왕의 좌우에 친신(親信)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떠났으니, 환란이 조석간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또 이장곤은 무용과 계략을 가진 사람인데, 이제 망명하였으니 결코 헛되이 죽지는 않으리다. 만약 귀양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군읍(郡邑)에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 들어온다면, 비단 우리들이 가루가 될 뿐 아니라, 사직이 장차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니, 일이 그렇게 된다면 비록 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게 될 것이오.’ 하니, 원종 등이 뜻을 결정하였다.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하고, 그 계획을 말하자 따르므로 이어 장정(張珽)·박영문(朴永文)을 불러 윤무(允武)와 더불어 무사를 모을 것을 언약하였다. 또 용구(龍廐)의 모든 장수들과 각기 응군(鷹軍)을 거느리고 오기로 약속하였다.

 

최측근들이 이렇게 동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윽고 무인일 저녁에 모두 훈련원에 모여 희안이, 김수동·김감에게 달려가 함께 가자고 하니, 감은 즉시 따랐고 수동은 두려워 망서리다가 결국 따랐다. 또 유자광이 지모가 많고 경력이 많다고 하여, 역시 불러 함께 하는 한편 용사들을 임사홍과 신수근·신수영의 집에 보내어 퇴살(椎殺)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신수겸(愼守謙)을 개성부에서 베니, 이를 들은 도중(都中)의 대소인들이 기약도 없이 모여 들어 잠깐 동안에 운집하자 즉시 모든 장수들을 편성하고 용구마(龍廐馬)를 내어 주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에워싸고 지키게 하였으며, 또 모든 옥에 있는 죄수들을 놓아 종군하게 하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윤형로(尹衡老)를 금상(今上)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그 사유를 아뢰고 그대로 머물러 모시게 하고, 이어서 운산군 이계(雲山君李誡)와 무사 수십 명을 보내어 시위하여 비상에 대비하게 하였다. 희안 등은 모두 돈화문 밖에 머물러 날새기를 기다리니, 숙위(宿衛)하던 장사와 시종·환관들이 알고 다투어 수채 구멍으로 빠져 나가 잠시 동안에 궁이 텅 비었다.


승지 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이우(李堣)가 변을 듣고 창황히 들어가 왕에게 사뢰니, 왕이 놀라 뛰어 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장(璋) 등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고 핑계하고 차차 흩어져 모두 수채 구멍으로 달아났는데, 더러는 실족하여 뒷간에 빠지는 자도 있었다.

원종 등은 내시를 시켜 장사 두어 명을 거느리고 왕에게 가 옥새를 내놓고 또 동궁에 옮길 것을 청하였으며, 전동(田同)·심금손(沈金孫)·강응(姜凝)·김효손(金孝孫) 등을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여명(黎明)에 궁문이 열리자 원종 등이 경복궁에 나아가 대비에게 아뢰기를 ‘주상이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을 수 없고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성 대군에게 돌아갔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의지(懿旨)를 받들어 진성 대군을 맞아 대통(大統)을 잇고자 하오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니, 대비는 전교하기를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경 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순정이 전지를 받들고 즉시 금상의 사제로 가 아뢰니, 상이 굳이 사양하기를 ‘조정의 종묘 사직을 위한 대계(大計)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고, 재삼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순정이 호종 시위하여 경복궁에 들어가니, 길에서 첨앙(瞻仰)하는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모두들 ‘성주(聖主)를 만났으니 고화(膏火)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시(申時)에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중외해 내렸으며, 대비의 명에 의하여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李)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베니, 도중(都中)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전비, 녹수, 백견은 연산군을 모시던 기생 출신의 총희들. 결국 '난리가 나면 너희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던 연산군의 예측대로 된 것이죠.


책공(策功)을 의정(議定)하게 하자, 원종 등이 여러 종실·재상들과 공을 나눔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니, 처음부터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유순(柳洵) 등 수십 인이 다 정국 공신에 참여되었다. 당초에 원종 등이 돈화문 밖에 모여 순(洵)에게 사람을 보내어 순(洵)을 부르니, 순이 변이 있는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라 나와 문틈으로 엿보다가 도로 들어가기를 너덧 차례나 하였으며, 또 문틈으로 말하기를 ‘나는 구항(溝巷)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 이번 일이 가하오. 마음대로 하오.’ 하고, 오랫동안 다른 일이 없음을 알고서야 나왔다. 그리고 구수영(具壽永)은 당초 원종 등이 거의(擧義)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훈련원에 달려가 제장들을 보았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랬지만, 벌써 와 몸바치기를 허하였으므로, 마침내 훈적(勳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단 반란이 성공하고 나면 어정쩡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을 일부러 공신에 포함시켜 정국을 안정시키는 수법이 엿보입니다. 구항이란 길가의 도랑을 말하는 것인데, 일국의 재상이 '마음대로 하라, 나는 모른다'고 벌벌 떠는 모습은 참 안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폐부(廢婦)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중종반정이 마무리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 블로그의 인수대비 관련 글 모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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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폐비 윤씨는 정말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을까? http://fivecard.joins.com/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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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인수대비 사후, 연산군은 어떻게 몰락했나 http://fivecard.joins.com/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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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쓰고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조선 왕조 최악의 군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廟號)를 받지 못한 한심한 왕이 두 사람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죠. 자의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신하들에 의해 끌려내려왔기 때문에 시호와 묘호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역사적 사실이 곧 무능한 군주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두 사람 중 광해군은 20세기 이후 재조명에 의해 - 비록 선왕의 정궁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그 소생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도적적인 흠결은 있지만 - 실질적으로 임진왜란 동안 국가를 경영한 능력이나 중국 명-청 교체기를 버텨낸 탁월한 국제감각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폭군'이라는 딱지를 어느 정도 뗀 느낌입니다.

 

반면 이런 치적이 없는 연산군은 보호망도 없이 패륜의 제왕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선왕의 후궁들을 직접 때려 죽이고(여러분이 '인수대비'에서 보고 계신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 소생인 동생들을 살해하고, 큰어머니를 범하고, 할머니를 머리로 받아 결국 사망하게 하고,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럼 연산군은 저런 광기의 제왕이었을까요? 혹시 달리 볼 요소는 없을까요?

 

 

 

 

일단 집권 4년째(1498)에 무오사화를 일으킬 때까지 연산군의 '만행'은 크게 상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4대 사화의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만치 피를 본 군왕이 한둘은 아닙니다.

 

하지만 폐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면서 연산군의 행적은 정상적인 사고를 벗어난 모습을 보입니다. '연려실기술'이 모아 들인 여러 사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성종이 함구령을 내린 폐비 윤씨 문제가 어떻게 연산군의 시대에 문제가 되었는지, 그 과정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하겠습니다.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그런데 궁금한 건 연산군의 준비 과정입니다. 이미 연산군은 즉위 2년째인 1496년에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를 확장하자는 의견을 냈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철회했고, 이해 10월 21일, 대신 윤씨의 어머니인 장흥부부인 신씨(즉 연산군의 외할머니)에게 곡식과 의복을 내리라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廢妃母申氏, 依領敦寧, 歲賜米三十碩、黃豆二十碩).

 

하지만 공식적으로 갑자사화의 시작은 연산군 10년인 1504년 3월20일이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이날 연산군은 그동안 감춰졌던 분노를 폭발시키며 만행의 시작을 알립니다. 연산군에게 적대적인 사관들이 상당 부분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인간성을 잃은 듯한 모습입니다.

 

바로 이렇게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인 엄귀인과 정소용을 끌고 나간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래 나오는 안양군과 봉안군은 모두 정소용이 낳은 자신의 동생들이죠.

 

그 동생들을 동원해 어머니의 복수(?)를 시키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장면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목: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때리다 
 

전교하기를, "안양군 이항(安陽君李㤚)과 봉안군 이봉(鳳安君李㦀)을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숙직 승지 두 사람이 당직청에 가서 항과 봉을 장 80대씩 때려 외방에 부처(付處)하라. 또 의금부 낭청(郞廳) 1명은 옥졸 10인을 거느리고 금호문(金虎門) 밖에 대령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항·봉을 창경궁(昌慶宮)으로 잡아오라.”
하고, 항과 봉이 궁으로 들어온 지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모두 다 내보내라” 하였다. 항과 봉이 나오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항과 봉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왕이,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왕이 손에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침전 밖에 서서 큰 소리로 연달아 외치되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하기를 매우 급박하게 하니, 시녀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대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 신씨(愼氏)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


왕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젓갈(醢)로 만든다는 것은 시체조차 보존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최악의 형벌입니다. 일찌기 한고조 유방이 반란의 혐의를 씌워 맹장 팽월을 죽인 뒤 해(醢)로 만들어 제후들에게 맛보라고 돌렸다는 바로 그 형벌이죠.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선 누구에게 먹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리고 나서 열흘 동안 엄씨와 정씨 친정 가족들을 참살하고, 안양군과 봉안군을 귀양보내고, 이미 다른 죄(그 전해 9월, 잔치 자리에서 임금이 내린 술잔을 몰래 따라 버린 죄..^^)로 위기를 맞고 있던 이세좌를 처단합니다. 그리고는 4월 1일, 마침내 조정에 정식으로 명을 내립니다. 

  

왕이 춘추관(春秋館)에서 상고한, 폐비(廢妃)에게 사약 내린 전말의 단자(單子)를 내려보내며 이르기를,
“도승지가 의정부·춘추관 당상 및 예문관(藝文館) 관원과, 함께 다시 그때 옛일을 인용하여 일이 되게 한 자와, 폐위함이 불가하다고 간하다가 죄를 받은 자, 사약을 내릴 때 간하지 않고 명대로 가서 일 본 자를 유(類)대로 뽑아 아뢰라”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 있으면 의문이 듭니다. 대체 왜 연산군은 즉위 10년 뒤에서야 어머니의 복수를 시작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10년 뒤에서야 외할머니 신씨를 만나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알고 분노했다고 보지만, 일단 연산군이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된 시점이 분명치 않습니다. 

 

(위에 인용한 '기해록'의 기록으로는 인수대비가 죽고 나서 알게 되어 피바람이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분명 사실과 다릅니다. 갑오년 3월20일이 피바람의 시작이었고, 인수대비는 그 한달 넘게 뒤인 4월27일 숨을 거둡니다.)

 

 

 

 

정황으로 볼 때 연산군이 1504년에 와서야 모든 것을 알게되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알 것은 다 알고 있었고,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 적당한 때란 언제일까요. 바로 자신의 힘이 인수대비와 비등해졌다고 판단한 때일 것입니다. 즉위 4년 째인 1498년(무오년), 연산군은 조의제문 사건을 이용해 김종직의 제자들을 참살합니다. 명분은 이유 없이 할아버지 세조를 사림이 욕보였다는 것이고, 당연히 인수대비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왕에 대한 도전을 권력으로 제압하고 나면 왕권은 강화되는 것이 당연한 일. 무오사화를 통해 힘을 한껏 키운 뒤에도 연산군은 6년을 더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갑자년 1월, 고령의 인수대비가 병석에 눕게 됩니다.

 

이제서야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연산군은 그 전부터 파악되어 있던 외할머니 신씨를 궁으로 불러들여 시커멓게 변한 금삼(피를 토했든, 약을 토했든 어쨌든 20여년이 흘렀으니 검은 색이었겠죠^^)을 전달하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의식'은 온 조정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 이제부터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테다. 그리고 당시의 일을 철저하게 규명할 것이다. 당시 아버지 편에 섰던 놈들은 모두 각오해라.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큰 잘못이 없는 자들은 지금부터 병석에 누운 대비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내 편에 설 것인지, 잘 생각해 보고 입장을 정하라.'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정리했겠죠.

 

 

 

게다가 갑자사화의 이면에는 연산군을 중심으로 무오사화 이후 권력을 보위하던 임사홍, 신수근 등의 친위세력과 세조-성종대를 지나오며 공신전을 독점하고 기반을 구축해 온 신권 세력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있습니다. 친위세력을 동원해 권신들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엿보입니다.

 

이런 요소들을 감안하면 연산군은 미친 왕이라기보다는 대단히 전략적인 야심가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비록 음탕하고 무능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런 기록들은 당연히 중종반정의 중심세력이 서술했을테니 그대로 믿기에는 약간의 의심이 듭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의 저변에는, 지난번 글에서 잠시 다뤘듯 자신의 최고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진성대군(뒷날의 중종)을 해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역시 이건 이번에도 다음 글에서 다뤄야 할 듯.^^

 

 

이 블로그의 인수대비 관련 글 모음입니다.

 

1. 계유정난은 어떻게 진행됐나  http://fivecard.joins.com/964
2. 폐비 윤씨는 정말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을까? http://fivecard.joins.com/1003
3. 폐비 윤씨, 사약을 마시고 정말 피를 토했나? http://fivecard.joins.com/1004
4. 폐비 윤씨 사약이 남긴 공무원의 숙명 http://fivecard.joins.com/1007
5.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fivecard.joins.com/1012
6. 인수대비 사후, 연산군은 어떻게 몰락했나 http://fivecard.joins.com/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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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가 마침내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론 드라마 '인수대비' 속의 이야기입니다.

 

1482년, 윤씨의 나이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성종보다 2세 연상설과 12세 연상설이 있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가 12세 연상설을 따르고 있으니 성종이 25세, 윤씨는 37세로 추정됩니다. 성종 임금은 한창 피어나는 나이였던 반면 윤씨는 서서히 시들어가는 나이였던 셈이죠. 두 사람 사이에서 1476년 태어난 원자(뒷날의 연산군)는 갓 여섯살. 당연히 어머니의 운명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정현왕후(당시의 숙의 윤씨, 뒷날 중종이 된 진성대군의 어머니)를 친 어머니로 알고 성장합니다.

 

연산군이 왕이 되면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 어쨌든 '폐비를 사사하라'는 결정이 내려진 이상 이 임무는 누군가 집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세좌라는, 임무에 충실했을 뿐인 한 공무원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만약 세자의 어머니에게 사약을 전하라는 조직의 결정이 내려지고 그 책임이 내게 맡겨질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성종 13년 임인(1482, 성화 18) 8월 16일 (임자)

이세좌에게 명해 윤씨를 그 집에서 사사하게 하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열무(閱武)하고, 드디어 경복궁(景福宮)에 나아가서 삼전(三殿)에 문안하고 궁으로 돌아왔다. 영돈녕(領敦寧) 이상 의정부(議政府)·육조(六曹)·대전(臺諫)들을 명소(命召)하여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인견하고 말하기를,
“윤씨(尹氏)가 흉험(凶險)하고 악역(惡逆)한 것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당초에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하겠지만, 우선 참으면서 개과 천선하기를 기다렸다.

 

기해년에 이르러 그의 죄악이 매우 커진 뒤에야 폐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지마는, 그래도 차마 법대로 처리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제 원자(元子)가 점차 장성하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안정되지 아니하니, 오늘날에 있어서는 비록 염려할 것이 없다고 하지만,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각기 사직(社稷)을 위하는 계책을 진술하라.하였다.

 

정창손(鄭昌孫)이 말하기를,

“후일에 반드시 발호할 근심이 있으니, 미리 예방하여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한명회(韓明澮)는 말하기를,
“신이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았을 때에는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아니한 적이 없습니다.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다만 원자(元子)가 있기에 어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만일 큰 계책을 정하지 아니하면, 원자(元子)가 어떻게 하겠는가? 후일 종묘와 사직이 혹 기울어지고 위태한 데에 이르면, 그 죄는 나에게 있다.하였다.

 

심회(沈澮)와 윤필상(尹弼商)이 말하기를,
“마땅히 대의(大義)로써 결단을 내리어 일찍이 큰 계책을 정하셔야 합니다.
하고, 이파(李坡)는 말하기를,
“신이 기해년(己亥年)에는 의논하는 데 참여하지 못하였습니다만, 대저 신첩(臣妾)으로서 독약을 가지고 시기하는 자를 제거하고 어린 임금을 세워 자기 마음대로 전횡(專橫)하려고 한 죄는 하늘과 땅 사이에 용납할 수 없습니다. 옛날 구익부인은 죄가 없는데도 한()나라 무제(武帝)가 그를 죽인 것은 만세(萬世)를 위하는 큰 계책에서였습니다. 그러니 이제 마땅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여야 합니다. 신은 이러한 마음이 있는 지 오래 됩니다만, 단지 연유(緣由)가 없어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후일에 그가 발호(跋扈)하게 되면 그 후환이 어찌 크지 않겠느냐? 측천 무후(則天武后)가 조정의 신하들을 많이 죽였던 것은, 자기 죄가 커서 천하(天下)가 복종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의 위엄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하였다.

 

이어서 좌우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재상(宰相)과 대간(臺諫)들이 같은 말로 아뢰기를,
“여러 의견들이 모두 옳게 여깁니다.
하였다. 이에 곧 좌승지 이세좌(李世佐)에게 명하여 (윤씨를)그 집에서 사사(賜死)하게 하고, 우승지 성준(成俊)에게 명하여 이 뜻을 삼대비전(三大妃殿)에 아뢰게 하였다.

 

이세좌가 아뢰기를,
“신은 얼굴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내관(內官)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하니, 조진(曹疹)에게 명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이세좌가 나가서 내의(內醫) 송흠(宋欽)을 불러서 묻기를,

“어떤 약()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하니, 송흠이 말하기를,

"비상만한 것이 없습니다.하므로,

주서(注書) 권주(權柱)로 하여금 전의감(典醫監)에 달려 가서 비상을 가지고 가게 하였다.

 

저녁이 되자 전교하기를,
“이세좌는 오지 말고 그 집에 유숙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한명회의 말에, ‘항상 정창손과 함께 앉으면 일찍이 이 일을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하였으니, 이는 아마 후일을 염려해서 한 것일 듯하다. 그런데 전날 임금이 권경우의 아룀으로 인하여 돌아보며 물었을 적에는, 한명회가 이에 말하기를, ‘임금이 사용하던 것이면 비록 미천한 것이라도 외처(外處)에 둘 수 없는데, 하물며 국모(國母)이겠습니까?’ 하였다. 이는 무람없게 거처하는 것을 혐의(嫌疑)함이고 후일을 염려한 것은 아닌 듯하다. 그러니 앞뒤가 어찌 이렇게 서로 어긋나는가? 대신으로서 국가를 위하는 염려가 이와 같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것이 운명의 8월16일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세좌가 처음부터 이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느냐는 데에는 이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본래 허종, 허침 형제가 이 역할을 맡게 되어 있었는데 '지혜롭게' 그 운명을 피해 갔다는 것입니다.

 

서울 경복궁 입구에는 종침교라는 다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자리에는 '종침교 터'라는 비석이 서 있을 정도로 꽤 유서깊은 다리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 다리는 연산군 및 폐비 윤씨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허씨 문중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1482년, 폐비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시절 허종과 허침 형제는 조정의 중신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들 형제의 누님(혹은 고모라고도 함)인 '백세 할머니'라는 지혜로운 여성이 "오늘은 조정에 어떻게 해서든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형제가 이유를 묻자 백세 할머니는 '이미 조정에서 폐비의 일을 결정할 참인데 지금 입궐하여 폐비를 핍박하는 일에 관여하면 나중에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했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형제는 입궐하다가 종침교(물론 당시엔 다른 이름을 썼을 것으로 추정)에 이르러 일부러 말을 다리 아래로 몰아 떨어져 부상을 이유로 입궐하지 않았다.

 

결국 허종 형제가 없자 조정에서는 숙질간인 이극균과 이세좌를 시켜 사약을 받들고 폐비에게 가게 했다. 뒷날 갑자사화가 일어나 연산군이 이극균과 이세좌의 집안을 멸문시킬 때 허종 허침 형제는 화를 피해 사람들이 백세 할머니의 지혜를 칭찬했고, 다리에 형제의 이름을 붙여 종침교라 불렀다...

 

는 것이 이른바 '종침교'의 고사입니다. 이것이 조선 왕조 500년을 지나면서도 미담으로 남았고,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처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라는 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리 칭찬할 일은 아닙니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벼슬에 올라 임금의 뜻이 옳지 않다 생각되면 목숨을 걸고 간하고, 그래도 소용이 없으면 벼슬을 던지고 죄를 청하는 것이 사대부의 도덕률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폐비에 반대해 처벌을 받았고(물론 그중 많은 사람들은 원자 즉위 후의 '뒷일'을 걱정해 보험에 들어 둔 것일 수도 있지만), 지난번 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온 선비의 기상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종침교의 고사는 결국 일신의 안위를 위해 직무유기를 시도한 공무원의 무사안일한 태도를 보여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저 고사가 사실이라면(후세에 윤색된 것일 가능성도 물론 있습니다), 되려 임금의 명에 충실했던 이세좌만 고지식한 바보일 뿐이고, 잔머리를 굴리지 않은 죄로 뒷날 멸문의 화를 당한 셈입니다.

 

왠지 이 대목에서 6.25 당시 육군본부의 명령에 따라 한강 인도교를 폭파시킨 죄(?)로 그해 9월 총살당한 최창식 공병감의 모습이 겹쳐지기도 합니다.

 

 

 

물론 종침교의 고사는 역사에 전하는 바는 아니기 때문에 널리 알려져 있다 해도 실제로 두 사람이 말에서 굴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허침은 이미 형 허종과 함께 덕이 높은 선비로 알려져 있었으므로 성종이 세자의 스승으로 삼은 인물입니다. 폐비에 반대한 인물이라 세자의 스승이 되었건, 세자의 스승이라는 의리 때문에 폐비에 반대했건, 아무튼 태도의 일관성을 보인 사람인 것은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런 일관된 입장 때문인지 갑자사화 때에는 당시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찬성한 사람들을 벌 주라고 앞장서서 외치는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실록의 기록입니다.

 

연산군 10년 갑자(1504,홍치 17)  45 (을축)

유순·허침 등이 폐비의 일을 상고하여 아뢰다

 

 유순(柳洵)·허침(許琛)·이집(李諿)·김수동(金壽童), 《실록(實錄)》을 상고하여 아뢰기를,

회릉(懷陵)이 폐위당할 때, 언문 글 쓴 자는 나인(內人)이기 때문에 상고할 수 없으며, 《실록》이 오르지 않은 것은 상고할 근거가 없습니다. 나인으로서 그 일에 간섭한 자는 권 숙의(權淑儀)·엄 숙의(嚴淑儀)·정 숙원(鄭淑媛)이며, 일을 의논한 사람은 전에 벌써 상고하여 아뢰고 빠진 자는 없습니다. 다만 언문을 가지고 온 자는 노공필(盧公弼)·성준(成俊)이었습니다.”

 

회릉이란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를 모신 능의 이름으로, 폐비 윤씨를 능호로 부른 것입니다. 즉 '폐비 윤씨'라는 뜻이죠. 언문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당시 삼전이라 불렸던 세 대비(세조비, 덕종비, 예종비를 말함)가 폐위와 사사의 당위성을 말한 언문 편지를 전달한 것을 말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준과 공필의 죄는 윤필상(尹弼商)과 벌이 같을 것이다.”

하였다. 순 등이 아뢰기를,

필상은 그 일에 참여하여 의논하였으니, 준과 공필은 이와 차이가 있습니다. 회릉이 폐위되어 사삿집에 거처할 때에 대사헌 채수(蔡壽)가 그것이 불가함을 간했습니다. 그리고 성종께서 의논하여 그 죄를 다스리고자, 공필을 명하여 가서 삼전(三殿)께 아뢰게 하니, 삼전께서 언문 편지를 붙여서 성종(成宗)께 아뢰게 하였으며, 준은 대사를 다 정한 후에 명을 받들어 삼전께 고하니, 삼전께서 언문 편지를 준에게 주어 아뢰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은 다만 삼전 및 성종의 명으로 왕복하며 회계(回啓)했을 뿐이요 건의한 일이 없으니, 그 죄는 필상과 차이가 있습니다.”

 

채수가 폐비가 곤궁하고 살고 있으니 양식과 옷을 대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죽을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는 전에 한 바와 같습니다. 나머지는 윗글에 대한 보충.

 

하니, 전교하기를,

그 죄가, 필상과 함께 벌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역시 경하게 논할 수 없는 일이니, 그들의 죄를 의논해서 아뢰라.”

하였다. 순 등이 아뢰기를,

준과 공필은 직첩(職牒)을 거두고, 외방에 부처(付處)하며, 그 아들도 함께 직첩을 거두소서. 또 공필은 전에 벌써 외방에 부처하였으니 먼 고을로 옮겨 정배하소서.” (이하 생략)

 

이처럼 허침은 그저 '지혜롭게 난을 피한' 수준이 아니라, 갑자사화 때 가해자 측에서 폐비를 찬성하거나 방조한 대신들을 죄 주는데 주된 역할을 합니다. 그리 아름다운 행동은 아닙니다.

 

반면 이세좌는 역시 숙질간인 이극돈과 함께 연산군 즉위 후, 무오사화의 주역으로 역사에 나쁜 이름을 남깁니다. 뒷날 갑자사화 때 이세좌가 임인년의 일(폐비 사사)을 이유로 죽음을 당한 것은 억울하다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뒷날의 평가가 그리 곱지 않았던 것은 이른바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과오를 후세의 사림들이 잊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처럼 허종, 허침 형제가 '지혜롭고 곧은 인물'로, 이세좌가 '운 없는 인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단지 그때 한 순간의 대처가 어땠느냐만으로 가려진 것은 아니고 그 사람들의 평생 삶이 두고 두고 후세 사람들의 평가를 받은 결과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허종과 허침 형제가 평생 청백리로 이름을 남겼다는 것도 가산점을 받은 요인이겠죠.

 

물론, 아무래 그래도, '종침교에서 굴렀다'는 이야기가 마치 '좋은 처세'의 본보기처럼 전해지는 것은 역시 문제 있는 시각이라는 생각입니다. 사극의 진짜 교훈은 드라마 밖에서 찾아야 한다고나 할까요.

 

 

 

P.S.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된 뒤 연산군의 보복은 참으로 집요하고도 광기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은 어머니를 몰아낸 주역으로 윤필상을 꼽아 처단했으면서도, 윤필상의 집안(파평 윤씨)이며 어머니를 '밀어내고' 중전의 자리에 오른 정현왕후에 대해서는 아무 보복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정현왕후의 아들인 진성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기까지 했죠.

 

대체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이건 혹시 연산군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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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한국 사극에서 여주인공과 관련된 킬러 콘텐트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나는 목욕신이고, 다른 하나는 사약 신입니다. '인수대비'에서도 이번 주말 폐비 윤씨 역의 전혜빈이 약사발을 들이키고 최후를 맞을 전망입니다.

 

여주인공이 사약을 먹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강한 비주얼을 제공합니다. 시청자들이 왜 사람이 피를 토하고 죽는 장면을 좋아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사약 신이 나오고 시청률 확보에 실패한 드라마는 없다는 것이 대략 정설입니다.

 

그런데 문득 이 대목에서 궁금증 하나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대체 왜 사람이 사약을 먹으면 피를 토하고 죽는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간단한 의문입니다. 우선 사람이 피를 토하려면 피를 흘려야 합니다. (....당연한 얘기라고 돌 던지지 마십쇼;;) 그럼 내출혈이 있어야 하는데,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은 사람은 당연히 몸 속에서 피가 날 겁니다. 그럼 입으로 피를 토할 수 있겠죠. 뭐 물론 얼마 전 나온 얘기로는 배를 칼로 찔린다고 해도 거꾸로 매달지 않는 한 입으로 피가 나오기는 쉽지 않다고도 합니다만, 아무튼 가능하긴 할 겁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수많은 사극 속에서 보아 온 폐비 윤씨, 장희빈, 경빈 박씨 등 역사적인 팜므 파탈들은 대개 입으로 피를 토해 왔습니다.

 

 

 

 

 

 

따라서 그냥 '사약 먹는 장면이 나온다'는 말만 들어도, 소복 입은 여인이 곱게 약사발을 받쳐 들고, 사약을 들이킨 뒤 붉은 피를 토해 소복이 젖는 비주얼이 그려집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은 상당히 과장된 것입니다. 어쨌든 고증은 해야 하기 때문에, 후배 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봅니다. 내과 의사나 약사가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만만한 사람이 좋기 때문에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화했습니다.

 

나: 통화 괜찮음?

의사: 네. 무슨 일로?

나: (불문곡직) 사람이 먹으면 피를 토하고 죽는 독이 뭐가 있냐?

의사: ....사극 쓰세요?

나: 묻는 말에 대답을 하세요.

의사: 글쎄요. 사실 피를 토하기가 쉽지 않아요. 농약 같은 걸 먹어도 시퍼런 약물을 토하지...

나: 그럼 먹자마자 대량 위 출혈을 일으키는 약물은 없나?

의사: 뭐든지 토하다 보면 피가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그러긴 쉽지 않을걸요.

나: 하긴 술먹은 다음날 토하다가도 피 나왔다는 사람이 있더라.

의사: ...암튼 간경변이 있는 사람은 식도 혈관이 상해서 쉽게 피를 토할 수도 있어요.

나: 그럼 강한 산이나 알칼리로 식도가 상하면 피를 토할수 있겠네?

의사: 그럴 수도... 그런데 그런걸 삼킬 수나 있을까요?

 

 

                                          (....삼킬 수 있냐고? 응?)

 

말 그대로 강한 알칼리, 즉 양잿물(수산화나트륨 용액)을 먹으면 피를 토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양'잿물인데서 알 수 있듯 이건 근현대 이후에 한국사에 편입된 물질이죠. 조선시대에 빨래할 때 쓰던 '잿물'이 과연 그 정도로 독성이 강했는지도 모르겠고, 뭣보다 잿물로 사약을 만들었다고 전해지지는 않는답니다.

 

폐비 윤씨 관련 역사 기록에는 왕이 '비상을 쓰라'고 했다고 나오고, 여기저기서 나오는 얘기로는 초오(草烏)라는 약재가 주로 사용됐다고 합니다. 초오는 미나리아재비과인 바곳이라는 식물의 뿌리로 만든 한약재. 바곳은 투구꽃이라고도 불렸다는군요.

 

투구꽃이라...

 

 

 

바로 영화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에 나오는 그 투구꽃입니다.

 

 

초오의 독성이 알려진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한약재'라는 이름 때문에 아직도 피해가 끊이지 않고 있다는군요. 약과 독은 정말 한끗 차이.

 

2006년 3월 경기도 연천에 사는 마을 주민 20명이 투구꽃(초오)으로 담근 술을 나눠 마셨다가 집단 중독 증세를 일으킨 사례도 있다. 이는 식물성 천연 독 ‘아코니틴(aconitine)’에 중독된 경우였다. 아코니틴은 투구꽃(초오)에 함유된 독으로, 뿌리>꽃>잎>줄기 순으로 독성물질이 분포돼 있다. 특히 뿌리부분은 독성이 강해 과거에는 독화살 성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투구꽃의 뿌리부분을 말린 것을 한방에서는 ‘부자(附子)’라고 부르며 신경통, 관절염, 중풍 등의 치료에 사용하기도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28&aid=000208495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11554

 

초오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독인 것은 분명하지만, 문제는 초오가 마비독이라는 점입니다. 즉 초오 때문에 죽으려면, 호흡중추가 마비되어 죽는다는 거죠. 그러니까 초오를 먹으면 욱 하고 피를 토하며 쓰러져 죽는 것이 아니라, 눈빛이 흐려지면서 쓰러져서 움직이지 못하고 숨이 막혀 죽는 겁니다. 당연히... '충격적인 비주얼'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그럼 왜 사극에서 사약 마신 주인공들은 피를 토하고 죽어갈까요.

 

많은 사람들은 박종화 원작 소설 '금삼의 피'를 이런 장면의 효시라고 생각합니다. "폐비 윤씨가 사약을 먹고 피를 토한 뒤, 친정어머니 신씨가 그 피묻은 한삼 자락을 간직하고 있다가 뒷날 연산군에게 전하고, 어머니의 피를 본 연산군의 분노가 폭발하며 마침내 갑자사화의 피바람이 분다는 이야기"라고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신 바로 그 작품입니다.

 

하지만 '금삼의 피'를 실제로 읽어 보면, 그 '금삼(비단 한삼)'에 뿌려진 피는 폐비가 사약을 먹고 토한 피가 아니라, 원한의 피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시기 바랍니다. 윤씨가 피눈물을 닦은 수건을 어머니 신씨에게 장면이 분명히 나옵니다. 저도 어린 시절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니 화끈하게 토한 피가 아니고 피눈물? 하고 살짝 실망(...;;;)한 기억이 납니다.

 

그럼 역사에는 사약을 먹고 피를 토했다는 기록이 있을까요. 사실 그 부분도, 딱 착각하기 좋게 돼 있습니다. '기묘록'의 기록입니다.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 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굵은 부분 원문: 尹氏以拭淚斑血帨。付其母申氏曰。吾兒幸保全。當以是告我哀冤

흔히 볼 수 없는 한자가 몇개 있습니다. 拭: 씻을 식,  帨: 수건 세.

吾兒, 즉 '내 아이'란 당연히 어린 세자, 즉 뒷날의 연산군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여기도 문제의 한삼에 젖은 피는 토한 피가 아니라 피눈물의 피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기록을 볼까요. 사실 조금 더 혼동하기 쉽게 돼 있죠. '파수편'입니다.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여기는 '토한 수건'이라고 되어 있지만 피를 토했다는 말은 역시 없습니다. '약을 토했다'와 '그 수건을 전달했다'는 맞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 방송되는 드라마에서 피 토하는 장면이 없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다른 무슨 수단을 쓴다 해도 그만한 비주얼을 얻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착각이나 오해는 하지 마시길.^^

 

그리고,

 

이 블로그의 인수대비 관련 글 모음입니다.

 

1. 계유정난은 어떻게 진행됐나  http://fivecard.joins.com/964
2. 폐비 윤씨는 정말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을까? http://fivecard.joins.com/1003
3. 폐비 윤씨, 사약을 마시고 정말 피를 토했나? http://fivecard.joins.com/1004
4. 폐비 윤씨 사약이 남긴 공무원의 숙명 http://fivecard.joins.com/1007
5.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fivecard.joins.com/1012
6. 인수대비 사후, 연산군은 어떻게 몰락했나 http://fivecard.joins.com/1015

 

그리고 긴 말 필요없이, 아래 추천 숫자 좀 눌러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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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인수대비'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중전 윤씨(전혜빈)는 아들을 빼앗기고 대비들과의 갈등이 극에 달해 정신을 잃을 지경이 됐고, 마침내 이번주 남편 성종(백성현)이 다른 후궁의 침소에 든 것을 참지 못해 달려들어 싸움을 벌이다 얼굴 손틉자국을 내게 됩니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성종과의 사이가 원만치 못해 늘 싸움이 잦았고, 어느날 용안에 손톱 자국을 낸 것이 인수대비에게 알려지며 즉시 폐비에 처해졌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남편인 임금의 얼굴에 상처를 냈을까요? 임금의 용안과 옥체는 그 무엇보다 귀중하게 여겨지던 것이 당시의 정서입니다. 아무리 제 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런 기록은 분명히 있습니다. 게다가 임금이 폐비 윤씨를 때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말로만 전해지는 야사는 아닙니다.

아무튼 이럴때 가장 확실한 지침은 일단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성종실록에는 성종 10년, 1479년 6월2일 마침내 임금이 폐비를 결심한 내용이 전해집니다.

성종 105권, 10년(1479 기해 / 명 성화(成化) 15년) 6월 2일(정해) 1번째기사

전날 저녁 야대(夜對)를 파(罷)한 뒤에 임금이 급히 승지(承旨)를 불러 입내(入內)하도록 하더니, 조금 있다가 이를 중지시키고, 정승(政丞) 등을 불러 내일 이른 아침에 예궐(詣闕)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여명(黎明)에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청송 부원군(靑松府院君) 심회(沈澮)·광산 부원군(光山府院君) 김국광(金國光)·우의정(右議政) 윤필상(尹弼商)이 이르니,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인견(引見)하였는데, 승지·주서(注書)·사관(史官)이 모두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좌우(左右)를 돌아보고, 일러 말하기를,

“궁곤(宮壼)의 일을 여러 경(卿)들에게 말하는 것은 진실로 부끄러운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일이 매우 중대(重大)하므로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제 입직(入直)한 승지(承旨)와 더불어 이를 의논하고자 하였으나, 생각하니 대사(大事)를 두 승지와 결단할 수 없으므로 이에 경들에게 의논하는 것이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선경 삼일(先庚三日) 후경 삼일(後庚三日)’이라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않고 함이겠는가? 부득이하여서 그러는 것이다.

(선경삼일, 후경삼일이라는 것은 중대사일수록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신중하게 결정한 것인가를 설득하는 과정입니다.)

지금 중궁(中宮)의 소위(所爲)는 길게 말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내간(內間)에는 시첩(侍妾)의 방이 있는데, 일전에 내가 마침 이 방에 갔는데 중궁이 아무 연고도 없이 들어왔으니, 어찌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마땅하겠는가? 예전에 중궁의 실덕(失德)이 심히 커서 일찍이 이를 폐하고자 하였으나, 경들이 모두 다 불가(不可)하다고 말하였고, 나도 뉘우쳐 깨닫기를 바랐는데, 지금까지도 오히려 고치지 아니하고, 혹은 나를 능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비록 내가 집안을 다스리지 못한 소치(所致)이지마는, 국가(國家)의 대계(大計)를 위해서 어찌 중궁에 처(處)하게 하여 종묘(宗廟)를 받드는 중임(重任)을 맡길 수 있겠는가? 내가 만약 후궁(後宮)의 참소하는 말을 듣고 그릇되게 이러한 거조(擧措)를 한다고 하면 천지(天地)와 조종(祖宗)이 소소(昭昭)하게 위에서 질정(質正)해 줄 것이다. 옛날에 한(漢)나라의 광무제(光武帝)와 송(宋)나라의 인종(仁宗)이 모두 다 왕후(王后)를 폐하였는데, 광무제는 한 가지 일의 실수를 분하게 여겼고, 인종도 작은 허물로 인했던 것이지마는, 나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다른 후궁의 침소에 왕이 들었는데, 그 침소에 중전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 왕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중궁의 실덕(失德)이 한 가지가 아니니,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았다가 뒷날 큰 일이 있다고 하면 서제(噬臍)를 해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예법(禮法)에 칠거지악(七去之惡) 이 있으나, 중궁의 경우는 ‘자식이 없으면 버린다.[無子去]’는 것은 아니다.”

하고, 드디어 ‘말이 많으면 버린다[多言去], 순종하지 아니하면 버린다[不順去], 질투를 하면 버린다[妬去]’라는 말을 외우고, 이어 이르기를,

“이제 마땅히 폐하여 서인(庶人)을 만들겠는데, 경들은 어떻게 여기는가?”

하였다. 정창손이 아뢰기를,

“이제 상교(上敎)를 받으니, ‘중궁이 실로 승순(承順)하는 도리를 잃어서 종묘(宗廟)의 주인을 삼는 것이 불가(不可)하다.’고 하였습니다. 상교가 이에까지 이르렀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한명회가 이르기를,

“신(臣)은 더욱 간절히 우려(憂慮)합니다. 성상께서 칠거(七去)로써 말씀하시니, 신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원자(元子)가 있어서 사직(社稷)의 근본이 되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윤필상이 아뢰기를,

“사세(事勢)가 이에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심회가 이르기를,

“태종(太宗)께서 일찍이 원경 왕후(元敬王后)와 화합하지 못하여 한 전각(殿閣)에 벽처(僻處)하게 하고 그 담장을 높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처(善處)하는 도리였습니다. 지금도 역시 별궁(別宮)에 폐처(廢處)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정창손과 윤필상이 이미 임금의 뜻에 따르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한명회와 심회는 궁 밖으로 내치는 폐서인은 온당치 않다는 입장입니다. 뒤에 보면 정창손마저도 '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을 합니다. 그만치 이 폐비는 파격적인 조치였던 것이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들은 사의(事宜)를 알지 못한다.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갑자기 붕어(崩御)한 것은 누구의 소위(所爲)였던가? 대저 부덕(不德)한 사람은 비의(非義)한 짓을 많이 행하는 것인데, 일의 자취가 드러나게 되면 화(禍)는 이미 몸에 미친 뒤이다. 큰 일을 수행(遂行)함에 있어 만약 일찍 조처하지 아니하였다가 만연이 된 뒤에는 도모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만일 비상(非常)한 변이 생기게 되면 경들이 비록 나를 비호하고자 하더라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한나라 성제는 본래 여색을 밝혀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습니다. 그중에서도 당대의 미녀인 조비연, 조합덕 자매를 총애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은 성총을 잃지 않기 위해 왕과 다른 궁녀가 동침하면 그 궁녀를 죽이고, 심지어 다른 후궁이 낳은 아이까지도 사라지게 하는 마수를 썼습니다. 그런데도 성제를 그런 악행을 모른체 했고, 이들은 성제의 비호 속에서 더욱 더 못된 짓을 저질렀습니다. 

결국 어느날 성제는 조합덕의 침소에서 죽은 채 발견됩니다. 두 자매가 성제를 죽일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 두 자매는 아이가 없어 황제가 죽으면 자신들의 권세도 끝나는 입장이었으므로 - 아무튼 황제가 죽은 뒤 사방에서 두 자매의 죄를 묻는 상소가 빗발치자 어쩔 수 없이 자결해 버리고 맙니다.

이쯤 되면 성종이 중전 윤씨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은 이미 정나미가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저것을 곁에 두었다가는 내가 비명횡사할지도 모르겠다' 수준까지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하였다. 도승지(都承旨) 홍귀달(洪貴達)이 아뢰기를,

“중궁의 실덕한 바가 가볍지 아니하니, 진실로 이를 폐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러나 원자를 탄생(誕生)하였고 또 대군(大君)을 나았으므로 국본(國本)에 관계되는 바이니, 폐하여 서인으로 삼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청컨대 위호(位號)를 깎아 내리어 별궁(別宮)에 안치(安置)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자는 장차 세자(世子)로 봉(封)할 것인데, 어머니가 서인이 되면 이는 어머니가 없는 것이니, 천하(天下)에 어찌 어머니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강봉(降封)을 하면 이는 처(妻)로써 첩(妾)을 삼는 것이니 크게 옳지 못하다.”

하였다. 좌부승지(左副承旨) 김계창(金季昌)이 아뢰기를,

“중궁은 명(命)을 중국 천자(天子)에게 받아서 이미 위호(位號)가 정당하고 원자를 탄생하였으며, 또 국본이 되어 관계된 바가 매우 중하니, 갑자기 폐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곽후(郭后)를 폐하여 옥청궁(玉淸宮)에 두었으니, 원컨대 별궁에 옮겨 두고서 그 허물을 뉘우치기를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고 하면 전일(前日)의 일도 경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근자(近者)에 또 그 침실(寢室)을 따로 하고 자신(自新)하기를 바랐으나, 그래도 고치지 아니하였는데, 능히 허물을 뉘우치겠는가? 만일 허물을 뉘우칠 기미가 있다고 하면 내가 어찌 감히 폐한다고 하겠는가?”

하였다. 좌승지(左承旨) 김승경(金升卿)이 아뢰기를,

“중궁이 전에도 잘못된 행동이 있어서 성상께서 이를 폐하고자 하였으니, 또한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것이 마땅한데, 또 오늘과 같은 일이 있었으니, 뒷날 반드시 이것이 습관이 되어 잘못된 일을 할 것이므로, 한 나라의 모의(母儀)로서는 불가(不可)합니다.”

하고, 우승지(右承旨) 이경동(李瓊仝)이 아뢰기를,

“모후(母后)를 폐치(廢置)하고 어찌 경이(輕易)하게 사제(私第)로 돌아가게 하겠습니까? 더욱 미안(未安)한 일이 되겠습니다.”

하고, 우부승지(右副承旨) 채수(蔡壽)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下敎)가 이러하니 신자(臣子)로서는 그 사이에서 감히 무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채수는 이렇게 폐비에 찬성해 간신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뒷날 '폐비 윤씨가 어렵게 살아가고 있으니 물자를 대 주어야 한다'고 주장해 성종의 분노를 사 고문까지 당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소신이 강한 사람이었던 듯.)


하였다. 임금이 승지들에게 이르기를,

“출궁(出宮)시킬 여러가지 일을 차비하도록 하라.”

하니, 홍귀달·김승경이 아뢰기를,

“모든 일은 이미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중궁은 이미 한 나라의 모의(母儀)로 있었는데, 사제(私第)로 돌려보내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고, 김계창이 이르기를,

“모시던 귀빈(貴嬪)이 비록 죄고(罪辜)에 저촉되었다 하더라도 오히려 사제로 돌려보내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왕비(王妃)이겠습니까? 원컨대 그대로 두고 여러 번 생각하소서.”

하니, 임금이 성을 내어 이르기를,

“경들은 출궁할 여러가지 일만 주선하면 그만인데, 무슨 말이 많은가?”

하였다. 정창손이 이르기를,

“이미 폐했는데, 어찌하여 반드시 다시 견책(譴責)을 가(加)하는 것입니까? 하물며 이미 중궁이 되어 한 나라의 모의가 되었고, 또 원자를 탄생하여 나라의 근본이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강등을 시키어 서인을 만들어 사제로 돌아가게 하면, 사론(士論)이 어떻하겠습니까? 청컨대 별전에 폐처(廢處)케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별전에 두면 따로이 견책하는 뜻이 없다. 만약 그 아들이 주기(主器)가 되면 마땅히 추봉(追封)할 것인데, 지금 서인을 만드는 것이 어찌하여 무엇이 상하겠는가?”

하였다. 심회가 말하기를,

“별전(別殿)에 폐처하는 것이 사제(私第)에 돌려보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원컨대 다시 여러 번 생각하소서.”

하고, 윤필상이 이르기를,

“별전에 안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어찌 별전을 새로 건립하겠는가? 정승(政丞)들은 나가도록 하라.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결단코 고칠 수가 없다.”

하였다. 정승과 승지들이 그래도 계속하여 다시 생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성을 내어 일어서면서 이르기를,

“경들이 물러나지 아니하면 내가 마땅히 안으로 들어가겠다.”

하고, 또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승지를 불러 나가도록 재삼 말하니, 이에 모두 다 나갔으나, 홍귀달·김승경·이경동·김계창만이 머물러 나가지 아니하고, 다시 요청하다가 오래 되어서 나갔다. 얼마 있다가 중궁이 소교(小轎)를 타고 나가서 사제로 돌아 갔다.

(시일을 두지도 않고 당일 곧바로 폐비가 집행된 것입니다. 하지만 승지들은 굴하지 않습니다. 왕의 진노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들의 정신이 볼만합니다.)

홍귀달 등이 차비문(差備門) 안에 나아가 다시 아뢰기를,

“신(臣) 등이 반복하여 생각해 보니, 후궁이 비록 죄가 있어 견책(譴責)을 당하더라도 오히려 사제로 돌려보내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왕비이겠습니까? 이미 중궁의 정위(正位)가 되었고, 또 원자를 탄생하였는데, 이제 여염(閭閻)에 거처하면 소인(小人)들이 성음(聲音)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매우 옳지 못한 것입니다. 청컨대 자수궁(慈壽宮)에 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傳敎)하기를,

“사제에 폐거(廢居)하게 되면 모자(母子)가 서로 보는 것도 또한 인정(人情)에 기뻐하는 바이다. 그대들이 만약 혹시 다시 아뢰면 장차 대죄(大罪)를 가할 것이다.”

하였다.

홍귀달 등이 이르기를,

“우리 조정에서는 조종(祖宗) 이후로부터 이러한 일이 있지 아니하였으니, 후세(後世)에 반드시 오늘날의 일로써 법을 삼을 것입니다. 청컨대 경솔하게 거행하지 말고 다시 대비(大妃)께 아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신이 비록 죄를 받는다 하더라도 차마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거조는 오직 신 등과 정승만이 알고, 외정(外庭)에서는 모두 다 알 수 없었으니, 청컨대 군신(群臣)을 임석(臨席)시켜 교서(敎書)를 반포(頒布)하고 종묘(宗廟)에 고한 연후에 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옛날 세종(世宗)께서 김빈(金嬪)을 폐할 때에도 오히려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하물며 왕비이겠습니까? 다만 전지(傳旨)만을 내리는 것도 예(禮)에 합당하지 못한 듯합니다. 종묘에도 오히려 고해야 하는데, 지금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위에서 계시니, 더욱이 품(稟)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교서(敎書)를 반포하고 종묘에 고하는 것은 아뢴 바가 마땅하다. 중궁의 정위는 길사(吉事)이었는데도 내가 오히려 군신을 참여시키지 아니했는데, 하물며 이러한 흉사(凶事)이겠는가? 권정례(權停禮)로써 행하도록 하라. 또 동부승지(同副承旨) 변수(邊脩) 외에는 모두 다 옥(獄)에 가두게 하라.”

하였다. 정승 등이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승지들의 계옥(繫獄)은 무슨 일입니까?”

하니, 전지하기를,

“이미 정승들과 더불어 의논해 결정하였는데, 승지들이 오히려 대비(大妃)께 아뢰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다른 것이 아니고 윤씨(尹氏)를 구제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정창손·한명회가 아뢰기를,

“승지들이 무슨 다른 뜻이 있었겠습니까? 오늘은 일이 많으니 우선 용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승지들이 대비께 아뢰기를 청한 것은 대비로 하여금 이를 중지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미 두 번이나 아뢰었더니, 대비께서 하교(下敎)하기를, ‘내가 항상 화(禍)가 주상(主上)의 몸에 미칠까 두려워하였는데, 이제 이와 같이 되었으니, 나의 마음이 편안하다.’ 하였으니, 남의 자식 된 자가 부모(父母)로 하여금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또 이는 이 한 집안의 정사이니, 내가 처치(處置)하는 데에 달려 있을 뿐이다. 대비께서 어찌 그릇되게 여기겠는가? 승지들은 육조(六曹)의 참의(參義)로 개차(改差)하도록 하라. 하였다.

일단 이날의 기록은 여기까지. 어쨌든 임금이 죄를 주겠다, 옥에 가두겠다고 협박을 해도 승지들은 '아닌 건 아닌 것'이라고 직간을 합니다.

 

 

조선시대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왕조실록을 보다 보면 이 직간의 문화만큼은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임금이 죽음으로 협박을 해도 당시의 사대부들은 자신의 소신과 맞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고 정면에서 맞섰습니다.

임금은 고사하고 한낱 상사들의 눈치나 보는 요즘의 소시민들이 보기엔 참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이런 직언에 귀를 기울였던 당시의 왕들 역시 요즘의 윗사람들보다는 훨씬 행복했을 겁니다. 잘못을 저질러도 다른 사람들이 고쳐주지 않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겠죠.

어쨌든 아무리 실록을 훑어봐도 '윤비가 임금의 얼굴에 상처를 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일설에는 '왕이 윤비를 때렸다'는 내용이 전해진다고도 하는데 이건 3일 뒤인 6월5일, 6월2일의 회의 때 없었던 백관들 앞에서 임금이 '너희들이 몰라서 그러는데 윤씨의 죄가 한두가지가 아니다'라고 털어놓는 과정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중요 부분만 발췌하면 이렇습니다.

지난 정유년에 윤씨(尹氏)가 몰래 독약(毒藥)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건시(乾柿)와 비상(砒礵)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혹 무자(無子)하게 하는 일이나, 혹 반신불수(半身不遂)가 되게 하는 일, 그리고 무릇 사람을 해(害)하는 방법을 작은 책에 써서 상자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일이 발각된 후 대비께서 이를 취하여 지금까지도 있다. 또 엄씨(嚴氏) 집과 정씨(鄭氏) 집이 서로 통하여 윤씨(尹氏)를 해치려고 모의한 내용의 언문(諺文)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고의로 권씨(權氏)의 집에 투입(投入)시켰는데, 이는 대개 일이 발각되면 엄씨와 정씨에게 해가 미치게 하고자 한 것이다. 항상 나를 볼 때, 일찍이 낯빛을 온화하게 하지 않았으며, 혹은 나의 발자취를 취하여 버리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비록 초부(樵夫)의 아내라 하더라도 감히 그 지아비에게 저항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비가 임금에게 있어서이겠는가? 또 위서(僞書)를 만들어서 본가(本家)에 통하여 이르기를, ‘주상(主上)이 나의 뺨을 때리니, 장차 두 아들을 데리고 집에 나가서 내 여생(餘生)을 편안하게 살겠다.’고 하였는데, 내가 우연히 그 글을 얻어보고 일러 말하기를, ‘허물을 고치기를 기다려 서로 보도록 하겠다.’라고 하였더니, 윤씨(尹氏)가 허물을 뉘우치고 말하기를, ‘나를 거제(巨濟)나 요동(遼東)이나 강계(江界)에 처(處)하게 하더라도 달게 받겠으며, 남방기(南方記)에서 발원(發願)한 대로 사람의 허물을 무량수불(無量壽佛) 앞에서 연비하여 이를 맹세하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내가 이를 믿었더니, 이제 도리어 이와 같으므로, 전일(前日)의 말은 거짓 속이는 말이었다.

曩在丁酉, 尹氏陰懷毒藥, 謀欲害人, 至以乾柿砒礵, 同置囊中, 安知不欲食我也? 或無子, 或半身不遂, 凡害人之方, 書諸小冊, 藏于篋中, 事覺, 大妃取之, 至今猶在。 又僞作嚴氏家與鄭氏家相通, 謀傾尹氏, 諺文, 故投于權氏之第, 蓋欲事覺, 害及兩氏也。 常見我, 未嘗和顔, 或言欲取我足跡, 而去之。 雖樵夫之妻, 尙不敢抗其夫, 況妃之於君乎? 又作僞書, 通于本家曰: ‘主上打我腮, 將率吾二子, 出居于家, 以安吾生也。’ 予偶得其書, 謂之曰: ‘俟改過, 乃相見。’ 尹氏悔過曰: ‘使處我於巨濟遼東江界, 亦所甘受, 願於南方記, 人過無量壽佛前, 燃臂以矢之。’ 予乃信之。 今反如此, 前日之言詐也。

腮가 뺨을 뜻하는 '뺨 시' 자였군요. 아무튼 가정폭력이 만만치 않았으니, 거꾸로 윤씨가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성종은 만 22세의 혈기방장한 나이. 윤씨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성종보다 두살 많거나 열두살 많은(드라마 '인수대비'는 12세 연상설을 택했습니다) 나이입니다. 나이가 많으니 자신이 시들고 꽃다운 새 후궁들에게 임금을 빼앗긴다는 것이 견딜수 없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원자를 낳은 몸, 조금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처신했더라면 연산군의 비극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작 중전이 성종의 뺨을 할퀴었다는 기록은 다른 책에 나옵니다. 1638년 나온 '기묘록'에는 이런 내용이 전해집니다.

성종조(成宗朝)에 공혜왕비(恭惠王妃)가 죽은 다음 숙의(淑儀) 윤씨를 올려서 비(妃)로 삼았다. 성화(成化) 병신년에 연산을 낳아 은총이 융숭하니, 교만하고 방자하여 여러 숙원(淑媛: 양가(良家)의 딸이었던 정씨(鄭氏)와 엄씨(嚴氏)를 말한다) 을 투기하였고 임금에게도 불손하였다. 하루는 임금의 얼굴에 손톱 자국이 있으므로 인수대비(仁粹大妃)가 크게 노하여, 천위(天威)를 격동시켰다. 임금이 외정(外庭)에 나가자 대신 윤필상(尹弼商) 등이 영합하여 의논을 올려 윤씨를 폐하여 친정으로 나가게 하였다.

成宗朝。王妃恭惠薨。陞淑儀尹氏爲妃。成化丙申生燕山。寵隆驕恣。妬忌諸媛不遜於上。一日聖顏有爪痕。仁粹妃 大怒。激成天威。出視外庭。大臣尹弼商等將順獻議。廢出私第。

 

뒷날의 '연려실기술'에서도 인용하고 있으니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닐 듯 합니다. 다만 드라마에서 볼 수 있듯 바로 그날, 그 '임금이 다른 후궁의 침소에 간 날' 몸싸움이 벌어져 손톱자국이 났는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손톱자국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서 궁에서 쫓겨나는 몸이 된 중전 윤씨.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죽음'까지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듯 합니다. 그러나 결론은 사약으로 이어지고, 비극은 수십년 뒤까지 이어집니다.

물론 그 얘기는 나중에 잇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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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포털에서 '아역 김소현 손예진 닮은꼴 미모 화제'라는 얘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김소현이라면 '러브 어게인'에 김지수의 딸로 나오고 있는 처자. 1999년생이라는 무시무시한 출생 연도를 갖고 있는 만 13세 소녀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러브 어게인' 1회를 보다가 '어라, 저 이목구비가 예사롭지 않은 저 아이는 누구지?' 했던 참이었습니다.

 

문득 시대를 넘어 세상을 울리고 웃겼던 브라운관 속 소녀들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갔습니다. 그중 몇몇은 '잘 자랐다'는 말을 듣고, 또 다른 몇몇은 성인으로서의 모습이 어린 시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아무튼 아역 시절 이미 레전드의 반열에 오른 분들을 한번 돌이켜 보자는 것이 이번 포스팅의 의도입니다.

 

 

 

 

사실 우리의 김소현 양은 상당히 아슬아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아역이라고 불리려면 최소한 7~8세에는 데뷔를 해서 그 즉시, 혹은 10~12세 이전에 스타덤에 올라야 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 15세 쯤이라면 방송계에서 통상 아역으로 분류하더라도 이미 하이틴 탤런트로 보아야 하는게 맞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일단 '미모의 아역' 얘기를 할 때 15세 이후에 빛을 발한 분들은 제외합니다. 임예진 김혜수 강주희 뭐 이런 분들, 그리고 가까이는 송혜교 한지민 등이 '아역' 시절 떴지만 실제로는 아역이라고 볼 수 없는 분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해 봅니다.

 

 

 

 

기억이 희미하실 분들부터 시작합니다. 맨 처음 강수연이 TV에 나왔을 때 - 아마도 TBC 어린이 드라마 중 한편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많은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 당시까지 아역 배우의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하던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얼굴에서 벗어난, 이목구비가 뚜렷한 어른 얼굴의 소녀가 등장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살짝 패인 보조개, 오똑한 콧날, 그리고 이미 '애기 소리'가 아닌 목소리(성인이 된 지금의 목소리와 거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한국 아역사에서 '미모'를 논하게 된 계기가 바로 강수연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미모를 뽐냈던 이 소녀는 결국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일세의 국민 여배우로 떠오릅니다. 일각에서(방송이든, 연예 기사든) '잘 자란 아역' 운운 하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그 리스트에 강수연이 빠져 있는 걸 보면 코웃음을 치게 됩니다. 그만치 그런 콘텐트를 만드는 사람들의 시야가 좁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의 미모, 연기력, 화제성, 그리고 성인이 된 뒤 연기자로서의 성취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지금까지 한국에서 강수연을 능가할 아역 배우는 나오지 않았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자료의 부족으로 강수연의 소시적 미모를 제대로 보여드릴 수 없어 아쉬울 뿐.)

 

 

 

나이는 강수연 보다 아래지만 강수연보다 먼저 데뷔한 아역 스타 가운데 윤유선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윤유선은 강수연과 달리 '전형적인 어린이 얼굴'의 배우였습니다. 미모라고 부르는 게 미안할 정도의, '살인적인 귀여움'을 갖고 있던 어린이였습니다. 드라마도 드라마지만 '호돌이와 토순이' 등을 통해 진행자로도 주목받았죠.

 

성인 연기자로는 20대의 나날을 어물어물 지나가 버린 느낌이 있습니다만, 오히려 30대 이후에 연기자로도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 40대에 접어들어서도... 어린 시절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슈퍼 동안의 대명사로 군림하고 있죠.

 

 

 

 

한동안 '강수연=예쁜 아역의 대명사'였던 시절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 바로 이상아였습니다. 일각에서는 '김지미의 어린 시절과 똑같다'는 말이 전해지는데 확인할 길이 없어 아쉽기도 합니다. 아무튼 영화 '길소뜸'에서 김지미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며 이상아의 아역 시대는 화려하게 열렸습니다.

 

이 리스트에 있는 누구와 비교해도 어린 시절의 미모로는 감히 따를 사람이 없었던 이상아. 그런데 아역 시절 이상아는 가녀린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심한 허스키 보이스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엄청난 노력으로 목소리의 약점을 극복, 놀라운 의지의 소유자임을 증명하기도 했죠.

 

 

 

 

90년대 아역의 최고봉을 꼽자면 이재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모는 물론이고 아역 본연의 귀여움과 연기력 면에서 단연 발군이었죠.

 

특히 이재은의 강점은 한복을 입었을 때 드러나는 이마. 밥 먹는 옆에서 대본 한권을 읽어 주면 다시 볼 필요도 없이 줄줄 외웠다는 총명함까지, 당대의 이재은은 역대 최고를 다투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성인이 된 뒤에는 주로 극성맞은 역할('인수대비'의 한명회 부인 같은...)을 맡고 있는데, 격세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비교적 근대(?)로 오면 문근영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맑디 맑은 눈망울에서 떨어지던 수정 같은 눈물방울을 기억하지 못하는 분들이 거의 없을테니 설명도 필요 없겠죠.

 

특히나 문근영은 10세 이하에서 20대 중반에 이르는 현재까지, 공백기나 쇠퇴기가 사실상 없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케이스입니다. 절정에 달했던 것은 13세 때인 2000년의 '가을동화' 지만 그 이전이나 이후, 문근영의 명성은 줄곧 상승곡선을 그렸습니다. 이른바 '국민여동생'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습니다.

 

 

 

 

문근영보다 세 살 아래, 문근영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고 봐야겠지만 미모 하나만큼은 역시 레전드로 꼽아 아깝지 않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바로 '반올림'의 고아라죠. 역시 13세때인 2003년 '반올림'으로 데뷔했습니다.

 

사실 스무살이 넘은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고, '아역 고아라'를 말할 때 과거형을 쓴다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점은 고아라에게 상당히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하죠. 뭐 성인 변신을 위한 확실한 작품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고.

 

(여담: 고아라에 비하면 유아인은 참 어른 얼굴이 된 셈이군요.^^)

 

 

 

 

위의 여섯 아역 스타들과 비교해 볼 때도 일단 미모를 따진다면 김소현은 충분히 경쟁력을 갖는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최근들어 갑자기 많은 작품('해품달' '옥탑방 왕세자' '러브 어게인')에 출연하며 관심이 집중됐다는 면도 있지만, '손예진 닮은꼴 미모'가 갑자기 거론되는게 그리 공허한 호들갑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10년, 20년 뒤에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정도인지는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겠죠.

 

여러분이 직접 '아역 미모'의 순위를 매기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사실 제가 생각하는, 제가 지금까지 본 역대 최고의 아역은 이 친구입니다.

 

 

 

 

솔직히 아역을 평가할 때 '어른 얼굴'에 가까운 미모가 그리 중요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신애를 능가할 아역을 지금까지는 못 본 듯 합니다. 귀여운 얼굴, 연기력, 어딘가 보고 있는 사람의 가슴을 무겁게 하는 청승맞은 눈빛까지... 완벽합니다.

 

P.S. 자료를 찾다 보니 이 아역이 눈길을 끄는군요. 누구일까요?

(눈썰미 있는 분이라면 금세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지금 얼굴이 그대로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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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가 일본 드라마 '동창회-러브 어게인 증후군'을 모태로 한 JTBC 수목드라마 '러브 어게인'의 주연으로 발탁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문득 생각난 작품이 있었습니다.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김지수는 2년 전, '도쿄 타워'라는 드라마의 주인공 물망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도쿄 타워'라는 제목은 좀 흔합니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건 아무래도 오다기리 조 주연의 영화 '도쿄 타워'(2007)죠. 어머니와 아들의 찐한 사랑 이야기인 이 영화는 같은 제목의 드라마를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지수가 물망에 올랐던 2004년작 영화 '도쿄 타워'는 이와는 좀 다른 얘깁니다. 20대 초반 청년과 40대 유부녀(극중에선 엄마의 친구로 설정)의 비련 이야기였죠. 일본 최고의 인기남 중 하나인 오카다 준이치가 주인공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모태로 한 한국 드라마 '도쿄타워(물론 가칭입니다. 한국 드라마 제목을 '도쿄타워'라고 붙일 수는 없는 일... '남산 타워' 였으면 그것도 코미디였을 것이고...^^)'는 남녀 주인공까지 캐스팅되는 등 제작 초읽기 단계까지 갔지만 결국 만들어지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남자 주인공 물망에 올랐던 J군이 갑작스레 심각한 문제에 휘말렸기 때문입니다. 의혹은 사실로 밝혀졌고, J군은 긴 자숙에 들어갔고, 드라마는 무산돼 버렸습니다.

 

 



김지수가 출연한 그 많은 작품들 가운데 유독 이 두 작품을 놓고 얘기하는 이유는... 아마도 일본 문화에 관심있는 분들은 금세 눈치채실 수 있을 겁니다. 일본 드라마 '동창회'와 영화 '도쿄 타워'의 주인공이 구로키 히토미라는 같은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쿠로키 히토미라고 쓰는게 정확한 발음에 가깝겠지만 어쨌든 아직 한국의 일본어 표기법은 첫 음에서 '쿠'와 '구'는 모두 '구'로 쓰게 되어 있습니다. 1960년 생. 일본의 독특한 문화 요소인 다카라즈카 출신입니다. 모든 등장인물을 여성들이 소화하는 다카라즈카는 일본 연예계의 엘리트 코스로 불리기도 합니다. 구로키 히토미를 비롯해 '여왕의 교실', '보스'의 아마미 유키(아마도 '일본의 고현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 합니다)나 미녀 배우 단 레이 같은 경우가 다카라즈카 출신의 대표적인 여배우로 꼽히죠.

 

 

 

 

다카라즈카의 특징은 남자 역을 맡은 배우는 미모와 관계 없이 다소 중성적이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가 몸에 배고(아마미 유키를 보신 분이라면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여자 역 전문 배우는 여성스러움을 극대화한 연기의 달인이 됩니다. 구로키는 대표적인 다카라즈카의 여자 역할 배우였다고 합니다.

 

 

 

 

나이를 봐도 알 수 있지만 구로키는 스타가 된게 오래 전의 일입니다. 아마도 좀 나이드신 분들은 1990년대 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물결과 함께 자주 거론됐던 '실락원'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실락원'은 남편과 갈등을 겪던 청순한 유부녀가 훨씬 연상인 중년의 잡지 편집장과 불륜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흔히 '일본의 안성기'라는 식으로 비교되는 야쿠쇼 코지가 남자 주인공을, 구로키 히토미가 여주인공을 맡았죠. 주인공들의 이름값에 비해 상당한 수위의 노출이 포함돼 있었기 때문에 일본에서도 화제였고, 국내 도입을 놓고 '수준높은 예술영화'냐 '왜색 에로영화'냐 하는 논란이 상당히 거셌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가 1997년작이니 지금부터 15년 전. 이미 37세였던 구로키는 50대가 된 지금도 중년 여성의 로망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마 국내 시청자들에게 알려진 드라마를 꼽자면 일본판 '하얀 거탑'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구로키는 한국 드라마로 치자면 장준혁(김명민) 박사의 애인인 카페 사장(한국에선 와인바 주인) 역을 맡았습니다. 한국판에선 김보경이 연기한 역할이죠.

 


구로키는 올해도 '추정유죄'라는 드라마에서 주역을 맡았습니다.

출연작들을 훑어보면 배우의 이미지가 대략 그려집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여자'의 느낌을 가진 배우죠. 특히 '세월이 흘러도 늙지 않는 여자'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일본을 대표하는 '방부제 복용 배우'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40대의 나이에도 20대 남자와 연애할 수 있는 여자'의 대표자로 꼽히기도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특히 좋아하는 앙케이트 조사에서도 젊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한 '모시고 싶은 여자 상사', 30대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모델로 삼고 싶은 중년 여성' 등의 상위권에 단골로 뽑힙니다. 1991년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남편의 신상 등은 잘 알려지 있지 않습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있으면 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여담이지만 일본 연예계와 연예 저널리즘의 관계는 한국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가끔 보면 놀라울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이쯤 되면 김지수와 구로키 히토미의 비교가 그리 무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시게 될 겁니다. 나이를 무시한 방부제 미모, '연하남'이라는 코드, 꾸준한 인기, 여성들의 선망. 물론 12년의 나이 차이가 납니다만, 구로키 히토미를 통해 대략 12년 후 김지수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아무튼 현재의 모습은 오늘 밤에도 방송되는 '러브 어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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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시면 '응? 주지훈과 류정한이 무슨 관계지?' 하실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드라마 마니아라면 다르시겠죠. 두 사람 모두 드라마의 거장 황인뢰 감독이 '깜짝 주인공'으로 캐스팅한 인물들이라는 점을 쉽게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드라마 제작 현장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캐스팅 과정이야말로 진짜 드라마'라는 말을 합니다. 작가와 연출자가 처음 대본을 만지면서 생각했던 주인공들이 그대로 캐스팅되는 경우는 100에 하나가 될까 말까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처음 구상과는 전혀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깜짝 신인이 '혜성과 같이 나타나서' 스타덤에 오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경우도 있고, '누가 봐도 망할 수가 없는 주인공'을 캐스팅한 드라마가 산산조각이 나는 경우도 흔합니다. 그것이 드라마의 세계죠.

 

 

 

 

최근 끝난 '아내의 자격'의 안판석 감독과 현재 방송중인 '러브 어게인'의 황인뢰 감독은 각기 일세를 풍미한 명 드라마 연출자로 유명합니다. 이 분들의 작품들 가운데서 신인 기용과 관련해 대조적인 경우가 문득 떠오릅니다.

 

안판석 감독은 '아내의 자격'의 주인공 이성재를 처음으로 주인공에 기용한 연출자입니다. 바로 1997년작인 드라마 '예스터데이'죠.

 

 

 

당초 이 드라마는 메인 주인공인 영호 역을 비워 놓고, 영호의 의붓형인 민수 역에 이종원을, 그리고 두 남자주인공을 갈라 놓는 여주인공 역으로 김소연을 캐스팅해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메인 주인공 캐스팅은 잘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안 감독은 이종원을 영호 역으로 바꾸고 대신 민수 역에 거의 완전히 신인인 이성재를 기용하는 모험을 합니다. 이 작품으로 이성재는 호평을 받았고, 두 남자 사이에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오히려 강한 인상의 이종원이 선한 주인공으로, 선하고 유약한 인상의 이성재가 이종원에게 앙심을 품는 역으로 등장하며 신선한 느낌을 줬다는 평이 주류였죠) 대신 이종원과 김소연이 너무 나이 차이가 커 보이며 케미스트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드라마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와는 정 반대 케이스가 '궁'입니다. 궁은 일찌감치 김정훈을 남자 2번 격인 이율 역으로 캐스팅하고, 주인공으로 모델 출신 신인 주지훈을 캐스팅합니다. 당시 지명도로 보나, 인기로 보나 UN 출신의 김정훈이 주지훈보다 높은 급의 배우였죠.

 

당연히 김정훈을 메인 주인공으로 올려 놓고 두 배우의 역할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제작진은 단호하게 그런 주장을 잘라 버렸습니다. 주지훈의 외모에 대해서도 어딘가 이상하다(지금 들으시면 깜짝 놀랄 얘기지만 '궁'이 방송되기 전에는 이런 얘기가 꽤 많았습니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역시 황인뢰 감독은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궁'은 히트했고, 주지훈은 바로 톱의 자리에 올랐죠.

 

물론 이런 선택 때문에 '궁'은 히트하고 '예스터데이'는 실패했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닙니다. 드라마가 성공하고 실패하는 데에는 엄청나게 많은 변수가 있기 마련이죠. 다만 당시 '궁'의 연출자가 황인뢰 감독이고, '궁'에 이어 다시 한번 남자 주인공에 드라마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신인을 기용한 거라는 점에서 유사점을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

 

 

 

 

또 류정한이 연기 경력이 없는 신인이냐면 그건 또 아니고.^

 

최근 김무열 조정석 엄기준 주원, 멀게는 오만석 신성록 송창의 박건형 등등 뮤지컬계에서 내로라 하는 이름들이 드라마나 영화에 진출해 각광받고 있는 건 어제 오늘 얘기가 아닙니다. 그런 수많은 스타들 가운데서도, 뮤지컬 본령에서 류정한의 이름을 넘어선 연기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있다면 조승우 정도?)

 

 

 

 

뮤지컬 출신 배우들이 성공하는 이유는 뭘까요. 아마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안정된 발성입니다. 위의 연기자들 가운데서 목소리가 매력적이지 않은 배우는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고, 그 중에서도 류정한의 적당히 기름기 있는^^ 저음은 특히 매력적이죠. '러브 어게인'에서 보면 '과연 저런 목소리의 형사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좀 들긴 하지만, 아무튼 목소리 참 좋다는 데에는 이견을 달 수가 없습니다.

 

연기력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대극장 무대에서의 연기와 클로즈업이 들어갈 수 있는 드라마/영화에서의 연기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야구로 치자면 내야에서의 송구냐, 외야에서의 송구냐 정도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 어깨가 탄탄한 선수라면 어느 쪽이든 적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가능하면 류정한이 드라마에서도 노래하는 장면을 한번 정도 보여주면 기존의 팬들 외에 새로운 팬들을 확보하는 데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본인의 뜻과 다르다 보니 그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겠습니다. 뒤로 가면 한번쯤 가능할지도...^^) 뭐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강력계 반장이 된 형사... 괜찮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류정한의 노래 한 곡.

 

 

 

만약 류정한을 드라마에서 처음 보신 분이라면, 지금은 드라마 속 역할 때문에 조용조용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남자라고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노래를 들어 보시면 그 안의 열정을 느끼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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