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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새 수목드라마 '러브 어게인' 첫방이 나갔습니다. 탄탄한 줄거리와 배우들, 연출력이 뒷받침 된 드라마이다 보니 첫 방송이지만 반응도 괜찮았습니다. 4%대 시청률로 막을 내린 '아내의 자격'의 후속이라서인지 첫회가 2%대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다 보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드라마 줄거리보다 여주인공 김지수였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제가 김지수를 TV에서 처음 본 게 1994년의 '종합병원'이더군요. 뭐 저 뿐만 아니고 거의 모든 분들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되는데, 놀랍게도 김지수의 모습이 그때와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뱀파이어녀' 혹은 '방부제녀'라는 말이 좀 장난스럽게 쓰이곤 하는데, 김지수야말로 진정한 뱀파이어족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건 바로 이번주 월요일에 있었던 '러브 어게인' 제작발표회장에서 찍힌 김지수의 모습입니다. 김지수는 1972년생. 오는 10월이면 만 40세가 됩니다. 극중 설정 나이가 얼추 45세면 실제 나이에 비해 큰 무리는 아닐 듯 하지만, 저 비주얼로 45세...라는 것은 진짜 45세 전후의 여성들에겐 참 불쾌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쨌든 서서히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2008년작 '태양의 여자' 때 한 잡지와의 인터뷰 사진입니다.

'태양의 여자'가 벌써 4년 전 드라마라는 것도 그렇지만, 지금과 김지수는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뭐 4년 전이니 당연히 그럴 법 합니다. 

 

2005년작, 영화 '여자, 정혜' 때의 스틸입니다.

지금보다 살짝 어려 보이는 건 헤어스타일 탓인 듯도 하고... 아무튼 뭐 그닥 달라진 건 없는 얼굴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지금부터 7년 전의 모습이라는 것. 

 

2001년작 드라마 '온달왕자들'에서의 모습. 자, 한번 맨 위의 사진과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찌 보면 며칠 전에 찍힌 사진보다, 이 모습이 나이들어 보인다고 느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려 11년 전의 모습입니다.

 

 일일드라마로 공전의 히트작이던 '보고 또 보고' 시절의 사진. 고인이 된 박용하가 옆에 있어 세월을 느끼게 하지만 아무튼 엊그제 찍은 사진이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정도.

어쨌든 1998년, 지금부터 14년 전입니다.

 

1997년작 '내안의 천사' 시절. 오른쪽에는 장진영의 모습이 있습니다. 이 사진 역시 지금보다 조금 나이들어 보인다고도 할 수 있는 모습...^^

 

이게 실질적인 데뷔작인 '종합병원' 때의 모습입니다. 1994년. 진짜 데뷔작은 1993년의 '머나먼 쏭바강'이지만 아무튼 사람들이 기억하는 첫 작품은 이거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이해 11월 경향신문의 인터뷰 기사에 실린 사진. 역시 지금과 다른 점이라면 살짝 남은 볼살 정도? 대개는 이 볼살이 빠지면서 좀 더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이지만 김지수는 볼살이 없어지면서 오히려 점점 더 젊은 얼굴이 되어 간 듯 합니다.

어쨌든 제 느낌으로는 이 사진이 더 나이들어보입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최소한 18년 전의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을 듯 합니다.^^ 보통 사람들과 비하면 더욱 그렇고, 연예인들 가운데서도 18년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이 정도인 사람은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엊그제 김지수가 나온 드라마 '러브 어게인'의 티저 영상 가운데 김동률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배경에 깐 버전이 공개됐습니다. 아마 드라마로는 4부 정도에 나오는 장면일 겁니다.

 

이 영상 속에 나오는 김지수와 다음 영상 속 김지수를 한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래쪽은 2001년 공개된 김동률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공식 뮤직비디오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영상에서도 김지수가 주인공을 맡았습니다. 화장법이 요즘 유행과 좀 달라지긴 했지만 참 세월이 흘러도 이렇게 안 변할 수가 있나 싶더군요.

 

김지수가 데뷔한게 벌써 19년 전. 참 여러가지로 놀랍습니다.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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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자격'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참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인지는 모르지만, 매회 볼 때마다 사람을 놀라게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내의 자격' 10회는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이혼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부분은 이혼한 부부의 자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한국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이혼한 부부의 모습은 '폭력 남편', '바람피는 남편'과 '폭력 피해자 아내' 또는 '자식새끼 내버리고 튄 화냥년'이라는 아주 전형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자격'은 다르더군요. 특히 자녀에게 이혼을 설명하는 부모의 모습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이혼을 맞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아내의 자격'이 다른 드라마들과 어떻게 다른가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10회에서 서래(김희애)는 초등학교 5학년생인 결이를 찾아갑니다. 과연 5학년인 아들에게, 이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더구나 이렇게 '자식을 버리고 바람나서 달아나는' 경우를 아이에게 어떻게 전할까.

대부분의 경우라면 이런 부모들은 그냥 바로 숨어 버릴 겁니다. 드라마 속에서도 아예 죄책감 때문에 아이와의 관계를 끊는 것으로 그려지죠. 하지만 서래는 아이를 만나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왜 엄마와 살 수 없느냐는 질문에 "양육권은 경제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고... 엄마가 잘못해서"라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아빠 말고 다른 아저씨를 좋아하게 되어서"라는 말에도 결이는 심하게 충격받지 않습니다. 그게 자기가 좋아하는 치과 의사 아저씨라는 데에서야 놀랄 뿐입니다. 이미 초등학교 5학년만 되어도 자신의 부모들이 이혼할 수 있다는 것,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이는 엄마를 만났다는 사실을 아빠에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나혼자 이런 저런 상상 많이 했는데 다 알게 돼서 좋았어요. 다음주에는 엄마 만나러 가고 싶어요."

그런 조숙한 아이에게 서래가 전하고 싶은 것도 "엄마는 너를 버리는게 아니야"라는 한마디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를 떠난다고 아이의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한국 드라마에서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가슴으로 전하는 여주인공이 지금까지 몇이나 있었을까요.

(사실 '아이에게 말하기'라는 것은 이런 경우의 부모들에겐 고문에 가까운 일일 겁니다. 그걸 잘 알기에 지선(이태란)도 태오(이성재)에게 "딸에게는 네가 저지른 짓, 직접 얘기하라"고 쏘아붙입니다.)

 

또 하나,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혼의 이유가 불륜' 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동안의 수많은 드라마에서는 '바람 피우다 이혼하는' 수없이 많은 커플들이 등장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태오-지선 부부가 갈라서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은, 부부가 함께 살다가 헤어지는 이유에는 수천만가지가 있다는 것을 넌즈시 보여줍니다.

지선은 두 사람이 헤어지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문득 '강남좌파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른바 '패션좌파'라고도 불리는 강남 부유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태오가 대학생이던 시절 운동권이었다는 것은 이미 태오의 선배이자 서래 남편 상진의 친구인 진만(현재 국회의원이 되어 있는)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런 태오와 캠퍼스 커플이었던 지선 역시 그 영향 속에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동지적 관계'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지금 지선은 강남 한복판에서 상위 1%의 사람들이 다음 세대를 키워내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학원 강사가 아니라 성공한 경영인으로 변신해 있고, 학원기업을 일으키자는 야망도 갖고 있습니다. 또 '내 딸 만큼은 상위 0.1%로 키워내야겠다'는 속내를 내비치기도 합니다.

그런 지선 때문에 호의호식하는 것도, 지선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태오에겐 모두 불만입니다. 이것이 어느새 부부 사이를 냉랭하게 만든 것이죠. 그리고 태오에게만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지선도 태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늘 하고 싶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다들 강남 좌파라고 한껏 폼 내고 사는데 이 남자(태오)는 왜 그렇게 못 할까. 화염병 만들던 애들이 빈티지 와인 마시고, 가끔 소탈한 척도 해야 하니까 막걸리도 있는 종류대로 골라 마시고,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이 남자는 그걸 못하나."

이런 불만이 쌓이고 쌓여 결국은 부부가 갈라서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마지막으로 정성주 작가는 이혼 이야기의 전개에서도 새로운 장을 열어 보입니다. 지금까지 부부 사이의 위기, 혹은 '불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드라마들은 대부분 '이혼을 하느냐 마느냐'를 정점으로 삼았습니다. '아내의 자격'과 간혹 비교되곤 했던 '애인'에서도 유동근과 황신혜가 연기했던 두 주인공은 결국 고뇌 끝에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막을 내렸죠.

하지만 김희애와 이성재는 16부작 드라마의 10회에서 갈라서 버립니다. 나머지 6회는? 기존의 드라마 진행속도로 본다면 이건 보너스인 셈이죠. 말하자면 지금까지는 '아내의 자격 1부'였던 셈이고, 이제 '아내의 자격 2부'가 제대로 시작할 조짐입니다.

 

물론 서래의 눈물겨운 고생담도 지금부터 시작일 듯 합니다. 태오에게는 동화책에 삽화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로 고생 없이 살고 있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생활을 위해 고기집에서 한밤중까지 불판을 닦는 고된 삶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11회에서는 그런 현실을 태오가 알게 되는 듯 하더군요. 이래저래 차회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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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수목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보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지는 한마디가 툭툭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회사가 회사다 보니 주변에 널린 게 기자들입니다. 요즘은 신문과 방송이 한 건물 안에 있으니 신문기자, 방송기자가 다 있습니다. 그중 한 선배에게 요즘 '아내의 자격' 보느냐고 물었습니다. "야, 말도 마라. 요즘 집에서 마누라 그거 못 보게 하느라고 마크하는데 진땀 뺀다."

아니 회사의 간판 프로그램인데 못 보게 하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그 남편, 얼마나 찌질하게 나오냐? 거기다 기자잖아."


'아내의 자격'에서 극중 방송사 중견기자 한상진 역으로 나오는 배우는 장현성. 왕년에 '놀러와'에 출연해 "지적인 외모 때문에 한때 길에서 정치범(?)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는 바로 그 배우입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상진 캐릭터는 정말 '먹물 찌질이'의 대명사라 할만한 캐릭터입니다. 뭔가 아는 것도 많고, 방송에 나와서 하는 말은 다 그럴듯하지만 방송 밖으로 나오면 금세 본색이 드러납니다.


서래와 결혼할 때만 해도 뭔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인 듯 보였겠지만 결국은 출세와 성공을 기준으로 인생을 평가하는 그런 남자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집에서는 큰소리를 쳐야 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있어 보이는 말'로 자기를 포장하기 바쁩니다.

'이런 남자'에 대한 정성주 작가의 서릿발같은 비판은 이미 시청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 있습니다. 바로 왕년의 히트작 '아줌마'에서 강석우가 연기했던 장진구라는 캐릭터입니다.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는 속물 지식인이었던 장진구는 늘 학력 컴플렉스가 있는 아내 앞에서 자신의 지식을 대단한 양 포장해 떠들지만 자신의 실체와는 영 거리가 있는 모습일 뿐입니다.


14일 방송된 '아내의 자격'에서 상진은 한술 더 뜹니다. 캠핑장 가는 길을 못 찾자 "이런데 캠핑장 만드는 것 부터가 자연 훼손"이라고 욕을 하더니 캠핑장이 마음에 들자 "역시 사람은 자연의 기를 자주 들이마셔야 한다"고 금세 팔랑거리고, 처음 만난 태오 부부에게도 바로 '학번'과 '학교'를 묻고 그 학교의 '아는 사람'을 들먹이며 선배 행세를 합니다.

15일로 넘어가면, 상진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자신과 친한 태오의 선배를 불러내 굳이 술자리를 갖고, 술에 취해 나뒹구는 추태를 보입니다. 아무튼 학벌/인맥/사회적 지위 앞에 한없이 작아져 '언론인의 기개'같은 것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는 나약한 지식인의 모습을 한껏 보여줍니다.


사실 너무 익숙한 광경이어서 소름이 끼칠 정돕니다. 어쩌면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저런 모습으로 비치고 있는게 아닌가'하는 불안감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집에서 그거 볼까봐 겁난다"는 선배 말이 가슴에 확 와 닿습니다.



아무튼 14일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불륜의 적발 장면. 늦은 밤 캠핑장에서 혼자 불 곁에 앉아 술을 마시던 태오는 담요를 뒤집어쓰고 나온 서래와 마주칩니다. 코를 고는 남편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어 나온 것이죠. 차에 가서 자겠다는 서래를 따라 나선 태오는 서래의 차 옆자리에서 잠이 듭니다.

다음날 아침 햇살에 눈을 뜬 서래는 차창 밖에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지선과 눈이 마주칩니다. 순간 헛것을 본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서래. 모두 다 모인 자리에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던 지선은 각자 집으로 돌아가기 직전, 서래를 꼭 껴안고 귀에 나지막히 속삭입니다. "내가 결이 엄마 좋아하는 거 알죠?"


결국 다시 '내가 미쳤지 미쳤어'의 자세로 돌아간 서래는 지선을 찾아가 "모두 내 불찰"이라며 간곡히 사과합니다. (물론 주인공들이 이 선에서 마무리한다면 아무 일도 없는 평온한 가정이 회복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면 드라마가 안 되겠죠.ㅋ) 하지만 이미 서래의 남편 상진과 시누이 명진이 사건의 추이를 알고 있는 이상, 간단히 일이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번 주 방송에서는 두 개의 대사가 기억에 남습니다. 첫째는 태오에게 "이건 밥도 아니고, 공기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서래의 대사. 뒤늦게 찾아온 감정이 소중하긴 하지만, 없어서 죽는 건 아니라는 걸 가리키는 얘기죠.

하지만 다음주 예고에서 서래는 "10년만에 내가 여자라는 걸 알게 됐다"고 합니다. 드라마며 소설에서 많이 나오는 말이지만 여운이 남다릅니다. 글쎄, 여자가 아닌 제가 이해하기는 참 힘든 얘깁니다만... 남자들이라고 매일 매 시간 '나는 남자다'라는 걸 스스로에게 다시 인식시키며 살지는 않죠. 그럼 남자들은 언제 '나는 아직 남자다'라는 걸 느낄까요. 그게 그렇게 소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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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자격 - 김희애, 이성재 주연 JTBC 수목드라마]

드라마 '아내의 자격'에서 서래(김희애)의 대사 가운데 유독 눈길을 끄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미쳤어"입니다. 입으로는 계속 '미쳤어' '미쳤어'를 되뇌면서도, 마음이 몸을 어찌 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대치동 교육 현실을 본격적으로 파고 들었던 1,2부에 이어 이번주 3,4부에서 '아내의 자격'은 서래와 대오의 격정이 명진과 은경의 감시망에 걸려드는데에까지 이어졌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남성 시청자들에게는 한가지 의문이 생긴 듯 합니다. '과연 한번 빠지면 저렇게까지 될까?' 라는 질문으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3부. 서래의 집에 시댁 식구들이 다 와서 저녁을 먹고 서래 남편 상진이 진행하는 '생생경제학'이라는 뉴스 꼭지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로원에 가서 서래 엄마의 치과 치료를 하고 돌아오는 태오가 계속 문자를 보냅니다. '전해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지금 배에서 내렸습니다', '터널 막 지났습니다'. 그 문자를 계속 확인하는 서래는 금방이라도 손에서 그릇을 놓쳐 깨뜨릴 사람처럼 보입니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밝은 낮에 주세요' 이 한마디를 왜 못하나 화가 날 지경입니다. 마지막에 서래는 '경비실에 맡겨주세요' 이 한마디를 못 하죠. '경비실에 맡겨 주세요'를 문자로 다 쳐 놓은 뒤에도 서래는 끝내 보내질 못하고 달려나갑니다. 그리고는 태오의 차 옆자리에 앉아 숨을 헉헉거리며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집에 시댁 식구들 다 와 있는데 거짓말 하구 나왔어요. 결혼해서 단 한 번두 안해본 짓이예요. 엄마가 치매라는 거두 숨기구 싶었지만 그러믄 내가 더 속상할 거 같아서 다 말했어요. 애 학원에선, 애 땜에 의논 좀 하자는데 그냥 내뺐어요. 그 학원 보낼려구 온갖 짓을 다 하구,원장 말이라믄 자다가두 벌떡 일어나야 마땅한데, 도망쳤다구요.  어떻게든 김태오씨 만나구 싶어서요. 지금, 원장이 전화 하라는데두, 안하구 싶어요. 내일 하구 싶어요. 말두 안되는 일이예요. 정신이 나간 거예요."

(정성주 작가님 존경합니다. 대사의 생생함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정말 미친게 맞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지금 시댁 식구들 다 와 있어요. 다음에 주세요'라고 했겠죠. 태오야 뭐 사정을 알리 없으니 그냥 문자 계속 찍어 보내는 거고. 아무튼 얼마든지 미룰 수 있었는데 서래는 미루질 못합니다. 왜. 그냥 당장 보고 싶은거죠. 당장 그 사람 얼굴을 못 보면 안될 것 같은 거고. 애가 초등학교 5학년인 주부가 말입니다.

실제로도 그런지는 제가 알 길이 별로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금단의 사랑에 빠져드는 여자들은 흔히 '미친 것'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예는 많습니다. 영화 '해피엔드'에서 전도연을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빠를 겁니다. 너무 남자(주진모)가 만나고 싶었던 전도연은 젖병에 수면제를 타 아기를 재워 놓고 달려나갑니다. 그 결과는... 유혈극이죠.



영화 '쌍화점'에서도 왕비 송지효는 왕의 심복인 무사 조인성에 대한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사고를 치고 맙니다. 이처럼 많은 작품에서 여자들은 '한번 사랑에 눈을 뜨면 세상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격정을 가진 존재들'로 그려지곤 합니다.

사실 속설로도 이런 얘기는 자주 등장합니다. '남자는 어쩌다 바람을 피워도 금세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그냥 한번의 바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가 바람이 나면, 남편이며 자식이며 다 버린다. 여자란 사랑에 눈멀면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맞는 얘기인지 알 수 없지만 참 많이 들은 얘깁니다.



제목은 저렇게 달았지만, 남자인 저로서는 참 궁금합니다. 왜 여자는 '스쳐가는 바람에 인생을 거는' 존재로 그려질까요. 왜 남자는 한번 스치고 지나가서도 흘러간 시절을 가끔씩 기억하며 잘 사는 반면, 여자는 평생을 잊지 못하고 한을 품는다고들 한 것일까요. 이런 건 정말 옛날, 여자들이 억압받고 살던 시절이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시절에나 통하던 얘기일까요?

그런데 정말 더 궁금한 건, '아내의 자격'을 보면서, 이 21세기의 다 열린 시대에도 여자들은 여전히 김희애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고들 하는 겁니다. 과연 여자는 원래 그런 존재일까요?




P.S. 사실 김희애에 가려 잘 안 보이긴 하지만 '아내의 자격'에는 또 하나의 '미친 여자'가 있습니다. 바로 서래의 앞집에 사는 은주(임성민)입니다.

은주는 서래의 시누이인 명진(최은경)과 친구 사이지만 사실은 명진의 남편 현태(박혁권)를 공유하고 있는 사이입니다. 은주가 혼자 기르는 아들 재훈이 바로 현태의 아들인 것이죠. 한 동네에서 두집살림을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분들도 있지만, 사실은 치밀한 구성이 숨어 있습니다. 3부에 나온 바로 이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은주-설마 당신 오늘 저녁 때 우리 앞집에 납실 건 아니겠지?
현태-돌았냐?!
은주-명진이가 늦더라두 오래던데?
현태-말이 그렇지!
은주-당신 명진이 말 잘 듣잖아. 좋은 남편 행세하느라 왔다가 재훈이랑 정면으루 마주치믄 참 볼 만 할거야,그치?
현태-얼른 가. 쓸데 없는 걱정 말구.  
은주-알았어...비루하지? 처남 집에두 맘놓구 못다니구.
현태-가라고!
은주-재훈이 국제중 들어갈 때까지만 참어. 나두 그 때 바라보구 참는 거야. 그리구,재훈이 아침 공부 매일 해 줘.일주일에 하루,거지한테 적선해? 나 그거 싫거든?
현태-아,아니,이거 봐,
은주-조현태씨. 재훈 아빠.나 당신 쫌 많이 알어. 나는 최후에 터질 폭탄이지만, 그러기 전에, 내 맘에 안들게 굴믄 터뜨릴 게 무수히 많다구...당신 별명이 2차 대마왕이라지?
현태-누가 그따위 소릴 해!
은주-당신 나 어디서 만났니...나 아직 그쪽 인맥 안 끊었어...왜냐,당신이 여전히 출입하구 있으니까.
현태-그,그거야 업무의 연장,
은주-뭐?
현태-아,알았어,일단 가.누가 보기 전에.

그러니까 이 대화를 통해 시청자들은 은주가 한때 룸살롱에 나갔다는 것, 현태는 여전히 룸살롱 업계의 큰 고객이라는 것, 두 사람은 호스티스와 손님 사이로 만났다는 것, 그리고 처음부터 한 동네였던 게 아니라 혼자 아들(재훈)을 키우던 은주도 바로 '교육 때문에' 현태와 명진이 사는 바로 그 동네로 왔다는 것 등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은주 또한 미쳐 있는 거죠. 분명 현태가 유부남인 것도 알고 만났겠지만, 어쨌든 자기가 온전한 가정을 갖지 못한다는 불만이 늘 가득 차 있고, 그것 때문에 현태의 목줄을 쥐고 놓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 정도가 되면 사랑에 미친 것인지, 아니면 사랑 때문에 미친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어지지만, 이 광기는 왜 은주가 서래와 태오의 관계를 폭로하지 못해 안달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자기가 차지하지 못한 현태를 차지하고 있는 명진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명진이 늘 자랑하는 '완벽한 가족'을 파괴하고 싶은 것이죠. 아무튼 이런 광기 때문에 '아내의 자격'은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아내의 자격 - 김희애, 이성재 주연 JTBC 수목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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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애 주연 '아내의 자격'이 첫 전파를 탔습니다. 연출 안판석, 극본 정성주, 주연 김희애 이성재 이태란 장현성. 이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손색 없는 라인업입니다.

처음 대본을 대했을 때의 느낌은 '정성주 작가의 화려한 귀환'이었습니다. 1999년 최진실-김혜자가 환상의 고부간 연기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장미와 콩나물', 2000~2001년 원미경 주연의 '아줌마'로 남자들의 위선적인 가부장주의를 거침없이 공격했던 대 작가였죠(한 시대를 풍미한 미남 스타 강석우가 찌질남의 대명사 '장진구'로 불리게 됐던 바로 그 드라마입니다). 이 시기의 정성주 작가는 포스트 김수현의 선두로 불러 아깝지 않은 필력을 과시했습니다. 특히 홈 드라마에서 여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힘은 대단했죠.

그러나 '고질적으로 대본이 늦는다'는 혹평과 함께 드라마 '술의 나라' 파동을 겪은 이후 정 작가의 작품에선 이전의 파괴력을 엿보기 힘들었습니다. 최정원 주연의 '애정만세'도 일정 수준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변호사들'은 마니아 층의 뜨거운 성원을 받았지만 예전의 정 작가 드라마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겐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자격'은 정 작가가 절치부심 뽑아낸 작품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소한 조연급 인물 하나 하나의 동작에도 이유가 설명되어 있는 것은 물론, 대사 하나 하나에도 섬세한 디테일이 잘 지시되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자격'은 아들 교육을 위해 대치동으로 전세를 얻어 이주한 주부 서래(김희애) 이야기입니다. 전형적인 강남 중산/부유층에서 자라나 방송사 기자로 일하고 있는 남편 상진(장현성)이 '아들 결이의 장래를 위해 이대로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이동생(최은경)의 딸이 국제중에 입학하는 장면을 본 다음의 결론입니다.

하지만 예상보다 '강남의 벽'은 높았고, 결이는 국제중 입학을 위해 다녀야 할 학원 시험에서마저 꼴찌를 하는 참혹한 성적을 기록합니다. 궁지에 몰린 서래는 학원 원장인 '홍마녀'(이태란)를 찾아가 결이를 받아줄 것을 간청하고, 서래에게서 일반적인 대치동 아줌마들과 다른 뭔가를 본 홍마녀는 결이에게 기회를 줍니다.

날아갈 것 같지만 여전히 대치동 생활이 낯설고 힘든 서래는 동네 치과를 갔다가 언젠가 자신의 도둑맞은 자전거를 찾아 준 태오(이성재)를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서래와 태오는 양로원에 있는 서래의 어머니 치료를 위해 먼 길을 떠났다가 귀경하는 배를 놓칠 위기에 놓입니다. (여기까지가 1~2부의 주요 내용)



대본상으로 여기까지 내용을 접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것은 여기 저기 나타나는 치밀한 취재의 흔적이었습니다. 대본은 강남 아이들이 학원 시험을 치르는 과정, 실제 가족의 식생활을 책임지는 '반찬 아줌마'들의 네트워크, 가족관계와 대화 내용 등 '대치동 라이프 스타일'의 디테일을 생생하게 살려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드라마 속에 나오는 '대치동'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흔히 '욕망 `1번지'로 불리는 강남 일대. 그 가운데서도 자녀들의 미래가 교육에 걸렸다는, 가장 첨예한 욕망이 들끓어 오르는 곳입니다. 몇해 전부터 유행하던 말입니다만 흔히 자녀 교육의 성공에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동생의 희생,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이라는 네가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중에서 '아빠의 무관심'이란 - 있어 봐야 도움이 안 되니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고 그냥 방해나 안 되게 멀찌기 가 있는게 낫다는 뜻 - 남자들이 지어낸 말 같기도 합니다만, 드라마 '아내의 자격'을 보시면 이 네가지 요소의 의미를 뼈저리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를 대외적으로 소개할 때 가장 간단한 요약은 '김희애의 불륜 스토리'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작진은 이런 소개에 상당히 거부감을 갖습니다. 이 드라마가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축소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드라마는 이미 1, 2회를 통해 '강남 교육특구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와, '2세 교육이 현대 한국 부부들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쉽게 대답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예전만큼 부모 자식간의 유대가 굳지 않고 어떤 부부도 노후 대비를 자녀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됐지만 한국인의 교육열은 그 전의 어느 세대 못지 않게 치열합니다. 그 경쟁의 강도를 놓고 보면 사상 최고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1편에서 서래의 남편은 '이건 전쟁'이라고 선언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의미 못잖게 서래와 태오의 관계 역시 이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자칫하면 '불륜 미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죠. 두 사람의 만남이 수채화같은 영상 속에서 아른아른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의도를 따져 보면 단순히 불륜 미화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해가기 마련입니다.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선배 등으로 규정되어 가는 것이죠.



이런 관계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두 성인이 기존의 관계와 정면으로 위배되는 감정을 느꼈을 때, 과연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 가는지를 바라보자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작가와 나쁜 작가의 차이가 있겠지만, 정성주 작가의 시선은 두 사람이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등지고 개인의 욕망을 향해 가는 과정을 참 설득력있게 그려냅니다.

이들이 과연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단지 지켜볼 뿐입니다. 물론 응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네. 누군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ㅋ)

마무리는 이 드라마의 주제곡처럼 쓰이게 된 Byrds의 Turn, Turn, Turn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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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담빠담'이 이제 두 회를 남겨 두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1일 개국 때부터 종편방송은 낙인이라도 찍힌 것처럼 외면하는 분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드라마 한 편이 나쁜 얘기 한마디 듣지 않고 방송되고 있는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새로 시작하는 방송사에서 '빠담빠담'을 방송하는 것도 사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개국 첫 드라마를 무엇으로 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나름 돈 깨나 써서 방송하는 드라마인데, 그래도 반향이 꽤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 민간 상업방송인데 시청률이 우선이라는 의견 등등.

하지만 그래도 '빠담빠담'이라는 작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는 '그래도 이런 작품을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쉽게 모아졌습니다. 안 그래도 흰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을 방송, 이 작품이라면 누구에게도 떳떳하게 얘기할 수 있을 거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방송이 시작되고 나니 묘한 반응이 일각에서 나왔습니다. 쏟아지는 호평 한 구석에서 "왜 이런 드라마는 '종편'에서 해서 사람을 갈등하게 만드냐'는 의견(아니 종편이 무슨 유신 시절의 대남방송이라도 된단 말입니까 ㅋ ), 그리고 '지상파에서 했으면 20%는 나왔을 걸작인데 방송사를 잘못 만나 참 안타깝다'는 의견 등등.

그런데 과연 지상파에서 방송됐다면 '빠담빠담'은 빅 히트를 기록했을까요. 현재 '빠담빠담'은 2%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차피 지상파 채널도 아니고, 아직 채널의 존재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서울을 벗어나면 '채널15'라고 자신있게 말할 처지도 아닌 상태에서 이 정도면 대단히 선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써 본 글입니다. <과연 '빠담빠담'이 지상파에서 방송됐다면 그만치 달라졌을까?> 미리 얘기하자면 개인적으로는 '크게 달라질 건 없었다'는 의견입니다. 

시작합니다.



얼마 전, 드라마 <천일의 약속>(SBS, 2010)을 집필하던 김수현 작가가 트위터에 올린 한마디가 화제가 됐다.

‘이미숙이 수애 남매 생모일 것이라는 점치기가 있었던가 본데 하하’, 이어서 ‘이젠 사촌 오빠 이상우가 수애를 좋아한다는 얘기가… 좋아하는 건 맞습니다. 그러나 사촌 누이동생에 대한 순수한 사랑과 배려가 전부, 숨겨놓은 카드 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 그리 아시길’이라는 내용이었다. <천일의 약속>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미숙은 지형(김래원)을 끝까지 애닯게 사랑하는 향기(정유미)의 엄마 역으로 출연했다. 만약 자신의 딸을 버린 지형에게 서연(수애)이란 연인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찾아가서 어떤 행패를 부렸을지 모를 캐릭터였다.

물론 이 드라마가 <천일의 약속>이 아니고, 작가가 김수현이 아니었다면, 이 분위기의 드라마에서 ‘알고 보니 이미숙이 어려서 수애 남매를 버리고 달아난 생모였다’는 식의 진행은 충분히 가능했을 거다. 최근 몇 년간 지상파 드라마를 주의 깊게 보아 온 시청자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상상이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김수현 작가도 일단 ‘하하’ 하고 반응했던 것이다.

드라마 <빠담빠담…그와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가 종편 채널 JTBC에서 방송되고 있다.

면면이 일단 화려하다. 국가대표 작가 노희경과 <아이리스>(KBS2, 2009)의 김규태 PD가 힘을 합쳤고, 정우성 한지민 김범이라는 출연진도 화려하다. 이 드라마는 현재 전국 기준으로 2퍼센트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요즘 “<빠담빠담…그와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이하 <빠담빠담>)가 지상파에서 방송됐다면”이라고 개탄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빠담빠담>의 기획안은 각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국 데스크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작품을 거부했다. ‘장사가 될 것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빠담빠담>은 전통적인 한국 드라마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 같지는 않은 드라마다. 첫 장면부터 주인공 강칠(정우성)이 교수대에 목이 매달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 다시 살아난다. 사건의 물리적 순서도 불분명하다. 귀휴로 교도소 밖에 나가 있던 강칠과 국수(김범)가 어느새 교도소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꿈인지, 환각인지도 분명치 않은 장면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신경 말초를 박박 긁는 드라마에 지친 시청자들은 이 드라마에 호평을 아끼지 않는다. 이들은 강칠에게 이어지는 기적이 과연 환상인가, 아니면 자칭 천사인 국수가 일으키는 기적인가를 궁금해 한다. 그러면서 10대 시절 교도소에 들어가 16년 옥살이 끝에 출감한 강칠이 여주인공 지나(한지민)를 만나 조금씩 삶의 기쁨에 눈떠 가는 과정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과연 <빠담빠담>이 지상파에서 방송됐다면 10퍼센트대의 시청률을 올리며 선전했을까.

노희경 작가의 전작 <그들이 사는 세상>(KBS2, 2008)도 완성도에서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현빈과 송혜교라는 주인공의 무게 역시 <빠담빠담>에 비해 못할 것이 없다. 극 중 사극 제작 신(<그들이 사는 세상>은 드라마 PD들의 삶과 사랑 이야기다)에서 단 1회를 위해 사극 세트를 세웠다가 바로 불태워버렸을 정도로 투입된 물량도 <빠담빠담>을 넘어섰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결과가 최고 시청률 7.7퍼센트였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거부한 시청자들이 과연 <빠담빠담>은 받아들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빠담빠담>의 현재 시청률은 적잖은 의미를 갖는다.

유료방송 채널이라는 약점과, 종편에 대한 일각의 반감을 극복하고 이만한 수의 시청자들이 이 작품의 진가를 인정하고 있다는 게 놀랍고 반갑다. ‘화학조미료를 좋아하냐’는 질문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주방에서 MSG를 쓰지 않는 식당은 며칠 못 가고 망한다는 것을. 드라마 시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소수라도 진짜 음식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끝>



입맛에 대해 얘기를 하고 나니 이런 이야기가 부담이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경영 압박이 심해지면 퀄리티를 훼손하는 경우가 생길 가능성을 100% 부인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최대한 초심을 잃지 않고, 이 기조를 간직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빠담빠담' 19회와 20회. 마지막까지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빠담빠담'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사실 결말은 저도 모릅니다.;;)



다음주부터는 송창의, 한혜진, 조재현, 박건형 주연의 '신드롬'이 방송됩니다. '브레인'과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 걱정하시는 분들도 있었는데, 이번에는 뇌수술을 통해 인간의 지각을 바꿔 놓으려는 위험한 시도가 펼쳐집니다.

(그런데 김성령이 송창의와 모자관계로 나온다니... 이건 좀 가슴이 아프군요. 아직 너무 젊으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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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정난, 드라마에서 나온 것만도 한두번이 아닌 유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바로 수양대군, 뒷날의 세조가 조카인 '단종의 왕권을 견고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을 견제하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 다수의 인물들을 제거하고 동생인 안평대군을 귀양보낸 사건이죠. JTBC 드라마 '인수대비'가 계유정난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언젠가부터 한번쯤 정리해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번 기회에 정리해보기로 했습니다.
 
사건의 이름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정란(政亂)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간혹 있는데, 계유정난의 정의는 '단종 1년인 계유년(1453년)에 난을 진압한 사건'입니다. 진압의 주체는 수양대군이고 '난'의 주체는 김종서-황보인인 셈이죠. 

물론 어느 쪽이 난의 주역이고 어느 쪽이 왕권 수호의 주축인지는 결과를 보고 나서도 헷갈립니다.

과연 계유정난의 시점에서 수양대군은 조카를 죽이고 제위를 차지한 명나라 영락제의 심정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린 조카를 보필해 '간신들'을 물리치고 왕위를 굳게 지킨 주나라 주공 단의 심정이었을까요. 전자라는 쪽이 압도적이지만 후자의 마음도 1% 정도는 있었을지 모릅니다.

혹시 영화 '관상' 때문에 오신 분이라면 '관상' 리뷰는 이쪽입니다.

관상: 관상은 정말 운명을 지배하나? http://v.daum.net/link/49999746


아무튼 계유정난이 일어난 날, 1453년 음력 10월10일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매우 길고 흥미롭습니다. 박진감넘치는 묘사로 보아 이 사건을 기록한 사관은 아마도 문학적 재능이 풍부했던 사람이었던 듯 합니다.

한번 보시겠습니다.

(중간중간 역주의 색을 바꿔 놨는데 모바일로 보시는 분들은 혼동의 여지가 있습니다. 가능하면 PC를 통해 보시길 권장합니다. 그리고 기록이 꽤 길고 정교합니다. 물론 가끔씩 시간대가 뒤바뀌곤 합니다만... 이해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세조가 새벽에 권남(權擥)·한명회(韓明澮)·홍달손(洪達孫)을 불러 말하기를,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金宗瑞) 같은 자가 없다. 저 자가 만일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 역사를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달려 아뢰면,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것도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좋습니다.” 하였다.

세조가 말하기를,
“내가 오늘 여러 무사(武士)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조용히 이르겠으니, 그대들은 느지막에 다시 오라.”
하고, 드디어 무사를 불러 후원에서 과녁을 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한낮쯤 되어 권남이 다시 왔다. 세조가 나와 보고 말하기를,
“강곤(康袞)·홍윤성(洪允成)·임자번(林自蕃)·최윤(崔閏)·안경손(安慶孫)·홍순로(洪純老)·홍귀동(洪貴童)·민발(閔發) 등 수십 인이 와서 더불어 과녁을 쏘는데 감히 입을 열지 못하였다. 곽연성(郭連城)은 이미 왔으나 어미의 상중(喪中)으로 사양하기에, 여러 번 되풀이하여 타이르니, 비록 허락은 하였으나 어렵게 여기는 빛이 있다. 그대가 다시 말하라.” 하고, 세조는 도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권남이 곽연성을 보고 말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지금 종사의 큰 계책으로 간사한 도적을 베고자 하는데,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네를 부른 것이니, 자네는 장차 어찌하려는가?”
하니, 곽연성이 말하기를,
“내가 이미 들었습니다. 장부가 어찌 장한 마음이 없을까마는 최복(衰服)이 몸에 있으니(상중이니) 명령을 따르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다. 지금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만번 죽을 계책을 내어 국가를 위하여 의(義)를 일으키는 것인데, 자네가 어찌 구구하게 작은 절의(節義)를 지키겠는가? 또 충과 효에는 두 가지 이치가 없으니, 자네는 구차히 사양하지 말고 큰 효를 이루라.” 하였다.

곽연성이 말하기를,
“수양 대군께서 이미 명령이 있으니 마땅히 힘써 따르겠으나, 이것이 작은 일이 아니니, 그대는 자세히 방략(方略)을 말하여 보라.”
하였다. 권남이 하나하나 말하니, 곽연성이 말하기를,
“나머지는 의논할 것이 없고, 다만 수양 대군께서 김종서의 집을 왕래하는 데 이르고 늦는 것을 알 수 없으니, 성문이 만일 닫히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이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마땅히 선처하겠다.”

[수양대군은 도성 안에, 김종서는 도성 밖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김종서를 제거한다 해도 도성으로 들어와야 궁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날이 저문 뒤에 도성을 출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김종서가 대세를 뒤집지 못한 것도 바로 이 이유 때문.]

하였다. 해가 저무니 홍달손(洪達孫)이 감순(監巡)으로 먼저 나갔다. 세조가 활 쏘는 것을 핑계하고 멀찌감치 무사 등을 이끌고 후원 송정(松亭)에 이르러 말하기를,
“지금 간신 김종서(金宗瑞)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오로지하여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날로 자라서 비밀히 이용(李瑢)에게 붙어서 장차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당원(黨援)이 이미 성하고 화기(禍機)가 정히 임박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충신 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위 문장 속의 '이용'은 당연히 안평대군.]

하니,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말씀한 바와 같습니다.”
하고, 송석손(宋碩孫)·유형(柳亨)·민발(閔發) 등은 말하기를,
“마땅히 먼저 아뢰어야 합니다.”

[당연히 역적을 토멸하려면 임금에게 아뢰고 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정답이긴 하지만 세조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답입니다. '역적을 토벌하라'는 칙명을 받는다 해도, 저쪽에서 준비할 시간을 줄 뿐입니다. 기습 외에는 방법이 없던 다급한 상황에서 이런 말이나 듣고 있자니 속이 탔겠죠.]

하니, 의논이 분운(紛?)하여 혹은 북문을 따라 도망하여 나가는 자도 있었다. 세조가 한명회에게 이르기를,

“불가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계교가 장차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하니, 한명회(위 사진) 가 말하기를,
길 옆에 집을 지으면 3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작은 일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큰 일이겠습니까? 일에는 역(逆)과 순(順)이 있는데, 순으로 움직이면 어디를 간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모의(謀議)가 이미 먼저 정하여졌으니, 지금 의논이 비록 통일되지 않더라도 그만둘 수 있습니까? 청컨대 공(公)이 먼저 일어나면 따르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作舍道旁, 三年不成 이란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길 옆에 집을 짓자면 오가는 사람들이 다 한마디씩 참견을 하기 마련인데, 그렇다고 이 말도 들었다 저 말도 들었다 하면 도저히 집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




하고, 홍윤성(洪允成, 위 사진)이 말하기를,
“군사를 쓰는 데에 있어 해(害)가 되는 것은 이럴까 저럴까 결단 못하는 것이 가장 큽니다. 지금 사기(事機)가 심히 급박하니, 만일 여러 사람의 의논을 따른다면 일은 다 틀릴 것입니다.”
하였다. 송석손 등이 옷을 끌어당기면서 두세 번 만류하니, 세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다 가서 먼저 고하라. 나는 너희들을 의지하지 않겠다.”

[ 여기서 강경파의 한 사람인 홍윤성은 뒷날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르는 세도가가 되지만 뒷얘기는 영 좋지 않습니다. 성품이 잔혹한 탓인지 사람을 함부로 죽이고 횡포도 심했지만, 세조의 총애 때문에 감히 아무도 건드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고, 드디어 활을 끌고 일어서서, 말리는 자를 발로 차고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기를,
“지금 내 한몸에 종사의 이해가 매었으니,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 장부가 죽으면 사직(社稷)에 죽을 뿐이다.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나는 너희들에게 강요하지 않겠다(從者從, 去者去, 吾不汝强). 만일 고집하여 사기(事機)를 그르치는 자가 있으면 먼저 베고 나가겠다. 빠른 우레에는 미처 귀도 가리지 못하는 것이다. 군사는 신속한 것이 귀하다. 내가 곧 간흉(姦凶)을 베어 없앨 것이니, 누가 감히 어기겠는가?”
하고, 중문에 나오니 자성 왕비(慈聖王妃)가 갑옷을 끌어 입히었다.

드디어 갑옷을 입고 가동(家?) 임어을운(林於乙云)을 데리고 단기(單騎)로 김종서(金宗瑞)의 집으로 갔다. 세조가 떠나기 전에 권남과 한명회가 의논하기를,
“지금 대군이 몸을 일으켜 홀로 가니 후원(後援)이 없을 수 없다.”

[주: "從者從, 去者去, 吾不汝强". 비장한 풍경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수양대군도 김종서가 아니면 내가 죽는다는 심정으로 목숨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고 권언(權?)·권경(權擎)·한서구(韓瑞龜)·한명진(韓明?) 등으로 하여금 돈의문(敦義門) 안 내성(內城) 위에 잠복하게 하고, 또 양정(楊汀)·홍순손(洪順孫)·유서(柳?)에게 경계하여 미복(微服) 차림으로 따라가게 하였다. 세조가 처음에 권남에게 명하여 김종서를 그 집에 가서 엿보게 하였다.

권남이 투자(投刺)[주: 명함을 드림] 하니, 김종서가 〈불러들여〉 별실에서 한참 동안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남이 돌아와 보고하니, 세조가 이미 말에 올라탔다. 세조가 김종서의 집 동구(洞口)에 이르니, 김승규(金承珪, 김종서의 장남)의 집앞에 무사 세 사람이 병기를 가지고 귀엣말을 하고 있고 무기(武騎) 30여 인이 길 좌우를 끼고 있어 서로 자랑하기를,
“이 말을 타고 적을 쏘면 어찌 한 화살에 죽이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세조가 이미 방비가 있는 것을 알고 웃으며 말하기를,
“누구냐?”
하니, 그 사람들이 흩어졌다.

양정(楊汀)은 칼을 차고 유서(柳?)는 궁전(弓箭)을 차고 왔다. 세조가 양정으로 하여금 칼을 품에 감추게 하고 유서를 정지시키면서 김종서의 집에 이르니, 김승규가 문 앞에 앉아 신사면(辛思勉)·윤광은(尹匡殷)과 얘기하고 있었다. 김승규가 세조를 보고 맞이하였다. 세조가 그 아비를 보기를 청하니, 김승규가 들어가서 고하였다. 김종서가 한참 만에 나와 세조가 멀찍이 서서 앞으로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들어오기를 청하니, 세조가 말하기를,
“해가 저물었으니 문에는 들어가지 못하겠고, 다만 한 가지 일을 청하려고 왔습니다.”
하였다. 김종서가 두세 번 들어오기를 청하였으나 세조가 굳이 거절하니, 김종서가 부득이하여 앞으로 나왔다.

김종서가 나오기 전에 세조는 사모(紗帽) 뿔이 떨어져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정승(政丞)의 사모 뿔을 빌립시다.”
하니, 김종서가 창황(蒼黃)히 사모 뿔을 빼어 주었다. 세조가 말하기를,
“종부시(宗簿寺)에서 영응 대군(永膺大君)의 부인의 일을 탄핵하고자 하는데, 정승이 지휘하십니까? 정승은 누대(累代) 조정의 훈로(勳老)이시니, 정승이 편을 들지 않으면 어느 곳에 부탁하겠습니까?”
하였다. 이때에 임어을운이 나오니, 세조가 꾸짖어 물리쳤다. 김종서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한참 말이 없었다.

윤광은·신사면이 굳게 앉아 물러가지 않으니, 세조가 말하기를,
비밀한 청이 있으니, 너희들은 물러가라.”
하였으나, 오히려 멀리 피하지 않았다. 세조가 김종서에게 이르기를,
“또 청을 드리는 편지가 있습니다.”
하고, 종자(從者)를 불러 가져오게 하였다. 양정이 미처 나오기 전에 세조가 임어을운을 꾸짖어 말하기를,
“그 편지 한 통이 어디 갔느냐?”
하였다. 지부(知部)의 것을 바치니 김종서가 편지를 받아 물러서서 달에 비춰 보는데, 세조가 재촉하니 임어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쳐서 땅에 쓰러뜨렸다. 김승규가 놀라서 그 위에 엎드리니, 양정이 칼을 뽑아 쳤다.

[이 대목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장면입니다. 수양의 옆에 있던 무사래봐야 4~5명 남짓. 장소는 김종서의 홈. 이미 아들 김승규와 30여명의 기병이 지키고 있던 상황. 측근들은 '할 얘기가 있으니 멀리 가라'는 말에도 물러서지 않았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테러가 가능했다는 것일까요. 김종서의 방심이 얼마나 지나쳤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방심 부분은 마지막에 다시 첨가합니다.]

하여금 말고삐를 흔들게 하여 돌아와서 돈의문에 들어가, 권언 등을 시켜 지키게 하였다. 이날 김종서가 역사(力士)를 모아 음식을 먹이고 병기를 정돈하다가 세조가 이르니, 사람을 시켜 담 위에서 엿보게 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적으면 나아가 접하고, 많으면 쏘라.”
하였다. 엿보는 자가 말하기를,
“적습니다.”
하니, 김종서가 오히려 두어 자루 칼을 뽑아 벽 사이에 걸어 놓고 나왔다.

[수양대군 일행의 수가 적다는 말에 오히려 방심해서 당했다는 이야기. 다음 부분은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해치려 떠난 뒤, 후원에 남아 불안에 떠는 무사들과 그들을 안정시키는 권남의 역할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부분도 참 생생합니다.]

처음에 세조가 김종서의 집에 갈 때에 무사들을 저사(邸舍)에 가두게 하고 나왔다. 여러 사람이 오히려 떠들어대며 다투어 튀어나오려고 하자, 권남(權擥)이 문에 서서 막으니, 혹은 말하기를,

“먼저 아뢰지 않고 임의로 대신을 베는 것이 가합니까? 장차 우리들을 어느 땅에 두려고 합니까?”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우리들은 용렬하지마는 대군(大君)은 고명하니, 익히 계획하였을 것이다.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 일을 만일 이루지 못하면 내가 어떻게 혼자 살겠는가? 장부는 다만 마땅히 순(順)을 취하고 역(逆)을 버리고, 종사를 위하여 공을 세워 공명을 취할 것이다.”
하니, 모두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어째서 우리들에게 미리 일러 활과 칼을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다만 빈 주먹이니 어찌합니까?”
하니, 권남이 말하기를,
“만일 격투할 일이 있으면 비록 그대들 수십 인이 병기를 갖추었더라도 어찌 족히 쓰겠는가? 그대들은 근심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만약 병력 대결로 간다면 팔도의 병권을 장악한 김종서에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것임을 수양과 측근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은 단신으로 대담한 암습을 감행했던 것이죠.]

하였다. 한명회(韓明澮)가 세조를 따라 성문(城門)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 또 세조의 명령을 반복하여 고해 이르고, 세조가 돌아오는 것을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권남이 달려 순청(巡廳)에 이르러 홍달손(洪達孫)을 보고 세조가 이미 김종서의 집에 간 것을 비밀히 알리고, 순졸(巡卒)을 발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약속하고는, 또 두 사람을 나누어 보내어 숭례문(崇禮門)·서소문(西小門) 두 문을 닫게 하였다. 권남은 스스로 갑사 두 사람, 총통위(銃筒衛) 열 사람을 거느리고 돈의문(敦義門)에 이르러 지키게 하고 명령하기를,
“수양 대군(首陽大君)께서 일로 인하여 문 밖에 갔으니, 비록 종(鍾)소리가 다하더라도 문을 닫지 말고 기다리라.”
하고, 권언(權?)을 시켜 문을 감독하게 하였다.

[순청이란 야간 통행금지를 관장하던 기관입니다. 인원은 많지 않았지만 수양대군 휘하의 세력 외에는 아무도 돌아다니지 못하게 되었으니 일단 절반 이상의 성공입니다.]

장차 대군(大君)의 저사(邸舍)로 돌아가려 하여 미처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성 안으로부터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돌아보니 세조가 이르렀다. 웃으며 권남에게 이르기를,

“김종서(金宗瑞)·김승규(金承珪)를 이미 죽였다.”
하였다. 권남이 말하기를,
“여러 무사가 아직도 공의 저사에 있으니, 따라오게 할까요?”
하였다. 세조가 조금 멈추었다가 부르니 한명회가 거느리고 달려왔다. 세조가 순청(巡廳)에 이르러 홍달손을 시켜 순졸(巡卒)을 거느려 뒤에 따르게 하고, 시좌소(時坐所) 로 달려가서 권남을 시켜 입직(入直) 승지(承旨) 최항(崔恒)을 불러내었다.

세조가 손을 잡고 최항에게 이르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이양(李穰)·민신(閔伸)·조극관(趙克寬)·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원구(元矩)·조번(趙蕃) 등이 안평 대군(安平大君)에게 당부(黨附)하고, 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경성 부사(鏡城府使) 이경유(李耕?)·평안도 도관찰사(平安道都觀察使) 조수량(趙遂良)·충청도 도관찰사(忠淸都都觀察使) 안완경(安完慶) 등과 연결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공모하여 거사할 날짜까지 정하여 형세가 심히 위급하여 조금도 시간 여유가 없다. 김연(金衍)·한숭(韓崧)이 또 주상의 곁에 있으므로 와서 아뢸 겨를이 없어서 이미 적괴(賊魁) 김종서(金宗瑞) 부자를 베어 없애고 그 나머지 지당(至黨)을 지금 아뢰어 토벌하고자 한다.”
하고, 연하여 환관 전균(田畇)을 불러 말하기를,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이 안평 대군(安平大君)의 중한 뇌물을 받고 전하께서 어린 것을 경멸히 여기어 널리 당원(黨援)을 심어 놓고, 번진(藩鎭)과 교통하여 종사를 위태롭게 하기를 꾀하여 화가 조석에 있어 형세가 궁하고 일이 급박한데 또 적당(賊黨)이 곁에 있으므로, 지금 부득이하여 예전 사람의 선발후문(先發後聞)의 일을 본받아 이미 김종서 부자를 잡아 죽였으나, 황보인 등이 아직도 있으므로 지금 처단하기를 청하는 것이다. 너는 속히 들어가 아뢰어라.”
하고, 또 말하기를,
“너는 마땅히 기운을 돌리고 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천천히 아뢰고 경동할 것이 아니다.”
하였다.

도진무(都鎭撫)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김효성(金孝誠)이 입직(入直)하였는데, 세조가 그 아들 김처의(金處義)를 시켜 부르고, 또 입직한 병조 참판(兵曹參判) 이계전(李季甸) 등을 불러 들이어 세조가 최항·김효성·이계전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아뢰고, 황보인·이양·조곡관·좌찬성(左贊成) 한확(韓確)·좌참찬(左參贊) 허후(許?)·우참찬(右參贊) 이사철(李思哲)·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정인지(鄭麟趾)·도승지(都承旨) 박중손(朴仲孫) 등을 불렀다.

[양정, 유수 등 수양이 계유정난에 동원한 주요 인물들은 바로 내금위 소속입니다. 국왕의 친위부대인 내금위는 김종서의 손 밖에 있는 병력이었죠.]

세조는 처음에 궐문에 이르러 입직하는 내금위(內禁衛) 봉석주(奉石柱) 등으로 하여금 갑주(甲胄)를 갖추고 궁시(弓矢)를 띠고 남문 내정(內庭)에 늘어서서 간적(姦賊)을 방비하여 엿보게 하고, 또 입직하는 여러 곳의 별시위 갑사(別侍衛甲士)·총통위(銃筒衛) 등으로 하여금 둘러서서 홍달손(洪達孫)의 부서를 시위하게 하고, 여러 순군(巡軍)은 시좌소(時坐所)의 앞뒤 골목을 파수하여 차단하게 하고, 친히 순졸(巡卒) 수백 인을 거느려 남문 밖의 가회방(嘉會坊) 동구(洞口) 돌다리[石橋] 가에 주둔하고, 서쪽으로는 영응 대군(永膺大君) 집서쪽 동구에 이르고 동쪽으로 서운관(書雲觀) 고개에 이르기까지 좌우익(左右翼)을 나누어 사람의 출입을 절제하고, 또 돌다리로부터 남문까지 마병(馬兵)·보병(步兵)으로 문을 네 겹으로 만들고, 역사(力士) 함귀(咸貴)·박막동(朴莫同)·수산(壽山)·막동(莫同) 등으로 제3문을 지키게 하고, 영을 내리기를,

이 안이 심히 좁으니, 여러 재상으로서 들어오는 사람은 따라오는 사람을 제거하고 혼자 들어오도록 하라.” 하였다.

[한명회가 이미 생살부(生殺簿)-요즘은 살생부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는 듯 합니다-를 작성해 놓고, '살'쪽에 기록된 인물이 들어오면 가차없이 처단하게 했다는 바로 그 장면입니다. 임금의 명으로 불러 옆에 따라오는 사람을 모두 떼어냈으니 꼼짝없이 죽을 밖에요.]

조극관(鳥克寬)·황보인(皇甫仁)·이양(李穰)이 제3문에 들어오니, 함귀 등이 철퇴로 때려 죽이고, 사람을 보내어 윤처공(尹處恭)·이명민(李命敏)·조번(趙藩)·원구(元矩) 등을 죽이고, 삼군 진무(三軍鎭撫) 최사기(崔賜起)를 보내어 김연(金衍)을 그 집에서 죽이고, 삼군 진무 서조(徐遭)를 보내어 민신(閔伸)을 비석소(碑石所)에서 베고【이때에 민신은 현릉(顯陵)의 비석을 감독하고 있었다.】또 최사기(崔賜起)와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신선경(愼先庚)을 보내어 군사 1백을 거느리고 용(瑢, 안평대군)을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에서 잡아서 압송(押送)하여 강화(江華)에 두고, 세조가 손수 편지를 써서 그 뜻을 이르고, 또 시켜서 말하기를,

“네 죄가 커서 참으로 주살(誅殺)을 용서할 수 없으나, 다만 세종(世宗)·문종(文宗)께서 너를 사랑하시던 마음으로 너를 용서하고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다.

용(瑢)이 사자(使者)를 대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도 또한 스스로 죄가 있는 것을 안다. 이렇게 된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삼군 진무 나치정(羅致貞)이 군사를 거느리고 용(瑢)의 아들인 이우직(李友直)을 잡아 압령하여 강화에 두었다. 용(瑢)이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 급히 그 종 영기(永奇)를 불러 옷을 벗어 입히고 비밀히 부탁하기를,
“네가 급히 가서 김 정승에게 때가 늦어진 실수를 말하여 주라.”
하였으니, 대개 김종서가 이미 주살된 것을 알지 못하고 다시 이루기를 바란 것이다.

[물론 이런 부분은, 이 실록이 이미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쓰인 거란 점을 생각하면 사실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실록은 권람 등이 이미 9월25일 안평대군과 김종서의 역모를 감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 부분 역시 마찬가지라고 봐야겠죠. 과연 이런 음모가 존재했다고 믿을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합니다. ]

또 말하기를,

“일이 만일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석(河石)이 반드시 먼저 베임을 당할 것이니, 네가 꼭 뼈를 거두어 오라. 내가 다시 보고야 말겠다.”
하였다. 이우직(李友直)이 강화에 이르러 용에게 말하기를,
“제가 여쭙지 않았습니까?”
하니, 용(瑢)이 말하기를,
“부끄럽다. 할 말이 없다.”
하였다.

용(瑢)의 당(黨)에 대정(大丁)이란 자가 있어 성녕 대군(誠寧大君)의 집에 숨어 있었는데, 성씨(成氏)가 여복을 입히어 침병(寢屛) 뒤에 엎드려 있게 하였다. 잡기를 급박하게 하니, 성씨가 부득이하여 내보냈는데, 곧 베었다. 운성위(雲城尉) 박종우(朴從愚)가 문에 이르러 들어가지 못하고 말하기를,
“비록 부르시는 명령은 없으나 변고가 있음을 듣고 여기 와서 명을 기다립니다.”
하니, 세조가 불러 들였다. 우승지(右承旨) 권준(權?)·동부승지(同副承旨) 함우치(咸禹治)가 또한 오니, 세조가 권준만 불러 들이었다.

[눈치 있는 사람들은 이제 세상이 누구의 것인지 알고, 부르지 않아도 달려와 줄을 서게 된 상황입니다. 그렇게 달려왔는데도 만나 주지를 않으면 참 난감하겠죠.ㅋ]

정인지(鄭麟趾)가 권남을 시켜 붓을 잡고 이계전·최항과 더불어 함께 교서(敎書)를 짓는데, 밤이 심히 추웠다. 노산군(魯山君)이 환관 엄자치(嚴自治)에게 명하여 내온(內?) ·내수(內羞)로 세조 이하 여러 재상을 먹이었다. 세조가 군사에게 술을 먹이도록 아뢰어 청하고, 또 아뢰어 용(瑢)의 당(黨)인 환관 한숭(韓崧)·사알(司謁) 황귀존(黃貴存)을 궐내에서 잡아 의금부(義禁府)에 넘기었다.

김종서(金宗瑞)가 다시 깨어나서 원구(元矩)를 시켜 돈의문(敦義門)을 지키는 자에게 달려가 고하기를,
“내가 밤에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어 죽게 되었으니, 빨리 의정부(議政府)에 고하여 의원으로 하여금 약을 싸 가지고 와서 구제하게 하고, 또 속히 안평 대군(安平大君)에게 고하고, 아뢰어 내금위(內禁衛)를 보내라. 내가 나를 상하게 한 자를 잡으려 한다.”

하였으나, 문 지키는 자가 듣지 않았다.

    ('공주의 남자'에서 빌려옴. ㅋ)

김종서가 상처를 싸매고 여복(女服)을 입고서, 가마를 타고 돈의문(敦義門)·서소문(西小門)·숭례문(崇禮門) 세 문을 거쳐 이르렀으나 모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와 그 아들 김승벽(金承壁)의 처가(妻家)에 숨었다. 이튿날 아침에 이명민(李命敏)도 또한 다시 깨어나서 들것에 실려 도망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홍달손(洪達孫)에게 고하니 호군(護軍) 박제함(朴悌緘)을 보내어 베었다.

세조가 인하여 여러 적이 다시 깨어날 것을 염려하여, 양정(楊汀)과 의금부 진무(義禁府鎭撫) 이흥상(李興商)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고, 김종서를 찾아 김승벽의 처가에 이르러 군사가 들어가 잡으니, 김종서가 갇히는 것이라 생각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걸어 가겠느냐? 초헌(?軒)을 가져오라.”
하니, 끌어내다가 베었다.

[이렇습니다. 김종서는 설마 수양대군이 나선다 해도 감히 선왕의 고명대신인 자신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라고 너무도 방심했던 겁니다. 자신의 수족들이 하룻밤 사이 다 참살당하고 있는 판에 도성 진입도 실패하고 나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일까요. 이렇듯 무기력하게 도성 부근의 사돈 집에 숨었다 잡힌다는 건 좀 납득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실록에 따르면 수양이 최측근과 거사를 결심한 것이 9월29일. 그런데 10월2일, 이미 황보인과 김종서에게 이 정보가 누설됐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수양은 "저 우유부단한 것들이 손을 쓰는데 열흘은 걸릴테니 열흘 안으로만 손을 쓰면 된다"고 말하는 대담함을 보입니다. 역시 후세의 영웅전설 꾸미기였는지 모르지만, 사실이라면 대단한 강심장입니다
.]

김종서의 부자·황보인·이양·조극관·민신·윤처공·조번·이명민·원구 등을 모두 저자에 효수(梟首)하니, 길 가는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어 그 죄를 헤아려서 기왓돌로 때리는 자까지 있었고, 여러 사(司)의 비복(婢僕)들이 또한 김종서의 머리를 향해 욕하고, 환시(宦寺)들은 김연(金衍)을 발로 차고 그 머리를 짓이겼다.

뒤에 저자 아이들이 난신(亂臣)의 머리를 만들어서 나희(儺戱)를 하며 부르기를,
“김종서 세력에 조극관 몰관(沒官)하네.”
하였다. 이날 밤에 달이 떨어지고, 하늘이 컴컴하여지자 유시(流矢)가 떨어졌다. 위사(衛士)가 놀라 고하니, 이계전(李季甸)이 두려워하여 나팔을 불기를 청하였다. 세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무엇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있는가? 조용히 하여 진압하라.”
하였다. [10월10일의 실록 끝]


 

 


이렇게 해서 이틀에 걸친 살육이 끝났습니다. 조정을 가득 채웠던 김종서의 파벌, 안평대군의 사람들이 싸그리 제거된 것이죠.

많은 분들이 착각하시듯 '계유정난=수양대군이 단군을 몰아낸 사건'은 결코 아닙니다. 계유정난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계유정난 이후에도 단종의 치세는 2년 더 이어졌습니다. 안평대군도 귀양을 간 상태였지만 살아 있었습니다.

계유정난때 이미 단종과 안평대군의 운명은 결정돼 있었을까요. 물론 이때 세조의 심정이 어땠는가는 큰 의미가 없을 듯 합니다. 이 두 사람이 살아 있는 한은 제아무리 세조가 왕위에 오른다 해도 정국이 안정될 기회는 없었을테니 말입니다.

아무튼 이번 주말, 김영호 수양대군이 어떤 카리스마를 발휘할 지 궁금합니다.

숨가쁜 계유정난의 틈바구니에서 이런 장면이 나올 기회가 없다는게 참 아쉽기도...^ 어쨌든 우리의 한모양도 시아버지를 도와 뭔가 하는 모습이 보일 것도 같습니다.

 

영화 '관상' 리뷰: 관상은 정말 운명을 지배하나? http://v.daum.net/link/49999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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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방송된 '빠담빠담' 5회가 제 날짜에 방송이 나가느냐 마느냐는 상당히 논란거리였습니다. JTBC 개국 이후 맞는 최대 사건(아마도 올해 대한민국 10대 사건 중 당당 1위를 차지할 것이 분명한 사건) 때문이었죠. 하지만 하루 종일 뉴스 속보를 방송하던 중에도 '빠담빠담' 팬들을 실망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방송이 나갔습니다. 그리고, 온종일 팍팍한 뉴스에 시달리던 분들은 충분히 위안을 얻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빠담빠담'은 꿈과 현실 사이를 구분하기 힘들게 했던 초반을 지나, 형기를 마치고 출감한 강칠(정우성)과 국수(김범)가 강칠의 고향 통영으로 내려와 강칠의 어머니(나문희)와 함께 살게 된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강칠은 수의사 지나(한지민)와 잇단 인연 끝에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강칠이 간암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안 국수는 일단 강칠의 아들 정(최태준)을 통영으로 데리고 내려옵니다.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지만 마음을 터놓을 수 없었던 강칠과 지나, 마침내 서울 여행을 통해 충격적인 엔딩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장면이죠.



물론 이날 최고의 볼거리는 바로 이 키스신이었지만, 최고의 대사는 전반부에 강칠에게서 나왔습니다. 16년 전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자들이 여전히 주변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에, 강칠은 그들에게서 자신의 인생을 망친 대가를 받는다면 얼마를 받아야 할지 국수와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지나의 호의로 함께 떠나 온 서울 여행, 난생 처음 기차를 타고, 난생 처음 동물원에서 데이트를 하며 행복에 빠진 강칠은 가슴 속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내 인생을 보상받으면 얼마나 될까요? .... 당신같이 괜찮은 여자를 만나도 사귀자고 말을 못하고.... 이걸 보상받으려면 얼마나 받아야 할까요?"

누가 봐도 고백이지만 지나는 슬쩍 눙쳐 버리고, 둘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강칠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두 가지 과거의 두려움을 떠올리죠.



강칠을 체포해 감옥으로 보낸 형사가 바로 지나의 아버지라는 것, 그리고 강칠이 죽인 동급생이 바로 지나 아버지의 동생이라는 것. 두 가지 과거가 강칠의 눈 앞을 스쳐 갑니다.

물론 강칠이나 지나나 이런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죠. 그리고 강칠은 또 지나가 속옷을 사서 포장해 보내는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 오래 전 자신을 면회 오고 자신에게 속옷을 보내주고 있는 사람이 지나의 죽은 어머니라는 것 역시 모릅니다.




그리고 전철 안. 흔히 남녀 사이에서 키스의 전주곡으로 통하는 '어색한 거리'가 연출됩니다. 뭐 사람들로 가득한 전철 안이기 때문에 실제로 맞닿지는 않지만....


기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을 잡고 달리는 두 사람. 마침내 가까스로 기차에 오르고, 난생 처음 겪어 본 스릴에 웃고 있는 지나를 바라보다 강칠은 용기를 냅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한번 파란이 시작되려는.


강칠의 '인생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문득 고전 영화 '빠삐용'의 유명한 장면을 연상시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빠삐용(스티브 맥퀸)은 꿈 속에서 사막을 걷고 있습니다. 모래 언덕 건너편에는 판관들이 서 있죠. 그들은 빠삐용에게 "너는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묻습니다. 누명을 쓴 빠삐용은 외치죠. "나는 무죄다!" 하지만 판관들은 냉정하게 고개를 젓습니다. "너는 유죄다."

이유를 묻는 빠삐용. 판관들은 말합니다. "너의 죄는 살인이 아니다. 너의 죄는 인생을 낭비한 것이다." 이 말에 빠삐용은 고개를 떨구고 무릎을 꿇습니다. "...유죄 맞습니다."

 



        (역시 인터넷엔 없는게 없군요. 마침 딱 그 장면의 캡처가 있습니다. ㅋ)

빠삐용이 스스로 낭비한 인생의 값을 치르기 위해 멀리 남미의 유형지에 와 있는 것이라면, 강칠은 타의에 의해 빼앗긴 인생의 값을 뒤늦게 돌려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순서가 바뀌었을 뿐, '인생의 가치'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는 면에서 두 작품의 메시지는 같습니다. 타의에 의해 갇혀 있는 것도 아닌 당신들(바로 TV를 보고 있는 우리를 말합니다)은 인생을, 지금 이 순간 순간을 낭비하지 않고 쓰고 있느냐는 질문이죠.


한때 강칠은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국수는 강칠이 계속 꿈꾸는 '사형당하는 꿈'에 대해 "출감 후의 삶이 두렵고, 밖에 나가 적응할 자신도 없기 때문에, 그냥 여기서 다 포기하고 죽고 싶기 때문에 꾸는 꿈"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죽으려고만 하지 말고 살려고 좀 해 봐 이 바보야!"라고 외치죠.

강칠이 감히 지나에게 키스할 수 있었다는 건 강칠이 마침내, 자신의 인생에 대해 강렬한 의욕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그들 자신만 모르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이게 그리 쉽지는 않겠죠. 과연 강칠은 아들의 간을 이식받을 수 있을지, 아니면 다른 이유로 삶을 마감하게 될 지 아직은 미지수입니다. 과연 이번엔 해피엔딩이 가능할지.



P.S. 계단 올라가기를 힘들어하는 지나의 모습은 죽은 어머니로부터 심장질환을 물려받았다는 암시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너무 환자가 많이 나오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ㅋ. 아무튼 20일 밤 9시에 6회가 방송됩니다.

5회 다시보기는 이쪽.
http://home.jtbc.co.kr/Vod/Vod.aspx?prog_id=PR10010013&menu_id=PM10010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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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참 손이 근질근질했습니다. 남들이 만드는 드라마, 영화 방송 나가는 걸 보면서 아 이런 얘기는 꼭 하고 싶은데, 뭐 이런 생각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뭐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곧 방송국을 오픈할 주제에 남들 작품 갖고 왈가왈부하는 게 솔직히 불안했죠. 뚜껑 연 뒤에 "남의 것 갖고 그 난리를 치더니 참 대단한 물건들 만들어 놨다"는 비아냥이라도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12월1일 JTBC가 개국을 하고, 하나 하나 준비한 물건들을 까 보는 과정에서 희망이 생겼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 교양 '깜놀, 드림프로젝트', 그리고 예능 '칸타빌레'를 보면서 콘텐트의 질에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물론 이 한편을 빼놓으면 말이 안 되겠죠. 바로 '노희경표 드라마', '빠담빠담'입니다.




JTBC 월화드라마 '빠담빠담'의 원제는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입니다. 좀 길죠. 이 드라마는 16년 전 어울려 다니던 동년배 학생을 죽인 죄로 수감된 강칠(정우성)과 어찌 어찌 하다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수의사 지나(한지민)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100% 드라마 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강칠은 사건의 진범이 아니고, 강칠의 손에 피묻은 칼을 쥐어 준 진범은 현재 검사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대법관 물망에 올라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강칠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있습니다.

첫회부터 아무 이유 없이 계속 마주치는 강칠과 지나 사이에는 끈끈한 인연이 숨어 있습니다. 강칠이 죽인 것으로 오해를 산 학생은 지나의 삼촌, 그러니까 형사인 지나 아버지의 나이 차이 나는 동생이었던 겁니다.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싸움질이나 하다가 누군가의 칼을 맞고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지나 아버지는 강칠을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살인범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지나 어머니는 강칠이 진범이 아닐 것이란 생각에 면회를 다니며 강칠의 구명 운동을 펴고, 이 때문에 부부 사이에 틈이 생기고, 그러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둡니다. 이때문에 지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죠.

참 난마처럼 얽인 관계입니다.



물론 이런 식의 갈등 구조는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빠담빠담'을 특이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드라마를 풀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꿈'과 '현실'의 교차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스스로 천사라고 주장하는 국수(김범)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시는 분들의 궁금증은 대략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국수가 진짜 천사인가, 아니면 자기가 천사라고 믿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미숙한 아이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과연 이 드라마가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인가, 아니면 강칠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첫번째와 두번째 이야기는 결코 무관하지 않죠. 제가 이 글의 제목에 '인셉션'을 끌어들인 것도 이 질문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꼭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제가 분명 내부자(?)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가 앞으로 전개될 방향에 대해서는 시청자 여러분보다 별로 더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모두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절대 회사나 제작진의 의견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 흑백 단편 영화 한 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대는 남북전쟁기의 미국. 한 남군 포로가 북군에게 체포돼 다리 위에서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목이 매달리는 순간, 줄이 끊어지고, 그 포로는 강물 속 깊이 빠집니다.

다리 위의 적군이 총을 쏘지만 포로는 요행히 총을 피해 내고, 들판을 달려 집으로 향합니다. 마침내 그리던 고향 집이 눈에 보이고, 예쁜 아내가 환히 미소지으며 포로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내와 손을 맞잡는 순간,

목줄이 조여지고, 포로의 다리가 축 늘어집니다. 그러니까 고향 집과 행운의 탈주는 모두 이 포로가 목이 졸리고 숨이 끊기기 전까지, 그 짧은 순간 동안 꾼 아름다운 꿈이었던 것이죠. 어찌 보면 삼국유사의 조신지몽과 비교할 수 있는, 인생의 비애를 느끼게 하는 수작입니다.

(뭐 대략 짐작도 하실 수 있겠지만 혹시나 해서 결말은 감춰 두었습니다. 마우스로 위의 흰 부분을 긁으시면 답이 보입니다.)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저 단편 영화는 로버트 엔리코(Robert Enrico)의 1962년작 'An Occurrence at Owl Creek Bridge' 입니다.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영화상 단편 부문을 휩쓴 유명한 작품이고, 저 결말은 두고 두고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단편 영화 치고는 24분 가량으로 좀 길지만, 한번 보실만한 수작입니다.

굳이 이 영화 얘기를 왜 꺼냈는지 이해 못할 분은 안 계시겠죠.^^



1, 2부에 걸쳐 강칠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석방 직전의 갈등 - 싸움 - 김교위의 갑작스런 죽음 - 교수형을 반복해서 경험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귀휴-아들과의 만남-지나의 차에 의한 교통사고 - 병원에서의 깨어남 역시 반복됩니다.

두 사건의 흐름은 정상적이라면 귀휴 - 교통사고 - 병원에서 눈뜸 - 교도소로 귀환 - 싸움 - 교수형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강칠은 교수형 이후 병원에서 눈이 뜨는 경험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싸움 장면을 경험하면서 국수에게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아!"라고 절규합니다. 마지막 순간, 김교위에게 향하던 주먹을 간신히 멈춰 정해진 사건을 중단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의아해하게 됩니다. 과연 강칠에게 일어난 사건의 정체는 무엇일까. 앞부분의 사건이 미래를 내다보게 해 준 예지몽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현실이라면 왜 똑같은 사건이 되풀이될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쉬운 답은 그냥 그대로 '국수가 천사이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천사가 나오는 드라마에서 개연성이나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건 바보짓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은, 뒷부분을 '강칠의 꿈'으로 풀어 가는 해석입니다. 강칠은 김교위를 죽인 죄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아마도 사형이 집행되기 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하는 후회를 수십번, 수천번은 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마지막 순간에라도 몸을 멈췄다면...'하는 간절한 소망이 꿈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강칠에게는 수많은 상상들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출감하고, 출감해서 귀휴 때 만났던 그 예쁜 아가씨를 다시 만나고, 알고 보니 그 아가씨가 자신에게 계속해서 속옷을 보내 주던 그 아주머니의 딸이고.... 간절함이 현실로 보이는 것이죠.



하지만 꿈은 꿈. 언젠가 꿈은 깨게 되어 있는 법. 그래서 어느 한 순간, 강칠은 다시 깨어납니다. 그 깨는 장소가 병원 침대 위일지, 감방 안일지, 그도 저도 아닌 또 다른 장소일지는 알 수 없겠죠. 그리고 그 꿈을 깬 뒤의 결과가 해피엔딩일지 비극일지도....

만약 이렇게 진행된다면 참 슬픈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노희경 같은 대 작가가, 저 따위가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진행을 선택하지는 않겠죠?

어쨌든 이런 저런 상상을 해 볼 정도로 '빠담빠담'은 흥미로운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이런 드라마가, 아직 18회나 남아 있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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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부인하고 있지만 - 인도네시아 특사들의 롯데호텔 방 침입 사건이 국정원의 망신으로 굳어지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아테나'에 나오는 민완 요원들은 드라마 속에나 있는 거냐"며 비웃었죠.

그런데 드라마를 봐도 사실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국정원은 아니고 NTS(...세무서?) 요원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요원들은 총 쏘고 차고 때리는 법만 배웠지 총 피하는 법(?)이나 머리 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듯 합니다.

더구나 어제 방송된 마지막회... 드라마 '아테나'나, 현실의 국정원 망신이나, 드라마 속의 요원들이나 다 그 밥의 그 나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참 실망이 큽니다.



이 드라마가 시작할 때 '아줌마를 위한 드라마는 없다 http://fivecard.joins.com/893 '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만치 '아테나'의 도입부는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국내 드라마들이 걸었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정우성이라는 주인공의 캐릭터에 맞게 다소 엉뚱하면서도 밝고 활기찬 첩보 액션 드라마가 나오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는 회를 거듭할수록 무참히 무너져갔습니다. 초반에는 '스토리가 없다'는 일부의 지적에 '전형적인 멜로드라마가 없다는 걸 스토리가 없다고 말하면 곤란하다'고 옹호도 했었는데 드라마가 진행되고 나니 오히려 어정쩡한 멜로드라마만 남고 진짜 스토리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게다가 도대체 맥락 없이 이어지는 진행. 최소한의 리얼리티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주요 캐릭터들은 '날아다니는 것'과 '머리 쓰는 것' 외에는 뭐든 다 합니다. 특히 마지막 두 회 분량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100년도 더 된 액션영화의 짜증나는 클리셰, '총 겨누고 서서 안 쏘고 말 많이 하다가 당하기'는 마지막 2회에만도 서너번 등장하는 듯 합니다. 주인공들 중 아무도 '다이 하드'를 못 본 모양입니다.

차승원으로부터 미사일을 발사하는 노트북 컴퓨터를 빼앗은 이지아는 3층에서 혹시나 컴퓨터가 망가질까, 고이 고이 받쳐 들고(총까지 맞아 가면서) 내려와서는, 1층에서 노트북에 총을 쏴 망가뜨립니다. 그리곤 "노트북을 던져서 망가뜨릴 힘만 있었어도 마지막 한발을...(그러니까 그 총알로 너를 쏴 죽였을 거란 얘기죠)" 하죠.  ...그럴 거면 대체 왜 3층에서 노트북을 내던지지 않았던 걸까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NTS 과학수사실장인 오윤아는 괴한들에게 납치되자 핸드폰을 이용해 비상 구조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현장에 출동한 최시원과 심창민은 차 바퀴 자국을 보며 한참 뭔가 생각하더니 그제서야 "납치된 것 같다"고 보고합니다.  ...그럼 대체 NTS요원은 어떨 때 구조신호를 보내는 걸까요. 그제서야 심각한 표정을 짓는 유동근 국장의 수준도 역시 안습. (그런 반면 납치된 오윤아는 맘 먹자마자 순식간에 찾아냅니다. 대단해!)

어쨌든 이지아는 차승원에게 총을 겨눈 채 말 많이 하다가 죽고, 아테나 요원들은 수애에게 총 겨눈 채 말 많이 하다가 죽고, 차승원도 정우성에게 총 겨눈 채 말 많이 하다가 죽습니다. 네. 어쨌든 '총을 겨눈 상태에서는 말을 하지 말라'는 교훈만큼은 확실히 전달됐습니다.



사고현장에서 여러 차례 총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실려간 수애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장기 치료가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자 마자 앰뷸런스에 실려 어디론가 갑니다. 그리고 그 호송을 맡은 것은 북한 특수요원인 김민종입니다. "내가 이런 미친 짓 하는 것도 정우(정우성) 놈 속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는 걸 보면 이 호송은 NTS 몰래 하는 '수애 빼돌리기'입니다.

온 나라를 뒤집어 놓고 NTS 본부를 초토화시킨 사건 현장의 주요 인물인 수애가, 이렇게 병원에서 아무런 경호나 감시 없이 실려 나가는 것도 일단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수애가 사라질 때 유일하게 병원에 있던 NTS 요원 정우성에게 아무도 수애가 어떻게 됐는지 책임을 따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해직당한 거리면 최시원이 '정말 안 돌아올 거냐'고 묻지 않겠죠.) 수애 정도를 마음대로 풀어 줄 권한은 원래부터 정우성에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북한 요원인 김민종이 국내에서 중상을 입은 수애를 회복시키고, 해외로 빼돌릴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건 뭐 그렇다고 넘어가겠습니다. 결국 뉴질랜드에서 수애와 정우성은 감격적인 해후를 하고, 드라마는 마치 해피엔딩인 양 포장되지만 수많은 한국 요원들을 무참히 살해한 수애의 죄과가 한방에 세탁되는 것이 과연 이 드라마가 말하는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 마지막 두 회분만 따져도 이렇습니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질문, 대체 차승원이 뭐가 아쉬워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냉혹한 국제 스파이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살 테러범으로 급변신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말하듯 수애를 잃은 좌절감으로? 일반적으로 배신을 당하면 배신한 '연놈'들을 죽이려 하는게 보통인데, 왜 애꿎은 원자로에 미사일을 쏴 대는 걸까요. 원자로가 파괴되고 NTS가 해체되어 정우성이 직장을 잃고 노숙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대단한 정교한 음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정원 요원들이 국민에게 실망감을 준 건 아마도 제대로 본받을 드라마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의 재기발랄하던 '아테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욱 더 심해 집니다. 앞으로 첩보 액션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실 분들, 제대로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P.S. 이 드라마로 유일하게 득을 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최시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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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최초의 히트작 '시크릿 가든'이 마침내 16일 막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20회를 앞두고 수많은 예측과 우려가 스쳐갔죠. 작가와 제작진이 모두 해피엔딩임을 공언했지만 마지막까지 드라마 주변에 깔렸던 단서들 가운데서는 불길한 느낌을 주는 것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세 아이가 울고 있다"는 아영의 꿈은 묘한 뉘앙스를 풍기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마지막 20회는 그동안 양산된 '시크릿 가든' 마니아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했던 듯 합니다. 20회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김주원-길라임 커플의 결혼 후 닭살 행각을 보여주는데 할애됐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이 주는 여운은 오래 오래 기억될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어폐가 있을 듯 합니다.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생각이 되풀이될수록 뭔가 앙금이 남는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요일자 신문에도 썼듯 작가의 집필권은 독자의 향유권 위에 있는게 분명합니다. 그 전제를 허물지 않는 한도 안에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회, "34년을 어머니의 아들로 살았으니 이제 한 여자의 남자가 되어 살겠다"는 말을 던진 주원은 라임을 데리고 구청으로 가서 혼인신고를 해 버립니다. 어머니의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결혼식은 올리지 않겠지만 법적으로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결혼식을 올리고, 두 사람은 5년 동안 세 쌍둥이(얼굴은 닮지 않았지만 세 아이 사이에 나이 차이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를 낳고 알콩달콩 잘 살아갑니다. 주원은 어머니로부터 의절당하지만 백화점 사장직은 유지하고, 라임은 무술감독이 되어 임감독의 대사를 그대로 재현합니다.


그리고 5년 뒤의 어느날, 라임은 주원에게 "나를 보러 오고서 왜 아버지의 유언을 전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 주원은 그날 밤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사고 후 병원에 입원중인 주원은 환자복 차림으로 라임 아버지의 빈소를 찾고, 통곡하고 있는 교복 차림의 소녀 라임을 봅니다. 죄책감 때문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오래도록 빈소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주원은 문상객이 모두 돌아긴 빈소에 혼자 지쳐 잠든 라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쓰러져 같이 잠들어 버리죠. 이것이 바로 '시크릿 가든'의 엔딩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이 엔딩은 죽었던 라임을 구해낸 주원이 기억상실 증세를 보일 때, 왜 깨나서 처음 본 라임을 낯설어하지 않는지, 그리고 라임의 이름도 귀에 익다고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러니까 주원은 언젠가 라임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고, 그 얼굴에 대한 인상은 강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계기가 바로 빈소에 지쳐 잠든 라임의 얼굴을 본 것이었다는 얘기죠.

나쁘지 않은 결말입니다만, 역시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할 때 의문이 남습니다. 그럼 대체 주원은 언제 기억상실이 된 걸까요? 본래 주원이 엘리베이터 사고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사고 당시의 충격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렇게 되고 나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사고 이후에도 기억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라임을 찾아 아버지의 유언을 전하려 한거죠.



그럼 사고를 겪고 난 주원은 왜 또 기억상실이 된 걸까요. 굳이 머리를 굴려 해석을 하자면 라임을 찾아가서, '라임의 모습을 보고 너무 큰 죄책감에 시달린 탓에 기억상실이 된 것'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을 듯 합니다.

이게 과연 자연스러운 흐름일까요. 이것이 제작진의 의도라면, 빈소에서 나란히 쓰러져 잠든 두 사람 중 누가 먼저 눈을 뜨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게 될텐데, 그렇다면 주원은 그 상황에서도 자기가 왜 누군가의 빈소에서 눈을 떴는지에 대해 전혀 의심하지 않고 그냥 병실로 돌아가 기억 안 나는 부분은 기억 안 나는 채로 살아간다는 얘기가 됩니다. 보시다시피 그리 깔끔하지는 않습니다.

하긴 마지막회 내내 강조되던 메시지가 '기적'이고, '이건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라는 메시지도 반복해서 강조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건 아주 사소한 문제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색함은 왠지 마지막 장면을 다른 식으로 해석하는게 좀 더 매끄럽다는 느낌을 줍니다.



즉 두 사람이 아이 셋을 낳고 행복하게 사는 미래는 라임 옆에 쓰러져 잠든 스물 한살의 청년 주원이 그 자리에서 꾼 미래에 대한 꿈이라는 것이죠. 스스로 상상력을 발휘해 가면서.

.... 이 상태에서 나는 기억을 모두 잊고, 세월이 흐른 뒤 이 여고생과 다시 만난다. 라임. 그래. 이름이 라임이었지. 아버지가 없어도 잘 자라 있으려면 상당히 씩씩하고 남자다운 성격이면 좋겠어. 그럼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그냥 평범한 여대생은 아닐 거야. 그렇게 씩씩하다면 음...여군? 여경? 혹시 여자 스턴트? ....


뭐 이런 엔딩도 굳이 말하자면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시크릿 가든'의 열혈 시청자들이 기대하는 해피엔딩과는 전혀 다른 것이고, 그 열혈 팬들을 만족시키기엔 역부족이겠지만 아무튼 주원이 꿈꾸는 미래는 지금부터 시작이란 점에서 희망적입니다. 잠에서 깬 주원은 쑥쓰럽게 그냥 달아날 수도, 라임의 눈을 마주보고 "이제 내가 네 아빠 역할을 해 줄게"라고 말할 수도, 아니면 잠에서 깼을 때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여러 해가 지나서야 그 긴 인연을 다시 시작할수도 있습니다.

작가의 의도가 이 쪽이라고 말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튼 제시된 엔딩만으로는 사고 당시를 기억하지 못하는 주원과 그 상황이 그리 썩 잘 어울리지 않는 건 분명합니다. 뭐 '시크릿 가든'의 열혈 팬들이라면 사소한 부조화가 있더라도 맨 처음 제시한 결말을 그냥 간직하실 겁니다.




'시크릿 가든' 20회는 그동안 나왔던 어떤 다른 편보다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느낌을 주는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오스카와 윤슬의 관계, 김비서와 아영의 관계도 세심하게 정리됐죠.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임감독과 주원의 여동생 사이에서 생길 뻔한 러브라인이 사라진 대신 임감독은 톱스타 손예진을 캐스팅하는 행운을 차지했습니다. (뭐 약간 심술궂게 생각한다면 이런 메시지들은 다 "현실이라면 이런 일이 동시에 다 일어날 리가 없잖아! 이건 꿈이야! 판타지라고!"라는 외침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아영이 발견하는 병속에 든 편지 또한 같은 맥락입니다.^)

꿈이든 판타지든 시청자에게 희망을 주려는 의도에는 저도 만족합니다. 하지만 끝까지 단서조차 주어지지 않은 궁금증 하나는 매우 아쉽습니다. 대체 주원이 제주도에서 들은 라임의 비명소리(15회인가 16회에서 주원이 "그런데 정말 그때 비명 지른 적 없어?"라고 상기시키기까지 하죠)는 무슨 의미였을까요?

몇몇 시청자들은 "그냥 라임과 주원을 비밀가든으로 유도하기 위한 라임 아버지의 조작"이라고 해석하는 듯도 합니다만, 정말 그게 전부라면 좀 허무하긴 합니다. 김은숙 작가님, 과연 이게 진짜 의도였던 겁니까?



P.S. 물론 '시크릿 가든'은 이런 사소한 지적질로 흔들릴 정도의 허약한 드라마는 아닙니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꽤 흐른 뒤라면 김은숙 작가의 최고작으로 평가될 작품은 바로 이 '시크릿 가든'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 왜 좋은 드라마의 종방은 이렇게 빨리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P.S. 2. 그리고 이 엔딩은... 새로운 작품의 시작이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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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헌과 김태희의 MBC TV 새해 드라마 '마이 프린세스'가 SBS TV '사인'과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월화 드라마가 '역전의 여왕', '드림하이', '아테나'의 3자 대결 국면인 데 비해 수목 시장은 '마이 프린세스'와 '싸인'이 '프레지던트'를 따돌리고 선두 경쟁을 하는 모습이죠.

'마이 프린세스'는 두 명의 톱스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기대를 모은 만큼 우려도 많이 모은 작품이었습니다. 비주얼로는 국내 최강의 자리를 누구에게 내주기 힘든 송승헌-김태희를 남녀 주인공으로 놓고도 우려가 있었다는 것은 대체 왜일까요.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최강 비주얼'을 투톱으로 내놓은 드라마들의 성적이 썩 우수하지만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드라마가 있었는지 살펴보시겠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뭐 누구랑 누구랑 같이 하는 드라마가 망할 리가 있겠어'라고 쉽게 얘기하곤 하지만, 다음 드라마들을 보시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걸 깨닫게 될 겁니다.




여기서 예로 드는 드라마들의 시청률은 '그리 낮지 않았던' 작품들도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송 전에 몰렸던 기대에 비하면 저조한 성적이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 작품들 위주로 꼽았습니다.

남녀 톱 주인공에 대한 기대를 배신한 작품들이라는 면에서 기억해둘만 합니다. (혹은 망각 속에 묻어 두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을지도...^^)




5. 장동건-김현주, '청춘'

이런 드라마가 있었나 싶은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심지어 장동건-김미숙-최지우가 공연한 '사랑'과 혼동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1999년의 장동건은 톱스타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후광이 머리 뒤에 걸려 있는 스타는 아니었고, 김현주는 앳된 미모가 확 피어나던 무렵이었습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는 초반부터 시청률 부진으로 삐걱거린데다, 일본 드라마 '러브 제너레이션'의 표절 시비에까지 말려들며 조기 종영의 비운을 면치 못했습니다. 장동건의 연기 역사상 유일한 조기 종영작...이라고나 할까요.



4. 이정재-최지우 '에어 시티'

비교적 최근작이라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공항을 무대로 국정원 요원 이정재와 노련한 공항 운영 전문가 최지우의 활약을 그린 드라마였죠.

물량이며 인물 배치에서 방송사에 남을 드라마 한 편이 나오는게 아닌가 하는 기대를 모았지만 개봉 직후 시청률은 연일 급락을 면치 못했습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를 통해 유일하게 위너가 된 건 최지우-이진욱 커플 뿐이라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3. 권상우-김희선, '슬픈 연가'

도저히 망가질래야 망가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이 프로젝트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 속에 잊혀져가고 있는 건 아무래도 송승헌의 중도 하차에서 가장 큰 원인을 찾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송승헌-권상우-김희선의 동갑내기 트리오가 함께 출연한 예고편 형식의 뮤직비디오(라고는 하지만 20여분의 길이입니다. 한편의 단편영화라고 해도 좋을 정도)는 지금 봐도 가슴 떨리는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시작될 때에는 송승헌 자리에 연정훈이 투입됐고, 한 축이 빠진 멜로드라마는 기운 배처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았습니다. 물론 10%대 후반의 시청률을 나쁜 시청률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만, 원안이 성사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4. 송승헌-손예진, '여름향기'

'가을동화'의 윤석호 감독, 주인공은 송승헌과 손예진. 어디서도 실패의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지만 뚜껑을 열고 난 뒤 드라마는 삐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멜로드라마는 주인공들 사이의 상성이 중요한데, 송승헌과 손예진은 그리 잘 맞는 파트너는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여름향기'는 시청률로 보면 그리 실패한 드라마는 아닙니다. 20%대를 넘나들며 선방한 드라마였지만 워낙 '가을동화'와 '겨울연가'의 후광이 강렬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성과를 내고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을 들은 거죠. 아무튼 '여름향기'에서 전작들을 뛰어넘는 성과를 보여주지 못한 윤석호 감독은 서서히 한류 대표 연출자의 자리를 위협받게 됩니다.




1. 배용준-김혜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지난 10년간 '가장 섹시한 여배우'의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 김혜수와 당대 최고의 미남 스타 욘사마가 함께 출연했지만 이 드라마는 흥행 면에서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고학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해가는 배용준이 연상의 대학 강사인 김혜수를 사랑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였죠.

하지만 이 드라마를 지금까지 기억에 남게 하는 것은 최초의 '마니아 드라마'라는 기록입니다. 시청률에 비해 그 시청층의 충성도가 엄청나게 높았던 겁니다. 게시판은 격려와 성원의 포스팅으로 가득 찼고, 드라마의 완성도를 칭송하는 소리가 하늘을 찔렀습니다. 힘든 사랑의 나날이 지나고 배용준의 죽음으로 드라마가 막을 내릴 때에는 탄식이 가득 찼다고 해야 할까요.

이런 '마니아 드라마'의 특징은 '우정사'를 거쳐 '다모', '아일랜드' 등으로 이어졌고, 노희경, 인정옥 등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작가군의 팬층을 두텁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건 이뤄질 뻔 했던 '슬픈연가' 뮤직비디오 판의 한 장면.)

이상 다섯 편의 드라마를 살펴봤습니다. 이밖에 이병헌 최진실 정우성 이영애라는 당대 최강의 얼굴들을 모아 놓은 '아스팔트 사나이'도 있지만, 1995년작이다 보니 시청률 관련 자료가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아무튼 당시 이 드라마도 성과 면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 작품들 가운데 몇몇 작품은 높은 완성도에 비해 시청자의 성원이 떨어진 작품으로, 또 몇몇 작품은 출연한 배우들의 얼굴이 아까운 졸렬한 작품으로 기억될 겁니다. 어쨌든, 시청률이 낮았다고 해서 드라마의 품질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위에 예로 든 작품들은, 저마마한 주인공들을 내걸고도 실패할 수 있을만큼, 드라마 한 편의 성공이란 천-지-인의 기운을 다 모아야 가능한 어려운 일이라는 진리를 확인시켜주는 작품들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전작들을 감안하면 '마이 프린세스'의 성공 역시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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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드림하이'는 판타지입니다. 이 드라마에서 리얼리티를 찾는 건 '궁'을 보면서 "한국에 왕이 어디 있냐?"고 따지는 거나, 혹은 해리 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를 보면서 대체 뭔 수작이냐고 따지는 셈입니다. 이 드라마의 기획자들(물론 그중에 배용준과 박진영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이 '이런 학교가 한국에 있다면 어떨까' 한 상상을 드라마로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씩 손발이 오글거리고 세상에 이게 말이 되냐 싶은 대목이 있지만, 일단은 "어쨌든 그런 학교가 있어"라는 데서 시작하면 뭐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리고 1, 2회로 볼 때 이 판타지는 제법 볼만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 좋은데, 드라마는 좀 따뜻한 환경에서 찍으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보는 내내 들었습니다. 너무 선명하게 보이는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수없이 많은 장면에서 보이는 입김입니다.



동영상으로 볼 때와 캡처 화면으로 볼 때는 사뭇 다릅니다. 그리 선명하지 않죠. 입김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사진상으로는 빛의 산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히 입김입니다.

무용교사 이윤지의 복장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는 분명 실내- 무용연습장입니다. 아무리 바깥 날씨가 춥다지만 저렇게 입김이 나오는 곳에서 실내 활동을 하는 건 무리겠죠. 학생들을 하드트레이닝하려는 목적인지는 모르지만 저렇게 교사들부터 솔선수범할 것까지야...

게다가 상대적으로 학생들은 두껍게 입고 있습니다.


아무튼 마구 나옵니다.

연속화면으로 보면 좀 더 선명합니다. 화면이 빛 때문에 뭉개진 것이 아님을 사진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동영상이라면 매우 선명하게 보이죠.






지난 연말 시상식에서 고현정과 문근영이, 물론 말하는 내용과 태도는 전혀 달랐지만 비슷한 취지의 지적을 했습니다. 바로 드라마 촬영 현장의 열악함에 대한 이야기였죠.

물론 가장 크게 지적되어야 할 부분은 몰아찍기와 합리적인 스케줄링이 안 되는 주먹구구식 환경입니다. 드라마가 방송을 시작할 즈음에야 많으면 5~6회, 적으면 1~2회 정도밖에 완성되어있지 않다는 건 참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집필하고 있는 작가며 연출가들조차도 '그럴 수밖에 없다', 혹은 '그게 더 낫다'고 말하는 건 더욱 놀랍습니다. 시청자들의 반응을 관찰해가며 드라마를 조율하겠다는 거죠. 스토리의 방향만 잡히면,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내보낼 수도 있다는 결의가 넘쳐납니다.

그만큼 심각하지는 않지만 촬영장에서의 연기자/스태프 혹사 역시 대단합니다. 드라마건 영화건 '세트는 춥다'는 것은 오랜 상식이기도 하고, 50~60년대 영화를 보면 겨울 장면이 아닌데도 아무데서나 입김이 나오는 걸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중견 연기자들은 "대사를 내뱉을 때 얼음을 입에 물어 입김이 나오는 걸 방지했다"고 오래된 추억담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거울빛에 반사돼 입김이 선명하게 잡혔습니다.^^)

그런데 무슨 사정인지 모르지만 2011년의 드라마 '드림하이'에서도 수시로 입김이 나옵니다. 야외 신이나 극장 오디션 신에서 나오는 거야 그럴만 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실내 장면에서 잇달아 입김이 눈길을 끄는 건 꼭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뭐 그동안도 계속 추웠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얼음을 물고 연기하는 연기자들의 눈물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영화의 경우는 계절상 여름에 개봉하는 영화는 겨울에 여름 신을 찍고, 겨울 영화는 여름에 겨울 신을 찍어야 하기 때문에 힘든 부분도 있었을 겁니다. 촬영장이 너무 넓어서 전체 난방을 하는 건 무리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어느 쪽이든 '실내 장면에서의 입김'은 좀 보기에 민망합니다. 이건 리얼리티에도 문제가 있다는 얘기가 되니 말입니다.




좀 있으면 학생들이 "배용준 이사장님, 촬영장에 불좀 때 주세요"라고 항의할지도 모르겠군요.^^


P.S. 이 드라마의 오디션 장면에서 함은정과 수지가 립싱크를 했다고 비판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건 드라마지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비판을 한다면 음악과 연주자들의 손도 썩 잘 맞지 않던, 야외 연주 장면 때도 실내 연주장 특유의 울림이 그대로 들리던 '베토벤 바이러스'의 '핑거 싱크'가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드라마에 영향을 준 미국 드라마 '글리'의 노래 장면은 100% 사전 녹음입니다. 물론 영화 '페임'은 더 말할 것도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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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절정의 드라마 SBS TV '시크릿 가든'의 협찬사인 롯데백화점이 희한한 보도자료를 내놨습니다. 요즘 백화점 매출의 핵심이 되고 있는 것이 50대 베이비붐 세대 등이며, 남성 고객들의 변화가 눈에 띈다는 등의 내용인데 눈길을 끄는 건 '로엘족'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전과는 다른 남성 고객들의 특징이 로엘(LOEL: Life of Open-mind, Entertainment and Luxury)이라는 신조어로 요약된다는 것입니다. 약자야 뭐 가져다 맞추면 되는 것이고, 어떻게 해서든 '로엘'이라는 이름을 한번 더 소비자/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키려는 노력이 눈물겹습니다.

말하자면 이 로엘족의 궁극적인 모습이 '시크릿 가든'의 CEO 김주원(현빈)이고, 그 이름을 쓸 권리가 있는 롯데 백화점은 바로 '시크릿 가든'의 협찬사입니다. 그러니까 '시크릿 가든'의 로엘 백화점이 바로 롯데 백화점인 것이죠. 그런데 왜 굳이 새삼 '로엘족'이란 신조어까지 등장하게 된 걸까요?


사실 대다수 관심있는 시청자들은 극중 로엘 백화점의 매장만 봐도 롯데 백화점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드라마 시청률이 20~25%를 웃도는데도 불구하고 그 효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판단이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흑은 효과가 꽤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윗분들의 닥달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실제로 극중 현빈의 별장으로 나오는 마임비전 빌리지라는 장소가 뜬 데 비하면 부족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다소 무리한 '로엘족' 이라는 조어까지 등장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로엘'이란 이름을 어떻게든 한번이라도 더 각인시키려는 노력인 것이죠. 약간 쓴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긴 기업의 입장에서는 들인 홍보비에 비해 효과가 적다고 생각하면 악착같이 쥐어 짜려는게 정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브랜드가 분명히 대대적으로 노출은 됐는데 소비자들의 기억에 남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기억하게 하는 방법을 동원해야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문득 아주 오래 전, 비슷하다면 비슷한 사례가 생각납니다. 전 국민이 다 아는 광고인데 그게 어디 광고인지를 모른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죠. 공교롭게도 이것도 롯데와 관련된 사안이군요.
'따봉'이란 이름을 들으면 나이드신 분들은 생각나시는 게 있을 겁니다. 어떤 오렌지 주스 광고입니다. 이거죠.



이 광고는 엄청나게 히트했습니다. TV 코미디 프로에서도 패러디를 했고, '따봉'이란 말은 대대적인 유행어가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죠.

사람들이 '따봉'이란 말은 너무도 잘 기억한 반면, 그 '따봉'이란 말이 어느 오렌지 주스의 광고인지를 구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당시 롯데는 세계적인 식품 업체 델몬트와, 해태는 선키스트와 합작해서 주스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따봉'이라는 메시지는 너무들 잘 기억한 반면 '그 광고가 어느 회사의 것이었느냐'는 질문에는 많은 사람들이 '선키스트'라고 대답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광고 제작자의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인 셈입니다.

마침 당시 학교 수업 시간에는 롯데 계열인 D모 대행사 관계자 한 분이 특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웃지 못할 상황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의 도중 이 분은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경우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으냐"는 질문을 던졌고, 거기에 "그럼 그 이름을 상표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요"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이런 광고가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예 '따봉 주스'라는 신제품이 나온 겁니다.^^

그 수업 시간에 나온 이야기가 실제 반영됐을리는 없겠지만, 아무튼 이 후속 제품과 최진희의 CM송이 나온 뒤에는 '따봉'이 어떤 회사의 제품인지 헷갈리는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따봉'이란 말은 여전히 유행어였죠.

'로엘족'이라는 말이 '따봉' 처럼 히트하는 유행어가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드라마가 대대적으로 히트하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로엘족'이라는 조어까지 밀어붙이는 건 약간 지나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뭐 어쨌든, 다 잘 되자고 하는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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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의 대작 '아테나'가 3회만에 10%대, 혹은 20%대 초반으로 내려앉았다는 보도가 요란합니다. 10%대 후반이든, 20% 초반이든, 가장 중요한 건 MBC TV '역전의 여왕'과 3~4% 정도 차이로 근접했다는 것이죠. '동이' 종영 뒤 '자이언트'가 패권을 가져갔고, '자이언트'가 끝나자 그동안 눌려 있던 '역전의 여왕'이 기를 펴는 형국입니다.

사실 '아테나'는 지금부터 어린이 드라마로 돌아서도 별 손해가 없을 전망입니다(물론 과장). 제작사는 제작사대로 사상 초유의 조건으로 지상파와 케이블TV에 방영권을 팔았고, 방송사는 방송사대로 '아테나' 끝날 때까지 법적으로 허용된 광고를 완판(매진) 시켰습니다. 물론 아직 해외 판매가 완료되지 않은 지역이 있기 때문에 끝까지 성의를 다해야겠지만, 그것도 실질적으로는 마무리된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만에 하나라도 '역전의 여왕'에 이름대로 역전이라도 된다든가 하는 건 자존심의 문제겠죠(여신이 여왕에게 역전..?). 게다가 '아이리스'-'아테나'가 연속 히트하지 못한다면 내년에 예정된 '아이리스 2'의 캐스팅이나 협찬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럼 외양으로 봐선 완벽한 이 드라마가 시청률이 떨어진 이유는 뭘까요.


물론 더 떨어지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얘기한다면 10%대 후반은 매우 훌륭한 성적입니다. 4개 지상파 채널에다 수십개의 케이블 채널이 경쟁하는 환경에서, 솔직히 20%대 시청률만 해도 놀라운 기록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제빵왕 김탁구' 처럼 40% 넘는 시청률의 드라마가 나오는게 훨씬 더 불가사의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시청률 저하의 이유는 사실 너무나 명료하게 눈에 보입니다. '동이' - '자이언트' - '역전의 여왕'으로 이동한 시청률의 정체는 뭐였을까요. 바로 '아줌마'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아테나'는 몇가지 부분에서 전통적으로 '아줌마 시청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던 요소들이 부족합니다. 첫째는 '간단한 플롯'입니다. '아테나'의 앞부분은 '도망자'의 1,2회처럼 극악의 혼란스러운 플롯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일반 시청자들이 '화장실도 왔다 갔다 하고, 전화도 받아 가면서' 볼 만큼 편안한 드라마는 아니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열혈 시청자 평 가운데는 이런 것도 있더군요. "정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재미있었다. 그런데 잠시라도 눈을 떼면 이해가 안 간다." 물론 대단한 복선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한국의 '주류' 시청자들은 특히 드라마 초반의 사건이 '이곳 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걸 상당히 경계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욱 중요한 두번째. 바로 '멜로 라인의 실종'입니다. 이 부분은 '아이리스'와 비교해도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죠. 드라마 첫회에는 40여분이 지나 주인공 정우성이 처음 출연하고, 3회에는 수애가 채 10분도 출연하지 않습니다. 국제적인 음모와 폭력 속에 강제로 헤어진 연인, 서로 그리워하다 정신병이 걸릴 것 같은 안타까운 그리움, 그 과정에서 매달리는 다른 미녀에게도 차가운 정절남, 뭐 이런 '드라마틱' 한 요소들이 없다는 데에 많은 시청자들이 실망하고 있는 듯 합니다.

(정우성-수애의 키스신이 꿈이었다는 데에도 많은 시청자들이 분개하고 있지만 사실 이건 언젠가 드라마가 끝나기 전에 재현된다고 봐야겠죠. ㅋ 일종의 복선?)


혹자는 이걸 싸잡아 '스토리가 없고 액션만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분명 '아테나'는 스토리가 없는 드라마가 아닙니다. '멜로' 스토리가 없는 드라마였죠. 정우성과 이지아의 과거, 차승원을 짝사랑하는 듯한 수애의 일방적인 모습 같은 것이 암시되고 있지만 분명 '주류 시청자'가 원하는 '가슴저미는 사랑'과는 자못 큰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런 요소 때문에 '아테나'는 더욱 가치 있는 드라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리스'를 만들고 '아테나'를 만든 제작진을 돌아보면, 위에서 지적된 두 가지 약점을 모를 리가 없는 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팀은 '아테나'를 만들었고 시청자들에게 공개했습니다. 이유는 자명합니다. '늘 똑같은 드라마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아테나'는 '아이리스'보다 훨씬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드라마입니다. 굳은 얼굴로 비정한 첩보 세계를 누비는 사나이와 미녀들의 이야기보다는, 뭔가 007을 꿈꾸는, 잘생겼지만 그만큼 빈틈도 많아 보이는 주인공이 다소 경쾌한 스텝으로 위기를 넘어 영웅이 되는 이야기죠. 아마도 '아이리스' 첫회를 본 시청자 중 절반 이상이 "이병헌은 드라마가 끝날 때 살아 있지 못하겠구나"라고 짐작했다면, '아테나'를 보고 정우성이 죽을 거라고 예상하는 시청자는 거의 없을 겁니다(만약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가 정우성이 죽어버리면 정말 어이없는 결말이겠죠^^). 같은 첩보물이라고는 하지만, 전혀 색깔이 다른 드라마입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성공한 '블록버스터형' 드라마들의 색채를 되새겨 보시면 훨씬 더 이해가 쉬울 겁니다. 뭔가 그늘이 있는 남자 주인공이, 그늘이 있는 여자 주인공을 사랑하다가, 서로 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주고 받고, 오해와 주변 환경 때문에 덕지덕지 만신창이가 되어 마지막에 피를 토하고 죽기 직전에서야 사랑을 확인하는 뭐 그런, 공식처럼 되어 버린 드라마들 말입니다. 사실 돈을 많이 들인 드라마들일수록 실패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크기 때문에, 그런 필승 공식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이런 드라마들 속에서 '아테나'는 매우 신선한 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김민종과 이한위 같은 캐릭터의 활성화 역시 이런 색깔을 맞추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특히 개인적으로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파 배우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김민종은 오랜만에 그럴듯한 역할을 맡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단 3편만 보고 드라마의 앞날을 모두 내다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 현재까지 방송된 '아테나'는 실망보다는 기대를 주는 드라마입니다. 비슷한 시도였던 '도망자'는 한번에 너무 먼 걸음을 뛰려 한 탓에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지만, '아테나'는 거기에 비해 훨씬 덜 야심적인 드라마입니다. 평소 안방극장에서 '반드시 통하는' 흥행 공식에서 한 발 정도 비껴갔다고나 할까요.

결론은 지금까지 얘기한 바와 같습니다. '이런 드라마'가 한국 안방에서 통할 때, 그리고 이런 다양성을 충족하는 드라마가 한국에서 공급될 때 진정한 '글로벌 콘텐츠'를 한국에 기대할 수 있을 겁니다. 당장 안방에서 30%, 40%가 나오는 드라마보다 훨씬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테나'의 선전을 기대하게 됩니다.

만,



P.S. 대통령의 딸이, 그것도 이보영 같은 미모의 소유자라면 대한민국 국민은 초등학생까지 다 알 것이고 심지어 아시아권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게다가 경호원 하나 없이 해외에서 혼자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죠.

그럼 대체 왜 그런 상황인지를 대사 한두마디로라도 설명을 해야 할텐데(예를 들면 대통령의 감춰진 딸이라든가) 그런 설명 하나 없이 넘어간 건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너무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제작진이 제정신이라면 뭔가 이유를 만들었을텐데 그 이유가 3회에 공개되지 않은 건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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