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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이상하게 잠이 잘 안 오더군요. 불면증이었나봅니다. 아무튼 억지로 잠을 청하고 있는데 웬 아저씨가 풀죽은 표정으로 턱을 괴고 머리맡에 앉아 있었습니다.

뭐 늘 있던 일이라 놀랍지도 않더군요. 이름을 물으니 형종이랍니다. 다른 분들은 전부 빙의로 찾아왔는데 왜 이렇게 직접 찾아왔느냐고 물으니 "남들은 잘 되던 모양인데 왜 난 안 되지?"하며 오히려 반문을 하더군요. 심정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빙의도 잘 안 되는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분도 뭔가 드라마에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받아 적어 봤습니다. 대신 빙의 상태가 아니라서 인터뷰 형식이 되더군요. 진짜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인지도 궁금했지만 거기에 대해선 별로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김남길 인터뷰가 아니라 비담 인터뷰입니다.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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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리 결정적인 건 아니지만, 앞선 '빙의' 시리즈를 보시는게 더 이해가 빠르실 듯.

 

 



그리고 비담과의 인터뷰입니다.

- 당신의 성은 무엇인가.
"당연히 김씨다. 그런걸 왜 물어보나. '선덕여왕'에 나온 사람 중 김씨 아닌 사람이 몇이나 되나."

- 그럼 이름은 정말 비담인가?
"이름이란게 뭔가. 남들이 자기를 그렇게 부르면 그 이름이 내 이름 아닌가? 다들 나를 비담이라고 부르니 나는 자연스럽게 비담이 됐다."

- 문득 '꽃'이란 시가 생각난다. 그렇게 얘기하니 갑자기 당신의 이름이 비담이 아니라 춘수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시 같은 걸 알 사람으로 보이나."

- 하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흠... 초기의 나 말인가, 말기의 나 말인가?"

-그래도 그 드라마에서 당신은 비교적 캐릭터가 균등하게 유지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초기의 나는 약간 이중인격적인 캐릭터였다. 한마디로 선악을 초월한 캐릭터였지. 인간적이라기보단 동물에 가까웠다. 즐거우면 웃고, 좋으면 좋고, 대신 누군가 비위를 거슬리면 그 자리에서 검으로 베어 버리는 인물이었다. 머리가 좋긴 했지만 그건 순간적인 대처였기 때문이다. 초반의 비담이라면 오랫동안 고민하고 계획을 짜서 누군가를 무너뜨리고 할 인물이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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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다.
"그렇다. 그렇게 상황에 따라 휘딱휘딱 변하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염종이 스승을 죽인 범인인 걸 알고도 다음 순간 염종을 살려 주는 행위가 가능한 거다. 그런데 후반으로 가면서 이상하게 성격이 왜곡됐다."

-어떻게?
"지나치게 머리를 많이 굴렸다. 한마디로 생각이 많아진 거다."

-나이를 먹으면 누구나 그렇게 되지 않나?
"하긴 그럴수도 있겠군. 아무튼 이번 기회를 빌어 작가들에게 고마운 점은 첫째, 내 역할에 미남 배우를 캐스팅해 준 것이고 둘째, 나를 검술의 명인으로 그려 준 점이다. 솔직히 내가 그 시절에 검을 잘 썼다면 화랑이나 장군으로 출세했겠지. 나는 본래 무인 기질은 없다."

-그럼 고맙지 않은 점은?
"칼을 잘 쓰는 대신 너무 머리가 나쁘게 그렸다. 일국의 상대등을 지낸 나를 그렇게 무식한 놈으로 그리다니. 거기다 귀는 왜 그렇게 얇은가. 누가 무슨 말만 하면 획획 돌아서고... 측근들에게 내가 정말 저렇게 변덕이 심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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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당신은 대체 왜 난을 일으켰나.
"아니 그렇게 드라마를 열심히 보고도 모르겠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당신은 선덕여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한 걸로 알고 난을 일으킨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당신이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 선덕여왕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물론 나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나."

-극중에서 당신의 마음 속 소리는 "내가 신국이 되어 너를 차지하겠다"는 걸로 나오던데. 대체 그럼 그 대사를 듣고 감동하고, 안타까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 수많은 시청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거 농담이다. 설마 그런 말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난을 일으켜 성공해서, 내가 왕이 된다 치자. 폐위된 여왕을 내가 마누라로 삼을 수 있겠나? 설사 여왕이 항복하고 내 마누라가 되어 살겠다고 한다고 치자. 우리 편들은 가만히 있을 것이며, 여왕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운 편은 또 가만히 있겠나?"

-그럼 대체 왜 난을 일으킨 건가?
"그렇게 모르겠다면 얘기해주지. 나는 독재를 막기 위해 싸운 거다."

-독재?
"그렇다! 진흥제 사후 진평-선덕 2대에 걸쳐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살하려고 시도한 독재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싸운 거다. 우리 신국은 본래 화백회의라는 간접 민주주의가 발달한 나라였다. 어떤 군주도 자기 독단으로 나라를 이끈 적이 없다. 그런데 선덕여왕과 그 후계자로 사실상 지목된 김춘추가 아예 민주주의의 싹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내가 죽고 나서 진덕여왕때 김춘추는 집사부를 설치하고 화백회의를 무력화한 다음 권력을 자신이 독차지했다. 내가 우려하던 일이 바로 실현된거다."

-그건 당신을 만들어 준 작가의 생각과는 좀 다른 것 같다. 작가들에 따르면 이 드라마에 나오는 화백회의는 소수 귀족들의 이권을 대면하기 위해 존재하던 부패한 기관이던데.
"하하. 그건 요즘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7세기 신라에 덧씌우다 보니 일어난 코미디다. 화백회의에서 참가자들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걸 오늘날 국회라는 곳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면 속없는 사람들이 '현실 정치에 대한 은유'라면서 칭찬을 해 대더라. 바보같은 짓이다. 그럼 물어보자. 화백회의가 없어지고 왕 혼자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좋은 점은 뭔가? 국회가 공전하면 아예 국회를 없애는게 나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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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만은 독재자라기보다는 민본정책을 실현하려 한 사람으로 그려졌다고 볼...
"그래서 사람들은 이율배반적이라는 거다. 극중에서 덕만도 우리 어머니를 존경한다. 왜? 똑똑해서 혼자 다 알아서 했기 때문이다. 자기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적당하게 죽이고 처리해가면서 말이다. 말하자면 유신 체제나 다를 게 없다."

-유신이라니... 김유신 말인가?
"아니. 그 유신 말고. 그 왜 총 맞고 죽은 대통령 있잖나. 내가 보기에 드라마에 나온 우리 어머니의 모델은 바로 그 사람인 것 같다. 별로 인기는 없는 것 같던데, 희한하게 시청자들은 다들 미실 좋다고 난리더라."

-음... 아무튼 왕의 독재라기보다는 역사적으로 볼 때 '왕권 강화'라는 말이 더 적절할 것 같다. 국정이 효율화되어 그 이후 신라의 통일 사업에 국력이 집중됐다고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효율이 좋으면 지금도 대통령인가 뭔가를 뽑아서 임기도 한 30년으로 하고, 국회 같은 건 없애 버리면 되지 않나? 독재자가 반드시 유능하고 똑똑할 거란 보장이 있나? 당신들은 요즘 '견제가 없는 독재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고 배우는 것 같던데."

-별걸 다 안다. 죽고 나서 공부를 꽤 많이 한 것 같다.
"한번 죽어 봐라. 죽고 나면 남는게 시간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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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듣고 보니 좀 이상하긴 하다. 아무튼 그렇다 치고, 그럼 당신은 화백회의를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인가?
"그렇다."

-덕만을 좋아한 건 아니고?
"물론 덕만을 사랑했다."

-그럼 대체 왜 난을...
"나는 덕만을 사랑하지 않은 게 아니다. 신라를, 신라의 민주주의를 더 사랑했을 뿐이다."

-표절이다.
"알고 있었나? 사실 그 이야기도 덕만에게 들은 거다. 어려서 읽은 플란다스의 개인가 하는 책에 그런 얘기가 나온다고 하더라. 브루터스가 뽀빠이를 죽이고 나서 그런 말을 했다고..."

-플란다스의 개가 아니라 플루타크 영웅전이겠지. 그리고 뽀빠이가 아니라 케사르다.
"그게 뭐 중요하겠나. 아무튼 우리는 국왕의 전제에 도전한 민주 열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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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7세기 신라에서 민주주의 얘기 하는 건 좀 어색하다.
"뭐가 어색한가? 드라마 나도 열심히 봤는데 덕만이 미실과 6분토론인가 뭔가 하면서 '시대정신(Zeitgeist)' 어쩌고 하더라. 그럼 내가 민주주의 얘기하는 건 이상하고, 덕만이 19세기 철학자 헤세의 용어를 쓰면서 얘기하는 건 괜찮냐?"

-...헤세는 소설가고 시대정신을 말한 철학자는 헤겔이다. 그리고 헤겔보다 괴테가 더 먼저 그 말을 썼다. 인터넷만 보지 말고 책을 좀 읽지.
"미안하다. 인터넷으로 보는게 훨씬 편하고 빨라서... 아무튼 왜 나한테만 7세기 사람이 될 걸 강요하나? 나도 21세기식으로 멋지게 나오고 싶다. 독재자 덕만에 저항하다 죽은 낭만주의자 비담, 얼마나 멋진가."

-아니 그게 무슨 사극인가.
"...그럼 지금까지 '선덕여왕'이 사극인줄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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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계속 밤잠을 설치고 있습니다. 밤마다 이상한 어르신들이 꿈속으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웬 잘생긴 거구의 아저씨가 나타나셨더군요.

사실 누군지 알아보기 어렵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른손에 닭다리를 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요즘도 꿩 많이 드시느냐고 했더니 꿩은 구하기 힘들어서 치킨으로 바꾸셨답니다. 네. 바로 태종무열왕 김춘추였습니다.

역시 이분도 드라마 때문에 오셨더군요. 그럴만 합니다. 어찌나 말씀을 잘 하시는지 받아 치느라 죽을뻔했습니다(이젠 슬슬 기억이 납니다). 이것도 많이 압축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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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빙의상태에서 제가 태종무열왕의 심기를 대변한 거라는 걸 자꾸 의심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는 법입니다. 사실 자꾸 밤에 이분들이 찾아봐서 저도 피곤합니다. 제가 뭐 바라는게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저 경주김씨 종친회와 무관합니다.

아무튼 이해를 위해선 앞의 글부터 보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선덕여왕, '선덕여왕'을 말하다

진짜 김유신이 '선덕여왕'을 봤다면

내 이름은 춘추다. 김춘추. 신라 최대의 정복군주인 진흥제와 진지제의 적통을 이은 왕손이다. 비록 할아버지 진지제가 명예롭지 못하게 왕위에서 밀려났다고는 하지만 부계와 모계 모두 손색 없는 왕실의 핏줄이다.

하지만 그때문에 나는 숨을 죽이고 살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미실은 진평제와 손을 잡고 할아버지 진지제를 폐위시켜 비참하게 죽게 내버려 두었다.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하려면 할아버지의 두 아들인 내 아버지 용수와 용춘 숙부를 모두 죽여 없애야 했겠지만 우리 신국의 왕손은 아무나 해칠 수 없는 고귀한 핏줄이었다.

전례도 있었다. 일찌기 실성이사금은 내물이사금이 자신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보복으로 내물이사금의 세 아들을 모두 죽여 없애고 싶었겠지만, 그중 둘을 각기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보내는 걸로 그쳤다. 스스로 목숨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만큼 신국의 왕손이 다른 왕손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대신 진평제는 아버지 형제에게 우호적인 손길을 뻗어 왔다. 아버지(용수)와 자신의 딸 천명공주를 혼인시켜 조카를 사위로 삼은 것이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진평제에게 아버지 쪽 촌수로 계산하면 당질이 되는 셈이지만, 진평제는 나를 한결같이 외손으로만 대했다. 마치 나와 진지제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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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나의 장래는 신국의 평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내가 진평제의 외손으로 대우받으며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진지제의 후손이나 그와 관련된 귀족들의 피를 흘릴 일이 없다는 보장 같은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평제가 내게 자신의 왕위를 물려줄 리는 없었다. 만약 아버지, 혹은 용춘 숙부, 혹은 내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면 진지제의 축출을 주도했던 미실 새주와 그 가문은 처절한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숙부, 나는 모두 살아남기 위해선 절대로 권력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대신 신국의 발전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때로 목숨도 가볍게 버릴 수 있는 자세를 보여야 했다.

역시 총명했던 덕만 이모는 이런 나의 존재가 자신의 세력을 굳히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이모는 어찌 보면 나를 적으로 돌려야 할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나와 유신을 자신의 양 날개로 삼고 왕권을 강화하는데 남몰래 힘을 집중했다. 이모의 왕위는 짤짤이로 딴 게 아니었다. 우리가 무슨 팔푼이들도 아니고, 진평제가 아무리 원했다 한들 본인이 그만한 배포와 실력이 없었다면 누가 여자를 왕위에 올려놓았겠는가 말이다.

비담이 난을 일으킨 것은 솔직히 좀 의외였다. 그는 늘 우리에게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비담이 우리 진영에 협조적이지 않았다면 그가 난을 일으키기 1년 전에 우리가 그를 상대등으로 삼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는 마지막 순간에 우리 편이 되기를 거부하고 난의 주역이 되어 버렸다.

그는 정말로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그가 왕이 된다 한들, 그런 나쁜 선례 이후에도 그가 왕으로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까? 그랬다면 정말 실망이다. 최소한 나는 그가 훨씬 현명할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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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라벌의 귀족들을 거세하면서 우리는 젊은 화랑 출신의 인재들을 대거 등용했다. 유신을 처음 알아본 것은 나였다. 한번 대한 사람은 모두 자기의 수하로 만들어 버리는 그의 엄청난 흡수력에 반해버린 거다. 그가 나와 대등한 신분이었다면 나는 선뜻 그의 휘하가 되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칠숙의 난 때 염장을 발견했고,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에는 천관이 화랑들을 거느리고 큰 공을 세웠다. 이들이 나의 사람들로 길러진 이상, 나의 권력에 도전할 사람은 없었다.

아무튼 그런데 왜 나중에 왕이 되었느냐고? 사실 내겐 반드시 왕이 되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순간이 있었다. 내 딸, 고타소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나는 그냥 각간의 자리 정도로 일생을 마쳤을 지도 모른다.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했을 때 검일이라는 자가 성문을 열어 항복했고, 성주였던 사위 품석이 비겁하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목이 잘렸다. 잔인한 백제 놈들은 그 아내인 고타소마저 내 딸이라는 이유로 참혹하게 죽였다.

이 소식을 듣고 나는 서서 혼절해 버렸다. 옆에서 누가 뭐라 해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됐던 모양이었다. 어려서 어미를 잃은 내 딸 아이. 내 인생이 어떤 전란에 빠지더라도 그 아이만큼은 평화로운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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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석은 누가 봐도 서라벌에서 손꼽히는 신랑감이었다. 멀끔한 인물이며 빼어난 검술 솜씨, 거기에 가문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외양에 속아 놈이 그렇게 비루한 천성을 갖고 있었다는 걸 알아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 놈에게 신라의 숨통인 대야성 성주라는 중책을 맡기다니, 이건 무엇보다 그런 놈에게 김춘추의 사위라는 간판을 달아 준 내 책임이었다.

일국의 재상으로서 딸 하나 보호하지 못하고 적군의 칼날 아래 목이 베이게 하다니. 백번을 후회하고 천번을 가슴을 찢어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품석의 아비는 부끄러움에 스스로 목에 칼을 꽂았다. 검일의 아비는 산으로 도망치다 맞아 죽었다. 유신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자진했을 지 모른다. 이미 처남이 된 유신과 그날 밤 다시 한번 맹세했다.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에 반드시 사비성을 짓밟고 이 원한을 갚기로 말이다.

물론 사사로운 원한보다는 삼한일통이란 대의가 더 컸다. 그리고 이런 사업을 완수하는 데 있어 가장 효율적인 방안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었다. 덕만 이모의 죽음 이후에도 나는 한번 더 참았다. 나 대신 승만 이모를 추대했고, 두번째 여왕을 배경으로 삼아 비담과 염종의 무리를 제거했다. 그 뒤로 집사부를 설치해 화백회의를 무력화했고, 원로인 알천과 실질적인 군부의 1인자 유신의 동의하에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드라마에서 내 역을 맡은 유승호라는 배우가 맡은 것에는 대단히 만족한다. '당서'와 '일본서기', '삼국사기'에 모두 미남에 달변이라고 기록된 나다. 이 정도 인물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첫 등장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수나라 유학을 다녀왔는지는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드라마에서 어머니가 미실 새주에게 죽음을 당한 것으로 처리됐으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복수심을 품는 것이 당연한 일일 듯 했다.

하지만 내가 수나라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여색이나 밝히고 돌아다닌 호화 유학생처럼 그려지면서 뭔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물론 그 뒤로도 내 캐릭터는 꽤 똑똑해 보이긴 했다. 하지만 겉똑똑이일 뿐이었다. 비담에게 약점을 잡힌 불량학생처럼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 드라마에 즐비한 바보들 중의 하나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 살벌한 진평제 치하에서 '왕위 계승권이 있다'고 설치다니. 내가 죽으려고 환장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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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 새주의 죽음 이후 이 드라마의 제작진은 좀 지나치게 비담에게 집착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제법 머리도 좋고 수하도 거느릴 줄 알았던 내가 이토록 하루 아침에 행여나 비담이 덕만 이모의 총애를 못 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질투 심한 꼬마로 전락할 줄은 몰랐다. 하긴, 유신이 보고 왔다는 검을 흑(黑)자가 부수라는 것도 알아내지 못할 정도로 바보가 돼 버린 내가 뭘 할 수 있었을까.

가장 짜증나는 건 642년, 대야성이 함락될 때까지 유승호군이 솜털 보송보송한 얼굴로 내 역할을 연기했다는 점이다. 당시 내 나이는 38세. 딸이 시집을 갔는데도 홍안의 미소년으로 버틴다는게 정말 말도 안된다. 내가 무슨 호빗이라도 되냐(사실 발을 잘 비추지 않을 때에는 나도 불안했다. 다행히 신발을 신고 다닌 것으로 보아 작가가 나를 호빗으로 묘사하려 한 건 아닌 듯 하다).

아무튼 이 드라마는 누가 봐도 앞부분 50회는 '여걸 미실'이었고, 뒤의 12회는 '풍운아 비담'이었다. 회를 거듭할수록 총기를 잃고 자신감도 잃은 김춘추는 결국 마지막회엔 아예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 개망신을 당했다.

결코 비담이 나보다 여자들에게 인기있어서 이러는 건 아니...
(여기서 꿈이 깨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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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 드라마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다시 폭식을 시작했다. 한때 하루에 꿩 10마리를 먹던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요즘은 꿩 구하기가 힘들어서 대신 프라이드 치킨을 8마리(양념 반, 프라이드 반)씩 먹는다. 이게 다 드라마 때문이다. 내 미남 이미지를 돌려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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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폐하에 이어 간밤에는 웬 우락부락한 할아버지가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분들이 저 세상에서 심심하셨는지, 아니면 오랜만에 자신들이 드라마에 나온다니까 TV를 열심히 보신 모양입니다. 아무튼 이 분 또한 MBC TV '선덕여왕'에 대해 할 말이 많으셨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또 타이핑된 글이 있군요. 매일 이런 탓에 낮에 피곤한 모양입니다. 아무튼 어제와 똑같은 과정이었다는 점만 말씀드리고 그냥 올리겠습니다.

아, 이번 글의 싸인은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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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처음 보시는 분은 '선덕여왕이 '선덕여왕'을 봤다면' 편을 먼저 보시는 게 이해가 빠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빙의 시리즈 두번째 편입니다.^



내 이름은 유신. 당연히 김씨다. 우리 조상은 금관가야의 왕족이지만 일찌기 신라와 나라를 합쳤다. 결코 복속된 것은 아니다(불끈). 증조부 때 신라 조정에 출사했고 내 조부 무력공은 일찌기 진흥제를 도와 관산성에서 대승을 거두고 백제 왕(성왕)을 전사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라벌의 콧대 높은 귀족들이 우리 가야 출신들을 무시하지 못하게 된 데에는 조부의 공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 서현공은 감히 만호태후의 딸인 만명부인과 혼인도 없이 사통을 했다. 어머니 만명부인은 진흥제의 여동생이며 며느리(동륜태자의 부인)인 만호태후가 숙흘종과 사통을 해서 낳은 딸이지만, 숙흘종 역시 진흥제의 동생이었으므로 부/모계가 모두 왕족인 귀인이었다. 다행히 뒷날 만호태후가 나를 보시고 자신의 외손자로 인정하셨으므로 나는 비로소 왕가와 피를 섞은 몸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아버지는 한번도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어머니와 짝을 이루려 한 것도 내게 보다 나은 출세의 기회를, 더 나아가 가야 출신들이 신라에서 더 나은 지위를 얻게 하기 위한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런 뜻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걸 이루기 위해 자진해서 왕실을 상대로 사기를 칠 만큼 아버지를 사랑했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말이냐고? 일설에 따르면 나는 어머니가 임신한지 스무달 만에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사람이 어떻게 스무달을 뱃속에 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소문이 퍼지게 된 건 아마도 어머니가 아버지와 야반도주를 할 때, '나는 이미 서현공의 아이를 가졌으니 더 이상 따라와서 괴롭히지 말라'는 식의 통보를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어머니가 나를 가진 것은 그로부터 열달 뒤의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스무달 만에 아이가 나왔다'고 얘기하게 된 게 아닐까?

이런 부모님의 뜻을 헛되이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남달리 노력했다. 열다섯에 화랑이 된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생긴지 백년도 되지 않은 제도였지만 화랑이라는 이름이 갖는 위엄은 대단했다. 사다함같은 명문가의 자손들이 화랑이란 이름으로 피를 뿌린 뒤로 누구도 화랑을 무시하지 못했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신라는 화랑의 피를 먹고 자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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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이란 이름으로 검을 허리에 차고 나면 우리는 모두 목숨을 나라에 내놓은 셈이었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만큼 삶에 대해 알지 못했고, 늘 자랑스럽게 죽어 나라의 제사를 받는 선배 화랑들의 명예에 대해 이야기했다. 감히 전장에서 적에게 등을 보이는 자가 있으면 적보다 내가 먼저 목을 쳤을 것이다.

내 나이 열다섯. 세상에서 그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물론 나는 누구보다 병법을 열심히 연구했으므로 실제로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개개인의 용맹보다는 장수의 역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정병이라도 무능한 장군 아래에선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실전 경험을 쌓아 가며 이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지만, 어쨌든 아군의 희생 없이 거둘 수 있는 승리는 없었다. 필요한 피를 아끼는 것은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할 뿐이었다. 만약 희생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아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이어야 했다.

내 나이 서른 다섯, 내게도 목숨을 바쳐야 할 시점이 왔다. 건복 51년, 아버지와 함께 출전한 낭비성 공략은 다소 무모한 싸움이었다. 고구려의 장병들은 날래고 거칠었다.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아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병력은 뒤지지 않았고 훈련도 잘 되어 있었지만 서전의 패배로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뭔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투구를 벗고 창을 잡자 놀란 흠순(꽤 유명한 내 동생이다. '선덕여왕'에 자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무척 상해 있다. 나는 혹시 월야가 나중에 흠순으로 개명을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이 말고삐를 잡았다. 우리 군의 총수인 아버지에게 결심을 알렸다. 흠순과 달리 아버지는 말리지 않았다.

단신으로 적진에 돌격해 내가 살아 남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다. 이미 죽음의 두려움을 아는 나이가 되어 있었지만, 왠지 자신감이 솟구쳤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내 피는 총명한 아우 흠순의 앞날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었다. 만약 내가 살아남는다면, 나는 신라군의 전설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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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다소 방심한 듯 했다. 설마 한 놈이 쳐들어 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달려드는 미친 놈에게 다들 길을 비켜 주었다. 내가 홀로 적진을 돌파하고 돌아오자 아군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두번째 말을 달려 적진으로 들어갈 때에는 나를 따르는 아군의 용사가 십여명이나 되었다.

우리는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적진을 누볐다. 이때에는 고구려군도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뒤를 돌아 보니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가슴이 다시 서늘해졌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독이 오른 아군이 함성을 지르며 돌격해들어오고 있었다. 이날 우리는 대승을 거뒀다.

그날 이후로 사병들이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얼굴에 분칠을 하고 단신으로 창을 잡아 적진으로 돌격한 화랑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두번이나 적진을 돌파하고도 살아 돌아온 사람은 나 뿐이었다. 나는 하늘이 돕는 신장이며, 창과 화살도 나를 꿰뚫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미 내 몸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어깨를 두드린 말은 하루에 천리를 달려도 지치지 않으며, 내가 벼린 창검은 부러지지 않는다고들 했다. 그래도 나는 전과 다름 없이 사졸들이 먹는 것을 먹고 사졸들과 같은 곳에서 잤다.

그 뒤로도 적진에서 위기를 맞은 적은 많았지만 휘하의 장병들은 나와 싸우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수백번 전장에 더 나섰지만, 내가 있는 주진이 돌파당한 적은 한번도 없다. 물론 나는 가끔 저 청년들을 대신해 내가 살아남는 것이 더 좋은 일인가 자문하기도 했다. 내가 무슨 권리로 비녕자에게 적진으로 뛰어들어 죽으라고 할 수 있으며, 조카인 반굴에게 죽음으로 모범을 보이라고 할 자격이 있었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나 또한 위기를 맞았을 때 목숨을 가볍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전장에서 병사는 운으로 살아남는다. 운이 중첩되면 그 장수는 신장(神將)이 되고, 그 군대는 신병(神兵)이 된다. 신장이 이끄는 신병은 결코 패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상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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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만들어진다고 했다. 내 역을 맡은 배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곱상하고 야리야리한 배우들이 인기라고 들었는데 무엇보다 남자답고 무게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보다 보니 점점 속이 상했다.

나를 따르는 용화향도를 철없는 시골 소년들처럼 그린 것까진 이해한다. 천여명에 달했던 용화향도가 스물 남짓 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아무튼 화랑으로서 인정받기까지 내가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내가 역경을 딛고 일어난 것으로 묘사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하지만 나는 도대체 너무 하는 일이 없었다. 국선이 되고, 풍월주가 된 뒤에도 드라마 속의 나는 도대체 위엄이라는 게 없었다. 나는 휘하 화랑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는 국선이었다. 화랑들이 나를 그토록 우습게 여겼다면 내가 어떻게 신라군의 수장이 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드라마 속의 나는 사소한 계략에도 쉽게 빠져드는 용렬한 인재였다. 내가 그렇게 단순했다면 나는 일찌기 전장의 백골이 되었을 것이다. 일찌기 손자병법에도 병불염사(兵不厭詐)라 했지만 적의 계략을 꿰뚫는 것은 장수의 기본이다. 내가 저렇게 우둔하고 우직하기만 한 인물로 그려지다니, 슬슬 짜증이 났다.

대체 저 사람들은 김부식이 쓴 내 열전(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을 읽어 보기는 한걸까? 사방에 간첩을 보내 적정을 정탐한 건 염종이 아니라 나라는 걸 모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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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조황고가 등극하신 뒤로 나는 신국을 수호하기 위해 신명을 바쳤다. 그런데 어느날 드라마를 보니 내가 흰 옷을 입고 옥에 갇혀 있었다. 기가 막혔다. 이 드라마를 만든 이들은 나를 약 천년 뒤 사람인 이순신과 착각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다음 회에 내가 졸병으로 강등되어 싸우는 장면(백의종군)이 나오는게 아닐까 의아해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본래 이 무렵의 나는 나가서 싸우는 것만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장의 승리를 완성시키는 것은 뛰어난 내정이었다. 그리고 나의 미래를 춘추에게 걸기로 했다. 좋은 장군의 재목은 아니었지만 잘생긴 외모와 뛰어난 화술, 그리고 놀랍도록 빠른 상황판단은 내가 본 최고의 인재였다.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 가운데 이렇게 뛰어난 인물이 있다는 것은 신라의 복이었다.

물론 나와 춘추의 동맹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자가 비담이었다. 그와 여왕 폐하가 사귀는 사이였는지는 알 수 없다. 아, 여왕폐하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나를 좋아했다는 대목이 나오던데 참 보기에 민망했다. ...여자와 관련된 스캔들은 천관녀 하나로 족하다.

아무튼 비담은 자신이 왕이 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듯 하지만 이거야말로 최후의 발악이었다. 어차피 전장에서 단련될대로 단련된 나의 군사들에게 비담의 무리는 적수가 될 수 없었다. 명활산성에 웅거한지 10일만에 비담군을 격파했다. 물론 연을 날린 것도 나의 계책이긴 했지만, 그게 그리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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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드라마 속 나는 그저 무능한 장군일 뿐이었다. 적군의 이동을 눈치채지 못했고, 제대로 공성전을 펴지도 못했으며, 비담이 스스로 자기 편을 해하지 않았다면 난을 진압하지도 못했을 것 같았다.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내가 보기에도 이런데 과연 누가 드라마 속의 나를 명장이라고 생각할까. 예상대로 내 역할을 맡은 배우는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주목을 덜 받는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무능하게 그려지는 건 정말 참기 힘들다. 어차피 드라마는 만드는 사람 마음대로였다면, 그냥 소년시절만 나오고 말았으면 할 정도로 창피했다. 이 긴 드라마에 나오면서 내가 나름 머리를 써서 한 것이 불붙은 연을 날린 것 하나라면, 이건 나에 대한 모욕이다.

여왕께서는 드라마 홈페이지의 기획의도를 보고 분노하셨지만, 사실 드라마 시작할 때만 해도 옛날이다. 드라마에서 미실새주가 죽고 나서 그 작가가 이후의 진행 방향을 거론하며 "천하의 기재가 드디어 빛을 발한다. 무적의 군신으로서 서라벌 최고의 중망을 가진 장군인 김유신. 그토록 비담이 갖길 원했던 ‘천년의 이름’을 당당히 거머쥔다. 김유신은 앞으로 삼국의 통일이라는 거대한 꿈을 위해 덕만을 끝까지 지지하고 덕만 역시 끝까지 김유신을 신뢰함으로써 둘의 완전한 결합은 이뤄진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뭐가 천하의 기재고 뭐가 무적의 군신인가. 드라마 본 사람들에게 물어봐라. 차라리 말이나 말지. 완전한 결합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興武大王.

P.S. 심지어 전화기 광고에도 바보로 나오다니. 가문의 치욕이다.


장군의 분노가 이해가 가시면 과감하게 추천을! (왼쪽 손가락을 누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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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 드라마에서 웬만한 성형수술이나 윤곽변형은 책잡을 거리도 안 됩니다. 얼굴 고쳐 놓고 치열교정이라고 우기는 것도 애교에 속합니다. 정말 대단한 건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마무리하는 솜씨들입니다.

KBS 2TV '아이리스'가 마침내 이병헌에 대한 저격으로 마무리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병헌이 '아이리스2'에는 출연하지 않는다는 소식이 있을 때부터 그 운명이 대강 짐작되긴 했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갈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마지막 부분, 그 처리의 방식에 정말 턱을 땅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입이 딱 벌어졌다'의 다른 표현입니다. 물론 좋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떻게 이 비싼 드라마가 이렇게 끝나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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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현준(이병헌)은 승희(김태희)가 기다리는 호텔로 반지를 사들고 룰루랄라 돌아옵니다. 승희는 승희대로 쓸데없이 호텔 이곳 저곳을 왔다 갔다 하고, 전화기를 켰다 껐다 하며, 이어폰을 꽂고, 그동안 못다 했던 PPL 광고주들에 대한 의무를 다하며 현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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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보이는 등대가 승희가 기다리는 바로 그 등대일 겁니다. 지금은 새치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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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죽죽 달려갑니다. 중간에 계속 승희의 얼굴이 삽입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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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앞 장면에서 가볍게 틱, 소리가 들리고 여기서 차가 뒤뚱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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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총에 맞은 현준이 운전능력을 상실하고 차가 정규 통행 방향에서 벗어납니다.

물론 총에 맞아 핸들을 놓친 사람이 브레이크는 어떻게 밟았는지... 저 짧은 거리에서 바다쪽으로 구르거나 왼쪽 절벽을 들이받지도 않고 절묘하게 차를 정지시킵니다. (촬영 막바지에는 제작비가 좀 더 딸리기 마련입니다. 더 이상 KIA 차량을 희생시킬 수 없었던 모양이군요. 유리 깨는 정도로 마무리.)

화면에 스키드마크도 보이지 않는 걸로 봐선 급브레이크도 밟지 않은...? 그럼 이 차는 운전자가 총에 맞으면 저절로 서는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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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유리가 대파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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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준은 운전대에 머리를 받고 쓰러져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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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가 많이 흐르고, 눈물도 흐릅니다.

지금부터 신의 조건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차량의 진행 방향으로 보아 오른쪽은 바다입니다. 저격수는 바다 한 복판에, 아마도 배를 띄워 놓고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겁니다. 당연히 바다는... 육지보다 출렁거립니다(무슨 소리야). 날씨가 좋아서 파고가 일정하긴 하겠지만, 아무튼 꽤 흔들립니다.

문제의 저격수는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커브 구간이긴 하지만, 운전자가 반지를 들고 애인에게 프로포즈하러 가는 사람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이 상황에서 유유자적 천천히 가고 있다면 그건 정신병자죠)를 겨냥하고 저격을 합니다.

이 차의 진행방향과 동선을 파악하고 있다면, 현준이 차에서 내려 등대로 갈 것 또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달리는 차 안과 외부에 노출된 등대 중에서 어느쪽이 쉬운 저격 목표일지는 자명합니다. 그런데도 굳이 차를 선택한 건 그만큼 저격 실력에 자신이 있단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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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총알은 정확하게 오른쪽 유리를 깨고 현준의 머리를 관통했습니다. 차 유리가 대파된 걸 보면 총알은 상당히 큰 구경인 듯 합니다. 그런데 총알은 유리를 깬 뒤에는 갑자기 소심해져서 현준의 머리 형상을 그대로 남겨 둘 정도로만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저 정도의 위력이라면 머리가 절반은 날아가야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 현준의 오른쪽 머리로 들어간 총알은 왼쪽으로 관통해서(그렇지 않았다면 현준의 왼쪽 머리에서 피가 날 리가 없죠. 충돌시 핸들에 부딪힌 머리도 오른쪽이니까요), 살짝 피가 날 정도까지만 힘을 냈습니다. 왼쪽으로 총알이 뚫고 나왔는데도 왼쪽 유리창에는 피 한방울 튀지 않을 정도로만 살짝.

사실 총격전 영화만 몇편 보신 분들도 저건 좀 이상하다고 느끼실 겁니다. 제가 무슨 총기 전문가는 절대 아니지만, 총상은 엑시트 운드(Exit Wound)가 더 큰 법이잖습니까. 오른쪽으로는 살짝 구멍만 나더라도 왼쪽 머리로 뚫고 나갔다면 왼쪽 머리는 지금보다 한참 더 심각한 상태여야 할텐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범인은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몇 Km 밖에 있는 달리는 차 안의 표적을, 그것도 단 한 방으로 정확하게 머리를 맞히고, 그것도 엑시트 운드도 없이 딱 출혈만 일어나도록 관통한 겁니다. 과연 이걸 신의 솜씨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이런 킬러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요.



물론 이런 신의 솜씨는 여기 저기서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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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요원 역을 맡은 류승룡입니다. 이 화면은 백화점을 점거한 테러범들이 NSS 요원들에게 보낸 협박 요구사항입니다. 류승룡은 자신만만하게, 마스크조차 쓰지 않고 얼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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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혼자 자신만만하게 얼굴을 드러낸 이 요원은 나중에 대통령의 정상회담 자리에도 그 얼굴 그대로 버젓이 들어와 총질을 합니다. 물론 실력은 신의 실력이 아니지만, 이 테러리스트는 신의 배짱을 가졌습니다.

참...대한민국은 나라도 아닙니다. 온 NSS 요원이 얼굴을 알고 있는 테러리스트가 몇시간 뒤 곧바로 대통령을 죽이러 난입해도 아무도 막지 못합니다. 스펙터클도 좋고 총싸움 저도 좋아합니다만, 이건 뭐 좀 어떻게...하는 생각밖에 들질 않습니다.

어쨌든 권총 한 자루로 그 많은 테러리스트를 진압한 신의 요원 현준. 그런 현준인 만큼 그를 죽이려면 신의 능력을 가진 저격수가 필수였겠죠.

네. 아이리스는 신들의 이야기, 그냥 신화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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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였기 때문에 전쟁의 신 현준과 미의 여신이자 거짓말의 여신인 승희는 맺어질 수 없었던 거겠죠. 드라마의 신들이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드라마가 신화가 된 모양입니다.

"난 전설같은 건 믿지 않아"라는 대사 뒤엔 "왜냐하면 내가 신이기 때문이야"라는 말이 감춰져 있었던 걸까요. '아이리스'를 봐도 그렇고, '선덕여왕'을 봐도 그렇고.... 대체 왜들 마무리가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신들의 얘기를 평민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구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튀어나와 죄송하지만,

아직 투표 안 하신 분들,

한표만 부탁드립니다.

http://www.gmarketstory.co.kr/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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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코믹했던 캐릭터는 이런 드라마에선 총부터 쏘고 말을 해야 한다는 사소한 진리를 몰랐던 이 아이리스 요원... 말이 많은 사람부터 죽는다는 것도 몰랐다니. 저도 이제 입 다물겠습니다.



블로그 방문의 완성은 추천 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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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날이 먼 산으로 가고 있는 본방에는 사실 흥미를 잃었습니다. 뭐 이제 와서 드라마가 망가지고 있네 어쩌네 해 봐야 몇회 안 남지도 않았더군요. 사실은 이미 '삼한일통' 때부터 드라마는 산소호흡기로 숨쉬기 시작했고, '미실의 난'이 시작될 때에는 맥박이 멎었습니다. 네. 드라마로서의 '선덕여왕'은 미실보다 먼저 운명하셨습니다.

드라마가 히트할 때마다 가끔씩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을 할리우드로 옮겨 캐스팅해보면 어떨까 하는 장난이 유행하곤 하는데, '선덕여왕'의 경우에는 아직 그런 경우가 별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종방 기념으로 한번 짝을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꽤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인물들의 캐릭터가 워낙 흔들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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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뭐니해도 '선덕여왕'이라고 쓰고 '여걸 미실'이라고 읽는 드라마이다보니 미실 역할이 가장 핵심적입니다. 고현정이라는 배우의 족적이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에 누구를 올려놓으면 좋을까 쉽게 결정하기 힘들었습니다.

결국은 제 맘대로 모니카 벨루치를 낙점했습니다. 영어 연기가 안 된다는 치명적인 약점 때문에 정규 할리우드 배우로서의 경력은 일천하지만, 웃으면서 군사들의 목을 칠 수 있는 '잔혹한 아름다움'이라면 가장 어울리는 배우가 아닐까 합니다. '매트릭스2'나 '그림형제'에서의 이미지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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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은 당연히 덕만인데 이 역할부터는 정말 생각이 잘 나질 않더군요. 이유는 도대체 덕만이라는 캐릭터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단 어린 덕만은 다코타 패닝이라는 안전한 카드를 씌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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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덕만은 정신적으로도 불안정하고(변덕이 죽끓듯), 어려서의 총기는 어디론가 내다 버린 듯,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점에서 '이제 여자이고 싶어요'를 외쳐 대는 짜증 캐릭터가 되어 버렸습니다. 리메이크를 한다 해도 별 비중 없는 캐릭터가 될 것 같으니 그냥 여전사 이미지만 살려 보겠습니다. '니벨룽겐의 반지'의 크리스티나 로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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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엄태웅. 설정대로라면 대단히 멋진 남자 중의 남자이며 장군 중의 장군이어야겠지만, 실제로는 이름만 탱크일 뿐, 보도블록도 넘어가지 못하고 반드시 턱에 걸리는 출력 부족의 무늬만 무한궤도 답답이 캐릭터가 됐습니다. 어쨌든 이름 값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엄태웅의 본래 포스를 고려해 좋은 배우를 골랐습니다. 크리스천 베일.

잠시 중간광고: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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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아래 기호 4번, '송원섭의 스핑크스'에 한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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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은 예측불허의 캐릭터일 때에는 매력 만점이었지만 이제 질투쟁이에다 칭얼대기나 즐겨 하는 어른 놀이 상대등이 되면서 매력이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게다가 드라마의 엔딩을 이룰 비담의 난 조차도 스스로 일으키지 못하고 남들에게 떠밀려 벌어질 모양이니 참...

어쨌든 예측불허의 매력남이라면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잭 스패로 선장을 빼놓고 누구를 떠올리겠습니까. 조니 뎁 낙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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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병풍알천'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알천 또한 지금의 상태에선 좋은 배우를 캐스팅하기 어렵습니다. 어쨌든 말로만 하는 캐스팅이므로 최고 수준으로 꼽아 봅니다.

알천의 매력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일을 완성하는 의기와 충성(뭐 대사가 너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입니다. 가장 신뢰감 가는 얼굴이라면 맷 데이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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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처음 3회 정도 매력있었던 춘추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지금은 이상하게 주위 배우들 다 늙어가는데 혼자 수염 한 가닥 나지 않는 요괴동안의 지진아 캐릭터가 돼 버렸습니다.

설명해봐야 답답해질 뿐이니까 일단 캐스팅. 할리우드의 유승호라면 누가 좋을까요. '어거스트 러쉬'의 프레디 하이모어가 꽤 자랐습니다. 크면서 이상해진 할리 조엘 오스몬트나 다니엘 래드클리프를 가볍게 제칠만한 미소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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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모습을 기억 못하실까봐 - 어린 시절의 유승호군 못잖은 귀염둥이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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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재기발랄하고 재미있던 죽방조차도 여왕이 등극한 뒤로는 어쩌다 한마디 하는 내시 캐릭터가 돼 버렸습니다. 과연 이 드라마에서 세 개 이상의 캐릭터를 동시에 관리하는 건 정녕 무리란 말입니까.

가끔 자기 무릎을 찍기도 하는 꾀돌이 캐릭터라면 드라마 '앙투라지'의 제레미 피븐을 꼽고 싶습니다. 사진은 에미상 수상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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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상으로는 잘한 게 하나도 없는데 미중년이라며 칭송받고 있는 설원공이 남았군요. 설원공 좋아하는 분들, 나이든 어르신들이 전두환 장군의 측근들에게 호감을 갖는다고 욕할거 하나 없습니다. 댁들도 똑같습니다.

어딘가 음흉한 눈빛을 풍기지만 머리 좋은 미중년. '트로이'의 션 빈을 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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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는 애당초 웃기려고 들어간 캐릭터인줄 알았는데 지금은 매번 무게만 잡고 있더군요.

본분을 되찾으란 뜻에서 강한 캐스팅으로 밀어 봅니다. '이어 원'의 잭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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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노를 빼면 좀 아쉽겠습니다. 가장 고민 없이 한 캐스팅입니다. 깊은 눈빛, 미중년, 칼이 어울리는 사나이, 진중한 한마디 한마디, 뭐 '반지의 제왕'의 아라곤 이상 있겠습니까. 비고 모텐슨 낙찰.

마지막 커플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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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직도 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똑부러진 이유를 대기는 쉽지 않습니다. 분명 재미도 전만 못하고, 어처구니없는 장면들이 이어지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가끔 분통이 터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선덕여왕'에서 생기가 도는 캐릭터를 찾기는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동안 그토록 재기발랄하게 극의 흐름을 끌어가던 죽방(이문식)과 염종(엄효섭)까지도 지금은 사실상 병풍이 돼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왜 이 드라마를 지켜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 시작은 창대했던 드라마가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를 증언할 의무감 같은 걸 느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이 드라마는 시청률 30%를 넘는 인기 드라마입니다. 이 수치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고, 다른 드라마들이 언감생심 넘보지 못할 시청자들이 덕만과 유신의 갈팡질팡을 지켜볼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할 때마다 '사극에서 역사왜곡이 무슨 문제냐' '드라마는 드라마고 다큐는 다큐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분명히 말합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왜곡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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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역사가 문제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은 아마 대야성의 성문을 연 배신자의 이름이 검일(黔日)이라는 데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겁니다. 당시 백제의 장군 이름이 윤충일 뿐, 계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야성 함락은 선덕여왕 11년(642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당시 검일이 성문을 열어 항복하는 바람에 백제에게 대야성이 넘어간 것도 역사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그런데...문제는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성주가 품석이라는데 있습니다. 품석은 춘추의 사위죠. '삼국사기'는 딸과 사위를 잃은 춘추의 비탄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기둥에 몸을 기대 선 채로 하루 종일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고, 자신의 앞으로 사람이 지나가도 의식하지 못했다. 이내 말하기를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무너뜨리지 못한단 말이냐!" (春秋聞之, 倚柱而立, 終日不瞬, 人物過前而不之省. 旣而言曰 "嗟乎! 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

실제 역사의 흐름은 이렇게 격노한 춘추가 고구려와 연합해 백제를 치기 위해 단신으로 고구려에 넘어가 연개소문과 협상을 벌이고, 여기서 여의치 않자 당나라로 가 외교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또 진덕여왕 원년(647년), 유신이 백제군의 침입을 격퇴하고 대승을 거둔 뒤 생포한 백제 장군 8명과 품석 부부의 유해를 교환해 신라로 가져오자 춘추가 감격을 금치 못하고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다른 배우들이 백발과 콧수염을 달고 나올 때에도 여전히 솜털 하나 없는 얼굴로 샤방샤방 눈웃음을 날려 주시고 있는 꽃미소년 춘추공이 징그럽게도 사위와 장성한 딸을 거느리고 있는 아저씨였다는 겁니다. 네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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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이 문제가 아니라고 해놓고 왜 역사 얘기냐고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드라마가 역사를 다루는 수준은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콩쥐팥쥐 이야기를 다루는 수준입니다. 그만치 경외심도 없고, 이해하는 수준도 낮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아니냐, 그건 역사 왜곡의 정도보다, 사극 드라마로서의 기본, 아니 드라마로서의 기본에 더 큰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왕마마의 충신 유신공이 거짓말장이로 몰리게 된 계기, '대야성에는 이름이 흑으로 시작하는 관원이나 군사가 없다'는 것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유신이 고한 것은 '대야성에 있는 첩자가 내응해 관문을 열 것이고, 그 첩자의 이름은 백제 작전지도에 흑 뭐시기라고 쓰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온갖 신라의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흑 뭐시기라는 사람은 대야성에 없으니 유신 저놈이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들끓기 시작합니다. 어이 상실 시퀀스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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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상황이 다 정리될 즈음에서야 그중 똑똑하다는 비담이 '부수일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고 다시 명단을 뒤져 봅니다. 기절해 쓰러질 일입니다. 한글로 '흑'이라고 써 놓고, '검'이라고 써 놓으면 전혀 다른 글자겠지만 한자로 '黑'을 써놓고 그 옆에 '黔'을 써 놓으면, 똑같은 黑자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도 명단을 보면서 여기 있네 흑, 하고 찾아 낼 겁니다.

게다가, 한글이 아니라 한문을 베이스로 생각한다면, 단지 한자로 선명한 黑 한 글자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黑으로 암시할 수 있는 비슷한 글자들을 모두 생각의 범위에 넣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테면 먹을 뜻하는 묵(墨)이라거나, 검은 색을 뜻하는 현(玄), 칠(漆) 등도 일단 의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같으면 얼굴이 검은 사람도 일단 용의선상에 놓겠습니다.^^)

한번만 더 생각하면, 그 글자가 올라간 곳이 백제의 작전지도라면... 애당초 간첩의 본명이 써 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007은 007이니까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자신의 실명을 까고 활약하지만 세상 어디의 스파이가 실명으로 활동하며, 스파이를 보낸 자가 스파이의 실명을 아무데서나 거론한단 말입니까.

애당초 '적의 스파이가 있다'는 것만 알아도 대야성의 수비진을 소환해 단속하는게 보통이겠죠. '첩자가 성문을 연다'는 구체적인 행동까지 알고 있다면 그걸로 막을 생각은 않고, 이름이 있네 없네만 따지고 있다는게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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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수준으로 미실 사후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국면을 이끌어가고 있는게 현재 '선덕여왕'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넓게 전체를 봐도 상황은 모순 투성이입니다. 미실의 도전을 물리치고 왕이 됐건만 덕만의 주변에는 여전히 미실의 세력이 득시글거리고, 덕만은 미실 코스프레와 성대모사에 빠져 있을 뿐 왕으로서의 면모는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덕만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니고, 유신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건만 '선덕여왕' 제작진에게는 이미 자신들이 어디서 본 두 역사적 인물의 캐릭터를 '선덕여왕'의 두 인물에 덮어 씌우려는 생각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이제 좀 더 지나면 '주인공 고립시키기'를 위해 '우리 편'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어갈 일밖에 없을 듯 합니다. 서현, 용춘, 알천, 필탄, 죽방, 고도 등은 이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나날입니다. 하긴, 이젠 그냥 죽고 쉬는 게 나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제작진에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신라를 이렇게 바보들의 나라로 만들어 놓고도 과연 덕만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영명한 여왕으로, 유신이 통일과 구국의 일념으로 사랑조차도 제쳐놓은 영웅으로 그려질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P.S. 이제 남은 욕은 '재미없으면 보지마 이 시키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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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미실 시대의 '선덕여왕'에서 제작진은 눈여겨 볼 부분 중 하나로 '김유신의 복권'을 꼽았습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자 불패의 명장인 유신의 면모를 살려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선덕여왕' 52회에서는 뭔가 선봉대장으로의 면모를 갖춘 듯한 고도와 함께 턱수염을 기른 유신의 모습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라마 상으로 '첫 승리'를 기록한 유신의 직위가 상장군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드라마는 드라마이다 보니 갑자기 유신이 승리를 거두는 상승장군이 된다 해서 놀라울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김유신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줄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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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에서 김유신의 전공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630년(진평왕 51년)의 낭비성 전투입니다. 이때 기록은 이렇습니다.

51년 가을 8월, 왕이 대장군 용춘·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성 밖에 나와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의 기세는 아주 드높았다. 아군은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신은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옷이 반듯해지고, 그물의 꼭지를 쳐들면 그물이 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그물의 꼭지와 옷깃이 되어 보겠다!"라고 말하며,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을 향하여 곧장 돌진하였다. 세 번을 적진 속에 들어 갔다 나오면서 그 때마다 적장의 목을 베거나 깃대를 뽑아왔다. 그러자 군사들이 기세를 올리며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여 5천여 명을 목베어 죽였다. 낭비성이 항복하였다.

五十一年, 秋八月, 王遣大將軍龍春·舒玄, 副將軍庾信, 侵高句麗娘臂城. 麗人出城列陣, 軍勢甚盛, 我軍望之懼, 殊無鬪心. 庾信曰: "吾聞: '振領而 正,  綱而網張.', 吾其爲綱領乎!" 乃跨馬拔劒, 向敵陣直前, 三入三出, 每入或斬將, 或 旗. 諸軍乘勝, 鼓 進擊, 斬殺五千餘級, 其城乃降.

이 기록이 중요한 이유는 유신이 신라군의 사령관이 되기 전, 일개 비장이던 시절에 '단신으로 적진으로 돌격했다'는 첫번째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김유신의 뒷날 전투 기록을 살펴보고 "참으로 모질고 독한 사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유신의 전투에서는 드물지 않게 최측근의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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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비녕자와 관련된 기록입니다. 유신의 낭비성 전투와 비교할만 합니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침입하여 무산, 감물, 동잠 등 세 성을 포위하였다. 왕은 유신에게 보병과 기병 1만을 주어 이를 막게 하였다. 유신은 어렵게 싸웠고 마침내 기력이 떨어졌다. 유신은 비녕자에게 말했다. “오늘의 사태가 위급하다. 그대가 아니면 누가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할 수 있으랴!”
비녕자가 절을 하고 말했다.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 드디어 적진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들 거진과 종 합절이 그를 따라 적의 칼과 창 속으로 돌진하여 전력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이를 바라보고 감격하여 서로 앞을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대파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冬十月, 百濟兵來, 圍茂山,甘勿,桐岑等三城, 王遣庾信, 率步騎一萬拒之. 苦戰氣竭, 庾信謂丕寧子曰: “今日之事急矣, 非子, 誰能激衆心乎.”
丕寧子拜曰: “敢不惟命之從.” 遂赴敵. 子擧眞及家奴合節隨之, 突劒戟, 力戰死之. 軍士望之, 感勵爭進, 大敗賊兵, 斬首三千餘級

화랑의 감투정신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예화입니다. 사실 선덕여왕 연간에 신라는 백제에게 수세로 전환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진덕여왕 원년, 신라와 백제의 전투에서 김유신은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고, 이때 비녕자에게 "네가 나서서 병사들의 사기를 들끓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비슷한 사적은 먼 뒷날, 황산벌에서 계백과 대치한 김유신의 군대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이 전투에서 김유신은 계백의 결사대에 연거푸 패해 군심이 흔들리자 자신의 친 조카인 반굴(유신의 동생 흠순의 아들)과 역시 조카뻘인 관창을 희생시켜 전군을 격동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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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여왕'에는 흠순이 나오지 않는 대신 월야가 의동생 역으로 나오고 있죠.)

총사령관의 동생인 흠순이 반굴에게 말합니다. "신하된 바로는 충성이 제일이요, 아들된 바로는 효도가 제일이다. 이날 우리가 위기에 처했으니 목숨을 버리면 충효를 모두 갖추는 것이다(爲臣莫若忠, 爲子莫若孝, 見危致命, 忠孝兩全)." 이 말에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목숨을 버립니다.

화랑들이 단신으로 적진으로 뛰어들어 용맹을 과시하면 아군 병사들의 사기가 치솟을 수 있겠지만 그 뛰어든 사람은 십중팔구는 죽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무위가 뛰어나다 해도 수천 수만의 적군과 혼자 대치하면 죽음을 피하기 힘듭니다.

유신과 비녕자, 반굴과 관창을 비교해 볼 때 기본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유신은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죽었다는 것 뿐입니다. 이 말은 유신 역시 낭비성에서 적진으로 침투할 때에는 역시 비녕자나 관창과 같은 운명이 될 각오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투에서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도구로 던질 각오가 있었던 사람이 장군이 되고, 그런 장군인 만큼 휘하의 병사들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 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신의 리더십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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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이런 배경을 찾아 볼 수는 없겠습니다. 이미 선덕여왕이 왕위에 올랐고 유신은 상장군이 됐지만, 그의 휘하 장병들이 그를 믿고 따라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이미 고위 장성이 되기 전에 그 또한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목숨을 걸고 적진에 뛰어들었던 인물이란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생략돼 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유신이 명장이 된 것은 일신의 용맹보다는 빼어난 지략과 정략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실제로 후세로 갈수록 김유신의 면모에선 지장의 면모가 풍겨나옵니다. 어쨌든 김유신을 '선덕여왕'에서 빛나는 캐릭터로 키워내기 위해선 필수적인 부분이 생략된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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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미실이 하는대로 똑같이 따라 하고 있는 여왕마마께서는 안 늙는 비법도 그대로 물려받으셨습니다. 유신과 알천, 월야가 수염이 시커매지고 설원과 미생은 노인이 됐건만... 참고로 드라마 '선덕여왕'의 설정을 따를 때 이 시기의 선덕여왕은 60세 전후입니다. (자꾸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네 하는 분들, 이건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이 드라마의 설정에 따를 때 그렇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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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대하사극 '여걸 미실'이 마침내 끝을 맺었습니다(아, 제목이 저게 아니던가요?). 50회. 타이틀 롤인 선덕여왕 역의 이요원보다 더 많은 회차에 출연했고, 아마도 출연 시간으로 따지면 전 출연진 가운데 단연 1위일 겁니다. 지금까지 고현정이 연기한 모든 역할 가운데서 가장 뜨거운 주목을 받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고현정 혼자의 힘은 아닙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미실이라는 캐릭터를 창조(라기 보다는 각색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해낸 제작진, 특히 작가진의 힘이 없었더라면 '미실 고현정'의 영광을 기대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럼 굳이 따지자면 어느 쪽의 힘이 더 클까요? 미실이라는 캐릭터가 고현정의 명연기를 만든 것일까요, 아니면 명배우 고현정이 미실이라는 캐릭터를 만든 것일까요? 비율로 따진다면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줘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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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비교할 거리가 있겠지만, 일단 가장 비교할만한 캐릭터와 배우를 찾아 보자면 한국 사극에서는 단연 장희빈을 꼽게 됩니다. 영화와 드라마를 합쳐 무려 7명의 배우들이 이 역할을 연기했고, 현재 이병훈 PD가 만들고 있는 드라마 '동이'에서도 여덟번째 장희빈이 등장할 전망(물론 이번엔 주인공은 아니지만)입니다.

가장 최근 장희빈을 연기한 배우 김혜수가 "장희빈 역을 맡는 건 신인때부터의 꿈"이라며 이미 캐스팅된 역할을 포기하면서까지 드라마에 매달린 것은 이 캐릭터가 갖고 있는 매력을 상징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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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청자들은 장희빈에 열광했을까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인들의 악녀 사랑은 지극했습니다.^ 뺑덕어미에서 장화홍련전의 계모에 이르기까지, 주인공을 학대하는 악녀들은 한국인 관객들에게 최고의 극적 흥분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왔죠.

사극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장희빈의 인기에는 좀 미치지 못하지만 명종 때의 정난정이나 연산군때의 장녹수, 광해군때의 김개시 김상궁 등이 모두 비슷한 의미의 캐릭터로 인기를 모았습니다. 비상한 두뇌와 성적 매력으로 정국을 뒤흔든 여자들이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았던 캐릭터들입니다.

게다가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되면서 이들 캐릭터에게는 점점 더 많은 '동정의 여지'가 첨가됐습니다. 전통적인 역사책 안에서 '선한 인현왕후를 핍박하는 악녀 장희빈'이라는 '사씨남정기'적인 해석이 주를 이뤘다면 드라마 속에서는 점점 더 '장희빈만 나빴던 것은 아니다'라는 쪽으로 중심 축이 옮겨져 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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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영화 속 장희빈들이 오빠 장희재와 함께 분탕질을 일삼는 못된 여자였다면 1982년 MBC의 이미숙 장희빈 이후에는 남인과 노론의 당쟁 사이에서 중심에 서게 된 장희빈의 '입장'이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사약 신'이 강조되기 시작하면서, 시청자들은 "장희빈도 불쌍했네"쪽으로 오히려 동정심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장희빈을 보다 보면 이번 '선덕여왕' 때에도 미실의 캐릭터가 어떤 식으로 그려질 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큰 방향', 즉 '일단은 악역으로 그려지되, 여기에 충분히 인간적인 연민을 살 수 있는 부분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정도에서 그칩니다. 그 안의 세세한 디테일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선덕여왕' 제작진은 미실이라는 캐릭터에 화려한 외피를 입히는 데 성공합니다. 신라 최고의 권력과 수많은 수하 남자들을 주었고, 어린 아이에게 '공주님의 남동생들이 모두 죽은 것은.... 모두 네 탓이다. 앞으로도 모두 죽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악함을 주었습니다. 소름끼치는 팜므 파탈이면서도 늘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거느리는 희대의 여걸이 등장한 것입니다. 장희빈과 명성황후의 합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강력한 캐릭터가 구축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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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드라마 '선덕여왕'과 미실 캐릭터의 성공은 제작진의 힘일까요. 여기에는 조금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화랑세기'의 미실은 인간적으로 동정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강력한 캐릭터입니다. 3대의 왕과 잠자리를 같이 했고, 남편과 남동생, 두 연인과 두 아들이 화랑 최고의 영예인 풍월주를 지냈습니다. 그 밖의 풍월주들도 사실상 미실이 골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신라 융성기 화랑의 역사가 곧 미실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미실이 곧 신라라고 할 수 있을 정도죠.

하지만 '선덕여왕' 제작진은 그런 강대한 미실과 선덕여왕을 적대자로 놓는 구도를 선택합니다. 이 선택은 상당히 매력적이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미실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유일한 문헌 근거는 '화랑세기'인데, 이를 아무리 뜯어 봐도 미실과 선덕여왕이 대립할만한 단서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작진은 설정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미실은 귀족 중심의 보수파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삼국통일을 국시로 삼는 것도 반대하며, 민중은 본래 어리석기 때문에 다소 기만을 해서라도 끌고 가야 하는 대상으로 보고 있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여기에 대항하는 덕만은 당연히 '사람'을 정치의 근본으로 생각하고, 과학과 기술의 개방을 통해 민중의 삶의 질을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설정은 전체적으로 그리 성공적이지 않습니다. 이런 미실과 덕만의 관계에는 어떤 사서나 사료의 뒷받침도 없기 때문에, 많은 사건들이 '그냥 그렇다니까 그런 것'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7세기의 신라 조정에 21세기 한국의 정치 상황을 비쳐 보려는 의도가 너무나 앞서기 때문에 이런 무리는 점점 더 깊어져 갑니다. 이런 시도는 상당히 세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뭐 어때, 우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설정이잖아'라는 식의 진행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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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그 중심에 선 미실조차도 오락가락하는 상황이 발생하죠. 본래 자신의 권력 유지가 최대의 목표인 미실은 수많은 만행을 저지르지만, 화랑들은 "미실 새주가 하신 일 중 대의에 따르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며 미실을 맹종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 드라마가 시작된 뒤로 미실이 그리 대의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화랑들이 잘 알고 있죠. 심지어 임종랑은 미실이 보종을 시켜 문노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도 알고 있고, 화살로 보종을 쏘아 목숨이 위태롭게 한 적도 있습니다(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임종은 그 사실을 싹 잊어버리고 맙니다). 게다가 대남보가 천명공주를 시해한 범인이라는 것도 공식적으로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대남보가 단독으로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화랑들이 바보일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미실은 수많은 비리를 저지르지만 화랑들은 여전히 "미실 새주가 하시는 일은 대의에 따른 것"이라고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랑들은 몰라도 시청자들은 미실이 수많은 암수를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죠. 문노-천명-서현-덕만은 모두 미실이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미실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면서 몇가지 사수를 쓰자 지금까지 가만 있던 설원은 갑자기 "아니 왜 새주답지 않게 비겁한 짓을 하십니까?"하면서 만류합니다(네. 설원도 상당히 건망증이 심합니다).

뭐 점점 얘기가 쓸데없이 길어집니다. 이런 식으로 살짝 오락가락하던 미실은 결국 "지금의 신라는 내가 전우들과 함께 피를 흘려 만든 것"이라는 감상과 함께 "피땀흘려 건설한 나라를 무너뜨릴 수 없다"며 원군을 복귀시키고 장렬하게 죽어갑니다. 자신이 한때는 "통일을 국시로 삼고 대외적으로 팽창하면 왕권만 강화될 뿐이고 우리 귀족들의 세력은 축소된다"며 쌍심지를 돋우던 사람이라는 것은 역시 과거의 일일 뿐입니다. 뭐 생각이야 바뀔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경우에는 생각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건망증의 결과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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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기하게도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고 있으면, 이런 문제들이 그리 눈에 띄지 않습니다. 쉴새없이 의심하고 생각해보지 않는 한 말입니다(물론 그런 시청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마는). 그리고, 이런 의문이 들 여지를 막아낸 것이 바로 고현정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현정이 연기하는 미실을 보고 있으면 '웃는 얼굴의 악녀'로서 역대 최고의 연기를 보았다는 데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웃는 얼굴에서 똑같이 다정한 말이 나오고, 누군가를 주살해야 한다는 명령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눈꼬리의 아주 사소한 움직임 하나로 미실의 감정 변화가 감지됩니다. 과연 이 역할을 다른 배우가 했다면 이런 효과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심지어 방금 전에 사람의 목을 치고도 화사하게 웃고 있으면 언제 그랬냐 싶냐는 분위기는 아무나 낼 수 있는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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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배우가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구요. 명배우가 모든 플롯의 구멍과 대본상의 모순을 덮어버리는 예는 여기저기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캐리비언의 해적' 시리즈의 조니 뎁입니다. 이 시리즈에서 논리적인 스토리의 진행을 찾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입니다. 설정은 수시로 추가되고, 어린아이의 놀이들처럼 룰이 수시로 바뀝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런 면을 따지지 않습니다. 만약 잭 스패로우 선장을 다른 배우가 연기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이 영화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악녀 미실', 혹은 '여걸 미실'의 시대를 이끈 것은 제작진의 힘이라기보다는 70% 이상이 배우 고현정의 힘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배우 하나의 포스가 이렇게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포스트 미실 시대의 '선덕여왕'(아, 이제야 이 드라마가 시작되는군요)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자못 궁금합니다. 과연 덕만공주는 지기삼사의 재능을 드러내며, 유신은 통일의 주역인 백전백승의 명장으로 돌아오며, 이제는 골치아파진 비담(배신의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한)은 어떻게 처리될까요. 살짝 걱정도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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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 납득이 안 가는 걸까요. 미실의 퇴장을 하루 앞두고 방송된 MBC TV '선덕여왕'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는 진흥왕이 남긴 조칙이었습니다. 문제의 문서가 대단한 비밀무기인 양 덕만은 문서를 땅속에 파묻고, 비담은 고민하고, 미실은 문서가 없어진 걸 보고 안색이 변합니다. 그리고 비담은 문서는 없었다고 보고합니다.

이 대목에서 상식적인 판단이 필요합니다. 과연 이 문서는 그렇게 큰 폭발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서가 공개되면 세상의 판도가 바뀔까요? 제작진은 그렇게 주장합니다. 지난주, 이 문서의 정체가 예고편을 통해 밝혀지면서 계속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대체 덕만은 저 문서를 어떻게 사용하려고 한 것일까.

그리고 이번 주, 그 해답이 공개됐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납득은 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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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흐름에 따라, 각 인물의 입장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덕만의 입장:

소화는 죽기 전에 덕만에게 문서를 전해 줍니다. 문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조칙: 신라의 적인 미실을 척살하여 대의를 바로 세우라(詔勅: 新羅之敵 美室刺殺 而? 正立大義)' 그리고 '무신년 3월'이란 날짜가 쓰여 있고, 옥새가 찍혀 있습니다.

자, 일단 이 문서가 '진흥왕이 쓴 것'이라는 것이라는 보장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어쨌든 옥새가 찍혀 있으므로, 왕명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고 칩시다. (사실 저 문서에서 알 수 있는 건 진흥왕의 한문 실력이 형편없다는 겁니다. 기초 문법에 맞게 쓰려면 '刺殺 新羅之敵 美室 而? 正立大義'라고 써야 합니다.)

만약 미실이 권세를 잡고 있을 때 이 문서가 공개된다면, 미실에게는 꽤 큰 타격이 될 것입니다. '진흥왕의 유지의 계승자'라는 미실의 권위의 한 축이 무너지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서를 공개하는 쪽도 죽음을 각오해야겠지만, 어쨌든 미실에겐 대단히 위험한 문서임에 틀림 없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덕만이 이 문서를 공개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점은 바로 공개추국입니다. 백관들이 덕만의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진흥제의 유지를 배반한 것이 바로 미실'이라고 공개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공격입니다. 하지만 덕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문서를 땅 속 깊이 파 묻었죠.

정작 덕만이 이 문서를 꺼내드는 것은 미실로부터 궁성을 회복하고, 대야성에 진을 친 미실과 일전을 준비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엔 미실의 위치에 상당히 큰 변화가 있었죠. 어제까지 위국령에 따라 정부 수반이었던 미실은 이제 반란의 수괴가 되어 있습니다.

이미 반란의 수괴란 죽어 마땅한 죄인인데, 여기에 진흥왕의 유언으로 다시 한번 미실을 신라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죽을 죄+ 죽을 죄'를 해 봐야 한 사람이 두번 죽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서를 공개할 가장 좋은 시기를 휙 넘긴 덕만은 뒤늦게 '이 문서만은 쓰지 않으려 했는데....'라며 비담에게 문서를 파 오라고 심부름을 보냅니다. 이건 뭘까요? 그 문서를 덕만이 쓰는 것은 반칙이란 뜻입니까? 몰래 훔쳐 온 문서이기 때문에 그걸 빌미로 미실을 공격하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뜻일까요?

(아마도 제작진이 생각한 이유는 다른 이유일 겁니다. 그건 다음 단락에서 얘기합니다. 한번에 다 해버리면 재미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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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비담의 입장:

비담은 덕만의 심부름을 떠나 붉은 비단보 속에 들어 있는 진흥왕의 조칙을 열어 봅니다. 거기에는 '신라의 적인 미실을 척살하여 대의를 바로 세우라'고 쓰여 있습니다. 물론 쓴 사람이 누구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이를 보고 비담은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알아내 버립니다. 첫째. 이 글을 쓴 사람은 진흥왕이다(대단합니다. 심지어 연도도 엉망인데 그걸 알아내다니...). 둘째, 이 글을 받은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조칙을 실행하지 않고 미실에게 바쳤다.

자, 여기서 비담의 두뇌는 계속 돌아갑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이 조칙이 덕만에게 전달되고, 덕만이 이 조칙을 공개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각지의 귀족과 장군들이 '오오, 그동안 우리는 미실에게 속아왔구나. 미실은 이미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적으로 지명돼 죽었어야 할 몸이었구나! 그래!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덕만공주님께 달려가자! 가서 미실을 쳐부수고 신라를 바로 세우자! 야호' 하고 소리칠까요?

...라고 생각한다면 참 순진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미실은 진평왕을 구금하고, 위국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궁을 점거하고, 회의석상에서 대신을 함부로 죽이고, 화랑들을 닥치는대로 고문해 죽이고, 덕만공주 체포령까지 내린 상황입니다. 그리고 나서 상황이 뒤집혀 도성에서 시가전을 벌이고, 도망쳐 남서쪽의 한 성에 웅거하고 있습니다. 네. 설명이 너무 길었나요?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반란의 수괴이자 내란의 주모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졸들이 미실을 따르는 건 모두 '미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이고 진평왕이야말로 왕 자격이 없는 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겠죠. 사실은 미실에게 아직 승산이 충분하고, 미실이 있는 힘을 다 발휘하면 서라벌의 왕과 덕만(얼마 전까지도 미실 앞에서는 쥐새끼같은 존재들이었던 자들이죠. 풍월주 유신? 서현? 웬 듣보잡들?) 따위는 한방에 날아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난(!)에 가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위에서 말했지만, 서라벌에 진평왕이 버젓이 살아 있는 한, 이미 미실은 '반란의 수괴'입니다. 충분히 죽을 죄입니다. 여기에 '진흥왕도 미실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된다 해도 죽을 죄에 죽을 죄를 보탠 들, 그냥 죽을 죄 이상은 될 수 없습니다. 즉, '진흥왕의 조칙 따위는 이미 소용 무'인 상태입니다.

하지만 비담에겐, 그리고 '선덕여왕' 제작진에겐 이런 상식 따위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담은 갑자기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함께 의문을 갖게 됩니다. 대체 똑똑하기로 소문난 우리 엄마 미실이, 왜 있어 봐야 불리할 뿐인 이 문서를 그 오랜 세월 동안 간직해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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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미실의 입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걸 보관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앞부분, 난을 일으키기 직전 모드로 갔을 때 이 문서는 설원에게 있었습니다. 미실이 설원에게 이 문서를 맡긴 것은 '이 문서를 공개하면 나는 죽을 죄인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따라서 당신에게 나는 목숨을 맡긴 셈이다. 그만치 나는 당신을 신뢰하며, 나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난을 일으키면서 미실은 다시 그 문서를 회수합니다. 그리고 설원에게 "우리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비담입니다"라는 요지의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만약 이번 난이 실패하면, 이 문서를 비담에게 전하고, 비담으로 하여금 나를 죽이게 해서 큰 공을 세우게 하고, 그럼으로써 덕만의 치하에 나, 미실의 후손을 남길 수 있다는 계산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계산을 위해 미실은 염종으로 하여금 비담을 서라벌에서 먼 곳에 묶어두게 하고, 당장 난이 진행되는 동안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못하게 합니다. 글쎄... 과연 난이 진압된다면 그 대혼란 속에서 무슨 수로 비담에게 그 문서를 전하고 무슨 수로 다른 사람 말고 정확하게 비담에게 죽게 될지도 참 궁금하지만, 아무튼 그런 건 어떻게든 가능하다고 칩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한 것은, 천재 비담은 진흥왕의 조칙을 보는 순간, 거기에 자신에 대한 어머니의 배려가 담겨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눈치채버린다는 점입니다. 뭐... 제작진의 배려겠죠.



4. 소화의 입장

소화는 이 문서를 갖고 '미실에게 해가 되고, 비담과도 관계가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말만 하고, 비담이 미실의 아들이라는 걸 덕만에게조차 말하지 않습니다.

이 문서가 왜 비담과 관계가 있을까요. 이 문서때문에 미실이 진지왕에게 접근해 비담을 낳아서? 즉 비담이 태어나게 된 계기가 이 문서 때문이라서? 그리고 이 문서가 공개되면 비담이 역적의 아들이 되기 때문에?

그런데 이건 모두 '세상 사람들이 비담이 미실의 아들이라는 걸 다 안 다음의' 문제라는 겁니다. 심지어 소화 자신도 덕만에게조차 털어놓지 않은 비밀을 대체 누가 안단 말입니까. 이것이 가장 어처구니없는 답답이 소화의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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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실을 지지하던 지방 군단장 A씨의 입장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분을 위한 마지막 설명입니다. 비담이 문서를 덕만에게 정상적으로 전달하고, 궁성을 차지하고 있는 덕만이 대야성의 미실 토벌을 위한 지방군의 동원령을 내리면서, 칙서 하나를 공개합니다. 칙서에는 (반복하기도 귀찮다) '미실을 죽여라. 나 진흥왕' 이라고 써 있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정상인 A씨의 머리 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떠오릅니다.

'그래? 그런데 왜 덕만공주가 그 문서를 갖고 있지?'
상식인인 A씨에게는 대체 왜 그런 문서가 남아 있는지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 문서를 받은 게 설원이고 설원이 냉큼 그 문서를 미실에게 바쳤는지 말았는지 그가 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조칙이 실현되지 않았는데 그 문서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합니다.

'그 문서를 갖고 있다면 왜 이제사 공개하지?'
이 대목에서 덕만공주에게 살짝 의심이 갑니다. A씨는 사실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어느쪽으로 붙어야 하나. 미실이 더 세 보이긴 했고, 미실에게 그동안 받은 것도 많은데 또 보니 미실은 궁성에서 쫓겨나 대야성에 있다고도 합니다.

'저 문서가 진짜긴 진짜야?'
A씨는 바로 얼마 전, '공주가 난을 일으켰으니 체포하라'는 문서에 당당하게 옥새가 찍혀 공개됐던 것을 기억합니다. 옥새가 찍힌 문서라는 건 권력을 쥔 쪽에선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죠. 진흥제가 미실을 죽이려 했는지 말았는지, 내 눈으로 원본을 본 것도 아니고 그깟 문서 쯤이야 궁성을 장악한 쪽에서는 백개라도 만들어 낼 수 있을 겁니다. 네. 지금 A씨에게 중요한 건 '그 문서가 진짜인지 아닌지'가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덕만은 이 문서의 진위를 어떻게 천하의 사람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까요. 답은 '없다'입니다. 현재는 21세기 아니고 7세기입니다. 기자회견을 할 수도 없고, 문서를 스캔해서 인터넷에 올릴 수도 없습니다. 또 국과수에 문서의 필적 감정을 요청할 수도 없고, 문서에서 진흥왕의 DNA가 나오는 지 알 수도 없습니다. 문서가 최소한 30년이 됐다는 과학적 감정도 할 수 없습니다.
덕만이 할 수 있는 건 '그런 문서가 있다'고 선포하는 것 뿐이고, 사람들은 그걸 믿고 싶으면 인정하고, 믿기 싫으면 인정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럼 이 상황에서 A씨에게 정말 중요한 건 뭘까요.

'그런데 대체 누가 이길 상황이지?'
빙고! 중요한 건 이겁니다. 만약 미실이 이길 상황이라면 그깟 문서 따위는 '간교한 덕만공주가 만들어 낸 것'으로 쳐 버리면 됩니다. 반대로 공주가 이길 상황이라면 '아 그래! 우리는 그동안 미실에게 속아 왔다! 자! 정의의 군사를 일으켜 역도 미실을 치자!'고 들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대체 그놈의 문서가 뭐라고 이 난리란 말입니까. 정 뭐하면, 진흥왕의 유서 같은 건 백개라도 다시 만들면 그만입니다. 그게 양심에 걸리면, '진흥왕의 손자이며 신라의 왕인 진평왕'의 이름으로 다시 '반란을 일으킨 신라의 적 미실을 처단하라'는 조칙을 내리면 어떻습니까. '미실은 진흥왕의 조칙으로만 죽일 수 있다'는 무슨 특별법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이런 식이기 때문에, 현재 '선덕여왕'이 비틀거리는 이유는 역사 왜곡이 아니라 제작진의 억지 때문이라는 겁니다. 하긴, 까짓 거 어떻습니까. 오늘 밤 미실의 장렬한 최후를 지켜보면서 그냥 감동 한 번 해 주면 그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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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지붕뚫고 하이킥'엔 좀 안타까운 점이 있습니다. 직장인들에게는 꽤나 이른 시간(오후 7시45분)에 방송되기 때문에 매일 챙겨 보기가 힘들다는 점입니다. 더구나 재방송도 너무 찔끔찔끔입니다.

성형수술로 신분을 바꾼 주인공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어린이들의 나이로 볼 때 치열교정 정도는 나올 것 같기도 합니다 - 물론 점으로 정체를 바꾼 해리는 나왔죠^) '하이킥'은 재미있습니다. 9월 정도까지만 해도 '하이킥'이라고 하면 '거침없이 하이킥'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제는 '지붕뚫고 하이킥'이 '거침없이 하이킥'의 추억을 충분히 대체하고 있는 듯 합니다.

과연 이 두 편의 '하이킥'의 차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거침없이 하이킥'도 너무나 재미있는 시트콤이었지만, '지붕뚫고 하이킥'은 전편과는 달리 메시지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웃음 속에 슬쩍 묻혀 있지만, 아마 많은 분들이 눈치채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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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요즘은 시트콤의 축이 지훈(최다니엘)과 정음(황정음), 준혁(윤시윤)과 세경(신세경)을 둘러싼 4각 관계 쪽으로 옮아 왔지만 이 시트콤이 초반에 자리를 잡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신애(서신애)와 해리(진지희)의 관계입니다.

모든 게 신기하고 탐나는 신애와 100을 갖고 있으면서도 1을 내주기 싫어하는 욕심 많은 해리의 다툼은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신애를 동정하게 하고, 눈물과 웃음을 주곤 했습니다. 특히나 어린이답지 않게 어딘가 그늘이 져 있는 신애의 표정이 어른 시청자들에게는 직격탄을 날리기에 충분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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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의도는 분명합니다. 김병욱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서, [순박한 시골 자매의 눈을 통해 현대의 도시인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는지를 조명해보고 그를 통해 행복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하겠다]는 의도를 내비쳤고, 충분히 그 의도를 관철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뭐 보탤 것도 없이 원래 포함돼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자녀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태도를 정면으로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귀한 자녀'에 대한 입장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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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의 입장에서 볼 때, 신애와 해리의 관계에서 가장 분통터지는 일은 아무도 해리를 적극적으로 제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특히 부모가 그렇습니다. 정보석이든 오현경이든, 부모 중 어느 한 쪽도 해리의 만행(?)에 정면 대응하지 않습니다. 그저 느긋하게 '...하지 마라...', '엄마가 그러지 말랬지' 하는 정도로만 막을 뿐입니다. 가끔씩 이순재가 약간 강경한 태도를 취하곤 하지만 그도 잠시뿐입니다.

즉 해리가 신애에게 가하는 만행들은 모두 어른들의 방조 속에서 이뤄집니다. 이 부분에 대한 시청자들의 분노도 꽤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나마 해리에게 제재를 가하는 사람은 삼촌 지훈과 오빠 준혁 정도입니다. 해리가 뭔가 위해를 가하려 하면 지훈이 아예 해리를 번쩍 들어 다른 데로 옮겨 놓거나 준혁이 쥐어박는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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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준혁에게는 해리를 강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원죄(?)가 있습니다. 해리가 세경에게 "야 이 그지 똥꼬야"하고 부를 때 준혁은 화를 내며 "왜 그런 식으로 부르느냐"고 야단을 치지만 해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준혁도 과외언니한테 야야 하면서 뭘 그러느냐고 대응하죠.

이건 사실은 준혁도 성장 과정이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준혁도 예의범절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교육 과정에서 그리 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거의 20년 전부터 수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핵가족화, 한자녀 가정의 보편화, '내 아이는 특별해' 라는 식의 전 사회적인 마케팅 등등이 복합적인 원인일 겁니다. 즉 생활 형편은 나아지는 반면 투자해야 할 자녀의 수는 줄어든 결과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왕자님과 공주님들이 대량으로 육성된 것이죠.

학교 생활을 통해 이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교사들도 '야단치는' 역할을 가정으로 떠미는 형편입니다. 안 그런 교사들도 있겠지만 제가 아는 교사들은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보다 엄마를 100배 쯤 더 무서워한다"며 학교 생활을 통한 교정의 가능성에 상당히 비관적이더군요. 그런데 그 '엄마'가 야단을 치는 주제는 '왜 공부 안 하니' 뿐이라면 아이들의 인성에 대한 훈련은 과연 누가 맡아야 할지 의문입니다.

(네. 이런 얘기를 할 때마다 '이젠 정말 빼도박도 못하는 영감태기가 되어 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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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안 그런 아이도, 안 그런 엄마도, 안 그런 선생님들도 많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 일각에는 이런 식으로 '아무도 야단치지 않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꾸밀 사회가 과연 어떤 것이 될까에 대한 우려가 싹트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이킥'의 해리는 그런 정경을 단적으로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나마 '하이킥' 속 해리는 세경과 신애 자매의 등장에 따라 어느 정도 교정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는게 위안일 듯 합니다. 이미 해리는 동화책 사건으로 신애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했고, '애기똥과 아빠똥'을 통해 도움을 받기도 했죠.

과연 해리가 이 시트콤이 끝날 때까지 신애에게 지금 같은 입장을 취할지(물론 김병욱 감독의 스타일로 볼 때 해리가 쉽게 개과천선(?)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만^)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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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2주간에 걸친 이승기의 '비어 캔 치킨' 고집을 보면서 '귀한 아들'과 '아무도 야단치지 못하는 아이'에 대한 생각이 이쪽에도 적용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습니다. (물론 이건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황현희와 안영미가 아이들 그룹에 대한 악담을 할 때마다 종이컵 든 손을 떠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수도 있을 겁니다.^^)

P.S.2. '하이킥' 최고의 수혜자는 왠지 최다니엘이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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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드라마가 이렇게 야매로 성형수술한 콧날처럼 무너져 내릴 수도 있군요. 아무개 사극처럼 초반에 제작비를 다 써버리는 바람에 후반에는 종이에 돌을 그려 붙인 성이 나오거나, 30만 대군이 나와야 할 장면에 30명 대군이 소리치며 개싸움을 하던 모 드라마도 아닙니다. '선덕여왕'입니다.

초기의 '선덕여왕'은 미실이라는 새롭고도 강력한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해 낸 고현정이라는 배우의 열연과 함께 2009년 한국 드라마의 빛으로 떠올랐습니다. 명대사와 명장면이 이어졌고, 몇몇 캐릭터가 좀 삐끗했지만 다양한 화랑 군상들이 나타나면서 위기를 탈출해냈습니다.

하지만 '미실의 난' 이후로 드라마는 총체적 난국입니다. 무슨 얘기를 감춰놓고 있는 것인지, 당초 48회에서 최후를 맞았어야 할 미실이 50회까지 살아가게 되는 바람에 줄거리를 질질 끌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인지, 스토리도 요령부득이고 등장인물들 중 납득이 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 덕만공주는 과연 지금 몇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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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미실의 난'이라는 것이 역사에 기록된 바 없는 사건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선덕여왕' 제작진이 생각하는 '미실의 난'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칠숙-석품의 난'을 모태로 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극중의 '현재'는 서기 631년이어야 합니다. 바로 진평왕 53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드라마 속의 온갖 정황이 모두 엉망으로 꼬여 시간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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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몇가지 사건들을 실제 시간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579년 진평왕 즉위

595년(진평왕 17년) 김유신 출생

604년(진평왕 26년) 김춘추 출생

611년(진평왕 33년) 진평왕, 수나라에 재차 원병 요청

618년(진평왕 40년) 당 건국

621년(진평왕 43년) 당에 사신 보낸 첫 기록

626년(진평왕 48년) 당 태종 이세민 즉위

631년(진평왕 53년) 칠숙,석품의 난

632년(진평왕 54년) 진평왕 사망, 선덕여왕 즉위


일단 월요일 방송에서 미생은 당나라 사신이 온 데 대해 "당나라는 건국한지 10년도 안 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의 건국은 618년입니다. 그럼 이 해로부터 13년 전이군요. 뭐 이 정도는 미생의 착각이라고 치고 넘어갑시다. (앞으로 나올 일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 '선덕여왕'에 따르면 춘추는 신라로 귀환할 때 수나라로부터 귀환했습니다. 최대한 늦게 잡아 춘추가 618년에 망하기 직전의 수나라를 멋지게 탈출한 것으로 칩시다. 그렇다 해도 춘추가 귀국한 때부터 현재까지는 역시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신기하군요. 드라마상으로는 몇달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여기에 소화는 죽어가면서 칠숙에게 "30년 동안 돌고 돌아 결국 우리의 운명이..."라며 쌍팔년도 영화에 자주 나오던 "할말 다 하고 죽기" 신공을 펼칩니다. 소화가 칠숙의 추적을 받은 것은 바로 덕만과 천명이 태어나던 그날 밤 부터입니다.

이걸 보면 덕만은 30세 정도란 얘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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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덕여왕' 제작진은 덕만과 천명의 출생을 진평왕 원년으로 잡아 놓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깁니다. 마야부인이 임신한 상태에서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죠.

여기서 집필진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진평왕의 출생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서기 579년 왕위에 올라 632년 숨을 거뒀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만으로 53년, 햇수로 54년을 재위한 초장수 왕이었던 것이죠.

이건 확실한 모순입니다. 소화의 말을 따라 소화와 칠숙이 쫓고 쫓긴지 30년 정도 되는 해라면 '현재'는 진평왕 31년 전후, 서기 609년의 언저리여야 합니다. 그러자니 여러가지로 말이 안 됩니다. 우선 이 시기는 아직도 중국을 수나라가 다스리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춘추공은 604년생이므로 젖먹이는 아니지만 세발자전거나 타고 다닐 나이입니다. 595년생인 유신낭 역시 14세, 지금처럼 분전하기에는 좀 어린 나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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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칠숙의 난'에 초점을 맞춰 다시 631년으로 돌아가 보면 이것 역시 골치아파집니다. 춘추는 27세, 좀 징그럽긴 하지만 엄청난 동안이라고 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나이입니다. 칠숙과 소화가 처음 쫓고 쫓길 때 스무살 안팎이었다고 하더라도 70세가 넘은 노인들이어야 합니다. 워낙 고령이라서 "쫓고 쫓긴지 54년"이라고 해야 할 것을 착각해 "30년"이라고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그러고 나면 덕만은 몇살일까요. 이미 작가들이 '덕만의 출생=진평왕이 즉위한 그 해'라고 못박아 놓았기 때문에, 631년 칠숙의 난 현재 덕만공주의 나이는 53-54세 입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미실이 늙지 않는다고 무슨 신공을 익힌 게 아니냐고 말하지만, 이쪽도 만만찮습니다. 50대의 덕만이 36세의 유신과 함께 도망치자며 징징 울어대고, 젊은 화랑들 못잖게 산야를 뛰어다닙니다. 대단한 신공입니다. 역시 미실의 적수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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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소화가 죽어가면서 "쫓고 쫓긴지 30년..."이라고 한 걸 보면 작가들은 시청자들이 그냥 천명(당연히 덕만과 동갑)이 15세 정도에 아들 춘추를 낳고, 그 춘추가 지금 15세 정도가 되었다는 설정을 따라와 주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초반에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마야부인이 쌍둥이를 임신한 걸로 묘사했던 걸 시청자들이 그냥 다 잊어주길 바랐던 것이겠죠. 아니면 아무도 대체 진평왕이 왕위에 몇년이나 있었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말하게 되지만, '선덕여왕' 작가들은 이미 마야부인이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주인공 덕만공주가 선덕여왕이 되기까지는 53년이 걸린다는 것을 슬쩍 잊어버린 듯 합니다. 그리고 칠숙과 석품의 난이 진평왕이 죽기 1년 전에 일어난다는 것 역시 슬쩍 무시하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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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지고 노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퀜틴 타란티노처럼 아예 "자, 한판 놀아 볼까?"하고 시작하고 대체우주를 설정했다면 그건 그냥 그렇게 봐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름 정통 사극을 표방했다면 최소한 인물들의 나이 정도는 맞춰 놓고 극을 구성했어야죠.

당나라 사신에게 당당하게 맞받아치는 미실의 모습을 보고 몇몇 시청자들은 환호할 지 모르지만, 그런 인기전술을 쓰는 사이 드라마 '선덕여왕'의 품질에는 수정하기 힘든 금이 갔습니다. '미실의 난'이 어떻게 마무리될 지 모르지만, 그리고 40%대의 시청률도 그대로 유지되긴 하겠지만, '얼렁뚱땅 사극'이라는 오명은 피하기 힘들 듯 합니다.




P.S. /몰아서/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다' 라는 분들께: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흑백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드라마에는 전적인 창작의 자유가 있고, 다큐에는 사실을 그대로만 전달하는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기계적인 구분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허용되는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죠. 그리고 이 글은 '선덕여왕'이 그 도를 넘어섰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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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2번'이라는 말은 드라마 관계자들이 흔히 쓰는 말입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드라마에서는 남-녀 각 2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것이 기본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가끔 남자 투톱, 여자 투톱의 드라마 같은 변형이 있지만, 현재 만들어지는 드라마의 80% 이상은 이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구도에서 '진짜 주인공'은 각각 '남자1번'과 '여자1번'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남자2번'과 '여자2번'은 주연급이면서 각각 남자1번과 여자1번의 삼각관계 파트너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재벌가의 반항적인 후계자(남자1번)와 가난한 집 출신이지만 당찬 또순이(여자1번)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라면 여자 2번은 역시 유력가의 딸이며 남자1번의 약혼자로, 남자2번은 어린시절부터 여자2번을 지켜봐 온 동네 오빠라는 식으로 구도가 짜여지곤 했죠.

어떤 경우든 '2번이 1번의 영역을 넘볼수는 없다'는 것 역시 드라마 업계의 상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 두 편의 대박 드라마에서 모두 2번이 1번을 누르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도 특이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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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현정의 미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자2번 캐릭터이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당초 미실의 비중이 통상적인 여자2번에 머물러 있었다면 고현정 같은 빅 스타가 캐스팅에 응했을 리도 없죠.

하지만 드라마의 제목이 '악녀 미실'이 아니라 '선덕여왕'인 이상, 어쨌든 이 드라마를 끌고 나갈 책임은 덕만공주-선덕여왕의 몫입니다. 드라마의 전반을 미실이 이끈 것도 사실이지만 전편을 꿰뚫어 볼 때 이 드라마는 누가 봐도 덕만의 드라마입니다. 덕만이란 인물의 일생을 통해 작가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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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은 그 과정에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더욱 선명해지게 하는 역할일 뿐, 그 스스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강렬하고 선명하다 해도 그 선명함은 덕만의 보색처럼 덕만이 어떤 캐릭터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당초의 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덕여왕'은 과연 '선덕여왕'인지, '악녀 미실'인지 보는 사람이 혼동할 때도 있습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연기 역량이 원인입니다. 고현정의 호연 때문에 미실은 잠시라도 2선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제작진도 당초의 의도를 망각(?)하고 미실이 드라마를 이끌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실은 곧 퇴장해야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덕만에게도 기회가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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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드라마의 축은 이병헌-김태희이고, 지금도 제작진은 이 커플을 고수하려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우려대로 이 커플은 제작진이 처음 기대했던 위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이 드라마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것이 선화 역의 김소연입니다. 어찌 보면 그동안 미모나 연기력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받아온 김소연이 이제서야 개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연기력이 뒤지는 김태희가 김소연이 빛을 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물론 김태희가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이 김태희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이긴 합니다. 대본 단계에서 캐릭터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연출진이 김태희의 능력을 온전하게 뽑아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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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똑같은 요소가 김소연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됩니다. 바로 위 사진 같은 부분이 애매하게 배우만 욕먹게 하는 연출의 좋은 예입니다. 김소연이 사격 때에는 개머리판을 어깨에 밀착해야 한다는 걸-무슨 말인지 모르는 분은 옆의 남자 배우와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어떻게 알겠습니까.

게다가 김태희 캐릭터 못잖게 김소연의 캐릭터도 보다 보면 어지럽습니다. 갑자기 이병헌에게 사로잡혀 이병헌을 좋아하게된 이후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연기력, 혹은 배우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은 이런 부분입니다. 좋은 배우에게는 아무리 얼토당토 않은 캐릭터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어쩐지 그럴듯 한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힘이 있는 법입니다. 반면 애당초 약점이 있는 캐릭터라면, 신통찮은 배우일수록 그 약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네. 보는 이로 하여금 '대체 쟤 저기서 뭐하니?'라는 평이 나오게 하는 연기죠.

그런 면에서 김소연은 확실히 이번 '아이리스'에서 전자 쪽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빛이나 숨결, 목소리, 신체의 모든 요소들이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김소연이 아무리 이 드라마에서 여자2번의 역할을 120% 소화한다 해도 결말이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끝나고 다음 작품을 준비할 때에는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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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1번급의 배우인데 2번의 역할을 맡아 1번의 임무를 수행한 고현정과 최근 줄곧 2번의 역할을 맡으며 에너지를 비축하다가 이번에 1번을 압도하는 2번으로 존재감을 부각시킨 김소연의 입장은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한 방에 이 둘을 묶어 얘기하는 건 좀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당겨 봤습니다. 이런 글들이 혹시라도 현재 2번들에게 다소간 밀리고 있는 1번들에게 자극이 되어 불꽃튀는 1번과 2번의 연기 대결이 펼쳐진다면 그건 시청자들에겐 매우 좋은 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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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4회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헝가리 로케이션 장면인 4회에서 정준호가 타고 다니는 차에 눈길이 갔는데, 그게 '먹통차'였던 겁니다. 상표가 있어야 할 자리가 까맣게 비워져 있었죠.

물론 자동차 중에는 특유의 마크가 잘 보이는 차도 있고, 아예 안 보이는 차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한국 방송에서는 간접 광고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제작진은 상표가 노출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차도 상표 없는 차로 분장(?)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한번 보시죠. 어떤 차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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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저 라디에이터 그릴의 한복판에 있는 밥풀같이 생긴 까만 타원형이 바로 상표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인 거죠.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한눈에 알아보셨겠지만 저는 내가 저 차를 어디서 봤더라 잠시 고민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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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로체 이노베이션입니다. 확인을 위해 정면샷 몇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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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관심이 없어 몰랐더니 KIA가 '아이리스'의 공식 스폰서더군요. KIA가 준비하고 있는 세단 K-7도 이 드라마에 나온다고 하는데 벌써 나왔는지, 앞으로 나올 예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차는 이병헌의 차로 등장한다는 보도는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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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7... 어쩐지 로체 이노베이션과 앞얼굴이 상당히 비슷한 느낌을 주는군요. 그랜저 TG와 N 소나타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것이 패밀리 룩인 모양입니다.

문득 오래 전, '올인'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올인'에서 이병헌의 차로 나온 차는 수입차였습니다. 당시 제작진에게 "기왕이면 국산 차를 쓰지 왜 외제차를 썼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이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국내에서 가장 큰 승용차 회사에 협찬 요청을 했답니다. 그런데 대답이 "차량은 제공할 수 있지만 돈은 곤란하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한국 드라마에는 한국 차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왕이면 드라마 만드는데 애국한다고 생각하시고 국산차를 좀 쓰시죠" 하면서 오히려 힐난하는 눈초리더랍니다. 그래서 결국 외제 차를 쓰게 됐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일어났을 일은 뻔합니다. '올인'에 나온 차는 대만에서 일단 대박이 났고,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큰 붐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올인'에 이병헌의 차로 나왔기 때문이었죠. 아마 이런 사실을 알면 그 회사에서 당시 '올인' 측의 협찬 요청을 걷어차 버린 담당자에게 징계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만 해도 '한류'라는 말이 아주 없던 시절도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들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는 '이병헌의 차'라는 이름을 단 저 차가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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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김승우 일행이 타고 다니던 차는 클로즈업이 되지 않던데(당연히 협찬사인 기아 차가 아니어서 그렇겠죠), 이 차도 무슨 차인지 궁금합니다. 그림자만 봐도 무슨 차인지 아시는 고수분들이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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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가 있다면 저 차의 조수석 바로 앞에 HYBRID라는 글자가 박혀 있더라는 것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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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그나자나... 참 아이리스 전반부는, 예상대로이긴 하지만 그 예상보다도 더 너무 뻔하게 진행되는군요. 타로 카드의 복선 하며... 이거야 원. 좀 신선하게 하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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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의 난'. 이번주 방송된 MBC TV '선덕여왕'의 핵심은 미실이 일으킨 정변입니다. 정변의 기본은 누군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세력이 등장했다'고 크게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대의명분과 함께 진짜 거병이 이뤄집니다.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난은 이런 기본 원칙에 아주 충실하게 진행됐습니다. 유신과 알천의 무력 도발이 유도됐고, 이어 석품에 의한 세종 습격 자작극으로 혼란을 유발한 뒤 수도 서라벌 인근의 정규군이 수도로 진격, 일시적인 계엄 상태를 만드는 것 하나 하나가 쿠데타의 기본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불만이 있다면 사건을 보는 눈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는 것 정도.

그런데 미실의 난이 정말 일어났다 해도, 금세 정리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지금 시작은 대단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지만, 이 난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게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난 이후에도 미실과 그 측근 인물들은 멀쩡히 살아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고, 덕만공주와 그 측근인 유신이나 알천, 비담 가운데서도 이 난으로 다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누가 이 난의 희생양이 될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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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번 포스팅에서는 '화랑세기'의 미실 관련 기록들을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나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과 최대한 맞춰 보는 걸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작가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미실의 난'을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칠숙/석품의 난'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반란이든 이 반란은 실패합니다. 실제 역사가 이 반란을 진압하고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이미 결과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반란을 미실이 주도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미실과 미실의 남편인 세종, 그 아들인 하종, 정부인 설원, 역시 그 아들인 보종, 미실의 동생 미생 등은 모두 참살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찬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세종이 난의 중심에 있었다면 이건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거대 사건입니다.

하지만 세종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은 단 한번, 그것도 진지왕 2년의 무훈에 대한 기록입니다.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주군을 침범하자, 이찬 세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였다. 세종은 일선 북쪽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3천7백 명을 목베었다. 내리서성을 쌓았다. (冬十月, 百濟侵西邊州郡, 命伊찬世宗出師, 擊破之於一善北, 斬獲三千七百級. 築內利西城)

그리고 아무런 기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화랑세기'에도 미실이 반란에 관여했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죠. 미실과 설원은 잘 늙어 죽었고, 이들의 아들 보종 또한 유신의 뒤를 이어 풍월주에 오를 몸입니다.

한마디로 '난은 무슨 난?'입니다. 반란의 주모자들이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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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역사의 기록이 지목하고 있는 반란의 주범은 칠숙과 석품입니다. 이미 이 부분은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삼국사기 원문을 한번 확인합니다.

여름 5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칠숙을 잡아 동쪽 시장에서 참수하고, 구족을 처형하였다. 아찬 석품은 백제 국경까지 도망하였으나, 처자가 보고 싶어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왔다. 그는 그 곳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나 그의 헤어진 옷과 바꾸어 입은채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돌아왔으나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夏五月, 伊찬柒宿與阿찬石品謀叛, 王覺之, 捕捉柒宿, 斬之東市, 幷夷九族. 阿찬石品亡至百濟國境, 思見妻子, 晝伏夜行, 還至叢山, 見一樵夫, 脫衣換樵夫衣, 衣之, 負薪潛至於家, 被捉伏刑)

석품의 말로가 참 불쌍합니다. 아무튼 반란은 미실이 일으켰는데 칠숙과 석품은 척살당하지만 미실과 주변 인물들은 멀쩡하다.... 이건 참 불공평하기도 하지만, 과연 작가들이 어떻게 드라마를 풀어 나갈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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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덕만공주와 비담의 활약으로 미실은 큰 무력 충돌 없이 스스로 병력을 거둘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애당초 미실이 난을 일으킨 이유가 비담의 장래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비담의 요청에 따라 난을 거두는 것도 가능할 듯 합니다. 애당초 '미실이 직접 왕이 된다'는 황당무계한 목표는 무시해도 좋았을 듯 합니다.

그러고 나면 덕만공주와 미실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겠죠. (혹은 아래 댓글로 다른 분이 지적하셨듯 진주군 사령관 주진공과 덕만 사이에 먼저 합의가 타결될 수도 있겠습니다) 미실이 덕만에게 강요하려 했던 것과 반대로, 미실과 미실의 측근들이 모든 정무에서 손을 떼고 재야에 칩거하는 대신 난의 주모자로서의 처벌은 모면하게 해 주는 선에서 대략 대화가 끝날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정변이 있었고 군이 출동했는데 그냥 덮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기선 누군가 희생양이 되어야겠죠. 그리고 칠숙과 석품이 그 굴레를 뒤집어 쓰게 될 겁니다. (아마 드라마 속 칠숙의 충성심으로 봐선 스스로 죄를 자처할 수도 있을 겁니다. )

이렇게 해서 비담과 유신, 춘추는 덕만공주를 옹립하는 세 축이 되고, 선덕여왕의 즉위에는 걸림돌이 사라집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 유신과 춘추가 한 편이 되어 비담을 배척하고, 결국 궁지에 몰린 비담이 난을 일으키는 지경에 다다르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입니다. 당장은 가장 확실한 같은 편일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지난번에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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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역사를 바꾸지 않는 한 필연입니다. 다만 남은 궁금증은 대체 덕만공주가 어떤 제안으로 미실로 하여금 뽑은 칼을 거두고 반란을 무마시킬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어떤 명분을 대든 참 황당무계한 진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담과 덕만의 혼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만, 그 정도로 뽑은 칼을 스스로 거두고 정국에서 물러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21세기도 아닌 7세기에 말입니다. 고작 몇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정변을 마무리한다는 건 그만큼 정변이 신속하고 별 인명 피해 없이 마무리됐을 때에나 가능한 일인데, 과연 무엇이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부디 작가진이 지혜를 발휘해서 보다 설득력있는 스토리를 보여주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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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에서 가장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이병헌에서 빅뱅의 탑에 이르는 엄청난 캐스팅입니다. 정준호 김승우 김소연 등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 충분히 주연을 맡을 배우들이 모두 조연급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기만 합니다.

'이죽사'의 김규태PD와 '리베라메'의 양윤호 감독이 공동연출을 맡고 있긴 하지만 이런 캐스팅은 아무래도 정태원 태원엔터테인먼트 대표와 전면에서는 빠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 작품을 컨트롤한 최완규 작가(초기에는 작가명이 드러나 있었지만 어느새 크레딧에는 '극본-김현준 조규원 김재은'이라는 표기로 바뀌어 있습니다)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완규-이병헌이라는 라인이 아무래도 '올인'의 향기를 다시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아이리스' 1부는 그동안 흘러나왔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은 이런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고 대놓고 자랑하는 화력시범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전체적으로 흠잡을데가 별로 없는 드라마에서도 위험 요소 하나가 보입니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맨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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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의 내용을 살짝 요약하자면 -

헝가리에 와 있는 NSS 소속 요원 현준(이병헌)은 부국장(김영철)으로부터 북한의 최고위 요인을 저격하라는 임무를 받습니다. 현준은 임무를 수행하지만 북한의 엘리트 요원이 철영(김승우)과 선화(김소연)의 추격을 받아 총상을 입습니다. 하지만 부국장은 현준의 구조 요청에 굳은 얼굴로 전화를 끊습니다.

이어지는 과거 회상. 707특임대 소속인 현준(이병헌)은 대학에 나가 공부를 하라는 기이한 특명(?)을 받고 학교 강의실에서 여학생 승희(김태희)를 만나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한편 현준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특임대의 에이스 자리를 다투는 사우(정준호)는 선배 상현(윤제문)과의 술자리에서 승희를 만나 역시 반해버립니다.

그리고 며칠 뒤, 현준과 사우는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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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모를수록 감상에 도움이 되겠지만 눈치 빠른 시청자들이라면 이후의 진행이 대략 짐작될 겁니다. 사전에 알 수 있는 줄거리는 홈페이지상에도 나와 있죠. 검은 양복들에게 끌려간 현준과 사우는 고문 테스트를 받고 부국장 김영철이 이끄는 비밀 기구의 요원이 됩니다. 신분을 가장하고 두 사람을 각각 만난 승희는 그 기구의 선배 요원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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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1회에서 보여준 물량과 빠른 편집은 시청자들이 갖고 있던 '드라마'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만 합니다. 두 연출자의 역할분담은 대략 스토리 라인은 김규태 PD가, 외부 촬영과 스펙터클은 주로 양윤호 감독의 몫으로 나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양윤호 감독의 작품들이 극악의 스토리라인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에는 그런 부담을 씻고 자신의 장기인 '볼거리'에 집중한 것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수없이 많은 외화들을 통해 저격 장면들을 보아 온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너무 간단하게 피격 포인트를 파악하고 너무 간단하게 저격 장소로 이동하며, 역시 너무 간단하게 현준의 은신처를 알아내 버리는 진행이 좀 불만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진행은 '총감독 정태원'의 스타일이라 매우 익숙합니다.

(흔히 정태원 대표는 작가, 감독, 제작사 대표를 모두 겸임해 '정태원 총감독'이라는 우스개로 불리곤 합니다. 그리고 이분의 스타일은 '귀찮고 머리 써야 하는 부분은 모두 삭제'라는 쪽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쨌든 이분이 아니면 '아이리스'같은 대작은 나올 수 없었다는 데 모든 사람이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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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익숙한 장면. 사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장면은 '앞으로 두 사람이 친구가 된다'는 걸 예고하는 장면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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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파격적인 스타 파워와 물량의 결합은 '아이리스' 1회에서 좋은 효과를 냈습니다. 대학 생활 장면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었겠지만 1회의 하이라이트인 고문 장면에서 이병헌의 힘은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화면을 꽉 채워버리는 압도적인 연기력은 시청자들을 충분히 납득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죠.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쉬리'와 '올인'의 유산들입니다. 여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국가로부터 오해받는 요원'이라는 키퍼 서덜랜드의 '24'가 오무라이스의 계란처럼 덮입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은 아닙니다. 일찌기 '쉬리'를 만든 강제규 감독 팀의 구호가 '한국에서도 블럭버스터를 만들 수 있다'였다면 '아이리스' 제작진의 정서는 '미드에서 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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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드라마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여주인공입니다. 김태희는 이미 1회에서도 몇차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지나치더군요. 어떤 연기를 할 때에도 변화 없는 표정을 보면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비밀 요원의 역할에 적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1회에서도 이렇게 불안요소를 드러낸다면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순간 '메롱드라마'라고 쓸 뻔 했습니다)가 진행되어야 할 때에는 진짜 심각한 위기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병헌은 지금까지 혼자 연기할 때는 물론 상대 여배우로부터 멜로드라마 연기를 이끌어내는 데에 발군의 솜씨를 보여왔습니다. 반면 김태희는 상대역이 누구든 간에 아무런 변화 없는 연기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조현재-김래원-정우성은 물론이고 설경구조차 끌어내지 못했던 김태희의 '연기'를 과연 이병헌은 끌어낼 수 있을까요?

아이리스는 첫회만으로도, 어쩌면 방송 전부터 어느 정도의 성공은 보장된 작품이란 게 분명해졌습니다. 이 점을 인정하고 나면, 바로 이 '위험 요소'의 처리 결과가 '아이리스'가 한국 드라마사에 남는 대작이 될지, 아니면 수많은 성공작 중 하나가 될 지를 결정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까지 가능성은 정말 반반이군요. 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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