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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큰'은 그저 그런 액션 영화들로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할리우드에서 한발 앞선 잔혹성으로 차별화에 성공한 사례로 꼽힙니다. 리암 니슨이 연기한 브라이언 밀스는 일반적인 할리우드 액션 스타들에 비해 생명 존중 사상이 심하게 부족한 캐릭터였죠.

 

밀스는 모든 도구를 사용해 확실하게 악당들을 해치워주는 확실한 실력과, 절대 주저하지 않는 결단력을 겸비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습니다. 이런 덕분에 2500만달러 제작비의 저예산(?) 영화였던 '테이큰'은 미국에서만 1억 달러 넘는 흥행 성공을 거뒀습니다. 덕분에 '테이큰2'가 만들어지게 됐죠.

 

할리우드 액션 영화를 보다 보면 다음과 같은 시퀀스와 쉽게 마주치게 됩니다. 주인공의 조력자가 범인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으면 주인공은 "쏘면 안돼! 그놈을 데려다 정당한 재판을 받게 한 뒤에 감옥에 쳐 넣어 죄값을 치르게 하자구!"라고 주절주절 떠들고, '우리편'이 주인공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이, 악당은 벌떡 일어나 기관총으로 '우리편'의 몸에 수십개의 구멍을 내 놓는 뭐 이런 진행 말입니다. 하지만 '테이큰' 시리즈라면 이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죠.

 

'테이큰'이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둔 것은 미국 관객들도 판에 박힌 '소심한 주인공'에는 질려 있었다는 것을 알려 주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테이큰2'는 1편으로부터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동유럽의 어느 작은 마을, 1편에서 밀스(리암 니슨)에게 죽음을 당한 인신매매 조직원들의 장례가 치러지고 있습니다. 마을의 좌장인 무라드(라데 세르베지야)는 밀스를 찾아 복수하겠다고 맹세합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뒤 밀스는 딸 킴(매기 그레이스)의 안전에 더욱 민감해지고, 전처 레니(팸키 젠슨)는 남편과 문제가 생깁니다. 밀스는 모녀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이 이스탄불에서 일을 마치면 함께 휴가를 즐기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세 가족(?)은 밀스를 잡기 위해 이스탄불로 찾아온 무라드 일파에 의해 안전을 위협받게 됩니다.

 

 

 

 

감독은 1편의 피에르 모렐에서 '트랜스포터3'의 올리비에 메가톤(물론 예명입니다. 그런데 설마 메가톤이라는 성이 실제로 있을까 하는 의문이...)으로 바뀌었지만 그로 인한 위화감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1편의 주역들이 그대로 다시 등장하는데다, 왕년의 명감독 뤽 베송이 제작자 겸 시나리오 라이터로 시리즈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테이큰2'의 긴장감은 1편에 비해 심하게 떨어집니다. 니슨이 연기하는 밀스는 여전히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양민(?)들을 학살하는데, 1편에 비해 악당들이 뭔가 강화됐다는 느낌을 주는 영화적 장치가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아무도 밀스 가족의 안전한 구출을 의심하지 않는 가운데, 크로아티아 배우 라데 세르베지야(Rade Serbedzija)는 훌륭한 악역을 보여주지만 이미 주인공 니슨부터 맥이 풀린 느낌을 주는 만큼, 그의 힘으로 영화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습니다.

 

뭐 영화가 잘 되고 못 되고에 대해 긴 이야기는 필요 없을 듯 합니다. '테이큰'을 보신 분에겐 그냥 또 다른 '테이큰'일 뿐이고, 자극의 강도는 확실히 약하다는 정도면 충분할 겁니다.

 

이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이라면 여기까지. 이후부터는 이 영화에 나타난 '미국 시민의 생명의 가치'에 대해 얘기하려 합니다. 스포일러(라는 것이 과연 이 영화에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가 싫은 분들은 여기서 아래로 내려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목의 '미국 시민'이라는 말은 American Citizen의 번역입니다. 모든 미국인이 city에 사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시민'이라고 번역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지만 '시민권' 등의 말에서 관용적으로 쓰이는 표현이므로 그냥 넘어가기로 합니다.)

 

 

 

 

 

알란 파커 감독의 1978년작 '미드나잇 익스프레스'는 터키에서 마약 밀매 관련 협의로 체포된 미국 청년이 터키의 법에 따라 형무소에 수감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은 말도 안 되는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터키 사람들이 보기에 이 영화는 편견의 덩어리입니다.

 

'터키에서 죄를 지으면 터키 사법제도에 의해 처벌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정당한 질문 앞에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은 매우 뻔뻔스럽습니다.  "아니 우리 미국 시티즌을 너희 나라의 법 따위로 구속한다고? 심지어 너희 나라의 감옥 따위에 가둔단 말이야?" 라고 대놓고 주장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뭐 이런 생각은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기엔 좀 과도한 판타지도 등장합니다. 세계 어디에 있건 미국 시민은 미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미국 정부가 그를 위해 하는 행위는 다소 거칠어 보여도 일단 정당하다는 식의 미화 말입니다.

 

앙트완 후쿠아의 '태양의 눈물'에서는 미국 정부가 미국인 여성 모니카 벨루치(그것도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것도 아니고 미국 남자와 결혼해 미국 시민이 된 여자)를 구출하기 위해 브루스 윌리스가 이끄는 특공대를 파견합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유발된 판타지라기엔 좀 너무 심합니다. 당연히 이 특공대는 아메리칸 시티즌 구출을 위해 현지인들을 거리낌없이 살해합니다. (뭐 정당방위처럼 보이긴 하죠.^^)

 

 

 

아마도 이같은 성향의 최고봉은 마이클 베이의 '나쁜 녀석들 2'가 아닐까 합니다. 미국 마이애미 경찰의 특수기동대는 아예 대규모 인원이 무기와 장비를 갖고 쿠바에 침투해 작전을 펼칩니다.

 

이게 독립국가인 쿠바의 주권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고, 말하자면 전쟁 행위라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아주 조용히 작전을 치르고 무사히 빠져나왔다면 또 모를까, 백주에 살상행위(물론, 대상은 끔찍한 악당들이죠)를 실컷 저지른 다음, 쿠바 영토 끝에 있는 미국령 관타나모로 탈출만 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테이큰'에서도 전직 첩보원 밀스는 프랑스의 사법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프랑스 경찰의 친구(?)는 이런 그의 행동을 저지하려고도 하지만 사실은 그의 행동에 다른 동기가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영화 속에서 무마됩니다.

 

하지만 '테이큰2'에서는 도를 넘습니다. 밀스는 터키 경찰을 살해하고(물론 그 경찰이 터키 폭력조직과 내통한다는 설정이지만, 밀스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지 그가 자신에게 총을 겨눈다는 이유로 사살합니다), 그로 인한 터키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시내를 다 뒤집어놓는 자동차 경주 끝에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합니다.

 

심지어 그러고 난 바로 다음날, 밀스는 총기까지 휴대하고 다시 이스탄불 시내를 휘젓습니다. 네. 전처가 악당들의 손아귀에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라는 건 관객들이 잘 알고 있지만 남의 나라에서 이건 좀 너무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어처구니없는 영화 속 이야기지만, 한국 해경 선박을 들이받은 중국 어선의 어부들을 별 책임도 묻지 않고 풀어주는 한국 경찰의 처지를 보거나, 심지어 한국 해경을 살해한 중국 어부들을 자기네 나라로 돌려보내라고 주장하는 일부 중국내 세력들의 시위를 보고 있으면, '테이큰' 시리즈 속의 이야기들이 반드시 허무맹랑한 얘기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는 불길한 느낌도 듭니다.

 

 

 

 

P.S. 밀스는 폭력과 피가 피를 낳는 복수의 고리를 끊으려 제의를 하지만 결국 그 제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밀스는 결국 다시 폭력을 행사하죠. 이게 만약 미국과 테러리즘에 대한 거대한 비유라면, 이런 논리는 9.11 전에나 통했을 법한 것입니다. 지금은 미국 본토도 안전지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테이큰2'에선 밀스 가족이 미국에서 행복한 일상을 찾지만, 만약 '테이큰3'가 만들어진다면, 그건 LA 시내가 생지옥이 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총지휘하고 있는 것이 프랑스인 뤽 베송이라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혹시 '테이큰' 시리즈는 은근히 미국민에게는 반성을, 비 미국인들에게는 반미감정을 촉진하려는 프랑스제 프로파간다였던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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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가 흥행에 가속을 붙이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추석 연휴도 '광해'의 차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죠.

 

'광해'는 역사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역사에 대한 상상력에서 발생한 픽션이죠. '바람의 화원'이란 드라마에서 화가 신윤복이 '혹시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상상에서부터 이야기를 끌어나갔고, '공주의 남자'에서 김종서의 아들과 세조의 딸이 연인 사이였다면 하는 상상을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광해군과 쌍둥이처럼 닮은 남자가 있었는지 말았는지, 지금으로선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이 정도는 당연히 이해하고 계시겠지만 그 밖의 이야기들, 영화 '광해'가 다루고 있는 광해군 시대의 여러가지 모습들 중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는 아니겠지만 가끔씩 영화를 역사 교과서로 생각하고 '아~~ 정말 그랬었구나. 난 몰랐네'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위한 선 긋기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분명히 말해 둘 것은, 이 글은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작품성과는 아무 상관 없는 글이라는 점입니다. '광해'는 매우 잘 만들어진 오락 영화고, 영화는 본래 역사 교과서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영화를 보면서 '실제로도 저랬나?' 라든가, '저건 실제론 어땠지?'라는 궁금증을 느낀 분들을 위한 글입니다.

 

그냥 리뷰가 필요하신 분은 이쪽:

'이병헌, 사실은 1인3역이었다. http://fivecard.joins.com/1050 '

 

사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지 않은 분이 이 글을 읽으면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당연히, 아주 당연히 이 글은 영화의 결말을 거론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미 영화를 보신 분이나, '나는 결말을 알고 가야 영화가 더 잘 들어온다(네. 이런 분 분명히 있습니다)'는 분들만 이 글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서 스포일러당했네 어쩌네 하는 분들이 없으셨으면 합니다.

 

 

 

 

1. 광해군 8년, 광해는 위기였나?

 

사실 광해군은 즉위 내내 위기였다고 말해도 좋을, 매우 불안한 권력 위에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중 이미 아버지 선조를 대신해 국정을 맡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보였지만, 선조는 뒤늦게 정궁에서 낳은 아들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 했습니다.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왜 형 임해군이 아닌 둘째 광해군이냐는 명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고, 결국 형 임해군의 의문사에 이어 즉위 6년차에는 어린 동생 영창대군을 귀양지에서 죽게 하는 데 이릅니다.

 

이런 상황이니 언제 반대파가 들고 일어나든, 누군가 수라에 독을 타든 그리 놀라울게 없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그런 상황이고 보면, 광해군이 '나와 똑같은 가짜를 써서 적들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닐 듯 합니다. 이 대목에서 '광해'의 설정은 상당히 그럴싸합니다.

 

여기서 한번 광해군 관련 연보를 짚고 넘어갑니다.


1569 허균 탄생
1575 광해 출생

1576 중전 유씨 탄생

1592 임진왜란
1600 인목대비, 19세 나이로 51세 선조와 혼인
1606 영창 출생
1608 즉위, 대동법 실시
1613 5년 칠서지옥, 영창대군 서인
1614 6년 영창 살해
1616 8년. 2. 28 "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에 내지 말라"
1618 10년 강홍립 파병, 인목대비 서궁유폐, 허균 역모로 능지처참

1623 15년 인조반정. 광해군 폐위

1641 광해군 사망

 

 

 

2. 중전 유씨는 한효주의 느낌이 났을까?

 

사실 사극에 나오는 중전마마들은 거의 한결같이 우아하고 기품있는 미인들인데 과연 모든 중전마마들이 그랬을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때 본 사람이 지금 있을 수 없으니 이건 뭐 하나마나한 얘기.

 

그런데 사실 나이 부분은 좀 걸립니다. 왕비 유씨는 1576년생으로 광해군 보다 한살 아래. 이 말은 문제의 광해군 8년인 1616년에 유씨가 만 40세라는 뜻이 됩니다. 물론 하선도 실제 광해군과 비슷한 또래였긴 했겠지만 17세기의 40세는 지금의 40세와 상당히 다른 느낌이죠. 최소한 한효주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이 부분을 아래 댓글 지적을 받아 수정했습니다.;; 이런 기초적인게 틀리면 안되는데...;;)

 

그리고 실제 왕비 유씨는 柳씨지만 영화 속의 유씨는 兪씨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왜 굳이 성의 한자를 바꿨는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아울러 영화 속 중전의 오빠는 긍정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만, 실제 중전 유씨의 오빠는 광해군 때의 권신 유희분입니다.)

 

 

 

 

3. 허균은 도승지가 아니었다?

 

영화 속 허균은 도승지로 광해군의 최측근 역할을 하지만 사실 허균은 도승지라는 벼슬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한때 좌승지로 임금의 비서 역할을 한 적은 있죠.

 

하지만 역시 1616년의 허균은 종계변무의 마무리를 위해 명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이 공로를 인정받아 형조판서-좌참찬으로 출세일로를 걷습니다.

 

물론 판서는 정2품으로 정3품의 도승지보다 높은 자리지만, 도승지는 왕을 측근에서 보좌한다는 특별한 역할 때문에 품계에 관계없이 요직으로 여겨졌습니다. 정작 광해군 시대에 도승지 자리를 가장 오래 유지한 사람은 이덕형입니다. 바로 '오성과 한음'으로 잘 알려진 그분이죠. 이덕형은 허균보다 8년이나 연상이지만 광해군이 밀려나는 그날까지도 도승지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오류를 범했습니다. 광해군 때 오래 도승지 자리를 유지한 사람은 한음 이덕형(李德馨 1561~1613)이 아니라 또 다른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두 '이덕형'이 활동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아래 댓글 지적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되면 이덕형은 허균보다 8년이 아닌 3년 연상이 됩니다.]

 

아무튼 허균이 1616~1617년에 걸쳐 광해군의 총신이었던 것은 분명하니 뭐 벼슬이 그리 중요할까 싶기도 합니다.

 

 

 

4. 서인 정권 속의 외로운 왕?

 

'광해'에는 하선이 백관들과 마주해 명에 보내는 공물 등을 논하며 "그대들같은 서인이 아니라는 이유로!"라고 질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광해'와 현실이 가장 크게 빗나가는 부분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그 대신들은 대부분 서인이 아닌 북인의 일부, 대북파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권을 좌우하던 당은 바로 광해군을 옹립한 세력으로,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복이었습니다. 서인은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세력 들 중 중앙 고위직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대부분 지방의 부사, 부윤 급 정도였습니다.

 

물론 광해군이 매사에 대북 일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광해'는 '보수파=서인=친명 세력=수구적=주자학 교조적'이라는 국사교과서의 상식에 너무 매달린 나머지, 광해군도 서인 대신들 속에 파묻힌 것으로 오도하고 있습니다. '광해'와 '영원한 제국'을 혼동할 정도로 말입니다.^^

 

 

 

 

5. 광해군은 반명(反明)적이었나

 

사실 광해군의 정책은 똑부러지게 '반명'이라든가 '친청'이라고 규정하기 힘듭니다. 당시 조선 사대부의 여론은 확실히 재조지은, 즉 임진왜란 때 원병을 파견해 왜군을 물리쳐 준 명과의 의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대세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감히 광해군도 부정할 수 없는 시대의 대의였죠. 광해군도 후금과의 관계 조정은 어디까지나 '미봉'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1619년의 실록. 명의 요청에 따라 조선군을 이끌고 후금과 전투를 벌인 강홍립이 광해군의 밀명에 따라 전투를 회피하다가 패전 후 항복한 데 대해 신하들이 강홍립의 가족을 벌주자는 건의를 하고, 거기에 광해군이 답변한 내용입니다.

 

 

광해 139권, 11년(1619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4월 8일(신유) 1번째기사
왕이 노추를 잘 미봉하고 명에 대한 의리로 국방의 계책을 삼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신 강홍립 등이 명을 받고 싸움터로 나갔다면 오직 적만을 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먼저 통역을 보내어 미리 출병하는 까닭을 통지하는 등 마치 당초에 싸울 뜻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어,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하였다가 그들의 장계를 보니, 힘이 모자라 함락을 당하였다는 정상은 조금도 없고 또한 구차하게 살아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뜻도 없이 가는 길의 행군한 절차를 차례로 서술하고 감히 미리 통지하여 낭패하였다는 등의 말을 버젓이 아뢰면서 스스로 그들이 한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며, 끝에 가서는 다시 회답할 말을 지시해 주어 살아서 돌아오기를 꾀하고 있습니다.

신하로서 적에게 항복하는 것은 천하에 가장 나쁜 행실입니다. 이것을 범하였을 경우 그 처자를 감금하여 법으로 처치하는 것이 국가의 일상적인 형법인데 (중략) 이 때문에 신들이 그들의 처자를 감금하고 정응정 등을 나포하여 문초하는 일에 대해 번거로움을 피하지 않고 누누이 청한 것입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 계사를 보니, 뜻은 좋다. 그러나 내 비록 혼미하고 병들어 맑은 정신은 아니지마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경들은 이 적을 어떻게 보는가? 우리 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추호라도 막을 형세가 있다고 여기는가? (중략)


지난해 군병을 들여보낼 때 경들은 마치 일거에 탕평할 것처럼 여겼는데, 병가(兵家)의 일은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옛사람들이 감히 가벼이 사용하지 아니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명나라에서 만약 군병을 진열하여 무력을 과시하고 중국의 국경을 굳게 지킨다면 마치 호랑이나 표범이 산 속에 있는 형세와 같아 적이 비록 날뛴다고 하더라도 감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점은 생각지 않고 가벼이 깊이 들어갔으니 반드시 패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중략)


강홍립 등의 사건에 있어서도 비록 적에게 항복하였다고 하나 이처럼 급하게 다스릴 것이 뭐가 있겠는가. 강홍립 등이 불행히 적진 중에 함몰되었으나 보고 들은 것들을 밀서로 계문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이 있는가. 진실로 본사의 계문과 같이 한다면 비록 노중(虜中)에 함락되었더라도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여 보내지 않아야 옳다는 말인가. 아, 묘당에 사려 깊은 노성(老成)한 인재는 거의 죄다 내쫓아 참여하지 못하게 하고 젊고 일에 서투른 사람이 비국에 많이 들어갔으니 국가 운영을 잘 못하는 것은 이상하게 여길 것조차도 없다.

대국 섬기는 성의를 더욱 다하여 붙들어 잡는 계책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말고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미봉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버려두고 생각지 않은 채 번번이 강홍립 등의 처자를 구금하는 일만 가지고 줄곧 계문하여 번거롭히고 있으니, 나는 마음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본사에서 누차 청하는 뜻을 나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천천히 선처하여도 진실로 늦지 않다. 오직 국가의 다급한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추의 서신이 들어온 지 이미 7일이 되었는데 아직도 처결하지 못하였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하늘의 운수이니 더욱 통탄스럽기만 하다.”

하였다. 당초에 강홍립 등이 압록강을 건너게 된 것은, 상이 명나라 조정의 징병 독촉을 어기기 어려워 억지로 출사(出師)시킨 것이었지, 우리 나라는 애초부터 그들을 원수로 적대하지 않아 실로 상대하여 싸울 뜻이 없었다. 그래서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虜穴)과 몰래 통하게 하였던 것인데 이 때문에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오랑캐의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구금되어 있으면서 장계를 써서 종이 노끈을 만들어 보냈는데, 화친을 맺어 병화를 늦추자는 뜻을 자세히 언급하였다. 정응정 등은 도망쳐 온 것이 아니고 오랑캐가 풀어 보낸 것인데, 보는 이들은 모두 노추(奴酋)가 전쟁을 늦추려는 계획이라고들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광해군 기록은 모두 광해군이 폐위된 뒤에 편집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당연히 광해군의 패륜과 실정에 주목하고, 인조반정을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기록은 사관이 광해군의 말에 심히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역사를 배운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시절 조정 대신들이 명분론에 매달려 나라를 망쳤다고 한탄하지만, 이 명분론이란 역사에 대의와 인과응보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과거사'와 '역사의 정의'를 말하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해군도 명을 부정하기 보다는, 다만 '미봉'이라는 말로 한창 일어나고 있는 후금을 무시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할 뿐입니다. (광해군이 어떻게 조정 대신들을 압도할 수 있는 정보력을 갖게 됐는지도 사실 궁금합니다. 비밀 정보조직이라도 운영한 것인지...)

 

 

 

 

6. 허균은 역성혁명을 일으켰나?

 

이건 제작진이 '역성혁명'이란 말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했는지 몰라 약간 애매합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이란 글자 그대로의 의미, 그러니까 '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성씨의 왕조를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역사의 기록대로만 보면, 허균에게 씌워진 혐의는 역성혁명이 아니라 의창군 광을 추대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의창군은 광해군의 막내 동생뻘이며 허균의 조카사위입니다. 의창군 역시 조선의 왕족이므로 이건 역성혁명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조선시대에도 역성혁명을 시도한 사람은 꽤 됩니다. 유명한 정여립이 - 물론 진짜 반란을 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렇듯 허균이 '역성혁명'을 시도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얘기입니다. 이 부분은 시나리오의 마지막 수정자가 역성혁명이란 말의 의미를 잘 몰랐는지, 아니면 김탁환의 '허균의 마지막 19일' 등에 나오는 '허균 역성혁명 가설'을 선택한 것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 안의 맥락으로 봐선 허균이 하선을 보고 '새로운 왕'의 가능성을 봤고, 하선을 살려 보낸 사실이 광해군에게 드러나면서 '역성혁명을 시도했다'는 죄목으로 처단됐다는 설명이 맞아 떨어집니다.

 

(어쩌면 제작진의 머리 속에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끝난 뒤 허균이 다시 하선을 찾아 나서고, 하선을 다시 왕으로 만들기 위해 거대한 음모를 짜다가 들통나고, 결국 하선과 허균이 함께 능지처참을 당하는 장대한 속편의 구상이 담겨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마치 알렉상드르 뒤마의 '삼총사' 속속편인 브라즐론 자작의 3부 - 흔히 '철가면'이란 제목으로 알려진 - 같은 느낌이군요.^)

 

 

 

거듭 말씀드리자만 '광해'은 오락 영화로서 탁월한 완성도를 갖고 있는 작품입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역사를 상상력으로 다시 재단해 자유롭게 구성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간혹 - 보다는 꽤 많이 - 영화 속의 역사 재구성을 마치 '감춰진 역사 발굴'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글은 그런 분들의 오해를 막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그러니 '영화는 그냥 영화로 봐라'라는 말씀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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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왕이 된 남자] 왕이 있고, 왕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있습니다. 영화적으로는 당연합니다. 두 인물은 1인 2역으로 같은 배우가 연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다 보면 1인2역이 아니라 1인3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드시 왕이 아니더라도 이런 이야기가 효과적이려면 두 남자는 생김새와 목소리가 똑같지만 신분상으로서는 상당한 격차가 나야 합니다. '왕자와 거지'를 보건, '가게무샤'를 보건 한쪽 남자가 비천한 신분인 것은 매우 당연한 공식입니다. 그리고 그 비천한 남자는 빠른 속도로 변해갑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는 하선이라는 한 평범한 남자가 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15일간 왕 노릇을 하고, 그 길지 않은 시간 사이에 새로운 사람으로 변신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변신 이야기는 놀라운 완성도로 이미 큰 성공이 예견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조선의 왕 광해(이병헌)은 암살의 위협을 다시 한번 넘기고 심복 허균(류승룡)에게 "나와 용모가 꼭 닮은 자를 구해 오라"고 지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발견된 것이 기방에 출입하며 광대놀음을 하던 하선(이병헌). 왕의 용모는 물론 목소리까지 똑같이 흉내내며 글도 읽을 줄 아는 하선에게 왕과 허균은 만족하고, 하선은 이따금씩 왕의 미행을 감추는 대리 역할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광해가 알 수 없는 독극물로 혼수상태에 빠지고, 허균은 왕의 변고를 감추기 위해 하선을 궁으로 데려온 뒤 왕을 은밀한 곳에 숨겨 치료하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선은 언제 깨어날 지 모르는 광해를 대신해 조선의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비밀을 아는 사람은 허균과 조내관(장광) 두사람 뿐. 비밀이 드러날 것에 대비해 "비빈들, 특히나 중전(한효주)은 절대 가까이 하지 말라"는 엄명이 떨어지지만....

 

 

 

 

 

 

조선의 여러 왕들 가운데 조선시대와 대한민국 시대에 가장 큰 평가의 변화를 겪은 임금을 하나 꼽으라면 광해군을 빼고 생각하기 힘들 듯 합니다. 연산군과 함께 패륜과 폭정의 상징이었던 광해군은 20세기의 눈으로 볼 때 중국의 명-청 교체기에 현명한 판단으로 전쟁 개입을 피하려 했던 외교의 대가요, 대동법을 도입한 선각자에다 임진왜란의 피해 극복을 지휘한 위대한 지도자로 탈바꿈했습니다.

 

사실 다들 아시겠지만 조선은 충보다도 효를 더 강조했던 윤리의 나라였습니다. 20세기 초, 전국에서 모인 의병을 이끌고 서울로 진공하려던 의병장 이인영이 모친상을 당한 몸으로 군을 이끌 수 없다며 귀향해 상을 치르고 체포된 것이 상식으로 여겨질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광해군 시대를 기록한 사서의 표현에서는 광해군의 정책에 대해 일면 긍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머니에 해당하는 인목대비(선조의 계비)를 유폐하고 어린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패륜'을 저지르고서는 왕위를 제대로 보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긴 세월이 많이 흘렀다 해도 지도자를 선정할 때 개인적인 윤리 차원의 '검증'이 필요 이상으로 중시되는 걸 보면 이건 한국인의 내재된 속성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런 광해에 대한 아쉬움이 이 영화에서는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비슷하게 왕과 똑같이 생긴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세종 때라는 배경이 특별한 의미가 아니지만, 이 '광해'는 비슷비슷한 다른 영화들에 비해 '시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물론 모든 시대극은 그냥 시대극으로만 그쳐선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기 힘듭니다. 일본 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가 "나는 단지 내 이야기에 가장 맞는 시대적 배경을 고를 뿐"이라고 말한 이후 이건 상식이 됐죠.

 

'광해' 역시 사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현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물론 많은 한국 영화들이 이걸 지나치게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고, '광해' 역시 이런 부분에서 다소 무리수가 보이지만, 그동안 나왔던 수많은 팩션 가운데 그래도 '역사의 무게'에 대한 인식에선 확실히 한발 앞서 있는 영화가 바로 '광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게 '광해' 속의 당시 정치 상황이 역사에 기록된 모습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역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 존중할 만 하다는 것입니다. 뭐 '높은 것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아랫 것들은 사소한 의리에 따라 목숨을 건다'는 식의 지나치게 도식적인 배치는 아니 나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입니다.^)

 

 

 

 

이를 포함해 '광해'에서 가장 두드러진 강점은 '무거운 이야기'와 '가벼운 이야기'의 황금비율입니다. '둘 다'를 소화해 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배우 중 하나인 류승룡이 영화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류승룡의 움직임에 따라 두 이야기의 배분이 조절되기 때문이죠. 류승룡이 중심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코믹함이 돋보이는 배우 김인권이 강직함을 표상으로 하는 도부장 역을 맡아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은 칼 관련 에피소드, 즉 김인권의 "저~~~~~언 하~~~ 히잉" 이었습니다.^^)

 

이밖에도 전반적으로 코미디와 관련된 '호흡'과 '박자' 면에서 추창민 감독은 장인의 솜씨를 보여줍니다.

 

 

 

 

 

 

배우들 이야기로 넘어가면 이병헌의 호연은 굳이 따로 거론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사실 영화 초반에는 하선과 왕을 가르는 선이 그리 분명치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왕은 그 자리에 있지만 하선이 지나치게 지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선이 지나치게 시정 잡배처럼 보여선 안된다'는 제작진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뒤로 가면서 하선1(광대놀음을 하던 원래 하선)이 하선2(왕이 된 뒤 변모한 하선)로 바뀌어 가면서 이병헌의 연기는 빛을 발합니다. 열정적이고 정의로운 왕 하선2와, "용상에 앉았던 천한 것을..."이라며 서늘한 분노를 감추는 광해는 선명하게 대비를 이룹니다.

 

이렇게 해서 이병헌은 세 인물을 연기하는 셈이 됩니다. 물론 광고 영화인 '인플루언스'에서 이미 1인3역을 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 영화가 하선이라는 인물의 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세 인물 가운데서도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하선2'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이병헌의 연기가 돋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한효주는 이미 사극에 익숙했기 때문인지 비련의 중전 역할에 너무나 잘 어울리는 아우라를 풍겼습니다. 역할의 특성상 눈에 띄는 자극적인 연기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광해'의 중전 역할을 할 배우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관객의 공감'입니다. 즉 '저런 중전이라면 하선이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해 가면서도 보호하려 기를 쓰는게 당연해'라는 생각을 줄 수 있는 배우여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한효주의 캐스팅은 탁월했습니다.

 

 

 

 

 

가짜와 진짜 사이의 에피소드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입니다만 '광해'에서는 구로자와 아키라의 '카게무샤'의 영향이 좀 더 느껴집니다. 가짜가 어느 한 순간 자신의 가능성을 각성하고, 진짜가 되어도 큰 무리가 없는 '가짜 진짜'가 되어 가는 과정이라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로 또 하나 기억나는 영화는 션 코너리 주연의 고전 영화 '왕이 될뻔한 사나이 (The man who would be king)' 입니다. 국내에서 극장 개봉은 없었던 듯 하고, TV에서 방송될 때에는 '나는 왕이로소이다'라는 제목을 달았던 작품이죠. 인도에 파병됐던 두 명의 영국군 낙오병이 네팔 부근의 오지로 들어가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그중 한 병사(션 코너리)는 몇번의 우연이 겹치면서 알렉산더 대왕의 재림으로 오해받게 되고, 서서히 그 자신도 자신이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나 혼동을 일으킵니다.

 

널리 알려진 영화는 아니고, 쌍둥이가 나오지도 않지만 가짜가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 생각하고, 자신의 것이 아닌 새로운 삶에 눈을 뜨면서 벌어지는 사소한 성공들, 도주의 기회, 자발적인 거부,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한 비참한 몰락 등으로 이어지는 연결은 광해와 상당히 흡사합니다. 그리고 이런 요소들이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서, 양쪽 영화 모두 성공적입니다.

 

(DVD 출시명은 '왕이 되려고 한 사나이'로군요.)

  

 

 

'광해'에서 인상적인 점 중 하나는 빛의 사용입니다. 진짜 왕 광해는 빛을 등에 이고(후광이라고 할까요^) 있거나, 인공적인 조명의 도움을 받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선은 왕위에 있을 때도 자연광 앞에 노출됩니다. 이런 배치는 '태어난 왕'과 '만들어진 왕'의 차이를 은연중에 관객에게 심어주는 데 상당히 효과적이었고, 전체적인 완성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생각입니다.

 

길게 얘기했지만 어쨌든 결론은: 얼른 보세요.

 

 

 

P.S. 사실 광해군은 33세에 왕이 됐고 중전 유씨는 당시 30세. 배경이 광해군 8년이므로 광해군은 41세고 유씨는 40세... 뭐 이런 생각을 하면 '광해'의 로맨스가 깨질 우려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는 얘깁니다. 이런 이야기는 별도 포스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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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펜더블 2, 실베스터 스탤론, 척 노리스] 1985년, 노량진 대성학원 옆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다방이 하나 있었습니다. 커피는 한잔에 천원. 그런데 특징이라면 차를 파는게 주업이 아니라 비디오를 틀어 주는게 주업이라는 점이었죠.

 

비디오라는 말에 눈을 반짝이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그 시절에 '빨간 비디오'를 틀어 주려면 시간이 그래도 새벽 한시는 넘어야 가능했을 겁니다. 그런 야한 영화가 아니라, 당시 극장에서 접할 수 없었던 할리우드의 최신작 영화들을 틀어 주는 전문이었습니다. 인터넷은 커녕 삐삐도 없었고, LP와 카세트 테이프가 음반 산업의 주축이던 시절, 어디서 그런 영화들을 구해 오는지 매우 의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해 여름, 학원생들 사이에서 당시 화제의 영화였던 '람보2'를 '그 다방'에서 틀어 준다는 소문이 쫙 돌았습니다. 극장 개봉 전이기도 했거니와, 극장 영화 표값이 한 2500원 정도 했던 시절. 가 보니 다방 안에 발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항의로 상영(?)이 중단될 뻔 했습니다. 아무리 무지몽매한 재수생들이었지만 보다 보니 주인공이 실베스터 스탤론이 아니고, 영화도 람보2가 아닌 것이 너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혀 그런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지금도 그날 본 그 영화가 람보2였다고 굳게 믿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몇명은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별로 항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진짜가 아닌 짝퉁 람보2였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넘어갈 만큼 영화는 재미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월남전 배경 영화는 흔치 않았던데다 서부극 못잖게 '쏘면 다 맞는' 영화는 현대전 영화에서 매우 드물었기 때문이죠. 아울러 수염 기른 남자주인공 또한 사뭇 매력적이었습니다.

 

 

 

 

짐작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그 영화는 'Missing in Action(1984)'이었고, 그 주인공은 척 노리스였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한 재수생의 머리 속에서 인연을 맺은 척 노리스와 실베스터 스랠론은 27년만에 한 영화에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익스펜더블2'.

 

 

 

1편을 보신 분이나 안 보신 분이나, 아무 상관없는 줄거리지만,

 

바니 로스(실베스터 스탤론), 크리스마스(제이슨 스타댐), 양(이연걸) 등은 1편의 악역이었던 거너 젠슨(돌프 룬그렌)을 멤버로 받아들여 여전히 용병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도입부는 네팔 어딘가에서 이들이 포로가 된 트렌치(아놀드 슈워제네거)를 구해 주는 장면. 신나는 불꽃놀이가 펼쳐집니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 정부 일을 하고 있는 미스터 처치(브루스 윌리스)가 과거의 부채를 거론하며 로스에게 동구권 어딘가에 추락한 비행기 금고에서 모종의 물건을 가져오라는 미션을 줍니다. 이들을 돕는 요원으로 젊은 중국인 여성 매기(여남餘男, 흔히 위난이라고 불립니다)가 파견되죠. 하지만 로스 일당은 현장에서 빌런(장 클로드 반담) 일당에게 기습을 당해 물건도 빼앗기고 인명 피해도 입죠. 분노한 로스는 매기의 도움으로 빌런 일당을 추격해 러시아로 갑니다.

 

 

 

 

이후의 전개에도 놀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전도, 복선도, 보는 사람의 머리를 복잡하게 할 수 있는 어떤 요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좋은 편은 악당들을 뭉개 버리고, 모든 사람이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결론을 향해 영화는 달려갑니다.

 

물론 이건 영화를 보기 전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입니다. 영화 한 편에 실베스터 스탤론, 브루스 윌리스,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다 나오고 이들이 같은 편인데 대체 누가 그걸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장 클로드 반담? 어림없죠.

 

 

 

 

이 영화를 보시는 분들의 마음 자세는 - 당연히 그렇겠지만 - 지금 현재가 아니라 '왕년'에 가 있어야 합니다. '왕년'의 극장가를 뒤흔들었던, 그리고 관객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바로 그 액션 영웅들이 얼마나 늙고 몸도 굼뜨게 변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은지원이나 문희준이 여전히 팬들을 졸도하게 할만한 슈퍼스타는 아니지만, 어쨌든 '응답하라 1997'은 그 시절을 보냈던 연령층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영화가 표방하는 대표적인 유머 역시 철저하게 관객의 추억에 기대고 있죠.

 

 

더 알아듣기 쉽게 하자면 이렇습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총알이 떨어졌다. I'll be back('터미네이터'의 상징적 대사).

브루스 윌리스: 그만 좀 돌아와! 이제 내 차례야. (제발 그 'I'll be back' 좀 그만 써먹어!)

아놀드 슈워제네거: 그래. Yippe-kai-yay ('다이 하드'에서 맥클레인의 상징적 대사)

 

 

 

 

1편에서 이미 그런 정서를 이용해 꽤 많은 돈을 번 '익스펜더블' 프로젝트는 2편에 들어가면서 부커(척 노리스)와 트렌치(아놀드 슈워제네거)를 보강하고, 미스터 처치(브루스 윌리스)까지 실전에 투입하며 기세를 올립니다.

 

 

 

 

사실 이 시리즈의 아이디어는 역시 추억의 명화인 '지옥의 특전대(Wild Geese)'에 가깝지만, 그 어떤 비장미도 찾아볼 수 없다는게 특징이죠. 영화 중반에서는 어쩐지 '황야의 7인(혹은 '7인의 사무라이')' 쪽으로 흘러가려는 듯한 느낌이 잠시 조성되기도 하지만,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접으시는게 좋습니다.

 

1편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몇몇 추가 멤버들과 함께 구질구질한 멜로드라마가 아예 삭제됐다는 것 뿐인데, IMDB 평점(6점대에서 7점대로), 로튼토마토 지수(41->64) 모두 상승했습니다. 글쎄 뭐가 그리 나아졌는지 알 수 없긴 하지만, 지금의 3,4,50대 남성 관객들이 두어 시간 동안 세상 시름을 잊고 1,2,30년 전을 그려 보기엔 딱 좋은 영화가 아닐까 합니다. (뭐 여자분들에게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수도...)

 

 

그런데 굳이 따져 보니 척 노리스는 70대였군요.^^ 진짜 액션 그랜드파...

 

척 노리스 1940.3.10

실베스터 스탤론, 1946. 7.6.

아놀드 슈워제네거 1947.7.30

브루스 윌리스 1955.3.19

돌프 룬그렌 1957.11.3

장 클로드 반담 1960.10.18

이연걸 1963.4.26

제이슨 스타댐 1967.9.12

 

 

 

 

자, 이제 3편에서는 누가 기다리고 있나 보겠습니다. 웨슬리 스나입스(1962.7.31)와 스티븐 시걸(1952.4.10)이 있군요. 1편에서 악역을 거부했던 반담도 가세했으니 시걸에게는 다이어트만 남은 셈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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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없는 꽃집'이라는 일본 드라마는 사실 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제목은 스치듯 들어본 기억이 있었지만, 사실 일본 풍의 순정 멜로 드라마는 제게 대부분 지루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호평일색인 '1리터의 눈물' 같은 드라마도 힘겨웠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 드라마는 '미녀 혹은 야수' 풍의 코믹터치입니다.)

 

게다가 여주인공이 다케우치 유코라는 것도 그닥 관심이 가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미인이라는 데에 이견을 달 수는 없지만 취향이라는 것도 있어서...^^ 그런데 어쨌든 회사 일 때문에 이 '장미없는 꽃집'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네. 2일부터 JTBC에서 방송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장미없는 꽃집'은 정말이지 겉보기와는 전혀 다른 드라마였습니다. 그야말로 드라마의 내숭이라고나 할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드라마는 '전혀' 순정 멜로 드라마가 아닌 겁니다.

 

 

 

줄거리. 에이지(카토리 신고)는 작은 역 앞 꽃집을 경영하며 살아가고 있는 30대 가장. 아이 엄마는 딸 시즈쿠(야기 유키)를 낳다가 죽었고, 그 추억 때문에 이 꽃집은 장미를 팔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미모의 맹인 여성 미오(타케우치 유코)가 꽃집 앞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외로운 두 사람은 서로 의지하게 됩니다. 여기에 우연히 에이지에게 얹혀 살게 된 호스트(마츠다 쇼타)까지 얽히며 미오와 에이지의 밀당이 시작됩니다.

 

...뭐 이렇게 쓰면 역시 전형적인 순정 멜로드라마의 시작입니다. 남자 주인공 에이지는 심지어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가도 일부러 노인 뒤에 줄을 설 정도로 착하디 착한 남자. 이유는 "성질 급한 사람이 노인 뒤에 줄을 섰다가 빨리 계산하지 못한다고 구박이라도 받을까봐"입니다. 당연히 일본 드라마의 남주답게 절대 애정 문제에서도 박력이나 패기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미오에게 끌리는 것도 사실이지만, 절대 미오에게 자신의 흑심을 드러내지 못합니다. '저쪽은 처녀고 나는 애아빠...'라는 식의 한국적인 생각 아닙니다. 그냥 일본 풍으로 주저하는 겁니다. 아주 그냥.

 

그런데, 문제는 이게 이 드라마의 주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선 2회쯤 되면 미오가 사실은 맹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새로운 사실. 즉 처음에 설정되어 있던 인물들의 구조가 회를 거듭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재구성된다는 게 이 드라마의 매력입니다. 즉 순정 멜로인 줄 알았던 장르가 미스터리 휴먼 성장 드라마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죠.

 

 (아니...뭐... 그렇다고 링은 아니고...)

 

출연진입니다.

 

薔薇のない花屋

 

2008年3月24日放送終了

 

香取慎吾  汐見英治
竹内結子  白戸美桜
釈由美子  小野優貴
松田翔太  工藤直哉
八木優希  汐見 雫 

 

 


 

가토리 신고는 일본 문화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들어봤음직한 슈퍼 아이돌 그룹 SMAP의 막내입니다. 아무리 막내라 해도 77년생. 이제 30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어쨌든 팀내 캐릭터는 장난꾸러기 막내라서 이전까지 '손오공' 류의 캐릭터나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황당무계한 변신이 그의 주업이었지만, '장미없는 꽃집'에서는 진지한 정극 연기자로 새롭게 탄생합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 친구가 나이가 들면 이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팬들이 보면 큰일나겠군요.)

 

 

 

타케우치 유코. 일본을 대표하는 순정파 여배우.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가녀린 선이 특기입니다. 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을 휩쓴 이른바 민폐형 여배우 캐릭터의 화신이라 할 수 있죠. 국내에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기무라 타쿠야와 공연한 '프라이드'.

 

2005년 나카무라 시도와의 결혼과 함께 활동을 중지했지만 2008년 이혼과 함께 복귀합니다. 그 복귀작이 바로 이 '장미없는 꽃집'입니다. 그 뒤로 다시 승승장구. 최근에는 미국 ABC 드라마 '플래시포워드'에도 출연합니다.

 

 

 

아마도 '로스트'의 김윤진이 성공을 거둔 이후 미국 드라마 시장에서 아시아 여배우에 대한 새로운 가치 판단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플래시포워드는 시즌1으로 제작 중단.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가장 주목받는 여배우는 타케우치가 아니라 시즈쿠 역의 아역 야기 유키입니다. 눈물 연기는 기본. 물론 '백한번째 프로포즈'를 쓴 천재 작가 노지마 신지의 위력이기도 하겠지만, 드라마 중반에 나오는 명장면 '시즈쿠 찾기' 등을 통해 야기는 일본 최고의 아역으로 자리잡습니다.

 

 

 

그밖에 눈길을 끄는 배우는 '꽃보다 남자'에 나왔던 마츠다 쇼타,

 

 

 

그리고 일본의 야쿠자 전문 배우 데라지마 스스무가 아직도 '청춘의 로맨스'를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에이지 앞집의 카페 주인으로 등장, 웃음을 자아냅니다.

 

 

한번 보시면 다음 진행이 궁금해지는 드라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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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에서 보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시리즈 가운데 가장 궁금했던 '마법의 섬 Enchanted Island)'을 봤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바로크 오페라 가운데(특히 헨델의 작품 중에) '마법의 섬'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마법의 섬'은 21세기의 음악가들이 셰익스피어의 희극 '템페스트'와 '한 여름밤의 꿈'을 토대로 헨델, 비발디, 그리고 라무(Jean-Philippe Rameau)의 작품들 중 분위기에 맞는 곡을 골라 만들어 낸 혼성 모방(pastiche)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21세기의 창작물이되 17~18세기의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내고 있는 작품인 겁니다.

 

이런 저런 요소들을 고려할 때 '마법의 섬'은 아름다운 무대와 적절한 유머 감각, 그리고 화려한 출연진의 명연기로 매우 훌륭한 볼거리 역할을 했습니다. 노래들이 워낙 반복이 심한 바로크 스타일을 그대로 모방한 덕분에 인터미션을 포함해 3시간40분의 공연 시간은 좀 길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번쯤 볼만한 작품이라는 느낌은 분명했습니다.

 

그리고 속물인 저 같은 관객에게는 또 다른 재미를 준 부분이 있습니다. 그건 '마법의 섬'에 등장한 소프라노 여가수들이 하나같이 날씬한 미인들이더라는 겁니다.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 무슨 조화인지 모바일 버전으로는 글 중간이 뚝 끊어져서 핵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내용은 PC 버전에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

 

많은 사람들이 '오페라를 본다'고 말하면 '그 지겨운 걸 어떻게?'라는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면 '배나온 아저씨들과 한팔로 안을 수도 없는 뚱보 아줌마들을 절세의 미남 미녀라고 주장하는 공연을 대체 어떻게 보느냐'고 말하기도 하죠.

 

하지만 '마법의 섬'을 보면 그런 말이 쉽게 나오지 않을 듯 합니다.

 

 

 

 

 

 

 

온 출연진이 모두 스타급이지만 그보다는 출연하는 소프라노들의 모습이 훨씬 더 충격적입니다. 일단 요정 에어리얼 역의 다니엘 드니스(Danielle De Niese). 화려한 외모 만큼이나 화려한 가창력으로 각광받고 있는 소프라노입니다.

 

 

'마법의 섬'에서는 좀 과한 분장 탓에 외모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화사한 외모는 물론이고, 탁월한 콜로라투라로 명성이 높습니다. 특히 바로크 풍의 경력이 두텁죠. 그가 부르는 헨델의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입니다.

 

 

그 다음은 헬레나 역을 맡은 레일라 클레어(Layla Claire).

 

 

물론 작은 역이지만, 무대가 메트로폴리탄인 만큼, 작은 역으로 나온다고 해서 그 위상을 낮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마법의 섬'에서의 조연을 다른 여타 오페라의 조연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최소 2곡은 자기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BBC 프로그램에서 키리 테 카나와의 레슨을 받고 있는 모습.

 

 

 

 

마지막으로 이 작품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미란다 역의 리셋 오로페사(Lisette Oropesa)입니다.

 

 

같은 메트로폴리탄의 '라인의 황금'에서는 라인의 세 처녀 중 하나로, '지그프리트'에서는 무대에 나서지 않는 새 역할로 참여했던 소프라노입니다.

 

물론 메트로폴리탄에서는 작은 역이지만 이미 다른 무대에선 광란 신으로 유명한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의 타이틀 롤을 맡은 적도 있는 소프라노. 머잖아 월드 클래스 주연급으로 도약할 것이 기대됩니다.

 

노래하는 모습.

 

 

그런데 오로페사의 과거 행적을 굳이 살피려고 한 것도 아닌데,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됐습니다. 한 장의 사진입니다. 이건 다 구글의 과잉 친절 때문입니다.

 

 

 

설마 싶지만 설마가 아닙니다. 놀랍습니다. 이목구비는 똑같은데 사람이 절반...

 

 

스타덤을 위해 엄청난 다이어트를 했다는 것이 드러나 보입니다. (외신에 따르면 채식을 이용한 엄청난 다이어트가 있었다는군요.)

 

물론 일찌기 오페라 평론가 박종호 선생이 '이미 전 세계 오페라하우스의 주역 소프라노들은 다이어트를 마쳤다'고 하셨듯, 아무리 오페라가 고급 예술이라 해도 '관중의 눈'에 최적화된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당연한 반론은 오페라 주역을 고를 때 가장 큰 기준이 '미모+가창력'이어야 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무조건 일단 가창력'이어야 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뭐 이 논란은 이미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니 길게 얘기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어쨌든 추세는 이미 존재하고 있고, 안젤라 게오르규나 안나 네트렙코가 정말 당대 최고의 가창력 때문에 스타 소프라노가 된 것이냐, 아니면 미인이기 때문에 실력 이상으로 평가받은 것이냐 하는 얘기도 쉽게 끝날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네트렙코가 빌리 데커 판 '라 트라비아타'로 오페라 DVD의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듯 앞으로 이런 추세는 더욱 더 가속화되지 않을까 합니다. 오로페사의 무서운 다이어트도 결국은 그런 노력의 일환이겠죠.

 

아무튼 '마법의 섬'은 메가박스에서 상영합니다. 단 금요일과 일요일만 상영하는 듯 하니 꼭 시간표를 확인하시길.

 

 

P.S. 인공지능이 적용된 덕분인지(?) 유튜브에 몇 차례 윗글에 나오는 이름들을 입력했더니 뜬금없이 이런 동영상을 보라고 권하더군요. 그렇게 발견한 몰도바 출신의 신예 소프라노 발렌티나 나포르니타(Valentina Nafornita). 25세. 성악가라기보단 모델 같은 느낌이 듭니다.

 

도니제티, '돈 파스콸레' 중에서 '그 눈길이 기사의 심장을 사로잡아(Quel guardo! so anch'io la virtù)'.

 

 

지난해 BBC 주최로 카디프에서 열린 신예 성악가 발굴 오디션에서 당당 1위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당시 5위 안에 들었던 성악가 가운데 한국의 이혜정(진짜 가운데)도 있었더군요. 나폴니타는 맨 오른쪽.

 

아무튼 앞으로 성장을 지켜보고 싶어집니다.

 

 

http://operalively.com/forums/showthread.php/545-Of-these-singers-who-is-the-loveli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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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스콧 Tony Scott(1944~2012)] 나름 영화 좀 본다는 사람들에게 '제일 좋아하는 영화' 혹은 '제일 좋아하는 감독'을 꼽으라면 쉽게 답을 하지 못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 많은 영화와 그 많은 감독중에 어떻게 그렇게 쏙쏙 뽑아내 대답을 하겠습니까. 그렇지만 5명을 뽑으라면, 저는 언제든 토니 스콧을 꼽아 왔습니다. (늘 '토니 스코트'라고 쓰다가 갑자기 '토니 스콧'이라고 쓰려니 좀 그것도 그렇습니다)

 

토니 스콧은 한동안 돈 들인 블록버스터 부문에서 '가장 돈이 아깝지 않은 장면을 뽑아 내는 감독'으로 꼽혀왔습니다. 한때 '불꽃같은 젊음'을 가장 강렬하게 그려냈던 스코트는 나이들면서 약간의 혼란을 겪는 듯 했지만 그래도 할리우드 제작자들이 가장 신뢰하는 감독들 중 하나로 꼽혀왔습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치의 뇌종양이었다니. (이 부분은 현재 가족들이 부정하고 있습니다. 오보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가 어디서 태어나 누구의 영향을 받아 최고의 감독이 되었는지 같은 위인전 풍의 내용은 사실 잘 모릅니다. 형인 리들리 스콧과 함께 영국에서 광고 프로덕션을 운영하며 수백편의 광고를 찍었고, 이 과정에서 특유의 영상미를 완성시켰다는 정도.

 

특이한 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시나리오에 크레딧을 올린 경우는 거의 없더라는 것입니다. 24편의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프로듀서로 나선 경우는 그 두배가 넘지만 시나리오를 직접 쓴 건 딱 두번뿐. 그것도 정식 상업영화 데뷔 전의 소품들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에서 개연성이 지적됐던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네. 제가 '말이 안 되는 영화'에 유난히 좀 민감한 편입니다. 그런 제가 봐도 스코트의 작품에 사용된 시나리오들은 탄탄한 플롯을 자랑합니다. 오히려 내로라하는 시나리오 라이터 출신 감독들을 무색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그런 그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꼽은 그의 대표작 5선을 되새겨 보는 것으로 문상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물론 개인적인 기준입니다. '라스트 보이스카웃'이나 '폭풍의 질주 Days of Thunder' 팬들은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5. 맨 온 파이어 (2004)

 

한국 영화 '아저씨'에 깊은 영향을 미친 영화들 중 하나인 '맨 온 파이어'는 토니 스콧이 본격적으로 덴젤 워싱턴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잡은 작품으로 의미를 갖습니다. 물론 그 전에도 '크림슨 타이드'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 영화 이후 스콧의 영화 5편 중 4편의 주인공이 워싱턴이라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스콧이 복수를 소재로 선택한 것은 비교적 초기작인 '리벤지' 이후 오랜만의 일입니다. 게다가 그 대상이 다코타 패닝이라는 건 관객의 공감을 200% 올려놓을 수 있는 배치죠. 마지막 시퀀스에는 약간의 아쉬움도 남지만, 음악과 함께 휘발유 냄새가 나는 영상은 수작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이후, 덴젤 워싱턴이 사실상 고정 주인공처럼 되면서 전작들의 경쾌한 스텝이 사라지게 됐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토니 스콧 자신이 그걸 원했다면 할 말은 없지만요.

 

 

 

4. 에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 (1998)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테크노 스릴러는 기존의 토니 스콧 영화와 사뭇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전의 액션들이 좀 더 우직하고 선이 굵은 느낌이었다면, '에너미 오브 더 스테이트'는 초시계로 시간을 재듯 딱딱 맞물려 돌아가는 신과 신이 무서울 정도로 정교한 영화입니다.

 

이미 고참 감독의 길에 접어든 스콧이 이 영화를 만들었을 때 개인적인 소감은 주다스 프리스트가 '페인 킬러' 앨범을 내놨을 때의 느낌이랄까요. 놀랍고도 감동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작품 이후 스콧과 윌 스미스가 한번쯤 더 작품을 함께 했더라면 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랬더라면 최근작들이 훨씬 더 생기넘치는 영화가 되었을텐데..

 

아울러 이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은 전혀 비중 없는 도청 기술자 역으로 등장한 잭 블랙.

 

 '화성 침공' 등에 얼굴을 비치긴 했지만 이때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High Fidelity'도,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 Shallow Hal'도 뒷날의 얘기일 뿐. 만약 요즘 이 영화를 처음 보는 분들은 전혀 웃기지 않는 잭 블랙을 보는 것도 이색적인 느낌일 겁니다. 나름 '선악의 판단이 없이 하는 일만 하는 공대생'의 느낌을 주는 캐릭터였는데 말이죠. (ㅋ)

 

 

 

3. 크림슨 타이드 (1995)

 

지금까지도 '잠수함 영화'를 한 편만 뽑으라면 뭐니뭐니해도 '특전 U보트(Das Boot)'를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 편을 뽑으라면 아무래도 나머지 한 편은 '크림슨 타이드'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좁은 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남자와 남자의 격돌, 그리고 거기서 뿜어 나오는 팽팽한 긴장은 이 영화를 '남자들의 영화'로 만드는 데 충분했습니다. 진 해크만과 덴젤 워싱턴의 충돌은 '남자다움'을 보여주고 싶은 배우들이 꼭 참고해야 할 연기(아무리 알 파치노와 드 니로가 나온다고 해도 마이클 만의 '히트' 따위나 봐선 절대 연기가 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합니다)입니다.

 

'남성용 영화'의 거장이지만 스콧이 자주 쓰는 캐릭터에는 '의리'라는 요소가 매우 희박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스콧의 영화에서 남자들 사이의 우정이란 서로 걱정하고 이해해 주는데서 오는 게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 대결하고, 상대의 가치나 실력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죠.

 

'탑 건'이나 '스파이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그 요소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역시 '크림슨 타이드'입니다.

 

 

또 이 영화를 잊지 못할 것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사람으로 한스 짐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사실 가끔은 그게 그거라서 구별하기 힘들다는 혹평도 있지만, 이 시한폭탄같은 긴장감을 주는 한스 짐머의 스코어는 '크림슨 타이드'의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이 영화를 생각하면 비고 모텐슨과 설경구가 은근 겹쳐집니다. 물론 무명이었던 두 사람과 잠수함 내부 환경, 그리고 해군 제복의 느낌일 뿐. 캐릭터가 비슷한 건 아닙니다.

 

 

 

 

2. 탑 건 (1986)

 

IMDB에서 이 영화의 평점이 6.7밖에 안 된다는 걸 알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아니 대체 왜? 뭐가 부족해서? 하긴 영어 사용자들이 이 영화를 보면 또 다른 느낌이 들 수도 있겠죠. 특히 이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발 킬머의 "You can be my wingman"은 영화 사상 가장 느끼하고 유치한 대사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1980년대의 청춘들은 이 영화에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습니다. 불과 1500만달러를 들여 만든 영화가 전 세계에서 3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습니다. 1986년의 세계 최대 흥행작인 것은 물론이고, 투입 대비 수익률로 따지면 역대 최상위의 영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신의 무명 배우 톰 크루즈'는 고른 치열이 빛나는 자신만만한 미소로 단번에 전 세계를 사로잡아 버렸고, 이후 4반세기를 꿰뚫는 스타의 화려한 탄생을 알립니다. 켈리 멕길리스가 조금 더 미인이었다면 좋았을 것 같지만 뭐 다 바랄 수는 없죠.

 

창공을 쪼개는 영상미, 26년 뒤 한국에서 만들어진 어떤 영화의 플롯까지 지배하는 완벽한 전형의 제시, 톰 크루즈-발 킬머-멕 라이언까지 보석같은 신인들을 골라낼 수 있었던 제작진의 선구안까지(그게 스콧 혼자의 힘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전설이 될만한 작품입니다.

 

 

 

 (물론 톰 크루즈의 저 뒤쪽에 팀 로빈스가 큰 키로 멀뚱멀뚱 서 있었다는 것도..)

 

특히 해롤드 폴터마이어, 조지오 모로더, 케니 로긴스, 스티브 스티븐스, 칩 트릭, 마이애미 사운드머신, 벌린(베를린^^), 그리고 여기에 제리 리 루이스와 라이처스 브라더스까지 얹힌 사운드트랙은 80년대 영화 중 무엇에 비겨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플래시댄스'나 '세인트 엘모스 파이어' 정도?

 

 

도대체 저게 무슨 노래야 싶은 분들을 위해 원곡을 준비했습니다.

 

 

영화 끝나기 전 이 노래가 원곡으로도 나오긴 나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은 기억하실지도.

 

 

 

1. 트루 로맨스(1993)

 

사실 '탑 건'을 제치고 꼽을 영화가 있다는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비록 이 영화의 흥행 성적이 '탑 건'에 미치지 못하는게 사실이라 해도 이만큼 액션과 로맨스, 판타지와 코미디가 절묘하게 배합된 작품은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진정한 아드레날린의 미학이라고나 할까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퀜틴 타란티노를 오늘날의 거장으로 만드는 데에는 이 영화, '트루 로맨스'가 한 몫을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글로 쓰고 고전 영화에서 보던 것이 실제 영상으로 가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공부가 되었을테니 말입니다. 비록 그가 이 시나리오를 헐값에 팔았다고는 하지만, 그리고 결말이 그가 직접 쓴 것과 상당히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최소한 올리버 스톤이 만든 '내추럴 본 킬러스'보다는 이 작품에 훨씬 더 만족했다고 전해집니다.

 

(인터넷에서 '트루 로맨스'의 대본을 검색하면 타란티노의 원본과 실제 영화에 사용된 대본의 두가지가 검색됩니다. 결말을 제외하면 대동소이하지만, 그래도 장면 장면에서 타란티노 풍의 장황한 대사가 많이 사라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대본은 본래 '내추럴 본 킬러스'와 한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가 전성기였던 크리스천 슬레이터와 파트리샤 아퀘트의 연기도 그만이지만 막 스타 악역의 길을 밟기 시작한 게리 올드만, 딱 두 장면에 정신 빠진 모습으로 나오는 브래드 피트를 비롯해 '오션스11'을 보는 듯한 조연들의 화려한 연기 경연이 영화의 매력을 배가시킵니다.

 

흔히 우리가 '낭만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달 밝은 가을 밤에 하우스 밴드가 멋진 테라스에서 쿨 앤 더 갱의 'Cherish'를 연주하는 광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원래 'romantic'이란 말의 의미에서는 '질풍노도'의 요소가 생략되어선 안됩니다.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격정이야말로 로맨티시즘의 이상인 것이죠. 이를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작품들은 중세 기사들의 무용담입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격정과 과장, 허세를 영화 '트루 로맨스' 만큼 잘  표현한 작품은 언제쯤 다시 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크림슨 타이드'의 그 '한스 짐머'가 이런 달콤한 멜로디를 내놨다는 것도 이 영화를 보는 즐거움입니다. 에밀리아넨코 효도르가 그린 병아리 그림이랄까요.

 

이 영화를 보다가 생각나는 옛 이야기 하나. 알라바마(파트리샤 아퀘트)가 클레어런스(크리스천 슬레이터)에게 자신이 창녀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대사는 분명히 "I've been a call girl for exactly four days, and you're my third customer" 였는데 자막은 "당신이 내 첫 손님이었다구요"라고 뜨더군요. 1993년만 해도 수입사 관계자들은 주인공이 '창녀와 결혼한다'는 데 대한 도덕적인 근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사실 이보다 훨씬 전 얘기긴 하지만 '졸업'을 극장에서 볼 때는 더스틴 호프만의 연애 상대인 앤 밴크로포트가 자막상으로는 캐서린 로스의 엄마가 아니라 이모로 표현되기도 했더랬습니다. 어찌나 도덕적인지...)

 

 

이제 마무리를 위해 그의 다른 영화 사운드트랙 가운데 한 곡을 골라 봤습니다.

 

 

'폭풍의 질주'에서 뽑은 한 곡. 화이트스네이크라 불린 사나이 데이빗 커버데일이 부른 'Last note of freedom'입니다. 어쩐지 last note라는 말이 그의 마지막 길을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가사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나의 길을 가겠다는 사나이의 각오입니다.

 

 

 

원제처럼 그야말로 '천둥의 나날'을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왼쪽부터 토니 스콧, 돈 심슨(제작자), 로버트 타운(시나리오 작가), 제리 브룩하이머(제작자), 그리고 톰 크루즈. 스콧-심슨-브룩하이머가 구축했던 황금의 트리오에서도 이제 브룩하이머만 남았군요.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아무래도 마지막 곡은 이 곡이라야 할 듯 합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도 분홍색 모자를 쓰고 이 음악에 맞춰 주먹을 흔들고 계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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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R2D2를 연상하시는 영화 '알투비(R2B) 리턴 투 베이스'를 봤습니다. 본래 '빨간 마후라 2 프로젝트'라고 불렸던 것이 시간과 논의를 거치면서 결국 '알투비 R2B'라는 제목으로 결정됐더군요. 다 아시겠지만 R2B는 '리턴 투 베이스(Return to Base)', 즉 '기지로 귀환'이라는 뜻입니다. 영화를 보고 난 분들 중에는 다른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만.^

 

창공 액션 영화라면 추억의 명화인 조지 페퍼드 주연의 '대야망(The Blue Max)'부터 그 이름도 거룩한 '탑 건(Top Gun)'를 지나,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두 편의 고전 영화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두 편이 공군과 파일럿의 세계에 대해 이뤄 놓은 업적이 워낙 큰 탓일 겁니다.

 

그리고 '알투비'가 한국에서 나왔습니다. 이 영화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것은 과연 이 영화를 어느 정도나 기대하고 보느냐의 차원이 될 것 같습니다.

 

 

줄거리. 태훈(정지훈)은 비행 실력에 있어선 따를 사람이 없지만 도대체 질서와 복종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파일럿. 결국 묘기를 부리다 공군 시험비행단에서 쫓겨나 (아마도 동부전선 어디쯤의) 전투여단에 배치됩니다.

 

선배 대서(김성수)의 편대에 배속된 태훈은 여기서 동기생 유진(이하나), 후배 석현(이종석)과 함께 비행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여단의 에이스는 미국 연수까지 다녀온 철희(유준상). 그는 제멋대로인 태훈의 기를 꺾어 진짜 군인으로 만들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훈은 여기서 미모의 정비사 세영(신세경)을 발견하고 달콤한 연애에 빠져듭니다.

 

그러는 사이, 북한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고, 서서히 긴장이 고조됩니다.

 

 

 

오래 전, '탑 건'이 개봉할 무렵, 관객들은 궁금증에 빠졌습니다. 이 영화가 F-14를 모는 미 해군의 최정예 파일럿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알았는데, 대체 실제 전투 장면이 나오는지, 나온다면 그 상대는 누구인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야망'이나 '빨간 마후라' 처럼 아예 전쟁 상황을 다룬 영화라면 이런 궁금증이 들 이유가 없겠지만, '탑 건'이나 '알투비' 같은 영화는 대체 '누구와 싸워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뭐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가 관객들보다 몇년 전에 했어야 할 고민입니다.

 

물론 안 싸울 수도 있겠지만, 수백억원짜리 전투기를 보여주면서 그 전투기가 실전에선 이런 위용을 뽐낸다는 장면을 넣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어나지도 않은 전쟁을 일어났다고 우기는 것도 좀 웃기는 얘기.

 

 

여기서부터 전투기와 파일럿이 나오는 영화의 리얼리티가 시험대에 오르게 됩니다. 이를테면 그 파일럿의 전투기가 어떻게 해서 교전상황에 말려들게 되느냐 하는 것인데, 이게 얼마나 그럴싸하고 납득할만한 상황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부분에서 '알투비'는 안타깝게도 좋은 점수를 따내지 못합니다.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CG가 화면을 장식하고 몇몇 장면들은 손에 땀을 쥐게 하지만, 일단 비행기가 날고 긴박한 상황이 펼쳐지면서부터 오히려 영화의 긴장감이 사라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물론 그따위가 뭘 중요하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죠.)

 

어떤 분들은 '막상 비행기가 날고 액션이 펼쳐지기 전까지, 달달한 연애담이 너무 지루했다', '그래도 마지막 항공 전투 신은 호쾌하고 볼만했다' 고 평을 합니다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살아 남을 가능성이 있다면 바로 그 유치하고 달달한 연애담 덕분이고, 정작 돈 냄새가 물씬 나는 공중 전투 시퀀스는 한마디로 '기본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아주 깔끔하게 마음을 비우고, 아무 기대도 없이 보시기를 권합니다. 영화를 보시는 동안, 절대로 논리적인 사고나 이성적인 판단 따위를 하셔서는 안 됩니다. 어쩐지 RETURN TO BASE 라는 제목은 '기본으로 돌아가라' 라는, 스스로 하는 반성처럼 읽힙니다.

 

그냥 하는 얘기는 여기까지. 나머지에선 스포일러가 밀어닥칩니다. 영화를 보러 가실 분은 여기서 표 끊으러 가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제작사 및 홍보 관계자, 알바 여러분도 별로 기분좋으실 얘기가 아니니 여기서 그냥 다른 데로 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주인공 태훈이 왜 시종일관 감정의 제어가 되지 않는 미친놈처럼 행동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습니다. 부모님이 안 계시고 (어려서부터) 할머니 밑에서 자라서? 사실 그보다는 그냥 "'탑 건'의 톰 크루즈가 대략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라는 쪽이 솔직한 설명일 겁니다.

 

이 영화의 골격은 대부분 이 공식에 따릅니다. 인물의 배치나 설정에서 어떤 목적이나 방향도 보이지 않습니다. 유일한 설명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또는 '탑 건 안 봤어? 탑 건에서도 그랬잖아' 뿐입니다. 통제가 안 되는 야생마같은 주인공이 있으면 '왠지' 냉철한 이성으로 그를 통제하려 하는 맞수 캐릭터가 있어야 할 것 같고, '왠지' 연애를 할 예쁜 정비사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왠지' 그를 이해해 주는 큰형같은 선배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왠지' 그 큰형을 짝사랑하는 선머슴 같은 동기생도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왠지 그렇게 있으면 굴러갈 것 같은' 캐릭터들이 즐비합니다. 어디서 본 듯 하고, 무슨 말을 할지 뻔히 보이는 캐릭터들 말입니다.

 

결국 그러다 보니 극의 흐름에서 생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살아 숨쉬는 듯한 캐릭터라고는 선임 정비사 역의 오달수 하나 뿐이기 때문입니다.

 

태훈과 철희가 서로 마주 보면 어떤 대화가 오갈지는 초등학생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서가 유진의 마음을 받아들여 결혼을 결심하는 순간, 모든 관객들은 '아, 대서는 영화가 끝나기 전에 이승을 하직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이지 이 영화에서 위 사진의 세 인물과 관련된 대사, 설정, 연기는 모두 최악입니다. 이 세 인물이 나오는 부분을 싹 들어내면, 이 영화에 대한 악평이 상당부분 감소될 수 있을 듯 하지만... 그건 불가능하겠군요.

 

'알투비'를 보다 보면, 촬영할 때 있었던 참 많은 장면들이 가혹한 편집 과정에서 삭제됐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살아남은 장면들조차 이렇게 뻔하디 뻔한 장면의 연속일 때는 참 난감합니다. 심지어 그 뻔한 대서의 장례식 장면에, 대서의 어린 아들이 영정을 들고 걸어가는 장면까지 나오면, 관객은 슬픔과는 아무 상관 없는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나마 좀 다행인 것은 메인 주인공을 정지훈과 신세경이라는 매력적인 스타들이 맡았다는 정도. 이해하기 힘든 두 인물의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그 역할을 연기하고 있으면 왠지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특히 세영의 주정 장면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활력 있는 장면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의 알콩달콩 장면이 이 영화의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 영화의 흥행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주인공이 정지훈과 신세경이 아니었다면... 꽤 끔찍한 결과가 벌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면 문제의 전투 장면이 시작됩니다. 이 영화의 설정으로는 북한의 원산 핵기지 주변 병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 정권(아마도 김정은)에 대항하고, 자신들의 선명성(?)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미국을 향해 핵탄두가 장착된 ICBM을 발사하려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일까요? 이를테면 김정은 정권을 타도하고 싶은데 자신들의 힘으로는 영 부족하니 미국을 향해 ICBM을 발사하면 미국이 그 보복으로 북한 체제를 궤멸시킬 거라는 계산일까요. 단순한 자살 테러 치고는 참 심오합니다. 어쨌든 그냥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이런게 한두가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눈에 띄는 것만 거론하자면, 수도 서울에다 총질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 대는 전투기를 '민간인 피해 때문에 격추시킬수 없다'고 주장하는 지휘본부, 대서의 3일장을 치르는 동안 완전히 전 세계가 (대서를 애도하기 위해?) 휴전상태로 들어갔다가 장례식을 마치자 다시 시작되는 '긴박한 상황', 긴 밤 다 지새우고 굳이 대낮에 단 2기로 북한에 침투하는 놀라운 대담성, 그런데 그 단 2기를 막아내지 못하는 엄청난 방공망, 지하 활주로는 폭파됐는데 대체 어디서, 그것도 단 1기만 날아왔는지 알 수 없는 MIG-29 요격기, 분명히 발사되는 걸 봤는데도 공중에 정지하고 있다가 태훈의 폭격을 받고 폭발하고 마는 이상한 ICBM, 휴전선 바로 위인 원산에서 핵탄두가 폭발했는데도 거기에 대한 걱정이나 대비는 전혀 없는 만사 태평의 한-미 양국 군사 수뇌들.... 한마디로 참 감당하기 힘든 내용이 이어지지만 뭐... 날아가는 비행기의 CG는 멋집니다.

 

 

 

당연한 반론이 예상됩니다. "누가 이런 영화를 보면서 그런걸 그렇게 따지냐"에서 그저 "이런 영화가 처음이다 보니 시행착오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면 언젠가 한국 영화도 할리우드 수준의 창공 액션 영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고..."라는 등등. 하지만 그렇게 훈훈하게 덕담을 주고받기엔 아쉬움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늘 얘기하지만 말이 되고 안 되고는 항상 그 영화가 갖고 있는 틀 안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럼 스타워즈에서 광선으로 칼싸움하는 건 말이 되냐?'는 식의 반론은 바보 인증일 뿐입니다. 그건 원래 전제가 그렇게 되어 있는 영화입니다.)

 

'제7광구' 때도 그랬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특수효과가 아니라 플롯과 대사, 연기입니다. 특히나 이런 류의 영웅담 블록버스터에서는, 제발 오글거려야 할 장면에서는 정말 눈물이 쭉 나올만큼 오글거리는 대사가 나와줬으면 합니다. 저는 작전에 투입되는 파일럿들이나 석현을 구하러 가는 레스큐 팀에게 비행단장이 뭔가 정말로 아드레날린이 확 뿜어나오는 연설이라도 할 줄 알았습니다.

 

이상하게도 한국 영화는 규모가 커지고 제작비가 많이 투입될수록 이런 기본은 점점 무시되는 경향이 있는 듯 합니다. 그래서 제목이 RETURN TO BASE, '기본으로 돌아가라' 일까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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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 '도둑들'의 전지현과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앤 해서웨이를 비교하는 기사들이 나올 때부터 올 여름 한국 극장가의 판도는 결국 '도둑들'이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맞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은 상식이 된 듯 합니다. 물론 '연가시'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고 있지만, 진짜 승부는 이제부터가 아닐까 싶습니다.

 

최동훈 감독은 '범죄의 재구성' 이후, 관객 동원 면에서 단 한번의 비틀거림도 없이 정상을 질주한 희대의 흥행사입니다. 이 '흥행사'라는 말이 불편하신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투자자와 제작사의 입장에서 보면 구세주나 다름 없죠. 더구나, 그 작품들 중 어느 한 편도 성미 까다로운 비평자들로부터 '대체 어떻게 저따위 영화가 대박이 날 수가 있나. 관객이란 존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한탄을 자아내지 않았으니, 한국 영화계의 간판 스타라는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이렇게 빠돌이풍의 도입부를 걸었으니, 이 글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도 대략 예상하실 듯 합니다. 사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홍콩 느와르 전성기의 정서였습니다.

 

 

 

줄거리. 한 유명 미술관 복도. 모녀간으로 변장한 씹던껌(김해숙)과 예니콜(전지현)이 걸어들어갑니다. 예니콜이 작업해 놓은 젊은 관장(신하균, 특별출연)을 만나기 위해서죠. 밖에서 뽀빠이(이정재)와 잠파노(김수현)이 와이어를 걸고, 이들은 순식간에 미술관의 보물 향로를 훔쳐냅니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로 뽀빠이가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고, 때맞춰 도착한 마카오박(김윤석)의 콜을 받아 일당은 마카오로 날아갑니다. 가석방된 펩시(김혜수)도 일행에 합류합니다.

 

마카오에는 첸(임달화)와 조니(증국상), 줄리(이심결), 그리고 앤드류(오달수) 등 홍콩 패거리가 준비하고 있습니다. 마카오박은 한국과 홍콩의 연합 도둑 드림팀에게 마카오 카지노로 오고 있는 300억짜리 다이아몬드를 훔치자고 제안합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배경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참 노골적입니다. '오션스 일레븐'에서 정점을 찍은 케이퍼 무비(caper movie: 범죄를 모의해서 실행하는 과정을 따라가며 보여주는 영화)의 전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영화 제작사 이름이 '케이퍼 필름'입니다. 이렇게 내놓고 시작하니 비슷하다 뭐다 하는 얘기는 아예 말도 꺼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케이퍼 무비에다 올스타 캐스팅까지 갖춰졌으니 이제 필요한 건 조율. 한 영화에 한두명만 써도 적절하다 싶은 배우들을 통으로 엮었으니 자칫하면 분량 시비가 일어나고, 심하면 "야, ***는 그 영화에 대체 왜 나온 거냐?"는 소리가 나올 판입니다. 그렇다고 배우 체면 때문에 분량을 살려 주다가 영화가 지루하네, 군더더기가 너무 많네 하는 얘기를 듣게 되면 대참사가 일어날 수도 있죠.

 

 

 

바로 그 부분에서 최동훈 감독은 신의 솜씨를 발휘합니다. 열 손가락이 각각 다 역할을 하되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어느 하나 아쉽지 않은 안배가 이뤄집니다.

 

사실 머리 좋은 도둑들이 스케줄을 짜고, 놀라운 솜씨로 최첨단 방어막을 돌파하고, 그 결과로 부자가 되고 안 되고 하는 이야기로는 이제 승부가 나지 않습니다. 이미 너무나 많은 블록버스터들이 이 분야를 파고들었고, 레이저 광선에서 행글라이더까지 동원되지 않은 장비가 없을 지경입니다. 아무리 긴장감 넘치는 침투 과정을 설정해 봐야 관객은 지루할 뿐입니다. 결국 승부가 나는 지점은 캐릭터인 것이죠.

 

 

 

 

순도 높은 액션 장면들이 보여주는 시각적 쾌감과 아주 찰진 대사가 빚어내는 웃음 사이에서 그 캐릭터들의 얽히고 설킨 사연이 잘 버무려질 때 비로소 코믹 케이퍼 무비가 완성됩니다.

 

(사실 이런 생각으로 만든 영화다 보니 개연성은 일단 뒤로 제쳐지게 됩니다. 이를테면 이런 엄청난 사건을 벌이는 범인들 중 아무도 스키마스크 등으로 얼굴을 가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렇죠. 마카오에서도 그렇고 부산에서도 그렇고... 아무도 공개 수배 같은 건 걱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배우들간의 비중이 철저하게 1/N 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김윤석에게는 다른 배우들과 다른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도둑 연합군의 리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가장 머리를 많이 쓰는 인물이기도 하고, 다이아 탈취 작전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김윤석은 특히 이 영화의 중국어 대사에서 빛을 발합니다. 중국어를 얼마나 잘 하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영화에서 특히 중요한 홍콩 느와르의 냄새를 가장 잘 소화해 내는 배우라면 김윤석 외에 다른 대안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순서가 좀 바뀐 듯도 하지만, 이 영화는 아마도 홍콩 느와르라는 장르가 없었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영화 곳곳에는 왕년의 홍콩 영화들이 이뤄낸 성과들에 대한 오마주성 장면들이 숨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산의 낡은 건물을 배경으로 한 와이어 액션을 보면서 서극의 '순류역류(Time and Tide)'가 생각나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오래된 아파트에서의 총격전 신은 정말 당시까지는 전 세계에 비길 데가 없었던 와이어 액션(와이어를 이용해 날아다는 것 처럼 표현하는게 아니라 진짜 주인공들이 건물에 와이어 걸고 그걸 이용해 벌이는 액션!)의 명장면이었습니다. 아무래도 '도둑들'의 부산 액션 장면에는 이 영화가 영향을 미쳤을 듯 합니다.

 

 

 

 

 

물론 흔한 플롯이긴 하지만, 또 생각나는 영화는 주윤발-장국영-종초홍이라는 황금의 트리오가 출연한 '종횡사해' 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세 도둑과 그 사이의 엇갈린 러브라인. 문득 '도둑들'의 이정재에게서 '종횡사해'의 장국영에 대한 오마주를 느꼈다면 오버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그런 오마주를 몸으로 대변하는 인물은 바로 임달화입니다. 사실 1980~90년대에도 임달화는 주윤발-장국영이나 사대천왕 급의 스타는 아니었지만 왕년 '첩혈가두' 등의 영화를 통해 깊은 눈빛의 배우로 강한 인상을 남긴 분입니다. (문득 임달화 이야기를 하자니 이수현이나 양가휘처럼 요즘은 보기 힘들어진 왕년의 스타들이 생각납니다.)

 

 

 

 

아무튼 이 영화에서 임달화의 존재감은 기대 이상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권총을 손에 쥐었을 때 관객을 압박하는 비장미는 한국 배우들에겐 아직 기대하기 힘든 듯 합니다(은근히 리얼리티가 없어서 그런 걸까요...). 특히 '도둑들'에서 임달화의 라스트 신은 두고 두고 기억날 장면이라 해도 좋을 듯 합니다. 아울러 임달화와 김해숙의 러브 라인도 빛을 발합니다.^^

 

임팩트를 놓고 보자면 이 영화 전체에서 가장 빛을 발하는 배우는 전지현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배우의 능력보다는 감독의 역할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전지현은 여전히 '엽기적인 그녀'에 머물러 있고, 그 캐릭터를 여전히 잘 소화해 냅니다. 그 캐릭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뽑아낸 것이 바로 '도둑들'에서의 전지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 캐럭터는 대성공입니다.

 

 

 

 

반면 김혜수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전지현의 따발총같은 대사와 많은 액션이 극장에 앉아있는 내내 관객을 즐겁게 하지만 영화가 끝나고 더 많이 기억나는 것은 김혜수의 캐릭터 쪽입니다. 어쨌든 이 영화의 핵심 축은 김윤석 - 김혜수 - 이정재 라인이고, 이 라인 위를 흐르는 감정이 마무리되어야 영화가 끝납니다.

 

비중으로 보면 오달수와 김수현은 조연이죠. 하지만 김수현이라는 거물(?)이 출연한 만큼, 그 캐릭터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았고, 연기도 흠잡을데가 없었습니다. 분량이 적다는게 아쉬울 정도. 김수현과 전지현을 주축으로 한 속편을 기대하게 합니다. 일각에서는 '전지현을 뺀 배우들의 존재감이 부족하다'고도 하는데, 그건 이런 올스타 캐스팅 영화를 보는 자세가 아니죠. 이런 말은 '타워링'에서 스티브 맥퀸밖에 기억이 안 난다거나,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모건 프리맨이 낭비됐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도둑들'의 캐스팅이 사기라고 생각되는 건 정말 지나가는 듯한 역할까지도 대단한 배우들이 등장한다는 데 있습니다. 신비의 여인 역을 맡은 예수정이나 채국희, 카지노 매니저 역으로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하는 최덕문, 그리고 사건의 키를 쥔 인물(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자세한 설명은 생략) 역으로 출연하는 연출가 기국서 등이 그렇습니다.

 

 

기국서의 경우에는 기주봉씨로 착각하신 분도 아마 있을 듯. 왼쪽이 기주봉, 오른쪽이 기국서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지만,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볼 것으로 예상되는 '도둑들', 한마디로 2012년 한국 영화의 뛰어난 성취라고 불러 부족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재미 면에서든, 느껴지는 공력 면에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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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나이트 라이즈] 예매 전쟁이 붙었다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영어 원제는 그냥 rise가 아니라 rises입니다)를 봤습니다. IMAX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열성팬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국내에서 음향으로 알아준다는 롯데시네마 건대 6관을 이용했습니다. 덕분에 한스 짐머의 진면목은 실컷 누리고 왔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번 작품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배트맨 3부작을 마무리하겠다고 이미 공언한 바 있습니다. 전작 '인셉션'의 흥행 성공 이후 한 인터뷰에서도 "인셉션이 흥행과 평단 양쪽에서 성공한 덕분에, 나의 마지막 배트맨 시리즈를 영화사에 전혀 빚진 느낌 없이, 그리고 아무런 간섭 없이 만들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다크나이트 라이즈' 개봉. 미국과 국내의 평론가/기자들은 일제히 입을 모아 놀란 감독과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성과에 대해 찬양에 나섰습니다. 심지어 '거룩하다'는 표현까지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이야기는 '다크 나이트'가 끝난 시점에서 8년 뒤에 시작합니다. 브루스 웨인(크리스찬 베일)은 '투페이스' 하비 덴트의 죽음 이후 세상을 등지고 칩거합니다. 범죄자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하비 덴트 특별법'을 통해 고담 시의 범죄율은 뚝 떨어지고 평화가 찾아오지만 짐 고든(게리 올드만)은 '아직 전쟁을 끝날 때가 아니다'라는 염려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웨인은 자신의 집을 털러 온 캣우먼(앤 해서웨이)의 등장, 그리고 자신이 배트맨이라는 것을 간파한 젊은 이상주의자 경찰관 블레이크(조셉 고든 레빗) 과 함께 세상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고담이 거물 용병 베인(톰 하디) 무리에 의해 습격당하자 다시 배트맨으로 변신합니다. 하지만 베인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뇌나 완력 모두 막강합니다.

 

 

액션 블록버스터로서의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완벽합니다. 특히 도시형 수직이착륙 전투기 '더 뱃(The Bat, 바로 아래 사진)'의 등장과 함께 액션은 더욱 화려해졌습니다.

 

 

전체 영화 속에서 액션의 비중이 그리 높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고편을 통해 공개된 풋볼 경기장 폭파 신이나 베인 일당의 항공 액션 등은 확실히 액션이란 절대적으로 '양보다 질'이라는 것을 입증해냅니다. 한스 짐머의 묵시록적 교향시를 바닥에 깔고 있는 이런 장면들은 이미 '트랜스포머'나 '어벤저스'에 익숙해진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감탄을 일으킵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수천명의 대격돌 신에서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물론,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얘기할 때 액션만으로 이야기를 끝낸다면 그거야말로 바보같은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슈퍼 히어로 무비들과 놀란의 '배트맨' 3부작 사이에는 대양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소위 철학적 담론 얘깁니다. 그리고 '다크나이트 라이즈' 역시 전편들과 같이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있습니다. (뭐 개인적으로는 약간 이견이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들은 여기서 발길을 돌리시는게 좋겠습니다.^ 이후 부분에서는 심하지는 않지만, 영화 내용을 꽤 언급하는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영화 얼른 보시고, 다시 오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댓글도 나중에 보시는게 좋습니다.

 

주로 이 영화를 '액션 블록버스터'만으로 볼 것이냐(즉 '트랜스포머'나 '배틀십'과 같은 기준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그 이상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배트맨 비긴스'와 '다크나이트'를 통해 크리스토퍼 놀란은 정의라는 필요악의 선을 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슈퍼 영웅 배트맨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그려냈습니다. 특히 '다크나이트'는 배경색을 통해 그리려는 사물의 윤곽을 드러내듯, 순수한 악의 화신 조커를 통해 과연 정의의 집행자와 악의 화신 사이엔 어떤 간격이 있는지를 보여줘 온 세상의 갈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배트맨의 도덕률에 대한 설정은 이야기의 흐름에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배트맨은 정의를 수호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 능력을 함부로 사용해선 안된다는 엄격한 자기만의 원칙 아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살인은 절대 안 된다'는 것이죠. 배트맨은 조커를 비롯한 악당들에게 '나는 너같은 살인마와는 달라'라고 말합니다. 조커는 갖은 노력을 통해 -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 배트맨이 통제되지 않는 살인자가 되게 하려 시도하지만 결국 실패하죠.

 

그런데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과연 저런 도덕적 기준이 실질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의는 본래 필요악입니다. 악당들이 총을 들고 사람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 때문에 목숨을 잃을 때, 소위 '슈퍼 영웅'이 자신만의 '살인 금지' 원칙을 고수하기 위해 그 범죄를 막지 않는다면 대체 슈퍼 영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배트맨의 이런 우유부단함은 지구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미국의 국제 분쟁 개입 결정과 비교되곤 했습니다. 물론 개입을 결정하는 요인이 반드시 '정의의 실현'만은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영화 속에서도 배트맨 캐릭터의 문제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배트맨은 이번에도 상황을 무시한 채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없어'라는 원칙을 고수해 계속 답답한 상황을 연출합니다. 심지어 개연성 면에서도 무리가 발생합니다.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월 스트리트의 대격전에서, 배트맨이 탄 공격기 '더 뱃'은 베인 군단의 장갑차에서 기관총 1정만 제거하고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배트맨은 다른 경찰관들과 함께 맨주먹으로 격전에 참가하죠.

 

자동화기와 장갑차로 무장한 베인 군단에게 3천명의 경찰관이 곤봉과 권총만으로 무장하고 달려드는 것은 실전이라면 거의 자살행위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월등한 화력을 보유한 배트맨이 '살인은 안된다'고 물러선 것은 정말 무책임한 행위가 아닐수 없습니다. 배트맨이 화력을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경찰관들의 병력 희생은 몇십배가 되었을 겁니다. (뭐, '소수의 영웅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희생을 통해 얻어낸 승리가 진정한 승리'라는 교훈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핵폭탄을 실은 트럭을 제지하려는 순간에도 '더 배트'는 호위 차량을 제압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호위차량이 발사한 미사일을 피하느라 시간만 낭비하죠.

 

(이 결전 이전에 주인공들은 "45분 후면 핵폭탄이 터진다"며 긴장된 표정으로 전투를 준비합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원칙 타령이나 하는 영웅이라니... 이 장면을 보고 감동하신 분들에겐 죄송하지만, "너 가고, 아이언맨 불러와"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물론 여기까지, 배트맨의 이런 특성이 답답한 사람은 답답한 것이고,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걸로 그만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개연성의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나의 배트맨은 원래 그래' 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그 밖에도 스토리의 전개에서 매끄럽지 않은 부분들이 눈에 띕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놀란의 너무 큰 야심과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너무 높은 기대 수준의 불균형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우선 베인을 비롯한 '악의 세력'의 캐릭터가 부실합니다. 베인 자신은 뛰어난 두뇌, 막강한 전투력, 거기에 부하들로 하여금 배신보다 죽음을 선택하게 하는 막강한 리더십을 자랑하지만 그 존재의 근거가 되는 사상이 모호합니다.

 

이를테면 대체 왜 고담을 외부로 부터 차단해 점령하고, 5개월간 무정부 상태를 유지한 뒤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는지에 대한 마땅한 설명이 없습니다. 대체 그는(혹은 그를 배후조종하는 탈리아 알굴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댓글을 참고해 몇마디 덧붙입니다.

 

많은 분들이 베인의 동기란 '라스 알굴의 유지 계승'과 '탈리아 알굴에 대한 사랑과 추종'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물론 이 내용은 영화에 나옵니다. 그렇지만 베인이 영화 속에서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보면 '배트맨 식의 설정'에 익숙한 마니아가 아닌 일반 관객들을 설득하기에는 역시 부족합니다.

 

이를테면 핵 과학자 납치 -> 웨인의 지문 탈취 -> 증권거래소 습격 -> 웨인 회사 경영위기 -> 미란다의 웨인 그룹 입성 -> 원자로 위치 파악 -> 테러로 고담 장악 -> 원자로를 핵폭탄으로 -> 5개월간의 해방구(?) 운영 -> 파멸 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왜 밟아야 하는지 납득할만한 동기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물론 굳이 설명하려면 할 수는 있겠죠. 그렇지만 일반 관객이라면, 억지라는 생각이 드는게 정상일 겁니다.

 

(아울러 지하에 갇힌 3천명의 경찰관을 왜 몰살시키지 않고 먹여살렸는지도... 혹시 고든과 블레이크가 식량을 조달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도시가 고립된 상태에서 3천명을 5개월 동안 먹고 마시게 할 수 있는 보급량을 10여명의 지하조직이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베인이 물과 음식을 주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렇다면 대체 왜?)

 

 

 

고담이야말로 현대 서구 문명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 고담을 타락시키고 멸망시키는 것이 온 세상에 본보기라도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리고 나서 그 목적을 이뤘으니 순교자가 되려는 걸까요.

 

참 기이한 악당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커만큼 선명한 목적이나 행동의 동기가 없는 이상한 악당은 이 영화의 극적 흥미를 상당 부분 떨어뜨립니다. 베인 일당이 미국이 상대하고 있는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비유라면, 놀란은 그들에 대한 이해가 너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듭니다. (실제로 미국의 많은 논자와 관객들은 베인을 '슈퍼 빈 라덴'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놀란은 영화 내내 현실에 대한 은유를 시도하지만, 그 결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occupy wall street' 시위를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증권거래소를 덮친 베인 일당에게 한 딜러는 "여기는 (현금이 오가지 않는) 증권거래소라 훔칠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베인은 "그런데 너희는 잘도 훔쳐 가더군?"이라고 비웃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놀란은 '자본의 탐욕에 맞선 시민들의 분노'를 다룰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놀란에 의해 그려지는 고담 시는 대혁명 때의 파리와 판박이가 됩니다. 혁명을 사칭한 베인 일당에 의해 교도소(바스티유?)는 무너지고, 혁명 재판소에서는 매일 피를 부르는 막무가내의 학살극이 펼쳐집니다. 이렇게 해서 월 스트리트를 점령했던 '분노한 시민들'은 베인 일당의 선동에 놀아난 '사회 불만세력 내지는 난동세력'으로 전락당합니다.

 

이런 어수선한 진행 끝에 결론은 '모든 사람은 영웅이 될 수 있고, 세상은 한두명의 영웅에 의해 유지되지 않는다'는 교과서적인 것이라니. 너무 안이합니다. 결론은... 놀란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피력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건 그냥 안 하는 게 나을 뻔 했습니다. 오히려 그 자신이, 인류 문명사의 복잡다단한 논점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냈을 뿐입니다.

 

물론 '배트맨 영화를 보면서 그런 것을 기대하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혹은 '이건 원래 만화잖아!' 라는 반론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놀란은 지금까지 '다크나이트'와 '인셉션' 등을 통해 자신이 그냥 단순한 상업영화 감독이 아니라는 기대를 심었습니다. 당연히 평가의 기준이 높아졌죠. 그리고 '다크나이트 라이즈'는 단순한 블록버스터 이상을 시도한 작품이되, 놀란 스스로 높인 기대치를 충족시킬만한 영화는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이 대목에서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배트맨' 마니아들은 한 시리즈의 마무리에 환호했을 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단순히 이 영화를 그냥 블록버스터로 소비한 관객에게도 꽤 훌륭한 선택이었겠지만, 놀란 감독의 작품들을 관심있게 지켜본 관객에게는 전작, 특히 '다크 나이트'에 비해 부족한 부분들이 아쉬울 뿐입니다. 그만치 기대치가 크기 때문에 아쉬움도 큰 것이겠죠. '어벤저스'나 '스파이더맨' 같은 영화들과 이 영화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분명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최고의 배우들이 망라된 이 영화의 캐스팅에 토를 단다는 것은 정신나간 짓이겠지만, 마리옹 코티아르가 왜 이 영화 저 영화에서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자로 나오는 지 납득이 가지 않는 사람으로서 미란다 역은 아무래도 미스캐스팅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면 이 영화의 가장 큰 수혜자로는 앤 해서웨이를 꼽지 않을 수 없겠더군요.^^

 

 

 

역대 최고의 배트맨 배우로 평가받고 있는 크리스찬 베일은 다시 배트맨을 연기할 수 있을까요? DC코믹스는 잭 스나이더가 준비하고 있는 슈퍼맨 시리즈의 리부트와 함께 마블의 '어벤저스'에 맞먹는 '저스티스 리그'의 출범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일단 베일은 한 인터뷰에서 "크리스(놀란)가 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 한 이번이 배트맨으로는 마지막"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일말의 가능성은 남긴 셈이죠.

 

P.S. 많은 분들이 최근 일어난 극장 총격 난사사건에 우려를 표명합니다. '다크나이트'에서도 모방 범죄 애기가 나오지만 거기선 악당이 아닌 배트맨을 모방한 사람들 이야기였죠. 반면 이번 총격범은 '나는 조커다'라고 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악역을 너무 멋지게 그려낸 부작용일까요.

 

P.S.2.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해석도 사실 논란거리입니다. 과연 브루스 웨인은 은퇴한 것일까요? 그럼 이제 정의 수호는 '로빈 맨'의 것일까요? 놀란은 배트맨-로빈 컴비를 긍정하는 것일까요, 부정하는 것일까요? 보신 분들의 의견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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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월요일, 영화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시사회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 블로그를 통해 소개했던 영화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덜 대중적인 영화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제목인 '모피를 입은 비너스'는 아시다시피 레오폴트 자허마조흐의 소설 제목입니다. 그리고 저 작가의 이름 자허마조흐에서 학대와 모욕을 당하면 성적 쾌감을 느끼는 이상 성욕을 가리키는 매저키즘이라는 말이 나왔죠.

 

소설 내용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권력 균형과 극한으로 치닫는 욕망을 그리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에서 전혀 이탈하지 않고 있다는 점, 그러면서도 코믹함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6년째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영화감독 민수(백현진)는 어느날 섹시하면서도 베일에 가려진 여자 주원(서정)을 발견하고, 그녀에게서 영감을 얻기 위해 매달립니다. 하지만 주원은 내심 민수를 '벌레'라고 호칭하며 우습게 생각합니다.

 

민수는 그녀의 매력에 끌리는 동시에 그녀의 재력에도 욕망을 느낍니다. 하지만 주원은 이미 상대를 노예로 길들이며 즐거워하는 데 익숙해진 터. 민수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줄듯 줄듯 하면서 즐기는 것(tantalizing)이 그녀의 목표입니다.

 

 

 

 

주원에게 부와 함께 성적 취향을 유산으로 남긴 사람은 얼굴이 나오지 않는 '남궁 회장'이라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결국 주원은 지금도 허회장이라는 인물과 정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죠. 그에게 민수는 하잘 것 없는 심심풀이의 대상 쯤 됩니다.

 

이렇게만 쓰면 이 영화가 인간의 욕망을 그리는, 대사는 거의 없는 1980년대 유럽 영화와 흡사할 것처럼 여겨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코미디라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일단 송예섭 감독의 내면 깊숙히 존재하는 시니컬한 유머감각이 영화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받아 마시지 말고 나한테 부으란 말이야!" 뭐 이런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이렇게 쓰면 제가 감독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데, 사실 그렇습니다. 제가 대한민국 영화감독 가운데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름을 보시면 눈치 빠른 분들은 짐작하시겠지만 - 제 사촌형이기 때문입니다.^ )

 

 

 

 

이 영화 속 캐릭터들의 특징은 양면성입니다. 주원과 관계를 맺는 허회장은 권력을 향한 심각한 얼굴과 주원의 성적 노예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두 가지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민수 또한, 기존의 영화들에서 묘사되던 차분한 관찰자나 희생양과는 다른 캐릭터입니다.

 

그 자신이 주원에게는 극도로 굴종적이지만,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잔혹한 면모를 드러냅니다. 이런 배치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가 반드시 일방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한쪽 측면에서는 약자로 보이는 한 인물이,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은 아니죠.

 

 

 

 

민수 역의 백현진은 어어부 프로젝트의 멤버로 무대에 섰을 때 보여주는 카리스마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면모로 웃음을 자아냅니다. 거의 아양 떠는 어린이의 모습으로 주원에게 매달리는 모습이 특히 그렇죠. 어쨌든 직업배우가 아니라는 백현진의 말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어눌함을 지향한 연기는 무척 뛰어납니다. 특히 주원에 대한 세레나데 신은 아무래도 백현진 이외의 다른 배우가 했다면 정말 안 어울렸을 듯 합니다.

 

오랜만에 복귀한 서정은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충분히 뿜어냅니다. 제작진이 원한 '모피를 입은 비너스'의 이미지가 딱 이런 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죠. 다만 무엇이 그렇게 주원을 주변 사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파멸로 이끌어가는지, 동기 부여가 좀 더 충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전체적인 완성도에 대해 제가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는 결과를 낳을 듯 합니다.^^ 저는 계속 낄낄거리면서 봤습니다만, 그건 직업이 영화감독인 주인공 민수의 모습에서 제 사촌형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직접 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이 좋을 듯.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서 상영중입니다.

 

 

 

P.S. 티치아노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 이 그림이 바로 자허마조흐의 원작에 영감을 준 작품이라고 합니다. 아랫도리에 두르고 있는 모피가 권위와 억압의 상징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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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사화(1504)의 만행으로 수많은 신하들의 피를 흘린 연산군. 이해 4월 인수대비도 숨을 거두고, 이제 연산군의 만행을 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언뜻 생각하면 이제부터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때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 그로부터 2년 뒤 연산군은 장녹수와 노닐다 말고 권좌에서 내려와 유폐되는 신세가 됩니다. 왕좌는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중종)에게 물려주게 되죠.

 

이 대목에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연산군은 왜 진성대군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최고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2년만에 쫓겨나는 신세가 됐을까요.

 

 

 

드라마 '인수대비'에서도 다뤄지지만 연산군이 폐위될 때 거론된 수많은 죄 중에는 '패륜'이 으뜸입니다. 패륜 중 하나는 앞글에서 얘기했다시피 병중인 할머니 인수대비를 '이마로 박치기 해' 충격으로 사망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자신의 큰어머니고 아버지 성종의 형수인 월산대군부인(승평부부인) 박씨와의 사통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 (1506, 정덕1)  7월 20일(정유)
 
월산 대군의 처 박씨의 졸기
 

월산 대군 이정(月山大君李婷)의 처 승평부 부인(昇平府夫人)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이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 박씨와의 관계는 - 일단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 연산군의 폐위에 매우 직접적인 원인이 됩니다. 왜냐하면 중종반정의 핵심인 박원종이 바로 승평부부인의 동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날이 7월20일, 연산군이 권력에서 물러난 것이 9월2일입니다. 그러니 정말 직접적인 동기가 아닐 수 없죠. 아무튼 연산군과 박씨를 둘러싼 추문 묘사는 실록에서도 대단히 구체적입니다.

 

항상 대궐안에서의 연회에 사대부(士大夫)의 아내로서 들어가 참여하는 자는 모두 그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하고, 미모가 빼어난 이는 녹수를 시켜 머리 단장이 잘 안되었다고 핑계대고 그윽한 방으로 끌어들이게 해서는 곧 간통했는데, 혹 하루를 지난 뒤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시 내명(內命)으로 인견(引見)하여 금중(禁中)에 유숙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월산 대군(月山大君) 부인은 세자의 양모라는 핑계로 항상 금내(禁內)에 머물게 하였고, 성종의 후궁 남씨(南氏)도 대비의 이어소(移御所)에 있으면서 자못 총행(寵幸)을 입어 추한 소문이 바깥까지 퍼졌다.

常於內宴, 士大夫妻人參者, 皆令書其夫姓名, 付諸衣領, 有姿色者, 令綠水, 諉以梳粧不整, 引入幽房, 卽通焉。 或經日後出, 或復以內命引見, 留宿禁中者, 亦數有之。 月山大君夫人, 稱爲世子養母, 常留禁內。 成宗後宮南氏, 亦在大妃移御所, 頗見寵幸, 醜聲聞外。

 

'녹수를 시켜'의 녹수는 당연히 장녹수. 또 다른 기록.

 

중종 5년 경오(1510,정덕 5) 4월17일 (임인) 
 평성부원군 박원종의 졸기
 
원종은 순천(順川) 사람이며, 무과로 출신(出身)했는데 풍자(風姿)가 아름다웠고, 폐주(廢主) 말년에 직품이 정2품에 이르렀다. 원종의 맏누이는 월산 대군 이정(月山大君李婷)의 아내로 폐주가 간통하여 늘 궁중에 있었는데, 폐주가 특별히 원종에게 숭정(崇政)의 가자를 주니 원종이 분히 여겨 그 누이에게 말하기를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 하였다.


元宗, 順天人, 由武擧進, 美風姿。 廢主末年, 位至正二品, 元宗之姉, 乃月山大君婷妻也, 廢主通焉, 長在宮中。 廢主特授元宗崇政加, 元宗憤之, 語其姉曰: “何爲忍生, 飮藥而死。

 

이 주장에 따르면 박원종이 누이의 죽음을 강요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실 연산군과 박씨의 관계가 사실이겠느냐는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의심의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박씨의 나이. 박원종이 1467년생이고, 맏누이인 승평부부인은 1455년생으로 전해집니다. 그럼 박씨는 죽을 때 만 51세...연산군이 1476년생이니 21세 연상입니다.

 

뭐 나이가 사랑의 장벽이 될 수는 없겠지만 지금의 51세도 아니고 15세기의 51세에 과연 임신이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 시절의 51세면 사실상 할머니에 가까운데 도대체 무슨 마술로 연산군을 미혹시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좀 의심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남녀관계였는지, 양어머니와 아들 관계였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연산군이 매년 수백필의 비단과 수십석의 곡식을 박씨에게 내린 것이 사실이고, 불교를 숭상하던 박씨의 집에 사대부집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풍기문란으로 미운털이 박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러나 저러나 연산군과 함께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 것은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당초의 궁금증으로 돌아가서. 연산군은 왜 최대의 라이벌인 진성대군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일설에는 정현왕후(자순대비)가 키워준 공 덕분에 진성을 친동생처럼 아꼈다고 하지만 지난번 글에서 '그날 밤(성종의 후궁들을 죽이던 1504년 3월20일)'의 기록에 연산군이 자순대비 침전 앞에 칼을 빼들고 난입해 당장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되어 있는 걸 보면 이런 설명은 그닥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5card.tistory.com/1012 참조.)

 

자신의 권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자신의 심복 신수근의 딸과 혼인한  진성대군이 '딴 마음'이 없다고 확신한 걸까요. 이런 설명도 신통치 않은 것이, 진성이 아무리 다른 마음이 없어도 그가 살아 있는 한, 모든 반란 세력은 일단 그를 옹립하고 일어난다고 봐야 합니다. 반대로 연산군이 죽이려고 결심만 했다면, 반란 사건하나를 조작하고 진성대군을 그 수괴로 조작하는 건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죠.

 

무엇이 이유였을까요. 마침 며칠 전 '인수대비' 종방연 자리에서 정하연 작가를 뵌 김에 여쭤봤습니다.

 

- 대체 연산군은 왜 진성대군을 죽이지 않았을까요.

정: 허허. 죽일 새가 없었던 것 아닐까요?

 

- 왕위에 12년이나 있었는데요.

정: 인수대비가 살아 있는 동안은 꿈도 꿀수 없는 일이었죠. 조선왕조의 이념은 충보다 효가 항상 우위에 있었어요. 대비가 살아있는 한 어떤 왕도 그 대비를 넘어설 수 없었으니까요. 광해군이 쫓겨난 가장 큰 이유도 패륜, 바로 모후는 아니지만 선왕의 정궁인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이었죠. 그러니 기회가 있었다면 인수대비 사후 뿐이에요.

 

- 인목대비 사후에는...

정: 의미나 시간이 없었죠. 이 정권은 갑자사화와 인수대비 사망 이후에 급격히 무너집니다. 사람을 죽이면 권력이 강화될 수도 있었지만, 그 와중에 할머니의 뜻을 거스르고, 할머니를 핍박해 죽게 했다는 것은 연산군에게 치명적이었던 겁니다. 박원종 아니라 누구라도 뒤집어 엎었겠죠. 연산군 스스로도 이미 민심과 신심이 모두 자신을 떠나 자신이 왕위를 오래 보전할 수 없을 것임을 눈치챘습니다.

 

(연산군이 자신의 앞날을 예감했다는 내용은 실록에도 전해집니다. 1506년 8월23일, 왕위에서 밀려나기 대략 열흘 전의 기록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1506,정덕 1) 8월23일 (경오)
 
후원에서 나인들과 놀며 불의의 변고를 예감하다. 전비와 장녹수 두 계집이 슬피울다
 

내거둥이 있었는데, 왕이 후정(後庭) 나인을 거느리고 후원(後苑)에서 잔치하며 스스로 초금(草笒) 두어 곡조를 불고, 탄식하기를,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는 것
하며, 읊기를 마치자 두어 줄 눈물을 흘렸는데, 여러 계집들은 몰래 서로 비웃었고 유독 전비(田非)와 장녹수(張綠水) 두 계집은 슬피 흐느끼며 눈물을 머금으니, 왕이 그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이르기를,
“지금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에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면하지 못하리라.”
하며, 각각 물건을 하사하였다.

 

有內擧動, 王率後庭內人, 宴後苑, 自吹草笒數闋, 嘆曰: “人生如草露, 會合不多時。” 吟訖淚數行下, 諸姬共竊笑, 唯田、張二姬, 悲噓飮泣, 王手撫其背曰: “今太平日久, 安有不虞之變, 然脫或有變, 汝必不免。” 各賜物。

 

정하연 선생의 말대로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정치력은 극도로 악화됩니다. 언문으로 연산군을 욕하는 벽보가 붙은 사건은 연산군이 민심을 잃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고, 그 측근 중에는 무력으로 정국을 끌고 갈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연산군의 측근 중 하나고 두 차례의 사화에서 모두 승자였던 노련한 총신 유자광이 어느새 중종반정의 주역으로 변신했다는 것은 연산군의 총신들 중에도 정권 보위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대변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연산군 집권 말기 그 측근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묘록 속집(己卯錄續集)

구화사적(構禍事蹟)

정덕(正德, 명 무종(明武宗)의 연호) 병인년(1506)에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事)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과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이 반정을 하려 할 때에 우의정 강귀손(姜龜孫)을 시켜 비밀리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생각을 떠보게 하였다. 이에 수근이 말하기를, “매부를 폐하고 사위를 세우는 것이니 나는 말할 수가 없소.” 하였다. 곧 연산(燕山)의 비(妃)는 수근의 누이요, 중종(中宗)의 전 왕비는 수근의 딸이기 때문이다.

(守勤曰。廢妹夫立女婿。吾所未能言。蓋燕山妃乃守勤之妹。而中廟前妃守勤之女故也)

 

귀손이 마침 등극사(登極使)로 명 나라 서울에 가는데 일이 발각될까 스스로 의심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한 나머지 병이 되어 길에서 죽었다. 원종 등은 귀양가 있는 이과(李顆)가 병사(兵使)ㆍ수사(水使)ㆍ수령과 더불어 본도의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올라온다는 말을 듣고 기일을 당겨서 먼저 거사하려 하였다. 그런데 9월 초이튿날에 마치 연산군이 장단(長湍)의 적벽(赤壁)에서 놀이를 하게 되었으므로 그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초하룻날 저녁에 원종 등이 장사들을 훈련원(訓練院)으로 모으기로 약속을 하니 그날 모인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으나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이에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 유자광(柳子光)을 부르고 그의 계책에 따라 두터운 유지(油紙)를 오려 표신(標信)을 만들어서 장사들에게 나누어 주고, 죄수와 역부(役夫)를 몰아 돈화문(敦化門) 앞 수백 보쯤 되는 곳에 나가서 말을 세워 진을 치고, 운천군(雲川君)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진성대군(晉城大君)의 저사(邸舍)를 호위하게 하고, 변수(邊修)ㆍ최한홍(崔漢洪)ㆍ심형(沈亨)ㆍ장정(張珽)을 시켜 궁 내성(內城)을 지키면서 내사복시(內司僕寺)에 쌓아둔 꼴더미에 불을 질러 뜻밖의 변에 대비하게 하고, 또 신윤무(辛允武)를 보내어 용맹한 장사 이조(李藻)를 거느리고 신수영(愼守英)ㆍ신수근(愼守勤)ㆍ임사홍(任士洪)의 집으로 가서 그들을 끌어내어 쳐 죽이게 했다. 그리하여 초이튿날 자순대비(慈順大妃)의 전지를 받들어 관원을 보내어 종묘에 고하고, 왕을 폐하여 연산군(燕山君)으로 삼아 교동(喬桐)으로 옮기게 했다.

 

좌의정 신수근은 연산군의 매부이며 심복 중 심복입니다. 그런 인물에게 '난이 일어나 진성대군을 세우면 누구 편을 들겠느냐'고 물어봤는데도 음모가 누설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그 인물의 대답이 '매부와 사위 중 누구를 고르란 말이냐. 난 못 고른다'라는 것은 당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권의 핵심 인물조차도 '까짓, 난이 실패하면 내 매부가 왕, 난이 성공해도 내 사위가 왕이 되는데 나를 어쩌겠어'라는 식으로 양다리나 걸칠 생각이었으니, 누가 연산군을 지키기 위해 나섰을까요. 반정이 성공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리고 불행히도 신수근은 그의 판단과는 달리 사위가 왕이 된 덕을 전혀 보지 못했고, 중종은 공신들의 등쌀에 왕비 신씨를 사가로 돌려보내고 새 왕비를 맞아야 했습니다. 박원종 등 중종반정의 주도세력들은 신수근과 새로운 권력을 나눌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이죠.

 

신수근은 커녕 유자광조차도 '박쥐' 취급을 받아 반정 핵심세력에 의해 곧 처단당합니다. 유자광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도 반정에 이용만 당한 것이죠. 그야말로 비정한 권력의 속성입니다.

 

 


 

아무튼 드라마 '인수대비'에 따르면 인수대비는 죽어가면서도 자신의 죽음이 연산군의 정치 생명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예상했고, 그 예상대로 '할머니를 해친 패륜아'의 낙인이 찍힌 연산군은 2년만에 왕위를 내주고 유폐당하는 몸이 됩니다.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4대에 걸쳐 정권을 농단했던 인수대비. 여걸인 것은 분명하지만 결코 좋은 팔자는 아니었던 듯 합니다. 어쨌든 마지막 가는 길마저도 한 임금의 권좌를 좌우할 정도였으니 그 그림자가 결코 작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연산군이 물러나던 날의 자세한 풍경을 남겨 봅니다.

 

 

연산군 12년 병인 (1506, 정덕1) 9월 2일(기묘)
 
중종이 경복궁에서 즉위하고 연산군을 폐하여 교동현에 옮기다

 

평성군(平城君) 박원종(朴元宗)과 전 참판 성희안(成希顔)이 한 마을에 살았는데, 서로 만나 시사를 논할 적마다 ‘이제 정령(政令)이 혼암 가혹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니 종묘 사직이 장차 전복될 것인데, 나라를 담당한 대신들이 한갓 교령(敎令)을 승순(承順)하기에 겨를이 없을 뿐, 한 사람도 안정시킬 계책을 도모하는 자가 없다. 우리들은 함께 성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천명과 인심을 보건대 이미 촉망된 바 있거늘, 어찌 추대하여 사직을 바로 잡지 않을 수 있으랴.’ 하고, 드디어 큰 계책을 정했는데 모사에 참여할 자가 있지 않았다.

부정(副正) 신윤무(辛允武)는 왕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이로서 평소에 늘 근심하고 두려워하기를 ‘일조에 변이 있게 되면 화가 장차 몸에 미치리라.’ 생각하고, 원종 등에게 가서 말하기를 ‘지금 중외(中外)가 원망하여 배반하고 왕의 좌우에 친신(親信)하는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떠났으니, 환란이 조석간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오. 또 이장곤은 무용과 계략을 가진 사람인데, 이제 망명하였으니 결코 헛되이 죽지는 않으리다. 만약 귀양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군읍(郡邑)에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쳐 들어온다면, 비단 우리들이 가루가 될 뿐 아니라, 사직이 장차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 것이니, 일이 그렇게 된다면 비록 하고자 한들 미칠 수 없게 될 것이오.’ 하니, 원종 등이 뜻을 결정하였다. 이조 판서 유순정(柳順汀)은 함께 일할 수 있다 하고, 그 계획을 말하자 따르므로 이어 장정(張珽)·박영문(朴永文)을 불러 윤무(允武)와 더불어 무사를 모을 것을 언약하였다. 또 용구(龍廐)의 모든 장수들과 각기 응군(鷹軍)을 거느리고 오기로 약속하였다.

 

최측근들이 이렇게 동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이윽고 무인일 저녁에 모두 훈련원에 모여 희안이, 김수동·김감에게 달려가 함께 가자고 하니, 감은 즉시 따랐고 수동은 두려워 망서리다가 결국 따랐다. 또 유자광이 지모가 많고 경력이 많다고 하여, 역시 불러 함께 하는 한편 용사들을 임사홍과 신수근·신수영의 집에 보내어 퇴살(椎殺)하고, 또 사람을 보내어 신수겸(愼守謙)을 개성부에서 베니, 이를 들은 도중(都中)의 대소인들이 기약도 없이 모여 들어 잠깐 동안에 운집하자 즉시 모든 장수들을 편성하고 용구마(龍廐馬)를 내어 주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에워싸고 지키게 하였으며, 또 모든 옥에 있는 죄수들을 놓아 종군하게 하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윤형로(尹衡老)를 금상(今上)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그 사유를 아뢰고 그대로 머물러 모시게 하고, 이어서 운산군 이계(雲山君李誡)와 무사 수십 명을 보내어 시위하여 비상에 대비하게 하였다. 희안 등은 모두 돈화문 밖에 머물러 날새기를 기다리니, 숙위(宿衛)하던 장사와 시종·환관들이 알고 다투어 수채 구멍으로 빠져 나가 잠시 동안에 궁이 텅 비었다.


승지 윤장(尹璋)·조계형(曺繼衡)·이우(李堣)가 변을 듣고 창황히 들어가 왕에게 사뢰니, 왕이 놀라 뛰어 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장(璋) 등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고 핑계하고 차차 흩어져 모두 수채 구멍으로 달아났는데, 더러는 실족하여 뒷간에 빠지는 자도 있었다.

원종 등은 내시를 시켜 장사 두어 명을 거느리고 왕에게 가 옥새를 내놓고 또 동궁에 옮길 것을 청하였으며, 전동(田同)·심금손(沈金孫)·강응(姜凝)·김효손(金孝孫) 등을 군중(軍中)에서 베었다. 여명(黎明)에 궁문이 열리자 원종 등이 경복궁에 나아가 대비에게 아뢰기를 ‘주상이 크게 군도(君道)를 잃어 종묘를 맡을 수 없고 천명과 인심이 이미 진성 대군에게 돌아갔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의지(懿旨)를 받들어 진성 대군을 맞아 대통(大統)을 잇고자 하오니, 청컨대 성명(成命)을 내리소서.’ 하니, 대비는 전교하기를 ‘나라의 사세가 이에 이르렀으니 사직을 위한 계책이 부득이하다. 경 등이 아뢴 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순정이 전지를 받들고 즉시 금상의 사제로 가 아뢰니, 상이 굳이 사양하기를 ‘조정의 종묘 사직을 위한 대계(大計)가 진실로 이러해야 마땅하나 내가 실로 부덕하니 어떻게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고, 재삼 거절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순정이 호종 시위하여 경복궁에 들어가니, 길에서 첨앙(瞻仰)하는 백성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모두들 ‘성주(聖主)를 만났으니 고화(膏火) 속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시(申時)에 근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대사령(大赦令)을 중외해 내렸으며, 대비의 명에 의하여 전왕을 폐위 연산군으로 강봉하여 교동(喬桐)에 옮기고, 왕비 신씨를 폐하여 사제(私第)로 내쳤으며, 세자 이황(李) 및 모든 왕자들을 각 고을에 안치시키고, 전비(田非)·녹수·백견(白犬)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베니, 도중(都中)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

 

전비, 녹수, 백견은 연산군을 모시던 기생 출신의 총희들. 결국 '난리가 나면 너희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던 연산군의 예측대로 된 것이죠.


책공(策功)을 의정(議定)하게 하자, 원종 등이 여러 종실·재상들과 공을 나눔으로써 뭇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려 하니, 처음부터 모의에 참여하지 않은 유순(柳洵) 등 수십 인이 다 정국 공신에 참여되었다. 당초에 원종 등이 돈화문 밖에 모여 순(洵)에게 사람을 보내어 순(洵)을 부르니, 순이 변이 있는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몰라 나와 문틈으로 엿보다가 도로 들어가기를 너덧 차례나 하였으며, 또 문틈으로 말하기를 ‘나는 구항(溝巷)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 이번 일이 가하오. 마음대로 하오.’ 하고, 오랫동안 다른 일이 없음을 알고서야 나왔다. 그리고 구수영(具壽永)은 당초 원종 등이 거의(擧義)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훈련원에 달려가 제장들을 보았다. 여러 장수들이 서로 돌아보며 놀랬지만, 벌써 와 몸바치기를 허하였으므로, 마침내 훈적(勳籍)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일단 반란이 성공하고 나면 어정쩡한 위치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을 일부러 공신에 포함시켜 정국을 안정시키는 수법이 엿보입니다. 구항이란 길가의 도랑을 말하는 것인데, 일국의 재상이 '마음대로 하라, 나는 모른다'고 벌벌 떠는 모습은 참 안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폐부(廢婦) 신씨(愼氏)는 어진 덕이 있어 화평하고 후중하고 온순하고 근신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졌으며,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하므로, 왕은 비록 미치고 포학하였지만, 매우 소중히 여김을 받았다. 매양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난, 방종함이 한없음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하되 말 뜻이 지극히 간곡하고 절실했는데, 왕이 비록 들어주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성내지는 않았다. 또 번번이 대군·공주·무보(姆保)·노복들을 계칙(戒勅)하여 함부로 방자한 짓을 못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는 울부짖으며 기필코 왕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중종반정이 마무리됐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이 블로그의 인수대비 관련 글 모음입니다.

 

1. 계유정난은 어떻게 진행됐나  http://fivecard.joins.com/964
2. 폐비 윤씨는 정말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을까? http://fivecard.joins.com/1003
3. 폐비 윤씨, 사약을 마시고 정말 피를 토했나? http://fivecard.joins.com/1004
4. 폐비 윤씨 사약이 남긴 공무원의 숙명 http://fivecard.joins.com/1007
5.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fivecard.joins.com/1012
6. 인수대비 사후, 연산군은 어떻게 몰락했나 http://fivecard.joins.com/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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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쓰고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조선 왕조 최악의 군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廟號)를 받지 못한 한심한 왕이 두 사람 있습니다.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죠. 자의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신하들에 의해 끌려내려왔기 때문에 시호와 묘호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이런 역사적 사실이 곧 무능한 군주라는 증거는 아닙니다. 두 사람 중 광해군은 20세기 이후 재조명에 의해 - 비록 선왕의 정궁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그 소생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도적적인 흠결은 있지만 - 실질적으로 임진왜란 동안 국가를 경영한 능력이나 중국 명-청 교체기를 버텨낸 탁월한 국제감각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폭군'이라는 딱지를 어느 정도 뗀 느낌입니다.

 

반면 이런 치적이 없는 연산군은 보호망도 없이 패륜의 제왕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선왕의 후궁들을 직접 때려 죽이고(여러분이 '인수대비'에서 보고 계신 바로 그 장면입니다), 그 소생인 동생들을 살해하고, 큰어머니를 범하고, 할머니를 머리로 받아 결국 사망하게 하고, 두 차례의 사화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그럼 연산군은 저런 광기의 제왕이었을까요? 혹시 달리 볼 요소는 없을까요?

 

 

 

 

일단 집권 4년째(1498)에 무오사화를 일으킬 때까지 연산군의 '만행'은 크게 상식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4대 사화의 시작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그만치 피를 본 군왕이 한둘은 아닙니다.

 

하지만 폐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하면서 연산군의 행적은 정상적인 사고를 벗어난 모습을 보입니다. '연려실기술'이 모아 들인 여러 사서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성종이 함구령을 내린 폐비 윤씨 문제가 어떻게 연산군의 시대에 문제가 되었는지, 그 과정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하겠습니다.

 

일찍이 성종(成宗) 기유년에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했는데, 폐출되어 사약을 내린 일은 성종조에 나와 있다. 윤씨가 눈물을 닦아 피묻은 수건을 그 어머니 신씨(申氏)에게 주면서, “우리 아이가 다행히 목숨이 보전되거든 이것을 보여 나의 원통함을 말해 주고,또 거동하는 길 옆에 장사하여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하므로 건원릉(健元陵)의 길 왼편에 장사하였다.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세상을 떠나자 신씨는 나인들과 서로 통하여 연산주의 생모 윤씨가 비명으로 죽은 원통함을 가만히 호소하고 또 그 수건을 올리니 폐주는 일찍이 자순대비(慈順大妃)를 친어머니인 줄 알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매우 슬퍼하였다. 시정기(時政記)를 보고 성을 내어 그 당시 의논에 참여한 대신과 심부름한 사람은 모두 관을 쪼개어 시체의 목을 베고 뼈를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기묘록》

 

윤씨가 죽을 때에 약을 토하면서 목숨이 끊어졌는데, 그 약물이 흰 비단 적삼에 뿌려졌다. 윤씨의 어미가 그 적삼을 전하여 뒤에 폐주에게 드리니 폐주는 밤낮으로 적삼을 안고 울었다. 그가 장성하자 그만 심병(心病)이 되어 마침내 나라를 잃고 말았다. 성종(成宗)이 한 번 집안 다스리는 도리를 잃게 되자 중전의 덕도 허물어지고 원자도 또한 보전하지 못하였으니 뒷 세상의 임금들은 이 일로 거울을 삼을 것이다. <<파수편>>

 

그런데 궁금한 건 연산군의 준비 과정입니다. 이미 연산군은 즉위 2년째인 1496년에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를 확장하자는 의견을 냈다가 대신들의 반대로 철회했고, 이해 10월 21일, 대신 윤씨의 어머니인 장흥부부인 신씨(즉 연산군의 외할머니)에게 곡식과 의복을 내리라는 안을 통과시켰습니다(廢妃母申氏, 依領敦寧, 歲賜米三十碩、黃豆二十碩).

 

하지만 공식적으로 갑자사화의 시작은 연산군 10년인 1504년 3월20일이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이날 연산군은 그동안 감춰졌던 분노를 폭발시키며 만행의 시작을 알립니다. 연산군에게 적대적인 사관들이 상당 부분을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인간성을 잃은 듯한 모습입니다.

 

바로 이렇게 아버지 성종의 후궁들인 엄귀인과 정소용을 끌고 나간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래 나오는 안양군과 봉안군은 모두 정소용이 낳은 자신의 동생들이죠.

 

그 동생들을 동원해 어머니의 복수(?)를 시키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혹한 장면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목: 안양군과 봉안군을 곤장 때리다 
 

전교하기를, "안양군 이항(安陽君李㤚)과 봉안군 이봉(鳳安君李㦀)을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숙직 승지 두 사람이 당직청에 가서 항과 봉을 장 80대씩 때려 외방에 부처(付處)하라. 또 의금부 낭청(郞廳) 1명은 옥졸 10인을 거느리고 금호문(金虎門) 밖에 대령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항·봉을 창경궁(昌慶宮)으로 잡아오라.”
하고, 항과 봉이 궁으로 들어온 지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모두 다 내보내라” 하였다. 항과 봉이 나오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항과 봉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왕이,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왕이 손에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침전 밖에 서서 큰 소리로 연달아 외치되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하기를 매우 급박하게 하니, 시녀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대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 신씨(愼氏)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


왕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젓갈(醢)로 만든다는 것은 시체조차 보존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최악의 형벌입니다. 일찌기 한고조 유방이 반란의 혐의를 씌워 맹장 팽월을 죽인 뒤 해(醢)로 만들어 제후들에게 맛보라고 돌렸다는 바로 그 형벌이죠.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에선 누구에게 먹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만...^^

 

그리고 나서 열흘 동안 엄씨와 정씨 친정 가족들을 참살하고, 안양군과 봉안군을 귀양보내고, 이미 다른 죄(그 전해 9월, 잔치 자리에서 임금이 내린 술잔을 몰래 따라 버린 죄..^^)로 위기를 맞고 있던 이세좌를 처단합니다. 그리고는 4월 1일, 마침내 조정에 정식으로 명을 내립니다. 

  

왕이 춘추관(春秋館)에서 상고한, 폐비(廢妃)에게 사약 내린 전말의 단자(單子)를 내려보내며 이르기를,
“도승지가 의정부·춘추관 당상 및 예문관(藝文館) 관원과, 함께 다시 그때 옛일을 인용하여 일이 되게 한 자와, 폐위함이 불가하다고 간하다가 죄를 받은 자, 사약을 내릴 때 간하지 않고 명대로 가서 일 본 자를 유(類)대로 뽑아 아뢰라”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 있으면 의문이 듭니다. 대체 왜 연산군은 즉위 10년 뒤에서야 어머니의 복수를 시작한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10년 뒤에서야 외할머니 신씨를 만나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알고 분노했다고 보지만, 일단 연산군이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 된 시점이 분명치 않습니다. 

 

(위에 인용한 '기해록'의 기록으로는 인수대비가 죽고 나서 알게 되어 피바람이 시작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분명 사실과 다릅니다. 갑오년 3월20일이 피바람의 시작이었고, 인수대비는 그 한달 넘게 뒤인 4월27일 숨을 거둡니다.)

 

 

 

 

정황으로 볼 때 연산군이 1504년에 와서야 모든 것을 알게되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알 것은 다 알고 있었고,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 적당한 때란 언제일까요. 바로 자신의 힘이 인수대비와 비등해졌다고 판단한 때일 것입니다. 즉위 4년 째인 1498년(무오년), 연산군은 조의제문 사건을 이용해 김종직의 제자들을 참살합니다. 명분은 이유 없이 할아버지 세조를 사림이 욕보였다는 것이고, 당연히 인수대비도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왕에 대한 도전을 권력으로 제압하고 나면 왕권은 강화되는 것이 당연한 일. 무오사화를 통해 힘을 한껏 키운 뒤에도 연산군은 6년을 더 기다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린 보람이 있어 갑자년 1월, 고령의 인수대비가 병석에 눕게 됩니다.

 

이제서야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연산군은 그 전부터 파악되어 있던 외할머니 신씨를 궁으로 불러들여 시커멓게 변한 금삼(피를 토했든, 약을 토했든 어쨌든 20여년이 흘렀으니 검은 색이었겠죠^^)을 전달하는 '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의식'은 온 조정에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자, 이제부터 나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테다. 그리고 당시의 일을 철저하게 규명할 것이다. 당시 아버지 편에 섰던 놈들은 모두 각오해라.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큰 잘못이 없는 자들은 지금부터 병석에 누운 대비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내 편에 설 것인지, 잘 생각해 보고 입장을 정하라.'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미 정리했겠죠.

 

 

 

게다가 갑자사화의 이면에는 연산군을 중심으로 무오사화 이후 권력을 보위하던 임사홍, 신수근 등의 친위세력과 세조-성종대를 지나오며 공신전을 독점하고 기반을 구축해 온 신권 세력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있습니다. 친위세력을 동원해 권신들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엿보입니다.

 

이런 요소들을 감안하면 연산군은 미친 왕이라기보다는 대단히 전략적인 야심가의 면모를 드러냅니다. 비록 음탕하고 무능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이런 기록들은 당연히 중종반정의 중심세력이 서술했을테니 그대로 믿기에는 약간의 의심이 듭니다.

 

그리고 연산군이 미친 사람이 아니었다는 생각의 저변에는, 지난번 글에서 잠시 다뤘듯 자신의 최고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진성대군(뒷날의 중종)을 해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역시 이건 이번에도 다음 글에서 다뤄야 할 듯.^^

 

 

이 블로그의 인수대비 관련 글 모음입니다.

 

1. 계유정난은 어떻게 진행됐나  http://fivecard.joins.com/964
2. 폐비 윤씨는 정말 용안에 손톱자국을 냈을까? http://fivecard.joins.com/1003
3. 폐비 윤씨, 사약을 마시고 정말 피를 토했나? http://fivecard.joins.com/1004
4. 폐비 윤씨 사약이 남긴 공무원의 숙명 http://fivecard.joins.com/1007
5. 연산군, 정말 계산 없는 광인이었나?  http://fivecard.joins.com/1012
6. 인수대비 사후, 연산군은 어떻게 몰락했나 http://fivecard.joins.com/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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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여름 최대의 기대작 중 하나였던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프로메테우스'가 국내 흥행 성적은 신통치 않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국이라고 '프로메테우스'가 박스 오피스 1위를 하고 있지는 않더군요.

 

솔직히 '프로메테우스'를 기대하면서도 이 영화가 제임스 카메론 풍의 액션 블록버스터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점, 다시 말해 '아바타'같은 영화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짐작했을 것입니다. 흘러나오는 이야기를 들을 수록, '프로메테우스'는 '글래디에이터'보다는 '블레이드 러너'에 가까운 작품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샘솟았습니다.

 

마침내 영화는 아무나 쉽게 할 수 없는 웅대한 시각적 파괴력을 앞세워 개봉했습니다. 그리고 내용에 대해서는 역시 논란이 한창입니다. 이 영화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 자체가 불경스럽다"는 반응을 보일 정도입니다. 반면 지나간 스코트의 히스토리를 모르는 젊은 관객들은 '뭐야 이게'라는 반응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도 다양한 층위의 관객들이 있습니다.

 

대체 이 영화의 어떤 점이 이런 다양한 반응을 낳고 있을까요.

 

 

 

 

간략 줄거리. 우주 어딘가의 별에서 한 외계인이 자신의 몸을 흩뜨려 검은 씨앗(?)을 전파시키는 장면이 프롤로그로 주어집니다.

 

2085년, 웨일랜드사의 탐사선 프로메테우스가 먼 우주로 떠납니다. 목적은 인류 문명의 외계 기원을 탐사하기 위해서. 수년간의 수면 비행에서 깨어난 비행사들은 그들이 잠든 동안 우주선을 지켜 온 안드로이드 데이빗(마이클 패스벤더)를 만납니다.

 

비행의 책임자인 비커스(샤를리즈 테론)는 이 미션에 대해 어딘가 시니컬하고, 엘리자베스 쇼(노미 라파스)를 비롯한 탐사 팀의 학자들과 회사의 목적이 분명히 다르다는 선을 긋죠. 어쨌든 미지의 행성에 발을 디딘 이들은 지구라면 피라미드에 해당할 거대 유적(혹은 시설물)을 발견하고, 거기서 놀라운 문명의 흔적과 마주합니다.

 

 

 

 

개봉 전부터 에일리언의 프리퀄이네 아니네 말이 많았지만, 프리퀄의 정의를 뭘로 하건 이 영화가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1979년작 '에일리언'의 앞 이야기 인 것은 맞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말 많던 스페이스 자키의 정체는 무엇인지, 우리의 뒤짱구 에일리언은 어떻게 해서 탄생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 별이 '에일리언'에서 화물선 노스트로모 호의 승무원들이 갔던 그 별이냐, '프로메테우스' 첫 시퀀스에서 등장하는 별이 지구냐 아니냐 등에는 논란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 리들리 스코트는 좀 반칙을 합니다. 원작자는 작품을 던졌으면 그만이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 놓고 해석 A와 B에 대해 '내 의도는 ....였다'는 식의 인터뷰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 이건 창작자의 역할은 독자나 관객 앞에 작품을 던져 놓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시는 움베르토 에코 선생이 봤다면 혼찌검이 날 일입니다. (심지어 그닥 독창적이라고 볼 수도 없는 외계인의 예수 파견설까지...)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심오함'이라든가 '철학적' 이라든가, '화제작'이라든가 하는 변설에 이끌려 이 영화를 보실 분들은 아예 안 보시는게 낫습니다. 이 영화는 매우 특이하고 야심적인, 놀라운 규모의 SF입니다. 처음부터 이 장르와 스코트에 애정이 없는 분들은 아무 감흥이 없을 것을 각오하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진입장벽이 꽤 있는 영화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2012년에 무슨 영화가 있었나...하고 회고할 때 이 영화가 빠진다면 좀 부끄러울 수도 있을 그런 영화죠.)

 

이하는 스포일러가 쑥쑥 튀어나올 겁니다. 하긴 뭐, 보고 나서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는 분들이 많은 걸 보면 오히려 스포일러가 감상에 도움이 될지도.

 

 

 

 

사실 리들리 스코트의 '에일리언'에 대해서는 몇가지 오해가 둥둥 떠 다니고 있습니다. '스코트가 만든 에일리언 1편은 쫄딱 망하고 혹평에 시달렸는데 제임스 카메론이 만든 2편이 대박을 치면서 프랜차이즈가 살아났다'고 믿는 분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흥행 성적만 보더라도 1979년작 '에일리언'은 1천만달러 살짝 넘는 제작비로 6천만달러 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약 2천만달러를 투입해서 8천만달러를 벌어들인 1986년의 '에일리언2(Aliens)'에 비해 낫다고도 할 수 있는 성적입니다. 쫄딱 망하거나 욕을 먹었다면 카메론이 굳이 속편을 만들겠다고 하지도 않았겠죠.

 

아마도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와 '에일리언'을 혼동하시는 분들이 많아서 생긴 일인 듯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에일리언2'가 아무 사전 정보 없이 개봉했다가 호평을 받고, 여기 필 받아서 뒤늦게 개봉한 '에일리언'은 '뭐 이딴게 다 있어'라는 평을 얻었기 때문에... 국내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죠. 저도 개인적으로 관객이 느낄 수 있는 재미 면에서는 '에일리언2'가 훨씬 앞선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어두운 우주선 안에서 승무원 일곱명이 차례 차례 잡아먹히는 내용은 단조롭고 지루하죠.

 

 

 

 

어쨌든 카메론이나 데이빗 핀처(에일리언3) 등의 노력으로 에일리언 시리즈는 전설의 흥행 시리즈가 됐고 비록 주인이 바뀌긴 했지만 원조집 사장인 스코트 옹은 뿌듯해집니다. 그리고 다른 레스토랑으로 잇달아 대박을 낸 터라, 이 기회에 '에일리언 원조집'을 대대적으로 오픈할 결심을 했습니다.

 

(뭐 중간 중간 '이건 에일리언 원조집(prequal)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언론플레이를 하기도 했지만, 아니면 뭐겠습니까. 이런 게 바로 허세...^^)

 

 

 

 

물론 백전노장 스코트 선생이 아무 준비 없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 '그럼 뭐겠습니까'에 대한 답으로 준비한 것이 바로 '인류의 시원을 찾아가는 대우주 파노라마'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엄청난 규모의 세트와 함께 수만년을 오르내리는 웅대한 플롯이 마련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이것만으로 감동할만큼 현대 관객들이 순진무구하냐는 데 있습니다. 인류의 외계 기원설이라는것이 그렇게 새로운 시각도 아닐 뿐만 아니라, 특히나 '신이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관념을 수천년 동안 유지한 서구 기독교 사회가 아니라면 '야, 인간은 알고 보니 신이 만든 게 아니라 외계인이 뿌린 씨에서 태어난 거였어. 깜짝 놀랐지?'라는 말에 과연 얼마나 큰 정서적 타격을 입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그 창조자는 누가 만들었을까?'하는 말 역시 뭐 그닥 큰 울림이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비 기독교 문화권 사람들(더 정확하게는 유일신 신앙이 보편화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인간을 신이 만들었건, 외계인이 만들었건, 우연히 단백질이 가득 찬 연못에 번개가 떨어진 뒤 수억년에 걸쳐 진화했건 별 큰 감회가 없는게 보통이죠. '뭐, 그랬나보지...'  

 

 

 

 

다만 여기에 스코트 감독은 또 하나의 층위를 보탭니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보여줬던 인간의 피조물, 바로 안드로이드죠. 이미 인간보다 기억력, 분석력, 체력, 근력, 심지어 외모까지도 모두 우월해진 데이빗 같은 안드로이드는 서서히 생각하게 됩니다. '대체 왜, 이렇게 훌륭한 내가, 나를 창조했다는 이유로 인간 같은 보잘것 없는 존재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관념은 이 영화를 지배하는 주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데이빗에게는 일단 웨일랜드 본인과 회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동기가 있고, 그 밖에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달성한다는 동기가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숙주로 이용해 제법 위험해 보이는 외계 생물을 지구로 가져가려 하는 것은 이 두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는 것이죠.

 

아무튼 데이빗은 상당히 흥미로운 발언을 많이 합니다. '모든 아들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지 않나요?' 같은. 우주선이 수년을 날아오는 동안 혼자서 지구의 상고 문명을 모두 연구하고, 갖가지 고대 문자를 비교 분석해서 지구 최고의 석학이 된 데이빗에게 '생명'이란 사실 귀찮고 부담스러운 관념입니다. 그래서 외계인의 골이 터지는 장면을 보면서도 '쳇. (너조차도) 불멸의 존재는 아니었어' 라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오는 것이죠.

 

 

 

 

이 영화 최대의 떡밥은 웨일랜드와 데이빗이 잠에서 깨어난 '엔지니어'와 만나는 장면입니다. 대체 데이빗은 웨일랜드의 감격적인 인삿말을 어떻게 전달한 것일까요. 웨일랜드의 뜻대로 전달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 것인지, 그리고 왜 엔지니어는 그런 파괴적인(^^) 반응을 보인 것인지는 참 궁금합니다.

 

이 대목에서 유일한 단서는 제목입니다. 다 아시다시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신들의 입장에서는 주고 싶지 않았던' 불을 주는 바람에 바위벽에 매달리게 된 티탄 신족입니다. 이 영화와 관련해 이 신화를 인용하시는 분들이 1.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와는 다른 신족이고 2. 프로메테우스가 절벽에 묶인 것은 사실 불을 줘서가 아니라 제우스의 예언 요청을 거절했기 때문이고 3. 정작 프로메테우스는 절벽에 묶이지만 불을 전달받은 인류는 대홍수로 절멸의 운명을 맞는다는 점을 간과하곤 합니다.

 

대체 왜 엔지니어가 지구인들을 싫어하느냐는 질문도 자주 나오지만, 그건 신화에도 나오듯 '저깟 것들이 뭔데 불(혹은 지성)을 사용해?'라는 간단한 불쾌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나 '에일리언' 등의 인간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안드로이드가 인간과 같은 외양, 때로 인간보다 뛰어난 지성을 보이는 것을 경멸하곤 하죠. 자신들의 피조물에 대한 무시는 때로 몇날 며칠을 공들여 만든 성냥개피 집을 자기 손으로 휙 허물어 버리거나, 늘 흥미롭게 지켜보던 개미집 표본에 물을 부어 수많은 개미들이 익사하는 광경을 즐거워하는 어린이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내가 만든 건데 어때? 죽이건 살리건 무슨 상관이야. 또 만들면 되지."

 

 

 

 

사실 '프로메테우스'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여러가지 상념에 젖게 하는 것은 이 영화가 철학적이고, 심오하고, 압도적이어서 아니라(물론 비주얼은 진정 압도적입니다)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빈 칸이 많은 상태로 관객 앞에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리들리 스코트는 그의 진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공 지능과 인격이라는 것이 과연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헤어지는가에 대한 폭넓은 통찰을 보여 줬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블레이드 러너'의 설정 곳곳에 있는 여백(노골적으로 말하면 '구멍')에 얼마나 마니아들이 열광하는지, 그리고 그 열광이 얼마나 자신을 더 위대한 감독으로 만드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프로메테우스'에 남겨진 여백들은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보다 훨씬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리들리 스코트가 관객들에게 하는 말이 제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들에게 매력적인 캐릭터와 웅대한 설정, 압도적인 비주얼, 그리고 한 3년 너희끼리 치고 받을 수 있는 풍성한 떡밥을 주마. 나는 가끔씩 인터뷰를 통해 '나의 진정한 의도'를 흘려 주지."

 

 

 

 

새로운 리플리 역을 맡은 노미 라파스(Noomi는 누구나 '누미'라고 읽고 싶어지는 스펠링이지만 독일이나 북유럽권에서 oo는 '우' 보다는 '오'의 장음에 가깝다고 합니다. '특전 유보트'라는 한국어 제목으로 소개된 영화 'Das Boot'는 '다스 부트'가 아니라 '다스 보트'죠^^)는 강인하긴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초인적인 캐릭터라서 현실감이 떨어집니다(배를 절개한 뒤 스테이플러로 박고도 날아다니는 인간이라니...그거 참). 또 하나의 여성 캐릭터인 비커스는 샤를리즈 테론의 낭비였다는 여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련되고 매력적인 사이코패스 악당 데이빗(...사실 이런게 사이코패스가 아니면 뭐가 사이코패스겠습니까^^)는 이미 성공이 예견된 캐릭터였고, 이미 패스벤더는 매그니토 역을 통해 보여준 악역 잠재성을 유감없이 이 영화에서 펼칩니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굳이 흠을 잡자면, 77년생 치고는 노안이라는... 그런데 블레이드러너의 시대는 2019년. 이때 이미 넥서스들이 그렇게 발달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2080년대의 데이빗, 2130년대의 비숍은 좀 발달이 정체된 느낌이 있습니다. 웨일랜드사가 타이렐 사의 기술을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P.S. 스코트 형님의 입장은 '반드시 속편을 만든다' 는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속편은 정말 예상대로 엘리자베스가 우주 괴물들을 데리고 엔지니어들을 멸종시키는 내용일까요.^^ 매우 궁금합니다. 어쨌거나 이제 뒤짱구 에일리언은 다시 못 보게 될 것 같으니 좀 아쉽습니다. 사진은 H.R.기거의 오리지널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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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여정 노출'이라는 검색어로 몇주째 인터넷 여론을 이끌고 있던 영화 '후궁: 제왕의 첩'을 조금 빨리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 '후궁'은 표면적으로 사극이고 조여정이 주인공이라는 점 외에는 '방자전'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영화지만 워낙 마케팅 차원에서 '방자전'이 강조되다 보니 일부 관객들 사이에서는 같은 감독의 영화로 착각당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노파심에서 강조하자면, '방자전',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과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누', '후궁'의 김대승 감독을 혼동하시면 곤란합니다.^^ 이름이 비슷하긴 하군요.)

 

제목에 저렇게 써 놓고 본문은 '조여정이 주인공...'이라고 시작하니 이게 또 뭔 헛소리인가 하실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조여정만 주인공이 아니고, 김동욱, 박지영도 주인공이었다'는 얘기를 하자는 건 아닙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느끼실 수 있겠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스타일'이라는 괴물입니다.

 

 

 

 

대략 조선 초기 정도로 추정되는 시대. 왕의 배다른 동생 성원대군(김동욱)은 우연히 사냥길에 나섰다 머물게 된 참판(안석환)의 집에서 참판의 딸 화연(조여정)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집니다. 대략 화연과 그 집의 아들처럼 대접받는 식객 권유(김민준)가 예사롭지 않은 관계지만 성원대군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원대군의 모친이며 왕의 계모인 대비(박지영)는 대군의 마음을 알면서도 간택령을 내려 화연을 왕의 후궁으로 들이고, 권유와 함께 도망쳤던 화연은 권유를 살려주는 조건으로 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바로 아들을 낳아 중전의 자리에 오릅니다.

 

5년 뒤, 병약했던 왕이 급사하고 성원대군이 왕위에 오릅니다. 대비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선왕비 화연과 화연이 낳은 왕자는 권력자들의 눈엣가시가 되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리고 왕이 된 성원은 여전히 화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 상황에서 거세당한 권유가 내시가 되어 입궐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이 정도까지의 줄거리는 이미 각종 기사나 TV 영화정보 프로그램을 통해 훨씬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작진이 굳이 오마주라고 표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찌기 신성일 윤정희 주연, 신상옥 감독의 '내시(뒷날 이두용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됩니다)'에서 오만석 구혜선 주연의 TV 사극 '왕과 나'에 이르기까지 관객들에게는 상당히 친숙한 이야기입니다.

 

'양가집 규수와 서로 사랑하던 젊은이가 여인을 궁에 빼앗기고 자신은 남성을 빼앗긴 몸이 되어 내시로 입궁, 권력의 희생양이 되어가고 있는 옛 연인을 바라보는 이야기' 말입니다. 물론 '후궁'은 이 익숙한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이야기의 주체를 '내시'에서 '왕'과 '여자' 족으로 확장시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결말도 크게 달라집니다.

 

 

 

 

이런 변화는 당연히 '고전의 극복 혹은 재해석'이라는 강점을 갖고 시작합니다. 보는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이야기를 깔고 거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맛보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왕의 여자를 사랑한 왕' 부분에서 조금은 무리가 있습니다. 웬만하면 성원대군의 욕망이 성취될 가능성 정도는 열어놓는 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선왕의 여자를 탐한 왕 이야기는 드물지 않습니다. 측천무후도 당태종의 후궁이었지만 그 아들인 고종의 황후가 되었고 광해군도 선조의 후궁이었던 개시 김상궁을 총애했습니다. 하지만 '아들까지 낳은 형의 정궁'을 어찌 했다는 이야기는 찾아보기 힘들죠. 며느리였다가 시아버지의 여자가 된 양귀비도 최소한 아이는 없었습니다.

 

 

 

 

뭐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도 형의 아내였던 캐서린을 첫 왕비로 맞기도 합니다만, 최소한 우리나라에서는 형사취수가 일반적이었던 고구려 시대 이후로는 이런 예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혹시 이런 기록을 보신 분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고려 때만 해도 부계만 다르면 남매끼리도 혼인을 하고, 이모나 삼촌과 결혼한 경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지만 '작은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경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작진의 의도는 아마도 성원의 욕망이 절대 이룰 수 없는 것일 때 극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할 것이라는 것이었겠지만, 반대로 '너무 어처구니없는 욕망'이기 때문에 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는 왕(성원대군)에 대한 공감이 뚝 떨어지는 부작용도 낳을 수 있습니다(개인적으로는 이쪽 생각입니다). 물론 막장드라마에 익숙한 현대인들이라면 다를 수도 있을 것이고, 결국은 관객 개개인의 취향 문제입니다.

 

 

 

 

굳이 성원대군의 욕망이 아니더라도, 이미 '혈의 누'에서부터 김대승 감독에게 '조선시대라는 배경의 고증과 하고 싶은 이야기 사이의 완벽한 균형' 같은 것은 전혀 중요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사극 영화의 예고편 배경음악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쓰일 때부터 짐작됐죠^^) 이런 식의 문제제기는 사소한 딴지 이상으로는 여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관객들에게도 그럴 것입니다.)

 

도입부에 얘기했듯 이 영화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은 예사롭지 않은 비주얼입니다. 도저히 조선시대 의상으로는 볼 수 없는 이색적인 의상과 공간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전하는 이야기로 일각에서는 왜색 의상설^^까지 나왔다고 합니다만, 이건 좀 무리한 얘기고, 오히려 이 비주얼에서 김대승 감독의 의도가 좀 더 분명해진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이 영화 속의 낯선(?) 고전 의상들을 보다 보면 와다 에미('란', '영웅')나 '와호장룡'의 섭금첨(葉錦添, 티미 입)이 만들어 낸 탈국적적 내지는 범 동양적인 고전 세계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특히 섭금첨이 미술을 맡고 풍소강 감독이 '햄릿'의 재해석을 시도했던 '야연'이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듯 합니다. '후궁'에서는 국내 최고의 미술감독으로 불리는 조상경씨가 이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런 의상과 장중함이 강조된 궁 세트는 자연스럽게 관객을 지배합니다. 이 글의 제목을 정할 때 '스타일이 주인공'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감독의 거대한 야심이 발현되고, 배우들의 연기를 압도하는 스타일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일반 관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저도 궁금합니다.^)

 

 

 

 

반면 셰익스피어적인 조건을 갖췄으되 셰익스피어 등장인물들의 독백이나 방백을 빼앗긴 배우들에겐 이 영화 속 등장인물로 동화되는 것이 상당히 힘든 과제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굳이 배경 설명이 필요없는, 너무나 선명한 인물인 대비 박지영이 돋보인 것은 아마도 당연한 일일 것 같고 반대로 다소 무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매력을 잃지 않았던 김동욱의 호연에도 큰 칭찬이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누드 연기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은 조여정의 열연은 굳이 새로 거론할 이유가 있을까 싶습니다. 그 화려한 세트와 의상을 능가하는 존재감이랄까요(오히려 이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듣는 것이 부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아무튼 이 영화를 보는 이유 1번이 '조여정'인 분들이라면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P.S. 이하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 궁금증입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여기서 발길을 돌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줄거리에 큰 영향이 없으니 스포일러는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목이 '후궁'이지만 사실 영화에 나오는 중요한 후궁은 조은지 한명 뿐입니다. 물론 조여정이 처음 입궁할 때 계비로 입궁한 것인지, 후궁으로 입궁한 것인지(아마도 후자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분명치 않지만, 후궁으로 입궁했다 해도 그 시절은 영화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후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 후궁이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대비전 지하의 그 비밀스러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그것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친절하게 제목에 '제왕의 첩'이라는 해설까지 붙어 있고, 영어 제목도 'cocubine'으로 붙어 있고 보면(영화 제목에서 이 단어를 보는 건 '패왕별희' 이후 처음입니다), 충분히 제기될만한 의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왜 제목이 '후궁'인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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