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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의 '박쥐'에 나오는 뱀파이어들은 참 특이한 존재들입니다. 뭐 문화와 배경의 차이가 있지만 흡혈귀의 대명사인 드라큘라 백작을 물리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십자가와 햇빛, 그리고 마늘이죠. 하지만 '박쥐'의 송강호는 원래 신부라서 그런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 한국 사람이니 아예 음식을 안 먹는다 해도 사방에 널린게 마늘인데, 마늘을 겁내선 도저히 돌아다닐 수가 없겠죠.

대개 뱀파이어는 불로불사이고 초능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지만 전설을 종합하면 이처럼 꽤 제약이 많은 존재들입니다. 그런 뱀파이어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한 물리학자에 따르면, '전통적인(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뱀파이어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도 수학으로 증명이 된다는군요. 왜 그럴까요? '박쥐'를 보다가 생각난 얘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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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뱀파이어

'박쥐’의 박찬욱 감독과 주요 출연진이 13일 칸 영화제 본선 장도에 오른다. 뱀파이어 이야기를 다룬 ‘박쥐’는 개봉 일주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는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뱀파이어에 대한 전설은 세계 어디에나 있다. 야행성이고 햇빛을 두려워하며, 피를 빨린 피해자도 뱀파이어가 된다는 점 역시 만국 공통이다. 이런 뱀파이어가 현실에서도 존재할 수 있을까. 미국 센트럴 플로리다대의 코스타스 에프티뮤 교수는 2006년 논문에서 간단한 계산만으로도 그 존재 가능성을 부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인구가 5억 명 정도이던 서기 1600년 1월, 지구상에 단 1명의 뱀파이어가 존재하고 그가 생존하기 위해 월 1명씩의 희생자를 찾아야 한다고 가정한다. 1600년 2월, 뱀파이어는 2명으로 늘어난다. 다음 달에는 4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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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우 출산을 감안해도 1603년이 오기 전에 지구상에는 먹이가 될 인간이 더 이상 남지 않으므로 뱀파이어 역시 전멸하게 된다. 결국 뱀파이어들이 자신들의 탐욕을 억제하지 못하면 인류의 말살은 물론 스스로의 운명에도 종지부를 찍게 되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뱀파이어 경제(vampire economy)’라는 시사용어가 떠오른다.

뱀파이어 경제란 정상적인 기업행위나 노동을 통하지 않은 채 부의 축적을 추구하는 행위, 혹은 남들의 정상적인 경제활동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기업을 말한다. 4, 5년 전만 해도 월 스트리트는 한국 경제에 대해 구조조정이 보다 엄격했어야 했다며 “햇볕만 쬐면 사라질 부실기업들이 판치는 뱀파이어 경제”라고 비판하곤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진짜 거물 뱀파이어들의 소굴은 그쪽이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전 지구를 휩쓴 경제 위기의 주범인 대형 금융사들이 그동안 서민들의 피를 빨아 부를 축적해 온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한때는 세계 경제를 리드한다며 대접받던 엘리트들이 하루아침에 전염병 보균자 취급을 받고 있다.

영화 ‘박쥐’의 결말은 남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자들(영화 속 뱀파이어)이 타자에 대한 배려를 무시한 채 욕망의 끝까지 치닫는 경우, 누군가는 정지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우화로도 읽힐 수 있다. 물론 영화 ‘박쥐’는 이런 한마디 교훈으로 정리하기엔 훨씬 복잡한 영화다. 미묘하고 중층적인 ‘박쥐’가 칸 영화제에서는 어떤 평가를 받을지 궁금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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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당초의 인구 5억명이 모두 뱀파이어로 바뀌는 시기는 1602년 6월 정도 됩니다. 2의 30제곱이 5억3000만 정도 될 겁니다. 중간에 아기가 무리하게 태어나고 했다고 하더라도 한두달이면  흡혈귀의 증가 속도가 출산 속도를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역설을 의식했는지, 20세기 후반의 뱀파이어들은 매우 똑똑해졌습니다. 앤 라이스의 작품에 나오는 뱀파이어들만 해도 모든 희생자를 뱀파이어로 바꿔 놓지는 않죠. 특별히 오래 오래 데리고 싶은 사람만을 뱀파이어로 바꿔 놓고, 나머지는 그냥 식용(?) 취급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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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진화한 뱀파이어들을 생각하면 에프티뮤(Efthimiou) 교수의 계산은 그리 적절치 않은 셈입니다.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꼭 무시할 것만은 아닙니다. 뱀파이어들이 지혜롭게 자신들의 개체수를 유지하고, 무분별한 살육으로 인간들의 씨를 말리지 않으면서 피를 빨아야 그들도 살고 인간들도 살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셈이죠. (아시다시피 신문에 쓰는 글은 지면의 한계로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을 다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난 9일자 신문에 저 글을 써놓고 밍기적거렸더니 그새 더 자세한 글이 올라와 있군요. 재반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쪽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박쥐'의 송강호만 해도 그렇습니다. 혈액은행을 이용하고, 산 사람으로부터 그냥 주스(?)만 받아 마시고, 자살하는 사람을 식용으로 이용하죠. 하지만 김옥빈은 그런 금욕적인 삶을 비웃습니다. '여우가 닭 잡아 먹는게 죄냐'는 대사가 인상적이죠.

이런 부분에서 경제 엘리트들의 무한에 가까운 욕망이 화를 불렀다는 이번 경제 위기가 오버랩됩니다. 소위 엘리트라는 이유로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끝까지 가 보자는 식으로 밀어붙이다가 결국 갈 데까지 가 버린 사람들이야말로 먹이가 사라진 뱀파이어의 운명이 돼 버린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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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위에 뱀파이어 경제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자료를 보다 보니 이 말 처럼 참 다양하게 쓰이는 말도 드물더군요. 윗글대로 미국의 경제 엘리트들이 한국 기업들의 주가가 저평가되어 있는 이유에 대해 "햇빛만 비치면 사라져야 할 뱀파이어같은 기업들이 아직도 즐비하게 남아서 은행이며 정부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부실 기업의 퇴출이나 구조조정이 미비하다고 비꼬곤 했던 때도 이 말이 쓰였습니다.

하지만 더 많이 쓰이는 의미는 역시 '남들의 고혈을 빨아' 먹고 사는 경제주체들을 가리킬 때였죠. 물론 위 문단의 뱀파이어같은 회사들도 이들 중 하나인 건 분명합니다. 또 어떤 때는 생산성에는 기여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하청업체를 울리는 대기업의 귀족노조를 가리킬 때 쓰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부동산투기를 유발해 먹고 사는 속 시커먼 건설사들을 가리킬 때도 쓰입니다. 입장에 따라 어느 쪽으로도 휘두를 수 있는 비유의 칼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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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든, 스스로가 뱀파이어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염치가 있어야 합니다. 피를 너무 빨아서 희생자를 죽게 하거나 자기 같은 뱀파이어들을 양산하고, 심심하다고 함부로 인명을 해치는 뱀파이어는 자기 목을 조르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걸 이미 설명했습니다. 경제 시스템 안의 뱀파이어들을 완전히 쓸어 버리는 게 어디서나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쪽이 현명하게 살아남는 길입니다. (어떤 작품들에는 치안유지에 재능을 활용하는 뱀파이어들도 나오곤 합니다.^^ '블레이드'라든가...)

아무튼 '박쥐'가 칸에선 어떤 성적을 낼지도 궁금합니다. 물론 이번에도 상을 탄다면 좋겠지만, 경쟁작들이 워낙 대단해서 마음은 싹 비웠습니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버릴 수는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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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에는 프랑스 병이라는 이름만 소개했지만, 이 병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프랑스 병, 이탈리아 병, 스페인 병, 영국 병, 터키 병, 폴란드 병... 온갖 나라 이름이 이 병의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 어쩌면 당연한 얘기지만 - 결코 아무도 자기 나라 이름을 이 병에 붙이지는 않았다는 점입니다.

최근 돼지(Swine)이라는 뜻이 들어가는 SI라는 명칭이 폐기되고 신종플루, 인플루엔자 A, 혹은 H1N1이라는 약칭이 대신 사용되게 됐습니다. 이름이 왜 바뀌게 되었는지는 모든 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이 글을 쓴지도 벌써 2주째로 접어들었군요. 5월 1일, 세계보건기구(WHO)가 SI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입장을 천명한 날 쓴 글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리로 옮겨오는게 좀 늦었는데, 사실 더 늦어도 상관없을 글이지만 중간에 희한한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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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프랑스병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탐험대는 황금과 함께 얄궂은 병(病) 하나를 유럽으로 가져왔다. 이 병은 16세기 초, 유럽 전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선 이 병을 ‘프랑스병’이라고 불렀지만, 반대로 프랑스에선 ‘이탈리아병’이란 이름을 붙였다. 동시에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병, 터키에서는 기독교도병으로 통했다. 멀리 타히티 섬에서는 영국병이라고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렇게 다양한 이름이 발생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들 ‘몹쓸 병을 옮기는 책임’은 외국에 떠넘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시인 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가 1530년 이 병에 ‘시필리스(syphilis·매독)’란 새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다면 유럽 각국은 지금까지도 서로 상대국의 이름을 병 이름으로 부르며 감정다툼을 벌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달 30일 유엔 산하 세계보건기구(WHO)는 현재 창궐하고 있는 국제 전염병에 대해 ‘SI(Swine Influenza)’ 대신 ‘인플루엔자 A형’ 또는 ‘H1N1’이란 명칭을 공식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널리 쓰이는 SI를 굳이 새로운 이름으로 바꾼 건 불필요한 오해와 피해를 막기 위해서다. WHO는 “이 병은 인간들 사이에서만 전염됐으며, 돼지로부터 인간에게 전염된다는 흔적은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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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돼지고기를 먹거나 만졌다고 전염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됐다. 이집트 등지에서 일어난 돼지 살처분 논란과 세계적으로 일고 있는 돼지고기 기피 움직임에 경종을 울리는 발표인 셈이다.

병의 이름은 혐오와 공포감을 함께 옮긴다. 20세기 이후 사람들은 병의 이름이 주는 그릇된 인식을 방지하기 위해 증세나 원인을 노골적으로 설명하는 이름은 피하는 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문둥병은 한센병으로, 노망은 알츠하이머병으로, 인간 광우병도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코프병으로 불리게 됐다. 정신분열증도 ‘도파민 항진증’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이미 욕설이 된 ‘지랄’이라는 고유어 대신 간질(癎疾)이라는 한자 병명을 사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철없는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장미를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고 향기롭지 않겠느냐”고 말하지만, 이름만 몇 자 바꿔도 아파트 가격이 천양지차가 되는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세상인심이 얼마나 이름에 민감한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WHO의 결정이 어느 날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양돈 농가들의 시름을 씻어주길 기대해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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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SI와 프랑스 병이 연결되는 것은 이 두 병이 각각 신종 플루와 매독(syphilis)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래의 이름에 담겨 있던 불필요한 편견이나 공포, 증오와 같은 감정을 희석시켰기 때문입니다.

SI라는 이름이 사라지고 신종플루라는 이름이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이 병과 돼지고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듯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SI라는 명칭이 사용되던 기간 중에 삼겹살집이나 족발집은 손님이 뚝 떨어졌다던데 중국집에는 여전히 손님이 많더군요.^^ 짜장면이며 탕수육, 모두 돼지고기 없으면 못 만드는 음식들일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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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롤라모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 선생은 1478년 베로나에서 태어나 활동하신 분입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대개 그랬듯 그냥 시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파두바 대학의 논리학 교수였으며, 코페르니쿠스와 절친한 천문학자였고 또 의사였다고 합니다.

이 분은 Syphilis sive morbus gallicus라는 서사시에서 프랑스 병(morbus gallicus: gall은 프랑스의 옛 이름)이라는 병에 처음 걸린 사람으로 시필루스(Syphilus)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거기서 병 이름인 Syphilis를 만들어냅니다. 뭐 지금은 이 병의 이름을 지은 것이 이분의 가장 큰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당시에는 꽤 존경받는 전염병 연구가였던 모양입니다. 티푸스라는 이름도 이 분이 지은 거라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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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병으로서의 매독은 환자와 직접 신체 접촉을 하지 않으면 거의 걸릴 가능성이 없을 정도로 전염성이 미약하지만, 막상 걸리면 살더라도 신체 일부가 썩어들어가고 환자의 외양이 흉칙해지는 등 극악의 증상을 보였기 때문에 이 병에 대한 공포심은 대단했다고 합니다(사진도 여러개 구할 수 있지만 너무 끔찍해서 피하기로 했습니다). 게다가 생활 패턴상(?) 예술가들이 걸리기 쉬운 병이다 보니 근세 수많은 유럽 예술가들이 이 병으로 죽거나, 이 병을 치료하려고 수은을 마시다 죽었다는군요.

구한말이며 일제시대까지도 매독을 치료하기 위해 수은 증기를 들이마시는 위험천만한 시술을 하다가 죽은 사림이 꽤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치료법 역시 프라카스토로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니 참 유서가 깊습니다. 병에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만... 다른 효과가 더 빠를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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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친 짓은 독일의 파울 에를리히가 1910년 살바르산 606호(어쩐지 친숙한 이름입니다. 606회의 실험 끝에 만들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어린 시절 읽은 과학도감에 쓰여 있었습니다. 여명 808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아시겠습니까?)를 만들 때까지 계속됐다고 합니다.

아무튼 대개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가져온 병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일각에서는 오히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퍼뜨리고 다시 되돌아온 병이라고도 주장한다고 합니다. 뭐 500년 전의 일을 지금에서 알 길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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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이 나간 뒤 어떤 분이 댓글로 노망이 알츠하이머 병과 다르며, 광우병과 크로이츠펠트-야코브 병도 다르다고 말씀을 해 주셨는데, 사실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어디가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두 병의 이름 모두 원래의 병 이름이 갖고 있는 멸시나 공포의 느낌을 함께 싣지 않는 효과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글의 취지에서 빗나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지랄'이라는 말이 본래 병의 이름이라는 것은 모르셨던 분도 꽤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왜 지랄이야'라는 말이 생각보다는 훨씬 심한 욕이었던 셈이죠. 이 말이 본래의 의미와 살짝 떨어져서 아예 욕으로 굳어진 이상, 실제 환자에게 그 병 이름을 쓰는 건 대단히 모욕적이고 가혹한 일이겠죠. 그래서 간질, 혹은 전간이라는 이름이 주로 쓰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유명한 줄리엣의 대사는 '로미오와 줄리엣' 2막 2장에 나옵니다. 유명한 발코니 신에서 로미오가 엿듣고 있는 줄 모르는 줄리엣이 '당신의 이름에서 몬테규라는 성만 지운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며 읖조리는 말이죠. 원문은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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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은 요란하지만 아무튼 결론은 이름 그거 함부로 지었다가 엉뚱한 사람이 애매하게 피본다. 그러니 이름 함부로 짓지 말자. 가능하면 아무 뜻도 없는 이름으로 짓는게 좋다는 얘깁니다. 저 칼럼은 5월2일자 신문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말, 그러니까 5월9일자 조선일보에 이런 글이 실렸더군요.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08/2009050801610.html?srchCol=news&srchUrl=news2

서울대 주경철 교수님의 이름이 걸린 '주경철의 히스토리아'라는 연재물입니다. 뭐 천하의 주경철 교수님('테이레시아스의 역사'는 참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이 위의 저런 후줄근한 칼럼 따위에서 아이디어를 얻으셨을 리는 없고 그냥 묘한 우연이겠죠. 그냥 참 신기한 일도 있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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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프라카스토로 선생의 고향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고향인 베로나입니다. 그 분의 동상도 바로 베로나의 시뇨리 광장에 있다는군요. (그래서 뭘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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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보일(Susan Boyle) 동영상은 다들 보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유튜브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2년 전 6월,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폴 포츠 열풍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동영상을 보고 있으면 절로 감동이 밀려옵니다.

솔직히 이쪽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수전 보일이건, 폴 포츠건, ITV의 '브리튼즈 갓 탤런트'가 만들어내는 이런 신데렐라 쇼를 보고 있으면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감동적인 사연과 노래 솜씨를 넘어 이런 사연과 이런 주인공들로 대중문화의 틈새 시장을 공략하는 방송 제작진의 기획력에 우선 감탄하게 됩니다. 게다가 인터넷과 유튜브의 등장은 이런 스타들이 영국이라는 한 지역 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날 수 있게 만들었죠.

그런저런 현상에 대해 생각나 쓴 글입니다.




제목: 반짝 스타

2007년 6월 9일, 영국의 신설 TV쇼 ‘브리튼즈 갓 탤런트’ 첫 방송에 폴 포츠라는 37세의 휴대전화 세일즈맨이 나왔다. 빈약한 외모와 자신감 없는 표정. 오히려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시청자들이 가슴을 조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유명한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흘러나오자 장중은 경악과 환호로 들끓었다. 여유 있는 형편이 아니면서도 자신의 꿈을 위해 자비로 성악 레슨을 받았다는 사연이 알려지며 그의 이름은 전 세계인에게 인간 승리의 대명사가 됐다.

‘브리튼즈 갓 탤런트’가 셋째 시즌의 첫 방송을 내보낸 지난 11일, 무대에 오른 수전 보일은 누가 봐도 폴 포츠의 재림이었다. 촌스러운 옷차림과 머리, 47세까지 남자와 키스 한번 해본 적이 없다는 이 시골 아줌마는 깜짝 놀랄 만한 미성으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아이 드림드 어 드림’을 불렀다. 관객들은 모두 그의 팬이 됐다.

이날 방송은 1000만 명 정도의 시청자가 본 것으로 추정됐지만 그 뒤 1주일 사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에 올려진 보일의 모습은 전 세계에서 2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봤다. 이번 시즌 우승 여부와 관계없이 또 한 명의 스타 탄생이 예고된 셈이다.

깜짝 스타의 등장은 한국에서도 그리 드물지 않았다. 지난 1984년 강변가요제에서는 키 작은 여대생 이선희가 ‘J에게’ 단 한 곡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4년 뒤, 같은 무대를 통해 꺽다리 여학생 이상은이 등장했던 순간도 지금껏 인구에 회자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들은 자취를 감췄다. 일반인 참여 프로그램은 날로 늘고 있는데 왜 한국에선 더 이상 깜짝 스타가 나오지 않는 걸까. 1990년대 이후 가요계가 기획사에서 다년간 훈련된 신인들 위주로 재편됐다는 점,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 등 꼽자면 수십 가지 이유가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폴 포츠의 승리는 ‘노래 한 곡을 통한 인생 역전’을 멋지게 포장해낸 방송 제작진의 쾌거라고 봐야 한다. 어떤 원석도 손대지 않은 상태에서 절로 빛을 발하지는 않는다. 경쟁력 없는 외모와 탁월한 노래 실력, 여기에 실패자로 살아온 인생까지 다 갖춘 후보들을 골라내 히트 상품으로 포장해낸 연출진의 기술은 실로 장인의 솜씨라 부를 만하다.

하나 더 보태자면, 이들에게 지갑을 열어 성원할 수 있는 대중의 저변이 없는 한 깜짝 스타의 출현은 기대하기 힘들다. 폴 포츠의 데뷔 앨범 ‘원 찬스’는 영국에서만 68만 장이 판매됐다. 한국에서라면 과연 어땠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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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보일의 깜짝 등장에 이어 영국과 미국의 각종 TV 프로그램들은 보일에 대한 기동력 있는 특집 취재에 들어갔습니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짙은 사투리를 구사하는 보일은 영국의 벽지 스코틀랜드에서도 벽촌인 블랙번에 홀어머니와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당연히 전문적인 음악 교육은 받아 본 적이 없고, 취미는 동네 호텔에 있는 가라오케 머신 앞에서 노래하는 것이라는군요. 네. 이미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물은 좀 그렇지만 효녀 중의 효녀"라는 코멘트까지 모두 기사화됐습니다.

'브리튼즈 갓 탤런트' 팀의 내공이 돋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이미 이들은 폴 포츠의 경험을 통해, 아무리 처음엔 외모에 대한 저항감이 심했더라도 빼어난 노래 실력은 그것을 한방에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번 이런 호감 역전 현상이 벌어지면 그 다음부터는 인간적인 감동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주변 이야기거리가 다시 한번 화제를 폭발시킨다는 점 등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 딱 맞는 사람을 찾아내기도 쉬워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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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첫 방송 때에는 누가 봐도 루저 형상인 폴 포츠가 그 역할을 맡았습니다. 2회 때에는 덩치는 크지만 노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순박한 눈매의 소년 앤드류 존스턴이 등장했죠. 존스턴의 폭발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이번에 찾아낸 것이 바로 보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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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스턴에 대해서는 별도의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보일의 외양과 사연은 이미 위에서 다뤘으니 생략합니다. 포츠와 보일의 차이가 있다면 누가 봐도 넘치는 자신감. 소심하고 내성적인 포츠에 비해 보일은 "엘레인 페이지처럼 되고 싶다"며 자신감을 뽐내고 있습니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단골 주인공인 페이지는 웨스트엔드의 여왕으로 군림해온 영국 최고의 뮤지컬 스타죠.

'브리튼즈...'의 연출진에게서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 것은 이렇게 준비된 스타를 무대에 내놓기 위해 포장하는 기술입니다. 제아무리 폴 포츠와 수전 보일이 천재의 노래 실력을 갖췄다 한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천 관중 앞에서 그렇게 노래할 수 있을 리는 없습니다. 노래방에서 혼자 부르는 실력과 관중 앞에서 부르는 실력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걸 극복하는 길은 부단한 훈련 뿐이죠. 어떤 노하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라이브 실력은 누가 뭐래도 철저한 트레이닝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 더 보태자면, 무대에서의 코멘트 역시 상당히 연구된 흔적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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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처음 용모와 태도가 준 임팩트를 떼놓고 생각한다면 폴 포츠의 노래 실력은 전문 성악가로는 한참 부족합니다. 음색에서 오는 표현력도 한정되어 있죠. 그걸 커버해 준 것이 노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의 힘입니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 있지만 이 팀의 선곡 실력 또한 감탄을 자아냅니다.

앤드류 존스턴의 '피에 예수' 역시 보이 소프라노의 매력을 최고로 뽑아낼 수 있는 곡이고, 보일이 부른 '아이 드림드 어 드림'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선곡이죠. '레미제라블'에서 팡틴이 미혼모가 되어 공장에서 일하며 코제트를 부양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짧았던 인생의 봄을 그리는 노래입니다. 다른 가사를 모두 접어 둔다 해도, '현실로 인해 말살당한 나의 꿈(Dream)'이라는 부분만으로도 충분히 보일의 현재 상황과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론 노래의 아름다움이야 이미 전 세계의 뮤지컬 팬들이 공감한 터이고.

전문 가수가 부른 노래를 한번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죠. 레아 살롱가가 부른 브로드웨이의 팡틴입니다. 도촬 동영상이지만 노래와 영상이 볼만 합니다. 지금까지 살롱가가 부른 팡틴의 정식 동영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해 내한공연에서 이 노래를 들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과 이 노래에 대한 이야기는 이쪽에 정리돼 있습니다. 레아 살롱가를 포함해 네 명의 가수들이 부른 서로 다른 I Dreamed a Dream이 있습니다.
 


보일의 노래 실력 역시 전문 가수들과 비교하자면 좀 어폐가 있습니다. 첫날 무대에서 보여준 노래도 박수에 가리긴 했지만 살짝 불안한 부분도 있었죠. 물론 아마추어로는 대단히 훌륭한 수준이고, 그 노래를 더욱 훌륭하게 보이게 뒷받침해준 전문가들의 솜씨 또한 기억할 만 합니다.

이런 식으로 가수를 포장하는 솜씨는 미국의 '아메리칸 아이들' 제작진도 탁월합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에서도 제니퍼 허드슨을 비롯한 스타들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1% 부족한 것은 바로 감동이죠. 루저가 위너로 바뀌는 순간의 감동, 그것까지 빠뜨리지 않은 것이 바로 '브리튼즈 갓 탤런트' 팀의 성공 요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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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질문, '왜 한국에선 이런 깜짝 스타가 나오지 않을까'에 대한 답은 이미 다 한 셈입니다. 사실 한국 방송 제작진에게는 좀 억울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매주 촬영과 편집을 진행해야 하는 한국 방송의 성격상, 1년에 3개월 정도 방송하고 빠지는 '브리튼즈 갓 탤런트' 같은 수준의 제작비와 지원, 연출력을 기대해선 안된다는 이야기가 당연히 나올 겁니다.

하지만 현재 3대 지상파의 인력구조를 감안할 때 제작비는 몰라도 사람이 부족해서 할 수 없다는 얘기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나머지는 기획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 꽤 클 겁니다. 비단 신인 발굴 프로그램에 한정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전반적인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생각입니다.

물론 깜짝 스타의 등장을 마무리하는 절대적인 조건은 사회의 저변입니다. 스타 하나가 똑바로 서려면, 그 스타나 제작자를 부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대중의 소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국내에서 등장했던 수많은 UCC 스타들이 잠깐 주목을 끌었다 사라진 이유는 뭘까요. 한때 그들에게 열광했던 대중이 그들을 먹여살리기는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문화와 스타는 공짜가 아닙니다.


p.s. 수전 보일을 보고 감동했다는 분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 이런 글을 쓴 것은 아닙니다. 단지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감동도 '날 것 그대로'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보시라는 뜻입니다. '브리튼즈 갓 탤런트'에 대해서도 칭찬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수전 보일과 같은 날 출연한 파비아 체라(Fabia Cerra)라는 출연자의 벌레스크 댄스 광경입니다. 이런 지상파 쇼 무대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춤을 추다니...

 

이런 분위기라면 체라는 화제만 뿌린 뒤 결국 보일의 들러리가 되고 말겠죠. 그렇습니다. 이런 화려한 인생 역전 쇼에도 루저는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방송에 출연도 하지 못하고 예심에서 떨어진 사람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겠죠. 쇼란 그런 것입니다.

p.s. 유튜브의 수전 보일 동영상은 벌써 퍼가기 금지 조치가 한창이더군요. 폴 포츠도 거의 블록돼 있어서 어렵게 찾았습니다.




샤힌(섀힌) 자파골리에 대해서는 들어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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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국외로 탈출한 지사들과 중국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들이 한데 뭉쳐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세운 날이죠. 또 올해가 백범 김구 선생 서거 60주년이기도 해서 백범의 유품 19점을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품 중에는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었던 '윤봉길 의사와 바꾼 회중시계'도 있더군요.

마침 매주 칼럼을 마감해야 하는 금요일에 이런 발표가 있었는데 이 시계 말고 두 개의 시계가 머리 속을 스쳐 갔습니다. 모두 역사적인 사건이나 사람들의 염원과 관련된 시계들입니다. 특히나 그중 한 시계는 정 반대의 의미를 가진 시계더군요. 그래서 이 시계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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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계

미국 워싱턴DC의 국립역사박물관에는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유품인 회중시계가 있다. 이 시계 안에는 감춰진 메시지가 있다는 전설이 내려왔다고 한다. 워싱턴 포스트는 지난 3월 11일 그 전설이 사실이라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시계 수리공 조너선 딜런에 의해 1861년 4월 13일 새겨진 메시지는 “포트 섬터가 반란군(남군)에 의해 공격당했다. 우리에게 정부를 갖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는 내용이었다. 남북전쟁 발발 당시, 마침 딜런은 대통령의 시계를 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초의 우국충정이 남북전쟁 기간 동안 대통령의 품 안에 늘 간직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묘한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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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인 오는 13일을 앞두고 백범 김구 선생의 유물 19점을 문화재 등록 예고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의거 직전 김구 선생과 바꿨다는 시계다. 『백범일지』는 거사일인 1932년 4월 29일 아침의 정경을 이렇게 전한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 점을 친다.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는 윤군에게 주었다.”

살아서 조국의 광복까지 매진할 사람과 몸은 버리고 이름만을 청사에 남길 사람. 두 장부의 맞잡은 손길을 따라 전해진 것이 시계만은 아니었을 것이고 보면 문화재 지정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문득 꽤 유명하되, 그리 아름답지는 않은 사연을 담은 시계 하나가 떠오른다. 고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은 10·26의 두 달 전인 1979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의 62회 생일 선물용으로 스위스의 명품 시계 메이커에 2만 달러짜리 순금 손목시계를 주문했다. 이렇게 충성을 과시하려던 인물이 어떻게 시해자로 변신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결국 이 시계는 정작 선물로 쓰여야 했을 그해 11월 14일에는 주문한 사람도, 받을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비운의 미아가 됐다.

두 개의 시계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참 이채롭다. 한 시계에 구국의 신념과 사나이들의 정이 담겨 있다면, 다른 시계가 보여주는 것은 권력을 향한 인간의 헛된 야심과 표변하는 인심뿐이다. 가능하면 두 개의 시계를 어디엔가 나란히 전시하는 것이 역사의 교훈을 더욱 깊게 해주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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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WBC 얘기를 쓸 때, 척 웨프너가 알리와 경기한 날짜가 한국이 WBC에서 일본과 결승전을 벌인 날짜와 같은 3월 24일이라는 걸 알고 참 신기하다고 느낀 적이 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도 날짜가 겹치더군요. 조너선 딜런이 링컨 대통령의 시계를 수리하고 있던 날은 4월 13일, 바로 남군이 포트 섬터를 공격해 미국 남북전쟁이 발발한 1861년 4월 12일의 바로 다음 날입니다. 그리고 맨 처음에도 얘기했듯 4월 13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 기념일이죠. 따로 따로 떼놓고 보면 별 상관 없는 날이지만, 이렇게 한 칼럼 안에 모아 놓고 보니 참 희한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링컨 대통령은 딜런이 자신의 시계 안에 어떤 메시지를 남겼는지 전혀 몰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평화로운 세상을 원하는 한 시계수리공의 마음이 위대한 대통령에게 금속 표피를 뚫고 전달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절로 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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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의 시계 이야기는 아주 어린 시절 교과서나 학교에서 주는 교양도서에 들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한정된 내용 때문에 좀 축소했지만 저 앞 뒤에도 이야기가 조금씩 붙어 있습니다. 다 복원하자면 이렇습니다.



이튿날 4월 29일이었다. 나는 김해산 집에서 윤봉길 군과 최후의 식탁을 같이하였다. 밥을 먹으며 가만히 윤군의 기색을 살펴보니 그 태연자약함에 마치 농부가 일터에 나가려고 넉넉히 밥을 먹는 모양과 같았다.
김해산 군은 윤군의 침착하고도 용감한 태도를 보고 조용히 내게 이런 권고를 하였다.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많은데 윤군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낼 것은 무엇이요?"
"일은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윤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나는 김해산 군에게 이렇게 대답하였다.
식사도 끝나고 시계가 일곱점을 친다. 윤군은 자기의 시계를 꺼내어 주며,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하기로 나도 기념으로 윤군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는 윤군에게 주었다.
식장을 향하여 떠나는 윤군은 자동차에 앉아서 그가 가졌던 돈을 꺼내어 준다.
"왜 돈은 좀 가지면 어떻소?"
하고 묻는 내 말에 윤군은
"자동차 값 주고도 5, 6원은 남아요."
할 즈음에 자동차가 움직였다. 나는 목이 메인 소리로,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하였더니 윤군은 차장으로 고개를 내밀어 나를 향하여 숙였다. 자동차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천하 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향하여 달렸다.
(이하 생략)


'제 시계는 한 시간 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라는 말을 읽으면 아직도 가슴이 찡 해 옵니다. 목숨을 버리기로 각오한 남자의 결연하면서도 담담한 의지가 느껴지는 듯 합니다. 어설픈 호기와는 다른 진정한 용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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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라는 구멍을 통해서 보자면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선물하려 했던 시계는 이와 정 반대인 헛된 의리와 충성의 본질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박 전 대통령과 김재규 전 부장도 혁명을 함께 할 때에는 나름대로 사나이의 의리로 뭉쳐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죠.

이 시계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10.26으로부터 10년이 지난 1989년, 박근혜 의원이 MBC TV에서 가진 박경재 변호사와의 대담 프로그램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뒤로 몇몇 시사지들이 이 시계와 관련된 추적 보도를 한 적도 있죠. 혹시 더 빠른 기록이 있는지 아시는 분은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 대담에서 박근혜 의원은 '10.26은 김재규가 오래 전부터 기회를 노려 계획하던 일'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이 시계 이야기를 합니다.


- 그러니까, 그 우발적이라는게 아주 무모한, 자기 자신이 앞으로 이 사건으로 해서 사형을 당한다던가, 이런 생각을 안하고 했다 이런 말씀이신지요. 그 10.26 저녁 궁정동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지 사전에 김재규 피고인이 법정에서 얘기한 그대로 건설부 장관을 할 때, 또 그후에도 계속 기회를 노렸다, 이런 말은 믿지 않으신다는 말씀이군요. 
"아, 말이 안돼요. 아버지 생신이 11월 14일 이거든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제가 물건 을 하나받은게 있어요. 11월 14일 조금 못돼선가 그런데, 김재규 그 당시 정보부장이 아버지 께 드리려고 준비했던 시계 선물이에요 몸에다 이렇게 차는 선물인데 어쨌든 아버지께 좋은 선물을 드리기 위해서 금시계로, 거기에다 '생신을 축하드린다'는 글씨도 박고 또 아버지가 훈장을 하고 계신 모습을 새겼고, 국내에서 선물을 준비해도 될 것을 스위스의 유명회사에 다 일부러 맞춰서 11월 14일날 드리려고 했었던 거죠. 그런 선물까지 준비할 필요가 뭐 있 었겠어요."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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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에서 이보다 더 권력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소도구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윗글에 쓴 대로 두 개의 시계가 보여주는 대조가 참 극명하다는 생각입니다. 한쪽은 명품 금시계, 한쪽은 가난한 독립 지사의 시계지만 두 개의 시계가 나란히 있을 때 정작 빛날 것이 어느 쪽인지는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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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매헌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는 지금도 저런 비석이 서 있습니다. 저 장소에 직접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한국에서 간 방문단이 폭탄이 터졌던 자리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일행 중의 미녀 한 분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옛날에는 이 앞길로 기차가 다녔던 건가요?"

약 2초 동안의 침묵. 아니 공원 한 복판에서 웬 기차?

"...기차에서 내리는 걸 총으로 쏜 거 아니었어요?"

그 다음부터 이 미녀의 별명은 '미스 돌고래'가 되었다는 추억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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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나 이슬람교의 신자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는 분들도 있고, 그 분들을 아예 적대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반드시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 적지 않더군요. 물론 어떤 삶의 양식이 등장하는 데에는 그 배후에 문화적인 이유가 있다고 보는게 좋을 듯 합니다.

이슬람교 교단에서 돼지고기나 술을 금하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초코파이를 '먹을 수 없는 음식'의 범주에 넣는다고 하는 건 좀 생소하실 겁니다. 물론 초콜렛은 먹을 수 있지만, 초코파이는 안 된다고 하는군요. 마찬가지로 우유는 마셔도 되지만 요플레는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이런 저런 이유가 겹쳐서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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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랄(halal)

미 국무부 법률고문에 내정된 한국계 고홍주 예일대 로스쿨 학장의 취임에 보수파의 반발이 있었다고 뉴욕타임즈가 2일 보도했다. 이슬람 율법에 대한 고 학장의 발언에서 꼬투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이슬람 율법은 일상 생활에서 투자-경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되는 일들을 규정해 놓았다. 그중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과자 중 하나인 초코파이를 먹어선 안 된다는 것도 있다.

초코파이의 젤라틴 성분 때문이다. 끈적끈적한 질감을 내는 제과용 젤라틴은 돼지 가죽에서 추출한다. 무슬림에겐 최대의 금기인 돼지가 포함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이런 성분을 모두 알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각국 이슬람 교단에서는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 식품의 목록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알려 준다. 이를 할랄 푸드(halal food)라고 부른다. 전 세계의 공인 할랄 푸드 시장 규모는 5800억달러에 달한다. 한국 이슬람교 교단에서도 지난달부터 '먹어도 좋은 한국 과자'의 목록을 공지하고 있다.

할랄이란 아랍어로 '허용된 것'이라는 뜻이다. 육류의 경우 돼지고기, 피, 맞아 죽은 짐승의 고기 등은 먹어선 안된다. 허용된 고기라 해도 율법 규정에 따라 도살된 것이어야 할랄 푸드로 인정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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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돼지가 금기일까.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는 척박한 사막의 환경에 이유를 돌린다. 유목민들에게 최고의 가축인 양이 풀만 있으면 자라는데 비해 돼지는 사람과 양곡을 나눠 먹어야 하고, 젖이나 털 등 부가 자원도 얻을 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따라서 사치품인 돼지를 키우느라 자원을 낭비하지 말라는 의도가 금기로 변한 것이란 설명이다.

결국 모든 금기의 이면에는 그 사회 특유의 필연적인 근거가 있다. 이런 금기의 무시는 때로 유혈 사태로 이어지곤 한다. 1857년 인도에서 일어난 세포이의 반란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금기를 경시했던 영국 통치 세력의 오만이 낳은 비극이었다. 이슬람 세력에 대한 미국 보수파의 경계야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상대 문화에 대한 이해의 거부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돌이켜 보게 된다.

할랄의 이해는 돈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드라마 '대장금'에 대한 아랍권의 뜨거운 반응에 힘입어 한국관광공사도 지난달 말 무슬림 모델을 기용한 한국 홍보 동영상을 제작하고 할랄 푸드 제공 식당을 안내하는 등 아랍권 관광객 유치에 적극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기회에 다른 경로로 젤라틴을 추출한 '할랄 초코파이'를 만드는 건 어떨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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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 신자가 많은 지역에서는 이처럼 할랄 확인 마크를 만들어 식품에 '안심하고 먹어도 되는 품목'임을 표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할랄의 상대 개념인 '금지'는 '하람(haraam)'이라고 부른다는군요.

이렇게 잘난 척 하고 끝맺음을 했는데, 기사가 나간 뒤 오리온제과의 김태욱 홍보과장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알고 보니,

"저희는 오래 전부터 중동 및 이슬람 국가에 수출되는 초코파이에는 돼지 추출 젤라틴 대신에 소 추출 젤라틴을 쓰고 있습니다. 아무 이상 없이 소비됩니다."

아앗 이런;;;; 역시 글쟁이보단 업계에 계신 분들의 손이 훨씬 빨랐던 거군요. 그런데 사막에서는 초코파이가 너무 빨리 녹지 않을까요?

"다 안 녹게 처리를 했죠."

그랬군요. 알고 보니 온 세계로 수출되는 초코파이는 소비되는 나라의 기후에 따라 조금씩 성분이 다르다고 합니다. 덜 녹거나 덜 얼도록 처리가 되어 있다는 거군요. 훌륭합니다, 초코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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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안에 설명이 부족한 부분을 조금 보충하자면 이렇습니다. 19세기 중반,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 현지인들을 세포이라는 이름의 용병으로 고용합니다. 당연히 이들은 거의 모두 힌두교도이거나 이슬람교도였죠. 당시 이들에게 지급된 총의 탄약통(magazine이라고 되어 있는데 당시의 총에 탄창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은 입으로 물어 뜯어 사용하게 되어 있었다는군요.

이 물어 뜯는 부분이 기름 먹인 종이였는데, 문제는 그 기름이 소 기름 아니면 돼지 기름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는 겁니다. 당연히 소=힌두교의 성스러운 동물, 돼지=이슬람의 금기이니 둘 다 입에 댈 수 없다는 반발을 낳은 겁니다.

처음에 이 문제를 무시하던 영국 당국은 뒤늦게에야 '탄통에 먹이는 기름은 염소기름만 사용한다'는 식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이미 불만이 커질대로 커진 상태. 결국 세포이들은 반란을 일으킨다...는 줄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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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전 세계의 모든 이슬람교 신자들이 이 할랄을 준수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추정치로는 약 70% 정도가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고 하는군요. 그래도 전 세계 시장이 5600억 달러에 달할 정도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장이죠.

아무튼 요즘 무슬림 관광객 유치를 위한 노력이 여기저기서 펼쳐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이 국내에 들어와 마음 놓고 식사를 하려면 할랄 여부를 표시해 주는 것도 중요한 일일 듯 합니다. 또 설명에 따르면 아랍 여성들도 이제는 히잡을 패션으로 인식할 정도로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슬람 문화에 대한 이해의 확산이 오일달러를 유치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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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사진은 중동 지역의 최신 유행 수영복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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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당연히 '막장성을 갖춘 드라마', 혹은 '막장스러운 드라마'라고 규정해야 할 겁니다. 막장성이란 스토리상의 막장성(이른바 작가가 원하는 것은 뭐든 이뤄지는 비비디 바비디 부 스토리), 연기의 막장성(소리만 지르고 막말로 싸늘하게 쏘아붙이기만 하면 '탁월한 감정 연기'냐), 연출이나 설정의 막장성(정말 점만 붙이면 아무도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해?) 등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 모두를 갖춘 막강 드라마도 있겠죠.

그런데 요즘 이 막장성 풍부한 드라마들 가운데 희한한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목만 보고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드라마에서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모두 살아 돌아오고 있다는 거죠. 이게 바로 공포영화와의 공통점입니다. '13일의 금요일'이나 '할로윈', '나이트메어' 시리즈를 보신 분이라면 무슨 말인지 금방 아시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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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공포영화들을 보면 많은 주인공들이 범인의 생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보는 관객들을 짜증나게 합니다. 목을 조른다든가, 몸에 불을 지른다든가, 쇠몽둥이로 머리를 때린다든가 하는 방식은 도대체 소용이 없습니다. 심지어 총에 맞는 것도 불충분합니다. 사지가 붙어 있기만 하면 괴물은 무조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공포영화의 원칙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장 확실한 건 '13일의 금요일' 1편 이후로 머리를 날리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버리면 제작자들이 속편을 만들지 못하죠. 그래서 항상 제작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공포영화 출연자들을 바보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략 어정쩡하게 죽여서 꼭 다시 살아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막장드라마 출연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요즘 드라마들 속에서 죽은 사람들은 죄다 살아 돌아옵니다. 막장계의 선두주자인 '아내의 유혹'에 나오는 장서희와 채영인은 모두 죽음에도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여기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이 드라마의 세계에선 아무리 아이를 막 놓아 기르다 잃어버려도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은 모두 무럭무럭 잘 자라나서 어느새 부모의 주변으로 돌아와 있곤 합니다. (참 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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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아버지가 쓰러져 있어도 시청자들은 아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비탄에 젖은 출연자들이 지겨울 뿐입니다. 깔끔한 연출과 중년 연기자들의 호연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은 '미워도 다시한번'의 막장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도 최명길의 옛 애인 선우재덕은 '당연히' 살아 있습니다. 하긴 도입부에서부터 냄새를 적잖이 풍겼죠.

'카인과 아벨'에 나오는 소지섭의 죽음 연출에 이르면 짜증이 날 뿐입니다. 대체 이 드라마에서 소지섭이 정말로 죽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요. 이렇게 뻔하다 못해 뻔뻔한 진행에도 시청률이 오르고 있다는게 참 안습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후손들이 아무 고민없이 브라운관을 누비고 다니고 있을까요. 좀 전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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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막장 드라마

남편이 정부와 작당해 아내를 죽이려 하는데 그 아내는 살아 돌아와 다른 인물로 변신해 복수를 노린다. 그런데 그 변신이란 게 얄궂어서 얼굴에 점 하나 찍었을 뿐인데 남편은 물론 부모와 친오빠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다. 6개월 만에 4개 국어와 골프, 수영을 마스터하는 것 정도는 기본이다.

SBS TV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울고 갈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요즘 이 드라마를 모르면 주부들 사이에선 대화가 힘들다.

이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소위 ‘막장 드라마’들이 안방극장을 장악하고 있다. 채널을 돌려도 소용이 없다. 등장인물의 내면묘사나 정교한 내러티브는 모두 뒷전, 비정상적인 인물과 개연성을 무시한 사건 진행이 드라마마다 넘쳐난다.

국어사전에서 ‘막장’을 찾아보면 ‘갱도의 막다른 곳’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인생 막장’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정도로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선정성이 ‘막장 드라마’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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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 쏟아지지만 방송사는 아랑곳없다. 시청률 40%를 넘나들며 광고를 앞뒤로 꽉꽉 붙여주는 효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셰익스피어 극에도 소위 ‘막장성 요소’는 있다”며 이 계열의 드라마들을 옹호하는 논리까지 등장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리처드 3세’의 주인공 리처드는 자신의 손에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뻔뻔스레 청혼하는가 하면 어머니와 형수의 저주를 받으면서 조카딸에게 청혼한다. 이 밖에도 남녀 쌍둥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야기(‘십이야’),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신비의 약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는 쉽게 발견된다.

물론 대문호의 작품에서도 이런 요소가 보이는데 한낱 TV 드라마에서 그 이상 무엇을 기대하겠느냐는 말을 하자는 건 아니다. 다른 논의를 다 미뤄 두고,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대가 언제인지만 살펴보자.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우리나라로 치면 ‘홍길동전’과 비슷한 연대다. 한마디로 막장 드라마들은 시청자를 400년 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막장성에 의존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황의 영향일 듯하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경기침체 탓으로 대형 뮤지컬들이 잇따라 막을 내리고, 스트립쇼 위주의 오락 공연 벌레스크(burlesque)가 거의 100년 만에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국도 세계의 첨단 조류인 ‘대중문화 퇴행’에 동참하고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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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 나오는 벌레스크란 뮤지컬의 초기 시대에 등장했던, 노래와 춤이 있는 극장용의 버라이어티 쇼, 유흥거리입니다. 이렇게만 쓰면 보더빌(vaudeville)과 차이가 없게 보이지만, 대략 벌레스크는 여자의 나체나 나체에 가까운 모습을 전면에 내세운 성인용 오락거리인 반면 보더빌은 줄거리와 노래, 춤에다 마술 등의 볼거리까지 결합해 보다 수용층이 넓은 형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아무튼 세상이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이 생각없이 볼 수 있는 막장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보는 사람들이 생각이 없어진다고 해서 만드는 사람들까지 생각이 없어서는 안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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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이 글은 이쪽으로 옮겨 오는데 시간이 살짝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공공기관장께서 '막장이란 광부들의 땀과 노력이 담긴 장소'라며 '막장드라마라는 표현을 자제해 달라'고 말씀하셨더군요. 하지만 그냥 이 말은 영어의 dead-end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듯 할 뿐, 저런 식의 확대 해석은 오히려 좀 과민반응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러다간 '개판', '개고생' '개수작' 등의 말이 '충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동물인 개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 표현이니 자제하자'는 말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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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의 정상 도전이 한껏 끓어올랐던 WBC의 분위기를 쫙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지만, 아직 WBC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남아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하는 얘기지만, 1948년 대한민국 건국 이후 한-일전에서 패하고도 이렇게 성원을 받은 것은 2009 WBC 대표팀 외에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왜,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한-일전에서 지고도 박수갈채를 받게 했을까요. 문득 또 다른 도전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고 나서도 퉁퉁 부은 눈으로 "에이드리언!"이라고 외치던 남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단지 영화 속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척 웨프너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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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도전자

1975년 3월 24일, 미국 오하이오주 리치필드의 링에 오른 무하마드 알리는 도전자인 척 웨프너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5개월 전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무적의 철권 조지 포먼을 꺾고 WBA·WBC 통합 챔피언에 오른 알리가 36세의 한물간 백인 복서 앞에서 긴장할 이유는 전혀 없어 보였다. 누구도 도전자가 3라운드 이상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웨프너는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5회를 넘겼다. 심지어 9회에는 알리를 다운시키기도 했다. 자존심이 상한 알리는 전력을 다해 웨프너를 맹폭했지만 도전자는 양 눈 위가 찢겨 피투성이가 된 채로 번번이 되살아났다. 마침내 15회, 경기 종료 19초를 남겨 두고 알리의 TKO승이 선언됐지만 관중은 오히려 웨프너의 투혼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왠지 낯익은 이야기인 게 당연하다. 무명의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은 이 경기를 보고 영감을 얻어 순식간에 시나리오를 썼고, 그가 직접 주연한 영화 ‘록키’는 대대적인 성공과 함께 이듬해 아카데미 작품상까지 따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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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키’에는 그때까지의 다른 스포츠 영화들과 좀 다른 점이 있었다. 주인공 록키는 15라운드의 혈투가 끝난 뒤에도 자신이 이겼는지 졌는지를 묻지 않는다. 단지 무적의 챔피언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웠다는 게 자랑스러울 뿐이다. 이런 도전자 록키의 순수한 열정은 30여 년간 전 세계 수많은 관객을 감동시켰다.

웨프너의 투혼이 빛난 지 정확하게 34년 만인 지난 3월 24일, LA 다저스 구장에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이 열렸다. 알리와 차이가 있다면 지난 대회 챔피언인 일본은 이번 대회에서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는 것. 하지만 한국은 예선에서 일본과 2승2패로 균형을 이뤘고, 결승에선 연장전까지 끌고 가는 명승부로 전 세계 야구 팬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어느 종목이건 일본과의 대결에서 지고도 이처럼 갈채를 받은 것은 아마도 이번 야구 대표팀이 유일할 것이다. 그만큼 선수들의 도전자 정신이 빛났고,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걸 알리는 산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영화 ‘록키’의 마지막 장면. 15라운드의 사투 끝에 기진맥진한 챔피언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내뱉는다. “다시는 너와 붙고 싶지 않아(Ain’t gonna be no rematch).” 아마도 WBC 결승에 임했던 일본 선수들의 심정도 딱 이랬을 터. 이렇게 챔피언의 진을 빼놓는 도전자라면, 이기든 지든 박수 받을 자격은 충분하지 않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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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대결이 벌어지게 된 건, 아무래도 '1차 방어전은 손쉬운 상대로 가자'는 생각의 반영일 겁니다. 척 웨프너의 당시 전적인 30승 9패. 한때 켄 노튼과도 싸워 본 적이 있었지만 당연히 졌고, 그는 복서 인생 내내 보디가드와 주류 세일즈맨으로 일했습니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복싱 훈련을 시작한 것은 '알리와의 타이틀전이 잡힌 뒤'였다는군요.

알리의 파이트머니는 150만불(당시로선 대단히 큰 돈이죠.^)인데 비해 웨프너는 10만불. 하지만 웨프너는 '지금까지 뭘 해서 번 돈보다 많다'며 대전에 뛰어들었습니다. 웨프너가 훈련을 하건 뭘 하건, 알리 쪽은 신나게 인터뷰를 하면서 상대를 백인으로 고른 것이 얼마나 흥행에 탁월한 선택이었나를 자찬하기 바빴다고 합니다.

록키가 아폴로와의 경기를 앞두고 아내에게 하는 유명한 대사, "내가 15회가 끝날 때까지 쓰러지지 않고 있으면 그건 내가 건달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라는 말도 실제로 웨프너가 아내에게 한 말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스탤론이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웨프너에게 물어본 것이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웨프너는 나중에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의 스토리를 도용했다'며 스탤론을 고소하기 때문이죠. 결국 스탤론은 알려지지 않은 액수의 돈을 주고 웨프너와 화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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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프너의 예상 밖 선전은 위에 쓴 바와 같습니다. 문제는 9회 알리를 다운시켰을 때. 자신의 코너로 돌아온 웨프너는 세컨과 이런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웨프너: 봤어? 내가 다운시킨거?
세컨: 그래. 그런데 저 사람 진짜 뚜껑 열린 거 같은데.

한마디로 10회부터 14회까지 웨프너는 '샌드백처럼 맞았다'고 합니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알리가 얼마나 KO를 노렸을지는 안 봐도 알만 하죠. 결국 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알리는 TKO 승을 거둡니다.

알리와의 대전이 웨프너에게 유명인의 자리를 줬지만 그는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링에 올랐지만 다시는 유명 선수와 붙지도 못했고, 나중에는 앙드레 더 자이언트와 친선경기(이종격투기가 없던 시절이라...)를 벌이는 등 그저 그런 일거리들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무튼 그 뒤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어진 듯 합니다.

웨프너의 인생을 바꾼 일전과 WBC 결승 한-일전의 날짜가 같다는 건 참 묘한 인연인 듯 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랬겠지만, 9회말 이범호의 동점타가 터졌을 때의 환희는 승리나 다름없더군요. 엄밀히 말해 이날 경기는 이미 져 있는 경기였기 때문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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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 5라는 안타 수에서도 보듯 일본은 수없이 많은 찬스를 날려 버렸습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꼬여도 정말 더럽게 꼬이는' 경기였죠. 반면 한국은 얼마 되지 않는 찬스를 모두 살려 득점으로 연결시키는 운을 보여줬습니다.

게다가 한국의 전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봉중근, 정현욱, 임창용이 모두 조금씩 불안했지만 바꾸지 않은 것은, 구위 면에서 이들보다 나은 투수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양팀간의 전력차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 네번째 대결, 2라운드 1-2위 결정전입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여유 전력을 가동한 경기였죠. 한국은 장원삼 임태훈 등 대표팀 내의 2진 투수들을 냈고, 일본 역시 그동안 가동하지 않던 투수들을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일본과 한국의 (대표팀 내) 2진 경기에선 일본이 압승이었습니다. 이날 경기는 승패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선수 층의 두터움에서 일본이 압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경기였던 거죠.

게다가 한국이 박찬호 이승엽 박진만 등 베테랑이 빠진 팀이긴 했지만 일본은 이번 대표팀 정도의 팀을 두 팀 이상 마련할 수 있을 정도로 풍성한 야구 저변을 갖고 있습니다. 대표팀 안에서도 1진과 2진의 기량 차이가 있는 한국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뭐 김광현에 대한 그간의 분석과, 세번째 나온 봉중근에 대한 분석 등 정보파악과 분석력에서도 어쨌든 한국보다 한수 위라는 것 역시 인정할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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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회에서 두 나라가 무려 다섯번의 대결을 벌이게 된 이번 대회의 진행 방식은, 그래서 한국인들에게는 극악무도한 대전방식이라고 지탄을 받지만 엄밀히 말하면 보다 야구 본연의 성격에 맞는, '진짜 강자가 이길 수 있는' 진행방식이기도 합니다. 야구란 서로를 알면 알수록 진짜 실력이 나오는 경기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토너먼트 방식의 약점을 극복하고 가능한 한 경기 수를 늘려서 같은 팀이 여러번 맞붙을수록 요행은 사라지고 실력에서 앞서는 팀이 이길 가능성이 높아지게 하는 건 어찌 보면 현명한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꽤 짜증이 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결승에서 그렇게 선전했다는 건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닙니다. 상대의 방심으로 러키 펀치를 터뜨린게 아니라, 승리에 대한 집념과 투지가 전력차를 밀어내 버린 경기였다는 거죠. 그래서 그토록 큰 감동과 박수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겁니다.

'록키' 이후 수많은 영화들이 '위대한 패배'를 모티브로 삼아 크게 성공했죠. '쿨 러닝'에서 '우생순'까지 사례는 충분히 있습니다. 승리만이 전부가 아니란 걸 가르쳐준 것이 '록키'의 공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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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 열릴 예정이던 X-재팬의 내한공연이 또 연기됐습니다. 지난해 8월15일, 11월에 이어 세번째 바뀐 날짜가 또 연기라니, 정말 팬들의 입장에선 화가 날만도 합니다. 일본에서 흘러 들어 온 얘기로는 한국 공연만 그렇게 된 게 아니라니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고.

이번 연기(사실상 취소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는 멤버간의 불화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베이시스트 히스의 소속사와의 문제라는 얘기도 있어서 확실치는 않습니다. 물론 지난해 3월 도쿄돔에서 열린 10년만의 재결합 콘서트에서도 요시키가 중간에 실신하는 등 그룹의 핵인 요시키의 건강 문제는 항상 돌발 변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과의 인연이 계속 꼬이는 것은 아무래도 뭔가 악연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X-재팬의 열렬한 팬은 절대 아니었지만, 아쉬움 때문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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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엑스 재팬

서태지라는 예명이 무슨 뜻인지 사람들이 궁금해 하던 시절, 그 이름이 일본 록 밴드 엑스 재팬의 베이시스트 타이지(Taiji)에게서 따 온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다.

서태지도 한때 록 그룹 시나위에서 베이스 기타를 쳤으므로 꽤 그럴싸한 얘기였지만 팬들은 엑스 재팬이라는 상징적인 이름 탓인지 "서태지를 일본 음악의 주구로 매도하려는 흠집내기"라며 격분했다. 결국 서태지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공식 해명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그 엑스 재팬의 첫 내한공연이 또 연기됐다. 당초 3월21, 22일 양일간 서울에서 공연할 예정이던 이들은 돌연 13일 아침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일방적으로 공연 연기를 선언했다. 5월로 잡혔던 일본 공연까지도 환불에 들어갔다니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 일본 음악을 들을 수 없던 시절, 1985년 결성된 엑스 재팬은 '일본 음악을 개방하는 순간 한국 대중음악은 고사해 버릴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처럼 보였다.

그만치 당시 이들이 보여준 음악적 성과는 국내 음악과 수준차가 있었다. 이들의 히트곡 '엔들리스 레인'이나 '세이 애니싱'은 처음 듣는 사람에게도 왠지 익숙한 느낌을 준다. 1990년대 초반, 수많은 한국의 작곡가와 가수들이 이들의 노래를 번안하다시피 그냥 베껴 불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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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수입은 꿈도 꿀 수 없던 무렵에도 서울 남대문 지하상가에선 이들의 베스트 앨범인 '베스트 오브 엑스(B.O.X)'를 구할 수 있었다. 보따리 장사들이 한국에 들여 온 양만 20만장 정도는 될 거란 추측이 나돌았다. 세월이 흘러 1998년부터 일본 대중음악이 순차 개방됐을 때 가장 먼저 발매된 음반도 바로 저 B.O.X 앨범의 연주곡 버전이었다.

개방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음악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한류라는 이름으로 한국 가수들이 일본에 진출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엑스 재팬의 모습을 한국에서 볼 수는 없었다. 이들은 1997년 해체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3월 재결성 선언과 함께 8월15일 잠실 주경기장 공연이 추진됐지만 "광복절날 서울에서 일본 밴드가 공연한다니 말이 되느냐"는 잡음만 쏟아졌다. 다시 11월로, 3월로 재차 연기된 공연은 멤버간 불화설 속에 또다시 무기 연기됐다. 서울에서 이들의 공연을 보는 일은 참 지난하기만 하다. 잠잠하다가도 한 순간 어디선가 터져나오는 망언으로 꼬여 드는 한일관계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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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이전 일본 대중음악의 한국 유입을 막은 것은 사실 꽤나 근거 없는 두려움, 무시할 수 없는 적대감, 그리고 한국 가요 제작자들의 장삿속이었다는 걸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적대감에 대해서는 사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 토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1980년대 학교를 다니면서, 안전지대나 튜브의 노래를 듣는 친구들에게 침을 뱉고 싶었으니 말입니다. 그 노래들이 엇비슷한 한국 가요로 개편되어 나온다는 건 굳이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적대감을 해소시켜 준 것이 카시오페아와 T-스퀘어였고, 은근히 그 음악 잘 한다는 X-재팬에도 관심이 쏠렸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음악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죠. 그래도 90년대라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대개 X-재팬의 싱글들이나 'Blue Blood', 'Jealousy' 앨범을 사 들여 오곤 했습니다. 물론 유입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고 국내에서 X-재팬의 붐이 절정을 이룬 건 1996년, 위에서 말한 B.O.X 앨범의 발매 이후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국내에서 인정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죠. 일본 출신의 록 밴드 라우드니스가 80년대 중반 영어 가사의 노래들만 부른다는 조건으로 내한 공연에 성공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90년대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X-재팬의 내한공연이 언제쯤 열릴 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수시로 등장했지만, 실제 가능성은 별로 없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이들이 영어로만 노래를 했대도 아마 마찬가지였을겁니다. 뭣보다 X-재팬이라는 이름, 요상한 화장과 요란한 머리 모양이 당시의 '어르신'들에겐 끔찍하게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죠. 서태지도 '복장과 두발 상태 불량'을 이유로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하던 게 90년대의 한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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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없는 두려움이나 장삿속에 대해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합니다. 결과를 볼 때 개방은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 향상을 가져왔고, 시장의 확대 측면에서도 일본보다는 한국 쪽에 훨씬 큰 득이 됐습니다. 표절 사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전처럼 '표절 아닌게 없다'는 수준에서는 크게 벗어났습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개방은 천천히 이뤄졌습니다. 그중 관심 가질만 한건 2000년 초, 1998년 2000명 이하의 공연장에서만 가능했던 일본 가수의 국내 공연 관객 제한이 없어진 조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국 땅을 처음으로 밟은 빅 스타는 차게&아스카였습니다. 이들의 인기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면을 감안하면 역시 이 때 왔어야 하는 건 X-재팬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1997년 라스트 라이브 이후 해체된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 뒤로 11년, 2008년 8월 15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릴 뻔 했던' 공연은 '광복절에 쪽바리들이...'라는 여론과 함께 사라졌고, 이후 요시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됐습니다. 이제는 정말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공연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이들이 한국 무대에 한번 서야 그 길고 길었던 상호 불신과 고집을 나날에 한번 쉼표가 찍힌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재주의 부족으로 저 짧은 글에는 여운만 남겼습니다. 그리고 '요상한 화장을 한 일본 딴따라들'을 병균 취급하던 시대에 대한 추억도 잠깐 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1992년 1월 도쿄돔에서 열린 'On the Verge of Destruction 1992.1.7 Tokyo Dome Live'를 다시 봤습니다. 아무래도 이들의 전성기는 타이지가 함께 했던, 'Jealousy' 앨범이 나왔던 90년대 초 까지라는 생각입니다.

92년 라이브는 유튜브에서 잘 보이지 않는군요. 많이 알려진 1997년 라스트 라이브 때의 'Endless Rain'입니다. 라이브에서의 이 노래는 정말 endless하게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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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가끔 주위 사람들이 "우리 애가 (연기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어디 소개시켜 줄 데 없느냐"는 질문을 해 오는 편입니다. 이럴 때 저의 대답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웬만하면 클 때까진 시키지 마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역 이기는 성인 배우 없다는 건 TV 드라마 시장의 철칙 중 하나입니다. 뒤로 가면서 처절한 실패를 맛보는 드라마도 앞 부분, 아역들이 나오는 부분만큼은 어느 정도 성적을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히트작도 예외는 아닙니다. 최근 종영한 MBC TV '에덴의 동쪽'역시 장기간 히트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은 송승헌의 아역으로 출연한 김범의 활약에 기댄 부분이 꽤 큽니다.

그럼 아역배우 본인의 삶은 어떨까요. 실제로 촬영장에 따라다니면서 본 결과, 아역배우들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이 솔직한 생각입니다. 우리나라의 환경이 문제일 수도 있고, 본질적으로 어린 나이에 생활 현장에 나와 있는 데서 오는 피로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이런 생각과 관련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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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역 스타

올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인도 뭄바이 빈민가에서 성장한 청년 자말이 100만 달러가 걸린 퀴즈쇼에 출연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유명 배우라곤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 이 영화는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상의 작품상을 휩쓸면서 일약 최고의 화제작이 됐다. 실제 빈민가 출신인 아역 배우 아자르 무하마드 이스마일(10)과 루비아나 알리(9)는 오스카 시상식장에도 등장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전 세계의 관심이 어린이들을 행복하게 한 것 같지는 않다. 이스마일의 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아들이 “피곤해 인터뷰 같은 것은 하고 싶지 않다”고 투정하자 보도진이 보는 앞에서 아이를 때려 쓰러뜨렸다. (위 사진입니다.) 인도 정부는 이들에게 살 집을 주고, 제작진은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에 대비해 신탁기금을 마련했지만 부모들은 “지금 당장 돈을 달라”며 항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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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스타들과 돈에 눈먼 부모들의 문제는 할리우드 최초의 스타 아역 배우가 출현했을 때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영화 '키드'(1921년)에서 찰리 채플린과 공연, 7세의 나이로 스타덤에 오른 재키 쿠건은 21세가 되자 그가 번 400만 달러를 탕진했다며 어머니와 계부를 고소했다. 하지만 재판 결과 쿠건이 되찾은 것은 12만 달러뿐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역 배우의 재산 보호에 대한 논쟁이 일었고,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미성년 배우가 벌어들인 돈 중 최소 15%는 성년이 될 때까지 제3자가 신탁 관리해야 한다는 법규를 통과시켰다. 이 법은 지금도 '재키 쿠건 법'이라고 불린다. 이 법은 재산뿐만 아니라 교육과 촬영 시간 등 미성년 배우가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출연한 배우들은 하루 9시간30분 이상 촬영장에 머물 수 없었고, 그중 3시간은 영화사가 고용한 교사와 함께 공부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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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한국의 경우 아역 스타들을 위한 보호 장치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다. 연기나 노래를 하는 동안 아이들의 교육은 방임 상태에 놓인다. 한국의 미성년 연예인에게 가장 큰 위험은 부모의 탐욕보다 '어른 대접'의 유혹이다. 최근 왕년의 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에서 소년 노마 역을 맡았던 아역 배우가 한의사가 됐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그보다 유명했던 금동이 역의 아역 배우는 법의 심판을 받기도 했다.

10대 스타들의 성공이 각광받으면서 '어릴 때부터 재능을 키워주고 싶다'는 부모와 아이들로 연예 관련 학원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지금, 재키 쿠건 법의 취지에 더 많은 관심이 모아져야 할 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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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키 쿠건이 벌어들인 1930년대의 400만달러는 지금으로선 상상하기도 힘든 거액입니다. 그런 거액을 부모가 보호자라는 이유로 탕진해버린 것은 아역 배우 입장에선 참 기가 막힐 일이죠.

더 잘 알려진 경우로는 매컬리 컬킨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80년생인 컬킨은 1990년 '나홀로 집에 (Home Alone)'에 출연하면서 당대의 영화 흥행 성적표를 모두 바꿔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스타덤은 굵고 짧았죠. 부모의 이혼, 이혼 후의 양육권 다툼 등 다양한 사건으로 골치를 앓던 그는 15세 때 부모로부터 법적으로 독립하고(내 재산은 내가 지킨다!) 아버지를 매니저로 고용해 월급을 주고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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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때 이미 귀여운 맛이 사라지며 상품성을 잃기 시작한 컬킨은 18세때 동갑내기인 아역 배우 출신 레이첼 마이너와 결혼, 20세때 이혼하는 등 성인으로서의 삶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느낌으로 팬들을 실망시켰습니다. 2004년에는 마약 소지로 체포되는 물의를 빚기도 했죠. 여전히 배우로 활동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관심에서는 꽤 벗어나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아역 출신이 성인이 되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사례는 여러 번 보고되어 있습니다. 가장 큰 위험은 윗글에서도 살짝 다뤘듯 아역 스타들이 일찍부터 어른들의 세계에 노출된다는 것이죠. 이른 나이에 한 사람의 어른으로 대접받고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니 미성년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이 오게 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일찍부터 음주나 흡연을 비롯한 어른들의 오락거리에 눈을 뜨고 비뚤어진 길을 걷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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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자체도 큰 스트레스입니다. 제가 옛날에 본 한 촬영장에서는, 활발한 성격의 아역 배우가 하루 종일 우울한 표정으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오늘 주사 맞는 장면이 있는데 진짜로 주사를 놓을 거다"라고 얘기를 했다더군요. 그래서 이 배우는 신이 끝날 때면 조연출에게 "정말 주사 맞아요? 오늘 찍어요?"라고 계속 물어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주사 맞는 장면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루 종일 그 아역 배우는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요. 이 정도면 거의 아동학대입니다.

아역들이 겪는 스트레스에 대한 글은 전에 따로 쓴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많은 아역 출신 배우들은 "그때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게 한"이라고 입을 모읍니다. 그 또래의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지식은 물론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방법에도 꽤 큰 영향을 줍니다. 물론 지식 자체는 말할 것도 없죠.

모든 측면에서 살펴보더라도 하루빨리 한국에서도 선진국들처럼 아역 배우들의 인권과 건강, 교육을 감안한 규제 방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초등학생에서 멀리는 '사실상 고교 휴학생'이 되어 버리는 10대 아이들 스타에 이르기까지, 무분별한 활동을 막는 방안 말입니다. 비록 당장은 '열심히 활동해서 성적을 내야 특차로 대학에 가지'라고 생각하는 부모들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 자녀의 인생을 생각하면 꼭 그게 득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p.s. 아무튼 요즘 자꾸 무거운 얘기만 올리는 것 같아(심정 탓인가...) 분위기 전환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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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식탁에서 고추를 제외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마 살 맛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겁니다. 매운 떡볶이 생각에 자다가도 깬다는 유학생들의 얘기를 들어 봐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눈길을 잡아 끄는 기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세종대왕때에도 고추가 있었다' 등등 일련의 기사였죠. 똑같은 자료에서 나온 기사이기 때문에 내용은 대동소이했을 겁니다.

먹거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국에 고추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전후라고 알고 계셨을 겁니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고추가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고, 그것이 다시 유럽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일본에서 다시 조선으로 전해졌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죠. 그래서 약 18세기 이전까지 한국인들이 먹어온 김치는 백김치였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최근 연구 결과는 이런 정설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궁금증이 절로 떠오릅니다. 대체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매운 음식을 먹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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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치 미스터리

 우리는 언제부터 매운 고추를 먹었을까. 오래전 할머니들은 말씀하셨다. “왜놈들이 처음에 고추를 먹어 보니 이게 독(毒)인 거야. 그래서 조선 사람들을 죽이려고 임진란 때 고추 종자를 뿌렸지. 그런데 조선 사람들한테는 독은커녕 입맛에 잘 맞아 널리 퍼진 거야.”

고추가 16세기 말 일본에서 전해졌다는 것은 학계에서도 정설이었다. 하지만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 박사팀이 반론을 제기했다. '시경'이나 3세기 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 이후 초(椒)라는 식물이 수많은 문헌에 등장하며, 최세진의 『훈몽자회』(1527)에도 이 글자의 뜻이 '고쵸 초'라고 기록돼 있는 등 본래부터 한국에는 고유종의 고추가 있어 널리 식용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고추의 도입 시기를 기록한 가장 중요한 문건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에 나오는 '남만초(南蠻椒)는 독이 있으며 왜국을 통해 들어와 왜개자(倭芥子)라고도 불린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권 박사는 남만초와 왜개자는 모두 우리가 먹는 고추(椒)와 다른 식물이라고 주장했다. 기존 연구자들이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발견한 고추와 한국산 고추는 전혀 다른 품종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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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입맛을 감안할 때 16세기 이전에도 고추가 있었다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이어지는 궁금증은 각종 음식, 특히 김치에 사용한 기록은 왜 별로 보이지 않으냐는 점이다. 1670년 발간된 한글 요리 책자인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수많은 김치 가운데서도 고추를 사용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19세기의 문헌 『규합총서』(1809)에 나오는 김치 중에도 대부분의 종류에는 고춧가루 아닌 실고추가 들어갈 뿐이다.

『한국 음식, 그 맛있는 탄생』의 저자 김찬별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우리는 모두 고추 중독자다'라는 기사를 인용해 새빨간 음식의 유행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하루 세 끼의 반찬이 모두 고추로 양념돼 음식 맛까지도 모두 고추 맛으로 변해 버렸다'며 당시의 풍조를 개탄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권대영 박사는 “고추는 소금 못잖게 김치의 장기 보존에 절대적인 조건”이라며 “김치에 고추가 사용된 것이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빨랐다는 것을 증명해 내겠다”고 의지를 보이고 있다. 과연 한국인의 매운맛 사랑은 반만년 역사에 비춰 볼 때 최근 100년 안팎의 유행일까, 아니면 면면한 전통의 결과일까. 연구 결과가 정말 기대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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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시 한번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저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일 뿐, 역사 분야에도 식품 분야에도 전문가가 아닙니다(먹는 쪽이라면 비교적 전문가에 가까울 수도...^^). 다만 우리가 먹는 음식의 기원에 궁금증을 느낀 사람일 뿐입니다.

저 연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신문 기사의 요약(이런 경우 많지만 대개 심각한 오류나 생략이 있기 마련입니다)을 기대하지 마시고, 직접 연구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www.kfri.re.kr에 가서 '사이버 홍보실 - KFRI 발간자료'로 가시면 원문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사는 일단 임란 100여년 전인 1487년 편찬된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등 임진왜란 이전의 문서들에서 한자 ‘초(椒)’에 한글로 ‘고쵸’라는 설명이 명시돼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도 '훈몽자회'의 예를 들었지만, 이런 단어 분석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문서에 전차(戰車)가 나온다고 해서 그 시대에 오늘날 우리가 전차라고 부르는 탱크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은 아무래도 16세기 고추 전래에 대한 의문 제기입니다. "만약 멕시코에서 나온 '아히'라는 고추가 1492년 유럽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면 고작 몇백년 사이에 한국 고추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종류로 바뀔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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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 결과가 발표된 뒤 사계의 많은 전문가들이 '낚시다'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지적은 아무래도 "멕시코 산의 고추와 한국-중국의 고추가 과연 DNA 차원에서 같은 조상을 가진 것인지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죠. 그리고 몇몇 분들이 멕시코를 원산지로 하는 고추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중 일부는 한국-중국산 고추와 같은 조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주장은 http://hosunson.egloos.com/2296323

이런 주장에 따르면 권박사님의 연구에 나오는 '한국의 고추는 콜럼버스가 멕시코에서 가져온 것과 다른 종자일 수 있다'는 가설은 원천봉쇄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가능성을 남겨 둔다면, 고추의 도래 시기가 16세기보다는 조금 더 빨라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단지 가능성일 뿐이지만,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15세기 초 정화의 원정대가 북미대륙 서해안에 도착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때 고추가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뭐 물론 근거라고는 전혀 없으니까 농담으로 치시는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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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지금까지의 정설을 따르자면 한국인들은 16세기 후반에 고추를 처음 접했고, 이 식물이 전국에 퍼지는 데에도 최소 100년 정도는 걸렸을테니 17세기 후반이나 18세기 초반에 온 국민이 고추를 식용으로 이용하게 됐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맛에 익숙해지는 데 다시 100년 정도는 걸렸다는 얘기죠.

또 위에 예로 든 김찬별님의 '한국음식 그 맛있는 탄생' 에 나오는 내용을 보거나, 매운 떡볶이의 등장마저도 해방 이후, 심지어 6.25 이후라는 증언들을 들어 볼 때 한국인들이 매운 음식에 익숙해진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겁니다. 매운 음식 없으면 못 사는 한국인들이 고작 100년...? 왠지 서운하다는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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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을 쓰기 위해 권대영 박사님과 통화했을 때에도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내가 이 연구를 시작한 것도, 한국인이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지금처럼 먹은 것이 최근(역사적으로 최근)의 일이라는 걸 납득하기 어려워서였다. 또 소금만으로 야채의 신선도는 유지되기 힘들다. 고추는 소금 못지 않게 김치의 보관에 절대적인 요소였다. 비록 현재까지 문서상으로 확보된 근거가 없어 지금은 뭐라 말할 수가 없지만, 앞으로 연구를 계속해 반드시 한국인의 고추 식습관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래된 일이라는 것을 밝혀내겠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존 연구가 뒤집히든, 아니면 더욱 강화되든 고추와 고춧가루의 역사는 좀 더 자세히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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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사실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인의 매운 맛 사랑은 최정상급은 아닙니다. 상위 30% 이내에는 확실히 들겠지만 10% 이내에 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한국산 고추 자체가 그리 맵지 않기 때문이죠. 흔히 '쥐똥고추'라고 불리는 동남아산 고추만 맛본 분들이라도 아마 이 말에 절대 반대하시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일본사람이나 앵글로색슨계의 백인(라틴계는 매운 맛에 익숙하죠)들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매운 거라면 우리가 독보적"이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도 같습니다.

(물론 최근 몇년 사이에도 한국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매운 맛의 강도는 나날이 드높아져 가고 있는 듯 합니다. 불닭이라는 음식을 가장한 고문 도구의 등장도 그렇고, 매운 맛의 정수인 수입 캡사이신액이 식당 주방에서 공공연히 쓰인다는 얘기도 들리고...

그렇다면 계속 떠오르는 의문. 대체 왜 하필 20세기에 들어와서 한국인들은 매운 맛에 눈을 뜨고 나름 즐기게 됐을까요? 일제 식민지의 고초를 견디기 위해서? 아니면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역시 연구자들의 분발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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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노벨상을 비롯해 세계적인 위인들의 이름을 딴 상은 수없이 많습니다. 레닌상(과학, 인권), 페르마상(수학), 오일러상(수학), 퓰리처상(언론), 로버트 카파상(보도사진), 간디상(인권), 사하로프상(인권), 막사이사이상(인권), 노구치 히데요상(의학), 에드가 앨런 포 상(문학), 오 헨리 상(문학)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수많은 위인들의 이름을 딴 상 중에 다윈상 혹은 다윈 어워드(Darwin Awards)이 있습니다. 다른 상들과 차이가 있다면 전혀 명예롭지 않은 상이라는 점입니다. 1985년부터 수상자를 배출해 왔지만 수상자 가운데 저나 여러분이 이름을 알만한 사람은 전혀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그냥 장난이라면 장난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유쾌하다고만 볼 수는 없는 장난이기도 합니다.

다윈 탄생 200주년, '종의 기원' 발간 150주년이고 지난 12일은 바로 찰스 다윈의 200번째 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생각났던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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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다윈상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영화 '다윈 어워드(The Darwin Awards, 2005)'는 다윈 상 수상자와 주위 여건의 상관관계를 추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여기서 다윈 상이란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을 기념해 제정된 상이며, '자연선택설에 입각해 그들 자신을 제거함으로써 인류의 유전자 개선에 공헌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상이라는 설명이 등장한다.

복잡하지만 풀어 설명하면 '살아 있었다면 인류의 형질 개선에 별 도움이 안 될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버려, 자신들의 어리석음이 후손들에게 유전되지 않도록 해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주는 상'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 이야기라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실제 존재하는 이 상(http://darwinawards.com)은 1985년부터 매년 수상자를 배출해 왔고, 수상자들의 어처구니없는 사연을 담은 책들도 여러 차례 발간됐다. 사연도 가지각색이다. 콜라 캔을 공짜로 빼내려다 자동판매기에 깔려 죽은 사람, 요트의 구멍을 테이프로 막고 항해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아내에게 위자료로 집을 주라는 판결이 나오자 집에 불을 질렀다가 타 죽은 사람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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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하긴 하지만 한국적인 기준에서 볼 때에는 어쨌든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사연을 웃음거리로 삼는다는 게 그리 편치는 않다. 유명인들의 사망 기사에 달리는 인터넷 악플들을 연상시키는 구석도 있다. 이런 장난에 자신의 이름이 쓰인다는 데 대해 다윈은 어떻게 생각할까.

다윈의 이론이 인류의 지성 발전에 기여한 내용이야 굳이 재론할 필요도 없지만, 한편으론 그의 주장이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을 합리화하는 데 악용되어 왔다는 비판도 항상 따라다닌다. 다윈이 없었다면 우생학이나 나치의 홀로코스트도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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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에서도 가끔은 다윈을 원망하는 일이 생긴다. 시청률에서 경쟁 방송에 뒤지는 프로그램은 당장 폐지되어야 하고, 박스 오피스를 장악하지 못하는 영화는 사라져 마땅하다는 주장 때문이다. 다행히도 가끔씩 독립영화 '워낭소리'가 50만 관객을 동원하는 기적이 일어나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지난 12일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아 세계 각국에서 축하 행사가 열리고 있지만 인류는 그동안 그의 가르침을 빙자해 저질러온 수많은 바보짓에 대한 반성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다윈 상의 존재 의미는 어쩌면 그런 실수들을 잊지 말라는 반면교사일 수도 있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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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다윈상 수상자들에 대한 책이 번역돼 나온 적이 있더군요.

사실 찰스 다윈의 자신의 일생을 돌이켜 보더라도 실수로 인한 발전도 꽤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영국 해군 함선 비글호에 편승한 다윈은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군도에 도달할 무렵 너무 심해진 배멀미로 인해 하선 조치를 당합니다. 만약 이때 다윈이 함선 생활에 너무나 잘 적응했더라면 '종의 기원'은 나오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뭐 남들의 어리석은 실수에 대해 비웃고 손가락질하는거야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걸로 인해 죽은 사람까지 대놓고 웃음거리로 삼는 건 좀 편치 않더군요. (아무래도 지난번 포스팅에 이어 너무 영감같은 소리만 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문화계와 다윈의 비유는 딱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연선택으로 인한 진화는 몇 세대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지만 문화계에서의 적자생존은 매 순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다윈의 어두운 쪽을 계승한(혹은 했다고 자처하는) 후계자들 은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것들만 살아남는다'는 식의 믿음에 따라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살아남을 가치가 없는 것들'을 참혹하게 억눌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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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에도 나오는 천지불인 天地不仁 이라는 경구는 다윈의 가르침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지만 이를 자신들의 잔혹성을 포장하는 데 사용해온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습니다. 어떤 현명한 가르침이라도 비뚤어진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남을 해치는 도구로 사용될 여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다윈상 홈페이지에는 볼테르의 경구가 떡하니 쓰여 있습니다. '수학자들이 무한이라고 말하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어리석음의 총량을 생각해봐야 한다(The only way to comprehend what mathematicians mean by infinity is to contemplate the extent of human stupidity.)' 이 말은 아마 이런 상을 만든 사람들 자신도 돌이켜봐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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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영화 '마스터 앤 커맨더'에 나오는 닥터 매튜린(폴 베터니가 연기했던)은 찰스 다윈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해서 흥미롭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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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호 김현중 김범 김준의 '꽃보다 남자'가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상황에서 살인마 강호순의 얼굴이 공개되고, 그가 뜻밖에도 인상 좋은 호남형 얼굴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미국의 전설적인 미남 연쇄살인범 테드 번디를 연상시키면서 잇달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모든 연쇄살인자가 연예인 수준의 미남인 것도 아니고, 미남이 평범한 외모의 남자들보다 더 위험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위험한 성향을 가진 사람, 전문 용어로 사이코패스인 인물들이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빼어난 용모를 가지고 있을 때 그 위험성은 배가될수밖에 없을 겁니다.

특히 미남 연쇄 살인범에 대한 기록들은, 이들이 잘생긴 외모 때문에 일찌감치 수사선상에서 제외되거나 체포된 뒤에도 수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던 전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죄라는 증거가 뚜렷한 상황에서도 이런 추종자들은 그들이 무죄라고 믿고, 심지어 남편으로 삼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대체 왜 그런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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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꽃보다 살인마

1980년 2월9일, 30여 명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미국의 살인마 테드 번디(위 사진)는 플로리다주에서 열린 재판 도중 증인으로 출석해 있던 캐럴 앤 분에게 “나와 결혼해 주겠느냐”고 물었다. 분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법정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이날 번디는 유죄 판결을 받았다.

잘생긴 외모와 언변에다 법대 졸업 학력까지 갖춘 번디는 매스컴의 주목으로 '살인 귀공자'란 별명과 함께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팬레터가 밀어닥쳤고 일부는 그가 진범일 리 없다고 주장했다. 번디는 89년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자신의 변호인과도 염문을 뿌렸다.

미남 살인마에 대한 기록에는 거의 예외없이 그들에게 매력을 느낀 여성들의 이야기가 포함돼 있다. 영국의 여성 저널리스트 샌디 폭스는 74년 미국 애틀랜타의 한 바에서 미남 청년 폴 존 노울스(아래 사진)를 만났다. 폭스는 77년 쓴 책 『킬링 타임』에서 노울스가 “확 눈에 들어오는 잘생긴 얼굴과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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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이미 18명을 죽인 노울스는 그날 밤 자신의 범행을 상당 부분 털어놨고, 폭스는 “섬뜩함을 느꼈지만 그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고 전했다. 뒷날 체포된 그에게는 면회를 요청하는 여성들이 끊이지 않았다. 언론은 그를 '카사노바 킬러'라고 명명했다.

미남 살인자들의 인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범죄심리학자들은 위험한 범죄자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경향을 '하이브리스토필리아(Hybristophilia)'라고 통칭한다. 이에 대한 유력한 설명은 구원 판타지다. 여성들은 설혹 상대가 연쇄살인마라 할지라도 자신의 사랑으로 그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미녀와 야수 신드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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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재판이 주는 긴박감이 보는 이를 성적으로 흥분시킨다는 가설, 또 유명한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 동경, 범죄자 내면의 외로움을 자신만이 달랠 수 있다는 믿음 등이 있다. 그리고 간혹 발견되는 미남형 범인들은 이런 경향을 최대치까지 끌어올린다는 것.

살인마 강호순의 미남형 외모가 공개되어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줬다. 그가 자신의 매력을 피해 대상인 여성들을 유혹하는 데 사용했다는 수사 보고가 전율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인터넷에는 '강호순 팬카페'까지 등장했다. 누군가의 치기 어린 장난이기를 바랄 뿐이다.

요즘도 일각에서는 KBS 2TV 드라마 '꽃보다 남자' 등 TV 프로그램들이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긴다고들 한다. 하지만 미남 살인마들을 둘러싼 기록을 보면 외모에 대한 선호는 이미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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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번디는 30여명의 살해를 인정했지만 실제로 그가 죽인 여자는 100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번디는 1980년 사형 판결을 받은 이후 줄곧 "속죄의 의미에서 경찰에게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전모를 밝히겠다"며 사형 집행을 1989년까지 연장했지만, 결국 재판 결과 외에는 아무 것도 더 털어놓지 않았습니다.

9년 동안 수없이 많은 경찰, 기자, 성직자, 심리학자와 프로파일러들을 만났지만 주장에는 일관성도 없었고, 수시로 말을 바꿨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식의 고백과 면담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려는 술책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사형 집행 전날까지도 유명한 포르노 반대자인 제임스 돕슨 목사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포르노를 금지하지 않으면 소년들이 제2, 제3의 번디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수사관들은 "그 이전까지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의 범행이 포르노의 영향이라고 말한 적도 없었고, 그의 소지품에서 포르노가 나온 적도 없었다"고 비웃었습니다. 결국 이 인터뷰 역시 돕슨 목사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대가로,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돕슨 목사가 자신의 사형 집행을 연기시켜 줄 것을 기대한 쇼였다는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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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캐럴 앤 분과의 결혼 역시 대중을 의식한 연기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번디와 분이 언제 처음 만났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분은 번디가 자신의 애인이라고 믿었습니다. 분은 번디가 주로 살해한 피해자들과 비슷한 특징 - 긴 갈색 머리, 한쪽으로 치우친 가르마, 가녀린 몸매 - 을 갖고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번디는 분을 해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분은, "그가 나를 해치지 않은 것은 그가 일련의 살인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주장했던 거죠. 유력한 증거였던 던디가 사체에 남긴 깨문 흔적조차도 분은 "경찰의 조작"이라고 우겼습니다.

법정에서 결혼한 뒤 1982년 번디의 딸까지 낳은 분은 그러나 1986년의 어느날, 번디와 이혼을 선언한 뒤 이름을 바꾸고 사라졌습니다. 뒤늦게나마 환상이 깨진 모양이죠. 번디의 딸이 살아있다면 현재 27세. 과연 어디서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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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린 리오이라는 여자는 13건의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리처드 라미레스(위 사진)에게 구애하다가 결국 결혼에 성공했습니다. 리오이는 라미레스의 사형이 집행되는 날 자살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고 합니다. 라미레스는.... 살인범의 얼굴이라고 생각하면 흉악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본다면 '강렬한 개성의 특이한 얼굴'로 볼 수 있는 용모입니다.

하이브리스토필리아(Hybristophilia)라는 생소한 용어는 성도착의 여러 증상 중 하나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위험해 보이는 남자, 특히 폭력적인 범죄자에게 끌리는 현상을 가리키는 이 용어는 가끔 '보니 앤 클라이드 신드롬', 혹은 '미녀와 야수 신드롬'이라고 불리던 현상들과 어느 정도 겹치는 영역을 갖고 있습니다.

모성애의 발로에서든, 아니면 다른 증세에서든 여자들은 악한 남자의 내면에서 구원의 여지를 찾고 거기에 헌신하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죠. 물론 모든 여자가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약간 비약하자면 많은 여자들이 순박하고 착한 남자보다 거칠고 못된 남자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슬쩍 이런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살인자에게 느끼는 위험한 매력과 비교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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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지금까지는 미남 살인자에 대한 여자들의 막연한 호감을 주로 얘기했지만 우리는 이미 그 반대의 경우를 온 국민이 겪어 본 적이 있습니다. 바로 1988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범 김현희의 경우에 이런 일이 있었죠. 미모 때문에 저지른 범죄의 어마어마한 죄과는 슬쩍 묻혀 버렸던 경험 말입니다. 어찌 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나온 얘기들은 여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란 말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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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쓸데없이 무거워진 것 같으니 유머로 마감하겠습니다. ^

얼마 전 조인성이 출연한 커피 광고가 '음악 하나 바꿨을 뿐인데' 사이코패스 드라마로 바뀌는 동영상이 유행한 적이 있었죠.

이건 '음악하나 바꿨을 뿐인데' 꽃보다 남자의 미남들이 사이코패스로 둔갑하는 마술들입니다. 먼저 윤지후 김현중 편입니다.




다음은 소이정 김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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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전명 발키리'는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물론 재미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대단히 미묘한 문제지만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이 영화를 보고 '재미'를 느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 '발키리'는 본래 국내에서는 '발퀴레'라는 표기가 더 익숙한 단어입니다. 바그너의 악극 제목이자, 북구 신화의 등장인물이죠.

이 '발퀴레'라는 음악과 관련된 지휘자 중에 다니엘 바렌보임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래 세계적인 명지휘자였던 이 사람은 '발퀴레'를 잘 연주해서가 아니라 '발퀴레'를 연주하려다 좌절한 사연 때문에 세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바렌보임의 '발퀴레'와 톰 크루즈의 '발키리'는 과연 어떤 관계일까요. 거기에 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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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발키리 - 발퀴레

22일 개봉한 영화 '작전명 발키리(Valkyrie)'는 1944년 히틀러를 암살하고 제2차 세계대전을 조기에 종식시키려던 독일 군부의 쿠데타 시도를 담고 있다. 최근 내한한 주인공 톰 크루즈는 출연 이유를 묻자 “당시 독일의 모든 사람이 나치의 꼭두각시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고 대답했다.

제목의 발키리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발퀴레(Walkure)의 영어식 발음. 흔히 갑옷 차림에 하늘을 나는 여신들로 묘사되는 발퀴레는 전사한 영웅들의 혼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바그너의 4부작 악극 '니벨룽의 반지'의 2부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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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게르만 신화를 소재로 한 바그너의 작품들이 독일 민족혼을 고취시킨다며 아낌없는 사랑을 퍼부었다. 특히 애용된 것이 '발퀴레' 3막에 나오는 '발퀴레의 기행(騎行)'이다. 당시 독일 전차부대는 외부 스피커로 '발퀴레의 기행'을 쩌렁쩌렁 틀어 놓고 진군하기도 했다.

이런 악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음악회에서든 바그너의 곡을 연주하는 것은 금기로 취급돼 왔다.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게 주된 이유였고, 바그너 자신이 유명한 반(反)유대주의자란 사실도 한몫했다. 이 금기는 2001년 7월 7일,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대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굳게 지켜져 왔다.

여기에도 곡절이 있다. 평소 이스라엘의 대아랍 강경책을 비판해 온 바렌보임은 이 해 예루살렘에서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발퀴레'의 하이라이트를 연주한다고 발표했다. 당연히 홀로코스트 희생자 유족들의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타의에 의해 레퍼토리가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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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렌보임은 연주 당일, 즉석에서 청중에게 앙코르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한 곡을 연주하겠다고 밝혔다. 일각에서 야유가 나왔지만 그는 “언제까지나 우리만 희생자라고 주장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는 서슬이 시퍼런 나치 치하에서도 모든 독일인이 권력에 굴종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줬고, 바렌보임의 '발퀴레'는 모든 유대인이 아랍과의 공존을 부정하는 것은 아님을 알렸다. 히틀러의 상징 음악으로 쓰였던 '발퀴레'가 시대를 뛰어 넘어 다수 여론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양심의 소리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는 사실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포격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가자 지구의 현실은 바렌보임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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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나름(?) 수려한 용모의 천재 피아니스트였던 바렌보임은 25세 때이던 1967년, 당시 22세의 세계적인 미녀 첼리스트 자클린 뒤프레와 이스라엘에서 결혼합니다. 두 사람의 결합은 당시 '20세기의 슈만과 클라라'라고 불릴 정도의 반향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뒤프레는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으로 연주 능력을 잃게 되고, 결국 1987년 42세의 한창 나이에 사망합니다.

이런 비극적인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유명했던 음악청년 바렌보임(일각에서는 아내가 죽어가는데도 콘서트 연습을 하고 있었다며 냉혈한이라고 그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사실 음악 말고 뭘 할수 있었겠습니까)은 정치적인 입장 때문에 또 한번 주목을 받게 됩니다.

지난해 알 자지라 영어 방송의 토크쇼 '프로스트'에 출연한 바렌보임입니다.

바렌보임은 마틴 부버의 말을 인용, "이스라엘과 아랍의 관계에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단순히 총격의 종료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이 현재의 이스라엘 점령지구가 직면한 문제에는 아랍과 이스라엘 양측의 책임이 공존한다고 주장하는 데 대해서도 "좋다. 그런데 그 지역은 이스라엘이 40년간 점유해온 지역이다. 40년을 다스렸다면 그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의 질에 대해선 점유하고 있는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합니다.

그는 스페인 세비야에서 아랍과 이스라엘 청년들이 함께 연주하는 '웨스트 이스트 디반 오케스트라'를 창단해 세계적인 연주 활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발퀴레'의 일부분입니다. 이 곡에 한이 어지간히 맺혔던 모양입니다.^




사실 국내에 나와 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1992년 유로피언 콘서트 DVD에도 바렌보임의 지휘로 플라시도 도밍고가 부르는 '발퀴레' 1막에 나오는 사랑의 아리아 '겨울 바람은 우아한 달에게 가는 길을 열어주고 Wintersturme wichen dem Wonnemond'가 수록돼 있습니다. 이 노래는 도밍고의 애창곡으로, 이번 내한 공연때도 리스트에 있었습니다.

한번 들어 보실 만 합니다. 2005년 BBC 프롬에서 '발퀴레' 특집이라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지그문트 역의 도밍고가 지글린데 역의 발트라우드 마이어와 함께 이 노래를 부릅니다. (도밍고 형님 특유의 '소프라노 만지며 노래하기' 신공이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마지막은 정말 시원시원한 '발퀴레의 기행'입니다. 역시 같은 2005년 BBC 프롬에서 안토니오 파파게노가 지휘하는 로열 오페라 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리사 가스텐을 비롯한 발퀴레 군단의 노래가 멋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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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올해 아카데미상 후보들을 발표됐습니다. 올해는 좀 특별한 해였죠. 작품상, 남녀 주연상 후보보다 남우조연상 후보가 더 관심을 끌었습니다. 브래드 피트가 남우주연상 후보, 안젤리나 졸리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간 것도 흥미로웠지만 히스 레저라는 이름이 올라가기를 기대한 사람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죠.

'다크 나이트'가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히스 레저는 남우조연상 후보에 들어갔습니다. 사실 주연상 후보래도 뭐 크게 탈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이런 경우 조연상 후보로 올라가는 쪽이 수상 가능성이 훨씬 높은 편이죠.

이미 골든글로브를 수상한 히스 레저가 과연 오스카에서도 사상 두번째로 사후 수상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이지만 오스카라는 상이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설픈 예측은 금물입니다. 일단 사후 수상에 성공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살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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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후수상

1993년 3월 8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영화상인 세자르상 시상식장에서 최고 영예인 작품상 수상작으로 시릴 콜라르가 감독·주연한 영화 '사베지 나이트(Les Nuits Fauves)'가 호명됐다. 하지만 콜라르는 금빛 세자르상 트로피에 키스하지 못했다. 에이즈에 걸려 있던 콜라르는 시상식 3일 전 병원에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12일(한국시간) 열린 2009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도 '다크 나이트'의 조커 역으로 명성을 떨친 히스 레저가 극영화 부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지만 수상자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동성애자 연기로 2006년 오스카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나이답잖게 연기파 배우의 명성을 쌓아온 레저는 영화가 개봉되기 6개월 전인 지난해 1월, 29세의 나이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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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글로브상의 결과에 따라 레저의 팬들은 '32년 만의 오스카 사후 수상'이라는 기대에 한껏 차 있다. 아카데미상의 80년 역사에서 사후에 연기상을 받은 인물은 1977년 '네트워크'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피터 핀치 단 한 명뿐이다.

영원한 청춘의 우상 제임스 딘은 55년 사망한 뒤 이듬해엔 '에덴의 동쪽'으로, 57년엔 '자이언트'로 두 번이나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모두 수상에는 실패했다. 스펜서 트레이시(68년 '초대받지 않은 손님'), 랄프 리처드슨(85년 '그레이스토크'), 마시모 트로이지(96년 '일 포스티노') 등 일세를 풍미한 명배우들도 후보에 그쳤다. 그만치 생과 사의 벽은 높았다.

어떤 분야에서든 사후 수상이란 매우 감동적인 이벤트다. 불의의 사고사든, 예고된 죽음이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분야에서 열정을 불사른 위대한 장인에게 살아 남은 사람들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헌사이기도 하다. 물론 분야에 따라 경우가 다를 수 있다. 무공훈장이라면 생존한 수상자보다 사망한 수상자가 더 많은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반면 노벨상은 이미 사망한 인물을 수상자로 결정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감정의 개입 없이 오로지 업적으로만 엄격한 판단을 하기 위해서다.

오스카상도 지금까지는 '망자에게는 공로상, 산 배우에게는 연기상'이란 원칙에 비교적 충실해 왔다. 역대 최고의 악역 연기라는 평가를 얻었던 히스 레저는 원칙의 벽을 넘을 수 있을까. 다음 달 23일의 제8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 결과가 기대된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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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베지 나이트'라는 해괴한 제목으로 국내에 공개됐던 이 영화는 에이즈 감염자인 남자와, 그 남자와 동침한 뒤에야 그가 에이즈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된 여자의 사랑과 좌절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미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알고 나서 이 영화의 구상에 들어간 시릴 콜라르는 결국 죽기 전에 영화를 완성시켰습니다.

물론 문화 차이도 있겠지만, '사베지 나이트'를 보고 공감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주인공들의 자기연민과 이기적인 행동에 도저히 동정심이 가지 않기 때문이었죠. 기억나는 건 석양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던 콜라르의 모습 정도지만 세자르상은 이 영화에 작품상을 주고 콜라르를 기렸습니다. 아마도 프랑스 사람들이 앵글로색슨족 보다는 좀 더 인정에 약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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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핀치의 '네트워크'는 미디어의 본질을 파헤친 문제작이었고, 어느날 갑자기 현대의 예언자가 되어 버린 핀치의 명연기는 상이 아깝지 않은 호연입니다. 저보다 몇년 윗 분들은 이 영화의 페이 더너웨이를 '지적인 미녀'의 대명사로 기억하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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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수상이 이번만큼 관심을 끌었던 것은 아마 제임스 딘의 사후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주연한 영화라고는 단 3편. 그중 2편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은(나머지 한 편은 '이유없는 반항'입니다) 이 배우의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아카데미는 이 배우에게 상을 주기를 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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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에 올랐던 나머지 배우들도 모두 상을 탈만 했던 배우들이었죠. 남우주연상으로만 9차례나 오스카 후보에 올라 이미 2차례 수상한 경력을 가진 스펜서 트레이시는 마지막 후보작이었던 '초대받지 않은 손님'으로 세번째 수상에 도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당시의 인종 문제를 엿볼 수 있는 사회성있는 작품이었죠. 스펜서 트레이시와 캐서린 헵번(오랜 연인이었죠) 부부의 중산층 백인 가정에 어느날 딸이 남자친구라며 흑인 배우 시드니 포이티어를 데려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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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프 리처드슨의 '그레이스토크'는 타잔 이야기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걷어 내고 '과연 어린 시절 아프리카에서 실종돼 원숭이의 손에서 자란 청년이 런던의 모습을 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를 지켜본 작품입니다. 크리스토퍼 람베르가 이 영화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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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포스티노'는 '시네마천국' '지중해' 등과 함께 이 시기의 대중적인 유럽영화를 대표하던 작품입니다. 위대한 시인 네루다와 집배원의 우정을 그린 작품이죠. 집배원 역을 맡았던 트로이지는 이 영화로 오스카 각본상 후보에도 동시에 올랐으나 결국 수상엔 실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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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올해 히스 레저와 경쟁할 후보들은 '밀크'의 조쉬 브롤린, '트로픽 선더'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다우트'의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그리고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마이클 섀논입니다. 본 작품은 아직 '다크 나이트'와 '트로픽 선더' 뿐인데 다우니의 후보 지명은 좀 많이 의외군요.^

과연 이들과의 경쟁에서 레저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시상식은 다음달 23일(한국시간), 전체 수상 후보는 http://www.imdb.com/features/rto/2009/oscars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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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삼의 영화 '적벽대전 2'가 실망스럽다는 글을 올렸더니 예상대로 불쾌하다는 반응이 제법 있더군요. 물론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신 분도 꽤 있을 겁니다. 1편은 국내에서 150만 정도의 관객을 동원한 걸로 알려졌습니다.

뭐 영화 한편에 대한 호오가 갈리는 거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대부'보다 '트와일라잇'이 훨씬 더 감동적인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라고 해서 뭐든 민주주의가 통하지는 않습니다. CG를 많이 쓴게 공통점이라고 해서 '반지의 제왕'과 '디 워'가 비슷하게 평가받는다면 그 또한 서운해 할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문득 '적벽대전'과 '트로이'가 겹쳐지면서 영화가 원작을 제대로 살렸네, 원작을 망쳤네 하는 논쟁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원작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나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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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적벽대전

미모를 재는 단위가 있을까. 참 할 일도 없었다 싶지만 어느 시대인가 서양 지식인들은 헬렌(Helen)이란 단위를 만들었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렌이 트로이의 파리스와 함께 사라지자 그리스 전역에서 1000척의 대함대가 동원되어 구출에 나섰다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만약 한 미녀가 1척의 배를 동원했다면 1밀리헬렌급의 미모로 인정된다. 즉, 1헬렌=1000밀리헬렌이다.

미녀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구상은 동양인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은 주유를 흥분시키기 위해 조조가 강동의 유명한 미녀인 교씨 자매를 얻으려 동오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속인다. 교씨 자매의 언니인 대교는 동오의 군주 손권의 형수요, 동생인 소교는 주유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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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서는 이 구상이 제갈량의 계략이었지만 오우삼(吳宇森) 감독은 아예 이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 '적벽대전' 1, 2편을 만들었다. '영웅본색'으로 유명한 오감독은 방대한 적벽대전 이야기를 2편의 영화로 나눠 1편은 지난해 여름, 그리고 2편은 지난 22일 공개했다.

아킬레스와 헥토르가 헬렌을 두고 격돌하듯 영화 '적벽대전'에서는 소교를 두고 조조와 주유가 대립한다. 소설에서는 대사 한마디 없는 소교가 영화에선 양측의 진영을 오가며 전쟁의 승부를 좌우하고, 영웅들의 피와 땀은 멜로드라마 속으로 슬쩍 가려진다.

애당초 삼국지라는 원작에 무지할 전 세계 관객들을 대상으로 삼았다니 오히려 서구인들에게는 이런 설정이 이해가 더 빠를 법도 하다. 하지만 대다수가 10대 이후 삼국지의 문화적 영향 속에서 성장하는 동아시아 남성 관객들에게는 원작의 향취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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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비판은 유명한 원작을 둔 영화라면 반드시 거치는 원죄에 해당한다. 1956년 오드리 헵번 주연의 '전쟁과 평화'가 개봉됐을 때에도 미국 평론가들은 일제히 “제작진을 통틀어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헨리 폰다뿐인 것 같다”며 비난했다. 사실 이런 논란은 독자들의 관심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책과 영화 양쪽에 모두 고무적이다.

정말 우려되는 것은 언젠가 원작의 훼손과 관련된 논란이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2004년 트로이 전쟁을 다룬 영화 '트로이'가 개봉됐을 때, 아킬레스의 죽음이 거론된 영화평을 두고 네티즌들로부터 “왜 결말을 공개하느냐”는 항의가 줄을 이은 적이 있었다. 고전이 사라진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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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 헬렌과 밀리헬렌 이야기는 2년 전쯤 다른 글을 쓸 때 써먹은 적이 있어서 약간 찔리지만, '분수대'에는 어차피 처음 나오는 이야기일 것 같아 다시 울궈 먹었습니다. 아무튼 저런 것까지 단위를 만들어 재고 싶어 했다는 데서 서구 합리주의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합니다. 적벽대전에 동원된 조조의 배가 몇 척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우삼의 해석대로라면 소교는 한 0.3 헬렌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고 욕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어떤 원작도 화면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재현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좋은 재현'과 '나쁜 재현'이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어떤 것이 좋은 재현일까요. 당연히 이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 각자가 생각하는 '원작의 맛'을 제대로 살린 것이 좋은 재현일 겁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짜장면에는 짜장과 돼지고기, 양파와 국수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무리 짜장면을 창조적으로 재해석 한다 해도, 어쨌든 짜장과 국수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짜장과 밥을 버무려 놓고 이것이 새로운 짜장면이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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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식의 주장은 본래 객관화되기 힘든 것인 터라, 유명한 원작을 갖고 만든 드라마나 영화는 어쨌든 원작을 훼손했다(즉 망쳤다)는 주장에 거의 항상 맞닥뜨리게 됩니다. '반지의 제왕' 처럼 호평받는 각색이라도 "왜 봄바딜이 안 나와!" 수준의 교조적인 애독자도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이런 논란이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그래도 이런 논란이 있다는 것은 원작을 읽는 사람들이 아직 꽤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급속도로 이런 추세가 무너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대체 원작이라는 걸 왜 읽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늘고 있죠.

윗글에서는 영화 '트로이' 때의 코믹한 사건을 예로 들었지만 디즈니 시대 이후에 성장한 세대 가운데에는 '인어공주'가 본래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영화 '발퀴레'에서 톰 크루즈가 실패한다는 것도 스포일러요(네. 히틀러는 암살당한게 아니라 자살했다는 걸 모르셨군요),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진다는 것도 스포일러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절대 다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날들을 생각하면 참 암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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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얘기지만 소교를 이용한 적벽대전의 전개 자체는 나쁜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칫 퍽퍽해 질 수 있는 적벽대전 이야기에 양념으로는 매우 좋은 선택이죠. 특히 소교 역할을 임지령 같은 미녀가 맡는 한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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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생. 생각보다는 꽤 나이가 있는 편입니다. 물론 잘 늙지 않는 중국 미녀들의 전통을 이어 영화에서는 아직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년의 헬렌(헬레네)들과 비교해볼까요.

사상 최악의 헬레네로 거론됐던 다이안 크루거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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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판 '헬렌 오브 트로이'의 시에나 길로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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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헬렌은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1955년작 영화 '헬렌 오브 트로이'의 로사나 포데스타(Rossana Podesta)입니다. '율리시즈' 등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영화에 자주 얼굴이 나왔던 배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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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1980년대, 난데없이 '원 플러스 식스'라는 희한한 이탈리아제 섹스 코미디로 나이든 모습을 보여 기억하는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던 배우죠.

임지령도 부디 '적벽대전'을 통해 월드 스타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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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런 대작 사극을 볼때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전쟁에 대한 개념이 있는 전쟁신'입니다. 이 부분에서 '적벽대전 2'는 초실망작입니다. 언제쯤 제대로 된 전쟁신을 다시 보게 될까요. 이 이야기는 따로 하겠습니다.





'적벽대전2'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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