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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교토 2화] 가메오카라는 도시가 있었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2025 교토 2화] 가메오카라는 도시가 있었네

교토역에서 가메오카 가는 전철길은 이렇다. 완행으로 29분, 5개 정거장 정도만 서는 급행은 20분 이내로 걸린다. 첫날 공항 생략. 하루카 탑승시 공항 출국 후 발권기에서 티켓을 출력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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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어집니다.

 

오전 9시30분 경. 사가 아라시야마 역은 꽤 분주했다.

당초의 목표는 사가 아라시야마역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그 유명한 도케쓰 다리를 보고,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려는 것이었는데 만만찮은 사람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마음이 변했다. "적은 북쪽에 있다". 아무래도 북쪽으로 먼저 올라가야 조금이라도 인파를 피해 단풍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이건 좋은 판단이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오른쪽이 사가 아라시야마 역이고 왼쪽의 빨간 표시가 오늘의 첫 목적지 조잣코지 (常寂光寺) . 1.2km 정도의 길인데 산길이 아니고, 가는 길 양쪽으로 아기자기한 교토의 골목들이 펼쳐져 있어 걷기 좋은 길이다. 

(아라시야마 역도 있고, 사가 아라시야마 역도 있는데, 사가 아라시야마 역에는 남과 북 출입구가 있고, 남쪽 출입구는 번화한데 비해 북쪽은 한산하다. 가 보면 그 분위기 차이를 알게 된다. 그러니 북쪽으로 먼저 가라.)

역을 빠져나와 주택가 사이 작은 골목을을 빠져나오면

어느새 여기저기서 인력거가 달린다. 당연하게도, 인력거의 승객 중에 중국인이나 한국인, 일본인 등 동아시아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양인들이 이 신기한 교통수단을 애용하고 있다. 

날씨도 쾌적하고, 단풍도 붉고, 걷기 딱 좋은 날씨.

그 유명한 치쿠린은 아니지만 어쨌든 대나무숲이 이 부근에는 꽤 흔하다. 그래도 아직은 한산한 편. 역시 북쪽으로 오길 잘 했다.

꽤 걸었다 싶으면 나타나는 이정표. 드디어 조잣코지, 한자로 상적광사까지 3분.

길가의 찻집들도 아직 문 열기 전이다.

드디어 산문! 

조잣코지는 1596년, 바로 그 모모야마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니 교토에서는 그래도 꽤 젊은 절에 속한다. 

매표소 부근엔 사람이 좀 있다.

우와 곱다

산문을 통과하면 바로 단풍이 우거진 계단길. 미친듯이 아름다운 색감.

이때부터 이성을 잃고 미친듯이 사진을 찍게 된다. 

너무 예쁜 구도.

본당 앞. 

이 절의 대표적 유적인 다보탑.

불국사 다보탑과 한자가 똑같지만 모습은 매우 다르다. 탑 2층의 난간 부분은 꽤 비슷한 모습. 

응 여기가 좀 비슷한데... 나중에 에이칸도에서도 보듯 일본의 다보탑들은 꽤 일정한 양식을 따르는 것 같다.

좀 멀리서 탑 상단부가 잘 보이게 찍어보려 했는데 쉽지 않다. 아무튼 단풍은 멋지다.

절 이름과 탑 이름. 저 다보탑은 1620년에 세워진 거라고. 

절 자체는 1596년. 모모야마시대의 사찰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전, 그의 세력에 저항한 유명한 스님이 산속으로 들어와 자리잡은 절이라고 한다. 도요토미에게 맞서고도 이렇게 큰 절(아주 크지는 않다)을 지을 정도로 후원 세력이 있을 정도라니, 대단한 스님이었던 모양이다.

좀 더 머리가 잘 보이는 다보탑.

그냥 프레임만 가져다 대면 모두 관광엽서 속.

벚꽃철이면 흔히 벚꽃이 참 요염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가을이 되어 보면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다.

제대로 물든 단풍은 벚꽃보다 훨씬 더 요염하다. 당나라 시인 두목의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서리 맞은 잎이 음력 2월의 꽃보다 붉네)는 절대 과장이 아니다.

절집 툇마루에 앉아 사진을 찍고 또 찍고 있다. 

하루 종일 단풍을 보고 앉아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아무리 카메라가 좋아져도, 이 정경을 사진으로 표현하기는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절 앞으로는 아라시야마 전경이 살짝 보인다.

붉은 단풍 사이로 은행나무 하나가 또 돋보이니 절묘하다.

온통 울긋불굿한 속에 노란색 은행나무가 하나 있으니 그것도 돋보이네. 

물든 단풍, 스러지는 단풍, 아직 물들지 않은 단풍, 그냥 단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다 간신히 발길을 돌리려 일어섰다.

상적광사, 아니, 조잣코지 안녕. 아무튼 강추한다. 절 자체가 엄청나게 유서가 깊다거나, 건축의 조형미가 놀랍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인공적인 조경이라기보다는 사찰의 건물들과 단풍이 매우 자연스럽게 서로 기대고 있는게 보기좋았다.

다시 한번 당부하지만, 단풍 구경하러 사가 아라시야마 역에 내리시는 분들, 일단 아침 일찍 도착해야 하고, 도착하면 남쪽은 쳐다보지도 말고 북쪽 입구로 나와 조잣코지로 향하시길 권한다. 아라시야마라는 곳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진다. 

조잣코지의 느낌이 너무 좋아서 조금 더 북쪽으로 깊숙히 들어가 본다.

평지로 나오니 단풍 아닌 나무들이 길 따라 쑥쑥 자라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매우 일본스러운 삼나무(杉, 스기) 같다.

유후

길가의 단풍 가로수도 아름답고,

지나가는 길에 수없이 많은 절간들이 있다. 교토 인근의 절 수가 1500개라니. 

유럽 귀족들이 대성당, 까떼그랄의 한 켠에 예배당을 짓는 것으로 가문의 영광과 앞으로의 창달을 기원했다면 교토의 명문 귀족들은 뭔가 빌 때마다 절을 하나씩 지은 모양이다. 그 많은 절이 지어진 것도 용하지만, 오늘날까지 버틴 것이 1500개라면 지어진 절은 더 많았던 게 아닐까. 대체 어떤 경제적인 법칙으로 이 많은 절들이 다 유지될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기오지 (祇王寺). 절 이름만 보면 왕을 위해 빈다? 왕이 태어나기를 빈다? 기오지 (祇王寺) . 이름을 보면 저 한반도 북쪽 안변의 석왕사(釋王寺)처럼 뭔가 왕과 관련있는 사연이 있는 절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을 알고 나면 조금 허탈해진다. 

일본 고전 헤이케 모노가타리 (平家物語)에 나오는, 강력한 무장 다이라 기요모리(平清盛)에게 총애받다가 버려진 기녀의 이름이 바로 기오(祇王) 라는 것이다. 기오는 버림받고 비구니가 되었다고 하는데, 그 기오가 살았다고 해서 기오지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기오지를 안 갔으면 후회할뻔.

너무 길어져서 기오지 이야기는 다음 회로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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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이어짐.

[2025 교토 1화] 교토에 가자, 여느 때처럼 갑자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2025 교토 1화] 교토에 가자, 여느 때처럼 갑자기

갑자기 교토가 가보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교토를 두번 갔는데, 두번 모두 기요미즈데라를 구경했다. 남들 모두 가는대로 야사카 신사 근처에서 시작해 아사카 탑을 지나 산넨자카를 걸어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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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역에서 가메오카 가는 전철길은 이렇다. 완행으로 29분, 5개 정거장 정도만 서는 급행은 20분 이내로 걸린다. 

첫날 공항 생략. 하루카 탑승시 공항 출국 후 발권기에서 티켓을 출력하는 것은 꽤 줄이 길고, 바로 온라인 티켓을 받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하다. 단 일본은 아직도 아날로그의 나라다 보니 그 시스템이 상당히 괴악하다. 뭐 못할 정도는 아니다. 어쨌든 70분 정도 걸린다. 

교토 역에 내려 가메오카 티켓을 끊고(일반 전철이다), 달리다 보면 사가 아라시야마 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린다. 역시 단풍 구경의 명소답다. 그러고도 전철은 10분 정도 더 가는데, 중간에 지나가는 산세가 장난 아니다. 살짝 흥분되기 시작한다.

역에서 하나레 니노우미까지는 약 1.1km. 차로 3~4분, 도보로 15분 정도 걸린다. 조용하고 깔끔한 시골 마을 한 복판, 주택가 한 가운데 꽤 널찍한 저택 하나가 있다. 하나레 니노우미.

https://www.hanare-ninoumi.jp/home-english

 

HOME-English | 「離れ」にのうみ 京都・亀岡

Kameoka town, which begins with beautiful mountains and rivers, and Tamba Kameyama Castle Town built by Mitsuhide Akechi. Enjoy the remnants.

www.hanare-ninoumi.jp

 

하나레 ( 離れ)는 일본어로 별채, 별저의 뜻이고 니노우미는 丹の海, 즉 붉은 바다라는 뜻이다. 이 지역은 본래 붉은 호수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대나 뭐라나.... 아무튼 이게 숙소의 이름이고, 여기에 딸린 세 개의 숙소 중 하나, '료이'에 묵기로 했다. 

친절한 일본 아주머니들이 무려 영어로 방 사용법 설명을 해 준다. 조그만 거실 겸 부엌과 침실, 욕실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아주 조고만 안뜰이 있다. 일본집스럽게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어 귀엽고, 있을 건 다 있다. 

장기판. 장기말은 없었다.

냉장고. 전자레인지. 개수대. 그릇과 수저, 인덕션 레인지(1구), 칼과 집게 등이 있다. 

전기밥솥은 없음 ㅎㅎ

겨울에 추운 일본 집 특성상 욕조가 꽤 요긴하다. 저기 뜨끈한 물을 받아서 몸을 덥히고 나오면, 으슬으슬한 일본 집 특유의 냉기를 쫓아버릴 수 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이 집의 하이라이트인 안뜰.

작지만 잘 꾸며져 있다.

여름이면 모기가 꽤 극성일 듯도 하지만, 예쁜 뜰이다.

이런 풍경이 연출된다. 뭘 해 먹으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해 먹을 수 있는 구조.

물론 도구를 쓸 경우에는 퇴실 전에 설거지를 해 놓고 나가는 게 규칙이다.

저 침실 안쪽에도 작은 뜰이 있고, 밤에는 조명을 켤 수 있게 되어 있다. 꽤 운치있다.

하지만 일본 집 특성상 오른쪽 위에 있는 에어콘이 난방기 역할까지 해야 하는데, 이게 꽤 버겁다. 저 공기 온도를 30도 정도로 해 놓아도, 온 집안에서 냉기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거실에 코타츠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몸을 덥히련만.... 위에서 보시다시피 식탁과 의자가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나중에 간 집에서 보면 코타츠는 코타츠대로 등받이가 없어서 또 불편하다. )

어쨌든 체크인에 성공하고 나니 밀려오는 허기....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동네 맛집이라는 라멘집으로 향했다. 이른바 무소신(無双心) 가메오카 본점.

한자로는 두 마음을 먹지 않는다는 뜻의 무쌍심인데, 배신자의 상징 아케치 미쓰히데의 동상이 있는 도시에서 무쌍심이라니. 이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이것이 이 집의 시그니처 라멘.

놀랍게도 돈코츠도 미소도 아닌 새로운 맛. 국물이 진하다 못해 오뚜기 크림스프의 느낌이다. 무엇 하나로 규정할 수 없게 여러가지 재료가 들어가 있는데, 고추기름을 좀 넣으면 더 괜찮은 진득한 맛이 난다. 그래도 저 국물을 완샷할 용기는 나지 않는 그런. 

(원래 일본에서도 라멘 국물을 완샷하는 사람은 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당한다고 합니다. 특히 어른인 경우에는 '니가 대학생인줄 아냐' 뭐 이런 타박을 당한다는...)

이것은 잘게 썬 차슈와 명란마요를 얹은 덮밥. 나쁘지 않은데 다음에 또 먹게 된다면 명란마요는 없는 차슈덮밥을 먹을 듯.

심심해서 시켜 본 가라아게 소짜와 교자. 교자는 딱 그냥 비비고 교자 맛이고, 가라아게는 인기 1위라는 대대적인 벽 포스터 설명과는 달리 노선 분명한 오버쿡이라 겉바속촉의 느낌이 전혀 없었다. 물론 뭐... 여행지에서 맥주 한잔 곁들이기에는 나쁘지 않은.

그래서 이걸 먹기 위해 교토에서 꼭 가야 하는 집은 절대 아니고(무려 이 집이 본점. 교토 시내에도 분점이 몇개 있나보다), 가메오카를 들르실 일이 있는 분들은 한번쯤 가보실만한 집. 저 걸쭉한 라멘국물은 한번 먹어볼만 하다.

집에 들어와 거실 조명을 켜니 이런 느낌. 운치있다.

교토의 전통가옥을 내부만 쓸수있게 교체한 집이라 이런 식의 전통 천장이 그대로 살아 있다.

어쨌든 코끝에 찬 바람이 이는 방 안(호텔이 아닌 일본식 집은 항상 이렇다)의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잘 자고, 몸서리를 한번 치고, 씻고 부랴부랴 짐을 꾸려 나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런 식의 전통 숙소를 한번쯤 경험해 보고 싶은 분에게는 강추. 다만 호텔보다는 확실히 약간 불편한 느낌이 있고, 호텔에 비해 많이 싸지 않다. 뭐 호텔로 치면 스위트룸 수준의 공간과 설비이긴 한데, 엄밀히 말해 스위트룸의 럭셔리를 기대할 수는 없다. 그저 '경험'에 초점을 두면 좋을 듯. 

(단풍철이나 벚꽃철이 아닐 때에는 싸게 장기체류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 용도라면 괜찮을듯.)

숙소에서 가메오카 역으로 가는 길에 가메야마 성터가 있다. 

'단바 가메야마 산성지'라는 이름. 물론 성은 없고 성터만 있는 곳인데, 이 성을 쌓은 사람이 놀랍게도 유명한 아케치 미쓰히데

그렇다. 1582년 음력 6월1일, 혼노지의 변 당시 아케치 미쓰히데의 본진이 바로 이 가메오카에 있었던 것이다(두둥). 물론 이 사실을 알고 가메오카를 간 것은 아닌데, 전날 숙소 안내 아주머니들이 보여준 자료 끄트머리에 바로 아케치의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역으로 가는 길에 들어가지는 못하더라도 가메야마 성 자리라도 보고 가자는 마음이 있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1582년 6월1일 저녁, 1만3천의 대군을 총동원해 가메야마성을 출발해 동쪽으로 진군했다. 아라시야마 남쪽, 쿠비즈카 신사 지역으로 산을 넘은 아케치는 지금의 니시쿄구 지역으로 들어가 카츠라가와를 건너, 그대로 혼노지로 쳐들어갔다. 

목표는 자신이 주군으로 섬기고 있던 오다 노부나가의 목. 

사방의 라이벌들을 제압하거나 같은 편으로 삼고, 무로마치 막부를 무력화하고, 천황을 손에 넣어 마침내 진정한 천하인으로 우뚝 선 오다 노부나가는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통일의 꿈이 물거품이 된다.

가메야마성에서 혼노지까지는 대략 20km 정도. 구글 지도로는 도보로 4시간43분이 걸린다지만 무장 병력이 산길을 걸어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여섯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한밤중에 지금의 교토 서부, 니시쿄구 지역에 도달한 아케치는 휴식을 취하고, 장병들의 신발을 갈아 신기고, 화승총의 심지를 잘라 짧게 한 뒤 곧바로 혼노지를 덮친다.

이때 가츠라가와를 건너면서 아케치가 내린 명령이 바로 "적은 혼노지에 있다" 라던가.

교토를 돌아 남쪽으로 진군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병력에게 돌연 "교토 시내로 진군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의아하게 생각할 사람이 없었을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은 오늘날의 시각이다. 아케치의 전술 목표가 오다 노부나가의 목을 치려는 것인지는 당연히 극소수의 측근들만 알았을 것이고,  대부분은 직속 지휘관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것이다("뭔 이유가 있겠지.").

아무튼 아케치의 대군은 그길로 혼노지를 공격했고, 병력의 열세에도 오다의 친위부대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국 6월2일 오전 8시경 오다는 불타는 건물 안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기습 공격은 성공했지만 아케치가 오다를 대체 왜 죽였는지, 오다를 죽임으로써 무엇을 이루려 한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정답이 없다. 오다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고 보기에는 사전 준비도, 사후 대처도 너무 미숙했고, 오다의 아들을 내세운 토요토미에게 곧바로 진압당하고 만다. 그 결과 아케치는 결국 브루투스나 베네딕트 아놀드처럼 배신자의 대명사로 기억될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다시피, 이 사건으로 엉겁결에 일본의 1인자가 된 도요토미는 10년 뒤 조선을 침공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가메오카 지역, 당시의 단바 지역에서만큼은 아케치는 밉상이 아니었다.

그 증거로, 이렇게 시내 한복판 공원에 동상이 서 있다. 

그저 교토 외곽의 시골이었던 단바 지역에 제대로 된 성과 제방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게 해 준 명군의 이미지라는 것이다. 이 역사 가메오카에서 하룻밤을 보내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을 일.

오다의 부하들 중에서도 학식이 뛰어난 지장형의 인물로 평가되던 아케치. 어머니를 인질로 보내 죽게 한 데 대한 복수에서부터 패장들에 대한 의리설까지, 오다를 죽이고 스스로 주군이 되려는 의도보다는 도의적인 분노에 의해 '야수의 심장으로 천하인의 심장을 쏜'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그래도 그에게 세상 한 구석만큼은 애정을 잃지 않았다니, 그것도 나름 괜찮은 일인 것 같다.

동상에서 고개를 돌려 몇발짝 걸으면 바로 가메오카 역.

아직 이른 아침. 기차를 타고 10여분만 가면 바로 아라시야마의 찬란한 단풍이 기다리고 있다. (기대하시라)

 

[2025 교토 3화] 아라시야마의 빛, 조잣코지(상적광사)의 첫인상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2025 교토 3화] 아라시야마의 빛, 조잣코지(상적광사)의 첫인상

오전 9시30분 경. 사가 아라시야마 역은 꽤 분주했다. 당초의 목표는 사가 아라시야마역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그 유명한 도케쓰 다리를 보고,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려는 것이었는데 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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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교토가 가보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교토를 두번 갔는데, 두번 모두 기요미즈데라를 구경했다. 남들 모두 가는대로 야사카 신사 근처에서 시작해 아사카 탑을 지나 산넨자카를 걸어 올라갔고, 기요미즈데라의 무대에서 건너편 산자락을 바라보고, 다시 건너편 산자락에서 무대와 무대를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나무 축대를 바라보며 감동했다. 유럽에서 본 어느 성당 못지 않게 감동적이었다.


한번은 12월, 한번은 1월이었는데 12월에는 그래도 단풍의 기운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확실히 남쪽이구나 했고, 언젠가는 그 단풍이 무성할 때 가야지 했다. 그 언젠가가 지금이라고 생각했다. 


구경 중에는 날짜를 맞춰야 하는게 몇가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벚꽃과 단풍이다. 벚꽃의 전성기는 1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는 만큼, 벚꽃 구경은 정말 운이 따라야 한다. 거기 비하면 단풍 구경에는 대략 2주 정도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임박해서 훌쩍 가기는 어려운 만큼, 11월21일부터 25일 정도면 구경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번 뭘 하면 제대로 뽕을 뽑자는 아내는 이번엔 교토에서 유명하다는 전통 가옥 숙소, 즉 마치야(町家·町屋)를 골라 오라는 미션을 줬다. 사실 마치야라고 이름붙은 곳은 대단히 많은데, 대개는 가격이 너무 비싸거나, 화장실이 공용이거나, 욕실이 공용이거나, 우범지역(?)에 있거나 뭐 다양한 문제들을 갖고 있었다. 꼽아보다 보니 두 군데가 쓸만했다. 한군데는 교토 북서쪽의 가메오카(교토역에서 20분 정도)에, 또 한군데는 시내 서쪽에 있었다. 둘 중에 고르라니 둘 다 가보고 싶다는 답. 그렇게 해서 마치야에서 이틀, 호텔에서 이틀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가메오카의 위치를 보니, 가메오카와 교토역(교토에서는 뭘 해도 교토역을 경유하지 않으면 얘기가 안 된다) 사이에 아라시야마가 있었다. 대략 1500년 전부터 교토 귀족들이 단풍구경 가던 그 아라시야마. 그렇게 동선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대개 어딘가를 여행하려 맘 먹으면 그 도시와 관련이 있는, 평소 이야기 듣거나 보고 싶었던 것들을 죽 나열해 보게 되고, 그 다음에는 그런 것들을 추적하다가 관심이 생기는 것들을 그 리스트에 추가하게 된다. 너무 늦게 안 것들은 표가 없거나 시즌이 아니라서 포기하게 되고, 다음 기회를 기약하게 되고,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일정이 짜여 간다. 

교토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일본 근대 화가 중에 우에무라 쇼엔 上村松園 이라는 화가가 있다. 그림체가 간 결하면서도 우아해서 마음에 들었는데, 그 화가의 작품이 교토에 있는 교세라 미술관이라는 곳에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기회에 가 봐야겠군. 교세라라면 또 <왜 일하는가>를 쓰신 이나모리 가즈오 센세가 만든,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을 상징하는 그 회사 아닌가. 

 

그리고 물론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이 단풍이다 보니 교토 인근의 단풍 명소들을 비교해보게 되었다. 당연히 꼽히는 곳이 유명한 아라시야마의 텐류지, 히가시야마의 난젠지, 에이칸도(젠류지), 도후쿠지, 그리고 역 근처의 토지... 교토 인근에만 1500개의 절이 있다는데, 그 중에서 일단 시내에서 먼 곳부터 빼자니, 항상 무슨 소설이나 영화에서 교토로 진군하는 군대가 넘어 들어오는 히에이산 지역 빼고, 남쪽의 차 산지로 유명한 우지 지역 빼고, 일단은 시내를 정리하기로 결심했다. 

아, 물론 단풍철은 전 세계에서 손님들이 몰려 온다는 이야기 때문에 일단 처음부터 빼고 생각한 곳이 기요미즈데라, 금각사, 은각사였다. 기요미즈데라의 단풍이나 라이트업(밤 조명을 말한다)을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너무 밀리지 않는 곳이 좋겠다는 생각이 앞섰는데, 이게 얼마나 허망한 생각이었는지는 차차 알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대략의 일정은, 

첫날 일본 간사이 공항 입국 - 하루카 열차로 교토행 - 가메오카 역까지 전철 - 마치야 숙소 '하나레 니노우미'에서 1박

둘쨋날 가메오카 - 사가 아라시야마 역 이동 - 아라시야마 일대 구경 - 시내 호텔로 이동 - 저녁 고다이지 라이트업 구경

셋쨋날 히가시야마 오픈런 - 에이칸도 - 난젠지 - 교세라 미술관 - 교토 근대미술관 - 휴식 - 도후쿠지 라이트업 - 호텔 

넷쨋날 ??? - 호텔 체크아웃 - 나오코노자 베테이 우메코지 (Naokonoza 別邸 梅小路) 숙박

다섯쨋날 하루카 열차로 공항 이동, 귀국

이런 식이다. 과연 계획대로 얼마나 잘 이뤄질지. 여행을 앞두고 일본 총리의 '타이완 발언'으로 중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일본 여행 자제령(이라고 쓰고 금지령이라고 읽는)을 발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와! 사람 별로 없겠다! 고 생각했으나....

결론적으로 말해 계획대로 되는 여행은 원래 별로 없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인 여행기 시작.

[2025 교토 2화] 가메오카라는 도시가 있었네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2025 교토 2화] 가메오카라는 도시가 있었네

교토역에서 가메오카 가는 전철길은 이렇다. 완행으로 29분, 5개 정거장 정도만 서는 급행은 20분 이내로 걸린다. 첫날 공항 생략. 하루카 탑승시 공항 출국 후 발권기에서 티켓을 출력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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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교토 3화] 아라시야마의 빛, 조잣코지(상적광사)의 첫인상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2025 교토 3화] 아라시야마의 빛, 조잣코지(상적광사)의 첫인상

오전 9시30분 경. 사가 아라시야마 역은 꽤 분주했다. 당초의 목표는 사가 아라시야마역에서 남쪽으로 내려가 그 유명한 도케쓰 다리를 보고,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려는 것이었는데 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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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낳은 걸출한 배우. 한때 한국 영화 그 자체였던 안성기(1952-2025)에 대한 송사.

 

0. 1988년. 태어나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해외로 나갈 수 있었다. 도쿄에서 환승한 귀국편은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한국인 승무원 중에 유난히 눈에 띄는 미인이 있었다.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튼 이런 저런 사연으로 TV에 몇번 출연했을 때라, 그걸 알아본 이분이 몇가지 기념품도 챙겨 주시며 친절하게 대해 주신 기억이 있다. "우리 남편이랑 얼마나 응원을 했는데요. 남편은 외국인이라 한국어도 못 하는데 재미있다고 보더라구요." 당시 나보다 몇살 위였던 나의 동행인은 '우리 남편'이라는 말에 큰 실망을 하는게 눈에 보였다.

그분이 누구였는지는 공항 입국장을 나서 커피 향기를 맡는 순간 기억할 수 있었다.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꽤 긴 세월 동안 안성기의 맥심 커피 광고 파트너였던 바로 그분이었다. 많은 분들이 배우 안성기의 아내로 착각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뒤로이 분은 여기저기서 인터뷰를 하기도 해서 '외교관과 결혼한 외국 항공사 승무원 이현미씨'라는 신상을 밝혔다. 안성기의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오래 오래 기억되던 분. 

국민배우 안성기의 부음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실제 안성기와 나눈 대화나 그의 말들보다 '최장수 커피 모델'이었던 안성기의 웃음, 그리고 이 기억이었다. 이 당시에도 안성기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아무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스타였다. 

 

항상 공기처럼, 커피 향기처럼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당연한 요소였던 그가 떠났다.

 

1.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 세대에게 안성기를 대표하는 영화는 <고래사냥(1984)><겨울나그네(1986)>였다. 물론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도 어떤 사람들에겐 그게 <꼬방동네 사람들(1983)>일 수도, <어우동(1985)>일 수도, <깊고 푸른 밤(1985)>, <외인구단(1986)>, <칠수와 만수(1988)>일 수도 있겠다. 아니, 90년대로 넘어와 <남부군(1990)>, <하얀전쟁(1992)>, <투캅스(1993)>, <영원한 제국(1994)>일 수도 있겠고, 어떤 이에겐 <라디오 스타>(2006)일 수도 있겠다.

겨울나그네



2. 안성기의 생애 출연작은 대략 65년간 200편 정도인 듯 하다(170편 정도라고 보도되고 있는데 아마 그게 맞을 듯 합니다). 그중 아역 출연작이 70편 정도 된다지만 성연 역으로도 100편은 훨씬 넘는다. 특히나 위에서 말한 시기, 1980년대와 90년대의 안성기는 한 개인이 아니라 한국 영화 그 자체였다. 그 시절, 안성기가 나오지 않는 영화는 그냥 '아예 영화가 아니었던' 시절이 존재했다. 

월급쟁이

3. 1957년, 5세의 안성기를 데뷔시킨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였던 김기영 감독이라고 전해진다. 이해 <황혼열차>로 데뷔한 안성기는 아마도 한국 영화의 전문 아역배우 1호라 해도 좋을 것 같다. 대략 한해 10편 안팎을 소화하던 안성기는 좀 무리한 스케줄이라고 느꼈는지, 경동중학교에 진학하던 1965년부터 한해 3~4편으로 '관리'를 시작했다. 대략 대학생이 될 무렵인 1969년부터는 10년간 출연작이 없다. 아무래도 연기 말고 다른 길을 가기로 결심했던 듯. 

(흔히 경동중학교의 3대 인물로 야구의 백인천, 가수 조용필, 배우 안성기를 꼽는다고 한다. 특히 조용필과 안성기는 동기동창. 그러나 서로 알기는 했으되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고 전해진다.)

라고 썼는데 아래 댓글로 어떤 분이 "굉장히 추억이 많은 사이였다"고 정정해 주셨습니다. 근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eBn7ZeNBjic

 

 

월급쟁이, 방성자와 안성기


'연기 못하는 아역은 없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안성기는 아역 시절부터 발군의 솜씨를 자랑했다. 김기영 감독의 유명한 <하녀>는 말할 것도 없고, 안성기의 열연이 궁금한 사람은 유튜브에서 이봉래 감독의 <월급쟁이>(1962)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 영화는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데 큰누나 엄앵란, 작은누나 방성자와 함께 되바라진 국민학생을 연기하는 안성기의 열연이 일품이다. (뒷날 충격적인 총기 관련 스캔들과 함께 스크린에서 사라진 방성자의 미모도 놀랍다.)

 

얄개전

4. 항간에 알려진 것과는 좀 다르게,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안성기의 필모그래피는 끊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얄개'라는 캐릭터로 1977년작 <고교얄개>의 이승현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은 1965년에 이미 <얄개전>이라는 영화가 있었고 만 13세의 안성기가 주인공 나두수 역을 맡았다.

조흔파 원작 <얄개전>에서 나두수가 중학생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은 이쪽이 더 원작에 충실했던 셈이다. 물론 이 영화는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수많은 한국의 옛날 영화들처럼 어디서도 볼 수는 없다. 

젊은 느티나무

안성기의 청소년기를 지금도 볼 수 있는 드문 작품으로 1968년작인 신성일 문희 주연 <젊은 느티나무>가 있다. 최고 스타 신성일이 최고의 신예 문희와 호흡을 맞춘 작품. '그에게선 늘 비누냄새가 난다'로 잘 알려진 강신재 원작 소설대로, 영화는 어머니의 재혼으로 갑자기 잘생긴 오빠가 생긴 한 여대생의 시선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여기서 문희에게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는 부잣집 아들 역으로 윤양하가 나오고, 안성기는 그의 동생으로 몇번 등장한다. 많은 관객들에게 눈에 익은 '코 찡끗' 표정은 이때부터 안성기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느티나무


(이 영화에는 스키, 테니스, 스포츠카, 고고 파티 등 당시의 웬만한 대학생들은 즐기기 힘들었을 자유분방하고 여유넘치는 정경을 보여줘 당시에도 상당히 흥행에 성공했다. 같은 원작을 영상화한 작품 중 꽤 유명한 것이 1986년의 KBS <TV문학관>. 당시 만 16세의 김혜수가 주인공으로 등장했었다. 오빠 역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5. 그리고 나서 앞서 말한대로 대학 진학과 함께 10년간의 공백기가 있고, 안성기는 이 영화로 돌아온다. (사실 이 영화 전에도 몇편의 출연작이 있었지만, 크게 의미를 가질만한 작품은 아니다.)

바람불어 좋은 날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1980). 이 영화를 시작으로, 안성기는 쉴 수 없는 배우가 되고, 이 영화 이후로 "대학생들도 한국영화를 보는 시대"가 찾아온다.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히트작들이 <미워도 다시 한번>이나 <춘향전> 같은 작품들이었던 시대를 끝낸 것이 바로 이 남자, 안성기의 힘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8세. 안성기도 풋풋했다.

이 작품에서부터 안성기의 연기에는 어느 정도의 과장이 섞여 보이기 시작한다.

 

 

6. 아역시절부터의 습관일까, <바람불어 좋은 날>이나 <고래사냥>의 캐릭터 소화를 보면 절로 떠오르는 다소 과장된 몸짓과 말투. 그런데 그것조차도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겨울나그네>에서 안성기가 강석우를 부를 때 쓰던 "피리부는 소년"이라는 호칭을 만약 다른 배우가 썼다면, 그게 그렇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아무튼 이 '과장'의 뒤에는 솔직한 감정을 숨기려는 소심함이 묻어났다. 감정이든 사상이든,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던 폭압의 시대. 이 '감춤'과 '과장'이 보는 이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었기에 안성기는 시대의 배우, 국민의 배우가 될 수 있었다.

 

고래사냥


여기에 하나 더. 안성기를 '국민배우'라고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는 건 글자 그대로 그가 연기해온 캐릭터들만 봐도 그냥 '국민의 배우'였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안성기는 왕이나 대통령 역은 몇 차례 했지만(<영원한 제국>의 정조 역이 대표적이다), 재벌 회장 역은 한 적이 없다. 아니, 누구도 안성기에게 회장님 연기를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7. 내게 가장 익숙한 그의 모습은 <고래사냥>의 왕초다. 일단 스크린에서 안성기가 안성기다우려면 면도 같은 것은 하지 않아야 하고, 머리도 감지 않아야 하며, 갑자기 벌떡 일어나 연극적인 대사를 읊어도 어색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빨치산이든(<지리산>), 그냥 고뇌하는 지식인이(<태백산맥>)든, 삼류 개그맨(<개그맨>)이든, 고공 크레인 타는 노동자(<칠수와 만수>)든, 월남전에 뛰어든 병사(<하얀 전쟁>)든 마찬가지다. 누군가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면 당할지언정, 절대 권력을 갖고 남을 핍박하지 않았다.

 

드문 예외가 <깊고 푸른 밤>의 냉혈한 그레고리 백이나 <인정사정 볼것없다>의 살인마 역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깊고 푸른 밤>은 정서적으로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지만, <인정사정 볼것 없다>에는 도통 몰입이 되지 않았다. 그 '빗속의 명장면'도 개인적으로는 딱히. 

무사


8. 나이들어가며 안성기는 인자한 눈빛으로 상대를 위로하며, 어떻게 해서든 인생의 지혜를 나눠주려 하는, 꼰대 아닌 '드문 어른'의 연기에 특화된 배우가 되어 갔다.

 

그게 자살특공대 교관이든(<실미도>), 천민들로 이뤄진 주진군의 지휘관이든(<무사>), 도술을 감추고 체육관을 운영하는 관장이든(<아라한 장풍대작전>), 20년 넘게 자신이 가수왕인줄 알고 사는 가수를 보살피는 매니저든(<라디오 스타>), 심지어 대통령이든(<피아노 치는 대통령>) 안성기는 그냥 안성기였다. 변신 같은 것은 필요도 없었고, 할 이유도 없었다.


아마 현실에서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 영화계에서 안성기는 그저 그냥 누구에게나 '선배님'이라고 부르고 싶은 대상이었고, 특히 대한민국의 '영화배우'들을 하나의 독립된 동아리처럼 하나로 엮는 형님이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안성기이라는 영원한 상왕을 업고 실제로 그 동아리를 관리한 것은 박중훈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둘은 영화 속에서만 콤비가 아니었다. (요즘은 대체 누가 안성기-박중훈의 뒤를 이어 한국 영화계의 형님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잠자는 남자

9. 한류스타 안성기는 없었을까. 안성기는 두 편의 외국 영화에 출연했다. 한 편은 중국 영화(합작) <묵공>. 한 성을 수호하기 위해 묵가의 제자 혁리(유덕화)가 등장하고, 그 성을 함락하기 위해 명장 항엄중(안성기)이 나선다. 비장미 넘지는 호연. 영화도 좋았다. 가끔씩 케이블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갑자기 한번씩 나오곤 한다.

나머지 한 편은 일본 영화 <잠자는 남자>. '일본의 안성기'로 불리는 야쿠쇼 코지와의 공연이 화제를 모았는데... 본 사람들은 다 쓰러졌다. 안성기는 '잠자는 남자' 역이었는데, 정말로 누워있는 연기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저 위의 사진이 유일하게 서 있는 장면이다. 과연 출연료는 얼마였을까. 사실 이게 가장 궁금했다.

한산



10. 2022년, 안성기는 세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두번째인 <한산>, 신연식 감독의 <카시오페아>, 그리고 박흥식 감독의 <탄생>이다. 이 세 편이 마지막 작품들이 될 줄은 본인도 몰랐을 듯. 이렇듯 한국 영화계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울 때, 그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이 더욱 안타깝다. 

 

안성기님, 덕분에 오래도록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내내 평안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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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2025년에는 본 드라마도 많았지만, 마음에 드는 드라마도 많았다. 미드나 영드보다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본 한 해 인듯. 주변에서도 미드/영드 추천을 많이 받지 못했다. <은중과 상연> 덕분에 <나의 눈부신 친구>가, 바카리즈무의 <핫스팟> 때문에 <브러시 업 라이프>가 다시 주목받게 된 것은 의미 있는 일인 듯.  

은중과 상연

극본 송혜진, 연출 조영민. 친구란 뭘까. '여자에게 오래된 남사친이란' 이란 질문의 답은 '내가 OK하면 바로 사귀는 사이가 될 수도 있지만, 사귄다고 남들 앞에 내놓기엔 부끄러운 남자' 일때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이런 식의 논리를 '여자들 사이의 우정이란'에 대입하면 어떤 답이 나올까. '내게 만만한' 이나 '내게 도움이 되는' 외에 정말로 동등한 선에서 나란히 세상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우정이란 가능할까. 아니, 여자가 아니라 남자 사이에서는 가능할까. 아무튼 그런 우정, 그런 사랑, 그런 젊음을 설득력있게 그려낸 드라마. 결말 외에는 다 마음에 들었다.

 

파인

극본 강윤성 안승환, 연출 강윤성. 윤태호 원작 만화를 각색한 작품. 1970년대, 신안 보물선 탐사 당시 남아 있는 유물을 정부 몰래 찾기 위해 뛰어든 온갖 인간들의 행태를 그렸다. 지금 보기에 촌스럽기 짝이 없는 1970년대 목포 풍경이 그럴듯했고, 어중이 떠중이 다 모아놓은 듯한 패거리들의 치사한 행태가 쓴웃음을 자아냈다. 다만 연출에서 류승룡을 비롯한 패거리들의 살인 등 악행을 너무 가볍게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연기 못하는 배우가 없는 출연진 가운데서 '복근이' 김진욱에게 특히 눈길이 갔고, 60년대 영화를 보면서 말투를 공부한 듯한 임수정도 확실한 변신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근처가 고향인 유노윤호의 사투리 연기도 발군. 

 

 

중증외상센터

극본 최태강, 연출 이도윤. 현직 의사인 한산이가 원작을 각색. 그렇다고 의학적 엄밀성, 의료계 현실반영 등등을 기대하면 큰일나는 판타지 드라마. 그저 시청자들은 국민 응급의 이국종 박사를 상상하며 사이다에 환성을 올렸고, 그거면 충분하지 않았나 싶다. 주지훈은 이제 버럭남으로 확실한 자리를 잡았고, 26세 추영우가 <옥씨부인전>에 이어 확실하게 차세대를 책임질 주인공으로 부각됐다. 개인적으로는 윤경호라는 배우의 이름을 처음 찾아본 작품.  (그런데 이 드라마의 제목이 중증의학센터가 아닌 것도 이번에 확인.)

 

 

폭싹 속았수다

극본 임상춘, 연출 김원석. 여기에 아이유 박보검 주연. 그야말로 국가대표 드라마답게 확실한 위력을 뽐냈다. 줄거리 모르는 사람 없을테니 생략. 애순이 아이유가 연기 잘했다 생략. 어쨌든 양관식 박보검은 이 지독한 순정남 연기로 국민 이상형의 자리를 굳혔고, 이미 다 떠 있는줄 알았던 염해란이 차세대 국민엄마의 자리를 넘볼 수 있게 올라왔는데, 뭐니뭐니해도 이 드라마의 최고 수혜자라면 '학씨' 최대훈을 빼놓을 수 없을 듯. 관식이 엄마 오민애와 학씨네 젊은 사모님 채서안도 빛을 발했다.

이 내용으로 글로벌 석권은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해외 반응도 꽤 있었던 듯? 하지만 2030에게는 거의 관심 밖의 드라마였다고도 한다. 외국보다 더 먼 젠Z의 세계...

(그런데 정말 정확하게 쓰기 어려운 제목. '폭삭 삭았수다'도, '폭싹 삭았수다'도 아니었다.)

 

 

서초동

극본 이승현, 연출 박승우. <중증외상센터>나 마찬가지로 현직 변호사 집필. 문유석 작가 이후로 '현직' 붐이 이는 모양이다. 변호사들 사이에서 은근히 '지금까지 나온 변호사 드라마들 중에서 리얼리티로는 최고'라고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물론 리얼해서 좋았다는 건 절대 아니고, 도시 한복판에서 만난 깍정이 변호사들이 '밥동무'라는 이름으로 서로 어울리며 도와 살아가는, 그런 청년 직업인들의 모습이 좋았다고 할까. 

 

루드비히 Ludwig

근래 짬짬이 본 드라마 중 최고는 역시 <Ludwig>. <루드비히>, <루드윅> 한글로는 어느 쪽으로 쓰는게 좋을지 애매하긴 하다. 시리즈의 전체 음악이 베토벤 작품의 변주라는 점에서 <루드비히>가 더 의도에 맞는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영국인인 주인공이 쓰는 필명은 <루드윅>이겠지.
(그런데 놀랍게도, 한글 제목은 <루드 비히: 퍼즐로 푸는 진실>이다. 아니 이 근본없는 띄어쓰기는 대체 뭔가...)
왠지 개인적으로 사회적 적응력이 떨어지는 천재 탐정 이야기에 집착하는 것 같다. <몽크>나 <엔데버>를 좋아했고, 사실 이런 탐정들의 조상은 셜록 홈즈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보니 <루터>도 반대 방향이긴 하지만 반 사회적 성격이긴 하네 ㅋ)
'루드윅'이란 필명으로 크로스워드 퍼즐을 만드는게 직업인 존 테일러는 어느날 형수 루시로부터 형 제임스(쌍둥이다)가 돌연 사라졌다는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제임스의 직업은 수사반장.
 
 
당연한 수순으로, 존은 제임스 행세를 하면서 제임스가 사라진 이유를 추적하려 하는데, 그러려니 제임스가 맡았어야 할 사건 파일들이 그의 앞에 놓인다. 그런데 딱 보니 퍼즐이 풀리고 범인이 보이네. 그러니 말을 안 할수도 없고... 그러다보니 명탐정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
물론 천재다보니 사건을 어떻게 퍼즐화하는지 시청자는 그 뇌 속 알고리듬을 '당연히' 알 수 없는데, 그런 추리의 결과를 보여주는 장면이나 주위 사람들과의 티키타카가 아주 좋다. 주인공 데이빗 미첼은 로버트 웹이라는 동료와 코미디 듀오로 유명한 모양인데 이 작품에서 처음 봤다(문득 왕년의 사이먼 펙-닉 프로스트도 그립네).
아무튼 이런 풍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강추. 왓챠 웨이브 티빙에 있는데, 누구든 좋은말 할때 빨리 시즌2를 내놓기 바란다.

 

아수라처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솜씨. 좋아하는 일본 배우들의 나이들어가는 모습이 빛났던 작품. 재미있었다. 문득 작년에 본 영화 <세설>이 떠오르기도 했다. 일본식의 자매 서사는 확실히 눈길을 끈다. 

https://fivecard.joins.com/1548

 

아수라처럼, 순한 맛의 아수라장

1. 나이를 넘어 고혹적인 맏딸, 미야자와 리에. 둘쨋딸, 미인이지만 확 끌리지는 않는 둘째딸, 오노 마치코. 별 인기도 없고 남자와 인연도 별로 없는 셋째딸, 아오이 유우(이건 좀 캐스팅에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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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오브 어스

유명한 게임이라는 건 일찍부터 듣고 있었다. 해본 사람들마다 게임이되 어지간한 드라마나 영화는 발라버릴만한 강력한 극성을 갖고 있다고들 했다. 마침내 드라마로 접했다. 감동했다. 

근미래의 아포칼립스가 된 미국. 좀비 비슷한 감염자들이 세상을 뒤덮은 가운데, 유일하게 그 감염병에 면역을 갖고 있는 소녀가 나타난다(그 소녀가 바로 <왕좌의 게임> 후반부에 "킹 인 더 노쓰!"를 외치던 바로 그 소녀라니). 그래서 주인공 페드로 파스칼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며, 저항군의 본부가 있는 중서부 깊숙히 소녀를 데리고 길을 간다. 파스칼은 <만달로리안>에 이어 어쩐지 '보호자 역에 특화된 배우'의 길을 가고 있는 듯. 어쨌든 긴 말이 필요없다. 시즌2가 시즌1에 비해 밀도가 떨어지는 것은 분명한데, 누구도 시즌1에 대해서는 트집잡을 구석이 없을 거라고 생각. 

 

 

재칼의 날

이 드라마를 보고 얼마 뒤, 지난 6월에 원작자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부음을 들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작가라고 생각했던 사람. 사실 아직도 이 드라마 <재칼의 날>보다는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1973년작 영화 <재칼의 날>이 더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고 드라마 <재칼의 날>에 나오는 가족 서사는 정말이지 쓸모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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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칼의 날, '가족'이 과연 필요했을까

2025 첫 완주 드라마는 . Peacock 오리지널인데 한국에서는 웨이브를 통해 공개됐다. The Day of the Jackal. 한때 세계 최고의 작가라고 생각했던 프레드릭 포사이스 원작을 드라마로 만들었다. 소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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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오퍼

영화 사상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대부>의 제작 과정을 그린 드라마.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물론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 스티브 맥퀸(응?), 알리 맥그로 등이 등장한다. 물론 주인공은 이 영화의 프로듀서인 마일스 텔러가 연기하는 알버트 루디와 매튜 구드가 연기하는 로버트 에반스. 그밖에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숨은 주역들이 주욱... 설명이 필요없다. <대부>를 사랑했던 사람들이라면 날밤을 새도 모자랄 작품.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누벨 바그>도 고다르가 영화 <네멋대로 해라>를 만드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라는데, 이런 작품들은 좀 더 많이 나와도 좋을 것 같다.

1. 다음 사항 중 4개 이상에 해당하는 사람
- <호간의 영웅들>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는 사람(사실 영화 <파벨만스>에서도 잠시 언급된다. ㅎㅎ)
- <대탈주>에서 스티브 맥퀸의 오토바이 신을 기억하는 사람. 혹은 영화 <르망>을 본 사람.
- <러브 스토리> 주인공들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
- <내일을 향해 쏴라>의 주인공들 이름을 아는 사람.
- <캬바레>의 라이자 미넬리 의상이 기억하는 사람, 혹은 <올 댓 재즈>를 본 사람.
-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누군가에게 대리수상하라고 시킨 배우를 아는 사람.
- 코폴라 와인을 호기심에 사 본 사람.
2. 다음 대사가 나오는 영화 장면이 3개 이상 떠오르는 사람.
-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네"
- "그분은 나쁜 소식은 빨리 듣고 싶어하죠."
- "화해를 주선하는 자가 배신자야."
- "내가 내 누이를 과부로 만들거 같아?"
- "카놀리 사 오는거 잊지 말아요."
- "흑인들에겐 마약을 팔아도 돼. 놈들은 영혼이 없으니까."
- "마이클 콜레오네, 악과 맞설수 있습니까?"
위 조건을 통과하신 분, 드라마 <디 오퍼>를 보십쇼. 인생 드라마가 될 겁니다. (그런데 왓챠에서만 볼수 있단게 문제...)

 

 

 

핫스팟

후지산이 보이는 일본 야마나시현 어느 호숫가의 작은 호텔. 이치카와 미카코가 이 호텔에서 일하는 싱글밤 키요미를 연기한다. 그 주변에는 세상에 대한 큰 야망이나 기대 없이 살아가는 소시민들뿐인데, 어느날 호텔에서 함께 일하는 선임 노총각 다카하시가 엄청난 초능력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심지어 그냥 초능력자도 아니고 외계인... 

이 드라마가 수없이 많은 초능력자, 외계인 드라마와 달라지는 점은 그 다음부터다. 키요미는 다카하시의 능력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나고, 다카하시는 절대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한 키요미가 친구들에게 사실을 털어놓은 데 화를 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속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초능력자든 뭐든, 세상을 살아하게 하는 것은 이런 엉뚱하면서도 사소한 욕망의 구현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카리즈무(일본의 잘나가는 코미디언이자 작가)의 영특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니 보는 사람이 절로 빠져들밖에. 

혹시 아직 <브러쉬 업 라이프>를 안 보신 분들, 꼭 찾아서 보세요. 

 

사건수사대 Q      DEPT.Q

매튜 구드에게 별 관심없는 사람들은 얼굴을 보고도 뭐야, 두산에서 뛰던 니퍼트 아냐? 할 정도의 배우. 그런데 희한하게 이 열편의 드라마 중에 <디 오퍼>에 이어 두번째로 등장한다. 아무튼 넷플릭스에서 <사건수사대 Q>를 보고, 이런 글을 페북에 썼다.

 

매튜 구드. 아마도 <와치맨>의 오지맨디아스 역으로 본게 처음일테니 20년이 족히 됐는데 그 이후로 큰 변화를 못 봤다. 생김새를 보고 넥스트 제레미 아이언스라고 생각했는데 별 엣지가 없었던 모양이다.
사실 동년배 영국 배우들을 보면 존재감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을법도 하다. 톰 하디, 마이클 파스벤더, 제임스 매커보이, 벤 위쇼, 에디 레드메인 같은 쨍한 개성은 암만 봐도 없다. 휴 댄시나 루크 에반스처럼 뭔가 깊이 악한 느낌도 약하고. 핸섬 앤 댄디만으로 이겨내기엔 경쟁자들이 너무나 강력했다.
그렇게 묻혀 늙어가나 했는데 갑자기 수염을 기르고 형사로 나섰다. 이건 누가 봐도 더스틴 니퍼트.... 사실은 에딘버러가 무대라길래 보기 시작했는데, 보다 보니 재미있다.
<사건수사대 Q> . 원제도 Dept.Q. 제잘난 맛에 동료들을 다 개무시하고 혼자 잘난데다 시니컬하고 상처도 잘 받지 않는, 샤프한 대문자 T 모크 형사. 현장에서 총격 사고를 당하고 복귀해보니 자리도 없고, 원래 없었던 인망은 더 없고.
사실 이 구도는 전혀 드물게 없는데 시리아에서 대체 뭘 하다 왔는지 모르겠으나 못하는 게 없는 치트키 아크람, 딱 봐도 너무나 일 못하게 생겼는데 분석력도 있고 앞가림도 잘 하는 로즈가 추가되고 나니 희한한 올 루저 팀 하나가 뚝딱 생겼다. 에딘버러판 슬로 호시스인가.

 

9개 에피소드를 한 사건으로 끌고 가니 사건은 꽤 지지부진한데 0에서 99로 만드는 과정이 그럴듯하고, 캐릭터들의 티키타카가 특히 재미있다. 시즌2에선 아크람의 과거사가 좀 더 드러나길. 어쨌든 수염 기르고 나온 매튜 구드의 변신 성공을 축하하며 추천.
 
 

그밖에도 <미지의 서울>, <협상의 기술>도 좋았고, 아직 결말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프로보노>도 울림이 대단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질적으로 볼 때 한국 드라마의 전성기인 것은 분명하다. 물론 아직도 뒷목잡게 하는 작품이 나오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인 작품의 수준이 훅 성장했다. 

미드 중에는 <외교관3>가 정상적인 폼을 유지하며 잘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드라마가 아닌 시리즈로는 단연 <피지컬 아시아>. 이렇게 손에 땀을 쥐고 본 시리즈가 없었다고나. 

이렇게 해서 2025년 결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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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 법원 타운을 가면 약국 편의점보다 변호사 사무실 간판이 더 많다. 건물 하나가 1층의 편의점이나 식당 빼고는 2층부터 7,8층까지 전부 로펌인 경우가 적지 않다.
<서초동>은 그런 건물 한 층씩을 쓰는 작은 로펌(변호사가 2~3명씩밖에 없다)에서 각각 일하는 10년차 이내의 '어쏘' 변호사들 이야기다. 법조계란 매우 좁은 선후배들의 사회다 보니 대략 한두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 변호사도 늘 끼니는 해결해야 하니 밥동무가 필요하다. 그렇게 한 건물에 다니는 이유로 고정 밥동무가 된 젊은 변호사 다섯명의 이야기다.
 
밥동무 이야기다 보니 당연히 식사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것이 처음부터 작가의 의도인지, 연출의 착안인지 모르겠으나 매끼 모여서 다른 음식을 먹는 장면이 '굳이' 나오는데, 그 장면들이 참 좋았다. 물론 아는 분들은 '먹는데 환장한 네가 보니 그렇겠지'라고 하시겠으나, 사실 식구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니다. 밥 식, 입 구. 끼니때 모여 밥 같이 먹는 사람이 식구다. 그렇게 매일 '특별한 일 없으면' 같이 수저를 맞대는 사이야말로 진짜 가족보다 가까운 사이일 수 있다. 그 '밥 먹는 장면'과 이런 저런 장면들을 볼 때, 박승우 감독은 조만간 걸작을 내놓을 것 같다.

 

 
<서초동>은 지금까지 드라마에 주로 나오던 변호사들과는 '다른 변호사들'을 보여준다. 너무 영웅스러워서 부담스럽지도 않고, 방금 구치소에서 자기가 풀어준 마약상습범 재벌 2세와 특급호텔의 퍼스널 스카이라운지에서 로마네콩티로 건배를 나누는 모습도 아닌, 대략 근처에서 많이 보이는 직장인 비슷한 변호사다.
물론 어쏘 변호사라도 변호사인 만큼, 그 또래의 일반 직장인들보다는 훨씬 높은 연봉을 받는다. 하지만 영원히 어쏘로 있을 수는 없다. 나이가 차면 개업을 하든, 다른 무슨 길을 찾아 떠나야 하는게 어쏘의 숙명이다. '사장' 변호사의 입장에선 머리가 굵으면 슬슬 인건비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하고, 또 한편으로는 '키워서 부려먹을만 하면 나가는' 것도 짜증스러울게다. 그런 애매한 시기의 변호사들이 나오는 건 변호사판 <언젠가는 슬기로울...>과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중간쯤 될까.
 
많은 드라마 속 변호사들처럼 <서초동>의 변호사들도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은 일들을 하는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라고는 말하지 않지만, 그래도 '변호사라는 것이 원래 돈 받고 의뢰인이 하려는 말을 대신 해주는 기능직'이라고 변명한다. 그래도 <서초동> 속 변호사들은 불쌍한 사람이 더 불쌍해지는게 싫고, 그 과정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너무 지나친, 정의감이 넘쳐서 도저히 현실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서 좋았다.
 
다만 법정드라마답게 많은 사건이 등장하는데, 그 각각의 사건들이 변호사들이 어떤 사람인지 드러내주는 용도로는 적절하지만 시청자의 관극 욕구를 충족해줄만큼 자극적이거나 흥미롭지 않다는 점은 좀 아쉽다. 아무래도 법정드라마라면 사건 자체로 관심을 끌 수 있었어야 하는데, 이것까지도 지나치게 리얼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P.S. 로펌 대표들 중 하나인 김지현이라는 배우에게 눈길이 갔고, 강유석의 생활연기가 돋보였다. 무엇보다 문가영이 이렇게 매력적인 배운줄 지금까지 몰랐다니. 무슨 말을 해도 편들어 줄 것 같은 사랑스러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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숱한 자료와 영상을 봤고, 책도 꽤 읽었지만 새로 나온 책을 정좌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는 힘들었던 한해였다. 그러고 보면 1년간 읽은게 다 무엇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 

10년 전에서 5~6년 전에 읽은 책을 쓸데가 있어서 다시 읽었다. 올해는 유난히 그런 해였던 것 같다. <생각에 대한 생각>, <이기적 유전자>, <그릿>, <몰입(flow)>, <창의성을 지휘하라>, <특이점이 온다> 같은 책들. 20년 전에 읽은 책들은 대략 기억이 나지만 10년 전에 읽은 책은 어렴풋이 기억이 나고, 4~5년 전에 읽은 책은 밑줄이 쳐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아 내가 이 책을 읽었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슬프다.

어쨌든 항상 책 파트 정리는 '아 젠장 올해는 정말 읽은 책이 없네'로 시작해 '10권을 어떻게 꼽나'로 갔다가 '그래도 한권만 더 하자'로 끝나는 듯. 올해는 12권. 

 

새왕의 방패 (이마무라 쇼고)

재미있다는 이야기는 진작에 들었는데 정작 읽게 된 것은 넷플릭스 시리즈 <이쿠사가미>도 같은 이마무라 쇼고의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의 일이다. (이쿠사가미가 재미있었다는 뜻은 아님) 이쿠사가미는 원작이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새왕의 방패>를 읽은 뒤의 소감은, <새왕의 방패>가 영화화되었더라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새왕의 '새'는 '요새'의 '새'. 사실 '두 천재 장인이 벌이는 숙명의 대결'이라는 슬로건은 일본 센고쿠 시대를 배경으로 성을 건설하는 축성 전문가들과 화약무기를 다루는 조총 전문가들의 대결이라는 것을 가리키는데, 저런 표현을 쓰기에 이 소설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새왕'이라 불리는 쪽, 즉 축성 전문가 쪽에 너무 큰 무게가 실려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미없다는 뜻은 절대 아님. 특히 일본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재미있을 책.

 

 

여학교의 별 (와야마 야마)
가라오케 가자 (와야마 야마)

<가라오케 가자>를 보고 반해서 찾아 읽게 된 만화. 근래 예전처럼 만화를 열심히 보지 못하고 있지만, <페이블> 이후 가장 재미있는 만화라고 인정할 만한 작품을 만났다. 어느 여학교의 왁살스러운 여학생들과 얌전한 선생님들 이야기. 자신이 인기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생님과 인기 같은 것은 1도 관심이 없는 두 젊은 남자 선생님들이 무지막지하게 웃기는 에피소드들을 뿌린다. 왜 이런 작품은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혹시 나왔는데 모르고 있는 거라면 알려주세요)

 

 

애프터 넷플릭스 (조영신)

집필에 아주 조금 관여(?)를 했다는 면에서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반칙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현재 우리가 속해 있는 미디어 상황에 대한 가장 설득력있는 논리가 담긴 책이다. 특히 조영신 박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당위'나 '지사적 책임감', 혹은 '국뽕' 때문에 현상을 무시하는 일부 관찰자들의 주장을 보면 쓴웃음이 나올 때가 꽤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조영신 박사의 브런치 https://brunch.co.kr/@troicacho/102 도 참고해 보시길. 

 

 

먼저 온 미래 (장강명)

이미 수없는 상찬을 받은 책. 인류 문명에 AI가 미칠 영향에 대해 최대한 국외자인 것처럼, 이 사회와 거리를 두고 서술하려 노력한 면이 특히 마음에 들었고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다. 다만 항상 이런 책들은 'AI는 이런 일들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논리에 '어차피 99.99%의 인간도 안 되는 일을 갖고 AI의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연결되는데, 이 책도 이 부분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이 아쉽기는 했다. 결국 인류 문명이라는 것은 그 0.01%에 의해 좌우되어 오지 않았던가. 그 0.1%가 반드시 엔지니어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미 나는 내가 현실적인 부분에서 0.01%일 수 없음을 알았고, 만약 그 역할을 인공지능이 대신한다 해도 과연 나의 삶에 큰 변화가 있지는 않는데, 혹시 내가 전체 인류의 0.01%라고 생각하는 부분(예를 들어 그렇다는 얘기다. 대체 어느 부분이 그렇냐고 묻지 말아주시)을 추월당한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떨까. 궁금하다.

 

 

몸, 내안의 우주 (남궁인)

응급외과 전문의의 '우리 몸'과 건강에 대한 전반적인 해설서. 응급 환자들의 사례에서 시작해, 우리의 몸은 어떤 기관들의 어떤 작용에 의해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만약 외부로부터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해서 병상에 누운 몸이 될 수 있는지를 소상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일단 순서대로 읽어도 좋은 책이지만, 상당히 두꺼운 책이니 책꽂이에 꽂아 두고 뭔가 궁금하거나 불편할 때 가장 먼저 찾아 읽어볼 수 있는, '남궁인의 가정의학백과' 같은 책으로도 가치가 높다. '2025년의 역저'로 꼽힐 책.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 월급사실주의 2024 (남궁인 손원평 등 공저)

어쨌든 현대 사회에서 행복한 불로소득자가 될만한 자산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 우리 중 대부분은 일을 해야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먹고 산다. 이 책은 '월급사실주의 2024'라는 제목대로, 그렇게 '벌어야 먹고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노동 현장을 소재로 한 8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그 중엔 전문 소설가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위 책에서 바로 이어지는 남궁인 박사는 의사의 노동 이야기 아닌, 프리랜서 아나운서의 삶을 이야기하고, 쿠팡 새벽배송 사태 때 '그나마 쿠팡이 상당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비해서는 괜찮은 일자리'라는 말에 꼬투리를 잡혀 유명해진 천현우 작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본래 남의 돈 버는 게 고달프지 않을 리가 없으니, 이 책의 소감이 '나만 힘든게 아니구나' 일지, '그나마 나는 양반이었네' 일지, 그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여기에 2025년의 히트 드라마 <...김부장 이야기>가 겹쳐지면 정말 그런 '고달픔에는 위아래가 없구나'가 되고, 영화 <어쩔수가 없다>가 겹쳐지면 '그래도 아직 일자리가 있는게 다행이야'가 될 수도. 

 

만화로 배우는 불멸의 역사 ( 브누아 시마 저/필리프 베르코비치 그림) 

이 책과 다음 두 권은 뭔가 하나로 연결되는 느낌이 든다. 인류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반사적으로 불멸을 꿈꿔 왔다. 그리고 그 지난한 역사는 인류 과학 문명의 발달과 연결되어왔고, 현대 사회에서는 실리콘밸리를 지배하고 있다. 레이 커즈와일이 먹고 있는 비타민이나 일론 머스크의 우주선 모두 '불멸'이라는 키워드로 연결될 수 있다는 논리를 매우 설득력있게, 증거 중심으로 구성한 책. 그리고 그 불멸이란 오늘날에 와서는 결국 '트랜스휴먼'이라는 키워드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 흥미롭고, 정교하다.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하드  SF의 대가 그렉 이건의 작품들을 읽다 보면 아무래도 테드 창과 비교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테드 창을 숭배하는 사람으로서, 창에 비해 이건은 좀 더 이과적인 작품을 쓴다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실존에 대한 이해는 확실히 테드 창을 따를 수 없고, 이건은 '내가 현대 사회와 기술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정통한데'를 자랑하는 데 더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 단편집의 <내가 되는 법 배우기>는 이글먼이나 아닐 세스의 책을 읽고 읽으면 더 실감난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은 타이틀 트랙(?)인 <내가 행복한 이유>. 행복해지는 방법을 물리적으로 제거당한 남자의 분투기가 눈물겹다. 아무튼 강추.

 

 

우리는 각자의 세계가 된다 (데이비드 이글먼)

읽다 보니 아닐 세스의 <내가 된다는 것>나 미치오 가쿠의 <마음의 미래>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글먼의 방향은 인간의 뇌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간 능력의 확장, 즉 '인위적인 진화'에 이르는 길. 앞서 읽었던 <만화로 배우는 불멸의 역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굳이 불멸이 그렇게 필요할까. 어쨌든 이 시대의 주제인 '인간의 확장'을 이해하기 위한 책들 중 손꼽히게 좋은 책.

 

 

구로사와 아키라: 자서전 비슷한 것 (구로사와 아키라)

구로사와 아키라는 감독이면서 뛰어난 시나리오 라이터이기도 했으나 대본 외에 구로사와 감독이 직접 쓴 글들은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글이 남아 있다는 것이 감동적일수밖에. 정말이지 '이 양반 굉장히 솔직하구나' 라고 느낄만한 담백한 문장들이 반갑기 그지없다. 어려서 겪은 관동대지진의 참상(강 위로 항문이 벌어진 시체들이 둥둥 떠내려가고 있었다)이나 2차대전 끝물의 위기들, 빈민가의 생활, 형의 자살 등이 수채화처럼 흘러간다. 그의 영화 세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볼만한 이야기.

 

 

제로 투 원 (피터 틸)

팔란티어라는 회사는 대체 뭘 하는 회사고, 온톨로지란 무엇인가를 궁금해 하다가 결국 가장 먼저 읽게 된 책. '유태인 동성애자이나 극우파'라는 정말 기묘한 포지션의 스탠포드 철학 석사 피터 틸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경쟁을 싫어하고 독점을 좋아한다는 그의 말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나면, 놀랍게도 많은 부분이 이해가 간다. 무려 1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지금도 상당히 유효한 책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일 때문에 이 방면의 책들을 꽤 여러권 보게 되었는데, 로저 마틴의 <디자인 씽킹 바이블>, 에릭 리스의 <린 스타트업>, 애시 모리아의 <린 스타트업 10주년 기념판> 등에 비해 뭔가 쨍한 느낌을 주는 책이다. 

다만 피터 틸은 엄청 급한 성격인 듯, 문장들이 그리 친절하지 않다는 점은 감안할 것. 

그런데 틸의 책이 경영 지침서, 특히 스타트업 용의 교훈서로 상당히 훌륭한 반면, 알렉산더 카프의 <기술공화국 선언>은 참담한 수준의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탠포드 로스쿨, 독일 사회철학 박사라는 으리으리한 간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책에 나오는 수많은 석학들의 인용과 다양한 상황 분석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리더십이라는게 개발독재형의 리더(그가 가장 찬양하는 지도자는 싱가포르의 리콴유다. 차마 시진핑이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라는 점은 지금 대체 이 책을 왜 읽고 있나 하는 허탈감을 줬다.

 

그리고 모처럼 연말 약간 여유가 생겨 읽고 있는 책은 이 책. 

대만이라는 따뜻하고 음식이 발달한 나라의 풍광과 음식 이야기, 그리고 점령국/피점령국 국민인 두 여자의 우정이 버무려진 책. 여행안내가 아니라 소설인데, 아직 결말까지 도달하지 못해 어떻게 끝날지는 모르겠으나, 무작정 대만으로 가보고 싶어지는 책이다. 너무 '여자여자' 한 이야기를 싫어하시는 분이 아니라면, 담가 보실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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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하던대로 10편의 영화를 꼽아 봤습니다. 그래도 올해는 극장에서 본 영화가 꽤 많네요. 

어쩌다 보니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을만한 씨너스가 맨 위에 있는데, 숫자가 1위~10위라는 뜻은 아닙니다.

1.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얼마 전에 올린 '21세기의 첫 쿼터를 대표하는 25편의 영화' 중의 한 편으로 올려놨으니 여기 빠질 수는 없는 작품.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지만, 영화 한 편을 봤을 뿐인데도 20세기 초 미시시피 델타 지방의 끈끈함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2025년 단 한편을 뽑으라면 이 영화. 이미 리뷰를 길게 써서... 그쪽을 참고하시길.

씨너스, 하룻밤의 혈투로 압축한 블루스의 역사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씨너스, 하룻밤의 혈투로 압축한 블루스의 역사

0. 스포일러는 없지만 일단 영화를 보시고 읽어보시길 권장. 근 몇년 사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얼른 보라고, 극장에서 내려오기 전에 보라고 권한 영화가 없었다. 후회 안 하실 거라고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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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보 (이상일)

가부키라는 것이 대체 어떤 것인가, 그냥 막연한 이웃나라 연희극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게 된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 재능과 혈통, 우정과 경쟁, 인간 본연의 심리에 어필하는 훌륭한 작품. 3시간이 짧게 느껴집니다. 

국보, '가부키'라는 남자들만의 이야기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국보, '가부키'라는 남자들만의 이야기

0. 야쿠자의 아들 기쿠오(요시자와 료)는 부모를 잃고 유명 가부키 배우 하나이 한지로(와타나베 켄)의 제자가 되어, 한지로의 아들 슌스케(요코야마 류세이)와 함께 자라고, 함께 수련한다.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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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폴 토머스 앤더슨)

올해의 코미디. 찌질이 중년남으로 변신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인종주의 인간말종 꼰대로 변신한 션 펜, 두 아저씨의 열연이 기발한 정치 코미디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폴 토머스 앤더슨에겐 아직 이런 장르가 무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정말 재미있는 영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PTA는 운동권을 비웃은 걸까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PTA는 운동권을 비웃은 걸까

1. PTA , 그러니까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들 중 , , , 는 좋아하는 영화들이지만 , 는 고만고만하고 는... 전혀 취향이 아니다. 일각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불세출의 천재 감독'이란 평가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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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쩔수가 없다 (박찬욱)

흠이 있다면 <기생충>보다 늦게 만들어 진 것? 늘 그렇듯 풍성한 비유와 기이한 유머로 가득한 박찬욱스러운 작품. 한마디로 주제를 요약하자면 '구조는 노예들을 싸우게 한다'? 거대한 공장에 '혼자' 서 있는 박찬욱 감독의 모습이 어쩐지 다른 50대 감독들이 다 나가떨어진 한국 영화계를 보여주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어쩔수가 없다, 아마도. 이제는 정말로.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어쩔수가 없다, 아마도. 이제는 정말로.

1. .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한편으론 웃기면서 한편으론 곤혹스러운’. 이것이 이 영화를 대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가 아닐까. 아마도 이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기억될 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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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콘클라베 (에드워드 버거)

교황의 급사 이후, 후계자 선출을 놓고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 스스로를 킹메이커의 자리에 놓은 로렌스 추기경(레이프 파인스)은 극좌에서 극우까지 다양한 후보들을 눈대중으로 심사하며 카톨릭 교회의 앞날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후보자들은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선명하게 부각되고... 

아마 2010년 중반이었다면 아카데미상은 <콘클라베>의 차지가 됐을 듯. 그만치 고전적으로 완성도 높은 영화. 수사극(?)의 형태로 되어 있는 중간 중간의 문제들이 너무 쉽게 해결되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2025년 최고의 정치 드라마(아, 아직도 이 영화가 종교극이라고 알고 계신건 아니겠죠)로 손색이 없습니다. 예기치 못한 엔딩의 감동도 일품. 대단한 영화입니다.

 

6. 시빌 워 (알렉스 갈랜드)

어느 편이 어느 편인지도 모르게 미국의 50개 주들이 제각각으로 흩어져 서로 싸우게 된 근미래(사실상 현대). 국가의 분열을 초래한 대통령을 지지하는 세력은 어느새 동부 끝으로 고립되어가고 있고, 특파원들은 대통령이 내릴 최후의 선택(?)을 취재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통과하는 미국의 시골 지역은 중앙 권력이 사라지며, 서부개척시대보다 더 엉망진창인 무법지역으로 변해 있습니다. 너무나 현실 같아서 차마 웃을 수 없는 영화. 결말은 사이다일까요, 아닐까요. 

시빌 워. 우화가 아닌 악몽. 9개의 질문과 대답.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시빌 워. 우화가 아닌 악몽. 9개의 질문과 대답.

를 꽤 기다렸다. 2023년 연말, '이런 영화가 나온다'는 예고편을 보고 와 정말 할리우드는 다이내믹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미국 개봉도 4월로 늦어지고(아마도 예측 불가능한 미국 대선과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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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앤드루 헤이그)

2023년작. 좀 늦게 봤지만 올해의 영화로 꼽지 않을 수 없을만큼 강렬했던 작품. 어둡고 우울한 도시에서 친구가 된 두 남자. 그리고 우연히 만나게 된 어렸을 적 부모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싶지 않은 주인공. 디즈니플러스를 구독하시는 분들이라면 꼭 보시길.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디즈니플러스에서 를 봤다. 앤드루 헤이그, 의 그 감독이다. 앤드루 스콧, 좋아하는 배우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퀴어? 보고 나서 알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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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F1 (조셉 코신스키)

역시 가장 재미있었던 영화 중 하나. 그동안 수많은 주제, 주제, 주제들에 시달렸던 관객들을 해방시켜 준 영화. '내가 왜 지금까지 영화라는 것을 보아 왔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속편 기대. 

F1, 세상은 변했나, 변하지 않았나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F1, 세상은 변했나, 변하지 않았나

2017년 F1의 사업권을 사들인 미국 회사 리버티 미디어는 의외로 F1이 미국에선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데 충격을 받고, 적극적인 마케팅 수단을 찾아나섰다. 그래서 2019년 시작된 기획이 넷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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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아노라 (션 베이커)

'어째서 아노라가 2025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어야 했는가'는 당시에는 꽤 논란이 됐지만, 할리우드가 당시 사회 분위기에 일희일비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은 뭐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죠. 그리고 션 베이커를 잘 모르셨던 분이라면, <아노라>를 통해 이 놀라운 감독의 세계를 느끼게 되실 듯. 자, 아직 안 보신 분들이라면 빨리 <아노라>를 보시고,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시길.

 

 

10. 세계의 주인 (윤가은)

역시 '만들어 줘서 고마운' 영화. 아직 인생의 도입부인 10대라는 세대, 그리고 남은 긴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위 사람들은 어떤 태도여야 하는지를 찬찬히 가르쳐주는 영화. 물론 거기다 재미있는 영화. 윤가은 감독이 디렉션의 힘을 어서 느껴 보시길.

세계의 주인, 주인이의 세계. :: 송원섭의 스핑크스 2호점

 

세계의 주인, 주인이의 세계.

근래 굉장히 비슷비슷한 영화평이 여기저기서 잇달아 올라오고 있다. '왜 좋은지 어떻게 설명을 하고 싶은데 설명을 하려들면 바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설명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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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좋은 영화들이 많이 봤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19년작 <리처드 주얼>은 정의란 무엇이고, 우리는 얼마나 외모나 연출에 약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세상이 멸망하지 않도록 보살피는 좋은 사람들도 있고...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 한국 영화로는 역시 넷픓릭스에서 본 <살인자 리포트>(조영준) 좋았습니다. 당연히 반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하는 출발점에서 실제로 반전이 밝혀지는 후반까지 구성이 정말 탄탄합니다. 

좀 고전적인 취향이라면 쩐 아인 훙의 <프렌치 수프> (원제가 La passion de Dodin Bouffant네요)를 추천. 줄리엣 비노슈의 잔잔하게 나이든 모습을 볼 수 있고, 딱히 음식에 관심이 좀 있는 분이 아니라도, 충분히 빠져들만한 잔잔한 이야기가 일품. 음식에 관심 많은 분들이라면 <고독한 미식가, 더 무비>도 올해의 영화로 추천할만.

반면 좀 너무 평이한건 싫다 하는 분들은 넷플릭스에 있는 <악마와의 토크쇼>를 강추합니다. 1970년대, 심야 시간대 시청률 경쟁을 벌이던 토크쇼들은 한명이라도 더 보게 하기 위해 마술, 심령, 불륜, 별별 소재들을 다 동원했는데, 그러다 결국 스튜디오에 악마를 불러들이게 됩니다. 그야말로 별별 짓을 다 보게 됩니다. 카메론/콜린 케언스(Cairnes, 캔스? 케이언스? 호주의 도시 이름인 Cairns와도 철자가 다름)는 형제인가본데 물론 전혀 들어본 적이 없고, 아는 배우도 나오지 않지만 아주 재미있습니다. 물론 호러는 아니지만, 노약자들은 시청을 피하시길.

 

자, 2025년 한햇동안 애써주신 여러 분야의 크리에이터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26년에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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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F1의 사업권을 사들인 미국 회사 리버티 미디어는 의외로 F1이 미국에선 별 관심을 끌지 못한다는 데 충격을 받고, 적극적인 마케팅 수단을 찾아나섰다.
 
 
그래서 2019년 시작된 기획이 넷플릭스 다큐 <본능의 질주 Drive to survive)>. 그 뒤로 시리즈도 승승장구, F1의 인기도 급상승. 코신스키도 영화 <F1> 제작에 <본능의 질주>가 미친 영향을 기자회견에서 언급했다. F1에서 보여줄 수 있는 카메라 앵글을 비롯해 거의 모든 비주얼 요소를 가이드로 보여준 셈인데, 어찌 보면 이런 면에선 영화 공짜로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레이서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은 참 많이도 나왔다. 할 얘기도 이미 다 했다. 남자의 고독, 질주 속에서 느끼는 실존감, 팀메이트간의 갈등, 특히 백전노장 드라이버와 신예 후배의 갈등, 차의 성능인가 드라이버의 실력인가, 의리와 명분... 주인공만 바뀐 똑같은 플롯의 영화들이 쌓여 있다. 물론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니까. 그리고 사실 영화라는게 원래 그런거 아닌가. 느와르는 안 그렇고, 로맨틱 코미디라고 크게 다른가.

스티브 맥퀸의 <르망(1970)>과 이브 몽탕의 <그랑프리(1966)>를 좋아한다. 두 캐릭터 모두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장 드라이버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후배들과 경쟁하고, 달린다.
 
지금은 매우 식상한 얘기지만 이런 영화들에는 꼭 "대체 이렇게 목숨 내놓고 이걸 해야겠어요? 뭐때문에 시속 200마일로 달리는 미친 짓을 하죠? (당신이 죽으면 나는 어떡해요?)" 라고 묻는 여성들이 나왔다. 그러면 노장들은 오만 폼을 잡고 말한다. "내겐 달리는게 전부야." 그렇다. 매우 유치하고 진부하지만, '달리는 것이 나의 존재 증명'이라는 그 시대의 과장된 진지함이 좋았다.

 

 
다행히도 코신스키의 <F1>에는 같은 질문을 던지는 여성 캐릭터가 없... 나오긴 한다. (웨이트리스가 비슷한 질문으로 브래드 피트에게 "돈은 중요치 않아요"라고 말할 기회를 준다.) 대신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그를 위해 세계에서 가장 빨리 달릴 수 있는 기계를 만든다. 멋지지 않은가. 이것이 2025년이다.
 
사실 <F1>을 신나게 보고 나왔는데, 정작 <F1>에 대해서는 딱히 할 말이 없다. 영화 자체가 그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F1의 규칙 같은건 나도 모른다. 아무튼 브래드 피트는 멋지고, 보고 있으면 저절로 응원하게 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지만, 영화란 건 원래 이런 거였고, 이랬어야 했다.
 
P.S. 파트너 돈 심슨이 살아있던 시절, 다들 아시다시피 1990년 제리 브룩하이머는 레이싱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바로 톰 크루즈의 <폭풍의 질주>. <F1> 속편에선 톰형과 빵형이 '왕년의 라이벌'이었던 것으로 놓고 데이토나나 르망에서 '마지막 대결'을 위해 만나보는건 어떨까. <탑건 매버릭> 감독이기도 한 코신스키는 이미 이런 구상을 해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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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쩔수가 없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한편으론 웃기면서 한편으론 곤혹스러운’. 이것이 이 영화를 대하는 사람들의 보편적 정서가 아닐까. 아마도 이 영화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기억될 <고추잠자리>씬을 보면서 딱 그런 생각을 했다. 한편으론 웃기면서도 한편으론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싶은.
 
이 다크한 코미디가 얼마나 대중적일지가 솔직히 궁금하다. 수수께끼 같은 장면들을 묘수풀이로 즐기는 관객들에겐 대단히 만족스러운 영화일 듯. 참고로 사과나무도 나오고, 뱀도 나온다.
 
 
2. 벌써 10몇년 전의 일이다. 한 지인의 지인이 출판사를 냈다며 건네 준 책에는 이런 추천사가 적혀 있었다. ‘박찬욱: 내가 가장 영화로 만들고 싶은 원작’...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야, 역시 재미있었다.
 
 
3. 소설 제목은 엑스(AX). 해고된 중년 가장이 재취업을 시도한다. 그러나 경쟁이 치열하고, 주인공은 자신이 특화된 영역의 비슷한 경력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럼 나와 비슷한 경력자들을 제거하면 되겠네? 그래서 실업자 아저씨는 킬러로 급변신을...
 
 
4. 대략 이런 이야기. 당연히 원작과 똑같지는 않다. 제지회사 베테랑 엔지니어 유만수(이병헌)는 사랑하는 미인 아내(손예진)와 두 아이, 두마리의 개, 자기가 태어나 자란 숲속의 집(어려서 집안이 망해 쫓겨났다가 성인이 되어 되찾았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식물들로 가득 찬 온실까지, ‘다 가졌다’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물론 영화 도입부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이제부터 주인공이 나락으로 향한다는 이정표다.
 
 
5. <어쩔수가 없다>. 제목은 너무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 일해 혼자 먹고 살 수가 없다. 반드시 어떤 부분은 남에게 의지해야 한다. 남이 해주는 일은 어딘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한국에서 그 부분을 지적할 때 가장 많이 돌아오는 말 중 하나가 ‘어쩔수 없다’다.
 
사실 영화 앞부분에서 미국인 임원의 대사는 “Sorry, no other choice”였던 것 같은데, 한국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어쩔수가 없다”는 아마도 “It is what it is”, 아니면 “That’s the way it goes. It was the best I could do”에 더 가깝지 않을까.
 
 

6. 그리고 구조는 노예들이 서로를 적으로 여기게 만든다. 이건 박찬욱 감독이 <복수는 나의 것>부터 유지해 온 스탠스가 아닌가. 그때도 송강호는 신하균에게 말했다. “사실 너 착한 놈인거 안다. 그러니까… 죽이는거 이해하지?” 이건 내가 너를 죽이는 게 아니라, 이 구조가 너를 죽이는 거야. 그러니 나를 탓하지 말아줘. 나도 어쩔수가 없어. AI도 나오고, 이야기의 외피는 새롭지만 그 속살은 소설 원작이 나온 시절의 시각을 지나치게(?)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건 아닐지.
 
(물론 차이가 있다면, '그 시절'에는 세상을 지배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선택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과 문명의 흐름이 세상을 완전히 바꿔 버려서 누구도 '어쩔 수 없이' 이 쪽으로 갈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이 '어쩔수가 없다' 인지도.)
 
 
7.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가 <기생충>보다 늦게 만들어진 이상, 비교는 필연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인디언 분장의 손예진은 아마도 관객에게 보내는 ‘인정할게. 자, 됐지?’의 사인일듯. 암튼 비슷한 문제에 대해 두 감독이 제출한 두 장의 답안지를 보는 느낌이다.
 
 
8. 전체 제작비에서 대체 출연료만 어느정도일까 싶게 캐스팅이 환상적이다. 차승원 이성민이 이 정도 비중의 역할로 출연하는 영화라니.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영화는 짧다. 이병헌의 능력을 굳이 얘기하는 건 이제 사족일 뿐이고, 궁금한 건 박찬욱 감독과 손예진의 조합이었는데, 결과는 감동적이었다.
 
 
9. 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올드보이> 이후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처음으로 ‘죄’만 있고 ‘벌’은 없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혹시 벌이 있다면... 레슨비?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엔딩의 이병헌 혼자 있는 장면은 혹시 박찬욱 감독이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이유는…)
 
 

10. 어쨌든 얼른들 가서 보세요. 보고 더 얘기합시다. 떡밥은 천지.

예를 들어 영재인 딸인 어딘가 AI를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악보를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표기하는 아이. 놀라운 재능이 있지만 인간 부모들과는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 아이. 어딘가 미심쩍은 눈으로 인간 어른들을 보고 평가하고 있는 아이. 결국 그 '아이'와 어떻게 미래를.... (정말 돈이 많이 든다. 제대로 키우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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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플러스에서 <올 오브 어스 스트레인저스>를 봤다. 앤드루 헤이그, <45년>의 그 감독이다. 앤드루 스콧, 좋아하는 배우다. 그 외에 다른 것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퀴어? 보고 나서 알았는데,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도 그 관계 자체가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런던 어딘가의 낡은 고층 아파트. 입주자들이 거의 다 빠져나간 폐허 같은 건물에서 살고 있는 아담(앤드루 스콧)은 어느날 이웃 해리(폴 메스칼)을 알게 된다. 세상 살이에 미련이라곤 없어진 아담은 어느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어떠냐"는 해리의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한다. 뒤늦게 자기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 아담. 그리고 그들은 매우 친숙한 사이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아담은 갑자기 어려서 살던 옛 집을 찾아가는데, 거기에는 여전히 부모님이 살고 있다. 자기를 남겨 두고 죽었을 때의 젊은 모습 그대로. 그들은 너무나 반갑게 아담을 맞이한다.
 
(네. 이런 얘기에요. ㅋ)
 
 
왠지 그렇게 끝나면 안 될 것 같은 방향으로 영화가 흘러가고, 결국 엔딩 크레딧이 뜬 뒤에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이런 기분 오랜만인데, 굳이 기억을 뒤져 보자니 관금붕의 <연지구>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외로움, 인연, 그리움, 이런 키워드들에 이어 ‘회한’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다 늦은 밤 시골길을 걷다 보면, 문명이란 어떻게든 어둠을 이겨 보려는 인간들의 발버둥이 이뤄낸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렇게 인간은 도시를 만들고, 밤을 낮처럼 밝혀냈지만, 마음 속의 어둠은 쫓아낼 수 없었고, 도시에도 여전히 그늘은 있다.
 
 
그 그늘에서 무엇이 나올지를 두려워한다면, 아직 당신은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지도.
 
1월이지만 올 연말에 꼽을 올해의 영화 중 한 자리는 확정. 영화는 잔잔하지만 여운은 어마어마하다. 디즈니플러스에서 볼 수 있음.
 
 
P.S. 일본 작가 야마다 타이치의 <이방인과 보낸 여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미 1988년에 영화화됐다. 물론 번역 출간도 되지 않았고, 영화도 볼 방법은 없어 보인다. 혹시 보신 분 계심?
 
 
P.S.2. 해리 역의 폴 메스칼이 <글래디에이터>에서 그 소년 루시우스였다고. 아. 세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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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굉장히 비슷비슷한 영화평이 여기저기서 잇달아 올라오고 있다. '왜 좋은지 어떻게 설명을 하고 싶은데 설명을 하려들면 바로 스포일러가 되기 때문에 설명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호소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세계의 주인>. 여고생 주인은 어린이집 원장인 엄마, 마술사를 꿈꾸는 초딩 남동생과 살고 있다. 태권도를 좋아하고, 봉사 모임에도 나가고, 남자친구와 키스도 좋아하는, 활기차고 씩씩한 주인. 어느날 같은 반 남학생 수호가 서명운동에 참여할 것을 부탁하는데, 주인은 정색을 하고 거절한다. 아니 충분히 찬성할만한 일인데 왜?
 
 
영화의 전반은 수수께끼를 내고, 후반은 그 수수께끼의 답을 준다. 의아했던 것들이 풀려 나가면서, 관객들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게 하는 묘한 영화. 미스테리는 해결되고, 웃음이 화면 가득 차오르지만 당신은 영화를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악은 분명 존재한다. 악이란 너무나 알아보기 쉬워서, 마주하는 자가 유혹에만 넘어가지 않으면 피해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영화는 물론이고, 실제 세상에도 악한 인간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만, 일단 악행이 저질러지고 나면, 어떤 식으로 단죄를 하든 '그 뒤의 삶'이라는 것은 고스란히 피해자에게 넘어온다.
 
 
그 악행의 흔적, 악행이 남긴 것은 지우개로 지우거나 욕실세제로 박박 닦아내릴수 있는게 아니다. 그럼 우리는 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태양 아래 여기 저기 돌아다니고 있는 악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약한 자들을 보호할수 있을까. 한번 무너진 것은 어떻게 다시 일으킬수 있을까. 그리고 그 무너진 것을 다시 쌓으려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윤가은 감독은 답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얼개를 짜는 재능 못지 않게 배우들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솜씨가 놀랍다. 영화 시작 후 30분이면 '음. 저 배우와 저 배우는 상당히 오버액션을 하네'라는 생각이 드는데, 1시간30분쯤 되면 그 오버액션도 연출의 일부임을 깨닫게 된다.
 
 
한국 영화에서 보기드물게 정교하면서도 동시에 휘몰아치는 힘이 느껴지는 영화. 상영관이 적은게 안타까운데 어떻게든 찾아서 보시길 권한다. 내 마음이 얼마나 굳어 있나 볼수 있는 자가검진 세트로도 사용 가능.

 

P.S.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윤가은 감독의 영화 몇 편을 찾아 봤는데, '남동생'이라는 존재의 특이한 역할이 공통점으로 드러나는 걸 보았다. 윤 감독은 남동생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관계일지가 궁금했다. (지인을 통해 '남동생이 있다'는 것까지는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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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TA , 그러니까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들 중 <리노의 도박사>, <부기 나이트>, <팬텀 스레드>, <펀치드렁크 러브>는 좋아하는 영화들이지만 <마스터>, <매그놀리아>는 고만고만하고 <데어 윌 비 블러드>는... 전혀 취향이 아니다. 일각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불세출의 천재 감독'이란 평가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특히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은 비호를 넘어 극혐에 가깝다(물론 라디오헤드의 우울증 유발형 음악도 좋아하지 않는다). 대체 뭐가 좋은지 모르겠다. 이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도 유일한 약점이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펼쳐지는 장면들과 지금 이 음악이 어울리나? 아무튼 내 취향엔 맞지 않았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배틀...>은 진심 재미있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위선에 맞선(?) 가상의 테러 조직과 세월의 흐름, 백인우월주의 비밀 서클 같은 주제들이 종횡무진 대륙을 질주하며 벌어지는 요란한 액션 코미디. PTA가 어쩌다 이런 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는지 기특하기 짝이 없다.
 
3. 요즘 미국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말도 안되는 짓거리와 영화 속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이 하는 짓들을 보면 이 영화는 트럼프의 나라가 되어 버린 미국에 대한 강렬한 비판인데, PTA는 그걸로 그치지 않고 그 반대편도 날카롭게 후벼 판다.
 
 
4. 겉멋들린 운동권 엄마는 결국 모든 걸 배신해버리고, 그 바람에 애당초 혁명의식이란게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운 밥(디카프리오다)은 하루 아침에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는데, 그 16년이란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어린 딸을 부양하면서 잡히지도 않고 버틸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무능하기 짝이 없다.
 
니들도 잘한게 없다는, 미국 진보진영에 대한 실망이 그대로 담긴 듯한 느낌이다. 너희가 쓸데없는 PC와 현실을 무시한 이상주의에만 매달려 민생을 돌보지 않는 바람에 정권이 트럼프한테 넘어간 게 아니냐는 분노가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젊었을 때는 목숨을 걸고'를 외우고 다니는 586 꼰대들에 대해 실망한 한국 관객들의 호응도 눈부시다.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5. 디카프리오를 비롯해 천하의 악당 역을 맡은 션 펜, 카라테 센세 역의 베니시오 델 토로의 활약이 눈부신데, 이 세 아저씨(셋 중 하나는 확실히 내년에 오스카 트로피를 쥐지 않을까. 특히 주연일지 조연일지 모르겠으나 션 펜)의 활약을 보고 있으면 이 영화를 타란티노 아닌 PTA가 만들었다는 것이 의아해진다.
 
 
6. 물론 PTA에게 이런 장르가 익숙지 않아 그런지, 아니면 '어차피 이 영화는 코미디'라는 생각에서인지 뒷부분으로 가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상황이 이어진다. 특히 영화를 본 모든 사람들이 감탄해마지 않는 마지막 시퀀스의 자동차 추격전 장면에서 대체 마지막에 세 대의 자동차가 어떻게 그 차가 그 차인줄 알고 쫓고 쫓길수 있는지에 대한 설명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냥 달리다 보면 그 차가 그 차고, '본능적으로' 그 차가 자기를 죽이러 쫓아오는 차인 걸 눈치챈다는 식이다.) 하지만 보고 즐기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은 금물. 특히 망원렌즈 활용을 극대화한 촬영은 박수받을만 하다.
 
 

 

SLA 홍보 요원이었던 허스트와 체포된 뒤의 모습.

 

7. 영화 속 프렌치75는 1970년대 언론재 벌 허스트가의 손녀 패트리샤 허스트를 납치한 사건으로 주목받았던 SLA 같은 무정부주의 조직에서 모티브를 가져온게 아닐까 싶다. 60년대의 대책없는 낭만이 남아있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2010년쯤의 미국에서 이런 조직은 존재했을리가 없어 보이긴 한다.
 
SLA는 Symbionese Liberation Army의 약자로, 이들은 반 자본, 반 인종차별, 반 제국주의를 주장하는 극좌 조직이었다. 사상적으로 치밀하지는 않았고 막시즘과 모택동의 사상에 안토니오 그람시의 진지전이나 호치민의 게릴라 전에 대한 생각들을 조합한 것이 이들의 기반이었다. 
 
1974년 당시 SLA 는 패트리샤 허스트를 납치했다. 처음에는 유괴 사건이었고 이들은 허스트의 몸값으로 빈민들에게 식량을 지급하라는 등의 요구조건을 내새웠지만, 사라졌던 허스트가 SLA의 테러 활동에 동참하고 있는 모습이 감시 카메라에 찍히며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테러 조직에게 납치당했던 재벌가 상속녀가 그 테러 집단의 한패가 되어 있다니.
 
그들과 함께 생활하던 허스트는 그들의 반복되는 주장에 어느새 '세뇌되었고', 그들의 일원이 된 것이다. 허스트는 피해자에서 어느새 지명수배 명단에 함께 오르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조직은 체포되어 와해되었고, 허스트도 당연히 같이 처벌을 받았지만 1982년 허스트는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의 책(그러니까 자발적 참여가 아니고 억압적 세뇌에 의해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인 것이다... 운운)을 써서 사면에 성공했다. 정말로 그녀가 자발적으로 동참했는지, 아니면 새로운 심리적 이론의 근거를 마련한 것인지는 그녀 본인만 알 듯. 
 
8. 어쨌든 PTA 답지 않은 결말까지도 한국 관객 취향에도 딱 맞을듯한 작품. 개인적 기준으론 상반기의 <씨너스>와 올해의 영화를 다툰다. 얼른들 보시도록.
 
 
P.S. 성수동 메가박스가 문닫기 직전에 관람. 이런 식으로 극장이라는 존재가 삶의 주변에서 아예 사라져버릴까 두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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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 안 읽고 오신 분들을 위해 리스트만 앞에다 붙인다.

기준은 작품성 예술성 모르겠고, 그냥 내가 가장 좋아한, 2001-2025 사이의 영화 25편. 배치는 제작 연도순. 순위 아님.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 2001)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피터 잭슨, 2001)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2)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무간도2 (유위강/맥조휘, 2003)

킬빌 (퀜틴 타란티노, 2003)
올드보이 (박찬욱, 2003)
쿵푸허슬 (주성치, 2004)
타인의 삶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타짜 (최동훈, 2008)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빗 핀처, 2008)
아이언맨 (존 파브로, 2008)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2010)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베스트 오퍼 (주세페 토르나토레, 2013)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2013)
킹스맨 (매튜 본, 2014)

매드맥스: 퓨리로드 (조지 밀러, 2015)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2025)

 

이것만으론 아쉬우니 한줄씩 붙인다. 

1~11까지는 바로 앞의 포스팅 참고.

12.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빗 핀처, 2008)

어느 순간엔가, 모든 좀비 영화는 가장 무서운 병, 치매라는 병에 대한 알레고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가장 슬픈 좀비 영화는 바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다. 사랑하던 사람이 살아 있으나 더 이상 사랑하던 사람이 아닐 때, 그 사람을 바라보던 케이트 블랜칫의 슬픈 눈빛이 지금도 떠오른다. 관심 있는 분은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 단편을 읽어 보시길. 각색이란 얼마나 위대한 예술인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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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 21세기의 포레스트 검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런 영화가 또 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데이빗 핀처는 잘 알려진대로 '에일리언 3'에서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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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이언맨 (존 파브로, 2008)

슈퍼맨은 단순하지만 명쾌한 데가 있어서 그나마 좋아했는데 뭘 해도 고민하는 배트맨은 너무 중2병스러워서 도저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언맨의 자기애와 과시욕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슈퍼히어로의 등장. 그리고 거기에 맞는 새로운 시대의 매혹적인 화법. 이 영화가 없었다면 지금의 마블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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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언 맨, 제2의 트랜스포머가 될 듯

마블 코믹스의 세계가 참 깊고도 넓다는 것은 일찌기 알았지만, 아이언맨이라는 캐릭터는 이 영화의 제작 소식이 들릴 때까지 전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고편만큼은 대단한 수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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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솔직히 놀란의 영화는 거의 다 봤지만 <인썸니아>, <프레스티지>, <인터스텔라>, <덩케르크>는 매우 마음에 들었던 반면 그 나머지 영화, 배트맨 3부작과 <메멘토>, <테넷> 등은 뭔가 좀 거슬렸다. 그런 사람으로서 <인셉션> 은 발상에서 그 발상을 영화로 표현한 방법까지, 진정 최고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영화였다. 그런데 과연 팽이는 멈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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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9가지 궁금증에 대한 심층해설

안 보면 왕따된다는 영화 '인셉션'. 본 사람도 또 보고 아이맥스로 봐야 진짜배기라고들 소문이 자자한 인셉션. 요즘 단연 장안의 화제입니다. 그런데 결말이 두가지네 어쩌네, 레오나르도 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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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누가 난해하다 했나?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에 대해 수없이 많은 평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 말들 속에는 흔히 공통된 단어나 어구가 등장합니다. '난해' '관객의 혼동' '지적인 블록버스터' '매트릭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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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그을린 사랑 (대니 빌뇌브, 2010)

뭐하는 감독의 무슨 영화인지 전혀 모르고 이런 영화를 보는 즐거움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보는 동안 설마...했던 것이 설마...가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나는 충격의 순간도. 이런 영화들을 통해 우리는 어느 세계, 어느 문명을 누리고 있어도 결국은 모두 비슷한 인간이라는 사실로 순식간에 회귀하곤 한다. <듄>이나 <컨택트>도, <시카리오>도 훌륭했지만 여전히 내게 빌뇌브의 최고작은 <그을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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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 당신의 심장을 직격하는 영화

'그을린 사랑'을 보러 가서 가장 놀랐던 점은 극장이 거의 꽉 차 있더라는 것입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지명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각계의 호평이 쏟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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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비극, 왜 여전히 살아있을까

고전극의 세계에 집착하는 영화 감독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셰익스피어 극의 리메이크를 시도했던 감독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죠. 특히 '햄릿'은 수십차례나 세계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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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그 많은 앨런의 영화들 중 하나를 꼽으라면 아직도 물론 <애니 홀>을 꼽지 않을 수 없고, 10개를 꼽는대도 7,8개는 20세기의 영화들일 것 같은데, 그래도 <미드나잇 인 파리>의 매혹적인 상상은 늘 다시 들쳐보고 싶게 하는 마력을 갖고 있다.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해서 살고 싶은가. 무엇이 나에게 진짜 산다는 느낌을 줄 것인가. 스스로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앨런의 위대한 헌사.

 

17. 베스트 오퍼 (주세페 토르나토레, 2013)

<시네마 천국>의 토르나토레를 사랑했고, 그 뒤로도 그는 생을 긍정하는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 놀라운 작품들을 잇달아 만들어냈다. <스타메이커>, <언노운 우먼>을 지나 <베스트 오퍼>와 <피아니스트의 전설>중 어느 것을 꼽을까 고심하다가 선정한 것이 <피아니스트의 전설>이었는데, 어느 분의 지적으로 확인해 보니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1998년작. (아뿔싸)

가슴을 쓸어내리며 <베스트 오퍼>로 정정한다. 영화 <베스트 오퍼>는 '자만심'에 대한 경이로운 우화. 세상을 우습게 보는 남자는 외로울 수밖에 없고, 그 외로움 때문에 의외의 곳에서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인적으로 토르나토레와 파라디를 21세기 초반, 세계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부르고 싶다. (사실 토르나토레의 작품 중에 엔니오 모리코네에 헌정하는 다큐멘터리 <엔니오(2021)>를 뽑을까도 잠시 고민. 이렇게 눈물이 펑펑 흘렀던 영화도 드물었던 것 같다.)

 


18.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뭔가 영화를 만들면 만들수록 어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고레에다(꼭 좋은 뜻만은 아님). 아무래도 그냥 마구잡이로 혼자 분류할 때, '가족과 아이들'에 천착했던 고레에다 1기의 정점에 있는 영화는 이 영화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키웠는데 내 아이가 아니라니...에서 오는 직관적인 느낌과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잊을 수 없는 영화를 만들어 냈다.

 


19.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스가르 파라디, 2013)

고구마 서사를 싫어하기 때문에 <어떤 영웅>은 좀 실망이었지만, 그래도 파라디에 대한 기대가 여전한 것은 <씨민과 나데르의 이혼>과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가 워낙 좋았기 때문. 두 작품 중 어느 것을 고르는가는 그야말로 미세한 취향 차이일 수 있는데(두 편 다 고르자니 25편은 너무 적었다), 전자는 누가 봐도 '확실한 이야기'가 있었던 반면, 후자는 '무슨 이야기인지 분명치 않은' 이야기인데도 그걸로 한 편의 영화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 그래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가 위대한 스토리텔러 파라디의 재능을 더 잘 발휘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리스트에 넣었다.


20. 킹스맨 (매튜 본, 2014)

다니엘 크레이그가 본드 역을 맡은 007 시리즈가 흥행 기록을 돌파할 때 한켠에서 분노로 몸을 떨던 사람들이 있었다. '저게 어떻게 제임스 본드냐!' 매튜 본의 <킹스맨>이 사랑받은 이유 중에는, 그렇게 '진정한 본드'를 빼앗긴 사람들이 이쪽으로 집결한 것도 크게 작용한 것은 아닐지. 비록 그 기세가 2편 3편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킹스맨>의 발랄한 엔딩만큼은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을 들을 때마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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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맨, 왕년의 007 팬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

어느 정부를 위해서도 일하지 않는 비밀 정보 기관 [킹스맨]의 멤버 갤러해드(본명은 해리, 콜린 퍼스)는 임무 수행중 죽은 동료의 아들에게 메달을 줍니다. 세월이 흘러 17년 뒤, 그 소년 엑시(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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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매드맥스: 퓨리로드 (조지 밀러, 2015)

이 영화, 네번째 매드맥스 시리즈 영화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감독의 나이를 보고 전율했다. 70세 노장의 감각이 이렇게 힙할 수가 있다니. 34세때인 1979년 <매드맥스>를 내놨던 조지 밀러는 결국 그 세계관을 갈고 닦아 30여년 뒤에도 통할 수 있게 부활시키는 놀라운 저력을 과시했다. 그 시절 칙칙한 불법 복제 비디오로 <매드맥스>와 <매드맥스2>를 보던 사람들 중 누가 2015년에도 젊은이들이 빨간 내복에 열광할 줄 알았을까. 밀러는 아직도 6번째 매드맥스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부디 가시기 전에 10편을 채워주시길. 


22.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마틴 맥도나의 영화라고는 <킬러들의 도시> 하나밖에 본 적이 없었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의 영화세계가 너무나 궁금해졌다. 작은 도시에 세워진 세 개의 간판. 그리고 법 집행을 믿을 수 없는 엄마의 폭주. 정의와 질서라는, 인류가 문명을 건설한 이후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어 있는 두 가지 요소가 제대로 충돌하도록 폭탄을 던지는 영화. 결국 영화란 우리의 인생에 뚝 떨어진 예기치 못한 사건과 거기에 대한 캐릭터들의 반응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관점에서, 그 정의에 가장 충실한 영화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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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빌보드가 작가 지망생들에게 미칠 영향은?

쓰리 빌보드 Three Billboards Outside Ebbing, Missouri 영화가 끝나 갈 무렵, 이 영화, '쓰리 빌보드' 의 악영향에 대해 잠시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꽤 적지 않은 수의 시나리오 작가 혹은 시나리오 작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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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정말로 우연히, 부산영화제 참관차 갔다가 사전정보 0인 상태로 보게 된 영화. 그런데 여운이 일주일은 갔다. 어린이와 엄마에 대한 이야기 중 이보다 강렬한 작품이 있었을까. 대체 무엇을 해 줘야 할지 모르는, 그러나 아이를 사랑하는 것만은 분명한 철없는 엄마와 그나마 철이 좀 든 어린이의 기막힌 드라마. 물론 베이커에게 아카데미 작품/감독/극본상을 안겨준 작품은 <아노라>였지만, 가장 오래 기억될 영화는 역시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아닐지. 

 

 


24.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신카이 마코토의 소위 '재난 3부작' 중 많은 사람들이 <너의 이름은>을 최고로 치지만, 개인적으로는 역시 베스트를 꼽자면 <날씨의 아이>. 끝없이 비가 내리는 도쿄의 어느 여름. 비가 그치고 해가 떠오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녀가 있다. 그런데 이 홍수는 우연이 아니고, 세계의 지형을 바꿀 노아의 대홍수였고, 그런 결과를 막는 것도 결국 그 소녀에게 달린 일이었다. 여기서 신카이는 묻는다. 자, 이 소녀 하나를 희생시켜서 그 비를 막을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까? '전체주의 국가' 일본에서 이런 질문이 나오다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감동적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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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의 아이, 일본인도 달라졌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나날. 비슷한 또래의 한 믿을만한 분이 극찬을 하기도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포스터 속 파란 하늘이 끌려서 를 선택했다. 어쩌면 며칠 전 한강을 건너다 본, 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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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2025)

대체 이게 뭐지. 호러 뮤지컬? <리틀 샵 오브 호러>나 <이발사 토드>의 연장선인가? 아니면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리메이크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화였지만 일단 보기 시작하고는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팔 수 없게 만드는 뚝심이 어마어마했다. 마이클  B 조던의 1인 2역 열연도, 영화 전편에 넘쳐 흐르는 순혈 블루스의 힘도 강력한 작품. 이 모든 것을 조율해 낸 라이언 쿠글러의 다음 작품이 빨리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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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너스, 하룻밤의 혈투로 압축한 블루스의 역사

0. 스포일러는 없지만 일단 영화를 보시고 읽어보시길 권장. 근 몇년 사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얼른 보라고, 극장에서 내려오기 전에 보라고 권한 영화가 없었다. 후회 안 하실 거라고 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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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고 추리다 영 아쉬워서 두편은 깍두기로 추가한다.


와일드 테일즈 (다미안 시프론, 2014)

인간의 감정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6편의 단편 모음 영화. 아르헨티나, 그 중에서도 부에노스 아일레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이야기 하나 하나의 밀도가 24시간 우려낸 설렁탕 이상이다. 천재의 다음 작품들을 기대하게 하는 힘이 압권.


스틸 라이프/삼협호인 (가장가, 2006)

사람들은 왜 모이고, 무엇 때문에 흩어지는가. 왜 제목은 스틸 라이프일까. 지아 장커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인물 하나 하나는 왠지 거대한 산수화 속에 박혀 있는 동그라미 머리 하나 하나처럼 느껴지곤 한다. 장강은 유유자적 흘러가고, 청산도 그대로 그 모습인데, 거기 잠시 머물다 가는 인간들의 사연이 제아무리 기구하다 하나, 어차피 곧 흘러갈 일들 아니겠는가. 이런 느낌 때문에 쉽게 '사회성 강한 영화'로 단정할 수 없게 하는 대작. 

 

이렇게 2001-2025까지 25편을 꼽아 봤다. (다 뽑은 지금도 역시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를 뽑았어야 하나 생각중이다.)

여러분의 25편은 어떠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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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즈가 21세기의 첫 쿼터를 맞이해 영화 100편을 꼽았다. 

물론 내 취향은 아니다. 나같으면 절대 꼽지 않았을 영화들이 대량으로 끼어 있다. 그냥 '21세기의 첫 100대 예술영화'라고 해도 좋을 것 같은 리스트였다. 예술영화 별로 안 좋아한다.

그래서 그냥 직접 꼽아 봤다. 2025년이다 보니 그냥 숫자를 맞춰 25편을 뽑았다. 꼽아 놓고 보니 개중엔 좀 뭔가 있어 보이는 영화도 있고, 심각한 사람들이 보면 피식 웃을 영화들도 있는 것 같다. 그냥 취향의 기억을 위해 정리해 본다. 모든 작품의 기준은 논리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 아니고, 그냥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욕하실 분은 취향을 욕하시길.

생각해보니 인생 참 짧다. 과연 20세기의 두번째 쿼터에서 내가 이런 리스트를 만들 수 있을까. 약간 회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언젠가, 20세기의 마지막 쿼터에 대한 25편의 영화도 한번 골라볼까 싶다. 그래도 리스트 두개는 남겨 봐야지.

21세기가 2000년에 시작하는지, 2001년에 시작하는지는 좀 애매한 것 같은데, 그래도 꽂아넣고 싶은 영화가 2000년 작품이라 여기에 넣었다. 그럼 시작한다. 순서는 연도순. 

화양연화 (왕가위, 2000)을 꼽으려고 했는데 2000년은 21세기가 아니란다. ㅠㅠ

그래서 다시.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 2001)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피터 잭슨, 2001)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2)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무간도2 (유위강/맥조휘, 2003)

 

킬빌 1,2 (퀜틴 타란티노, 2003)
올드보이 (박찬욱, 2003)
쿵푸허슬 (주성치, 2004)
타인의 삶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렛미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타짜 (최동훈, 2008)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데이빗 핀처, 2008)
아이언맨 (존 파브로, 2008)
인셉션 (크리스토퍼 놀란, 2010)
그을린 사랑 (드니 빌뇌브, 2010)

미드나잇 인 파리 (우디 앨런, 2011)
베스트 오퍼 (주세페 토르나토레, 2013)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2013)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아쉬가르 파라디, 2013)
킹스맨 (매튜 본, 2014)

매드맥스: 퓨리로드 (조지 밀러, 2015)
쓰리 빌보드 (마틴 맥도나, 2017)
플로리다 프로젝트 (션 베이커, 2017)

날씨의 아이 (신카이 마코토, 2019)
씨너스 (라이언 쿠글러, 2025)

 

줄이고 줄이다 영 아쉬워서 두편은 깍두기로 추가한다.


와일드 테일즈 (다미안 시프론, 2014)
스틸 라이프/삼협호인 (가장가, 2006)

이상 긴 리스트 끝. 

제목만 열거하고 끝내려니 뭐라도 한마디씩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순서는 연도순. 순위 아님.

화양연화 (왕가위, 2000)

정말 인생 최고의 순간은 언제 찾아오는 것일까. 내가 지금 최고의 순간에 있다는 것을 그 순간에는 알 수 있을까. 먼 훗날, 지나고 난 뒤 석상의 귀에 대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 뿐이라면, 인생은 너무나 슬픈 것이 아닐까. '유려하다'는 말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슬로모션, 계단을 오르내리는 장만옥의 치파오, 끝까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몇몇 사람들과 반대로 과도하다 싶은 1인 샷들. 내용을 떠나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오래 오래 기억될 것 같다.

그런데 사실 21세기는 2001년부터 시작한다고 한다. 어쩔수 없이 <화양연화>는 제외.

1. 물랑루즈 (바즈 루어만, 2001)

바즈 루어만이 그동안의 영화들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을 모두 쏟아부은, 그의 영화 세계 종합편. 인도 영화인들은 '인도 사람이 만들지는 않았지만 발리우드 영화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것은 마치 '한국인이 제작하지 않은 K-POP'을 연상시킨다)'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고 한다. 모든 장면들이 현란하고 아름답지만 개인적으로 최고의 장면은 탱고와 어우러진 '록산' 신. 데이비드 셔젤이 <바빌론>으로 해보려 했던 것들을 이 영화는 모두 뛰어넘고 있다.


2. 반지의 제왕 트릴로지 (피터 잭슨, 2001)

설명이 필요할까 싶지만, 피터 잭슨은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시기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할 듯. 물론 그가 아니었어도 이렇게 잘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스스로 이야기 속에 폭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그려낸 성과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명배우들이 열연했지만, 이 영화 시리즈에서 딱 한 장면만 뽑으라면 2편에 나오는 '로한의 봉화' 장면. 지금도 빅 스크린에서 이 장면을 보고 온 몸에 소름이 끼쳤던 순간이 생생하다.


3. 시티 오브 갓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2002)

지옥이 있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신이 있다면 이런 도시를 세상에 남겨두어도 좋은 것일까. <시티 오브 갓>을 보면서, 이런 영화를 만드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 가치, 보람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 뒷날, 그가 <두 교황> 같은 영화도 만들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 강렬하고 또 강렬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오고 20여년, 세상은 점점 더 '신의 도시'가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도.


4.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우리는 우리에게 예기치 못한 슬픔과 상실과 분노를 자아내는 힘을 악이라고 부른다. 악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떠난 적이 없었고, 우리는 그것을 기를 쓰고 단죄하려 하지만,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일부이며, 우리는 잠시 그것을 잊으려 노력할 뿐이다. 그런 인간들의 이야기 중 <살인의 추억>은 단연 놀라운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



5. 무간도2 (유위강/맥조휘, 2003)

<대부>가 만들어 진 이후, 범죄집단과 그 가족을 그린 영화로 <대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작품은 없다. <무간도2>는 1편에서 만들어진 인물의 구도(경찰에 잠입한 마피아와 마피아 속에 잠입한 경찰) 위에 <대부>의 가족 플롯을 덮어 씌운 탁월한 작품. 1편도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2편은 그 구도에 그리스 비극의 장중한 운명을 얹은 걸작이다. 물론 그 뒤에는 3편이라는 어이없는 작품이 있어 이 영화를 트릴로지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역대 어떤 홍콩의 갱스터 무비보다 뛰어난 작품.


6. 킬빌 1,2 (퀜틴 타란티노, 2003)

자신이 보고 자란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타란티노의 핏빛 광시곡. 장난기조차도 엄숙하게 연출하는 이 작품을 과연 누가 비웃을 수 있을까.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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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빌, 쿵푸의 스타 데이비드 캐러딘을 조상하다

영원한 '쿵푸'의 스타 데이비드 캐러딘이 73세로 운명했습니다. 1936년생. 4일 방콕의 한 호텔에서 목을 매 사망한 채 발견됐다는군요. 70대에 자살이라니...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로 왕년의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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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올드보이 (박찬욱, 2003)

박찬욱은 항상 죄와 벌을 말한다. 그런데 그 벌은 누가 내리는 것인가. 신이? 신을 대신해서 인간이? 아니면 그냥 인간이 인간의 판단으로? 어떻게 결정하든, 그 벌은 결코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궁금한 것. 과연 오대수의 뒤편에서 흔들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8. 쿵푸허슬 (주성치, 2004)

주성치를 모르는 사람도 없었지만, 영화 좀 본다는 사람 중에 '주성치 영화를 보는 사람'을 비웃지 않는 이도 드물었다. 그러나 <소림축구>와 <쿵푸허슬> 이후에는 이 콧대높은 소위 영화 마니아들은 여래신장 맞은 두꺼비 꼴이 되었다. 순도 높은 주성치 스타일의 루저 주인공에서 깨알같은 전통 무협 장르 패러디까지 완벽한 선물같은 영화. 

 

 


9. 타인의 삶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

모든 영화는 인간이 변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것은, 별다른 원칙 없이 '그저 열심히' 하던 사람에게 변화의 계기가 찾아오는 순간. 동독 비밀경찰의 숨가뿐 기밀 업무 속에서, 하나의 '인간'이 눈을 뜨고,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폰 도너스마르크는 왜 좀 더 많은 작품을 만들어주지 않는 것일까. 이 영화를 보시고 꼭 <작가미상>을 보실 것.

 

10. 렛 미 인 (토마스 알프레드슨, 2008)

'뱀파이어는 주인이 초대하지 않으면 그 집 문턱을 넘지 못한다'는 규칙을 누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 하기에 한국에서도 호랑이는 창귀의 부름에 대답하는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었으니, 이 비슷한 느낌일 수도 있겠다. 사람의 피를 빨아야 살 수 있는 괴물도 청순하고 여릴 수 있다는 뜻밖의 경험. 순백의 눈 위에 그려진 순수의 그림. 아름다운 영화.

클로이 모리츠가 나온 영어판 리메이크(2010)도 좋았는데 왠지 <렛 미 인>을 보면 줄리앙 뒤비비에의 고전 영화 <나의 청춘 마리안느>가 떠오른다. 사춘기, 그리고 영원한 사랑, 이 두개의 키워드 때문에. 

 

 

11. 타짜 (최동훈, 2008)

허영만의 원작은 걸작이 분명했는데, 최동훈이 아니었다면 그 숨결을 이렇게 살려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소재는 도박이지만 분명 이것은 의리와 불의, 성장과 복수의 무협 극화. 검결을 외던 검객들이 그저 화툿장을 손에 쥐었을 뿐. 불행히도 속편들은 <타짜>의 맥을 제대로 잇지는 못했다. 이제 곧 20주년이 되면 시리즈 리부팅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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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짜', 왜 자꾸 '친구'가 어른거릴까

화면을 보면서 한참 생각했습니다. 대체 왜 드라마 '타짜'의 배경이 부산일까, 왜 이 드라마에는 '우정'이라는 말이 이렇게 자주 나올까. 그리고 왜 고니의 패거리는 네 명이고, 원작에 없는 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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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5, 뒷부분은 여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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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첫 25년의 영화 25편 (2)

앞의 글 안 읽고 오신 분들을 위해 리스트만 앞에다 붙인다.기준은 작품성 예술성 모르겠고, 그냥 내가 가장 좋아한, 2001-2025 사이의 영화 25편. 배치는 제작 연도순. 순위 아님. 물랑루즈 (바즈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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