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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폭발적인 관객 동원으로 연말 최고의 화제작이 된 영화 '변호인'을 보고 왔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변호인'은 매우 뜨거운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그 뜨거움이 득이 되는 경우도, 해가 되는 경우도 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극장에서 공개된 뒤에는 그 뜨거움이 영화의 완성도에 앞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변호인'은 매우 상업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거창한 의무감으로 이 영화를 추천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 영화는 송강호의 매력이 살아 있는, 잘 만들어진 휴먼 코미디 영화로 충분히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감동으로 소름이 끼치는 영웅담을 기대하신다면, 다른 영화를 보시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줄거리.

 

상고 출신 변호사 송우석(송강호)은 '돈을 벌기 위해' 판사직을 때려치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합니다. 학벌과 집안 같은 배경이 없던 송우석은 변호사들이 마다하던 부동산 등기 등을 취급하며 승승장구해 이름을 알립니다.

 

세무 변호사로 출세일로를 걷던 우석은 어느날 친하게 지내던 국밥집 아주머니(김영애)의 아들 진우(임시완)가 행방불명됐다는 소식에 도움을 주다 진우의 몸에 있는 고문의 흔적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날부터 그는 서슬이 시퍼런 군사정권 아래서 용공 조작 사건의 변호인을 맡아 인생의 전기를 마련합니다.

 

 

 

 

영화의 전반은 매우 잔잔한 영웅담입니다. 자신의 표현대로 '몸뚱아리 하나밖에' 없던 우석은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부와 명성을 획득한 이 사회의 성공 모델입니다. 당연히 기득권층이고, 사회의 혼란이 그에게 해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자신의 안온한 삶을 버리고(극중 사무장 박동호 역을 맡은 오달수의 대사에도 나옵니다. "송변, 오늘부로 니 편안한 인생, 니가 포기한기다") 누가 봐도 손해뿐인 '민주 투사'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화 '변호인'의 가장 뛰어난 부분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입니다.

 

진우의 고문과 수사라는 것의 실체를 알게 된 우석은 이 영화의 명대사 중 하나를 내뱉습니다. "이러면 안되는 거잖아요." 여기서 '이러면 안된다'의 기준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보편적 상식의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상식'의 기준은 모두 다릅니다. 하지만 소위 민주국가, 선진국이라고 불리고 싶은 나라라면 그 국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선' 이라는 게 분명 존재합니다. 이를테면 한 나라의 국민이 다른 나라 사법 기관에 의해 부당한 처우를 받아선 안된다,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들이 현행범도 아닌데 두들겨맞고 끌려가선 안 된다, 고문 등으로 자백을 강요받아선 안 된다...

 

그러니까 변호사 송우석은 어떤 사상이나 의식에 의해 이 사건의 변호인으로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최소한의 상식' 에 반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나선 것이죠. 그리고 이 부분에서 바로 영화 '변호인'은 많은 관객들 앞에서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고문 경관 차동영(곽도원)입니다. 양우석 감독이 그러낸 차동영은 그저 출세가 목표이거나,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서가 아니라 '빨갱이를 때려잡는다'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생각하는 확신범입니다. 한국 영화에 지금껏 등장했던 대부분의 2차원적 악역들과는 달리, 인물 설계가 입체적입니다. 일제하 고등계 형사였던 차동영의 아버지는 6.25때 - 어째서 피난을 못 갔는지 모르겠지만 - 인민군 혹은 좌익 세력에게 '학살'당한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 결과 차동영은 북한과 공산주의에 대한 철저한 적개심을 갖게 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의 대사인 "나같은 사람이 빨갱이를 청소해주고 있으니까 당신 같은 사람이 발뻗고 잘난체 하며 잘 살 수 있는 거야(죄송합니다. 재현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격투중에도 국기강하식에 예의를 잊지 않는 차동영의 모습은 그의 내면에 있는 '나는 애국자'라는 확신을 보여줍니다.

 

 

 

 

이런 형태의 애국자 캐릭터는 이제는 고전이 되어 가는 영화 '어 퓨 굿맨'의 잭 니콜슨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 보위'의 큰 목표를 위해서는 사소한 악은 눈 감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굳은 신념을 지닌 인물이죠. 단순히 '악'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변호인'은 단순한 흑백 논리의 대립이 아닌, 좀 더 깊은 생각을 요구하는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적'을 상대하기 위해 우리 안의 도덕적 원칙을 얼마나 배신해도 좋으냐 하는 주제를 다룬 영화는 적지 않습니다. 스필버그의 '뮌헨'을 비롯해 캐서린 비글로의 지난해 화제작 '제로 다크 서티'에 이르기까지, 테러와 싸우기 위해선 같은 악마가 되어도 좋으냐는 '상식'의 문제는 현대 사회의 가장 큰 고민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변호인'은 그에 대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차동영에 대한 더 깊은 묘사는 없습니다.

 

고전 영화 '케인호의 반란'을 리메이크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1988년작 '케인 호의 반란'은 원작에서 그저 함장의 권력에 집착한 미치광이로만 묘사됐던 퀵 선장에 대해 색다른 해석을 제시합니다. 변호인인 바니가 이런 말을 하죠. "그래도 우리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에 가지 않게 해 준건 퀵 선장 같은 사람이 독일과 싸워 준 덕분이야. 그래서 난 이 재판에 대해 수치심을 느껴." 뭐 할 얘기는 많지만 이 얘기는 여기까지만.)

 

 

 

 

영화 전편을 통해 가장 빛나는 인물은 당연히 송강호입니다. 속물에서 소신을 가진 인물로 거듭나는 변호사 송우석. 이 캐릭터가 빛을 발하는 것은 역시 송강호라는 명배우에 의해 그 인물이 구현됐기 때문이라는 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또 '송우석의 변화' 그래프가 관객에게도 자연스러운 곡선으로 느껴지는 것은 물론 양우석 감독의 솜씨일 것입니다.

 

그밖에 꼼꼼한 80년대 초반의 그림, '보통 사람'으로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뽑아먹는 오달수, 몇 장면 안 나오지만 존재감은 기대 이상인 이성민 등이 모두 탄탄한 그림을 그려냅니다. 결론적으로 '변호인'은 올해 한국 영화가 낳은 마지막 화제작으로 추천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영화입니다.

 

 

 

 

다만 몇몇 부분의 완성도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일단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약간 어정쩡한 스탠스의 문제입니다. 이 영화는 첫 자막과 마지막 자막이 모순 관계라는 흥미로운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특정 인물의 전기 영화가 아니라 어느 정도 픽션임'을 알리는 자막으로 시작하지만, 끝날 때에는 '실제 일어난 일을 재현한 장면'임을 알리는 자막이 올라옵니다('부산 지역 변호사 142명 중...'으로 시작하는 자막 말입니다).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선 이 영화가 둘 중 어떤 노선을 선택하고 있는가를 좀 더 분명히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차도영을 증인석에 앉힌 송우석의 모습은 그때까지 지켜져 온 영화의 룰, '이 영화는 리얼리티를 살린 실제 사회의 물리 법칙을 따른다'는 설정을 한방에 날려 버립니다. 갑자기 영화의 성격이 달라져 버린다고나 할까요. 옆 자리에 앉은 동료 변호사의 한마디는 관객의 심정을 대변해 주기도 합니다. "그럼 *, ****** 라고 할 줄 알았나?"

 

호오가 엇갈리는 마지막 장면에 대해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싶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스탠리 큐브릭의 '스파르타쿠스'를 떠올렸습니다. 다만 이 장면에서, 변호사들 역을 맡은 단역배우들이 미숙한 연기로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오점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문득 "'살인의 추억'에서는 논바닥의 시체도 등으로 연기를 한다"는 과거의 표현이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가 '정치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참 안습입니다.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서 분명히 말하자면, 그 시절 대학가 운동권 세력 가운데에는 분명 '용공'의 선을 넘어 북한의 주의 주장에 동조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네. 당시의 시국 관련 사건으로 조사받거나 처벌받은 사람들이 모두 억울한 피해자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몇몇 사건의 경우 이 영화와 비슷한 불법적 고문과 폭행이 자행됐고, 그로 인해 억울하게 인생을 망가뜨린 피해자 꽤 많이 있었습니다. 이 선에서 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처럼 맴도는 한,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엔 절대 도달하지 못합니다.  

 

위에서도 말했듯 이 영화가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무려 30년도 넘은 옛날, '상식이 통하지 않던 시절에 상식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묘하게도 자꾸 이 영화가 어딘가 당금의 현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그건 이 영화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의 문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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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미술관의 미로같은 내부를 헤매다 보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방에 도달한다.

 

유명한 '메이 웨스트의 방 Mae West Room'. 메이 웨스트(1893~1980)는 흑백영화시대 할리우드의 유명 여배우. 1920~30년대의 섹스 심벌이다. 실제 발음은 분명 '메이' 인데, 많은 한국인들이 Mae라는 철자 때문에 이 배우를 '매 웨스트'라고 부른다. 뭐 일본에선 '마에 웨스트'라고 부를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보면 의도가 보이긴 하지만 그냥 방이다. 도시 풍경을 찍은 흑백 사진 작품이 벽에 걸려 있고, 약간 코믹하게 생긴 벽난로가 있다. 마지막으로 입술 모양의 소파가 놓였다.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그 방을 입술 각도에서 바라본다. 물론 전체를 조망하는 큰 돋보기 앞에는 거대한 금발 모양의 가발이 걸려 있다. 사실 줄이 너무 길어서 직접 돋보기를 통해 들여다 보는 건 포기하고, 달리가 의도한 형상을 찍어 왔다. 그러니까 위 광경이 이렇게 보이도록 하는게 달리의 의도였다. 

 

 

 

 

메이 웨스트의 실제 모습. 아마도 이 사진을 모델로 한 듯 한데, 달리의 시도에 대해 웨스트 본인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을까.

 

 

 

달리 극장미술관의 한 전시관은 이 미술관의 공동 설계자이며 달리 사후 관장을 지낸 화가 안토니 피초트(피쇼트라고 읽을 수도) Antoni Pitxot에게 헌정되어 있다. 그의 작품세계는 모든 세상을 저 색색깔의 조약돌로 환원시켰다는 데 있다. 해설에 따르면 그는 일단 조약돌로 자기가 원하는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다시 그걸 유화로 그리기를 즐겼다고.

 

...달리와 어울렸다니 뭐 일단 그것부터 정상인은 아니다.

 

 

가장 유명한 이 그림의 제목은 '기억의 우화 Allegory of the memory'. 이 그림의 변형만도 수십종이다. 아마도 기본 형태는 루벤스의 '삼미신(三美神) Three Graces'을 돌멩이로 재구성한 듯한 느낌이다.

 

 

 

이 유명한 그림 말이다. 물론 루벤스 시대의 취향에 따라 좀 굵으시긴 하다. 이 그림의 원본은 며칠 뒤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서 영접하게 된다. 아무튼 화면에 있는 세 여성 형상의 구도로 보아 이 그림을 변형시킨 것으로 느껴진다.

 

 

혹은 오른쪽에 남자로 보이는 형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루벤스의 또 다른 그림, '파리스의 선택 Judgement of Paris'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헤라, 아테네, 아프로디테의 세 여신이 셋 중 누가 가장 아름다운 여신인가를 놓고 파리스에게 판정을 요구한 그리스 신화의 유명한 광경이다. 여기서 파리스가 아프로디테를 선택하고, 그 댓가로 헬레네를 요구하면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유럽의 유명 미술관에 가서 시간낭비를 하지 않으려면 두 권의 책은 꼭 읽어야 한다. 바로 그리스 신화와 성경이다. 인상파 이전의 수많은 거장들이 그린 그림 중 80% 정도는 성경과 그리스 신화의 드라마틱한 장면들이다. 어느 정도나 보면 되냐고? 위 그림을 보고 투구와 방패가 있는 여자(아테네), 날개달린 꼬마 에로스를 거느린 여자(아프로디테), 공작을 거느린 여자(헤라), 유명한 지팡이 카듀케우스 Caduceus 를 들고 날개 달린 샌들을 신은 남자(헤르메스), 그리고 목동 형상을 하고 누구에게 사과를 줄까 고민하고 있는 남자(파리스)를 알아볼 수 있는 정도면 웬만한 그림은 즐기면서 읽을 수 있다.

 

(물론 이 정도면 다 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만 이런 걸 알 수 있는 눈과 그렇지 않은 눈으로 루브르나 프라도, 우피치, 내셔널 갤러리 같은 유럽 굴지의 미술관을 갔을 때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의 크기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얘기다. 어찌 보면 '최소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심지어 초현실주의의 거장, 달리의 극장 미술관에서도 고전에 대한 이해는 분명히 필요하다. 여담 끝.

 

 

 

이 달리 미술관은 엄청나게 규모가 큰 미술관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구석 하나 빈 곳이 없다. 어디 한 군데라도 눈이 스칠 곳이 있으면, 그곳이 작품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구경할 수 있는 동선 역시 공간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짜여졌다.

 

 

 

제목도 알 수 없는 소품 하나. 반쯤 비치는 조명을 통해 '에일리언'에 나올 법한 형상이 슬쩍 드러나 보인다. 그냥 드러나 있다면 별 특이한 점이 없었겠지만, 이렇게 장막을 통해 보여주면서 호기심과 공포감을 극대화시킨다.

 

 

 

공들인 대작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소품들도 즐비하다. 뭘 그렸는지 가장 궁금했던 그림. 메두사일까, 밥 말리일까.^^

 

 

 

그리고 매우 드문 생활형 그림. 갈라를 그리고 있는 달리 자신의 자화상(?)

 

전시실을 돌다 보면 바람의 궁전 Palace of Wind 이라는 매우 인상적인 방에 들어가게 된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연상시키는 웅대한 규모의 천정화가 일단 방문자를 압도한다.

 

 

 

도록 버전으로 빌려오면 이렇다. 물론 구상은 웅대하지만 내용은 코믹하다. 양쪽의 거상은 당연히 달리와 갈라(오른쪽 파란 바지 입은 사람의 콧수염을 주목하라^^). 양쪽 가장자리와 사방에는 숲속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는 갈라와 달리, 그리고 피게레스에 내리는 금화의 비 등 얼핏 봤을 때 중세 종교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의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장난스러운 내용이 그려져 있다.

 

 

 

 

이 바람의 궁전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조각. 위쪽은 메두사의 머리를 높이 든 페르세우스, 그리고 아래 쪽은 십자가 없는 예수다.

 

 

그리고 그 조각 아래의 받침대는 니케 여신상을 거울로 반사해 양쪽 날개를 모두 갖게 한 형상이 뒤집힌 모습이다.

 

...이미지의 폭격은 끝없이 이어진다.

 

 

 

 

바람의 궁전 한켠에 설치된 스튜디오. 유명한 '기억의 집착'이 태피스트리 버전으로 걸려 있다.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서재처럼 꾸며진 스튜디오. 가구에서는 가우디의 느낌이 나기도 한다.

 

 

 

갑자기 다른 화가의 그림이 보인다. 부게로 Bouguereau 의 그림이나,

 

 

 

달리에게 누구보다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거론되는 엘 그레코 El Greco의 작품.

 

 

 

바람의 궁전 한켠의 작품. 방 하나가 궁극의 여성성을 설명하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건 위에 소개한 부게로의 그림과 미국 조각가 존 디 안드레아 John De Andrea의 이 작품. 존 디 안드레아는 실제 사람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하이퍼리얼한 누드 상(이라고 쓰고 마네킹이라고 읽어도 좋을 듯. 주 사용 제료가 '폴리에스터'다)을 즐겨 작품으로 내놓고 있다. 

 

 

 

미켈란젤로의 모세 위에 문어 한마리가 버티고 있는 이 작품의 제목은 모세와 일신교 Moses and Monotheism. 이런 작품이 꽤 많은데, 이걸 어디까지 달리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지도 조금 의문이긴 하다. 

 

아무튼 박물관 구경도 막바지를 넘어섰는데,

 

 

이번 방문에서 또 하나 큰 충격을 받은 작품이라면 바로 이 작품. '사이버 공주 Cybernetic Princess'. 물론 이 작품에도 해설 같은 건 전혀 없다. 그냥 제목만 간신히 알 수 있을 정도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작품은 그냥 갑옷을 입은 로보트처럼 보인다. 발바닥이며 온 몸에 회로도나 기판 같이 생긴 것이 새겨져 있어 제목과 뭔가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왜 이 작품의 제목이 '사이버 공주'일까.

 

중국이 자랑하는 한나라 때 유물 중에 금루옥의(金縷玉衣)라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것. 모르는 사람은 이게 달리의 작품인 줄 알 정도로 외양은 똑같다.

(물론 잘 보면 남성용과 여성용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달리의 작품은 당연히 여성용. 이 사진은 남성용.^^)

 

2000여장의 작은 옥판을 금실로 이어 붙여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옷을 만든 것이다. 당연히 산 사람이 입을 수는 없고, 죽은 뒤에 입는 수의다. 중국 한(漢)대에는 옥의 찬 기운과 금의 녹슬지 않는 기운이 사람의 시신을 썩지 않게 보관해 준다고 믿었고, 이런 수의를 입으면 언젠가 다시 살아나 영생불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이 금루옥의의 주인은 한나라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中山靖王 劉勝)과 그의 아내인 두관(竇琯)이다. 경제는 열 세명의 아들을 왕으로 봉했는데 유승은 그중 중산국의 왕이 되었고, 정(靖)이란 시호를 받아 중산정왕이라 불린다. 1968년에서야 중국 하북성 능산(凌山)에서 발굴된 뒤 전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개인적으로 이 금루옥의를 처음 본 것은 국내에 개봉됐던 허관걸 주연 영화 '미스터 부'를 통해서였다(확인해 보니 이 영화는 미스터 부 시리즈 4편, '마등보표'였다^^). 물론 그 옷이 세계적인 보물이라는 걸 알게 된 건 한참 나중의 일이지만.

 

 

 

 

(여담이지만 '중산정왕 유승'이라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 한 분들이 꽤 있을 거다. 그렇다. 유비가 자신의 조상으로 꼽는 한나라의 황족이다. 유승은 무려 42년간이나 중산국의 왕으로 있으면서 부귀와 향락이 하늘에 달해 딸 아들 합해 120명을 두었다는, 한나라 때 '좋은 팔자'의 대명사처럼 불렸던 사람이다. 중산국은 유비가 살던 탁군 바로 옆이고, 그 수많은 아들들이 다 자손을 뿌렸을테니 후손 가운데 짚신 장수 하나 쯤 있다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뭐 그건 그렇고.)

 

아무튼 저 금루옥의를 이역 만리 스페인 피게레스에서, 그것도 달리의 작품 속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새삼 감개가 무량.

 

 

 

 

 

 

 

2층의 휴게공간에서 눈길을 쓰는 사이프러스 소나무. 달리 미술관답게 나무 하나도 예사롭지 않다. 초자연적으로 보인다.

 

 

 

 

 

 

아쉬운 마음으로 미술관을 나섰다.

 

피게레스에서 1박 이상 할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당일 여행을 온 사람들은 시간 관리에도 신경을 좀 써야 한다.

 

소요시간은 AVE라서 얼마 안 걸리지만, 배차가 2시간에 한대 꼴이다. 미리 차 시간을 확인하지 않으면 역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시내에서 역으로 들어가는 것도 그냥 되지는 않는다. 일단 관광안내소를 찾아 확인하는 것이 가장 좋다.

 

'가까운데 뭐 택시 타고 들어가면 되지'라고 생각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워낙 좁은 촌동네라 다운타운(스페인 도시들의 다운타운은 Gran Via라고 누차 얘기했다)으로 가지 않으면 택시 구경을 할 수가 없다. 달리 미술관을 관람하고, 피게레스 시내 구경을 마쳤다면 첫째 그란비아를 찾아 택시를 타거나, 둘째 버스 정류장 위치와 배차시간을 정확하게 확인하는게 상책이다. 버스도 2013년 10월 기준 배차 간격이 약 30분 정도이므로, 여차하면 기차를 놓칠 수도 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다시 바르셀로나로. 저녁에는 바르셀로네타 해변에서 해산물을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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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에르자 부르타. 2013. 12. 15. 잠실 종합운동장 FB빅탑시어터

 

Fuerza Bruta - '잔혹한 힘(Brutal Force)'이라는 뜻. 상상력의 한계는 없음을 느끼게 하는 놀라운 퍼포먼스.

 

('푸에르자 브루타'라고 읽어야 정상이겠으나 공연의 한글 공식 표기가 '푸에르자 부르타' 네요.^^

 간혹 '푸에르타 브루자'라는 표기도 드문드문 등장. 푸에르타 델 솔의 영향인가요...)

 

 

 

 

 

 

 

 

 

 

 

 

 

 

 

 

 

 

 

 

 

 

 

 

아크릴 판 같은 재질의 공중 무대 위에서 물과 여성 무용수들의 공연이 펼쳐진다.

 

아크릴 위의 수증기. 미세한 흠, 물의 무늬, 물방울, 물결... 빛의 굴절을 가져오는 모든 것이 도구다. 자연스럽게 물의 무게에 따라 아크릴 판(혹은 두꺼운 비닐?) 중심부가 아래로 늘어지며 물이 고인다.

 

그곳이 수조 역할을 하고, 무대는 천천히 관객들의 머리 바로 위까지 내려온다.

 

 

 

 

 

 

 

 

 

 

 

 

 

 

 

 

 

공연자들은 자연스럽게 밑의 관객들과 컨택트를 시도하고, 카메라를 보고 웃어주기도 한다.

 

지금까지 상상해 보지 못한 각도의 상상해 보지 못한 볼거리다.

 

 

 

 

 

 

 

딱 20년만 젊었으면 미친듯이 같이 뛰고 놀 것을, 하는 생각이 드는 공연.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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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빗:스마우그의 폐허]

 

'호빗:스마우그의 폐허'는 '호빗' 시리즈 2탄입니다. 일단 줄거리부터 시작합니다.

 

1편에서 간신히 오크들의 추격을 뿌리친 소린(리처드 아미티지)과 난쟁이들, 그리고 빌보(마틴 프리먼)는 목적지 외로운산으로 가기 위해 어두운 숲을 가로지르는 여정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시 위기에 빠지고, 숲속 요정들에게 구원을 받았다가 다시 요정들의 감옥에 갇혔다가, 간신히 빠져나와 인간들이 사는 호수 마을, 에스가로스까지 가게 됩니다. 여전히 오크들은 이들을 뒤쫓고 있습니다.

 

호수 마을의 민중 지도자 바르드(루크 에반스)는 난쟁이들이 예레보르의 옛 성으로 가 보물을 노릴 경우 스마우그의 분노를 사 마을에 피해가 올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마을 영주와 대다수 주민들은 난쟁이들이 찾은 보물을 나눠 가질 생각에 이들을 환영하며, 물자를 주어 외로운산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이들은 당연히...성에서 보물의 산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용 스마우그를 만납니다.

 

호빗 1편, '호빗: 뜻밖의 여정'에 대한 내용은 이쪽:  http://fivecard.joins.com/1086

 

 

 

 

속편이 있는 영화들이 대부분 숫자로 불리는 데 비해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연작들은 독자적인 제목을 부각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큰 의미를 갖습니다. 여기에 가장 근접했다고 할 수 있는 '스타워즈' 시리즈도 '제국의 역습'이나 '돌아온 제다이', '보이지 않는 위협' 같은 제목들이 꽤 인식되긴 했지만 그래도 압도적으로 '에피소드 1~6'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죠. 하지만 '두개의 탑'이나 '왕의 귀환'을 '반지2'나 '반지3'으로 부르는 사람은 거의 못 봤습니다. 그만치 각 에피소드의 독립성 면에서는 괄목할만한 업적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도 1편의 부제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죠.^^ '반지의 제왕' 첫편은 '반지원정대'라는 제목 대신 그냥 '반지의 제왕'이라고 불리고, '스타워즈'도 '에피소드4'는 '새로운 희망'이라는 제목 대신 그냥 '에피소드4'나 아예 '스타워즈'로 불리곤 합니다. 이것도 흥미로운 특징입니다.)

 

'호빗' 시리즈 역시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1편의 부제가 '뜻밖의 여정'이라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냥 '호빗'이거나 '호빗 1편' 정도로 통하고 있죠. 거기에 비하면 '스마우그의 폐허'는 꽤 알려진 제목이 될 듯 합니다만, 블록버스터 사상 이 영화만큼 독특한 2편도 아마 없을 듯 합니다. 이런 대작 영화 시리즈 가운데 이렇게 '야심이라곤 없는' 소박한 2편은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면, 흔히 3부작으로 알려진 수많은 영화 가운데, 처음부터 '이건 3부작이 아니면 안돼'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영화는 거의 없다는 점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대부3'? '대부'나 '대부2'가 만들어질 때만 해도 계획에 없던 작품입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무법자' 시리즈?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미 3편이 넘어갔지만 '터미네이터'나 '인디애나 존스'도 마찬가지. 즉 이들 영화들은 모두 2편 째가 확실히 성공하지 않았다면 3편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작품들입니다.

 

'반지의 제왕'은 확실히 처음부터 3부작으로 기획된 작품이었지만 이 역시도 2편째인 '두개의 탑'이 참혹하게 무너졌다면 3편은 그냥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 만큼, '두개의 탑'은 그 자체로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고, 장대한 클라이막스가 있습니다. 인간-요정 연합군과 오크 군대가 대규모로 격돌하는 헬름 협곡의 대전투는 로만 군대의 멋진 돌격과 함께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비록 실제 전투에서 가능한 양상과는 정 반대의 이상한 싸움이긴 하지만, 어쨌든 '두개의 탑'의 이 전투 신은 많은 사람들이 '왕의 귀환'에 나오는 미나스 티리스 수성전, 즉 펠레노르 평원의 대전투보다 더 좋아하는 명장면이기도 합니다.

 

요약하면, '두개의 탑'은 2편만 떼 놓아도 훌륭한 하나의 상품이 될 수 있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스마우그의 폐허'는 그만한 야심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것은 아주, 정말, 매우, 명백히 1편과 3편을 이어 주는 허리 기능 뿐입니다. 1편은 난쟁이들과 빌보가 어떻게 만나는지, 그리고 고블린이나 오크들과 이번엔 어떤 액션을 펼치는지, 난쟁이들의 캐릭터는 어떤지, 간달프를 비롯한 1편 출연진들은 얼마나 변했는지(엄밀히 말하면 '옛날엔 어땠는지')를 보여주는 미덕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에 나올 3편에선, 바르드와 인간들이 어떻게 스마우그와 싸우는지, 그리고 대규모로 집결한 고블린 및 오크 군대와 인간-요정-난쟁이 연합군이 어떻게 싸우는지가 화려한 볼거리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비해 2편엔 정말 들어간 재료가 별 게 없습니다.^^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가 새롭게 보여주는 거라곤 아르웬의 공백을 메울(?) 새로운 엘프 타우리엘(에반젤린 릴리)과 인간 영웅 바르드의 등장, 그리고 이미 검증된 카드인 레골라스의 재등장 정도입니다. 액션으로도 나무통을 타고 가는 급류타기 놀이 정도? 물론 이 영화에서 가장 힘을 준 부분은 성 안에서 잠자고 있던 거대한 용 스마우그(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목소리라고 미리 가르쳐주지 않으면 절대 알아차릴 수 없는 목소리^^)의 등장이긴 합니다.

 

 

 

수많은 동화판 '호빗'의 삽화가들이 이런 모습으로 상상했던 스마우그를 '드디어' 공개하는 장면인 것이죠. 하지만 이미 스필버그의 '주라기 공원'에서 심형래의 '용가리'까지 수많은 용과 괴물들을 보아 온 관객들에게 이 스마우그의 모습이 - 아, 물론 대단히 멋지긴 하지만 - 기절할 정도로 놀라운 장면일 리는 없겠죠.

 

 

 

아마도 이 '스마우그의 폐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이 장면, 그러니까 거대한 보물의 산 속에서 잠자고 있던 스마우그가 스르르 눈을 뜨고 그 사악함과 강대함을 단번에 드러내는 장면일 듯 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반지의 제왕' 연작을 5편째 보고 있는 관객이 이 정도로 만족할 리는 당연히 없고, 피터 잭슨과 그 휘하의 선수들 역시 그럴 리는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을 상황입니다. 만약 이 2편만으로 독립된 만족감을 주려 했다면, 2편은 스마우그가 호수 마을로 날아가서 인간들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그 다음에 ******** 되는 (스포일러 생략) 내용까지를 커버했어야 했을 겁니다.

 

그런데 피터 잭슨은 그렇게 하지 않고, 스마우그의 공격과 마지막 대결전을 3편에 모두 몰아넣었습니다. 이건 정말 영화 사상 보기 힘든 자신감입니다. 그런 볼거리 없이도 관객을 극장으로 끌고 올 수 있다는, 그리고 '호빗'을 봤다고 얘기하려면 1,2,3편을 다 봐야 한다는, 세 편 중에서 재미있는 두 편만 골라 볼 수는 없을 거라는 자신감인 것이죠. 이런 자신감을 갖고 2편을 만든 감독은 아마도 피터 잭슨 이전엔 없었을 겁니다.

 

(물론 제작 일정이 촉박해서 도저히 여기까지밖에 만들 수 없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런 경우라면 대개의 영화들은 차라리 개봉 시기를 늦춥니다. 그러지 않고 2편은 그냥 '2013년 크리스마스'에 풀겠다는 결정은 어지간해선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죠.)

 

 

 

 

아, 물론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눈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스마우그의 폐허'는 그 자체로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피터 잭슨과 이 시리즈의 팬이라면 그가 이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이해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봐, 어차피 끝까지 다 볼 거잖아. 그러니까 2편 하나가 재미있네 재미없네, 실망이네 아니네 하는 투정은 집어 치워. 그리고 2편이 헐거워 진 대신, 3편에서 다 보충해 주겠어. 알았지? 삐지지 마."

 

 

 

P.S.1. 누가 봐도 춥고, 습기차고, 정말 살기 힘들 것 같은 북유럽 풍의 호수마을. 이 미술팀은 정말 최곱니다.

 

P.S.2. 이번엔 HFR로 보지 않고 그냥 2D로 봤기 때문에 지난번 '호빗: 뜻밖의 여정' 때와 같은 이질감 - 야외 신인데도 세트처럼 보이는 이상한 비현실감 - 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도 HFR로 보신 분들은 그 사이 좀 적응이 되셨는지, 아니면 이번에도 이상했는지 궁금합니다.

 

P.S.3. '호빗'과 사우론을 연결시키려는 노력은 글쎄...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호빗'과 '반지의 제왕'이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을 모를 관객이 과연 있을까요. '호빗' 때 이미 사우론의 재림이 노출됐다면, 간달프와 엘론드, 갈라드리엘 같은 지도자들이 그 긴 세월 동안 아무런 대비 없이 세월을 허송하고 있었다는 게 더욱 한심해지지 말입니다.

 

P.S.4. 강대한 힘을 가진 스마우그와 사우론은 어떤 관계일까요? 같은 편? 서로 인정하는 사이? ^^

 

 

 

P.S.5. 레골라스를 보니 더욱 아라곤과 아르웬이 그리워집니다. 김리는 뭐, 이제 구별도 잘 안되고... 킬리와 타우리엘의 관계를 보면 역시 킬리는 드워프계의 허경환이었다는 점이 분명해집니다. "이만큼 생겼으면 키는 좀 작아도 되잖아!"^^

 

마지막 사진은 스포일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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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를 간다면 반드시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곳이 바로 인근의 도시 피게레스 Figueres 였다. 이유는 단 한가지.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화가 살바도르 달리 Salvador Dali 의 고향이며 달리가 직접 구상한 달리 극장 미술관 Theatro-Museo Dali 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달리에 대한 외경은 아주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아마도 달리라는 화가를 가장 먼저 기억하게 된 그림은 누구나 다 아는 '기억의 집착'이었지만  그 그림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 피카소 이후의 화가들은 전부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중학생 시절의 어느날, 친척집에 있는 꽤 큰 화집에서 놀라운 그림 하나를 보게 됐다. 바로 이 그림이었다.

 

 

이른바 '최후의 만찬의 성사(聖事)'라는 1955년작. 두 페이지를 펼쳐 소개된 이 그림을 보고 단번에 빠져들었다. 당시의 소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 현대 화가 중에도 이렇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 웅대한 구도와 구상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소견으로는 인류 역사에 남을 걸작이라는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보다 이 그림이 훨씬 더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리고 이건 새로운 발견이었다.

 

대학 진학 후에는 프랑스 광고계의 거물 자크 세겔라 Jacques Séguéla 가 쓴 '광고에 미친 사나이' 라는 책에서 우연히 달리와의 일화를 접하게 됐다. 세겔라가 고급 빌라의 광고를 맡으면서, 빌라의 프리미엄 이미지를 위해 달리를 광고 모델로 기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난 뒤 벌어진 에피소드였다. 상당히 긴 내용이라 여기 소개하기는 그렇지만, 아무튼 달리라는 사람이 작품 만큼이나 기괴한 사람(을 넘어 사실상 정신병자)이라고 느끼기엔 충분했다.

 

가장 최근 접했던 달리와 관련된 문건은 스탠 로리센스의 책 '달리와 나' 였다. 지금도 이 책의 황당무계한 내용이 어느 정도 소설이고 어느 정도 실제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접한 달리의 일화, 그리고 지금도 시장에 달리의 그림이 비정상적으로 많다는 것, 마지막으로 비슷한 시기에 읽은 리처드 폴스키의 책 '앤디 워홀 손안에 넣기' 에 나오는 현대 미술 시장과 컬렉터들의 행동 양식에 비쳐 볼 때 상당 부분은 사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달리와 나'를 읽은 뒤 피게레스에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역시, 또다시 그 꿈이 이뤄지는 날이 왔다. 

 

 

 

바르셀로나(지도 아래 A)에서 피게레스(지도 위쪽 B)로 가는 길은 북동쪽, 그러니까 프랑스와의 국경으로 가는 길이다. 피게레스에서 조금만 더 가면 프랑스 땅이다. 피게레스에서 동쪽으로 죽 간 해변의 #표시가 있는 곳이 카다케스 Cadaques. 발리가 들르곤 했다는 바닷가 어촌 마을인데 달리 마니아들 뿐만 아니라 호젓한 지중해 어촌의 정취를 느끼고 싶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들었다.

 

내친 김에 바르셀로나 교외에서 사람들이 많는이 찾는 곳이 몬세라트 Montserrat 와 기로나 Girona 다. 일단 기로나는 위 지도에서 피게레스로 가는 길 중간에 '헤로나'라고 표시된 곳이다. 거의 모든 관광 책자와 자료에 '히로나'라고 되어 있는데, 기차 안에서 안내 방송을 할 때에는 분명히 '기로나'라고 했다. 현지인들도 '기로나'라고 한다.

 

아무튼 바르셀로나를 가게 되면 암벽과 수도원이 유명한 몬세라트(위 지도에서 바르셀로나 북서쪽, C-16 사인 옆의 빨간 동그라미 표시), 중세 성곽 도시의 원형이 잘 보존됐다는 기로나, 그리고 달리 미술관이 있는 피게레스 중 하나 정도는 가 보게 된다. 어디를 선택하느냐는 시간의 문제.

 

가까운 거리와 경관을 좋아한다면 몬세라트, 중세 도시의 정취가 그리우면 기로나라고들 한다(둘 다 안 가봤으므로 길게 할 말은 없다). 그리고 미술에 별 관심 없는 사람이라도 피게레스를 선택한다면 후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르셀로나-피게레스는 약 140Km 거리. 예전에는 바르셀로나의 중앙역인 산츠 역 Sants Estacio 에서 피게레스까지 두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달리면 도착할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고속전철 AVE가 개통됐다. 단 문제는 AVE로 닿는 역은 시 외곽에 새로 지은 피게레스-빌레판트 Figueres-Vilafant(우리나라로 치자면 대략 천안아산역 같은 경우) 역이라는 점이다.

 

작은 시내 복판에 있던 구 피게레스 역과는 달리 이 역은 지도상으로 2Km 정도 외곽에 있다. 그깟 2Km라고 코웃음 치실 분도 있겠지만, 막상 걷자면 텅 빈 언덕과 벌판을 거쳐 30분 정도는 잡아야 할 거리였다. 차량 이동을 권한다.

 

버스를 이용하면 대략 피게레스 관광안내소 근처에서 내리게 된다. 불행히도 시내 표지판은 엉망이라 중간에 길을 묻지 않을 수 없는데, 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너무나 좁은 동네라 어떻게 하든 달리 미술관에 닿게 되어 있다. (그리고 길 묻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단 노인에겐 절대 물으면 안 된다.^^)

 

이내 달리 미술관의 위용이 모습을 드러낸다. 빨간 건물 위의 금색 조상과 달걀의 기괴한 조화가 눈길을 끈다.

 

...근데 왠지 멋져.

 

 

여기서 또 한번, 피게레스의 성당 종탑이 보이는 골목으로 꺾어진다.

 

 

그리고 나서 전혀 이런 게 있을 것 같지 않은 골목 안. 입구가 나타난다.

 

 

정면의 달걀머리 마네킹 같은 형상은 카탈루냐의 철학자 프란세스코 푸욜 Francesc Fujol 에게 헌정된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도 멋져.

 

 

구형 잠수복과 황금으로 된 바게트 빵을 든 자와 Jawa(스타워즈 IV의 사막 부족) 같은 형상이 나란히 선 기괴함.

 

...역시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왠지 멋지다고.

 

표를 사서 입장하고 나면 작은 뜰이 나타나고, 정면의 기이한 형상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원형의 작은 정원이 있고, 한복판에는 캐딜락 한 대. 그리고 캐딜락 위에는 고대 원시인들의 비너스 여신상을 연상시키는 여자 조각상이, 그 뒤에는 타이어로 만든 탑이 우뚝 서 있다.

 

이것이 표를 끊고 중정으로 들어선 관람객의 눈에 가장 먼저 띄는 광경이다.

 

 

 

탑 위에는 뜬금없이 배 한 척. 그리고 배의 마스트 끝에는 검은 색 우산이 매달렸다.

 

이 정원을 둥근 벽이 둘러싸고 있고, 벽에 난 창에서 금색 마네킹들이 환영하듯 손을 흔든다.

 

 

 

여성상의 이름은 '에스더 여왕 Queen Esther'. 오스트리아 조각가 에른스트 푹스 Ernst Fuchs 의 작품이다.

 

에스더 여왕은 구약성서에서 페르시아 왕에게 시집간 유태인 처녀로서, 이스라엘 지역을 점령한 페르시아 중신들에 의해 유태인이 몰살당할 위기에 놓이자 목숨을 걸고 남편인 왕에게 간청해 동족들의 생명을 구한 인물이다.

 

 

 

물론 그 에스더와 이 조각상이 대체 무슨 관련인지는 알 길이 없다. 오히려 구석기 유물인 빌렌도르프의 관능미 넘치는 비너스 Venus of Willendorf, 혹은 아스타르트나 이슈타르 여신상이 떠오를 뿐이다.

 

 

 

 

뭐 이런거 말이지.... 아무튼 뭔가 멋지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이 에스더 여왕상은 쇠사슬을 통해 뒤의 타이어 탑과 연결되어 있다. 타이어 탑은 달리 스스로 로마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기둥을 복제한 것이라고 한다. 하필 왜 트라야누스의 기둥일까. 이유는 트라야누스가 스페인에서 태어난 로마 황제이기 때문이라고.

 

육로를 기준으로 생각하면 스페인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를 거쳐야 갈 수 있는 땅이다. 게다가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한다. 하지만 고울 지방(지금의 프랑스)보다 히스파니올라(당연히 스페인) 훨씬 더 먼저 로마의 영토로 편입됐다. 로마인은 기본적으로 바다의 민족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중해 연안을 죽 훑어내려가며 북아프리카에서 그리스, 소아시아를 죄다 장악하고 지중해를 자신들의 수족관으로 만든 뒤에야 비로소 북으로 알프스를 넘어 중부 유럽으로 진출했다.

 

이러니 뱃길로 지중해를 건너 바로 도착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는 로마 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도시였다. 게다가 이베리아 반도의 끝에는 '길만 건너면 아프리카'인 지브롤터가 있다. 지중해 장악을 위해선 필수적으로 보유해야 할 곳이다.

 

...또 삼천포로 빠졌다. 아무튼 그래서 '트라야누스의 기둥'의 타이어 버전이 여기 있는 거라고 한다. 

 

 

 

그리고 그 뒤, 아치 모양의 거대한 격자창 너머로는 달리가 메트로폴리탄 발레 '라비린스'에 사용했던 거대한 무대 배경막이 걸려 있다. 이 배경막을 통해 왜 이 이상야릇한 전시장을 '극장 미술관 Theatre-Museo' 라고 이름붙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여왕상(왠지 자꾸 여신상이라고 부르고 싶어진다)의 뒤쪽에서 보면 그 벽을 장식하고 있는 기괴한 조각상들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구도는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고 흐르는 음악은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신화적인 느낌이 신비로운 맛을 더한다.

 

 

 

 

정원을 지나 들어간 박물관 메인 건물 1층. 건물 밖에서 보던 바로 그 돔(cupola)이 있는 부분이다.

 

정원에서부터 1층까지, 쉴새없이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이 상상 이상이고, 의미를 부여하자면 끝이 없다. 쏟아지는 이미지의 폭격이라고나 할까. 거대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이 그야말로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어때, 이래도 인정 안 할래?'하는 달리의 오만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느낌이다.

 

 

 

쿠폴라 아래로 들어와 정원을 바라보고 좌우 벽에는 거대한 그림이 각각 걸려 있다. 그중 오른쪽 그림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좋아하는 그림이다. 바로 '환각을 일으키는 투우사 The Hallucinogenic Toreador'. 어디선가는 '투우사의 환상'이라는 제목으로도 소개된 그림이다.

 

그런데 원본은 아니라고 한다. 원본은 미국 플로리다주 세인트 피터스버그(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가 아니다^^)에 있는 달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2층에 유명한 '링컨의 얼굴' 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 작품의 제목은 '18미터 밖에서 보면 링컨의 얼굴인, 해변을 바라보는 갈라의 누드 Gala nude looking at the sea, which, at 18 meters appears as President Lincoln'다.

 

정말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보인다.

 

 

그렇다. 그는 18미터 밖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지를 갖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그 외에도 이 미술관에는 익히 보던 작품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섹스 어필의 유령 The spectre of sex appeal' 이라든가. 이 그림이 이렇게 작은 그림인 줄은 몰랐다. 엽서 두세 장 정도의 크기.

 

 

역시 유명하고 여러 작품으로 재생산 된 '갈라리나 Galarina' 당연히 다들 아시겠지만 갈라는 달리의 아내이자 뮤즈다.

 

 

유명한 빵 바구니 그림은 앞에 금으로 도금된 빵 바구니가 함께 있어야 완성된다.

 

 

백조로 변해 레다를 유혹한 그리스 신화에서 모티브를 딴 '아토믹 레다 Leda Atomica'. 물론 여신의 원형은 역시 또 갈라다.

 

 

'풍자적 구성 Satirical compositon'. 히든싱어 관련 글에서 잠깐 소개했지만 앙리 마티스의 '춤' 연작과 너무나 닮아 있다. '춤'의 모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달리 같은 거장도 초기에는 자기의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선배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훈련을 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시도 중의 하나. 미켈란젤로의 작품 '피에타'의 재해석.

 

 

 

 

루브르에 있는 유명한 니케 여신상을 재해석한 이 작품의 제목은 '릴리스-레이먼드 루셀에 대한 오마쥬 Lilith-Hommages to Raymond Roussel' 이다. 에반게리온 덕분에 이제는 모르는 분들이 거의 없지만 릴리스는 유다 전설에서 이브(하와) 이전에 존재했다는 아담의 짝이다. 아담에게 종속된 이브보다 독립적인 여성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여권 운동의 심볼로 가끔 쓰이기도 하는데, 니케 여신상을 여성의 성기와 연결한 상상력이 다만 놀라울 뿐이다.

 

지하로 내려가면 달리의 또 다른 취미 중 하나인 금속공예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자본주의의 신인 나에게 존경을 표하는 방법은 돈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달리. 그러고 보면 금이 등장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렇게 금빛이 찬란한 지하 전시실 벽면을 보면, 이 놀라운 박물관에서 가장 감명깊은 상징물을 만나게 된다.

 

 

 

달리의 묘비.

 

그렇다. 피게레스에 있는 달리의 '극장 미술관'은 달리의 거대한 묘지였던 것이다.

 

달리 미술관을 정리하자면 갈길이 워낙 멀지만 달리에 관심 없는 사람도 있을테니 대략 다음편으로 마감. 그리고 나서 그날 밤. 가을날의 바르셀로네타 해변으로 갔는데... 달리의 그림 속 같은 초현실적인 풍경이 나타났다.

 

이런 느낌.

 

 

 

기대하시라. 개봉 박두. (벌써 10편째 기행문인데 아직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까지 언제 가나. 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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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에 가기 전부터 리세우 Liceu 극장 이나 카탈루냐 음악당 Palau de la Música Catalana 중 한군데에서 공연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시다시피 리세우 극장은 세계적인 오페라 공연장. 그리고 카탈루냐 음악당은 '가우디의 라이벌'이었다는 평 때문에 슬슬 스페인 바깥에도 알려지고 있는 몬타네로가 지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연장'이라고 불리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공연장을 방문하는 낮 투어 가격만도 30유로. 게다가 투어 내내 사진 촬영 금지를 강조한다고 한다. 그럴 바엔 공연을 보는게 낫지! 라고 생각하고 곧바로 공연을 예매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낚인 것 같기도 했다.

 

이 투어의 존재가 어쩌면 공연 관람을 유도하는 마케팅이었는지도.^^

 

 

 

그런데 국제적인 명성에 비해선 극장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19세기적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이 이 건물에 바치는 정성은 예사롭지 않다. 1층 출입문 옆의 오래된 매표구 자리를 보면 알 수 있듯, 원형 그대로의 보존하려는 노력이 매우 가상하다.

 

건물 뒤편의 정식 매표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식당이 있다. 여기서 한 첫번째 실수는, 이 극장 뜰에 있는 레스토랑과 내부의 카페테리아가 너무 격이 다른 식당이었다는 것. 당초 뜰의 레스토랑에서 저녁식사를 할 예정이었지만 자리가 없었다.

 

뭐, 카페테리아도 모습은 훌륭하다.

 

 

 

 

고풍스러운 시설에서 간단한 먹거리(pincho)와 음료, 맥주, 와인 등등을 판다.

 

문제는 식사. 10유로에 파스타와 음료를 주는 메뉴가 있었다. 웨이터라는 작자에게 무슨 파스타냐고 물었다. '오늘의 파스타'란다. 그래서 그 '오늘의 파스타'가 대체 무슨 파스타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대답이 가관. '오늘의 파스타는 스파게티'라는 거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고, 스파게티가 어디 한두가지냐. 그럼 그 스파게티는 '어떤 스파게티'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냥(just) 스파게티'라는 거다. 그래서 '뭐가 들어가는 스파게티' 냐니까 '밀가루, 물, 소금, 토마토...' 동행인만 없었으면 확 때려 엎을 뻔 했다.

 

아무튼 시간도 그렇고, 다른 사정도 있어서 그 '그냥 스파게티'를 시켰다. 그 결과는 이랬다.

 

 

 

토마토 소스도 아닌, 케첩도 아닌, 뭔가 붉은 국물에 버무린 스파게티였다. 먹어보니 아주 오래 전, 1980년대 학교 구내식당에서 팔던 함박스테이크(한 700원 정도 했던 것 같다)에 살짝 끼어 나오던 '스파게티'의 맛이었다. 햄버거로 치자면... 한 30년 전에 중고등학교 매점에서 팔던 계두버거(패티에 닭 머리를 갈아 넣는다는 소문이 있던 햄버거. 공식 명칭은 '빅보이'인가 그랬다. 먹다 보면 뭔가 뼈처럼 딱딱한 것이 씹혀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런 우아한 공연장에서 이따위 음식을 팔다니. 기분이 팍 상했다. 관광객의 속을 터지게 했던 웨이터의 태도가 문득 이해가 갔다. 대체 저따위 음식을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먹는 둥 마는 둥(물론 그렇다고 남겼을 리는 없다) 접시를 물리고 공연장으로 입장.

 

 

 

안쪽에서 본 1층 로비.

 

 

뉘신데 여기 계신지...

 

 

 

1층에는 로비뿐이고 실제 공연장은 2층부터다. 그리고 계단 하나, 벽 마무리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2층에는 뭔가 좀 더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이 있다.

 

 

 

레스토랑 입구의 휴게공간. 인터미션 때 왕년의 귀족 아저씨들이 샴페인과 시가 한 대를 즐겼을 법한 공간이다.

 

아르누보적인 느낌이 오늘날 보기엔 약간 조잡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당시로서는 최대한의 공력을 들여 치장한 느낌.

 

 

 

극장 내부. 무대의 정면. 대형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무대는 다소 좁아 보인다. 풀 오케스트라가 바그너나 말러를 공연하기엔 다소 비좁아 보일 정도.

 

 

 

 

낮에 보면 더 예쁘다는 천장의 스테인드글라스.

 

 

 

이렇게 4층 객석의 아치와 연결된다.

 

 

 

2층이 무대와 같은 높이. 3층과 4층에 객석이 있다.

 

 

자세히 보면 이런 느낌.

 

 

 

무대 정면의 위쪽도 화려함의 극치다.

 

 

조금 확대해 보면 이런 느낌. 그러니까 저 가장자리를 둘러 친 거대한 장미꽃 모양을 비롯해 전체 내부의 인테리어 컨셉트가 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거대한 꽃밭이다.

 

 

 

 

딱 내 취향은 아니지만 아무튼 대단히 공이 들어간 작품이라는 건 분명하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 명성에 비해 규모는 꽤 작은 극장이다.

 

 

 

아무튼 공연 시작.

 

볼 공연은 오페라와 플라멩코를 결합해 꽤 상업적으로 성공했다는 오페라 이 플라멩코 Opera y Flamenco. 지난 2009년부터 바르셀로나에서 거의 상시 공연되고 있고, 수시로 해외에서도 초청됐던 공연이다.

 

홈페이지는 http://www.barcelonayflamenco.com/shows.php?id=486#cast-tab 

카탈루냐 음악당은 http://www.palaumusica.cat/en/

 

 

 

2013년 10월19일의 출연진은 이랬다.

 

 

바이올린, 첼로, 카혼(상자같이 생긴 타악기), 피아노에 노래를 겸하는 기타리스트까지 반주자 5명, 칸타오르 cantaor(남)와 칸타오라 cantaora(여) 라고 불리는 플라멩고 전문 싱어 2명, 그리고 소프라노와 테너가 각각 1명씩 등장하는 제법 큰 규모다.

 

 

 

 

물론 이 위에 쓴 사람들은 보조 출연자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 뭐니뭐니해도 무대의 꽃은 각각 바일라오르 bailaor(남)와 바일라오라 bailaora(여) 라고 불리는 플라멩코 댄서들이다. 특히 이 무대의 꽃은 카티아 모로 Katia Moro(바로 위 사진) 라는 이름의 바일라오라였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공식 예고편을 보는 게 빠를 듯.

 

 

 

 

뭔가 좀 아쉽다. 카티아 모로의 모습을 좀 더 볼 수 있는 다른 공연장의 모습이다.

 

 

 

사실 오페라와 플라멩코의 결합이란 플라멩코의 발상지로 꼽히는 세비야가 무대인 오페라 '카르멘'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나중에 세비야에서 본 플라멩코 공연에도 '카르멘'의 한 장면이 동원된다). 그 밖의 다른 오페라들은 사실 플라멩코와 큰 접점은 없다. 그리고 '오페라' 파트에서 등장하는 두 성악가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다. 실제 오페라의 주역급은 아니라는 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와 플라멩코(스페인어 y는 and의 뜻)'는 꽤 매력적인 콘텐트다. 이유는 전체 공연에서 약 1/4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 오페라와는 별개로 3/4 정도의 비중인 플라멩코의 수준이 워낙 훌륭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위에서 거론한 카티아 모로의 열연은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여담이지만 스페인도 인터넷 사용이 꽤 보편화되어 있는 느낌인데 비해 플라멩코 관련 내용은 온라인으로 검색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이 플라멩코도 한국에서의 국악의 위치와 다소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80분 정도의 공연을 마치고 박수갈채에 답하는 출연자들.

 

반대쪽에서 보면 이런 모습이다. (물론 이 사진은 위의 Opera y Flamenco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

 

이렇게 해서 첫 이틀이 폭풍같이 지나갔다.

 

 

P.S. 스페인을 여행중인 한 관광객이 이 음악당에서 이 무지치 합주단의 공연을 본 뒤 "이렇게 소리가 좋은 공연장은 오랜만"이라는 소식을 알려 왔다. 카탈루냐 음악당은 보기만 좋은 공연장은 아닌 듯 하다.

 

 

 

(예고) 셋째날, 드디어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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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주익 언덕으로 가는 길은 에스파냐 광장에서 시작된다. 에스파냐 광장에서 시내버스를 타면 몬주익 언덕의 주요 포스트를 거쳐 몬주익 성을 지나 다시 광장으로 내려온다. '그 중간 중간'에 카탈루냐 미술관, 호안 미로 미술관, 보타닉 가든 등의 볼거리가 있다. 전부 샅샅이 구경하고 나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 다리도 아프고 그럴 여유가 없다.

 

심지어 이런 중요한 포스트도 버스 안에서.

 

 

 

 

 

 

제일 크게 나온 사진이 제일 흔들렸다.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영웅,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의 부조다.

 

당시를 기억할만한 또래라면, 결승점에 선두로 달려들어오던 황영조의 모습을 중계하는 캐스터의 "몬주익 언덕에.... 몬주익 언덕에...."라는 숨가쁜 코멘트를 통해 '몬주익 언덕'이란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1992년 8월10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 경기인 마리톤에서 황영조는 전 세계의 황금 다리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따냈다.

 

황영조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우승후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 전문가들은 황영조가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었다. 이유는 더위에 강하다는 점. 당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위원회는 초여름 무더위를 피해 오후 6시30분로 출발 시간을 미뤘다. 그래도 시내는 스페인의 태양에 후끈 달아올라 있는 시간이었다.

 

게다가 결승점인 몬주익 경기장은 언덕으로 올라가는 대로 곁에 지어져 마지막 2km 정도는 오르막을 뛰어올라야 하는 난코스였다. 이미 세계 마라톤은 지구력에서 스피드로 패러다임이 바뀐 시점이었지만, 이런 난코스라는 점을 감안할 때 누구보다 폐활량이 크고 지구력이 강한 황영조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더위에 강한 한국 마라톤'은 이미 10년 전, 82년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누구도 예상 못한 금메달을 따낸 김양곤 때부터 검증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김양곤은 기록상으론 2시간22분대의 저조한 성적이었지만 뉴델리의 무더위 속에서 페이스를 잘 지켜 경쟁자들을 따돌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몬주익 영웅'의 탄생.

 

 

 

예상대로 당시 세계신기록보다 7분 정도 뒤진 기록이었지만 무더위 속에서 기록한 값진 승리. 특히 손기정 이후 56년만의 마라톤 금메달이라 의미는 더욱 컸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황영조 신화의 시작이다. 황영조는 2년 뒤인 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내며 국민 영웅의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98년 이봉주의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한국 마라톤은 전성기를 이어갔다.

 

 

어쨌든 중간의 포스트들은 모두 통과하고 도착한 곳이 바로 몬주익 언덕 정상에 있는 몬주익 성이다.

 

몬주익은 '유태인의 산'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뭐 유태인이 어쨌든 가 보면 이 자리야말로 바르셀로나라는 항구 도시를 수호하는 최대의 군사 거점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요충지 중의 요충지다.

 

 

 

당연히 이런 대포도 있고,

 

 

성벽이 있다.

 

 

성벽 위로 올라가 보면 탁 트인 전망.

 

 

 

바르셀로나 시에는 어떤 건축물도 몬주익 성의 높이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꽤 큰 규모의 성이다.

 

 

 

 

 

반대쪽으로 나오면 바르셀로나 해안선이 역시 한 눈에 들어온다.

 

 

 

 

갈매기가 한가롭게 날고,

 

 

해변의 랜드마크가 된 W호텔이 멀리 보인다. 사진상으론 그리 인상적이지 않지만, 몬주익 성은 바르셀로나 전체를 한번쯤 조망할 수 있는 포인트로, 들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성 아래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출발점인 에스페냐 광장으로 내려왔다.

 

 

 

토요일 저녁. 저 몬주익의 분수 쇼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꾸역꾸역 까탈루냐 미술관 앞으로 몰려들고 있다.

 

아나운서 출신 여행작가 손미나가 "바르셀로나를 떠나 가장 생각났던 시공간"으로 지목했던 바로 그 분수 쇼. 장관이라는 말은 참 많이 들었는데 안타깝다. 여행중에 들를 수 있는 날은 금,토 이틀밖에 없었는데, 지금 분수 쇼를 바로 앞에 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이다. 카탈루냐 음악당의 공연을 예매해 두었기 때문이다.

 

아쉬움에 한껏 줌을 당겨 봤다(위 사진).

 

 

실제로는 꽤 먼 거리.

 

 

분수쇼는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다음번 바르셀로나를 찾을 때 보기로.

(...이번 생에 다음 기회가 있어야 할텐데.)

 

 

 

 

다들 분수쇼는 이 노래가 나올 때가 클라이막스라고 한다.

 

당연히 프레디 머큐리, 몽세라 카바예가 함께 부른 'Barcelona'. 본래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제가로 만들어진 이 노래는 프레디 머큐리가 AIDS로 급사하는 바람에 갑작스레 그 자리에서 밀려난다. 그리고 나서 등장한 것이 사라 브라이트먼과 호세 카레라스가 부른 'Adios Para Siempre'. 모든 사람이 앞의 노래가 더 좋다고들 했지만 당시만 해도 '에이즈로 죽은 사람이 부른 노래를... 상서롭지 못하게...'라는 분위기였다. 요즘같으면 오히려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라고 더 난리가 났을 일이다.

 

 

 

 

에스파냐 광장을 대표하는 쇼핑몰. 모습을 보면 눈치챌 수 있지만 본래 투우장이라고 한다.

 

해변에 서 있는 콜럼버스 동상이나 마찬가지로, 옆에 있는 탑 같이 생긴 옥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코스도 꽤 인기있는 관광 코스다. 물론 올라가 보지 않았다.

 

다 아시겠지만 본래 바르셀로나는 투우를 즐기는 문화권이 아니다(아시다시피 대부분의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우리는 카탈루냐 사람이지 스페인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본래 두 군데의 투우장이 있었지만 그것도 사실상 관광객용이었고, 몇해 전에 아예 카탈루냐 주 법령으로 투우가 금지됐다. 그래서 기존 투우장은 모두 용도변경이 이뤄졌다고.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어찌어찌 해서 카탈루냐 음악당 도착.

 

이날 저녁, 극장 안의 식당에서 이번 스페인 여행 내내 가장 잊을 수 없는 식사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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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마리아 델 마르 광장에서 점심시간을 보낸 뒤 본격적인 고딕 지구 탐방이 시작됐다. 그런데 줄지어 있는 기념품 매장 가운데 똑같은 포즈의 인형들이 즐비한 진열장이 눈길을 끈다.

 

 

 

 

 

 

잘 보면 알만한 세계적인 인물들인데, 포즈가 약간 이상한 느낌을 풍긴다. 조그만 인형 하나에 16유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뒤쪽을 보면 헉 소리가 난다. 피케, 파브레가스, 푸욜, 사비, 메시 등 바르셀로나의 주축 선수들이 줄줄이 앉아서... 대변을 보고 있는 인형이다. 위 사진의 근엄한 세계적인 인물들도 모두 마찬가지.

 

 

 

 

 이 인형은 바로 바르셀로나의 전통적인 명물 까까네로 Cacanero 인형이다. 한국어로는 과자를 가리키는 까까가 스페인어로는 바로 대변이란게 좀 뜨악하다. 아무튼 이 까까네로 인형은 액운을 막아 준다는 행운의 상징으로,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관광 상품이라고 한다.

 

 

 

사이즈도 다양하다.

 

 

맨 왼쪽은 누군지 모르겠고(캐머런 영국 총리...?) 카스트로, 사르코지, 올랑드, 엘리자베스 2세 까지 다양한 세계 각국 명사들도 모두 뒤를 돌려 보면 엉덩이를 까고 덩어리를 낳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우리의 싸이도 (아마도) 밥 말리와 함께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략 훑어본 바에 의하면 한국 사람으로 이 까까네르 인형의 반열에 오른 건 이 싸군 한 사람 뿐인 듯 하다.

 

 

 

저게 싸이야? 하시는 분들, 만든 사람이 곰손이라 그렇지 싸이 맞다. 나름대로는 이 모습을 만들고 싶었던 거다. 이해하자.

 

 

 

그리고 다시 찾아온 왕의 광장 Placa del Rei. 밝은 날 보니 약간 낯설다.

 

 

 

지도 위의 파란 줄이 바르셀로나의 핵심 거리인 라 람블라 La Rambla 다. 그 라 람블라를 중심으로 이 글에 나오는 명소들이 죄다 위치해 있다. 위 지도 한복판, 붉은 원 안에 '1' 표시가 있는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 카테드랄과 왕의 광장 Placa del Rei 가 있는 곳이다. 복습하면 왕의 광장은 콜럼버스가 1492년 신대륙 발견을 처음으로 이사벨라 여왕에게 보고한 역사의 현장.

 

그리고 그 오른쪽의 X표 쳐진 곳이 피카소 미술관. 시내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해서 그렇지 다 거기서 거기다.

 

 

 

계단에서 골목 입구 방향을 바라보면 이런 구도가 나온다. 역시 바르셀로나답게 광장이라고는 하지만 그냥 뒷마당 정도의 크기다. 아무래도 밤에 오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 이 상태에서는 저 멀리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시민들의 환영 속에 달려오고, 이 계단에 이사벨라 여왕이 서서 맞아들이는 장면의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런 역사적인 대사건의 무대 치고는 좀 초라한 게 사실.

 

 

뭐니뭐니해도 관광객에겐 이런 모습이 제격 아니냔 말이다. 역시 밤이 낫다.

 

 

 

왕의 광장의 유명한 계단을 올라가면 문이 하나 있다. 시립 바르셀로나 역사 박물관 Museu d'Historia de Barcelona 로 통하는 문이다. 땅 위에도 볼 것 천진데 굳이 들어갈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으로 별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무척이나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우선순위를 따지다 보니 막상 시간이 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라는 도시가 처음 건설된 것은 페니키아 계열의 지중해 해양 민족이었다고 하고, 로마의 진출과 함께 이 지억에 첫번째 전성기가 찾아온다. 그러니 우리가 아는 '스페인 제2의 도시', 혹은 '카탈루냐의 수도 바르셀로나' 이전에 '로마의 고대 도시'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

 

들어가 보진 않았고,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허락되지 않아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지만, 아무튼 바르셀로나의 외피로 덮여 있는 고대 로마 지배하 스페인의 모습(히스파니올라라고 불리던)이 담겨 있다는 전언이야. 다른 구경도 많이 했지만 다녀 오고 나면 이런 게 제일 화가 나지.

 

 

 

 

이건 계단에서 바라볼 때 바로 오른쪽으로 뚫린 입구 안쪽. 바르셀로나 문화청 건물인데 예전 귀족 저택을 개조한 거라고 한다. 그래서 바로 문 안쪽으로 파티오 Patio(中庭)가 보인다.

 

 

 

 

 

이것이 신대륙을 발견한(물론 당시의 인식으로는 서쪽으로만 계속 가도 인도 동쪽에 있는 지팡구로 갈 수 있다는 신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의 공적을 인정해 그를 그가 도달한 땅의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약조 원문. 뭐가 그리 조항이 많은지 책으로 한 권이다. 신영토를 개척한 콜럼버스와 그의 자손들에게 내리는 특전, 그리고 그가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될 일에 대한 내용이 꼼꼼하게 정리됐다고 한다.

 

역시 영토 정복 사업도 해 본 자들이 잘 한다. 하긴 바로 이웃에 온 세계를 다 쓸고 다니며 정복하고 있던 포르투갈이 있었으니 그 전례를 많이 모방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연히 카테드랄 앞에서 마주친 거리 축제. 이른바 '시장 축제'다. 바르셀로나 각 지역 시장들이 나와서 벌이는 판촉 행사인 셈이다. 주로 먹거리 위주의 판매이므로, 안 그래도 점심시간이 긴(어림잡아 오후 2시~5시) 이곳 사람들이 먹고 마시며 시끌벅적 벌인 판이 제법 볼만하다.

 

 

 

밤과는 사뭇 달라 보이는 구시가의 골목들. 노란색과 빨간색의 깃발이 바로 카탈루냐주를 상징하는 깃발이다. 잘 알려진대로 스페인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카탈루냐주는 지속적으로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중앙 정부는 절대 놔 줄 생각이 없다.

 

 

 

 

토요일의 람블라 거리. 차가 다니는 1차선 도로인데도 관광 마차가 다닌다. 승용차 운전자들로선 복장 터질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주말에 람블라 거리로 차를 갖고 나오는 건 애당초 만용이란 생각도 든다.

 

 

 

람블라 거리는 기본적으로 도보 통행을 위한 거리기 때문이다. 양쪽으로 차도가 있고, 가운데에는 서울의 광화문 광장처럼 섬 같은 인도가 죽 이어진다. 그냥 인도가 아니고, 그 위에 카페와 레스토랑, 꽃가게 같은 점포들이 이어진다. 물론 노점상은 전혀 없다.

 

 

 

지나다 보면 갑자기 2층에서 깜짝쇼가 펼쳐진다.

 

 

 

뭔가 했더니 에로틱 박물관의 자체 홍보 활동이다. 눈길은 확 끈다. 성공적이다.

 

그 에로틱 박물관의 바로 앞에 유명한 식료품 전문 시장인 보케리아 시장 Mercado de la Boqueria 이 있다.

 

국제적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셰프가 '보케리아에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는 내용의 이야기를 했대서 더욱 알려졌다.

 

 

기념물 내용을 제대로 읽을 능력은 없으나 대충 때려맞춰 보면 올해가 개장 100주년인 듯.

 

 

 

관광객을 제일 먼저 반기는 건 역시 스페인의 상징인 하몽 Jamon. 돼지 다리를 저렇게 통으로 숙성시켜 만드는데 돼지의 질과 숙성 기간, 산지 등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혹자는 이 하몽을 한국의 홍어에 비교하기도 하는데, 홍어에 비해 너무나 보편화된 대중식이란 점이 좀 다르다. 처음엔 살짝 비릿하고 구릿한 맛이 날 수도 있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말린 고기 특유의 감칠맛이 난다. 한국에서 육포를 먹듯 살짝 불에 구우면 더 맛이 좋아질 것도 같은데, 체류기간이 짧아서 막상 그렇게 먹는 법은 보지 못했다.

 

그냥 얇게 저며 생으로 먹거나, 그대로 빵 사이에 끼워 다른 재료 전혀 없는 '하몽 샌드위치'로 먹는게 가장 흔한 방식이다. 그 외에는 수만가지 요리에 재료로 쓴다고 한다.

 

 

 

 

스페인 하면 과일. 태양의 나라답게 오만가지 과일이 알록달록 아름답다. 보케리아 시장의 가장 대표적인 관광객 유치 수단은 과일 주스인 것 같기도 하다. 가격은 1.5~2.5 유로 정도. 안쪽이 더 싸다.

 

여기서부터 다소 엽기적인 사진이 등장할 수도 있으니 심약하신 분들은 그만 보셔도 좋을 듯.

 

분명히 경고합니다.

 

 

 

사실 그냥 식재료만 마구잡이로 파는 게 아니라 비주얼도 매우 훌륭하다.

 

멋대가리 없이 10개 20개씩 포장된 한국 마트의 계란쌓기와는 좀 차원이 다른 디스플레이. 그럴싸하다.

 

 

여기서 등장하는 '좀 다른' 식재료는 토끼 고기. 시장에서 이렇게 손질된 토끼고기를 생닭 팔듯 판다. 다른 유럽 국가에서 토끼는 식용 동물이라기보단 애완용 동물의 이미지가 강한 데 비하면 참 원초적인 느낌이다. 하체 곡선이 좀 징그럽기도 한데, 아무튼 이 사람들에겐 이 누드 토끼가 누드 닭만큼 자연스럽다고 한다. 특히나 빠에야의 본산 발렌시아는 항구 도시이지만 해물보다 일단 토끼고기가 들어가야 진정한 빠에야라고 쳐 준다는 설이 있다.

 

아. 가끔 가게에 따라선 닭을 주문할 때 따로 얘기하지 않으면 대가리까지 붙여 준다고.

 

 

 

물론 시장의 재미는 이런 즉석 먹거리. 시장 맨 안쪽에 이런 식의 바 들이 성업중이다. 시장에서 파는 먹거리들을 즉석에서 살짝 살짝 조리해 바로 음식으로 만들어 판다. 여기에 맥주나 와인 한잔을 곁들여 수다를 떠는 사람들이 들끓는다.

 

보기엔 만원인데 가이드의 설명으론 '아주 잘 되는 집은 아닌' 것 같단다. 이유는 바닥이 너무 깨끗하다는 것. 이 지역의 문화는 이런 바 바닥에 포장지며 땅콩 껍질, 생선 가시, 닭뼈 등을 버리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거다. 그래서 바닥에 뭔가 사람이 먹고 마신 잔해가 흩어져 있으면 그게 '잘 되는 가게'의 상징이라나.

 

 

 

하다 하다 보니 한국 점포도 있다. 이름은 마싯따(마드리드에 있는 한식집 마시타와는 무관^^). 한국산 라면이며 고추장 등 먹거리를 팔고, 메뉴를 보면 알 수 있듯 간단한 한국 음식을 낸다. 한국 관광객들이 꽤 오는 듯 했다.

 

바로 아래 사진의 다음 사진을 보기 전, 마음의 준비들을 해 두시길.

 

 

 

시장 한 켠에 있는 코치니요(El Cochinillo) 전문점에는 일본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다. 세고비아 지역의 명물인 새끼 돼지 통구이 요리 코치니요 아사도(Cochinillo Asado) 전문점이라는 설명이다.

 

그 원조라는 세고비아에서 한번 먹어볼까 했는데 세고비아를 가 보지 못해 그냥 통과. 

전에 상해에 갔을 때 카우루주(烤乳猪)라는 지역 특산 새끼돼지 통구이를 먹은 적이 있는데 바삭바삭한 껍질이 정말 일품이었던 기억이 난다. 맛간장으로 양념해 굽는 중국식과는 다르겠지만 스페인식도 대략 훌륭한 맛일 듯.

 

 

 

 

 

 

자, 이제 진짜 충격적인 사진이 나온다.

 

 

 

 

 

 

무슨 사진인데 그렇게 뜸 들이냐는 분들, 난 책임 못 진다.

 

그럼.

 

 

 

카베사스 코르데로 Cabezas Cordero, 새끼 양의 머리다.

 

생선 대가리가 아니고 염소 대가리를 이렇게 시장 정육 코너에서 판다. 이 분들이 염소탕을 집에서 많이 끓여 드시는데, 대가리를 안 넣으면 국물 맛이 제대로 안 난다는 거다. 뭐 우리도 유명한 설렁탕집에선 소머리가 안 들어가면 맛이 안 난다고 한다. 이분들, 맛 제대로 아신다.

 

 

 

바로 옆에선 내장을 이렇게 판다. 영/미권에선 바로 버리는 내장인데 스페인에선 수프의 주 재료로 쓴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만든 대표적인 음식이 카스티야 지방의 대표적 음식인 카요스 마드릴레뇨스 Callos Madrilenoz 라고 하는데, 드셔 본 분들의 말에 따르면 토마토 소스로 끓인 곱창전골 맛이 나서 한국 사람들도 꽤 좋아할 만 하다고.

 

아무튼 이 분들, 음식문화가 참 마음에 든다.

 

 

 

여전히 화려한 디스플레이의 향연.

 

라 람블라를 동남방으로 죽 걸어내려오면 바르셀로나의 바닷가가 나온다. 그렇다. 바르셀로나는 항구였던 것이다.

 

 

 

그리고 바닷가에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위업을 기리는 기념탑이 서 있다. 엄청나게 높다. 단 저 콜럼버스가 가리키는 방향이 자신이 발견한 신대륙의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그냥 웃자는 얘기다.

 

 

 

잡아당겨 보면 이런 포즈. 아무튼 유럽 역사, 특히 스페인 역사에서는 잊을 수 없는 영웅이다. 물론 스페인 사람이 아니고 이탈리아 제노바 사람이라는 게 함정. 실제로 제노바에 가면 콜럼버스가 살았던 집이 관광 명소라는데, 급조된 것이니 절대 가 볼 필요가 없다는 제보가 있었다.

 

 

 

콜럼버스의 동상에서 해변으로 나 있는 구름다리를 건너 면 고래등같은 쇼핑몰 하나가 갑자기 등장한다. 마레 마그눔 Mare Magnum. 바르셀로나의 모든 쇼핑몰과 거의 대부분의 상점들은 일요일에 문을 닫는다. 한국 백화점이 기를 쓰고 일요일에 문을 열고 월요일에 쉬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하지만이 마레 마그눔만은 일요일에 문을 연다고 한다.

 

그리고 저 APP라는 글자 바로 밑, 그러니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한층 올라간 자리에 스타벅스가 있다. 저 자리가 할일없이 해변을 바라보고 앉기에는 최고의 명소라는 평이 있다. (사진은 못 찍었다. 미안하다.)

 

이렇게 해서 피카소 미술관 이남의 고딕 지구에 대한 간략한 탐방 끝. 다리는 아프지만 뿌듯하다.

 

다음 코스는 그 이름도 유명한 몬주익 언덕이다. 몬주익 언덕에 뭐가 있냐고?

 

 

바로 1992년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대한 건아 황영조의 부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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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입니다.

 

이 코너를 쓰기 시작하고 13번째 글. 그러니까 1년이 돌았다는 얘깁니다.

 

새해 준비, 1년의 마무리...이런 말들에 너무 크게 의미 두고 갑갑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생 뭐 있나요? 한살 더 먹으면 그만이지. 사실 남들도 별거 없어요.

 

송년회 못 가고 야근하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볼 사람들은 새해에 보면 돼요.

 

연말에 괜히 한 것도 없이 올해가 다 갔네 뭐 쓸데없이 자책하지 마시라고 한 얘깁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12월의 문화생활 가이드

 

이 연재를 시작한지 벌써 1년이 됐어. 세월 징하게 빠르군.

 

12월에 뭔가 문화생활을 하라고 권할 때에는 아무래도 크리스마스가 끼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지. 커플인 사람들에게 이 날은 참 잘 넘기기 어려운 날이야. 솔직히 말해 1224일과 25일에 권하고 싶은 행동 강령은 아무리 재미있는 공연도, 아무리 멋진 콘서트도, 아무리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도그 두 날 만큼은 절대 가지 말라는 거야.

 

이해를 못 하는 사람들을 위해 질문. 주위에 알만한 선배나 친척 어른들에게 크리스마스를 연인과 함께 보낸 즐거운 기억에 대해 물어봐. 없지? 없는 게 정상이야. 그럼 크리스마스에 데이트 하다가 힘들었던 기억을 물어봐.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늦게 왔다고 자리 빼서 싸운 얘기, 없는 돈에 마이클 볼튼 공연 예매했다가 차가 밀려서 앵콜 곡밖에 못 들은 얘기, 밤에 명동에서 술취한 여친 등에 업고 택시 잡느라 허리 부러진 얘기, 결국 택시 못 잡고 한남동에서 상계동까지 걸어서 집에 간 얘기 등등, 아마 끝없이 나올 거야.

 

젊어서 힘들었던 얘기가 뒷날의 추억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냥 크리스마스고 뭐고 당장 군대를 가. 갔다 왔다고? 그럼 해병대 캠프라도 다시 가든가.

 

 

그렇다고 명색이 커플인데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물론 그렇지. 관계가 꽤 성숙한 사람들은 쓸데없이 고생하지 말고 야외로 나가. . 이때도 빠져나가는 길이 엄청나게 밀릴 테니 일찍 출발하는 건 필수. 물론 당일 귀가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야. 대한민국, 특히 서울 주변에는 이런 커플들을 위한 인프라가 굉장히 발달해 있어.

 

아직 이러기엔 서먹서먹한 커플들, 살아 남으려면 뭉쳐. 서너 커플만 모아도 방 하나 빌리는 데 큰 부담은 안 될거야. 호텔엔 방이 없을 거야. 변두리 레지던스를 알아 봐. 넓은 거실, TV, 냉장고, 주방이 있어. 이런 날 한우 등심에 양주 한병이면 정말 추억에 남는 크리스마스를 만들 수 있어. 물론 이것도 비용이 꽤 들지만, 밖에서 인파에 치이고, 밀리는 길에 짜증내면서, 별로 대단치도 않은 레스토랑에서 비싼 돈 내고 짐짝 취급 받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라고 장담해.

 

솔로들은 어쩌냐고? 쓸데없이 모여 봐야 한숨만 나올 테니 괜히 모여서 스트레스만 더 받지 말고, ‘이런 날은 외출하지 않는게 내 원칙이라고 해. 그리고 집에서 특집 프로그램이나 봐. 폭설에 한파가 밀려오길 기도하면서. . 이런 얘기는 여기까지.

 

1211, 미샤 마이스키+서울시향의 ‘3 Concertos’. 이렇게 유명한 연주자의 비싼 공연을 추천하긴 처음이야. 하지만 5만원 짜리 예술의 전당 B석이라도, 연말이고 뭔가 감성적이면서도 고상한 분위기를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

 

누구든 포털사이트에 초본데 좋은 첼로 곡 좀 추천해 주세요라는 질문을 올리면 아마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 그리고 생상스와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이 1,2,3번 댓글로 달릴 거야. 그런데 이 세 곡을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다면 아니 좋을 수가 없겠지. 3층이라도 충분히 즐길 만 해.

 

1212, 코리아심포니의 베토벤 교향곡 9합창’. 12월에는 합창을 들어야 한 해가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 용. 베스트셀러는 정명훈의 서울 시향 연주지만 1226일과 27일 모두 매진이야. 그 안으로 추천할 만한 공연. 3만원짜리 A석이면 1층에도 앉을 수 있고, 15천원 짜리 B석도 괜찮을 듯.

 

 

 

 

국립 현대미술관이 서울 소격동에 서울관을 오픈하면서 기념 전시에 들어갔어. 국가대표 설치 미술 작가라고 할 수 있는 서도호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집속의 집 속의 집을 비롯해 현재의 현대미술 지평을 그리는 연결-전개, ‘자이트 가이스트, ‘알레프 프로젝트전 등 모든 전시를 7000원에 볼 수 있지. 이런 건 일단 가 봐야 하지 않겠나?

 

겨울의 책이라면 역시 미스터리. 이번엔 미야베 미유키의 외딴 집을 추천하겠어. 미미 여사를 구태여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이분은 최근 2이란 이름으로 에도 시대를 무대로 하는 일련의 작품들을 내놓고 있어. 이 작품군을 대표하는 작품은 뭐니뭐니해도 외딴 집이야.

 

10페이지만, 미미 여사 특유의 탄탄한 구성과 감탄을 자아내는 디테일을 읽어 가다 보면 어느 새 입을 떡 벌린 시커먼 동굴로 떨어져 에도 시대의 일본 어촌 마을로 툭 떨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어느 시대나 힘 있는 자들의 게임 사이에서 희생되는 불쌍한 보통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

 

악인에 대한 응징과 복수가 시원하게 이뤄지는 활극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안 맞을 수도 있겠지만, 다음 내용이 알고 싶어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하는 미미 여자의 마력은 이 작품에서 진정 빛을 발한다고 생각해. 찬바람이 쌩쌩 부는 날, 바닥에 배 깔고 귤 까먹으며 보기엔 최고야. 신간이 아니라서 상/ 2권 세트에 12500원이면 살 수 있어.

 

정리하면, 

미샤 마이스키, 3Concerto B 5만원

코리아 심포니, 베토벤 교향곡 9합창’, B 3만원~C 1500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통합 관람권 7000

미야베 미유키, ‘외딴 집/하권 12500

합계 99500~84500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를 해도, 명절이며 이름 있는 날에는 뭔가 복작거리는 데서 지지고 볶아야 제맛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꼭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12월24일이면 코엑스, 대학로, 홍대앞, 명동 언저리는 미어 터지다 못해 분노 범죄의 온상이 되고, 곳곳에서 패싸움과 난동으로 경찰서 보호실까지 만원이 됩니다.

 

물론 공연장도 일찍 일찍 도착하고, 예약 시간에도 꼭꼭 맞춰 가고, 이런 날 바가지 씌우지 않는(대부분의 레스토랑이나 카페 등속이 이런 날은 '스페셜 디너 코스'라는 이름으로 평소엔 하지도 않던 메뉴로 10몇만원씩 커플들의 - 주로 남자 쪽의 - 등골을 빼놓죠) 착한 업소를 찾고, 어디 가서 술 한잔 걸쳐 분위기를 낸 뒤에도 안전하고 쾌적하게 귀가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놓는다면(아마도 기사 딸린 리무진 외에는 별로 없을 듯 한데...) 뭐 아무 상관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는 분들, 혹은 그러기엔 좀 사정이 열악한 분들은 저 위의 충고를 따르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요즘은 아예 파티룸이라는 신종 공간도 임대 가능한 모양이던데 지금부터 서두르면 아직 남아있는 자리가 있지 않을까 싶네요.

 

싱글들은... 역시 위에 있는 행동강령을 따르시구요. 싱글들끼리 이런 날 밖에서 만나 봐야 우울증만 더 심해지고 사고 칠 가능성만 높아집니다. 그리고 이런 날 TV에서도 재미있는거 많이 하더라구요. 그래도 정 누구라도 만나야겠다 싶으면, 누구 하나 집에서 모이는게 제일 나을 거에요.

 

본론으로 돌아가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Kol Nidrei)는 '첼로라는 악기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 할 때 가장 먼저 들어야 할 곡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게다가 길이도 10분 정도.

'콜 니드라이'는 히브리어로 '신의 날'을 뜻한다고 합니다. 곡의 분위기는 곧 '참회의 기도'.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는 어렵지 않게 구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현장에서 듣는다면 훨씬 강렬한 느낌.

 

 

이어서 하나 더 듣는다면 생상스의 첼로 협주곡.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보다 조금 덜 알려졌다고 할 수 있지만 1악장부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초절정의 기교는, 흔히 첼로라는 악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악기'라는 선입견을 확 날려 버립니다.

 

아울러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어쩌다 보니 연말의 '반드시 들어야 하는 선택' 처럼 된 느낌이라 소개했습니다. 지난해 서울 시향의 경우에는 '합창'과 모짜르트의 레퀴엠 공연이 모두 12월에 있어 분산되는 효과도 있었는데, 올해는 너무 몰린 듯.

한 해를 정리하는 느낌으로는 개인적으로 이 곡도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합창교향곡 만큼의 대중적 인지도는 없어서 덜 연주되는 듯 합니다. 물론 베토벤의 9번 교향곡도 4악장의 합창 부분이 잘 알려졌다 뿐이지 1,2,3악장은 그리 말랑말랑한 곡은 아닙니다만...^^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5악장의 피날레, 역시 합창 부분입니다. 레너드 번스타인의 런던 필하모니 연주.

 

 

혹시 이 곡을 모르시는 분이라면 위 피날레 부분 만이라도 들어 보시라고 강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총 1시간 30분의 대곡이 이 거대한 합창으로 마무리되는 시점의 감동이란. 내년 6월5일에는 서울시향 스케줄에 이 곡이 잡혀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내년 리스트에는 말러의 교향곡이 3곡(2번, 5번, 10번)이나 들어 있군요.

 

 

미야베 미유키의 '외딴 집'은 첫 장을 열면 그야말로 에도 시대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섬세한 묘사가 일품입니다. 물론 이런 평가에는 필연적으로 취향이 큰 영향을 미치지만, 개인적으론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 중 하나만 꼽으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아마 이 '외딴 집'을 꼽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 연말. 숙취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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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둘쨋날. 역시 아침부터 바르셀로나 여행에 나섰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유로자전거나라 투어. 이번엔 도시 곳곳을 누비는 속살 투어다. 특히 전날 밤 투어에서 다녀 본 길들을 낮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끌렸다. 다만 걷는 거리가 이만저만 아닐 것 같아 다소 긴장했다.

 

그런데 정작 집합한 뒤, 카탈루냐 광장 맞은편의 카페로 향한다.

 

 

카페 이름은 4Gats. 4가 Quatro라 콰트로가츠라고 읽는다. 정식 이름은 카탈루냐어로 Els Quatro Gats 다. gat이 영어의 cat이니 네 마리의 고양이란 뜻.

 

이 카페가 바르셀로나에서 무명 시절의 피카소가 늘 죽치고 앉아 시간 때우던 유서깊은 곳이라는 거다. 갈 데가 없어 하루 종일 자리 차지하고 있던 피카소에게 가끔씩 커피도 한잔씩 서비스로 주고 하던 주인장이 사실상 피카소를 키웠다는 이야기. 피카소 뿐만이 아니고 이 카페는 당대 스페인 화단의 문화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이 카페의 주인이 당대의 유명 화가인 라몬 카사스 Ramon Casas 였기 때문. 파리를 늘 동경했던 카사스는 바르셀로나에도 파리의 유명 카페들처럼 예술가들의 보금자리가 될만한 곳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가게(?)를 열었다.

 

아래 그림이 카사스의 유명한 대표작. 자전거 앞자리에 수염난 사람이 카사스 자신, 뒷자리 사람은 콰트로가츠의 공동 경영자인 페레 로메우 Pere Romeu라고 한다.

 

 

여기 있는 그림은 사본이고 진본은 박물관에 있다고.

 

 

 

아무튼 화가들답지 않게 경영 수완도 좋았던지 4Gats는 오늘날까지도 같은 자리에서 성업중이다. 얼마 전 바르셀로나를 무대로 한 우디 앨런의 영화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Vicky Cristina Barcelona' 에도 나왔다. (사실 제목이 주는 기대감과는 달리 이 영화에는 바르셀로나의 풍광이 그닥 많이 소개되지 않는다.)

 

바로 이 아래쪽 자리 중 하나다.

 

 

 

 

아무튼 1897년부터 성업해온 유서깊은 곳 답게 곳곳이 예쁘고 아늑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카소의 일대기(말하자면 피카소와 일곱 여자-아내의 역사 이야기)를 듣는 것이 이날 바르셀로나 투어의 시작이다.

 

사실 공식적인 미술사를 보면 피카소는 수없이 변신한다. 초기 - 청색시대 - 장밋빛시대 - 아프리칸 - 입체파 - 신고전주의 - 다시 입체파 - 자유분방한 만년으로 계속해서 바뀌는 스타일을 보였다. 막연히 이렇게만 알고 있던 터에 그 변화의 시기마다 피카소의 내면이 흔들릴만한 생활 면에서의 변화가 있었다는 설명은 매우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창백하고 우울한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청년기 절친이었던 카를로스 카사헤마스 Carlos Casagemas의 자살, 그리고 1901년 파리로 건너가 느낀 '나는 우물 만 개구리였구나'와 식의 느낌에서 온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얘기다. 피카소가 1881년생이니 이 해 나이 만 스무살. 이 콰트로가츠에서 늘 어울리던 친구, 그리고 파리로 같이 청운의 뜻을 품고 유학간 친구가 모델에게 구애하다가 거절당하고 자살한 사건 정도면 충분히 인생을 바꿔놨을 만 하다.

 

 

 

이 청색시대를 대표하는 그림 '인생 La Vie'에 등장하는 남자가 바로 카사헤마스라는 설명. 피카소의 친구에 대한 애도가 느껴진다. 아무튼 이 청색시대는 피카소에게 사랑이 찾아오면서 끝난다. 역시 젊은이에겐 사랑이 약. 피카소가 모델 페르난도 올리비에 Fernando Olivier 와 사랑에 빠지면서 우울한 청색은 사라지고 바로 장및빛 시대가 시작된다.

 

 

 

 

피카소는 올리비에의 초상만 100장 이상 그렸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피카소가 여자를 총 몇명 사귀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으나, 그의 여성 편력에서 시작점은 늘 이 올리비에다.

 

 

 

 

에바 구엘 Eva Gouel - 피카소의 초기 입체파 시기. 하지만 구엘은 1912년 피카소를 만나고 3년만에 결핵으로 병사한다. 깊이 사랑했다고는 하나, 피카소는 죽기 직전의 그녀를 나몰라라 했다고 전해진다.

 

(이 대목에서 인상적인 이야기: 피카소는 본래 현실적인 성격이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매우 민감했다. 예를 들어 피카소가 처음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것은 1907년이었지만 당시 주위 사람들이 '그게 뭐냐'고 일제히 혹평을 해 대자 장롱 깊숙히 그림을 감춰 두었다가 1916년, 시대가 큐비즘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는 판단이 서자 전시에 내놨다...는 이야기. 이유야 어쨌든 '아비뇽의 처녀들'이 9년 동안 미발표작으로 남아 있었던 건 사실이다.^^) 

 

 

 

올가 코흘로바 Olga Khokhlova - 러시아 발레단의 발레리나. 이 시기 피카소는 화단의 기린아로 칭송받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면서 과도한 실험성에서 도피, 신고전주의의 화풍을 지향한다. 어쨌든 피카소가 실제로 결혼한 첫 여자는 올가.

 

사실 수많은 여자관계에도 불구하고 피카소가 단 두번밖에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바로 올가가 이혼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마리 테레즈 발터 Marie-Therese Walter - 1927년, 피카소는 17세의 마리 테레즈를 만난다. 임신중이던 아내 올가는 마리 테레즈도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격분해 이혼을 요구하지만 피카소는 재산 분할을 거부. 따라서 올가는 1955년 죽을 때까지 피카소의 아내라는 법적 지위를 유지한다. 

 

아무튼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인 '꿈(위 그림)'의 주인공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마리 테레즈의 얼굴들을 보면 평온함과 행복이 느껴진다. 반면...

 

 

 

 

도라 마르 Dora Maar -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낳을 수 있게 했던 여자라는 평. 사진작가이며 그 스스로도 예술가여서 피카소 자신도 스스로에게 영감을 주는 여자라고 불렀다고 함. 1936~1944년 사이 피카소의 연인이었지만, 자유분방한 피카소에게 너무 집착하다가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됐다. 피카소의 유명한 '우는 여자(위 그림)' 연작 그림이 바로 신경쇠약으로 피카소만 보면 눈물을 흘렸다는 도라 마르를 모델로 한 것이다.

 

마리 테레즈를 그린 그림과 뒷날의 도라 마르를 그린 그림 만큼 그 여자들의 의미를 잘 보여주는 비교도 없을 듯.

 

 

 

 

 

프랑수아즈 질루 Francoise Gilot - 가장 얘깃거리가 많은 여자다. 1943년, 62세의 피카소는 22세의 미술학도 를 만나 깊은 관계에 빠진다. 젊은 연인의 활력 덕분인지 이 시기의 피카소는 '고전 다시 그리기'의 새로운 세계에 진출한다.

 

 

 

이 그림도 지금은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지만, 이 그림을 그릴 무렵의 피카소는 자신감이 흘러 넘친 나머지 "야, 내 그림이 벨라스케스 그림보다 훨씬 낫지 않아?"하고 물어 많은 사람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화면 아래쪽의 개 그림에서 피카소의 유머 감각이 돋보인다. 이 개는 1992년, 바로 유명한 이 개의 모델이 된다.)

 

 

 

바로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모델인 코비 Cobi. 어딘가에서는 피카소가 키우던 개 이름이 바로 코비였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치 않다. 아무튼 잠시 곁길로 이야기가 샜다.

 

 

 

질루는 60이 넘은 피카소의 일방적인 만행과 왕자병, 그리고 끊이지 않는 젊은 여자들과의 스캔들에 피카소와 결별해 버린다. 그리고 나서 다른 식으로 피카소에게 복수를 했다. '피카소와의 삶 Life with Picasso'라는 자서전 풍의 책을 내면서, 한 해변에서 늙은 피카소가 큰 양산을 들고 젊은 자신을 공주처럼 모시고 따라다니는 장면의 사진을 표지로 사용한 것이다. 누가 봐도 '망할 놈의 영감, 어디 엿 좀 먹어 봐라' 라는 느낌이 강렬하다.

 

 

 

유사 이래 수많은 예술가들은 젊은 연인을 사귀면서 자신의 창의성을 유지했던 것 같다. 피카소 역시 젊은 여성들에게 끝없이 끌렸던 것이 바로 야수와 같은 창작력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다. 질루는 이에 대해 "그 '성스러운 괴물(sacred monster)'에게 자신을 희생하지 않은 여자는 나 뿐"이라며 피카소의 이기적인 모습을 고발했지만... 그렇게 해서 그 자신이 얻은 건 무엇일까 싶기도 하다. 아무튼 질루가 낳은 딸 팔로마 피카소는 뒷날 티파니의 보석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쳐 피카소의 자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됐다.

 

 

 

 

자클린 로케 Jacqueline Roque - 유로자전거나라 설명에선 '피카소도 결국 질루 이후 지친 탓인지 만년은 35세의 과부와 보냈다'고 되어 있었지만 다른 기록을 보면 피카소는 1953년 27세의 이혼녀 로케를 처음 만났다. 이 시기, 피카소는 도자기에 새롭게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61년, 80세의 피카소는 35세의 로케와 두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니까 로케 역시 피카소가 좋아했던 '젊은 여자'였다. 단지 오래 버틴 젊은 여자였을 뿐이다. 운이 따랐다면 피카소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이 '공식 아내'인 올가 코흘로바가 1955년 사망했다는 것. 그렇게 해서 로케는 피카소의 '아내 2호'가 됐다.

 

피카소의 두번째 결혼은 1973년 피카소의 죽음까지 이어졌다. 당연히 질루를 비롯해 수많은 과거의 연인들, 피카소의 '씨'를 낳은 엄마들이 재산에 대한 권리를 놓고 도전해 왔고, 로케는 이들과 맞서 '피카소의 아내' 자리를 지켰다. 그러던 1986년, 로케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설명에 따르면 로케는 피카소의 장례식에 다른 유족들의 접근을 막을 정도로 독점욕이 강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피카소 이야기 끝.

 

[물론 저는 미술사 전문가도 아니고, 바르셀로나를 다녀 온 여행객일 뿐입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제가 알고 있던 것들을 덧붙여 쓴 글입니다. 혹시 더 정확한 내용을 아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시면 가차없이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이런 이야기를 피카소가 쭈그리고 앉아 있던 카페에서 듣는 느낌도 색달랐다.

 

 

 

바르셀로나 시가 인증한 문화공간으로서의 표석. 바르셀로나 곳곳에 이런 식의 유적 인증 표지가 있다.

 

 

 

"아저씨, 제가 죽치고 있어도 뭐라고 안 해 주셔서 감사해도. 혹시 제가 뭐 해 드릴거라도 없을까요?"

"음. 너 곧잘 그리는 것 같은데 우리 가게 포스터 하나만 그려 봐라."

"포스터요?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로트렉 그림이 마음에 들더라구요."

 

뭐 대략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했을, 피카소가 그린 4Gats의 포스터.

 

이렇게 해서 첫 코스인 4Gats를 나서 피카소 미술관 Museo Picasso 로 간다.

 

 

 

 

 

 

좁다른 고딕 지구의 골목길을 수십번 꺾어져서 도착한 곳이 바로 피카소 미술관. 왜 피카소 미술관인데 철자에 하나도 들어 있지 않은 'B' 마크를 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바르셀로나 시의 공식 문장인 것 같기도 하다.

 

 

 

 

한 귀족 가문 저택을 개조해서 만들어진 덕분에 중정이 있는 고운 건물 구조가 그대로 드러나 있어 아름답다. 규모나 소장품의 수가 결코 어마어마하지는 않지만, 위의 이야기 속에서 여자들(!)과 함께 거론된 피카소의 시대별 변천사를 일목 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는, 잘 정돈된 미술관이었다. 입장료 11유로. 월요일 휴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특히나 이 글을 읽고 갔다면.^^

 

 

 

 

피카소 미술관에서 역시 다시 좁은 골목길을 내려오다 보면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넓어지면서 빛을 한껏 안고 나타나는 건물이 있다. 바로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성당 중 하나인 산타마리아 델 마르 Santa Maria del Mar.

 

1384년 완공될 당시에는 이 성당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찰랑찰랑 하는 해변이었다고 한다. 산타마리아는 잘 알려진대로 뱃사람들을 수호하는 역할.

 

 

 

 

고전적인 사원의 양식미가 잘 살아 있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처럼 전 세계에 단 하나 있는 아름다움과는 좀 다르지만, 아무튼 내부에 들어서면 위압감과 안정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유럽 대 성당의 느낌에 충실하다.

 

 

 

그렇지만 고전적이기만 하지는 않다. 수많은 스테인드 글라스 중에는 1992년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 하나 있다.

 

1992년은 바로 바르셀로나에서 월드컵이 열린 해.

 

 

자세히 보면 수많은 이니셜들이 쓰여 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 중 메달리스트들의 이름 철자를 이용해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다. 누가 찾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이 중에 황영조 선수의 이니셜이 있다고 한다.

 

눈 밝은 사람이 좀 찾아 주기 바란다. 내 눈엔 안 보여서.

 

 

 

 

 

7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산타마리아 델 마르는 여전히 예배를 보는 성당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카탈루냐 카톨릭의 상징인 검은 성모상.

 

본래의 검은 성모상은 이슬람 지배 초기, 이교에 대한 박해를 겁내 지하로 숨어들어갔던 시절의 유물이다. 그때도 처음부터 검은 색이었던 것은 아니고, 지하 동굴 성당에서 예배를 보려니 촛불이나 횃불의 그을음 때문에 성모상이 검게 변했다는 것. 그 전통을 기려 이렇게 지상에 나와 있는 성모상에도 검은 칠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리지널 검은 성모상은 바르셀로나 근교 도시 중 유명한 관광지인 몬세라트에서 볼 수 있다고.

  

 

 

이렇게 해서 오전 일정 끝. 한여름은 아니지만 바르셀로나의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오후엔 난데없이 바르셀로나 뒷골목에서 위대한 한국인과 마주치게 된다. 대체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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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싱어 아이유]

 

'히든싱어 2'의 아이유 편이 화제입니다. 아이유의 역대 최다 득표도 놀랍지만 아이유 모창 도전자로 출연했던 영국 출신의 샤넌(다음 검색어로는 섀넌^^), 걸그룹 투아이즈 멤버 김연준, 그리고 영국에서 온 또 다른 도전자 안나 등이 모두 화제의 대상입니다. 샤넌은 밤새 내내 포털 검색어에 남아 있더군요. 걸그룹 파이브걸스 멤버로 잠시 활동한 이력까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실 화제도 화제지만, 아이유 편은 '히든싱어' 제작진에게 '히든싱어'라는 프로그램이 또 한 단계 진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히든싱어'는 제작진에겐 매우 힘든 포맷입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디어는 2012년 연말 갑자기 나온 게 아닙니다. 많은 연출자들이 이 프로그램의 시놉시스를 검토했지만, 대부분 '제작 불가능'이라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 해도 모창의 어려움. '히든싱어'에 출연하는 가수들은 '말하자면 국민 가수'들입니다. 10년, 20년씩 히트곡을 계속해서 낳으며 정상에 군림하고 있는 가수들이죠. 이 가수들이 한해에도 수백명씩 나오는 새로운 도전자들에 맞서 자기의 자리를 지킨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만치 남과 확연히 차별화되는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이 가수들이 10년, 20년 씩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건 이미 '복제 불가능' 도장을 받은 상태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대중의 귀는 냉정합니다. 어지간하면 흉내낼 수 있는 가수에게 국민 가수의 특권을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선 경력은 짧지만 아이유도 마찬가지. 아이유는 이번 '히든싱어' 출연을 통해 '아이유는 왜 아이유인지' 를 확실하게 다시 한번 부각시켰습니다. 오히려 아이유도 '히든싱어'에 나올만 한 가수라는 점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2012년 이전에 '히든싱어' 아이디어를 접했던 연출자들은 '그게 말이 되냐'고 웃어 넘긴 것입니다. 반면 그 어려움을 극복했기 때문에 JTBC '히든싱어'는 대중에게 사랑받는 프로그램이 된 거죠. 그리고 더더욱 신승훈 조성모 편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선배 가수에 대한 존경과, 그렇게 되고 싶다는 열망이 100명의 청중으로 하여금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비슷한 효과를 낸 것이죠.

 

이쯤에서 다시 보는 신승훈 편 출연자 장진호의 우승 비결.

(물론 '신승훈의 배려'를 절대 빼놓을 수 없겠죠.^^)

 

 

 

 

'히든싱어'에 지난 1년간 20여명의 가수들이 출연하면서 시청자들의 기대 수준이 높아진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마 파일럿으로 제작됐던 박정현 편이나 김경호 편을 지금 다시 본다면, '어, 생각보다 안 비슷했잖아?'라고 생각할 시청자들도 꽤 있을 겁니다. 이런 프로그램을 처음 봤을 때 '우와, 다섯명이 나왔는데 다섯명이 다 박정현이네?' 했던 신기한 느낌은 점점 사라져 갑니다. 회를 거듭하면서 시청자들의 요령은 점점 늘어나고 전편보다 더 비슷한 모창능력자를 기대하게 되지만, 모창자들의 수준이 높아지는 데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나 백지영이나 윤도현 처럼 타고난 음색이 독특한 사람들을 똑같이 흉내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유 편은 도전자의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재미를 창출해 냈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도 간간이 모창 도전자들의 사연이 화제가 된 적은 있었지만, 아이유 편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주인공 가수와 '너무 비슷해서'가 아니라 '아주 똑같지는 않은데 이 아이도 주목할만 해!'라는 걸로는 아이유 편의 샤넌이 첫번째 케이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 방송을 못 보신 분이라면 샤넌의 이 노래를 놓치면 안 됩니다.

 

 

 

 

시청자들은 사년의 I dreamed a dream 을 들으면서 샤넌의 마음 속에 있는 간절한 꿈, 옆에 서 있는 아이유 처럼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읽었을 것입니다. 유영석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는 것도 이해가 갈 정도로 인상적인 가창이었죠.

 

(그런 의미에서 매우 적절한 선곡이었다는 느낌입니다.)

 

또 '히든싱어'에 출연한 가수 중 최연소인 아이유에게는 이날 샤넌과 김연준의 등장이 다른 누구보다 큰 의미로 다가왔을 듯 합니다. 아직 자신도 가수로 더 성장해야 할 나이에, 이미 자신을 우상으로 삼고 노력하고 있는 '후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됐을테니 말입니다. 이제 '선배로서의 책임'과 '가수로서 나이들어 간다는 것'에 대한 고민이 아이유에겐 더 큰 발전의 계기가 되겠죠.

 

 

 

 

이 그림은 유명한 앙리 마티스의 '춤 La Danza' 연작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최근 피게레스의 달리 미술관에서 본 살바도르 달리의 '풍자적 구성 Satirical compositon' 이라는 그림입니다. 달리가 19세 때 그린 그림. 아닌 분도 있겠지만 제게는 보자 마자 위 그림이 생각나게 하더군요.

 

작가들도 좋아하는 선배 작가의 문장을 통째로 베끼는 데서부터 문학 수업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나만의 개성을 얻기까지 남의 재능을 닮고자 노력하는 것은 장르를 불문하고 드문 일이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그렇게까지 닮으려는 노력을 보이는 후배들의 모습'을 즐기는 것도 '히든싱어'를 보는 즐거움이 될 듯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자신의 우상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려는 이유가 있겠죠. 그런 이유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꿈과 바로 연결될 것이고 말입니다.

 

언젠가는 '히든싱어'라는 프로그램이, 그런 미래의 스타들에게 한번쯤 '나도 이렇게 나의 우상과 닮으려고 애쓰던 시절이 있었지'라는 훈훈한 추억으로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P.S. 그나자나 샤넌 참 귀엽군요.

 

 

 

 

 

11세 때 '스타킹'에 출연한 모습.

 

 

 

그리고 이건 브래드 리틀과 함께 '오페라의 유령' 시연하던 모습.

 

 

 

 

현재까지는 파이브돌스 멤버로 잠시 활동하다가 솔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습니다.

 

과연 샤넌의 코리안 드림은 어떻게 될지, 앞으로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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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을 자고 나왔다. 이쯤에서 숙소 소개를 한번쯤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한다.

 

바르셀로나 in, 마드리드 out으로 일정을 잡았기 때문에 바르셀로나는 일단 스페인에 처음 발을 디디고 적응해야 하는 곳이라 질의응답이 꽤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숙소는 한인 민박으로 잡았다.

 

그 많은 바르셀로나의 한인 민박 가운데 까사꼬레아나 http://www.casacoreana.com 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손님을 많이 받을 수 없는 구조였고(더블 룸 하나, 트윈 룸 하나가 전부다) 둘째, 방마다 전용 욕실이 딸려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외에 '음식이 좋다!'는 부가적인 평가가 있었지만 그건 사실 직접 가 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나이 먹은 부부가 여행하면서 욕실이 딸리지 않은 방에서 묵는다는 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샤워를 하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서 다 씻고 물기를 닦은 뒤 속옷까지 갈아 입고 다시 복도로 나와 방으로 돌아간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번거롭다. 아, 물론 나도 대략 15년 전만 해도 그런 민박의 도미토리에서 자고 여행을 다녔다. 그때는 공동욕실을 쓰고, 칸막이 하나 없는 큰 방에서 다 같이 잤다. 그 시절에 누가 나에게 욕실이 딸린 방이어야 하기 때문에 민박집 방에 1박 85유로를 낸다고 했으면 미쳤다고 했겠지만, 사람이 그럴 때가 있었으면 안 그럴 때도 오는 법이다.^^

 

 

 

머문 방 사진. 쿠션이 지나치게 푹신한 느낌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깔끔하고 편안했다. 이 사진은 직접 찍은 게 아니고 http://www.casacoreana.com/ 에서 퍼 왔다.

 

하지만 방은 별 변수가 아니었다. 정말 놀란 건 아침 상을 받아 보고 나서다.

 

 

 

 

 

 

네 번의 아침이 모두 감동적이었는데 먹느라 정신을 뺏겨서 두번은 사진 찍을 생각을 못했다.

 

사실 평소 진밥 애호가인 본인은 건강을 생각해서 주신 현미밥이 너무 된밥이라 좀 먹기 힘들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박 하는 동안 제공된 식사가 너무나도 감격적이었다는 점은 꼭 강조하고 싶다. 정말이지 바르셀로나까지 가서 저런 아침밥을 먹게 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관광 정보는 덤. 주인댁 부부가 바르셀로나 안내 서적을 쓰셨던 분이다.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홈페이지에 없는 욕실 사진. 마루바닥이고, 하루에 사람 수대로 수건 1장씩이 제공된다. 비누, 샴푸, 헤어 드라이어는 기본 제공. 당연히 온수 무제한. 욕실에 창도 있어 습기를 뺄 수 있다.

 

위치는 지하철 5호선 산츠 역에서 걸어서 5분(진짜 5분). 전철로 바르셀로나 관광의 중심인 카탈루냐 광장까지 15분 정도 걸린다. 전철역까지 오가는 길 도중에 저렴한 중국 수퍼가 있어 간식거리며 과일 등을 살 수 있고 집에서 1분 거리에 꽤 괜찮은 식당이 있다(나중에 맛집으로 소개 예정).

 

뭐 숙소가 카탈루냐 광장에 있어 밤에 걸어서 숙소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일 듯 한데, 이 정도 거리에 조용하고 넉넉한 공간이 있는 것도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다른 숙소는 다른 숙소대로 장점이 있겠지만, 아무튼 숙소 선택은 대만족. 추천한다.

 

내친 김에 바르셀로나 교통 요령도 간단 설명.

 

지하철은 단기간 체류 예정이라면 T-10 이 매우 편리하다. 모든 전철역에 이렇게 생긴 판매기가 있다.

 

 

 

 

T-10이라고 써 있는 표를 사면 된다. 9.8유로. 명함 크기 정도의 종이 티켓이 나온다. 이걸로 지하철과 버스를 10회 탈 수 있다. 단 70분 이내 환승은 1회로 친다. 표 한장으로 둘이 나눠 쓸 수도 있다. 물론 2회씩 차감된다.

 

 

 

아래쪽은 뒷면. 한번 탈때마다 긴 숫자가 찍히는데, 마지막 숫자만 보면 된다. 그 숫자가 앞으로 탈 수 있는 횟수를 보여준다. 잘 보면 긴 숫자의 마지막 자리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걸 알 수 있다.

 

 

 

사실 바르셀로나 지하철이 그렇게 깨끗하거나 환상적이진 않다. 외국 나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지하철 만큼 삐까뻔쩍 깨끗하고 넓고 잘 관리된 전철은 없다고 봐도 좋다. 바르셀로나 지하철도 한국 지하철보다 작고 좁은데, 장점이 있다면 배차간격이 엄청나게 짧다. 차를 하나 보냈나 싶으면 금세 다음 차가 온다. 지루하게 기다린단 느낌이 거의 없다.

 

 

 

산츠 에스타시오 Sants Estacio 는 척 보면 알 수 있듯 '산츠 역'. 바르셀로나의 가장 대표적인 역이다. 주요 도시로의 연결은 모두 산츠 역을 이용한다.

 

 

 

타고 내릴 때 소르티다 Sortida(출구) 라는 표지만 보면 이용 준비 끝. 숙소의 위치가 누만시아 Numancia 거리였으니 '소르티다 누만시아'로 나가면 된다. 쉽지?

 

 

 

흔히 바르셀로나 관광객은 5호선(녹색선)만 잘 타면 된다고들 하는데 뭐 경험상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맨 오른쪽 끝의 산츠 역에서 두 정거장만 가면 몬주익 언덕/분수쇼/카탈루냐 미술관 등의 관광 거점인 에스빠냐 광장 Espanya 역이다.

 

해변 쪽으로 갈거면 Parallel(빠라옐? 뭐라고 읽는지 잘 모르겠음)이나 Drassanes에서 내리면 되고, 람블라 거리와 구 시가(고딕 지구)를 갈거라면 리쎄우 Liceu 나 카탈루냐 Catalunya 에서 내린다. 뭐 쇼핑이 목적이라면 그라시아 거리 Passig de Gracia 까지 가면 되고. 아래 숫자가 있는 역은 당연히 환승역이다.

 

 

까딸루냐 역에 내리면 당연히 소르티다를 보고 나갈 방향을 찾는다. 카탈루냐 광장에서 가장 많이 갈 방향은 당연히 람블라 거리 쪽. Rbla가 Rambla를 줄여 쓴 거다. 이 글자만 눈에 들어오면 지하철에서 헤맬 일은 없다.

 

아무튼 서울 사람을 기준으로 말하면, 바르셀로나는 매우 아담한 도시다. 지도상으로 멀어 보여도 사실은 골목 돌면 거기다. 서울에서 강 한번 건너면 기본이 30,40분인 거리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동 시간은 그리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택시 요금 체계가 약간 희한하긴 한데,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바르셀로나 택시 요금은 그리 비싼 편이 아니다. 최저 요금인 T1 체계와 할증인 T2, T3가 있다. 모두 기본요금은 2.05 유료인데 그 다음 Km당 요금이 다르다.

 

주의할 점은 평일 할증 시작 시간이 밤 12시가 아니라 저녁 8시라는 것. 그리고 토요일 밤과 일요일 밤은 T3가 적용된다. 뭐 그렇다는 얘긴데, 기왕 피곤해서 택시를 탔다면 할증도 그렇게 크게 긴장할 정도는 아니다.

 

아, 공항에서 밤에 시내로 들어갈 때에는 30유로 정도 나온다.

 

 

 

 

아무튼 교통안내는 여기까지. 둘쨋날도 매우 고된(?) 관광의 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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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무언입니다만...

 

그러니까 여행도 좀 다녀오고 하느라고 11월을 건너 뛴 걸 잊고 있었다는.

 

아무튼 한 분도 '왜 11월은 없냐'고 재촉해 주시지 않은 점도 약간 원망스럽습니다.

(전형적인 책임 떠넘기기)

 

뭐, 지나갔지만 아 11월엔 이런 것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봐 주시길.

 

대신 12월엔 정상적으로 퍼 올리겠습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11월의 문화가이드

 

잠시 훑어보니 클래식 쪽의 11월 라인업이 정말 화려해. 2~3일 모스크바 필, 11~12일엔 베를린 필 내한공연. 솔로이스트로는 정경화와 랑랑. 오페라의 해답게 예술의 전당에서만 네 편의 오페라가 올려지더군.

 

물론 베를린 필 공연(45만원짜리 R석은 약간 남아 있는지도) 7만원 짜리 C석은 아예 구하는게 불가능한 상황이야. 재수 좋게 구한다 해도, 과연 그런 공연에 7만원을 투자하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일까. 이게 바로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칼럼의 출발점이야.

 

그래. 45만원짜리 2장을 예매하면서 싸잖아. 베를린까지 가는 왕복 비행기표와 숙박료를 생각해 봐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틀린 말은 아니야). 단지 차는 안전이 최고라는 이유만으로 벤츠 S600을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물론 훌륭한 이유지).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좀 적은 비용으로 높은 문화적 효용을 누릴 수 있는 지혜를 나눌 필요가 있겠지. 그래서 이런 칼럼도 필요한 거고.

 

그런 의미에서 1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메조소프라노 막달레나 코체나(공연 포스터에 코제나라고 되어 있는데 체코 출신에 Kozena니까 코체나가 맞을 거야)의 첫 내한 공연에 한번 투자해봐. 사이먼 래틀 경을 못 보니 대신 그 부인을 만나 보라는 얘기만은 아니야.

 

코체나는 래틀과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늘씬한 미모라는 점 때문에 더 유명해진걸 부정할 순 없겠지만 가창력으로도 세계 정상급이야. 특히 이번 공연의 주 레퍼토리인 초기 바로크 시대 음악엔 더욱 강점이 있지. ‘카르멘류의 선곡으로 관객에게 아부하려는 공연이 아니라는 점에서 가산점. 좌석을 확인해 보니 2층 사이드가 5만원짜리 B석이야.

 

 

그 다음엔 112, 예술의전당 IBK 챔버홀에서 열리는 바흐, 피아졸라를 만나다를 추천하고 싶어. 두 작곡가 모두 시공을 초월한 팬덤을 갖고 있지만 이렇게 하나의 무대로 엮는 건 그리 보편적인 접근은 아니야. ‘브라질 풍의 바흐를 작곡한 빌라 로보스도 아니고 피아졸라?

 

주최측의 설명은 “17세기 클래식 음악계에서 바흐가 했던 역할과 피아졸라가 그 시대에 했던 역할을 비교한다는 건데, 무엇보다 두 개의 세계 모두, 혹은 둘 중 어느 한 쪽에만 익숙해 있는 청중이라면 이런 식의 조합이 음악적 소양을 넓히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될 거야. 특히나 전문가 해설이 덧붙여진 경우라면. 55천원과 33천원인데, 전에도 얘기했지만 IBK홀은 그리 큰 공연장이 아니므로 33천원이면 충분하다고 봐.

 

 

 

 

아낀 돈으론 김환기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 김환기, 영원을 노래하다를 보러 가.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에서 1228일까지. 사실 그 자리에 늘 있는 환기미술관이니 100주년 기념 전시라 해서 특별히 다를 게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에 부암동 나들이도 하고 그러는 거야.

 

마지막으로 책. 사실 11월의 책이라면 뭔가 좀 사색적인 내용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정작 권하고 싶은 책은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개인적으로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면서 읽은 여러 권의 책들 가운데 가장 바르셀로나에 가 보고 싶게 만든 책이기도 해. 물론 주의할 점은, 실질적인 가이드 북으로서의 역할은 전혀 하고 있지 않아. 몇 군데의 포스트를 소개하고 있긴 한데 정말 가 보라는 건지, 아니면 난 이런 데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건지 약간 경계가 불분명한 정도라고 보면 돼. 아무튼 책이 나온게 2006년이고 내가 산 2009년 이미 18쇄를 찍었으니 지금은 엄청나게 더 팔려 있겠지만, 일러스트만 봐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야. 1만원 내외.

 

사실 연극 당통의 죽음도 관심이 가긴 하는데 뷔히너의 원작을 읽어 본 것도 아니고, 이자람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추천하는 건 좀 부담스럽더라고. 다행히 하루 이틀에 끝나는 공연은 아니니까 본 사람들의 평을 눈여겨 보도록. 그럼 연말에 봐.

 

막달레나 코체나 내한공연    B 5만원

바흐, 피아졸라를 만나다      B 33천원

김환기, 영원을 노래하다   1만원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1만원

 

합계             103천원

 

 

 

 

막달레나 코체나의 노래 중 유명한 노래를 먼저 들어 봅니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의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 어떤 분은 이 노래의 제목이 '파리넬리'라고 알고 계시기도.^

 

 

 

 

 

 

다음은 코체나의 주 종목이라고 할 수 있는 바흐의 곡. 'B단조 미사(BWV 232)' 가운데서 '주님께 찬양 Laudamus Te' 입니다.

 

 

 

 

 

마지막은 래틀과의 협연.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베를린 필하모니와 함께 콘체르탄테 형식으로 '카르멘'을 공연한 적이 있는 듯 합니다. 그중 흔히 '집시의 노래'로 잘 알려진 '신나는 트라이앵글 소리 Les tringles des sistres tintaient' 부분입니다.

 

 

 

 

이걸로 11월은 조용히 건너 뛰고, 1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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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부터 야간 투어는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오랜 경험에 따라 '첫날은 일단 피곤하게'라는 원칙을 따르기로 했다. 첫날 무리해서 여정을 망치는 경우도 있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보다 무서운 건 시차의 극복이었다. 첫날 일정을 오후 7~8시 정도에 마감하고 쓰러져 잠들어 버리면 기껏 많이 자 봐야 밤 12시에서 새벽 1시 정도면 잠이 깬다. 그때부터 다시 자 보려는 부질없는 노력과, 다음날 일정까지 망치면 어쩌나 하는 스트레스가 매우 짜증스럽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가능한 한 첫날은 일찍 잠들어선 안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둘쨋날 기상 시간이 늦으면 늦을 수록 그 여행은 성공적일 가능성이 높았다.

 

 

 

바르셀로나 야경 투어는 람블라스 길 한 귀퉁이, 지하철 역으로 리세우 Liceu 역 부근에 있는 레이알 광장 Placa Reial 에서 시작됐다. 레이알 광장은 네 면이 건물로 둘러싸인 거의 정사각형의 공간이다.

 

 

 

사실 사진으로 보면 그럴듯하지만 결코 사진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 한복판의 랜드마크인 분수는 오물로 가득 차 있고, 주변 건물들의 아치에는 세월의 그을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노천 카페에서 먹고 마시며 금요일 밤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저분하다면 지저분한, 낭만적이라면 낭만적인 그런 장소였다.

 

그리고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색이 다른 가로등, 이게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이게 가우디의 데뷔작이라는 레이알 광장의 가로등. 본래 가스등으로 설계된 것이었다고 하나 "왜 니가 설계한대로 짓기만 하면 뭐든 왜 설치비가 두배씩 드는 거야"라는 시 당국의 반응 때문에 결국 1호 등인 이 등만 남고 나머지는 설치된 곳이 없다고 전한다. 비록 가우디의 건물들이 지금은 입장료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하지만, 건축 당시로 돌아가 보면 정말 경제적으로 성공한 곳이 없다.

 

아무튼 야경을 찍으면서 새로 산 카메라의 놀라운 성능에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이 밝기에서 삼각대도 없이 이 정도..?

 

마침내 가이드 도착. 야경 투어 출발.

 

 

 

 

 

이 지도에서 A라고 표시된 곳이 출발 지점인 레이알 광장, 그리고 B라고 표기된 곳이 일단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는 카탈루냐 음악당 Palau de la Música Catalana 이다. 위의 구글 지도상으로는 1.2Km, 도보로 약 15~20분 정도 거리라고 볼 수 있는데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빨리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닌 만큼, 약 1시간 동안 골목을 이리저리 돌며 지나간다. 위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카탈루냐 광장의 남쪽, 바르셀로나의 구 도심은 엄청나게 미로같은 골목과 골목의 연속이다.

 

그리고 지도 오른쪽의 동그라미 친 부분 바로 아래를 보면 El Gotic 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바로 이것이, 이 주변을 가리키는 이름인 '고딕 지구' 라는 뜻이다. 이 주변에 바르셀로나의 카테드랄 Cathedral, 왕의 광장 Placa del Rei, 그리고 시립 역사 박물관 등의 포인트가 있다. 비록 도착 첫날, 한밤중에 골목길을 빙빙 돌아 간 위치가 제대로 기억에 남을 리 없으나, 아무튼 나중에 지도상으로 확인해 보면 그렇다.

 

사실 저 위 지도가 커버하는 영역 안에 대부분의 관광객들이 찾는 바르셀로나 관광 포인트의 절반 가량이 들어 있다. 아무리 미로같은 골목의 연속이라지만 방향만 눈에 익으면, 바르셀로나 중심부에서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지도 왼쪽 윗부분의 미로처럼 표현된 카탈루냐 광장, 광장을 등지고 바로 오른쪽 아래(바다 방향)로 뻗은 라 람블라 La Rambla 거리,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라이에타나 길 Via Laietana 만 알면 절대 헤매지 않는다. 중간에서 아무리 헤매도 한 방향으로만 계속 가면 10분 내에 두 길 중 한 길과 만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뭐 이건 한참 나중의 이야기고, 일단 밤길을 즐겨 본다.

 

 

 

 

이렇게 가이드의 뒤통수만 보고 골목길 속으로 들어가는게 시작.

 

소니 RX100 2의 렌즈 밝기 때문에 길이 실제보다 밝아 보일 수 있다. 사실은 굉장히 컴컴하고 으슥한 골목이다.  

 

 

 

그런 좁은 길에도 수시로 자전거가 지나간다. 긴장은 해야 한다.

 

 

 

물론 모퉁이를 돌 때마다 수백년 전에 건설된 성벽의 잔해, 그리고 아치와 만날 수 있다.

 

(이 광장은 영화 '향수'의 무대가 되었다는 곳.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작은 광장 마다 쭈그리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금세 익숙해진다.

 

 

구 도심에는 높은 건물 없는 5~6층짜리 오래된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스페인 특유의 파티오 Patio, 즉 중정(中庭)을 갖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통으로 된 돌 건물 같지만 내부에는 뻥 뚫린 공간과 작은 정원이 있다는 뜻.

 

도시 경관 유지를 위해 건물의 외부를 수리하는 일에는 엄격한 제한이 있다. 이건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에 대부분 적용되는 규정이다. 그래서 실제로 내부에 들어가 보면 그렇게 오래된 건물이라는 느낌은 없다고 하지만, 건물 외관을 봐선 도저히 현대인이 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이 지역의 아파트들은 특히 엘리베이터 따위는 없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래도 도심 한복판인데다, 보기보다는 치안도 좋고, 무엇보다 유명한 바르셀로나의 고딕 지구에 살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집세는 꽤 비싼 편이라고 한다.  

 

아무튼 저 위 사진들이 페란 Ferran 거리, 아비뇽 Avignon 거리 등을 지나며 찍은 것들이다. 잠깐 아비뇽 거리? 그렇다.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에 나오는 바로 그 아비뇽 거리다. 피카소가 살던 무렵에는 도심의 집창촌이었고, 그 그림에 나오는 여자들 또한 거기서 일하는 매춘부들이었다는 얘기다.

 

 

 

이 아비뇽이 '아비뇽의 유수'로 유명한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거리 이름이었다니.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한다.

 

그 사연을 알고 나니, 이 그림이 그렇게 큰 비판의 대상이 된 이유가 단지 화법이 대담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피카소는 과감했다. 20세기 초에 누가 이렇게 누구나 입에 담기 꺼려 하는 창녀촌의 여자들을 올 누드로 그리고, 제목까지 명확하게 붙여 작품으로 내놓을 생각을 했을까 싶다.

 

 

 

 

사실 야경 투어 가이드의 방침 자체가 '분위기를 느껴보라는 보너스 투어' 형식이지 이해하라는 것이 아니어서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지나가다 보니 그럴싸한 건물 벽면에 뭔가 중요한 듯한 설명 명패가 붙어 있어 찍었다.

 

팔라우 델 라 헤네랄리타트 Palau de la Generalitat 는 '카탈루냐 자치정부 청사'라는 뜻. 팔라우는 스페인어로 궁전, 청사라는 뜻이고 헤네랄리타트는 카탈루냐 특유의 자치 시스템을 가리킨다고 한다.

 

 

 

이건 그 자치청사의 뒷골목. 건물과 건물 사이를 '행정적 편의'를 위해 연결해 놓은 모습이다. 공무원 건물이라지만 관광객이야 알 바 아니고, 밤에 보면 꽤 멋지다.

 

 

 

 

미로같은 건물마다 도로명이 써 있긴 하지만 초행자가 길 찾기란 매우 힘들다. 그래도 갈 사람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그리 규모가 크지 않아 위에서 말한 대로 어느 방향이든 한 방향으로만 계속 가면 람블라 거리나 라이에타나 길 중 하나를 만나게 되니까.

 

단 바르셀로나 뿐만 아니라 전 스페인 사람들에게 길을 물을 때 주의사항. 영어로 의사소통이 안 되거나 잘 모르는 듯한 사람을 만나면 빨리 패스하고 다른 사람을 섭외해야 한다. 상대방이 스페인어를 전혀 모르는 것이 분명한데도, 딱 잘라 이쪽인지 저쪽인지 말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뭔가 수다를 떤다. 특히 노인들이 이런 경향이 짙다. 마치 '너는 스페인어를 모르지. 하지만 내가 계속 하는 얘기를 듣고 있으면 너도 귀가 트여 우리 말을 이해할 수 있을거야'라는 신념을 갖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악의에서 하는 행동은 절대 아니겠지만, 바쁜 관광객의 입장에선 잡혀 있으면 좀... 곤란하다.

 

 

 

어둑어둑한 골목만 보면 마치 유령도시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그 골목 사이마다 카페나 바가 있고 사람들이 빼곡 들어차 술을 마시고 있다. '있을까' 싶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게 매력이다.

 

 

 

그 골목을 돌고 돌다 가게 된 곳이 유명한 포인트 중 하나인 왕의 광장 Placa del Rei. 저 아마추어 밴드가 공연하고 있는 계단이 바로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최대한 스페인 발음에 가깝게 하면 끄리스또발 꼴론)가 이사벨라 여왕에게 신대륙의 발견을 보고한 역사적인 자리다.

 

 

 

 

 

왜 이 자리에서? 하는 생각은 고개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면 사라진다. 이곳이 바로 스페인이 분할되었던 시대, 아라곤 Aragon 왕국의 궁전 앞이기 때문이다. 아라곤 왕국의 수도는 사라고사 Zaragoza 지만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에도 왕궁이 있었던 모양이다. 1492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초간단으로 설명하면, 아랍계 무어인들과 오랫동안 공존해 온 스페인의 기독교/유럽 세력은 강력한 국토 회복 운동을 벌여 수많은 지역이 몇 개의 왕국으로 통합되어 갔다. 그 결과 중부 스페인 대부분 지역을 다스리던 카스티야 왕국과 동남부, 아라곤과 카탈루냐, 발렌시아 등을 장악한 아라곤 왕국이 양강을 형성하게 됐다.

 

1479년 카스티야의 공주 이사벨과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가 결혼을 한다. 양쪽 모두 기득권 세력의 반대가 만만찮았지만 아무튼 통일과 국토 회복을 위한 대 결단이 내려졌고, 두 나라가 하나로 무혈 통합됐다. 그렇게 해서 국력이 두배가 된 이들은 1492년 1월, 그라나다에 있던 마지막 이슬람 세력을 무찌르고 기독교 스페인의 회복, 즉 레꽁께따 Reconquesta(철자를 보면 알 수 있지만 re-conquest, 즉 '재정복'이란 뜻이다. 레꽁께스따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s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를 완성한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같은 해 8월, 스폰서를 구하다 구하다 못 구한 콜럼버스가 이사벨 여왕의 후원을 얻어 서쪽으로 서쪽으로 인도를 발견하겠다고 가더니 결국 라틴 아메리카를 발견해 냈다(물론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도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도 동쪽의 어디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향료 대신 황금을 가져와 스페인의 전성시대를 연다. 1492년이 이토록 중요한 해였으므로 스페인에서는 그 500주년인 1992년, 바르셀로나에서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 것이다.

 

(참고로 아라곤이란 말을 듣는 순간 '반지의 제왕'의 비고 모텐슨을 떠올리며 꺅 소리를 내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그 아라곤은 Aragorn. 책에는 아예 아라고른이라고 써 있다.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과는 아무 상관 없이 톨킨이 만들어 낸 이름이다. 혹시 여기 오면 반지의 제왕과 관련된 뭔가가 있을까 기대하시는 분이 있을까봐 기우로 한마디 보태면, '반지의 제왕'은 판타지 소설이다. 제발 실제 역사와 판타지는 구별 해 주시길.^^)

 

 

 

 

이렇게 동상과 그림자를 이용한 조명 플레이도 꽤 멋지다. 누구 동상인지는 패스.^^

(지금 찾아보니 바르셀로나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라고 한다.)

 

 

 

왕궁의 한 귀퉁이. 지금은 이쪽 면이 라이에타나 대로변으로 나와 있다. 대로라고 해봐야 겨우 4차선 정도다.

 

 

 

뒤로 살짝 돌아 나오면 이것이 바로 바르셀로나의 카테드랄 Cathedral. 각 도시마다 있는 카테드랄은 그 도시의 수많은 성당들 중 본당을 의미한다. 당연히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에서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탈리아의 두오모와 거의 같은 역할이라고 보면 될 듯 하다.

 

...지만 바르셀로나의 카테드랄은 좀 서운할 수도 있을 듯 하다. 일단 세계적으로 유명한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지어지고 있는 한편, 남쪽 해변 가까이 있는 산타마리아 델 마르 성당에도 지명도 면에서 뒤지는 처지가 됐기 때문이다.

 

 

 

안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규모나 화려함 면에선 별로 뒤질 게 없어 보이는데... 안됐다.

 

 

 

거기서 길을 건너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카탈루냐 음악당이 나온다. 오페라의 전당인 리세우 Liceu 극장과 함께 바르셀로나 공연 문화의 상징이며, 이 도시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당대 가우디의 라이벌이라는 건축가 몬타네로의 작품이라는 데서 오는 자부심이고, 외벽만 봐도 꽃 장식이 요란하다. 심지어 내부 투어만 하는데도 입장료를 받는다.

 

내일 저녁에 공연을 보러 올 예정이므로 이 정도만.

 

 

 

 

아름다운 건 분명하나 명성에 비해 너무 좁은 골목길 안에 있어 건물 전체를 찍을 각도가 잘 나오지 않는다.

 

아무튼 여기서 불량 체력 관광객들은 일행과 결별.

 

나머지 일행은 한국의 리움 미술관도 설계했다는 세계적인 건축가 장 누벨 Jean Nouvel이 지은 바르셀로나의 새로운 명물, 아그바 타워 Agbar Tower를 보러 떠났지만, 이만 하면 숙면을 취하기 충분하겠다는 판단 아래 숙소로 향했다.

 

 

 

바로 이 건물. 저렇게 태극 색으로 반짝이는 야경 사진을 보면 가 볼걸 그랬다는 생각도 물씬물씬.

 

그런데 여행은 가서 배우고, 다녀 와서도 배운다. 막상 바르셀로나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명물로 아그바 타워도 있어요"라고 말할 때, "아, 런던에서 그거랑 똑같은 건물을 봤어요. 같은 사람이 지은 건가 보죠?"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네. 그렇다고들 하데요"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아니더라는 거지.

 

알고 보니 지은 사람이 달랐다.

 

 

 

이 건물이 런던에 있는 30 세인트 메리 엑스 30 St. Mary Axe(좀 길지만 건물 이름이 이렇다). 똑같이 생겼지만 이건 장 누벨이 아니라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 Norman Foster의 작품이었다. 이럴수가.

 

공법이 전혀 다르다 해도 외관이 이 정도로 비슷하면 표절 시비라도 이는 게 정상이 아닐까 싶기도 한데, 아무튼 런던과 바르셀로나에 있는 똑같이 생긴(바르셀로나에서는 '좌약 빌딩'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두 건물은 아버지가 달랐다. 놀라웠다.

 

이렇게 해서 첫날을 마무리.

 

둘째 날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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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La Sagrada Familia 는 서쪽 출입구 쪽 매표구로 입장해 다시 서쪽 출입구로 나오는 구조다. 입장료는 14.8 유로. 건물의 규모가 비교가 안 되는 카사 밀라나 카사 바트요에 비해 훨씬 싸다. 물론 한국 돈으로는 2만원이 넘지만 아무튼 현장에선 그렇게 느껴진다.

 

그리고 입장하는 순간, 전혀 본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화려한 천장 기둥 장식. 수백의 꽃송이가 기둥을 떠받친다.

 

 

 

감동이 밀려온다. 이 정도 규모의 성당이 없는 게 아니라, 성당에서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라는 게 감동적인 거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대성당의 천장을 찍었을 때, 기대되는 사진은 이런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유서깊은 산타마리아 델 마르 Santa Maria Del Mar 성당의 천장이다. 이런 비주얼도 매우 아름답지만, 이런 성당은 유럽 곳곳에 굉장히 많다. 그걸 가우디는 저렇게 획기적으로 바꿔 놓은 거다.

 

 

 

그야말로 기둥과 천장만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다.

 

여기에 뒤를 돌아보면 환장하게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한 채광.

 

 

 

 

 

이틀 뒤 카사 바트요에서도 느끼지만 가우디는 자연광을 실내로 끌어들여 이용하는데 진정 장신의 솜씨를 보여준다.  

 

하늘과 통하는 구멍 하나 정말 허투루 뚫린 것이 없을 정도.

 

 

 

 

 

 

 

 

 

그냥 이 안에서 살고 싶다. 다른 생각이 들질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첫날부터 너무 강한 걸 봤어...

 

사실 이 기막히게 아름다운 성당 내부가 일단 완공된 것은 2010년의 일이다. 2009년 이전에 바르셀로나를 방문한 사람은 이 내부 광경을 볼 수 없었던 거다. 만약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내가 죽기 전에 이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싶다"며 스페인 정부를 압박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이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일각에선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공사가 자꾸 늦어지는 것이 '가우디의 유작, 아직도 건설중'이라는 화제를 한없이 길게 끌고 가려는 스페인 관광청의 음모라는 설도 있었을 정도니까.

 

이래저래 말이 많은 베네딕토 16세지만 이 시점에서는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내부 구조를 소개한 모형. 그러니까 평면도를 보면 성가족성당의 내부는 이런 식으로 생겼다.

 

 

 

 

1번 쪽이 현재 관광객들이 출입하는 서쪽 출입구. 2번이 성당의 주 제단(High Altar)이 있는 북쪽(출입구가 없다), 3번이 가우디가 생전에 완성한 동쪽, 그리고 4번이 현재 공사중인 남쪽이다. 위 모형의 4번 계단으로 볼 때 전체 성당이 완공되면 남쪽이 주 출입구가 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것이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주 제단(High Altar).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평면도의 4번 방향에서 2번 방향의 주 제단을 바라보면 이런 모습이다. 그리고 좌우의 스테인드그라스로부터 휘황찬란한 빛이 들어와 온 성당을 광휘로 휘감는다. 말하자면 빛의 오르가즘이라고 표현할 만 하다.

 

 

 

어지럼증을 느끼게 하는 매혹적인 광경의 연속이다.

 

 

 

3번 방향에서 1번 방향을 본 그림. 사진의 왼쪽 끝 나선 계단 뒤편에 옥수수 모양을 한 파사드 중간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줄 길이가 장난 아니다. 그리고 내려오는 길은 바로 그 나선계단이다. 대략 보기에만도 상당히 어지럽고 폭도 매우 좁다. 참고로 엘리베이터는 추가 요금이 있는데, 굳이 타고 싶지 않았다.

 

 

 

가우디가 만들어낸 동쪽의 조각을 보고 '마치 바닷속에서 솟아 올라온 기괴한 산호초같은 형상'이라고 느꼈다면 동쪽의 이 기둥 장식을 보고 흐뭇해질 수도 있다. 이 거북 받침은 가우디가 성당 건설 과정에 바다의 이미지를 담고자 했음을 확인시켜준다.

 

이 동쪽 입구로 나오면 기념품 가게와 박물관으로 연결된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설과 관련된 도면, 모형, 사진자료, 스케치, 기타 등등이 꽤 방대하게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 마니아라면 이 박물관만 보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듯.

 

 

 

1926년. 가우디가 죽던 해까지의 공사 현장 사진이다.

 

 

 

 

가우디가 전철에 치어 죽었다는 것, 그리고 사망 당시 너무나 남루한 차림을 하고 있어 아무도 그가 그 유명한 가우디인지 몰랐고, 그래서 꽤 오랜 시간을 응급실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가 죽었다는 일화 등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1882년, 31세의 나이로 스승이 짓던 건물을 물려 받아 1926년 사망할 때까지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건설에 매진했던 가우디는 이 성당의 지하에 묻혔다. 그에게는 너무나 어울리는 영면의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묘소가 있다는 지하 기도실은 평소엔 개방하지 않는다.

 

이렇게 엿볼 수밖에 없었다.

 

 

 

 

매년 바르셀로나를 찾는 그 많은 관광객 가운데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찾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지만, 지금까지 내 두 눈으로 직접 본 인류의 구축물 가운데 이렇게 큰 충격을 준 건물은 없었다. 진정 탁월한 상상력과 그 구현체를 보고 싶은 자라면 하루 빨리 바르셀로나 행 항공편을 예약하라고 권하고 싶다.

 

오후 6시. 문 닫을 시간임을 알리는 경비원의 손짓이 아니었더라면 한참을 더 성당 관내에 앉아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유로자전거나라 투어의 가우디 투어 일정에는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떠나 람블라 거리에 있는 구엘 저택이 마지막 코스로 되어 있었지만, 중년 관광객에겐 하루 치의 체력과 감동을 느낄 능력이 모두 소진된 터라 여기서 일단 숙소로 향했다. 잠시 휴식으로 원기를 보충한 뒤 야간 투어를 따라 나서기 위해서였다.

 

아무튼 첫날. 하루 분의 감동으론 좀 지나치지 않았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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