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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2]

 

사실 '레드2' 를 보러 가서도 '레드'의 핵심 줄거리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했습니다. 3년이라면 요즘 블럭버스터의 속편 제작 주기에 비해 그리 긴 시간은 아닙니다. JJ 에이브럼스의 '스타트렉' 리부트 시리즈가 4년만에 나왔고, '다크나이트'와 '다크나이트 라이즈' 사이도 4년이었죠.

 

하지만 그리 전통있는 프랜차이즈라고 보기 힘든 '레드'의 경우 3년은 매우 긴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시리즈 간의 긴밀한 연속성을 제기하기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2'는 보는 시간 내내 영화의 길이를 느끼기 힘들었던 수작이었습니다. 생명존중과 같은 기본적인 윤리를 감안하면 참 막장형 영화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오락영화라고 생각하면 이만큼 충족감을 주는 영화도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순도 높은 '오락만을 위한 영화' 입니다.

 

 

 

 

전작에 이어지는 이야기. 왕년의 스파이 에이스 프랭크(브루스 윌리스)는 사라(메리 루이즈 파커)와 소시민으로 알콩달콩 생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료 마빈(존 말코비치)은 곧 폭풍이 밀어닥칠 것이라고 경고하고, 결국 프랭크와 사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누군가 설치한 폭탄에 의해 마빈이 타고 있는 차가 폭발해버립니다[스포일러 아님]. 그리고 마빈의 장례식장에서 프랭크는 기관원들에 의해 연행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는 전 세계를 무대로 전개됩니다. 프랭크 일당을 제거하기 위해 영국은 전편에서도 활약한 이들의 동료 빅토리아(헬렌 미렌)를, 미국은 세계 최고의 킬러 배한조씨(이병헌. 이 이름에 대해선 저 밑에 자세히 정리)를 기용합니다. 이들 사이에 프랭크와 과거 사연이 있었던 러시아 스파이 카티아(캐서린 제타 존스), MI6에 의해 연금된 천재 과학자 베일리(앤서니 홉킨스) 등이 엎치락 뒤치락 연루됩니다.

 

 

 

 

사실 사건의 전개 과정을 따라가는 데 뇌는 별로 쓸 필요가 없습니다. 한물 갔다고 생각했던 노장들이 실제로는 한창 팔팔한 현역들을 능가하는 기량의 소유자들이라는 스토리의 영화들은 이미 한두편이 아니죠. 최근작으로는 실베스터 스탤론 계열의 근육질 아저씨들이 대거 등장한 '익스펜더블' 시리즈가 있고, 추억의 영화로는 '지옥의 특전대'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됐던 Wild Geese(1978) 가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지옥의 특전대'의 주역인 리처드 버튼은 영화 개봉 당시 53세, 로저 무어는 51세, 리처드 해리스는 48세. 70년대에는 이 정도면 충분히 '노장'으로 불릴 만한 나이였죠. 반면 '레드2'의 브루스 윌리스는 58세, 존 말코비치는 60세. 헬렌 미렌은 68세. 앤서니 홉킨스는 76세... 평균 수명 연장과 과학의 발달에 따른 할리우드 스타 정년 연장이 실감납니다.)

 

 

 

 

아무튼 이 '지옥의 특전대' 때 이미 베테랑들의 노익장 과시 뿐만 아니라 정부의 음모에 대항한다는 주제는 완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21세기 판인 '레드' 시리즈에서 달라진 것은 좀 더 확실해진 인명 경시 사상. 영화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존 말코비치는 아예 브루스 윌리스에게 대놓고 "사람 죽인 지 한참 지나 인생이 지루하지 않냐"고 물어볼 정도입니다.

 

그 강력한 힘을 갖고도 사람 하나 죽일까 말까 30분씩(물론 영화상으로. 실제 시간은 더 걸릴 수도) 고민하는 슈퍼맨이나 배트맨이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이 분들은 태연히 살인을 저지릅니다. 컴퓨터 게임보다 더 자연스럽게. 그리고 플롯이 너무 단순해 비어 보일 수 있는 영화의 틈바구니는 세계적인 명배우들이 잘 알아서 메꿔 줍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빛나는 배우는 '여왕 폐하' 헬렌 미렌. 아마도 이 영화에서 헬렌 미렌이 미친 척 하기 위해 읊조리는 대사는 세실 어쩌고 하는 대목으로 봐서 2005년 출연했던 BBC 사극 '엘리자베스 1세'에 나오는 것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다 아시다시피 '더 퀸'에서는 현역 여왕 역으로 오스카를 따냈죠. (사실 정통 셰익스피어 극 출신인 이 양반은 젊어선 존 부어맨의 '엑스칼리버'에서 모르가나 여왕 역으로 팜므 파탈의 위용을 떨친 분입니다.)

 

아무튼 그런 관록을 스스로 희화화하기라도 하듯, 이 영화에서 미렌은 카리스마 넘치는 코믹 연기(영화를 보시면 이게 말이 된다는 걸 납득할 수 있습니다^^)로 관객을 압도합니다. 특히 이병헌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의 액션을 보면 '아. 이 영화의 주인공은 헬렌 미렌이구나'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됩니다.

 

 

 

 

물론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를 냉정하게 평가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박지성이 출전하는 맨유 경기나 류현진이 던지는 다저스 경기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병헌이 이 영화에서 어떻게 다뤄지는가가 매우 중요한 요건이 되는데, 이 무시무시한 배우들 속에서 이병헌의 모습을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즐거움을 줍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토르'의 아사노 타다노부 등에 비해 훨씬 돋보이는 역할이라 마음이 놓였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지아이조' 시리즈에 이어 너무 자객 이미지가 강화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사나다 히로유키의 '라스트 사무라이'처럼 딱 맞춤으로 떨어지는 작품이 주어지지 않는 이상 아시아 출신의 남자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이름과 얼굴을 알리자면 더 나은 선택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아무튼 적지 않은 나이에 영어 연기에 도전해 이 정도의 성취를 거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받을 만 합니다.

 

 

 

 

이 영화의 흥행 성과가 썩 시원치는 않아 이제 알 수 없는 상황이 됐지만, 만약 '레드3'가 만들어진다면 이병헌의 역할은 '꽃보다 할배'의 이서진이 될 수도 있을 듯 합니다. (해외의 이병헌 팬들은 이 영화를 통해 한국어의 '좆됐다'가 무슨 뜻인지 알았겠죠.^^)

 

나머지 배우들은 '딱 다 알만한 캐릭터'를 '딱 다 납득이 갈 만한 수준'으로 연기해 줍니다. 아쉬움도 없고, 그렇다고 큰 기대흘 할 만큼도 아닙니다. 극장에서 가치관이 바뀌기를 기대하지 않는 분이라면 충분히 만족할만한 오락 영화. 인생의 의미나 구원의 메시지를 찾고 있는 분들에겐 비추. 당연히 헬렌 미렌이나 존 말코비치를 모르는 분들에게도 비추.

 

 

 

P.S. 이병헌의 극중 캐릭터 이름은 Han Cho Bai 인데 이게 한국 이름이라면 '배한조'라고 봐야겠죠^^. 뭐 한일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는 미국 제작진이 이 캐릭터의 킬러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의 전설적인 닌자 핫토리 한조의 이름에서 대강 섞어 만든 듯 합니다만... 뭐 이런 영화에 그런 디테일까지 기대하기는 힘들 겠죠.

 

IMDB에 따르면 극중 이병헌의 어린 시절 사진에 나오는 분은 실제 이병헌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확인해 보지는 않았는데 아마 맞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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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대중문화 상품을 살펴보더라도 자국산 TV 드라마가 경쟁력을 갖고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나 자국 드라마가 해외에서도 인기 콘텐트인 나라는 더욱 적습니다.

 

이 부문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나라는 역시 미국과 영국입니다. 유럽의 선진국이라는 프랑스나 독일의 TV 편성표를 살펴보더라도 미제 드라마, '하우스'나 'CSI'가 프라임 타임에 편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미드'가 영 맥을 못 추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한국입니다. 자국산 드라마 콘텐트가 워낙 강력하기 때문에 세계적인 위력을 자랑하는 '셜록'이나 '왕좌의 게임' 조차도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합니다.

 

한국은 어떻게 해서 드라마 강국이 되었을까요. 1980년대 후반부터 인재들이 부단히 이 분야로 모여들고, 치열한 경쟁을 통해 좀 더 나은 콘텐트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으려는 노력이 끝없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강한 드라마'를 만든 절대 공로자 중 한 분이 어제 급서했습니다. 뜻하지 않게 원고 청탁이 와서 급하게 쓴 글입니다.

 

 

 

 

제목: 30년의 도전, 아쉬움 속에 끝맺다.

 

사극의 거장 이병훈PD는 후배 김종학 PD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1985년,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의 '임진왜란' 편을 찍을 때 이야기. 당시 급박한 촬영 일정 때문에 이PD는 한 후배에게 왜군들이 조선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가는 신을 부탁했다. 마침 추운 겨울이라 '엑스트라들 감기 들면 촬영이 어려워지니 신경 써서 찍으라'는 조언까지 했다. 이PD가 자기 신을 마치고 후배 PD의 촬영을 살피러 갔더니 조선 포로 엑스트라들이 맨발에 동저고리 차림으로 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당부까지 했는데. 화가 난 이 PD가 후배를 불러 따지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요, 왜병들이 포로를 잡아갈 때 옷이며 신발을 제대로 챙겨서 끌고 갈 것 같지 않더라구요. 그래야 시청자들도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는 말이라 더 이상 야단을 치지 않았다는 이 PD, 당시에도 '저렇게 독하니(?) 좋은 PD가 되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듬해, 입사 10년차인 후배 김종학은 '조선왕조500년'의 '회천문'을 연출했다.

 

 

 



김종학은 거대한 서사 속에서 운명에 맞서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모습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이문열 원작을 극화한 '영웅시대'와 '황제를 위하여' 는 그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작품이란 평을 들었다. 북한의 현실을 그린 '동토의 왕국' 에선 다큐멘터리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낯선 연극 배우들을 대거 브라운관에 데뷔시키기도 했다. 김홍신 원작 '인간시장'에선 무명 신인이던 박상원을 기용해 한국형 히어로 드라마의 원형을 제시했다.

 

 


물론 '연출가 김종학'을 정상으로 끌어올린 작품은 단연 1992년작 '여명의 눈동자' 였다. 김성종 원작, 송지나 각색의 '여명의 눈동자'는 일제 말~한국 전쟁까지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대치(최재성), 여옥(채시라), 하림(박상원)의 얽히고설킨 운명을 그렸다.

특히 이 시기를 다룬 한국 TV 드라마 중 최초로 이념의 벽을 넘은 작품이라 평가할 만 하다. 마지막 회, 빨치산 대장과 토벌군 장교로 만난 대치와 하림이 “우리의 자리가 언제 바뀌었어도 전혀 놀랍지 않았을 것”이라고 담담하게 대화하는 장면은 아직 반공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여운을 남겼다.

 

 

 


이 성공으로 MBC를 떠나 프리랜서가 된 김종학은 1994년 다시 한번 송지나 작가와 호흡을 맞춰 광주 민주화운동과 범죄 조직간의 암투를 그렸다. 제목은 '모래시계'. 최민수 고현정 등 호화 캐스팅이 뒷받침 된 '모래시계'는 60%대 시청률이란 전설로 '귀가시계'라는 별명을 얻었다. 개국 4년째였던 신생 방송사 SBS는 '모래시계'를 통해 비로소 메이저 방송사 중 하나에 들었다고 일컬어진다. 이후에도 도전은 계속됐다.

2002년작 '대망' 은 팩션 사극의 새 장을 열었고 2007년, 한류스타 배용준을 앞세운 판타지 블록버스터 '태왕사신기' 는 거대한 규모와 완성도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제작사 대표 김종학'은 '연출가 김종학'에 미치지 못했다. '태왕사신기'에 투입된 200억원의 제작비는 당시의 한류 드라마 시장의 매출 규모에 비해 지나친 규모였다.

 

 

 

 

작품에는 엄격했지만 스태프들에겐 너그러웠던 성품도 적자 폭을 늘리는 데 꽤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유작이 된 2012년작 '신의'는 이민호 김희선 등 한류스타들이 대거 등장한 판타지 드라마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시청률은 저조했고, 막대한 투자는 이번에도 큰 짐이 됐다.

결국 시청자들은 더 이상 '김종학표 드라마'를 볼 수 없게 됐다. '모래시계' 이후 김종학의 일관된 꿈은 영화 연출이었다. 그는 한동안 태평양전쟁을 배경으로 한 대작 영화의 제작에 몰두했으나 스스로의 완벽주의 때문에 계획은 자주 미뤄졌다. 그 동안에도 어린이 드라마,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천계영 원작 '오디션'을 아이돌을 소재로 개작하려는 기획도 진행중이었다. 일찍 정상에 섰지만 결코 안주하지 않은 도전 정신이야말로 '연출가 김종학'이 한국 방송사에 남긴 진정한 교훈이라 할 수 있다. (끝)

 

 

 

 

 

 

고인의 업적을 다 기술하긴 터무니없이 짧은 분량입니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작품들인 만큼 특별히 설명을 보탤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많은 후배들이 그를 가리켜 '역사를 아는 PD'라고 일컫습니다. 물론 송지나 작가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원작 소설 '여명의 눈동자'를 읽어 본 사람들일수록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감탄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원작의 인물 구성과 사건의 흐름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보다 균형 잡힌 역사관이 가미되면서 일종의 '반공문학'이던 원작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원작의 대치는 그냥 흉폭한 악역이지만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대치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 북으로 가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림 역시 이념이나 정치적 구도에 대한 고려 없이, 어찌 하다 보니 미군의 군속이 되어 남쪽 편에 서게 되죠.

 

이런 건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었던 설정입니다. 그래서 저 윗글에서 소개한 장면이 뭉클한 감동을 줬던 것이죠. (이 드라마는 제주 4.3사건을 다룬 최초의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내용 외에도 '여명의 눈동자'는 한국 드라마사에 길이 남을 수작입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둔 대치와 여옥이 "살아있어야 해! 살아있으면 만나게 돼 있어!"하고 절규하는 장면, 또 영국군의 추격을 피해 밀림을 횡단하던 대치가 뱀을 잡아 씹어먹던 장면 등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나 하나 거론하려면 날이 새도 모자랄 고인의 업적 중 하나는 탁월한 신인의 발굴입니다. 전혀 경력이 없는 신인을 발굴했다기 보다는, '그냥 그런 신인들 중 하나'를 찍어내 일약 스타로 만들어 내는 솜씨가 놀라웠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것이 '인간시장'의 박상원과 '모래시계'의 이정재입니다. 특히 이정재는 '모래시계' 이전에도 활동을 했고, '느낌' 등의 드라마를 통해 나름 꽤 인기를 얻은 청춘스타였습니다. 하지만 '모래시계'에서 말수 적은 보디가드 역할을 하면서 전 국민이 아는 주연급 스타로 승격됐죠.

 

오죽하면 이 역할 이후에 유망 남자 신인을 꾈 때 드라마 제작진이 단골로 하는 말 중에 "모래시계 이정재 같은 역"이라는 말이 생겼을까요.

 

 

 

 

그 외에도 '백야 3.98'에서 심은하의 아역이었던 이은주, 김경아(왕희지)의 아역이던 송혜교, '모래시계'에서 최민수의 아역이었던 김정현이 김종학 감독의 손끝을 통해 발굴됐습니다.

 

 

 

 

'태왕사신기'에서도 이지아와 이필립이 스타덤에 올랐죠(배용준의 아역이던 유승호는 원래 아역 스타였으니 빼겠습니다).

 

 

 

 

아무튼 어느 때든 드라마 촬영장에서 만나면 늘 "이것만 하고 영화 하려고" 하며 웃으시던 감독님. 이제 짐 다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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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시픽림]

 

군사 마니아들이나 시사에 밝은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한국 해군이 참가하는 국제 기동훈련 가운데 림팩(RIMPAC)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풀 네임은 'Rim of the Pacific Exercise' 인데 약자로 만들지 않고 가장 중요한 pacific과 rim만 따서 그냥 림팩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Rim of Pacific 이라고 쓰거나, Pacific Rim이라고 쓰거나, 결론은 모두 '태평양 연안(국)'을 말합니다. 그래서 처음엔 이 영화의 제목만 들었을 때 혹시 림팩 훈련과 관련 있는 해양 액션물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올 여름 최대의 기대작이었던 이 영화, 결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엄청난 물건이었습니다.

 

 

 

 

줄거리는 단순한 정도를 넘어섭니다. 2020년 언저리의 어느날, 갑자기 바다 속에서 카이주가 나타나 샌프란시스코를 공격합니다. 군의 출동으로 진압에 성공하지만 점점 강해지는 카이주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인류는 거대 로봇 예거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해서 인류는 거의 20년에 걸쳐 카이주와의 전쟁을 펼칩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예거 '집시 데인저'를 조종하던 에이스 파일럿 롤리 베켓(찰리 허냄)은 전투의 충격으로 일선을 떠나 공사판(?)을 전전하던 도중 옛 상관 팬터코스트 장군(이드리스 엘바)의 방문을 받습니다. 뭐 이유는 너무나 뻔합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자는 사연인 것이죠.

 

(이미 잘 아시겠지만 Jaeger는 독일어서 hunter라는 뜻, 그리고 카이주는 한자로 怪獸, 바로 우리가 보통 부르는 그 괴수의 일본식 발음입니다.)

 

아무튼 미리 말하자면, 이런 류의 '로봇 대 괴수'의 차고 때리고 부수는 대혈전을 실사로 볼 날을 꿈꿔왔던 많은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그야말로 꿈의 실현입니다. 신의 선물이죠. 그 밖의 분들은...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대만족.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 봤습니다.

 

 

 

 

 

이 영화의 국내 예매자 가운데 40~50대 남성의 비율이 무척 높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자녀들을 위한 예매'만으로 보기 힘든 요소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 로봇 만화의 전성기는 아무래도 70~80년대까지. 물론 90년대의 청춘들에겐 에반게리온이 있고, 이른바 '건담 왕조'라고 할만한 건담 시리즈는 최근까지도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지만 아무래도 진정한 메카물의 시대는 나가이 고의 마징가 연작과 겟타 로보가 활약하던 무렵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퍼시픽 림'은 메카물의 재현인 동시에, '울트라맨'에서 '고질라' 시리즈를 거쳐 '아이젠버그'로 이어지는 특촬물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한 작품입니다. DNA를 보자면 애니메이션의 실사화라기 보다는 특촬물의 고급화라고 보는 쪽이 더 정확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감독이면서 시나리오에도 참여한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일본적인 상상력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음을 전혀 감추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이 영화의 로봇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작품으로 '철인 28호'를 꼽기도 했죠.

 

 

 

 

액션의 사이즈를 보면 확실히 '퍼시픽 림'은 '마징가'보다는 '고질라' 류의 계승입니다(사진은 고질라의 라이벌인 가메라). 마징가Z가 20m 이내, 건담 시리즈가 30~40m인데 이 영화의 예거와 카이주들은 100m 언저리의 신장을 갖췄습니다(그렇습니다. '트랜스포머'류 보다 훨씬 큽니다). 꼬리 길이를 합해 200m라는 고질라급의 체격이죠. 어쨌든 이 덩치들이 펼치는 액션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통의 계승이 충실히 이뤄지다 보니, 돈 들인 티가 좔좔 흐르는 화면 한 구석에서도 어딘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괴수물을 다시 보는 듯한 정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괴수들이 도시 한복판에서 쿵쿵거리고 싸우는 동안 마분지로 만든 듯한 고층건물들이 무너지고 불타오르는 70년대 특촬물의 저렴한 느낌 말입니다. 특히나 어린 마코가 파괴된 도쿄 한복판에 숨어 있는 장면은 '고질라' 시리즈 중 한 장면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제목에 있는 질문의 답은 이렇습니다. '강렬하게 추억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잘 몰랐지만 메카물이 갖고 있는 현실적인 근거(혹은 현실적으로 보이기 위한 플롯)는 너무나 초라합니다. 일단 그런 초대형 로봇이 걸어서 이동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데다, 사용하는 무기나 기타 동작이 전혀 물리적인 기반을 갖추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화영화일 때에는 누가 뭐라 따지지 못할 수도 있지만, 만약 이걸 실사판 영화로 바꾸어 놓는다고 하면 엄청나게 유치하게 보일 곳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철인28호'를 비롯해 일본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애니메이션의 실사판 영화들이 개봉하자마자 욕설의 집중포화를 맞고 나오는 족족 침몰한 것도 이런 요소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런 요소를 충분히 고려해 지금까지 만들어진 것들 가운데 '가장 그럴싸하게 움직이는' 대형 로봇을 창조했습니다.

 

전투 장소까지 수십대의 대형 헬리콥터에 의해 이동하는 모습이나 로봇을 보관하기 위한 거대한 도크, 그리고 그런 전투가 가능하게 하기 위해 움직이는 엄청난 수의 보조 인력 등은 '로봇 만화'를 그냥 실사로 바꾸는 선을 넘어서, 어떻게 해서든 그런 로봇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세심하게 배치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수천톤 무게의 로봇이 펀치를 날리며 싸운다든가, 고공에서 맨땅에 떨어져도 멀쩡하다든가 하는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감독의 이런 세심한 노력 덕분에 '퍼시픽 림'을 보는 눈은 대단히 즐겁습니다.

 

그리고 '말이 되게 하기 위해' 일반 관객들이 과거 로봇물에 대해 갖고 있는 거의 무한정의 기대를 희생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칭찬할 만 합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뇌를 공유해야 로봇이 전력을 발휘해 싸울 수 있다든가 하는 드리프트라는 독특한 설정(어쩌면 '아이젠버그'에 나오는 '영이 철이 크로스!'의 발전된 형태...?^^)은 이 영화가 노리고 있는 특정한 줄거리를 펼쳐 나가기 위해 필수적이지만, 관객들을 당황하게 할 정도는 아닙니다.

 

로봇과 파일럿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싸울 수 있다는 설정은 이미 로봇이 공격당할 때 마다 파일럿이 그 공격당한 부위에 통증을 느끼는 일본 메카 만화의 전형적인 설정에 매우 충실한 것이기 때문에, 대다수 관객들에게 아무 무리 없이 전달됩니다.

 

(물론 왕년에 만화영화를 볼 때에는 좀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괴수 로봇이 마징가 제트의 눈을 드릴로 후벼 팔 때, 자기 눈을 움켜쥐고 괴로워하는 쇠돌이(카부토)를 보면서, 아니 그냥 조종만 하는 줄 알았더니 어느새 마징가와 쇠돌이는 신경이 연결되어 버린 거냐, 하고 당혹감을 느끼곤 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에반게리온'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연령 때문에 본 게 에반게리온밖에 없어서 그럴 수는 있겠지만, 사실 에반게리온에서는 수트 외에는 그다지 영향을 받은 게 없습니다. 아마 '철인28호'와 70년대 애니메이션을 모르시기 때문에 나온 얘기일 듯.)

 

 

 

뭐 델 토로가 이 그림- 고야의 '거인' - 을 연상하며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건 '진격의 거인'도 마찬가지라고 하죠.^ 이 그림이 갑자기 21세기 들어 각광받고 있는 듯.

 

그런데 아래 댓글 지적에 따라 찾아 보니 이 그림이 고야의 그림이 아니고 제자 아센시오 훌리오의 그림이라는 보도가 있었군요. 이 글과 직접 관련 있는 건 아니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기사 내용의 일부입니다.

 

(프라도미술관의 19세기 작품 담당인 호세 루이스 디에스 씨도 캔버스 왼쪽 아랫부분을 확대해본 결과 AJ라는 서명을 발견했으며 이것이 고야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아센시오 훌리아(Asensio Julia)의 이니셜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메나씨는 프라도미술관이 이 작품과 훌리야의 다른 작품들을 비교하고 추가 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이 그림이 고야의 작품이 아니라는 최종적인 결론은 유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148492)

 

 

 

사실 배우들에 대해서는 크게 언급할 거리가 없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거들과 카이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는 이 영화를 진정 사랑할 관객들(!)이 원하는 것도 그런 요소들이라는 점을 절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선 사실 별 기대할 게 없습니다. 그건 배우들이 그리 이름값을 할만큼 거물들이 아니어서이기도 하겠지만(뭐 이 정도 그래픽에 돈을 때려 부었는데 배우까지 비싼 인물들을 쓸 여력은 절대 없었겠죠. 특히 영화에 딱 한명 나오는 '동양인 미소녀'가 기쿠치 린코라니. 이런 젠장), 그보다는 애당초 줄거리에 별다른 공이 기울여지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대략 이런 식으로 사건이 진행됩니다. "자, 이런 영화 많이 보셨죠? 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대략 아시죠? 그럼 재미없는 부분은 대강 넘어갑니다?" 휘리릭.

 

그러다 보니 '퍼시픽 림'을 본 많은 사람들이 '비주얼은 볼만한데 뭐 내용은 하나도 없고...'라는 식의 평가를 합니다.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정말 내용은 별 게 없기 때문이죠.^ 오히려 주인공 롤리가 '인간적인 갈등'이나 '사랑에 가까운 감정'을 표현하거나, 펜터코스트 장군이 전 인류의 궐기를 호소하는 명연설을 펼칠 때에도 관객들은 '왜 이런 데 시간을 낭비하지?' 같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만치 '인간 대 인간이 겪는 감정'은 그냥 구색 맞추기 수준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네. 이 영화는 관객들이 "이봐, 이럴 시간 있으면 로보트를 1분이라도 더 보여주는게 어때?" 이런 생각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 분명합니다.

 

 

     (이건 마치 FSS...)

 

 

그래서 굳이 결론은 - 로봇과 괴수의 박진감 넘치는 결전 장면은 아마도 인류가 만들어 낸 영화 사상 최고의 볼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3D 효과 또한 역대 최강권입니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앞으로 모든 영화의 액션 신은 '맨 오브 스틸'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퍼시픽 림'을 봤다면 자신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느끼고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그 밖의 부분들에 대해서까지 높은 점수를 주기엔 '영화'로서의 플롯과 연기 등 '인간 캐릭터들이 해결해야 할 부분'이 매우 부실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의 평가는 꽤 엇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만족도는 '이런 장면을 얼마나 실사로 보기를 꿈꿔왔는가'에 따라 퍽 많이 나뉠 듯 합니다. 아마 저처럼 "제발 속편, 아니면 프리퀄이라도 계속 만들어 줘!"라고 외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겁니다.

 

 

 

 

P.S. 1. '이런 영화는 한스 짐머'의 공식을 깨고 라민 자바디(Ramin Djawadi)가 맡은 음악은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려 줍니다.

 

 

 

 

 

 

P.S.2. 미친 과학자 역으로 찰리 데이라는 배우가 나옵니다. 저는 당연히 샘 록웰인줄 알았습니다. 실수.

 

 

 

P.S.3. 관제탑 요원 역으로 나오는 텐도는 'Tendo Choi'라는 이름으로 보아 한국계 캐릭터인 것 같습니다. 물론 연기한 배우 클리프턴 콜린스 주니어는 아시안 혈통과는 아무 상관 없는 멕시코 계 미국인.

 

P.S.4. 분명 여기저기 봐도 설정엔 일본 예거가 있는데, 일본 예거가 이 영화에 나오긴 하나요? 보신 분 계시면 어느 장면인지 제보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artgihun?Redirect=Log&logNo=20190632696

 

P.S.5. 어이, 양덕들, 이제 건담이나 FSS를 실사판으로 만드는 게 어떨까? 아무래도 일본 친구들이 실사영화 만드는 솜씨는 이제 못 믿겠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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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꽤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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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종영한 드라마 '천명'은 마지막에 악인 문정왕후가 참회하고 인종이 왕으로서의 귄위를 회복하는 해피엔딩을 맞았습니다.

 

뭐 드라마야 시청자들이 행복한 결말에 만족했다면 그걸로 끝이겠습니다. 사실 사극이건 현대물이건,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질 때 반드시 현실 그대로 끝을 내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천명'이 다루고 있는 공간은 실제 역사에서는 그냥 도입부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인 듯 합니다. 드라마는 문정왕후의 뉘우침으로 마무리됐지만, 진정한 '문정왕후의 시대'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문정왕후 윤씨(1501.10.22~1565.4.6, 음력)

 

조선 중종의 두 번째 아내이자 명종의 어머니. 조선 왕조를 통틀어 손꼽히는 독부(毒婦)로 꼽힌다. 그가 죽은 날 조선왕조실록에는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했으니, 바로 윤씨 같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牝雞之晨, 惟家之索, 尹氏之謂也)’라는 극언이 등장한다. 물론 생전에는 감히 아무도 할 수 없었던 말이다.

 

중종의 첫 왕비(엄밀히 말하면 왕위에 오르기 전 진성대군일 때 혼인을 한 적이 있으니 아내로는 '두번째 아내'입니다) 장경왕후가 1515년 세자 호(, 뒷날의 인종)를 낳고 죽은지 2년 뒤, 문정왕후 윤씨는 만 16세의 나이로 왕비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궁의 최강자는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경빈 박씨. 출생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흥청(興淸, 연산군이 즐기기 위해 선발한 미녀들) 출신이라는 점, 1509년 아들 복성군을 낳았다는 점 등으로 미뤄 볼 때 윤씨보다 열 살은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인자 희빈 홍씨도 아들을 다섯이나 낳을 정도로 총애가 두터웠다.

 

중종이 연산군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것이 1506년. 이때 이미 경빈 박씨는 연산군이 고른 미녀들 중 하나였으니 대략 1500~1501년 전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연산군의 승은을 입지는 않았으니 중종에게도 차례(?)가 돌아왔을텐데, 1517년 문정왕후가 간택을 통해 궁에 들어올 즈음 경빈 박씨는 이미 궁 생활 10년을 넘긴 마녀 중의 마녀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경빈을 지원하던 쪽은 남곤 심정 등 훈구파의 구신들. 또 희빈 홍씨도 홍경주의 딸이었으니 아무리 문정왕후가 명문 파평윤씨가의 딸이라 해도 상대들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종은 경빈을 아예 계비로 삼으려 했으나 조정 대신들이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해 뜻을 접었다. 세자만 없다면 복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해도 놀랍지 않을 상황이었다.

 

문정왕후의 최선책은 아들을 낳는 것이었지만 그건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 1521년 의혜공주부터 딸만 내리 셋을 낳았다. 살기 위해선 내가 세자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며 경빈 세력과 맞서야 했다. 이 파란의 시기를 그린 작품이 월탄 박종화 대하소설 여인천하. 2001 SBS TV에서 장장 150회에 걸쳐 방송되며 공전의 인기를 누린 사극 여인천하의 원작이다.

 

 

 

 

당시 여인천하를 열심히 본 시청자들에겐 요즘 KBS 2TV ‘천명의 문정왕후(박지영)가 영 낯설다.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전인화)는 악녀 경빈(도지원)의 세력으로부터 어린 세자를 보호하는 지혜롭고 따뜻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명에서는 그 문정왕후가 인종(바로 그 세자)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좀 이상하지만 둘 다 실제 문정왕후의 모습이다.

 

1527,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으로 경빈이 몰락한다. 누군가 세자의 생일에 맞춰 불에 지진 쥐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건이다. 당연히 경빈 모자가 범인으로 지목돼 귀양길에 오른다.

 

중종은 어떻게든 복성군만은 살려 보려 했으나 윤임, 김안로 등 세자 보위 세력과 문정왕후의 동맹군은 집요했다. 6년 뒤인 1533, 사약이 내려졌다. 사실 경빈이 주범이라는 확증은 없었다. 오히려 이종익 같은 이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의 짓이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던 만큼 자작극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여인천하' 방송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천재 소년 세자 역의 아역 스타 권오민. 이 친구에 대해서도 전에 뭔가 쓴 적이 있습니다. 1997년생. 한창 폭풍의 나날을 보내고 있겠군요.

 

아역스타, 그 성장의 위기   http://fivecard.joins.com/121

 

물론 권오민 군이 위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1534, 문정왕후가 마침내 아들 경원대군(뒷날의 명종)을 낳으며 동맹이 깨졌다. 세자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었다. 1543년에는 동궁 처소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세자 부부가 죽을 뻔 했으나 유야무야 됐다.

 

결국 1544,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보위에 오르지만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한다.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이 파다한 가운데 열한살의 명종이 왕위를 이었다.

 

그러니까 드라마와 역사가 갈리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드라마 '천명'에선 '모든것이 정리되고 다들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식의 마무리가 있었지만, 인종이 왕위에 머문 기간은 다 합해 8개월 뿐이기 때문입니다.

 

최원(이동욱)이 "밖에서 잘 살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과연 인종이 죽고 문정왕후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뒤 그가 잘 살 수 있었을까요.^^

 

 

 

'여인천하' 보시던 분들에겐 참 아쉬운 일이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이런 현명하고 냉철한 전인화 문정왕후는 사라지고,

 

 

 

아들과 윤씨 일족, 그것도 윤원형 일족의 안녕을 위해 모든 장애물을 몸소 제거하기로 마음 먹은 독한 박지영 문정왕후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당시 권력 주변엔 윤씨 외척이 너무 많았다. 세조비 정희왕후,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중종의 정궁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모두 파평 윤씨였기 때문이다. 대동단결했다면 조선말의 안동 김씨가 부럽지 않았겠지만 윤씨들은 내부 경쟁을 선택했다. 특히 인종의 외숙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숙 윤원형의 소윤(小尹)은 마침내 명종 1(1545) 을사사화로 충돌, 수백명의 피를 흘렸다. 여기서 승리한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묵인 아래 친형인 윤원로까지 죽이고 권력을 독점했다.

 

문정왕후가 사관들에게 치열한 공격을 받은 것은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윤원형의 독재를 비호한 잘못이 가장 컸다. 명종도 윤원형을 견제하려 했으나 어머니가 네가 누구 덕에 왕이 됐는지 아느냐고 윽박지르는 데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20년 세도 끝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자(1565) 곧바로 윤원형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쏟아졌고, 궁지에 몰린 윤원형도 자결했다. 그의 부패와 만행이 얼마나 심했는지 실록은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다가 마침내 죽으니 조야가 모두 기쁘게 여겼다. (중략) 극형을 받지 않고 스스로 죽은 것이 안타깝다고 했을 정도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거론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정난정(위 사진은 '여인천하' 때의 윤원형-정난정 커플)입니다. 천민 출신으로 윤원형의 소실이었던 난정은 문정왕후의 인정을 받으며 마침내 윤원형의 정실이 되어 정경부인의 칭호를 허락받습니다. 대단한 신분 상승인 셈이죠.

 

하지만 뒤를 봐 주던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의 만행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황해도로 귀양가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예감한 정난정은 지니고 있던 독약으로 바로 목숨을 끊었고, 난정의 죽음을 안 윤원형 역시 통곡하다가 따라 자살했습니다.

 

(이런 사연을 보면 비록 악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정난정에 대한 윤원형의 마음은 참 진실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남매는 사후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다음 임금인 선조 때 사림은 심의겸의 서인과 김효원의 동인으로 갈라졌다. 동인은 심의겸이 외척(명종의 처남)이란 이유로, 서인은 김효원이 한때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며 날을 세웠다. 서로 상대방을 타락한 구세력의 잔재로 규정하고 명분 싸움을 벌였으니, 당쟁의 기원이 바로 문정왕후의 정치적 유산이었던 셈이다.

 

윤원형은 본래 사림의 언관 출신이라 지식인들을 어떻게 억누르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문관들의 인사권을 좌우하는 이조전랑직을 관리하면서 젊은 신진 관료들이 자신 앞에 스스로 줄을 서도록 한 것이죠. 유학 하는 선비로서 관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윤원형에게 잘 보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윤원형의 시대를 정리한 뒤에도 조정에 윤원형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이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조차도 윤원형의 세도가 시퍼렇던 시절에 벼슬을 하고 과거에 장원을 했다는 이유로 '세상에 아부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윤원형도 죽고, 명종도 죽으면서 사림의 정치가 시작됐지만 이제 사림은 그 내부에서 파가 갈리며 권력 독점을 위해 경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대편을 비방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는 바로 '윤원형의 개' 혹은 '구시대의 잔류'라는 것이 되죠.

 

 

 

P.S. ‘여인천하천명만큼 중요한 역할은 아니지만 한류 드라마의 대표작 대장금에도 문정왕후가 등장했다. 박정숙이 연기한 이 문정왕후는 장금의 후원자로 그려졌으니 당연히 좋은 이미지.

 

실존인물인 의녀 장금은 천명에도 등장하는데, 이 장금(김미경)은 궁에서 홀몸으로 늙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럼 민정호(지진희)와의 러브스토리는?

 

 

여담이지만 영화 '후궁'에서 박지영이 연기했던 대비 역시 문정왕후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그 이미지 때문에 '천명'에도 이어 출연하게 된 것으로 보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후궁'에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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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리즈시절'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됩니다. 대략의 의미를 알고 쓰시는 분도 있고, 그냥 남들이 쓰니까 쓰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가끔 꽤 엉뚱한 의미로 쓰시는 분들이 눈에 띄는게 조금 거슬립니다.

 

사실 '리즈시절'같은 말은 세월이 얼마가 흐르든 절대 사전 같은 곳에 등재될 말도 아니고, 누가 그런 의미에 크게 얽매일 말도 아닙니다. 하지만 '리즈 시절'같은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은 분명 그 사회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고, 왜 그런 말이 등장하게 되었는지 정도는 누군가 정리할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

 

[문화어 사전]이란 항목으로 나오는 글들은 그런 목적에 따른 것들입니다.

 

 

 

 

 

리즈 시절 [관용구]

: 간단히 말해전성기

2005년 박지성이 전통의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을 때, 같은 맨유 소속이던 앨런 스미스를 두고 일부 팬들이앨런 스미스도 리즈 시절엔 날아다녔는데라며 자신의 축구 지식을 자랑한 것이 유래다.

 

여기서 리즈(Leeds)는 영국의 프로 축구 클럽 리즈 유나이티드를 말하며, 이는 곧나는 박지성 때문에 영국 프로 축구에 관심을 가진 너희와는 달라라는 잘난 척이다. 하지만 이후 ‘OOO의 리즈 시절이라는 식의 관용구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연예인을 지칭할 때에도 널리 사용되며옛날’ ‘성형 전’, 심지어학생 시절을 가리키는 말로 오용되는 사례가 눈에 띈다. 하지만 원 뜻은 어디까지나가장 빛나던 시절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리즈 유나이티드는 21세기 들어 무리한 구단 운영으로 성적이 추락, 2004 2부 리그로 강등된 이후 1(프리미어 리그)에 올라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따라서 국내 축구 팬들이 안방에서 리즈 유나이티드의 경기를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저 위 사진이 바로 리즈 유나이티드 엠블렘을 자랑스럽게 들어 올리고 있는 앨런 스미스입니다. 2000-2001 시즌 리즈를 UEFA챔피언스리그 4강까지 올려놓은 것이 앨런 스미스의 선수생활 중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즈가 몰락한 것은 위에서 적은 바와 같고, 팀 말고 앨런 스미스 개인으로 봐도 98-99 시즌 EPL에 데뷔해 리즈에서 뛴 첫 6년 동안 38골을 넣었고, 다른 팀으로 이적한 뒤 현재까지 10년 동안 10골을 넣었으니 확실히 리즈 시절이 그에겐 최고의 나날이었던 듯 합니다. 아무튼 당시엔 벤 애플렉을 연상시키는 미모가 매우 출중했군요.

 

결론적으로 '리즈 시절'이라는 말은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란 뜻입니다. 그냥 '옛날', 심지어 '사람들이 잘 모르던 시절'이란 뜻으로 쓰시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진에도 '리즈 시절'이라는 제목이 붙어 돌아다니는데, 물론 재미있긴 하지만 이런게 '리즈 시절'은 아니라는 거죠.^^ 뭐 말의 의미라는 것이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니 계속 쓰이다 보면 아예 이런게 '리즈 시절'이란 뜻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송혜교는 여전히 리즈 시절의 한복판이군요. 시들지 않는 미모와 인기.

 

 

 

 

 

 

미란이[고유명사]

 

올란도 블룸의 아내인 세계적인 톱모델 미란다 커(Miranda Kerr)를 한국 팬들이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 퍼스트네임인 미란다와 한국 여자 이름인미란의 발음 유사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식의한국식 명명은 한국인 특유의 가족주의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레이 아나토미로 유명한 캐서린 헤이글은 한국 소녀 네일리(Naleigh)를 입양한 덕분에김서린이라고 불린다.

 

 

 

이 계열에서석호필(石虎弼)’ 웬트워스 밀러를 빼놓을 수 없다. 밀러가프리즌 브레이크에서 맡았던 캐릭터 이름인 스코필드를 한국식으로 변형한 이름인데, 사실 이 이름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 박사가 원조다. 스코필드 박사는 3.1운동을 서구에 알린 공로 등으로 1968년 건국훈장 독립훈장을 수상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 리스트는 1627년 풍랑에 밀려 도착한 네덜란드인 얀 벨테브레(Jan Weltevree)에 도달한다(흔히한국에 도래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오인되는 하멜보다 26년 빠르다). 끝내 조선을 탈출한 하멜과 달리 벨테브레는 박연(朴燕)이란 한국 이름으로 적응해 잘 살았고, 병자호란에도 종군했다. ‘하멜 표류기에도 박연이 하멜의 탈주를 말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후 구한말엔 고종의 외교 고문 목인덕(穆麟德, 독일인 파울 폰 묄렌도르프), 영국 언론인 배설(裵說, 어니스트 베델), 연희전문 설립자 원두우(元杜尤, 미국 선교사 호레이스 언더우드) 등이 이 전통을 이었다. 물론 거스 히딩크의 애칭 희동구(喜東丘)도 이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뭐 한두분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 거론하기는 그렇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가문을 꼽으라면 아에 '연희 원씨'라고 스스로 부르는 언더우드 패밀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원두우-원한경-원일한-원한광 박사에 이르기까지 4대가 120년간 한국과 인연을 맺은 집안이니 누가 이분들을 외국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희동구 이야기는 전에도 거론한 적이 있으니 링크로 대신합니다.^^

히딩크는 왜 희동구가 되었나?     http://fivecard.joins.com/43

 

 

소공녀(小孔女) [명사]

 

: 모공이 작아 HDTV의 압박을 견딜 수 있는 피부 미인

 

한자가 다른소공녀(小公女)’는 미국 여류 작가 프랜시스 버넷이 1888년 펴낸 소설 ‘Little Princess’의 일본 번역판 제목. 한국에도 같은 제목으로 소개된 뒤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오랜 기간 동안 사랑받아왔다. 부유한 장교의 딸로 민친 기숙여학교 학생이던 사라 크루(Sara Crewe)  아버지가 행방불명 된 뒤 학교의 하녀로 신분이 급전직하되지만, 강인하고 낙관적인 성격으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이야기다.

 

하지만 2013년의소공녀(小孔女)’는 글자 그대로모공(毛孔)이 작은 여자라는 뜻. HDTV의 등장 이후 많은 여자 연예인들이피부나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고화질에 대한 공포를 호소해 왔고, 그 뒤로 피부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됐다. ‘도자기 피부’ ‘단백질 인형등의 표현이 대표적이며 급기야소공녀까지 등장했다.

 

2013 5월 한 유명 피부클리닉에서 내원객 547명을 대상으로최강의 소공녀를 설문조사한 결과 미스A의 멤버 수지가 35%의 지지로 당당 1위에 뽑혔다. 19세의 나이를 생각하면 불공평한 결과일 수도 있겠으나, 그만치아기 피부에 대한 여성들의 염원을 반영한 결과로 보인다.

 

P.S. 소설소공녀의 영원한 파트너인소공자(小公子)는 같은 프랜시스 버넷이 1886년 펴낸 ‘Little Lord Fauntleroy’의 번역판 제목. 두 작품이 한 작가의 작품이란 것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뉴욕에서 홀어머니와 함께 살던 소년 세드릭(Cedric)이 어느날 영국 귀족인 할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후계자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건너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미국 여자와 결혼한 아들을 버렸던 완고한 할아버지가 영리하고 품성 좋은 소년 세드릭의 힘으로 인간미를 되찾게 되는 훈훈한 이야기다.

 

버넷은소공자’, ‘소공녀는 물론 1909년작비밀의 화원(Secret Garden)’으로도 명성을 얻었다. 물론 현빈 하지원 주연의 드라마와는 무관한 내용이다.

 

 

 

 

 

프란시스 버넷 여사는 작품세계와는 달리 매우 씩씩하게(?) 생긴 분이더군요.

 

 

아무튼 소공자, 소공녀, 비밀의 화원을 모두 같은 분이 썼다는 것 정도는 기억하셔도 좋은 일일 듯. 참고로 JTBC에서도 곧 전현무-오상진-오현경이 진행하는 '비밀의 화원'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방송됩니다. 아, 물론 이것도 소설과는 무관한 미스코리아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잘 찾아 보시면 보너스 사진이 있습니다. 인디애나 존스3 스타일.^^

 

 

http://www.egotastic.com/photos/miranda-kerr-topless-surprise-during-photoshoot-in-miami/miranda-kerr-topless-surprise-in-miami-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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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중학교 교사의 블로그에서 가슴아픈 사연을 봤습니다. '요즘 제자들과 진격의 거인 때문에 대화가 통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게 왜 가슴아픈 사연일까요? 이유는 하나. "그 전까지 제자들이 어떤 만화도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랍니다.

 

요즘 학생들 사이에서 '덕후'는 아주 심한 욕에 가깝고,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답니다. 그리고 절대 다수의 학생들은 만화를 볼래야 볼 시간이 없다는군요. 그래서 원피스도, 슬램덩크도 본 사람이 없답니다. '요즘 학생들이 호연지기가 없는 건 좋은 만화를 보고 자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란 말에 저도 좀 가슴이 아팠습니다.

 

'진격의 거인'이 훌륭한 작품인 건 맞지만 과연 '슬램덩크'처럼 많은 소년들의 가슴에(소녀들은 어떤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청춘의 불꽃을 타오르게 할 그런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운지도.

 

아무튼 이번 '문화어사전'은 진격의 거인으로 시작합니다.

 

 

 

 

 

문화어사전 (4)

 

진격의 [관형사]

 

: 엄청나게 큰, 매우 크고 위협적인, 도저히 당할 수 없는

 

만화 진격의 거인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말. 진격의 거인(원제 進擊巨人)지난 2009년부터 일본 소년 매거진에 연재중인 이사야마 하지메(諫山創)의 장편 만화. 27세의 신예가 그린 작품이라기엔 놀라울 정도로 탄탄한 구성과 획기적인 세계관으로 온갖 상을 휩쓸었고 단행본 판매도 일찌감치 100만부를 돌파, 2013년부터는 TV 애니메이션으로도 방송중이다.

 

배경은 인류가 갑자기 나타난 거인들의 습격으로 멸종 직전인 가상의 시대. 살아님은 인류는 높이 50m 성벽 도시 안에 대피해 일시적이나마 평온을 유지하게 된 지 100년이 흘렀다. 하지만 어느날,  그 성벽 위를 넘겨다 볼 수 있는 초대형 거인이 등장하며 한 순간에 인류는 다시 생존을 위협받게 된다.

 

 

 

 

만화의 인기와 함께 수없이 많은 패러디가 등장했다. 가장 자주 패러디되는 것은 초대형 거인이 성벽 너머로 인류를 바라보는 첫 장면과 그 장면에 깔리는 그 날, 인류는 떠올렸다. 놈들이 지배하던 공포를. 새장 속에 갇혀 지낸 굴욕을이라는 대사다. (추천 검색어: ‘진격의 맥도날드’, ‘진격의 금붕어’) 최근 무한도전에서도 정준하의 신체적 위력을 진격의 준하라는 자막으로 빗대 표현하는 등, 터무니없이 크거나 강력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자주 사용된다.

 

P.S. ‘進擊巨人이란 일본어 제목과 ‘Attack on titan’이라는 영어 제목 사이엔 뭔가 괴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진격의 거인이란 한글 제목도, 한국어의 의미에 맞추려면 거인의 진격이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이게 바로 진격의 장미칼입니다.

(원작을 모르는 분들은 덜 재미있을 수 있는...^^)

 

여담이지만 진격 시리즈를 잠시 소개합니다.

 

 

 

         진격의 금붕어

 

 

 

           진격의 백금붕어

 

 

  진격의 맥도날드

 

 

 

사랑과 진격 ㅋㅋㅋ

 

 

 진격의 식욕

 

 

 

 

 

그리고 진격의 축구공

 

 

 

죄송합니다. 이건 패러디는 아니군요.^^

 

이 축구공은 지금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보는 즉시 인증샷을 찍어 두시기 바랍니다. 찍어 두시면 좋은 일이 있습니다.

 

http://home.jtbc.co.kr/Event/Event.aspx?prog_id=PR10010216&menu_id=PM10018402

 

모든 이벤트는 중복응모가 가능합니다.^^

 

 

 

 

가짜 싸이 [고유명사]

본명: 드니 재완 카레(Denis Jae Wan Carre)

2013년 칸 영화제에 등장했던 싸이와 닮은 인물. 신원이 밝혀지기 전에는 네티즌들에 의해 짜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의 정체는 드니 재완 카레라는 이름의 프랑스인. ‘재완이라는 미들 네임에서도 알 수 있듯 한국계 입양아다. 올해 34인 카레는 현지 인터뷰에서 지난해 9월 한 나이트클럽에서 사람들이 나를 가리키며 싸이다!’라고 외친 뒤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의 대 혼란이 벌어졌다. 이후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싸이가 내 인생을 바꿔 놨다고 밝혔다. 최근 나이트클럽 등에서 싸이 닮은꼴로 행사 등에 출연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인의 눈으론 그리 닮은 편이 아니지만 칸 현지에서는 진짜 싸이라고 믿은 사람이 상당수 있었던 것으로 보도됐다. 싸이도 대인배답게 재미있는 해프닝으로 받아들인 듯. 그가 개설한 페이스북 ’Gangnam Denis’도 칸 해프닝 이후 4000여명의 팬이 몰리는 등 인기 급상승중이다.

 

 

 

 

 

 

 

 

기내 라면 [명사]

: 항공 여객기 내에서 기내식 혹은 간식으로 먹는 라면

 

기내 라면이 정확하게 라면이냐 컵라면이냐를 구분하지 않은 보도 때문에 상당 기간 혼란이 있었다. 현재 국적기 규정에 따르면 1등석은 봉지 라면을 끓여서, 비즈니스석은 대형 컵라면을 익힌 뒤 그릇에 담아서, 그리고 이코노미석은 컵라면에 물을 부어 용기 그대로 서비스하는 것이 원칙이다. 컵라면이든 라면이든 1등석과 비즈니스석은 항상 제공 가능하지만, 이코노미석은 일부 노선에서만 제한적으로 공급된다.

 

최근 승무원 폭행 사건의 핵심으로 등장한 라면의 맛에 대해 본래 기내에서 먹는 라면은 맛이 없다는 주장이 일었다. 그 원인으로 신형 기종인 A380의 기내 전압이 안전 문제로 80V 이하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하지만 전압이 낮다는 것은 화력이 약한 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라면 조리의 달인이라면 큰 문제가 아니다.

진짜 이유는 여객기내의 낮은 기압이다.

 

표고 1m 고공의 정상 기압은 0.2기압. 물론 항공사들은 승객들이 고산병으로 쓰러지는 일을 막기 위해 인공 가압(pressurization)을 통해 기내 기압을 0.8기압 정도까지 올려 놓는다. 그래도 기내에서 물의 끓는점은 섭씨 80도 정도다. 높은 산에서 밥이 설익듯, 압력솥을 쓰지 않는 한 기내에서 알맞게 익은 라면을 먹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컵라면의 조리법이 애당초 끓이는 것이 아니라 불리는(macerate) 것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차이가 나겠느냐는 주장이 있다. 라면이 제공되지 않는 이코노미석에서도 승무원에게 잘 보여(“말만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라면을 얻어먹어 온 베테랑 승객들의 의견을 따르면, 기내에서 라면 맛 타령을 하는 것은 한마디로 배가 불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현재까지 등장한 설명 가운데 가장 설득력있는 쪽을 골랐습니다.

 

아무튼 저도 기내라면 참 좋아하는데요, 저도 곧 먹어 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까지 국적기를 타고 단 한번도 승무원이 불친절 근처에라도 간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가끔씩 불친절과 차별대우를 호소하시는 분들을 보면 대체 그 분들은 평소에 다른 서비스업 종사자들로부터, 혹은 회사 직원들이나 가족들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고 사시는지 참 궁금해지곤 합니다.

 

(아, 물론 승무원 말고 항공사의 다른 분야 직원들, 그리고 항공사의 업무 처리 스타일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한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특히 K 모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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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글에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를 잠시 비교했습니다. 본인은 비명에 가더라도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오르지 않고는 큰 차이가 있었죠.

 

게다가 소현세자는 아들들 뿐만 아니라 아내인 강빈까지 사약을 받고, 그 후손들이 대대로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됩니다. 한번 왕위에서 밀려나면 언제 반역의 무리로 몰릴 지 알 수 없는 '밀려난 왕손'의 운명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죠.

 

여기에 하나 더. 그래도 '북벌 정책(비록 실질적으론 큰 의미가 없었다고 하나)'을 시도하며 '기개 있는 왕'으로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 효종에게서도 실망스러운 모습이 보입니다. 바로 형의 자손들에 대한 대접이죠.

 

일부 드라마에선 효종이 소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 나오지만, 실상은 그럴만큼 여유롭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글에 이은 소현세자 2탄입니다. 순서대로 보시려면 여기를 먼저 들러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소현세자를 죽였나     http://fivecard.joins.com/1140

 

 

 

소현세자 (2)

 

1645 218, 백성들은 소현세자의 귀국을 앞다퉈 환영했다. 국가 차원의 경사였지만 이미 심사가 틀어진 왕은 퉁명스럽기만 했다.

 

공사견문은 인조의 성품에 대해 찡그리고 웃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무겁고 말이 없어 가까이 모시는 궁녀도 임금의 말을 자주 듣지 못했으며 여러 신하는 임금의 뜻이 어떤지 측량하지 못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내성적이고 감정표현이 별로 없던 인조의 내면엔 세자에 대한 미움이 계속 쌓이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던 소용 조씨의 역할도 컸다. 조씨 소생의 숭선군은 세자가 귀국하던 1645, 고작 만 여섯살의 어린아이였지만 어쨌든 왕위 계승의 자격이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소용 조씨, 공신 세력의 우려를 대변하는 김자점, 그리고 의심 많은 인조의 성품이 만난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423, 세자는 학질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24일과 25침을 맞았다는 기록 한 줄씩만을 남긴 채 26일 사망했다. 침을 놓은 사람은 인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어의 이형익이었다.

 

 

 '꽃들의 전쟁'에서 손병호가 연기하고 있는 이형익. 조선왕조실록은 꼭 집어 지목만 하지 않고 있을 뿐, 사실상 이형익의 손에 의해 소현세자가 죽음을 맞았을 것이라고 거의 적시하고 있습니다.

 

 

세자의 졸곡제를 다룬 실록 기사에는 온 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온 몸의 일곱 구멍에서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중략)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는 내용이 전한다. 사실상 독살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꽃들의 전쟁에서는 김자점(정성모)이 직접 이형익(손병호)에게 세자를 해치게 지시하는 장면이 나오고, ‘마의에서는 이형익(조덕현)이 다시 이명환(손창민)을 이용해 세자에게 독을 썼다는 설정이다.

 

 

'마의'에서는 그래서 이명환이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다시 이형익을 살해한다는 설정입니다. 직접 손을 쓴 것은 한 단계 더 거친 이명환이란 해석.

 

 

이형익은 심지어 소용 조씨의 어머니와 사통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으니 누가 봐도 그에게 혐의가 가는 것이 당연했다. 언관들이 당장 이형익을 조사하라고 들고 일어났지만 인조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그 뒤에도 수시로 이형익을 불러들여 침과 뜸으로 치료를 받았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인조는 62, 서둘러 대신들을 모아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하겠다고 밝혔다. 원칙대로라면 왕위계승의 우선권은 소현세자의 어린 세 아들에게 있었다. 하지만 대신들이 선뜻 동의하지 않자 인조는 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는 것이냐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때도 김자점이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앞장섰다.

 

흥미로운 것은 그해 113, 봉림대군의 감기가 낫지 않자 이번에도 의원 이형익이 침을 맞아야 낫는다고 간했다는 기록이다. 하지만 대군은 가벼운 감기라며 치료를 거절했고, 곧 회복했다. 만약 이 침을 맞았다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갔을까.

 

 

 

 

해가 바뀌어 1646 1, 인조는 수랏상의 전복구이에서 독이 나왔다며 진실 규명을 지시했다. 처음부터 소현세자빈 강씨를 용의자로 놓은 수사였다. 하지만 이때 이미 강빈은 궁중의 왕따 신세였고, 엄중한 감시의 대상이었다. 독을 반입해 어선에 넣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문이라는 좋은 수단이 있었고, 강빈의 하인들 가운데서 자백이 나왔다.

 

조정 대신들이 목숨만은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중국 조나라 무령왕의 예를 들며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맞섰다. 무령왕은 장남을 폐하고 차남을 후계자로 삼았다가 후계 구도를 놓고 분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궁에 유폐되어 굶어 죽은 인물이다. 누가 봐도 비슷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인조의 광기는 이미 통제의 범위를 넘어 있었다. 강빈은 사약을 받고, 어린 세 아들도 제주도에 유폐됐다. 그중 둘은 일찍 죽고(그 죽음의 원인 역시 밝혀지지 않았다), 막내 석견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아이가 추노의 그 아기다.

 

 

조나라 무령왕의 고사는 참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무령왕은 사실 당시 중국 남자의 하의(당시까지는 바지보다 치마에 가까웠던)를 개량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라!"는 개혁 조치를 한 긍정적인 고사로 자주 인용되는 인물입니다. 당시까지 오랑캐의 옷으로 간주되던 헐렁한 바지를 '말 타고 내리기 편하다'는 이유로 도입해 전국 7웅 중 하위권이던 조나라의 국력을 상위권으로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하지만 말년에 총기가 흐려진 탓인지, 다 자란 장남을 제쳐 놓고 후비가 낳은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한 뒤 양위합니다. 대개 이렇게 되면 장남이 정치적으로 제거되는 것이 수순이지만, 갑자기 장남이 불쌍해진 무령왕은 장남의 영토를 넓혀 조나라를 두개로 쪼개 상속할 궁리까지 합니다. 하지만 후비파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격분한 장남은 아버지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에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후비파에 유능한 장군들이 많이 포진하고 있어 반란은 가볍게 실패. 장남은 아버지 무령왕의 궁으로 달아납니다. 이미 왕위를 넘겨받은 후비와 어린 아들 쪽에선 장남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만 무령왕은 "내 아들인데 목숨만이라도 보존하게 해 달라"고 오히려 간청하죠.

 

밖에선 잔혹한 결단이 내려집니다. 장군들이 "만약 장남을 잡으러 들어갔다가 무령왕을 다치게 하는 날이면 우리는 당장은 아니라도 언젠가 그 죄 때문에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데 의견 일치를 본 것이죠. (이건 사실 또 얘기하려면 긴 얘기가 되어 여기선 생략하겠지만 병법의 대가 오자(오기)의 죽음 때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궁의 문을 밖에서 잠그고 아무도 나오고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한달이 지나 굶어 죽은 무령왕과 장남의 시체가 다 썩어 없어진 뒤에야 문을 열어 통곡을 하며 장사를 지낸 겁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은 맞지만 무령왕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것은 스스로 후계자를 잘못 고른 결과이니, 인조 자신이 강빈을 죽여야 하는 이유로는 매우 궁색합니다. 그리고 무령왕과 자신을 비교한 것은 소용 조씨 소생의 숭선군을 세자로 봉하겠다는 이야기로도 들립니다만, 결국 그렇게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시선에선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싶겠지만 김자점이나 소용 조씨에겐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행여라도 소현세자의 자손이 왕위를 차지하는 날이면 그들 자신은 물론 일가친척의 생명 또한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권력의 비정함은 효종에게서도 엿볼 수 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른 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홀로 남은 어린 조카 석견을 경안군으로 봉하고 서울로 불러 올렸지만, 형수 강빈의 억울함을 회복해주는 것은 딱 잘라 거절했다. 오히려 상소를 올려 강빈의 신원을 촉구한 김홍욱을 잡아다 때려 죽이기도 했다. 아무리 조카가 가엾어도, 그들에게 '역적의 자손'이라는 죄를 씻어 주고 나면 자신의 후손들이 계승할 왕좌가 불안해 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경안군은 1665년 만 21세로 죽었다. 두 아들을 낳아 후사를 이었으나, 맏손자 밀풍군은 영조 때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자결했다. 소현세자와 그 후손들에게 조선은 더없이 잔혹한 나라였다. ()

 

 

 

 

 

소현세자와 강빈이 죽은 뒤, 세 아들이 남았습니다. 인조가 서둘러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 소현세자가 죽은 뒤 왕위 계승 서열에서 각각 1,2,3위가 될 왕손들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게 된 이상 효종의 왕위 계승 경쟁자일 뿐입니다. 1647년, 이들은 처음엔 각각 흩어져 귀양을 갔다가 '서로 모여 살게 하라'는 인조의 은혜(?)로 제주도에 모입니다.

 

1648년, 석철이 13세의 나이로 가장 먼저 죽고 곧이어 둘째 석린도 숨을 거둡니다. 공식적인 원인은 풍토병. 하지만 인조와 김자점이 배후에 있을 것이라는 의혹은 당시에도 일었다고 합니다.

 

석철이 죽기 전 청나라 장수 용골대(병자호란 때 선봉장이었던 당대 청의 대표적인 장군입니다)가 조선 조정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소현세자의 아들이 고아가 되어 형편이 딱하다고 하니 내가 데려가 기르면 어떻겠는가."

 

용골대와 소현세자는 심양 시절에 꽤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실록에 남은 기록은 주로 조선을 무시하는 용골대에게 소현세자가 맞서 싸운 내용이지만, 그렇게 자주 대면을 했으니 꽤 교분이 쌓였을 법 합니다. 하지만 인조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면 이 말은 매우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네가 아무리 둘째를 왕으로 세웠다지만, 맏손자는 우리 손에 있다. 네가 삐딱하게 나오면, 언제든지 왕이 될 수 있는 후보를 우리가 데리고 있다.

 

더구나 그 손자가 잔혹하게 부모를 죽인 할아버지를 곱게 볼 리가 없죠. 오죽하면 석철의 죽음을 전하는 실록에 "용골대가 그런 말을 했으니 모든 사람들이 이제 석철이 온전하겠느냐고 걱정했는데 이렇게 죽었다"는 말이 다 나오겠습니까.

(先是, 龍骨大之來也, 以取養石鐵爲言, 人皆謂其必 不保全, 至是卒)

 

 

 

 

 

그 뒤로 왕위는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집니다. 숙종의 친위세력은 숙종을 가리켜 '삼종의 혈맥(三宗之脈)'이라고 떠받듭니다. 그러니까 3대가 모두 국왕의 정궁(정식 왕비)으로부터 태어난 왕자들로만 이어진 혈맥이라는 것이죠. 그게 뭐 대단하냐 싶겠지만 조선 역사를 살펴보면, 태조-정종-태종-세종-문종-세조-단종까지 이어진 초기 4대를 제외하면 정궁 소생의 왕자들로만 왕위가 이어진 예가 그리 많지 않다는 걸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효종은 즉위와 함께 아버지의 세력이던 인조 반정 공신들을 싹 청소하고, 북벌 이데올로기와 함께 정통성을 확보해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한 뒤 3대에 걸쳐 자신의 후손들이 왕 노릇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 준 공로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형의 자손들이 세상에 나올 수 없도록 형수 강빈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는 비정한 모습을 보였다는 건 권력의 비정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입니다.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가의 자손은 두 가지 면에서 위태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위를 지키고 있는 쪽에서 볼 때도 잠재적인 경쟁자요, 정권을 뒤집어 엎으려는 음모가 쪽에서는 옹립할 수 있는 유력한 후보입니다.

 

사실 광해군 시절의 능양군(인조)처럼 반란군과 사전에 교감이 있던 경우도 있지만, 뒷날 김자점의 난(?)에 함께 거론된 숭선군이나 소현세자의 증손자로 이인좌의 난에 연루된 밀풍군의 경우엔 다들 "그들이 일방적으로 옹립하려 한 것일 뿐 직접 관련은 없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숭선군은 살아남았고 밀풍군은 죽음을 당했죠. 이들의 생사는 정말 그때 그때 운에 달렸다고 할 정도로 달랐지만, 특히나 밀풍군의 죽음에는 '한이 많은 소현세자의 자손'이라는 면도 꽤 작용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무튼 이건 먼 뒤의 이야기. 당장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운명, 이어지는 소용 조씨(김현주)의 악행은 아직 한참 더 '꽃들의 전쟁'을 통해 펼쳐질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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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2013년의 상반기가 마감되고 있습니다. 뭐 구구절절 뻔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하반기도 즐거운 나날 계속되시길.

 

7월은 덥고 짜증나는 달이니 휴가와 여유있는 전시 관람 중심으로 짜 봤습니다. 특히나 5월이 공연의 달이라면 7,8월은 전시의 달이라고 할 정도로 방학 철을 앞두고 온갖 주최사들이 잔뜩 힘을 준 전시들이 이어집니다.

 

이번엔 알폰소 무하 전과 스튜디오 지브리 전이 눈길을 끕니다. 아울러 아래 사진의 브레겐츠 오페라 라이브 연결도 권장.

 

 

 

  

 

10만원으로 즐기는 7월의 문화생활 가이드

 

휴가철의 문화생활이란 어떤 걸까. 직접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서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와 베르니니의 조각들을 직접 만나 보는 것?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에서 뮤지컬 할인 티켓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것? 다 좋은데, 당장 그런 팔자가 안 되는 사람들은 이번 달 가이드를 잘 읽어보도록. 서울에 앉아서도 잘 찾아보기만 하면 얼마든지 풍성한 경험을 할 수 있어.

 

 

 

 

가장 먼저 추천해야 할 공연은 황병기 배병우 양방언의 토크 콘서트 동양 풍경이야. 가야금의 황병기, 사진의 배병우, 피아노의 양방언이라면 이미 대한민국의 각 분야에서 확실한 명성을 굳힌 거장들이지. 이런 거장들이 뭉쳐 90분 동안 뭘 보여준다면 3만원은 그리 비싸지 않다고 생각해. 73일 국립극장에서 단 한 차례 공연.

 

이 공연을 놓친다면 퓨전 국악 기획 공연 여우락(여기 우리의 음악이 있다)’의 다른 공연들을 눈여겨 봐. 양방언 한영애 김수철 등 믿고 볼만한 이름들이 꽤 있어.

 

지난번에 브레겐츠 호반 오페라에 대해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데 올해 휴가철을 맞아 메가박스에서 새로운 시리즈를 내놨어. 그것도 브레겐츠 현지에서 올해 717일부터 무대에 오르는 신작 공연을 라이브로 보는 기회야.

 

 

 

 

작품은 차이코프스키의 베니스의 상인(19)’과 모짜르트의 마술 피리(20)’. 특히 후자에 눈길이 가. 매번 공연 때마다 연출자들이 머리를 짜내 다양한 특수효과로 장식해 온 작품인데, 역시 늘 창의적인 연출로 화제를 만들었던 호수 위의 무대에서 어떤 연출이 이뤄질지 궁금해. 3만원.

 

이달엔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두 전시가 돋보이네.

 

 

 

 

우선 미야자키 하야오의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 전이 있어. ‘이웃집의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등 걸작 애니메이션의 밑그림이 된 스케치 1300여점을 볼 수 있어. 15천원. 더 설명이 필요한가?

 

 

 

 

또 하나는 알폰소 무하의 작품들이 나오는 아르누보와 유토피아전이야. 20세기 초 체코 출신 화가 알폰소 무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그의 작품을 보면 하는 소리를 낼 수밖에 없어. 너무나 친숙한 그림들이기 때문이지.

 

혹자는 연습장 표지계의 거장’, ‘순정만화 그림체의 창시자라고 비하하기도 하지만, 그건 이 화가의 놀라운 영향력에 대한 질시의 표현이라고 봐. 아무튼 알폰소 무하를 검색해서 나오는 작품들을 보고 결정해.  12천원.

 

, 휴가용 서적 추천. 휴가 때 정의란 무엇인가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읽을 사람은 패스. 아무래도 휴가 때는 뭔가 머릿속이 말랑말랑해지는 소설이 최고지.

 

 

 

 

추천 1번은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Gone Girl)’. 얼마 전 트위터에 최근 10년 동안 읽은 책 중 재미로 치자면 최고라고 했더니 많은 분들이 관심글표시를 했던데 과연 몇 명이나 실제로 읽었나 궁금해.

 

이 소설은 시골 출신 수재 닉이 뉴욕에서 나고 자란 부잣집의 천재 딸 에이미와 결혼해 5년이 지난 뒤의 얘기야. 5년째 되는 날, 에이미가 사라져. 그리고 이런 소설의 특징대로 남편이 용의자로 지목되지. 그런데 그 뒤로 이 소설은 적어도 다섯 번, 독자에게 반전의 스릴을 느끼게 해.

 

주의사항. 여기까지 읽었으면 절대 인터넷 블로그든, 신문 기사든, 서평 기사를 검색하지 마. 너무나 뻔뻔스럽게 스포일러를 노출한 작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지금 상태에서 그냥 믿고 책을 찾아 읽든, 아니면 그냥 읽지 마. 인터넷 가격으로 12천원 내외.

 

 

 

또 한 권은 픽션이란 제목의 단편집이야. 닉 혼비, 닐 게이먼 등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영미권 작가들의 골때리는단편들을 모은 책이지. 레모니 스니켓이 쓴 서문을 읽어 보면 이 책에 참여한 작가들이 가장 혐오하는게 바로 진부함이라는 걸 알 수 있어.

 

작품 하나 하나가 발랄한 상상력 그 자체야. 뭣보다 피서길 흔들리는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 읽기에도 적절해 보여. 11천원 내외.

 

그럼 밤에 배 잘 덮고 자고, 8월에 만나.

 

황병기 배병우 양방언의 토크콘서트 동양 풍경        3만원

브레겐츠 페스티발 오페라, ‘마술 피리                  3만원

미야자키 하야오 스튜디오 지브리 레이아웃       15천원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와 유토피아                  12천원

길리안 플린, ‘나를 찾아줘                               12천원

닉 혼비 외, ‘픽션                                           11천원

 

11만원

 

 

 

 

올해 브레겐츠 페스티발 오페라 '마술 피리'의 준비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영상입니다. 독일어지만 그림만 보셔도 대략 어떤 분위기인지 아실 수 있을 겁니다.

 

위에서 말한 브레겐츠 페스티발 오페라는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브레겐츠 호수 위에 설치된 무대에서 매년 여름 펼쳐지는 독특한 오페라입니다. 그때 "브레겐츠에 비길 만한 독특한 오페라 무대로는 이탈리아 베로나의 로마시대 원형경기장이 있다"고 했는데, 올 여름에 브레겐츠와 베로나 무대를 모두 메가박스에서 현장 중계할 모양입니다.

 

(2월 가이드 참조: http://fivecard.joins.com/1093)

 

올해 브레겐츠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차이코프스키의 '베니스의 상인'과 모짜르트의 '마술 피리' 입니다. '마술 피리'는 웬만한 분들은 직접 보시지 못했어도 제목은 들어 보셨거나 밤의 여왕이 부르는 가장 유명한 아리아 '지옥의 불길은 내 마음에 타 오르고 Der hoelle Rache kocht in meinem Herzen'를 잘 아실 겁니다.

 

브레겐츠 오페라는 무대의 제한을 독특한 공간 연출로 승화시킨 놀라운 무대로 유명한데, '마술 피리'는 대대로 연출자들의 상상력을 시험해 온 작품입니다. 따라서 이 무대와 작품의 만남은 매우 기대되는 경우죠. 브레겐츠 무대가 감이 안 오는 분들을 위해 2011년 '안드레아 세니에'의 프로모 영상입니다.

 

 

 

 

이건 2009년의 '아이다'. 본래의 배경 이집트를 현대 뉴욕과 접목시킨 상상력이 그럴듯합니다. 아무튼 무대 미술은 놀랍습니다. 관객이 찍은 듯한 영상인데 분위기를 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실 윗글에는 포함시키지 못했지만 '베니스의 상인'을 작곡한 차이코프스키는 우리가 잘 아는 '백조의 호수'의 표트르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 폴란드 작곡가 앙드레 차이코프스키(1935~1982)입니다. 그리고 '베니스의 상인'은 그의 유작으로, 이번 브레겐츠 공연이 세계 초연이라는군요.

 

 

 

                                  (이 양반이 앙드레 차이코프스키...)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를 읽고 난 다음 많은 분들의 소감을 들어 봤습니다. 의외로 여자들보다 남자들의 호응이 훨씬 컸고, 특히 결혼 생활을 경험해 보신 분들의 공감도가 훨씬 높았다는 점이 참 특이하더군요.

 

사실 서평이든, 영화 리뷰든,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책이나 영화를 스스로 보기 전에는 가급적이면 남의 리뷰를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어처구니없는 스포일러도 짜증나지만, 그 작품의 진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어설픈 리뷰는 감상을 해칠 뿐입니다. (원래 리뷰란 작품을 감상한 뒤, 남들은 나와 생각이 어떻게 다른가를 보기 위해 있는 겁니다.^^)

 

그래도 어떤 작품을 볼지 말지 결정하기 위해 리뷰를 참고하고 싶다는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내가 믿을만 하다고 생각하는 리뷰어의 글만 보라'는 정도입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나와 코드가 맞는 리뷰어'라고 쓰는 게 더 적절할 듯 합니다.

 

(많은 분들이 착각하시는 것과 달리 세상에 '모든 사람이 극찬하는 걸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디 워'를 보더라도 내가 만족하면 그걸로 그만이죠. 세상에는 '내가 보기에 재미있고 훌륭한 작품'을 다른 사람이 욕하면 벌컥 화를 내는 바보들이 있는데, 전혀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믿을만한 리뷰어인지는 경험이 축적되어야 알 수 있습니다. 전에 내가 재미있게 보았던 어떤 작품에 대한 특정 리뷰어의 글을 읽어 보고, 그 글이 내 생각(혹은 취향)과 대략 일치한다는 느낌이 들면 일단 신뢰할 수 있는 리뷰어의 리스트에 올려 놓아도 좋을 겁니다.

 

이 대목에서 또 '이 바쁜 세상에 언제 내가 그런 리뷰어 따위까지...'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그냥 그대로 사시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외식 한번을 하려고 인터넷 블로그들을 검색할 때에도 이 블로거가 용돈 받고 맛있다고 써 주는 사람인지, 소신껏 자기 판단에 따라 쓰는 사람인지 정도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론은 뭐든 제대로 즐기려면 최소한의 관심과 노력은 필요한 법입니다. 그게 귀찮으면 그냥 집에서 열심히 리모콘을 조작하면서 '채널은 많은데 왜 이렇게 볼게 없냐'고 짜증이나 내시는게 좋겠죠.

 

아무튼 리뷰는 함부로 읽으면 안 됩니다. 아래 리뷰는 '절대 읽으면 안 되는' 리뷰의 좋은 예입니다. '나를 찾아줘'를 이미 읽어 보셨거나, 소설 따위는 전혀 관심 없는 분들만 보시기 바랍니다. 극악의 스포일러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다시 한번 주의: '나를 찾아서'를 읽어 보려고 생각하시는 분은 절대 보면 안 됩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320918

 

 

'픽션'의 대표작가로 소개된 닉 혼비는 영화 '어바웃 어 보이',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 '나를 미치게 하는 남자'와 '피버 피치(영국 영화)'의 원작자입니다. 발랄하고 재기 넘치는 문장이라면 당대 최고 중 하나죠.

 

아무튼 이 정도면 멀리 휴가 못 가는 분들도 7월을 즐기기엔 손색 없어 보입니다. 그럼 다음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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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 '멤피스'라는 뮤지컬이 극장에서 상영중입니다. 5~6월의 메가박스 상영 목록에 보면 '뮤지컬 멤피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2010년 토니상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쓸었으니 브로드웨이 기준으로도 꽤나 신작인 셈입니다.

 

그레이스랜드(Graceland)의 존재를 아시는 분들은 '멤피스'라는 제목을 보고 혹시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내용이 아닐까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엘비스에 대한 직접적인 내용은 아닙니다. (뭐 엘비스가 거론되지는 않지만, 내용으로 보아 전혀 관계 없지도 않군요.^^ 참고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들을 갖고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은 '올슉업 All Shook Up'입니다.)

 

'멤피스'는 1950년대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그 시점의 그곳은 미국 내에서도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했던 곳이고, 심지어 백인들이 흑인 음악을 듣거나 흑인 음악이 담긴 음반을 트는 것 조차도 금기시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흑인 음악의 중요한 요소인 솔(Soul)을 현대 대중음악의 핵심적인 요소로 끌어 올리는 시도가 시작됐던 것입니다.

 

엘비스 프레슬리, 로이 오비슨, 제리 리 루이스 같은 인물들은 흑인 음악의 요소를 끌어들여 발빠르게 로큰롤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음악을 만들어 낸 개척자 역할을 해 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비슷한 시기, 척 베리라는 원조 흑인 히어로가 미국을 열광시킵니다.

 

 

 

 

 

 

뮤지컬 '멤피스'는 바로 이렇게 흑인음악이 미국 대중음악의 주류가 되기 직전, 인종차별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던 미국 남부 한 도시에서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뭐 줄거리 따로, 노래 따로 구비하려면 힘들 것 같아 아예 노래를 중심으로 줄거리를 한번 구성해 봤습니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아 마땅히 가이드도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멤피스' 관람 가이드 형식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1막> 1950년대 초 멤피스.

 

  • Underground - Delray, Felicia and Company
  • 멤피스의 흑인 환락가인 빌 가(Beale Street)의 밤. 들레이의 클럽에서 클럽 주인 들레이의 여동생이며 가수인 펠리시아가 노래를 부르며 한껏 분위기를 끌어올립니다.

     

  • The Music of My Soul - Huey, Felicia and Company
  • 클럽에 백인인 휴이가 등장하자 흑인들이 모두 불쾌해 합니다. 하지만 휴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흑인음악에 심취해 있었음을 밝히고, 그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립니다.

     

    낮의 휴이. 마켓에서 형편없는 판매원으로 잘리기 직전이던 휴이가 사장에게 "매장에서 음악을 틀어 레코드 판매 실적을 내겠다"고 제안합니다. 사장은 외출하면서 한번 해 보라고 하죠.

     

  • Scratch My Itch - Wailin' Joe and Company
  • 그래서 튼 이 노래로 휴이는 높은 판매고를 올리지만 사장은 흑인들의 노래(Race records)를 틀었다는 이유로 휴이를 해고해 버립니다.

     

  • Ain't Nothin' But a Kiss - Felicia and Huey
  • 들레이의 클럽에선 여전히 펠리시아가 노래를 부르고, 휴이는 "내가 반드시 너의 노래가 라디오 방송에서 울려퍼지게 해 주겠다"고 장담합니다. 이때까진 다들 비웃는 단계.

     

    그리고 휴이는 어찌어찌해서 방송국에 난입(?)해 노래 한 곡을 틉니다. 휴이가 DJ가 되는 과정이 코미디의 압권.

     

     

     

  • Everybody Wants to Be Black on a Saturday Night - Company
  • 그런데 이 노래가 청취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전화 폭주.

     

  • Make Me Stronger - Huey, Mama, Felicia and Company
  •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음반을 전해 주며 정말 틀어줄 수 있냐고 물어보는 펠리시아. 하지만 아들이 흑인 여성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어머니. 그렇게 해서 딱 한장 뿐인 레코드는 깨지고...

     

  • Colored Woman - Felicia
  • 펠리시아는 흑인 여성이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한탄합니다.

     

     

     

     

    어쨌든 휴이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를 씁니다.

     

  • Someday - Felicia and Company
  • 방송국 스튜디오로 펠리시아를 불러 라이브로 노래를 하게 하죠. 그리고 히트.

    펠리시아도 감사의 인사(?)로 휴이와의 감정을 확인.

     

  • She's My Sister - Delray and Huey
  • 동생을 걱정하는 들레이는 휴이와 동생이 남녀관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당시의 분위기로 봐선 당연한 얘기.

     

  • Radio - Huey and Company
  • 그리고는 휴이의 전성기가 찾아옵니다. 휴이가 발굴한 아티스트들이 성공하고, 휴이는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되죠. 아울러 펠리시아와의 관계도 깊어갑니다.

     

    하지만 거리에서 휴이와 펠리시아가 함께 걷다가 백인 불량배들에게 습격을 당합니다.

     

  • Say a Prayer - Gator and Company
  • 클럽 들레이로 다친 펠리시아를 데려와 도움을 요청하는 휴이. 내 이럴 줄 알았다고 격분하는 들레이. 이때 단 한마디도 대사가 없던 게이터가 모두를 진정시키는 노래를 부릅니다. (1막 끝)

     

     

     

     

    <2막>

     

  • Crazy Little Huey - Huey and Company
  • 2막이 시작하면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고, 휴이는 R&B를 전면에 내세운 TV쇼의 MC로 나서 여전한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 Big Love - Bobby
  • 그리고 방송국 청소부이던 바비가 가수로 데뷔합니다.

     

    펠리시아는 멤피스의 인기가수가 됐지만 여전히 두 사람은 몰래 만나는 사이. 펠리시아는 인종 차별 문제가 심하지 않은 뉴욕으로 함께 가자고 하지만 휴이는 여기서도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편 뉴욕에서 업계의 거물 앞에서 몰래 오디션을 보는 펠리시아.

     

     

     

     

  • Love Will Stand When All Else Falls - Felicia and Company
  • 거물은 흡족해 하지만 자신이 소외된 사실을 안 휴이는 분개. 하지만 거물은 휴이도 뉴욕으로 함께 가 쇼를 진행할 수 있을 거라고 권장합니다.

     

  • Stand Up - Delray, Felicia, Huey, Gator, Bobby and Company
  • 다같이 뉴욕으로 가자고 다짐하는 일행.

     

  • Change Don't Come Easy - Mama, Delray, Gator and Bobby
  • 심지어 이제 휴이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 어머니까지도 휴이에게 웬만한 건 고집부리지 말고 더 큰 물로 나가라고 격려합니다. (전형적인 '아줌마 보컬'이던 어머니도 soulful한 보컬의 대열에 합류하는 면에서 매우 흥미로운 노래입니다.^)

     

    하지만 도저히 자신의 스타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휴이

     

  • Tear the House Down - Huey and Company
  • 전국 네트워크에서 원하는, 평범한 스타일에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스타일을 그대로 드러내는 휴이.

     

    휴이가 전국 방송의 MC가 될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펠리시아는 어쨌든 자신은 꿈을 이루기 위해 뉴욕으로 가겠다며 휴이에게도 같이 갈 것을 간청합니다.

     

  • Love Will Stand/Ain't Nothin' But a Kiss (Reprise) - Felicia and Huey
  • 절망적인 심정으로 휴이는 생방송 도중 펠리시아에게 키스. 방송은 중단되고, 들레이는 당장이라도 뉴욕으로 떠나야 펠리시아가 안전할 수 있다고 재촉합니다. 그래도 펠리시아를 따라 나서지 못하는 휴이.

     

  • Memphis Lives in Me - Huey and Company
  • 펠리시아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도 자신이 왜 멤피스를 떠나지 못하는지 절절한 마음으로 노래하는 휴이.

     

    4년이 흐른 뒤, 휴이는 3류 DJ로 다시 전락해 있습니다. 그때 펠리시아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 Steal Your Rock 'n' Roll - Huey, Felicia and Company
  • 결말은 스포일러일테니 여기까지. (내용이 드러나면 좀 곤란하니 Steal your Rock'n Roll은 토니상 수상 퍼포먼스 영상입니다.^^)

     

     

     

     

     

    멤피스를 1950년대 이후 미국 대중음악의 가장 중요한 도시로 만든 데에는 Phillips라는 성을 가진 두 사람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 사람은 선 레코드(Sun Records)의 창립자인 샘 필립스. 이 사람이 설립한 선 스튜디오와 선 레코드를 통해 로이 오비슨, 제리 리 루이스, 자니 캐쉬, 그리고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배출됐습니다. 1950년대, 미국의 주류 대중음악으로 흑인 음악이 흘러들어와 로큰롤을 태동시키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 개척자라고 할 수 있죠.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멤피스 지역의 인기 라디오 DJ였던 듀이 필립스(Dewey Phillips). 이 사람이 바로 휴이 칼훈의 모델이 된 인물입니다. 비슷한 시기 같은 바닥에서 활동한 두 사람의 필립스는 가족 관계는 아니었지만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샘 필립스의 아티스트들이 듀이 필립스의 라디오를 통해 스타로 성장했다고 전해집니다. 예를 들어 엘비스 프레슬리가 라디오에 데뷔한 것이 바로 듀이 필립스를 통해서였다고.

     

    (wiki에 따르면 듀이 필립스가 엘비스의 데뷔 음반을 방송한 것이 1954년 7월이었고, 그 다음 엘비스에게 출신 고등학교를 질문해 '인종'을 공개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시절 남부에는 백인과 흑인이 다니는 학교가 구분되어 있었으므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라디오라도 한 사람이 어느 학교를 다녔다고 말하면 그걸 통해 그 사람이 흑인인가 백인인가를 알 수 있었다는 얘기죠.

     

    '멤피스'에서도 이 에피소드가 칼훈이 처음 DJ로 마이크를 잡았을 때 등장합니다. 라디오 방송국 사장이 "자네가 백인이라고 밝히라"고 하자 휴이가 곧대로 "I'm White"라고 해 버리죠. 이때 사장이 "아니 그렇게 말고!" 하자 휴이는 "저는 어디 어디 고등학교를 나왔구요"라고 돌려 말합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만큼 또 그걸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건 금기에 해당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듀이 필립스는 1968년, 42세의 나이로 저 세상 사람이 됩니다. 뮤지컬 속의 휴이도 늘 술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현실의 듀이 역시 워낙 술과 약물에 찌들어 살던 터라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는 설명입니다. ('멤피스'의 휴이 칼훈 스토리에는 듀이 필립스와 당대의 인기 DJ였던 알란 프리드의 일화가 많이 섞여 있다는군요.)

     

     

     

     

    아무튼 이 뮤지컬 영상을 보고 나면 몬테고 글로버(Montego Glover)의 팬이 되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그만치 풍성한 성량과 절절한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10 토니 어워즈 여우주연부문에도 올라갔지만 캐서린 제타 존스라는 할리우드 스타의 명성과 A Little Night Music 이라는 전설적인 작품에 밀려 수상은 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몬테고 글로버라는 무명 배우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듯. (게다가 이런 실력을 가진 배우가 적잖은 나이에 - 바이오를 공개하지 않아서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 무명으로 있었다는 데서도 브로드웨이의 가공할 선수층에 놀라게 됩니다.)

     

    과연 이 뮤지컬은 언제쯤 국내 무대에 올려지게 될 지 궁금합니다. 일단 이 뮤지컬에 등장하는 폭발적인 R&B 넘버들과 댄스를 소화할 수 있는 빼어난 가수들이 대거 등장해야 할텐데, 만약 한다면 누가 하게 될까요.^^ 노래만 놓고 보면 손승연 같은 재목들이 있어 보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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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현세자]

     

    사극 드라마나 영화, 역사 소설을 보다 보면 시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거나 인기가 오르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역사적인 인물을 평가할 때에는 그 시대가 어떤 가치를 강조하는 시대였느냐가 큰 영향을 미치죠.

     

    소현세자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소현세자에 대한 내용은 매우 짧고 섬소합니다. 그런데 그 짧은 생애를 보면 유명한 사도세자에 비해 더 큰 비극을 안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왕위를 이어받아야 할 세자의 몸에서 (아버지에 의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 것까지는 같지만,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라 어느 정도 한풀이를 할 수 있었던 반면 소현세자는 아들 손자에 이르기까지 참혹한 비극의 주역이 됐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대체 소현세자는 왜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을까요. 드라마 '꽃들의 전쟁' 보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어땠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소현세자(1612~1645) 1

     

    2010년 화제의 드라마 추노는 조선 인조 시대를 배경으로 추노꾼 대길(장혁)과 노비 태하(오지호)의 쫓고 쫓기는 대결을 그렸다. 본래 무관이었던 태하는 소현세자의 마지막 혈육인 왕손 석견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 피난길을 떠나고, 대길은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뒤를 쫓는다. 태하는 본래 소현세자의 측근인 무관이었으나 세자 사후 정변에 휘말려 노비로 강등됐다는 설정이다.

     

    맥락을 모르는 사람이 추노를 보면 의문이 들었을 법 하다. 대체 소현세자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본인이 급사한 뒤 부인인 세자빈 강씨도 사약을 받고, 어린 세 아들까지 목숨을 위협받게 된 것일까. 답은 권력의 비정함에 있다.

     

     

    (이 아기가 바로 당시 인기 높았던 그 석견이죠.)

     

     

    병자호란이 끝난 1637, 청은 조선의 두 왕자를 인질로 요구했다.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차남 봉림대군(뒷날의 효종)이 수많은 포로들과 함께 심양으로 끌려가고, 청은 명을 완전히 멸망시킨 1645년에야 이들의 귀국을 허락한다 

     

    하지만 돌아온 소현세자를 바라보는 궁 안팎의 시선은 싸늘했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껏 전해내려오는 야담에서 읽을 수 있다. 두 아들이 귀환하자 인조는 무엇을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소현세자는 용 모양의 벼루를 꺼내며 이것이 천하의 귀물이라는 용연석(龍硯石)으로 만든 벼루입니다. 아버님께 드리려고 천금을 들여 샀습니다라고 했다. 반면 봉림대군은 청 황제에게 간청하여 포로로 끌려간 우리 백성들을 힘 닿는대로 함께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했다.

     

    인조는 세자를 향해 너 따위가 무슨 세자냐고 호통을 치며 그 벼루로 머리를 내리쳤다. 세자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곧 병들어 죽었다는 전설이다.

     

    실체가 있는 기록 역시 소현세자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세자가 숨을 거둔 1645 426 실록에 실린 졸기(卒記)를 보면,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는 말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학문에는 관심이 없고 무인들과 어울리는데 시간을 쏟았다. 오직 화리(貨利:사고 팔아 이익을 남김)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를 즐기고 개와 말 따위를 기르는데 열중했으므로 크게 인망을 잃었다는 내용도 있다. 한마디로 소현세자가 일찍 죽고 효종이 왕위에 오른 것이 나라를 위해 큰 다행이었다는 주장. 이것이 일제시대까지의 전통적인 해석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평가는 수정되기 시작했다.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끌려가 있을 때 독일 출신 선교사 탕약망(湯若望),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과의 친교를 통해 많은 신문물을 조선에 소개했다는 이야기가 교과서에 실렸다.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다면 개혁군주가 되어 조선의 근대화를 앞당겼을 것이라는 아쉬움 섞인 주장이다.

     

     

     

     

    사실 동시대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던 소현세자의 모습도 오늘날의 시각에선 그리 흠으로 보이지 않는다. 글이나 읽는 샌님보다는 건축과 이재에도 밝은 무인 풍의 세자가 훨씬 미래지향적인 인물로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종영한 마의의 정겨운 이나 현재 방송중인 꽃들의 전쟁의 정성운 모두 이런 시각의 소현세자를 연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시대는 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가 인질로 나날을 보냈던 심양은 지정학적으로한반도를 관리하는 대륙의 창구 역할을 했던 도시다. 고려말 원나라도 만주에 심양왕이라는 직책을 마련해 두고 고려 왕을 견제했다. 고려 25대 충렬왕이 마음에 들지 않자 심양왕으로 있던 아들 충선왕을 개경으로 보내 부자간에 왕권 다툼을 벌이게 한 적도 있다..

     

    소현세자는 이 심양에서 예친왕 도르곤을 비롯한 청의 고위 인사들과 막역한 사이가 되어 갔다. 중원이 이미 청에게 넘어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판단이다. 자연스럽게 병자호란으로 권위가 실추된 인조보다 청 황실과 가까운 젊은 소현세자가 실세로 판단하는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미래 권력인 세자에게 투자하자는 계산이 서기 시작한 것이다.

     

    인조와 정치적 생명을 함께 하는 김자점 등 반정 공신 세력들에겐 이보다 께름칙한 일이 없을 터. 이들은 날이 새면 인조에게 달려가 소현세자가 이미 왕이 된 듯 처신하고 있다며 속닥질을 했다.

     

    언젠가 물려줄 왕위라 해도 당장 내놓으라면 불쾌한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게다가 충렬왕과 충선왕의 전례를 생각해 보면 어느날 갑자기 청이 양위를 요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해 보였다. 한양과 심양의 거리 속에서 부자간의 관계는 날로 소원해져 갔다. (2부에 계속)

     

    2부 소현세자, 죽은뒤에도 눈을감지 못했다. http://fivecard.joins.com/1141

     

     

     

     

    그러니까 소현세자가 귀국하자마자 죽어야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단 하나, '아버지를 불안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인조는 여러 차례에 걸쳐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에 대해 "심양에 있으면서 거의 왕과 왕비 행세를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물론 이게 소현세자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힘들 듯 합니다.

     

    당시까지 청의 수도인 심양에 세자가 있고, 포로 송환을 비롯해 수많은 외교 사안이 있었던 상황이고 보면, 세자와 수행원들은 오늘날의 대사관 역할을 넘어 아예 조선의 작은 정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세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성격이었다면 모를까, 말을 달리는 매 사냥을 즐기고 청 순치제의 숙부인 예친왕(도르곤)과 친분을 쌓는 호방한 성격이었으므로 그 존재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런 세자가 있었으니, 조선 내에도 세자야말로 조선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특히나 인조는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정치적인 권위가 내려앉은데다 그를 둘러싼 인조반정 공신들, 그 중에서도 김자점의 세도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방송중인 사극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을 보시면 이 시기의 정국이 적나라하게 그려집니다. 김자점(정성모)이 수양딸로 삼아 궁에 들여보낸 궁인 조씨(김현주)는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두 아들을 낳고 내명부로서 소용을 거쳐 귀인에까지 이릅니다. 김자점은 한편으로 조씨가 낳은 공주를 손자며느리로 맞아들이는 등 인조를 둘러싼 김자점과 소용 조씨의 '인의 장벽'은 날로 두터워졌죠.

     

    이들에게 최선의 결과는 인조가 인열왕후(이때는 이미 죽은 뒤)와의 사이에 낳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인평대군을 제치고 조씨가 낳은 숭선군이 인조의 후사를 잇는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김자점을 경원하는 세력이 세자 곁으로 모였으니 이들이 갈 길은 정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세자와 인조의 사이를 갈라 놓아야 했던 것이죠.

     

     

     

    게다가 소현세자는 천주교에 귀의했을 가능성까지 높게 점쳐지고 있습니다. 2005년 막을 올린 연극 '흔적'은 한국 기독교의 첫 순교자로 소현세자를 꼽고 있습니다. 조선이 본격적인 기독교 박해에 나서기보다도 훨씬 전의 일인데, 어쨌든 당시 조선의 분위기로 보아 천주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사교(邪敎)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P.S. 마지막으로 인조와 소현세자-봉림대군 사이의 벼루 이야기는 당시로선 꽤 신빙성있게 받아들여진 이야기인 듯 합니다. 실제로 소현세자가 귀환할 때 많은 문물과 함께 꽤 많은 재물을 가져왔다고 하니 그 이야기가 저렇게 윤색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죠.

     

    아울러 일설에 따르면 인조가 소현세자를 내리친 '용연석'이 요즘도 쓰이는 '요녀석'이라는 말의 어원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얼마나 공인된 학설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 주장을 읽어 보시면 웃어 넘길 정도로 근거 없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http://www.unn.net/ColumnIssue/detail.asp?nsCode=21437

     

     

    너무 길어졌습니다. 소현세자 사후에도 3대에 걸쳐 이어진 비극에 대해선 다음 또 한편의 글을 통해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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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드워Z]

     

    영화 '월드워Z'는 아시다시피 맥스 브룩스의 유명 원작 '세계대전Z(World War Z)'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이 국내에 처음 소개될 무렵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마징가Z'를 먼저 연상하는 바람에 진지한 대접을 받지 못한 요소도 있지만, 사실 '좀비 문학'이라는 것이 새로운 장르로 인정받는 데에는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꽤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좀비물은 책 보다는 영화에서 먼저 장르로서의 자리를 확고하게 굳혔습니다. 그 유명한 조지 로메로 감독의 70년대 좀비물은 제작자와 관객 모두를 환호하게 만든 새로운 시장의 개적을 알렸죠. 이후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한 좀비물은 마침내 소설 '세계대전Z'로 하나의 기념비를 남겼고, 영화 '월드워Z' 역시 좀비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만 합니다. (물론 칭찬입니다.)

     

    그런데, 물론 재미있게 잘 봤지만, '월드워Z'는 참 예상과는 다른 영화였습니다.

     

     

     

     

    먼저 줄거리. 전 UN 조사관이었다가 은퇴한 뒤 가족과 함께 조용히 살던 제리 레인(브래드 피트)는 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에 나갔다가 갑작스런 좀비의 습격으로 도시가 생지옥이 되는 광경을 목격합니다. 곧이어 미국 전역, 아울러 세계 전체가 좀비의 공격으로 인류 문명이 말살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리고 걸려온 한 통의 전화. UN 당시의 상관으로부터 헬리콥터를 보내주겠다는 연락이 옵니다. 간신히 탈출해 UN 소속 함대에 합류한 제리에게 "다시 현역에 복귀하는 조건으로 가족을 보호해 주겠다"는 제안이 들어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제리는 UN의 비밀 조사단을 인솔하고 좀비 바이러스가 최초로 보고된 한국 평택(Camp Humphreys)으로 향합니다.

     

     

     

     

    영화 '월드워Z'는 공개되기 전, 예고편 단계에서부터 소설 팬들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습니다. 원작의 설정과 매우 다른 장면들이 속출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사실 원작은 전통적인 소설의 작법이 아닌, '좀비와 인간의 세계대전'을 가상 설정으로 두고 거기에 참가했던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작품입니다. 아마도 이 원작 하나만 갖고도 이런 저런 영화를 30편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풍부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가상 논픽션'입니다. 그런데 영화 '월드워Z'는 그런 원작의 장점을 잘 살리고 있는 영화는 분명히 아닙니다.

     

    맥스 브룩스의 소설 '세계대전Z'와 '좀비 서바이벌 가이드'는 처음부터 좀비의 특성과 그 공략법, 현대 사회의 취약성 등에 대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설정을 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작의 완벽한 설정을 영화가 상당 부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원작 팬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를테면 소설 원작의 좀비들은 '느리고, 기본적으로 1대1에서는 인간보다 체력이 약하고, 사다리가 있어도 그걸 타고 위로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지능과 균형 잡힌 운동 능력이 0에 가까운'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영화 '월드워Z'의 좀비들은 거의 표범 수준으로 날렵하더군요.

     

    '뇌를 파괴하지 않으면 그 무엇으로도 멈추게 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소설과 영화가 일치하지만, 영화에서는 뇌가 아닌 다른 부위에 총을 맞아도 좀비들은 일단 동작을 멈추고, 거의 전투불능상태에 빠집니다. 일장일단(?)이 있지만, 목 윗부분만 남아도 쉴새없이 이빨을 딱딱 마주치며 무엇이든 물어뜯으려 드는 원작 소설 속의 좀비들보다는 어찌 보면 공포감이 덜하기도 합니다.

     

    물론 어떤 영화도 원작 속의 설정을 100% 재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상화를 위해선 적절한 변화를 두는 것이 훨씬 성공적인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영화 '월드워Z'의 경우에는 역대 어느 영화에서보다 '빠르고 전투력 강한' 좀비상을 설정하는 바람에(아무래도 '28일 후'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영화의 진행에 다소 무리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왜 굳이 원작과 다른 길을 갔는지 상당 부분 아쉽습니다.

     

    원작에 나오는 생생한 인간과 좀비군단의 전투, 왜 현대의 첨단 무기가 좀비 군단을 막는데 역부족이었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 단순한 전투력 뿐만 아니라 공포심과 무기의 본질에 대한 탁월한 성찰 등이 영화에 전혀 반영되지 못한 부분이 아쉬워서 이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늟어놓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이라도, 이 장르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소설 '세계대전Z'를 꼭 읽어 보시기 권합니다.

     

     

     

     

    안 좋은 이야기로 시작해서 좀 그렇긴 하지만, 원작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고 영화만으로 판단했을 때, '월드워Z'는 훌륭한 오락 영화입니다. 특히 좀비와 액션을 앞세운 블록버스터적인 특성보다는 온 가족용 코미디로서 탁월합니다. 예를 들어 슈퍼히어로 장르라고 가정한다면, 겉으로 보기엔 '아이언맨'이나 '다크나이트' 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인크레더블'이나 '슈퍼배드', 혹은 '스카이 하이'에 가까운 영화였던 겁니다.

     

    (전형적인 좀비 마니아들에게는 매우 실망스러운 얘기지만, 잔혹한 장면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새벽의 황당한 저주 Shaun of the Dead' 보다도 덜 잔인합니다. 좀비 영화의 기본인 좀비의 산 사람 먹방, 사지 절단 등의 장면은 그냥 상상력으로 커버해야 할 수준입니다. 상상 이상으로 다릅니다.)

     

    겉으로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영화 '월드워Z'를 지배하는 건 다소 시니컬하고 허무주의적인 유머감각입니다. 사소한 좀비 패러디도 아니고, 대사 하나 하나마다 지적인 유머가 감춰져 있다고 할까요. 

     

    피트가 좀비들과 사투를 벌이고 난 뒤 아내와 나누는 전화 대화("여보. 내가 아까 전화했는데..." "응. 알아." <- 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시겠지만, 보신 분이라면 이 장면이 얼마나 배꼽빠지게 웃기는 장면인지 아실 수 있습니다^^) 처럼 아주 노골적으로 웃기는 장면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이 영화를 지배하고 있는 건 냉소적인 허무개그의 정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전반부에 '인류의 희망'이라며 강조하던 패스바크 교수의 운명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죠. 그래서 영화 보는 내내 진심으로 유쾌했습니다.

     

     

     

     

    아울러 이 영화에선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애가 철철 넘쳐 흐릅니다. 어떻게 해서든 가족에게 돌아가려는 영웅 브래드 피트의 파란만장 일대기 - 이를테면 '오딧세이' - 인 것이죠.

     

    이렇게 가족영화적 요소와 코미디적 요소를 강조한 작품이다 보니 이 영화는 어마어마한 물량을 투입한 제작비 2억 달러짜리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리 큰 작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유명 배우라고는 브래드 피트 혼자 정도인데도 불구하고 제작비가 2억 달러일 정도로 비주얼에 공을 들인 영화인데, 이렇게 비주얼이 인상적이지 않다는 건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나마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데이빗 모스나 매튜 폭스는 우정 출연 수준. 물론 데이빗 모스는 그 짧은 출연 시간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죠^. 사실 이렇게 쓰면 영화에 대한 비판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재미있게' 할 거라면 돈은 훨씬 덜 써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얘깁니다.^^)

     

     

     

     

    이건 아무래도, 비록 '퀀텀 오브 솔러스'를 만들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액션 블록버스터 장르의 감독이 아닌 마크 포스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번 경우에는 인간 내면을 표현하는데 장점을 가진 그의 특기가 잘 살아난, 성공적인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영화 '월드워Z'가 이런 완성도 높은 작품이 된 데에는 매튜 마이클 카너핸(Matthew Michael Carnahan)이라는 각본가의 공로를 빼놓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작들인 'Lions for Lambs'나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그리고 '킹덤'에서 보듯 카너핸은 저널리스트적인 통찰이 돋보이는 세계관과 다소 염세적인 부분도 있지만 아무튼 현실 세계의 국제 정세를 영상으로 구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줬던 작가입니다. (물론 완성도 높은 유머는 누구의 기여일 지 매우 궁금합니다.)

     

    어쨌든 결론은 강추. 요약하면

     

    1. 원작과는 너무나 딴판이다.

    2. 좀비 블록버스터 액션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큰 실망.

    3. 반면 가족 코미디로서는 대단한 수작. 장르 선입견 없는 사람이라면 대만족일듯.

     

    개인적으론 언젠가 용자가 나서서 '월드워Z, 더 리얼 무비' 정도로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 주길 기대합니다. 제임스 카메론이나 잭 스나이더면 진짜 인간과 좀비의 세계대전을 실감 넘치게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P.S. 원작에서 인상적이었던 인물이 영화 속에서 구현된 경우는 위르겐 바름브룬 외에는 모르겠습니다. 주인공 제리 레인이 소설에도 나오는 인물인지는 찾아 보려다 포기했습니다. 혹시 기억나시는 분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P.S.2. 이 도표를 봐도 영화 '월드워Z'의 좀비들은 역사상 '가장 날쌘 좀비들'로 보이는군요.^^ (표는 클릭하면 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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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오브 스틸]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 강철의 사나이)'은 슈퍼맨의 수많은 별명 중 하나이고, 슈퍼맨을 다룬 수많은 DC코믹스 원작 중 여러 편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사실 탄생 100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슈퍼맨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한다는 건 약간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워낙 많은 텍스트가 워낙 긴 세월에 걸쳐 축적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어지간한 마니아가 아니고서는 근 80여년에 걸쳐 축적된 슈퍼맨이라는 캐릭터의 온 역사와 변천 과정, 다양한 외전과 작품 사이에 서로 상충되는 설정에 대해 다 알 리가 없을 겁니다(거론되는 텍스트의 양으로 보아 한 학자가 평생을 바쳐 연구해야 할 과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저스티스 리그' 처럼 배트맨이나 원더우먼 같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같은 우주에서 만나기 시작하면, 그건 정말 총체적 혼란이 와야 정상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재한 코믹스 팬들, 정말 존경합니다.)

     

    아무튼 잭 스나이더와 크리스토퍼 놀런이라는 최강의 조합으로 새롭게 시리즈를 시작하는 '맨 오브 스틸'을 봤습니다.

     

     

     

    일단 줄거리.

     

    지구에서 엄청나게 먼 행성 크립톤은 고도로 과학을 발달시킨 문명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친 자만으로 행성의 소멸을 막지 못합니다. 늘 문명의 종말을 경고해왔던 과학자 조엘(러셀 크로)은 갓 태어난 아들을 캡슐에 태워 종족의 미래를 잇게 하려 합니다. 한편 무능한 원로들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은 군인 조드 장군(마이클 섀넌)은 조엘을 죽이지만, 반란 혐의로 체포되어 우주 유형에 처해집니다.

     

    지구에 도착한 어린 슈퍼맨은 미국 캔자스 주 스몰빌(!)에 사는 조나산 켄트(케빈 코스트너)와 마사 켄트(다이언 레인) 부부의 아들로 성장하고, 사춘기가 지나 슈퍼맨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북극 기지에서 크립톤의 선조들이 날려 보낸 우주 정찰선을 발견하는 과정에 유능한 기자 조이스 레인(에이미 아담스)의 눈길을 끌게 되고, 결국 레인의 추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족쇄에서 풀려난 조드 장군이 지구에 나타나 '조엘의 아들'을 요구하고 나섭니다. 대체 누가 친구고 누가 적인지 알지 못하는 인류는 혼란에 빠집니다.

     

     

     

     

    우선 맨 처음 경고.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스토리의 개연성을 따지자는 것은 이 영화를 보지 말자는 것과 같습니다. 배트맨이나 아이언맨 같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비교해도 슈퍼맨의 경우는 특히 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설정 자체가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죠.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날 수 있고,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고, 다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왕년에는 크립톤 별에서 나온 광석, 즉 크립톤나이트를 접하면 약해지는 약점이라도 있었지만 '맨 오브 스틸'에서는 그조차도 없어졌습니다. '신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신입니다. '토르'같은 히어로는 참 신이라고 불릴 가치도 없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슈퍼맨 이야기는 아무리 정교하게 꾸미려 해도 그냥 동화의 수준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슈퍼맨이 '아무 이유 없이(혹은 성격상의 문제로)' 자신의 능력을 덜 쓰지 않는 한, 패배가 불가능한 캐릭터이기 때문이죠. 그런 면에서 꽤 정교해질 수 있는 배트맨 이야기와는 달리 슈퍼맨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이건 원래 그냥 유치한 옛날 이야기에요' 라는 자세를 유지해왔습니다. 오죽하면 슈퍼맨이 성장한 동네 이름은 '작은 동네(smallville)'고 성장한 슈퍼맨이 기자 클락 켄트로 활동하는 대도시는 '대도시(metropolis)'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슈퍼맨 이야기를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뇌의 회전을 멈추고, 그냥 영화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비해 비판하지 않고 어린 시절 옛날 이야기를 듣듯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그게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 오브 스틸' 제작진은 최대한 이 이야기가 마치 지성에 근거한 것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도입부에서 크립톤 행성의 의사결정기관이 반란죄로 체포된 조드 일당을 굳이 행성 밖으로 추방하는 데 대해 조드 장군이 "나를 죽일 용기도 없는 놈들!"이라고 욕을 하는 대목 등이 그렇습니다(하지만 사실은 이 '유배형'이야말로 크립톤 행성의 소멸에서 조드 일행이 살아남는 계기가 됩니다. 한마디로 최고의 문명이 발달한 크립톤 행성 사람들은 반란군에게 - 죄 없는 사람들보다 우선해서 - 최대한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너무나 인간적인 문명이었던 것이죠).

     

    뭐 이런 대목을 세다 보면 역시 날을 지샐 수 있으니 그냥 덮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화를 즐기려면 많은 걸 [덮어 둬야] 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준비가 된 상태에서 본 이 영화는 너무나 신나는 엔터테인먼트의 총체입니다. 며칠 전에 본 '스타트렉:다크니스'의 비주얼이 갖고 있는 장대함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슈퍼맨과 조드 일당이 벌이는 액션의 강도는 역대 최강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소 쌓인게 많은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절대 비아냥 아닙니다. 정말 신납니다)

     

    아무튼 보다 보면 이 영화의 슈퍼맨은 두 다른 맥락의 영웅을 생각나게 합니다.

     

    하나는 '맘만 먹으면 지구를 파괴할 수도 있는 선과 악의 두 존재가 지구를 무대로 싸우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드래곤 볼 시리즈죠. 슈퍼맨과 조드가 싸우기에는 지구라는 무대, 특히 뉴욕 메트로폴리스 같은 대도시는 매우 취약한 공간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싸움에 허망하게 부서져가는 고층건물과 차량 및 시설물들이 참 안쓰러울 뿐입니다. 싸우려면 좀 사막 같은 데 가서 싸우든가...하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드래곤 볼 시리즈의 손오공 역시 외계에서 온 인류의 구원자. 신과 죽음을 초월한 능력자. 자손 대대로 이어진 히어로 계보와 팬덤의 확장 등을 보면 무척 비슷하다는 점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또 하나는 바이블 스토리. 슈퍼맨을 예수에 대입시키는 해석이나 시도는 결코 새롭지 않습니다. 심지어 '슈퍼맨 리턴즈'에서는 '부활'이란 설정까지 등장해 수많은 관객들에게 떡밥을 던졌죠. 그런데 '맨 오브 스틸'에선 또 다른 식으로 이런 해석을 밀어붙입니다. 물론 의도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의도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부분은 외계 세균의 존재 어쩌고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스와닉 장군에게 "33세까지 아무도 감염시킨 적이 없다"며 은근히 나이를 공개하는 대목입니다.  33세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나이죠. (슈퍼맨의 나이가 33세라는 것이 슈퍼맨 일대기의 공식 설정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다른 의견 있는 분이 계시면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실 예수와 슈퍼맨(특히 영화 '맨 오브 스틸'의 슈퍼맨)은 많은 성장기의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친아버지를 모르는 채 양아버지에 의해 양육됐고 ▲정체성 때문에 고민했고 ▲인류와는 엄청난 능력 차이를 가졌고 ▲기적을 일으켰으며(광신도 엄마가 "Act of God"이라며 흥분하는 장면도 나옵니다) ▲왜 친아버지가 자신을 인류에게 보냈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며 ▲공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구금되기도 하지만 ▲언제든 인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이런 슈퍼맨을 의심하고, 괴물 취급하고, 욕하는 인간들은 빌라도 앞에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친 유태인들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존재들인 셈이죠. 그런 의미에서 '맨 오브 스틸'의 많은 장면은 '21세기에 예수라는 존재가 인류 앞에 나타났다면' 이라는 상황을 상상하게 합니다.

     

    (한편으론 '너무나 신에 가까운' 슈퍼맨이란 캐릭터 자체가 반 기독교적으로 느껴지는 면이 있습니다.  슈퍼맨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피조물일까요? 그도 구원받을 영혼을 갖고 있는 존재일까요? 이런 이유로 '맨 오브 스틸' 중간에 삽입된 슈퍼맨과 신부의 대화는 묘하게 코믹하게 느껴집니다.)

     

     

     

     

    영화가 '슈퍼맨'이다 보니 할리우드의 톱스타들이 지나가는 청소부 역까지 맡을 정도로 화려한 캐스팅이 눈길을 끕니다. 이런 배우들이 몇마디 안 되는 대사로 슥슥 지나가는게 아쉬울 지경입니다.

     

    개인적으론 에이미 아담스가 연기한 로이스 레인은 매우 흡족하고 다이언 레인의 주름살이 참 가슴아프더군요.

     

     

     

    뭐 가장 중요한 슈퍼맨 역의 헨리 캐빌은 기대 이상입니다. 당초 '전형적인 각진 턱 미남'이 아니라는 점에서 살짝 우려가 있었지만 연기력으로 충분히 커버되는 수준입니다. (뭐 한때 니콜라스 케이지도 거론된 적 있었던 슈퍼맨 역할이고 보면...^)

     

     

     

     

    헨리 캐빌이 얼굴만 지나치게 잘 생긴 브랜든 라우스에 비해 좋은 캐스팅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 더 2:8 가르마가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왕년의 그분, 크리스토퍼 리브야말로 진정한 역대 최강의 슈퍼 페이스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 지금은 철거된 국제극장을 몇바퀴 감았던 살인적인 매표 라인을 뚫고 이 영화를 보러 간 추억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이렇게 세 사진을 놓고 보니 슈퍼맨 수트의 색깔 변화가 더 확연합니다.)

     

    자, 이제 정리 들어갑니다.

     

    '맨 오브 스틸'은 '슈퍼맨 리턴즈'로 인해 위축됐던 무비 스타 슈퍼맨의 위치를 다시 세우는 데 더 없이 훌륭한 성취를 보여줬습니다.

     

    주요 스태프들이 워너 브라더스와 3편으로 계약을 했다니 당연히 후속작이 나오겠지만(일부 보도에 따르면 다음 한 편은 그냥 속편, 그리고 3편째는 저스티스 리그-배트맨 같은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함께 활약하는-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고 합니다), 1편에서 워낙 기대 강도를 높여 놓은 터라 대체 2편째에는 어떤 악당이 슈퍼맨과 대결을 펼칠 지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이래갖고는 어디 렉스 루더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결론적으로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주는 엔터테인먼트 대작. 개인적인 취향으론 '스타트렉: 다크니스'가 더 다음에 들지만, 이 정도면 그리 실망하실 분은 없을 듯 합니다. 강추.

     

     

     

     

    P.S.음악은 '누가 들어도 한스 짐머'였는데, 슈퍼맨과 조드 일행(정확하게는 페이오라)이 처음 대면하는 장면의 음악은 '누가 들어도 영웅본색' 이더군요. 기억 안 나시는 분들은 이 동영상의 6분45초쯤부터 나오는 음악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개인적으론 역시 존 윌리엄스가 더 취향.^^

     

     

    아울러 이 친구의 장래가 기대됩니다. 딜런 스프레이베리 Dylan Sprayb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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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트렉 다크니스]

     

    '스타트렉 다크니스(Startrek into the darkness)'는 J.J.에이브럼스의 두번째 스타 트렉 시리즈 영화입니다. '스타 트렉-더 비기닝(2009)' 이후 4년만에 나온 영화죠. 대부분의 시리즈 영화들이 2년 간격을 준수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간격이 좀 길었던 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기다려 온 팬들에게도 기다림은 상당히 지루했죠.

     

    그리고 그 지루함을 보상하기라도 하듯,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차원이 다른 즐거움을 관객에게 선물합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엔터테인먼트의 정수라고나 할까요. 밀림 속에서 갑자기 앙코르와트를 발견하는 듯한 즐거움입니다. 아이맥스나 큰 화면을 강추.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스타트렉' 오리지널 TV 시리즈의 등장인물과 설정을 깔고 시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자, 다 아시는 내용은 생략하고 시작합니다'라는 식의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스토리텔링의 제왕인 J.J 에이브럼스는 과거 팬들의 향수('스타트렉' 시리즈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60년대에 이 오리지널 시리즈를 봤던 세대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새로 생성된 수많은 '젊은' 팬들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올드 팬이라고 해서 반드시 60~70대라고 생각해선 안된다는 거죠)를 달래면서도 새로운 팬들을 확보할 수 있는 현명한 방안을 마련했습니다.

     

    바로 리부트의 형식으로 새로운 시리즈를 시작하되, 시점을 오리지널 시리즈보다도 한참 더 앞선, 그러니까 유명한 등장인물들이 처음 관계를 맺기 시작할 때부터 새로 벽돌 쌓기를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커크나 스팍 같은 유명한 캐릭터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스타트렉- 더 비기닝'을 보면 이들이 어디서 어떻게 만나 처음 우주함대에서 인연을 맺게 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을 통해 에이브럼스의 새 영화 시리즈를 보는 사람들은 올드 팬이나 새로운 팬이나 동등한 위치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불만 많은 올드 팬들은 어디나 있기 마련이죠. 몇몇 팬들은 '스타트렉 다크니스'가 아주 느슨하게 영향을 받은 왕년의 영화 '스타트렉: 칸의 분노(Star Trek: the Wrath of Khan, 1982)과의 관계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리메이크면 떳떳하게 리메이크라고 해라!'라는 식인데, 뭐 어쩌겠습니까. 이미 만들어진 영화를...)

     

     

     

     

    일단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줄거리.

     

    미지의 행성을 관찰하고 있던 우주전함 엔터프라이즈. 외계에서 어떤 문명을 접하든 그 문명의 역사에 관여해선 안된다는 것이 우주함대(Starfleet)의 절대 의무(Prime Directive)지만 이들은 그 행성에서 두 부분의 선을 넘습니다. 첫째는 스팍(재커리 퀸토)이 화산을 진정시켜 행성의 멸망을 막은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커크(크리스 파인)가 스팍을 구조하기 위해 엔터프라이즈의 모습을 행성민들에게 드러낸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주함대로부터 징계를 받고 커크는 함장직을 내놓게 됩니다. 한편 모종의 음모에 의해 우주함대의 수뇌부에 테러 공격이 가해지고 고위 지휘관들이 살해당합니다. 테러의 배후에는 존 해리슨(베네딕트 컴버배치)이라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이들을 추적하기 위해 다시 우주함대가 출동합니다.

     

    그리고 이 테러의 배후에는 정치적인 음모와 과거의 배신이 있었다는 사실이 서서히 밝혀집니다.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환상에 가까운 비주얼의 도가니입니다. 내용은 없고 비주얼만 화려한 영화만큼 관객을 짜증나게 하는 것도 없지만, 적절한 플롯의 배치에 가해진 비주얼의 위력은 정말 '궤멸적'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정도로 효과적입니다.

     

    특히 곳곳에서 등장하는 스펙터클은 더욱 효과적입니다. 화려하기만 할 뿐만 아니라, 장려하기까지 하죠. 영화 초반, 미지의 행성에서 벌어지는 추격 신과 함께 바닷 속에서 물살을 가르며 하늘로 솟구치는 엔터프라이즈의 모습은 제아무리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려 마음 먹은 관객도 한방에 무장해제시키는 힘을 발휘합니다.

     

     

     

    젊은 주인공들 역시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기존의 시리즈가 커크-스팍의 관계에 집중됐던 느낌(이래서 이 둘의 관계를 BL쪽으로 풀어 보려는 마니아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이라면, 의사 맥코이(칼 어반)나 기관장 스코티(사이먼 펙), 그리고 항해사 우후라(조이 살다나) 등의 비중이 만만찮습니다. 조타수 술루(존 조)나 엔지니어 체코프(안톤 옐친)도 시리즈를 거듭하다 보면 주연급이 될 지도...

     

    (아니면 아직 그리 핵심 멤버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에 사소한 트러블이 생기면 다음 시리즈에서는 다른 배우로 교체될지도...^^)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 시리즈를 살리는 핵심적인 키는 바로 이 괴물같은 배우에게 있습니다. 사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조금 더 빨리 스타덤에 올랐더라면 이번 악역 대신 스팍 역을 제안받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외계인스러운 외모는 물론이고, 일반 지구인의 감정을 잘 이해 못하는 이성 제일주의자의 컨셉트라면 스팍이나 셜록이나 막상막하. 하긴 제안을 받았다 해도 '너무 똑같은 역할을 계속 맡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컴버배치가 거부했을 수도 있겠군요.)

     

    어쨌든 컴버배치라는 거물 악역의 등장으로 시리즈는 또 한번 힘을 얻었습니다. 앞으로도 최소한 한번 이상은 우려먹을 듯한 느낌.

     

     

     

    4년 전,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을 보고 나서 '60년대 SF로의 회귀'라는 표현을 썼는데, 그때는 '과학 기술의 미래에 대한 낙관', 내지는 '미국적인 프론티어 정신에 대한 존중'이라는 의미에서 그랬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정서가 90년대 이후 '지나치게 심각해진' SF 영화들에 싫증났던 기존 관객들을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 긍정적인 요소라고 했던 것이고, 이번 '다크니스'에서도 그런 경향은 여전히 유지됐습니다. 오히려 거기서 더 나아가, 아예 2대차전 시절의 할리우드 영화같은 느낌이 추가됐다고나 할까요.

     

    사실 '이 분위기'야말로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타트렉 다크니스'를 9.11과 테러의 위협에 노출된 미국에 보내는 메시지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메시지라면, 꽤 의미 있는 변화가 느껴집니다.

     

    '스타트렉' 시리즈에선 사실 꽤 강도 높은 군국주의가 읽히곤 합니다. 이 시리즈에서 늘 강조되는 모토는 '소수의 희생을 통한 다수의 번영'입니다. 주인공들은 '나 하나를 희생시켜서 이 전함이, 혹은 이 전함 한 척을 희생시켜서 전 함대가, 혹은 이 함대를 희생시켜서 인류 전체가' 보호받을 수 있다면 0.1초도 고민하지 않고 그렇게 하겠다는 각오로 가득합니다.

     

    (어떤 때 보면 전함 엔터프라이즈가 아니라 '진충보국'을 가슴에 새긴 1940년대 전함 야마토의 승무원들 같기도 하죠.)

     

    이 맥락에서 '스타트렉 다크니스'는 특히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적(테러)과 맞서기 위해선 우리도 적잖은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안온한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적들만 파괴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은 없다. 희생이 없으면, 승리도 없다'고 강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쩐지 이 영화는 2차대전 시절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이던 애국주의를 보강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입장은 영화 초반에 견지됐던, '외부 문명의 운명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우주함대 본연의 프라임 디렉티브와는 분명히 서로 상충되는 것입니다. 영화 속에서는 교묘하게 가려져 있지만 아무튼 그렇습니다. 이건 현실에서도 '최강의 문명국가'가 겪는 딜레마이기도 하죠. 보편적인 도덕률에 따라 개입할 것인가, 누군가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지켜볼 것인가.

     

     

     

     

    뭐, 이 양반에게 깊이 파고 들면, '어차피 먼 미래의 광활한 우주공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라고 할테지만요. 아무튼 '스타트렉 다크니스'가 올 상반기 최고의 오락영화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개인적인 순위에선 '아이언맨3'를 이미 제쳤습니다.^)

     

    마지막은 참 코믹한 패러디. 눈빛만으로도 엮으면 이렇게 엮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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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문화가이드가 조금 늦었습니다. 물론 특별한 사정이 있는 건 아닙니다.

     

    벌써 7개월째 소개를 하고 있는데 일정한 패턴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미리 소개 드립니다. 1년 내내 시리즈로 펼쳐지는 공연들이 있습니다. 좋은 공연이고, 추천하고 싶은데 그 공연들을 줄줄이 소개하면 매달 똑같은 추천을 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죠.

     

    이를테면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2년에 걸쳐 총 32곡을 4곡씩 8회의 공연으로 연주)나 국립극장의 완창 판소리 시리즈(6월22일에도 공연이 있죠) 같은 공연은 할 때마다 매번 소개하는 건 지면의 낭비인 듯 합니다. 물론 그 달에 추천할만한 적당한 공연이 영 없으면 다시 등장하겠지만(^^), 가능하면 한번도 소개하지 않은 공연을 추천하는게 의무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이달도 시작합니다.

     

     

     

    10만원으로 즐기는 6월의 문화가이드

     

    ‘계절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5월에 비해 6월은 약간 가라앉은 분위기야. ‘호국 보훈의 달’이라는 이름에다 현충일과 6.25가 있고, 예전부터 문화 행사보다는 추모/궐기 행사가 많은 달이지.


    하지만 사실 6월에 행사가 적은 진짜 이유는, 어린이날/어버이날/스승의날로 이어진 5월의 지나친 지출로 6월은 조용히 그늘에서 쉬는 달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 그래도 잘 찾아 보면, 너무 큰 지출 없이도 문화를 향유할 수 있어. 바로 이런 칼럼이 필요한 달이지.

    연재 시작할 때부터 ‘왜 뮤지컬은 소개하지 않느냐’는 질문이 꽤 있었어. 사실 안 한 건 아닌데, 아마도 클래식 공연에 비해 적다고들 느낀 모양이야. 사실 대부분의 뮤지컬 공연은 너무 고가라서 이 칼럼과는 인연이 없었지. 정한 예산이 10만원인데 ‘자, 20만원짜리 티켓을 사서 이 공연을 봐. 그리고 다음달은 쉬어’ 이럴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단가를 맞추기 위해 검증되지 않은 창작 뮤지컬들을 소개하기도 곤란해. 국산 뮤지컬 중에도 ‘빨래’나 ‘김종욱찾기’처럼 생명력이 검증된 작품도 있지만 아직 대부분은 마니아용이야. 어지간한 라이선스 공연은 다 졸업하고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눈을 반짝이는 관객들이 먼저 판단을 해 줘야 하는 공연들이지.

    어떤 장르든 입문용 작품은 이미 추려져 있어. 오페라를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 같은 걸 보여주면 한참 자다 일어나서 다음부턴 오페라란 말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켜. 뮤지컬도 ‘그리스’나 ‘브로드웨이 42번가’ 같은 작품으로 시작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해. 초심자에게 ‘레미제라블’을 보여주면 의외로 지루하다는 반응이 많아.

     

     


    그런 의미에서 서울 디큐브센터에서 6월30일까지 하는 ‘브로드웨이 42번가’ 를 추천하고 싶어. 고전 중의 고전인데다 ‘이런 게 바로 브로드웨이 쇼구나’하는 화려함에 흠뻑 빠질 수 있거든. 역시 비싸지만 6월의 수요일(5,12,19,26일) 낮 공연은 30% 할인이야. A석이면 3만5천원.

    출연자 개개인보다 전체의 앙상블이 중요한 작품인 만큼 A석이라도 괜찮아. 그리고 이걸로 자신의 ‘뮤지컬 적성 테스트’를 해 보라는 거지. ‘아, 이거야말로 내 취향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적금을 들어. 극장에 취직하든지.

     

    다음. 중급용으로 ‘멤피스’라는 뮤지컬이 있어. 본 조비 밴드의 키보드 연주자 데이비드 브라이언이 작곡한 작품인데, 2010년 토니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작곡상/극본상/편곡상을 휩쓸었지. 2009~2012년 사이 브로드웨이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추천 받는 공연이었는데 아직 한국에선 공연된 적이 없어.

     

     


    그런데 메가박스에서 5월부터 ‘멤피스’의 2011년 브로드웨이 공연 실황을 상영중이야. 무대와 가장 비슷한 곳에서 현장감을 느끼며 볼 수 있는 기회지. 이런 상연의 기회가 반가운 건 나중에 국내에서 라이선스로 공연이 이뤄질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거지. 굳이 브로드웨이까지 가지 않아도 오피니언 리더가 될 수 있어. 2만원.

     

    음악으로 넘어가 볼까? 6월에도 수많은 공연들이 있지만 가격대 성능비를 고려해 볼 때 '바흐 특집'인 디토 페스티발을 추천하고 싶어. 그 중에서도 6월15일의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전곡 연주에 눈길이 가. 요요 마나 미샤 마이스키 같은 세계적인 첼로 비르투오조들에 의해 인기 높은 곡이지. 하지만 이 곡을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로 연주하는 걸 들어 본 사람은 흔치 않을 거야.

     

     

    무반주 첼로 조곡 하면 생각나는 바로 이 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중 1번 곡의 전주곡입니다. 그러니까 '무반주 첼로 조곡 전곡'이라고 하면 이런 곡이 6곡씩 1번부터 6번까지, 총 36곡이라는 얘기죠.


     

    6월15일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열리는 2013 디토 페스티발 에서는 ‘삼색바흐’라는 제목으로 리처드 용재 오늘(비올라), 마이클 니콜라스(첼로), 디쑨 장(더블베이스)이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을 연주해. 세 사람이 각각 두 곡씩 맡아 독주로 들려주는 거지. 그야말로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는 이색 연주야. S석(4만원) 추천..

     

     

    예산이 거의 찼네. 이번엔 살짝 초과해 보자고. 올 여름의 블록버스터 기대작 중에 ‘월드워 Z’라는 작품이 있는 걸 알고 있나? 사실 장르 문학, 특히 더 좁혀서 좀비 장르의 독자들에겐 너무나 유명한 소설 ‘세계대전 Z ’가 원작이야. 브래드 피트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영화화 판권을 놓고 경쟁을 벌인 끝에 피트가 이겼지. 물론 자기가 주인공도 맡고.

     

    맥스 브룩스가 쓴 원작은 지금껏 나온 좀비 장르의 소설들 가운데 가장 스케일이 커. 그 전까지의 좀비 이야기들이 대부분 좀비 창궐로 인한 인류 문명의 멸망과 생존자들의 필사적인 노력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건 아예 국가 단위의 ‘대 좀비 전쟁’ 판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읽어볼만 한 책이야.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면 8천400원 선.


    6월은 이렇게 보내. 7월에 보자고.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 낮 공연 A석                              3만5천원
    뮤지컬 ‘멤피스’ 실황 상영                                                       2만원
    디토 페스티발 - 삼색 바흐(무반주 첼로협주곡)                        4만원
    맥스 브룩스, ‘세계대전 Z’                                                  8천400원

    합계                                                                          10만3천400원

     

     

     

     

     

     

    '세계대전 Z'는 형식면에서도 매우 독특합니다. 그냥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 정교한 가짜 보고서와 가짜 인터뷰의 결합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작가 맥스 브룩스가 만만찮은 양의 정보를 종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한 밀리터리 매니어가 만들어 낸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인류의 상황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사회경제학적 통찰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소설 '세계대전 z'가 더욱 흥미롭기도 합니다.

     

    사실 원작을 읽고 나면, 이 방대한 규모와 시각을 가진 작품을 그대로 영화로 옮기는 것은 재앙이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일단 한 사람의 주인공을 뽑아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죠. 게다가 소설은 '할리우드적'인 영웅담을 조소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사람들이 강조하는 인류애나 인권에 대한 생각들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에 매우 회의적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미 만들어진 예고편만으로도 원작 마니아들은 대단히 영화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원작이 갖고 있는 정서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영화 제작자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세계대전Z' 처럼 지적이고 냉소적인 작품을 그대로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었다간 투자자들로부터 테러를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도 소수의 '독자'들에겐 통할 지 모르지만 대다수 '관객'들에겐 용납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아무도 보지는 못했지만 이번에 개봉하는 영화를 통해 원작 '세계대전Z'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를 보실 분이든 아니든, 원작 '세계대전 Z'는 꼭 한번 읽어 보시라고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단순한 '모험소설'이나 '공포소설'은 결코 아닙니다.

     

     

     

     

    클래식계 훈남들이 늘 등장하는 디토 페스티발은 올해도 바흐를 주제로 다양한 공연이 열립니다. 위에서 소개한 무반주 첼로 조곡 3인 연주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습니다. 지름은 각자 알아서 하시길.^

     

     

     

    마지막으로 멤피스는 감명이 꽤 커서 따로 포스팅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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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정도시 정경호]

    '무정도시' 라는 드라마가 월/화요일 밤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동시간대에 방송된 쟁쟁한 지상파 드라마들의 몇배나 되는 검색량이 밀어닥쳤습니다. 검색어 순위가 모든 것을 대변하는 건 아니지만, 그만치 이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그 화제의 핵심에는 '정경호'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되는 배우. '무정도시'에서는 국내 최대 마약 거래 조직의 하부 조직을 이끄는 중간 보스 시현 역을 맡았습니다.

     

    드라마에 대해서도 '영화 보는 것 같다'는 호평이 이어지고 있지만, 특히나 많은 사람들이 '정경호에게 저런 면이 있는지 몰랐다'며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인도 아니고, 주연을 안 해 본 것도 아니고, 이미 수많은 출연작과 꽤 많은 고정 팬을 확보하고 있는 배우에게 이런 평이 나오는 것은 꽤 의미 있는 일입니다.

     

    정경호 본인과 제작진에겐 무척이나 고무적인 일이고 말이죠.

     

     

     

    '무정도시'가 방송되기 전까지, '정경호'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활짝 웃는 미소년의 얼굴이었습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이런 모습이나

     

     

     

    '개와 늑대의 시간'의 이런 모습.

     

     

     

     

    그런데 '자명고'에서는 슬쩍 남자 냄새를 풍기기 시작하더니,

     

     

     

     

    그것이 '무정도시'에서는 활짝 피어납니다.

     

    흔히 말하는 '리젠트 스타일'의 머리와 수트 차림의 색다른 모습. 단정한 듯 하지만 감정의 동요가 없는 냉정함이 빛납니다.

     

     

     

    대개 '리젠트 스타일'이라고 하면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하는데, 뭐 사실 서양에선 리젠트 스타일이란 말 자체가 없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폼파두르 스타일 Pompadour style 을 일본에서 '리젠트 스타일'이라고 부른다는 얘기가 있군요. 그런데 누가 봐도 콩글리시같은 올빽 All-back'은 엄연히 쓰이는 표현이라니... 참 어렵습니다.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

     

    아무튼 리젠트든 올빽이든, 아무나 함부로 따라할 수 없는 머리 모양입니다. 일단 머리칼 외의 얼굴 각 요소들과 전체적인 윤곽이 받쳐 주지 않으면 그 사람의 결점을 백일하에 드러내 주는 공포의 헤어 스타일.

     

     

     

     

    그런데 저런 수준의 외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머리 모양으로 남성미를 극대화해서 표현하신 분이 있습니다. 아마도 어린 분들은 잘 모르실 수도.

     

     

    바로 누아르의 제왕, 험프리 보가트 선생이십니다. 물론 머리숱이 적어서 저런 머리 모양밖에 안 될 수도 있었겠지만, 저런 허무와 냉정이 깃든 눈빛은 아무한테서나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무정도시'의 정경호에게서 그런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의 대사.

     

    "수야... 이 거리, 우리가 다 먹어 보자."

     

    남자다움을 강조하기 위한 거친 말투나 과장된 몸짓은 없습니다. 말투도 조용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거역하기 힘든 카리스마가 담겨 있습니다. 상복에 가까운 검은 수트는 원래 '그쪽' 남자들의 유니폼 같은 것이지만, 정경호의 스타일은 결코 그 안에서 땀을 흘리거나 칼을 휘두를 것 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20대1로 '다구리'를 뛴 뒤에도 땀방울 하나, 숨결 하나 가빠질 것 같지 않은 모습입니다.

     

    물론 저 수트 안에 탄탄한 근육이 감춰져 있긴 하지만, 결코 근육을 강조하는 표현 방식이 아닙니다. 정경호는 스스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남성성을 과시하는 방법을 익힌 듯 합니다.

     

    (혹은 이정효 감독의 디렉션이 정경호의 내면을 제대로 끌어낸 것인지도.)

     

     

     

    지난번 리뷰에서도 얘기했지만 '무정도시'에는 유난히 등장인물들이 거리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자주 등장합니다. 좋게 말하면 꿈,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욕망의 표현이죠.

     

    누구의 눈에서 바라본 미래가 현실이 될까요. 물론 '무정도시'는 꽤 길고 잔혹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지금의 주인공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 미래를 보지 못합니다. 그건 지금부터 드러날 이야기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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