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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선덕여왕'이 32강 비재 선수권대회로 시청자들을 확 끌어당겼습니다. 이럴 때 역시 불쌍한 건 주인공입니다. 이미 이 대목에서 유신이 풍월주가 된다는 건 정해진 사실인데도, 역으로 유신이 너무 쉽게 우승하면 극의 흥미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개고생을 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제작진이 던진 것은 비담이라는 새로운 변수. 그냥 유신과 보종이 각각 싱거운 4연승으로 결승에 올라 맞붙으면 너무 단순한 얘기가 되는 반면, 검술 실력만으로는 유신과 보종을 앞설 수 있는 비담의 등장이 새삼 긴장을 불어 넣는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비담이 시청자들에게도 널리 호응을 받는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바로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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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극중 인물들의 입장에서 보나,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나 모두 해당되는 말입니다. 먼저 등장인물들의 입장에서 보겠습니다.

비담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갸웃거리는 반응을 보입니다.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의사 소통에 문제를 겪습니다.

지금까지의 방송 내용으로 볼 때 비담의 문제 해결 방식은 참 독특합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갖고 있는 도덕관이나 예의범절에 전혀 얽매이지 않고 곧바로 결론으로 치고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떼도둑들로부터 서책이 담긴 가방을 되찾으려면 그냥 그들을 죽이면 됩니다. 범죄나 살인에 대한 공포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지독하게 단순하면서도 효율적이지만, 감히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이고, 상상한다 해도 실행에 옮길 수 없는 행동입니다. 이걸 사이코패스라고 불러도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반인들과는 매우 다른, 초 효율적인 사고방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비담의 존재는 덕만이건 미실이건 진평왕이건, 심지어 그를 키운 스승 문노에게까지도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됩니다. 이 인물들은 모두 동시대의 신라를 살아왔고, 당시 사회의 가치와 판단 기준을 어느 정도 공유하는 인물들입니다(엄밀히 따지면 덕만이야말로 이런 가치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어쨌든 지금은 공주라는 위치에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잘 적응하고 있으므로 따지지 맙시다).

하지만 비담은 다릅니다. 아직까지 비담의 마음 속에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시청자들은 알게 됐지만 등장인물들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려 할지도 모르는데다, 그 '무엇'을 하기 위해서 대체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담은 다른 모든 캐릭터들을 긴장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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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에게도 이런 비담의 행보는 흥미를 북돋는 요소입니다. 신선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천진난만한 어린애같은 모습으로, 또 때로는 음험하고 속 깊은 음모가의 모습으로, 그야말로 수시로 변신하는 비담의 모습은 그의 앞에 펼쳐진 스토리조차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더구나 비담의 이런 모습은 유신과 덕만 등 '고지식 캐릭터'에 답답함을 느끼던 시청자들에게는 청신호입니다. 뻔히 돌파할 길이 있는데, 조금도 곁길이나 속임수를 쓰지 못하는 주인공들은 그저 정도를 갈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이때 비담이 나타납니다. 대략 이런 상황이 펼쳐집니다.

비담: 니가 고민하던 문제, 내가 해결했어.
유신: 네 이놈, 이게 말이 되는 짓이냐! 누가 이런 짓을 하라고 했어!
비담: 왜? 안되나? 원래 이렇게 되길 바란거 아냐?
유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해주진 않아! 난 정당하게 해야 해! 이건 반칙이야!
비담: 그래? 할수 없지. 그럼 도로 원래대로 해 놓고 올게.
유신: (바짓단에 매달린다) 야, 잠깐만,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그게 아니고...

같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쉬운 승부는 상상도 할 수 없다는 유신과 알천의 대결을 보면서 시청자들이 모두 '그래, 저게 진정한 승부지'라고 감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답답해하는 시청자들이 꽤 있을 겁니다. 이런 부분을 해소해 주는 것이 바로 비담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비담에게선 '전통 질서의 파괴에서 오는 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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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강 비재에서도 비담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들입니다. "난 엉덩이만 노려"나 엉덩이 춤 같은 기이한 행동을 하는가 하면, 문노나 덕만과 함께 있을 때에는 자신도 신라 정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야망을 드러냅니다.

이런 비담의 행동은 이미 대략 정해져 있는 화랑들의 무공 서열에서 상당한 변수 역할을 합니다. 그것도 흥미의 요인이죠.


물론 비담의 문제 해결 방식이 때로는 더 적절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차와 관습, 규범이라는 것은 괜히 생긴게 아니죠. 우리 편이라면 이렇게 상대가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멤버가 하나쯤 있는 것도 좋겠지만, 문제는 비담 같은 캐릭터는 과연 언제까지 우리 편일지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누구를 배신하는 데 있어 죄책감을 느낄 타입이 아니기 때문이죠.

'선덕여왕' 제작진의 가장 큰 성과는 현재까진 비담이라는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과 그 정착입니다. 이런 캐릭터 활용이 다소 수준 낮은 역사 해석에서 오는 줄거리상의 문제점들을 잘 덮고 있습니다. 아무튼 비담의 활약은 춘추의 등장과 함께 이 드라마의 흥미를 끝까지 끌고 가는 데 큰 역할을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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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궁을 떠나 오래 생활한 춘추 역시 진평왕이나 미실이 볼 때 도저히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비담과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담과 춘추가 대면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그 또한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춘추는 정말 저렇게 꽃미남이었을까요? 거기에 대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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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보너스 샷은 보종의 암바-^^  전국 화랑 이종격투대회가 돼 버렸군요.

맘에 드시면 팍팍 추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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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선덕여왕'이 마지막 카드를 다 펼쳤습니다. 여성 시청자들을 끌어들일 김춘추 역의 최종병기 유승호군이 예고편에 살짝 얼굴을 내밀었군요. 많은 분들이 지난주에서 이번주로 넘어오는 '삼한일통' 에피소드의 실망감을 씻으실 수 있을 듯 합니다.

김춘추는 신라는 물론 한국 역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엄친아 왕으로 거론됩니다. 미남 귀공자로 학식과 덕망, 그리고 현실 정치 능력을 고루 갖춘 인물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승호라는 차세대 꽃미남이 청소년기의 김춘추 역으로 일찌감치 캐스팅되어 있었습니다.

그럼 김춘추는 정말 미남이었을까요? 혹시 요즘의 시각으로 볼 때 전혀 미남이 아니거나 오히려 특이한 용모는 아니었을까요? 의혹을 추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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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호가 김춘추 역에 캐스팅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김춘추가 미남이라는 기록은 여기 저기 펼쳐져 있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김춘추가 일본을 방문한 것은 고모도쿠(孝德)왕 시대. '김춘추는 잘생기고 말을 아주 잘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봐도 그렇습니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당나라 황제가 김춘추의 용모를 칭찬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 태자(동궁) 자격으로 고구려 정벌을 위해 청병차 당나라에 들어갔다. 당나라 임금이 그 풍채를 칭찬해 '신성한 사람'이라고 하고 굳이 자기 곁에 머물러 주기를 원했지만 애써 설득시켜 돌아왔다. (在東宮時 欲征高麗 因請兵入唐 唐帝賞其風彩 謂爲神聖之人 固留侍衛 力請乃還)

뭐 물론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아무튼 대표적인 귀공자의 풍모를 가진 왕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사인 '삼국사기'도 짧지만 왕의 외모와 총명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왕은 의표가 뛰어나고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을 지녔다(王儀表英偉, 幼有濟世志)

이런 기록들을 훑어볼 때 외모가 출중했던 것만은 분명한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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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의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그것은 '삼국유사'에서 위에 서술한 '신성지인' 바로 앞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장끼 아홉마리씩을 먹었다. 백제가 망한 뒤에는 점심을 거르기 시작했지만 이때도 하루에 쌀 여섯말, 술 여섯말, 꿩 열마리를 먹었다. (王膳一日飯米三斗 雄雉九首 自庚申年滅百濟後 除晝膳 但朝暮而已 然計一日米六斗 酒六斗 雉十首)

그러니까 백제 멸망 이전까지는 한끼에 밥 한공기(한 말 크기)와 꿩 세마리 씩을 드시다가 백제 멸망 후에는 아침과 저녁만 먹는 대신 한끼에 쌀 세말과 꿩 다섯마리를 드신 모양입니다. 오히려 백제가 멸망하고 나서 한끼에 드시는 양은 더 많아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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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꿩의 크기를 닭과 비슷하다고 친다면,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덜 먹을 때 하루에 치킨 아홉마리(혹은 삼계탕 아홉 그릇), 좀 더 먹을 때에는 치킨 열 마리를 드시는 분은 과연 어떤 체형을 갖고 있을까요. 이건 일반인의 식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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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게 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양은 절대 아닙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다른 숫자들(예를 들어 지철로왕의 체격이나 진평왕의 키 같은)에 비하면 대단히 현실적인 숫자입니다. 요즘도 웬만한 고등학교 씨름부 학생이라면 저 정도는 거뜬히 먹을 겁니다. 즉,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체형은, 요즘의 꽃미남들과는 상당히 달랐을 거란 점입니다. 저렇게 먹고 얼마나 운동을 했을 지 모르지만, 아마도 모델보다는 씨름 선수에 가까운 체형이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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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냉정하게 보자면, '의표가 출중하고', '용모가 신성하다'는 것이 반드시 요즘의 시각에서도 그러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위에 나오는 마신 부우 같은 체형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깁니다. 비명을 지르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 시대엔 저런게 미의 상징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시대가 있다면 그때 태어났어야 했는데...)

물론 저 식사량 얘기가 아예 '왕을 신비롭게 그려내기 위한 조작'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보시는 분들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얼굴을 강호동이나 개그맨 유민상에 맞추기보다는 유승호로 상상하시는 것이 여러 모로 정신건강에 좋겠죠. 뭐 누가 실제로 만나보고 온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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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길어져서 태종무열왕의 능력치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추천이 공짜라는 건 다들 알고 계시죠? 팍팍!

비담의 활약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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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선덕여왕' 제작진은 퀴즈놀이에 푹 빠진 듯 합니다. 저번에는 '사다함의 매화'로 낚시질을 하더니 이번에는 유신과 보종의 비재 대결에서 신라(新羅)라는 국호의 세번째 의미(?)를 묻는 문제로 다음주 월요일까지 시청자들을 붙잡아 놓기로 결심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비밀이 다음주까지 지켜질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답은 이미 8일 방송된 드라마 속에서 전부 나와 있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답이 있어서 설마 이게 답일까 했던 분들, 여러분의 생각이 맞습니다. 정답은 삼국통일입니다. 그 밖에 무슨 답이 또 있겠습니까.

특히 주인공들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동안 죽방 이문식은 혼자 정답을 말하기도 했죠.




문노가 화랑들에게 낸 문제는 '지증왕 때 생긴 신라라는 국호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으며, 그 세 가지 의미는 화랑의 존재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니 세 가지 의미를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무력의 양성, 신흥 세력의 육성이라는 두 가지 의미는 다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세번째 의미는 아무도 - 심지어 문제를 낸 문노까지도 -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낭도들이 답을 놓고 고민하는 장면. 죽방은 태연히 "신라면 새 그물이잖아. 화랑들이 그물이 돼 갖고, 그 그물에다 백제고 고구려고 다 쓸어 넣겠다는 거 아녀! 그물이 답이여!"라고 말합니다. 다른 낭도들이 "그렇게 쉬울 리가...?"하고 의심하자 "그래서 국선이시지, 그렇게 허를 찌르는거여"합니다.

죽방의 판단은 정확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답은 맞았습니다. 그리고 유신과 덕만이 거칠부가 숨겨 놓은 소엽도 표면의 미세한 글자를 들여다 보는 장면에서, 정답은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덟 자가 보입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군요.

회전을 시켜 보면 좀 더 확실히 보입니다.



잘 보이지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삼국사기에 나오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 입니다. 해석하자면 '나라의 덕업을 새롭게 하여 천하를 받아들이다'라는 얘기가 됩니다. 즉, 나라를 잘 다스려 부강하게 하고 그를 통해 덕을 쌓아 사방으로 영토를 펼쳐 나가자는 얘기죠. 이 시기의 신라에서 다른 말로 바꾸면 삼한일통, 즉 삼국통일입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개인적으로 '선덕여왕' 제작진에게 실망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날 방송에서는 계속해서 그 궁금증을 증폭시키기 위해 이 감춰진(?) 의미를 '진흥왕의 불가능한 꿈'이라는 식으로 표현하는데, 이건 정말 어이없는 생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진흥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꿈꿨고, 거칠부가 편찬한 국사에 그 뜻을 담아 후세에 전하려 했으나 뒤를 이은 진지왕이 그 뜻을 잇기를 거부했고, 진지왕이 폐위된 뒤에도 미실과 세종이 짜고 그 뜻을 감추었기 때문에 지금(드라마 속의 시대)에 와서는 그 뜻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식으로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덕여왕' 제작진의 설정에 따르자면, 미실이 권력을 쥐고 있던 진평왕 때에는 왕도, 왕비도, 대신들도, 장군들도, 화랑들도, 아무도 '삼국 통일'이라는 대명제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아무도 이것이 국가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는 겁니다. ...아무리 드라마지만 좀 지나치지 않습니까? 웃음이 나옵니다.

우선 당시 신라의 힘을 보겠습니다. 진흥왕 이후의 신라에게 있어 삼국통일이란 '불가능한 꿈'도 아니요, 어느 한 시대의 집권세력이 감추려 한다 해서 감춰질 정도로 불분명한 목표일 수도 없었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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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봐도 금방 드러나지만 진흥왕대의 신라는 이미 한반도의 핵인 한강 하구를 손에 넣었고 함경남도 지역까지 깊숙히 고구려의 영토로 침투하는 등 삼국시대의 주도권을 잡아가기 시작한 나라입니다.

더구나 신라인의 스케일은 그저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해 통일을 이루는 정도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흔히 '삼국통일의 염원이 담긴 탑' 정도로 알려진 황룡사 9층탑은 한 층마다 한 나라씩, 모두 아홉 나라를 병탄하겠다는 엄청난 야망이 담긴 탑입니다.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 5층은 응유, 6층 말갈, 7층 단원, 8층 여적, 9층은 예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9층의 예맥 속에 포함돼 있습니다. 한마디로 동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겠다는 에너지를 뿜어내는 탑인 것입니다. 이 탑을 세운 것이 선덕여왕때라고 해서 이런 비전을 선덕여왕 혼자 갖고 있었다고 밀어붙이는 건 좀 곤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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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미실은 "국가가 전쟁에 나서면 왕권은 강화되고 귀족들은 세력을 잃을텐데 무엇때문에 내가 세번째 의미(삼국통일)를 계승해야 하느냐"고 냉소하지만, 이것 역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그럼 대체 미실은 '삼국 통일', 다른 말로 '백제와 고구려의 정복'을 접어둔 채 어떤 주장으로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굳히고, 화랑이라는 무장 집단의 발전을 정당화했을까요.  

요즘 같으면 '국방'과 '정복 전쟁'은 구분되는 개념이지만 7세기에도 '주변국을 자극하지 않는, 그저 방어만을 위한 무력'이라는 개념이 존재했을까요. 어림없는 얘기입니다. 당시의 눈높이로 보자면 화랑과 상무정신의 존재는 정복 전쟁으로 이어질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진흥왕의 정신은 책 한권을 태우고 다시 쓰고 해서 가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흥왕의 의지를 표현하는 증표는 역사책 몇권보다 훨씬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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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네 군데에 세워진 진흥왕 순수비입니다. 진흥왕이 스스로 개척한 국토를 돌아보며 세운 세 군데의 비석만큼 팽창해가는 신라의 에너지를 잘 상징해주는 유물은 없습니다. 순수비가 뻔히 서 있는데 책 몇권을 조작한다고 이만한 국가적인 목표가 잊혀질 거란 생각은 참 안이합니다.

이 드라마의 설정대로라면 미실 일파는 반 통일세력이고, 그 이유는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사리사욕에 빠져 국가적인 목표를 잃었다는 점이 미실 그룹이 타도되어야 하는 이유이고, 덕만은 이를 통해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명분이란 바로 삼국 통일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온 나라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다음 주의 '선덕여왕' 내용일 듯 합니다.

반통일적인 기득권 세력에 대항해 통일을 명분으로 내건 젊은 개혁세력 덕만. 용어는 그럴듯하지만 비유는 참 공허합니다. 용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끌어다 붙인 억지 춘향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걸 '작가의 메시지'라고 생각하겠죠.

저는 이미 몇달 전부터 '대체 미실과 덕만의 차이는 무엇인가, 덕만이 미실을 대신해야 한다면 그 명분은 무엇인가에 대해 드라마 제작진이 답을 내놔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들어 이 드라마의 초점이 '대체 덕만이 미실에게서 권력을 빼앗아도 좋은 명분은 무엇일까' 쪽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을 보며 내심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제작진이 내놓은 답은 참 실망스럽습니다. 그냥 판타지 드라마로 남아 있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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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선덕여왕'의 문노가 마침내 솜씨를 과시했습니다. 칼 한번 뽑지 않고 비재를 위해 연무장에 모인 화랑들을 단번에 제압해 버리더군요. '내가 칼 뽑으면 니들은 다 죽어'라는 식의 위압감이 넘쳤습니다. 알천을 비롯한 10화랑들도 감히 손가락 하나 손댈 수 없었습니다.

문노가 검으로 단연 신라 최고라는 것은 이미 '선덕여왕'의 설정이자 '화랑세기'의 기본 이해 사항입니다. 문노 이후의 화랑들 중 문노의 제자가 아닌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랑세기'에 문노의 검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문노 이외의 다른 화랑들은 어느 정도인지가 다뤄져 있지는 않습니다.

문노를 포함해 '선덕여왕'에 등장하는 화랑들의 칼솜씨에 순위를 매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랭킹을 좀 따져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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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는 당연히 문노.

'검술이 뛰어나고 의기가 빼어났다'는 것이 문노에 대한 기록입니다.

문노편에는 사다함의 어머니 옥진궁주가 '문노로 하여금 사다함의 스승이 되게 하였다'고 되어 있고, 하종편에도 '(하종이)15세때 화랑에 입문하여 역사는 토함공에게, 노래는 이화공에게, 검술은 문노에게, 춤은 미생에게 배웠다'고 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미생과 관련된 기록. 미생은 12세에 사다함의 문도로 화랑에 입문했으나 너무 어려서(혹은 운동신경이 떨어져서) 말을 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화랑에 들어올 수 없는 상태였지만 열혈 누나 미실이 나서 "왜 내 동생을 함부로 떨어뜨리느냐"고 반발해 그대로 눌러 앉게 됐다고 합니다. 이때 문노의 반응입니다.

...문노가 꾸짖어 "무릇 낭도가 말에 오르지 못하고 검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하루 아침에 일이 생기면 어디에 쓸 것인가"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어 말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받아들일 만 하지 않겠습니까"하여 문노가 다시 따지지 않았다.

아무튼 이런 배경을 기본으로 창조된 '선덕여왕'의 문노는 '고독한 최강의 사나이' 이미지를 굳히고 있습니다. 젊은 화랑들과는 이미 비교할 수 없는 수준차이가 나죠. 드라마상으로는 스카우터도 필요 없는 단연 최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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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위는 칠숙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문노와 짧긴 하지만 그나마 1대1로 싸움을 펼쳤습니다. 또 미실도 '네가 문노에 비해 뒤질 것이 뭐가 있느냐'며 칠숙의 솜씨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죠.

검술도 검술이지만 터미네이터같은 집념과 사막의 폭풍우에서도 살아남는 생명력은 랭킹 2위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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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위는 비담.

문노의 제자로서 엄청난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지만 최근 미실에게 잡혔을 때 혼자 다수의 포위를 뚫고 탈출하는 것은 아직 무리라는 점도 드러났기 때문에 문노나 칠숙에 비교할 실력은 아닌 듯 합니다. 칠숙과는 한번 겨뤄 봤지만 당시 칠숙은 그의 검술 스타일을 파악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냥 치고 빠졌죠.

하지만 살인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는 점이나, 물불 안 가리는 과감성 덕분에 동년배의 화랑들에 비해서는 이미 한 수 위의 실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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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위: 유신

죽방 이문식의 대사로 '백만스물 하나, 백만스물 둘'이 나온 것으로 보아 드라마 관계자가 이 블로그를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듭니다(물론 처음부터 작가진이 '백만 스물 하나'를 염두에 두고 썼을수도 있겠죠).

아무튼 그런 무식한(?) 타격 훈련의 힘 덕분에 유신은 이미 보종을 넘어서 기존 화랑 중에서는 최강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덕만을 구하기 위해 비담과 함께 화랑들을 상대로 싸울 때, 문노가 '최근에 검을 겨룬 적이 없지?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잘 모르는구먼'이라면서 힌트를 준 적이 있죠. 그리고 실제로 보종과 석품을 단칼에 물리쳤습니다.

보종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미 '선덕여왕' 드라마 상에서 유신의 검술은 보종을 넘어서 있습니다. 8일 방송일지 다음주일지 유신과 보종은 차대 풍월주 자리를 놓고 대결을 펼치겠지만 유신의 낙승이 예상됩니다.

(이미 시청자들이 유신의 우세를 점치는 상황이므로 예선에서 유신과 맞붙은 석품이나 기타 등등이 보종의 우승을 위해 유신에게 반칙으로 부상을 입힌다... 등등의 전개가 예상됩니다. 가능하면 이런 진부한 전개는 좀 피해 줬으면 하는 기대가 있습니다.)

물론 '화랑세기'상의 기록에도 14세 호림(호재)의 다음인 15세 풍월주는 유신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유신의 승리는 역사적인 필연입니다.^^ 보종은 유신으로부터 풍월주의 자리를 물려 받을 운명이죠. 안타깝지만 조연의 팔자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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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위: 보종

설원과 미실도 당연히 비재를 하면 보종이 1등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다른 10화랑들도 이미 보종에게 모두 무릎을 꿇은 상태이니 그중 최강은 보종입니다. 알천과 석품도 "이미 유신 빼고는 모두 보종에게 굴복했다"고 이야기했죠. 보종의 낭도들도 "보종과 다른 사람들이 겨루면 재미가 없어서 못 본다(너무 쉽게 승부가 가려진다는 뜻)"고 할 정도로 보종의 검술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미 어린 시절, 서라벌에 처음 올라온 유신은 보종에게 수준차를 느끼며 굴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보종은 비담과 유신에게 망신을 당한 적이 있죠.

생각해보면 '선덕여왕'에서 가장 고생하는 사람은 보종입니다. 문노를 찾으러 갔다가 임종의 화살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서현을 죽이려다 미실에게 죽음을 당할 뻔 하고, 힘든 일만 있으면 파견되고... 조연의 운명 치고는 참 가혹합니다. 일복을 타고 났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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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사실 별 의미도 없고, '선덕여왕' 제작진도 이 이상의 서열 매기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알천이 그리 검술로는 두각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정도입니다.

그나자나 뒷날 칠숙이 석품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다 실패해 죽음을 당할 때(뭐 대략 미실파의 마지막 실질적 위해 시도라고 생각되지만) 혁혁한 공을 세워야 할 염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도 의문입니다. 염장은 17세 풍월주로 보종과 춘추 사이를 잇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뭐 드라마에서는 월야나 알천, 지금까지 전혀 활약이 없는 필탄 등이 그 역할을 대신 할 수도 있겠죠.

그러고 보니 궁금합니다. 칠숙이 덕만을 살해하기 위해 마지막 몸부림을 칠 때 칠숙을 제압하는 것은 문노일까요, 비담일까요, 유신일까요. 여기서 또 한번 순위 변동의 계기가 생길 듯 합니다.^




그동안 '선덕여왕'에 대해 썼던 글들을 모두 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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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시는 분들에게 장진영이라는 배우는 어떤 배우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인에 대한 예의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장진영은 단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이 표현을 '였습니다'라고 써야 한다는게 참 안타깝습니다. 연기력으로, 미모로 장진영과 경쟁할 만한 30대 여배우는 감히 '없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1997년쯤의 일이군요. 지금은 사라진 현대방송(HBS)의 '연예특급'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고인은 탤런트 김승환씨와 함께 MC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도 그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고인을 처음 알게 된 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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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장진영은 미스코리아 출신(1993년 충남 진)이었고 미모와 몸매로 주목을 끌었지만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신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장진영의 소속사는 스타들의 집결지였죠. 이승연 장동건 김지수가 한창 빛을 발하고 있었고 원빈과 윤손하가 발군의 신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뒤늦게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는 양정아와 장진영이 있었습니다.

스타군단의 막내...란 쉽게 스타들의 후광으로 떠오를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얼마나 욕심을 내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당시 소속사 대표의 말은 "갖출 건 다 갖췄지만 본인이 그리 열심히 하려는 의욕이 없는 것 같다. 스스로 하려는 뜻이 없으면 아무래도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는 쪽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미모와 몸매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였지만 이 대표의 예상대로 장진영은 쉽게 스타덤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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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장진영의 첫 모습으로 기억하는 것이 1999년의 '순풍산부인과'지만 그 전에도 장진영의 출연작은 여러 편 있었습니다. 1997년 출연작인 '내안의 천사'때 OST 표지(위 사진)에서도 아랫줄 오른쪽 장진영을 못 알아 보실 분도 있을 겁니다. '마음이 고와야지'같은 드라마에선 극중 비중도 꽤 컸습니다. 단지 히트작이 없었을 뿐이죠.
 
농담처럼 베스트극장 '그와 함께 타이타닉을 보다'가 대표작이라고 말하던 무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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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장간호사 역할은 이미 연예계에서는 '유망주라기엔 너무 세월이 흘렀고, 자리를 잡았다고 보기엔 너무 지명도가 떨어지는' 장진영이 하기엔 좀 아슬아슬한 역이었습니다.

어쨌든 드라마에서 주연급으로 출연했던 배우가 하기엔 너무 작은 역이었죠. 말하자면 백의종군인 셈입니다. 아마도 장진영이 '어디 한번 열심히 해 보자'고 각오를 다진 것이 '순풍산부인과'를 전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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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의 손짓에 응한 장진영은 '반칙왕'에서 송강호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관장 딸(요즘 드라마 '드림'의 손담비 역에 가깝군요) 역으로, '싸이렌'에서 신현준의 애인 역으로 출연합니다. '반칙왕'은 좀 주목을 끌었지만 '싸이렌'에선 영화도, 장진영의 역할도 전혀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냥 '주인공도 애인이 있어야겠지?'라는 데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캐릭터였죠.

하지만 전혀 의기소침하지 않은 채, 천연덕스럽게 "다음부턴 좀 비중이 큰 작품을 골라야겠다"고 말하던 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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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장진영은 마침내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지금껏 개인적으로 한국 공포영화 사상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윤종찬 감독의 '소름'에서 그야말로 소름끼치는 열연을 펼칩니다. '소름'은 철거 직전의 낡은 아파트를 배경으로 '저주'라는 것의 본질을 파고드는 걸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걸작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장진영과 김명민이라는 두 주인공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습니다.

아무도 '연기력을 갖춘 배우'라고 생각지 않았던 장진영으로선 자신의 가능성을 이 한편으로 증명해 보인 셈이죠. 영화는 그리 히트하지 못했지만 김명민과 장진영, 두 배우의 이름은 한국 연예계에서 '더 비싸지기 전에 빨리 잡아야 할' 명단에 오릅니다. 그리고 이 작품으로 첫번째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안습니다.

사실 그리 흥행작도 아닌 영화에서, 그리 연기력이 검증되지 않은 배우에게 이런 상이 주어진다는 건 파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와 장진영이 던진 파문이 컸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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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꽃 향기'가 조금 아쉬움을 남긴 화제작이었다면 '싱글즈'는 로맨틱 코미디의 여자주인공으로도 장진영을 능가하는 배우는 없다는 확신을 주는 흥행작이었습니다.

김주혁과 장진영이라는 배우의 절묘한 호흡이 '한국에서도 이런 장르가 성공할 수 있다'는 모범사례를 만들었죠. 장진영은 이 작품으로 두번째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흥행과 평단의 호평을 한손에 거머쥐었습니다. 장진영으로서는 '귀여운 여자'의 이미지로도 변신 가능하다는 걸 증명하는 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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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05년 '청연'의 흥행 실패, 2006년 '연애, 그 참을수 없는 가벼움(이하 연애참)'의 부진이 좀 안타까웠습니다. 특히 '연애참'은 장진영이 자존심을 건 열연을 펼쳤지만 제작편수 증가와 한국영화 인플레이션의 틈바구니에서 관객 동원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자존심만 강한, 실속이라곤 없는 고참 호스테스 역을 맡은 장진영의 연기가 돋보였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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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 수상 발표 때, "감독님에게 서운했고, (김)승우 오빠에게 서운했다"며 눈물을 흘리던 장진영의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그리고는 2007년작 '로비스트'가 있었고, 그 이후로 장진영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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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와 데뷔 연도에 비해 장진영이 실제로 주목받은 기간은 매우 짧은 편입니다. 관객 동원으로 봐도 장진영은 천만 관객은 커녕 300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도 갖지 못한 배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였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고인에 대한 인사치레가 아닙니다.

장진영은 대형 스크린을 혼자 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였습니다. 또 활동기간이 훨씬 더 긴 배우들 가운데서도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발군의 적응력을 보인 사례는 현역 여배우들 가운데선 찾아보기 힘듭니다. 지금까지 해낸 기록만으로도 대단한 배우임을 확인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고인이 조금만 더 일찍, 연기로 인생의 승부를 걸었더라면 아마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진영보다 훨씬 더 큰 배우로 남았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씩씩하고 밝은 성격에 두주불사의 친화력을 자랑하던 이 배우가 아직 한창 나이에 이렇게 팬들의 곁을 떠난 건 그래서 더욱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때 병세가 회복되어 바깥나들이도 할 수 있다던 그가 어느새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있다니, 이렇게 글로 조상하는 일도, 참 부질없이 느껴집니다.

부디 저 세상에서도 더욱 빛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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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재'. 역시 이 노래겠죠.



P.S. 출생 연도가 최종 확인되어 1972년으로 정정합니다. 오해를 끼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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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선덕여왕'이 잇달아 새로운 인물들의 활약으로 흥미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서라벌 10화랑으로 부족해서 가야파의 1인자 월야(주상욱)에다 사라졌던 미실의 아들 비담(김남길), 그리고 다음엔 또 누가 등장할지 모르겠군요. 물론 춘추 유승호는 여전히 위력적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다 보면, 어라 저기서 인물이 나와야 하는데 왜 안 나올까 할 때가 있습니다. 사극이라 특히 그렇죠. 진지-진평왕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면 반드시 나와야 할 인물들이 안 나옵니다. 김유신과 덕만의 로맨스를 강조하기 위해 천관녀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건 지난번에도 얘기했었지만 당대를 호령해야 할 유명한 화랑들이 다수 드라마에서 사라진 건 좀 아쉬운 구석이 있습니다.

과연 어떤 인물들이 안 보일까요. 정리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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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광법사

사실 진흥-진지-진평왕 시대의 화랑 얘기를 하면서 원광법사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건 반칙입니다. 화랑을 논하면서 세속오계를 빼놓을 수 없고, 오계를 부정하지 않는데 원광법사가 단역으로라도 등장하지 않는 건 심각한 문젭니다. (하지만 제작진은 전혀 생각이 없는 듯 합니다)

물론 지금 나오면 그것도 반칙입니다. 이유는 삼국사기 기록을 토대로 볼 때 원광법사의 입적 연도가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태어난 연도인 602년이기 때문입니다. 춘추가 수나라로 유학을 갔다 오는 마당에 원광법사가 살아 있다는 건 좀 심각한 왜곡이죠.

하지만 원광법사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이 화랑들은 세속오계를 모르는 족보 없는 화랑들이 돼 버렸습니다. 수나라에서 돌아온 원광법사가 귀산과 추항을 불러 오계를 내리고 화랑도의 근본으로 삼으라고 해야 할텐데, 그 대목이 빠지니 오계를 논할 시점을 놓친 것입니다.

사실 원광법사가 '선덕여왕'에서 사라진 뒤에는 더 복잡한 이유가 있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따르고 있는 '화랑세기'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원광의 아버지는 4세 풍월주 이화랑이고 어머니는 세종(미실의 남편)의 누나인 숙명공주입니다. 세종의 외조카가 되어 버리니 세종-미실 측과 너무 가깝죠. 이화랑과 숙명공주는 원광과 동생 보리공(12세 풍월주)를 낳아 신라의 화랑 계보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화랑오계를 내리는 등 당시 신라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원광법사가 세종-미실의 측근이라는 건 드라마 속에서 미실에 대항하는 덕만 세력의 정통성을 지나치게 크게 해치는 구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는 원광법사를 등장시킬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게 역사 왜곡은 좀 작작 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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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귀산과 추항

마찬가지로 원광법사로부터 오계의 가르침을 받아 사군이충, 사친이효, 교우이신, 임전무퇴, 살생유택을 다른 화랑들에게 널리 퍼뜨리는 중책을 맡은 인물들인데 어디론가 실종돼 버렸습니다. 아마 원광법사의 생몰연대에서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이들은 이미 어디선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를 해 버린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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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형

사실 '선덕여왕'의 흐름에 상당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던 인물이지만 드라마에서는 활용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듯 합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비형은 진지왕(사륜왕)이 죽은 뒤 그 혼령이 서라벌의 미녀 도화랑과 정을 맺어 태어난 아들입니다.

기록을 좀 더 자세히 보자면, 진지왕은 도화랑의 미모에 반해 궁으로 불러 범하려 합니다. 하지만 도화랑은 "남편이 있는 몸이 어찌 몸을 함부로 하겠느냐"며 왕명을 거역하죠. 기특하게 여긴 진지왕이 "그럼 남편이 없다면 되겠느냐"고 묻자 도화랑은 "그렇다면 허락하겠다"고 답합니다.

진지왕은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고('선덕여왕'에 따르면 미실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죽죠), 도화랑의 남편 역시 3년 뒤 죽습니다. 남편이 죽은 어느날, 진지왕의 혼령이 도화랑을 찾아와 동침을 요구하고, 열달 뒤 비형이 태어납니다.

왕가의 핏줄이라 소문이 나자 진평왕은 비형을 궁중으로 데려와 길렀는데, 이때에도 비형은 밤마다 몰래 혼자 빠져나가 귀신들을 거느리고 노는 비범한 면모를 보여줍니다. 이때 진평왕은 비형에게 "귀신들 가운데 인간세상을 섬길만한 자가 있느냐"고 묻자 비형은 길달이라는 귀신을 추천합니다. 이에 진평왕은 길달을 각간 임종(네. 아래 사진에 나오는 10화랑 중의 바로 그 임종입니다)의 양자로 삼게 합니다.

이렇게 귀신을 거느릴 정도로 신통방통한 비형. 물론 과학 기술을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에겐 이런 비형의 사적이 공자님께서 꺼리라 하신 괴력난신에 해당할테니 '선덕여왕'에서 제거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뒷날 누군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드라마를 만든다면 그때는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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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륵선화 미시

진지왕때 흥륜사에서 진자대사가 기도해 맞아들인 미시(未尸)는 불교의 미래불인 미륵의 화신으로 인정받은 소년 화랑입니다. 홀연히 나타나 신라의 화랑, 국선이 되었다가 홀연히 사라졌다는 전설의 화랑입니다.
물론 '화랑세기'의 역대 풍월주 명단에는 미시랑의 이름이나 사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삼국유사의 미시랑 관련 기록에는 최초의 화랑 이름이 설원이라고 되어 있죠. 물론 '화랑세기'에는 설원의 앞에 6명의 풍월주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상충되는 기록들을 모두 살리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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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호세, 구참

진평왕때의 명승인 혜숙대사의 사적에 나오는 화랑들입니다. 특히 구참공이 사냥과 살생을 즐기는 것을 보고 혜숙대사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그렇게 고기가 좋으면 이 살을 드시오" 하고 권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합니다.
물론 '화랑세기'에도 이런 인물들은 아예 흔적도 보이지 않습니다. '화랑세기'가 정교한 위서라면 이런 화랑들을 일부러라도 등장시켜서 삼국유사 기록과 맞아 떨어지는 부분을 늘려 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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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향가 '모죽지랑가'로 유명한 죽지랑이 등장해야 하겠으나 주요 활동 연대가 진덕여왕 이후이니 아직 태어났어도 어린 소년일 겁니다. 유신랑의 동생인 흠순이나 관창의 아버지 품일 같은 사람들은 앞으로도 충분히 등장할 여지가 있겠지만 그다지 큰 역할을 맡게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국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김유신을 중심으로 '족보 있는(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근거가 나오는)' 알천과 임종, 필탄이 중심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보종이나 그 계열의 '창작 화랑진'은 조역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게 되겠죠.

이런 구도는 '그들은 왜 역사에 등장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역사는 승자만을 기록한다'는 대답을 내놓을 수 있는, 매우 교묘한 배치입니다. 마야부인이 미실을 향해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은 것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미실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설명 역할을 하듯, 드라마 속 화랑들의 운명 역시 미실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설명이 이뤄질 겁니다. 이런 인물 배치 속에도 제작진이 시청자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숨어 있다고 봐야겠죠.

그나자나 비형랑이 '선덕여왕'에 나온다면 비담 못잖은 괴짜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을 것 같은데...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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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기대작 중 하나였던 마이클 만 감독의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왔습니다. 조니 뎁과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하는 갱스터 무비라는데 안 보고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죠. 이름 값으로 놓고 보면 왕년에 만 감독이 '히트'에서 이뤄냈던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의 경연 이후 최강의 진검 승부라고 부를 만 합니다.

이 영화는 1930년대,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로 잘 알려진 남녀 커플 강도 보니 파커와 클라이드 배로와 함께 가장 유명한 범죄자였던 존 딜린저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1930년대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대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을 때이면서 미국의 FBI가 오늘날의 명성을 차지하기 시작한 시기, 그리고 제임스 캐그니 주연의 오리지널 영화 '퍼블릭 에너미'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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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강도 존 딜린저(조니 뎁)는 단정한 용모와 세련된 옷차림, 그리고 여자에겐 손을 대지 않고 은행을 털 때에도 저금하러 온 일반 고객의 지갑은 건드리지 않는 독특한 스타일로 팝스타 못잖은 명성을 누립니다. 그런 그는 어느날 클럽에서 미모의 빌리(마리옹 꼬띠야르)를 보고 한눈에 반합니다. 결국 딜린저와 빌리는 연인이 됩니다.

한편 쉴새없는 딜린저의 발호로 곤경에 몰린 FBI 국장 후버(존 크루덥)는 딜린저 못잖게 유명한 갱인 프리티보이를 사살한 명수사관 퍼기스(크리스찬 베일)를 FBI 시카고 지부장으로 임명하고 딜린저 체포의 전권을 맡깁니다. 일반 경찰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 낼 때 FBI라는 조직의 앞날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후버의 승부수였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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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라는 새로운 스타를 내놓으며 70년대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예로 들었지만 딜린저를 소재로 한 영화도 한두편이 아닙니다. 한국에 비디오로 나왔던 영화만도 '델린저'와 '전설의 대도 딜린저' 등이 있습니다. 두 편 모두 딜린저와 퍼기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도 너무나 유명한 얘기지만, 혹시라도 이걸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테니 그 얘기는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이클 만은 1930년대 매스컴에 의해 '로빈 후드'로 묘사됐던 독특한 성격의 은행 강도를 다루는 데 있어, 역시 평소의 그답게, 다소 혼란스러운 시각으로 접근합니다. 개인적으로 마이클 만은 참 희한한,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는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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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뉴스 프로그램 PD 출신답게 냉정하면서도 관찰자의 시점에 남아 있는 연출을 즐기는 듯 하지만 어느 한 순간 격렬한 신파에 휘말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결말은 산으로 가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스카 노미네이트작인 '인사이더'가 그의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의 공연'이라는 간판이 달린 '히트'일 겁니다.

그가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열정을 보여줄 때 '인사이더'나 윌 스미스 주연의 '알리'같은 영화가 나옵니다(단 '알리'는 너무 지루하기 때문에 비추). 하지만 그가 오우삼 못잖은 닭살 느와르 감독의 본색을 드러낼 때에는 '히트'나 '콜래트럴', 그리고 이번 '퍼블릭 에너미'같은 영화가 나오죠. 감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최초의 작품인 '킵'이나 '라스트 모히칸' 같은 영화들은 갱들이 나오는 작품은 아니지만 후자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한때 그는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그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세계의 화해를 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때문에 차기작에는 더욱 관심이 쏠렸지만 '퍼블릭 에너미'는 형식면에서의 높은 완성도에 비해 유난히 돋보이는 세계관의 부재 덕분에 불균형이 더욱 눈에 뜨는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단어가 좀 어렵다고 생각하실 분들을 위해 좀 편안한 말로 풀어 설명하자면, 때깔과 만듦새는 매우 그럴 듯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좀 의아한 영화라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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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릭 에너미'가 그럴 듯하게 '있어 보이는' 것은 마이클 만이 깔아 놓은 알리바이가 꽤 그럴싸하기 때문입니다. 만은 딜린저를 시대를 잘못 태어난 낭만주의자이며, 그를 '퍼블릭 에너미'로 만든 것은 FBI 국장 에드가 후버라는 식의 서술 말입니다. 만은 영화 곳곳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인기 없는 인물인 에드가 후버가 진짜 악역이라는 식의 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조차도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은 듯 합니다.

게다가 관객들은 '퍼블릭 에너미'를 볼 때 '1930년대 미국 갱의 역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영화 속의 사건들은 그냥 만 감독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재배치되어 있습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를 애인인 아나 프리셰트의 구출을 위해 목숨을 거는 순정남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많은 기록들은 영화의 라스트 신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폴리 해밀턴과도 연인 관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딜린저와 동시대의 갱들인 프리티보이 플로이드와 베이비페이스 넬슨은 모두 딜린저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 사소한 변동이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이 영화는 겉으로 포장된 것 만큼 '담담하고 감정을 배제한 채 묘사된 진짜 느와르의 시대'를 담고 있지 않다는 얘깁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겉멋에 치중해 알맹이는 하나 없는 화려한 한 폭의 그림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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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영화에서 남는 것은 상황 판단을 못하는 과대망상증 환자인 은행강도 존 딜린저와 한때 그의 치명적인 매력(...그런데 그것은 딜린저의 매력이라기보단 조니 뎁의 매력으로 보입니다)에 빠져 인생을 망친 아나 프레셰트의 덧없는 사랑 이야기 뿐입니다. 크리스찬 베일에겐 미안하지만 이 영화에서 '때로 자기 환멸에 빠지는 고독한 법의 집행자' 이미지는 그냥 겉돌다 사라질 뿐입니다.

너무나 캐스팅이 화려한 탓에 늘 실망하면서도 꼭 보게 되는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들.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게 되는 영화는 '인사이더'와 '마이애미 바이스' 정도입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부동심을 지켜 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길 기도해 봅니다. 아무튼 제 의견을 묻는다면, 보러 가시라고 추천하기 힘든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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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딜린저의 실제 얼굴과 영화 속 조니 뎁입니다. 뭐 그리 닮은 편은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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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균 감독의 '해운대'의 천만 관객 동원이 기정사실이 됐습니다. 한국 영화 사상 다섯번째의 위업이고, 과연 어디까지 더 갈지가 궁금합니다.

사람 힘만으론 안되고 하늘이 도와야 가능하다는 천만 관객 동원, 대체 원인이 무엇일까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윤제균 감독의 힘, 설경구와 하지원, 그리고 이대호(^^)의 열연, 김인권과 이민기의 탁월한 재능 발휘, 해운대라는 친숙한 환경이 사라진 폐혀의 모습, 등등은 이미 수없이 거론됐던 부분들입니다.

하지만 '해운대'라는 영화 바깥에서 천만 관객 동원을 지원한 세력들이 있습니다. 바로 외부 세력들입니다. 과연 누가 '해운대'를 외부에서 도와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정리해보겠습니다. 물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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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국발 금융위기

참 멀리 간 얘기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대체 금융위기가 영화와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셨던 분들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그게 그게 아니라는 걸 아실수 있을 겁니다.

1991년 '터미네이터2'가 최초로 제작비 1억달러 선을 돌파한 이후 거의 20년, 이제 여름 시즌을 겨냥한 할리우드 블럭버스터의 예산은 평균 1억달러를 넘긴 지 오래입니다. 1억5천-2억달러 선의 영화도 한 시즌에 두세편씩 개봉되는게 보통이죠. 한국 돈으로 는 2000억원에서 5000억원까지의 돈이 왔다 갔다 합니다.

아무리 할리우드라지만 이런 돈을 쌓아놓고 장사하는 영화사는 없습니다. 대개 영화 제작 단계에서 제작비 투자를 받죠.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월 스트리트를 싹 쓸어버린 금융위기는 블럭버스터 투자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결과는 올해 여름, 할리우드의 이렇다 할 블럭버스터가 최소한으로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지난해와의 차이는 다음 항목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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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트랜스포머 2

2억 달러가 들어간 대작 '트랜스포머 2'는 현재까지 미국 내에서만 약 4억달러 가까운 돈을 긁어 모았습니다. 지난 6월24일 국내에서 개봉한 뒤에도 740만 관객을 쓸어모았죠. 전 세계적으로 올해 최고의 흥행작이 될 전망입니다. 그런데 왜 이게 '해운대'의 흥행에 도움이 됐다는 걸까요? 위 항목과 연계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불황이라도 될 영화에 투자가 끊기는 법은 없습니다. 금융위기일수록 확실한 곳에 투자가 몰리는 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올해, 2년만에 마이클 베이가 감독하는 '트랜스포머'의 속편이 나온다는 사실은 다른 영화에 대한 투자가 쑥 들어가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 결과 올해는 대자본 영화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지난해와 비교해 보면 차이가 극명합니다. 바로 1년 전 여름 시즌 할리우드의 공세는 대단했습니다. '월E'와 '쿵푸팬더' 등 애니메이션 대작을 비롯해 '다크나이트' '핸콕' '원티드' '아이언맨' '헬보이2' '마마미아' '미이라3' '인크레더블 헐크', 그리고 '인디애나 존스 4'가 줄줄이 개봉했습니다. 5월 말 이후 개봉 일정에서 대혼전이 벌어졌습니다. 지난해의 한국 영화들인 '님은 먼곳에' '놈놈놈' '눈눈이이' 등은 이런 대작들과 힘겨운 정면승부를 펼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상대적으로 헐렁했습니다. '트랜스포머 2'와 앞서 개봉한 '터미네이터4',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와 '지.아이.조' 정도를 빼면 이렇다할 대작이 보이질 않습니다. 일찌감치 개봉한 '천사와 악마'를 합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미국 국내 흥행을 살펴봐도 대작들이 사라진 결과 한 여름의 황금 시즌에 '행오버(Hangover)'같은 3500만달러짜리 소품(^^)이 2주씩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2억6000만달러를 벌어들이는 기현상까지 벌어지더군요. 이런 영화들은 국내 개봉 일정도 불분명합니다.

이렇게 해서 금융위기와 '트랜스포머 2'의 합작으로 '해운대'는 할리우드의 대작 블록버스터가 사라진 여름을 맞았습니다. '트랜스포머 2'는 경쟁작들을 사전에 봉쇄하면서 이 '해운대'의 천만 관객에 일등 공신 역할을 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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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리 포터

그 몇 안되는 블럭버스터 가운데 '해운대'의 가장 강력한 위협으로 꼽힌 것이 바로 '해리 포터와 혼혈왕자'입니다.

하지만 시사회가 끝난 뒤 '해운대' 쪽은 쾌재를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반응이 완전히 썰렁했기 때문이죠. 물론 해외에서의 해리 포터는 여전히 위협적입니다. 시리즈 6편인 이런 작품도 세계적으로는 4억달러 이상의 돈을 걷어들이며 순항중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개봉 초기 악평이 쏟아진 가운데 전편들에 비교할만한 성적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너무나 음울하고, 특별히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점(소설에서도 6부가 갖고 있는 구조적인 맹점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입니다) 때문에 '해리 포터' 시리즈의 골수 팬들 외에는 대부분 실망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해운대'는 '트랜스포머 2'를 피하고 '해리포터'가 예상보다 약했던 덕분에 견제 세력이 사라진 고삐 풀린 말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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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스 울릭

'해운대'가 개봉을 앞둔 올 상반기, 홍보의 초점은 한스 울릭이라는 시각효과 전문가였습니다. 뉴욕이 빙하기를 맞는 영화 '투모로우', 거슬러 올라가면 '스타워즈' 시리즈에 참가했던 CG의 대가죠. 특히 '퍼펙트 스톰'에서는 대양을 휩쓰는 해일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스 울릭과의 협업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는 소문이 끊임없이 돌았습니다. 심지어 영화에 참여한 관계자들의 입을 빌어 "할리우드에 비싼 돈 내고 갔는데 정작 배울게 없더라. 괜히 돈만 날린 것 같다"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리고 결정타가 된 것이 일찍 공개된 예고편이었습니다. 해운대를 휩쓰는 엄청난 해일이 강조된 예고편을 본 순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조금 과장하면 '해운대 망했다'는 소문이 쓰나미처럼 번져갔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제작진이 전면 재편집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죠.

사실 CG는 아무리 좋아도 영화의 성패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이건 세계적인 거장들도 여러 차례 경험한 교훈입니다. 한스 울릭이 만들어 낸 '해운대'의 비주얼은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이게 영화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물론 아주 나빴다면 그건 치명타였겠죠).

어쨌든 울릭은 '해운대'가 영화의 방향을 CG와 쓰나미 자체가 아니라, 등장하는 인물들의 구구절절한 사연과 드라마에 맞추게 하는 데 큰 영향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라마가 중심이 되면서 비로서 '해운대'는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영화가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뜻하지 않은 기여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하긴, 이렇게 쓰고 보니 네가지 요인 중 의도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고 봐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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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네 팀(?)의 외부 조력자들을 살펴봤습니다. 물론 조건이 갖춰진다고 그냥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윤제균 감독이 관객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을 만들었다면 천만 관객이란 꿈에 불과했을 겁니다.

아무튼 최고의 공헌자는 당연히 윤 감독과 직접 영화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이 글에 나오는 네 팀의 조력자들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그 영향의 크기라는 건 그냥 웃고 넘어가셔도 될 겁니다. 혹시라도 "영화는 아무것도 아닌데 여건이 좋았다"는 얘기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없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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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아가씨를 부탁해'가 화제 만발입니다. 윤은혜를 둘러싼 미스캐스팅 논란에서부터(...별로 미스캐스팅같지 않은데), 연출이 닭살이라든지(...뭐 이런 드라마가 그렇지), 연기가 발연기라든지(....사실 이런 드라마 보면서 연기력 따지는 것도 좀) 예상할 수 있던 모든 얘기들이 다 나오고 있는 듯 합니다.

결국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꽃보다 남자'의 성공에 용기백배한 KBS 드라마국의 기획 드라마 2탄이라는 점이 분명하고(물론 외부 기획 중에서 선택한 것이죠), 그런 만큼 이 드라마의 한계와 표적 또한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좀 심한 것이, 장면 장면마다 죄 너무나 어디서 본 듯한 친숙함이 흘러 넘치더군요.

물론 공감하시는 분도, 안 그런 분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제가 '아가씨를 부탁해'를 보면서 느낀 기시감(데자부)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하긴 '일본 드라마 짜깁기'는 그리 새로운 현상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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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편 설명을 곁들이지면, 한국의 패리스 힐튼인 강혜나(윤은혜)는 강만호 회장(이정길)의 사실상 유일한 후계자(물론 강회장의 후처-아들-딸로 이어지는 경쟁자가 하나 있긴 합니다)로 온 아시아를 뒤흔드는 핫 셀러브리티입니다.

그 반대쪽에는 전직 제비족이지만 손을 씻고 여의주(문채원)네 꽃집에 얹혀 살고 있는 서동찬(윤상현)이 있습니다. 하지만 손을 씻은 대가는 사채업자들의 집요한 빚 독촉이죠. 그러던 동찬이 꽃배달을 가다가 혜나의 '싸가지 없는 운전 매너' 때문에 얽혀 드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해서 강회장이 동찬에게 혜나의 '사람 만들기'를 목적으로 동찬을 혜나의 전속 집사로 고용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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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마지막 시퀀스가 좀 이해가 안 가긴 하지만(드라마를 봐도 당연히 이해가 안 갑니다), 어쨌든 드라마가 원래 저렇게 되게 되어 있었으니 그냥 갈 길을 가는 겁니다. 거기에 토를 달아 봐야 별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이 드라마는 너무 노골적으로 일본 드라마의 만화적인 분위기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드라마 도입부의 장중한 음악과 함께 시작하는 남자 목소리의 나레이션은 수많은 일본 드라마에서 써먹은 테크닉입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드라마는 당연히 '부호형사'입니다. '꽃보다 남자'에도 많은 영향을 줬던 이 드라마는 어마어마한 재벌가의 손녀딸인 후카다 교코가 형사가 되어 '이해하기 힘든 서민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해 가며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해가는 하이 코미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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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다 교코가 극중에서 살고 있는 저택입니다. 네버랜드는 여기 비하면 콘테이너 임시주택 수준이군요. 저 넓이에다 한쪽에는 독자적인 항구까지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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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를 부탁해'에서 윤은혜가 살고 있는 '골프장, 테니스장, 수영장이 갖춰진 40만평짜리 저택'을 보다 보니 '부호형사'가 가장 먼저 생각났습니다.

그 다음은 당연히 많은 분들이 떠올리실 '메이의 집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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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일본에서 방송되어 상당한 호응을 얻었고, 국내의 일드 마니아들이 '꽃보다 남자'의 금단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많이 찾았다는 작품입니다.

내용인 즉 귀족가문의 영양들만이 다닐 수 있는 기숙학교(물론 가상)가 있고, 이 학교에는 학생 한명마다 식사와 의전을 책임지는 집사가 하나씩 있다는 기본 설정에서 시작됩니다. 이 학교에 어쩌다 너무나 평범하게 자란 메이라는 소녀가 다니게 되고, 그 어설픈 메이에게 어쩌다가 최고 중의 최고인 집사가 붙습니다. 당연히 메이와 집사 사이에는 뭔가 띠용띠용한 감정이 생기게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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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사 역의 미즈시마 히로(당연히 가운데)는 차세대 기무라 다쿠야(물론 너무나 지겨운 호칭이기도 합니다)의 선두주자로 단연 부각되며 톱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차기작인 '미스터 브레인'에서는 기무라와 공연하기도 했더군요. (하지만 이번엔 좀 바보 캐릭터더라 전작 같은 폭발적인 반응은 기대하기 힘들겠더라는...)

아무튼 '메이의 집사'는 철저하게 '아가씨들의 판타지'에 입각한 드라마입니다. 공주 옷을 입고 하늘하늘 뛰어다니던 아가씨. 그런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이때 준비돼 있던 미남 집사가 나직한 저음으로 "비를 맞으면 건강에 해로우십니다, 아가씨"하며 우산을 펼쳐 줍니다. 정 우산이 없으면 "전 비같은 거 맞아도 괜찮습니다. 아가씨만 멀쩡하시다면" 하면서 재킷을 벗어 씌워주겠죠. 혹시 길에서 깡패를 만난다, 당연히 "네 이놈들, 우리 아가씨에게 감히 손가락 하나라도 댈 셈이냐! 내 목숨을 걸고 지킬테다!"하며 눈에서 불이 뿜어 나옵니다.

...네. 제정신을 가진 남자 시청자들은 절대 참고 볼 수 없는 드라마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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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아가씨'와 '집사'라는 이 두가지만 보더라도 '아가씨를 부탁해'와 '메이의 집사'의 관계는 굳이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미즈시마 히로와 윤상현의 캐릭터 차이, 또 정일우라는 새로운 인물의 보강으로 스토리 라인은 절대 비슷하지 않을 구조를 갖췄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드라마는 그냥 느끼할 정도로 달디 달게, 그냥 판타지의 세계로 달려가 버리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볼 사람들도 그 이상의 생각은 할 능력이 없거나, 할 능력이 있어도 이 드라마를 보는 동안 만큼은 잠시 어디다 '생각'을 접어 두고 보실 분들이 대부분일테니, 굳이 이 드라마에 '생각'을 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그런데 강만호 회장의 캐릭터나 굳이 '인권 변호사'라는 명함이 붙은 정일우의 캐릭터는 좀 우려를 낳게 합니다. 괜히 이 드라마를 가지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물론 첫회에서는 비아냥의 대상으로 쓰였습니다만)를 얘기하거나 하는 건 오히려 참기름을 물에 녹이려는 부질없는 노력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가씨를 부탁해'는 걸작을 지향하지도 않고, 지향할 수도 없는 드라마입니다. 10만원짜리 떡볶이를 만들어 봐야 별 소용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저기까지 가는구나' 하면서 너털웃음을 웃는게 시청자들의 적절한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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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똥을 치우는 혜나의 모습을 보다 보니 바로 패리스 힐튼의 '심플 라이프'가 떠오릅니다. 사실 패리스 힐튼은 아무 생각 없어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냉혹한 사업가 기질이 돋보입니다. 힐튼가의 부를 축내는 천덕꾸러기 행세를 하지만 사실은 반대로 자신을 상품화해서 힐튼 가의 재산을 오히려 늘려 주고 있죠.

뭐 이런 사실을 반영하는 건 나쁘지 않겠지만 강만호 회장의 문제(건강? 피습?)로 그룹에 위기가 닥치고, 갑자기 경영의 천재로 돌변한 혜나양이 남자 주인공들의 도움으로 가문을 지키는 처녀 회장으로 돌변한다... 뭐 이런 진부한 진행만은 좀 피해 줬으면 합니다. 그건 '보자 보자 하니까...'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거니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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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참, 이 만화와는 그냥 제목만 똑같을 뿐 내용은 거의 겹치는게 없다는군요. 제가 직접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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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에 할리우드에서 전설의 지존 이소룡의 출연작 리메이크 소식이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이소룡이 출연했던 TV 시리즈 '그린 호넷'의 주역으로 권상우가 물망에 올랐다더니 결국 중국의 인기 가수 겸 배우 주걸륜이 이 역할을 따냈습니다.

그와 함께 이소룡의 영화 빅4('사망유희'는 차마 여기에 포함시킬수가 없더군요)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인 '용쟁호투'의 리메이크에는 이소룡의 역할로 한국의 정지훈이 주목받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주걸륜은 캐스팅 확정이고 비는 검토중이라고 하지만 지금의 단계에서는 언제 어떻게 상황이 바뀔 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소룡의 리메이크작에서 이소룡 역을 맡는다는 것은 아시아 출신 배우들에게는 더없는 영광이면서 기회인 좋은 조건입니다. '이소룡의 후계자'라는 이름만으로도 대단한 의미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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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9월 8일 처음 방송된 '그린 호넷'은 이소룡이 복면 속의 쿵후 영웅으로 출연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에서 이소룡이 연기한 카토는 낮에는 평범한 일본인 운전사고 밤에는 악당을 물리치는 가면 영웅이 되는 캐릭터였죠. 이소룡은 '그린 호넷'의 캐릭터를 그대로 가져가 비슷한 시기에 방송되고 있던 아담 웨스트의 TV판 '배트맨'에도 몇 차례 특별출연했습니다.

'그린 호넷'은 꽤 인기를 끌었지만 한 시즌만에 끝났고, 여러 편의 TV 드라마와 영화에 그리 크지 않은 역으로 출연하던 이소룡은 1971년 홍콩으로 와 골든 하베스트의 레이먼드 초 회장과 의기투합, '당산대형'을 만듭니다. 일설에는 이 영화의 히트와 함께 TV 시리즈 '쿵후'의 주역이 자신이 아닌 '백인' 데이비드 캐러딘에게 넘어갔다는 데 대한 분노로 이소룡은 홍콩에 그대로 남아 '정무문'과 '맹룡과강'을 만들며 영화 속에서 백인 거한들을 때려눕히는 것으로 위안을 삼습니다.

단 세편의 영화로 홍콩-중국어권 최고의 스타가 된 이소룡에게 할리우드는 다시 손을 뻗어 왔고, 이렇게 해서 할리우드와 홍콩의 합작으로 '용쟁호투(Enter the Dragon)'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1973년 7월 이소룡은 의문의 죽음을 맞고, 그의 사망 한달 뒤 미국 전역에서 개봉된 '용쟁호투'는 대단한 성공을 거둡니다.

이렇게 그가 저 세상 사람이 된 뒤에는 생전 촬영했던 일부 필름을 짜깁고 붙여서 '사망유희'라는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로 그의 이름은 전설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 이소룡과 닮았다는 이유로 캐스팅된 당룡(唐龍: 김태정)이란 이름의 한국인 배우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역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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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따지고 보면 '그린 호넷'보다는 '용쟁호투' 쪽이 더 끌리는 작품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일단 '그린 호넷'은 당시 시대가 갖고 있던 '허드렛일 하는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깊이 깔려 있는 작품인데다 감독이 '이터널 선샤인'의 미셀 공드리이고 코믹 연기에 일가견이 있는 배우 세스 로건이 주연과 시나리오를 맡았습니다. 원작의 분위기나 감독의 스타일을 볼 때 진지한 액션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코미디로 리메이크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주걸륜의 캐스팅도 비슷한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사실 주걸륜에게서 액션 스타의 이미지를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니셜 D'나 '쿵푸덩크'가 있고 '황후화'에서는 무협 액션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주걸륜이 보여준 가장 훌륭한 모습은 피아노를 두드리는 로맨틱 가이의 모습입니다. 그에게서 이소룡의 카리스마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물론, '그린 호넷'의 카토라는 캐릭터 자체가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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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비가 물망에 올라 있다는 '어웨이큰 더 드래곤(Awaken the Dragon)'은 '용쟁호투'의 배경을 그대로 현대로 옮겨 놓았다는 설정을 갖고 있습니다. 동양인 무술가가 미국 정보기관의 의뢰로 비밀 무술대회에 침투해 범죄조직의 실체를 파악한다는 내용이죠.

'용쟁호투'는 지금까지도 서구인들이 기억하는 이소룡의 전설을 만든 작품이면서, 그 자체로 미국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입니다.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의 역할을 연기한다는 것은 이소룡의 후계자로 불릴 만한 자격을 갖춘다는 뜻이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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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까짓게 뭐라고'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소룡은 그냥 흔히 치부하는 '무술 액션 잘 하는 중국인 배우'의 범주를 넘어 선 사람입니다. 어찌 보면 한 시대에 있어 동양인 배우의 한계를 넘고, 백인들에게 아시아인의 새로운 이미지를 남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현대 중국어권 영화계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성룡과 주성치, 이연걸이 모두 '정무문', 혹은 '신 정무문'이라고 불리는 영화를 통해 이소룡의 역할을 연기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들은 모두 '제 2의 이소룡'이 되기를 기원했죠. 물론 세 사람 모두 각기 다른 스타일로 최고 스타의 자리에 올랐지만 본래의 이소룡이 갖고 있던 강인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사람은 없습니다. 셋 중에서는 이연걸이 가장 가까이 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역시 근본부터 스타일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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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종합적으로 볼 때 두 작품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용쟁호투'의 리메이크 쪽입니다. 단지 우려되는 것은 '그린 호넷' 쪽이 유명 감독과 유명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인 반면, '어웨이큰 더 드래곤'은 영화 경험이 없는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비 측에서 '어웨이큰 더 드래곤'에 관심이 있다면 전체 제작비와 공연하는 배우, 전문적인 무술 감독의 기용 등 주변 조건들을 좀 더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닌자 어새신'도 꽤 관심을 모으고 있는 작품인 만큼 후속작을 그보다 못한 영화로 고를 이유는 없을 겁니다.

아무튼 정지훈군이 그냥 '제2의 이소룡' 에서 그치지 않고 '브루스 리의 신화를 계승한 배우'로 각인되길 바랍니다.



'용쟁호투'의 오리지널 예고편입니다.
70년대의 정서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이건 21세기의 이소룡 팬이 다시 편집한 버전.
편집만 다시 했는데도 상당히 새로운 감각이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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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탐나는도다' 첫회를 봤습니다. 시작하기 전부터 재미있는 설정이라는 생각에 관심이 끌렸던 드라마입니다. 조선 인조 때를 배경으로 제주도에 표류해 온 영국 귀족 청년과 조선의 선비, 그리고 순진무구한 해녀가 펼쳐가는 드라마라는 건 상당히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원작 만화는 보지 못했지만 영국 귀족 청년 역에 프랑스 출신인 금발의 미남 청년이 등장하고 선비 역에 임주환, 해녀 역에 서우가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훌륭한 진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대부분의 시청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뚜껑이 열린 '탐나는도다'는 실망이 앞서는 드라마였습니다. 뒤로 가면서 좀 더 나아질 지도 모르지만 요즘 드라마의 스타일로 볼 때 이런 1회를 만든 드라마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마디로 서우의 열연이 아깝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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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으로 포장된 도입부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1회에 방송된 '탐나는도다'는 시퀀스들이 너무 깁니다. 아마 다른 드라마들이라면 '탐나는도다'의 1회에 방송된 분량은 20분 정도면 정리하고 넘어갔을 겁니다.

1회의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영국 귀족 청년 윌리엄(황찬빈-피에르 데포르트)은 아시아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네덜란드를 넘나드는 일본 상인 얀(이선호)과 함께 나가사키행 배에 올랐다가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 해안에 표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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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양의 선비 박규(임주환)는 부녀자 희롱죄(?)로 제주도로 유배를 오게 되고, 여기서 천방지축에 난채 그대로 있는 해녀 장버진(서우)과 엮이다가 결국 버진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처지가 됩니다. 버진은 우연히 바닷가에서 윌리엄을 발견하고, 몰래 감춰준 뒤 보살피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내용으로 한시간 가까운 분량을 만들었다는게 놀라울 지경입니다. 물론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소개되고, 이런 저런 '코믹' 에피소드들이 끼어들지만 문제는 이 코미디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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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보는 순간 윌리엄과 버진이 만났을 때 윌리엄이 버진을 virgin이라고 생각할 거라는 걸 모를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마찬가지로 박규를 만나게 되면 fuck you라고 생각하겠죠.

그런데 이 드라마의 코미디는 대개 이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네. 한국 드라마에 외국인 캐릭터가 처음 등장하던 1970년대 수준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이 조선시대 사람들과 만나 벌이는 해프닝이 한동안 방송에 나오지 않아서 신선할 거라고 생각한걸까요. 혹시 보다 보면 윌리엄이 고추장을 보고 "오! 케첩!"하고 퍼먹다가 매워 매워 물좀 줘 하는 내용이 나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진의 연구가 영 부족해 보입니다.

버진과 해녀들, 박규와 버진이 벌이는 해프닝도 영 어설프기는 마찬가집니다. 한번 뒤져보기나 하면 될걸 계속 진상패를 내놓으라는 버진과 그런거 안 갖고 있다는 박규의 승강이는 정말 지칠 정도로 이어집니다. "진상패 내놔요!" "어허, 네가 지금 정녕 진상을 떨고 있구나" 이런 식의 말장난이 시청자들에게 통할 거라고 생각한다는게 놀랍습니다.

용변 해결을 위한 버전아비(변우민)와 박규의 나무 판자 놀이...도 제작진은 아마 '너무나 재미있는 에피소드'라고 느꼈을 것 같습니다. 이 제작진은 매주 '개그콘서트'라도 보면서 요즘 시청자들의 수준을 익힐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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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회를 지켜보고 나서 든 생각은 "서우가 아깝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 드라마에선 볼거리도 서우, 앞으로 발전이 기대되는 것도 서우밖에 없더군요. 조선시대의 4차원 해녀라는 생뚱맞은 캐릭터지만 서우가 연기하고 있으면 생기가 느껴집니다. 이 드라마가 어떤 결과를 내든 서우에게는 그리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임주환도 재능있고 매력적인 배우이긴 합니다만, 이 드라마를 통해 얻을 것은 별로 없을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탐나는도다'는 매력적인 설정과 관심 가는 배우들로 이뤄진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지나치게 느린 전개와 설정 자체에서 한발도 더 나가지 못한 지루한 대본은 이 드라마를 나락으로 밀어넣는 느낌입니다. 첫 주말이 지나고 나면 제작진도 느끼는 바가 있겠지만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p.s. 사실 제주도 사투리가 낯설기는 박규나 윌리엄이나 별 차이 없었을 듯 한데 그런 부분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더군요.


p.s.2. 댓글들을 보니 이 드라마에 만족하신 분들이 꽤 많군요. 워낙 관심이 가던 작품이라 제가 이 드라마에 너무 많은 걸 기대했었나봅니다.

이렇게 '탐나는도다'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많은 걸 보니 드라마의 앞날이 생각보다 밝은 듯 하군요. 부디 닥본사하셔서 '탐나는도다'가 흥행면에서도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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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G.I. Joe: The Rise Of Cobra, 2009)'이 할리우드보다 한발 빨리 한국에서 공개됐습니다. 시차를 감안하면 약 사흘 빠른 셈이죠. 이병헌이 연기하는 스톰 섀도우를 마침내 봤습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이병헌의 할리우드 진출을 앞두고 "배역이 스톰 섀도우라는 걸 알고 마음이 놓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치게 악당으로 묘사된 부분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이어 2연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근래 한국인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맡은 역할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거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지.아이.조'는 대체 어떤 영화고 이병헌은 어떤 역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이병헌의 선택이 좋았다고 하는 걸까요?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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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무기제조업체인 MARS사의 대표 맥컬렌(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은 NATO의 투자를 유치해 수술이나 의료 목적에 사용되던 미세 로봇 나노마이트를 무기로 개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나노마이트가 장착된 탄두를 이송하던 듀크(채닝 테이텀)는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받는데, 습격자 중 하나가 자신의 애인이었던 애나(시에나 밀러)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습니다. 괴한들이 탄두를 차지하기 직전, 역시 정체불명의 특공대가 나타나 괴한들을 쫓고 탄두를 되찾습니다.

이들의 정체는 초국가적인 정의의(?) 특전부대 G.I.조. 이들의 리더인 호크 장군(데니스 퀘이드)은 탄두 탈취 시도의 배후에 맥컬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합니다(영화의 진행으로 보아 그건 의심할 바가 없죠^^). 그리고 맥컬렌은 최강의 닌자 스톰 섀도우(이병헌)를 동원해 탄두를 다시 빼앗을 계획을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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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정도는 이 다음에 진행될 사건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이번 '전쟁의 서막' 편은 앞으로 주구장창 나올 '지.아이.조' 시리즈의 맛뵈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터지는 사건들은 글자 그대로 잠시도 관객을 쉬게 두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건들과 전투 장면을 보여주면서 결코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모두 설명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죠.

비슷한 경우였던 'X맨' 1편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느낌도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X멘' 1편에서 브라이언 싱어가 시도했던 철학적인 고민의 흔적은 싹 사라지고 없다는 점입니다. 'X멘' 시리즈를 지배하고 있는 '선택된 민족', 혹은 인종 차별과 인종 청소에 대한 은유 같은 것은 '지.아이.조'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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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쉴새 없이 뛰고 달리고, 그러면서도 연애질도 하고, 할말 다 하는 만화적인 주인공들과 엄청난 돈이 투입되어 구현한 만화적 비주얼입니다. 네. '지.아이.조'는 그야말로 '대놓고 활극'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대뇌는 쉬고 있어도 됩니다. 무릎 반사가 가능할 정도만 살아 있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물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진행의 연속이지만, 이 영화의 강점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설사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관객이라 하더라도, '두 시간 본 값은 충분히 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겁니다.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G.I.JOE라는 완구-만화-애니메이션의 3종 시리즈가 갖고 있는 위력을 생각하면 쏟아 부은 제작비가 아깝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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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이 연기한 스톰 섀도우는 그 다양한 인물들 가운데서도 꽤 인기있는 캐릭터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캐릭터는 시리즈에 따라 어디서는 G.I.조의 편에서, 다른 쪽에서는 G.I.조의 상대편인 코브라 조직의 일원으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본래 일본인 캐릭터(이름은 토미 아라시카게)이고, 최고의 기술을 가진 닌자이며, G.I조의 핵심 멤버인 스네이크 아이즈와는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한 형제 같은 사이라는 설정입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스네이크 아이즈와 '어찌 보면' 철천지 원수의 관계라는 점이 강조됐는데, 앞으로는 변화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 '앞으로는'이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천하의 스톰 섀도우가 이렇게 한번 나오고 말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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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한국의 수많은 배우들이 아시아의 영역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진출을 향해 발을 내딛었습니다. 사실 남자 배우들보다는 여배우들의 경쟁력이 더 뛰어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남자 배우들이 맡을 수 있는 캐릭터는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무술의 달인이나 '무표정한 동양인 암살자' 캐릭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어찌 보면 이병헌이 맡은 스톰 섀도우도 그런 역할의 범주 안에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이 영화 안에서 이병헌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 배우가 맡았던 어떤 역할보다 비중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물론 '블러드'를 할리우드 영화로 친다면 전지현의 비중이 훨씬 크겠지만, 그 영화와 '지.아이.조'를 비교하는 건 2차대전때의 제로센 전투기와 F-22를 비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영화에서 이 정도 비중의 캐릭터를 맡는다는 건 결코 그냥 무시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이 역할이 이병헌에게 들어온 것은 행운이지만 이 역할에 전념해서 따낸 것은 이병헌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병헌은 이 작품을 통해 '영어로 연기가 되는 배우'라는 점을 인식시켰습니다. 이번에 함께 일한 스티븐 소머즈가 아닌 다른 감독이나 제작사도 동양인 역할이 있는 영화를 만들 때 염두에 둘 수 있는 배우의 선에 오른 셈이죠. 배우를 설명할 때 "그 왜, '블러드'라는 영화 있었잖아. 그 영화에서...."라고 설명하는 것과 "'G.I조'에서 스톰 섀도우 역으로 나왔던 배우"라고 설명하는 것은 천지 차이죠. 아무튼 이병헌이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어떤 족적을 남길 지, 매우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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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은 똑부러지게 누구라고 할만한 톱스타는 없지만, 알려진 배우들이 꽤 많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일단 설정상 주인공인 채닝 테이텀은 앞날이 크게 기대되는 스타는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이 배우는 '스텝업' 시리즈를 통해 인기 스타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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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미남형 주인공이라기보단 '유주얼 서스펙트'의 가브리엘 번의 젊은 날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10년 뒤에 살아남아 있다면, 주인공보다는 성격파 배우로 변신해 있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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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 밀러가 이병헌과 공연했다는 건 참 감동적인 일이기도 하고... 감독이 스티븐 소머즈이다 보니 '미이라' 군단인 브랜든 프레이저와 아놀드 보슬루(바로 '미이라' 역이죠) 등이 그리 큰 비중 없이 얼굴을 비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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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얼굴과 대사가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스네이크 아이즈. 어떤 분은 이 배우의 이름이 레이 파크(Ray Park)라는 이유로 '혹시 또 하나의 한국계 배우가 있는게 아니냐'고 추론하기도 합니다만, 이 배우는 무술 전문 연기자로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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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스타워즈 - 에피소드 1'의 다스 몰 역을 맡았던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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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보시는게 불편한 분을 위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은 결코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 아닙니다. 올해의 '수작'으로 꼽기도 좀 모자랍니다. 하지만 시원시원하게 쏟아 붓는 물량을 생각하면 본전 생각이 나는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등급은 '볼만한 영화'입니다. 아, 물론 뵹헌사마의 팬들에게는 '놓치면 후회할 영화'인게 분명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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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스톰 섀도우가 한국인(영화 중간에 나오는 회상 신에서 어린 시절의 스톰 섀도우가 "도둑놈이다!" 등 두 마디의 한국어 대사를 합니다^^)으로 바뀐 것은 이병헌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아역으로 나오는 태국계 배우에게 직접 한국어 지도까지 했다는군요.

노력이 가상합니다. 그런데 스톰 섀도우가 워낙 독한 악역으로 나오다 보니 바꾸지 말고 그냥 두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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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선덕여왕'에 뛰어든 비담 김남길은 단 2회 출연만에 온 시청자들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축구로 치자면 아주 적절한 시기에 투입된 조커라고나 할까요.

사실 비담이 인기를 모으는 건 당연한 일로 보입니다. 그동안 미실 고현정, 덕만 이요원, 천명 박예진 등 여자 주인공들이 판을 치던 드라마에서 혼자 남자 주인공의 역할을 감당하던 유신 엄태웅은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답답한 캐릭터였기 때문입니다. 목검으로 나무등걸을 천번 내리치다가도 한번 정신이 어긋났다고 다시 하나부터 시작하는 에너자이저 유신랑은 진지하고 진솔한 면은 높이 평가할 만 하지만 도대체 잔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캐릭터였습니다.

하지만 비담 김남길은 첫 등장부터 광기가 흐르는 눈빛으로 예사롭지 않은 앞날을 예고하더군요. 특히 약초 캐던 농민들이 비담의 미소를 보고 질겁하는 장면은 이미 비담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간 명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라의 정예 10화랑과 혼자 붙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엄청나게 강한 무공과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텅 빈 머리 속, 때로 어린애같은 성정은 비담을 사뭇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캐릭터는 처음이 아니죠. 분명 어디선가 본듯 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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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을 봤을 때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캐릭터는 바로 이 친구였습니다. 당연히 많은 분들에게 친숙할 겁니다. 바로 '슬램 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그린 '베가본드'의 무사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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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바와 같이 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 전국시대의 지독하게 강한 검객입니다. 긴 검과 짧은 검을 함께 써서 니토류(二刀流)의 대가로 불리는 무사시는 일본의 역사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의 베스트셀러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알려졌고, 1950년대 이나가키 히로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뒤 3편까지 시리즈가 이어지는 인기를 누렸습니다.

'베가본드' 역시 같은 원작을 취하고 있으므로 내용은 똑같습니다. 단지 '베가본드'의 무사시에게선 조금 더 강백호의 냄새가 난다는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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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건 만화건 이 시리즈에 나오는 젊은 날의 무사시는 그야말로 야수같은 매력을 뿜어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베어야 한다는, 엄청나게 강하지만 선악이나 다른 사람의 감정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캐릭터죠. 아니, 아예 감정이란 요소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는 게 나을 겁니다. 어찌 보면 요즘 스릴러에 자주 등장하는 사이코패스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캐릭터의 원형은 중국 고전 '수호지'에 나옵니다. 바로 108영웅들 중 하나인 흑선풍 이규입니다. 쌍도끼를 휘두르는 천하장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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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더 원형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이규의 원형은 삼국지의 장비입니다만, 장비는 어쨌든 배운 사람이고 정규군의 장수이므로 이규처럼 무차별 살인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살성(天煞星)을 타고 난 이규는 피를 보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살인을 즐기는 인물이죠. 그런데도 송강의 명이라면 절대 복종하는 어린이같은 면모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 뒤로 각종 무협지에 나오는 '천살성'이란 말은 하나의 캐릭터로 정립됐습니다. 선악이나 정사 따위는 가리지 않고 거스르는 자는 무조건 죽이고 보는 단순무식막강한 캐릭터를 가리키는 말이 됐죠.

얼마전에 한 분이 최근 한 일본 만화에 나오는 무겐이라는 캐릭터를 비담의 닮은꼴로 추천하셨는데, 무겐이 나오는 작품을 본 적은 없지만 대략 그림만 봐도 어떤 캐릭터인지 느낌이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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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캐릭터가 아무리 좋아도 그걸 연기하는 배우가 엉망이라면 인기가 있을 리 없습니다. 비담이란 인물이 성공한 데에는 그 역할을 맡은 김남길이라는 배우의 역량이 절대적인 공헌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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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초, IS 연예팀은 '올해의 유망주'로 15명의 각 부문 신인을 선정했습니다. 당시의 명단은 '고아라·민효린·이선호·유연지·정일우·최시원·지서윤·하정우·이한·한효주(이상 연기자)와 김현중·남규리·민선예(가수). 신봉선·정성호(개그맨)'입니다. 이때의 이한은 '굳세어라 금순이'의 금순이 남편과 '굿바이 솔로'의 냉정한 친구 유지안 역을 맡아 연기력보다는 외모로 주목을 끌던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2008년 초, 연기자 이한에 대한 평가는 '좀 더 노력이 필요함'이었습니다.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870705) 3단계 평가에서 맨 아래 순위였죠(아, 물론 김현중과 하정우도 이때까진 '좀 더 노력이 필요함' 등급이었습니다^^). 영화 '후회하지 않아'와 드라마 '꽃피는 봄이 오면' 등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동성애 소재의 '후회하지 않아'는 애당초 흥행이 될 영화는 아니었고, 이 영화에서의 이한은 장래에 대한 기대를 더욱 크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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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주춤거리는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김남길이라는 본명을 되찾은 뒤 이한은 특유의 '섬뜩한 눈빛'을 빛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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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역은 아니었지만 '공공의 적 1-1'을 본 사람은 김남길이라는 배우의 차가운 매력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김남길은 한 자루의 날선 칼날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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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모던 보이'. 영화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김남길은 친구 해명(박해일)을 싸늘하게 버리는 일본인 검사 신스케 역을 맡아 우아한 잔혹함을 연기해냅니다. 이 정도면 동년배 배우들 중에서는 연기력으로 단연 돋보이는 모습을 보인 셈이죠.

그리고 나서 이번 비담 역할은 김남길의 앞날에 어느 정도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려도 하나 떠오릅니다. 어떤 배우에게 쉽게 굴레를 씌우고 싶어 하는 한국의 영화/ 드라마 판의 속성상 김남길에게도 앞으로 계속 이와 유사한 역할만이 몰려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김남길이 잘생긴 얼굴에 머물지 않고 탁월한 성격 연기의 길을 개척한 것은 칭찬할 만 합니다. 하지만 연기를 잘 하는게 오히려 족쇄가 되어 '이상성격 전문배우'의 길을 걷게 되는 것도 걱정스럽습니다. '선덕여왕'이 끝난 뒤,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지혜로운 선택이 필요할 때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비담의 활약은 '선덕여왕'의 앞날을 더욱 탄탄대로로 만들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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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이 날로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선덕여왕이 아직 감춰두고 있는 카드(혹은 떡밥, 혹은 비밀무기)'들에 대한 포스팅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비담 김남길 떡밥을 빼먹었더군요. 비담 공개는 최상의 선택인 듯 합니다. 비담과 문노를 한방에 공개한 걸 보면 꽤 쏠쏠한 완성도를 보이고 있는 '드림'을 초반부터 아예 밟아 버리겠다는 살의(?)가 번득입니다.

사실 비담 얘기로 포스팅 하나를 때우려는 건 아니고... 딴 얘깁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는 가운데 요즘 그 원작격인 '화랑세기'를 직접 읽어보겠다는 분들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그냥 읽는 분들은 아마 놀라실 일이 많을 겁니다. 사실 '선덕여왕'이 처음 시작할 때에는 미실의 복잡다단한 남자관계에 눈살을 찌푸리셨던 분도 많았겠지만, '화랑세기'를 직접 보신 분이라면 그게 얼마나 빙산의 일각인지도 아실만 합니다.

사실 '화랑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 차마 점잖은 자리에서 거론하기 힘든 얘기는 미실과 관련된 이야기뿐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화랑세기'가 진짜 역사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유력한 명분으로 작용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이걸 다 지어냈다고 치면 참 그 상상력도 대단한 상상력이란 생각도 듭니다.

드라마에서 다 볼 수 없었던 19금판 선덕여왕, 용어해설로 풀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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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선덕여왕, 제대로 만들었으면 19금

MBC TV '선덕여왕'은 왜 인기일까. 타이틀 롤인 선덕여왕 이요원도 잘 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이 드라마의 일등 공신은 미실 역의 고현정이다.

미실. 장희빈도 아니고 정난정도 아니고, 웬만한 시청자들이라면 이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까지 생전 듣도 보도 못했을 이 캐릭터가 어떻게 이렇게 시청자들을 빨아들이고 있을까. 더구나 이 미실이라는 인물은 한국 사극에서 전례를 보기 힘들 만큼 문란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남편 세종(독고영재)이 있으되 정부인 설원(전노민)도 버젓이 옆에 버티고 있고, 진흥왕(이순재)와의 관계가 암시되는가 하면 그 아들인 진지왕(임호)과는 아예 '왕위에 오르면 왕비로 삼겠다(아니, 남편이 뻔히 있는 여자가!)'는 보장을 받고 몸을 섞는다. 아무리 '천추태후'가 사극 여주인공의 사생활의 한계를 넓혔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늘 그렇듯 TV 드라마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드라마의 원작 격인 '화랑세기'를 보면 더욱 입이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진짜 역사라는 주장과 1930년대에 쓰여진 창작물이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물려 있는 책이지만, 아무튼 '화랑세기'의 미실은 훨씬 과감하다.

진흥-진지왕에 이어 근 30세 연하인 진평왕과도 몸을 섞는다. 예를 들자면 이런 수준이다. 드라마 속에서 김유신(엄태웅)의 라이벌인 보종(백도빈)이 태어나게 된 계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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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 8년(579년), 미실궁주가 옥새를 맡아보는 새주(璽主)가 되어 정사당에서 문서들을 보다가 낮 꿈을 꾸었는데 흰 양이 가슴으로 들어왔다. 길한 꿈임을 알고 급히 왕(진평왕)를 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왕은 아직 어려서 궁주의 기분에 제대로 따라 주지 못했다. 이에 설원랑을 불러 들여 보종공을 낳았다. (따라서 누구의 아들인지 분명치 않았지만)보종은 자라면서 모습이 설원랑과 같았으므로 궁주가 설원에게 내려 아들로 삼게 하였다.' 이런 식이다.

사실 내용인 즉 허균의 '홍길동전'에서 홍판서가 길동이를 낳게 되는 대목 - 용꿈을 꾸고 부인에게 동침을 요구하지만 부인이 대낮부터 망측하다며 거절하자 여종 춘섬이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간다 - 이나 '삼국유사'의 지철로왕 관련 기사(지철로왕은 지증왕의 다른 이름. 궁금하면 찾아 보시라)를 생각해보면 뭐 충격 받을 수준은 아니지만, 아무튼 '화랑세기'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런 얘기들의 연속이다. 이 책을 보고 나면 흔히 '화랑'이란 말을 들었을 때 떠오르는 육사 생도들이나 보이스카우트의 이미지는 싹 사라질 지도 모른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역사책이다 보니 그 내용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공부가 필요하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름하여 'TV에는 안 나오는 진짜 선덕여왕 용어 사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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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공(色供) = 글자 그대로 색으로 윗사람을 섬기는 일, 즉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일을 말한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왕을 모실 수 있는 모계 혈통에는 진골 정통과 대원 신통이 있는데, 이들의 가문은 왕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해 특별한 재능을 갖춘 여자들을 계속 배출했음이 암시되어 있다.
미실의 어머니인 묘도와 이모인 사도(진흥왕의 왕후)는 미실이 세종과 결혼할 때 "우리 가문은 대대로 색공을 바치는 집안"임을 강조하며 어찌 왕의 서자 뻘인 세종 따위(?)에게 시집을 가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미실은 태연히 "어찌 남편이 있다 하여 임금을 모시지 못하겠느냐"고 맞받아쳤다는 기록이 있다.

음사(陰事) = 군주와 잠자리에 드는 것. 즉 방사(房事)의 높임말이다. '선덕여왕'의 사실상의 주인공 미실은 음사에 특히 능해 그와 한번 잠자리를 같이 하면 군왕들도 헤어나지 못했다. 특히 진흥왕은 미실을 잊지 못해 남편 세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미실을 불러들였다. 심지어 임신중에도 미실을 입궁시킨 기록이 있다.

마복자(磨腹子) = 현대인의 시각으로 볼 때 가장 기이한 성풍속의 하나. 윗사람이 임신한 아랫사람의 아내를 받아들여 관계한 뒤 낳은 아이를 자신의 아이처럼 보살피는 것을 말한다. '화랑세기'는 시작부터 제 1대 풍월주인 위화랑이 비처왕의 일곱 마복자들인 이른바 '마복칠성' 중 하나임을 밝히고 있다. 그의 어머니 벽아부인이 그를 임신한 채로 비처왕의 후궁으로 들어가 낳은 아들이란 얘기다.

방외우(方外友) = 글자대로 풀면 그냥 '신분을 벗어나 사귀는 사이'라는 의미지만, '화랑세기'의 사이에서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들과 관계하면, 그 여자들 주변의 사람들과도 친구 뻘이 된다는 뉘앙스의 말로 사용됐다.
예를 들어 방탕했던 동륜태자(진평왕의 아버지)는 미실에게 혹하자 신분이 한참 아래인 설원이나 미실의 동생인 미생과도 친구가 된다. 이것이 바로 방외우의 기본 형태인 것이다.

유화(遊花) = 낭도들의 짝이 되는 신분이 낮은 여자들. 본래는 이들도 크게 볼 때 화랑도 조직의 일원인데 역할은 궂은 일에서 밤일에까지 넓게 걸쳐 있다. '화랑세기'의 진흥왕 대창 원년(568년) 기록엔 이런 대형 난교 파티의 기록이 있다.
'...이날 밤, 왕(진흥왕)과 미실은 남도의 정궁에서 합환을 하였다. 낭도와 유화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합방(奔)하게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만여명이었다.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사해의 물을 끓어오르게 하였다. (중략) 낭도들이 각기 한 명의 유화들을 이끌고 손뼉치고 춤추며 난간 아래를 지나갈때마다 만세 소리가 진동했다.'
이 광경을 바라보며 진흥왕과 미실은 군중들에게 돈을 던져주며 즐겼다고 한다. 이 땅에서 있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환락의 도가니였던 모양이다. 물론 이날의 기록 외에도 유화와 화랑 사이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태어난 기록이 전해진다.

용양신(龍陽臣) = 최측근. 항상 곁에 두는 총신의 의미이지만 '화랑세기'의 기록을 살펴 보면 이 단어에서 남색의 냄새가 짙게 풍긴다.
미실의 첫사랑인 사다함의 가계를 살펴보면, 스페인 영화 '하몽하몽'을 연상시키는 난맥상을 발견하게 된다. 사다함은 구리지공과 금진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미남으로 유명했던 구리지공은 한 촌부와 정을 통했는데, 이 촌부는 이미 유화로 나가던 시절 이름도 모르는 화랑과의 사이에서 설성이라는 아들을 두고 있었다. 설성은 어려서부터 '얼굴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구리지공은 얼마 뒤 설성을 자신의 용양신으로 삼았다. 어머니와 아들을 모두 파트너로 삼은 셈이다.
그러나 구리지공이 전쟁터에 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금진은 설성을 잠자리로 끌어들였고 그 사이에서 설원이 태어났다.
이렇게 어지러운 사연 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요즘 '선덕여왕'에 나오는 설원랑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뒷날 이 가문에서 원효대사와 설총이 나왔다.

신선골(新善骨) = 출세를 위해 낭도들 가운데 화랑에게 딸을 바치고 청탁을 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이렇게 딸을 바쳐 화랑과 연을 맺은 자들을 신선골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때의 '골'은 골품(骨品)을 의미한다. 13세 풍월주 용춘 때 대남보라는 낭도가 신선골이 되기를 거부했다는 말을 듣고 용춘이 기특하게 여겨 승진을 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아내를 바쳐 그 아들을 마복자가 되게 하는 것과 딸을 바쳐 신선골이 되는 것, 과연 어느 것이 더 부도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삼서지제(三壻之制) = 한 여자에 대해 세 명의 남편을 허용할 수 있다는 제도. '화랑세기'에는 이에 따라 선덕여왕은 용춘과 흠반, 을제 등 세 남편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여왕의 경우 후사를 얻지 못할 때 세 명까지 남편을 둘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일반인 여성들의 경우에도 세 명의 남편을 둘 수 있다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불행히도 정사인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의 남편이 몇명이었는지는 다루고 있지 않다. 그러나 후대의 진성여왕이 자신의 숙부뻘인 각간 위홍을 연인으로 삼았다가 위홍이 죽자 수십명의 미남 청년들을 끌어들였다는 기사를 싣고 있어 여기에 비쳐 볼 때 선덕여왕의 세 남편 이야기도 그리 황당무계한 것은 아님을 보여줄 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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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복자라는 희한한 풍습에서는 어쩐지 손님에게 아내를 주어 동침하게 하는 북방민족의 풍속이 연상됩니다. 사실 이 방법보다 더 손님-혹은 나그네-에게 '우리는 적이 아니다. 너와 나는 한 가족이다.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네가 내 아내와 자식을 보살피기 바란다' 는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는 방법은 없을 듯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복자 제도 역시 '뱃속의 아이는 네 아이지만 내 아이기도 하다는 뜻을 강조하기 위해 아이 어머니와 관계를 하겠다. 너의 아내 역시 내 아내인 셈이다' 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정말 엽기적이지만, 일부 기마민족 사이에서는 이와 유사한 풍습들이 전해진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역사이건 위작이건, '화랑세기'는 오늘날의 잣대가 아닌 신라시대로 떠나는 시간여행의 느낌을 갖게 합니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현대적인 시각으로 짜여져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에 지치면 '화랑세기'를 한번 펼쳐 보시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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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담 캐릭터, 굳이 말하자면 천살성(天煞星)이라고나 해야 할까요? 상당히 낯익은 캐릭터이면서도 드라마나 영화에서 흔히 공개되지는 않은 캐릭터입니다. 나중에 여기에 대해서도 좀 공을 들여 들여다 보겠습니다.

 




그나자나 이제 남은 떡밥은 김춘추-유승호 떡밥 하나인 셈이군요. 언제 나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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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의 스포츠 드라마 '국가대표'는 '이 영화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각색한 것'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영화는 스키 점프라는 비인기종목에서 어느날 갑자기 세계 정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한국 대표팀의 이야기를 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직도 등록선수는 5명뿐이라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는 점, 선수들에 대한 지원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는 점, 국내 유일의 스키점프대인 무주 스키점프대는 사실상 동계 시즌에는 가동된 적이 없다는 점 등등은 확실히 사실입니다. 하지만 영화와 현실이 다른 부분도 꽤 있습니다. 아무래도 영화의 속성상, 부분적으로 과장이 있을수밖에 없는 게 정상입니다.

영화 '국가대표'에서 사실과 같은 부분, 사실과 다른 부분들을 한번 짚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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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대표'를 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이 영화는 '국가의 도움 없이 개인이 이뤄낸 성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에게 '신성한 의무'와 '어깨를 누르는 책임감'을 강조하던 지나간 시대의 관념에 찬물을 끼얹는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죠.

영화 리뷰는 이쪽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각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제작진이 무시하고 싶은 내용은 깔끔하게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한국 스키점프 대표팀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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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한국 스키점프 대표팀은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가운데 1997년 창단돼 곧바로 1997년 12월 독일 오베르스트도르프 월드컵에 참가해 월드컵 출전권을 따내고, 이듬해 2월의 나가노 동계올림픽에 나가 아슬아슬하게 메달권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 속 이야기처럼 봉고차 지붕에 스키 부츠를 매달고 훈련해서 1년만에 올림픽에 나가 세계 수준의 성적을 낸다는 건 정말 꿈같은 이야기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영화니까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죠.

실제로 한국에 스키점프가 도입된 것은 1991년. 그리고 1994년에는 이미 대표팀이 전지훈련을 간 기록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스키점프의 대명사인 네 명의 선수들, 김흥수(현 코치) 최용직 최흥철 김현기 등은 이미 10대 시절부터 유망주로 발탁돼 육성된 선수들입니다. 한국 스키점프 선수 중 최초로 국제대회 개인성적을 낸 최용직은 1997년 오베르스트도르프 대회에 만 16세의 나이로 참가해 40위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의 기록은 확실치 않지만, 21세기 들어서는 매년 1-2차례씩 해외 전지훈련을 다녀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가 2003년 타르비시오 동계 유니버시아드 금메달로 이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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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흥철, 최용직, 김현기, 강칠구 선수.   사진출처=세계일보

물론 해외 전지훈련을 간다고 해서 호화 훈련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하이원이 실업팀을 창단해 최흥철과 김현기가 입단하기 전까지 이들 국가대표 선수들의 공식 수입은 연봉 380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유니폼이 모자라 기워 입어야 하고, 선수들이 직접 스키 날에 왁스를 입혀야 하는 열악함도 사실입니다. 다만 영화에서 보듯, '국가가 스키점프라는 종목을 버리려 했는데 선수 개개인이 살려냈다'는 식의 기술은 사실과 꽤 거리가 있다는 겁니다.

(오히려 선수들이 개인 생활 유지를 위해 각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는 얘기는 영화에서 생략되어 있더군요.)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어쨌든 체육회를 비롯한 국가 기관에서는 스키 점프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을 위해 그래도 해외 전지훈련 등의 지원을 했고, 그 결과 도입 12년만에 동계 유니버시아드 금메달이라는 성과가 나왔습니다. 그로부터 5년 뒤에는 실업팀도 생겼습니다. 비인기 종목의 레벨로 따지면 이보다 못한 종목도 수두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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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보듯 황무지에서 어느날 뚝딱 대표팀이 만들어지고, 그해 겨울에 국제대회에 나가고, 그 이듬해에 올림픽에 나가고...하는 식의 황당무계한 스토리는 오히려 스키 점프 발전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선수-지도자 외에 측면에서 지원한 많은 분들이 있을 겁니다) 꽤나 서운한 얘기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열정만으로 되는 일은 꽤 제한되어 있습니다.

결국 이런 부분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스스로를 구제한 작은 영웅들 이야기'라는 영화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생략된 것입니다. 물론 전에도 한번 강조했지만 이런 부분들이 오락 영화로서 걸작인 '국가대표'의 가치를 해치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영화는 영화일 뿐, 영화를 현실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현실은 현실, 영화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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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으로 하나 끼워넣는 얘기라면, 이들 스키 점프 대표팀 선수 가운데 해외 입양 후 귀국한 선수는 없습니다. 해외에 입양됐던 스키 선수의 뿌리 찾기 이야기는 토비 도슨의 실화에서 따온 것인 듯 합니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동메달리스트인 스키 스타 도슨은 자신의 뿌리인 한국을 찾아 아버지와 동생을 만났고, 이어 약혼녀와 한국에서 전통 혼례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도슨은 이후 골프 선수로 변신, 2007년 이후 각종 대회에 출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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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영화 마지막에 봉구가 점프하기 직전, 키를 재고 방코치가 "키가 크니까 스키 더 긴거 타도 돼"라고 어필하는 장면은 시점의 착각입니다. 현재는 스키 점프 선수가 이용할 수 있는 스키의 길이가 자신의 키의 146%로 제한되어 있지만 이 규정이 생긴 것이 바로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일본이 3개중 2개의 금메달을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선수들이 큰 스키를 쓰는 전법으로(영화에도 나오는 얘깁니다) 스키점프에서 강세를 차지했고, 나가노 올림픽 이후 유럽 각국이 이 전략을 차단하기 위해 신장 대비 스키 길이 규정을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당시에는 없던 규정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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