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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드라마가 이렇게 야매로 성형수술한 콧날처럼 무너져 내릴 수도 있군요. 아무개 사극처럼 초반에 제작비를 다 써버리는 바람에 후반에는 종이에 돌을 그려 붙인 성이 나오거나, 30만 대군이 나와야 할 장면에 30명 대군이 소리치며 개싸움을 하던 모 드라마도 아닙니다. '선덕여왕'입니다.

초기의 '선덕여왕'은 미실이라는 새롭고도 강력한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해 낸 고현정이라는 배우의 열연과 함께 2009년 한국 드라마의 빛으로 떠올랐습니다. 명대사와 명장면이 이어졌고, 몇몇 캐릭터가 좀 삐끗했지만 다양한 화랑 군상들이 나타나면서 위기를 탈출해냈습니다.

하지만 '미실의 난' 이후로 드라마는 총체적 난국입니다. 무슨 얘기를 감춰놓고 있는 것인지, 당초 48회에서 최후를 맞았어야 할 미실이 50회까지 살아가게 되는 바람에 줄거리를 질질 끌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인지, 스토리도 요령부득이고 등장인물들 중 납득이 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 덕만공주는 과연 지금 몇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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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미실의 난'이라는 것이 역사에 기록된 바 없는 사건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선덕여왕' 제작진이 생각하는 '미실의 난'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칠숙-석품의 난'을 모태로 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극중의 '현재'는 서기 631년이어야 합니다. 바로 진평왕 53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드라마 속의 온갖 정황이 모두 엉망으로 꼬여 시간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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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몇가지 사건들을 실제 시간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579년 진평왕 즉위

595년(진평왕 17년) 김유신 출생

604년(진평왕 26년) 김춘추 출생

611년(진평왕 33년) 진평왕, 수나라에 재차 원병 요청

618년(진평왕 40년) 당 건국

621년(진평왕 43년) 당에 사신 보낸 첫 기록

626년(진평왕 48년) 당 태종 이세민 즉위

631년(진평왕 53년) 칠숙,석품의 난

632년(진평왕 54년) 진평왕 사망, 선덕여왕 즉위


일단 월요일 방송에서 미생은 당나라 사신이 온 데 대해 "당나라는 건국한지 10년도 안 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의 건국은 618년입니다. 그럼 이 해로부터 13년 전이군요. 뭐 이 정도는 미생의 착각이라고 치고 넘어갑시다. (앞으로 나올 일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 '선덕여왕'에 따르면 춘추는 신라로 귀환할 때 수나라로부터 귀환했습니다. 최대한 늦게 잡아 춘추가 618년에 망하기 직전의 수나라를 멋지게 탈출한 것으로 칩시다. 그렇다 해도 춘추가 귀국한 때부터 현재까지는 역시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신기하군요. 드라마상으로는 몇달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여기에 소화는 죽어가면서 칠숙에게 "30년 동안 돌고 돌아 결국 우리의 운명이..."라며 쌍팔년도 영화에 자주 나오던 "할말 다 하고 죽기" 신공을 펼칩니다. 소화가 칠숙의 추적을 받은 것은 바로 덕만과 천명이 태어나던 그날 밤 부터입니다.

이걸 보면 덕만은 30세 정도란 얘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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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덕여왕' 제작진은 덕만과 천명의 출생을 진평왕 원년으로 잡아 놓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깁니다. 마야부인이 임신한 상태에서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죠.

여기서 집필진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진평왕의 출생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서기 579년 왕위에 올라 632년 숨을 거뒀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만으로 53년, 햇수로 54년을 재위한 초장수 왕이었던 것이죠.

이건 확실한 모순입니다. 소화의 말을 따라 소화와 칠숙이 쫓고 쫓긴지 30년 정도 되는 해라면 '현재'는 진평왕 31년 전후, 서기 609년의 언저리여야 합니다. 그러자니 여러가지로 말이 안 됩니다. 우선 이 시기는 아직도 중국을 수나라가 다스리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춘추공은 604년생이므로 젖먹이는 아니지만 세발자전거나 타고 다닐 나이입니다. 595년생인 유신낭 역시 14세, 지금처럼 분전하기에는 좀 어린 나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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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칠숙의 난'에 초점을 맞춰 다시 631년으로 돌아가 보면 이것 역시 골치아파집니다. 춘추는 27세, 좀 징그럽긴 하지만 엄청난 동안이라고 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나이입니다. 칠숙과 소화가 처음 쫓고 쫓길 때 스무살 안팎이었다고 하더라도 70세가 넘은 노인들이어야 합니다. 워낙 고령이라서 "쫓고 쫓긴지 54년"이라고 해야 할 것을 착각해 "30년"이라고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그러고 나면 덕만은 몇살일까요. 이미 작가들이 '덕만의 출생=진평왕이 즉위한 그 해'라고 못박아 놓았기 때문에, 631년 칠숙의 난 현재 덕만공주의 나이는 53-54세 입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미실이 늙지 않는다고 무슨 신공을 익힌 게 아니냐고 말하지만, 이쪽도 만만찮습니다. 50대의 덕만이 36세의 유신과 함께 도망치자며 징징 울어대고, 젊은 화랑들 못잖게 산야를 뛰어다닙니다. 대단한 신공입니다. 역시 미실의 적수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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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소화가 죽어가면서 "쫓고 쫓긴지 30년..."이라고 한 걸 보면 작가들은 시청자들이 그냥 천명(당연히 덕만과 동갑)이 15세 정도에 아들 춘추를 낳고, 그 춘추가 지금 15세 정도가 되었다는 설정을 따라와 주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초반에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마야부인이 쌍둥이를 임신한 걸로 묘사했던 걸 시청자들이 그냥 다 잊어주길 바랐던 것이겠죠. 아니면 아무도 대체 진평왕이 왕위에 몇년이나 있었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말하게 되지만, '선덕여왕' 작가들은 이미 마야부인이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주인공 덕만공주가 선덕여왕이 되기까지는 53년이 걸린다는 것을 슬쩍 잊어버린 듯 합니다. 그리고 칠숙과 석품의 난이 진평왕이 죽기 1년 전에 일어난다는 것 역시 슬쩍 무시하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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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지고 노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퀜틴 타란티노처럼 아예 "자, 한판 놀아 볼까?"하고 시작하고 대체우주를 설정했다면 그건 그냥 그렇게 봐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름 정통 사극을 표방했다면 최소한 인물들의 나이 정도는 맞춰 놓고 극을 구성했어야죠.

당나라 사신에게 당당하게 맞받아치는 미실의 모습을 보고 몇몇 시청자들은 환호할 지 모르지만, 그런 인기전술을 쓰는 사이 드라마 '선덕여왕'의 품질에는 수정하기 힘든 금이 갔습니다. '미실의 난'이 어떻게 마무리될 지 모르지만, 그리고 40%대의 시청률도 그대로 유지되긴 하겠지만, '얼렁뚱땅 사극'이라는 오명은 피하기 힘들 듯 합니다.




P.S. /몰아서/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다' 라는 분들께: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흑백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드라마에는 전적인 창작의 자유가 있고, 다큐에는 사실을 그대로만 전달하는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기계적인 구분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허용되는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죠. 그리고 이 글은 '선덕여왕'이 그 도를 넘어섰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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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2번'이라는 말은 드라마 관계자들이 흔히 쓰는 말입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드라마에서는 남-녀 각 2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것이 기본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가끔 남자 투톱, 여자 투톱의 드라마 같은 변형이 있지만, 현재 만들어지는 드라마의 80% 이상은 이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구도에서 '진짜 주인공'은 각각 '남자1번'과 '여자1번'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남자2번'과 '여자2번'은 주연급이면서 각각 남자1번과 여자1번의 삼각관계 파트너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재벌가의 반항적인 후계자(남자1번)와 가난한 집 출신이지만 당찬 또순이(여자1번)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라면 여자 2번은 역시 유력가의 딸이며 남자1번의 약혼자로, 남자2번은 어린시절부터 여자2번을 지켜봐 온 동네 오빠라는 식으로 구도가 짜여지곤 했죠.

어떤 경우든 '2번이 1번의 영역을 넘볼수는 없다'는 것 역시 드라마 업계의 상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 두 편의 대박 드라마에서 모두 2번이 1번을 누르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도 특이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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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현정의 미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자2번 캐릭터이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당초 미실의 비중이 통상적인 여자2번에 머물러 있었다면 고현정 같은 빅 스타가 캐스팅에 응했을 리도 없죠.

하지만 드라마의 제목이 '악녀 미실'이 아니라 '선덕여왕'인 이상, 어쨌든 이 드라마를 끌고 나갈 책임은 덕만공주-선덕여왕의 몫입니다. 드라마의 전반을 미실이 이끈 것도 사실이지만 전편을 꿰뚫어 볼 때 이 드라마는 누가 봐도 덕만의 드라마입니다. 덕만이란 인물의 일생을 통해 작가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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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은 그 과정에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더욱 선명해지게 하는 역할일 뿐, 그 스스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강렬하고 선명하다 해도 그 선명함은 덕만의 보색처럼 덕만이 어떤 캐릭터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당초의 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덕여왕'은 과연 '선덕여왕'인지, '악녀 미실'인지 보는 사람이 혼동할 때도 있습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연기 역량이 원인입니다. 고현정의 호연 때문에 미실은 잠시라도 2선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제작진도 당초의 의도를 망각(?)하고 미실이 드라마를 이끌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실은 곧 퇴장해야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덕만에게도 기회가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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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드라마의 축은 이병헌-김태희이고, 지금도 제작진은 이 커플을 고수하려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우려대로 이 커플은 제작진이 처음 기대했던 위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이 드라마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것이 선화 역의 김소연입니다. 어찌 보면 그동안 미모나 연기력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받아온 김소연이 이제서야 개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연기력이 뒤지는 김태희가 김소연이 빛을 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물론 김태희가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이 김태희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이긴 합니다. 대본 단계에서 캐릭터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연출진이 김태희의 능력을 온전하게 뽑아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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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똑같은 요소가 김소연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됩니다. 바로 위 사진 같은 부분이 애매하게 배우만 욕먹게 하는 연출의 좋은 예입니다. 김소연이 사격 때에는 개머리판을 어깨에 밀착해야 한다는 걸-무슨 말인지 모르는 분은 옆의 남자 배우와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어떻게 알겠습니까.

게다가 김태희 캐릭터 못잖게 김소연의 캐릭터도 보다 보면 어지럽습니다. 갑자기 이병헌에게 사로잡혀 이병헌을 좋아하게된 이후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연기력, 혹은 배우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은 이런 부분입니다. 좋은 배우에게는 아무리 얼토당토 않은 캐릭터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어쩐지 그럴듯 한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힘이 있는 법입니다. 반면 애당초 약점이 있는 캐릭터라면, 신통찮은 배우일수록 그 약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네. 보는 이로 하여금 '대체 쟤 저기서 뭐하니?'라는 평이 나오게 하는 연기죠.

그런 면에서 김소연은 확실히 이번 '아이리스'에서 전자 쪽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빛이나 숨결, 목소리, 신체의 모든 요소들이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김소연이 아무리 이 드라마에서 여자2번의 역할을 120% 소화한다 해도 결말이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끝나고 다음 작품을 준비할 때에는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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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1번급의 배우인데 2번의 역할을 맡아 1번의 임무를 수행한 고현정과 최근 줄곧 2번의 역할을 맡으며 에너지를 비축하다가 이번에 1번을 압도하는 2번으로 존재감을 부각시킨 김소연의 입장은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한 방에 이 둘을 묶어 얘기하는 건 좀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당겨 봤습니다. 이런 글들이 혹시라도 현재 2번들에게 다소간 밀리고 있는 1번들에게 자극이 되어 불꽃튀는 1번과 2번의 연기 대결이 펼쳐진다면 그건 시청자들에겐 매우 좋은 일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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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작품성 있는 영화'라고 칭찬받는 작품들을 '영화제용 영화'라며 아예 취급을 안 하던 마나님이 "'파주' 언제 개봉하지? '파주' 좀 보러 가자"고 할 때부터 '아, 이 영화가 한 건 했나보다'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주'에 대한 평 중에는 좀 유치하다 싶은 '아름다운 불륜' 류의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형부와 처제라는 '공식 불장난 우려 관계'를 바탕으로 진짜 인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영화 한 편이 만들어졌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박찬옥 감독이 사람의 내면을 파고 들 때 '확 깨게 만드는' 솜씨는 이미 '질투는 나의 힘'에서 익히 본 바가 있었습니다만,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는 서우의 영화입니다. '미쓰 홍당무'에 이어 이 배우에게 두번째로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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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도시로의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파주. 3년 전 '대학 입학금을 들고 인도로 날아갔던' 은모(서우)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형부 중식(이선균)을 다시 만나지만 둘 사이에는 편안하지 않은 긴장이 흐릅니다.

8년 전, 중식은 구속된 운동권 선배의 집에 은신하고 있다가 선배의 아내이자 자신의 첫사랑인 자영(김보경)과 불륜에 이르게 되지만 산 같은 죄책감만 안은 채 서울을 떠나 파주로 도피합니다. 거기서 공부방을 운영하다 반 아이들 중 하나인 은모의 언니, 은수(서이영)와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짜여진 세 사람의 가족의 행로는 순탄치 않습니다. 은모의 가출과 은수의 죽음, 그리고 형부와 처제가 함께 사는 삶. 그런 곡절을 안고 돌아온 은모는 언니가 죽은 이유를 궁금해 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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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 속에서 설악산을 오른 적이 있습니다. 오른쪽 등산로 밖으로 난 길 아래가 천길 낭떠러지일지도 모른다는 스릴도 짜릿했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슬며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이웃 봉우리를 보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천년 전쯤으로 와 버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습니다.

'파주'는 짙은 안개 속에서 은모가 파주로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안개 속'은 이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살을 맞대고 살아도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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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는 DIY 영화입니다. 완성품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영민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완성시키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금세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를 제대로 보려면 계속 생각해야 합니다. 대체 왜 중식은 저기서 혼자 술을 마시는 걸까. 대체 왜 은모는 사과는 안 하고 엉뚱하게 저 말을 하는 걸까. 그리고 많은 관객들이 '생뚱맞다'고 하는 중식의 '고백(?)'은 왜 나오는 걸까.

얼마 전 '선덕여왕'을 보다가 '대체 저 캐릭터들은 자신에게 카메라가 오지 않을 때에는 서로 대화도 안 하는 거냐'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극이 실제 인물들의 삶을 비쳐주는 거라면, 모든 캐릭터는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삽니다. 극은 그중 가장 중요한 장면들을 돌아다니면서 비추죠. 즉 모든 캐릭터는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때에도 뭔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시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캐릭터들은 카메라 앞에서만 모든 의미있는 행동을 하고, 카메라 밖에서는 관 속으로 들어가 누워 있는 듯 할 때가 있습니다. 카메라가 비치지 않을 때에는 전원이 꺼진 인형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죠.

하지만 '파주'의 등장인물들은 카메라의 프레임 밖에서 너무 많은 일들을 합니다. 그래서 카메라에 비치지 않은 부분은 관객이 추측하고, 영화의 빈 자리를 관객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메꿔야 합니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관객이라면 질색을 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대로 따라 간 관객이라면 이 영화의 '이야기'가 수백 페이지 분량의 텍스트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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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귀찮은 관객에게 이 영화는 생뚱맞음의 연속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는 작업 자체가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뚫고 들어가는 모험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날라리가 어느날 갑자기 종교철학이니 사회복지학이니 하는게 어처구니없다'고 하기도 하고, 이 영화에 나오는 몇몇 장면들이 '너무 뜬금없어서 어처구니 없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객들에게 '파주'의 뜬금없음과, 재벌집 아들인 남자 주인공이 가난한 집 출신의 여주인공에게 따귀 몇대 맞고 '날 이렇게 대한 건 네가 처음이야' 하면서 갑자기 사랑에 빠지는 식의 '뜬금없음'은 전혀 다르다는 걸 이해하길 바라는 게 무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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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영화의 가장 큰 공은 배우들에게 돌려야 할 듯 합니다. 어찌 보면 운명(?)에 질질 끌려 다니는 비운의 남자 주인공 역을 이선균이 연기하지 않았더라면, 이만한 반향을 일으키는 건 쉽지 않았을 듯 합니다. 아내 역의 심이영과 평생의 로망인 선배 역의 김보경(무슨 특별출연이 이렇게 비중이 크단 말입니까^^) 역시 기대 이상의 호연입니다. 그리고 뭐니뭐니 해도 이 영화의 힘은 서우에게서 나옵니다.

서우가 연기한 은모는 그 자체로 불가해한 캐릭터입니다. 흔히 기성세대가 10대들을 보고 "대체 요즘 너희 세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니?"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그저 '한심하다'는 뜻을 넘어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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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모는 비논리와 즉흥성, 즉물성의 상징 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생각과 행동이 흔히 엇나가기 마련인 사춘기의 방황과 속단이 숨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성의 눈으로 볼 때에는 외계인처럼 보이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캐릭터를 서우가 연기하면서, 관객들은 '그래. 저런 캐릭터가 실제로도 있었지', 혹은 '나도 저런 때가 있었어'라고 납득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불가해한 캐릭터를 납득이 가게 만드는 힘, 아마 이런게 배우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의 서우는 어딘가 '와호장룡'에서의 장자이를 연상시키게 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연기를 만들어 낸 것이 배우 혼자만의 힘일 리는 없습니다. 박찬옥 감독의 디렉션이 서우와 맞아 떨어진 결과일 겁니다. 그런 면에서 서우의 앞날이 더욱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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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민들의 투쟁 장면과, 중식이 운동권 출신의 활동가라는 점이 이 영화를 짐짓 오해하게 만들 여지가 있지만 정작 이 영화의 고갱이와는 별 상관 없는 부분들입니다.

플롯상에는 몇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그리고 이런 부분은 제가 평소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주'의 울림은 영화를 본 다음날까지 지속됩니다. 겉으로 잔잔하게 보이는 수면 속에서 엄청난 격랑이 일고 있는 광경을 감지해 낼 수 있는 사람들에게 '파주'는 절대 심심한 영화가 아닙니다. 어쩌면 올해 최고의 영화들 중 하나가 될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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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늦은 밤이었지만 객석은 꽤 많이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고 나오는 관객들 중 상당수가 '낚였다'는 반응을 보이더군요(위 화보를 비롯해 '안된다고 하니까 더 갖고 싶어졌다'류의 홍보 문구를 생각하면 그 분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네. 형부와 처제의 짜릿하고 자극적인 불륜을 기대하신 분이라면 그냥 집에서 비슷한 제목의 야동을 보시는게 나을 듯 합니다.

P.S.2. 은모가 중식에게 '대체 왜 이런 일을 하는거에요. 어떤 의미에요?'라고 물을 때 중식은 '젊었을 땐 ....했고, 지금은 잘 모르겠어. 계속 일이 생겨'라고 대답합니다. 중식은 영화 속에서 66년생. 박 감독은 68년생입니다. 말하자면 '불혹에 맞은 미혹'인 셈입니다. 문득 80년대생 젊은이들이 이 영화의 함의를 모두 읽어내길 기대하는 건 좀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블로그 방문의 완성은 화끈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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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굿모닝 프레지던트'에는 세 사람의 대통령이 나옵니다. 평생을 민주화에 힘쓴 고령의 김정호 대통령(이순재), 정치인 2세인 젊은 엘리트 출신 차지욱 대통령(장동건), 그리고 대법원 판사와 법무장관을 역임한 한경자 대통령(고두심)까지 세 사람입니다.

세 사람 모두 모델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합니다만(굳이 말하자면 세번째 대통령의 모델 선정은 너무 노골적입니다), 아예 생각 않는게 보기에 편합니다. 주된 평가는 잔잔하고 따뜻한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인데, 정치 드라마건 로맨틱 코미디건 드라마의 강도는 매우 약합니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주 옅은 커피라서 숭늉인지 커피인지 잘 분간이 안 가는데 어쨌든 커피라니까 커피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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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 대통령 모두 개인적인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노년의 김대통령은 이미 잘 알려진대로 244억원짜리 로또에 당첨되면서 고민이 시작됩니다. 아직 젊은 홀아비 차대통령은 연애 문제와 장기 이식 문제로 갈등에 빠집니다. 마지막으로 성공한 여성 한대통령은 자신에 비해 영 수준이 떨어지고 사고뭉치인 남편이 고민거리입니다.

2. 또 세 대통령은 동시에, 우리 사회가 봉착하고 있는 세 가지 문제 해결을 놓고 고민합니다. 김대통령은 과거사 청산과 갈등 해결, 차대통령은 대일-대북관계, 한대통령은 땅값과 부동산 투기 해결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습니다.

이런 이중의 구조는 장진 감독의 작품에서 흔히 나타납니다. 1은 코미디적인 장치와 구성을 말하고, 2는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작가로서 감독의 목소리입니다. 1을 위주로 한 즐거운 코미디인가 하고 있으면 어느새 등장인물들은 2를 얘기하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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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 감독은 1 만을 갖고 깜빡 넘어가게 웃기는 영화를 그리 선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든 2를 추가하는 것이 그의 취향이자 전략이죠. 이 전략엔 장점이 있습니다. 1이 다소 부실하더라도 2는 영화가 지나치게 싸구려(?)로 보이는 것을 막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의 영화를 볼 때 진짜 원하는 것은 1인데도, 자신들이 이 영화를 보고 만족하는 것은 2 때문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설득하기도 합니다. 이런 관객들의 다소 이율배반적인 속내를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장진 감독은 순수하게 1로만 구성된 작품을 내놓지 않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의 영화에서 2는 1이 확 살아나는데 방해로 작용하곤 합니다. 그가 직접 감독을 맡지 않은 '웰컴 투 동막골'에서는 1과 2의 비율이 잘 어우러졌지만, 대부분의 작품에서 2가 1을 짓누르고 일어서곤 합니다. 아, 물론 2가 자취를 감췄던 '아는 여자'가 호평을 받은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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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프레지던트'에서도 2는 자꾸 1을 위태롭게 합니다. 세 개의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이순재가 대통령을 연기하는 첫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이순재라는 탁월한 연기자의 능력 덕분에 2의 딱딱함이 잘 감싸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 유연한 연기자가 아닌 장동건에게 공이 넘어오면 더 이상 영화는 매끄럽게 굴러가지 못합니다. 장동건에게 맡겨진 2는 지나치게 딱딱해서, 그 속을 파내고 1을 넣을 자리를 만들기가 힘들어집니다. 그저 길을 이탈하지 않고 계속 굴러가는 게 다행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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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장동건이 자기 하나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배우는 아닙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최악의 파트너를 만났습니다. 신은 한채영에게 눈부신 미모와 세계 굴지의 S라인을 내려줬지만 안타깝게도 연기력까지 주지는 않았죠. 긴장을 풀어 줄 둘 사이의 관계에서는 아무런 화학적 반응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흔히 어떤 연기자들을 보고 "제발 국어 책좀 그만 읽으라"고 불평을 하곤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조차도 아쉽습니다. 국어책을 또박또박 읽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의 한경자 대통령은 가장 불리한 입장에 놓였습니다. 누가 봐도 2는 분명한데, 이 경우에는 1도 2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안은 분명 코미디의 재료가 되어야 할텐데 한대통령의 경우에는 1이 되어야 할 것이 '사회 안에서 성공한 여성이 겪어야 할, 내조와 외조의 문제'라는 2가 돼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코미디는 사라지고,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관객은 시계를 보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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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이 영화는 '잔잔하긴 하지만 그냥 볼만한 영화'라는 정도의 평은 얻을 만 합니다. 그런데 실제 본 사람들의 평이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 살짝 실망 쪽으로 기우는 건 왜일까요. 그건 이 영화를 보러 간 관객의 대략 2/3 정도는 '대통령 장동건의 가슴뛰는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즉, 홍보단계에서 이 영화는 마이클 더글러스의 '대통령의 연인'이나 '러브 액추얼리'에서 영국 총리 휴 그랜트의 구애 스토리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영화인 양 포장됐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영화에서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더군요.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장동건과 한채영 사이에선 사실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갑돌이와 갑순이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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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보니 아무리 첫번째 에피소드가 설득력이 있어도 뭔가 성공을 기대하긴 힘들어집니다. 그렇다고 영화에 뚜렷하게 나쁘게 볼만한 대목이 없기 때문에 굳이 악평을 들을 일도 없습니다. 어쨌든 '착하디 착한 영화'인 건 분명합니다.

발을 구르며 '야, 이거 정말 재미있는데?'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에 이 영화는 살짝 부족합니다. 대다수 관객들의 평이 '너무 밋밋하지 않아?'와 '장동건 잘생겼더라' 사이에서 맴도는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장동건이 나온 '박중훈 쇼'도 재미있게 보신 분이 있었을테니 이렇게 잘라 말하는 건 좀 무리일 수도 있겠군요. 그냥 '절반은 성공'이라고 하는게 낫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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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최근 현대가 대통령전용차를 납품하기 전까지 한국 대통령은 벤츠 방탄차를 써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BMW가 등장하더군요. 이것도 P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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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2주만 제한 상영된다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This is it)'을 첫날 보고 왔습니다. 2주라도 시간이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첫날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디스 이즈 잇'은 잭슨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기획하고 있던 공연의 이름이자, 그가 준비하고 있던 신곡의 제목입니다. 그리고 영화 '디스 이즈 잇'은 그가 준비하던 공연의 리허설 광경, 아주 짧은 인터뷰 등으로 구성된 그의 생애 마지막 날들을 담은 작품입니다.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그를 성형수술과 메이크업, 친자 여부와 사소한 스캔들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디스 이즈 잇'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대중의 관심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가운데서도 그는 결코 멈춰 서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를 잘 아는 분들이라면 '디스 이즈 잇'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과연 그는 그의 생애 마지막 공연(그의 죽음 이전에 이미 그는 이번 공연이 자신의 '은퇴 공연'이라고 공언했죠)을 어떻게 준비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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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 이즈 잇'의 부제는 '마치 당신이 그를 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처럼((Like you've never seen him before)'입니다. 이 말은 그만치 '디스 이즈 잇'이 우리가 사전에 본 그의 공연과는 다른 공연이라는 것을 가리켜주고 있습니다.

일단 '디스 이즈 잇'의 예고편부터.



잭슨이 오프닝으로 애용하는 'Wanna be startin somethin'에서 잭슨의 장례식 때 엔딩 곡으로 사용된 'Man in the Mirror'까지 14곡의 음악이 등장하고, 각각의 노래들을 잭슨이 마지막 무대에서 어떻게 활용하려 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영화 '디스 이즈 잇'의 내용입니다. 유일한 신곡, 'This is it'은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 배경 음악으로 사용됩니다.

14곡의 노래들 중 그 전까지 그닥 사용되지 않았던 노래들은 없다고 봐도 좋습니다. 모두 MJ의 정수를 고른 히트곡들입니다. 귀에 익을 대로 익은 노래들이죠. 하지만 이 노래들을 활용하는 방식은 모두 전과 같지 않습니다. 무대에서 이 노래들을 토대로 보여주는 퍼포먼스 역시 연구를 거듭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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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잭슨 자신에게서도 느껴집니다. 이 영상에서 잭슨은 그리 큰 몸짓을 하지 않습니다. 10년 전처럼 과격한 움직임은 하지 않는 반면, 노래에는 좀 더 신경을 쓰는 듯한 모습이더군요.

물론 이건 신체 나이와 무관하게 이 영상이 리허설 광경을 촬영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가 공개되기 전, 잭슨의 가족들은 일제히 이 영화의 공개에 반대했습니다. 특히 누나 라토야 잭슨은 "마이클은 항상 자신이 한 최고의 모습을 팬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어느 누구도 리허설에서 최선을 다해 노래하고 춤추지 않는다. 따라서 마이클은 이 영화의 일반 공개를 원치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디스 이즈 잇'을 볼 때 감안해야 할 부분입니다.)

(가족의 반대 가운데에는 "그 영화에 나오는 건 마이클이 아니라 누군가가 연기한 대역일 뿐"이라는 아버지 조 잭슨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영화를 본 느낌에 따르면... 원래 헛소리 잘 하기로 소문난 이 아저씨는 이제 제발 좀 가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잭슨의 퍼포먼스는 여전히 눈부십니다. 사실 '은퇴 공연'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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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연의 연출자이자 마이클 잭슨과 함께 공동 대표였던 케니 오르테가는 영화 '하이 스쿨 뮤지컬'의 감독이자 안무가입니다. 그리고 '디스 이즈 잇'을 보면 그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조력자들의 힘은 20세기의 스타 MJ를 어떻게 21세기에 적응시킬까에 대한 많은 연구를 느낄 수 있게 합니다. 이를테면 백댄서 10여명으로 만들어 낸 이런 '디지털 백만대군'의 영상 삽입 등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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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잭슨은 공연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노련한 제작자의 모습으로 변신하곤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관객이 이렇게 박수를 칠거야.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해."

본래 잭슨은 '디스 이즈 잇' 공연을 10회 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공연장인 런던 O2 아레나는 대략 2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으니 20만 정도의 관객에게 자신의 마지막 퍼포먼스를 보여주려 한 것이죠. 하지만 그 즉시 몰려든 관객의 수요를 보고 진행 측은 공연을 순식간에 50회로 늘렸습니다. 물론 이 50회도 개표 즉시 매진됐죠. 한 도시에서 한 공연으로 100만 관객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는 얘깁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숫자입니다.

그리고 영상으로 일부분만 볼 수 있었던 '디스 이즈 잇'은 그런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작품이 되었을 거라는 걸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더욱 아쉽습니다. 아마 케니 오르테가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이 영상을 기를 쓰고 공개하려 한 것은 - 물론 돈 문제도 있겠지만 - 이런 아쉬움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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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스 이즈 잇'으로 가장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잭슨의 백 보컬이었던 주디스 힐을 꼽게 될 듯 합니다. 힐은 이미 지난번 잭슨의 장례식 때 '힐 더 월드'를 불러 세계인의 주목을 끈 바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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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힐은 영화에서도 'I just can't stop loving you'를 잭슨과 함께 부르는 영예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잭슨은 원곡의 시다 가렛을 비롯해 수많은 여가수들과 이 곡을 불렀지만 힐의 가창은 단연 최고 수준으로 꼽힐 만 하더군요. 특히 이 노래의 끝부분에서 잭슨과 힐이 보여주는 1분 가량의 애들립은 두 보컬의 수준을 가감 없이 보여줬습니다. 진짜 가수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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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2주만의 제한 상영이란 이 영상을 담은 dvd 등의 상품이 곧 나올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극장에 걸어 두면 그냥 관객들이 올(한국은 몰라도 최소한 미국에서는) 이런 자료를 2주만 틀고 폐기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될 일이고, 2주간의 제한 상영은 이 영상물의 수익 모델이 극장 공개가 아니라 '영구 보관을 위한 판매' 쪽으로 맞춰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도 이 영상을 굳이 보실 분들이라면 극장에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숨을 죽이며 보는 쪽을 좋아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노래나 기가 막힌 퍼포먼스가 나올 때마다 하! 하고 탄성을 터뜨리면서 말이죠. 어떤 상영관에서는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도 터져나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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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4회에서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헝가리 로케이션 장면인 4회에서 정준호가 타고 다니는 차에 눈길이 갔는데, 그게 '먹통차'였던 겁니다. 상표가 있어야 할 자리가 까맣게 비워져 있었죠.

물론 자동차 중에는 특유의 마크가 잘 보이는 차도 있고, 아예 안 보이는 차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든 한국 방송에서는 간접 광고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제작진은 상표가 노출되지 않도록 신경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차도 상표 없는 차로 분장(?)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한번 보시죠. 어떤 차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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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저 라디에이터 그릴의 한복판에 있는 밥풀같이 생긴 까만 타원형이 바로 상표가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인 거죠. 자동차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면 한눈에 알아보셨겠지만 저는 내가 저 차를 어디서 봤더라 잠시 고민해야 했습니다.

바로 이 차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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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로체 이노베이션입니다. 확인을 위해 정면샷 몇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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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관심이 없어 몰랐더니 KIA가 '아이리스'의 공식 스폰서더군요. KIA가 준비하고 있는 세단 K-7도 이 드라마에 나온다고 하는데 벌써 나왔는지, 앞으로 나올 예정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차는 이병헌의 차로 등장한다는 보도는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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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7... 어쩐지 로체 이노베이션과 앞얼굴이 상당히 비슷한 느낌을 주는군요. 그랜저 TG와 N 소나타가 그랬던 것처럼 이런 것이 패밀리 룩인 모양입니다.

문득 오래 전, '올인'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올인'에서 이병헌의 차로 나온 차는 수입차였습니다. 당시 제작진에게 "기왕이면 국산 차를 쓰지 왜 외제차를 썼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이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국내에서 가장 큰 승용차 회사에 협찬 요청을 했답니다. 그런데 대답이 "차량은 제공할 수 있지만 돈은 곤란하다"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 "한국 드라마에는 한국 차가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왕이면 드라마 만드는데 애국한다고 생각하시고 국산차를 좀 쓰시죠" 하면서 오히려 힐난하는 눈초리더랍니다. 그래서 결국 외제 차를 쓰게 됐다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일어났을 일은 뻔합니다. '올인'에 나온 차는 대만에서 일단 대박이 났고,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큰 붐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올인'에 이병헌의 차로 나왔기 때문이었죠. 아마 이런 사실을 알면 그 회사에서 당시 '올인' 측의 협찬 요청을 걷어차 버린 담당자에게 징계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만 해도 '한류'라는 말이 아주 없던 시절도 아닌데, 어쩌면 그렇게들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번에는 '이병헌의 차'라는 이름을 단 저 차가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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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김승우 일행이 타고 다니던 차는 클로즈업이 되지 않던데(당연히 협찬사인 기아 차가 아니어서 그렇겠죠), 이 차도 무슨 차인지 궁금합니다. 그림자만 봐도 무슨 차인지 아시는 고수분들이 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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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가 있다면 저 차의 조수석 바로 앞에 HYBRID라는 글자가 박혀 있더라는 것 정도입니다. 그 외에는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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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2. 그나자나... 참 아이리스 전반부는, 예상대로이긴 하지만 그 예상보다도 더 너무 뻔하게 진행되는군요. 타로 카드의 복선 하며... 이거야 원. 좀 신선하게 하면 안될까요?


블로그 방문의 완성은 화끈한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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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실의 난'. 이번주 방송된 MBC TV '선덕여왕'의 핵심은 미실이 일으킨 정변입니다. 정변의 기본은 누군가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세력이 등장했다'고 크게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우리가 나서야 한다'는 대의명분과 함께 진짜 거병이 이뤄집니다.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의 난은 이런 기본 원칙에 아주 충실하게 진행됐습니다. 유신과 알천의 무력 도발이 유도됐고, 이어 석품에 의한 세종 습격 자작극으로 혼란을 유발한 뒤 수도 서라벌 인근의 정규군이 수도로 진격, 일시적인 계엄 상태를 만드는 것 하나 하나가 쿠데타의 기본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습니다. 불만이 있다면 사건을 보는 눈이 지나치게 현대적이라는 것 정도.

그런데 미실의 난이 정말 일어났다 해도, 금세 정리될 수밖에 없는 운명입니다. 지금 시작은 대단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지만, 이 난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게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볼 때 이 난 이후에도 미실과 그 측근 인물들은 멀쩡히 살아 남아 있을 것이 분명하고, 덕만공주와 그 측근인 유신이나 알천, 비담 가운데서도 이 난으로 다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는 누가 이 난의 희생양이 될 것인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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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번 포스팅에서는 '화랑세기'의 미실 관련 기록들을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나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기록과 최대한 맞춰 보는 걸로 시도해 보겠습니다.

작가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미실의 난'을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칠숙/석품의 난'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반란이든 이 반란은 실패합니다. 실제 역사가 이 반란을 진압하고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이미 결과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반란을 미실이 주도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미실과 미실의 남편인 세종, 그 아들인 하종, 정부인 설원, 역시 그 아들인 보종, 미실의 동생 미생 등은 모두 참살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이찬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세종이 난의 중심에 있었다면 이건 삼국사기에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거대 사건입니다.

하지만 세종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것은 단 한번, 그것도 진지왕 2년의 무훈에 대한 기록입니다.

겨울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의 주군을 침범하자, 이찬 세종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하게 하였다. 세종은 일선 북쪽에서 이들을 격파하고, 3천7백 명을 목베었다. 내리서성을 쌓았다. (冬十月, 百濟侵西邊州郡, 命伊찬世宗出師, 擊破之於一善北, 斬獲三千七百級. 築內利西城)

그리고 아무런 기록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리고 '화랑세기'에도 미실이 반란에 관여했다는 느낌을 주는 부분은 전혀 보이지 않죠. 미실과 설원은 잘 늙어 죽었고, 이들의 아들 보종 또한 유신의 뒤를 이어 풍월주에 오를 몸입니다.

한마디로 '난은 무슨 난?'입니다. 반란의 주모자들이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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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역사의 기록이 지목하고 있는 반란의 주범은 칠숙과 석품입니다. 이미 이 부분은 여러 차례 언급했지만 삼국사기 원문을 한번 확인합니다.

여름 5월,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이 반역을 도모하였다. 왕이 이를 알고 칠숙을 잡아 동쪽 시장에서 참수하고, 구족을 처형하였다. 아찬 석품은 백제 국경까지 도망하였으나, 처자가 보고 싶어 낮에는 숨고 밤이면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왔다. 그는 그 곳에서 나무꾼 한 사람을 만나 그의 헤어진 옷과 바꾸어 입은채 나무를 지고 몰래 집에 돌아왔으나 곧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夏五月, 伊찬柒宿與阿찬石品謀叛, 王覺之, 捕捉柒宿, 斬之東市, 幷夷九族. 阿찬石品亡至百濟國境, 思見妻子, 晝伏夜行, 還至叢山, 見一樵夫, 脫衣換樵夫衣, 衣之, 負薪潛至於家, 被捉伏刑)

석품의 말로가 참 불쌍합니다. 아무튼 반란은 미실이 일으켰는데 칠숙과 석품은 척살당하지만 미실과 주변 인물들은 멀쩡하다.... 이건 참 불공평하기도 하지만, 과연 작가들이 어떻게 드라마를 풀어 나갈지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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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덕만공주와 비담의 활약으로 미실은 큰 무력 충돌 없이 스스로 병력을 거둘 것으로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애당초 미실이 난을 일으킨 이유가 비담의 장래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비담의 요청에 따라 난을 거두는 것도 가능할 듯 합니다. 애당초 '미실이 직접 왕이 된다'는 황당무계한 목표는 무시해도 좋았을 듯 합니다.

그러고 나면 덕만공주와 미실 사이에 합의가 이뤄지겠죠. (혹은 아래 댓글로 다른 분이 지적하셨듯 진주군 사령관 주진공과 덕만 사이에 먼저 합의가 타결될 수도 있겠습니다) 미실이 덕만에게 강요하려 했던 것과 반대로, 미실과 미실의 측근들이 모든 정무에서 손을 떼고 재야에 칩거하는 대신 난의 주모자로서의 처벌은 모면하게 해 주는 선에서 대략 대화가 끝날 겁니다.

하지만 분명히 정변이 있었고 군이 출동했는데 그냥 덮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여기선 누군가 희생양이 되어야겠죠. 그리고 칠숙과 석품이 그 굴레를 뒤집어 쓰게 될 겁니다. (아마 드라마 속 칠숙의 충성심으로 봐선 스스로 죄를 자처할 수도 있을 겁니다. )

이렇게 해서 비담과 유신, 춘추는 덕만공주를 옹립하는 세 축이 되고, 선덕여왕의 즉위에는 걸림돌이 사라집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 유신과 춘추가 한 편이 되어 비담을 배척하고, 결국 궁지에 몰린 비담이 난을 일으키는 지경에 다다르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입니다. 당장은 가장 확실한 같은 편일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지난번에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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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진행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역사를 바꾸지 않는 한 필연입니다. 다만 남은 궁금증은 대체 덕만공주가 어떤 제안으로 미실로 하여금 뽑은 칼을 거두고 반란을 무마시킬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어떤 명분을 대든 참 황당무계한 진행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담과 덕만의 혼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만, 그 정도로 뽑은 칼을 스스로 거두고 정국에서 물러난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21세기도 아닌 7세기에 말입니다. 고작 몇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정변을 마무리한다는 건 그만큼 정변이 신속하고 별 인명 피해 없이 마무리됐을 때에나 가능한 일인데, 과연 무엇이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부디 작가진이 지혜를 발휘해서 보다 설득력있는 스토리를 보여주길 기대해 봅니다.



블로그 방문의 완성은 한방의 추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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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 안 훙 감독의 '나는 비와 함께 간다(I come with the rain)'을 보고 왔습니다. 캐스팅 소식을 듣고 제목은 저런데 왜 비는 안 나오고 이병헌이 나오느냐는 농담을 한 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국내에 공개되다니, 세월 참 빠릅니다.

트란 감독은 잘 알려진대로 90년대 '시클로'와 '그린 파파야 향기'로 국제적인 주목을 끈 감독입니다. 그리고 2000년 이후 8년만에 이번 작품,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내놨고, 2010년 개봉 예정으로 현재 무라카미 하루키 원작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를 촬영하고 있습니다.

90년대의 트란 안 훙이 눈길을 끈 것은 베트남이라는 아열대 공간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끈끈함이 감도는 화면 안을 꽉 채우던 관능적이고 탐미적인 영상과, 순수와 현실의 대립이라는 소재가 잘 어우러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1990년대에 머물러 있다면 과연 지금도 그게 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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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화, '나는 비와...'는 액션 느와르의 외피를 쓰고 있습니다. 당연히 총도 몇발 발사되죠. 일단 줄거리입니다.

경찰 출신인 탐정 클라인(조시 하트넷)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세계적인 갑부('세계 최대 제약회사의 주인'이란 설명이 붙여집니다)로부터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실종된 아들 시타오(기무라 타쿠야)를 찾아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시타오의 행적을 쫓아 홍콩까지 온 클라인은 홍콩 경찰인 친구 멩지(여문락)를 찾아 도움을 청하는데 이 과정에서 악질인 갱단 보스 수동포(이병헌)를 알게 됩니다. 어떤 것도 무참하게 살해해 버리는 잔학한 범죄자인 수동포에게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여인인 릴리(트란 누 엔 케)가 있습니다.

영화의 줄거리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은 분들은 여기까지만 보시는게 좋을 듯 합니다. 제목과 관련된 얘기는 영화 내용을 건드리게 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꼭 보시겠다는 분들은, 나머지 이야기도 영화를 본 뒤에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볼까 말까 하시는 분들에게 이 영화를 권할 생각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트란 감독은 '시클로'를 만들고 나서 13년 이상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걸작들은 시대를 넘어 서는 힘을 갖지만, 어떤 작품들은 그 시대가 지나면 용도폐기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 '나는 비와...'는 시대를 넘어서는 작품이라고 보기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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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형사인 탐정과 현직 강력계 형사, 그리고 악당 보스와 미녀가 나오는 이 작품은 전형적인 느와르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이 트란 안 훙인 이상, 관객의 위장을 쥐어 짜는 긴장감을 이 영화에서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졸음을 이길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이 영화를 특이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이른바 구세주 캐릭터입니다. 영화 속에서 기무라 타쿠야가 연기하는 시타오는 사람의 상처나 병을 치유하는 신비로운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대신 치료의 방법은 좀 독특합니다. 이미 알려진 치료사들과는 달리 시타오는 타인의 병이나 상처를 자신에게로 흡수해 그 사람을 낫게 합니다. 자연히 그 사람이 겪고 있던 고통은 그대로 시타오의 차지가 되죠. 시타오는 불사신의 몸이라 죽지는 않지만, 대신 상처가 나을 때까지 끔찍한 고통을 대신 겪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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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대신 겪는다는 것은 '타인의 죄를 대신 속죄한다'는 것을 곧바로 연상시킵니다. 그렇습니다. 시타오는 누가 보기에도 예수의 재림이었던 겁니다. 이 비유는 대단히 노골적입니다. 아름다운 창녀에서 그의 추종자로 변신하는 릴리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면 누구일까 싶습니다. 시타오는 자신을 죽이러 온 수동포를 살인자 바라바를 대하듯 합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비와...'는 이 추악한 욕망과 범죄의 시대에 잘못 찾아온 재림 예수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여기에 곁다리로 붙은 것은 클라인의 기억 속에서 계속 클라인을 괴롭히는 과거의 연쇄 살인마 이야기입니다. 이 연쇄살인범에 대한 기억은 클라인의 뇌리에 박혀서 그로 하여금 선과 악의 실체를 혼동하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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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설정이 이제는 너무나도 흔해빠진 것이란 점입니다. 일찌기 니체가 말한(어느 책인지는 모릅니다)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 본다(Whoever fights monsters should see to it that in the process he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look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looks into you)'는 경구를 연상시키는 스토리는 더 이상 울궈먹을 게 없을 정도로 진부한 얘기가 돼 버렸습니다. 심지어 드라마 '아이리스'에도 나옵니다.

트란 안 훙 감독이 이 영화를 약 10년 전쯤 내놨더라면 아마도 이보다는 훨씬 우호적인 평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트란 감독이 '시클로'의 세계에 만족하고 있는 사이 세계는 2009년이 되어 버렸습니다. 유명 배우들을 끌어들이는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런 진부한 영화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성찰에 관객들이 탄복하기를 바라는 건 무리일 듯 합니다. 차기작인 '노르웨이의 숲'은 오히려 통째로 회고적인 작품이니 보다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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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이 영화에서 기무라 타쿠야는 - 나름대로 열연하긴 했지만 - 이 영화에서 '2046'에 이어 또 한번 굴욕을 겪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사라곤 서너마디 뿐인, 그리고 나머지 장면에서는 모두 괴성을 지르며 굴러다니는 연기로 일관해야 하는 이런 캐릭터를 과연 일본 최고의 톱스타가 해야 하는지는 정말 의문입니다.

도대체 왜 기무라가 이런 역할을 수락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서 한 영화라고는 '무사의 체통'과 '히어로' 정도가 전부인 기무라가 뭔가 좀 배우로서의 새로운 돌파구나 해외 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이 영화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납득할 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캐릭터로 대체 뭘 얻을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엑스트라로 전락했던 '2046'의 경험에서 별로 배운 것이 없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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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이 첫 할리우드 진출작인 '지아이조'에서 주목을 끌 수 있었던 것은 작품이나 감독보다 캐릭터의 힘이 컸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감독이 뭘 보고 그런 캐릭터를 맡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이병헌은 기무라 다쿠야와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장점을 갖고 있죠. 영어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영어 대사를 들어 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영어 실력이 배우로서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자국어로 연기하는 배우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도 당연히 아닙니다(꼭 이런 헛소리를 하실 분이 있을 것 같아 노파심에서 덧붙이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굳이 '해외 진출'이라는 걸 원한다면, 아무래도 영어 실력은 필수일 듯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괴성을 지르는 벙어리 연기 외에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교훈 중 하나라고나 할까요. 해외 진출을 꿈꾸고 있는 연예인이라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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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제목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성경 구절이 아닐까 했는데 딱 맞는 구절이 없더군요. 이사야 55장이나 에제키엘(에스겔) 13장에 뭔가 끌어다 붙일 수 있는 구절이 있긴 합니다만... 딱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내리는 눈이 하늘로 되돌아가지 아니하고 땅을 흠뻑 적시어 싹이 돋아 자라게 하며 씨뿌린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내주듯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그 받은 사명을 이루어 나의 역을 성취하지 아니하고는 그냥 나에게로 돌아오지는 않는다.' As the rain and the snow come down from heaven, and do not return to it without watering the earth and making it bud and flourish, so that it yields seed for the sower and bread for the eater, so is my word that goes out from my mouth: It will not return to me empty, but will accomplish what I desire and achieve the purpose for which I sent it (이사야 55:10,11 - 해석은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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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에서 가장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것은 이병헌에서 빅뱅의 탑에 이르는 엄청난 캐스팅입니다. 정준호 김승우 김소연 등 다른 드라마나 영화에서 충분히 주연을 맡을 배우들이 모두 조연급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도 놀랍기만 합니다.

'이죽사'의 김규태PD와 '리베라메'의 양윤호 감독이 공동연출을 맡고 있긴 하지만 이런 캐스팅은 아무래도 정태원 태원엔터테인먼트 대표와 전면에서는 빠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이 작품을 컨트롤한 최완규 작가(초기에는 작가명이 드러나 있었지만 어느새 크레딧에는 '극본-김현준 조규원 김재은'이라는 표기로 바뀌어 있습니다)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완규-이병헌이라는 라인이 아무래도 '올인'의 향기를 다시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아이리스' 1부는 그동안 흘러나왔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한마디로 '한국은 이런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고 대놓고 자랑하는 화력시범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이렇게 전체적으로 흠잡을데가 별로 없는 드라마에서도 위험 요소 하나가 보입니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맨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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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의 내용을 살짝 요약하자면 -

헝가리에 와 있는 NSS 소속 요원 현준(이병헌)은 부국장(김영철)으로부터 북한의 최고위 요인을 저격하라는 임무를 받습니다. 현준은 임무를 수행하지만 북한의 엘리트 요원이 철영(김승우)과 선화(김소연)의 추격을 받아 총상을 입습니다. 하지만 부국장은 현준의 구조 요청에 굳은 얼굴로 전화를 끊습니다.

이어지는 과거 회상. 707특임대 소속인 현준(이병헌)은 대학에 나가 공부를 하라는 기이한 특명(?)을 받고 학교 강의실에서 여학생 승희(김태희)를 만나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한편 현준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특임대의 에이스 자리를 다투는 사우(정준호)는 선배 상현(윤제문)과의 술자리에서 승희를 만나 역시 반해버립니다.

그리고 며칠 뒤, 현준과 사우는 검은 양복 차림의 남자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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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는 모를수록 감상에 도움이 되겠지만 눈치 빠른 시청자들이라면 이후의 진행이 대략 짐작될 겁니다. 사전에 알 수 있는 줄거리는 홈페이지상에도 나와 있죠. 검은 양복들에게 끌려간 현준과 사우는 고문 테스트를 받고 부국장 김영철이 이끄는 비밀 기구의 요원이 됩니다. 신분을 가장하고 두 사람을 각각 만난 승희는 그 기구의 선배 요원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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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1회에서 보여준 물량과 빠른 편집은 시청자들이 갖고 있던 '드라마'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만 합니다. 두 연출자의 역할분담은 대략 스토리 라인은 김규태 PD가, 외부 촬영과 스펙터클은 주로 양윤호 감독의 몫으로 나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동안 양윤호 감독의 작품들이 극악의 스토리라인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번에는 그런 부담을 씻고 자신의 장기인 '볼거리'에 집중한 것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수없이 많은 외화들을 통해 저격 장면들을 보아 온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너무 간단하게 피격 포인트를 파악하고 너무 간단하게 저격 장소로 이동하며, 역시 너무 간단하게 현준의 은신처를 알아내 버리는 진행이 좀 불만스럽기도 하지만, 이런 진행은 '총감독 정태원'의 스타일이라 매우 익숙합니다.

(흔히 정태원 대표는 작가, 감독, 제작사 대표를 모두 겸임해 '정태원 총감독'이라는 우스개로 불리곤 합니다. 그리고 이분의 스타일은 '귀찮고 머리 써야 하는 부분은 모두 삭제'라는 쪽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어쨌든 이분이 아니면 '아이리스'같은 대작은 나올 수 없었다는 데 모든 사람이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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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익숙한 장면. 사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서 이런 장면은 '앞으로 두 사람이 친구가 된다'는 걸 예고하는 장면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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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파격적인 스타 파워와 물량의 결합은 '아이리스' 1회에서 좋은 효과를 냈습니다. 대학 생활 장면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었겠지만 1회의 하이라이트인 고문 장면에서 이병헌의 힘은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화면을 꽉 채워버리는 압도적인 연기력은 시청자들을 충분히 납득시키고도 남음이 있었죠.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쉬리'와 '올인'의 유산들입니다. 여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국가로부터 오해받는 요원'이라는 키퍼 서덜랜드의 '24'가 오무라이스의 계란처럼 덮입니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은 아닙니다. 일찌기 '쉬리'를 만든 강제규 감독 팀의 구호가 '한국에서도 블럭버스터를 만들 수 있다'였다면 '아이리스' 제작진의 정서는 '미드에서 한다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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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드라마에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여주인공입니다. 김태희는 이미 1회에서도 몇차례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지나치더군요. 어떤 연기를 할 때에도 변화 없는 표정을 보면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비밀 요원의 역할에 적역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은 1회에서도 이렇게 불안요소를 드러낸다면 본격적인 멜로드라마(순간 '메롱드라마'라고 쓸 뻔 했습니다)가 진행되어야 할 때에는 진짜 심각한 위기가 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병헌은 지금까지 혼자 연기할 때는 물론 상대 여배우로부터 멜로드라마 연기를 이끌어내는 데에 발군의 솜씨를 보여왔습니다. 반면 김태희는 상대역이 누구든 간에 아무런 변화 없는 연기로 사람들을 놀라게 해왔습니다. 지금까지 조현재-김래원-정우성은 물론이고 설경구조차 끌어내지 못했던 김태희의 '연기'를 과연 이병헌은 끌어낼 수 있을까요?

아이리스는 첫회만으로도, 어쩌면 방송 전부터 어느 정도의 성공은 보장된 작품이란 게 분명해졌습니다. 이 점을 인정하고 나면, 바로 이 '위험 요소'의 처리 결과가 '아이리스'가 한국 드라마사에 남는 대작이 될지, 아니면 수많은 성공작 중 하나가 될 지를 결정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까지 가능성은 정말 반반이군요. 흥미진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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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TV '천사의 유혹'이 방송 초반부터 화제가 됐습니다. '아내의 유혹'에 중독됐던 주부층을 다시 사로잡을지에 관심이 몰리고 있는 가운데, 이번 작품도 도입부부터 '놀랍도록 빠른 전개'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사실 '천사의 유혹'의 스토리가 새롭게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천사의 유혹'이나 '아내의 유혹'과 자주 비교되는 아침드라마들의 경우, 비슷한 엽기성 스토리가 날이면 날마다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아침부터 이런 얘기들이 먹혀드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천사의 유혹'이나 '아내의 유혹'의 인기는 수십년간 축적된 아침 드라마 시장의 소비자들과 분리해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이 드라마를 놓고 방송의 공익성이 어쩌네 저쩌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안정된 시청률과 광고 판매의 효자인 이런 드라마를 없앤다는 건 방송사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이런 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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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 드라마에 대해 모르는 분들을 위해 '천사의 유혹'의 베이스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주아란(이소연)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원수의 아들 현우(한상진-나중엔 배수빈)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주아란을 돕는 의사 남주승(김태현)과는 내연의 관계죠. 주아란은 현우의 집안을 박살내는데 성공하지만 식물인간이 됐던 현우는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성형수술을 통해 다른 인물로 변신해 다시 주아란에게 복수합니다.

딱 보면 아시겠지만 배신과 복수, 그리고 다른 인물로의 변신이 주요 소재입니다. 네. '아내의 유혹'에서 익히 봤던 소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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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옥 작가의 이 드라마들은 왜 인기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만화 보시는 분들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만화 많이 본 독자일수록 만화 한 권을 보는 속도가 빠릅니다. 소설도 사실 마찬가지일 겁니다. 영화를 1년에 100편 이상 보시는 분들은 가끔씩 빨리감기로 보는 영화가 있을 겁니다.

이 '유혹' 시리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용이야 이미 수십년간 아침드라마들을 시청하며 첫장면 봐도 끝장면이 보이는 높은 내공의 주부 시청자들에게, '당연히 생략해도 좋을' 장면들은 과감하게 날려 주는 것이 이 '유혹' 시리즈의 서비스입니다.

'유혹' 시리즈는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긴 하지만 다른 막장성 드라마들처럼 시청자를 짜증나게 하는 요소들이 과감하게 생략돼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건 너답지 않아!'라며 말리는 친구에게 '그럼 나다운게 뭔데?'라고 반문하는 여주인공 같은 장면들입니다. 이런 구태의연한 장면은 '유혹' 시리즈에서 볼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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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좀 더 상상을 초월하는 장면들이 등장합니다. 엊그제 결혼한 새색시가 사실은 강남 텐프로 룸살롱의 에이스 출신이고(이름은 웬 로즈마리?) 악당 회장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룸살롱에서 007 쇼를 벌입니다.

여기에 주아란과 남주승은 와인 잔을 부딪히며 자신들의 음모가 성공하는 걸 자축하다가 그 자리에서 눈에 불이 붙어 바로 뜨거운 키스와 함께 베드신으로 직행합니다. (어딘가 외국 영화에서 본듯한 장면입니다만, 연출이며 연기가 사실 좀 낯뜨거울 정도로 어설펐습니다.)

어쨌든 이 드라마의 매력은 1.5배속, 혹은 2배속으로 아침 드라마를 보는 재미입니다. 지루한 부분은 확실히 생략. 괜히 시간만 끌고 러닝타임만 잡아먹는 똑같은 줄거리의 드라마에 비해 '유혹' 시리즈의 만족도가 높은 건 너무 당연한 얘깁니다. 그리고 가끔은 상상을 초월하는 '말도 안 되는' 장면이 등장해 시청자의 기대를 무너뜨려 줍니다.

그런데 기껏 애쓰고 돈들여 만든 드라마보다는 이런 드라마들이 확실한 효과를 주고 있으니, 방송사 입장에서도 어찌 보면 답답한 노릇입니다.

아, 처음에 얘기한 해결 방법은 왜 안 나오냐구요. 네. 지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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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합니다. 지금부터 이 드라마의 장르 표기를 바꿔 버리면 됩니다.

그러니까 '미니시리즈 천사의 유혹' 이라고 부르는 대신, '코미디 극장 천사의 유혹' 이라고만 부르면 만사 해결입니다(마침 강유미도 나오지만, 강유미가 나와서 코미디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이미 이 드라마는 드라마가 가지고 있어야 할 대체적인 미덕을 넘어서서 '황당무계한 상황'을 통해 '현실을 풍자하는 웃음'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개콘'이나 '웃찾사'를 보면서 '저게 세상에 말이 되는 얘기야? 말도 안돼!'라며 흥분하지 않죠. 다소간의 과장은 코미디의 미덕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방송사측에 권합니다. 그냥 제목과 장르 표기만 바꾸시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어떤 시청자 단체가 코미디라는데 토를 달겠습니까. 게다가 '천사의 유혹'은 현재의 '웃찾사'보다 훨씬 더 많은 웃음을 주고 있습니다. 그게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오는 헛웃음인지, 정말 즐거워서 나오는 웃음인지는 굳이 구별하지 맙시다. 어쨌든 웃음은 웃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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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유혹'을 보면서 TVN의 '롤러코스터'에 나오는 '막장로맨스'나 '막장극장'과 혼동을 느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들 코너들은 '막장드라마의 엑기스만을 모아' 드라마처럼 꾸며 방송하는 패러디 코너들이죠. 그런데 '천사의 유혹'을 보다 보니 어느 것이 원작이고 어느 것이 코미디 프로그램의 패러디인지 구별을 못하게 돼 버렸습니다.

기왕 이렇게 된 바에는 '천사의 유혹'의 장르 표기만 코미디로 바꾸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출연하는 배우들이 항의할까요? 에이, 사실은 다들 알고 출연했을텐데요. 그리고 요즘 왕비호한테 욕 한번 먹으려고 줄 선 배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 오늘 저녁부터 '코미디 극장 천사의 유혹',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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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두 작가 중 하나인 박상연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선덕여왕'이 너무 기록된 역사를 무시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가능하면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더군요.

솔직히 참 무책임한 얘기입니다. 사극도 드라마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역사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신라시대를 조명한 사실상 두번째 사극(그리고 첫번째는 많은 사람들이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삼국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좀 더 역사의 '의미'에 충실한 드라마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요즘 춘추의 역할이 드라마의 활력소가 되고 있긴 합니다만, 이 드라마의 춘추 해석은 좀 무리한 구석이 많아 보입니다. 드라마 속의 춘추는 스스로 '왕이 되겠다'며 나서고 있지만 진평왕 치하의 춘추는 그렇게 마음 편한 상태였을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영조 후기의 세손 이산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보는게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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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무열왕 김춘추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龍春之子也.母, 天明夫人, 眞平王女

태종무열왕이 즉위했다. 이름은 춘추.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의 아들이다.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다. (드라마만 보시던 분은 용춘은 숙부인데 무슨소린가 하시겠지만 '삼국사기'는 용수와 용춘을 동일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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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6대 왕인 진평왕이 아들이 없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로써 남자 성골이 사라졌고,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등장합니다. 여왕 등극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로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게 환영받지는 못하는 사건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27대 왕인 덕만공주=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왕이 됐어야 했을까요. 남자 중에서 왕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춘추입니다.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이며, 어머니 또한 진평왕의 딸이므로 사실상 성골입니다.

그렇다면 왜 춘추가 있는데도 덕만공주가 왕위에 올랐을까요?



 진흥왕(24대왕) -   동륜태자           -   진평왕(26대왕)      -   덕만(27대왕)
                           진지왕(25대왕)   -   용수(용춘)           -   춘추(29대왕)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모계에만 주목했기 때문에 덕만공주가 춘추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저 따뜻하기만 합니다. '비명에 간 언니 천명공주의 아들'이라는 시선만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계에 따라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들은 6촌 남매의 같은 항렬인 왕위 경쟁자입니다. 덕만공주 대신 춘추가 왕위에 올라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왜 춘추는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까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진평왕과 당시의 지배 세력들이 춘추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그 정도로 - 여자를 왕위에 올려 놓을 정도로 - 꺼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춘추와 춘추의 아버지 용수(혹은 용춘)는 진지왕이 폐위당하지 않았다면 적통으로 왕위에 올랐을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용수의 장인인 진평왕은 진지왕과 그 후손들인 용수(용춘)의 왕 자리를 빼앗은 인물인 것이죠. 아울러 진평왕을 왕으로 만든 사람들은 모두 용수-춘추 부자의 적들인 셈입니다.

진평왕은 숙부인 진지왕을 내쫓은 대신 그 아들이며 자신의 사촌인 용수를 사위로 삼아 포용하는 정책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왕위를 물려 줄 정도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설사 진평왕이 믿었다 해도 진지왕을 내쫓고 진평왕을 옹립한 세력들은 용수를 왕위에 올려놓는 것은 자신들의 목을 용수의 정치적 보복 앞에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춘추는 감히 덕만의 경쟁자가 될 수 없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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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에서 용수-춘추는 한 다리 건너 조선시대 정조의 위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위에 올랐으나 이내 빼앗긴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갖고 있는 신세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진평왕이 용수를 사위로 삼으며 감싸긴 했지만, 폐위된 왕의 자손이라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 죽음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들입니다. 또 진평왕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람들은 춘추가 왕위에 오르면 정치 보복이 시작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는 면에서, 영조때의 노론 벽파와 다를 게 없습니다.

결국 용수, 용춘, 춘추가 살아남는 길은 '왕위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음을 강조'하는 길 뿐입니다. 다른 마음이 없음을 증명하고 진평왕-선덕여왕에게 적극 협조하는 길 뿐이죠. 이 대목에서 '나도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설치는 길은 '나를 죽여주세요'하는 거나 마찬가지일겁니다. 똑똑하기로 유명했던 춘추가 안 그래도 주목을 받는 처지에서 이런 자살행위를 할리는 없겠죠.

오히려 춘추는 대외적으로 신라의 위치를 높이는 외교 활동으로 큰 공을 세우고, 안으로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신라 무장 세력의 핵심인 유신과 연합합니다. 이 연합은 자신이 유신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거기서 태어난 조카를 다시 유신에게 시집보내는 겹사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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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연합은 선덕여왕 사망 직전에 발발한 비담-염종의 난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대체 선덕여왕의 치세에 반대한 세력이라면 왜 여왕이 죽기 직전에 난을 일으켰을까요. 이것은 난의 상대가 여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담-염종은 이미 신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춘추-유신의 세력에 대항해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즉 비담과 염종의 난은 춘추의 등극을 원하지 않고 있던, 진지왕 폐위 세력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이죠.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하기에 앞서 춘추-유신은 진덕여왕을 옹립, 자신들이 '왕위에 사심이 없음'을 천명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7년 동안 이 겹사둔 콤비는 신라 안팎을 다져 춘추의 등극을 위한 준비를 마칩니다. 결국 이런 오랜 준비의 결과로 춘추, 즉 태종무열왕 이후 약 100년간 이 가문에 도전할 사람은 없어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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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깐 이런 식의 희화화도 좋고, 촌장의 목을 한방에 날리는 결단력있는 여왕 덕만의 모습도 좋습니다. 다 좋지만, 역사가 가야 할 방향을 너무 엉뚱하게 돌려 놓는 시도는 좀 곤란하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천추태후'와 비교하면 양반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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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면서 중간에 몇번 웃었습니다. 이 영화는 명성황후 민씨와 그 호위무사 사이의 멜로드라마입니다. 또한 무려 90억원의 순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에픽이기도 합니다. 순 제작비가 90억원이라는 것은 홍보와 마케팅 비용을 포함하면 실제 제작비는 그보다 훨씬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끔 어떤 영화는 돈을 잔뜩 들이고도 도대체 어디에 제작비가 들었을까 보는 이를 궁금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90억원이 들어간 영화로 보일까요? 네. 어디에 돈이 들었는지 확실히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돈이 제대로 쓰일 곳에 쓰였느냐는 질문에는 대답이 좀 궁색해집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의 출발점은 지난 2002년 드라마 '명성황후'의 주제가로 쓰였던 조수미의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입니다. 당시엔 정준호가 훈련대장 홍계훈에서 모티브를 따 온 호위무사로, 이미연이 명성황후 역으로 나왔죠. 불행히도 영화는 그 뮤직비디오 한편만큼의 여운을 남기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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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아버지를 잃은 소녀 자영(수애)은 대원군(천호진)의 간택을 받고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바닷가를 찾아갑니다. 이때 늪을 헤치고 물길을 타준 사공 무명(조승우)은 수애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러다 자영은 반대파의 기습을 받고, 무명이 가까스로 자영을 구해내지만 자영은 대원군이 보낸 뇌전(최재영)의 경호를 받으며 사라집니다.

어떻게든 자영의 곁에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무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 궁을 지키는 무예별감이 되어 호위를 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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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이 영화는 실제 시간으로 본다면 1866년 자영이 입궁할때부터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물론 아직 대한제국 선포 전이므로 사망시까지는 그냥 민비입니다)가 살해당할 때까지의 29년간을 커버합니다. 자영은 1851년생이므로 만 15세때부터 44세까지의 세월이죠. 아무 생각 없이 '불꽃처럼 나비처럼'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길어야 3-4년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시각에서 다룬 드라마는 꽤 여러편 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다뤄진 것이 2002년이었으니 그 내용을 대략 기억하는 분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어쨌거나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시려면 구한말 역사에 대한 지식은 아예 버리고 시작하는게 좋습니다. 아니, 최소한의 '건전한 상식'을 조금이라도 남기면 영화 감상에 아주 막대한 지장이 옵니다.

이후의 내용에는, 저는 전혀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역사라고는 20년 전 초등학교때 배운 뒤로는 단 한번도 되새김질 한 적 없는 분들에게는 스포일러일 수도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맨 아래, P.S로 건너 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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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유지하고 있는 역사적 발판이라고는 '(1) 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고, 자영은 고종의 아내다 (2) 중간에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자영은 죽을 위기를 넘긴다 (3) 을미년(1895년) 명성황후는 일본 공사 미우라가 보낸 낭인들에게 참살당한다', 이 세가지 정도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무시해도 좋습니다.

그 밖의 설정과 구성은 여러가지로 실소를 자아냅니다. 그 극치는 임오군란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한 대원군의 경복궁 진공(?)입니다. 대원군이 백주 대낮에 수천명의 군병을 이끌고 광화문을 향해 6조 앞 대로를 진격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앞의 궁내가 수비 병력으로 가득 차 있는 장면은 한국사에서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장면입니다. 한마디로 '황후화'나 '야연' 같은 중국식 에픽의 영향을 받은 기상천외의 유치한 장면일 뿐입니다.

그밖에도 헤아리자면 사흘 밤낮이 모자랄 정도지만 그냥 이 정도로만 해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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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얘기하면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제가 살짝 비꼬고 있는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이 영화가 조선의 명성황후가 아니라 오로라제국의 별나라 여왕과 호위대장의 이야기래도 좋습니다. 문제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 수준입니다.

전반부의 스토리는 요약하자면 '스토커 조승우와 인기를 즐기는 수애여왕'입니다. 낮에는 뱃사공, 밤에는 살인청부업자의 이중생활을 하고 있던 무명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자유분방하고 씩씩한 미녀 자영에게 반나절만에 홀딱 빠져버립니다.

생전 연애라는 것을 해보지 않은 무명은 자기 페이스대로 스토킹에다 납치까지, 정상적인 연애 감정에서는 있어선 안될 행위들을 마구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를 따끔하게 혼내고 잘라 버려야 할 자영양은 은근히 그의 마음 속 불꽃에 땔감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정작 제목대로라면 자영이 불꽃이고, 그 불꽃에 너무 겁없이 다가간 무명이 나비겠지만 이 전개 과정을 보면 누가 불꽃이고 누가 나비인지 불분명합니다. 둘 다 너무나 무모하고 무책임합니다. (아,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라구요?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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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남편에 대한 애정 따위는 없지만 나라를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왕비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는 자영과 '난 그런 건 모르니 그냥 어디로 둘이 훌훌 떠나면 안되겠니'의 무명 사이는 끝없이 그냥 평행선을 탑니다. 여기에 '그냥 똑똑한 것 같아서 호감이 갔는데 알고 보니 내 마누라였고, 다른 놈이 좋아하는 듯 하니 기분나빠서 내거라는 걸 분명히 해야겠다'는 고종까지 합세해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의 멜로드라마에서 한몫을 합니다.

결국 도를 넘어선 무명은 주제를 잊고 엄한 남편과 아내의 잠자리까지 질투하기 시작합니다(뭐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시기에 고종과 자영은 이미 다섯 자녀(모두 어려서 잃고 뒷날 순종이 되는 세자만 생존)를 낳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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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설명해서 그렇지만, 문제는 영화를 봐도 이런 황당무계한 전개를 뒷받침해 주는 감정의 디테일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납득이 가는 전개'의 실종입니다. 조승우나 수애 급의 배우들이 거기에 불만이 없었던 걸 보면 아마도 찍어 놓기는 한 7시간 분량을 찍어 둔 듯 하지만 7시간짜리 영화를 개봉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죠.

아예 처음부터 대본이 이 수준이었다면 조승우가 이 역할을 맡았을지도 궁금하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조승우가 출연한 작품들 중 이 정도로 극중 인물의 감정이 제멋대로에다 요령부득인 작품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좋은 작품이 있고 좋은 배우가 있지, 배우는 잘했는데 작품은 엉망이라는게 말이 되느냐'는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무능한 연출가도 - 혹은 연출가가 무능할수록 - 초절정 명배우가 한달 고민해서 한 연기를 학예회 수준으로 추락시킬 수 있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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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흥행 성과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등급을 보니 15세 이상 관람가더군요. 과연 15세가 넘은 분들 중에도 이 영화를 즐기실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느냐가 관건일 듯 합니다. 물론 제 주변 분들 중에도 '나쁘지 않다'는 분들이 몇분 있긴 했습니다. 제 경우엔 그냥 뮤직비디오는 뮤직비디오로 감상할 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P.S.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 이 영화의 미술이며 복식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한마디로 화면은 참 화려하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네. 90억원 쓴 태가 확실히 납니다. 특히 수애의 광팬이라면, '수애에게 한복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는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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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TV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는 시청자들이 조금만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 느끼는 첫번째 궁금증은 대략 비슷합니다. "도대체 미실은 몇살인거야?" 네. 분명 백발의 파파할머니여야겠지만 드라마 속의 고현정은 팽팽하기만 합니다. 보톡스도 없고 리프팅 기술도 없던 7세기 초, 대체 무슨 재주로 미실은 젊디 젊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미실이 며칠 전 유신에게 "내 나이만 젊다면 내가 직접 너를 품고 싶다만..."이라고 할 때 사실 많은 분들이 좀 의아했을 겁니다. 실제 고현정과 엄태웅은 세살 차이군요. 충분히 직접 나서셔도 될텐데 딸도 아닌 손녀를 유신과 짝지워 주려고 하는 역할이라니...^^)

물론 나이 얘기를 하기 시작하면 지금의 '선덕여왕'은 당장 무너져 버릴 드라마라는 걸 모르는 분은 아마 없을 겁니다. 28일 방송에서도 그냥 홍안의 청년인듯 하던 보종이 시집갈 나이의 딸 보량(그 시절엔 12-13세에도 결혼을 했다고는 하지만)의 아버지로 급변신하는 모습에 헉 소리가 나왔습니다. 이미 이런 얘기는 많이 한 터라 더 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새로운 관심인물인 춘추의 활약(?)을 보다 보니 살짝 어이없어지더군요. 바로 춘추의 현재 나이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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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출생 연도는 604년, 즉 진평왕 26년입니다. 595년생인 김유신보다는 9세 연하이지만 출생연도가 알려지지 않은 덕만공주와는 몇살 차이인지 알 수 없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김춘추는 어렸을 때 어머니 천명공주에 의해 수나라로 보내지고, 거기서 약 10년을 머물다 천명공주의 서거 소식을 듣고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나라로 가기 전의 춘추의 모습, 그리고 돌아온 뒤인 현재의 춘추 모습으로 보아 대략 5-8세 정도에 가서 15-18세 정도에 돌아왔다고 하면 적절할 듯 합니다. (아, 물론 김춘추가 수나라에 유학갔다는 것은 드라마 속 설정입니다. 이런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수나라가 망한 것이 618년이라는 점입니다. 수나라는 612년 양제의 고구려 정벌군이 을지문덕에 의해 격파당해 곤경에 놓인 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617년, 사실상 궤멸 상태에 이릅니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춘추가 귀국한 것은 최소한 616년 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617년은 뒷날 당나라의 시조가 되는 이연의 반란군이 수도 대흥성을 함락하고 허수아비 황제인 공제를 세웠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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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당에 인질도 아닌 신라의 왕자가 그렇게 한가하게 남아 있었을 리가 없죠(강제로 억류돼 있었다면 어머니가 죽었다고 쉽사리 귀국할 수 있었을 리도 없습니다). 더구나 28일 방송에서도 설원이며 보종이 "수나라 정세에 대해서도 얘기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덕담을 했건만, 이때에도 수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이들이 대화하고 있는 시점은 최대한 늦게 잡아 봐야 617년 상반기 이전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617년이라고 쳐도 춘추는 만 13세. 우리 나이로 열 네살. 그런데 하는 짓은 가관입니다. 미생과 함께 술맛을 논하는 가 하면(논하는 풍을 보니 이미 수나라에서부터 술깨나 마신 분위기입니다. 그 나이에...) 기방에 가서 미색을 논하고, 도박장에선 주사위를 던집니다. 그리고 이제는 보종의 딸과 결혼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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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워낙 옛날이니 조혼을 하고 사람들이 지금보다는 훨씬 조숙했다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그래도 만 13세에 음주에 기방, 도박이라는 건 좀 너무 했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선덕여왕' 제작진도 지금의 춘추가 만 13세라고 설정해놓고 드라마를 만들고 있지 않다는 건 대략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당연히 세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춘추의 출생 연대와 수나라가 망한 해, 중국의 정세를 결합해 볼 때 춘추가 드라마 속에서 보이듯 10대 후반의 나이로 중국에서 귀국하려면, 그건 수나라로부터가 아니라 당나라로부터 귀국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긴 이 정도로 춘추의 나이가 흔들리는 것 보다는, 그냥 소년 화랑인줄 알았던 보종이 갑자기 보량이라는 다 큰 딸을 데리고 불쑥 나타나는 것이 더욱 황당무계할 수도 있습니다. 좀 어설프긴 합니다만, '판타지 선덕여왕'의 세계에서는 지금까지 줄곧 있어 온 일이죠. 어쩌겠습니까. 그냥 넘어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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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 내곁에'를 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현대 의학으로 고치지 못하는 환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소재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장애나 병을 다룬 영화 중에서도 '나의 왼발'이나 '블랙' 처럼 인간승리의 드라마도 아니고, '러브 스토리'처럼 멜로드라마의 소재로 죽을 병 - 불치의 병이 사용된 경우도 아니고, '병과 환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영화에 선뜻 눈길이 가지 않았던 겁니다.

예상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시사회를 지켜 본 한 지인은 "왜 박진표 감독이 처음에 권상우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려 했는지 알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물론 그 개인의 생각이고, 이유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잘 알려진 얘기지만 본래 김명민이 이 역할을 맡기 전에 권상우가 주인공으로 낙점된 적이 있었죠. 그리고 나서 곡절 끝에 권상우가 하차하고 주인공이 김명민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들은 '전화위복(?)'이라며 이 영화 제작사에 축하 인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도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저도 어렴풋이 지인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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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이 어느 정도 진척되어 휠체어 신세가 된 종우(김명민)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준비하다가 우연히 어린 시절 알고 지냈던 장례지도사 지수(하지원)를 만납니다. 그 자리에서 지수에게 프로포즈하는 종우.

하지만 이미 끝이 정해져 있는 게임이라 종우는 점점 죽음을 향해 가고, 두 사람은 서로 열렬히 사랑하지만 경제적 위기, 오해, 불신, 갈등이 찾아옵니다.

줄거리를 정리하려니 정말 정리할 게 없는 줄거리입니다. 이미 '불치병에 걸린 것을 알고 있는 남자와 헌신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여자 이야기'라는 전제가 너무도 선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재의 영화를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영화의 방향과 전개과정은 약간의 상상력만 발휘하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일단 '줄거리의 진행 방향에 대한 궁금증'은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걸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나 연출자가 박진표 감독이라면 더더욱 그럴 겁니다. 박감독은 이미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에이즈 걸린 여자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남자 이야기'라는 역시 끝이 다 보이는 소재로, 그리고 '유괴범은 목소리만 들려줬을 뿐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세상이 다 아는 미결의 미스테리로 두 편의 히트작을 만든 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치 박진표 감독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 가장 기초적인 정서를 뒤흔드는 데 있어 오케스트라 앞에 선 명지휘자의 솜씨를 줄곧 발휘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약간 다른 느낌이 듭니다. '너는 내 운명'에서 주인공은 분명 절망적인 사랑을 하는 두 남녀였고, '그놈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이를 잃은 절박한 부모였습니다. 하지만 이번 '내사랑 내곁에'의 주인공은 왠지 인물이 아니라 루게릭 병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이라는 생각이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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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이라면 이건 제 잘못만은 아닙니다. 이 영화가 제작에 착수한 이후 모든 홍보의 포인트는 '김명민의 감량'에 맞춰졌습니다. 즉 다른 모든 것보다 김명민이 엄청나게 말라 죽어가는 루게릭병 환자의 모습을 얼마나 성실하고, 숭고하고, 제대로 재현하느냐에 모든 관심이 쏟아져 버린 겁니다. 당연히 영화를 보는 사람도 다른 모든 조건에 앞서 김명민의 몸 상태에 눈길이 쏠립니다.

그런데 이런 선입관 때문인지, 영화는 두 남녀의 관계를 조명하기 보다는 환자의 상태를 쫓아가는 데 몰두합니다(아니면 감독의 편집 의도와는 달리 관객의 눈에는 뭘 만들든 '환자의 상태'만 보이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온전히 루게릭병 환자가 죽어가는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형식의 작품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의 스탠스는 약간 어정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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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변명을 한 김에 조금 더 하자면, 이 영화가 '너는 내 운명'과 '그놈 목소리'의 마법을 이어가려 했다면 분명 루게릭병보다는 두 남녀 사이의 사랑이 좀 더 밀도있게 그려져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 제 눈에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 두 주인공 김명민과 하지원 사이에서는 아무래도 화학적인 반응이 느껴지질 않습니다.

김명민 쪽을 보자면, 누가 봐도 '고시 준비를 열심히 하다가 뜻하지 않게 병마로 쓰러졌지만 억울해서라도 그냥 죽을 수는 없다며 분투하고 있는 남자'라는 설정에 수긍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지원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두 번 결혼에 실패하고 그래도 열심히 살다가 곧 죽을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역을 연기하고 있는 하지원'이 보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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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배우 하지원의 문제가 아니라 캐릭터 설정 때부터의 무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여주인공은 배경 설정에 비해 너무 밝고 씩씩하고 명랑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지켜보고, 나름대로 생사에 대한 생각과 인생의 의미에 대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대목이 있는 반면 대부분의 장면에서는 그냥 발랄하고 청순한 20대 초반 여성의 느낌이 그대로 풍겨나옵니다. 이런 두가지 느낌이 하나로 융화되지 못하고 그때 그때 다른 사람처럼 등장합니다.

이렇게 불안한 캐릭터인데다, 김명민과 단 둘이 있는 장면에서도 어쩐지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그닥 느껴지질 않습니다. 김명민-하지원 커플보다는 오히려 남능미 부부나 임하룡 부부의 사연이 훨씬 가슴에 와 닿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요. 특히 '그 순간'을 놓쳐 버린 임하룡이 자책하며 쓰러지는 장면에선 절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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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애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결국 실컷 울고 싶은 관객이 기댈 곳은 그냥 보기만 해도 가슴아픈 김명민의 참상(;)입니다. 하지만 냉정을 되찾고 보면, 정작 김명민은 앙상한 갈비뼈로만 연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목소리를 잃은 다음에도 끊임없이 뭔가 말하기 위해 눈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도 압도적인 '몸'의 연기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건강이 위험할 정도로 살을 빼는' 결단은 확실히 아무나 내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만, 그 '몸'의 상태 때문에 명배우와 보통 배우의 격차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몸'에 초점이 맞춰질 거였다면 김명민 같은 당대의 명배우가 과연 필요했을까 하는게 제 생각입니다. 김명민 팬들에겐 좀 불측한 생각인지도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지금처럼 바짝 말라 죽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을 통해 관객을 감동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영화였다면, 좀 더 젊고 잘생긴 꽃미남 배우가 했어도 큰 문제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히려 권상우나 송승헌, 소지섭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이었다면 더 많은 감동을 주지 않았을까요.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역할에 김명민을 기용한 것은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이 투입된 것이라는 느낌입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를 좀 더 해 볼 생각입니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김명민은 몇 개의 트로피를 더 받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이 영화 전체를 구원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어쨌든 온 세상이 모두 자신들을 위한 무대와 설정으로 보이는, 한창 뜨거운 연인들은 보실만 합니다. 하지만 솔로부대는... 자제하시는게 나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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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제작발표회때 하지원의 스타일이 어쩐지 낯이 익더군요. ...혹 라키시스 코스프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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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초반이지만 김병욱 감독의 '지붕뚫고 하이킥'은 상당히 논란의 대상입니다.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5초에 한번씩 '빵' 터지는 순도 높은 웃음에 중독된 사람들의 항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트콤이냐 드라마냐' '왜 전처럼 쉴새없이 웃기지 않느냐'는 게 이유입니다.

하지만 '지붕뚫고 하이킥'은 시청률면에서는 12-14%대의 시청률을 보이며 순조롭게 항행하고 있습니다. 일부의 거부반응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청자들이 이 새로운 시트콤의 매력에 빠져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그 핵심은 아역 서신애(신세경의 동생이므로 극중 이름은 신신애)입니다. 김병욱 감독을 잠시 뵐 기회가 있어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면도를 안 하고 나왔다고 하셔서 사진 촬영은 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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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감독이 "어떻게 보고 있느냐"고 묻길래 "(서)신애가 자전거 타다가 넘어지지만 않으면 끝까지 잘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솔직한 의견입니다). 김 감독도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바스트샷이 너무 좋아요. 그 안에서 정말 무궁무진하게 표현이 되는 아이에요."

- 어떻게 신애를 캐스팅하게 됐나.
"드라마 '고맙습니다'를 보고 그때부터 꼭 데리고 하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방송 시작 시점도 신애의 스케줄에 맞춘 셈이다(웃음)."

- 그런데 아동학대라는 지적도 있다.
"극중 이순재의 손녀 해리(진지희)가 자기 집 가정부로 들어온 신애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 때문이다. 이 장면 전후에 웃음(시트콤에서 흔히 나오는 웃음 효과음)을 깔았다는 이유로 반발이 엄청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는 거였다."

- 신애의 '울다가 먹다가' 연기에 대해서도 반발이 있었다.
(해설: 신애가 언니를 잃어버리고 서울 시내를 해메고 다니는 장면에서, 먹을 것만 보면 울음을 멈췄다가 다 먹고 나면 또 우는 장면이 있었음.)
"나이 먹은 시청자들은 그 장면을 보고 자신들도 따라서 울다가 웃다가 했다는 반응들이다. 하지만 젊은 층은 '왜 애가 배고파 우는데 거기에 웃음 효과음을 깔았나. 제작진이 제정신이냐'는 반응들을 보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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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회에 나왔던 '칡뿌리 캐먹는 신애' 모습.)

- 그런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때리는 척만 한게 아니라 실제로 때리는 걸로 찍었기 때문에 본인에게는 참 미안하지만... 시청자들은 표현하려는 뜻을 봐 줬으면 좋겠다."

- 어린 여배우들(?)과 일하는데 상당히 애로도 있겠다.
"뭐, 워낙 성격들이 좋아서 별 문제는 없다. 사실 열두살이면 다 컸다고 봐야 한다. 둘 다 굉장히 어른스럽다. 특히 신애는 이해력이 대단히 뛰어나다."

- 신애에게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나.
"물론 성장해가고... 신애의 러브 라인도 있다. 상대는... 아직 비밀이다."

누구냐고 추궁해서 그 상대를 알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아직 공개하면 안될 듯 합니다. 그런데 참... 대단히 의외의 인물이라는 것만 알아두시면 좋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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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생인 서신애는 아무래도 2007년 영화 '눈부신 날에'와 드라마 '고맙습니다'로 대중의 주목을 확 끌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고맙습니다'에서 치매 노인 신구와 함께 보여준 노-소의 조화는 그야말로 환상의 컴비네이션이었죠. 많은 시청자들에게 웃음과 눈물을 안겼습니다.

신애의 특이한 점은 더없이 귀여운 얼굴이면서도 얼굴 한 구석에 슬픔의 흔적이 보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웃는 얼굴을 보고 있어도 왠지 가슴 한 구석이 아려오는 듯한 구석이 있죠. 그동안 신애를 만나 본 연출자나 제작자들이 이 점을 캐치하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눈부신 날에'에서도 불치병, '고맙습니다'에서도 불치병.... 신애가 그동안 비극적인 역할을 주로 맡아 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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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어디선가 발견한 신애의 데뷔 시절 오디션 모습입니다. 공식 데뷔가 2004...




이번 '지붕뚫고 하이킥'에서도 신애는 부모와 헤어져 언니와 함께 남의 집 살이를 하는 역으로 등장합니다. 신애의 가장 큰 적은 엄청난 식욕. 이 풍요로운 시대에 배고픔이라는 원천적인 동기와 싸워야 하는 신애의 투쟁은 참 재미있으면서도 눈물겹더군요.

사실 '지붕뚫고 하이킥'은 21세기 드라마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보면 1970년대, 혹은 60년대가 어울리는 광경이 자주 연출됩니다. 이미 기획안에서 '식모'라는 사라진 말이 다시 등장하는 데서도 볼 수 있듯 그 시대에는 충분히 있었을법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야채는 먹기 싫어하고, 고기와 우유만 좋아하는 덕분에 늘 변비로 고생하는 이기적인 서울 아이 해리와 뭐든 신기한 것 투성이에 순수하기 짝이 없는 산골 소녀 신애의 대비는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리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가슴 먹먹해지는 신애의 눈빛은, 가능하면 이 시트콤이 신애가 행복해지는 쪽으로 끝나기를 그저 기원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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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장면은 '지붕뚫고 하이킥'이 '거침없이 하이킥'을 넘어설 수 있는 작품이라는 걸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장면을 보다가 그냥 쓰러졌습니다. 서신애의 '마트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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