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보면서 든 생각은 - 누구라도 비슷했겠지만 - 정말 한 시대가 마감하는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죽음과 비교하자면 결례일지도 모르겠지만, 한 시대를 이끌고 가던 인물의 사망 소식이라는 건 비슷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의 위업이나 생애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정리가 있었을 겁니다. 여기선 생략하고, 이 분의 죽음에 임해 '화해'를 표방하고 나선 김영삼 전 대통령에 눈길이 갔습니다. 지난해 연말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한 DJ에 대해 "정신이 이상해도 보통 이상한게 아니다"라는 말로 원색적인 비판을 했던 YS입니다. 그런 그가 DJ의 병문안을 가 "화해라고 봐도 좋다"고 말하고, 추모의 코멘트를 하는 모습은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정리해봤습니다.
제목: 라이벌
기원전 1세기. 카이사르와 로마의 1인자 자리를 다툰 최강의 라이벌은 폼페이우스였다. 3두 정치의 두 축을 이뤘던 두 사람은 결국 내전으로 정면 대결에 들어갔다. 패주하던 폼페이우스를 뒤쫓아 이집트까지 간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가 비참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가담한 자들을 모두 처단해버린다. 이를테면 라이벌에 대한 마지막 예의다.
역사를 장식한 라이벌들은 상대로 인한 위협이 사라진 순간, 때로 일생을 사귄 친구처럼 유대감을 드러내곤 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재위 초기 사촌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때문에 줄곧 왕위를 위협당했다. 엘리자베스가 결국 메리를 사형에 처하자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이를 빌미로 무적함대를 동원해 영국을 공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1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굳이 메리의 아들 제임스(뒷날의 제임스 1세)를 지목했다. 메리에 대한 정신적인 보상도 작용한 게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물론 모든 라이벌 관계가 아름답게 끝나지는 않았다. 중국 전국시대 방연(龐涓)은 최고의 전략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손빈(孫臏)의 다리를 잘랐고, 복수에 나선 손빈에게 패한 방연은 최후까지 “이렇게 해서 어린 놈이 명성을 얻는구나(終於成就了這小子的名聲)”라고 분개하며 숨을 거뒀다.
19세기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보수당의 디즈레일리와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에게도 마지막 화해란 없었다. 1881년 4월 디즈레일리가 사경을 헤맬 때 글래드스턴은 문병 한번 가지 않았다. 빅토리아 여왕의 권유에도 글래드스턴은 “가 봐야 할 말도 없다”며 거절했다. 디즈레일리가 국장을 사양하고 개인 장례식을 택한 데 대해서도 글래드스턴은 “겸손해 보이려고 쇼를 하는 것”이라고 빈정댔다.
디즈레일리가 죽은 다음달, 글래드스턴은 의회에서 송덕문을 낭독하게 돼 있었다. 마지 못해 짧은 송덕문을 읽은 글래드스턴은 “태어나서 이렇게 힘든 일은 처음”이라고 불평한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 비하면 대한민국 1인자의 자리를 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일생을 경쟁한 YS와 DJ의 마지막 화해 분위기는 훨씬 훈훈한 풍경이다. 물론 이들의 진정한 협력이 20년, 30년 전에 있었더라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지만, 구태여 이를 따지기에도 퍽 긴 세월이 흘렀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9단들의 시대'가 마무리되는 모습이다.
휘그당의 글래드스턴과 토리당의 디즈레일리는 평소에도 디즈레일리가 재난과 불행의 차이에 대해 "글래드스턴씨가 강물에 빠진다면 그건 불행이지만 누군가 그를 건져 준다면 그것은 재난"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지독한 앙숙이었습니다.
물론 빅토리아시대의 총리로서 두 사람은 누가 더 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보였고, 이 시기의 영국은 두 사람이 번갈아가며 총리직을 수행하는 가운데 세계 최강국의 자리를 굳게 지켰습니다. 누군가의 표현을 빌자면 영어를 세계 공용어의 자리에 올려 놓는 데 초석을 제공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인물들도 상대방이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서도 용서나 화해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는 건 참 의외의 일이기도 합니다. '죽은 사람에게 함부로 하면 안된다'는 한국식의 사고방식과는 참 많이 다릅니다.
아무튼 DJ와 YS의 화해(...뭐 좀 일방적이긴 합니다만)를 보고 있으면 1987년을 정점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두 사람의 사연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특히 1987년의 단일화 실패는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겼습니다. 물론 '정치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인 터라 더욱 쉽지 않았을 거라는 해석도 일리가 있습니다.
이들 두 사람을 포함해 몇몇 사람을 가리켜 흔히 '정치 9단'이라고 부릅니다. 예측불허의 한국 정계에서 50여년간 정상의 길을 걸어왔다는 것만 봐도 이런 호칭에 의아해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9단'이 아니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것이 한국 정치사의 비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9단의 시대란 마주보는 9단이 없으면 별 의미가 없을 겁니다. '9단의 한수'는 그 의미를 짐작하고 대응하는 다른 9단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DJ의 서거를 진정으로 아쉬워 할 사람은 YS라는 말이 그리 과장은 아닐 듯 합니다.
이런 9단들의 시대가 갔다는 것이 과연 발전일까요, 아니면 퇴보일까요. 그건 세월이 알려줄 것 같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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