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참 손이 근질근질했습니다. 남들이 만드는 드라마, 영화 방송 나가는 걸 보면서 아 이런 얘기는 꼭 하고 싶은데, 뭐 이런 생각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뭐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곧 방송국을 오픈할 주제에 남들 작품 갖고 왈가왈부하는 게 솔직히 불안했죠. 뚜껑 연 뒤에 "남의 것 갖고 그 난리를 치더니 참 대단한 물건들 만들어 놨다"는 비아냥이라도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12월1일 JTBC가 개국을 하고, 하나 하나 준비한 물건들을 까 보는 과정에서 희망이 생겼습니다. 드라마 '인수대비',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 교양 '깜놀, 드림프로젝트', 그리고 예능 '칸타빌레'를 보면서 콘텐트의 질에서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는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물론 이 한편을 빼놓으면 말이 안 되겠죠. 바로 '노희경표 드라마', '빠담빠담'입니다.
JTBC 월화드라마 '빠담빠담'의 원제는 '빠담빠담, 그와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입니다. 좀 길죠. 이 드라마는 16년 전 어울려 다니던 동년배 학생을 죽인 죄로 수감된 강칠(정우성)과 어찌 어찌 하다가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수의사 지나(한지민)의 이야기입니다.
아직 100% 드라마 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강칠은 사건의 진범이 아니고, 강칠의 손에 피묻은 칼을 쥐어 준 진범은 현재 검사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대법관 물망에 올라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강칠에게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있습니다.
첫회부터 아무 이유 없이 계속 마주치는 강칠과 지나 사이에는 끈끈한 인연이 숨어 있습니다. 강칠이 죽인 것으로 오해를 산 학생은 지나의 삼촌, 그러니까 형사인 지나 아버지의 나이 차이 나는 동생이었던 겁니다.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싸움질이나 하다가 누군가의 칼을 맞고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지나 아버지는 강칠을 절대 움직일 수 없는 살인범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지만 지나 어머니는 강칠이 진범이 아닐 것이란 생각에 면회를 다니며 강칠의 구명 운동을 펴고, 이 때문에 부부 사이에 틈이 생기고, 그러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숨을 거둡니다. 이때문에 지나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가고 있죠.
참 난마처럼 얽인 관계입니다.
물론 이런 식의 갈등 구조는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빠담빠담'을 특이하게 보이게 하는 것은 드라마를 풀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드라마에서는 '꿈'과 '현실'의 교차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스스로 천사라고 주장하는 국수(김범)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를 보시는 분들의 궁금증은 대략 두 가지로 압축됩니다. 하나는 국수가 진짜 천사인가, 아니면 자기가 천사라고 믿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미숙한 아이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과연 이 드라마가 실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인가, 아니면 강칠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첫번째와 두번째 이야기는 결코 무관하지 않죠. 제가 이 글의 제목에 '인셉션'을 끌어들인 것도 이 질문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 꼭 짚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제가 분명 내부자(?)이긴 하지만, 이 드라마가 앞으로 전개될 방향에 대해서는 시청자 여러분보다 별로 더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모두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절대 회사나 제작진의 의견 아닙니다.>
아주 오래 전, 흑백 단편 영화 한 편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무대는 남북전쟁기의 미국. 한 남군 포로가 북군에게 체포돼 다리 위에서 교수형을 당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목이 매달리는 순간, 줄이 끊어지고, 그 포로는 강물 속 깊이 빠집니다.
다리 위의 적군이 총을 쏘지만 포로는 요행히 총을 피해 내고, 들판을 달려 집으로 향합니다. 마침내 그리던 고향 집이 눈에 보이고, 예쁜 아내가 환히 미소지으며 포로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가 아내와 손을 맞잡는 순간,
목줄이 조여지고, 포로의 다리가 축 늘어집니다. 그러니까 고향 집과 행운의 탈주는 모두 이 포로가 목이 졸리고 숨이 끊기기 전까지, 그 짧은 순간 동안 꾼 아름다운 꿈이었던 것이죠. 어찌 보면 삼국유사의 조신지몽과 비교할 수 있는, 인생의 비애를 느끼게 하는 수작입니다.
(뭐 대략 짐작도 하실 수 있겠지만 혹시나 해서 결말은 감춰 두었습니다. 마우스로 위의 흰 부분을 긁으시면 답이 보입니다.)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저 단편 영화는 로버트 엔리코(Robert Enrico)의 1962년작 'An Occurrence at Owl Creek Bridge' 입니다.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 영화상 단편 부문을 휩쓴 유명한 작품이고, 저 결말은 두고 두고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단편 영화 치고는 24분 가량으로 좀 길지만, 한번 보실만한 수작입니다.
굳이 이 영화 얘기를 왜 꺼냈는지 이해 못할 분은 안 계시겠죠.^^
1, 2부에 걸쳐 강칠은 여러 차례에 걸쳐 석방 직전의 갈등 - 싸움 - 김교위의 갑작스런 죽음 - 교수형을 반복해서 경험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귀휴-아들과의 만남-지나의 차에 의한 교통사고 - 병원에서의 깨어남 역시 반복됩니다.
두 사건의 흐름은 정상적이라면 귀휴 - 교통사고 - 병원에서 눈뜸 - 교도소로 귀환 - 싸움 - 교수형으로 이어져야 하지만, 강칠은 교수형 이후 병원에서 눈이 뜨는 경험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똑같은 싸움 장면을 경험하면서 국수에게 "몸이 맘대로 움직이지 않아!"라고 절규합니다. 마지막 순간, 김교위에게 향하던 주먹을 간신히 멈춰 정해진 사건을 중단시킵니다.
이 과정에서 시청자들은 의아해하게 됩니다. 과연 강칠에게 일어난 사건의 정체는 무엇일까. 앞부분의 사건이 미래를 내다보게 해 준 예지몽일까? 아니면 현실일까? 현실이라면 왜 똑같은 사건이 되풀이될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쉬운 답은 그냥 그대로 '국수가 천사이기 때문'일 겁니다. 사실 천사가 나오는 드라마에서 개연성이나 실현 가능성을 따지는 건 바보짓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은, 뒷부분을 '강칠의 꿈'으로 풀어 가는 해석입니다. 강칠은 김교위를 죽인 죄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아마도 사형이 집행되기 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하는 후회를 수십번, 수천번은 했을 겁니다. 그러다 보니 '만약 그때 조금이라도, 마지막 순간에라도 몸을 멈췄다면...'하는 간절한 소망이 꿈으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해서 살아난 강칠에게는 수많은 상상들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출감하고, 출감해서 귀휴 때 만났던 그 예쁜 아가씨를 다시 만나고, 알고 보니 그 아가씨가 자신에게 계속해서 속옷을 보내 주던 그 아주머니의 딸이고.... 간절함이 현실로 보이는 것이죠.
하지만 꿈은 꿈. 언젠가 꿈은 깨게 되어 있는 법. 그래서 어느 한 순간, 강칠은 다시 깨어납니다. 그 깨는 장소가 병원 침대 위일지, 감방 안일지, 그도 저도 아닌 또 다른 장소일지는 알 수 없겠죠. 그리고 그 꿈을 깬 뒤의 결과가 해피엔딩일지 비극일지도....
만약 이렇게 진행된다면 참 슬픈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노희경 같은 대 작가가, 저 따위가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진행을 선택하지는 않겠죠?
어쨌든 이런 저런 상상을 해 볼 정도로 '빠담빠담'은 흥미로운 드라마입니다. 그리고 이런 드라마가, 아직 18회나 남아 있다는 건 꽤 즐거운 일이기도 합니다.
결국 롯데 자이언츠의 11번은 영구결번이 됐군요. 과연 이제 와서 구단이 그럴 자격이 있느냐는 주장이 팬들로부터 제기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목이 '최동원 잔혹사' 풍의 냄새를 풍기기는 합니다만, 최동원이 속해 있던 '70년대 야구'의 풍경을 바라볼 때 최동원의 혹사는 어찌 보면 거의 모든 투수들, 특히 에이스 급 투수들에게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현상이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400승 투수인 재일교포 김경홍(가네다 마사이치. 한때 김정일이란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의 투구사를 보면 50~60년대 일본 프로야구 역시 '투수 혹사'라는 면에선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매년 투구 이닝이 300이닝이 넘고 '25승20패' '24승24패' 등의 연간 기록을 보다 보면 참 어이가 없기도 합니다.
최동원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야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것을 안 세대입니다. 어찌 보면 불행한 세대일 수도 있겠죠.
고교생 최동원이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관심사였듯 연세대 에이스이자 한국 최고 투수 최동원의 졸업 후 진로는 국민적인 관심사였습니다. 물론 국내 실업야구 사정상 최동원을 데려갈 수 있을만한 팀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은행팀이 아닌 기업 팀, 즉 롯데, 한국화장품, 포철 등이나 그만한 스카우트 비용을 낼 거라는 게 기정사실이었죠. 특히 롯데는 김동엽 감독에 의한 창단 때부터 '롯데 자이언츠'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세미 프로 냄새를 강하게 풍겼습니다. 부산 지역과의 끈끈한 연고 의식으로 박영길 감독을 비롯해 경남고 출신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는 점 역시 최동원이 롯데로 갈 것이라는 예상을 짙게 했습니다.
하지만 롯데 입단도 만만찮은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 시기를 기억하는 야구팬들에게 '최윤식씨'와 '선판규씨'는 스타플레이어나 감독 못잖은 유명인이었습니다. 당연히 두 분은 최동원과 선동렬, 두 국보급 투수의 아버지들이고 그만치 열성적으로 아들을 보살핀 분들입니다.
대학 이후 최동원의 진로에 대한 입장들은 대부분 최윤식씨의 입을 통해 알려졌는데, 그 과정에서 다소 무리한 주장들이 등장하곤 했습니다. 대학 시절 구타 사건 뒤엔 "동아대로 전학시켜 달라. 맞아 가면서 연세대에서 운동을 시키지 않겠다", 대학 졸업반일 때에는 "롯데에 가지 않고 그냥 군 입대를 시키겠다", 81년 실업야구 코리안시리즈를 앞두곤 "시리즈가 끝나면 은퇴시키겠다"는 등의 말들이 최윤식씨로부터 흘러나왔습니다. 당연히 현실과는 거리가 먼 억지였고 이런 주장들은 최동원 부자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확대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일생을 둔 동갑내기 라이벌 김시진은 포철과 입단 줄다리기를 하다가 이른 군입대를 선택, 경리단 소속이 됩니다. 포철이 '거액의 스카우트 비용을 지출할 상황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체 그 '거액'은 얼마쯤이었을까요.
그렇게 해서 81년. 곡절 끝에 최동원은 "무려 3000만원의 계약금에" 아마추어 롯데자이언츠의 에이스가 됐습니다. 그해 롯데는 사실상 투수 최동원과 강만식을 스카우트하는 정도로 선수 보강을 마쳤습니다. 역시 이미 최강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경기 방식상 여러 명의 투수가 필요치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포철은 상당히 가난한 기업으로 보입니다. 물론 지금과 당시의 물가 차이가 얼마나 심한지 보여주는 지표라고 해야겠죠.^^)
당시의 각 팀 전력을 정리한 기사입니다. 초기 프로야구를 휩쓴 스타들이 당시엔 어떤 팀 소속으로 뛰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 성인야구의 특성상 경리단과 성무, 두개의 군 팀이 가장 유리한 입장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지난번 글에서 충분히 설명이 됐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81년 방식은 10개 팀이 4차례의 리그(전기 1,2차와 후기 1,2차)를 펼치는 것. 그래서 총 36게임을 치르게 됐고 롯데와 경리단이 각각 전,후기를 나눠 가져 코리언시리즈에서 맞붙었습니다.
관심이 가는 건 최동원의 등판입니다. 총 36경기 가운데 무려 30경기에 등판, 17승4패를 기록했습니다. 매일 경기를 하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지나치다 싶은데... 전기리그만 놓고 보면 더 기가 막힙니다. 총 18경기에서 최동원이 13승1패를 기록한 겁니다. 전기 1,2차 리그를 합한 롯데의 성적은 18승2패.
이런 말이 안 되는 기록이 가능했던 건 당시의 진행 방식입니다. 일단 10팀이 풀리그를 벌이면 경기수는 총 45경기. 하루 3~4경기씩 약 2주에 걸쳐 대회가 진행됩니다. 매일 한 경기씩 완투하던 최동원에겐 이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대회 끝나면 또 몇달 푹 쉬지 뭐", 이런 식). 성인야구라고는 하지만 지난번 글에서 얘기했듯 30대 선수라곤 리그 전체에 한두명 있을까 말까 한 젊은 리그에서 최동원을 막을 적수는 김시진 정도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전기 1,2차 리그를 휩쓴 롯데는 후기 리그에선 다소 부진합니다. 최동원이 지친 탓인지, 아니면 굳이 코리언시리즈를 없앨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후기 우승은 경리단에게 돌아갑니다. 그렇게 해서 5판 3선승제의 코리언시리즈가 개막된 겁니다.
이 무렵, 메이저리그의 관심이 현실로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같은해 9월, 결국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했다는 AP 통신의 보도, 그리고 계약이 "사기계약이라 무산됐다"는 최윤식씨의 발표, 이어 왜 사기계약인지에 대한 해설 기사 등등이 등장합니다.
이런 상황을 정리한 1981년 9월24일자 중앙일보 기사입니다. 좀 길지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꽤 도움이 될 것 같아 전재합니다.
금테안경을 끼고 시속 1백50km의 강속구를 뿌리는 한국야구의 간판스타 최동원(23·롯데자이언츠)이 미국 프로야구 아메리컨리그 소속인 터론토 블루 제이즈팀과 입단계약을 맺었다는 23일의 AP통신 보도는 국내 야구계를 흥분 속에 몰아넣기에 충분한 뉴스였다. 결론적으로 최동원의 캐나다 터론토에 프랜차이즈(전용구장)를 둔 블루 제이즈 입단은 현재 양측의 조건이 엇갈려 결렬상태에 있다고 최의 전권을 쥐고있는 부친 최윤식씨(52)가 23일 밝혔다. <정부차원 타결모색> 그러나 최에 대한 미련을 못버린 블루제이즈 구단은 스카우트의 관건이 되는 병역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단의 고위인사가 오는 27일 방한하는 캐나다 「트뤼도」수상 일행과 함께 와 한국정부측에 비공식으로 요청할 것으로 알려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이는 AP통신이 『블루제이즈측은 최의 병역문제를 28일 한국정부가 보류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고 보도한 기사로도 뒷받침되고 있다. <농구 전 국가대표 김명자씨가 통역> 한편 최동원의 블루 제이즈 입단계약은 지난 15일 서울 플라자호텔 18층 회의실에서 이루어졌다고 부친 최씨가 말했다. 전 국가대표 여자 농구선수인 김명자씨(36)가 스카우터들이 와 14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롯데-성무와의 경기를 보고 15일 만나자는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경기에서 최동원은 완투, 2-0으로 패했으나 스피드건으로 구속을 잰 이들은 만족을 표시했다. 김명자씨의 남편인 미국인「프랭키·위키」씨(미8군 골프클럽지배인)는 터론토에 오래 거주한 일이 있어 블루제이즈측은 이들 부부를 통역으로 내세운 것이다. 열렬한 스포츠맨인「위키」씨는 『만일 내 한 팔을 잘라 내 아들이 꿈의 무대인 메이저리그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기꺼이 이를 해내겠다』고 극언할 정도로 흥분되어 이번 일에 성의를 다해 도와주었다는 최씨의 설명이다. 15일 밤 플라자호텔에서 블루제이즈 구단의 지난25년동안 스카우트요원으로 활약한 「엘리어트·웨일」인사담당관을 비롯, 「봅·주크」감독, 그리고 「웨인·모건」스카우터 등 3명을 혼자서 만난 최씨는 계약금 20만 달러(약1억4천 만원)에 연봉 20만 달러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들은 메이저리그 규약상 신인에겐 첫해에 연봉 3만2천5백 달러(약2천2백75만원)이상을 줄 수 없으며 2년째부터 향후 4년 동안 총계 61만 달러(약4억2천7백만원)를 지급하는 조건의 계약서를 제시해왔다. <깨알같은 계약서> 최씨는 약간 미심쩍기는 했지만 깨알같은 글씨로 장장 7면에 걸친 계약서를 얼른 알 수도 없어 사인을 한 뒤 사본을 하나 얻어 돌아왔다. 그러나 최씨는 메이저리그 신인선수의 연봉 최하한선이 3만2천5백 달러라는 조항을 보고 깜짝 놀란 것이다. 계약에 따라선 이 이상 제한 없이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씨가 사기계약을 했으므로 계약서를 파기하고 안하는 경우 출국정지를 요청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당황한 이들은 계약은 무효로 하되 본사와의 관계로 계약서를 폐기할 수는 없다며 17일 떠났다. 최씨는 자기아들을 높이 평가하여 이역만리를 찾아온 손님들이어서 계약파기만 합의했다는 설명이다. 그런데 23일 느닷없이 외신으로 입단계약이 이루어졌다는 보도에 놀라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최동원은 최근 로스앤젤레스 다저즈 팀에서도 관심을 표시하고 있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되는 경우엔 이 블루제이즈와의 계약이 불씨로 남게 됐는데 최씨도 이점은 시인하고 있다. 한편 최동원은 오는 28일 병역문제가 해결되는 경우 블루제이즈 팀의 입단가능성이 남아있어 앞으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니까 요점만 말하면, 신인 연봉 상한선이라는 말을 믿고 계약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하한선이었다는 것이고, 이를 속인 데 항의해 계약무효를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블루제이스 측은 최윤식씨가 서명한 계약서를 파기하지 않았고, 향후 몇년간 기회 있을 때마다 최동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게 됩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은퇴설이 아버지 최윤식씨에 의해 제기됩니다. 이런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구단과 최동원 측 사이에는 상당한 갈등이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별 실현 가능성 없는 '은퇴'같은 말이 나온 것은 좀 아쉽다고나 할까요.
○…한국야구의 간판투수인 최동원 (23·롯데) 을 둘러싸고 화제와 잡음이 꼬리를 물고있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인 터론토 블루제이즈 입단여부로 화재를 뿌렸던 최동원이 이번에는 은퇴설이 나돌아 야구계를 아연케하고 있다. 연세대 진학과 지난해 롯데입단 때도 잦은 후문을 낳았던 최동원의 이번 은퇴설은 잡음의 극치를 이룬 느낌. 부산에 머무르고 있는 최동원의 아버지 최윤식씨(51)는『잘하면 잘하는 대로 인정해주고 보호해주어야 하는데도 조금만 잘못하면 탓하고 인기에 먹칠을 하는 현재의 국내야구풍토에서는 더 이상 야구를 시키고 싶지 않다』면서『롯데를 떠나기 위해서라도 오는 25일부터 열리는 롯데경리단의 코리언시리즈를 끝으로 은튀 시킬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해 롯데와의 심한 불화관계를 강하게 시사했다. 그러나 최씨는 『외국에 나가는 길이 있으면 내보내겠다』는 아리송한 말을 해 은퇴는 미국프로야구진출을 위한 연막으로 해석하는 야구인들이 많다. 이같은 최씨의 발언은 내년 서울에서 열리는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앞둔데다 체육특기자의 병역혜택이 발표된·직후에 일어난 것이어서 야구팬들의 기대를 저버린 약삭 빠른 태도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최동원과 함께 청주에 전지훈련중인 박영길 롯데감독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고 말하고 『더구나 코리언시리즈라는 큰 대회를 앞두고 일어난 것이어서 지극히 유감스럽다』고 불쾌한 표정이었다. 아뭏든 앞으로의 최동원의 진로가 어떻게 결말지어질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있다.
네. 진로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죠. 이렇게 뒤숭숭한 가운데 코리언시리즈가 시작됩니다. 후기리그 들어 최동원이 부진 아닌 부진을 보인 결과 롯데가 후기 우승을 경리단에 내줬다는 점에서, 혹시 최동원이 메이저리그 진출 실패에 따른 의욕 부진으로 흔들릴지 모른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건 기우였습니다.
(물론 롯데 구단이 메이저리그 진출 포기에 상응하는 다른 당근을 제시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또 이해 하반기부터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움직임이 일었던 것이 새롭게 의욕에 불을 질렀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많은 분들이 81년의 최동원-김시진 시리즈를 84년 한국시리즈의 전초전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필생의 동갑내기 라이벌과 맞붙어 6경기 전부를 등판하고 2승을 올려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니 84년 시리즈와 크게 다를 게 없습니다. 3승1무2패로 롯데가 경리단을 꺾는 데 절대적인 공헌을 한 거죠.
당시의 보도.
끈기의 롯데가 2년만에 실업야구 왕자자리에 복귀했다. 초반2연패를 기록했던 롯데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벌어진 코리언시리즈 6차전에서 7회초 9번 손상대의 천금같은 결승꼴로훔런으로 지난해 우승팀인 훈리단을 6-4로 물리치고 79년에 이어 2년만에우승을 되찾았다. 롯데는 월드시리즈에서의 로스앤젤레스다저즈가 2연패후 내리 4연승을 거두고 괘권을 안은 것처럼 초반 2연패 후. 3연승을 기록, 일대 역전승을 장식한것이다. 한편 롯데의 최동원은 최우수선수 (MVP)·최다승리투수 (17승4패) 그리고 신인투수상등 3관왕을, 이해창은 최고 수훈상을 각각 차지했다. 이날 롯데는 최동원을 6게임째 등판시켰고, 경리단은 권영호·김시진 (6회)을 계투시켜 숨가쁜 한판승부를 펼쳤다.
다만 이때 적인 경리단에 김시진과 권영호만 있었다면 84년에는 황금박쥐 김일융이라는 무시무시한 적이 하나 더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드라마틱하다고 할까요. 어쨌든 이 81년 시리즈가 '최동원의 전설'에 한 획을 그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그 당시를 사셨던 분들에게도 이 81년 시리즈는 큰 이슈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치 '실업야구' 자체가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가 아니었죠. 코리언 시리즈 기사가 신문 스포츠면의 톱도 아니고 2단 기사 정도로 처리됐으니 말입니다. 81년 한국 야구계의 가장 큰 스타는 이미 최동원이 아니라 박노준이었고, 이 해의 가장 큰 사건은 최동원의 성인야구 데뷔와 스윕이 아니라 봉황대기 결승전에서 박노준의 발목이 부러진 것이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었을 겁니다.
최동원이 우승을 했다 해도 '뭐 한국 야구는 원래 최동원인데...'하는 것이 일반 통념이었기 때문에 큰 관심이 가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오히려 최동원이 실업야구에 진출해 우승하지 못했다면 '최동원도 이제 한물 갔구나'하는 게 뉴스가 됐을 상황이었던 겁니다.
그러던 것이 드라마틱하게 바뀝니다. 1981년 10월말 "한국에도 프로야구가 생긴다"는 발표가 나자 이듬해인 82년부터 당장 리그 시작이 확정될 정도로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82년 서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릴 예정이라 83년에 개막한다면 더 좋았겠지만, 아마도 당시의 '하면 된다' 분위기에서는 어림없었을 듯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대회가 한국의 우승으로 끝났고, 선동렬이라는 또 하나의 신화적인 투수가 발굴됐다는 점에서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당시 대표팀의 면면을 소개하는 선에서 마쳐야 할 듯 합니다. 감질나시겠지만 하나 더 써야 끝을 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한야구협회는 20일 오는 9월4일부터 18일까지 서울잠실구장및 서울운동장·인천구장에서 열릴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할 국가대표선수23명을 최종확정하고 단장에 김상겸 부회장을 선임했다. 12월 선발한 국가대표상비군 28명중 그동안 국내성적과 대만전지훈련 (2월)결과를 토대로 윤학길 김정수(이상 연세대) 이상군(한양대) 김봉근(동국대) 김상기(인하대) 등 투수5명을 제외하고 포수및 내·외야수들은 그대로 선발, 오는 26일부터 영동유드호스텔에서 합동훈련에 들어가기로했다. 최종확정돤 대표선수를 보면 실업에서는 최동원 임호균 (이상한전) 김시진 장효조(이상경리단) 김재박 이해창 (이상한화) 등 11명이며 대학에서는 선동렬 박노준 김정수(이상고려대) 박영태 조성옥 김상훈 (이상동아대) 오영일 김진우(이상인하대)등 12명으로 구성, 대학과 실업, 노장과 신예가 조화를 이루고있다. 사상 처음 대회를 유치한 한국은 이번대회에서 우승을 목표로 하고있으나 힘의 야구를 구사하고있는 쿠바·미국·일본등이 도사리고 있는데다 올해 프로야구출범으로 경험있는 많은 유망선수들이 프로로 진출, 우승을 차지하는데는 다소 어두운 전망이다. 이번대표팀의 평균연령은 21.1세에 평균신장 178.2cm, 타율2할8푼으로 되어있다. 한편 어우홍대표팀 감독(한전)은 『프로로 많은 선수를 빼앗겨 경험이 부족한것이 흠이지만 노련한 실업선수들과 패기의 대학선수들이 잘만 조화된다면 쿠바·미국등과 한번 겨뤄볼만하다』면서『14일동안 11게임을 치러야하기때문에 평균연령이 22.1세로 구성된것은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대표팁명단 ▲단강=김상겸 ▲총무=김진영(인하대감독) ▲감독=어우홍 ▲코치=배성서(한양대) 김 충 (상업은)▲투수=김시진 (23 189cm) 최동원 (25·179cm) 임호균 (26·l75cm·이상 한전) 선동렬(20·183cm) 박노준(21·178cm·이상 고려대) 오영일(22·185m·인하대) 박동수(22· 174cm·동아대) ▲포수=심재원(29·178cm·한화) 김진우(25·l88cm·인하대) 한문연(22·l73cm·동아대) ▲내야수=김상훈(23·180cm) 박영태(24·180cm·이상 동아대) 이석규(24·178cm ) 정구선(25·178cm·이상경리단)한대화(21·177cm·동국대) 김재박(28·174cm·한화) 이선웅(22·173cm·인하대)▲외야수=이해창 (29·180cm·한화) 장효조 (25·174cm·경리단) 박종훈 (23·176cm·상업은) 유두열 (27·172cm·한전) 조성옥 (22·176cm·동아대) 김정수(23·177cm·고려대)
최동원에 대해 늘 나오는 얘기는 '단기전에서는 최강이었고 타자를 압도하는 기세가 일품이었지만 젊어서 너무 혹사당한 탓에 투수로서 단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환경으로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리 짧게 정리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세를 풍미한 대투수를 나름대로 조상하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야구 출범 직전인 1977~1981년의 시점으로 돌아가 봅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포츠는 고교야구였고, 성인야구에도 수많은 스타들이 있었지만 후대에까지 전설로 불릴 만한 스타는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꼽자면 최동원, 장효조, 그리고 김재박을 첫 손에 꼽을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세 선수는 각자 자기 포지션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위세를 뿜어내고 있었죠. 80년대로 접어들면서 고교야구 사상 최강의 강타자들이었던 한양대의 이만수와 고려대의 김정수가 차세대 스타의 자리를 예약하고 있던, 그리고 선동렬과 박노준이 갓 고교야구 스타로 발돋움할 시점입니다.
77년 연세대에 입학한 직후부터 최동원은 곧바로 국내 최고 투수로 공인을 받게 됩니다. 고교야구 시절 한 경기 탈삼진 20개를 기록하며 최고의 재목으로 꼽히기는 했지만, 당시 경남고의 전력은 최동원을 제외하면 큰 기대를 가질 수준이 아니었죠. 아무리 최동원이 잘 던져도 늘 이길 수 없는 팀이었습니다.
하지만 연세대는 달랐습니다. 고려대 입학 약속을 하루 아침에 뒤집고 최동원이 연세대에 입학한 77년은 바로 전력이 급상승하는 해였던 겁니다. 이미 박철순, 배경환 등 뛰어난 투수들이 있었던데다 실업야구의 강타자이자 국내 최고 포수 중 하나였던 박해종이 뒤늦게 77학번으로 대학에 입학합니다. 또 3년 선배로 '투수에서 포수까지 전 포지션을 뛸 수 있다'던 만능 선수 이광은과 그의 배재고 동기인 철완의 외야수 신언호가 있었고, 역시 강타자 김봉연도 이 해에 복학합니다. 최동원과 합께 입학한 강타자 양세종도 빼놓을 수 없죠.
(만약 최동원이 당시 고려대로 갔다면 또 어떻게 됐을까요. 김윤환 우경하 등 강타자들과 또 한팀을 만들었겠지만 연세대만큼 강한 팀이 되지는 못했을 듯 합니다. '최동원의 연세대'를 이기기 위해 고려대는 이듬해부터 김경문 박종훈(78년)은 물론 79년에는 양상문 김호근 김정수 김남수라는, 당대 고교야구의 '빅4'를 모두 잡아오는 등 필사적인 추격을 펼칩니다....만, 최동원의 벽을 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전력의 뒷받침 속에서 최동원은 최고의 에이스로 자리를 굳힙니다. 그해 대학야구 4관왕에 오른 것은 물론, 곧바로 국가대표로 선발되자마자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에서 한국이 우승을 해 버립니다. 물론 쿠바가 불참한 대회라는 것도 최동원의 행운 중 하나일 겁니다. 이 대표팀 마운드에서 최동원이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한 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그가 승승장구,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몇가지 좋은 여건이 따랐습니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대로 경남고 졸업 직후 그를 포함해 전력이 최고조에 이른 연세대에 입학한 것. 그리고 둘째는 좋은 동년배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19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회 대표팀입니다. 7명의 투수 중 3명이 실업, 4명이 대학 선수일 정도로 대학생의 비중이 높습니다. 그 이유는 아래 설명합니다.)
고교시절부터 동갑내기 최동원-김시진-김용남은 최강의 트리오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77년, 최동원이 대학에 입학한 이후 김용남은 약간 빛을 잃고, 이들보다 2년 선배인 임호균을 합해 최동원-김시진-임호균이 국가대표 마운드의 1,2,3번 투수가 됩니다. 77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 대표팀이 이 최-김-임 트리오의 데뷔 무대였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 트리오는 82년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선동렬이라는 새로운 에이스가 등장할 때까지 한국 야구의 최고 투수 자리를 내놓지 않습니다.
(78년 고교야구에서도 양상문(좋은 투수라는 것 외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지만 부산 출신에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제2의 최동원'이라고 불렸습니다^^), 이상윤, 장호연, 양일환 등 우수한 투수들이 대거 배출됐지만 이 세대 역시 최동원과 김시진을 넘어설 만한 대 투수는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들이 한국 야구의 주축으로 일찍 떠오르게 된 것은 우선 무엇보다 이들이 뛰어난 투수였기 때문이지만, 당시 실업야구의 조로현상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많은 선수들이 대학 3~4년차, 졸업후 3~4년째까지가 전성기였고 그 뒤로는 아예 은퇴를 하거나 실력이 내리막을 걸었던 것이 이 시기에는 상식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 엘리트 선수의 코스는 대략 이렇습니다. 고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면 대부분 대학에 진학했고, 졸업 후 실업팀에 스카웃됩니다. 이후 2~3년간 선수로 뛰다가(대개 야간대학원 진학 등의 편법을 쓰는 거죠), 군에 입대합니다. 당시엔 성무(공군)와 경리단(육군)이 라이벌 관계로 실업야구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제대할 시점이면 서른 전후.
대단한 엘리트 선수가 아니면 은퇴를 해 일반 직원으로 변신하거나 - 은행 팀들이 실업야구의 주축일 때에는 많은 선수들이 은행원으로 변신했습니다 - 지도자가 되는게 대략의 길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가실 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은행 팀에 입단하면 '평생직장이 보장된다'는 이유로, 대학에 스카웃될 수 있는 우수 선수들 가운데서도 고교 졸업 직후 은행으로 직행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례를 보면 더 느낌이 옵니다. 김응용 감독이 한일은행 선수에서 은퇴해 감독이 된 건 만 31세 때인 1972년입니다. 김성근 감독은 69년 일찍 은퇴하기도 했지만 실업야구 기업은행 감독이 된게 만 30세 때인 1972년이죠. 코치도 아니고 감독이 서른살 언저리였다면 한국 성인야구가 얼마나 젊은 팀이었는지 아실만 할 겁니다.
(이때문에 프로 출범 직전인 1981년, 현역 선수였던 33세의 김우열이나 32세의 윤동균은 전 실업야구 리그를 통틀어 대단히 희귀한 존재들이었습니다. 28세의 김봉연이 '대단한 노장' 대접을 받았으니 뭐 말할 것도 없죠.)
다시 77년으로 돌아가, 이런 환경이었기 때문에 19세의 최동원이 한국 야구의 기둥이 될 수 있었던 겁니다. 프로야구 출범이 선수들의 수명을 엄청나게 늘려 놓은 지금의 시선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선수들은 체계적인 몸관리가 필요 없었던 겁니다.
어차피 야구는 '서른 넘으면 그만 두는 종목'이었고, 웨이트 트레이닝은 '쓸데 없는 근육을 만들어 배팅 스피드를 줄이는', 절대 하면 안되는 운동이었죠. 당시의 투수들이 어깨가 아파도 계속 던졌고, 지도자들이 그걸 그냥 용인했던 것은 '서른 넘으면 쓸 일도 없는 어깨'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어제 던졌다가 오늘 또 던지고, 아프면 약 먹고 던지고 하는게 상식이던 시절입니다.
1978년 6월6일자 중앙일보에 실린 저 위 기사를 보면 경악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한 대회에서 42이닝, 그것도 준결승-결승은 이틀동안 연장전 포함 27이닝을 혼자 던졌다는 얘깁니다. 요즘 프로야구의 '노예'라고 불리는 투수들은 여기에 비하면 왕족이죠.
하지만 기사 어디에서도 '혹사'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아예 그런 개념이 없던 시대였던 겁니다. 최동원은 이런 70년대 야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런 투수가 1980년대 이후에 배출됐다면... 뭐 일찌감치 메이저리그에 가 있었을 지도 모를 일이군요.
아무튼 그 최동원은 바로 그 77년부터 미국 일본 프로야구의 주목을 받습니다. 오라는 데 많은 바쁘신 몸이 된 겁니다. 나중엔 미국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까지 했다가 파기를 선언, 계약위반이니 뭐니 시끄럽기도 했고 스카우트 파문에 짜증이 난 최동원이 은퇴를 선언하는 등 진통이 끊이지 않았지만, 대학 재학기간 중에는 주로 일본 프로야구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심이 쏟아졌죠. 재일교포가 구단주인 롯데 오리온즈(지바 롯데 마린스의 전신)로 가는게 아니냐는 얘기가 가장 많았습니다.
거기다 79년에는 구타에 항의한 팀 이탈 사건도 벌어졌고, 이때 세상의 반응은 '아니 어떻게 최동원 같은 스타를 때릴 수가 있느냐'는 것과, '마운드에서도 건방져 보이더니 오죽하면 선배들한테 맞았겠느냐'는 것으로 양분됐습니다. 늘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었죠.
한국 야구 만화에는 대개 주인공과 맞수인 완벽한 야구 선수가 나왔습니다. 이를테면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오혜성 못잖게 유명했던 마동탁이죠. 그런데 한국 야구에는 그런 타자가 실제로 있었습니다. 너무 완벽해서 만화같았던 타자입니다.
그 타자, 한때 재일교포 강타자 장훈에 비견되어 '작은 장훈'이라고 불렸던 장효조 삼성 2군 감독이 고인이 됐습니다. 왕년의 야구소년 눈에 불가능이 없는 타자로 여겨졌던 거인이 이렇게 빨리 전설이 되어 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리 요즘 정신이 사람 정신이 아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강타자 장효조'를 얘기할 때 프로 진출 이후를 얘기하곤 합니다. 4회의 타격왕, .331의 통산 타율. 신화가 되기에 충분한 숫자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한 천재타자가 어느 야구소년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강렬한 기억을 심어준 날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론 뭐 직접 만났다거나 하는 얘기는 아닙니다.
1978년. 서울 동대문구장(당시 이름은 서울운동장)에서 드문 볼거리 하나가 등장합니다. 한미 대학야구. 미국 NAIA 소속 대학야구 선수 15명으로 구성된 팀이 내한해 한국 대학선발팀과 경기를 가졌습니다. 요즘 기준으로 대학선발이라면 그냥 무명 선수들의 집합체 정도로 생각되겠지만, 프로가 없던 시절 대학선발팀의 위용은 대단했습니다. 당시 멤버는 이랬답니다.
사실 최동원-김시진-임호균은 당시 한국 야구의 넘버 1, 2, 3 투수들이었습니다. 김성한이 투수로 들어 있는데 놀랄 젊은(?) 야구팬들도 있겠지만 당시의 김성한은 조계현이나 이광은 등과 함께 손꼽히는 투타 겸업의 천재 선수였습니다. 프로 원년에 거둔 10승은 우연이 아니었죠.
최동원-박해종의 배터리는 당연히 국가대표 주전이었고, 박해종-김봉연-장효조 역시 국가대표에서도 클린업 트리오에 해당했습니다. 이 시절에도 실업야구가 있었지만 박해종이나 김봉연은 사실 실업야구에 먼저 진출했다가 대학으로 U턴한 경우라 나이는 일반 대학생보다 한참 위였습니다. 경험 면에서도 밀리지 않았던 거죠.
면면을 보시면 대부분 프로야구 초창기를 빛낸 스타플레이어들입니다. 아무튼 국가대표에서도 핵심을 차지하던 쟁쟁한 선수들이 대학선발의 주축을 이뤄 미국에서 온 선수들과 붙었습니다.
WBC를 거치고, 박찬호 추신수의 시대를 보면서 현재의 야구팬들은 미국 야구에 대해 별다른 공포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일본 야구만 해도 장훈, 백인천의 활약 덕분에 크게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지만 체격 면에서 압도적인 '미국 야구'는 '절대 한국인이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란 게 일반적인 생각이었죠. 아마 지금도 현저한 '한국 농구와 미국 농구' 정도의 차이, 혹은 '한국 육상과 미국 육상의 차이' 정도를 생각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아무튼 '미국 본토의 대학야구 선수들'은 어떤 수준일까 하는 궁금증 속에 대회의 막이 올랐습니다. 7월23일, 한국은 당연히 에이스 최동원을 등판시켰고, 최동원은 5회까지 1실점(비자책)으로 호투하고 타선은 4점을 뽑아 이길 듯한 기미를 보입니다. 하지만 6회 최동원은 투런 홈런을 맞아 4-3으로 쫓긴 채 마운드를 김시진에게 넘기고, 김시진이 역전 3점포를 허용하면서 5-7로 첫판을 내줍니다.
한국의 충격은 사뭇 컸습니다. 최고 투수인 최동원과 김시진, 임호균을 모두 동원해서도 미국 타선을 봉쇄하지 못했고, 타자들은 나름 분전했지만 거구의 미국 타자들에게 동대문구장은 작게만 보였습니다. 게다가 야수들의 다이빙 캐치, 외야에서 홈으로 '쏘는' 송구 등은 그때까지 한국야구에서 볼 수 없는 허슬플레이였습니다. '본토 야구는 강하다'는 느낌을 주기 충분했던 겁니다. 당연히 첫판 이후 비관론(...'론'이라봐야 동네 여론이지만)이 번졌습니다.
하지만 둘째판부터 상황이 일변했습니다. 첫날 '역시 김시진은 안돼(큰 경기에 약한 경향...ㅋ)' 소리를 듣던 김시진이 9이닝을 2실점으로 완투하고 타선이 대폭발하며 13대2, 대승으로 첫날 패배를 설욕한 것입니다. 이렇게 1대1이 된 상황, 3차전에 관심이 몰렸습니다.
여기서 장효조의 한방이 전설을 만듭니다. 1978년 7월25일, 당시만 해도 전력 사정으로 보기 쉽지 않았던 야간 경기(흔히 '나이터'라고 불렸죠) 때의 일입니다.
3차전은 한국의 승세가 초반 빛을 발했습니다. 선발 임호균은 5회까지 단 1안타로 호투했고, 타선은 박해종의 3점포를 포함해 5-0으로 앞섰습니다. 하지만 호투하던 임호균은 일순 흔들려 만루홈런을 허용해버립니다. 5-4로 쫓긴 상황. 1차전의 홈런 역전패가 팬들의 눈에 어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한국에도 찬스가 돌아왔습니다. 7회. 1사 만루에서 4번 김봉연이 타석에 섰습니다. 하지만 삼진. 그런데 해설자가 묘한 말을 합니다. "병살타보다는 삼진당한게 나아요." 1차전 막판의 역전 찬스를 병살타로 날린 김봉연에 대한 질책인지, 아니면 5번 장효조에 대한 기대인지, 요즘 같으면 해설자들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해 버린 겁니다. (사실 김봉연은 1~3차전에서 연속 홈런을 치는 좋은 컨디션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서 2사 만루, 타석에는 한국에서 가장 잘 친다는 장효조. 물론 프로 데뷔 후의 장효조를 기억하는 분들에겐 '딱총'의 이미지가 강하겠지만 당시의 장효조는 당당한 홈런타자였습니다. 프로 데뷔 시즌인 1983년에도 18개의 홈런을 쳤을 정도로, 당시의 장효조는 장/단타를 가리지 않는 타자였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프로야구가 시작된 이후, 그의 체구가 그렇게 작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5-4로 쫓긴 7회, 2사 만루, 2-3의 극적인 상황에서 장효조는 왼쪽 담장을 살짝 넘기는 만루홈런을 터뜨려버립니다. 당시 한국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밀어 친 홈런'. 9-4. 온 동네 아파트 단지에서 함성이 터져나왔습니다. 지금까지 야구를 보면서 이만큼 강렬한 임팩트를 준 홈런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 장효조는 소년에게 야구의 신이 되었습니다. 전혀 관심 없던 대학야구도 챙겨 보기 시작했죠. 대학야구에서도 장효조는 평균 4할 이상의 강타자였고, 타자 개인의 힘으로 경기를 뒤집어 놓는 카리스마를 뿜어냈습니다. 국가대표에서도 그 이상 믿을 수 있는 타자는 없었습니다.
(그런 그가 삼성의 잇단 한국시리즈 패배와 함께 '찬스에 약한 타자'로 낙인찍히게 된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아무튼 프로 진출 이후, 무시무시한 활약을 보였지만 1978년 한미대학야구 3차전에서처럼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영화같은 활약'은 다시 볼 수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물론 이 분도 완벽하지는 않았습니다. 1983년 타격왕을 차지하고도 신인왕을 박종훈 현 LG감독에게 넘겨준 것에 대해 대개 '신선하지 않다'는 이유(물론 아마 시절 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야구 스타였던 장효조에게 새삼 신인왕을 주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로 주로 설명하지만, 많은 야구인들은 '안하무인'이라는 주변의 평가도 큰 역할을 했다고도 증언합니다.
또 호타준족이었지만 수비만큼은 도저히 칭찬할 수 없었다는 것 역시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프로에서는 주로 우익수로 출전했지만 아마 시절만 해도 1루수나 지명타자 출전이 많았죠. 특히 결정적인 포구 미스가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타격에 있어서만큼은 신의 솜씨라는 것 역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한때 야구 기자였던 시절, 원로 심판들이 하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투스트라이크 이후에 포수 미트로 들어오는 공을 보면 베테랑 심판들은 공이 들어 오기 0.1초 전에 '아, 삼진이구나', 혹은 '치겠구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는 겁니다. 공의 방향, 스피드, 타자의 자세(어느 코스를 기다리는구나)를 본 상태에서의 종합적 판단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측을 어김없이 비웃는 타자가 바로 장효조였다는 거죠. '절대 칠 수 없는 코스. 헛스윙이나 루킹 삼진이다'라고 생각하는데 믿을 수 없는 각도에서 배트가 나와 커트를 시켜 버린다는 겁니다. 또 이럴 때마다 장효조 타자는 심판을 보면서 씩 웃었다고 합니다. '어때, 못 칠줄 알았지?'하는 표정으로. 이심전심인 거죠.
여기에 위 도표를 보시면 경기수에 비해 안타수가 엄청나게 많지는 않습니다. 이건 아무 공이나 치는 타자가 아니라 끝까지 기다리는 타자였다는 것이죠. 실제로 타격 1위는 통산 4번이지만 출루율 1위는 6번입니다.
1m72의 비교적 작은 체구에도 이런 경이적인 선구안, 앞에서 말한 배트 컨트롤, 거기에 '글러브 안에 들어온 공도 친다'는 배트 스피드. 그것이 '장효조의 전설'을 만든 것입니다.
그날의 신화가 생각나는 밤. 추모의 뜻을 담아 두서없이 정리해봤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P.S. 사실 옛날 기사를 찾아보기 전까지 저도 제 기억이 맞는지 반신반의했습니다. 한점차로 쫓긴 상황, 2사만루 2-3 풀카운트에서 나온 만루홈런. 그런데 정말 기억 그대로더군요. 가끔 기억이 전설을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하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고전극의 세계에 집착하는 영화 감독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셰익스피어 극의 리메이크를 시도했던 감독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죠. 특히 '햄릿'은 수십차례나 세계 각국에서 시대와 배경이 바뀐 채 영화화됐고, 영화 천황 구로자와 아키라도 '맥베스'와 '리어 왕'을 자기 식으로 만들어 낸 걸로 유명합니다.
그걸 한층 더 넘어서서, 만들어진지 2천년이 넘은 그리스 비극들이 다룬 모티브가 지금까지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건 참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삶의 형태가 변한다 해도 삶의 방식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것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인간들이 자신의 환경을 지배하고 있다는 설득력을 가진 지금이야말로 그리스 비극이 자주 다뤘던 주제들이 확연한 의미를 갖고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썼던 글입니다. 제목은 '왜 그리스 비극은 아직도 유효한가' 정도로 붙이면 좋을 듯 합니다. 물론 아실 분은 다 아시겠지만, '그을린 사랑'을 보고 나서 쓴 글입니다.
시작.
신(神)들이 마련해 놓은 운명은 인간의 상상이 미치지 못할 만큼 가혹하고 기구하다. <백년동안의 고독>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콜롬비아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스 마르케스가 시나리오를 쓴 1996년 작 <오이디푸스>(Oedipus the Mayor)라는 영화가 있다.
마약 군벌과 부패한 정부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남미 콜롬비아의 한 도시에 젊은 시장 에디포가 부임한다. 하지만 도시는 실질적인 지배자 라이오가 게릴라에게 납치당한 사건으로 혼란스럽다. 얼마 뒤 라이오는 시체로 발견되고, 에디포는 라이오의 미망인 조카스테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진다.
여기까지만 보면 영락없이 남미를 배경으로 한 텔레노벨라(텔레비전 소설)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갑자기 등장한 관 짜는 노인(장님인 데다 이름이 심지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다)이 심상찮은 대사를 읊어대면서 본색을 드러낸다.
라이오는 언젠가 자신이 아들에 의해 살해당할 거라는 꿈을 굳게 믿고 있었다. 에디포는 결국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알아차리고 만다. 아들과 정(情)을 통한 사실을 알게 된 조카스테는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에디포는 스스로 두 눈을 파낸 뒤 거리를 방황한다.
무려 2,400여 년 전 쓰여진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왜 아직도 유효한 텍스트일까? 굳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지 않아도 그리스 비극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주제는 선명하다. 신(神)들이 마련해 놓은 운명은 인간의 상상 따위는 미치지 못할 만큼 때로 가혹하고 기구하다. 만인의 추앙을 받는 영웅도, 세상을 발아래 놓을 수 있는 미녀도 그런 운명 앞에선 가랑잎 같은 존재일 뿐.
그런 주제에 감히 ‘오만’(Hubris)을 품는 건 멸망을 자초하는 짓이란 게 그리스 비극의 공통된 메시지다. 물론 마르케스의 <오이디푸스>가 던지는 메시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에디포 시장은 현실을 개혁하려는 젊은 이상주의자지만 현실은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녹록지 않다.
결국 그는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모든 가치관을 부정당하고(심지어 자신이 30년 이상 믿고 의지한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무너져 내린다. 자기 스스로 두 눈을 파내는 것은 극한의 자기 부정이다. 마르케스가 이토록 강하게 부정하는 대상은 뭘까.
서구 민주주의를 그대로 남미에 이식하려는 시도야말로 마르케스에게는 지독한 오만이다. 남미의 특수성을 부정하고 합리성과 자본주의의 논리로 남미를 ‘계도’하려는 시도는, 알지 못한 채 근친상간의 패륜을 저지른 주제에 도덕 회복을 외치는 오이디푸스만큼 헛되다는 게 이 영화의 결론이다.
한때 유럽 영화를 이끌어가던 감독들이 앞 다퉈 그리스 비극을 영상으로 옮기던 시절이 있었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메데이아>(1962), 미카엘 카코야니스 감독의 <엘렉트라>(1962)는 시대적 배경이 에우리피데스 시대 그대로였지만, 그 중에도 줄스 다신 감독의 <죽어도 좋아>(Phaedra,1962)는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 무대를 현대로 옮겨왔다.
결말 부분의 광기 어린 자동차 질주로 유명해진 바로 그 영화다.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 왕은 선박왕 타노스(랠프 발로네)로, 아들이며 후계자인 히폴리토스는 내성적인 화가 청년 알렉시스(앤서니 퍼킨스)로 바뀌었다. 현대 영화의 페드라(멜리나 메르쿠리)가 알렉시스와의 사랑 때문에 목숨을 버리는 정열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
그리스 비극을 모태로 한 영화 한 편이 최근에 국내 관객들을 충격에 몰아넣고 있다(물론 어떤 비극인지 밝히는 것은 스포일러에 해당한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캐나다 영화 <그을린 사랑>이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영화가 그 모델이 된 그리스 비극의 교훈을 뛰어넘는 성취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은 오만을 반성하고 신을 두려워할 때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용서할 때 진정한 인간 정신의 고양을 이뤄낼 수 있다는 빌뇌브 감독의 메시지는 지난 2,400년 동안 인간이 멈춰서 있지 않았음을 납득시키는 아름다운 증거다. <끝>
이 '시장 오이디푸스'는 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 '오이디푸스'라는 비디오로 출시된 적이 있습니다. 구해 보시려면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해 볼 수 있긴 합니다만,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분이 아니라면 그리 권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전 취향이신 분들은 마리아 칼라스가 메데이아 역으로 나오는 '메데이아'같은 작품을 한번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단, 대단히 지루하다는 점은 각오를 하셔야 할듯.^^)
현대극으로 의미 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죽어도 좋아' 쪽입니다. 다소 평면적인 신화/비극 속의 페드라에게 부여된 입체적인 캐릭터가 멜리나 메르쿠리라는 명배우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안소니 퍼킨스가 절벽으로 질주하며 '페드라!'를 외치는 이 영화의 엔딩을 기억하고 계시죠. 지금까지도 '불꽃같은 사련'을 얘기할 때 자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입니다. 이런 장면의 연기는 배우라면 한번쯤 도전해 보고 싶을 듯 합니다.
동영상이 좀 길긴 합니다만 약 4분30초 이후에 펼쳐지는 안소니 퍼킨스의 독백과 질주, 그리고 절규는 한번쯤 보실만 합니다.
이미 한국의 모든 교과과정에서 '혹성'이라는 말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버티고 있는 제목이 바로 '혹성탈출'입니다. planet이라는 말의 공식 한국어 번역은 '행성'입니다. 일본어의 와쿠세이(惑星)는 더 이상 한국에서 쓰지 않는 말이지만 일단 한번 붙여진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의 생명은 길기도 합니다. 뭐 일단 붙여진 제목이 워낙 유명하니 흥행을 생각하는 입장에선 어떻게든 그 제목을 유지하려는게 당연하겠죠.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아주 오래 전 시작된 '혹성탈출'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작품입니다. 1968년, 찰턴 헤스턴 주연의 영화 '혹성탈출'이 개봉된 뒤, 사람들은 원숭이 탈을 씌운 배우들의 연기에 매료됐고, 이 시리즈가 유명한 인간 스타 배우(예를 들면 찰턴 헤스턴)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일단 이 영화의 줄거리:
제약회사의 스타 연구원 윌(제임스 프랑코)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뇌세포 재생 약제의 개발에 골몰합니다. 암컷 침팬지에게 실험한 결과 놀라운 지능 향상 효과를 발휘하지만 우여곡절끝에 침팬지는 살해되고, 윌은 발견되지 않은 새끼 침팬지를 맡아 기르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성장한 아기 원숭이는 시저(앤디 서키스)라는 이름을 갖게 되고, 같은 또래의 인간 아이를 능가하는 지능을 보입니다. 하지만 서서히 시저는 자신과 인간이 왜 다른 대우를 받는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죠.
영화의 원제는 원숭이 행성의 시작(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약간 우스꽝스러운 제목입니다. 일단 제목부터 정리해 보겠습니다.
1968년작 '혹성탈출'의 원제가 Planet of the Apes. 직역하면 '원숭이의 행성'입니다. 한국 제목 '혹성탈출'이 일본어 제목에서 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꽤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본어 제목은 원작의 제목을 직역한 '원숭이의 혹성'이죠. 이 제목이 너무 밋밋하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혹성탈출'이라는 한국 제목을 붙인 걸로 보입니다.
어쨌든 '혹성 탈출'에는 네 편의 공식 속편이 있습니다.
Beneath the Planet of the Apes (1970) - 1편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 지구 지하에 원숭이의 지배를 피해 살고 있는 인류가 있습니다. 이 인류들은 겉보기엔 완벽한 미남 미녀들이지만 사실은 핵 오염으로 추악한 외모를 정교한 가면으로 감춘 것 뿐이고, 이들의 신은 지구 전체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거대한 핵무기입니다. 어쩐지 '매트릭스'에도 영향을 준 듯한 영화. '속 혹성탈출'이란 제목으로 국내에도 개봉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scape from the Planet of the Apes (1971) - 더 이상 속편을 만들 수 없게 된 줄거리상(?) 과거로 돌아갑니다. 1편에서 찰턴 헤스턴을 도와준 원숭이들이 어찌 어찌 해서 인류의 과거로 돌아가 현생 인류에게, 주위를 돌아보지 않는 무모한 과학 발달 때문에 인류가 절멸하고, 미래는 원숭이의 차지가 된다고 경고합니다. 경고에 놀란 인간들이 어떻게 하면 그 미래를 막을 수 있을까 골몰하는 이야기. 결국 지구를 지배하게 된 원숭이들은 미래에서 온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미래가 과거를 만들고 다시 과거가 미래를 만든다는 루프 스토리.
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 (1972) - 앞편에서 바로 이어집니다. 당연히 인간들의 책동(?)은 실패하고, 원숭이 부부가 낳은 아이 시저가 지구상의 원숭이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모아 인간을 상대로 봉기합니다. 당연히 원숭이의 반란은 성공하고, 지구는 원숭이 판이 됩니다. 아주 오래 전에 KBS가 여름 방학 특선인가 하는 제목으로 여기까지 세 편의 시리즈를 연속 방송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의 제목은 '행성정복'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공영방송 KBS는 시청자들의 지적으로 '혹성'이란 제목을 포기했던 거죠.
Battle for the Planet of the Apes (1973) - 지구를 차지한 원숭이들의 내전 이야기. 정권을 차지한 원숭이들 사이에 분란이 생겨 침팬지파와 고릴라파가 지구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다고 합니다. 위의 영화들은 어렴풋이 줄거리라도 기억나지만 이건 본 적이 없는 영화라...
이밖에도 '혹성탈출'을 TV 시리즈로 만든 작품, 그리고 '완결편'을 자처하는 'Back to the Planet of the Apes'라는 TV 영화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혹성 탈출' 시리즈는 이런 장대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번에 나온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은 위에서 든 'Conquest of the Planet of the Apes'에서 바로 나온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래에서 온 원숭이' 보다는 훨씬 설득력있는 '유전공학 기술의 실수로 태어난 천재 원숭이'라는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죠.
'진화의 시작'이 성공한 가장 큰 이유는 시저에 대한 설득력있는 설정입니다. 인간들에 의해 돌연변이 천재로 태어난 시저는 자신이 뛰어난 지성을 갖고 있음에도 인간들 사이에 낄 수 없다는 데 분노를 느끼는데, 영화는 관객이 그 분노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미물 원숭이'가 인간을 상대로 싸우는데 관객은 인간보다는 시저의 편에서 응원하게 되는 것이죠.
이건 어찌 보면 또 하나의 '아바타' 스토리라는 생각도 들지만 - 혹은 '아바타' 때 외계인에게 미군이 궤멸당하는데도 미국 관객들이 그걸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입각한 스토리 전개라고 할 수도 있겠죠 - 아무튼 영화 속의 시저는 매우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특히 윌과 시저가 느끼는 감정의 연대가 잘 표현되어 있어 "Caesar is home" 같은 대사는 꽤나 감동적인 울림을 자아냅니다.
그리 길지도 않고, 엄청난 액션 장면이 있지도 않지만 시저의 성장기는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과연 여기서 또 다른 시리즈가 시작되려는 것인지는 알수 없군요. 그건 관객들이 제임스 프랑코 없이 시저를 주인공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입니다.
크게 돈 들인 장면이 없어 보이고, 심지어 앞부분은 저예산 영화의 냄새(윌이 일하는 제약회사에서의 전반부 촬영 장면은 돈 들이지 않고 찍은 태가 역력합니다. 90년대 이전 한국 영화의 영상 수준이랄까...)까지 나지만 이 영화 역시 1억 달러 가까운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입니다. CG 기술의 발달로 가상 캐릭터 시저를 생동감있게 표현할 수 있게 됐지만 그 비용은 여전히 만만찮습니다.
루퍼트 와이어트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속편의 가능성을 거론했지만 여기서 더 나아간 이야기가 인간 관객들에게 얼마나 호응을 얻을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과연 원숭이 영웅이 병든 인간 사회를 정복해가는 과정이 얼마나 흥미있을까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좀 보고 싶기도 하군요.^^)
어쨌든 '진화의 시작'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습니다. 정말 앤디 서키스가 이 영화로 아카데미상을 받을 수 있을지도 궁금합니다.
대개 여름 시즌의 블록버스터들은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개봉 날짜를 잡습니다. 당연히 방학 앞부분, 즉 7월 초쯤에 개봉하는게 제일 좋겠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날짜를 앞당겨 경쟁작과 '박치기'라도 하게 되면 피해가 막심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개봉 첫주 박스 오피스 1위' 달성은 매우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국보다 훨씬 더 '기업 마인드'로 스크린수를 조절하는 한국 멀티플렉스들의 성향으로 볼 때, 미국처럼 개봉 초기에는 미미했지만 점점 더 스크린 수를 불려 나가며 롱테일 흥행작으로 우뚝 서는 경우는 더 보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8월 후반에 개봉하는 작품들은 스스로 약세를 인정한 셈이라는 시각이 있었는데, 의외로 올해는 8월 중순 개봉작들이 완성도 면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는 입소문이 났습니다. '최종병기 활'과 '블라인드'가 그렇고, 외화 중에도 '혹성탈출 2'가 평이 좋더군요.
인조반정. 광해군의 측근에 대한 토벌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어린 남이와 자인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북쪽으로 달아납니다. 아버지의 친구 김무순(이경영)에 의해 길러진 남매. 자인(문채원)은 곱게 자라 무순의 아들 서군(김무열)과 혼인을 하게 되지만, 혼인 당일날 병자호란의 발발로 청의 군대에 의해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서군과 자인은 포로로 끌려가는 몸이 됩니다.
바뀐 시점. 청의 바이러(貝勒)이며 황제의 동생인 용장 쥬신타는 전쟁을 마치고 귀환하는 길에 이상한 궁수 하나가 앞서 귀환한 조카(청의 황자)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재촉해 보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그 궁수가 놀라운 솜씨를 갖고 있으며, 자신이 한 마을에서 본 이상한 자와 동일인물이라는 확신만 굳어 갈 뿐입니다.
일단 영화를 보고 나면 왜 이 영화가 이렇게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속도감이 일단 발군입니다. 주인공들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따로 감정 신을 나열하는 식의 구태의연한 연출은 없습니다. 석양이나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주인공들이 굳이 자기의 속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시 같은 대사를 읖조리게 할 만큼 이 영화는 한가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약간의 손실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정신은 분명합니다. 그 결과,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의 탄력이 살아났습니다. 어느 부분을 짚어도 탱탱하게 튕겨나갈 듯한 박진감이 느껴집니다. 김한민 감독의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과 비교해 볼 때, 윤색에 참여했다는 하리마오 픽처스('추노'와 '7급 공무원'을 히트시킨 천성일 작가의 회사입니다)의 공헌이 꽤 커 보입니다.
아무튼 재미 요소에서 이 영화는 근 몇년 동안 개봉됐던 한국 영화 가운데 최상위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권해도 욕 먹지 않을,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주연배우들의 힘은 굳이 말할 게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쥬신타를 연기하는 류승룡의 중량감이야말로 영화의 큰 힘입니다. '고지전'의 인민군 중대장 역할이 비슷한 시기에 공개됐다는 것이 다소 불만이긴 하지만, 아무튼 '넘어야 할 막강한 적'이면서 '그 적에게도 싸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역할로 이보다 좋은 캐스팅과 연기는 찾기 힘들 듯 합니다.
박해일의 남이는 참 흥미로운 역할입니다. 만약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전혀 다른 캐릭터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장혁이 이 연기를 했다면 정말 진중한 캐릭터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박해일이었기 때문에, 극도로 비장미 넘치는 장면에서 슬랩스틱에 가까운 장면까지 캐릭터의 폭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물론 취향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역시 이 영화가 이 정도까지 큰 호응을 얻는 데 있어 박해일의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는 쪽에 표를 던지겠습니다.
도르곤 역의 박기웅을 비롯해 남이를 잡기 위해 목숨을 걸고 추격하는 니루들의 역할도 모두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더군요. 아무튼 요즘은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저 장면 하나 찍기 위해 진짜 목숨을 걸어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습니다. 특히 절벽에서 따라 뛰는 장면 같은 부분에서는 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 꽤 중량감이 있습니다. 한국인이니 당연히 광해군과 북방 외교 정책, 인조반정과 서인의 득세에 이은 외교 균형의 파괴,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역사적인 치욕에 대해서는 관객의 사전 지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도르곤이나 정황기, 바이러나 니루 같은 청나라의 군 제도에 관련된 단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쑥쑥 튀어 나오고 육량시, 애깃살 같은 군사 전문 용어(?)도 마구 등장합니다. 물론 몰라도 영화를 즐기는 데에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알고 보면 볼수록 더 재미있어 진다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입니다. (뭐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니 직접 검색해서 찾아 보시는 것도 영화를 즐기는 방법일 듯 싶습니다.)
영화 속 청의 군대가 사용하는 언어는 이제 사어 취급을 받는 만주어입니다.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복원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그런데 만주어를 복원할 정도의 공덕인데 남이와 서군은 어찌하여 이렇게 현대화된 한국어를 쓰고 있는 것인지...)
단지 하나 딴지 아닌 딴지를 걸자면, 이 영화가 가리키고 있는 '병자호란'이라는 시기와 사용되는 무기가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청의 주력이 일단 궁장기병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청의 팔기군은 이 궁장기병의 기동력으로 총포를 사용한 명군을 무력화하며 승승장구한 기록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청을 상대로 기록한 몇 안되는 전과 가운데 하나가 청 태조 누루하치의 사위라는 명장 양고리(楊古利)를 사살했다는 것인데요, 여러가지 주장이 있지만 양고리는 고창 출신 무장 박의의 조총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 가장 신빙성있게 보입니다. (물론 원두표라는 설도 있고, 무명의 병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방어 전술은 활보다는 총포를 중심으로 한 성곽 체제였고, 조선을 대표하는 병기 역시 조총으로 급격히 변해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 속 남이가 정규군 소속도 아니었고, 혼자 산속에서 무예를 익힌 인물이었으므로 활대 활의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영화를 처음 만들 당시에도 '배경이 병자호란이라면 활대 활이 아니라, 청의 활대 조선 총의 대결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곤 했습니다.
(써놓고 보니 괜한 지적질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심지어 일부 기록은 박의가 양고리를 사살한 무기가 활인 듯 묘사하고 있기도 합니다만...ㅋ 5천년 역사를 이어온 조선 명궁의 전설이 '명포수'로 바뀌어 가는 것이 이 시대였기 때문에 해 본 얘기였습니다.)
아울러 한가지만 더: 속도감을 높이는 편집을 위해 많은 것이 희생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위에도 했지만, 그래도 남이와 몇몇 동료들이 '호랑이 사냥을 위해 압록강 일대를 자주 넘나들어 주변 지리에 익숙해 있었다' 정도의 밑밥은 영화 앞 부분에 좀 깔아 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남이의 활에 써 있던 문장 해석. 전추태산 발여호미(前推泰山 發如虎尾)는 '앞은 태산처럼 무게를 두고 시위는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 쏘라'는 뜻입니다. 알고 보니 국궁 용어 중 유명한 전추태한 후악호미(後握虎尾)의 변형이더군요. 뜻은 마찬가지입니다.
'그을린 사랑'을 보러 가서 가장 놀랐던 점은 극장이 거의 꽉 차 있더라는 것입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이 지명도가 높은 것도 아니고, 유명 배우가 출연하는 것도 아니고, 각계의 호평이 쏟아진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게 대체 어떻게 이런 많은 관객을 몰고 왔나 궁금할 지경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사전정보를 수집하는 거야말로 최악의 선택이라고 늘 생각해 왔지만 워낙 온 세상이 영화 정보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라, 근 몇년 사이 이 영화만큼 사전에 아무런 지식 없이 본 작품도 없었습니다. 그저 아내가 "'그을린 사랑' 보고 싶어"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게 전부였죠.
지금이라도 다른 사람의 생각이 개입하지 않은 채 이 영화를 보고 싶은 분은 빨리 창을 닫으시기 바랍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를 보지 않고 2011년을 그냥 흘려 보낸다면 여러분은 이 해에 단 한편의 영화도 보지 않은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캐나다 퀘벡에 위치한 장 레벨씨의 공증인 사무소. 쌍둥이 남매 시몬과 잔느는 어머니 나왈의 기묘한 유언장을 접하고 당황합니다. 어머니는 남매에게 두 가지를 각각 부탁합니다. 잔느에게는 '너희의 아버지를 찾아 이 편지를 전하라', 시몬에게는 '너의 형을 찾아 이 편지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진작에 죽었다고 알고 있고, 형이 있다는 말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남매는 일순 반발합니다. 하지만 유언을 따르지 않겠다고 버티는 시몬과는 달리 어머니에게 여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낀 잔느는 어머니의 과거를 찾기 위해 나왈의 고국인 '아랍의 어느 나라'로 향합니다.
끝까지 나왈이 태어나 자란 '이 나라'가 어디인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인종 청소와 관련된 내전이 거론되는 탓에 구 유고 연방 지역의 어딘가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보고 있으면 레반트 지역의 어느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화의 주요 촬영지는 요르단. 하지만 기독교 민병대와 PLO가 개입된 내전으로 국토가 폐허가 될 정도의 심각한 혼란을 겪은 나라라면 레바논이 모델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원작이 된 연극의 저자도 레바논 출신이라는군요.
(다만 이 시기 중동 지역에서 펼쳐진 종교분쟁의 아수라장을 얘기할 때 책임을 피하기 힘든 이스라엘과 미국 관련 내용은 이 영화에서 아예 거론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런 신중함이 이 영화를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려놓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원리주의를 고집하는 분들에게는 이런 요소가 비판을 부르는 부분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영화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10대 후반쯤이었을 나왈은 '이 나라'의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 팔레스타인 난민 청년(당연히 무슬림입니다)과 해서는 안될 사랑에 빠지면서 역사의 격동 속으로 몸을 던집니다. 영화의 전반부를 지배하는 것은 손에 묻은 피를 새로운 적의 피로 씻는 복수극의 정서입니다. 온갖 참극을 직접 몸으로 겪은 나왈 역시 스스로 복수의 화신이 되기를 결심합니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이런 격렬한 복수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용서와 평화의 메시지로 전환된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을 한 여인의 비극을 통해 보여주며 관객을 설득하는 빌뇌브 감독의 스토리텔링은 가히 경지에 이르렀다 할만 합니다.
빌뇌브 감독이 모성애에 기반한 이해와 용서를 웅변처럼 외치고 있는 이면에서 또 한가지 강조하고 있는 것은 기록에 대한 애정입니다. 대부분의 인류 역사가 기록자의 시각에 따라 왜곡될 여지가 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반면, 숫자로 표현되는 기록은 묵묵히 진실을 대변해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죠.
물론 기록 자체도 진실을 그대로 기록하는 것인지, 그리고 나중에 해석하는 사람에 의해 어떤 기록이 채택되는지에 의해 주관을 반영할 가능성이 있지만 화려한 수사로 서술된 '말의 역사'에 비하면 도표와 숫자는 훨씬 더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빌뇌브 감독의 입장은 선명합니다. '기록하라'. 당장 의미가 부여되지 않아도 제대로 된 기록은 언젠가 진실을 알려줄 수 있을 거라는 얘기죠. 뒷날 기록에 의한 진실 규명이 이뤄진 뒤에도 용서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순진한 것이 아닐까(프랑스계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고전적인 가르침대로 덮어 둘 것은 그냥 덮어 두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만, 아무튼 '그을린 사랑'을 보고 나면 빌뇌브 감독의 이런 주장에 대략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너무나 강력한 서사가 지배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에 대해 뭐라 평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왈 역을 맡은 루브나 아자젤은 1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에 이르는 한 여자의 반생을 기가 막히기 표현해 냅니다. 거대한 역사 속에서 글자 그대로 '망가져'가는 개인의 삶을 묵묵히 표현해내는 연기는 보톡스와 친한 중년 여배우들에게선 절대 기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절제와 균형이 빛을 발하는 연기와 연출입니다.
사실 '그을린 사랑'의 가장 큰 강점은 빌뇌브 감독의 메시지보다는 이야기를 배치하는 교묘한 솜씨입니다. 특히 충격적인 결말 이후에도 영화의 에너지가 전혀 사라지지 않게 이야기를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아무리 칭찬해도 진정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영화의 '반전'을 너무 기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반전에 신경 쓰다 보면 진정 중요한 메시지를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빌뇌브 감독은 이 부분에서 반전을 감추기 위해 살짝 영화적인 반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안 속겠다고 버티면 버틸수록 영화의 감동은 사라진다는 사실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은 아무튼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 역시 같은 요령으로 가려 둡니다. 영화를 이미 보신 분만 마우스로 긁어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 안 보신 분들은 끝까지 읽어보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 바로, 표 사러 나가세요.
전체적인 영화의 얼개는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을 이오카스테의 시선에서 재해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굳이 니야드를 나중에 알아보기 위해 표시하는 부위가 발 뒷굼치라는 점('오이디푸스'는 '부은 발'이란 뜻입니다)은 관객을 위한 힌트라고 봐야 할까요.
물론 니야드의 정체를 가리기 위해 빌뇌브 감독은 지나치게 나이 든 배우를 기용해 자신의 의도를 가립니다. 나왈이 크파르 리야트에 수감되어 있을 때 니야드는 만 스무살을 넘기 힘들죠. 하지만 그때 니야드의 얼굴을 보고 스무살 안팎의 청년이라고 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듯 합니다. 일종의 반칙인데, 애교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P.S. 영화에는 두 가지 형태로 지식인의 역할을 표현합니다. 한 사람은 다레쉬에 갔을 때 잔느가 처음 만나는 수학 교수입니다.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건,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는 인물이죠. 잔느가 "빌어먹을 코헨(이 교수를 소개시켜 준 자신의 은사를 말합니다)"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살짝 중의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코헨이라는 대표적인 유태인 이름을 이용해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역사적 비극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는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것으로 들리기도 합니다.(네. 과잉 해석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가장 중요한 사람, 바로 나왈의 고용주였던 공증인 장 레벨입니다. 레벨이 병상에 누운 나왈의 구술에 따라 편지를 대필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주 쉽게 남매에게 모든 사실을 얘기해 줄 수도 있었을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남매가 어머니의 유언을 직접 몸으로 수행하고 어머니의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합니다.
물론 편지는 죽기 전에 써 놓은 것일 수도 있고, 레벨도 전모를 알고 있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끝까지 '기록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진실을 파헤치는 데 도움을 주는 레벨의 역할을 생각하면, '기록자'에 대한 빌뇌브 감독의 애정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습니다.
P.S.2. 원제 INCENDIES는 '전쟁의 참화', '불에 그을린 것'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는군요. 거기에 비하면 '그을린 사랑'은 너무 순한 제목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나쁜 제목도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감독 장훈('영화는 영화다', '의형제'), 시나리오 박상연('공동경비구역 JSA', 드라마 '선덕여왕 공동집필)이라는 브랜드만으로도 '고지전'은 관심을 가질만한 영화입니다. 이런 한국 영상계의 에이스들이 함께 만든 작품이라면 굳이 배우 요소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일단은 보고 얘기해야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영화는 한 마디로 요약해 훌륭합니다. 후반 약 30분은 다소 무리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만치 제작진이 관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 났다는 선의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놓고 감히 말하자면, '태극기 휘날리며'류의 감상주의에 대한 압도적 승리라고 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 영화가 가져온 가장 큰 수확은 고수라는 새 배우의 발굴입니다. 네. 1998년 만 20세때부터 활동한 바로 그 고수 말입니다.
1953년 1월, 지리한 휴전협상을 바라보던 방첩대 소속 강은표 중위(신하균)는 사소한 시비 때문에 동부전선의 격전장 애록고지로 전출되게 됩니다. 하지만 정작 전출 이유는 애록고지를 둘러싼 전투의 핵심인 악어중대에서 뭔가 인민군과 내통한 흔적을 수사하라는 것입니다. 그 현장에서 강은표는 전쟁 발발 직후 인민군에게 포로로 끌려갔던 친구 김수혁 중위(고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강은표는 방첩대에서는 알 수 없었던 전쟁의 진실을 하나 하나 알아차립니다.
1950년 6월25일 발발한 이 전쟁의 첫 8개월은 엄청난 규모의 역전과 재역전이 펼쳐집니다. 개전 한달만에 낙동강에 고립됐던 한국과 UN군은 그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10월1일(국군의 날)에는 북진을 시작합니다. 12월, 한반도의 북쪽 끝까지 국군의 진격이 이뤄지지만 중공군의 투입과 맥아더의 퇴진, 1.4후퇴로 다시 전선은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내려오죠. 이 1951년 1월 이후 전선은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한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지루한 휴전 국면이 이어집니다.
하지만 이 휴전 국면은 그야말로 누가 땅 한뼘을 더 차지하느냐의 싸움이었고, 지휘관과 국정 지도자들이 지도상의 땅 1cm, 아니 1mm를 놓고 책상 위에서 설전을 벌이는 동안 휴전선 일대의 고지들은 시체로 산을 쌓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대살육전의 핵심을 지목한 것이 바로 영화 '고지전'입니다.
물론 영화에 나오는 애록(Aero.K)이라는 고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지금도 동부/중부전선 어디를 가나 이 이야기의 무대가 될만한 고지들이 널려 있습니다. 유명한 백마고지를 비롯해 펀치볼, 피의 능선, 베티고지 등 수많은 고지들이 바로 그 '지도 위의 1cm'를 놓고 수천 수만명의 젊은 목숨을 앗아간 곳들입니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영화 '고지전'은 '한 고지를 사이에 두고 몇 개월, 몇년씩 마주 보고 싸워야 하는 적들 사이의 묘한 관계'에 주목합니다. 그렇게 매번 같은 고지를 놓고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전투를 벌이다 보면 서로 얼굴도 알아볼 만 합니다. 더구나 같은 언어로 대화도 통하는 동족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흥미로운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노련한 제작진은 이 '고지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성공적으로 전달합니다. 어떤 때는 친구처럼 친근하게 굴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함께 청승맞은 노래를 합창하며 눈물을 닦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로 먹을 것을 나눠 먹기도 하지만 어느 한 순간, 서로 목숨을 노리며 눈을 부라리는 관계는 지금도 변한 게 없습니다. 서로 이름까지 알 사이지만 돌아서서 "그 자식, 어제 제가 죽였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관계.
평양에서 펼쳐지는 남한 가수의 공연에 박수를 보내는 손과, 연평도에 포탄을 퍼붓는 손이 다른 손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지도 반대쪽에서 볼 때에는 이쪽도 마찬가지로 보인다는 것. 1953년 동부전선에서 펼쳐지던 웃지 못할 희비극이 지금도 하나 달라진 게 없다는 설득력 있는 설명이야말로 영화 '고지전'의 가장 큰 가치가 아닐까 합니다.
다만 이런 '설득하고자 하는 의지'가 때로 넘쳐난 것이 '고지전'의 단점이라면 단점입니다. 혹자는 이런 요소를 "한국 전쟁영화는 역시 죽기 전에 너무 말이 많아"라고 한마디로 치부해 버리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건조하게, 조금 더 냉정한 시선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영화였으면 하는 느낌입니다. 이미 제작진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정서'는 후반부의 '전선야곡' 합창으로 충분히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더 감정에 어필해야 하고, 얼마나 더 냉정한 시선을 유지해야 하느냐에 따라 수천가지 입장이 나뉠수 있습니다. 아무튼 '고지전'은 지금까지 나온 대략의 한국전쟁 영화들에 비해 감정의 분출을 가능한 한 억제한 영화라는 데에는 많은 분들이 동의하실 겁니다. 이 정도만 해도 그동안 쏟아진 울고 짜고 하는 감상주의에 비해선 대단히 큰 발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상주의를 배제하는 것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법이란 얘기가 아니라, 감상주의 일변도의 신파 노선을 벗어나서도 이렇게 큰 울림이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게 큰 성과라는 뜻입니다.)
연출과 대본의 훌륭함을 넘어 이 영화를 진정 살려내는 건 온갖 전력을 갖고 전쟁에서 하나로 뭉쳐진 악어중대원들의 열연입니다. "정말 형이라고 부를 거지요?"라고 궁시렁대는 류승수, 믿기 어려운 광복군 전력을 신물나게 외우는 고창석, 허풍쟁이 신임 중대장 조진웅, '전선야곡'을 구성지게 불러대는 이다윗 등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화려한 조연의 향연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이제훈과 고수가 있습니다. (신하균은 사실 연출 의도를 살리면 살릴 수록 관객에게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죠. 배우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일 겁니다.)
'파수꾼'에서 곱상하면서도 잔혹한 1진의 면모를 보여준 이제훈은 첫 등장하는 장면, 첫 대사인 "무례하네, 상관한테" 이 한마디로 절대 지워지지 않는 존재감을 관객에게 각인시킵니다. 원래 그러라고 있는 대사와 상황이겠지만, 커리어가 길지 않은 배우가 자신이 '따 먹어야' 할 장면을 이렇게 제대로 '따 먹는걸' 보면 제작진도 신이 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목소리가 다소 가녀린 면이 있지만 앞으로의 대성이 기대됩니다.
고수의 성공은 보면 볼수록 놀라운 데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고수는 어떤 배우였을까요. 데뷔 후 줄곧 따라다녔던 '사슴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모성애를 자극하는 청년'의 이미지에서 고수는 얼마나 벗어나 있었을까요. 솔직히 말해 이 작품 전까지 '그리 멀리 달아나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저런 작품에서 고수가 냉혈한의 이미지를 연기하곤 했지만 그 속에는 항상 상처받은 소년이 있었고, 그 모든 캐릭터는 고수가 본래 갖고 있는 요소, 즉 수려한 용모 속에 가려져왔다고 보는게 냉정한 평가일 겁니다.
하지만 '고지전'의 고수를 보면 여러 모로 엄청난 발전이 느껴집니다. 고수의 작품 중 처음으로 고수 아닌 김수혁이 화면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경 쓴 나약한 청년으로 전장에 투입된 김수혁은 인민군의 포로가 됐다가 곡절 끝에 탈출해서, 2년 사이 졸병에서 장교로 진급해 있는 인물입니다.
누구보다 생사의 기로를 여러번 넘나들었고, 승리와 패배, 명령과 복종이라는 간단한 논리에도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된 인물이죠. 특히 '살고 죽는 문제가 1초의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세계에 단련된 남자'만이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시니컬한 웃음은 정말 일품이라고 칭찬할 만 합니다. 드디어 '사슴의 외모'와 '짐승의 내면'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완성됐다는 신호인 것이죠.
올 연말과 내년 초 사이에 고수가 이 작품으로 트로피를 몇개나 모을 지 궁금합니다. 영화 '고지전'과 고수가 트로피 갯수로 경쟁을 벌일 지도 모르겠군요.^^
P.S. '잘가라' 신에서 영화가 끝날 수 있었다면 그나마 행복한 결말이었을 것이고, '전선야곡' 합창과 '돌격'에서 끝났다면 냉정한 선택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뒷부분이 과연 필요했나 하는 것은 생각해 볼만한 상황이지만... 이렇게 힘들고 긴 작업을 마친 제작진으로서는 더 선명한 결말을 원했을 수도 있겠죠.
아무튼... 영화를 보고 난 제1감은 '영화 내용도 전쟁이지만 정말 찍는게 더 전쟁이었겠구나'하는 생각. 스태프며 배우들, 지긋지긋 했겠습니다. 고생에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사실 닭이란 동물은 대개 음식으로 대하게 됩니다. 개 안 먹는 나라, 돼지 안 먹는 나라, 소 안 먹는 나라는 있어도 닭 안 먹는 나라(혹은 문화, 종교, 학칙...)이라는게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기르기 쉽고, 알도 쑥쑥 낳아 주고, 죽으면 고기와 국물을 주고, 좀 따갑긴 하지만 털로는 베게며 이불도 만들어 주는 아주 훌륭한 동물입니다.
그런 유틸리티 애니멀인 반면 대중적인 인기는 크게 떨어집니다. 대개는 호랑이나 사자, 독수리 같은 뽀대 나는 동물들이 인기 앞 순위를 차지하기 마련이고(그런 면에서 프랑스는 대단히 예외적인 나라...), 이런 경향은 한화 이글스를 비하하는 호칭인 칰스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저 역시 닭이란 동물에 별 애정이나 관심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심지어 남들이 다 재미있었다는 '치킨 런'조차도 굉장히 지루하게 봤습니다. 그런데 '마당을 나온 암탉'은 좀 다른 영화더군요.
이 국산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양계장의 암탉 '잎싹'. 늘 먹고 알 낳는 것이 일상인 수많은 암탉들 가운데서 잎싹은 문틈으로 보이는 양지바른 마당을 동경합니다. 하지만 어느날, 마침내 마당으로 나가게 되지만 그 마당은 잎싹이 바라던 살만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야생의 세계로 진출한 잎싹은 남성미 넘치는 야생 청둥오리 '나그네'를 보고 연정을 품게 되는데, 종이 다를 뿐만 아니라 나그네의 옆에는 우아한 암컷 오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악역인 족제비가 나그네의 둥지를 덮치고 잎싹은 그들의 알을 대신 품어 새끼 오리가 태어나게 합니다.
알에서 깬 조류는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여긴다는 자연의 철칙대로 잎싹을 엄마로 여기는 병아리. 이 병아리에게 '초록'이란 이름을 붙인 잎싹은 아기를 데리고 바닷가 늪으로 갑니다.
살짝 코믹한 외양의 잎싹은 지성보다는 행동력이 지나치게 앞서는 타입의 여성입니다. 왜 사람에게 가축들이 순종해야 하는지, 마당의 가금류들 사이에는 왜 서열이 있는지, 자연 상태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미 가축이 된지 오랜 닭은 왜 물가에 가면 힘들어지는지 따위의 상식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민폐 캐릭터의 모든 요소를 갖춘 잎싹. 하지만 유일한 특징은 같은 동물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는 능력입니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그 존재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한다는 뜻이죠. 그 전에는 그냥 '오리 1', 혹은 '파수꾼'이던 오리는 잎싹에 의해 '나그네'란 이름으로 기억되죠. 초록이도, 달수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그런 민폐형 캐릭터 잎싹이가 펼치는 예상 밖의 결말은 정말 충격적이기도 합니다.
뭔가 이 카리스마 넘치는 오리에게서 위장취업한 운동권 대학생류의 느낌을 받게 되는 건 아무래도 제가 80년대 세대이기 때문일 듯 합니다. 아무튼 이 최민식의 목소리가 잘 어울리는 수컷 오리는.... 보기만큼 제몫을 다 하지는 못합니다.
뭐 어차피 주인공도 아닌데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도 미스테리로 남는 건 옆에 있던 암컷 오리의 정체입니다. 대사를 주지 않은 것은 연기력이 떨어지기 때문인지, 제작비 절감 차원의 선택인지 모르겠지만 행색으로 보아 집오리 종류인 듯한 이 암컷 오리는 대체 어쩌다 야생으로 나오게 됐던 것일까요.
생각해보면이 암컷 오리야말로 멜로드라마 주인공으로 제격입니다만...(묵념)
유승호가 목소리 연기를 맡은 초록이는 딱 유승호 같은 캐릭터입니다. 적당히 귀엽고 적당히 반항적인데 능력은 초인적..아니 초압적입니다. 원래 오리는 그렇게 빨리 자라나요? 1년도 안 되어 다 자란 수컷 오리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이 '마당을 나온 암탉' 최고의 스타 캐릭터는 수달 달수입니다. 이름이 왠지 오달수를 캐스팅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무리 봐도 1/3 이상이 애드립인듯한 박철민의 연기는 불꽃을 튀깁니다.
생각해보면 주요 캐릭터들 중 상당수가 죽고 헤어지는 가운데서도 이 영화가 밝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는 건 누가 뭐래도 박철민의 공헌이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물론 이 애니메이션을 오래 기억나게 할 건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아무래도 영상일 듯 합니다.
모든 장면이 이 장면처럼 잔뜩 공이 들어갔다면 영화가 버틸 수 없었겠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아 이건 우리나라의 산야고 우리나라의 늪지대구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게 하는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특히 잎 진 겨울 산야와 멀리 보이는 하늘을 배경으로 오리들이 날아가는 장면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우리 자연'을 그리는 데 남달리 공이 들어간 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성장에 대한 우화로 여겨졌던 이 작품의 예기치 못한 결말은 원작을 안 보신 분(저를 포함해서)들에게 참으로 충격적일 것입니다.
이 작품의 원작이 동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세상이 분명한 선과 악으로 나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방법도 참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꼭 이런 결말을 내려야 했는가 하는 의문도 듭니다. 어쨌든 세상 만물에는 모두 특유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자연에는 이래저래 순환하는 법칙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불변의 진리. 굳이 노자의 천지불인(天地不仁)을 거론하는 건 오히려 촌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문득 잎싹의 선택은 예전에 한번 거론한 적이 있었던 앤서니 퀸 주연의 1960년작 '이누크(The Savage Innocents)'에서 장모 할머니가 내렸던 선택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대략 이렇습니다. 다만 영화를 안 보신 분들에게는 스포일러 역할을 할 수도 있으니 블라인드 처리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아래 흰 부분을 마우스로 긁어 보세요.^^)
워낙 식량 생산이 적은 에스키모들은 노령이 되어 더 이상 가족을 위한 노동에 종사하지 못하게 되면 일종의 자발적 고려장을 요구하게 됩니다. 북극곰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버려져 곰의 먹이가 되는 거죠.
이 영화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곰을 바라보며 할머니는 생각합니다. "곰이 나를 잡아 먹고 살이 쪄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이누크가 곰을 사냥하겠지. 그럼 이누크와 내 딸, 그리고 아기가 곰을 먹고, 나는 가족에게 돌아가는거지." 이것이 영화 '이누크'가 보여주는 에스키모의 독특한 자연관입니다. '마당을 나선 암탉'의 결말과 어쩐지 일맥상통하는 느낌이죠.
아무튼 어린이들이 이 결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참 궁금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똑똑한 어린이들은 어른들보다 쉽게 그 정수를 이해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입니다. 아무튼 비오는 여름철, 한번 보실만한 영화임은 분명합니다. 절대 '애들 보는 영화'가 아닙니다.
중간 중간 여러번 실망하기도 하고, 책은 애저녁에 따라잡기를 포기한지 오래지만, 생각해보면 지난 10년 동안 그래도 꼬박꼬박 한편도 빼놓지 않고 영화를 따라 본 전력이 있고 보면, 그 긴 10년 세월이 마무리된다는데 하필 또 그 완결편을 외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나서 극장을 찾으려 하는데 이놈의 처지란 천상 평일은 분주한 월급의 노예다 보니 어차피 시간은 주말이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대낮에 상영관을 잡기란 하늘의 별따기라는 사실도 알게 되고, 그래서 밤도 한참을 지나 거진 자정이 다 되어서야 극장을 찾게 되었는데 이건 또 하필 3D 아닌 2D 상영관이었다는 사실을 극장 들어가서야 알아차리고, 그렇게 해서 '해리 포터' 시리즈 중 유일한 3D 작품을 2D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그냥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긴 했는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늘 '하리 포타아아아~~'하고 발음하는 코 없는 아저씨도 그립고, 점점 하관이 커져 가는 래드클리프 군도 왠지 이게 마지막이구나 하니까 서글프고, 세 주인공 가운데 유일하게 성장의 잔인한 손길을 벗어난 엠마 '허마이오니' 왓슨 양은 뭐 물론 금세 다른 작품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이 시리즈에서는 마지막 보는 모습이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어쩐지 안타까운 마음이 새록새록....
(죄송합니다. 갑자기 박상륭 선생이 생각나서 잠시 시도해 봤습니다. 뭐 대단한 능력이 필요한 작업은 아니었던 것 같군요. 시간만 있다면 운율도 맞출 수 있을 듯 합니다.^^)
2001년 시작한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지막 편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이하 '8편')'는 소설의 7번째 시리즈에서 영화화된 두번째 영화입니다. 그러니까 2011년의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해리 포터' 시리즈는 7부에 걸친 소설과 8편의 영화로 마무리되는 것이죠. 롤링 여사가 사 둔 부동산이 갑자기 지진으로 무너지지 않는 한, '해리 포터'의 새 시리즈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의 귀염둥이 주인공들이 다른 작가에게 놀아나게 내버려 둘 것 같지도 않으니 아쉬움이 넘쳐 나시는 분들도 더 이상의 속편은 '없다'고 마음을 비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설 시리즈로 말하자면 저는 4부 이후 소설은 포기하고 영화로 스토리를 간신히 따라잡고 있는 불량 독자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나오는 '대체 스토리가 왜 이래?'라는 의문에 대해 혹시 원작에 답이 있다면, "야 이 원작도 안 읽어보고 무식하게~"라고 성토하시는 대신 친절하게 '원작에는 이러이러하게 나와요'라고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무튼 줄거리 요약. 6편 '혼혈왕자' 이후 극에 달한 음침한 분위기는 8편까지 주욱 이어집니다. 볼드모트는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 가고, 스네이프가 교장이 된 호그와트는 디맨터들이 하늘에 둥둥 떠 있고 아이들은 제대로 된 침실도 없이 거의 건물 안 노숙자들처럼 피폐해 가는(아니 대체 왜? 정원외 합격자를 너무 많이 받은?) 환경입니다.
우리의 하리 포타 군은 친절한 피해자 볼드모트의 마음을 스팟 스팟 읽어 또 하나의 호크룩스(볼드모트의 영혼 조각이 봉인되어 있는 성물)가 호그와트에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위험천만한 호그와트에 몰래 침투합니다. 한마디로 영화 마지막 순간까지는 아무도 건드릴 수 없다는 주인공의 권능을 함부로 사용한 만용이죠.
어쨌든 포타군은 그 호크룩스가 마지막 호크룩스라고 생각하는데 알고 보면 또 하나의 호크룩스가 늘 볼드모트의 곁에 붙어 있고, 볼드모트 외의 다른 사람은 파괴할 수 없는 가장 핵심적인 호크룩스가 또 있습니다. 원작을 보신 분들이 천지인데 뭐 이게 스포일러일까 싶지만, 아무튼 호크룩스가 파괴될 때마다 조금씩 약화된 볼드모트는 마침내 하리 포타 군과 맞대결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아무튼 원작은 점점 더 길어지는데 영화의 길이는 한정되어 있는 탓에 5, 6 편으로 갈수록 영화만 보는 관객들의 불만은 점점 더 커지고, 그렇다고 매번 각 시리즈를 두 편의 영화로 쪼개자니 안 그래도 점점 노년으로 향해 가고 있는 래드클리프군이 머리가 벗겨지지 말라는 법도 없어 눈물을 머금고 강행군을 해야 했던 제작진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자를 건 과감하게 자르고, 키울 건 키워서 영화만 보는 관객들을 악착같이 끌고 간 데이비드 예이츠 감독의 역량에는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롤링 여사도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시리즈가 계속 진행중인데 영화판도 나란히 따라가고 있는 만큼 다니엘 래드클리프라는 쑥쑥 자라고 있는 배우에게 줄거리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상당한 고충이었을 듯 합니다. 지난번에도 몇몇 분들이, 연재를 시작할 때 롤링은 이미 마지막 편의 줄거리를 다 생각해 뒀다는 둥, 시리즈 7편을 보면 앞에서부터 얼마나 정교하게 그 얼개가 짜여져 있었는지 알 수 있다는 둥 하는 얘기를 하셨지만 이런 분들은 글을 써 본 적이 없는 분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연재를 시작할 때 10년 뒤에 나올 수천 페이지 뒤의 내용을 다 고려하고 글을 썼다면 롤링은 시간여행자이거나 신의 경지일 수밖에 없겠죠. 이건 J.J 에이브럼스가 '로스트'를 시작할 때 마지막 시즌 내용을 다 고려하고 있었다는 거나 마찬가지 얘깁니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해 놓고 대략 끝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대략의 구상은 있었겠지만,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척척 아귀가 맞는 듯 한 '증거'로 보이는 것들은 유능한 작가라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사실 좋은 작가들일수록 뒤에 가서 어떻게든 소용에 닿게 하기 위해서 잘 보이지 않는 각종 설정들을 초반에 '마구' 던져 놓는 경향이 있죠.)
어쨌든 긴 긴 스토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으로 이번 8편은 손색 없는 수작입니다. 뭐 '반지의 제왕'에 꽂혀 있는 분들이라면 이 정도의 스펙타클로는 '애개' 하실 수도 있겠지만 공포정치의 무대가 된 호그와트의 시각적 형상화(나이 먹은 사람으로서 1980년대의 한국 대학가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나, 2차대전 초기 히틀러의 악받친 공습에 맞서 싸워야 했던 영국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호그와트 공방전의 모습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뭐 이 다음 내용은 살짝 스포일러가 됩니다. 뭐 책에는 당연히 다 써 있는 내용이고, 여기까지 읽어 보신 분들이라면 영화 줄거리가 어떻든 일단 보러 가실 분들이니 별로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튼 저는 책임 못 집니다.
롤링 여사의 성향으로 보아 아마도 결말에서 하리 포타 군이 성인이 된 뒤 소시민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건 대략 많은 분들이 예상하셨을 겁니다(아, 물론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말이죠). 그런데 19년 뒤라고 해 봐야 30대 후반인데 그렇게까지 파삭 늙은 모습들이라니...ㅜㅜ
언젠가는 큰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됐던 네빌 롱바텀 군이나 맥고나걸 교수가 후반 들어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 데 대한 보상도 마지막회에 충분히 등장합니다. 마지막으로 비련의 주인공 스네이프 교수의 허무한 죽음에는 참 공분을 느끼게 됩니다. 아니 그렇게 갖은 궂은 일을 다 시키고 그렇게 비참하게 죽게 한단 말입니까.
(이런 데서도 볼 수 있지만 역시 롤링 여사는 인간적으로 본받을만 하거나 함께 어울려서 즐거운 성품의 소유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
지금도 가끔씩 많은 사람들(특히 어르신들)이 "우리도 해리 포터에 맞먹는 오리지날 스토리를 내놓고 그로 인한 엄청난 파생 이익을 따내 문화 강국이 되자"는 말씀을 하시곤 하는데, 그런 분들일수록 '돈 벌 수 있는 스토리=해리 포터와 비슷한 이야기'로 착각하시곤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 옵니다.
사람들이 책을 많이 읽게 하고, 좋은 인재들이 책을 써서 먹고 살 수 있게 하고, 글쓴이의 저작권이 기본적으로 보호받게 해 주고... 뭐 이런 등등의 제반 여건이 갖춰 지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긴 한데 그걸 어떻게 확보해야 하느냐고 하면 참 그 또한 어려운 문제로군요. 세월이 빨리 흘러서 당장 비싼 걸 먹고 좋은 옷 입고 큰 차에 타는 것 말고도 다양한 욕구들을 가진 세대가 빨리 어른이 되길 바랄 뿐입니다.
P.S. 몇몇 주인공들이 나이 먹으면서 무시무시하게 무너진 반면 네빌 롱바텀 군은 의외의 훈남으로 자라났더군요. 물론 8편에서는 분장으로 많은 게 커버되지만.^^
한동안 뜨거웠던 여론이 어느 정도 식은 다음이라 살짝 민망하기도 합니다만, 2주 전에 기고했던 글이 문자로 나오기 전에 블로그로 가져오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SM타운 파리 콘서트와 샤이니의 런던 공연이 화제가 되면서 유럽의 한류가 허상 아닌 실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유럽 청소년들이 한국 연예인들을 보고 환호하고, 한글 응원보드를 흔든다는 건 정말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간밤에 방송된 SM타운 파리 콘서트 실황. 뭐 예상했던대로이긴 하지만, 유럽 관객들이 한국 가요를 따라 부르며 열광하는 모습은 참 묘한 느낌을 주더군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라 더욱 강렬한 느낌이랄까...
얼마전 주간 '무비위크'에 썼던 글입니다.
프랑스에 한류를 심는다는 뜻:
생각해보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정훈희가 1975년 칠레 국제 가요제에서 '무인도'를 불러 3위로 입상했을 때 한동안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은 "정훈희를 아느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나훈아와 조용필, 송창식 등 일세를 풍미한 한국 가수들은 항상 일본 시장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체감하는 인기와 한국 내에서 알고 있는 인기 사이에는 항상 온도차가 있었다. 다소간 과장된 보도들이 너무 앞서갔다는 요인을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야, 그 잘 나가는 나라들이 한국 가수(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에 관심 가질 리가 있냐"는 냉소적인 시선도 한 몫을 했다.
2004년,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폭발적인 붐을 일으키기 시작할 무렵에도 한국인들은 대부분 '설마'라는 입장이었다. 개방만 하면 일본에 먹힌다는 생각으로 일본의 영화, 가요, 드라마를 꽁꽁 묶어 두고 있던 시대라는 점을 생각해봐야 한다. 초기 '겨울연가' 신드롬을 보도했던 기자들은 허풍선이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80~90년대를 거치며 기무라 타쿠야가 주연한 수많은 걸작 드라마나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 구와타 게이스케나 고무로 테츠야의 음악에 경도되어 있던 수많은 '일류' 팬들에게는 그닥 잘 만든 것 같지도 않은 한국 드라마에 일본 시청자들이 성원을 보낸다는게 참 믿기 힘든 일들이었던 것이다.
최근 파리에서 열린 SM타운 콘서트를 놓고도 많은 사람들이 인지부조화를 경험했다. 미국에도 쉽사리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는 자존심 높은 문화의 나라 프랑스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자신들이 평소 무시해 마지 않던 '아이돌'들에게 환호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프랑스의 문화적 자존심이란 지난 세기의 전설에 불과하다. 재미없고 수준높다는 프랑스 영화는 자국 관객들도 외면해 고사 직전이고, 뤽 베송과 그의 추종자들이 만드는 할리우드 스타일의 액션 대작들이 극장을 지키고 있다. 프랑스 TV의 프라임 타임에서 가장 인기있는 장르는 '하우스'나 'CSI' 같은 미국 드라마다.
기획사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번 파리 콘서트의 홍보 효과는 대단했지만, 까놓고 말해 '유럽 한류'는 경제적으로 득 될 바가 별로 크지 않다. 이미 한류 시장은 아시아만으로도 충분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구태여 그 먼 곳까지 간다 해서 부가가치가 더 커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 SM 관계자가 "스케줄상 이런 대형 유럽 콘서트는 2년에 한번 이상 힘들다"고 말한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도 '유럽 한류'가 계속 이어지길 바라는 건 과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아울러 이 작은 나라에서 전 세계에 팬들이 있는 문화적 지분을 확보하게 됐다는 건 참 대견한 일이긴 하지만, 갑자기 관계 당국이 끼어들어 이걸 행여 '정책적으로 육성'하려거나 하는 시도는 없었으면 한다. 대중문화는 이윤 극대화를 향해 움직이게 되어 있다.
비틀즈의 브리티시 인베이전은 결국 큰 시장을 향한 이동이었을 뿐이다. 영국 정부가 비틀즈의 미국 진출에 무슨 정책적 뒷받침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다. 아시아 시장이 포화가 될 정도로 K-POP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 본격적인 미주/유럽 시장 진출이 시작될 것이다.
한가지 더. 이번 파리 콘서트를 계기로 K-POP 팬이 더 늘어나긴 하겠지만 프랑스 청소년의 90%가 '한류 빠순이'가 된 건 결코 아니다. 당연하다. (한국과는 달리)다양성을 존중하고 수많은 취향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한류 취향'이라는 선택 항목이 하나 더 늘어난 것 뿐이다.
비교하자면 이렇다. 프랑스 레스토랑의 와인 리스트는 길고도 길다. 이 리스트에 '라이스 와인' 혹은 '사케'라는 항목이 추가되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처음 등장한 것 만으로, 그리고 그 항목을 주문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였다. SM의 파리 콘서트는 그 긴 메뉴에 지금 막 'K-POP'이라는 메뉴가 등장한 것에 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끝)
파리 SM타운 콘서트 이후에 나온 국내의 부정적인 반응은 두 갈래로 나뉩니다. 첫째는 '뭐 그쪽의 내가 아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금시초문이라고 하더라. 별것 아닌 걸 가지고 침소봉대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 그리고 두번째 것은 '해외에서 좀 인기가 있다고 해서, 노예계약이니 뭐니 하는 한국 아이돌의 문제가 모두 면죄부를 받는 것은 아니다. BBC나 르몽드는 그런 점을 지적하고 있지 않느냐?'하는 종류입니다.
첫째 반응은 그야말로 한국적인 반응이라고 해야 할 듯 합니다. 한국은 좀 작은 나라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성향이 '대세'로 몰리기 쉬운 경향을 갖고 있죠. 뭐가 뜬다 싶으면 전국이 열광하고, 반면 식기 시작하면 삽시간에 싸늘해지곤 합니다. '유럽에 K-POP이 진출했다'와 '일정 정도의 성원을 얻었다'가 '유럽에서 K-POP이 대세다. 에이브릴 라빈보다 소녀시대가 더 인기있다' 'K-POP 모르면 유럽에선 왕따'라는 식으로, 엉뚱하게 해석되어선 곤란합니다. 윗글에서도 강조하고 있듯, '진출해서 크건 작건 일정 지분을 얻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입니다. 싹쓸이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생각은 곤란합니다.
다음, 두번째 반응은 일면 긍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런 말은 어느 분야에서나 옳을 수밖에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BBC의 원문 기사 제목은 THE DARKER SIDE OF K-POP(K-POP의 어두운 이면)입니다.
일단 이런 식의 비판은 어느 분야에서나 가능하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한국 자동차 산업의 어두운 이면'은 없을까요? 한국산 자동차는 눈부시게 성장해 한국경제를 지탱하는 큰 힘이지만, 수시로 벌어지는 노조 파업과 가격경쟁력의 문제, 그리고 부품 납품업체에 대한 착취, 아울러 수출가격과 내수가격의 차이로 인한 국내 소비자의 박탈감 등 수많은 문제가 쌓여 있습니다.
이번 차이코프스키 콩쿨을 휩쓴 '한국 클래식의 이면'은 어떨까요. 젊은 연주자들이 해외 음악제에서 큰 상을 받고 주목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과연 돈을 내고 국내 연주자의 클래식 공연 티켓을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그 많은 음악대학 졸업생들은 음악에서의 성공이 가장 큰 목표일까요? 계속해서 적잖은 기린아들을 배출한 것만큼 국내 클래식 음악의 수준이 높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듯 '이면'이 없는 성공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음은 비판의 내용입니다. 사실 기사를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노예계약'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설명이 있습니다. '제작사는 투자금을 회수(RECOUP)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초기에는) 아티스트들에게 돌아가는 이익 배분이 적을 수 있다'는 것이죠. 네. BBC 기자는 국내의 어설픈 아이돌 비판자들에 비해 논리적입니다.
(가수와 소속사의 수익 분배에 대한 내용은 예전에 썼던 이 내용을 한번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http://fivecard.joins.com/500 실제 숫자를 가지고 얘기를 해 보면 일반적인 통념과는 좀 다른 느낌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이 기사에서 한국 가요 시장에 대해 깊은 이해를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이를테면 한국의 음원 가격이 저가인 것은 맞지만, 그때문에 가수나 기획사들이 돈을 못 버는 건 아니죠. 음원을 팔아 얻는 수익의 대부분이 이동통신사나 그들과 관련된 음원 판매 업체로 넘어가고 정작 음원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큰 몫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 지적되었어야 합니다. 한국 시장에서 가수나 제작자가 큰 돈을 벌지 못하는 것(물론 지금도 버는 분들은 꽤 잘 버시지만 어쨌든 외국에 비해 적은 돈)은 어처구니없는 수익 배분 구조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
아울러 '노예계약'을 얘기하면서 '한국은 K-POP을 통해 일본처럼 멋진 이미지를 가진 국가로 부각되고 싶어 한다'고 말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한국에서는 동방신기가 둘로 갈라지고, 결국 탈퇴한 멤버들이 JYJ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일본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SMAP라 해도 자니스를 벗어나선 존립이 불가능할 겁니다. 가수에 대한 회사의 지배력을 기준으로 노예계약을 말한다면 일본은 한국보다 훨씬 더 강력한 아이돌 노예계약국가죠. 다른 점을 꼽자면, 한국 아이돌은 아시아를 벗어나 이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고, 일본 아이돌은 여전히 아시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네. 일본 자체가 대단히 큰 시장이므로 그럴 필요가 없는게 맞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의 고무로 테츠야 이후 해외로 진출하려던 수많은 시도가 모두 불발로 끝난 것 역시 사실이죠) 데서 차이가 날 뿐입니다.
'우리가 거둔 작은 성취에 너무 고무되지 말고, 우리가 가진 문제점을 제대로 보자'는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누구도 반대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문제점'만을 대단히 큰 것처럼 보고, '남들도 그만한 문제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건 사대주의적인 태도일 뿐입니다. 우리가 완벽하지 않은 만큼, 남들도 다소간 문제가 있습니다. 굳이 남들의 이야기까지 예로 들어 가며,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못난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못난 짓일 뿐입니다.
생각해보면 '트랜스포머'를 처음 보고 마음 속으로 '그래 이거야 이거!'라고 외친 것이 벌써 4년 전의 일입니다. 물론 다 큰 분들게 2007년은 바로 어제같겠지만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는 관객 중에는 그 4년이 인생의 30%나 40%, 심지어 50%인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온 주말 내내 3D 상영관과 2D 상영관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극장이 매진에 가깝다는 놀라운 환경에서(심지어 개봉관이 적은 것도 아닌데!) 간신히 심야를 틈타 '트랜스포머3'를 보고 왔습니다. 뭐 장사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보고 나서 괜히 볼멘 소리 할 거면 안 보는게 낫다고 할테고, 사실 보기 전부터 이미 '트랜스포머3'의 품질에 대한 기대는 매우 낮았지만 그래도 안 볼수는 없다는 묘한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습니다. (물론 결과도 예상과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일단 줄거리.
1961년, 인류는 달에 뭔가 외계물체로 추정되는 것이 충돌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이 물체의 정치를 파악하기 위해 우주계획에 박차가 가해지고,
두번의 모험 뒤에도 샘 윗위키(샤이아 라보프)는 실업자가 되어 있습니다. 무슨 곡절인지는 모르겠지만 샘은 이미 미카엘라(메건 폭스)를 차버리고 새로운 여자친구(슈퍼모델인 로지 헌팅턴 위틀리)와 동거중입니다. 나라가 샘에게 해준 보상은 장학금과 훈장이 전부. 직장은 자기가 잡아야 합니다. 당연히 샘에겐 울분의 나날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옵티머스 프라임은 러시아에서 자신들과 관련된 문명의 편린을 발견하고, 이것이 달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그들이 달에서 발견한 것은 오토봇들의 행성이 멸망하기 직전 간신히 탈출한 우주선. 그리고 문명의 부활을 이끌어낼 수 있는 '사다리'의 부품입니다.
'트랜스포머3'는 평론가들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습니다. 특히 유명 평론가 로저 이버트로부터 심각하게 욕을 먹었는데 사실 전혀 놀랄 일은 아닙니다. 이버트는 이미 2009년의 시리즈 2편도 박살을 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 2편을 모두 보신 분이라면 이런 평가가 상식에서 벗어난 얘기는 아니라는 데 동의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의 흐름을 경험했습니다. (이버트도 1변은 호평했다가 2편에서 개실망을 드러냈죠.)
사실 3편에 대해 평론가들이 혹평을 쏟아 붓는 걸 보면 새삼스럽게 뭘 또 이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2편에서 플롯이라는 요소는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그 2편이 흥행에서 온전히 대박을 기록하면서,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는 관객층은 플롯 따위는 발가락의 때 만큼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게 증명된 셈입니다. 그럼 굳이 그렇게 2편을 만든 마이클 베이가 3편이라고 논리에 충실한 스토리를 만들어 낼 리는 만무하겠죠.
(뭐 그런 식으로 얘기하다보면, '수십톤에 가까운 로보트들이 소리도 안 내고 2족 보행을 하거나, 아스팔트를 망가뜨리지 않고 도로를 질주하는게 말이 되냐'는, 애당초 이 영화의 근간을 흔드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이런 경우에 '말이 되느냐 안 되느냐'는 그 영화 안에서의 논리가 일관성이 있느냐는 것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무슨 수로 광선을 갖고 칼싸움을 한다는 거냐'고 주장하실 분은 아예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지 않는 것 외에는 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영화든 '1편에선 저게 됐는데 2편에선 왜 안돼?'라는 소리를 들어선 안된다는 것이죠.)
반대로 2편에서 스토리에 대한 기대를 싹 걷어낸 결과, 개인적으로 3편은 꽤 재미있는 영화로 기억될 듯 합니다. 다른 분들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 장면과 뒷 장면의 논리적인 연속성, 어떤 인물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 같은 것은 아예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냥 꽤 길고 잘 설계된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생각하시는게 가장 좋은 태도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접으면 장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정교한 그래픽과 생동감 넘치는 로봇들간의 전투는 박진감이 넘칩니다. 특공대원들이 날개를 달고 도시 상공으로 낙하하는 장면은 심지어 CG가 아니라 실사라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는, 멋진 장면입니다. 한동안 3D 값을 제대로 못하는 찌질한 영화들에 질린 분들은 제대로 박진감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렇게 낙하하냐고 물어보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건 트랜스포머3를 감상하시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딱 하나, 제대로 이치에 닿는 부분이 있다면 '인간 전투력의 성장'입니다. 1편에서 디셉티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던 인간들이 2편에선 제법 저항을 하고, 3편에서는 어떻게 디셉티콘에게 인간의 화력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달은 모습을 보입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보면 디셉티콘을 상대하는 인간의 능력이 점점 성장한다는 게 당연한 거겠죠. 아마 4편이 나온다면(마이클 베이는 손을 떼겠다고 얘기했지만 영화사가 이런 돈나무를 그냥 베어 버릴 리가 만무하겠죠) 오토봇 없이도 디셉티콘들은 인간과 감히 맞서기 힘들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3편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메건 폭스의 결장입니다. 이미 온갖 언행을 통해 '내가 왜 남들의 눈치 따위를 봐야 하나'라는 인생관을 노출한 처자인 터라 예상은 했지만, 베이 선생님과 스필버그 선생님까지도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잘 아시는대로 폭스는 3편의 캐스팅에서 제외됐고, 영화 내용상으로도 샘에게 한방에 차인 꼴이 돼 버렸습니다. (심지어 꼬마 오토봇들로부터는 "걔 정말 밥맛이었어"라는 말까지 듣죠.)
그 대안으로 나타난 로지 헌팅턴 위틀리도 팔등신 미인인 건 분명하지만, 1m76의 라보프와 1m63의 폭스가 괜찮은 비례를 보여준 데 비해 위틀리는 너무 큽니다(수치상으로 라보프가 1cm 큰 걸로 되어 있지만, 영화 속에서 라보프가 위틀리를 안아 올리는 장면에서 위틀리의 발은 여전히 지면에 붙어 있는 굴욕적인 장면도...). 게다가 연기력은 아직 초보 수준이라는 약점도 그대로 노출됩니다. 뭣보다 용모만 놓고 보면 폭스에 비해 많이 처진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개인 취향이 반영된 주장입니다.)
결론입니다. 속도감과 화려한 액션, 박진감만으로도 '트랜스포머3'는 재미있게 볼만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1편이 갖고 있던 주인공의 성장에 대한 기대, 꽤 볼만했던 유머, 그리고 로맨틱한 느낌은 영영 사라져버렸습니다. 네. 이제 더 이상 '소년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이죠.
사실 샤이아 라보프가 미래의 톰 크루즈가 될 가능성은 별로 없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 외에,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인간 배우들에 대해선 별로 할 얘기가 없습니다. 엄청난 배우들이 엄청나게 낭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2편 리뷰 때 '유일하게 연기할 거리가 있는 역할'로 존 터투로가 연기하는 시먼스 요원 역할을 얘기했는데 그건 3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랜시스 맥도먼드나 존 말코비치같은 관록의 명배우들이 카메오처럼 별 의미 없는 역할로 흘러갑니다. 특히 말코비치는 대체 왜 나왔는지 궁금할 지경입니다.
'그레이 아나토미'의 스타 패트릭 뎀시가 정말 찌질한 역으로 나와 굴욕을 당하는 건, TV 스타들에게 좋은 역할을 주지 않는 할리우드의 전통을 이어가는 듯도 하지만, 역시 TV 시리즈 '라스베가스'의 스타 조쉬 두허멜이 이 영화를 통해 영화배우로 성장할 계기를 마련한 걸 보면 베이에게 그런 편견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P.S. 샘의 부모 역할은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자자 뱅크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볼수록 짜증납니다.
결국 모든 것은 시장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MBC TV '나는 가수다'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수천명의 정규/사이비 분석가들이 날마다 분석했다고 보여집니다. 사실은 해석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 시간 동안 어떻게 듣고 즐기느냐가 중요한 거겠지만, 뭐든 해석을 해내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입니다.
아무튼 시청률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있지만 계속해서 '나가수'를 보는 시청층이 있고(초반에 이 프로그램에 너무 많은 기대와 열광을 쏟아 부은 사람들은 슬슬 떨어져 나간 듯도 합니다),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사회에 봉사(?)하게 될지에 대한 방향은 어느 정도 잡혔습니다. 박정현이 '재발견' 되었고(참 어처구니없는 얘기지만...), 임재범이 다시 '영웅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대중의 건망증과 무심함을 엿볼 수 있는 얘기지만, 요즘 한창때인 정엽까지도 '나가수'에 출연한 이후 너무 많은 스케줄로 봄날을 맞고 있다는 얘기에선 참 할 말이 없어집니다. 대략 알고는 있었지만 한국의 음악 청취층이란 그렇게도 얇고 가벼웠던 것인가 말입니다.
아무튼 '나가수'의 '가수 발굴 프로젝트'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옥주현을 통해 '아이돌(출신) 바로 세우기' 작업이 진행되는가 하면 - 이건 아직 미완성이라고 생각되지만 - '중년 가수 재발견 시리즈' 역시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장혜진과 조관우가 이 대열에 합류했죠.
사실 장혜진과 조관우는 약간 손해를 본 부분도 있을 겁니다. 청중평가단 중 장혜진과 조관우를 얼굴을 보는 순간 알아볼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 아저씨(아줌마) 누구야?'라고 얘기할만한 집단도 충분히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처음 등장하는 가수들에게는 한곡 정도 더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얼굴은 몰라도 노래는 알만한' 히트곡 몇곡씩은 다 있는 분들이니 말입니다.
아무튼 젊은 한창때의 가수들과 함께 예전에 정말 '왕년에' 씨의 인기를 갖고 있었던 선배 가수들이나, 한창때이긴 해도 실력에 비해 여러 가지 요소로 인해 봄날을 맞지 못한 가수들의 '화력 시범장'으로서 '나가수'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개인적으로, 그리고 아주 편견 가득한 눈과 귀로, '나가수'에서 한번 끌어들였으면 좋을 것 같은 가수들을 꼽아 봤습니다.
일단 아이돌 혹은 아이돌 출신에 대해서는 조금 판단을 보류합니다. 옥주현이 나왔으니 바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 맞는 말입니다. 뭐 그건 굳이 남들이 추천하지 않아도 제작진이 알아서 하겠죠. 안 그래도 제작진의 이쪽 분야에 대한 애정은 꽤 두터워 보입니다. (물론 더 원이 아이돌이란 뜻은 아닙니다.^^)
조용필 선생을 위시한 레전드 그룹도 배제합니다. 물론 나오시기만 한다면야 시청자들의 복이겠지만 굳이 '애들 노는데' 끼고 싶지 않으시다면 강요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신승훈 이선희 이승철 이승환 이문세 심수봉 등 전혀 나오고 싶은 의사가 없는 듯한, 굳이 모실 이유도 없을 듯한 그룹을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아, 그리고 현재의 '나가수'에 나와서 뭔가 반향이 있을 것 같은 가수들을 위주로 꼽았습니다. 예를 들어 김동률이나 이적, 장기하, 성시경의 훌륭함을 부정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이런 스타일의 가수들이 '나가수'의 시스템에서 생존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울러 고함과 샤우팅을 구별하지 못하는 가수, 엄청나게 고평가되어 있지만 라이브에서 전혀 안정감이 없었던 가수, 느끼함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가수들은 제외했습니다. 물론 모두 개인적인 기준입니다.
그럼 리스트 시작.
1. 박미경
요즘 활동이 뜸하지만 만약 디바의 조건을 '다재다능함'으로 내건다면 이분을 넘어설 가수는 별로 없을 듯 합니다. 폭발력, 리듬감, 호흡, 무대 매너 등에서 흠잡을 데 없는 대형 가수죠.
2. 신효범
한때 한국에서 '목소리' 하면 신효범을 꼽던 시절이 있었죠. 뭐 이하 설명은 생략.
3. 체리필터
왜 YB는 되고 체리필터는 안 될까요? 심지어 체리필터는 밴드 답지 않게 왕년의 히트가요를 록으로 편곡한 앨범도 낸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 조유진이라는 무시무시한 보컬을 생각하면... YB가 당장 긴장해야 할듯.
4. 아이비
누구? 하는 분들이 많겠지만, 그리고 옥주현 못잖은 안티 그룹이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지만, 사실은 백지영이 처음 '나가수'의 오프닝 멤버에 있을 때에도 비슷한 반응이 많았습니다. 개인적으론 이만한 재능을 가진 가수는 정말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론되는 다른 가수들에 비해 경험이 일천하다는 점이 약점이긴 하지만, '재발견'이란 소재에 너무나 잘 어울릴 가수가 아닐까 합니다.
5. 김조한
정엽 이후 솔 보컬 출신의 '나가수' 등장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김조한의 차례가 온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왕년의 솔리드 팬들에겐 추억의 무대가 되겠군요. 물론 가공할 실력은 여전합니다.
6. 김진호
SG워너비가 재평가되어야 할만큼 하락세란 말이냐...고 반문하실 분들이 적지 않겠지만, '소머리'라는 이름으로 저평가됐던 보컬 김진호의 위력은 한번 떼 놓고 감상해볼만 할 겁니다. (개인적으로 김범수와 김진호가 정면으로 맞붙었을 때 대중이 누구를 선택할까 하는 것도 궁금합니다.^^)
7. 더 원
아마 이름도 생소한 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블랙 아이드 솔이란 장르에서 임재범의 진정한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 몇 안 되는 가수 중 하나입니다. 최근에는 태연의 노래 선생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죠. 조금 자제하는 힘만 발휘한다면 목소리의 위력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할 가수죠. (사진은 저 위에 있습니다.) 추천곡은 '죽도록'.
8. 테이
결국 밴드 활동 쪽으로 갈 길을 잡았지만 테이가 가진 황금의 목소리는 조쉬 그로번 풍의 팝페라로 변신할 때 진정한 위력을 발휘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페라 스타'를 보신 분들이라면 여기에 반대하지 않으실 걸로 믿습니다. 쇳소리를 내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성대라는 느낌.
9. 홍종명
과연 여기 이 분의 이름을 거론할 때 몇명이나 얼른 알아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만(SBS TV 드라마 주제곡이던 '사랑은 블루'라는 노래는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까요?), 지난 20년간 들어 본 목소리 중에서 이렇게 인상적인 목소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높은 종탑에서 울리는 종소리 같다고나 할까요. 동영상 하나 첨부합니다. 물론 서울예대에서 교직을 갖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지만(CCM 가수로도 유명하시다더군요), 이런 가수가 이런 무대에 서고 있다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목소리는 여전하신 듯.
10. - - -
사실 열명을 채우려니 너무 생각나는 가수가 많아 고를 수가 없겠더군요. 왕년의 기량 그대로라면 당장 모셨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전성기의 기량을 이미 잃어버린 분들, 그러고 보면 어디서 뭘 하시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분들... 지금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뭔가 조금씩은 아쉬운 분들.
제목 슈퍼 에이트(8), 감독 J.J. 에이브럼스, 제작 스티븐 스필버그. 이건 뭐 관객들을 향해 '이래도 안 볼래?' 수준의 무력 시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요소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선수들인 만큼 영화 내용에 대한 노출은 극도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더 자세히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당대 강호 최고의 낚시왕과 전대 최강의 대마두가 한 편을 먹고 뭔가 보여주려고 한다는데, 이럴 때 정직한 관객의 태도는 '네네 알겠습니다. 봐 드리죠' 하고 고개 숙이고 매표구로 달려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리뷰를 읽어보는 시점은 영화를 보기 전이 아니라 영화를 본 다음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생각합니다. 어떤 영화를 보기 전에 다른 사람의 시각을 참고한다는 건 스스로 영화를 보는 눈을 제한하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다 제작진이 스스로 이렇게 영화에 대한 정보를 꽁꽁 싸매고 있는 경우에는 무리하게 정보를 취득하려 하지 말고 그냥 선입견 없이 보는게 최곱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기본적인 얘기부터 하자면, 이 영화는 대략 이런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1979년.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인구 1만2천의 소읍 릴리안. 사고로 엄마를 잃은 중학생 조(조엘 코트니)는 여름방학을 맞습니다. 가장 친한 친구 찰스의 꿈은 영화감독. 이들을 포함한 다섯 친구는 단편 영화 촬영에 열중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동급생 앨리스(엘르 패닝)를 영화에 끌어넣으면서, 이들은 평생 경험하지 못한 충격적인 사건 속으로 말려듭니다.
줄거리는 이 정도만 아셔도 충분합니다(오히려 많이 아실수록 감상에는 방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도만 보더라도, 이런 영화야말로 아주 오래 전부터 스필버그가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 온 장르라는 것이 쉽게 드러납니다. 그 계보는 아무래도 'E.T'에서부터 시작해야겠죠.
'E.T'에서 리처드 도너 감독의 '구니스'(직접 연출하진 않았지만 이 영화의 원안은 스필버그의 것입니다)까지, 스필버그는 어느날 갑자기 초유의 대사건에 휘말리는 일단의 어린 친구들 이야기를 다루는 데 천부적인 솜씨를 보여왔습니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그가 소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천재였기 때문이겠죠.
물론 그 '소년의 마음'이 '후크'나 'A.I' 에서처럼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뭣보다 그 '소년의 마음'이 없었다면 '태양의 제국'이나 '주라기공원' 같은 영화는 아예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지금과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됐을 겁니다.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비록 '슈퍼 8'가 J.J 에이브럼스의 주도로 만들어진 영화지만, 그 색깔은 지금까지 에이브럼스가 만들어 온 작품들에 비해 훨씬 스필버그 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목에도 있지만 이 영화는 '21세기 판 구니스+E.T' 라고 규정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작품이죠. 어쩌면 성장기에 두 영화를 보고 자란 에이브럼스가 스필버그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구니스와 E.T를 보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짐작하시겠지만 영화는 두 시간 내내 관객들 들었다 놨다 하는 수작입니다. 스필버그적인 낙관이 좀 불편하신 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이 정도 영화라면 입장료가 절대 아깝지 않다는 쪽에 표를 던지겠습니다.
그럼 아동용 영화란 말인가..하는 생각이 드실 분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가장 크게 공감할 관객은 30,40대 남성 관객이란 생각도 듭니다. 이 사람들이 왕년의 10대 초기를 회상할 때 가장 아쉬웠을 부분을 건드려 주는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뭣보다 그때 꿈꿨음직 한 꿈의 여자친구 캐릭터가 등장하죠.
어느 영화에서도 아역이 연기를 못해 망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 영화의 핵심은 여섯 친구들, 그 중에서도 조와 앨리스 역의 두 배우에 몰려 있습니다. 특히 이 영화의 앨리스 역을 맡은 엘르 패닝은 다코타 패닝의 동생이란 점에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다코타가 1994년생, 엘르 패닝은 1998년생으로 네살 차이가 납니다.
외모도 외모지만 이들 자매를 보고 있으면 정말 연기는 뱃속에서부터 몸에 밴 듯 합니다. 아마도 어머니가 임신중에도 계속해서 줄담배를 핀 게 아닐까 하는(...훈제...) 생각을 하게 될 정도입니다. 다코타 패닝을 보았을 때 이렇게 외모와 재능을 타고 난 아이가 있을까 생각하신 분이라면 아마도 이번에 그 업그레이드 버전을 보시게 될 겁니다.
게다가 만 13세에 이미 신장은 1m68. 다코타 패닝의 한계로 꼽히던 신장과 '유아 몸매'도 이미 벗어나 버렸습니다. 한 5년 뒤가 기대됩니다.
(...한국의 고아라는 언제 포텐셜이 터질지.)
P.S.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목의 '슈퍼8'은 필름의 종류를 말합니다. 기존 8mm 필름에 비해 좌우 비율이 개선된 포맷을 말하죠. 가정용 비디오 카메라가 나오기 전까지 홈 무비의 대세는 8mm였습니다. 당연히 이 영화 속에서 아이들이 만드는 영화가 바로 슈퍼 8mm 영화인 것이죠.
스필버그는 1960년(14세), 이미 40분짜리 8mm 영화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잘은 모르지만 영화 속 1979년의 에이브럼스(영화 속 주인공들과 마찬가지인 13세)도 아마 딱 저런 짓을 하고 있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P.S.2. 배경이 1979년이면 스필버그는 이미 1975년작 '조스'로 유명 감독이 되어 있던 시절인데, 영화 속에 스필버그의 개입은 보이지 않더군요(혹시 있다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좀비 영화의 대가 조지 로메로 감독의 이름은 영화 속 '로메로 화학'에 들어 있던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