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퀄(prequal)이라는 말은 오히려 시이퀄(속편, sequal)이란 말보다 잘 알려진 단어가 됐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시이퀄은 '속편'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프리퀄은 '전편'으로 번역하면 의미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죠. '엑스맨-퍼스트클래스'가 '엑스맨'의 프리퀄이라고 말하면 웬만한 사람은 다 알아듣지만 '전편'이라고 얘기하면 누군가는 심각한 표정으로 '엑스맨'이 가장 첫번째 작품인데 무슨 전편이 있느냐고 따질 수도 있습니다. 뭐 아무튼 그렇다는 얘깁니다.
최근 들어 히트한 영화에는 속편 제작의 유혹만큼이나 프리퀄 제작의 기회가 있는 게 보통입니다만 모든 종류의 프리퀄에는 심각한 약점이 있습니다. 그건 당연히... 거의 모든 관객이 결말을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요 인물의 생사에 대한 자유도는 전혀 없어지는 것이죠. 누가 죽고 누가 살아남는지를 모든 관객이 아는 상태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상당한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일단 줄거리.
2차대전 중 폴란드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에릭 랜셔는 나치의 학대 속에 자신 속에 잠자는 초능력의 발현을 경험합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 동부 명문가의 아들 찰스 재비어는 집에 몰래 들어온 어린 레이븐(뒷날의 미스틱)을 동생처럼 거둡니다.
세월이 흘러 1960년대. 미국 정보요원 모이라는 소련의 첩보활동을 돕는 세바스찬과 일단의 초능력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안 뒤 초능력=돌연변이의 소산(이라는 놀라운 추론을 해내다니!)이라는 생각에서 돌연변이 연구로 각광을 받던 젊은 날라리 학자 찰스 재비어를 찾아나섭니다. 미국의 방첩활동에 뛰어든 재비어는 오래지 않아 복수를 위해 세바스찬을 뒤쫓던 에릭 벤셔와 만나게 됩니다.
위에서 말한 문제점은 고스란히 '엑스맨-퍼스트 클래스(이하 FC)'에도 해당됩니다. 주요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습니다. 찰스 재비어(제임스 매커보이)와 매그니토-에릭 랜셔(마이클 패스빈더)가 아무리 우정을 나눠도, 언젠가는 적이 될 거라는 걸 관객들은 영화가 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습니다. 돌연변이 악당 세바스찬(케빈 베이컨)이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영화가 끝나기 전에 그의 전성기는 막을 내릴 거라는 점 역시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럼 도대체 이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할까요. 사실 프리퀄의 약점부터 얘기하고 시작했지만 좋은 점도 있습니다. 프리퀄을 보러 오는 관객의 특성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기본적으로 캐릭터의 히스토리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매그니토가, 내가 좋아하는 X박사가 철들기 전에는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은 냉철하고 판단력 뛰어난 비스트는 어려서 어떤 타입이었을까, 미스틱은 어쩌다 X박사와 등지고 매그니토와 같은 편이 되었을까와 같은 '설명'을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관객들은 액션의 부족이나 거대한 볼거리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대신 캐릭터가 어떻게 성장하고, 어떻게 서로간의 관계를 맺어 가는지에 주목하는 경향이 짙죠. 이것만 잘 하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매튜 본은 이 과업을 특유의 유머 감각을 살려 성실하게 수행했습니다. 영화감독보다는 클라우디아 쉬퍼의 남편으로 더 유명하고, 이따금씩 수컷판 백조의 호수를 연출한 매튜 본과 혼동되며(무용 매튜 본은 Matthew Bourne, 영화감독은 Matthew Vaughn 입니다^^), 원래 '엑스맨 3'의 감독이 될뻔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프리퀄을 맡게 된 이 감독의 유머감각은 프로듀싱을 맡은 영화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스'나 자신의 데뷔작 '레이어 케이크'에 잘 나타나 있죠. 괴짜 돌연변이들의 성장 드라마에 이보다 적절한 감독도 드물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교해보자면 나쁜 프리퀄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스타워즈 1, 2, 3'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세 편이나 되는 대작 영화에 거대한 음모와 대전쟁을 그려 놓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은 지루했을 뿐입니다. 전쟁이 아무리 엄청난 규모로 그려져봐야 어차피 스톰 트루퍼가 승자가 된다는 건 다 알고 있으니 관심 갈 내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에피소드 4~6에서는 한두명만 있어도 행성간 전쟁의 전세를 바꿔 놓을 수 있을 것 같던 초전사 제다이들이 1~3에서는 수십명 있어도 백병전에서 몰살이나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설정이 시리즈에 대한 반감을 폭증시켰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에피소드 1, 2, 3가 관객들에게 보여준 거라곤 '대체 요다는 어떻게 싸울까'에 대한 대답 뿐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매튜 본의 이 프리퀄이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데에는 기존 배우들의 젊은날을 연기한 새로운 배우들이 큰 몫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뭐 요즘 한창 뜨거운 배우들인 매커보이나 패스빈더는 굳이 거론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간 건 역시 엠마 프로스트 역을 맡은 재뉴어리 존스. '언노운'을 못 봤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처음 대했는데 왠지 클라우디아 쉬퍼가 젊었으면 욕심냈을 것 같은 역할이더군요. 아니면 이런 타입이 바로 매튜 본의 스타일인지도....ㅋ
이미 속편('엑스맨4'가 아니라 이 FC의 속편 - 그러니까 여전히 '엑스맨' 보다 앞의 시대 이야기)을 만든다는 계획이 세워져 있다는데 이 시리즈가 계속되는 걸 보고 싶은 마음이 반, 두번의 프리퀄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반 정도 듭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굳이 FC라는 이름을 건 것은 '비긴스'나 '리턴스'의 또 다른 표현이며 이제부터 이 배우들을 갖고 새로운 시리즈를 만들어 보겠다는 얘기일테니, 2편부터는 굳이 프리퀄의 굴레를 씌울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만 울버린이나 성인 미스틱 같은 배우들의 얼굴이 잠깐 비쳤던 건 또 어떻게 소화할 생각인지...^^
P.S. 생각해보면 왕년의 NBA 선수중에 보스턴 셀틱스, 시애틀 슈퍼소닉스 등에서 뛰었던 재비어 맥다니엘이라는 선수의 별명이 'X맨'이었습니다. 그때는 그냥 드물게 이름이 X로 시작(Xavier)한다는 것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엑스맨' 시리즈와 무관하지 않은 별명이었을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P.S.2. 얼마나 가능성있을지 모르지만 어쩐지 부잣집 출신의 마음씨 넉넉한 재비어는 매튜 본 자신을, 재능은 뛰어나지만 독선적인 에릭은 가이 리치를 그리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슬쩍 스치고 지나가더라는.... ('뭐 아니면 말구'죠.^^)
화제의 '트루맛 쇼'를 좀 늦게서야 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제는 커녕 시사회에 갈 수 있는 특권도 사실상 박탈당한 상태이고 보니^^ 빠른 접근은 쉽지 않더군요.
사실 지금 전국 어디에서든(서울이든 지방이든) '트루맛쇼'를 보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개봉관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굉장히 한정된 '예술영화 전문관'에서나 상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이건 '트루맛쇼'의 오락적인 가치를 너무 낮게 평가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큐멘터리로서의 가치를 털어 버리고, 근래 한국에서 나온 코미디 영화 중에서 냉정하게 따져 볼 때에도 이만한 웃음을 주는 영화는 별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트루맛쇼'는 TV 맛집 프로그램을 둘러싼 잡음들을 정면으로 파헤친 작품입니다. 누구나 이런 의문을 가졌을 법 합니다. 물론 업계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이런 정황에 대해 눈치채고 있기 마련입니다. TV에 나오는 스타의 단골집이 다 단골집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죠. 사실 대부분의 스타들이 '아는 사람(혹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이 최근 개업한 식당'을 자신의 단골집으로 포장해 주는 데 별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도 소개된 남희석 칼럼은 이런 풍조에 대한 드문 자기 고백으로 꼽을 만 합니다. (제가 유치해서 진행한 칼럼입니다. 이럴 때 참 뿌듯합니다.^)
'트루맛쇼'의 가장 큰 미덕은 가차없는 비판으로 그치지 않는 유머감각입니다. TV의 시사/고발성 프로그램들이 흔히 하듯, 인상 팍 쓰고 당장 지구가 멸망할 듯한 표정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과장하는 논법으로 일관했다면 아마 이 영화의 가치는 지금의 절반 정도에 그쳤을 겁니다.
이 영화에는 사실상 유일하게 얼굴을 가리고 등장하는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맛집 전문가 겸 음식점 창업 컨설턴트' 임모씨가 바로 그 분입니다. 이 분이 만들어 낸 '캐비어 삼겹살' 요리를 보여주던 화면이 보물 다루듯 캐비어를 만지는 프랑스인 주방장으로 옮겨가는 순간, 그리고 이 조리장의 입에서 "캐비어는 섬세한 음식입니다. 어떤 열도 가해선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카메라는 다시 불 위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캐비어 삼겹살' 쪽으로 넘어갑니다. 정말 빵 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캐비어'의 정체는 극장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지금껏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낯설게 느껴졌던 실명 비판입니다. 한 방송사의 사장님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모크 없이 맨 얼굴로 등장합니다. 만약 그 당사자들이 문제를 삼으면 어떻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영화의 의도로 볼 때 비판이 그 당사자들을 겨냥한 게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되긴 합니다.
어쨌든 '트루맛쇼'에 대해 다른 공간에 쓴 글이 아까워서 일단 가져옵니다. 오늘 아침자 신문에 나온 칼럼입니다.
제목: 트루맛쇼
유명 담배 회사의 연구개발 부문 고위 간부였던 제프리 와이갠드는 1993년 갑작스레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는 얼마 뒤 이 담배 회사가 그동안 고의적으로 니코틴의 함량을 속여왔다고 폭로했다. 실제로는 니코틴 중독을 유발하기 충분한 양이었지만 포장지에는 그보다 훨씬 낮은 함량이 표기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곧바로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다. 와이갠드는 CBS-TV의 간판 시사 프로그램 '60분' 제작진의 취재에 응했지만 거대 기업인 담배 회사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방송을 차단했다. 결국 이 내용은 1996년 2월에야 전파를 탔다. 담배 회사가 인체에 유해한 성분을 고의로 유통시켰다는 최초의 보도였다.
소속 집단의 비리를 고발하는 내부인을 흔히 휘슬블로워(whistleblower)라고 한다. 공익을 위해 합당한 일이었다 해도 조직의 입장에서 본 휘슬블로워는 일단 응징해야 할 배신자다. 와이갠드 역시 “무능해서 해직당한 분풀이를 하는 것”이란 음해에 시달렸고 정체불명의 남자들로부터 살해 위협도 받았다. 러셀 크로가 와이갠드 역을 맡은 영화 '인사이더(99년)'가 개봉된 뒤에야 대중은 와이갠드를 영웅으로 받아들였다.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를 가능케 했던 내부 고발자 '딥 스로트(Deep Throat)'도 보복이 두려워 철저하게 정체를 감췄다. 30여 년이 지난 2005년에야 밝혀진 그의 이름은 윌리엄 마크 펠트, 당시 FBI 간부였다.
방송사 맛집 프로그램을 둘러싼 음습한 뒷거래를 고발한 영화 '트루맛쇼'가 개봉돼 화제다. 전직 방송사 PD 출신으로 이 영화를 만든 김재환 감독 역시 방송사로부터 배신자 취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 MBC는 이 영화의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누군가 배후가 있다'는 악의적인 사주설도 널리 퍼졌다.
가처분신청은 기각됐지만 '트루맛쇼'의 개봉관은 여전히 극소수다. 화제에 비하면 이 영화를 실제로 본 사람은 아직도 적다는 뜻이다. '트루맛쇼'에서 한 맛집 블로거는 개탄한다. “방송에서 한번 다뤄지면 식당 앞에 장사진이 생깁니다. 이게 한국 대중의 입맛 수준입니다. 이 수준이기 때문에 방송에 휘둘리는 겁니다.” '입맛'과 '식당' 대신에 '관심'과 '정치', 혹은 '기업'을 넣어 보면 어떨까. 대중이 깨어나기 위해선 좀 더 많은 '트루맛쇼'가 나와야 한다. <끝>
개인적으로 마이클 만 감독의 액션 대작 가운데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많지 않습니다. '마이애미 바이스'나 '라스트 모히칸' 정도? '히트'를 비롯해 대부분의 영화들이 범작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는 느낌이지만,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 '인사이더' 만큼은 정말 인정해 줄만한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사이더'는 제프리 와이갠드(상기한대로 러셀 크로가 연기합니다)라는 실존 인물과 그를 취재하는 '60분'의 PD(알 파치노)를 통해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폭로가 얼마나 구조적으로 힘들어졌는지를 담담하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통해 마이클 만은 그의 영화에서 왜 여성 캐릭터가 마냥 겉돌기만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다큐멘터리 감독이지, 블록버스터 흥행작 감독이 아니었던 겁니다.^^ 어쨌든 이 영화는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오르며 기염을 토하지만 본상은 하나도 수상하지 못한 비운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마이크 월러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의 트랩 대령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연기하는 이 실존 인물은 '60분'의 산 증인이기도 하며 월터 크롱카이트와 함께 CBS를 대표하는 방송 저널리스트입니다. 하지만 영화 '인사이더'에서 이 인물은 회사 편에 서서 와이갠드의 인터뷰 내용이 방송에 나가지 못하게 차단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물론 본인은 이 영화 내용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지만, 그의 불만이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이라면 명예훼손 소송부터 온 난리가 났을 겁니다. 물론 영화 속 그에 대한 묘사가 사실과 다르다면 법정에서 결론이 났겠죠.)
아울러 아래 쪽의 '딥 스로트'를 볼 수 있는 영화도 있습니다. 다 아시겠지만 로버트 레드포드,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죠. 할리우드 영화 가운데 기자가 좋은 역으로 나오는 몇 안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사설이 길었지만 어쨌든 '트루맛쇼'는 의식이 앞서 보는 이를 지루하게 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보고 있으면 최소한 다섯번은 의자에서 몸을 흔들며 웃게 되는, 훌륭한 블랙 코미디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가까운 개봉관을 한번씩 찾아보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임재범 복귀 이후 심상찮은 분위기의 MBC TV '나는 가수다'가 첫번째 미션을 치렀습니다. 박정현이 1위에 올랐고 그 뒤로는 이소라-김범수-임재범-윤도현-김연우-BMK의 순으로 등수가 매겨졌습니다. 의외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차피 등수가 매주 변하는게 정상이고 보면 이변이란 말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그리고 이날 방송은 1등은 찾기 힘들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가 하위권으로 몰릴 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겁니다. 윤도현, 김연우, BMK가 하위권으로 갈 것이라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죠.
이건 이 세 사람의 노래 실력이나 당일 퍼포먼스가 나빴기 때문이라고 보기는 힘들 듯 합니다. 그보다는, 이 세 사람을 제외한 다른 네 사람이, 보다 빠르게 이 미친(?) 경쟁의 룰에 적응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합니다. 바로 '대중의 허영'이라는 기준에 말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영화든 드라마든 노래든 대중문화 장르에서 한 작품이 나왔을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대중적인 것인지, 대중적이지 않은 것인지 쉽게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어 김기덕 감독의 영화와 최동훈 감독의 영화 중 어느 것이 더 대중이 선호할만한 것인지 알아차리는 데에 어떤 전문적인 식견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가끔은 예외적인 현상이 일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합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같은 영화가 한국에서 10만명씩 관객들 동원하기도 하고(그리 많지 않은 수처럼 느껴지지만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나라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입니다^^), 비틀즈가 부른 'I'm the walrus' 같은 전위적인 노래가 히트곡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들에 대해서도 사실 간단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대중의 심리 속에 묻혀 있는 허영이라는 동기가 사회적인 분위기나 톱스타의 후광과 결합하면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가 가끔씩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허영은 '나는 가수다'의 8일 방송에서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사실 가수들은 매일 경쟁을 합니다. 음반이나 음원을 발표하는 것 자체가 거센 경쟁에 몸을 던지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이 경쟁은 상당히 선명하게 결과를 맺습니다. 구매자들이 직접 자기 돈을 내고 그 결과로 순위기 매겨지기 때문입니다.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순위만 매기는 것과, 직접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순위 매김에 참여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나는 가수다'는 다들 아다시피 500명의 청중 투표단이 가수들의 가창을 보고 순위를 매기는 게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내가 들어서 좋은' 것에 투표할까요, 아니면 '내가 보기에 수준이 높은 것 같은' 쪽에 투표할까요. 순수하게 전자라고 보기는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의 투표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비교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끔 방송사들은 대중을 상대로 '현재 방송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을 설문조사로 묻곤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현실을 대변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늘 결과가 일정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대건 시청자들은 그 당시의 TV가 '지나치게 오락적이고', '선정적이며' '저질에다' '억지 웃음을 자아낸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항상 '수준 높은 시사 보도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싶어 하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은 보다 줄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방송을 하다간 방송사가 아마 곧 망하고 말 겁니다.
그리고 8일 방송된 '나는 가수다'의 청중 투표단은 바로 이런 설문조사에 임하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큰 호평을 이끌어 낸 임재범(남진의 '빈잔')과 이소라(보아의 '넘버 원')의 무대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 무대를 본 대부분의 시청자들의 첫 반응은 아마 '우와' 였을 테지만, 이 '우와'가 바로 '우와 좋다'는 아니었을 겁니다. ('저건 뭐지;;' 였을지도..^^)
아마도 이 두 가수가 '나는 가수다'라는 방송 프로그램 없이, 바로 이런 음원을 내놨다면 '좋다'는 반응을 이끌어 내거나, 음원 판매 순위에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두 가수의 시도는 매우 매력적이고 신선했습니다. 아마도 평소에 음악 깨나 듣는다는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박수를 보냈을 법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래가 발표됐을 때 대중에게 환영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을 겁니다. 그럼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그건 바로 '허영'이라는 동기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겁니다. 대단히 '뭔가 있어 보이는' 편곡과 무대였기 때문입니다.
이들 두 사람과는 조금 달랐지만 박정현과 김범수는 가장 훌륭한 무기로 이 경기의 룰에 적응했습니다. 말하자면 '평가단에게 더 노래를 잘하는 것 처럼 보이는' 방법을 몸소 실천한 것입니다. 두 사람은 모두 최고의 가수들입니다. 하지만 이날 두 사람이 노래 말미에서 보여준 고음의 무력 시위같은 애들립이 과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느냐는 질문을 던져볼 만 합니다.
고음으로 애들립 넣기, 음 길게 끌기, 일부러 디스토션을 넣기, 더 힘들게 노래하는 척 하기, 더 큰 목소리 내기 처럼 '실제로 노래를 잘 하기' 보다는 '대중을 상대로 노래를 잘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런 방법들은 실제로 실력이 신통찮은 사람이 써도 꽤 훌륭한 효과를 내지만 진짜 훌륭한 가수가 쓰면 정말 엄청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네. 심지어 김범수나 박정현 같은 가수들이 쓰는 건 정말 반칙이라고 할 수 있죠.^^)
이날 상위에 오른 네 가수와 하위권 세 가수의 차이는 실제 실력과 퍼포먼스의 차이보다는, 누가 더 대중의 눈을 의식한 공연을 펼쳤느냐의 차이라고 - 최소한 제 눈에는 - 보였습니다. 심지어 탈락권에 접어들어 본 적이 없는 이소라조차도 위기의식을 갖고 좀 더 강한 자극을 주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김연우와 BMK는 너무 순진하고 안이했다고나 할까요. (아, 이런 룰을 잘 알고 있었는데도 하위권으로 처진 가수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런 평가와 이런 무대가 당장 없어져야 할만큼 나쁘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대중이 겪어보지 못한 음악적인 충격과 자극이 계속 이뤄지다 보면 한국 대중음악의 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은(물론 아주 조금, 아주 아주 조금입니다만) 있기 때문입니다. 뭐 이런 변화가 이뤄지지 않고, 그 방송 안에서 일어났던 모든 변화들이 그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물거품처럼 흩어져버린다 해도(사실은 이럴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진행되면 될수록 '실제로 노래를 잘 하는 것'과 '노래를 잘 하는 것 처럼 보이는 것' 중에서 후자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 대세가 될테고, 점점 더 가수들이 악에 받친 듯 소리 짜내기 경쟁에 들어간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듯 합니다. 하긴, 세상 밖을 쳐다보면 반드시 가수들만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어느 분야는 안 그럴까요.
P.S. 그런 면에서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박정현이 1등을 차지한 건 사뭇 위안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P.S. 2. 노파심에서 한마디: 혹시 제목의 '허영'이라는 말이 불쾌하신 분이 있다면, 앞으로 가수들 콘서트도 좀 가시고, 음원도 돈 내고 사서 들으시면 됩니다(아, 물론 '나는 가수다'에 나오는 음원 말고 일반 음원 말입니다).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저 위의 '허영'이란 말은 여러분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위의 '허영'이란 말은 생전 가요 듣는데 돈 한푼 쓰지 않으면서 누가 뭐라면 '돈 내고 들을 가치가 있는 노래가 없다'고 거들먹대는 분들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심은경의 '빙의 장면'을 못 보신 분이라도, 이 영화의 개요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은 분들은 이 영화의 흥행 포인트를 두가지로 압축하는 데 크게 어려움이 없으실 겁니다. 첫째는 최근 몇년 사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이른바 '80년대 지향형 추억 마케팅'이고, 또 하나는 여성 영화로서의 가능성입니다.
여성 영화라고 약간 뭉뚱그려 표현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소위 의리니 우정이니 하는 것들이 왜 남자들만의 전유물처럼 표현되느냐는 반발이 저변에 깔려 있는 작품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든가, 흑인 여강도 집단 이야기를 다룬 제이다 핀켓 스미스의 '셋 잇 오프', 그리고 교도소 동기들끼리의 여성 록밴드 이야기인 독일 영화 '밴디트' 같은 느낌의 작품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영화 '써니'를 보신 분들은 왜 이렇게 약한 표현을 쓰는지 아마 아실 수 있을 겁니다^^)을 갖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 두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살펴볼 때, 아무래도 이 두가지 요소를 통해 성공했던 전설적인 히트작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바로 곽경택 감독의 '친구'죠.
성공한 사업가인 남편과 딸 하나를 두고 별 고민없이 살고 있던 주부 나미(유호정)은 어머니 문병차 들른 병원에서 우연히 옛 친구 춘화(진희경)이 입원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춘화의 병은 암. 살 날이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춘화의 말에 나미는 오래 전 함께 어울려 울고 웃던 '써니'의 일곱 친구들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어린 나미(심은경)의 시선으로, 전남 벌교에서 서울로 전학와 처음 만나게 된 춘화(강소라)와 친구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쌍꺼풀 마니아인 자칭 no.2, 국문과 교수 딸인 욕쟁이, 미스코리아 지망생, 욱하면 무서운 문학소녀, 그리고 잡지 표지 모델인 미녀까지... 이들의 과거와 현재 모습이 교차되면서 나미는 잊고 살았던 '자기 자신의 삶'을 발견해 갑니다.
전형적인 '자아 찾기 영화'의 구도입니다. 사실 '전형적인' 이란 말을 리뷰에 쓸 때에는 대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강형철 감독에게는 예외일 듯 합니다. '과속 스캔들'도 그랬지만 '써니'는 '전형적인 수법'이라든가 '어디서 많이 본 장면'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영화입니다. 오히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코미디가 이 영화의 강점이니 말입니다.
어쨌든 이 영화와 '친구'가 상당히 유사한 흥행 요소에도 불구하고, 코미디와 느와르라는 장르 성격상 사뭇 다른 길을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코믹했던 점은 '친구'의 한 장면과 매우 유사했던 부분이죠.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어른 배우들보다 어린 배우들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다는 점, 특히 심은경이라는 천재적인 청소년 연기자의 솜씨가 불을 뿜는다는 것은 굳이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들이라도 능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영화 속 과거 모습의 재현도 정교하게 과거를 복원한다는 의미보다는 재미를 위해 어느 정도의 왜곡은 당연하다는 태도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 이를테면 영화의 배경은 아무래도 1987년쯤으로 보이는데, 시위 장면에서 굳이 그해 7월 개봉한 '록키4'가 극장에 걸려 있다는 점은 옥의 티 수준입니다. 시위 내용으로 보아 87년 전반기(즉 6.29 이전)가 더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말입니다. - 어쨌든 아시겠지만 이런 부분은 모두 재미로 따지는 겁니다. 거기에 목숨 걸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무튼 영화는 흠잡을 데 없이 유쾌하고 즐겁습니다. 이 영화가 흥행에서 대박을 내느냐 마느냐 하는 부분은,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남자들이 영화 '친구'때 보여줬던 수준으로 80년대에 청춘을 보낸 여성 관객들이 이 영화를 찾느냐에 달렸다과 봐야 할 듯 한데, 그건 좀 더 지켜봐야 알 수있을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매우 궁금하게 여기는 부분입니다.
위에서 '여성 영화로서의 가능성'을 얘기했지만, 그 부분에 너무 중점을 두면 이 영화를 보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어디까지나 그건 그냥 '가능성' 선에 머뭅니다. 어디까지나 이 영화는 - 욕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 가족용 코미디 영화입니다. 왠지 중년의 엄마와 10대 딸들이 같이 보면 좋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 들더군요.
<<< 나머지 내용에서는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영화를 더 재미있게 보실 분들은 건너 뛰셔야 할 부분들입니다. >>>
P.S.1. 이 영화를 보실 때 80년대 운동권에 대한 희화화라든가(예전의 운동권이던 오빠의 이름이 임종& 라는 거나, '노동운동 한답시고 돌아다니다가 나이 먹어서 부하 직원들 봉급이나 떼먹는 사람이 됐다'는 얘기를 듣는 점, 뭣보다 시위 현장과 여고생들의 패싸움 장면의 오버랩 등), 산타클로스의 등장으로 모든게 해결돼 버리는 데 대한 반감 같은 것은 좀 접어 두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P.S.2. 수지 역의 성인 배우가 예고편이며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소개되지 않는 데 대해 많은 억측과 관심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 스포일러를 각오하고 얘기하자면 나오긴 나옵니다. 한때 대단히 인기있었던 분이었고, 지금도 적잖은 나이지만 우아한 모습을 간직하고 계시더군요. 정 궁금하신 분은 아래 희게 보이는 부분을 마우스로 긁어 보시기 바랍니다.
P.S.3. 주제가처럼 사용되는 'Time Atfer Time'은 신디 로퍼의 오리지널 버전 대신 턱 앤 패티의 리메이크 버전이 사용됐습니다. 목소리를 들었을 때에는 트레이시 채프먼의 리메이크를 사용한 줄 알았는데 턱 앤 패티의 여성 보컬 음색이 채프먼의 판박이더군요. 굳이 리메이크를 쓴 건 신디 로퍼의 노래가 두 곡 들어가는 걸 경계한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P.S.4. 아주 오래 전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앞부분에 아역으로 나오던 제니퍼 코넬리가 뒷부분에서 엘리자베스 맥거번이 되어 있는 걸 보면서 '세월의 잔혹함을 보여주려는 은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도 그런 시도가 나옵니다. 왕년의 꽃미남 김시후가 중년 배우 L씨로 바뀌어 있는 부분에서 인생의 비애가 느껴지죠.
P.S.5. 마지막으로 딴지는 마그마의 '알수 없어'와 리처드 샌더슨의 'Reality'가 엇갈리는 음악감상실 신은 아무리 봐도 87년이라기보다는 70년대, 아무리 더 쳐 줘도 80년대 초의까지의 느낌인 듯 합니다. 80년대 중반 이후 그 분위기의 업소는 아주 조명이 캄캄해 지거나(신촌 일대), 영상 음악 카페로 바뀌어 사라졌죠. (뭐 물론 재미로 그렇다는 겁니다.^)
영화 '토르'는 미국 마블 코믹스계 작품인 '토르(그래도 진짜 발음은 '쏘오르'에 훨씬 가깝죠.^^)'를 실사 영화로 만든 작품입니다. 부분적으로 인용한 작품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영화화는 아마 처음인 듯 합니다.
이 영화의 홍보 문구는 '지금까지 영웅들은 인간이었다. 이젠 신이다'라는 것인데... 글쎄, 영화 내용대로라면 토르는 분명히 신이 아닙니다. 만약 진짜 신이라면,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영웅들과 균형이 이뤄지질 않겠죠. 아이언 맨, 캡틴 아메리카, 토르 등이 총출동하는 만화 '어벤저'(물론 영화로도 몇년 내로 나올 겁니다)같은 경우에 과연 다른 영웅들 중 누가 신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튼 이런 문제 때문에 영화는 '사실은 튜튼 신화에 나오는 신들 - 오딘, 토르, 로키 등등 - 은 신이 아니라 문명이 발달한 성계에서 온 외계인이었다는 식으로 시작합니다. 뭐 나쁘지 않습니다만, 영웅 토르가 독자적인 프랜차이즈를 만들어 가기엔 너무 스토리가 빈약합니다.
제목이 왜 저런가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텐데, 사실 오늘의 주제는 영화 속에도 나오는 '목요일은 토르의 날'이라는 말입니다. 대체 왜 목요일이 토르의 날일까요?
개인적으로 이 목요일=토르의 날이라는 것은 참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요일의 이름이 어떻게 정해졌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일단 일,월요일을 보시죠.
일요일=태양의 날=sunday 월요일=달의 날 = monday
자. 여기까지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듯 합니다. 다음 다섯개의 요일 이름은 모두 별의 이름이자, 오행사상의 오행의 이름이며, 그리스-로마-튜튼 신족의 신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복잡한 뜻이 전혀 혼란 없이 모두 잘 들어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화요일=불의 날=화성의 날=마르스(로마)의 날=튀르(게르만)의 날=Tuesday
마르스는 게르만 신화의 튀르와 같은 전쟁의 신이면서 영어로 화성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참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된 겁니다. 즉, 그리스/로마에서 정해진 각 날의 이름은 그때까지 알려진 태양계 다섯 행성의 이름이자(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의 존재가 알려진 건 한참 뒤의 일입니다) 신들의 이름인 것이고, 그 이름들이 로마의 게르만 정복과 함께 각각 해당하는 신들의 이름으로 '번역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 번역의 기준이 일반적인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하면 각각의 주신인 주피터-보탄(오딘의 다른 이름)이 먼저 대응되어야 할텐데, 이 요일 이름의 번역을 보면 기능별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즉 주피터는 번개의 신이므로 게르만 신화의 뇌신 토르로 연결되고, 상업의 보호신인 머큐리(헤르메스)는 곧 게르만 신화의 상업의 신인 보탄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어떤 해설을 보면 금요일이 가정의 여신인 프리그(프리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라-주노에 해당)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저런 원리를 안다면 있을 수 없는 엉터리 해설입니다.
그럼 마지막.
토요일=흙의 날=토성의 날=새턴(사투르누스, 로마)의 날=...=Saturday
로마 신화의 농업의 신인 사투르누스는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와 동격입니다. 모든 신들을 낳은 아버지인 셈이죠. 다른 신들에 비해 이 사투르누스(새턴)은 일찌감치 게르만 지역으로 진출해 이미 영역을 확보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래서 새턴은 다른 신으로 번역되지 않고, 그냥 받아들여집니다.
아무튼 참 신기한 것은 이런 의미가 고스란히 실린 채 동양으로 와서 일~토요일의 이름이 되었다는 것인데, 보면 볼수록 신기하게 착착 맞아떨어지는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론은 그래서 '목요일은 토르의 날'이라는 겁니다.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느냐. 사실은 '토르'를 보긴 봤는데 영화에 대해서 도무지 할 얘기가 없더라는 겁니다. 뭐 줄거리는 전혀 뇌의 사용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냥 앉아서 하하 호호 보기만 하면 됩니다. 뭐 아주 재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순진하고 열린 마음으로 앉아서 즐기고 나오면 되는 영화입니다.
라는 영화 치고는 캐스팅이 상당히 화려합니다. 나탈리 포트먼이 토르의 여친인 제인(그렇다면 토르는 타잔?) 역으로 나오는 것을 비롯해 안소니 홉킨스가 토르의 아버지인 오딘, 르네 루소가 토르의 어머니인 프리가 여신 역입니다. 그런데 워낙 영화의 성격 자체가 늘씬늘씬한 스칸디네이비언 남녀들로 가득 차야 하는 터라, 일본의 희망 아사노 타다노부는 온데간데 없고, 웬 넙데데한 동양인 조연 하나만 눈 앞에서 왔다갔다 한다고 느끼게 됩니다(전 영화 끝나고 나서야 그게 아사노라는 걸 알았습니다). 배우들 보는 재미도 확실히 있습니다.
어쨌든 이 영화로 가장 큰 덕을 보게 될 배우는 토르 역의 크리스 헴스워스입니다. 최근 영화 '스타 트렉'에서 시작하자마자 죽어 버리는 커크 선장의 아버지 역('하우스'의 카메론 박사님과 부부로 나왔죠)으로 등장해 일부 훈남 마니아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던 헴스워스는 이 작품을 통해 인생 역전을 이룰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듯 합니다.
(그런데 3형제가 배우라니, 잘하면 볼드윈 패밀리를 제치고 헴스워스 패밀리가 뭔가 해낼 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해서 '케네스 브라나와 이 많은 스타 배우들이 과연 이 영화에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도 남지만, 영화 '토르'의 등장을 학수고대했을 마블 팬들이 아니더라도 입장료가 아까울 수준은 아닙니다.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즐기시기 바랍니다. 단 3D 효과는 크게 기대할 건 못 됩니다.
P.S. 마지막으로 저번에도 한번 소개했던 영상 같은데, 무려 20여년전 영화에 나오는 '토르(?)'의 모습입니다. 엘리자베스 슈가 십대 소녀를 연기했던 'Babysitting Blues'의 한 장면이죠. 1985년 노량진의 한 다방에서 자막도 없는 비디오 테이프로 본 영화인데 신기하게 이 장면은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물론 저 토르 역의 배우가 바퀴벌레 외계인 빈센트 도노프리오라는 것은 아주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MBC TV '나는 가수다'가 처음 나올 때 썼던 글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프로그램이 역풍을 맞았고, 담당 PD가 전격 교체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물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런 사태를 제가 예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 비슷한 얘기도 한 적이 없습니다.)
'나는 가수다'는 보고 있으면 아쉬움과 한탄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몇가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순기능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진짜 음악'의 가치를 상당수 시청자들에게 다시금 느끼게 했다는 점이죠.
그리고 또 하나의 순기능을 이제 기대하게 됐습니다. 바로 '실력에 비해 대중에게 덜 부각된 가수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런 목적을 수행한다면 내일부터 새로 출범하는 '나는 가수다'는 새롭게 존재의 가치를 평가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기대를 갖게 하는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김연우'라는 이름입니다.
지난해 12월29일, '슈퍼스타K 2'의 열기가 다 식기 전에 썼던 글입니다. 이때만 해도 '위대한 탄생'은 막 시작하고 있었고, '나는 가수다'같은 프로그램이 나타나는 상황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붙인 이 글의 제목은 ‘슈퍼스타 K’가 가수들에게 준 선물은?' 이었습니다. 5개월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현재의 상황은 이때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쪽으로 가고 있는 듯 합니다.
‘슈퍼스타 K’가 가수들에게 준 선물은?'
<슈퍼스타 K 2>(Mnet) 최고의 수혜자는 허각. 이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 그의 우승으로 가장 크게 덕을 본 사람은 누구일까? 케이블 TV Mnet 사장? 허각의 노래를 만든 작곡가 조영수? 허각의 가족? 여자친구? 사실 다들 허각의 우승으로 만세를 부른 사람들이지만 순서를 매기자면 김태우를 빼놓을 수 없다. 벌써 한 달 이상 지났지만 기억들을 되새겨보시기 바란다.
우승을 결정짓는 마지막 무대에서 허각은 김태우의 ‘사랑비’를 불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말했다. “김태우가 그렇게 노래를 잘하는 가수인 줄 몰랐어.”조금 더 시계 바늘을 앞으로 돌려보면 <슈퍼스타 K 2> 심사위원 윤종신은 허각에게 이렇게 말했다. “허각 씨가 앞으로 상대하게 될 가수들은 김태우 김연우 김조한 같은 가창력으로 승부하는 가수들입니다. 그러려면 좀 더 분발해야 합니다.”
솔리드 출신의 김조한은 아는데 김연우는 누굴까 하는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하자면, 김연우는 토이의 객원 싱어일 때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 ‘여전히 아름다운지’ 같은 히트곡을 남긴 최강 미성의 가수다. 어쨌든 김태우 김연우 김조한 모두 용모로 따지자면 결코 비디오형으로 분류될 수는 없는 가수들이다. 대신 그런 약점을 소름 끼치는 노래 솜씨로 극복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윤종신은 허각 역시 가요계로 나간다면 그들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할 것임을 정확하게 짚어냈고,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대다수 시청자들은 의아해 했다. “아니, 허각이나 그네들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그리고 허각이 부른 ‘사랑비’는 많은 사람들에게 윤종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해줬다. 그 노래 잘하는 허각도 김태우만큼 ‘사랑비’를 소화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슈퍼스타 K 2>가 가르쳐 준 교훈 중 하나는 ‘어울리는 노래’가 가수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이었다. <슈퍼스타 K>는 몰라도 MBC <스타 오디션-위대한 탄생>(이하 <위대한 탄생>)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노래를 했다가 멘토 방시혁에게 당장 쫓겨나게 되어 있다. 허각에게 ‘사랑비’가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는 아니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 노래 때문에 사람들은 허각이 아직 더 다듬어져야 할 가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반인들이 프로에 대한 존중 혹은 존경을 느낄 기회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위대한 탄생>의 다섯 멘토 중 하나인 방시혁은 자신 앞에 선 도전자들이, 그리고 시청자들이 이 부분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지적한다. “요즘 가수 되려고 준비하는 친구들이 대부분 ○○○ 씨보다 노래를 잘해요.” “기존 가요계를 비판하려면 실력으로 압도해야 하지 않겠어요?” 농담이 아니다.
요즘 아이돌 그룹 멤버들을 보고 ‘붕어’ 어쩌고 했다간 엄청난 망신을 당할 수 있다. 뮤지컬계가 제정신이 아니라서 앞 다퉈 아이돌 그룹 멤버들을 데려다 주인공을 시키는 게 결코 아니다. 분야에 따라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선명하기도 하고, 흐릿하기도 하다. 바둑 실력에 자신이 있는 어떤 사람이 이세돌이나 이창호와 비슷한 실력이라고 주장하면 다른 사람들은 몇 단이냐고 물어볼 것이다.
그때 그 사람이 “인터넷 바둑에선 5단”이라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상상해 보자. 자기가 던지는 공이면 박찬호는 몰라도 김광현 정도는 될 거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어느 팀에서 뛰고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주말마다 직장인 야구팀에서 뛰는데 작년에 10승이나 했다”고 말하면 정신병자 취급받을 것이다.
노래방에서 자신이 마이크만 잡으면 박수가 쏟아진다는 사람들은 동전을 넣고 치는 야구 연습장에서 때릴 때마다 공이 쭉쭉 뻗는다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적당하다. 노래방 실력으로 방송에 출연하는 가수들과 자신의 실력을 견주는 사람이야말로 야구 연습장 실력으로 자신을 이승엽이나 이대호와 비교하는 사람과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것, 그것이 <슈퍼스타 K>와 <위대한 탄생>의 공적이다. 그래서 가수들과 가요계는 <슈퍼스타 K>에 고마워해야 한다. <끝>
윗글에서 '실력에 비해 덜 알려진 가수'로 김연우를 든 것은 그냥 예로 든게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에서 가장 노래 잘 하는 가수는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보통 김범수인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김범수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실력파는 누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김연우와 이승열을 꼽게 되더군요. (아, 물론 조용필에서 신승훈 이승철에 이르는, 이미 레전드의 자리에 있는 가수들을 같은 선에서 비교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제가 김연우나 이승열의 광팬은 아닙니다만, 약간 덜 대중적인 길을 걸어 온 이승열에 비해 김연우는 대단히 대중적인 노선을 걸어왔으면서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잘 모른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합니다. 뭐 '내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란 노래를 들으면 '아, 이 노래 유희열이 부른 거 아닌가?'라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상황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이대목에서 김연우의 노래 한 곡. 영화 '사랑을 놓치다'에 삽입된 '사랑한다는 흔한말'입니다.
고음이 가수의 가치를 입증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야구에서 구속만 빠르다고 최고의 투수가 되는 것은 아닌 것에 흔히 비교합니다), 이런 맑고 투명하면서도 힘찬 고음의 소유자는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는 면에서 김연우의 목소리는 정말 탁월합니다.
'나는 가수다'에 김연우 같은 가수들이 잇달아 등장한다면, 그리고 그 가치를 새롭게 증명한다면 이건 프로그램에도 정말 좋은 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실의 시대', 혹은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사람 중에(전 세계에 1000만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 질 경우 절대 보러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감독이 쩐 아인 훙(흔히 트란 안 훙이라고 번역되는 Tran anh hung의 실제 발음은 여기에 훨씬 가깝다고 합니다. 한자로는 陳英雄. 베트남어에 '트란'이란 발음은 없다는군요)으로 결정되고, 나오코 역의 배우가 기쿠치 린코로 결정되면서 "이따위 영화는 안 만들어지는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특히 쩐 감독의 최신작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본 사람들 사이에선 이런 감독에게 영화화를 허락하다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 정신이 아닌게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었죠.
막상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정작 영화가 만들어지자 마음 속 한 구석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건 그래도 한번 봐 줘야 하는게 아닐까. 욕을 하더라도 어떻게 만들어 놨나 한번은 봐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결국은 이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의 첫 느낌. '못 볼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만족과는 거리가 멀더군요.
원작을 아니 보신 분에게 '상실의 시대'의 줄거리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지는 참 난감합니다. 특히 영화와 연동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권장사항은,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은 아예 영화를 안 보는게 낫다"입니다. 줄거리 따라가기도 아마 벅차지 않을까 싶네요.
1960년대말, 와세다 대학 신입생이 된 와타나베(마츠야마 켄이치)에겐 자살한 친구의 연인이었던 나오코(기쿠치 린코)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마음 속 상처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나오코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나오코는 연인의 자살이 준 상처로 인해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있죠. 그러는 사이 와타나베는 발랄하고 엉뚱한 동급생 미도리(미즈하라 기코)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나오코가 있는 산 속 요양원과 미도리가 있는 도쿄의 캠퍼스 사이를 오가며 와타나베의 스무살이 지나갑니다.
'상실의 시대'는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영화로 옮기기 쉬운 작품일 지도 모릅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어지럽게 현실과 환상을 오가지도 않고, 시간에 따른 내러티브의 진행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분명히 영상화하는 데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온게 사실입니다.
그때문에 원작자 무라카미도 쏟아지는 영화화 제의를 굳게 거절해 온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쩐 아인 훙이 이 영화를 만들게 허락하는 모습을 보니, 무라카미는 아마도 영미권의 감독이 제안을 했다면 진작에 OK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가 원한 건 원작의 감성을 잘 살려 줄 연출이 아니라, 이 작품을 영상물로 만들어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할만한 연출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약간은 불측한 상상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고심을 그대로 드러내줍니다.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의 불만은 기쿠치 린코가 과연 나오코 역에 적합한 배우냐는 것으로 모아질텐데, 이 답은 보기 전부터 많은 분들이 생각하신 바와 같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나오코가 단순히 산골 요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자폐증의 스무살 여자라면 기쿠치는 꽤 좋은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나오코는 스무살 와타나베의 가슴을 찢어 놓을 만큼 아름다워야 하는데, 이 배우는 전혀 그런 역할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쩐 감독의 눈이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입니다.
(물론 위의 속물적인 '세계적인 관심' 이론을 적용하면 또 상황은 달라집니다. 쩐 감독과 무라카미는 이런 대화를 나눴을 수도 있겠죠.
쩐: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구치 린코밖에 없어. 무: 뭐라고! 그건 말도 안돼! 그건 나의 나오코에 대한 모욕이야! 쩐: 이봐, 잘 생각해 보자고. 나는 이 영화를 갖고 유럽 3대 영화제에 갈 수 있는 감독이야. 그런데 거기엔 아시아의 뮤즈가 필요하다고. 유럽의 바보들이 생각하는 아시아 최고의 미녀 여배우가 누구겠어? 일본 유일의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 배우를 두고 왜 내가 다른 선택을 해야 하지? 무: 그래도 스무살 나오코 역에 서른살 먹은 못생긴 배우를 쓴다는 건 좀... 쩐: 오우 노우. 유럽의 바보들이 보기에 일본 여배우는 다 베이비페이스야. 당신이 원하는 게 한국 중국 일본의 관객들인가? 그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미 더 올라갈 데가 없어. 당신에게 진정 필요한 건, 아직 당신을 모르는 세계의 독자들이야! 그럼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다고! 무: 그, 그럴까? 쩐: 그럼! 당연하지! 유럽 매스컴의 찬사가 보이지 않아? '아시아의 신비로운 미녀 린코가 무라카미의 원작을 환상적으로 재현해 냈다' 부라보! 기쿠치가 들어 오면 우린 벌써 해 낸거나 다름없어!
<= 물론 전부 농담입니다. 절대 도청한 적 없습니다. 제 상상입니다.)
심지어 기쿠치 린코를 나오코로 쓴 것보다 더 나쁜 점은 나오코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겁니다. 나오코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와타나베의 갈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나오코는 오히려 주인공 와타나베보다 영화 전반에서 더 중시되고 있습니다.
나오코에 집착하는 감독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일단 미도리. '봄날의 곰처럼'이 없는 미도리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쩐 감독은 과감하게 미도리 부분을 삭제해 버립니다.
미도리 역의 미즈하라 기코는 한국계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0.1초도 의심하지 않고 동남아 혼혈이라고 생각했을 느낌입니다. 아마도 쩐 감독의 취향이 가장 잘 반영된 캐스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울러 쩐 감독이 이해한 이 작품의 분위기는 대다수 한국 독자들의 느낌과는 분명한 온도차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독자들이 이 작품을 좋아한 이유는 절망과 희망이 5:5 정도로 적절하게 배합된 느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쩐 감독은 7:3 정도로 절망에 집착합니다. 심지어 마지막 시퀀스조차도 와타나베의 새로운 희망을 보여준다기보단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음침함만 풍겨 나옵니다.
마츠야마 켄이치의 연기력이나 외모는 와타나베를 구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지만 그 혼자서 건져 내기엔 다른 캐스팅이나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 무겁습니다. 게다가 충실하게 와타나베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면, 이 영화는 그 시선을 너무 흩어놓습니다. 심지어 나오코나 미도리도 아니고, 레이코의 시선으로도 영화를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조 아무개 감독님의 지적대로 이 레이코는 원작과는 달리 너무 미인입니다. 게다가 레이코스러운 농담은 완전히 사라진, 이상할 정도로 심각하고 차분한 레이코입니다.)
쩐 아인 훙이 성공하고 있는 건 다양한 구상을 통해 구현되는 화면의 색채와 영상미입니다. 특히 60~70년대풍의, 다소 정제되지 않은 원색 위주의 색감과 자연이 보여주는 조화는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는 대안이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무라카미가 왕가위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마음이 놓이는 '상실의 시대'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상실의 시대'는 필사적으로 원작 '상실의 시대'를 요약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빠져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살려 놓은 부분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살려져 있는지는 매우 의문입니다. 다소 천박한 용어지만 '선택과 집중'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80년대에 60년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상실의 시대'가 여전히 지금의 20대에게도 유효한 원작이라면, 그 이유는 '스무살'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스무살 때에는 이 세상에서 '스무살 전후의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이나 사물은 대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인생에서도 '열다섯에서 스무살 사이에 일어난 일' 이외의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매우 힘든 법이죠. 그런 사건들 역시 긴 시선에서 보면 다섯살 때나 일곱살 때 일어난 그저 그런 사건들과 별 차이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려면 10년 이상 더 살아 봐야 합니다.
무라카미는 어느 시대, 일본이란 나라에 살았던 '스무살 짜리' 들의 이야기를 통해 온 세계가 공감한 '상실의 시대'를 써 냈고 그걸로 세계적인 작가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24년전에 쓰여진 이 작품을 영상으로 변신시키는 모험에 참여했죠. 과연 그 결과가 어떤 것이 될지는 전 세계의 '스무살 짜리' 들이 판가름할 일인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비관적이지만, 굳이 영화도 책도 읽지 않은 그 언저리 나이대의 분들에게 권장한다면, 일단은 책을 읽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P.S. 레이코의 트라우마 부분은 오히려 영화적으로 매력적이었을 듯 한데 왜 사라졌는지 궁금하군요.^
포스터만 보고도 이렇게 흥미가 가는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었습니다. 물론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팬들과는 달리 저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고, '불량공주 모모코'는 단 한번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끈불끈 일어나게 한 것은 이 영화의 초기 설정입니다. 한 중학교의 종업식날(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종업식-짧은 봄방학-새 학년 시작의 순서입니다), 여느 날처럼 아이들은 급식으로 나온 팩 우유를 마시고, 여교사가 학생들에게 평온한 어조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거나 말거나 자기 페이스에 열중해 있는 아이들. 하지만 교사의 말이 "여러분 가운데 내 아이를 죽인 사람이 있다"는 데 이르자 일시에 교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해집니다.
미혼모인 교사는 처음 자기의 아이 아버지가 존경받아온 교사이며, HIV 보균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혼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사는 혼자 딸을 키워왔고, 아이 봐 주는 사람의 사정 때문에 일주일에 하루씩은 아이를 학교에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는 교정에서 시체로 발견됩니다.
경찰의 수사 결과는 사고사. 하지만 몇몇 단서는 사고가 아니라는 단서를 던지고, 결국 교사는 두 명의 자기 반 학생이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네. 의심이 아니라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하지만 상대는 처벌할 수 없는 미성년자. 그래서 교사는 더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그 두 학생의 우유에 뭔가를 주사기로 넣었다"고 하는 거죠.
사실 저는 이 내용이 영화 전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더군요. 이 내용은 말하자면 2시간짜리 영화에서 앞부분 35분 정도, 즉 도입부에 해당하는 내용입니다. 진짜 '이야기'는 이런 설명이 끝난 뒤, 즉 여교사는 학교를 떠나고 남아 있는 반 아이들과 가해자인 두 아이가 어떻게 학교 생활을 이끌어가는가를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일본 여배우 중에 가장 관심이 가는 배우를 꼽으라면 소(아, 이게 아니구나) 아무래도 마츠 다카코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뭔가 살짝 심심한 듯 다소곳하면서도 엉뚱한 캐릭터를 연기하는 데 강점을 보여 온 배우죠. 그런 배우가 '아이를 잃고, 아이를 죽인 자기 반 학생들에게 보복하는 미혼모 여교사' 역할을 한다는 건 상당히 흥미로운 변신입니다.
이 대목에서 나카시마 감독의 솜씨를 일단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소에도 그렇듯 집중 같은 것은 전혀 할 수 없는 아이들, 미소까지 머금은 여교사의 표정, 온갖 장르를 오가는 화려한 음악과 유려한 영상 속에서 뼈속까지 시린 대사들이 부조화 속의 조화를 연출해 냅니다.
아마 전혀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이 이 영화를 본다면 아름다운 학원드라마 같은 앞부분이 점점 소름끼치는 가면의 공간처럼 변해가는 데 전율을 느낄 듯 합니다. 훌륭합니다. 특히 아래 사진 같은 장면은 배신과 음모의 반전을 다루는 데 매우 효과적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영화에서 현실의 고발이나 진지한 문제제기를 보는 듯 합니다만, 저는 제목에도 썼듯 온 사회에 만연한 '중2병' 환자들에 대한 어른들의 반격이야말로 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중2병에 대한 수많은 접근이 이뤄졌지만, 대부분 어른의 시각에서 아이들을 선도한다는 시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느낌입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제정신이 아닌 짓을 해도, 어른이 좀 참고 양보해서 선도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식의 시선이 조금은 깔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이 영화는 다릅니다. '너희들이 중2병 수준으로 도발해 오면, 우리 어른들도 중2병의 시선에 맞춰 너를 박살내 주겠다'는, 말하자면 '더 이상 애라고 봐주지 않겠다'는 엄포가 느껴집니다. 이 자체가 유머일 수도 있겠지만, 이 내용을 풀어가는 방식은 사뭇 진지합니다.
자기보다 젊은 세대를 대할 때 어른의 제대로 된 태도라는 것은, '10대는 20대나 30대를 경험해 보지 않았으니 알 리가 없다. 10대를 살아 본 사람이 10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나카시마는 이미 그런 접근으로 세대간 화해를 하기엔 너무 늦었다며 조종을 울립니다. 거기에 희망 같은 것은 없습니다.
'더 이상 대들면 밟아서라도 교정해 주겠다'는 나카시마의 시선이 10대나 20대 관객들에겐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참 궁금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관객들이 더 봐야 할 영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 물론 이 영화의 재미는 '어른들'이 더 느낄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편에 서 있는 영화기 때문이죠.
(여기까지. 나머지는 스포일러)
'고백'의 구조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갈수록 태산'인 반전의 반전입니다. 나름 좋은 교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여교사가 아무리 살인범이지만 자기 제자들이 먹는 우유에 에이즈 환자의 피를 넣을 수 있었을까. 이런 순진한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영화상으로는 피를 넣으려 했지만 남자의 만류로 넣지 못했다고 되어 있는데 어쨌든 방해가 없었다면 넣고도 남았을 겁니다.
마지막 대사, 여교사가 슈야의 의도를 뒤집어 전화 버튼을 누르는 순간 교정이 폭파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를 날려 버렸다는 것을 알려주는 순간 슈야는 발작을 일으키고, 여교사는 이런 요지의 말을 합니다.
"이렇게 절망에 빠지는 것이 너에겐 기회일거야. 그렇게 절망하는 순간에 갱생의 계기가 찾아오는 법이니까..... 물론 농담이지롱."
원작과 영화의 차이는 마지막 대사라고 합니다. 즉 마지막 대사를 넣은 것이 나카시마 테츠야의 의도라는 얘기죠. 이 '농담이지롱'은 한국식으로 하자면 '~~ 막 이래' 라는 식으로 지금 한 말은 나의 진심이 전혀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체 저 말의 의도가 뭐냐고 고민하시는 분도 있는 듯 한데, 제가 보기엔 그 말을 하기 직전, 마치 자기가 이렇게 슈야를 절망에 빠뜨린 것이 그가 제대로 성장하기 위해 절망이란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교육적인 의도에 의한 것인 양 포장한 것이 농담이라는 뜻입니다. 즉 이 '농담이지롱'은 '내가 너같은 쓰레기의 갱생 따위를 신경쓸 것 같아?'라는 비웃음이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영화 속 아이들은 말합니다. '어른이니까 참아야죠' '이해해 줘요' '그런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교사가 자기 학생을 외면할 수가 있지? 그건 교사의 의무 아닌가?' '우리에게도 권리가 있어요' 어른이 기대하는 아이다운 순진함은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 이 영화에 나오는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라는 이유로 참아야 하는' 어른들의 약점을 다 파악하고 그걸 한껏 사용하자는 영악한 악마들이거나, 욕구와 본능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하등동물뿐입니다.
어느 쪽이든 더 이상 관용은 없다, 는 시선은 참 신선하긴 합니다. 그런데 정말 영화처럼 할 수 있는 어른이 있을까요? 과연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하면 정말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위대한 탄생'의 최대 화제 인물은 아무래도 권리세였던 듯 합니다. 과연 12강에 오를 실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통해 계속 논란을 만들어 냈던 권리세는 결국 12강이 겨루는 첫번째 라이브 무대에서 황지환과 함께 첫번째 탈락자가 됐습니다.
사실 '위대한 탄생', 더 나아가서 '슈퍼스타K' 류의 포맷에서 이 사람의 실력이 결선 출전자 가운데 몇등이냐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프로그램들은 '누가 가장 노래를 잘 하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누구를 가장 좋아하느냐'를 보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권리세의 탈락은 이미 예정돼 있었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권리세의 팬덤이 약하다는 뜻이 아니라, 지난번 '슈퍼스타K' 시즌 2의 첫 결선과 마찬가지 결론이라는 의미에서입니다.
벌써 한참 된 지난해 9월17일, '슈퍼스타K' 시즌2도 11명의 도전자가 첫번째 생방송 결선 무대에 올랐고, 이날 3명이 탈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3명은 김소정, 김그림, 이보람이었죠.
김소정과 이보람은 도전자들 중 드물게 댄스와 노래를 함께 하겠다는 쪽이었고, 김그림은 논란이 일었지만 어쨌든 참가자들 가운데 미모로는 첫손에 꼽을만한 후보였습니다. 어찌 보면 첫날 탈락한 세 도전자는 전체 본선 진출자 가운데서도 미모로 TOP3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권리세의 경우에서 보듯 한국에서 이런 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 미모는 관심을 끄는 요인은 되지만 특별히 오래 생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미 증명된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당락의 절대 조건인 시청자 투표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성비를 따져 보면 여성이 절대 우위에 있고, 여성 시청자의 절대 다수가 남자 후보에게 투표한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미 '슈퍼스타K' 시즌 1에서도 나타났죠. 마지막으로 갈수록 여성 도전자인 길학미의 우승 가능성은 점점 낮게 평가됐습니다. 다른 여성 도전자들에 비해 여자 시청자들의 표를 많이 받아 온 길학미인데도 '성 대결'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던 것이죠.
그렇다고 보면 '미모가 돋보이는' 권리세의 경우에는 그 운명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닙니다.
혹자는 '미모가 문제가 아니라 노래 실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탈락한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지금껏 '위대한 탄생'을 열심히 시청해온 분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권리세는 지금까지 바로 그 '실력' 때문에 특혜 논란을 자아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탈락한 바로 그 무대에서 권리세는 빛을 발했습니다. 자우림의 '헤이 헤이 헤이'를 부르면서 권리세는 이제서야 재능의 단초를 발휘했다고 할까요. 이날의 퍼포먼스만 놓고 보면 TOP5 안에 들만한 모습이었습니다. 물론 권리세가 이전보다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여준 반면, 나머지 도전자들은 첫 라이브 도전에서 심하게 부진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권리세보다 노래 실력으로는 훨씬 나은 것으로 평가됐던 이태권 등이 큰 무대의 긴장을 이기지 못하고 크고 작은 실수로 안타까움을 자아낸 반면, 권리세는 평소 기량보다 오히려 안정된 모습을 보여 '현장 체질'임을 드러냈습니다.
이미 시청자들에게도 익숙해진 얘기지만, 이런 오디션에서의 성패는 역시 얼마나 현장에 강하냐가 좌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많은 도전자들에게 이런 무대가 처음이겠지만 그래도 노지훈이나 김혜리처럼 평소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인물들이 있으니, '꿩 잡는게 매'라는 얘기가 나오는 거겠죠.
이날 무대를 놓고 보면 노지훈과 김혜리는 감히 다른 후보들이 도전할 수 없는 TOP2의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특히 김혜리는 고단위 물량 투입의 결과로, 용모에서도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보였더군요.^ 백청강도 좋은 무대를 보여줬지만, 그건 아무래도 노련한 김태원의 선곡이 큰 힘을 발휘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015B도 리메이크했던 나미의 '슬픈 인연'은 백청강의 다소 과장된 창법이 잘 녹아들 수 있는 곡입니다. 특히 남자가 소화할 때에는 늘 지적됐던 백청강의 비음 섞인 고음이(본래 여자 노래라는 점에서)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백청강의 진짜 실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물론 시청자들이 절대적인 성원을 보내고 있으니 이건 별개의 사안이죠.^^)
반면 김윤아를 멘토로 삼은 정희주와 백새은은 앞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할 듯 합니다. 정희주는 박상민의 '하나의 사랑'을, 백새은은 주주클럽의 '나는 나'를 골랐는데, 이 두 노래는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점에서 오디션 곡으로는 최악입니다. 노래에 기승전결이 있고, 확실한 클라이막스가 있어야 도전자들의 호소력이 빛을 발할텐데, 둘 다 그런 노래가 아니죠. (전에도 수없이 말해 왔지만, 오디션에서 '드라마틱한 선곡'은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정희주의 경우엔 신승훈도 정확하게 이 부분을 지적했습니다.)
김윤아 본인이 다소 마이너 취향이라 해도, 자기 패밀리의 성공을 위해선 좀 더 대중적인 선곡이 필요할 듯 합니다. 이 부분을 고치지 않으면 결과는 불보듯 뻔합니다.
P.S. 이제 막 시작한 '위대한 탄생', 이번엔 누가 새로운 스타로 떠오를까요. 그런데 프로그램의 컨셉트 상 이미 멘토들에게 너무 초점이 맞춰져서 누가 1등을 하건, 허각이나 장재인 만큼의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P.S.2. 권리세도 재일교포 출신으로 이만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분명 가정사나 성장기에 시청자들의 감정선을 자극할만한 포인트가 있었을텐데, 제작진이 그만큼 세심하지는 않았다는 뜻이 될 것 같습니다(아쉽습니다^^). 앞으로 권리세를 국내에 데뷔시키려는 분들이 있다면 참고하실만한 부분일 듯 합니다. ...어쨌든 앞으로의 대결 관전 포인트는 '실력이냐, 감정이냐'라고 해야 할 듯?
영국 왕이 된다는 건 한때 세계의 제왕이 되는 것과 거의 비슷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비록 베르사이유나 쉔브룬 궁, 자금성 같은 거대한 궁궐도 없고, 음식은 그냥 그렇고, 본토의 인구 역시 프랑스나 독일의 절반도 안 되는 정도였지만 해가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식민지로부터 거대한 부가 밀려들어오던 시절이 있었죠.
퀸 빅토리아의 기치 아래 영국 신사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국제적 감각과 함께 가장 발전된 식민 통치 형태를 개발해가며 인류 역사상 이전의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진정한 세계 제국의 엘리트들을 길러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는 아직도 외국어 중 하나만 배워야 한다면 영어를 배우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물론 이건 이제 영국보다는 미국 때문이라고 할 분도 계시겠지만 그 미국이 영어를 쓰고 있는 것이 바로 영국 때문이라는 걸 생각하셔야겠죠.ㅋ)
19세기 독보적인 세계 강국의 위치에 올라선 영국은 20세기 이후 후발 유럽 국가들과 세계 전역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칩니다. 1차대전의 승전으로 한숨을 돌렸지만 숨을 죽였다고 생각했던 독일은 어느새 원기를 회복, 총통 각하의 영도하에 다른 나라들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일찌기 수백년 동안 유럽 대륙의 균형자 역할을 자임했던 영국이 보기에 상황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인 조지5세는 노쇠해갔고, 영국 왕실의 고민이 시작됩니다. 왕위를 이어야 할 왕세자 데이비드(뒷날의 에드워드 8세, 더 뒷날의 윈저 공)는 미국인 이혼녀에게 빠져 보위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윈저 공은 비록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해도 히틀러와 나치즘에 상당한 호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에 장차 독일과 일전을 벌이게 된다면 국가를 대표하는 데 있어 취약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요크 공작으로 불리는(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영국 왕세자는 웨일즈 공작, 그 바로 아래 동생은 요크 공작의 지위를 갖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Prince of Wales'라는 말 자체가 '영국 왕세자'라는 뜻입니다) 둘째 알버트. 그런데 이 알버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말더듬이라는 점이었죠. 여기서부터 '킹스 스피치'가 시작됩니다.
요크 공작 알버트(콜린 퍼스)는 대중 연설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자신의 약점을 치료하기 위해 나서지만 뾰족한 효과를 보지 못합니다. 아내(헬레나 본햄 카터)를 통해 호주 출신의 언어치료사 로그(제프리 러시)를 만나지만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로그가 녹음해 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난 알버트는 서서히 자신이 치료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는 사이 아버지 조지5세가 죽고 장남 데이비드가 왕위를 계승, 에드워드 8세가 되지만 이혼녀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 논란으로 결국 자진 퇴위합니다. 그 결과 별로 왕이 되고 싶지 않았던 알버트가 새로운 왕 조지 6세가 됩니다.
솔직히 이런 이야기로 영화를 만든다는 건 참 어지간한 사람들에겐 상상하기 힘든 일입니다. 영화에 대해 설명할 때 누가 '무슨 영화냐'고 물으면 '응, 영국 왕이 말더듬이라서 연설을 못해. 그래서 치료받는 얘기야'라고 하면 누가 그 영화를 보고 싶을까요. ㅋ
하지만 놀랍게도 이 영화는 재미있습니다. 물론 세 명의 연기 9단이 투입되지 않았다면 이런 영화는 만들어졌을 리가 없겠지만, 그보다는 영국 영화 특유의 탄탄하고 유머 넘치는 대본에 첫번째 공로를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인물들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세심함을 잃지 않았고, 역사의 기록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해 냈습니다. (네. 걸핏하면 팩션 타령을 하면서 역사 왜곡을 작가의 창의력과 착각하는 몇몇 작가분들이 참고하셔야 할 작품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걸핏하면 셰익스피어를 인용해대는 이 영화의 대본이야말로 바로 대영제국의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반면 '리처드 3세' 오디션을 보는 로그에게 극단 관계자들이 '호주 사투리 쓰는 너따위가 어떻게 영국 왕 역할을 하겠다는 거냐?' '퍼스? 퍼스에도 극단이 있냐?' 고 빈정대는 장면은 대영제국의 다크 사이드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 조지 6세 가족. 콜린 퍼스에 결코 뒤지지 않는 훈남 왕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메시지를 따로 얘기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두 남자 어른 사이의 우정이라는 것은 사실 일반인과 별로 대화할 짬이 없었던 왕자가, 자신을 격의 없이 대하는 호주 출신의 아마추어 배우에게 호감을 가질 가능성은 의외로 꽤 큽니다. (말하자면 바로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인 거죠. ㅋ) 얼핏 사기성이 엿보이는 이 호주 출신 아저씨에게, 어느날 제발로 찾아온 환자가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 2위인 왕자님이라는 건 복음과도 같은 소식이었을 겁니다. 인생 역전의 기회였달까...
그러니까 이 두 남자의 관계가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계급을 초월한 두 남자의 우정'인지 아닌지는 뭐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깊이 생각할수록 이상해집니다) 그냥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여유 넘치는 영국식 코미디로 즐기면 되는 겁니다.
단 이 영화가 전해주는 진실 가운데 분명한 것은 왕이나 왕자로 산다는 것이 그리 편안한 팔자만은 아닐 거라는 점입니다. 실제로 조지 5세의 아들 형제들은 참 복잡한 팔자로 살았습니다. 조지 5세는 다섯 아들을 뒀습니다.
장남 에드워드 8세의 얘기는 세기의 러브스토리로 포장됐지만 뒷얘기를 까면 까 볼수록 책임감없는 이상한 왕자와 문란한 이혼녀의 막장 스토리로 가는 기미가 있고, 4남 조지 왕자는 묘한 성적 취향 때문에(bi....) 사회적 물의를 빚었지만 결국 2차대전중 전사하는 바람에 전쟁 영웅이자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표상으로 곱게 포장된 해피엔딩(?)의 주인공입니다.
(조지 5세 가족. 남자 왼쪽부터 데이빗-왕세자, 3남 헨리, 조지 5세, 알버트-조지 6세, 그리고 4남 조지. 앞줄 여자는 왼쪽이 메리 공주, 오른쪽이 왕비.)
흔히 2남이자 '킹스 스피치'의 주인공인 조지 6세야말로 형 때문에 원치 않는 왕좌에 올라 2차대전과 대영제국의 해체를 바라보며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아 형 윈저 공보다 일찍 죽은 비운의 주인공으로 꼽히지만 이들 형제 가운데 가장 불행했던 것은 막내 존 왕자입니다.
존 왕자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간질 판정을 받습니다. 이때문에 가족과 함께 윈저 성에 거주하지도 못하고 시골 농장에서 사실상의 유폐 생활을 하다가 14세에 숨을 거둡니다. 간질에 걸린 왕자라는 것은 왕가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간주됐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물론이고 죽은 뒤에도, 왕가의 가족에 대한 모든 공식 언급에서 존 왕자와 관련된 내용은 제외되어 왔습니다.
(저도 이런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우연히 케이블TV에서 LOST PRINCE라는 BBC 드라마를 보고 나서 살짝 충격을 받았습니다. 20세기에도 간질 때문에 왕가에서 감춰져야 했던 왕자가 있었다니... 케사르도 앓았다는 간질인데...)
아무튼 그렇습니다. '킹스 스피치'는 왕도 사실은 사람이고,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로 가족과 자신의 장래, 직업과 친구 문제로 고민하고 괴로워한다는 점을 제대로 풀어냈습니다. 그 내용이 100% 사실은 아니더라도 셀레브리티의 인생도 늘 파티만으로 가득 찬 게 아니라는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스토리로 받아들여지는 듯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저 제목은 틀렸습니다. 사실 그동안 저런 여론이 일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번 지진 해일/방사능 사태가 터지면서 우리의 욘사마 배용준이 10억원을 쾌척한 데 이어 수많은 한류 스타들이 거액을 기부했을 때부터 나온 일입니다. '외국인이 저렇게 많은 돈을 선뜻 내놓고 있는데 대체 기무라 타쿠야는 뭘 하고 있느냐'는 불만이 일본 일각에서 터져 나온 것이죠.
그런데 오늘 오전, 일본 데일리스포츠(전통의 닛칸스포츠가 아닙니다^^. 온라인인듯. http://www.daily.co.jp/gossip/article/2011/03/28/0003900459.shtml ) 가 그룹 SMAP 멤버들이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거액을 내놓고 있었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기무라 다쿠야를 비롯한 다섯 멤버들이 기부한 돈이 총 4억엔(약 55억원?)에 달한다는 내용, 그리고 자선 광고 등에 출연한다는 내용, 그리고 멤버들은 이런 사실이 알려지기를 전혀 원하지 않았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뒤늦은 얘기를 들고 나왔느냐...는 건 저번에 썼던 글과 관련해서 조금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왜 배용준은 기부를 하는데 일본 톱스타들은 기부를 하지않을까' 라는 의문은 얼마 전 술자리에서 비롯됐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니가 잘 취재해서 그걸 칼럼으로 쓰라'는 냉냉한 대접(!)만 하더군요. 할수없이 주섬주섬 주변 취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나서 쓴 글입니다. 2주쯤 되어 갑니다.
[분수대] 기부 한류
‘동일본 대지진’으로 불리는 이번 참사 이후 가장 빨리 움직인 것은 한국인들이었다. 어느 나라보다 먼저 구조대를 파견했고, ‘한류 스타’들은 앞다퉈 통 큰 기부에 나섰다. 김현중과 배용준을 비롯, 장동건·이병헌·송승헌·장근석·안재욱·최지우 등 알 만한 이름들은 모두 수억원씩을 쾌척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움직임 때문에 난처해진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본의 톱스타들이다. 일본 내에서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외국인인) 배용준도 거액을 내놨는데 (일본의 톱스타인) 기무라 다쿠야는 뭘 하고 있느냐”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물론 일본 톱스타들이라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일본의 대형 연예기획사 자니즈는 재해지역에 발전차를 파견했고, 기무라 다쿠야와 아라시 등 소속 스타들은 각자 이재민을 격려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후쿠야마 마사하루 등 톱스타가 즐비한 아뮤즈 엔터테인먼트도 마스크 240만 개와 구호용품을 ‘금일봉’과 함께 기부했다. 하지만 한류 스타들의 일사불란한 거액 기부 행렬에 비하면 뭔가 궁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문화적 차이’로 설명한다. 일본 연예계에선 오래전부터 돈의 힘으로 튀어 보이겠다는 시도를 ‘바이메이(賣名)’라고 부르며 경계하곤 했다. 과거에도 일부 연예인이 거액을 기부하겠다고 나서며 이목을 끌면 오히려 “바이메이를 하자는 것이냐”는 비판적 여론이 일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가수 각트(Gackt)는 일본적십자사의 성금 모금운동에 앞장섰다. 하마사키 아유미도 티셔츠를 팔아 기부금을 마련하는 등 직접 돈을 내지 않는 활동에 나섰다. ‘슬램 덩크’의 이노우에 다케히코 등 수많은 스타 만화가도 돈보다는 이재민을 격려하는 만화로 성의를 표현하고 있다.
재일동포 방송기획자 홍상현씨는 최근 “한류 스타들의 발 빠른 기부가 일본의 기부문화를 바꿔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기 걸그룹 AKB48이 눈치 보지 않고 5억 엔의 거액 기부를 밝혔고, 대형 기획사인 에이벡스도 1억 엔 규모의 기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서해안 원유 유출 사고 때, 한국 연예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해안으로 달려가 기름 묻은 바위를 닦는 봉사활동에 나섰다. ‘한류 기부문화’가 정착되면 일본 톱스타들도 지진 복구 현장에서 헬멧을 쓰고 땀 흘리는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끝)
위에 나오는 일본 만화가들의 정성입니다. 일단 이노우에 다케히코.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모두 지진 피해 지역의 이름을 유니폼에 붙이고 있습니다. 피해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라는 의지가 돋보입니다.
이건 바로 우라사와 나오키. 생소하신가요? '몬스터', '마스터 키튼', '20세기 소년'..
그리고 이름은 잘 몰랐지만 건담의 작화가인 오오카와라 쿠니오. '힘내라 일본'.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문을 구했을 때 두 분이 '바이메이(賣名)'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한 분은 윗글 안에 있는 분이고, 다른 한 분은 국내 굴지의 연예기획사 대표입니다. 일본 연예계 사정에 누구보다 밝은 분인데 '감히 내가 그런 이야기에 대해 코멘트할 수 없다'며 극구 거절해 코멘트의 출처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가까이는 고베 대지진 때에도 일부 무명(?) 연예인들이 거액을 기부하는 행위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려는 시도를 했는데, 한국 같으면 그래도 칭찬은 받았을 행위가 일본에서는 빈축을 사는 행동이 되었다는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끼워 넣으면 '바이메이를 통한 메이와쿠' 인 셈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저 글은 1160자라는 제한에 걸려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담기엔 역부족이고, 압축하다 보면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왜 일본 연예인들은 이런 역사적인 피해 상황에서 기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느냐'는 질문을 드렸을 때 홍상현씨 @kou_syougen 가 대답해 주신 내용을 전재해 보겠습니다. 이해에 상당한 도움이 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 배경에는 일본의 문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욘사마가 10억을 냈는데 그게 결국 7,200만엔이거든요? 그런데 이를테면 일본의 대표적 메가뱅크 중의 하나인 미츠이스미토모 은행이 낸 돈이 1억엔이예요. 개인으로썬 상상도 못할 액수인 거죠.
그런데 여기서 참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는 기부행위 등을 하는 데에도 체면 등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유명인이 "나 얼마 낸다"하면서 기부를 하는 것은 정말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라기보다 일종의 상술로써 매명행위(편집자 주=이것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바이메이'를 말하는 것입니다)를 하기 위해 내는 것이라는 그런 차가운 시선에 직면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이름을 밝히며 돈을 기부하거나 하기 보다는 익명으로 남을 돕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한국에는 기부 프로그램도 상당히 많지만 일본에서 보면 그거 참 신기한 거거든요.
그렇게 결국 "기부행위를 하면서도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문화가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부를 하더라도 익명으로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자선바자, 혹은 이번 쟈니즈가 하고 있는 것처럼 회사 이름으로 재해현장에 발전차를 보낸다든가 아니면 자선바자를 하던가. 그러던 것이 이번 동북의 지진재해 같은 경우 재해규모가 워낙 방대하고 사태의 심각성이 워낙 크니까 그런 문화자체도 다소 변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당연히 한류스타의 기부관련 보도도 자극제가 되었지요.
사실 연예기획사들의 시스템(K-Pop 가수들의 경우 거의 사무소 이름으로 돈을 내고 있잖아요)과 관련한 문제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본 연예기획사의 경우, 한국의 회사들처럼 회사쪽이 막대한 이익을 가져갈 수는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꺼번에 큰 금액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AKB의 경우는 왜 달랐냐면 걔넨 일종의 고교생의 部活(한국으로 치면 특별활동 정도?) 같은 개념으로 활동을 시키고 일반적으로 다 학교생활도 하게 하면서 사무소가 돈을 거의 다 관리하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하면, 일단 AKB같은 계약방식으로 일하지 않는, 이른바 목돈 버는 애들은 왜 돈을 풀지 않느냐는 질문이 남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관련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전부터 일본사회가(버블 이후 심화되었지요) 고질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워낙 고령화 사회인 데다, 연금만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기에 결국 죽는 순간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결국 착실히 저금을 해 놓지 않으면 나이 먹어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된다는 인식이 만연하여, 사람들이 죽도록 저금만 하고 쓰지를 않는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내수경제가 침체되고, 디플레도 오게 된 것이고.
게다가 한국처럼 나이 좀 들고, 은퇴하면 집에서 손자손녀들이나 봐주면서 자식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일본에서는 여간한 집이 아닌 경우 힘들고, 사실 성인이 되면 자기 삶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여기 문화이니까... 그렇다 보니 연예인도, 평범한 사람들도 보통 여간한 일에는 돈을 풀지 않고(물론 자기 결혼식에 몇 억엔 쓰는 연예인도 있고 하지만) 죽도록 저금만 하는 것이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리고 일단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산다는 인식은 비슷할 지도 모르지만, 일단 여기 연예인 애들은 꿈, 팬들의 사랑 등과 같은 추상적인 목적이 아니라 스타가 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일"로서 "돈"을 벌기 위해 배우도 하고 가수도 하고 탈랜트도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천명하고 있기 때문인 거예요. 내가 능력 돼서 돈 버는 건 버는 거지만 그것과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게다가 기부를 한다는 것은 매명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고 한국처럼 기부를 하지 않았다고 짠돌이라 부르지도 않으니 그냥들 사는 거죠.
그런데 이번 동일본대지진의 경우는 좀 다를 듯 합니다. 일단 한류스타들이 워낙 액수자체도 크고 적극적이면서도 빠르게 기부들을 해 줬고, 실제로 일본의 연예인들은 무얼 하고 있는가 하는 얘기도 나왔거든요. 실제로 어찌 보면 아무리 국민브랜드라고는 하지만 소니라든가, 미츠이스미토모 은행 같은 데와는 게임도 안 될 지 모르는 유니클로가 10억엔과 또 몇 억엔 어치의 현물기부까지 했고, AKB(어찌 보면 너무 어리다 보니 업계 눈치를 안 볼 수도 있는)가 5억엔을 기부하기도 했으니까요. 그 외의 흐름을 보자면 자기 돈을 털어서 내기보다는 자기 얼굴을 걸고 모금을 주도하는 형식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것이 어제 1억엔을 돌파했다는 Gackt의 "Show your heart" 홈피를 통한 모금입니다.
일본적십자사와 협조해서 진행했죠. 결국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눈치들을 보고 있다가 사태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고 여기저기서 돈들을 내는데, 그걸 보니까 진짜 장난이 아닌 것 같아서 다른 액션들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동북지역이 고향인 니혼햄의 다르빗슈는 이치로의 다섯 배로 알려진(항간에 이치로는 천만엔을 냈다고 함) 오천만엔을 냈고, 연예계의 대모격인 와다 아키코(한국계로 알려진)씨 등이 소속되어 있는 홀리프로도 일단 기금을 설립해서 우선 5,750만엔 정도를 내놨지요. 연예계 앗코씨(여기선 그렇게 부릅니다)의 사무소가 그렇게 나섰으니 다른 후배들도 무척 많이 동참하게 될 겁니다. (이하 생략)
상황을 보다 보면 홍상현씨의 지적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SMAP 소속사 자니즈는 결국 '4억엔 기부'를 선언했고, 수많은 톱스타들이 SMAP에 앞서 실질적인 도움을 내놨습니다. 대재해가 일본의 기부 문화를 바꾼 셈이지만 거기에는 한류 스타들의 통 큰 기부가 큰 역할을 한 듯 합니다.
재해 초기, 일본인들의 질서 준수 문화가 알려지면서 '이런 선진국이 있나!'라는 경탄의 목소리가 한국을 휩쓸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무질서한 한국인들에 대한 반성이 잇달았죠.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복구나 구호 조직의 움직임이 느린 것이 일본 특유의 '매뉴얼 문화' 때문이라는 지적이 이어졌죠. 그 걸과, 문제가 생겼을 때 복구의 신속성이나 거액을 선뜻 내놓는 기부 문화, 그리고 내 일처럼 앞장서서 피해 복구에 나서는 '가슴의 뜨거움'은 어쩐지 한국이 더 앞서는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결론은 그렇습니다.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에 앞다퉈 거액을 쾌척한 것은 아무래도 일본 시장으로부터 큰 덕을 보아 온 한류스타들로서는 당연한 일일 듯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본 연예인들보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고를 더 걱정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죠.
이처럼 한국 문화에는 한국만의 장점과 단점이, 일본 문화에는 일본만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문화든 좋은 점만을 모두 갖출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번 지진 사고때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한국 문화에 대한 자아비판'들이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두 나라 사이의 다름이 그저 '우열'이 아니라 '다름'이었다는 균형잡힌 시선들이 나오는 게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P.S. 그나자나 해방 이후 드물게 보는 한/일간의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또 다시 역사 교과서 파동 국면이라니. 아무래도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듯 하군요. ㅋ
가창력 좋은 가수들을 등장시켜 기를 쓰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한번 대결할 때마다 꼴찌를 떨어뜨려서 망신을 시킨다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가수들이 노래를 잘하는 줄 몰랐다' '서바이벌이란 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가수들이 열창하니 좋다' '오랜만에 이렇게 가슴떨리는 노래를 들어 본다'는 등등의 소감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한방에 그런 성원이 180도 회전해 원성으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자니 기분이 참 그렇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처음 성원을 보낼 때, '가수중의 누구 하나가 떨어진다니 참 흥분되고, 누구 하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그런데 떨어져야 할 사람이 안 떨어진다니까 온갖 비판이 쏟아지더군요.
이 대목에서 솔직해져야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가수들이 온 정성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 떨어지는 모습이 궁금했던 겁니다. 미리 얘기하자면, 대중에 대한 과대평가가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 한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간혹 있기 때문에 미리 설명을 붙입니다. 이 글은 김건모나 이소라, '나는 가수다' 제작진을 옹호하는 글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프로그램에는 '공정성의 훼손' 말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얘기하는 글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의 치명적인 '결정 번복'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공정함에 굶주렸던 시청자들에게 김건모의 '재도전 허용'은 또 하나의 특혜로 여겨졌고, 여론의 질타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재도전을 처음 거론한 김제동은 오지랖 때문에 욕을 먹었고, 이소라는 김건모의 탈락 상황에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방송 부적격자라는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제작진의 실책은 굳이 다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제작진은 가장 큰 실수는 '공정성이 생명인 서바이벌 게임에서 공정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할 때 '공정성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분야에서 공정성을 고집하겠다고 나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500명의 청중을 모아 놓고 '가장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를 뽑게 만든 다음 '가장 가창력이 떨어지는 가수'를 하나씩 교체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방식으로 정말 '가창력이 가장 떨어지는 가수'를 솎아낸다는게 가능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가창력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가창력이라는게 대체 뭐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략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딱 떨어지게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너도 그게 뭔지 알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을 겁니다. 이를테면 신승훈이나 이승철에게는 있는 거지만 김장훈이나 유희열에게는 없는 것. 뭐 그런 거죠.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하늘을 찢어 놓을 듯한 새된 목소리를 '놀라운 가창력'이라고 부르는 반면, 어떤 사람은 '소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김정민이나 박상민의 느낌을 '뽕끼'라고 천박하다 여기고, 어떤 사람은 '직접 와 닿는 호소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가장 노래 잘 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조영남'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발성의 깊이나 음정의 정확성 등을 고려한다면 있을 수 있는 답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가창력'의 기준이란 매우 흔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전인권을 '가창력 뛰어난 가수'로 분류하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마구 질러대는 고함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레너드 코헨이나 밥 딜런까지도 가창력 뛰어난 가수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가창력이라는 말을 '노래를 정확하게 잘 부를 수 있는 능력'에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간 뭔가 느끼도록 노래하는 능력'이라는 말로 확대 해석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흔한 오해 중에는, '뭔가 열심히 부르는 듯 한 모습'이 신통찮은 가수를 가창력있는 가수로 바꿔 놓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열창'과 가창력이 이상하게 혼동되는 장면이죠. 이를테면 이은미는 가창력 뛰어난 가수고, 김윤아는 그냥 평범한 가수라는 식의 묘한 오해가 대표적입니다.
문제의 판정 날, 문제의 청중 판정단은 '가창력'을 뽐냈다기 보다는 피아니스트와 조명, 액션에 치중했던 가수를 1등으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귀'로만 집중했다면 절대 꼴찌가 될 수 없었던 김건모를 탈락자로 선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중'은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 요소의 방해를 벗어나 가창력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서 아마 제작진의 혼란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히' 대중이 가창력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한 데 대해 발끈할 분들이 꽤 많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겁니다.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가장 노래를 잘 하는 가수였던 시대는 이미 약 20년 전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오래 전, 한국이 차세대 전투기 사업을 하면서 F-15와 프랑스제 라팔 전투기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뤄진 적이 있습니다. 이때 한 언론사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F-15와 라팔 중 어느 것이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되어야 하는지를 설문 조사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설문 조사 결과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걸 물어봤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나는 가수다'가 대중이 현장에서 들으면 '가창력'을 테스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무한도전'이 시청자들에게 누가 가장 잘생겼는지 찍어보라고 했을 때 어쨌든 유재석이 무조건 1위를 한 것과 똑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이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기'입니다. 그리고 이 '인기'와 '가창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물론 대중가수에게 '인기'와 '가창력'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은 여기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슈스케'는 뭐냐고 생각하실 분들. '슈스케'는 가창력 좋은 가수를 골라내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차세대 인기 가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재목'을 뽑아내는 프로그램입니다. 엉뚱하게도 '슈스케'의 그런 요소를 비판하신 분들이 있지만 그건 프로그램의 지향점을 잘못 판단하신 겁니다. '슈스케'건 '아메리칸 아이돌'이건, 이런 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애당초 처음부터 '가장 노래 잘 하는 가수'를 골라내겠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실 가수'를 뽑아내는 프로그램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가수다'의 첫번째 교훈은 '공정성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아무 거나 판단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거기 참여하는 가수들, 제작진, 시청자들, 아무도 거기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이 위험천만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런 비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영미권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대단히 흔한 여자 이름입니다. 좀 길기 때문에 리사, 엘리사, 베스, 엘, 등 여러가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엘리자베스의 이름 가운데 대표 애칭이 리즈(Liz)가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냥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가운데 영국 여왕보다 유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사망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79세면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지만, 육상효 감독님의 한마디, "어릴 때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세상을 떠나면 삶의 유한성에 대해 아프게 느낄 것을 걱정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니 정말 그렇다"는 말씀에 실로 공감하게 됩니다. 심지어 테일러의 전성기가 저물어 갈 무렵에 태어난 저조차도 이 말과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그 배우가 한때 가졌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50년대'를 한번 정리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두 차례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이 모두 60년대의 일이지만 '여신 리즈'가 가장 위력을 뽐낸 시기는 50년대가 아닐까 합니다.
<< 제가 본 영화들만 언급합니다. 못 본 영화들은 패스.>>
1932년 영국에서 태어나 LA로 이주한 뒤 1944년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 1949년 '작은 아씨들'을 통해 국민 미소녀의 자리를 굳힌 리즈는 1950년대 들어 미소녀 아닌 미녀로 탈바꿈해갑니다. 그 첫 시도는 아무래도 '신부의 아버지' 연작이지만 그건 제가 못 본 영화인 관계로 패스. 그리고 1951년, 너무나도 유명한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가 나옵니다.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후 전 세계에서 수만번에 걸쳐 (사실상)리메이크됩니다. '가난한 집의 명석하고 야심만만한 미남 청년이 재벌 집 딸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이루고자, 어려운 시절의 연인을 차 버리는 이야기'의 원조인 겁니다. 2011년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마이더스'의 먼 조상 뻘인 셈이죠.
글자 그대로 영화는 아메리카의 비극, 물신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회의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19세의 리즈는 주인공 몽고메리 클리프트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게 해 줄 열쇠' 역할을 합니다. 너무나도 청순하고 아름다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상징이죠. 비록 대단히 큰 비중은 아니지만, 아무튼 리즈의 존재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고민에 너무나 설득력있는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아울러 이 영화 이후 리즈에게는 '부잣집에서 자라난 공주님이며 발랄하고 청순하지만 다른 사람의 상황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캐릭터가 부여됩니다. 이를테면 한국 미니시리즈의 여자 2번으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죠.
1952년. 제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리즈의 모습이 등장하는 영화 '아이반호'가 등장합니다. 아이반호 역은 당대의 미남 스타 로버트 테일러. 사실 월터 스콧 경의 원작을 존중하자면 여주인공은 색슨 족의 로웨나 공주여야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아이반호를 짝사랑하는 유태인 처녀 레베카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에 리즈를 캐스팅 한 데서도 결국 아이반호와 맺어지는 로웨나보다 레베카가 돋보여야 한다는 연출 의도가 엿보입니다.
(여담이지만 조앤 폰테인은 이로써 '레베카'에게 두번째 까임을 당한 셈입니다. 이미 1940년작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에서 폰테인은 '그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미인인' 레베카'-영화 속에 얼굴은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라는 여자와 비교되는 역을 맡았죠. 폰테인도 상당한 금발 미녀지만 어쩌다 이런 역할을 두번이나 맡게 되는지 참...)
아무튼 '아이반호', 우리 제목으로 '흑기사'의 레베카는 그윽한 눈빛으로 한 소년의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었던 비련의 주인공으로 오래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본 작품은 1954년작 '랩소디'.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작품일테지만 제게는 매우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영화입니다.
또 한번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 역을 맡은 리즈는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홀딱 반합니다. 남자도 여자가 좋지만 연습 조차 하지 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는 여자의 철없음에 질려 버리고 결별을 선언합니다. 충격을 받은 여자는 주변에 있던 별볼일없는 피아니스트와 결혼해버리죠.
몇년 뒤, 여자에게 얹혀 살다시피 하던 피아니스트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해서 결혼한게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고 있다는 자각으로 그녀 곁을 떠나려 합니다. 그제서야 정신차린 리즈는 죄책감에 평강공주로 변신, 본래는 재능있던 남편을 정상의 피아니스트로 되돌려 놓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는 사이 옛 애인은 거장으로 승승장구하죠.
여자는 옛 애인과 조우하고, 둘 사이의 감정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합니다. 하지만 구렁텅이에 빠진 상태로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에 더욱 훈육을 강화하고, 남편의 재기가 거의 확실해지자 '이제 당신이 두 발로 설 수 있으니 난 떠나련다'는 뜻을 전합니다.
연주가 끝나면 아내가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처절한 심정으로 남자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단 저 동영상의 끝이 바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닙니다. 그냥 동영상 올린 분이 엔딩 크레딧을 보여주려고 편집한 모양이네요.)
이 영화에서 이 곡의 비장함은, 바이올리니스트 남자의 상징곡인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의 화려함과 정면으로 대비를 이루면서 최상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실제 피아노 연주는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맡았다는군요. 실제로 제가 클래식 음악의 매력을 느낀 것은 이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물론 거기에 리즈의 미모가 미친 영향은... 뭐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
'내가 마지막 본 파리'에서도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의 이미지는 계속됩니다. 이 시기 리즈의 주연작들이 한국 멜로드라마에 미친 영향은 참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 1954년 영화에서 이미 두 자매가 한 남자를 놓고 펼치는 묘한 신경전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검은 터틀넥이 잘어울리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영화는 1956년작 '자이언트'. 록 허드슨과 제임스 딘, 그리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세 주인공의 이름만으로도 당대 최고의 작품이 되기에 충분했던 영화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200분이라는 상영시간이 다소 긴, 몇 장면을 빼면 그닥 높이 평가하고 싶지는 않은 영화입니다만.... 어쨌든 괴팍한 제임스 딘이 끝까지 순정을 보이는 '마님'역의 리즈는 당연히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리즈의 60년대 작품들에게 오스카상이 주어진 것은 58년작인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와 59년작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 상을 주지 않은 데 대한 반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대 후반을 맞은 리즈는 그저 별 변동 없는 '철없는 부잣집 딸'에서 순식간에 진짜 배우로 변신합니다. '뜨거운...'에서 알콜 의존증인 남편 폴 뉴먼과 시아버지의 갈등을 보며 괴로워하는 아내 역을 맡아 홈드라마 적응력을 보여준 리즈는 마침내 걸작 '지난 여름 갑자기'를 통해 손꼽히는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리즈의 출연작 가운데 가장 화려한 면면의 영화는 '자이언트'라는게 정설이지만 개인적으로 최고의 영화(이후 작품들을 모두 감안하더라도)는 바로 '지난 여름 갑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브의 모든 것' 등으로 이미 두 차례나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거장 조셉 L 멘키위츠 감독(물론 뒷날의 '클레오파트라' 때문에 리즈와 싸잡아 욕을 먹지만)의 이 작품은 대부호 집안의 미망인 캐서린 헵번이 젊은 정신과 의사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만나 이야기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1년 전 여름, 헵번의 아들과 그 연인인 엘리자베스 테일러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천천히, 잘 드는 칼로 과일 껍질을 벗기듯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별다른 액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와 탄탄한 대본, 절묘한 연출에 의해 관객은 보는 내내 긴장을 멈추지 못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충격적인 사건과 영화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면 배우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에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말이 그저 뻔한 수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만 18세의 나이로 1950년대를 맞은 리즈는 10년 동안 세번의 결혼을 경험하고, 두 차례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평단과 일반 관객으로부터 불멸의 미모와 연기력을 칭송받는 여신의 반열에 오릅니다. 비록 오스카 수상이나 '사상 최고의 실패작'으로 불렸던 '클레오파트라', 리처드 버튼과의 결혼과 이혼 등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리즈의 인생에 남아 있지만,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이름을 불멸에 이르게 하기에는 지금 살펴본 10년으로도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으로 제 방식대로 엘리자베스 여신에 대한 조의를 표명합니다.
P.S. "난 결혼한 남자 말고는 아무와도 함께 자지 않았다"는 등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쿼트 가운데는 유명한 말들이 많은데, 그중엔 "난 리즈라고 불리는게 싫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알지만 본명이 너무 길다 보니 어쩔 수 없더군요.^
윤회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부디 얼른 다시 태어나 세상에 또 한명의 여신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오페라'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는 김장훈의 '오페라, 오페라, 오페랄랄랄라'를 떠올리고, 그 다음에는 뚱뚱한 아저씨가 뚱뚱한 아줌마의 없는 허리에 간신히 짧은 팔을 감고 희노애락을 가늠할 수 없는 우렁찬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가끔 오페라를 보러 간다든가, 오페라 dvd를 샀다든가 하는 말을 하면 별 희한한 짓거리를 한다는 얘기가 듣기 싫어 아예 얘기를 하지 않는게 보통입니다.
지난 주말, 호암아트홀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HD 영상에 담은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을 봤습니다. 아시다시피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첫날 밤에 해당하는 작품이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최근 들어 그 시즌 무대에 올려졌던 작품을 그대로 HD 영상으로 제작,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극장에서 상영하게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메가박스가, 그리고 연말부터는 CGV에서 이 시리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관람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체 진짜 오페라도 아니고, 영상물을 극장에서 보는데 가격이 2만5천원이면 너무 비싼 게 아니냐. 두 사람에 5만원이면 오페라 DVD를 두 장은 살 수 있다. 맞는 말이지만, 오페라 DVD를 집에서 보는 것과, 극장에서 보는 것 사이에는 영화를 집에서 보는 것과 극장에서 보는 것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네. 사실 저도 몰랐습니다만, 그런 차이가 '있더군요'.)
그리고 DVD는 그리 '최신 공연'이라고 보기 힘든 영상을 보여줍니다. 이 메트 오페라 시리즈처럼 2010년 시즌의 공연을 곧바로 전 세계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DVD 발매가 빠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오페라가 이런 강점을 가질 수는 없죠. 브린 터펠이나 로베르토 알라냐, 안나 네트렙코, 마르첼로 알바레스 같은 최고의 스타와 최고의 무대 기법이 동원되는 메트 오페라니까 이런 식의 상품화가 가능할 겁니다.
또 한가지, 다른 메트 오페라와 다른 점은 바로 바그너의 '링' 시리즈였다는 점도 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냥 오페라가 멜로드라마라면 바그너 오페라는 블록버스터라고 해야 할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재 연출가라는 로베르 르파쥬(Robert Lepage)의 손길이 닿은 무대는 정말 살아 움직입니다.
막이 오른 뒤 첫 장면은 '라인의 황금'의 상징인 세 라인 강의 처녀들(Rhinemaiden)의 등장입니다. 이 첫 장면은 바그너 당대부터 상상력을 동원한 연출이 이뤄졌던 장면이죠.
현대로 오면서 다양한 연출이 이뤄졌습니다. 뭐 이를테면 이런 식도.
그런데 이렇게 깊은 강물 속에서 노래하는 세 처녀(인어)의 모습을 형상화한 건 정말 획기적입니다.
그리고 저 세 처녀가 헤엄치는(사실은 매달린) 저 벽. 저 벽에 이 무대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보통 벽이 아닙니다.
때론 동굴의 천장과 바닥으로,
때로는 계단으로,
그리고 이런 성벽과 무지개다리로 변신합니다.
이런 식으로 초대형 철골 무대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시각적인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무대의 무게만 45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구조가 버티지 못할까봐 보강 공사를 거쳐 선보이는 무대입니다.
첨단 기술을 이용한 무대 장비와는 반대로 의상은 완전히 복고풍입니다. 1870년대 초연 때의 의상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바그너 극 의상과 모더니즘이 빛나는 차가운 알루미늄 성벽으로 장식된 무대. 놀라운 조화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오페라인 만큼 '음악'과 '노래'에 대한 평이 있어야겠지만 제가 그럴 주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21년 전에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무대에 올렸던(DVD도 나와 있죠) 제임스 레바인인 만큼 음악적으론 흠잡을 데가 없어 보입니다. 특히 당대의 베이스 바리톤 가운데 브린 터펠보다 나은 보탄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
'라인의 황금'에 나오는 보탄은 북구 신화의 주신 오딘의 다른 이름입니다. 주신이고 신들의 아버지이긴 하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는 전혀 다른 신격입니다.
제우스(주피터)와 보탄(오딘)의 차이는 이미 유럽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던 일입니다. 요일의 이름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수요일은 보탄의 날, 그리고 목요일은 보탄의 아들이며 번개의 신인 쏘르(토르, '니벨룽의 반지'에는 도너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의 날입니다. 그런데 이 요일의 이름이 영미권에 전해지면서 수요일은 수성(머큐리/헤르메스), 목요일은 목성(주피터/제우스)의 날로 번역됩니다.
상식적으로는 보탄=제우스여야겠지만 남쪽 유럽 사람들은 보탄과 머큐리를 상업의 보호신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쏘르와 주피터를 번개의 지배자라는 공통점으로 묶은 것입니다. 그만치 보탄은 점잖고 권위 넘치는 주신이라기보다는 재기발랄하고(?) 사기성이 농후하지만(?) 계약에는 놀라울 만치 엄격한 신입니다. 심지어 그 자신의 사기성(?)을 보강하기 위해 나중에 신들의 멸망을 가져오는 사악한 불의 신 로키(역시 바그너 악극에는 로게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를 늘 달고 다니는 신입니다.
아무튼 바그너의 악극에 나타나는 보탄은 신이라기엔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이 뚜렷한 신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적인 약점이 결국은 신들의 몰락을 낳는 단서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라인의 황금'은 4부작의 서막이면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작품답게, 나머지 세 작품의 스토리에 복선을 깔아 두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아무튼 '라인의 황금', 정말 못 봤으면 크게 후회할만큼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몇달 뒤 국내에서도 볼 수 있게 될 '발퀴레'에서는 이런 장면(바로 위 사진)까지 연출된다니 도저히 아니 볼 수가 없겠습니다.^^
P.S. 이런 무대를 직접 본다면 더 멋지겠지만, 개인적으로 저라면 HD 영상으로 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비싼 표를 사서 실연 무대에 간다 해도 90%의 관객은 배우의 얼굴 표정조차 보기 힘들죠. 그런 의미에서 HD를 통한 오페라 관람은 오페라라는 장르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양영희 감독의 '굿바이 평양'을 보고 왔습니다. 양영희 감독은 재일교포. 제주도 출신(양씨라는 데서 일단 짐작 가능하죠^^)의 아버지는 조총련의 핵심 간부였고, 특히 북한 사회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인정받아 김일성과 함께 사진 촬영까지 한 인물입니다. 그런 아버지는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세 아들을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고, '자랑스러운 조국'에 10대 후반의 세 아들을 보냅니다.
막내인 양영희 감독은 세 오빠가 하루 아침에 집을 떠난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세 오빠의 이후 삶을 지켜보면서 아버지를 원망도 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영희씨는 90년대 중반부터 2004년까지 북한으로 가족을 방문하러 갈 때마다 찍었던 영상을 편집해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만들었습니다.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은 전편과 속편의 성격이라기보다는, 같은 시기와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되 조금 자제한 이야기와 조금 더 솔직한 이야기로 나눠집니다. '디어 평양'을 만든 죄(!)로 양 감독은 북한 입국을 금지당했고 여기에 대한 반발(?)로 '굿바이 평양'을 내놨습니다.
영화는 1995년, 다섯살 난 선화가 맛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선화는 양 감독의 둘째 오빠가 두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입니다. 양 감독은 이것이 선화와의 첫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방문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1991년생(어쩌면 1992년생)인 선화는 1996년 엄마를 잃고, 1999년 새엄마를 맞습니다(그러니까 선화 아빠는 결혼을 세번 하신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화는 구김살없이 명랑하고 씩씩한 아가씨로 자라납니다. 영화는 곧 선화의 성장사입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던 아기는 엄마의 묘소 앞에서도 방긋 방긋 웃는 아기가 되어 있고, 어느새 학교에서 배운 시 낭송을 하는 어린이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마냥 북한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그동안 '식량난, 꽃잽이, 대량 탈출 가능성'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만 부각될지 모르지만 영화 속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북한의 실상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수돗물은 하루에 두 시간 나오고 수시로 정전이 찾아오는 평양의 아파트(생일 축하를 위해 불을 껐을 때 아버지가 "어, 정전이냐?"고 물으면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도 평양 사람 다 되셨다"며 웃습니다. "영광스런 정전입니다" 하며 까르르 웃는 선화의 대사도 나옵니다), 어머니가 3년만에 닭고기 요리를 해 준다는 조카들, 미키마우스 양말을 신고 학교에 가는 선화에게 고모(양 감독)가 "이거 신어도 괜찮아? 하고 묻자 "다들 잘 몰라"라고 대답하는 선화, 그 선화보다 머리 하나씩은 작은 선화네 학교의 아이들(선화네 가족이 그나마 평양에서는 살림새가 괜찮은 편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은 양 감독이 들고 있는 카메라가 영 신기한 듯 그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이런 물질적인 빈곤 외에도, 고모가 자꾸만 선화에게 미안해 지는 이유는 여러 군데서 드러납니다. 해외 방문객이 머무는 호텔 식당에서 "먹어 본 게 없어서 고를 수가 없다"며 한동안 메뉴판만 뒤적이던 선화는 고모가 약간 민감하다 싶은 질문을 던지자 "카메라 꺼요"라며 눈치를 살핍니다. 열세살 나이에도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하면 안 될 말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양 감독이 선화에게 보여주는 애착은 오빠들 사이에서 혼자 자라나고 있는 고명딸이라는 공통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닐 겁니다. 선화를 바라보는 양 감독의 시선에선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던 이 조카가 평양에서 자라야만 하는 데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납니다. '디어 평양'이나 '굿바이 평양' 정도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갈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리는 그런 나라에서 말입니다.
북한 입국을 금지당한 뒤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오가고, 선화는 어느 새 영어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고생하다 숨을 거두고, 아버지가 죽기 직전 우울증에 시달리던 큰오빠(선화의 큰아버지)도 생을 마감했습니다. 큰오빠의 아들은 북한의 음악 영재로 자란 듯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양 감독이 담고 싶었던 것은 세 아들의 삶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심지어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는 데 대한 아버지의 깊은 후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특이한 가족사를 담아낸 '굿바이 평양'의 시선은 건조한 듯 하면서도 따스합니다. 북한과 재일교포, 진실보다는 신화만 요란한 두 사회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라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져야 할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P.S. 아무쪼록 '굿바이 평양'의 공개가 선화나 그 가족의 삶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