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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히 말하면 저 제목은 틀렸습니다. 사실 그동안 저런 여론이 일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번 지진 해일/방사능 사태가 터지면서 우리의 욘사마 배용준이 10억원을 쾌척한 데 이어 수많은 한류 스타들이 거액을 기부했을 때부터 나온 일입니다. '외국인이 저렇게 많은 돈을 선뜻 내놓고 있는데 대체 기무라 타쿠야는 뭘 하고 있느냐'는 불만이 일본 일각에서 터져 나온 것이죠.

그런데 오늘 오전, 일본 데일리스포츠(전통의 닛칸스포츠가 아닙니다^^. 온라인인듯.  http://www.daily.co.jp/gossip/article/2011/03/28/0003900459.shtml ) 가 그룹 SMAP 멤버들이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거액을 내놓고 있었다는 보도를 했습니다. 기무라 다쿠야를 비롯한 다섯 멤버들이 기부한 돈이 총 4억엔(약 55억원?)에 달한다는 내용, 그리고 자선 광고 등에 출연한다는 내용, 그리고 멤버들은 이런 사실이 알려지기를 전혀 원하지 않았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뒤늦은 얘기를 들고 나왔느냐...는 건 저번에 썼던 글과 관련해서 조금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왜 배용준은 기부를 하는데 일본 톱스타들은 기부를 하지않을까' 라는 의문은 얼마 전 술자리에서 비롯됐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니가 잘 취재해서 그걸 칼럼으로 쓰라'는 냉냉한 대접(!)만 하더군요. 할수없이 주섬주섬 주변 취재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나서 쓴 글입니다. 2주쯤 되어 갑니다.

[분수대] 기부 한류

‘동일본 대지진’으로 불리는 이번 참사 이후 가장 빨리 움직인 것은 한국인들이었다. 어느 나라보다 먼저 구조대를 파견했고, ‘한류 스타’들은 앞다퉈 통 큰 기부에 나섰다. 김현중과 배용준을 비롯, 장동건·이병헌·송승헌·장근석·안재욱·최지우 등 알 만한 이름들은 모두 수억원씩을 쾌척했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움직임 때문에 난처해진 사람들이 있다. 바로 일본의 톱스타들이다. 일본 내에서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외국인인) 배용준도 거액을 내놨는데 (일본의 톱스타인) 기무라 다쿠야는 뭘 하고 있느냐”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물론 일본 톱스타들이라고 나 몰라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일본의 대형 연예기획사 자니즈는 재해지역에 발전차를 파견했고, 기무라 다쿠야와 아라시 등 소속 스타들은 각자 이재민을 격려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후쿠야마 마사하루 등 톱스타가 즐비한 아뮤즈 엔터테인먼트도 마스크 240만 개와 구호용품을 ‘금일봉’과 함께 기부했다. 하지만 한류 스타들의 일사불란한 거액 기부 행렬에 비하면 뭔가 궁색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문화적 차이’로 설명한다. 일본 연예계에선 오래전부터 돈의 힘으로 튀어 보이겠다는 시도를 ‘바이메이(賣名)’라고 부르며 경계하곤 했다. 과거에도 일부 연예인이 거액을 기부하겠다고 나서며 이목을 끌면 오히려 “바이메이를 하자는 것이냐”는 비판적 여론이 일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가수 각트(Gackt)는 일본적십자사의 성금 모금운동에 앞장섰다. 하마사키 아유미도 티셔츠를 팔아 기부금을 마련하는 등 직접 돈을 내지 않는 활동에 나섰다. ‘슬램 덩크’의 이노우에 다케히코 등 수많은 스타 만화가도 돈보다는 이재민을 격려하는 만화로 성의를 표현하고 있다.

 재일동포 방송기획자 홍상현씨는 최근 “한류 스타들의 발 빠른 기부가 일본의 기부문화를 바꿔놓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기 걸그룹 AKB48이 눈치 보지 않고 5억 엔의 거액 기부를 밝혔고, 대형 기획사인 에이벡스도 1억 엔 규모의 기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서해안 원유 유출 사고 때, 한국 연예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해안으로 달려가 기름 묻은 바위를 닦는 봉사활동에 나섰다. ‘한류 기부문화’가 정착되면 일본 톱스타들도 지진 복구 현장에서 헬멧을 쓰고 땀 흘리는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끝)

 

위에 나오는 일본 만화가들의 정성입니다. 일단 이노우에 다케히코. 등장하는 어린이들은 모두 지진 피해 지역의 이름을 유니폼에 붙이고 있습니다. 피해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라는 의지가 돋보입니다.


 

이건 바로 우라사와 나오키. 생소하신가요? '몬스터', '마스터 키튼', '20세기 소년'..

그리고 이름은 잘 몰랐지만 건담의 작화가인 오오카와라 쿠니오. '힘내라 일본'.

여러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문을 구했을 때 두 분이 '바이메이(賣名)'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한 분은 윗글 안에 있는 분이고, 다른 한 분은 국내 굴지의 연예기획사 대표입니다. 일본 연예계 사정에 누구보다 밝은 분인데 '감히 내가 그런 이야기에 대해 코멘트할 수 없다'며 극구 거절해 코멘트의 출처를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이분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가까이는 고베 대지진 때에도 일부 무명(?) 연예인들이 거액을 기부하는 행위로 사람들의 주목을 끌려는 시도를 했는데, 한국 같으면 그래도 칭찬은 받았을 행위가 일본에서는 빈축을 사는 행동이 되었다는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을 끼워 넣으면 '바이메이를 통한 메이와쿠' 인 셈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저 글은 1160자라는 제한에 걸려 있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담기엔 역부족이고, 압축하다 보면 오해를 낳을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왜 일본 연예인들은 이런 역사적인 피해 상황에서 기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느냐'는 질문을 드렸을 때 홍상현씨 @kou_syougen 가 대답해 주신 내용을 전재해 보겠습니다. 이해에 상당한 도움이 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 배경에는 일본의 문화라는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욘사마가 10억을 냈는데 그게 결국 7,200만엔이거든요? 그런데 이를테면 일본의 대표적 메가뱅크 중의 하나인 미츠이스미토모 은행이 낸 돈이 1억엔이예요. 개인으로썬 상상도 못할 액수인 거죠.

그런데 여기서 참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는 기부행위 등을 하는 데에도 체면 등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유명인이 "나 얼마 낸다"하면서 기부를 하는 것은 정말 사람을 도우려고 하는 것이라기보다 일종의 상술로써 매명행위(편집자 주=이것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바이메이'를 말하는 것입니다)를 하기 위해 내는 것이라는 그런 차가운 시선에 직면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름과 이름을 밝히며 돈을 기부하거나 하기 보다는 익명으로 남을 돕는 문화가 일반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한국에는 기부 프로그램도 상당히 많지만 일본에서 보면 그거 참 신기한 거거든요.

그렇게 결국 "기부행위를 하면서도 타인의 눈치를 살피는" 문화가 일반적인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부를 하더라도 익명으로 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자선바자, 혹은 이번 쟈니즈가 하고 있는 것처럼 회사 이름으로 재해현장에 발전차를 보낸다든가 아니면 자선바자를 하던가. 그러던 것이 이번 동북의 지진재해 같은 경우 재해규모가 워낙 방대하고 사태의 심각성이 워낙 크니까 그런 문화자체도 다소 변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당연히 한류스타의 기부관련 보도도 자극제가 되었지요.

사실 연예기획사들의 시스템(K-Pop 가수들의 경우 거의 사무소 이름으로 돈을 내고 있잖아요)과 관련한 문제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본 연예기획사의 경우, 한국의 회사들처럼 회사쪽이 막대한 이익을 가져갈 수는 없는 구조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한꺼번에 큰 금액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AKB의 경우는 왜 달랐냐면 걔넨 일종의 고교생의 部活(한국으로 치면 특별활동 정도?) 같은 개념으로 활동을 시키고 일반적으로 다 학교생활도 하게 하면서 사무소가 돈을 거의 다 관리하고 있거든요.

그렇다고 하면, 일단 AKB같은 계약방식으로 일하지 않는, 이른바 목돈 버는 애들은 왜 돈을 풀지 않느냐는 질문이 남는데, 그것은 바로 일본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관련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전부터 일본사회가(버블 이후 심화되었지요) 고질적으로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워낙 고령화 사회인 데다, 연금만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기에 결국 죽는 순간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결국 착실히 저금을 해 놓지 않으면 나이 먹어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된다는 인식이 만연하여, 사람들이 죽도록 저금만 하고 쓰지를 않는다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내수경제가 침체되고, 디플레도 오게 된 것이고. 



게다가 한국처럼 나이 좀 들고, 은퇴하면 집에서 손자손녀들이나 봐주면서 자식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이 일본에서는 여간한 집이 아닌 경우 힘들고, 사실 성인이 되면 자기 삶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여기 문화이니까... 그렇다 보니 연예인도, 평범한 사람들도 보통 여간한 일에는 돈을 풀지 않고(물론 자기 결혼식에 몇 억엔 쓰는 연예인도 있고 하지만) 죽도록 저금만 하는 것이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가 되어 버린 겁니다.

그리고 일단 팬들의 사랑을 먹고 산다는 인식은 비슷할 지도 모르지만, 일단 여기 연예인 애들은 꿈, 팬들의 사랑 등과 같은 추상적인 목적이 아니라 스타가 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일"로서 "돈"을 벌기 위해 배우도 하고 가수도 하고 탈랜트도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천명하고 있기 때문인 거예요. 내가 능력 돼서 돈 버는 건 버는 거지만 그것과 자선단체에 돈을 기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게다가 기부를 한다는 것은 매명행위로 비쳐질 수도 있고 한국처럼 기부를 하지 않았다고 짠돌이라 부르지도 않으니 그냥들 사는 거죠.

그런데 이번 동일본대지진의 경우는 좀 다를 듯 합니다. 일단 한류스타들이 워낙 액수자체도 크고 적극적이면서도 빠르게 기부들을 해 줬고, 실제로 일본의 연예인들은 무얼 하고 있는가 하는 얘기도 나왔거든요. 실제로 어찌 보면 아무리 국민브랜드라고는 하지만 소니라든가, 미츠이스미토모 은행 같은 데와는 게임도 안 될 지 모르는 유니클로가 10억엔과 또 몇 억엔 어치의 현물기부까지 했고, AKB(어찌 보면 너무 어리다 보니 업계 눈치를 안 볼 수도 있는)가 5억엔을 기부하기도 했으니까요. 그 외의 흐름을 보자면 자기 돈을 털어서 내기보다는 자기 얼굴을 걸고 모금을 주도하는 형식을 예로 들 수 있는데 그것이 어제 1억엔을 돌파했다는 Gackt의 "Show your heart" 홈피를 통한 모금입니다.

일본적십자사와 협조해서 진행했죠. 결국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눈치들을 보고 있다가 사태가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고 여기저기서 돈들을 내는데, 그걸 보니까 진짜 장난이 아닌 것 같아서 다른 액션들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동북지역이 고향인 니혼햄의 다르빗슈는 이치로의 다섯 배로 알려진(항간에 이치로는 천만엔을 냈다고 함) 오천만엔을 냈고, 연예계의 대모격인 와다 아키코(한국계로 알려진)씨 등이 소속되어 있는 홀리프로도 일단 기금을 설립해서 우선 5,750만엔 정도를 내놨지요. 연예계 앗코씨(여기선 그렇게 부릅니다)의 사무소가 그렇게 나섰으니 다른 후배들도 무척 많이 동참하게 될 겁니다. (이하 생략)

상황을 보다 보면 홍상현씨의 지적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SMAP 소속사 자니즈는 결국 '4억엔 기부'를 선언했고, 수많은 톱스타들이 SMAP에 앞서 실질적인 도움을 내놨습니다. 대재해가 일본의 기부 문화를 바꾼 셈이지만 거기에는 한류 스타들의 통 큰 기부가 큰 역할을 한 듯 합니다.

재해 초기, 일본인들의 질서 준수 문화가 알려지면서 '이런 선진국이 있나!'라는 경탄의 목소리가 한국을 휩쓸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무질서한 한국인들에 대한 반성이 잇달았죠.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복구나 구호 조직의 움직임이 느린 것이 일본 특유의 '매뉴얼 문화' 때문이라는 지적이 이어졌죠. 그 걸과, 문제가 생겼을 때 복구의 신속성이나 거액을 선뜻 내놓는 기부 문화, 그리고 내 일처럼 앞장서서 피해 복구에 나서는 '가슴의 뜨거움'은 어쩐지 한국이 더 앞서는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결론은 그렇습니다. 한국 연예인들이 일본에 앞다퉈 거액을 쾌척한 것은 아무래도 일본 시장으로부터 큰 덕을 보아 온 한류스타들로서는 당연한 일일 듯 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일본 연예인들보다 일본에서 일어난 사고를 더 걱정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죠. 

이처럼 한국 문화에는 한국만의 장점과 단점이, 일본 문화에는 일본만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어떤 문화든 좋은 점만을 모두 갖출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번 지진 사고때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한국 문화에 대한 자아비판'들이었는데 시간이 가면서 두 나라 사이의 다름이 그저 '우열'이 아니라 '다름'이었다는 균형잡힌 시선들이 나오는 게 다행이란 생각입니다.

P.S. 그나자나 해방 이후 드물게 보는 한/일간의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또 다시 역사 교과서 파동 국면이라니. 아무래도 평화를 원치 않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듯 하군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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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창력 좋은 가수들을 등장시켜 기를 쓰고 노래를 부르게 하고, 한번 대결할 때마다 꼴찌를 떨어뜨려서 망신을 시킨다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가수들이 노래를 잘하는 줄 몰랐다' '서바이벌이란 건 좀 그렇지만 어쨌든 가수들이 열창하니 좋다' '오랜만에 이렇게 가슴떨리는 노래를 들어 본다'는 등등의 소감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한방에 그런 성원이 180도 회전해 원성으로 바뀌는 광경을 지켜보자니 기분이 참 그렇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처음 성원을 보낼 때, '가수중의 누구 하나가 떨어진다니 참 흥분되고, 누구 하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군요. 그런데 떨어져야 할 사람이 안 떨어진다니까 온갖 비판이 쏟아지더군요.

이 대목에서 솔직해져야 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가수들이 온 정성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이 아니라, 누군가 떨어지는 모습이 궁금했던 겁니다. 미리 얘기하자면, 대중에 대한 과대평가가 이 프로그램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이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 한글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간혹 있기 때문에 미리 설명을 붙입니다. 이 글은 김건모나 이소라, '나는 가수다' 제작진을 옹호하는 글이 아닙니다. 반대로 이 프로그램에는 '공정성의 훼손' 말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얘기하는 글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이 프로그램의 치명적인 '결정 번복'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공정함에 굶주렸던 시청자들에게 김건모의 '재도전 허용'은 또 하나의 특혜로 여겨졌고, 여론의 질타를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재도전을 처음 거론한 김제동은 오지랖 때문에 욕을 먹었고, 이소라는 김건모의 탈락 상황에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방송 부적격자라는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제작진의 실책은 굳이 다시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제작진은 가장 큰 실수는 '공정성이 생명인 서바이벌 게임에서 공정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할 때 '공정성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분야에서 공정성을 고집하겠다고 나선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 500명의 청중을 모아 놓고 '가장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를 뽑게 만든 다음 '가장 가창력이 떨어지는 가수'를 하나씩 교체한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방식으로 정말 '가창력이 가장 떨어지는 가수'를 솎아낸다는게 가능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단연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가창력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가창력이라는게 대체 뭐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략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딱 떨어지게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너도 그게 뭔지 알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지을 겁니다. 이를테면 신승훈이나 이승철에게는 있는 거지만 김장훈이나 유희열에게는 없는 것. 뭐 그런 거죠.

물론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하늘을 찢어 놓을 듯한 새된 목소리를 '놀라운 가창력'이라고 부르는 반면, 어떤 사람은 '소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김정민이나 박상민의 느낌을 '뽕끼'라고 천박하다 여기고, 어떤 사람은 '직접 와 닿는 호소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에서 가장 노래 잘 하는 가수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조영남'이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발성의 깊이나 음정의 정확성 등을 고려한다면 있을 수 있는 답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할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가창력'의 기준이란 매우 흔들립니다. 어떤 사람은 전인권을 '가창력 뛰어난 가수'로 분류하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마구 질러대는 고함일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레너드 코헨이나 밥 딜런까지도 가창력 뛰어난 가수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가창력이라는 말을 '노래를 정확하게 잘 부를 수 있는 능력'에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간 뭔가 느끼도록 노래하는 능력'이라는 말로 확대 해석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흔한 오해 중에는, '뭔가 열심히 부르는 듯 한 모습'이 신통찮은 가수를 가창력있는 가수로 바꿔 놓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열창'과 가창력이 이상하게 혼동되는 장면이죠. 이를테면 이은미는 가창력 뛰어난 가수고, 김윤아는 그냥 평범한 가수라는 식의 묘한 오해가 대표적입니다.


문제의 판정 날, 문제의 청중 판정단은 '가창력'을 뽐냈다기 보다는 피아니스트와 조명, 액션에 치중했던 가수를 1등으로 뽑았습니다. 그리고 아마 '귀'로만 집중했다면 절대 꼴찌가 될 수 없었던 김건모를 탈락자로 선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중'은 눈으로 보이는 시각적 요소의 방해를 벗어나 가창력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여기서 아마 제작진의 혼란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감히' 대중이 가창력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고 한 데 대해 발끈할 분들이 꽤 많을 듯 합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겁니다. 대중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가장 노래를 잘 하는 가수였던 시대는 이미 약 20년 전에 지나가 버렸습니다.


오래 전, 한국이 차세대 전투기 사업을 하면서 F-15와 프랑스제 라팔 전투기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이뤄진 적이 있습니다. 이때 한 언론사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F-15와 라팔 중 어느 것이 차세대 전투기로 선정되어야 하는지를 설문 조사로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설문 조사 결과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걸 물어봤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나는 가수다'가 대중이 현장에서 들으면 '가창력'을 테스트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결국 '무한도전'이 시청자들에게 누가 가장 잘생겼는지 찍어보라고 했을 때 어쨌든 유재석이 무조건 1위를 한 것과 똑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이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인기'입니다. 그리고 이 '인기'와 '가창력'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물론 대중가수에게 '인기'와 '가창력'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은 여기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 '슈스케'는 뭐냐고 생각하실 분들. '슈스케'는 가창력 좋은 가수를 골라내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차세대 인기 가수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재목'을 뽑아내는 프로그램입니다. 엉뚱하게도 '슈스케'의 그런 요소를 비판하신 분들이 있지만 그건 프로그램의 지향점을 잘못 판단하신 겁니다. '슈스케'건 '아메리칸 아이돌'이건, 이런 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애당초 처음부터 '가장 노래 잘 하는 가수'를 골라내겠다고 주장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실 가수'를 뽑아내는 프로그램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가수다'의 첫번째 교훈은 '공정성을 해쳐서는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아무 거나 판단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거기 참여하는 가수들, 제작진, 시청자들, 아무도 거기에 대한 심각한 고민 없이 이 위험천만한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가 이런 비극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다시 프로그램을 시작할 제작진은 부디 이 부분을 심각하게 고민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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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대단히 흔한 여자 이름입니다. 좀 길기 때문에 리사, 엘리사, 베스, 엘, 등 여러가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많은 엘리자베스의 이름 가운데 대표 애칭이 리즈(Liz)가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심지어 그냥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가운데 영국 여왕보다 유명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사망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습니다. 79세면 물론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지만, 육상효 감독님의 한마디, "어릴 때부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세상을 떠나면 삶의 유한성에 대해 아프게 느낄 것을 걱정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니 정말 그렇다"는 말씀에 실로 공감하게 됩니다. 심지어 테일러의 전성기가 저물어 갈 무렵에 태어난 저조차도 이 말과 비슷한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건 그 배우가 한때 가졌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50년대'를 한번 정리해 보고 싶어졌습니다. 물론 두 차례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이 모두 60년대의 일이지만 '여신 리즈'가 가장 위력을 뽐낸 시기는 50년대가 아닐까 합니다.


<< 제가 본 영화들만 언급합니다. 못 본 영화들은 패스.>>

1932년 영국에서 태어나 LA로 이주한 뒤 1944년 '녹원의 천사(National Velvet), 1949년 '작은 아씨들'을 통해 국민 미소녀의 자리를 굳힌 리즈는 1950년대 들어 미소녀 아닌 미녀로 탈바꿈해갑니다. 그 첫 시도는 아무래도 '신부의 아버지' 연작이지만 그건 제가 못 본 영화인 관계로 패스. 그리고 1951년, 너무나도 유명한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가 나옵니다.

드라이저의 '아메리카의 비극'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의 줄거리는 이후 전 세계에서 수만번에 걸쳐 (사실상)리메이크됩니다. '가난한 집의 명석하고 야심만만한 미남 청년이 재벌 집 딸과 결혼해 신분 상승을 이루고자, 어려운 시절의 연인을 차 버리는 이야기'의 원조인 겁니다. 2011년 방송되고 있는 드라마 '마이더스'의 먼 조상 뻘인 셈이죠.

글자 그대로 영화는 아메리카의 비극, 물신과 성공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사회의 비극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19세의 리즈는 주인공 몽고메리 클리프트에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살게 해 줄 열쇠' 역할을 합니다. 너무나도 청순하고 아름다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상징이죠. 비록 대단히 큰 비중은 아니지만, 아무튼 리즈의 존재는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고민에 너무나 설득력있는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아울러 이 영화 이후 리즈에게는 '부잣집에서 자라난 공주님이며 발랄하고 청순하지만 다른 사람의 상황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 캐릭터가 부여됩니다. 이를테면 한국 미니시리즈의 여자 2번으로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죠.


1952년. 제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리즈의 모습이 등장하는 영화 '아이반호'가 등장합니다. 아이반호 역은 당대의 미남 스타 로버트 테일러. 사실 월터 스콧 경의 원작을 존중하자면 여주인공은 색슨 족의 로웨나 공주여야 하지만 정작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아이반호를 짝사랑하는 유태인 처녀 레베카입니다. 그리고 그 역할에 리즈를 캐스팅 한 데서도 결국 아이반호와 맺어지는 로웨나보다 레베카가 돋보여야 한다는 연출 의도가 엿보입니다.

(여담이지만 조앤 폰테인은 이로써 '레베카'에게 두번째 까임을 당한 셈입니다. 이미 1940년작인 알프레드 히치콕의 '레베카'에서 폰테인은 '그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미인인' 레베카'-영화 속에 얼굴은 한번도 나오지 않지만-라는 여자와 비교되는 역을 맡았죠. 폰테인도 상당한 금발 미녀지만 어쩌다 이런 역할을 두번이나 맡게 되는지 참...)

아무튼 '아이반호', 우리 제목으로 '흑기사'의 레베카는 그윽한 눈빛으로 한 소년의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었던 비련의 주인공으로 오래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본 작품은 1954년작 '랩소디'. 거의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 작품일테지만 제게는 매우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영화입니다.

또 한번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 역을 맡은 리즈는 유망한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홀딱 반합니다. 남자도 여자가 좋지만 연습 조차 하지 말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라는 여자의 철없음에 질려 버리고 결별을 선언합니다. 충격을 받은 여자는 주변에 있던 별볼일없는 피아니스트와 결혼해버리죠.

몇년 뒤, 여자에게 얹혀 살다시피 하던 피아니스트는 여자가 자신을 사랑해서 결혼한게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망가지고 있다는 자각으로 그녀 곁을 떠나려 합니다. 그제서야 정신차린 리즈는 죄책감에 평강공주로 변신, 본래는 재능있던 남편을 정상의 피아니스트로 되돌려 놓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는 사이 옛 애인은 거장으로 승승장구하죠.

여자는 옛 애인과 조우하고, 둘 사이의 감정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합니다. 하지만 구렁텅이에 빠진 상태로 남편을 버릴 수 없다는 신념에 더욱 훈육을 강화하고, 남편의 재기가 거의 확실해지자 '이제 당신이 두 발로 설 수 있으니 난 떠나련다'는 뜻을 전합니다.
 



연주가 끝나면 아내가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처절한 심정으로 남자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하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단 저 동영상의 끝이 바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닙니다. 그냥 동영상 올린 분이 엔딩 크레딧을 보여주려고 편집한 모양이네요.)


이 영화에서 이 곡의 비장함은, 바이올리니스트 남자의 상징곡인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1번의 화려함과 정면으로 대비를 이루면서 최상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실제 피아노 연주는 클라우디오 아라우가 맡았다는군요. 실제로 제가 클래식 음악의 매력을 느낀 것은 이 영화를 본 다음이었다고 기억합니다. 물론 거기에 리즈의 미모가 미친 영향은... 뭐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


'내가 마지막 본 파리'에서도 '철없는 부잣집 아가씨'의 이미지는 계속됩니다. 이 시기 리즈의 주연작들이 한국 멜로드라마에 미친 영향은 참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 1954년 영화에서 이미 두 자매가 한 남자를 놓고 펼치는 묘한 신경전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검은 터틀넥이 잘어울리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영화는 1956년작 '자이언트'. 록 허드슨과 제임스 딘, 그리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세 주인공의 이름만으로도 당대 최고의 작품이 되기에 충분했던 영화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200분이라는 상영시간이 다소 긴, 몇 장면을 빼면 그닥 높이 평가하고 싶지는 않은 영화입니다만.... 어쨌든 괴팍한 제임스 딘이 끝까지 순정을 보이는 '마님'역의 리즈는 당연히 인상적입니다.


아마도 리즈의 60년대 작품들에게 오스카상이 주어진 것은 58년작인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와 59년작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 상을 주지 않은 데 대한 반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대 후반을 맞은 리즈는 그저 별 변동 없는 '철없는 부잣집 딸'에서 순식간에 진짜 배우로 변신합니다. '뜨거운...'에서 알콜 의존증인 남편 폴 뉴먼과 시아버지의 갈등을 보며 괴로워하는 아내 역을 맡아 홈드라마 적응력을 보여준 리즈는 마침내 걸작 '지난 여름 갑자기'를 통해 손꼽히는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일반적으로 리즈의 출연작 가운데 가장 화려한 면면의 영화는 '자이언트'라는게 정설이지만 개인적으로 최고의 영화(이후 작품들을 모두 감안하더라도)는 바로 '지난 여름 갑자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브의 모든 것' 등으로 이미 두 차례나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거장 조셉 L 멘키위츠 감독(물론 뒷날의 '클레오파트라' 때문에 리즈와 싸잡아 욕을 먹지만)의 이 작품은 대부호 집안의 미망인 캐서린 헵번이 젊은 정신과 의사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만나 이야기하는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1년 전 여름, 헵번의 아들과 그 연인인 엘리자베스 테일러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천천히, 잘 드는 칼로 과일 껍질을 벗기듯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별다른 액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와 탄탄한 대본, 절묘한 연출에 의해 관객은 보는 내내 긴장을 멈추지 못합니다. 특히 마지막의 충격적인 사건과 영화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면 배우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에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말이 그저 뻔한 수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렇듯 만 18세의 나이로 1950년대를 맞은 리즈는 10년 동안 세번의 결혼을 경험하고, 두 차례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 평단과 일반 관객으로부터 불멸의 미모와 연기력을 칭송받는 여신의 반열에 오릅니다. 비록 오스카 수상이나 '사상 최고의 실패작'으로 불렸던 '클레오파트라', 리처드 버튼과의 결혼과 이혼 등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리즈의 인생에 남아 있지만,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이름을 불멸에 이르게 하기에는 지금 살펴본 10년으로도 충분하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으로 제 방식대로 엘리자베스 여신에 대한 조의를 표명합니다.


P.S. "난 결혼한 남자 말고는 아무와도 함께 자지 않았다"는 등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쿼트 가운데는 유명한 말들이 많은데, 그중엔 "난 리즈라고 불리는게 싫어"라는 말도 있습니다. 알지만 본명이 너무 길다 보니 어쩔 수 없더군요.^

윤회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부디 얼른 다시 태어나 세상에 또 한명의 여신을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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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는 김장훈의 '오페라, 오페라, 오페랄랄랄라'를 떠올리고, 그 다음에는 뚱뚱한 아저씨가 뚱뚱한 아줌마의 없는 허리에 간신히 짧은 팔을 감고 희노애락을 가늠할 수 없는 우렁찬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떠올립니다. 가끔 오페라를 보러 간다든가, 오페라 dvd를 샀다든가 하는 말을 하면 별 희한한 짓거리를 한다는 얘기가 듣기 싫어 아예 얘기를 하지 않는게 보통입니다.

지난 주말, 호암아트홀에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를 HD 영상에 담은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을 봤습니다. 아시다시피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첫날 밤에 해당하는 작품이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최근 들어 그 시즌 무대에 올려졌던 작품을 그대로 HD 영상으로 제작, 미국은 물론 전 세계 극장에서 상영하게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메가박스가, 그리고 연말부터는 CGV에서 이 시리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형태의 관람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체 진짜 오페라도 아니고, 영상물을 극장에서 보는데 가격이 2만5천원이면 너무 비싼 게 아니냐. 두 사람에 5만원이면 오페라 DVD를 두 장은 살 수 있다. 맞는 말이지만, 오페라 DVD를 집에서 보는 것과, 극장에서 보는 것 사이에는 영화를 집에서 보는 것과 극장에서 보는 것 이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네. 사실 저도 몰랐습니다만, 그런 차이가 '있더군요'.)

그리고 DVD는 그리 '최신 공연'이라고 보기 힘든 영상을 보여줍니다. 이 메트 오페라 시리즈처럼 2010년 시즌의 공연을 곧바로 전 세계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DVD 발매가 빠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오페라가 이런 강점을 가질 수는 없죠. 브린 터펠이나 로베르토 알라냐, 안나 네트렙코, 마르첼로 알바레스 같은 최고의 스타와 최고의 무대 기법이 동원되는 메트 오페라니까 이런 식의 상품화가 가능할 겁니다.

또 한가지, 다른 메트 오페라와 다른 점은 바로 바그너의 '링' 시리즈였다는 점도 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냥 오페라가 멜로드라마라면 바그너 오페라는 블록버스터라고 해야 할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재 연출가라는 로베르 르파쥬(Robert Lepage)의 손길이 닿은 무대는 정말 살아 움직입니다.

막이 오른 뒤 첫 장면은 '라인의 황금'의 상징인 세 라인 강의 처녀들(Rhinemaiden)의 등장입니다. 이 첫 장면은 바그너 당대부터 상상력을 동원한 연출이 이뤄졌던 장면이죠.

현대로 오면서 다양한 연출이 이뤄졌습니다. 뭐 이를테면 이런 식도.

그런데 이렇게 깊은 강물 속에서 노래하는 세 처녀(인어)의 모습을 형상화한 건 정말 획기적입니다.

그리고 저 세 처녀가 헤엄치는(사실은 매달린) 저 벽. 저 벽에 이 무대의 진수가 담겨 있습니다. 보통 벽이 아닙니다.

때론 동굴의 천장과 바닥으로,

때로는 계단으로,

그리고 이런 성벽과 무지개다리로 변신합니다.

이런 식으로 초대형 철골 무대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시각적인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무대의 무게만 45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구조가 버티지 못할까봐 보강 공사를 거쳐 선보이는 무대입니다.


첨단 기술을 이용한 무대 장비와는 반대로 의상은 완전히 복고풍입니다. 1870년대 초연 때의 의상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전통적인 바그너 극 의상과 모더니즘이 빛나는 차가운 알루미늄 성벽으로 장식된 무대. 놀라운 조화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오페라인 만큼 '음악'과 '노래'에 대한 평이 있어야겠지만 제가 그럴 주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21년 전에 니벨룽의 반지 전곡을 무대에 올렸던(DVD도 나와 있죠) 제임스 레바인인 만큼 음악적으론 흠잡을 데가 없어 보입니다. 특히 당대의 베이스 바리톤 가운데 브린 터펠보다 나은 보탄을 찾기는 쉽지 않을 듯.


'라인의 황금'에 나오는 보탄은 북구 신화의 주신 오딘의 다른 이름입니다. 주신이고 신들의 아버지이긴 하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는 전혀 다른 신격입니다.

제우스(주피터)와 보탄(오딘)의 차이는 이미 유럽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던 일입니다. 요일의 이름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수요일은 보탄의 날, 그리고 목요일은 보탄의 아들이며 번개의 신인 쏘르(토르, '니벨룽의 반지'에는 도너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의 날입니다. 그런데 이 요일의 이름이 영미권에 전해지면서 수요일은 수성(머큐리/헤르메스), 목요일은 목성(주피터/제우스)의 날로 번역됩니다.

상식적으로는 보탄=제우스여야겠지만 남쪽 유럽 사람들은 보탄과 머큐리를 상업의 보호신이라는 공통점으로 묶고 쏘르와 주피터를 번개의 지배자라는 공통점으로 묶은 것입니다. 그만치 보탄은 점잖고 권위 넘치는 주신이라기보다는 재기발랄하고(?) 사기성이 농후하지만(?) 계약에는 놀라울 만치 엄격한 신입니다. 심지어 그 자신의 사기성(?)을 보강하기 위해 나중에 신들의 멸망을 가져오는 사악한 불의 신 로키(역시 바그너 악극에는 로게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를 늘 달고 다니는 신입니다.

아무튼 바그너의 악극에 나타나는 보탄은 신이라기엔 너무나 인간적인 약점이 뚜렷한 신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간적인 약점이 결국은 신들의 몰락을 낳는 단서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라인의 황금'은 4부작의 서막이면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작품답게, 나머지 세 작품의 스토리에 복선을 깔아 두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아무튼 '라인의 황금', 정말 못 봤으면 크게 후회할만큼 대단한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몇달 뒤 국내에서도 볼 수 있게 될 '발퀴레'에서는 이런 장면(바로 위 사진)까지 연출된다니 도저히 아니 볼 수가 없겠습니다.^^

P.S. 이런 무대를 직접 본다면 더 멋지겠지만, 개인적으로 저라면 HD 영상으로 보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비싼 표를 사서 실연 무대에 간다 해도 90%의 관객은 배우의 얼굴 표정조차 보기 힘들죠. 그런 의미에서 HD를 통한 오페라 관람은 오페라라는 장르에 새로운 힘을 불어 넣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뭔가 부실한듯 해서 퍼온 동영상.





그러고 보니 주빈 메타도 21세기형 링 시리즈를 내놨군요. 역시 쫌 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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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의 '굿바이 평양'을 보고 왔습니다. 양영희 감독은 재일교포. 제주도 출신(양씨라는 데서 일단 짐작 가능하죠^^)의 아버지는 조총련의 핵심 간부였고, 특히 북한 사회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인정받아 김일성과 함께 사진 촬영까지 한 인물입니다. 그런 아버지는 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세 아들을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고, '자랑스러운 조국'에 10대 후반의 세 아들을 보냅니다.

막내인 양영희 감독은 세 오빠가 하루 아침에 집을 떠난 것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세 오빠의 이후 삶을 지켜보면서 아버지를 원망도 했던 모양입니다. 아무튼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영희씨는 90년대 중반부터 2004년까지 북한으로 가족을 방문하러 갈 때마다 찍었던 영상을 편집해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만들었습니다.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은 전편과 속편의 성격이라기보다는, 같은 시기와 같은 사람들 이야기를 다루되 조금 자제한 이야기와 조금 더 솔직한 이야기로 나눠집니다. '디어 평양'을 만든 죄(!)로 양 감독은 북한 입국을 금지당했고 여기에 대한 반발(?)로 '굿바이 평양'을 내놨습니다.

영화는 1995년, 다섯살 난 선화가 맛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선화는 양 감독의 둘째 오빠가 두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입니다. 양 감독은 이것이 선화와의 첫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는 방문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1991년생(어쩌면 1992년생)인 선화는 1996년 엄마를 잃고, 1999년 새엄마를 맞습니다(그러니까 선화 아빠는 결혼을 세번 하신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화는 구김살없이 명랑하고 씩씩한 아가씨로 자라납니다. 영화는 곧 선화의 성장사입니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던 아기는 엄마의 묘소 앞에서도 방긋 방긋 웃는 아기가 되어 있고, 어느새 학교에서 배운 시 낭송을 하는 어린이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마냥 북한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이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그동안 '식량난, 꽃잽이, 대량 탈출 가능성'이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점만 부각될지 모르지만 영화 속에서 간간이 드러나는 북한의 실상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수돗물은 하루에 두 시간 나오고 수시로 정전이 찾아오는 평양의 아파트(생일 축하를 위해 불을 껐을 때 아버지가 "어, 정전이냐?"고 물으면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도 평양 사람 다 되셨다"며 웃습니다. "영광스런 정전입니다" 하며 까르르 웃는 선화의 대사도 나옵니다), 어머니가 3년만에 닭고기 요리를 해 준다는 조카들, 미키마우스 양말을 신고 학교에 가는 선화에게 고모(양 감독)가 "이거 신어도 괜찮아? 하고 묻자 "다들 잘 몰라"라고 대답하는 선화, 그 선화보다 머리 하나씩은 작은 선화네 학교의 아이들(선화네 가족이 그나마 평양에서는 살림새가 괜찮은 편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은 양 감독이 들고 있는 카메라가 영 신기한 듯 그 앞을 떠나지 못합니다.



이런 물질적인 빈곤 외에도, 고모가 자꾸만 선화에게 미안해 지는 이유는 여러 군데서 드러납니다. 해외 방문객이 머무는 호텔 식당에서 "먹어 본 게 없어서 고를 수가 없다"며 한동안 메뉴판만 뒤적이던 선화는 고모가 약간 민감하다 싶은 질문을 던지자 "카메라 꺼요"라며 눈치를 살핍니다. 열세살 나이에도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하면 안 될 말이 따로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양 감독이 선화에게 보여주는 애착은 오빠들 사이에서 혼자 자라나고 있는 고명딸이라는 공통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닐 겁니다. 선화를 바라보는 양 감독의 시선에선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던 이 조카가 평양에서 자라야만 하는 데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납니다. '디어 평양'이나 '굿바이 평양' 정도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갈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버리는 그런 나라에서 말입니다.




북한 입국을 금지당한 뒤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오가고, 선화는 어느 새 영어를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뇌경색으로 고생하다 숨을 거두고, 아버지가 죽기 직전 우울증에 시달리던 큰오빠(선화의 큰아버지)도 생을 마감했습니다. 큰오빠의 아들은 북한의 음악 영재로 자란 듯 하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는 없습니다.

양 감독이 담고 싶었던 것은 세 아들의 삶이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심지어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는 데 대한 아버지의 깊은 후회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특이한 가족사를 담아낸 '굿바이 평양'의 시선은 건조한 듯 하면서도 따스합니다. 북한과 재일교포, 진실보다는 신화만 요란한 두 사회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라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져야 할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P.S. 아무쪼록 '굿바이 평양'의 공개가 선화나 그 가족의 삶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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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이 MBC TV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새 코너 '나는 가수다'에 쏟아졌습니다. '대박이다' '감동이다' '이소라 노래 듣다가 눈물이 났다' '가수들이 이렇게 노래 잘 하는 지 몰랐다' 등등. 모처럼 새로운 볼거리가 나왔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참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시다시피 '나는 가수다'는 일곱명의 가수들이 출연해 관객 평가단 앞에서 미션을 수행하고, 그 미션에 따라 한번에 한명씩 꼴찌는 탈락하는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그 첫회에 등장한 가수들이 이소라 김범수 백지영 정엽 윤도현 박정현 김건모 등 7명이라는게 사실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가수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첫회에 나온 일곱 가수들은 자신의 대표곡을 하나씩 불렀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진지하게' 가수들의 노래에 집중한 시청자들은 찬탄을 아끼지 않았지만, 가수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역력했습니다. 그리고 방청석의 청중 평가단(몇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은 1등 박정현부터 7등 정엽까지 순서를 매겼습니다.

물론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청중들의 반응에 따라 1등부터 7등까지 순위를 매기는 것이 가혹하다? 사실 가수들은 매일, 매번 노래를 할 때마다 순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숫자로 표시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점수를 매깁니다. 그 순위가 음반/음원 판매량이 아닌 노래 실력으로, 그것도 현장에서 노래를 들은 사람들의 채점으로 매겨진다는 건 그리 불합리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한명씩 떨어진다? 어차피 우리나라에서 가장 노래를 잘 한다는 7명 중에서 떨어지는 것 쯤이야 별 문제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 7등'이라고 생각하면 못 버틸 이유도 없죠. 더구나 자기 노래로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네. 가수들의 각자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건 아마 첫 회가 마지막일 겁니다. 다음부터는 특정 미션에 대한 수행으로 경쟁이 이뤄질 전망입니다), 슈퍼스타K 처럼 미션을 수행하는 형식으로 진행될테니 그게 반드시 '진검 승부'라고 볼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 우리도 가수들 나오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지. 그런데 가수들이 나와서 노래만 하면 시청률이 안 나와. 어쩌겠어? 방송이란게 시청률이 나와야 먹고 사는 건데. 그러니까 이렇게 서바이벌 형식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팍 끌어야 한다고. 어차피 가수라는게 매일 무대에 설 때마다 남보다 잘 하려고 경쟁하는 거 아닌가?"


아마 이런 식으로 제작진은 가수들을 섭외했고, 가수들도 이런 논리에 동의해서 출연에 임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안타깝기도 합니다.



박정현이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데뷔 14년차. 미국에서 왔다는 땅콩만한 키의 가무잡잡한 소녀 가수가 입을 열었을 때, 허공에 음표가 뿌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이름은 리나 박. 한국어 실력은 자신이 부르는 가사를 다 이해하는지도 의심스러울 정도였지만 아무튼 '목소리를 가지고 노는' 그 솜씨는 실로 경이적이었습니다.

당시 소속사는 큰 회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최고의 남녀 가수는 우리 회사에 있다'며 큰 자부심을 내세웠습니다. 바로 임재범과 박정현을 가리키는 말이었죠. 듀엣 '사랑보다 깊은 상처'는 이렇게 이뤄진 거였습니다.

14년 뒤. 그 박정현이 방송에서 '실력에 비해 참 안 알려진 가수'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한국 가요계의 현실입니다.


방송사는 '대중음악을 살려 보자'는 대의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가수들은 그 대의를 높이 사서 자신들의 체면이 깎일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프로그램에 동참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 대의는 좀 의심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상업방송' SBS도 유지하고 있던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이 '공영방송' MBC에는 아주 오랫동안 없었습니다. 전통을 자랑하던 '수요예술무대'는 어느새 폐지됐고, 최근에서야 자회사 케이블 TV에서 부활됐습니다.

대중음악을 살리겠다는 MBC의 그 '대의'는 케이블 TV M.NET이 총력을 기울여 '슈퍼스타K'를 만들자, 곧바로 100억원대의 제작비를 투입해 '위대한 탄생'을 만들어 물을 타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위대한 탄생'은 이제 '슈퍼스타 K'를 뛰어넘는 시청률을 과시하며, 시즌 2 제작을 앞두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이 새로 기술을 개발해 시장을 개척해 놓으니 대기업이 압도적인 자본력과 유통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그 시장을 채우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과연 '대중음악계의 숨겨진 재능'을 찾는 것이 목표였을까요, '케이블 TV 따위가 감히...'가 목표였을까요.

'노래 자랑 프로그램을 케이블 TV만 하라는 법이라도 있냐. '슈퍼스타 K'도 '전국 노래자랑'과 '아메리칸 아이돌'을 보고 개량한 프로그램 아니냐'면 할 말은 없습니다. 비슷한 프로그램을 한다고 다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위대한 탄생'이 성공하고 있는 것은 '위대한 탄생' 제작진이 심혈을 기울여 재미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위대한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라고 한 MBC 경영진의 의사결정은 그닥 페어플레이라고 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

 이제 '위대한 탄생'은 이번 시즌을 마치면 바로 다음 시즌 준비로 들어갈 겁니다. 시점상 '슈퍼스타 K'의 시즌 3와 '위대한 탄생'의 시즌 2가 거의 정면으로 대결을 벌일 수도 있을 겁니다. 올 연말이면 국내 스타 서치 프로그램의 대명사는 '슈퍼스타 K'가 아니라 '위대한 탄생'이 되어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다시 '나는 가수다'로 돌아갑니다. 가수들이 그런 불이익을 감수해 가면서 이런 프로그램에 나오게 된 건 그만치 '프라임 타임 대에 가수들이 나가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게 어디냐'는 얘기가 절실했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한국 TV에서 '가수'들의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죠.

(그런 '대의' 속에서도 '나는 가수다' 제작진은 계속해서 개그맨들을 투입해 '노래 듣는 분위기'를 흔들어 놓더군요. 지나치게 많은 가수들의 인터뷰 삽입, 특히 노래를 끊고 들어가는 중간 화면 등은 그렇게 '음악'을 강조한 프로그램에서까지 꼭 이렇게 해야 하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많은 음악계 인사들과 가수들은 '"그래도" 가수들이 프라임 타임에 노래를 하고, 사람들이 그 노래를 관심있게 듣게 해 준 게 어디냐'며 환영의 뜻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되고야 만 상황이 참 허탈할 뿐입니다.

앞으로 대결이 어떻게 전개될 지 모르겠지만, 일곱 가수가 노래 경연을 펼친 첫회를 봐선, 내세우는 '대의'와 프로그램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과의 차이에 대한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 합니다.



P.S. 그리고 '가수'들이 방송에서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은 방송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청중도 절반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방송에서 안 틀어 줘서, 방송에서 출연시키지 않아서 몰랐다고 변명하지 맙시다. 음반이며 음원을 사지 않고, 콘서트도 가지 않은 채, 가수들이 예능 프로그램에밖에 나오지 못하게 한 건 바로 '시청자 여러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랜만에 가수들이 열심히, 진지하게 노래하는 게 보기 좋았다'고들 합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가수들은 거의 항상 '진지하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습니다. 10년 전에도, 5년 전에도, 최근에도 그랬습니다. 다만 아주 아주 오랜만에, 그들이 노래하는 광경을 당신이 '진지하고 열심히' 바라본 것 뿐입니다.

P.S.2. 첫 방송이 나간 뒤로 이소라와 박정현의 음원이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고, 오랜만에 많은 사람들이 '진짜 노래'에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네. 분명히 '나는 가수다'는 일면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절대 "'나는 가수다' 따위의 나쁜 프로그램은 당장 때려 치우라"고 외치는 글이 아닙니다. 현재의 가요계에서 그나마 이런 프로그램이 순기능을 수행한다면, 그 역할도 인정합니다. 다만 이소라나 박정현 같은 가수들이 이렇게까지 해야 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다는 게 참 안타깝고, 그런 의미에서 '어쩌다 세상이 이렇게 됐나'라는 한탄일 뿐입니다.

대체 어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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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는 가다피라고 불렸던 카다피. 요즘은 과대망상증에 걸린 미친 노인네 대접을 받고 있지만 한때는 '제3세계 반미 자주의 상징'으로 영웅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특히 1980년대 국내에서 카다피의 인기는 대단했죠. 한때 한국의 운동 깨나 한다는 학생들은 '카다피의 리비아야말로 한국이 미래에 본받아야 할 국가 모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사회주의를 표방하긴 했지만 리비아는 한국과 친근한 나라였던 것도 분명합니다. 동아건설이 주도했던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포함해 한국 건설사들이 많이 진출했던 나라입니다. 심지어 얼마 전 우연히 탔던 택시 기사 아저씨는 왕년에 리비아 건설 현장의 중장비 기사 출신이시라며 가까이서 본 카다피의 영걸스러움(?)에 대해 한바탕 칭찬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카다피의 독재나 국내 인기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보신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1980년작, '사막의 라이온'이란 영홥니다.



그동안 어찌 어찌 하다 보니 신문에 쓴 글을 이쪽으로 가져오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꽤 오랜만에 가져오는군요.^^


[분수대] 영화와 현실

2009년 6월, 위성방송 스카이 이탈리아 채널은 느닷없이 1980년작 영화 ‘사막의 라이언(Lion of the Desert)’을 편성했다. 미국·리비아 합작인 이 영화는 1930년대 리비아 민중이 지도자 우마르 묵타르(Omar Muktar)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침략군에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 영화가 이탈리아군이 포로를 폭행해 학살하는 장면 등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1982년 상영 금지 조치를 내린 바 있었다. 하지만 2009년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이탈리아 방문 기간에 맞춰 TV 편성이 이뤄졌다.

 카다피와 이 영화의 인연은 매우 각별하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는 대작 영화를 통해 ‘서구에 맞서는 아랍의 영웅’으로 자신의 위업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이미지의 이상적인 모델이 바로 우마르 묵타르였다.

 할리우드의 아랍계 프로듀서 무스타파 아카드가 감독에 선정됐다. 아카드는 1977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기 영화 ‘무함마드, 신의 메신저’ 제작 때문에 카다피의 신뢰를 얻은 인물이었다. 3500만 달러의 오일 머니가 아낌없이 투입됐다. 같은 해 나온 007 시리즈 ‘포 유어 아이즈 온리’(제작비 2800만 달러)보다도 1.5배나 많은 규모였다.

 그 결과 묵타르 역의 앤서니 퀸을 비롯해 올리버 리드, 로드 스타이거 등 월드 스타들이 캐스팅됐고, 수백 명의 기마대가 탱크부대와 맞서 싸우는 대규모 전투 장면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관객은 프로파간다를 원치 않았다. 전 세계 흥행 수입은 100만 달러에 미치지 못했고, 이는 20세기 영화 사상 손꼽히는 실패 사례로 꼽힌다. 물론 가장 큰 투자자 카다피가 만족했으니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 속 리비아인들은 유목민족 베두인의 후예답게 탱크 앞에서도 끈으로 다리를 묶고(후퇴하지 않기 위해) 용감하게 싸운다. 포로가 된 묵타르도 “승리 아니면 죽음이다. 우리에게 타협이란 없다. 내가 안 되면 다음 세대가 이어 싸울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과연 카다피는 그 국민이 목숨을 걸고 물리치려 하는 상대가 바로 자신이고, 국민들이 외세 개입에 희망을 거는 상황을 상상이나 해봤을까. 아직도 “국민들은 나를 사랑한다”고 우기고 있는 카다피는 더 이상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란 사실을 언제 깨닫게 될까.

송원섭 JES 선임기자



영화 속에도 나오듯 이슬람 지도자이며 교사 출신이었던 우마르 묵타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족 특유의 치고 빠지는 기동력을 이용해 이탈리아 침략군을 괴롭혔습니다.

사실 로마 제국 이후 이탈리아군이 다른 나라 앞에서 무력을 뽐낸 사례는 별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19세기까지 여러 도시 국가로 분열돼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2차대전사에서도 이탈리아군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해 같은 편인 히틀러의 골머리를 썩힌 사례가 여러 차례 보고됩니다.

지금도 리비아는 광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600만 정도입니다. 만약 이탈리아가 아니라 좀 더 군사력이 강한 나라였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묵타르의 영도력이 카다피에게 영감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영화는 1981년 12월 국내에서 개봉됐고, 저도 광화문 한복판에 있던 '국내 최대의 무허가 건물' 국제극장에서 봤습니다. 대한극장을 제외하면 당시 가장 큰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는 극장이었기 때문이죠.

광대한 화면에서 펼쳐지는 액션은 전혀 나쁘지 않았고, 약소국 국민들이 제국주의 침략군에 맞서 싸운다는 내용은 충분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리비아는 적대해야 할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한국이 개척해야 할 건설 시장이었으므로 이 영화가 상영되는 데 장애 같은 건 전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신 분들 중 90% 정도는 이 영화의 배경이 리비아였다거나, 이 영화와 카다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광고를 보면 사상 초유의 제작비 3500만달러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당시의 3500만달러가 엄청난 돈인 건 분명하지만 그때도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의 '슈퍼맨' 같은 영화는 5000만달러 대의 제작비를 쓰곤 했습니다. 물론 뒷날 제임스 카메론이 '터미네이터2'로 1억달러 제작비를 넘어 서기 전까지 이 정도의 금액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분명 영화가 그리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대실패한 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제작/후원/배급자인 카다피가 이 영화를 통해 돈을 벌어 들이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국내에도 거의 무료로 틀어달라고 한 게 아닐까...




묵타르에 대한 카다피의 집착은 바로 저 가슴에 달린 사진에서도 나타납니다. 이탈리아 군에 생포된 당시 묵타르의 사진(위 사진)을 가슴에 붙이고 공식석상에 수시로 등장할 정도로, 묵타르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카다피의 야망은 적나라했습니다.

어쨌든 세상은 변했고, 카다피는 자신이 원했던 묵타르의 모습이 아니라 묵타르와 리비아 민중에게 쫓기는 이탈리아 침략군의 위치에 오게 됐습니다.

30년 사이 카다피가 초심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30년 사이 가식이 걷힌 것인지. 결과에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아무튼 30년 전 그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생각한 영화를 보면 정말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합니다.

P.S. 가끔 이 영화 얘기를 하면 션 코너리가 아랍 족장으로 나왔던 영화를 떠올리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바람과 라이온'입니다. 두 영화 모두 '사자'를 굳이 '라이온'이라고 쓴 이유는 아마도 일본식 표기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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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어찌 하다가 아카데미상 시상식 이틀 전에야 그 소문이 파다한 '블랙 스완'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영화의 완성도와 나탈리 포트만의 열연을 칭송하는 분위기입니다. 특히 발레라는 소재, 빛과 어둠을 대표하는 두 개의 역할을 동시에 소화해야 하는 '백조의 호수'라는 작품의 분위기, 발레리나 역할을 소화하기 위한 여주인공 나탈리 포트만의 엄청난 변신 노력 등이 관객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화는 예술가들의 완벽을 향한 집념과 그 집념에서 비롯되는 심리적인 압박, 그리고 그때문에 무너질 수 있는 여리디 여린 신경을 다룬 작품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예술을 통한 성취 그 자체보다는, 세심하게도 이 여배우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득력있게 깔아 놓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비극의 원천은 바로 '마마걸'이란 요소입니다.


미국 유명 발레단의 주역 무용수 니나 세이어(나탈리 포트만)는 이 발레단을 이끌어 온 스타 베스(위노나 라이더)의 은퇴와 함께 새 시즌의 개막작인 '백조의 호수'의 여주인공을 따내기 위해 엄청나게 긴장합니다. 단장(?)인 토마(뱅상 카셀)는 니나의 테크닉을 높이 평가하지만, 백조 여왕 오데트와 쌍둥이 흑조 오딜을 동시에 연기하기에는 니나의 감정 표현이 완벽하지 않다며 의구심을 보입니다.

토마는 니나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여주인공 역할을 맡기지만, 악의 상징이며 남자를 유혹해 오데트를 파멸에 빠뜨리는 오딜 역을 연기하기에는 니나의 연기력이 부족하다며 계속해서 니나를 압박합니다. 이때문에 안 그래도 여린 니나는 엄청난 정신적 압박을 경험하게 됩니다.

(몇몇 분들이 오데트와 오딜을 한 사람이 연기하는 것이 토마의 새로운 해석이라고 오해하시곤 하는데 사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거의 초연 때부터 오데트와 오딜을 한 무용수가 춤추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백조의 호수'나 발레의 세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이 영화를 더 즐길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이 영화를 소비하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영화는 결국 재능과 성공, 노력과 가능성에 대한 여러가지 요소들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이며, 그 단계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아주 새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세심한 연출로 만만찮은 성과를 이끌어냈습니다.

특히 나탈리 포트만의 니나 연기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찬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극중 발레 장면에서 보여주는 발레리나 연기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설탕 인형 같은 니나의 아슬아슬한 모습을 연기하는 데 있어 이만한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었다는 건 박수 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나탈리 포트만은 이미 골든 글로브와 영국의 아카데미상이라고 할 수 있는 BAFTA를 비롯해 13개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쥐었습니다. 여주인공의 극중 비중이나 연기력 면에서 2010년의 영화들 가운데 따라올 작품이 없다는 압도적인 성과인 셈입니다. 물론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후보로 오른 배우들 중 무시할 수 있는 후보는 하나도 없다고 봐야겠지만, 올해만큼은 포트만의 독주에 제동을 걸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요소들에 궁금증을 느끼는 분들은 당연히 보셔야 할 작품이지만 화려한 액션이나 웅대한 스케일, 피로를 날려 줄 코미디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겐 약 두시간 동안 송곳으로 놋그릇을 긁는 소리를 듣는 감정의 혹사로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블랙 스완'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건, 나탈리 포트만이 여우주연상을 받건 말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재미있다고 느끼는 영화를 보는게 좋습니다. '명화'라는 말이나 지적 허영에 매달릴 이유는 없습니다.

영화 소개는 이 정도. 나머지는 스포일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일단 영화를 보신 뒤에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니나 못잖게 눈길을 끄는 것은 주변의 세 여자입니다. 첫째는 예전 발레단의 여왕이었던 베스(위노나 라이더), 천재성을 상징하는 릴리(밀라 쿠니스), 그리고 니나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엄마(바브라 허쉬)입니다. 사실 니나라는 존재는 그 자체로서는 그리 선명하지 않은, 클리셰 덩어리 같은 캐릭터일 뿐입니다. 이 세 인물과의 관계가 니나를 선명하게 드러나게 합니다.


베스는 니나가 닮고 싶은 존재, 니나가 지향하는 '완벽'에 가장 가까운 인물입니다. 니나는 심지어 베스의 물건들을 훔쳐 가면서까지 베스의 세계에 접근하려 합니다.




릴리는 니나가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경지를 보여줍니다. 무대공포증도 없고, 완벽에 대한 압박도 없이 발레를 즐길 수 있는 발레리나입니다. 니나와 같은 자기 혹사도 없고(자몽 반개로 끼니를 때우는 니나와는 달리 릴리는 치즈버거 - 할리우드 영화에서 흔히 다이어트로 인한 욕구불만의 상징으로 그려지죠 - 를 먹으며 춤을 춥니다), 목숨을 걸고 연습하지도 않지만 노련한 안무가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유형의 예술가입니다.

릴리와 니나의 관계는 고전 '아마데우스'에서 모짜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연상시키지만 릴리는 모짜르트는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삶을 누리기 위해 예술이 원하는 완벽성을 희생시키는 존재입니다. 다만 니나가 90에서 100의 완성도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요소의 90 이상을 투입해는 삶을 살고 있다면, 릴리는 80에서 90 정도의 완성도를 내기 위해 인생의 50 정도(니나의 시선에서는 더 낮아 보입니다)를 투입하는 캐릭터입니다. (예술가의 노력과 결과로 나타나는 성취의 관계는 흔히 지수함수로 표현됩니다. 최정상의 단계에서 1%의 완성도를 더 높이기 위해선 그 전보다 몇 배의 투입 요소가 필요한 법입니다.)

니나가 본능적으로 릴리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은, 그 자신이 릴리처럼 역량의 50 정도를 투입한다면 릴리가 보여주는 80 정도의 퍼포먼스를 결코 내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또 릴리가 만약 인생의 100을 발레에 투입한다면 - 물론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지만 - 자신보다 우수한 성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릴리의 자유분방함은 니나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요소입니다. 이렇게 예측불가능한 상대에 대한 공포는 흔히 혐오로 바뀌기 마련이죠.




니나의 비극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엄마와의 삶입니다. 영화 속 내용으로 짜 맞춰 보면 엄마는 그닥 재능있지는 않은 발레리나였고, 28세때 니나를 임신한 이후 발레리나로서의 인생을 접고 육아에 전념했습니다. 니나의 생부가 누구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 뒤로 다른 남자와의 삶 같은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하고, 마찬가지로 니나의 성장과정에서 연애 같은 것은 아예 배제시켜버린 주역이기도 합니다.

니나를 사랑하고 니나를 통해 자신이 못 이룬 프리마돈나의 꿈을 이뤄보려 하지만 한편으로 니나는 자신의 발레 인생을 강제로 끝내게 한 존재(사실과 다르지만 니나 엄마의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이며, 한편으로는 자신을 넘어 너무 성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라이벌이기도 합니다.

니나가 오데트 역을 따냈을 때 엄마는 니나에게 케이크를 먹이려 하고, 니나가 케이크를 거부하자(자몽 반개 먹는 사람에게 케이크라니...) 바로 케이크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려 시도합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정상적인 딸이 자랐을 리 만무합니다.



물론 니나와 니나 엄마 같은 캐릭터들은 현실에서, 특히 한국의 현실에서 너무 쉽게 발견됩니다. 딸의 재능에 확신을 갖고, '장래의 성공'이라는 가치를 위해 딸의 초기 성장 과정에서 교우, 취미, 사회생활, 특히 연애 등을 철저하게 차단해 스파르타식으로 단련시키는 어머니들과 그 밑에서 경주마처럼 키워지는 딸들의 이야기입니다. 그중에 몇몇은 성공하고, 어차피 몇몇은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딸의 실적이 성공이냐 실패냐와는 별개로, 어머니와 딸 사이의 관계에선 엄청난 긴장과 비극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런 현실을 배경으로 바라볼 때 '블랙 스완'은 좀 더 의미있는 영화가 되곤 합니다. 물론 이런 영화 속 요소들이 대단히 기발하다거나, 창의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위에서 소개한대로 아로노프스키의 섬세한 영화 작법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게 됩니다. (어쩌면 재능있는 딸에게 올인하고 있는 한국의 어머니들이 꼭 봐야 할 영화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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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은 부인하고 있지만 - 인도네시아 특사들의 롯데호텔 방 침입 사건이 국정원의 망신으로 굳어지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 '아테나'에 나오는 민완 요원들은 드라마 속에나 있는 거냐"며 비웃었죠.

그런데 드라마를 봐도 사실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물론 국정원은 아니고 NTS(...세무서?) 요원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요원들은 총 쏘고 차고 때리는 법만 배웠지 총 피하는 법(?)이나 머리 쓰는 법은 전혀 배우지 못한 듯 합니다.

더구나 어제 방송된 마지막회... 드라마 '아테나'나, 현실의 국정원 망신이나, 드라마 속의 요원들이나 다 그 밥의 그 나물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참 실망이 큽니다.



이 드라마가 시작할 때 '아줌마를 위한 드라마는 없다 http://fivecard.joins.com/893 '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만치 '아테나'의 도입부는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수많은 국내 드라마들이 걸었던 길을 답습하지 않고, 정우성이라는 주인공의 캐릭터에 맞게 다소 엉뚱하면서도 밝고 활기찬 첩보 액션 드라마가 나오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는 회를 거듭할수록 무참히 무너져갔습니다. 초반에는 '스토리가 없다'는 일부의 지적에 '전형적인 멜로드라마가 없다는 걸 스토리가 없다고 말하면 곤란하다'고 옹호도 했었는데 드라마가 진행되고 나니 오히려 어정쩡한 멜로드라마만 남고 진짜 스토리가 사라져버렸습니다.

게다가 도대체 맥락 없이 이어지는 진행. 최소한의 리얼리티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주요 캐릭터들은 '날아다니는 것'과 '머리 쓰는 것' 외에는 뭐든 다 합니다. 특히 마지막 두 회 분량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습니다.



100년도 더 된 액션영화의 짜증나는 클리셰, '총 겨누고 서서 안 쏘고 말 많이 하다가 당하기'는 마지막 2회에만도 서너번 등장하는 듯 합니다. 주인공들 중 아무도 '다이 하드'를 못 본 모양입니다.

차승원으로부터 미사일을 발사하는 노트북 컴퓨터를 빼앗은 이지아는 3층에서 혹시나 컴퓨터가 망가질까, 고이 고이 받쳐 들고(총까지 맞아 가면서) 내려와서는, 1층에서 노트북에 총을 쏴 망가뜨립니다. 그리곤 "노트북을 던져서 망가뜨릴 힘만 있었어도 마지막 한발을...(그러니까 그 총알로 너를 쏴 죽였을 거란 얘기죠)" 하죠.  ...그럴 거면 대체 왜 3층에서 노트북을 내던지지 않았던 걸까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NTS 과학수사실장인 오윤아는 괴한들에게 납치되자 핸드폰을 이용해 비상 구조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현장에 출동한 최시원과 심창민은 차 바퀴 자국을 보며 한참 뭔가 생각하더니 그제서야 "납치된 것 같다"고 보고합니다.  ...그럼 대체 NTS요원은 어떨 때 구조신호를 보내는 걸까요. 그제서야 심각한 표정을 짓는 유동근 국장의 수준도 역시 안습. (그런 반면 납치된 오윤아는 맘 먹자마자 순식간에 찾아냅니다. 대단해!)

어쨌든 이지아는 차승원에게 총을 겨눈 채 말 많이 하다가 죽고, 아테나 요원들은 수애에게 총 겨눈 채 말 많이 하다가 죽고, 차승원도 정우성에게 총 겨눈 채 말 많이 하다가 죽습니다. 네. 어쨌든 '총을 겨눈 상태에서는 말을 하지 말라'는 교훈만큼은 확실히 전달됐습니다.



사고현장에서 여러 차례 총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실려간 수애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장기 치료가 필요하다는 판정을 받자 마자 앰뷸런스에 실려 어디론가 갑니다. 그리고 그 호송을 맡은 것은 북한 특수요원인 김민종입니다. "내가 이런 미친 짓 하는 것도 정우(정우성) 놈 속을 알기 때문"이라고 하는 걸 보면 이 호송은 NTS 몰래 하는 '수애 빼돌리기'입니다.

온 나라를 뒤집어 놓고 NTS 본부를 초토화시킨 사건 현장의 주요 인물인 수애가, 이렇게 병원에서 아무런 경호나 감시 없이 실려 나가는 것도 일단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수애가 사라질 때 유일하게 병원에 있던 NTS 요원 정우성에게 아무도 수애가 어떻게 됐는지 책임을 따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사건에 책임을 지고 해직당한 거리면 최시원이 '정말 안 돌아올 거냐'고 묻지 않겠죠.) 수애 정도를 마음대로 풀어 줄 권한은 원래부터 정우성에게 있었던 모양입니다.

북한 요원인 김민종이 국내에서 중상을 입은 수애를 회복시키고, 해외로 빼돌릴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능력을 갖고 있는 건 뭐 그렇다고 넘어가겠습니다. 결국 뉴질랜드에서 수애와 정우성은 감격적인 해후를 하고, 드라마는 마치 해피엔딩인 양 포장되지만 수많은 한국 요원들을 무참히 살해한 수애의 죄과가 한방에 세탁되는 것이 과연 이 드라마가 말하는 '정의'에 부합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 마지막 두 회분만 따져도 이렇습니다. 게다가 더 근본적인 질문, 대체 차승원이 뭐가 아쉬워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던 냉혹한 국제 스파이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자살 테러범으로 급변신하는 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말하듯 수애를 잃은 좌절감으로? 일반적으로 배신을 당하면 배신한 '연놈'들을 죽이려 하는게 보통인데, 왜 애꿎은 원자로에 미사일을 쏴 대는 걸까요. 원자로가 파괴되고 NTS가 해체되어 정우성이 직장을 잃고 노숙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대단한 정교한 음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국정원 요원들이 국민에게 실망감을 준 건 아마도 제대로 본받을 드라마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의 재기발랄하던 '아테나'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욱 더 심해 집니다. 앞으로 첩보 액션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실 분들, 제대로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P.S. 이 드라마로 유일하게 득을 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최시원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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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던 MBC TV의 '스타 오디션 - 위대한 탄생'이 마침내 TOP 20을 뽑는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신승훈 김태원 이은미 방시혁 김윤아 등 다섯명의 멘토들이 자신의 제자로 4명씩을 생존시키고, 그 4명씩을 집중 지도해 대결하게 한다는 시스템입니다.

'위대한 탄생'의 초기에 쏟아졌던 수많은 비난은 방송이 궤도에 오르면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슈퍼스타 K' 따라할 걸 왜 하냐, 공개 오디션에 3천명밖에 안 왔다더라, 출연자들이 우중충하다, 멘토들이 이상하다...뭐 등등 있었습니다만 결론은 '역시 한국에 노래 잘 하는 사람은 끝없이 많더라' 정도로 정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 역시 아직 갈 길은 멉니다만, 이미 '슈퍼스타 K'와 완전히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어떤 사람을 뽑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슈퍼스타 K' 시즌 2의 심사위원진을 가장 오래 유지한 건 이승철-엄정화-윤종신이었고, 본선 직전까지는 박진영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심사위원단에게는 상당히 엄정한 심사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건 '가수로서의 희망이 보이되 나쁜 버릇이 몸에 배지 않고,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쪽'을 선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쁜 버릇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이미 시장에서 성공하고 있는 가수의 스타일을 거의 모창에 가깝게 모방하는 경우, 혹은 불필요한 기교나 콧소리, 바이브레이션 등이 자동적으로 나오는 경우 등등입니다. 과도한 몸짓이나 눈을 까뒤집는 버릇 등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겁니다.

이런 기준은 가끔 무대에서 부르는 노래의 완성도와는 동떨어진 결정으로 이어지곤 했습니다. 분명 A가 B보다 '지금은' 노래를 더 잘 한다. 하지만 B가 '제대로 길러진다면' A를 능가할 수 있다, 뭐 이런 식의 과정을 통해 B가 선발되곤 했던 것이죠. 아무튼 이런 기준 자체에 누가 이견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슈퍼스타 K'가 추구하는 방향이라면 그건 누구나 인정해야 할 일입니다.




시청자들에게 가장 많은 안타까움을 샀던 것이 바로 김보경입니다. 당시 '너무 창법이 올드하다'는 평을 들었죠. 이미 통기타를 들고 무대에서 활동하던 경력이 있다 보니 흔히 라이브 카페의 통기타 가수들에게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창법의 흔적이 보였다는 게 감점 요인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위대한 탄생'의 참가자들을 보면 이런 분위기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위대한 탄생'에서도 몇몇 심사위원들이 "모창은 곤란하다"는 식의 지적을 하곤 합니다만, 전반적으로 '위대한 탄생'은 성장의 가능성 보다는 현재 해내고 있는 퍼포먼스에 좀 더 우위를 두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현재까지 선발된 많은 출연자들을 보면, 앞으로 90점이 될 수 있는(물론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70점보다는 이미 되어 있는 80점을 더 높이 산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차이가 보이는 이유를 꼽자면 아무래도 '슈스케'에서는 박진영과 윤종신이 육성자(프로듀서) 마인드에서 선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위대한 탄생'의 멘토들 중 과반수가 가수들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듯 합니다. 그 멘토들 가운데서 누군가로부터 전문적인 보컬 트레이닝을 받아 이 자리까지 온 사람은 없죠. 다들 혼자 연습해서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그동안 수없이 '김경호 모창이냐'는 비판을 받은 백청강이 버티고 있는 것도 그런 경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현재까지 선발된 내용을 보면 김태원 사단이 주로 그런 편이군요^^). 이런 분위기에서, 만약 김보경이 '슈스케' 아닌 '위탄'에 나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쪽이라면 훨씬 더 높은 순위까지 올라갔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권리세라면, '슈스케'에서는 좀 더 장수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현재의 성취냐, 장래의 가능성이냐 하는 것은 어느 한 쪽의 손을 들기 힘듭니다. 야구로 치자면 미국 마이너리그와 일본 프로야구 2군의 차이와 비슷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야구는 폼, 특히 투수의 투구 폼에 예민하고, 어느 단계에서든 신인 투수의 폼 교정에 많은 공을 들입니다. 반면 메이저리그는 현역 투수들 가운데에도 별별 폼이 다 눈에 띕니다. 프로야구 초기 한국 코치들이 미국에 가서 '올바른 투구 폼'에 대해 묻자 대다수 지도자들이 '자기가 편하게 던지는 게 최고의 폼'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미국 마이너리그의 기준은 어떤 폼이든 지금 잘 던지는 선수를 '선발'하는 것이고, 일본 프로야구 2군의 기준은 원석을 좋은 폼에 맞춰 '육성'하는 것이라는 말이 야구계에선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야구를 잘 모르는 분들은 이해하기 힘든 얘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슈스케'와 '위탄'의 또 다른 차이라면 멘토와 심사위원의 차이입니다. 결과적으로 사제간의 관계를 갖게 될 멘토들이 '슈스케'의 심사위원들보다는 훨씬 인간적으로 보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더구나 신승훈이나 김태원은 이 프로그램이 '오디션'보다는 '예능' 쪽으로(특히 '휴먼 예능' 쪽으로^^) 높은 평가를 받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깐깐한 독설 담당으로 포지셔닝했던 방시혁도 서서히 제자를 받는 멘토로 변신하고 있다는게 눈에 띕니다. 초기의 안경과 재킷 차림이 '엄격한 선발자'의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점점 곰인형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요. 아무튼 전체적으로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살벌한 대결장 보다는 인간적인 교육현장 쪽으로 끌고 가는데 멘토들의 영향이 크게 느껴집니다.


                                          이런 초기 모습에서


                                   다소 부드러워진 모습으로 ㅋ

'위대한 탄생'과 '슈퍼스타 K'의 방향이 달라 보인다는 건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프로그램이 장수한다는 것을 가정할 때 보다 다양한 가수 지망생들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의 안목이 더 뛰어났는가 하는 것은 먼 훗날, 어느 쪽 길에서 더 훌륭한 가수들이 배출됐는가로 판가름날 것 같습니다.


P.S. 그런데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다음달부터 방송된다는 '나는 가수다'... 당장은 흥미로운 기획이지만 참 씁쓸합니다. 어떻게 이런 기획이 이뤄질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얘기는 나중에.

P.S.2. 멘토들 중 한명은 여전히 평가도 이상하고... 자신이 어떻게 노래하는지 전혀 모르는 듯 합니다. 처음 선발될 때의 우려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P.S.3. 저는 '위대한 탄생'을 볼 때마다 윌 스미스가 떠오릅니다. 이유를 아시는 분?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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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남자의 자격' 팀의 지리산 등반은 '산행 예능'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보여주는 계기가 됐습니다. 완주를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사실 다음 문제입니다. 완주를 하면 하는대로, 못하면 못하는 대로 얘깃거리는 만들 수 있습니다. 문제는 힘이 들기 때문에 평소 그렇게 말이 많던 출연진도 할 말이 끊기고 만다는 것입니다.

체력이 어쩌네 저쩌네 했지만 지리산에서도 이경규가 그나마 '방송 분량'을 뽑아 냈을 뿐, 나머지 멤버들은 입을 꼭 봉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만 보여줬을 뿐입니다. 그럼 등반 일정도 조금 짧고(지리산에 비해 설악산), 멤버들의 연령대도 훨씬 젊은 '1박2일' 팀은 어땠을까요. 화면 자체는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만, 중요한 교훈을 준 점에서는 '1박2일'이 발전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로 '사람이 찍고 있었다'는 것이죠.



설악산을 겨울에 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산 위를 올라 보면 대체 왜 산 이름에 눈 설(雪)자가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순백의 눈 덮인 산 위에 나무마다 피어 있는 눈꽃과 얼어붙은 계곡이 자아내는 풍경은 아무리 숨이 차도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위험하기도 위험하죠.

이렇게 말하면 제가 무슨 등반 전문가인 것 같지만 저도 겨울 설악산 등반은 딱 한번 해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20년 전 일입니다. 당시 저희 일행은 가장 효율적으로 설악산을 즐길 수 있는 코스, 즉 소공원-비선대-양폭-희운각-대청봉-오색 코스를 택했습니다.

그러니까 전날 밤에 설악동 부근에 숙소를 잡고 다음날 새벽, 해뜨기 전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해 이른 낮 시간에 대청봉에 오른 다음, 해지기 전에 오색으로 쏜살같이 내려오는 겁니다. 그리고는 버스를 타고 설악동으로 돌아와 저녁을 지어 먹고 놀다가^^ 다음날 서울로 돌아오는 일정이었습니다. 급한 분들은 오색으로 하산해서 바로 (서울이든 어디든) 귀가 차편을 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 코스는 가장 시간이 짧게 걸리면서 설악산의 진미를 다이제스트로 맛볼 수 있는 코스입니다. 물론 상급자용으로는 한계령 코스, 공룡능선 등의 더 깊이 파고 들어가는 '진미'가 있겠지만, 시간과 체력, 장비 등을 감안해 산 속에서 숙박을 하지 않고 설악산을 살짝 맛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코스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시간 단축만을 생각하면 최단 왕복 거리인 오색-대청봉-오색 코스도 있지만 이건 설악산의 산악미를 맛보기에는 너무나 부족합니다. 여러 모로 가로든 세로든 평지-대청봉-평지로 왕복하지 않고 쭉 넘는 종주가 좋습니다.)

어쨌든 이런 '쉬운 코스'도 겨울에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아이젠과 피켈은 당연히 필수. 걷는 동안은 땀이 뻘뻘 나지만 멈춰 서서 휴식에 들어가면 3분 이내로 온 몸이 시려오고 장갑은 북어처럼 빳빳해집니다. 중간에 몸을 덥히려 코코아를 끓였는데 두모금 째부터는 따뜻해지고 네모금째에는 미지근해집니다. 위험한 것도 당연합니다. 제가 올라가기 며칠 전 폭설과 조난으로 행방불명된 사람이 있었고, 대피소에서 실종자의 시체를 수거해서 하산하는 구조대와 만나기도 했습니다. (네. 무척 쫄았습니다.;)





그런데 1박2일 팀은 2개 조로 나뉘어 강호동-은지원은 상당한 난코스인 한계령 코스, 나머지는 상급자용 코스인 백담사 코스로 잡았습니다. 아마도 '산에서 1박2일'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짧은 코스를 배제한 것이겠지만, 그 결과 상당히 위험한 일정이 짜여졌습니다.

백담사 코스는 흔히 '길어서 그렇지 가장 평탄한 코스'로 꼽힙니다. 완만한 경사로 오래 오래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날씨입니다. 아무리 평탄한 길이라 해도 산길에서 7~8시간을 머무는 건 큰 각오를 해야 하는 코스죠. 더구나 난코스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많은 분들의 상식대로 "설악산 갖고 무슨 종주냐. 아침에 올라가서 저녁에 넘어 오면 되는 건데"와는 좀 다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1박2일' 팀은 잠시 '찍는 사람'의 수고에 고개를 돌립니다. 사실 전문 산악 다큐멘터리를 봐도 출연자보다 보이지 않는 촬영팀이 훨씬 더 힘들 것이라는 건 당연한 얘깁니다. 주인공이 땀흘려 정상으로 오르는 장면을 찍기 위해선, 누군가는 그보다 한발 앞서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더구나 무거운 촬영 장비를(심지어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납니다) 들고 말입니다. 


연예인이 이렇게 얼굴 내놓기를 꺼릴 정도의 추위라면 말 다 한거죠. 그런 데서 남들을 찍고 있는 사람들의 고생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강호동은 말합니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가시는데다가, 우리는 앞 보고 가는데 저 분들은 뒷걸음질로 올라가요. 그러다 나무에 부딪히고, 바위에 부딪히고... 참 고생하십니다." 구체적으로 화면에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산악 촬영팀이 아니라 예능 촬영팀이다 보니 이번 '1박2일' 촬영 과정에서도 촬영팀이 뒤로 처져 오히려 출연진의 발걸음이 더뎌지기도 한 모양입니다. 



어쨌든 이 예능특공대에게 복이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설악산은 아니지만 저도 여러번 일출을 보려고 노력해 봤는데, 이날 화면에 나온 것만큼 둥글고 제대로 계란 노른자 깨듯 쏙 튀어나오는 해는 본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아침놀이 지고, 그 구름 속에 갇혀 있던 해가 그냥 퉁 하고 어느 순간 드러나있는게 보통입니다. 아주 운이 없으면 흐린 하늘 아래서 그냥 날이 훤해지고 말죠. 이렇게 선명하게 쏙 나오는 일출은 참 운이 따르지 않으면 보기 힘든 광경입니다. (일출 장면의 순간 시청률은 40%대를 넘었다고 하는군요.)

이런 보람이 있었으니 체감온도 영하 35도의 혹한 속에서도 산에 올라 웃을 수 있는 모양입니다. 일출을 바라보는 출연진의 눈꼬리에 맺히는 눈물은 연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고, 그 감격이 시청자들에게 전달됐다는 게, 그리고 그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고 있는 사람들의 노고를 느낄 수 있게 한다는 게 이 프로그램의 남다른 힘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나자나 이승기가 빠지면 저 눈물은 대체 누가 대신 흘려 줄까요. 지난번에 '제6의 멤버'라면 이승기보다 어린 멤버가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이젠 4명의 기존 멤버에 2명을 보강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수도 있겠군요. 제작진의 위기감이 대단하겠습니다.

이런 빈 자리도 공개 오디션으로 뽑으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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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 동안 가장 친하게 지낸 건 만화였습니다. 인생의 로망이 만화책 끼고 뒹굴뒹굴인데 평소에 그럴 짬이 별로 없다 보니... 모처럼 연휴가 좋은 기회였습니다. 물론 사람이 살려면 또 할 일이 여러가지 있는 터라, 5일동안 37권밖에 못 봤습니다.

평소 친애해마지않는 한국 벤처기업의 기수이자 왕년의 만화평론가? 권대석 사장의 추천작을 중심으로 골랐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부터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뭐 만화같은 걸 볼 시간이 있다니...하고 혀를 차실 분들도 있을테지만 아무튼 이렇게 생겼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건 아무래도 오카자키 마리의 '서플리'. 연애 문제에 대한 인사이트가 필요한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오카자키 마리 - 서플리

아무래도 이 작품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광고회사를 배경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AE에 해당하는 한 20대 후반의 열혈 직장 여성이 일에 치여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남녀관계의 깊이에 점점 눈을 떠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뭐 더 간단히 요약하면 'OL의 일과 사랑'입니다.

물론 한국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20대 후반까지 연애 한번 못해 본.... 타입은 아니고, 첫 등장부터 동거하는 남친이 있습니다. 그 남친과 깨지면서 본격 스토리가 시작되죠. 둘러싼 여성 캐릭터는 (1)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하는 30대 초반 프리랜서 카피라이터 (2) 외모도 일도 완벽에 가까운, 다소 얄미운 30대 초반 유부녀 AE (3) 제대로 된 남자를 잡아 결혼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전문대 출신의 20대 중반 사무직 (4) 단단히 프로 의식을 보여주는 30대 독신 스타일리스트 (5) 인생의 쓴맛을 모른 채 선배들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20대 중반 사회 초년생 (6) 좋아하는 남자에게 자존심이고 뭐고 일방적으로 매달려 목을 매는 20대 중반 사회 초년생 (7) '좋은 시절' 다 보낸 40대 후반의 독신 여사원 등입니다. 당연히 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남녀관계에 대한 밑그림은 다 다릅니다.


이 만화에는 '직장생활 5년이 넘었는데 애인이 없으면 연애결혼은 힘들다'는 말이 나옵니다(죄송합니다. 정확한 워딩은 잊어버렸습니다.^^) 물론 3년이냐 4년이냐 5년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만치 직장생활과 연애관계를 함께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일의 강도도 중요하죠.



사실 그냥 막연히 '직장생활'이라고 했지만 이 만화 속 인물들의 '일 중독'은 심각한 지경입니다. 광고회사가 일 많이 하는 곳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 회사의 이 주인공들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뭐 하긴... 제가 아는 분들 중에도 이 만화의 주인공들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하게 일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 맨 위 사진의 "나랑 일 중 뭐가 더 중요해?"는 남자친구가 하는 말입니다.^^)

특히 이 만화에는 그리 강하게 다뤄지지 않고 있지만, 한국 쪽에서는 어떤 종류의 일을 하건 네트워킹이 강조되다 보니 식사와 술자리가 '사회 생활'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직장 동료 끼리, 동년배끼리의 릴랙스를 위한 술자리야 차라리 휴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요한 분들'과의 술자리는 그 자체가 심한 스트레스죠. 이 만화에 나오는 분들은 그런 스트레스를 받는 분들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하루 15시간씩 일하는 워커홀릭이지만 늘씬한 미녀, 사귀는 남자들은 뉴욕 지사로 뽑혀 갈 정도의 미남 엘리트, 혹은 국제감각이 탁월한 사진작가, 업계 최고의 CF 감독 등 화려한 면모가 부각되기 때문에 어찌 보면 아직 세상을 모르는 10대 소녀적 판타지에 충실한 만화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 묻혀 있는 남녀 사이의 줄다리기 감정, 연애할 때 놓치거나 강조되는 점들, 일하면서 만나는 같은 여자들끼리의 연대감 혹은 적대감에 대한 묘사는 탁월하다고(뭐 저는 어차피 건너 느끼는 것이지만;;)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매우 드라마적 요소가 풍성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2006년 일본에서 원제 그대로(물론 일본 식으로 하면 '사프리'가 됩니다) 드라마화된 적이 있습니다. 여주인공 역은 '전차남'의 이토 미사키. 후리후리한 키가 강조되는 캐릭터인 만큼 적절한 캐스팅이었던 듯 합니다. 다만, 이 만화가 그 무렵 연재가 시작돼 2010년에서야 완간된 점을 생각하면 드라마의 결말은 만화의 결말과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아무튼 '일하는 여성'들은 한번쯤 보실만 한 작품인 듯 합니다. 딱 10권으로 끝납니다. 다만 남자 입장에서 볼때 결말은 좀.... 그렇습니다. 여자분들은 좀 다른 느낌을 가지실 수도 있을 듯.




다케토미 토모 - 이루어질수없는 사랑

전 3권이라는데 앞의 2권밖에 구해볼 수 없었습니다. 사실 저도 결말이 궁금합니다.

20대 초반에 이미 같이 잔 여자가 100명이 넘는 플레이보이가 명문 꽃꽂이 가문에서 고이고이 자란 영양(명문댁 아가씨라는 뜻의 일본식 표현이죠)에게 홀딱 반해 버립니다. 그야말로 태어나 처음으로 사랑을 알아 버린 겁니다.

그런데 장애가 한둘이 아닙니다. 이 아가씨는 빚 때문에 저택과 장원이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돈많은 정혼자와 결혼해야 하고, 정혼자의 어머니는 또 남자주인공이 아는 사람입니다.
2권까지 봤는데 결론이 매우 궁금하다는 면에서 뛰어난 작품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 19금.




오바 츠쿠미(스토리작가), 오바타 타카시(작화) - 바쿠만

만화 보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앞의 두 사람은 '데스노트'를 함께 만든 콤비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만화를 그린다는 것'에 대한 만화를 그렸습니다.

너무 몸을 혹사해 만화를 그리다 죽은 삼촌을 둔 중학생 1은 어느날 학교 최고의 우등생인 중학생 2로부터 "너 나랑 같이 만화계에 뛰어들지 않겠니?"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받습니다. 평소 만화 스토리를 쓰고 싶었던 2가 그림에 재능이 있는 1을 스카우트한거죠.

중학생으로 출발한 이들 듀오는 갖은 연구로 작품을 만들어 일본 최고의 만화 주간지 '점프'에 도전합니다. 아시는 분들은 역시 아시겠지만 '점프'는 독자 앙케이트를 통해 연재되고 있는 만화의 인기도를 측정하고, 하위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만화는 잔혹하게 잘라버리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니까 이 만화는 세계적인 스토리의 보고인 일본 '망가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가르쳐주는 충실한 교과서 역할을 합니다. 신인 작가가 주간지의 연재에 도전하고, 연재에 성공하면 단행본이 나오고, 단행본이 히트하면 TV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고, 거기서 결과가 좋으면 극장판까지 다시 만들어지는 그런 과정이 알기 쉽게 다뤄져 있습니다.

물론 주인공 1과 친구 여중생과의 기이한 사랑 이야기("우리는 사랑하지만 서로 성공할때까지 만나선 안돼") 같은 정서, 또 지나치게 엄숙하게 묘사되는 역시 일본적인 점프 편집부의 권위주의("한번 결정된 일이야!") 등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아무튼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만화적인 개그 스토리도 충분히 재미를 제공합니다. 현재까지 10권 나와 있고, 극중 주인공들과는 달리 만화 '바쿠만'은 이미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됐더군요.^^

(이들 콤비의 라이벌로 불리는 동년배의 천재 만화가에게서 '데스노트' L의 모습이 자주 보인다는 점도 웃음거리로 꼽을 만 합니다.^)




토보소 야나 - 흑집사

요즘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만화라고 해서 조카분의 강력 추천으로 보게 됐습니다. '...집사'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꽃미남 집사와 아가씨의 스토리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아가씨가 아니라 안대를 한 꽃미남 도련님...

빅토리아 시대 영국. '여왕의 번견'이라고 불리는 팬텀하이브 가문의 어린 후계자(백작)는 12세에 불과하지만 영국 정부의 구린 일들을 해결하는 '어둠의 손' 역할과, 세계적인(?) 완구 회사의 경영자라는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정체불명의 완전체 미남 집사가 버티고 있죠.

곧 드러나지만 이 미남 집사는 완벽한 두뇌와 완벽한 전투력, 그리고 절대 죽지 않는 완벽한 체력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악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악마 치고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정의롭습니다. 그가 백작의 집사로 봉사하고 있는 것은 나중에 백작의 영혼을 차지하는 댓가로 백작이 이승에 사는 동안 충실하게 그를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로 계약을 했기 때문(네. 이런 이론에 따르면 악마는 계약에 죽고 사는 존재라고도 하죠)이라는데, 한 남자아이의 영혼을 차지하는 데 들어가는 수고 치고는 너무 셉니다.

뭐 만화니까 그렇다고 치겠지만, 가끔씩 등장하는 다소 심각한 대사(인간의 본질적인 악에 대한 성찰...성 대사)와 집사를 제외한 세 사람의 고용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초등학생용 개그(그야말로 슬랩스틱성이 주류)의 불균형은 매우 심각합니다. 심각한 대사는 고교생 이상 용, 개그는 초등학생용이라고 생각하면 평균 잡아 중학생 이상은 재미있게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흑집사'의 인기는 중학생을 넘어 성인층에게도 한창 폭발적이라는군요. 물론 만능인 미남 집사가 인기 있는 건 당연한 일이라 치지만, 평소 생각하던 '악마'라는 존재의 능력에 비하면 이 집사의 능력은 너무 약하기도 하고(또 어떤 때에는 너무 무리하게 강합니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구성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쉽지 않은 만화였습니다. 초기 설정으로 끝까지 먹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

현재까지 10권 나와 있고, 앞으로 30권은 무난히 돌파할 듯 합니다. 아무튼 저는 별로 더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긴 '홍차왕자'나 '꽃보다 남자' 역시 저는 참고 보지 못합니다.) 전형적인 소녀 만화라고 생각하시면 될 듯.



이상입니다. 사실 '최근 읽은 책' 등 무게있는 포스팅도 하고 싶지만 어쩐지 무거워서... 이런걸로 면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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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에 걸쳐 MBC TV  '아이돌 스타 육상·수영 선수권 대회'를 지켜봤습니다. 사실 KBS 2TV의 '드림팀 시즌2'를 보시는 분들이라면 전혀 새삼스러울게 없는 일이지만, 샤이니 민호의 운동신경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 합니다. 물론 '드림팀' 쪽에서 보면 운동신경의 1인자는 민호가 아니라 상추(마이티마우스)죠. 상추가 출전했더라면 민호의 3관왕 독주는 그리 쉽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뭐 마이티마우스가 아이돌이냐 아니냐 하는 얘기도 나올수 있겠지만 명색이 록밴드인 씨엔블루나 트랙스도 나오고 채연이나 황보, 마르코도 나오는 판에 그런 얘기는 별 설득력이 없을 듯 합니다.)

그런데 암만 봐도 어색하고 이해가 안 가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옷 입고 수영하는' 초유의 수영대회에 대한 불만입니다. 도대체 왜?


이번 대회를 앞두고 신경전이 오갔다는 것은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수영대회=수영복'이 상식이다 보니 이건 저절로 '아이돌 아이들을 벗겨 놓고 한번 보여주겠다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로 연결됐을 겁니다. 뭐 늘상 터지는게 '쇼 프로그램에서 아이돌의 선정성'이었으니 말입니다.

이런 논란은 제작진에게 상당한 부담을 줬을 게 틀림없는 일이고, 결국 제작진은 고심 끝에 여자는 허벅지까지 오는 전신수영복, 남자는 상의에 흰 티셔츠를 입고 수영하게 했습니다. 참 코믹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전신수영복은 뭐 어쨌든 없는 옷을 만든 건 아니니 그렇다 치겠습니다. 그 사이에 레인보우 멤버들의 싱크로나이즈 시범이 있었는데, 아무리 '선정성'의 압박에 시달리는 제작진이라 해도 수영경기용 수영복을 입고 싱크로나이즈 스위밍을 시킬 수는 없었는지 이 경우엔 원피스 수영복이 등장했습니다. 그나마 허리에는 희한한 스커트를 달게 했고, 그것도 40초 편집으로 마무리해버렸습니다.

이쯤 되면 이런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럴 거면 수영대회를 하지를 말지, 할거면 제대로 하든가, 아니면 말든가?'





위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여자 경기용 수영복은 뭐 원래 있는 옷이니 그렇다 치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남자까지 옷을 입고 수영을 하게 한 건 뭐란 말입니까. 남자용 전신수영복이 금지되지만 않았으면 그걸 입했을지 모르지만, 수영복 재질도 아닌 티셔츠는 물속에서는 방해가 될 뿐입니다. 심지어 젖은 티셔츠 안으로 '비칠 건' 다 비치죠.

남자의 수영복 입은 상체가 얼마나 선정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방송사가 겁내는 '선정성 시비' 여론은 대체 누가 만드는 걸까요. 참 이해하기 힘든 나라의 이해하기 힘든 여론입니다.

아이돌 수영대회에서 민호가, 마르코가, 닉쿤이 웃통 벗고 수영하는 장면이 그렇게 선정적이라서 전국의 여자 청소년들이 음탕하게 변할 거라는 걱정이라도 든단 말입니까? 대체 그런 걱정은 누가 하는 걸까요? 만약 그런게 걱정이라면 전국의 남녀노소가 훌러덩 벗고 돌아다니는 캐리비안 베이 같은 음란 업소들부터 영업정지를 시켜야 하는게 아닐까요.

정말 눈가리고 아웅입니다.




수영장에서 수영복 입은 모습이 그렇게 두려워 할만큼 선정적인 거라면, 대체 가족 시간대 드라마에서 수시로 나오는 수영복 신은 어떻게 아무 문제 없이 방송되는 겁니까?




만약 이태임은 성인이라 괜찮고, 아이돌들은 상당수가 미성년이라 안되는 거라면, 고교시절의 박태환이 나오는 수영 대회 중계방송은 모두 19금이어야 했다는 걸까요. 박태환이 인기가 없거나 수영이 너무나 비인기종목이라서 관심을 끌 수 없다는 말(물론 농담입니다)은 별 설득력이 없습니다.

심지어 CF와 비교해도 참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드라마도 되고, 스포츠 중계에서도 되고, 광고에서도 되는데 왜 예능에서는 안되는 걸까요. 같은 장면도 드라마에서 보면 선정적이지 않고 예능에서 보면 선정적인 걸까요. 늘 겪는 일이지만 참 이해가 가지 않는 사고방식입니다.

대회 내용은 그냥 틀어놓고 있으면 눈길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로웠지만 수영복 개그는 참 보기 안쓰러웠습니다.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걸까요.

그런 의미에서 내년부터는 새로운 패션을 추천합니다. 요즘 아랍 지역에서 유행하는 최신 모드 수영복이라고 합니다.



이거 하나면 노출 시비는 완전 차단입니다. 어떻습니까? 강력히 추천합니다.

P.S. 그나자나 매주 '드림팀'을 방송하면서 이 아이템을 이렇게 강력한 명절용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KBS 예능국은 군소리 좀 나오겠군요. 아이디어의 길이란 참 험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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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언론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지만 최근 연예 관련 외신들이 꽤 비중있게 다룬 뉴스 중에 미국(정확하게는 멕시코)의 영화 제작자 일리아 설카인드(솔카인드라고도 합니다. 스펠링은 Ilya Salkind)라는 사람이 실종됐다는 것이 있었습니다.

할리우드에 영화 제작자가 한두명이 아니고 제리 브룩하이머도 아닌 이런 아저씨가 실종되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많지만, 이 사람의 경력은 s자로 시작해 s자로 끝납니다. 그리고 그 경력의 정점은 바로 리처드 도너 감독의 영화 '슈퍼맨' 이었죠. 그렇다면 사건은 새롭게 발전합니다. 바로 '슈퍼맨의 저주'라는 전설이 되살아날뻔 한 거죠.



물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설카인드는 실종 나흘만에 병원에서 발견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경찰 조사가 진행중입니다. 사실 설카인드가 살아서 발견되는 바람에 아쉬워(?) 한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바로 오랜 슈퍼맨의 저주 시리즈 마니아들이겠죠. (물론 농담입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딸의 주장에 따르면 설카인드의 실종은 일종의 납치 사건이었다고 하는데, 이건 조사가 더 진행되면 확인될 일이겠죠.

사실 슈퍼맨의 저주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분은 안 계실 겁니다. 사실 꽤 역사가 깁니다. 꽤 과장된 면이 있지만, 크리스토퍼 리브 부부의 비극은 참 안된 일입니다.



낙마 사고로 전신마비 상태가 되어서도 많은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주던 리브스는 9년간의 투병 끝에 2004년 심장마비로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저 사진처럼 끝까지 남편의 생존을 도왔던 아내 데이나 리브 역시 남편이 사망한 1년만에 폐암으로 숨을 거둡니다.


슈퍼맨의 연인 로이스 역을 맡았던 배우 마고 키더도 1996년, 리브스가 사고를 당한 1년 뒤 갑자기 실종사건의 주인공이 됩니다. 경찰에 의해 발견된 뒤에도 환각 증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말론 브란도의 경우에도 비극이 가족으로 확산됩니다. 슈퍼맨의 아버지 역이었던 브란도는 아들이 이복 누이의 남자친구를 총으로 쏘아 죽이는 사고로 체포되고, 이 사건으로 인해 딸은 자살하는 비극을 겪습니다. 물론 본인도 당뇨병과 암, 그리고 인한 실명, 은둔생활 등 불행한 말년을 보내다 2004년 사망합니다.



이건 '알고보니' 성이지만 영화 '슈퍼맨'의 도입부에서 어린 슈퍼맨 역을 했던 리 퀴글리라는 아기까지도 1991년, 14세의 나이로 독성 용액을 잘못 마셔 숨을 거뒀다는군요.




'따지고 보면'은 사방으로 퍼져가기 시작합니다. 초창기 슈퍼맨 TV 시리즈의 주인공이

었던 조지 리브스도 1959년 자살해 숨을 거뒀습니다. 뭐 전형적인 '찾아보니 이런 일도 있었더라' 류입니다.



이밖에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어도 '슈퍼맨'에 출연한 뒤 운이 다했더거나, '슈퍼맨'이 오히려 액운이 됐다거나 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케네디 대통령도 슈퍼맨 시리즈에 대통령이 나오고 나서 바로 죽더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영화 '슈퍼걸'의 헬렌 슬레이터 같은 경우도 그 뒤로 시들시들해진 인물들입니다.

위 사진에 나오는 만화 슈퍼맨 시리즈의 원작자는 이 엄청난 슈퍼맨 시장을 개척해놓고도 1년에 3만5천달러씩의 '연금'을 받는 것으로 모든 권리를 빼앗겼다는군요(물론 저주가 저주인 만큼 슈퍼맨 이후로 어떤 히트작도 내지 못했다고도...).

하지만 '슈퍼맨' 시리즈에 나왔어도 렉스 루더 역을 맡은 진 해크먼과 케빈 스페이시는 아주 멀쩡한 걸 보면 악역에게는 저주도 통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 많은 슈퍼맨들 가운데 실제로 큰 불행을 겪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물론 '저주' 마니아들은 윗줄의 양쪽에 선 딘 케인과 브랜든 루스도 잠재적인 예비 피해자로 놓고 있기도 합니다. 딘 케인의 스타 커리어는 슈퍼맨으로 사실상 끝났고, 브랜든 루스 역시 별 미래가 없을 거란 얘기죠.

근데 이런 건 슈퍼맨 뿐만 아니라 007에도 해당되는 이야기일 겁니다. 이렇게 강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나면 다른 역할에는 잘 어울리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슈퍼맨 역할은 연기력보다는 외모 위주로 캐스팅하기 때문에 더더욱 다른 역할에서 빛을 발하기가 쉽지 않겠죠^)

아무튼 결론은 정초부터 괜히 헛소리 한 셈이 됐지만, 일리야 설카인드의 실종 때문에 잠시 반짝 했던 관심을 그냥 접기 아까워서 흔적으로 남겨 봅니다.

다들 새해 복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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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은 아주 오래 전, 국사 시간의 660-668-676 을 기억나게 하는 영화입니다.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676년 한반도에서 당의 세력 축출이라는 시간표는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각각 정확하게 8년차가 나서 기억하기 쉬웠던 숫자였죠.

이준익 감독은 일찌기 세 편의 영화를 구상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황산벌'이 660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이번 '평양성'은 668년이 배경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들어질 영화는 676년,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 세력을 흡수해 당과 일전을 벌이고 한반도 경략 야욕을 분쇄하는 내용을 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런데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 논란이 꽤 일고 있는 모양입니다. 코미디로서의 정체성에 불만을 느끼는 관객들이 꽤 있기 때문입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마침내 고구려의 숨통을 끊기 위한 마지막 작전에 들어갑니다. 각각 남과 북에서 동시에 진공해 평양성에서 만나자는 것이죠. 하지만 문무왕(황정민)의 생각과는 달리 김유신(정진영)은 신라군 본진을 한성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평양성에서는 연개소문 사후 세 아들 남생(윤제문), 남건(류승룡), 남산(강하늘)의 3형제가 항전을 이끌지만 당과의 협상을 주장하는 남생과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남건 사이에 분란이 일어나 끝내 남생이 축출됩니다.

한편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백제군으로 참전했던 거시기(이문식)는 이번 전쟁에는 신라군으로 징발돼 참전해 있습니다. 신라를 원수로 생각했던 거시기에게 신라군으로 뛰라는 건 참 어처구니없는 일로 여겨지지만, 고구려군의 미녀 갑순이(선우선)을 보고 뭔가 가슴 뛰는 경험을 합니다.



일단 지적해야 할 것은 '평양성'이 매우 불친절한 영화라는 점입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볼 때 과연 '평양성'을 극장에서 보는 관객 중 몇명이나 660-668-676을 기억하고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고, 초반에 아무 설명 없이 나오는 이름들의 의미를 몇명이나 제대로 느낄 것인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런 전개는 '황산벌' 때와 같습니다. 그때도 관객 대다수는 김법민(문무왕)과 김인문이 모두 김춘추(무열왕)의 아들이며 형제간이라는 것, 김유신과 김흠순도 역시 형제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왕자인 김인문은 오래 전부터 당과의 연락 담당(인질이라면 인질, 현지화 조기 유학생이라면 유학생)으로 활약했기 때문에 "아 왜 맨날 뒷처리는 내가 하는 거냐"는 식의 푸념을 늘어놓게 된 것이라는 점, 이들 형제는 김유신과 군신관계이기는 하나 아버지의 처형이자 신라 군사력의 핵심인 김유신을 감히 거역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 등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영화를 봤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황산벌' 때에도 이런 이유로 관객 중 절대 다수는 '황산벌'의 코미디 요소 중 상당부분을 소화하지 못했을 겁니다. 관객 절대 다수에게 '황산벌'은 백제 군사들과 신라 군사들이 서로 사투리로 욕을 하는 코미디 영화였을 뿐입니다. 군국주의와 민초들에게 갖는 전쟁의 의미 등 정작 이 영화에서 중요했을 부분은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었고, 당시 삼국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판단이나 이해는 전혀 읽히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쨌든 '황산벌'은 박중훈이라는 좋은 배우가 계백장군이라는 유명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그 토대 위에서 펼쳐지는 코믹한 상황들이 관객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놀랐던 것은 '그냥 코미디'라고 하기에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돋보이는 영화라는 점이었습니다.



일단 '평양성'은 '황산벌'의 맥을 제대로 잇고 있는 영화입니다. 거기에 8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작품인 만큼 TV 사극과는 비교도 안 되는 물량이 등장합니다. 전투의 진행도 대부분의 사극에 나오는 '마구잡이 개싸움'과는 천지 차이입니다. 전투 진행에 질서가 있고, 원칙이 있습니다. 여기서 수시로 터져나오는 이준익 식의 유머도 제몫을 합니다.

그런데 '평양성'을 보다 보니 이준익-조철현 콤비는 '황산벌'의 성공 요인을 좀 오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양성'은 엄밀히 말해 '황산벌'보다 훨씬 더 역사적 환경에 대한 이해를 요구하는 영화입니다. 대다수 관객들에게 김유신이 평양성 내의 고구려 잔존 세력과 힘을 합치려 한다는 것은 그냥 허무맹랑한 얘기로 읽힐 뿐입니다.


실제로 668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1년전 당은 백제의 영토를 관장하는 웅진도독부에 의자왕의 아들 융을 도독으로 임명하고 문무왕과 백마의 목을 잘라 화친을 맹세하게 합니다. 이런 일련의 행동은 구 백제 지역 영토를 신라에게 넘겨줄 뜻이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결과 고구려 멸망 2년만인 670년, 신라는 고구려 부흥을 꾀하는 왕족 안승을 지원해 고구려 왕에 임명, 당에 반발하게 하고 웅진도독부 지역을 공격해 백제 영토의 본격적 병합에 나섭니다. 이 과정에서 당과의 전투가 이어지고 결국 676년,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 전략은 지금 돌아봐도 탁월한 데가 있습니다. 당과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지만 그 순간마다 당과 결전을 벌일 시기가 올 것이라는 것을 예견한 움직임이 포착됩니다. 당에 맹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당의 최종 목표가 한반도 전체의 병합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 면에서 '황산벌'에서 '평양성'으로 이어지는 영화들의 역사의식은 대단히 높은 수준입니다. 삼국시대를 다룬 수많은 TV 사극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느라 실제 당시에 펼쳐졌던 사건들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아울러 지나치게 '과거'에 '현대'의 의미를 담으려다 내용이 산으로 가는 우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칭찬할 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정확한 판단이 어쩌면 관객들에게는 지나친 역사의 무게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문식을 중심으로 한 코미디를 기대한 관객들에게 실제 역사를 보여주는 시도는 '대체 이게 뭔 소리야'라는 반응을 이끌어 낼 가능성이 높죠. 이런 두 가지 요소가 잘 결합됐다면 상관이 없겠지만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준익 감독의 역사 강론은 자칫 관객들에게 '너무 직설적인 강의'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양성'의 코미디가 약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문식을 비롯한 백제 출신 병사들이 부르는 '쌀노래'는 포복절도할 환경을 만들고 독특한 유머감각은 각처에서 빛을 발합니다. 다만 고구려와 그 백성들에게 놓인 운명이 지나치게 무거운 탓에 밝은 면이 제대로 강조되지 못할 뿐입니다.



연기 9단들이 대거 포진한 만큼 배우들의 연기는 더 보탤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만, 상당히 중요한 역할인 선우선이 아쉽습니다. 선우선이 구사하는 이북 사투리 연기 가운데 제대로 소화됐다고 보이는 것은 '어찌 보니(왜 쳐다보니)?' 정도일 뿐, 나머지는 뭉개지고 흩어져 알아듣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가능하면 좀 더 많은 관객들이 보았으면 하는 영화지만 '조선명탐정'에게 워낙 밀리다 보니 불길한 예감(이준익, "관객 250만을 넘지 않으면 상업영화에서 은퇴하겠다")도 들지만 뒷심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설 연휴를 맞아 '글러브', '조선명탐정', '평양성'을 둘러 봤지만 제 취향에는 '평양성'이 가장 맞는 듯 합니다만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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