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들어 이 영화를 케이블TV에서 자주 맞닥뜨리게 됩니다. 아마도 여름 시즌이라 그런 모양이죠. 그런데 이 영화를 다시 보다 보니 새로운 걸 느끼게 되더군요.
대체 왜 처음 이 영화를 볼때 그렇게 재미있었나 하는 점입니다. 이상하게도 두번째 보니 처음 볼 때에는 그냥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었던 어설픈 플롯이며 말도 안 되는 줄거리가 자꾸만 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체 처음엔 왜 이런 단점들을 쉽게 넘길 수 있었는지(물론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궁금해지더군요.
처음 그때의 느낌입니다.
1편에서 죽을 고생을 했던 세 주인공은 <캐리비안의 해적:망자의 함(Pirates of the Caribbean: Dead Man's Chest)>의 도입부부터 다시 고초를 겪습니다.
윌 터너(올란도 블룸)와 엘리자베스 스완(키라 나이틀리)은 결혼식을 올리려는 아침, 동인도 회사에서 파견된 커틀러 베켓 경(톰 홀랜더)에게 체포됩니다. 베켓은 터너에게 잭 스패로우(조니 뎁)가 갖고 있는 망자의 나침반을 엘리자베스와 교환하자고 제의합니다.
따르지 않을 수가 없겠죠.
하지만 낙천적인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불분명한 잭 스패로우는 바다의 제왕 데비 존스(빌 나이)에게 진 빚 때문에 언제 괴물 오징어 크라켄의 공격을 받을 지 몰라 도망치느라 엘리자베스고 뭐고 전혀 안중에 없습니다.
결국 스패로우는 자신을 찾아 나선 터너를 존스에게 넘겨 버리고 도망치는데 그 덕분에 터너는 존스에게 봉사하고 있는 아버지 '부트스트랩' 빌 터너(스텔란 스칼스가드)를 만나게 되고 새로운 모험이 시작됩니다.
고어 버빈스키는 정말이지 스토리의 논리적 정합성 따위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드러냅니다. <링>이야 원래 만들어져 있던 영화를 옮기는 것 뿐이었지만, 브래드 피트-줄리아 로버츠라는 황금 캐스팅에 제법 괜찮은 유머를 갖추고도 참패한 <멕시칸>으로도 버빈스키는 버릇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 못잖게 스토리의 개연성은 형편없는 <캐리비안의 해적>이 대성공을 거뒀으니 이젠 잔소리를 할 사람이 아예 사라졌겠죠.
<망자의 함> 역시 플롯을 놓고 이야기를 하자면 참담할 정도입니다. 개연성은 뮤지컬 영화 수준이죠. 이 영화에서 지켜지는 설정이나 전제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해적인 잭 스패로우, 해적 마니아인 살짝 맛간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스완은 그렇다 치고 그나마 정상적인 인물로 보이는 윌 터너까지도 정신없는 윤무 속으로 뛰어듭니다.
터너와 스패로우, 그리고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제임스 노링턴(잭 데이븐포트) 전직 영국 해군 준장이 펼치는 3자간의 칼싸움은 그 극치를 이룹니다.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얏!" 하고 고함을 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엘리자베스의 배신만 해도 그렇습니다. 크라켄이 노리는 것이 잭 스패로우라면 잭 스패로우가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날 때 화를 낼 이유가 대체 뭐란 말입니까. 반대로 크라켄이 잭 스패로우가 배에 없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다면 같이 도망치지 않을 이유가 없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자의 함>이 재미있는 영화로 느껴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배우와 캐릭터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조니 뎁이라는 당대의 에이스가 탁월하게 해석해 낸 잭 스패로우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모든 플롯 상의 허점을 덮어 버리는 위력이 있습니다.
영화 <슈퍼맨>이나 드라마 <원더우먼>을 보면서 "아니 쟤들은 저 안경 하나 썼다고 저 사람이 그 사람이라는 걸 못 알아본단 말이야?"하고 화를 내면 안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캐리비안의 해적> 1편을 본 관객들은 잭 스패로우의 행동에서 논리적인 이유나 합리적인 사고방식, 그리고 행동의 예측을 기대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이미 숙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객들은 "대체 저게 말이 되는 소리야?" 라고 말하는 대신 잭 스패로우가 양팔을 헐랭이처럼 휘저으면서 도망칠 때 그냥 폭소를 터뜨려 버립니다. 그 편이 훨씬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잘 즐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죠.
이밖에도 캐스팅은 여전히 성공적입니다.
매켄지 크룩과 리 아렌버그가 연기하는 라게티-핀텔 듀오의 호흡은 오히려 훨씬 좋아졌고, <러브 액추얼리>의 능청맞은 늙은 가수 아저씨 빌 나이는 문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웃음을 터뜨리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스텔란 스칼스가드가 올란도 블룸의 아버지 역으로-1편에서 잭 스패로우는 "네가 빌 터너의 아들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어. 너는 아버지와 똑같이 생겼거든"이라고 말하죠-나온다는 건 <망자의 함>의 가장 큰 실수라고 부를 만 합니다.
물론 잭 스패로우의 재능도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어 있습니다. 조니 뎁이 모델로 삼았다고 고백한 키스 리처드도 <망자의 함>에 우정출연, 스패로우 부자의 코믹 신이 연출될 뻔 했지만 롤링 스톤스의 공연 문제가 겹쳐 안타깝게도 이 장면은 뒤로 미뤄져야 할 것 같습니다.
<망자의 함>을 아직 보지 않은 분들에게 미리 드리는 팁 하나라면, 이 영화는 2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허탈해 하지 마시길. 물론, 그렇게 대강 마무리하듯 끝나더라도 이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단, 당신이 잭 스패로우의 팬이 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 한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결국 그렇게 되고 말더라구요.)
반가운 소식이라면 이미 어느 정도 촬영이 진행된 시리즈 3탄에는 우리의 영원한 따꺼 주윤발 형이 해적 두목 사오 펭 역으로 나온다는 점입니다. 감독이 버빈스키라면 윤발이형이 해적들을 상대로 멋진 쌍권총 묘기를 보여준다 해도 그리 이상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2편에서 부활하는 바르보싸(제프리 러시), 잠수 해군을 거느린 데비 존스와 함께 사오 펭이 펼칠 해적 선장 3파전이야말로 정말 볼만한 구경거리를 마련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밀려옵니다.
p.s. 데비 존스의 부하들이 한 해산물 분장(?)은 너무 실감나게 징그러워서 약간 비위가 상합니다. 특히 부트스트랩의 뺨에 붙은 홍합이며 불가사리, 작은 조개껍질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얼굴 피부가 근질근질해지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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